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읽는 삶 만드는 삶 - 책은 나를, 나는 책을
저자 : 이현주
출판 : 유유
출간 : 2017.04.24
와아아.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하는 내적 친밀감과 동질감이 팍팍 솟구친 책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내향적인 편이다.
그래서일까? 이런 반가움도 타인을 직접 만나는 자리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무언가 좋은 게 있으면 아는 사람과 떠들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책을 읽는 사람은 친구가 없어서 그걸 글로 쓰는 것 같다. 물론 농담이다(하지만 일말의 진실도 담겨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는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이 필요하다!)."
아니, 이렇게 신랄하면서 적절할 수가!!
굉장히 긴 시간을 야행성 인간으로 살아왔는데, 1년 동안 잦은 거주지 이동 -거의 떠돌이- 을 겪으며 주행성으로 패턴이 변해 버렸다. 일부러 노력하거나 애쓴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밤에 잠들고 낮에 일어나는 생활을 한지가 벌써 서너 달.
문득 아침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식사와 모닝커피를 즐기고, 햇살과 함께 책장을 넘기는 나날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된 김에 -이사 후 어떤 패턴으로 살아갈지 아직 정해둔 바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려 한다.
여전히 책들은 이중으로 꽂혀 있고, 바닥에도 일부 쌓여 있지만- 적어도 책을 '찾아볼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니까 -곧 될 예정이니까- 앞으로는 계획 독서에도 도전해 봐야지. 전보다 더 큰 도서관이 주변에 있고, 산책하기 좋은 공원도 가까이 있으니 좋은 나날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전보다 좀 더 개인적인 생각들과 감정들 위주로 남겨 보려 한다.
이 글들은 모두 '나'를 위한 기록이니까.
그래도, 여기에 남은 책과 발췌들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담겨 있다.
그런 정도의 가벼움으로.
읽고, 또 읽을 삶.
- 책을 읽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써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황송하게도 좋아하는 출판사에서 주신 제안이었다. 독서광을 칭할 정도로 많이 읽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깊게 읽지도 못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한 달 넘게 망설이며 비슷한 책을 찾아 읽었다. 그동안 이런 종류의 책은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먹고 뒤져 보니 더 많았다.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거기에 하나 더 보태는 일이 민망스러워졌다.
- 그렇다고 살아온 이야기가 대단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출판 경력이 십수 년이라고 하지만 띄엄띄엄 일하느라 만든 책의 종수가 많지 않고, 많이 팔리는 책을 만들지도 못했고, 대단한 지위나 권위를 갖고 있거나 감탄할 만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내지도 못했다. 뭐라도 있으면 읽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읽으면 사는 데 이렇게 보탬이 된다고 억지라도 부려 볼 텐데, 어째서 이렇게밖에 못 살았나, 부끄러움을 느꼈다.
- 이런 생각은 책을 읽는 게 사는 데 별 보탬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다 그건 아니지 싶었다. 내가 외사촌 집에서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 1권 <행복한 왕자>를 읽은 이래, 책은 친구가 아닌 적이 없었다. 늘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덜 외로웠다. 읽는 일로 밥을 벌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책은 계속 나에 대해, 삶에 대해 그리고 타인과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했고 그 덕에 조금이라도 덜 후진 인간이 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책이 삶에 들어와서 내게 작용한 일, 그래서 조금이라도 삶이 풍요로워진 일 말이다. 그 일들은 징검다리와도 같아서 내 앞에 놓인 삶이라는 강에 띄엄띄엄 길을 만들어 주었고 나는 그것을 딛고 용케 여태까지 그럭저럭 살아왔다. 내 능력으로는 바로 앞에 놓을 돌만 겨우 수습한 터라 그것이 어디로 나를 데려가 줄지는 아직 모르겠다. 지금 선 곳에서 돌아본 징검다리도 삐뚤삐뚤하다.
- 그 징검다리에 관한 이야기다. 몽테뉴는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삶은 가르침이 될 수 없기에 이 말을 스스로에 대한 명령어로 바꾼 적도, 타인에 대한 충고로도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감히 몽테뉴에 비유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이 내게 주는 의미도 그렇다.
- 처음 책을 읽은 순간부터, 책을 통해 삶과 닿고 다시 삶과 책이 닿은 순간들을 적었다. 개인적인 순간이지만 때로는 모두의 순간이 되는 부분도 있으리라. 미리 말하지만 책을 읽는다고 유능하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모두 자기만큼의 사람이 될 뿐이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읽는 삶이, 적어도 나에게는 꽤 만족스러웠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그런 마음을 독자에게 잘 전하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 <행복한 왕자>와 그 책을 둘러싼 기억들 덕분에 내게 독서는 마가린 향이 밴 프렌치토스트, 하얀 레이스 커튼이 방마다 걸린 깔끔한 아파트, 높고 긴 창문이 달린 이국의 건물, 알록달록하고 반짝거리는 보석과 황금, 먼 나라의 신기한 이야기, 가난한 이를 돕는 착한 마음이다. 그것들은 모두 좋고 아름답다. 부드럽고 폭신하고 달콤한 맛, 빛나고 아련한 사물들, 슬프지만 결국 행복해지는 착한 사람들. 내게 책은 그런 동경의 결정체였다.
- 나는 외사촌 집에 있던 여름방학 동안 100권을 다 읽어버렸다. 다른 책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40번대에 있었던 <마더구우즈 동화>만 기억나는데, "이 세상이 커다란 만두라면"으로 시작하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이 경험은 나를 조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시시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이상 나랑 놀아주지 않는 친구들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 책을 읽는 동안은 혼자서도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 '셜록 홈스 때문에 편집자가 되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셜록 홈스가 편집자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쓰면 대충 맞는 말이다. 홈스 덕분에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 덕에 하게 된 여러 가지 경험으로 인해 결국 편집자가 되었으니까. 출판 동네에서는 유난히 셜록 홈스를 읽고 책의 재미를 알았다는 사람이 많다. 책과 함께 붙어 다니며 재미와 혼동되는 '유익' 말고 진짜 '재미' 말이다. 읽는 동안 눈을 뗄 수 없고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며 어서 끝을 보고 싶어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미루며 안달하게 되는 그런 것.
