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하라 료]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일루젼 2025. 2. 23.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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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하라 료 / 권일영
출판 : 비채
출간 : 2018.06.05


       

        

최민우 작가의 <발목 깊이의 바다>는 하라 료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나, 본문에 언급되는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다. 특히 사무실 장면은 굉장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두 작품 모두 상당히 취향이다. 

 

하드보일드.

그중에서도 필립 말로를 오마쥬한 듯한 소설.

그 특유의 건조함과 무관심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작품 전체로 보자면 취향을 꽤 탈 것 같다. 등장인물들의 서사나 사건의 전모가 짜릿하지는 않지만, 중심인물인 사와자키의 독백과 사상이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 중심의 작품. 사와자키와 와타나베, 그리고 니시고리 세 인물의 인연과 오 년 전의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다.

 

하라 료의 작품은 처음 읽어보는데 다른 작품도 더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일본 작가의 느낌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지만, 그것마저도 장르와 잘 어우러져 위화감 없는 무채색의 느낌이 난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는 함께 일하던 동료이자 친구의 배신으로 혼자 남아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한 탐정의 이야기이다. 옛 동료를 찾아 걸려오는 의문의 전화나 협박이 아직도 간간히 있기 때문에 -또 직업상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급작스럽고 낯선 연락에도 조심스럽지만 익숙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이 매력. 

 

어느 날 '사에키라는 사람이 찾아왔었냐'는 낯선 이의 질문에 대답을 거절하면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만난 적도 없는 인물의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결국 그의 아내 나오코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사와자키.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의뢰인과 의뢰. 그것을 위해 위법과 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와자키를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면, 당신은 이 책과 하라 료의 매력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럼, 끝! 

 


   

 

- 커튼을 올렸다. 방 안이 약간 환해졌다.  

코트를 입은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최소한만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주머니에서 왼손을 빼더니 문을 닫았다. 책상 의자에 앉아 그 남자에게도 맞은편에 있는 손님용 의자를 권했다. 

 

- "아뇨, 여기도 괜찮습니다. 사에키 씨가 이 사무실에 들렀을 지난주 목요일 이후 그 사람과 연락이 안 됩니다. 자기 아파트에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더군요. 나는 그 사람을 급히 만나야 합니다."
"미안하지만 도움이 되지 못하겠군요."
"어째서죠?" 그가 무심코 두세 걸음 다가왔다. "그 사람이 여기 왔는지 그걸 알고 싶을 뿐인데."
"말이 많을수록 탐정의 신용은 떨어진다고들 하죠. 물론 상대가 의뢰인인 경우에는 다르지만."
나는 윗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종이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피스'라는 멍청한 이름의 필터 없는 담배였다.

- 코트를 걸친 남자는 뭔가 계산하듯이 천천히 손님용 의자로 다가와 그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그가 입술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럼 당신 의뢰인이 되면 되지 않습니까? 하루 요금이든, 지난주 목요일 이후부터의 요금이든 청구해요. 그 대신 내가 알고 싶은 걸 가르쳐주시오." 
나는 담배 연기를 뿜었다. 연기가 상대방의 가슴에 닿아 얼굴 쪽으로 흩어졌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절하죠." 내가 말했다. "당신은 단지 날 매수하려는 것이 목적이니까."

- 코트를 걸친 그의 두 어깨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피로감이 얹혀 있었다. 그는 손님용 의자를 끌어당기더니 쓰러지듯 걸터앉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중얼거렸다. 
내게 한 말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 대답했다.

"우선 자기 이름부터 밝히는 게 어떻겠습니까? 르포라이터라는 사에키 씨가 무엇 때문에 여기 왔었는지 그걸 알고 싶군요."

- 그는 곤혹스러워했다.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이름을 밝히기 난처한 듯 보이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아마추어 탐정 같은 서툰 질문을 계속하는 한, 내 의뢰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 그는 약삭빠르면서도 어린애 같은 웃음을 지었다.

"사에키 씨가 여기 왔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그리고 내 이름이 무엇인지도 들었을 텐데요."
나도 지지 않고 웃어 보였다.

"그러면 결론은 하나, 사에키 씨는 여기 오지 않았다. 이제 됐으면 얼른 나가주셔. 한 대 피우고 우편물 정리도 해야 하니까."

나는 담배꽁초를 W자 모양의 검은 유리 재떨이에 비벼 껐다.

- 그는 내 뒤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있는 위치에서는 건물 뒤편 주차장 너머에 있는 엇비슷하게 낡은 잡거빌딩의 회색 벽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새삼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스포츠맨 같은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왠지 더 섬세한 신경이 요구되는 일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부분에 비해 가느다란 콧날로 약간 밸런스를 잃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호감이 가는 미남이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자기 기분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이번에는 그의 말이 어떤 방향일지 대략 짐작이 갔다.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걸 가르쳐주면 현금으로 이십만 엔을 내죠. 만약에 사에키 씨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해 주면 돼요. 난 이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왼손으로 코트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내 책상 위에 던졌다. 겉봉에 '도쿄 도민은행'이라고 인쇄된 서비스용 봉투였다.

"아마 만 엔짜리 지폐가 스무 장 넘게 들어 있을 거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자꾸 자신을 한심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 필요는 없을 텐데."

나는 짜증이 났다.
"사에키 씨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바로 자기 태도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차근차근 이야기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울며불며 애원하거나 매수, 협박 같은 거 하지 말고."
"그건... 그렇게는 못하지. 아니, 사에키 씨와 의논한 뒤라면... 흠, 사에키 씨의 행방을 모른다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는 모르겠군요."

- "천천히 생각해보셔."

내가 말했다.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고, 담뱃갑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일부러 오른손으로 잡을 수밖에 없는 위치를 겨냥해 던졌지만 그는 심리상태에 어울리지 않는 반사신경으로 상체를 틀어 왼손으로 멋지게 받았다. 그는 내 의도를 눈치채고 씩 웃었다. 그리고 역시 왼손으로 자연스럽게 담배를 뽑아 물더니 담뱃갑을 내게 던졌다. 의외로 만만치 않은 상대인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종이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 우리는 잠시 담배 연기 속에서 침묵을 지켰다. 그는 필터 없는 담배를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필터가 없는 탓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지나치게 세게 빨아 힘들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요령을 알았다. 이윽고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사무실 안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 그는 담배를 끄고 일어섰다. 처음에 복도에서 보여준 무방비한 인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까지 그 봉투를 맡아주시죠.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만약 사에키 씨와 만나게 되면, 앞으로의 문제도 있고 하니 내가 연락을 취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면 좋겠군요. 그럼 이만 실례."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오른손을 보여주지 않는 남자라고 할까?"
그는 문 쪽에서 뒤를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가이후라고 하면 알 겁니다. 담배 잘 피웠습니다. 말투는 고약하지만 담배는 괜찮은 걸 피우는군요."

- 그는 나가면서 사무실 문을 닫았다. 그를 불러 세우려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은 안다. 그의 문제는 아마 탐정이 처리할 만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르포라이터 사에키란 인물을 찾아내 풀릴 문제라면 그가 보인 그토록 긴장한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다. 책상 위의 봉투를 집어 드니 현금의 두께가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가이후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가 이 사무실을 다시 찾아올 거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 대충 훑어보고 말았다. 도쿄 지방판에는 새 지사가 내년도 예산안을 둘러싸고 여당인 자민당 의원들과 대립한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정치, 범죄, 스포츠, 문화 등 지면은 달라도 어느 기사나 인간의 투쟁 본능에서 비롯된 소식들뿐이었다. 인간만큼 투쟁을 좋아하는 동물은 아마 없을 테고, 남의 투쟁을 구경거리로 삼는 동물 또한 인간뿐일 것이다. 

