[김용진, 한상진, 봉지욱] 압수수색
저자 : 김용진 / 한상진 / 봉지욱
출판 : 뉴스타파
출간 : 2024.10.07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눈을 뜨니 온 세상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한창 진행되던 계약의 한 중간이었다.
준비해 왔던 것들이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이 깊어지면 공포가 된다는 걸 알았다.
이제 그 끝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내 선택들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될지 기대도 불안도 크다.
실사용에 큰 문제만 없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기왕이면 조화롭고 깔끔하게 마감되었으면 싶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배치를 위해 기존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이런 일을 '압수수색'에 빗대기는 민망한 일이지만, 조금쯤은 그런 기분으로 정리를 진행했었다. 가능한 한 제3자의 시선으로, 냉철하게 계속 소유할 물건과 보내줄 물건을 나누었다.
아직 완결 짓지는 못했지만 성과가 있었다고 느낄 정도까지는 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입춘이다.
모쪼록,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 해외 탐사저널리즘 교본에 '부러진 다리 신드롬(Broken Leg Syndrome)'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다리를 부러뜨리기 전까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리를 절고 다니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는 의미다. 탐사보도 기자의 자질을 말할 때 나오는 이 격언은 사회 현상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모든 감각을 동원해 열정을 가지고 탐색하라는 충고다.
- 부끄럽게도 우리는 2023년 9월 검찰 압수수색을 당하기 전까지 압수수색이라는 강제수사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별 관심도 없었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전에 사건 기사를 쓸 때 검찰이나 경찰의 압수수색 집행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어떨 때는 검경의 선전부대로 나서기도 했다. 부끄럽다.
- 어느 날 갑자기 검사와 수사관과 포렌식 요원이 종이 몇 장 내밀고 사무실과 집안 곳곳을 우리보다 더 제 집처럼 뒤질 때 비로소 '현타'가 왔다. 휴대폰을 뺏기고 노트북을 털린 뒤 좁은 검찰 포렌식방에 앉아서 나도 모르던 내 휴대폰 안 정보 수십 수백만 건을 검사와 수사관과 나란히 앉아 같이 보는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다. 그 일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검찰의 압수수색을 아무런 통제나 감시 없이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을.
- 압수수색으로 인한 인권침해, 개인정보 침해는 생각보다 너무 심각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압수수색이 검찰 권력을 작동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압수수색은 우리나라 검찰 권력을 점점 비대하게 만들었다. 이미 이상발육한 몸체에 뼈와 살과 지방을 끊임없이 공급했다. 어느 순간 정치권력을 넘보는 지경이 됐고, 결국 최고 권력마저 거머쥐었다. 통제와 견제 없는 압수수색이 정치검찰이라는 괴물을 키웠다. 언론은 이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이런 반성이 이 책을 쓰는 원동력이 됐다.
- 김용진, 한상진, 봉지욱, 우리 셋은 2023년 9월과 12월 압수수색을 당하고, 출국금지가 된 후 '압색출금동지회'를 결성했다. 이후 기소도 같이 됐는데 동지회 앞에 기소는 붙이지 않았다. 너무 길어지니까. 압색출금동지회는 어느 날, 책을 쓰기로 결의했다. 우리가 당한 압수수색은, 압수수색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고 검찰 권력을 더 집중해 파헤치라는 계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재미없는 책은 쓰지 말자고 다짐했다. 흥미롭고 유쾌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기로 했다. 괴물과 싸우려면 지치지 말아야 한다. 지난 1년을 싸웠고 앞으로 얼마나 더 싸워야 할지 모른다. 책 쓰기는 그 싸움을 신나게 하기 위한 우리 나름의 처방이기도 하다.
- 이 책 <압수수색>은 2023년 9월부터 2024년 9월까지 1년간 뉴스타파와 우리 셋이 겪은 일을 담아낸 르포르타주다.
- "여러분은 법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법적으로 엄청나게 특히 형사법에 대해서 엄청나게 숙련된 검사와 이 법정에서 마주쳐야 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재앙입니다. 그래서 이 검찰의 기소라는 게 굉장히 무서운 겁니다."
'국민의힘 윤석열 이준석 서울대학교 청년 간담회' 당시 윤석열 후보 발언 중, 2021년 11월 25일
- 일단 기소가 되고 보니 "기소가 되면 인생이 절단 난다"는 말이 확 와닿는다. 윤석열 정치검찰은 김용진 한상진 봉지욱 세 기자의 인생을 절단내기 위해 우리를 수사하고 기소했을까? 우리의 인생은 과연 어떻게 절단날 것인가. 검찰과 법원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이런 실존적 고민에 빠지다가 한편으론 기자로서 큰 기회를 잡았다는 짜릿함을 느낀다.
- 탐사보도 기자들은 가끔 잠입 취재나 위장 취재, '스팅 오퍼레이션 Sting operation'을 한다. 정상 취재 방법으로 밝히기 힘든 일을 알아내기 위한 특수한 취재 기법이다. 경찰학교 내 인종차별을 파악하기 위해 경찰학교 시험 공부를 해서 합격한 뒤 입학을 하거나, 감옥 내 인권탄압을 밝혀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진짜 감옥에 들어가서 취재를 수행하거나, 극우 파시스트 정치조직 내부에 잠입해 실태를 폭로한 사례 등이 실제 있다. 뉴스타파 기자도 국제 가짜학회 실태를 폭로하기 위해 엉터리 논문을 작성해 해당 학회에 제출한 뒤, 학자로 위장해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는 잠입, 위장 취재를 했다.
- 정치검찰의 표적이 된 우리는 의도치 않게 압수수색도 당하고 기소도 됐다.
- 검찰은 압수수색과 포렌식, 전자정보 선별 및 보관에 너무 많은 편법과 불법을 일상적으로 자행한다. 검찰 수사를 받는 사람은 물론, 심지어 변호사도 대부분 이를 모르거나 알아도 "어어"하면서 당한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명백한 불법과, 불법은 아니더라도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요소가 많다. 이런 건 대부분 검찰 판단과 재량의 영역이 돼버렸다. 법률상 행정부(법무부)의 일개 "외청"에 불과한 검찰청이 임의로 처리하고 그게 사실상의 법처럼 돼버린 게 너무 많다.
- 9월 1일 금요일 검찰의 신학림 압수수색 이후, 압수수색 영장에 담긴 일부 내용이 유출됐다. 검찰의 언론플레이가 시작된 것이다. 검찰이 망상 속에 짠 시나리오(김만배가 신학림에게 청탁-사적 만남 가장한 인터뷰-뉴스타파 통해 선거 직전 보도)가 2일과 3일 동안 삽시간에 각 매체에 퍼졌다.(1년이 지난 지금, 이 같은 검찰 시나리오에 부합하는 증거나 증언은 나온 게 없지만 검찰은 아직도 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 검찰 시나리오를 받은 언론사들은 자가발전을 했다. '허위 인터뷰' '기획' '공모'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고 주말 사이 여론을 장악했다. 검찰 망상이 언론사로 전이되면서 그럴듯한 뉴스로 포장돼 '동료 시민'을 속이기 시작했다. 검찰망상을 자사의 망상과 뒤섞어 보도한 대표 사례가 9월 2일 자 조선일보 기사다. <김만배 기획·신학림 실행... 허위 인터뷰, 대선 3일 전 터뜨렸다>라는 제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