- <워싱턴 포스트>에서 삼십 년 넘게 서평 기자를 하고 있는 마이클 더다는 셜록 홈스를 '덕질'하다가 <코난 도일을 읽는 밤>이라는 책까지 썼는데, 거기에는 '베이커 가 특공대'의 창립자 크리스토퍼 몰리의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몰리가 볼티모어의 이너프랫 무료 도서관에서 셜록 홈스 책을 빌려 집까지 가는 동안 딱 한 문단씩만 더 읽기 위해 가로등이 보일 때마다 멈춰 섰다고. 이 대목을 읽었을 때, 학교 도서실에서 교사 앞 벚나무가 드리우는 그림자를 피해 해가 질 때까지 책상을 옮겨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 책을 집에 가져간 기억은 없으니 빌릴 수는 없었나 보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담당 선생님도 없이 방치된 도서실에 틀어박히곤 했다. 그 여름이 끝나고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뭍으로 전학을 갔으니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 "그래서 범인은..." 하고 범인을 지목하면서 끝나는 탐정소설의 통쾌는 불의가 처벌되고 정의가 승리해서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이상한 모든 일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데서 왔다. 나를 매혹한 것은 설명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믿음이었던 셈이다.
-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명쾌하게 해결된 사건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은 건 잡을 수 없었던 범인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단편에서는 홈스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만 범인은 배를 타고 유유히 떠난다.
- 게다가 좋은 편이든 나쁜 편이든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자리 잡은 인간의 복잡함은 선이나 정의, 절대 악 같은 거대한 이상으로 수렴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홈스의 이야기에서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 나와 전혀 다른, 처음부터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책 속의 악당들은 어떤 면에서는 모두 나 같기도 했다. 그들이 살인을 저지른 것은 마음속에 악마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질투, 분노, 편견, 이기심, 탐욕 같은 작은 악덕 때문이었으니까.
- 홈스라는 캐릭터의 매력은 말해 무엇할까? 세상만사에 무관심하고 평소에는 무기력하며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약중독자 탐정은 열정적인 정의의 수호자라기보다 많이 배운 덕에 세상만사에 냉소적인 백수 이웃 아저씨 같았다. 그는 어린아이인 우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어서 괴도 뤼팽과도 달랐다. 뤼팽과 홈스 모두 내가 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임에는 틀림없지만 뤼팽보다는 홈스가 더 만만해 보였다.
- 그리고 추리소설 동네에 여전히 남아 있는 홈스의 흔적을 발견하면 '어머, 당신도?' 하는 친근함마저 느꼈다. 일본 작가 시마다 소지가 전형적인 홈스식 구성으로 쓴 추리소설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홈스의 여장을 비웃는 대목을 보고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키가 19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양산 쓴 할머니라니...
- 여자를 때리는 것이 농담이고, 사랑의 표현이며, 하루가 못되어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화해하는 이 과정.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이야기 아닌가. 한국단편문학전집을 내가 처음 읽은 때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무렵이었다. 오빠가 며칠 전 학교에서 사 온 책이었는데, 학교에 온 외판원이 고등학생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했단다. 세로 조판의 하드커버 '한국단편문학전집' 열 권이었다. 1980년대 중반, 가로 조판으로 책을 바꾸면서 재고를 정리하려던 것이었으리라.
- 세로로 쓰인 책이라 처음에는 읽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자꾸 같은 줄을 읽게 돼 한쪽을 넘기기도 힘들었다. 읽다가 재미가 없으면 다른 소설로 넘어가곤 했는데, 이때 읽은 작품들이 <물레방아>를 비롯해 <뽕>, <감자>, <백치 아다다>, <벙어리 삼룡이> 같은 작품이었다. 호기심 많은 사춘기 소녀가 어른들의 음침한 세계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이상한 감정이 남았다.
이들은 연민이 필요한 사람인데, 이 작품들에서는 모두 비극의 원흉인가. 거의 모든 소설이 그랬다.
-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한순간도 그녀가 그 책들을 다 읽진 않았을 거라고 의심하거나 그것들이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일까를 두고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다. 더 나아가서 그 책들은 그녀의 마음과 성격의 연장선인 듯 여겨졌다. 반면에 나의 책들은 나와는 기능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내가 장차 본받으려는 특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 전체 소설과는 상관없는 부분이었지만 이 대목을 읽고도 나는 두 캐릭터를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의 '나'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 읽은 책뿐 아니라 서가의 취향으로도 인간의 유형을 나눌 수 있는데, 이 문장이 대표적인 두 유형을 보여 준다. 어떤 사람의 서가는 그 책들이 모두 그 사람의 연장인 듯한 느낌이 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의 서가는 그의 성격과 마음이 서가의 책과 분리되어 오로지 그의 지향을 보여 준다.
- 당연한 얘기지만 책에도 취향이 반영된다. 취향은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소비를 해야 비로소 생겨난다. 어떤 것에 끌리는 경향이야 타고날 수 있지만 세밀한 취향은 절대 소비량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취향은 자본주의적이고, 개인과 도시의 탄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나는 촌년이다. 진짜 촌년도 아니고 뜨내기 촌년이었다. 서해의 섬이나 경기도 변두리 학교를 떠돌아다닌 나는 거기서 만난 아이들처럼 놀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섞인 것도 아니었다. 여름 섬에서는 엉터리 낚싯대를 가지고 놀고, 가을 촌에서는 친구네 논 가장자리 원두막에 매달린 깡통을 두드려 참새를 쫓으며 놀았다. 겨울이면 땔감을 찾아 야산을 돌아다니며 마른 솔잎과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지만 그저 흉내일 뿐이었다.