- 세 통의 우편물은 각각 여대생이나 페미니스트, 여장 취미가 있는 남자에게나 보내야 할 광고 우편물이었다. 늘 그러듯 쓰레기통에 바로 던져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우편물 사이에 끼어 있는 종이비행기를 발견하고 다시 집어 들었다. 날개가 독특하게 접힌 종이비행기였다. 펼쳐보니 북방영토 반환 요구 전단지의 여백 부분에 눈에 익은 볼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창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정겨운 불빛도 유리창에 페인트로 쓴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란 글자도 예전 그대로군. 그리고 블라인드 안쪽에 보이는 그림자 하나. 그림자라는 것이 이리도 그 사람의 특징과 버릇을 고스란히 표현하는지는 몰랐네.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로군. 나는 목구멍까지 술이 찼어도 여전히 잘 지내네. 하지만 오늘 밤은 가을바람이 차군. 올겨울에는 따스한 남쪽으로 갈 생각이라서 도중에 잠깐 들렀네. 그럼, 또.]

- 이런 편지를 요 근래 오 년 사이에 두세 통 받았다. 종이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펼친 종이비행기를 그 불로 재떨이에 태웠다. 창가로 가서 바깥 거리와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그저께인 토요일 밤, 옛날 파트너는 틀림없이 맞은편 빌딩 모퉁이에서 이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위스키 병을 주머니에 꽂고서. 목구멍까지 술이 찼다고? 머리 꼭대기까지 술에 절은 알코올의존자 주제에.

- 이런 편지를 받은 지 벌써 이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곳까지 왔으면서도 결코 만나려 하지는 않는다. 만날 생각은 없지만 인연을 끊겠다는 용기도 없다. 혈육 한 점 없이 곧 환갑을 맞을 알코올의존자 사내를 동정할 마음은 없다. 오 년 전에 이억 엔 가까운 불로소득을 가로채 죽을 때까지 술을 퍼마실 수 있는 돈과 방랑자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손에 넣은 그 사람은 어느 누구의 동정도 필요로 하지 않으리라.

- 오 년 전, 그를 마지막으로 본 날도 와타나베는 책상에 앉아서 막 위스키 병을 서랍에 넣던 참이었다. 그는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더니 장난치다 들킨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이미 그날 밤 결행하려던 일확천금 탈취 계획이 성공하면 다시는 이 사무실에 ...

 

- 잡목 숲을 둘러보고 이름 모를 작은 동물들의 울음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며 기다리자 말이 앞발을 치켜들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현관의 오크 문이 열렸다. 나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키 큰 남자가 나타나 나를 훑어보았다.
"변호사인 니라즈카일세. 사라시나 씨가 기다리네. 자, 들어오지."

귀가 덮일 정도로 긴 머리카락에 가늘고 긴 은테 안경, 날렵한 더블 블레이저. 칼같이 주름이 잡힌 바지의 끝자락 아래 보이는 와인색 하프 부츠, 옷차림은 한껏 젊어 보였지만 잔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길쭉한 얼굴은 실제 나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쯤 위인 마흔다섯 가량 되어 보였다. 

 

- 나는 현관으로 들어가 팔이 끼지 않도록 조심하며 묵직한 문을 닫았다. 니라즈카 변호사는 태어나서 한 번도 펜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 보이는 희고 갸름한 손가락을 우아하게 한 차례 흔들더니 앞장서서 안내하기 시작했다. 저택 안은 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게 되어 있는 듯했다. 우리는 작은 집 한 채는 들어갈 넓이의 현관홀을 지나 건물 뒤편으로 통하는 복도를 걸었다.

- "직업상 나도 흥신소나 탐정사무소와는 두세 번 접촉한 경험이 있어." 니라즈카는 긴 목을 돌려 나를 보고 말했다.
"하지만 개인영업을 하는, 이른바 사립탐정을 만나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무슨 일이나 다 처음이 있죠. 인식을 새롭게 하기에는 좋은 기회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아, 그렇지." 그는 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남자의 몸은 어디나 다 길다.
"결국 이 세상은 경험이 말해주는 거니까, 안 그런가? 자넨 탐정일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나?"
"십일 년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경험이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 지는 칠 년이 되죠."
"재미있는 말이로군." 니라즈카가 말했다.


- 늘 그러듯 내 진짜 이름을 가르쳐주는 사이에 관엽식물 온실 같은 안뜰을 따라 복도를 두 개, 떡갈나무로 만든 세련된 문을 세 개 지났다. 출발한 현관까지 되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될 무렵, 니라즈카 변호사는 한결 더 큰 두 짝짜리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여기라는 몸짓을 한 뒤, 문을 세 번 두드렸다. 그러고는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넥타이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꽤 멀리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문을 열고 나를 앞세워 방으로 들어갔다.

- 방은 삼십 평은 너끈히 될 법한 이 저택의 식당이었다. 동쪽은 전체가 정원에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멋진 프랑스식 창으로 되어있었다. 방 안에는 차분한 햇살이 들어오고, 창 너머로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과 큼직한 분수가 보였다. 방 한복판에 놓인 오래되어 보이는 식탁은 서른 명은 너끈히 앉을 법한 크기였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에서 들린 목소리의 주인은 그 안쪽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큰 식탁을 지나 거기까지 가는 데는 삼십 초가 걸렸다. 

- 나는 커피를 부탁했다. 사라시나 씨는 미술관 도예 전시회에서나 구경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만든 그릇에 든 차죽 같은 것을 먹고 있었다.
주문을 받은 여자가 물러가자 그는 변호사에게 말했다.

"나오코에게 사와자키 씨가 오셨다고 알려주고 오지 않겠습니까? 그 애는 정원 분수 부근에서 산책하는 중일 겁니다."
매우 정중한 말투지만 오히려 그런 정중함이 상대를 더 위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보이는 정중함이었다.  

- "실례지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사라시나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물었다. "실은 사와자키 씨를 보니 문득 내가 이 집에 처음 왔던 날이 떠오르는군요."
"마흔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역시, 그런 나이로 보이는군요. 그건 의외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너무 늙어 보이거나 젊어 보여도 안 되는 것 같더군요. 가짜 겉모습으로 내면의 거짓을 덮어 숨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조금 전 사와자키 씨를 보고 내가 장인에게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처음이 집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집사람과 재혼한 때가 막 마흔하나가 된 참이었으니... 그때 내 모습을 장인의 눈을 통해 보는 듯한 일종의 회상 착오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기시감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런 이상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게 벌써 십오 년 전 일입니다." 

- 사라시나 슈조가 십오 년 전에 열두 살 난 딸을 데리고 재혼한 상대는 '도신 그룹'의 창립자 고야 소노스케의 큰딸 요리코다. 삼 년 뒤, 장인이 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 도쿄 예술대학 조교수였던 그는 새로 회장이 된 아내의 고문으로 취임해 경제계에도 관여했다. 그것이 고인이 남긴 유언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도신 그룹의 중역들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도 깜짝 놀라며 우려했지만, 십 년간 그가 보인 능력과 실적은 장인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는 평가였다. 뿐만 아니라 본업인 미술계에서도 더욱 폭넓게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전혀 다른 두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셈이다. 이 년 전, 도신 전철의 사장이었던 처남 소이치로가 서른 살이 되자 그룹의 새로운 회장으로 취임했다. 요리코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새 회장의 취임을 계기로 사라시나 씨는 고문 자리를 아내에게 넘기고 도신 그룹 경영에서 손을 뗐다. 그 뒤 미술 분야에 전념했고, 그의 명성과 권위는 날로 높아졌다. 어제 도서관에서 얻은 지식이다. 

-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됩니까?" 내가 물었다. "인간도 미술품처럼요?"
사라시나는 식사를 마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순간 그는 내 질문이 왜 나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뇨... 미술이란 말하자면 허구와 상상력의 세계이기 때문에 오히려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진짜 예술은 자체에 그 거짓을 견뎌내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러지 못하죠. 평범한 인간은 자신의 거짓을 스스로 견뎌내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평범한 인간 말입니까. 그건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만큼 간파하기 어려운 것도 없으니까요."