- 아주 어릴 때부터 세련된 취향을 단련해 온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 자기 취향에 따라 입장과 호오가 분명한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러웠다. 재기 발랄하고 분명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위축되었다. 다른 사람이 다 칭찬하는 것을 보고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까 봐, 내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까 봐 두려웠다. 내 마음을 직접 건드린 음악도, 그림도, 영화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주눅 든 내게 책은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알기 전에는 직관적으로 좋다고 느껴도 판단을 유보했다. 무색무취의 모호한 인간이 되어 갔다.
- 그런데 책을 만들면서 이 열등감은 좋은 쪽으로 작용했다. 잘 모르는 것에 관대했고, 다양한 취향에 포용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섣불리 호오를 정하지 않았다. 윤리적인 판단을 제외하고 절대 안 되는 건 없었다. 잘 모르니까 이것도 재미있고 저것도 재미있었다.
- 세상에는 넓고 얕게 보는 책도 필요하다. 물론 그 하나로 모든 걸 알았다고 끝내게 하면 안 되고(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더 깊은 세계로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그런 책들의 필요를 어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한다. 허영이면 어떻고 가짜면 어떤가? 아직 찾는 중인데.
- 물론 다 헛된 꿈이었다. 첫날,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학부모 사서의 역할과 할 일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은 좀 내성적이고 친구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애정을 갖고 주의 깊게 살펴 주세요."
아,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책은 친구를 잘 못 사귀거나 친구가 없는 아이들의 유일한 친구다.
- 나는 사랑보다 우정을 훨씬 좋아한다. 뜨겁지도 변덕스럽지도 않기 때문이다.
불혹을 한참 넘기고 이제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장면은 늘 같다. 두 소녀 혹은 소년의 모습이다. 텅 빈 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심각했다가 깔깔 웃었다가 하면서 귓속말을 나누는 아이들, 점심을 먹고 남은 시간에 학교 운동장 으슥한 나무 그늘에 무릎을 맞대고 앉은 아이들,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심 한복판에서 팔짱을 낀 채 오로지 서로에게만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
- 삶의 어느 순간에 겪어야만 하는 일을 겪지 못한 결핍은 그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거나 다른 걸로 메워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빈 채로 남는다. 지금까지도 이런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을 보며 새삼 깨닫는다. 이런 결핍은 종종 삶의 한 부분을 찌그러뜨린다. 사춘기 시절 내내, 친구들의 호기심을 끌고 싶어 특별한 사람인 체했다.
- 러시아 현대 문학 열풍 덕분에 당시 인기 높았던 막심 고리키는 <어머니>나 '~시절 시리즈' 같은 대표작이 아닌 <끌림 쌈긴의 생애> 같은 책까지 번역되었다. 그뿐인가. 중앙일보사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 전 동유럽 작품까지 아우른 30여 권짜리 '소련·동구 현대문학전집'을 펴냈다. 출판에서도 상업성이 제1원칙이 되어 버린 지금 돌아보면 참 대단한 시대였다.
- 그전까지 월북 작가의 작품은 본문의 여러 부분이 글자 대신 네모나 동그라미처럼 깨진 글자로 처리되어 있었다. 이런 책이 특별히 재미있었다기보다 그동안 금지당한 것에 대한 욕망이 컸다. 이제껏 읽어 보지 못한 카프 KAPF 작가의 책은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
- 그때는 아직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라는 게 없어 한국문학에서 까맣게 칠해 놓은 어느 부분을 나도 알아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이 있었다. '혹시 내가 좋아할지도 모르잖아' 같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좋아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1988년에 전집이 출간된 김기림의 책은 참 좋았다. 왜 이 책이 그동안 금서였을까 싶을 정도로 계급성이나 목적의식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며 1945년 해방 후부터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분단이 고착되기 전까지의 한반도는 어떤 곳이었을까 상상해 보곤 했다.
- 그래도 일곱 권짜리 <고요한 돈 강>을 읽는 건 일종의 도전이었다.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가 이미 1965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아 이견의 여지가 없는 고전이요, 명작이었지만 방대한 양도 양이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길고 긴 러시아 이름과 어딘지 모를 지역을 따라가는 것이 버거웠다. 도서관에서 대출 기한을 연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반납한 후 다시 빌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곱 권을 다 읽었지만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을 책을 재미있다고 느끼지도 않으면서 왜 그토록 기를 쓰고 읽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생각한 '교양'은 그런 것이었다. 세상에는 혼자서는 알 수 없고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도 없는 어떤 거대한 가치가 있는데, 그걸 알려면 힘들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이상한 믿음도 있었다. 개인의 취향이라는 말이 없던 때였으니 이게 좋고 재미있다는 나의 감각을 확신할 수도 없었다.
- 그래서 아직 충분히 경험해 보지 않은 것에 마음을 열어 두었다. 그러기에 좋은 시절이기도 했다. 서점의 서가를 가득 채웠던 러시아 소설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맞물려 인기가 시들해졌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동안 금지되었던 많은 것이 풀려났다. 일본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한 일본 현대 문학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뒤이어 남미 문학도 쏟아져 들어왔다.
- 개인의 삶에 집중하는 하루키의 소설과 연이어 출간된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일지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 널리 읽혔다. 세상에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수많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서도 쏟아져 나왔다. 중남미 소설도 이 시기에 많이 나왔는데,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출간되자마자 필독서가 되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남미의 식민지 역사를 허겁지겁 공부해야 했다.
- 뒤이어 말로만 듣던 '보르헤스 전집'이 출간되었다. 대하소설과 리얼리즘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했던 내가 이탈로 칼비노의 <코스미코미케>나 톨킨의 <실마릴리온>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컸다. 수만 년에 이르는 진화와 수억 년에 이르는 우주의 역사를 녹여낸 것 같은 <코스미코스케>는 읽긴 읽었으되 지금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 없는 책이다. 마치 온 생명과 온 세상의 기원 같은 할아버지가 주인공인데, 이름이 '프우프'였다. 이름부터 난관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한단 말인가. 그 주인공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심지어 동물의 종까지 오가며 지구와 달, 우주, 생명의 탄생에 대해 아름답고도 신기한 이야기를 펼친다. 이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나 같은 미물이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 하드리아누스는 "인간 그 자체, 혼자이나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는 인간"이다.
이 소설은 가장 번성했던 시기를 살았던 로마 황제의 화려함이나 긴박감 넘치는 사건과 거리가 멀다. 작가는 오로지 한 인간이 삶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과 감정에 집중했다. 사랑과 상실, 실패와 늙어감 그리고 죽음까지. 줄거리를 말하라면 단 한 줄로밖에 말할 수 없는 이 책을 다 읽은 날 가득 차오르던 감동과 감격을 잊지 못한다. 수천 년 전의 사람과 지금의 나 사이에 근본적으로 이어져 있는 접촉 지점들을 하나하나 만져 본 느낌이었다.
- 프랑스 여성 작가 소설은 열림원에서 선집으로도 펴냈는데, 여기에 유르스나르의 <알렉시>, <세 사람>이 포함되어 아주 기뻤던 기억도 난다.
- 소설 읽기를 시간 낭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은 자기 계발서처럼 한마디로 선명하게 인생의 진리, 해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줄거리로 요약하면 A4 용지 반 장이면 될 것을 삼백 쪽이 넘는 장편으로도 풀어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소설은 인간의 삶 속 모든 감정을 세세히 살펴보고 새롭게 표현한다. 사건들이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할 때 그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슬픔이나 기쁨, 노여움, 즐거움을 모두 그린다. 그래서 소설은 다른 책처럼 발췌해 읽거나 건너뛸 수가 없다.
- 이 감정의 세목이 자세해질수록 우리는 삶을, 인간을, 세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세상과 세대가 달라지면 당연히 감정의 표현도, 사회적 상상력도 달라진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소설이 계속 쓰여야 하는 이유다. 계속 쓰이는 이상, 나 역시 계속 읽을 것이다. 소설 독자가 점점 줄고 있는 중에도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소설을 계속 펴내는 젊은 작가들을 응원한다. (열심히 사서 읽고 있습니다!)
- 소설, 비평을 논하는 풍경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 봤자 그까짓 게 뭐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김현 선생이 말했다시피 문학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권력도 돈도 되지 못하니까. 하지만 선생은 그 쓸모없음으로 문학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발견하게 해 주었다. 나는 선생이 권한 책을 읽으며 나 혼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삶의 빛을 발견하곤 했다.
- 사람들은 이제 책을 잘 읽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낙담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지, 사는 게 그렇지, 인간이 뭐 그렇지 하는 냉소가 피어오를 때, 사람들이 삶과 세상에서 좋고 밝은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해주는 책을 만들자는 의지가 더 힘차게 솟아오른다. 그럴 때면, 죽음을 앞두고도 읽고 쓰기를 거듭한 김현 선생이, 선생의 책이 내 어깨를 가만히 안아 주고 있구나 싶다. (아, 이것도 변태 같은가?)
- 소설보다 자서전과 평전을 더 많이 읽게 된 것은 이 무렵이다. 천상의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개인적으로는 탐욕스럽고 폭력적이고 사악하며 야비한 사람이라면, 이 사람과 작품을 별개로 판단해야 할까? 그가 만일 차별주의자이고 권력에 아첨하며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비열한 악한이라면? 그러나 가족을 비롯해서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랑과 애달픔이 넘치는 다정한 사람이라면?
- 나는 또 어떤가. 내 안의 속물성과 비뚤어진 욕망, 허영, 때때로 솟아나는 사악 같은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나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평전과 자서전을 읽으면서 한 인간 안에 이 모든 것이 뒤섞여 있을 수 있음을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다. 정말 사랑할 만한 인간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삶을 통해 끊임없이 자각하고 성찰하고 변화해서 조금씩 나아지는 인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네 권이나 되는 책을 홀린 듯 단숨에 읽었던 홋타 요시에의 <고야>는 그런 점에서 내게 기념비 같은 책이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에게 사람들은 위대한 작품만큼이나 견결한 삶을 기대한다. 자신의 예술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영웅을 바란다. 하지만 책 속의 고야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 나는 서경식 선생이 이 재생의 노력을 지금처럼 계속해 주기를 바라면서 선생의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산다. 책을 만든다면 이런 책을 만들어야 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선생이 지치지 않기만을 빈다(책은 제가 계속 사고 소문도 내드리겠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우리 망명자들>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망명자는 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 하면 저항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대신에 친구와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다.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 하고 쾌활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 서경식 선생은 이 말을 받아 이렇게 썼다.
"아는 재일조선인 중에 자살한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 봐도, 화를 내야 할 때 서글프게 웃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다가 스위치를 뚝 끄듯이 사라져 버렸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런 죽음과 만났을 때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개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아, 역시나' 하는 심정에 가깝다. '그 사람은 이제 어깨에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 생각하고픈 마음 ..."
- 치료가 불가능한 관절염을 진단받았던 그 아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지내다가 식구들이 집을 비운 사이 투신했단다.
그 소식을 전한 친구와 한참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째서?" 하는 의문과 함께 어쩐지 알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사람은 왜 살까, 내가 사는 의미는 뭘까 하고 묻는 대신 사람은 왜 죽지 않고 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끝내 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이유를 알려 줄 것 같아 그런 책들을 사 모았다. 보잘것없는 내 서가 한 귀퉁이는 어느새 이런 책으로 가득 찼다.
- 그 가운데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책들이다. 그는 이탈리아 파시즘에 대항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가 '인간 실험실'이라고 불렀던 수용소에서 8개월 만에 살아 돌아왔지만 1987년에 유서 한 장 없이 돌연 자살해 버렸다.