조금 전 그 기모노 차림의 여자가 내 커피와 사라시나의 차를 가지고 와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의 맛이나 난이 그려진 백자 커피 잔이나 최상품이었다.

- 그는 몸에 잘 맞는 감색 계통의 트위드 상의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브라이어 파이프를 꺼내 물고, 검은 옻칠을 한 던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상의 안에 크림색 스포츠 셔츠에 짙은 녹색 애스콧타이를 맨 편한 복장이었다.

"사와자키 씨, 당신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들통날 거짓말은 하지 않겠지만 스스로 거짓말인지도 알지 못하는 거짓말을 얼마나 하는지 저도 모르니까요."
"진실이란 들통나지 않는 거짓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라시나는 짐짓 속된 표현으로 말했다.

- "이 저택에는 어째서 미술품이 한 점도 없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현관에서 이 방까지 오며 보니 벽에 그림 한 장 없고, 진열장에도 장식품 하나 없더군요." 
사라시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와자키 씨에게나 저 스스로에게나 거짓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군요... 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은 모두 도신 미술관에 전시해 일반인들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핑계지만 미술은 제게 일단 업무니까요. 말하자면 업무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겠다는 원칙이 적용된 건지도 모르겠군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응접실에는 딱 한점, 조르주 루오의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흥미가 있으시면 나중에 구경하시죠."

- 미인이라고 할 만한 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얼굴에는 평범한 미인 이상으로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이제 스물일곱 살일 텐데, 야무진 눈썹과 그 아래 서늘한 눈매는 소년 같은 매력을 지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코에게 인사했다.
"사에키 나오코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오코가 자기 성을 '사에키'라고 밝히자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사라시나 슈조의 브론즈 상 같은 얼굴에 왠지 자신감을 잃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니라즈카 변호사의 길쭉한 얼굴에도 분명히 불쾌한 표정이 스쳐갔다. 사에키 나오키라는 사내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그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다들 왜 제가 사에키 씨의 거처를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아니, 그 이전에 저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걸 알고 싶군요."
사라시나와 니라즈카가 재빨리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오코는 홍차잔을 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어제 전화로도 말했듯이..." 니라즈카는 먹던 토스트를 접시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라시나 씨는 귀중한 시간을 내어 자네와 이야기하고 계시네. 자네의 호기심에 관해서는 나중에 내가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해 줄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얼른 사라시나 씨의 질문에 대답해 주면 좋겠군. 그게 자네에게도 효율적인 일처리가 될 걸세. 그건 내가 보증하지."
나는 사라시나에게 말했다.

"변호사를 고용하고 사는 형편이 아니라서 지금 니라즈카 씨의 충고를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어떤지 자신이 없지만, 말하자면 니라즈카 씨가 제게 하는 이야기는 꾸물거리지 말고 아는 사실을 털어놓는 게 훨씬 빨리 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소립니까?"
니라즈카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라시나는 약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사에키 나오코는 고개를 숙인 채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 "딸은 걱정이 된다고 하지만 르포라이터라는 직업이나 사에키의 평소 생활로 보아 반드시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동의를 구하듯이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나오코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내 얼굴에 정답이 있다는 듯이.

- "잠시만요." 니라즈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탐정 나부랭이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 남자는 우리 약점을 찌르고 있을 뿐이죠. 돈이나 우려내려는 이런 교섭은 제게 맡기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는 등을 쭉 펴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뭔가 팔 만한 정보가 있다면 조건을 말해보게. 난 그쪽이 어떤 인간인지 알아." 
"그렇겠지." 내가 말했다. "올려다봐야 할 인간인지 내려다봐도 괜찮을 인간인지. 당신에게 인간이란 두 종류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일어섰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는 이미 드렸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출구를 향했다. 자, 이 대저택을 안내 없이 어떻게 탈출해야 할까. 약간 불안했다.

- "부인의 남편을 찾는 사람은 여기 계신 분들만이 아닙니다. 어제 니라즈카 변호사한테 전화가 오기 조금 전에 어떤 사람이 제 사무실을 찾아와 역시 사에키 씨에 관한 질문을 했죠. 사에키 씨가 르포라이터라는 사실은 그 사람 입을 통해 알게 된 겁니다. 사에키 나오키를 안다고 대답하기에는 약간 거부감이 들었지만 모른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던 거죠."


- 세 사람의 얼굴에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걸 말로 표현한 사람은 나오코였다.

"그이를 찾는 사람이라니, 누구죠?"
"그건 대답할 수 없습니다. ... 그 사람은 제 의뢰인입니다."

분명히 내 책상 서랍에는 그 남자가 맡긴 이십만 엔이 들어 있다. 안 그래도 요즘 거짓말과 참말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접근한 발언이 많아졌다. 조심하지 않으면 버릇이 될 것 같다.

- "비밀 유지 의무라는 건가?" 니라즈카가 비웃었다. "법률적으로 탐정에게 그런 건 없어."
"이 세상은 법률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지."

"그럼, 의리상의 문제인가? 지켜야 할 비밀은 지킨다. 아주 좋아. 미친 세상이니 탐정에게 의리가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지키고 싶은 비밀은 지키겠다. 그뿐이지."
"니라즈카 변호사, 그쯤 해둬요." 사라시나가 제지했다. 여전히 표현은 정중했지만 훈련이 잘된 개에게 명령하는 듯 효과적이었다.

- "잠시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만약 제가 사에키 씨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된다면 여러분이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 이건 무료입니다. 또 하나는 사에키 씨의 행방을 찾는 일을 제가 의뢰받는 것. 이쪽은 규정 요금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에키 씨가 사라져서 조금이라도 불안하다면 바로 경찰에 연락하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자기 아파트에 들어가지 않은 지 이미 닷새째라면 누구나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할 겁니다."
나오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힘이 빠진 듯 의자에 몸을 의지하고 앉았다. 사라시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딸 쪽으로 몸을 숙였다.
니라즈카가 불쑥 일어서더니 긴 손가락을 내게 디밀었다.

"넌 사에키와 나오코 씨 부부의 현재 상태를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니라즈카는 그렇게 지껄이면서 점점 더 흥분했다.

- 오로지 실용성만 생각한 합성가죽 구두, 내용물 이외에는 애써 의도한 것처럼 동생인 니라즈카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오기 변호사의 뒤를 따라 사에키의 작업실로 돌아왔다.
"아, 나오코." 오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게 몇 년 만이지? 많이 컸고 무척 예뻐졌군, 내가 덴엔초후에 드나들었던 게 2대째인 고야 회장이 말썽을 일으켰을 때니까 넌 아직 학생 때였나?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란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이나 마찬가지라서 넌 나 같은 인간하고는 평생 인연이 없는 행복한 세상에 살 줄만 알았는데, 안타깝구나."
"죄송해요. 이런 곳에 오시라고 해서."
"뭘, 괜찮아. 나오코를 위해서라면. 게다가 일이니까. 보수는 아버지한테 듬뿍 받을 거야.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가 내 쪽으로 돌아보았다. "사와자키 씨라고 했나?”

-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상대는 이 방면의 프로라서 이해가 빨랐다. 오기와 나는 옆방으로 옮겼다. 그는 시체를 보았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하필이면 형사라니, 골치 아프군." 그는 재판정 벽에 난 얼룩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하지만 만에 하나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사라시나 집안의 변호사인 셈이지."
"나오코 씨가 아버지와 대립하게 되면?" 내가 다시 물었다.
"알았어." 오기는 포기했다. "나오코가 내 의뢰인이야. 이제 됐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증거가 필요해."
"참 끈질긴 친구로군." 오기가 말했다. 하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나오코, 얼마든 상관없으니 돈을 내. 내가 영수증을 써주면 난 네게 고용되는 거야."

그는 서류가방에서 영수증철을 꺼내 쓰기 시작했다.

- "이런 게 필요해요?" 나오코는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며 내게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오기가 말했다.