- 아우슈비츠 생존자가 따뜻한 집과 고향,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죽어 버리다니. 그는 대체 왜 그랬을까. 프리모 레비의 삶과 죽음을 안 순간부터 나에게는 이것이 인간 존재의 수수께끼였다.
-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에서 살아 나올 수 있는 존재이면서, 죽을 이유가 없어 보일 때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존재. 그 사이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프리모 레비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자유죽음>이라는 책을 쓴 장 아메리,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를 쓴 타데우슈 보롭스키, 비록 생물학적으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과 다름없었던 소비에트 연방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 바를람샬라모프(<콜리마 이야기>) 같은 이가 그들이다.
-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의 삶을 추적해 <생존자>라는 책을 남긴 테렌스 데 프레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물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인류의 비극을 증언하며 천수를 누린 빅토르 프랑클, 엘리 위젤, 로베르 앙텔므, 임레 케르테스 같은 이도 있다. 하지만 나는 늘 끝까지 살지 못한 이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들이 삶 너머로 사라지기까지의 마음이 궁금해 소설로 재구성한 이야기들도 좋았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이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 같은 책이다.
- 그 시간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가끔씩 현실이 막막하고 나 자신이 초라해 슬퍼질 때면 아무도 내게서 파괴할 수도, 몰수할 수도 없는 시간이 있음을 떠올린다. 과거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모든 성취와 삶이 파괴되었다고 느낀 순간, 새로운 삶과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깨달은 츠바이크처럼.
- "그러나 그 시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지옥과 연옥을 지나가야 한단 말인가! ... (그 전쟁의) 그림자는 내내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가 밤낮으로 나의 모든 생각 위를 떠다녔다. 아마도 그 그림자의 어두운 윤곽은 이 회상의 서書의 많은 페이지 위에도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 몇 개월 사이 소속 밴드인 '장기하와 얼굴들'은 하나의 현상이 되어 버렸다. 싸구려 커피는 그 시대 청춘의 송가가 되었고, 그들의 독특한 퍼포먼스는 장기하를 '장 교주'로까지 떠받들게 했다.
- <88만원 세대>가 출간된 것이 2007년이었다. 이 책은 세대 경쟁과 승자 독식의 세계에서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젊은이의 상황을 그려 높은 호응을 얻었다. 2012년 저자가 직접 책을 절판시키기까지 오 년여 동안 약 14만 부라는 판매고를 올렸는데, 우리가 붕가붕가 레코드를 만난 때가 2008년이었다. 나는 이들의 움직임이 어쩌면 <88만원 세대>에 대한 화답이 아닐까 생각했다.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라는 해결책 대신 '이왕 망할 거, 남들이 뭐라든 나나 재밌자'라고 말이다. 어차피 모두 가능성이 없다면 그 무한 경쟁의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즐겁게 살겠다는 거다. 이들은 자기 내면의 동기와 동력으로 자신을 움직여간다. 노래 만들고 노래하는 게 재밌으니까 하는 거고 대중가수니까 대중이 좋아해 주면 더 좋겠단다. 남다른 음악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강박도, 그러니 세속적이면 끝장이라는 과도한 자의식 같은 것도 없었다.
- 한 시대의 분위기를 담은 책을 작업하는 건 편집자가 몇 번 경험하기 힘든 일이다. 아쉽게도 나는 이 책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팀장도 없이, 바빠진 저자들을 쫓아다니며 책을 완성한 당시 기획 편집자에게는 늘 미안함을 갖고 있다.
- 책이 출간된 후 '장기하와 얼굴들'이 떠서 판매도 기대가 컸다. 장기하와 함께 대형 서점에서 저자 사인회를 잡았는데, 같은 날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이 사인회를 함께 열었단다. 회사 식구들까지 총동원했는데도 '딴따라' 쪽 책상은 금세 비어 버렸고, 이석원 쪽은 독자가 몇 시간 동안 이어져 편집자와 마케터가 울고 왔단다. 지금이라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때가 아니었으면 아마 이 책은 영원히 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 중학생이 되었다고 아이들이 자기 밥을 알아서 해 먹지도 않고, 하면 아무 표시도 안 나지만 안 하면 대번 표시가 나는 집안일이 사라지거나 대신해 줄 우렁각시가 나타나지도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를 둔 엄마에게 학교에서 요구하는 공짜 노동도 만만치 않다. 아침 등굣길 도우미부터 청소, 급식 담당까지. 엄마가 없으면 집안과 아이의 일상 곳곳에 그 시간이 고스란히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업주부는 스스로 끊임없이 존재 가치를 의심하며 살아간다.
- 그런데 아이가 중학교 이상이 되면 엄마 노릇을 정량해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아이들 성적을 통해서 '특목고’나 '자사고 입시는 실질적으로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된다. 아이가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고등학교 입시에 대해 알아볼까 하고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설명회를 갔는데 중2 엄마는 나 하나뿐이었다. 가장 많은 학령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 그런 곳에 가서 앉아 있으면 세상 모든 여자의 꿈이 특목고나 자사고를 졸업한 서울대생 엄마가 되는 것, 한 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아이들의 성취와 진로에 엄마 역할의 중요성을 확신하는 엄마들을 만나면 왜 밥은 하루에 세 끼나 먹어야 하는가, 왜 먼지는 알아서 소멸되지 않는가, 왜 옷들은 저절로 깨끗해지고 반듯해지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나의 욕구와 자리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비정상으로 느껴졌다.
- 이러고 살 때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이 내게 왔다. 이 책을 펼쳤을 때 우선은 부끄러웠다. 고전문학을 공부한 세 명의 학자에게 불려 나온 조선의 여성 열네 명 가운데 아는 이름보다 모르는 이름이 더 많았다. 현모양처의 현신으로만 기려지는 신사임당, 요절한 천재시인 허난설헌, 이문열의 소설 <선택>을 통해 완고한 유교적 이념의 여성상으로 '잘못' 그려진 <음식디미방 飮食知味方>의 저자 안동 장씨 정도만이 아는 사람이었다.
- 이들 외에도 이 책에는 가부장제의 부당한 권위에 항의했던 송덕봉, 퇴계에 비견할 만한 여성 유학자 임윤지당, 왜곡되지 않은 세속적 욕망을 자신의 삶에서 건강하게 표출한 김삼의당, 남편의 스승이 되었던 여성 유학자 강정일당, 여성의 삶을 호방한 글쓰기로 재성찰한 김호연재, 열녀의 삶을 인간의 삶으로 바꿔 놓은 풍양 조씨, 빼어난 시인이었으나 이름을 얻지 못한 채 스러진 이옥봉, 쓸 때 쓸 줄 알았던 제주 큰 손 김만덕, 열네 살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 유람에 나섰던 김금원, 기예 하나로 사당패의 꼭두쇠가 된 바우덕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윤희순 등이 나온다.
- 여성이라는, 조선이라는, 유교라는 삼중의 감옥에 갇힌 이 여성들이 얼마나 꿋꿋하게 자기 삶을 살아 냈는지, 읽는 내내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걸 지켜 내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들의 절망을 가늠할 수 있는 예화가 있다. 조선 숙종 때 문호였던 김창협이 그 재주를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딸 김운은 "나는 여자라 후세에 이름을 남길 방도가 없으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아버지가 내 묘지명을 지어 준다면 그것이 차라리 더 낫겠다"라고 했는데, 정말 스물에 죽어 아버지가 딸의 묘지명을 지어 이름을 남겼다. 또한 '삼호정시사' 三湖亭詩社라는 여성만의 시회를 만들었던 김금원과 경춘, 죽서, 운초, 경산은 공부를 해도 시를 써도 알려지지 못한 채 결국 사라질 거라는 소외감과 고립감에 절망했으며, 조선과 유교와 가부장제라는 조롱에 갇힌 새로 자신을 인식했던 허난설헌은 초월을 꿈꾸다 스물일곱에 떠나 버렸다.
- 하지만 아내로, 어머니로 살아가면서도 현실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자신'으로 살아갔던 이들도 있었다. 방탕한 남편 송요화와 시댁과의 문제로 부대끼던 김호연재는 여자의 부덕을 탓하지 않고 붓을 들어 <자경편 自警篇>을 썼다. 감히 거스를 수 없었던 남편과 시댁과의 관계를 유교적 당위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과 경험을 바탕으로 재해석했다. 하루 일을 끝낸 한밤중, 나지막이 <주역>을 읽던 임윤지당도 있다. 대학자였던 둘째 오빠 임성주와 편지로 궁금증과 자신의 생각을 주고받았던 그녀는 단순히 남성의 공부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타자의 입장을 세워 공부의 주체가 되고자 했다.
- 열녀 대신 삶을 선택한 풍양 조씨는 남편을 위해 살을 베려했으나 베지 못하고,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다 죽지 못한 자신이 맞닥뜨렸던 공포와 고통을 솔직하게 기록함으로써, 열녀의 입을 빌려 가부장제의 규범만을 이야기한 사대부 남성 문사가 외면한 고통과 두려움을 드러냈다. 한편 유교 규범의 수호자로 그려진 안동 장씨는 남성 유학자가 말로만 떠들던 유교적 가르침의 본질을 생활에서 실천한 사람이었다.
- 김호연재의 시집 가운데는 집안의 문집으로 여성에게만 전해지는 묘한 형태의 시집이 한 권 있다고 한다. 원래 한자로 쓴 시에서 한자는 적지 않고 한자의 음만을 한글로 적은 필사본이다. 한자 없이 그 음만 한글로 여러 번 옮겨지면서 원래의 한자가 무엇인지는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다. 한자를 모르니 당연히 그 시의 내용과 뜻도 알 길이 없다. 그런데도 그 시를 거듭 옮겨 적어 전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 "페리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집에서 자란 것 같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앞문으로, 그는 뒷문으로 나간 것 같았지."
그 집에서 태어난 것은 카포티와 페리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심연 속에는 잔혹과 어둠이 깃들어 있다. 우리가 범죄자를 괴물로 생각할수록 우리 속의 어둠은 더 깊숙이 숨을 것이다.
- 범죄 논픽션이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범죄소설은 어쩐지 책꽂이에 꽂아 두기 껄끄럽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빌리 밀리건>, <화이트 시티>, <타블로이드 전쟁>, <블랙 달리아>. 흥미롭게 읽었던 이런 책을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구석에 꽂아 두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범죄를 다룬 작품은 내가 사랑하는 책일 것이다. 그렇게 시시때때로 내 안의 어둠을 들여다볼 작정이다. 그 어둠은 언제나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들이 지평선을 이루던 황량한 캔자스의 풍경으로 떠오른다. 순전히 카포티 때문이다.
- 베른트 하인리히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무조건 사두어야 한다. 모든 책이 훌륭해서 대체로 번역이 되지만 베스트셀러가 아니라서 금방 절판된다. 근래 나온 책 두어 권을 빼놓고는 <아버지의 오래된 숲>까지 현재 모두 품절 혹은 절판 상태다. 다사 모으려고 했지만 <뒤영벌의 경제학>과 <까마귀의 마음>은 구하지 못했다. 소박한 그림이 돋보이는 <동물들의 겨울나기>는 특히 사랑스러운 책이다.
- 말하지 않아도 그 밑에 깔린 원망이 전해졌다. 아버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양차 세계대전이다.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참전함으로써 전쟁의 참혹을 직접 경험했다. 아버지가 경험한 전쟁 이야기를 옮기면서 아들은 툭하면 맵시벌과 새로운 종의 새를 찾아 야생의 자연으로 떠나곤 했던 아버지가 사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기로부터 달아나고 싶어서였던가 추측한다. 또한 아버지가 겪은 전쟁을 베른트가 생물학자의 관점에서 분석한 부분은 명쾌하다. 1차 세계대전 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한 대목이다.