"됐어, 나오코 자, 천 엔이든 이천 엔이든 괜찮으니 이리 줘.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원래는 영수증을 쓰지 않고도 빠져나갈 길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면 변호사로서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겠지."
두 사람은 영수증과 돈을 교환했다.

 

- 내가 전화기로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오기가 말했다.

"잠깐. 당신만 점수를 따면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보람이 없지. 이번 경우에 대해 최선의 조치를 미리 생각해 두었는데... 당신은 여기서 바로 나가주는 게 좋겠군."
"그래...?"

나는 전화기에서 손을 물렸다.

나오코가 오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사와자키 씨는 제 부탁으로 여기 와주신 거예요.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이유가 몇 가지 있어." 오기가 대답했다. "첫 번째는 탐정을 고용해서 사에키를 찾으려 한 이상 저 사람에겐 그 일에만 전념하게 해야 해. 여기 경찰이 밀고 들어오면 이 탐정은 일단 이틀이나 사흘가량 움직일 수 없게 될 거야. 나는 변호사로서 나오코만이라면 늦어도 오늘 8시에는 경찰서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할 자신이 있어. 하지만 이쪽 탐정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어. 경찰에 썩 좋지 않은 기억을 심어준 경력이 있거나 하면 오늘 밤은 경찰서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어. 내 의뢰인은 나오코이고, 탐정은 내 의뢰인이 아니니까. 내가 무리를 할 이유가 없지.”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현재 사에키를 찾아내기 위한 실마리는 사에키에 대해 물어보러 당신 사무실에 찾아온 남자뿐이지 않나? 그 남자와 접촉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경찰서 같은 데서 꾸물거리면 안 되는 거야.”

- 오기의 제안에는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이 만만찮은 변호사가 불어 있다면 나오코가 경찰에게 번거로운 일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경찰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사 담당자의 심증을 나쁘게 만드는 일쯤일 것이다.

- "그건 둘째 이유고." 내가 말했다. "사실은 사라시나 가문 주변에 스캔들 조짐이 보이니 고문 변호사로서 탐정 같은 수상한 놈까지 등장시키고 싶지 않다는 눈물겨운 배려가 첫째 이유겠지."
"그건 셋째 이유고." 오기가 말했다. "둘째는 이 매력적인 부인을 에스코트해서 경찰 나부랭이들로부터 지켜낸다는 멋진 역할을 당신 같은 사람하고 나누고 싶지 않아서야. 그리고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겼을 경우, 나오코와 나뿐이라면 변호사의 권리를 행사해서 말을 맞출 수도 있어. 당신까지 그러기는 버겁지." 

- "제가 여기 없었던 걸로 경찰에게 이야기하기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예, 어떻게 해볼게요. 그러니 사와자키 씨는 남편 찾는 일에 신경 써주세요.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군요." 나는 사에키의 탁상달력을 가리켰다. "이 메모를 그냥 두면 언젠가는 경찰이 나를 귀찮게 굴 텐데."
오기는 잠깐 생각하더니 내 이름과 사무실 전화번호가 적힌 목요일 페이지를 뜯어냈다. "이런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걸로 하지."
나는 그 메모를 구기기 전에 오기의 팔을 잡았다. "그건 내가 맡아두지."
그가 씩 웃으며 메모를 내게 건넸다. "그러시지."
 
- 신주쿠로 돌아온 시각은 4시 반이었다. 나는 햐쿠닌초 뒷골목에 있는 사진관에 들러 사에키의 아파트에서 들고 나온 필름을 현상해 달라고 맡겼다. 무엇이 찍혀 있는지 모를 필름을 일반 현상소에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 사진관은 요금이 좀 비싸기는 하지만 주인이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법에 저촉될 만한 것이 찍혀 있는 필름이라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곳이었다. 

- "요새 너무 뜸해." 사진관 주인은 렌즈가 동그란 까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와타나베 선생한테서는 여전히 연락 없고?"

은팔찌를 차본 적이 있는 인간에겐 알코올의존증 전직 경찰관도 영원한 경찰관이다.
인사를 대신한 사진관 주인의 물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천 엔짜리 지폐 두 장을 손에 쥐어주며 물었다. "사진은 언제 찾을 수 있지?"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와타나베 선생 걱정이 돼. 흠, 사진은 내일이면 언제든지 괜찮아. 뭘 찍은 필름이야?"
"알면 이런 데 던져주러 오지도 않지."
"그도 그렇군."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데 자네 몇 살이지? 왼쪽 관자놀이 부근에 흰머리가 한 가닥 났군."
"제 마누라를 모델로 한 에로 사진 필름을 들고 오는 녀석들은 진짜로 당신이 앞을 못 본다고 믿는 거야? 진짜로 눈이 보이지 않아도 현상과 인화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글쎄, 어떨까? 그렇게 믿으니 사진을 찾으러 왔을 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을 수 있겠지."
"힘들이지 않고 모은 에로 사진 컬렉션과 그걸 복사한 사진으로 돈을 버는 걸 알면 그놈들도 그런 표정일 수는 없을 텐데."
사진관 주인은 까만 안경을 쓴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젓더니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녀석들은 그런 거 뻔히 알면서도 필름을 가지고 오는 거야. 그런 사진을 찍는 사람들 마음을 자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아마 그렇겠지. 내일 사진 찾으러 올게."

- 눅눅해진 상의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기 전에 사에키 나오키 앞으로 온 편지와 사에키의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편지를 집어 들었다. 편지봉투 뒤에 '후추 제일병원'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남의 편지를 훔친 죄에 그것을 뜯어보는 죄까지 저지를 참이었다. 살인 사건의 증거 인멸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상당히 대담하지 않은가. 죄를 짓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책상 위에 있는 가위를 들어 봉투 윗부분을 잘랐다. 병원 이름이 인쇄된 편지지에 상당히 흘려 써서 읽기 힘든 편지였다.

 

- 집 지키는 개처럼 웅크리고 앉은 회색 건물은 접근하는 모든 것에 겁을 주려는 듯 보였다. 네바도 텔 루이스 화산의 분화로 진흙 속에서 숨을 거둔 열두 살 소녀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명의 제복경관을 현관에서 스쳐지나 1층 안내창구로 갔다. 모자를 쓰지 않은 젊은 경찰관이 창구 뒤에서 <포커스>인지 <프라이데이> 같은 사진 주간지를 펼쳐 몰래 보고 있었다.


- 내 시선이 사진 주간지로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안내창구의 경찰관은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런 잡지,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사진이 너무 많이 실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가수인 프랭크 나가이 1985년에 자살을 기도도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건 너무 심했고, 도지사 선거 때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조작을 하다니. 찍는 쪽이 나쁘다, 찍히는 쪽이 잘못이다 말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누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여기 1층 안내창구인데요, 지금 사와자키란 분이 찾아왔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내게 말했다.

"이쪽 계단 2층으로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수사과가 있습니다. 두 번째 방입니다."
"고마워." 나는 인사를 하고 안내창구를 떠났다. 계단에 발을 딛고서 안내창구의 경찰관에게 말했다.

"그런 잡지를 사서 읽는 놈들이 제일 나쁘지." 

 

- "그래. 그래서 사에키가 전화로 당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고 싶어. 사에키는 9월쯤부터 무슨 조사에 몰두했던 모양인데, 그 사람 부인도 구체적인 내용은 몰라. 사에키가 무엇을 조사했는지, 나를 고용해서 무얼 시킬 작정이었는지, 그걸 알면 그 사람을 찾는데 도움이 되겠어." 
니시고리는 담배를 비벼 끄면서 마지막 연기를 찡그린 입술 사이로 뿜어냈다. 그의 얼굴에 나를 사에키에게 소개한 걸 후회하는 표정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내가 왜 탐정이 하는 일을 도와줘야 하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관만큼 자기 질문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인종도 없다.
"탐정, 자넨 오 년 전 일로 내게 뭔가 빚이 있을 텐데." 그가 또박또박 말했다. "자네가 이틀이나 구류되어 심문을 받았던 것은 자업자득이야. 자넨 결백을 증명하지 못했으니까."
"사흘간이야. 그리고 공범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렇지 않아. 내 이야기는 자네가 와타나베와 오륙 년씩 함께 일하면서도 그가 그런 짓을 꾸미고 있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공범보다 더 나빠." 
니시고리의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옳았다. 내 마음 한구석이 그의 생트집 같은 비난에 분명히 아픔을 느꼈다.