“사태는 곧 급변했다. 민심이 히틀러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두고두고 말이 많았다. 생물학자인 내겐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메뚜기는 큰 무리를 이루면, 몸의 형태와 색깔,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고, 철새처럼 떼 지어 이동한다. 이들은 극도로 불안한 행태를 보이고 무섭게 먹어 치우며 맹목적으로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인간을 180도 돌변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자극제는 공격받고 있다는 자각이다. 그런 자각이 들면 대열을 좁히고, '적'을 찾아 나선다. 적의 색출은 '우리'와 '저들'을 분리하고, '저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그 책임을 물을 대상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이렇게 혼란과 무질서가 난무할 때 권위 있는 인물이 나타나 질서 회복을 약속하는 경우 군중 다수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적'이 실재하든 상상의 산물이든, 그 적을 색출하고 없애는 동안 '자유'는 제약당할 수도 있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이제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복종하면 보상이 주어지고, 거역하면 지도자가 쥐고 있는 권력에 정비례하는 보복이 가해진다."
-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도 아버지가 나치당이나 나치 동조 단체에 한 번도 가담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아들은 깊이 안도한다. 하지만 만약 가담했더라도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고 욕할 수 있을까. 내가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해 보는 대목은 윗세대를 이해하려 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나라면 과연 할 수 있었을까 하는 행동을 윗세대에게서 발견하면 그것 자체가 희망의 증거로 느껴질 것이다.
- 아버지가 동네 주민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 대목은 뭉클하다. 아버지는 수용소에 끌려간 친한 이웃 코왈레프스키를 데려오겠다고 호기롭게 나선다. 하지만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맞닥뜨린 것은 막 파낸 구덩이에 잔뜩 쌓여 있는 유대인의 시체였고, 그걸 보자 아버지의 몸은 덜덜 떨렸다. 도망치려는 자신을 억지로 떠밀어, 아버지는 곡식과 고기를 생산해야 하는데 농기구를 만들고 수리할 대장장이가 여기 붙들려 와서 데리러 왔노라고 태연히 책임자에게 말한다. 책임자가 안 된다고 하자 다시 아버지는 도탄에 빠진 식량 생산을 방해한 죄로 상부에 고발하겠다고 거짓 으름장을 놓는다. 같은 동네 주민이었던 책임자는 미심쩍어하면서도 혹시 정말 고발해서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웠는지 코왈레프스키를 순순히 풀어준다. 코왈레프스키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잡혀가고 죽는 혼란의 와중에도 아버지는 시대의 한계를 변명으로 삼지 않았다. 비상 물품을 사러 나온 길에 독일군이 유대인 이웃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아버지는 두고두고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또 그 일이 부당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 역사를 좌우할 선택을 개인이 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베른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적어도 약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그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기뻤으리라. 만약 내 아버지가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을 덜했을까 상상해 봤다. 잘 모르겠다. 다만 베른트는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이나 원망 때문에 아버지의 다른 면, 그러니까 과학자나 저술가로서의 장점을 덮지 않는다.
- 개인을 이해하는 것과 세대를 이해하는 일은 다르다. 나는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래야 인류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테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베른트의 이 말이 마음에 남았다.
"한 사람의 생은 철학이 아니다. 종을 구분하고 이름 짓는 식별 특징처럼 고유한 특수성의 종합이다."
인간의 식별 특징에는 미덕과 악덕이 섞여 있다. 악덕은 여전히 악덕인 채로 말이다. 그것까지 이해할 필요는 없다.
- 나는 책벌레가 아니다. 책벌레는 내 현실태라기보다 이상향이다. 그래서 수많은 책벌레가 쓴, 책에 관한 책, 독서에 관한 책, 도서관이나 서점에 관한 책을 좋아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책은 정말 많다. 소설가 장정일은 60세가 될 때까지 20권의 독서일기를 펴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독서일기'를 시리즈로 내고 있는데, 좋았던 책뿐 아니라 별볼 일 없었던 책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썼다. 좋은 거 보기도 바쁜데, 별로인 걸 읽는 데 시간을 들이고 마음에 안 든다고 쓰는 데 또 시간을 투자하다니, 정말 책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보다. 실패작은 외출 길에 들고 나와 아무 공중전화 위에 놓아둔단다. 별로인 책을 다른 독자가 미리 피하게 해 주는 덕업을 쌓는가 했더니 혼자만 읽은 게 아무래도 억울했던 모양이다(물론 그 책을 발견한 어떤 이에게는 감명을 주었을지 모르니 덕업의 연장일지도 모른다).
- 본격적인 평론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작가도 한두 권쯤은 독서일기를 펴낸다. 국내 저자뿐 아니라 외국 저자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좋은 게 있으면 아는 사람과 떠들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책을 읽는 사람은 친구가 없어서 그걸 글로 쓰는 것 같다. 물론 농담이다(하지만 일말의 진실도 담겨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는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이 필요하다!).
- 독서일기를 쓰는 사람이 애서가라면, 장서가는 책 자체의 물성에 빠진 사람이다. 희귀본·초판본 등에 열광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책을 쌓아 두는 것만으로 흐뭇해한다. 하지만 책은 생각보다 무겁고 종수도 엄청나다. 끝도 없이 모으다 보면 그야말로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오카자키 다케시가 쓴 <장서의 괴로움>에는 실제로 책의 무게 때문에 집이 무너진 사람의 사연을 비롯해 온갖 '짠내 나는' 사연이 가득하다.