- "그렇지만 말이야."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심하는 일이 전문인 당신들도 감쪽같이 속았잖아? 그게 분명히 야마구치 구미 쪽과 적대하던 '세이카이'라는 조직폭력단이었지? 와타나베를 미끼로 삼아 세이와카이와 각성제 3킬로그램을 일억 엔에 거래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정리되었어. 당신들은 전직 경찰관인 와타나베가 경찰에 협조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세이카이는 경찰에서 밀려난 알코올의존증 늙다리가 경찰을 배신할 거라고 믿었고. 그래서 경찰은 진짜 각성제까지 준비해 와타나베를 거래 장소로 보냈어. 하지만 경찰 각본대로 '게이오 플라자' 호텔 방으로 쳐들어가니 수갑을 찬 채로 넋이 나가 있는 세이카이의 조장과 간부 한 명만 남아있었을 뿐, 각성제와 일억 엔은 물론이고 와타나베도 사라져 버렸고. 맞지?" 
"시끄러. 그 사건 이야기를 더는 입에 올리지 마."


- 나는 담배를 꺼내려했지만 한 개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빈 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니시고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마지못해 자기 담배를 한 개비 꺼내주었다. 내 담배와 이름은 같은데 필터가 달려 있었다.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았지만 잘 빨리지 않아 필터를 뜯어냈다. 니시고리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와타나베는 내게 가출한 세이카이의 보스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았다고 했어. 그래서 세이카이나 신주쿠 경찰서와 자주 연락해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내 일만 했지. 난 형사처럼 남을 의심하는 습성이 없어."
"그쯤 해두지." 니시고리는 노기를 띤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미끼 작전에 반대했어. 하지만 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났던 신임수사과장이 막무가내로 결행해 버린 거란 말이야.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게 자랑이던 그 멍청이는 지금 자기 고향 지방 경찰서에서 찬밥 신세지."
"그 작전에 반대했다고?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이야기로군. 와타나베가 그렇게 나올 거라는 걸 예측이라도 했다는 소리인가?"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내가 반대한 건 그런 위험한 일에 미끼로 경찰 외부 인력을 쓴다는 데에 대해서야.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난 와타나베가 알코올의존증이 꽤 심하다는 걸 알았어. 작전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어떨지 의문이었지."

 

- "멋지게 해치웠지."

"멋대로 줄거리를 바꿔서 문제였지." 니시고리가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 계단을 다 올라가 복도에 서자 내 사무실에 불이 켜 있는 게 보였다. 자물쇠를 걸었던 문도 반쯤 열려 있었다. 찾아올 가능성이 있는 인물의 얼굴이 줄지어 떠올랐지만 모두 어긋났다. '저 꺼질 듯 타오르는 와인 레드...' 어쩌고 하는 형편없는 노랫소리가 사무실 안에서 들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반주를 틀어놓고 노래 연습을 할 만한 남자는 한 명뿐이다.

- 나는 문 앞으로 가서 사무실 안을 살폈다. '세이카이'의 하시즈메란 남자가 내 책상에 두 발을 얹고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앉아 기분 좋다는 듯 노래를 흥얼거렸다. 반주는 책상 위에 놓인 라디오카세트에서 흘러나왔다. 짙은 남색 줄무늬 더블 정장, 새하얀 실크 넥타이, 얼굴이 비칠 것 같은 이탈리아제 에나멜 구두, 그리고 양복 옷깃에 ...

- "미리 말해두지만 그걸 연 건 우리가 아니야." 하시즈메가 말했다. "여긴 너무 허술해. 우리가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도둑이 몽땅 털어갔을 거라고."
야쿠자 파마를 한 뚱보가 의자에서 일어서 벽 쪽으로 이동했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 있었나?" 내가 물었다.

- "그렇게 말뚝처럼 서 있지 말고 거기 앉아. 여긴 네 사무실이야. 어려워할 필요 없어."
나는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오 년 전에도 이 의자에 앉아 닷새를 보냈다. 속에서 분노와 공포가 서로 엇갈렸다. 나는 간신히 태연한 척했다.

- 공원에서 만난 세 꼬마한테 빼앗은 잭나이프 칼끝이 하시즈메의 더블 정장 옆구리에 닿아 있었다.
"무슨 짓이야. 이거 누가 조폭인지 알 수가 없군." 하시즈메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똘마니를 달고 왔으면서 몸수색 하나 시키지 않은 건 실수라고밖에 할 수 없겠지."
"기억해 두겠어."
"실수하는 인간은 늘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더군."

 

- "어쩌란 거야? 창문으로 도망친 녀석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건가?"
"아니, 내겐 남을 위협하면서 질문하는 취미는 없어. '칼 내놔'라고 해."
하시즈메는 잠시 망설였지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칼 내놔'라고 하면 웃으면서 '싫어'라고 하지 않을까?"

 

- 내가 웃으며 칼을 접어 하시즈메에게 건넸다.

"길거리 똘마니들한테 받은 거야. 눈에 거슬리니 처리해 줘.”
하시즈메는 바로 칼날을 뽑아 내 턱 아래 들이댔다. 살짝 통증이 왔다.
"다시는 그따위 짓 하지 마." 하시즈메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내가 왜 널 죽이지 않는지 알아? 야쿠자가 누군가를 죽일 때는 자기보다 상대가 잃을 게 많다는 손익계산이 있기 때문이야. 세상 사람들이 야쿠자를 두려워하는 것도 그 손익계산이 되기 때문이지. 쿠자와 서로 죽인다 해도 상대편이 훨씬 손해거든. 상대는 슬퍼할 부모가 있고, 보복을 두려워할 마누라가 있고, 길거리를 헤맬 자식이 있고, 멍청한 짓을 했다고 꾸짖을 친구가 있어. 그래서 야쿠자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거야. 그런데 넌 뭐야? 지금 널 죽여봤자 내가 너보다 잃을 게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시즈메의 눈에 내가 그렇게 보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시즈메는 칼날을 접어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실크 넥타이를 고쳐 매고 올백으로 넘긴 머리를 쓰다듬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냉정해졌다.  
"창문으로 도망친 건 자그마한 여자였어. 털실로 짠 모자에 둥글게 파마를 한 머리가 보였지. 얼굴은 뭔가를 검게 칠한 것 같아서 잘 알아볼 수 없었어. 검은 점퍼에 검은 바지, 검은 운동화. 그런데 장갑만 흰색이더군. 그 여자는 처음부터 여기 숨어들 작정을 한 게 틀림없어."
"젊다는 거로군?"

"확실하게 이야기할 순 없어. 스무 살에서 마흔 살 사이! 하지만 이 창문에서 뛰어내려 바로 도망칠 정도니 나이가 많지는 않을 테지."

 

- "경찰서에서는 어땠습니까?" 내가 물었다.
"예, 오기 변호사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어요 요즘 남편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자세하게 묻더군요. 덴엔초후에서 나카노로 가면서 사와자키 씨에게 말씀드렸던 내용이라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에 있던 시체는?"
"결국 사진으로 얼굴을 확인시키더군요. 그 사람이 이하라라는 형사란 사실을 우리는 모르는 걸로 되어 있으니까요. 얼굴도 보지 않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어서..."
"오기 변호사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까?"
"하셨죠. 반대하셨어요. 경찰이 시체의 신원을 안다면 그 이름만 대면 제가 아는 사람인지 어떤지 대답할 수 있을 거라면서요... 하지만 경찰이 잠깐 이야기 좀 하자며 오기 변호사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어요. 잠시 후 오기 변호사가 돌아와서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체의 얼굴이 그리 참혹한 상태는 아니니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저도 각오는 했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죠. 남편 아파트에서 시체가 나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 오기 변호사를 고분고분 물러서게 한 경찰의 이야기는 무슨 내용이었을까... 나는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아버님은 어떠십니까?"
"조금 전까지 여기 계시다가 덴엔초후로 다시 가셨습니다. 라즈카 변호사와 함께 나카노 경찰서로 달려오셨죠. 그리고 구가야마 집까지 데려다주셨어요. 아버지는 걱정이 된다며 덴엔초후로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남편이 언제 이리 돌아올지 몰라서 저는 여기 남기로 했습니다."
구가야마에 있는 나오코의 집은 경찰이 감시할 테니 만약 나오코에게 위험한 일이 닥치더라도 덴엔초후보다 오히려 더 안전할 것이다. 
 
- 고포 후지카와 뒤쪽 밭에는 양배추로 보이는 채소가 갈색으로 변색된 채 방치되어 있고, 살짝 썩는 냄새도 풍겼다. 채소를 심은 목적은 농작물 수확이 아니라 세금을 줄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 삼십 분 가까이 기다려 자정이 지났을 무렵, 가이후 마사미의 오른쪽 이웃집도 불을 껐다. 1층 왼쪽 끄트머리에 있는 집 창문에만 아직 불이 켜져 있고, 이따금 커튼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그 집주민이 자기 전에 찾아가 2층에 사는 가이후 마사미가 어떤 남자, 혹은 어떤 여자인지 묻는 방법도 있었다. 이 가이후 마사미도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이런 곳에서 추위에 떨며 시간을 허비할 일은 없다. 하지만 이런 시간에 이웃 사람에 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려면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다. 망설이는 중에 또 십오 분이 흘렀다. 나는 구실을 찾아내지 못한 채 블루버드에서 나오려 했다. 바로 그때 뒤편에서 자동차 한 대가 다가와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아야 했다. 녹색 택시가 속도를 줄이며 블루버드 옆을 지나 고포 후지카와 A동 앞에 멈췄다. 

- "왜 그래?" 내가 물었다.
유미는 고개를 들더니 착실한 학생 같은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늘 데이트에 나올 때 처녀를 버릴 결심이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멍청하게 굴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부탁이에요. 저를 당신 집에 데려가주세요. 전 친구들에게도 어린애 같다고 비웃음을 사지만 앞으로 두 달만 있으면 스무 살이에요. 이제 처녀성 따윈 버리고 싶어요."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난 쓰레기통이 아니야.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거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본인이 쓰레기처럼 생각하는 걸 멋대로 내게 버리려 한다면 난 참을 수 없어."
"아뇨." 유미는 뺨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저도 쓰레기로 여기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말뿐이야. 그렇지 않다면 기껏해야 삼십 분 전에 만난 이름도 모르는 사내에게 그런 소릴 할 리 없지."

나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유미의 손에 쥐여주었다.

"사흘 뒤에도 그런 생각이라면 전화해."
"싫어요. 전 오늘 밤이 아니면."
"시끄러. 그 명함 잘 봐. 세상 사람들은 탐정이란 직업을 쓰레기 같은 인간이나 하는 걸로 여기지. 난 널 집으로 데리고 가서 발가벗긴 뒤에 밧줄로 묶어 추잡한 사진을 잔뜩 찍은 다음에 네 부모를 협박할지도 몰라. 만약 장차 네 남편 될 사람이 부자라면 이건 아주 좋 ..."

- 그 여자의 첫인상은 굳이 이야기하자면 '슬프면서도 밝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연립주택 문을 살짝 연 가이후 마사미는 마흔 살 전후의 안색이 좋지 않은 여자였다. 화장을 했다면 오 년 전에는 남자들이 좋아할 얼굴이었을 여자였다. 오 년 전에는 또 '삼 년 전에는...'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로서의 매력은 보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다를 테지만, 오늘 만난 세 명의 젊은 여성과 비교하면 여자로서의 존재감이 훨씬 짙었다. 발자크는 '서른 살이 지나지 않은 여자에게 자기 얼굴은 없다'라고 썼다는데, 그런 표현도 실제 사례를 보기 전에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기 마련이다. 또 서른 살 먹은 여자나 마흔 먹은 여자가 반드시 여자로서의 얼굴을 지닌다고만은 할 수 없다.


- "어쨌든 사에키 씨는 지난주 목요일부터 행방을 알 수 없고, 가이후 씨도 어제 오후부터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이건 두 사람이 뭔가 공통된 문제에 말려들었다고 보는 것이 앞뒤가 맞을 겁니다. 제가 하는 일은 사에키 씨를 찾아내는 일인데, 그게 가이후 씨나 당신에게 손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도 가이후 씨가 무사히 여기 돌아오시기를 바라고, 그분과 함께 사에키 씨를 찾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이야기가 여자에게 잘 전달이 되도록 잠깐 뜸을 들였다.

"제 이야기가 납득이 가신다면 가이후 씨에 관해, 그리고 가이후 씨와 사에키 씨의 관계에 관해 아시는 내용을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여자는 텔레비전이 놓인 진열장에서 '커티' 병을 꺼내 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모습으로 보였다.

- "그렇게 된 건가? 그럼, 사에키 씨는 어떻게 되나?"
"사건은 비공개지만, 사에키와 그의 차에 대해서는 어젯밤 수배령이 내려졌어. 결국 형식적으로는 우리 쪽이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고... 나오코 씨에겐 이렇게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사에키에게 위험이 닥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네. 그래서 내가 독단으로 처리했는데, 잘못된 조치는 아닐 거야." 
"그렇군. 부인은 겉보기와 달리 보통이 아니던데. 공연히 숨겨봐야 소용이 없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다 보니 그만 어린애 취급을 해버린 것 같군." 오기는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런데 당신은 가이후란 남자를 찾아낼 생각인가?"

- 내가 오기 변호사에게 전하는 조사 상황은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고의로 늦춘 것이었다. 최종 조사 결과는 우선 의뢰인에게 전달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젯밤 내 사무실에 누군가가 침입한 시점에서 내가 이 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던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이 변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슬쩍 유인구를 던졌다.

"그보다 사에키 씨에게 나를 소개한 사람을 찾아낼 생각이야. 그쪽에서 사에키 씨의 행적이 파악될지도 모르니까."

- "남자에게 장모란 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쭤본 겁니다."
"저도 사위에게 그런 존재였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마법처럼 사위를 나오코 앞에 꺼내놓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요리코 여사의 몸짓은 예전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어머니 같았다.

 

나는 사에키 나오코에게 말했다.

"잠시 어머니와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요리코 여사가 움직이던 손을 허공에서 딱 멈췄다. 주주총회에 출석한 질 나쁜 총회꾼을 보는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나오코는 잠깐 당황했지만 내 요구가 수상하다는 생각보다 남편의 행방을 찾는 일에 협조하는 길을 선택했다.

"오래간만에 왔으니 이 위에 있는 도신 미술관을 잠깐 보고 올게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모은 '인상파' 컬렉션이야말로 두 분이 애지중지하는 자식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세상 사람들은 도신 그룹의 자산 가운데서도 가장 장래성이 있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럼 다녀올게요."

나오코는 잰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 "사와자키 씨, 남편 말에 따르면 당신은 절대로 매수에 응하지 않는 분이라고 하던데..." 요리코 여사는 미련이 남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을 위해 금액만은 알아두어도 괜찮겠죠. 사무실에 돌아가 후회하며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서."
요리코 여사는 포기하고 나루세에게 미술관에 있을 딸을 불러오라고 시켰다.

- 요리코 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세가와는 이미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거 아닌가요? 저와 사에키가 만났다는 이야기를 운전기사에게 들었잖아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누구에게 들었죠?"
"당신이 모르는 사람입니다."
요리코 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은 내 이야기가 사실인지 어떤지 하세가와에게 확인할 생각인가요? 내 말을 의심하는 거로군요."
"오늘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의심하느냐 믿느냐 하는 표현 자체를 쓸 수가 없죠. 저는 다만 사에키 씨를 찾아내는 일을 엉성하게 처리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오코는 최고의 사냥개를 고용한 것 같군요." 요리코 여사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빈정거리는 말은 칭찬으로 듣고, 칭찬은 빈정거리는 소리로 들어두는 것이 무난하다.

- "사에키 씨 신상에 위험이 미칠 가능성도 있다는 건 아시죠? 당신은 방금 한 이야기를 이십사 시간 전에 제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요리코 여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에 익숙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운전기사 하세가와를 부르라고 비서에게 지시했다. 

-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왼쪽 벽에 걸린 그림 쪽으로 갔다. 가로 세로 모두 1미터가 약간 안 되는, 풍경을 그린 유화였다. 화면은 노란색과 황록색으로 칠한 밭이고, 빨간색과 흰색 꽃이 군데군데 피어있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 있는 담 너머에 두 채의 집과 숲, 산들이 보인다. 산 위에는 노란색 태양이 떠 있고 하늘도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달력에서 본 적이 있는 고흐의 작품인데, 진품인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방에 있다면 '모나리자'가 아닌 한 진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요즘은 짙은 청색 BMW 같은 걸 타고 돌아다닌다, 그렇게 대답했지."
"그런 걸 묻는 사이인가. 두 사람은?"
"그렇지도 않아. 동생은 나보다 일곱 살 아래이니 마흔한 살이지. 사에키 씨보단 꽤 선배인 셈이야. 둘 다 '와세다' 출신이어서 만나면 잠깐씩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어. 특히 내 동생이 뉴욕에 가기 전, 그러니까 사에키 씨가 <아사히 신문>에 갓 입사했을 무렵이지... 하지만 동생이 뉴욕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사에키 씨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요즘엔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으면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지 않겠나?" 

- 사라시나 요리코의 집무실과 같은 쪽의, 빌딩 북동쪽 모서리에 있는 방의 문이 열리더니 남자 두 명이 나왔다. 하세가와가 그쪽을 보며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라고 했다. 스리피스 다크 정장에 멋진 금테 안경을 쓰고 하세가와보다 한참 어리고 스마트해 보이는 남자가 오기 변호사와 함께 있었다. 변호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후줄근한 옷차림에 낡은 가방을 들었다.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열심히 뛰어다니는군.” 오기가 내게 말했다. "소개하지. 이쪽은 고야 회장님의 비서 하세가와 운전기사인 하세가와 씨의 동생인데 꽤 수재야." 도쿄 대학 졸업생이 와세다 대학 졸업생을 꽤 수재라고 칭찬할 때의 말투에서는 다른 사람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뉘앙스가 풍겼다. 

- 사건 당시 텔레비전 뉴스에서 몇 번이나 본 영상이었다. 책상 안쪽에 있던 남자가 리모컨으로 비디오를 끄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방금 본 화면에서는 보기 드물게 형에게 주인공 역을 양보하고 조연을 맡았던 사키사카 고지였다. 영화배우로 성공하고, 청년 실업가로서도 성공했으며 지금은 도쿄도지사의 동생이자 참모 가운데 한 명이고 가까운 장래에 정계입문이 기정사실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 나오코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예. 원하신다면... 오세요."
나는 담배를 끄고 일어섰다. "댁까지 바래다 드리죠."
난로를 끄고 돌아보니 나오코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 품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전과는 다른 향수 냄새가 났다. 어쩌면 나오코의 진짜 냄새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오코를 껴안았다기보다는 품 안에서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누르고 있었다. 
"당신 집에 데려가줘요." 나오코가 내 가슴에 대고 말했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가자고 했다.


- 블루버드에게 초과근무를 시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나오코는 한동안 와타나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고슈 가도를 서쪽으로 달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노카시라 길과 나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구가마로 가는 거냐고 묻고, 간파치 길로 좌회전해서 남쪽으로 달릴 때는 덴엔초후로 가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세타가야 길로 들어가고야 소이치로가 있는 '세타가야 의료센터' 주차장에 블루버드를 세웠다. 나오코에게는 오빠나 마찬가지 존재인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자 나오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 현관으로 달려 들어갔다. 잊었던 상처에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그 뒤 오후 늦게 집에서 잠이 깨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 나는 조르주 루오의 유화를 바라보았다. 그 그림은 사라시나 저택응접실의 세련된 느티나무 벽에 걸려 있었다. 화요일에 처음 방문했을 때 사라시나가 이 집에 한 점뿐이라고 했던 미술 작품이었다. 

-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걸친 두 사람이 원근법에 따라 삼각형으로 보이는 길인지 개울인지 확실치 않은 곳에 한 사람은 서 있고 한 사람은 앉아 있다. 전체적으로 노란색과 갈색을 바탕으로 짙게 칠해진 물감은 특유의 검은 윤곽을 메워버릴 정도였다. 하늘의 희뿌연 달과 불길한 바람처럼 거칠게 붓질한 녹색 물감이 묘한 콘트라스트를 이루었다. 화가의 눈에는 달빛만으로 밤이 이렇게 또렷하게 떠오르는 모양이다. 이런 그림의 가치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이 대저택에 비하면 오히려 소박한 장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 나오코가 진정되기까지는 시간이 약간 걸렸다.

"사에키가 프러포즈하기 전 딱 열흘 동안 저는 저 사람에게 임신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민했죠. 프러포즈했을 때 왜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아요. 얼떨결에 조금 기다려달라고 대답했어요. 그날 밤새도록 고민했죠. 그 순간에 이야기하지 못했다면 영원히 이야기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튿날 저는 소이치로 씨와 의논했습니다. 소이치로 씨는 물론 반대했죠. 네가 이야기할 수 없다면 자기가 대신 사에키에게 이야기하겠다고요... 저는 얼른 임신한 건 사에키의 아기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은 소이치로 씨를 설득했죠. 아기를 지우고 그의 프러포즈를 받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도 왜 이렇게 굴절된 반응을 하게 되었는지 저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닷새 뒤,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을 때는 이제 모든 게 잘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 하지만 역시 잘못이었던 거예요." 

- '세타가야 의료센터'에 있는 고야 소이치로에게 가겠다는 나오코를 나는 블루버드로 태워주었다. 도중에 우리는 내 보수 정산 문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나오코는 오늘 아침 내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뭔가 이야기하려고 망설이다가 -내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애정과 진실을 배려하는 것이 증오와 거짓을 배신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더 깊은 상처를 입힌다는 생각을 했다. 직업상 서로 기쁨을 나눌 수 없는 사람들의 배반을 보는 건 일상다반사지만 괴로움 또한 서로 나누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고 오히려 커지는 모양이다.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굳이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의심받는 길을 선택한 여자의 마음을 나는 이해하려고 해 보았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진실은 털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 '마사유키가 다시 사키사카 지사를 저격...'이라며 '한편 동생인 고지 씨는 다행히도 총탄이 빗나가 생명에 지장은 없고, 오른손 검지를 잃게 되었을 뿐...'이라고 보도했다.
매스컴은 늘 중요한 내용을 빠뜨린다. 진실을 전달한다고 떠들지만 기껏해야 그런 수준이다. 


 

-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사무실 불을 끄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시간만 걸릴 뿐 성과가 없는 일이 열흘 이상 계속되어 무척 피곤했다. 이미 저녁 7시가 지난 시각이라 받지 말고 그냥 나가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책상으로 돌아와 전기 스탠드를 켜고 수화기를 들었다. 귀에 익은 남자 목소리가 사와자키 씨냐고 물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년 전 사건 때 헤어진 아내와 함께 큰 신세를 졌던 르포라이터 사에키 나오키입니다.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고 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어디서 만나 술이라도 한잔 하며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만."
 
- "세상에는 그런 보잘것없는 것으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세계도 있다는 건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요즘은 단순한 것이 유행인 줄 알았는데."
사에키가 웃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필립 말로라는 남자를 아십니까?"

-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워싱턴, 링컨, 메디슨, 루스벨트 케네디... 아니, 미국 대통령이 아닌 건 분명하다.
사에키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로라는 남자에 관해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게 '남자는 터프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부드럽지 않으면 살 자격이 없다'였던가? 그 사람의 이런 대사는 들어본 적 있겠죠?"

 

- "갑자기 들으니 자양강장제의 광고 카피처럼 들리는군. 그런 말은 뭔가 그럴듯한 질문이 있을 때 나와야 할 답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고 보니 분명히 '당신처럼 엄격한 남자가 어떻게 그리 부드러워질 수 있느냐'는 여자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던 것 같네요."
"요즘은 다들 답에만 신경을 쓰지, 질문 쪽은 생각하지 않아. 그만한 질문이 있어야 나올 대답인데 답만 끄집어내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건 뭔가 잘못된 거지." 
"그렇군요. 소설에서 한 문장만 뽑아낸다는 게 원래 난센스이긴 하군요. 그렇지만 다들 그 답에만 신경 쓰는 건 분명 요즘 남자들이 여자 입을 통해 그런 멋진 질문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 "누군가 말했듯이 답은 반드시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현대인의 신앙이고, 자기만 그걸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 현대인의 불안이라고 하니까요."
"내겐 자네가 이야기한 말로라는 남자의 대답이 이미 일종의 질문처럼 들리는군. 그 사람이 자네가 이야기한 스타일의 탐정이라면 그는 인생에 답이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걸세." 
"과연. 답을 구하지 않는 탐정이라,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떻게 해서든 답을 알고 싶어 하는 건 어린애나 어린애 같은 사람이란 건가요?"
"답이란 건 올바른 답일수록 사실은 번잡한 조건이 붙기 마련일 거야. 일반적으로 다들 아는 내용이라면 답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 남자 같은 사람은 그런 것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걸 테지."

- "중요한 건 더 잘, 더 정확하게 묻는 건가요?"
"그런 뻔한 소리가 아니야. 아까 그 대사 말인데, 나처럼 인생이 반쯤 꺾어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엄격해질 수 없었다면 여태 살아올 수 없었을 테고, 부드러워질 수 없다면 살 자격이 없을 것이다'... 라는, 누구에게 확인할 길이 없는 물음을 가슴에 안고 있기 마련이지. 물음이라고 하기 이상하다면 일종의 감개 같은 걸까? 약간 부끄럽고 다소 멋쩍은." 
"서른둘인 저로서는 아직 이해할 수 없군요." 사에키가 말했다.

- "아까 자네가 '남자는...'이라고 했지만 그 부분은 별로 신용할 수 없군. 그런 감개에 무슨 남녀가 따로 있겠나. 제대로 된 여자라면 역시 엄격하고 부드럽게 사는 거지."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아마 '남자는...'이란 말은 누가 멋대로 붙인 거고, 원래는 말로라는 탐정 스스로가 그렇다는 대사였던 것 같군요."
나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손님이 두고 간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 사에키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말로와 당신이 닮았다고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말로와 당신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군요."
"나는 신문 1면에 버젓한 얼굴로 사진을 찍히는 인간들하고도 한두 가지 공통점이 있을 테고, 신문 3면 기사에서 고개를 숙인 채 사진을 찍히는 인간들과는 틀림없이 더 많은 공통점이 있을 거야."
"그런 의미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아시죠? 말로라는 인물의 살아가는 모습과 당신이 살아가는 모습에는 뭐랄까..."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자네, 직업과는 달리 어정쩡한 표현을 쓰는군. 죽어가는 모습이란 건 있지만 살아가는 모습이란 건 없어. 그런 표현을 쓰니 이야기가 갑자기 수상해지는군." 
"삶의 방식이라고 하면 괜찮겠습니까?" 사에키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 나는 W자 모양의 검은 유리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뱃재를 털고 나서 말했다.
"삶의 방식은 아무리 계획적 혹은 의지적으로 보여도 결국은 그때그때의 거래에 지나지 않아."
"아마 그렇겠죠. 하지만 거래라고 하셨는데, 말로나 당신이나 늘 기꺼이 손해 보는 거래만 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그거야 뭐가 이익이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겠지. 선배 탐정에겐 미안하지만 철이 덜 든 거야."
"말로는 삼십 대 중반이 조금 지난 남자예요."
"그거 놀랍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마 작가의 나이가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작가는 그때 이미 오십 대였을 테니까요."

- 사키는 그 작가에 관해 한동안 열심히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 작가 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알코올 의존증에다가 행방도 알 수 없는, 와타나베라는 옛 파트너를 생각했다. 잡념을 떨치니 사에키는 인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싸워야 할 상대는 늘 자기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일단은 스스로와의 싸움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있죠. 거의 모든 사람이 둘 중 하나에 속할 겁니다. 특별히 어느 쪽이 낫다 못하다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야구선수라면 나가시마 시게오는 전자이고, 오 사다하루는 후자죠. 가공의 인물로 따지면 햄릿은 후자고 돈키호테가 전자라고 해야 할까요? 혹은 나폴레옹은 전자이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후자겠죠. 물론 그 사람들은 하나의 정점에 이른 천재들이니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그렇지 않죠. 한심하게도 늘 혼란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제일 골치 아픈 건 전자는 스스로와 싸워야 할 때 문제를 남과의 다툼으로 해결하려 들고 후자는 바로 앞에 있는 적과 싸워야 할 때 스스로에 갇혀 의미 없는 소모만 반복하고... 하지만 말로에겐 결코 그런 혼란이 없어요 그는 어느 쪽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사람인 거죠. 당신도 아마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나는 담배 연기를 천천히 뿜어냈다.
"아무래도 이거 칭찬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아뇨, 칭찬이나 폄하가 아니라 특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지...?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싸우기만 하는 존재인가? 싸워 이기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인생에서 승패는 늘 부분적인 승패에 지나지 않는 거 아닌가? 싸울 상대가 자신이든 누구든." 
"그런 사고방식은 패배주의로 간주될지도 몰라요.”
"심판을 바꿔." 내가 말했다. "아니, 애당초 불공평한 싸움에 몸을 던질 용기가 있다면 왜 심판이나 관객의 눈을 신경 쓰는 거지?"

- "어떻게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거죠...?"
사에키는 묻는다기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성격 때문일까?"
"그런 건 난 잘 몰라. 아는 거라고는 딱 한 가지야. 자네는 싸워야 할 상대가 스스로라고 생각하는 인간에 속하고, 게다가 자기와의 싸움에 지쳐 있다는 사실이지."

사에키는 아무 반론도 하지 않았지만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놀리는 투로 말했다.
"사와자키 씨, 당신은 자기 문제로 탐정과 상담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대체 어떻게 할 거죠?"
"글쎄... 전화번호부에서 '마' 페이지를 뒤져 '말로'를 찾아보겠지."

- 사에키는 비로소 밝게 웃었다. 그는 잠시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 사실은 그 탐정 관련 특집기사 서문을 쓰다가 막혀 있었는데 이제야 좀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한심한 용건이 없는 다음에 또 전화드리죠."

- 잠깐 침묵이 흐르고, 나는 그가 이 년 전 사건 때문에 헤어진 아내 일이나 새로운 동거녀 문제를 말하려는가 생각했다. 그가 그런 문제를 생각했던 것은 확실했지만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나는 담뱃불을 끄고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말로란 탐정 이야기를 쓴 사람 이름을 가르쳐줄 수 있나?"

"레이먼드 챈들러."

사에키가 대답했다.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 1988년 9월에 하야카와쇼보에서 발행한 <레이먼드 챈들러 독본>에 수록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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