- 책에 대한 탐욕 때문에 겪는 온갖 바보 같은 일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책은 비슷한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공감과 함께 자기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책을 사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첩첩책중'에 갇혀 지내는 사람은 같은 책을 두 번 사거나 분명히 있는 줄 알지만 찾지 못해서 다시 사는 일이 예사다. 스스로 명품 가방이나 구두보다 값도 싸고 남는 게 있으니 보람 있다고 자위할지 모르지만 마음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 책에 관한 이 숱한 책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언제나 책이 한 개인의 삶과 부딪쳐 만들어 내는 이야기다. 책이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경험이 되어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이야기의 이 연쇄 파문이 참 좋다. 게다가 이런 책은 책을 만드는 사람에게 매우 실용적이다. 책벌레 저자의 폭넓은 식견 덕에 그동안 몰랐던 책이나 작가를 알게 되어 새로운 책의 출간으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 이런 책은 또 잘 안다고 생각했던 책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한다. 똑같은 책이라도 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가 가진 어떤 경험과 만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책처럼 보이는 건 참 신비롭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독자를 책을 만든 사람의 의도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대상이 ...
- 수업과 관련된 평론을 몽땅 읽고, 시의 의미와 구조를 깊이 생각하며 연필심을 날카롭게 다듬는 시간은 어느 때든 한 번은 인생에서 누려 봄 직하지 않은가 싶었다.
- 그런 그가 책을 읽고 쓰는 직업으로 중년에 이르렀다. 중년은 어쩐지 세상 이치를 다 안 것만 같아 책과 멀어지기 좋은 시기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다 아는 말 같고 대단찮게 들린다. 목소리가 크고 높을수록 '흥, 그래 봤자' 하고 심드렁해진다. 그래도 그게 다는 아니다. 경이와 감탄, 갈증의 독서는 끝나지만 중년의 독서 세계가 새롭게 열리기 때문이다.
- "열변을 토하는 것은 싫다. 내가 선호하는 예술은 세련되고 절제되고 잘 탁마된 것이다. 감동적인 것보다 재치 있는 것이 좋고 현실적인 것보다 예술적인 것 혹은 인위적인 것이 좋다. 이제는 소설보다 역사나 전기가 더 매력적이다. 현대물보다 고전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셰이커 교도의 단순함이 내게 호소한다. 또 탈레랑은 이렇게 조언했다. 'Surtout pas de tropzele(무엇보다도 열광이 없어야 한다).'"
마이클 더다, <오픈 북 - 젊은 독서가의 초상>
- 어느새 중년에 이른 나는 그에게 잘 안다는 듯 눈을 찡긋거리고 싶다. 세상에 있는 책은 모두 몇 권이나 될까? 엄청나게 많다!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기를 써도 만 권을 넘기 힘들다. 책 보다 재미있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세상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고 읽은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얼마나 드문 일일까? 편집자가 책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건 그래서다.
- "'관절염과 민간요법', '관절염퇴치하기', '관절염 다스리며 살아가기', 노화를 소재로 한 유머러스한 크리스천 포켓북 몇 권, 거의 손도 안 댄 듯한 노인들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작업 치료에 관한 책 네 권, 그리고 아직 비닐을 뜯지도 않은,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페이퍼백 한 권. 어머니의 일생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려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슴 먹먹한 순간이었다."
웬디 윌치,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
- 과연 내가 죽은 후에 남은 서가는 내 삶에 대해 어떤 말을 해 줄까? 잭과 웬디는 가격과 가치는 다르다고 말한다. 중고품의 경우는 더 그렇다. 헌책의 가격은 돈으로 계산할 수 있지만 추억의 순간으로 매겨진 것은 가치다. 잭과 웬디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이나 이혼으로 떠나간 이의 책에 값을 매기는 일은 오래된 잡동사니 서랍을 열고 하나하나 물건을 꺼내면서 그 물건에 깃든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누군가 읽은 책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로 비로소 책이 된다.
- 그래서 이들에게 책을 파는 일은 각별하다. 다른 물건은 기능적인 역할을 잘해 내면 그뿐이지만 책은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의미를 띤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락을, 어떤 사람에게는 정보를, 어떤 사람에게는 감동과 동기를, ...
- 면지 바로 뒤에 책 제목만 아주 작게 쓰여 있는 권두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신호 같아서 언제나 설렌다. 표지에 두른 띠지는 다들 귀찮아하지만 내겐 책갈피로 유용하다. 책 읽는 동안 쓰다가 다 읽으면 원래대로 끼워 두는데, 그러면 처음 책 모양과 똑같아진다. 원래 모양대로 책을 보관하는 건 그렇게 만드느라 편집자와 디자이너, 마케터가 얼마나 오래 고민했는지 잘 알아서이기도 하지만 만듦새 자체로 참고가 돼서다.
- 책을 아끼는 사람은 책이 햇빛에 바래는 것을 막으려고 집에서 가장 어두운 방을 서재로 삼고 여름이면 책꽂이 칸마다 커튼처럼 신문지를 붙여 두기도 한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긴 세월 수많은 사람의 아이디어와 손길로 완성된 책의 물성을 구석구석 기억해 주고 싶다. 여기까지 읽은 분이라면 앞으로 책을 볼 때 내가 언급한 모든 부분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셨으면 해서 이렇게 길게 썼다.
- 그러나 외출 시간이나 이동 시간이 제아무리 길어도 그 책들을 모두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들도 잘 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있다. 잠시라도 여기에 한눈을 팔면 그깟 시간이야 손쉽게 사라진다. 전철을 타자마자 자리가 생겨 옳다구나 앉아도 조느라 가방 속 책은 펼쳐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경험을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좀처럼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니 병이랄밖에. 덕분에 늘 가방은 무겁고 만성적인 어깨 통증에 시달린다.
- 프랑스 작가 아니 프랑수아도 그런 사람이다. 그이는 <독서광 일반병리학>이라는 글에서 "... (무거운 책들은) 내 가방을 축 늘어지게 만들고, 내 어깨에 톱질을 해 대고, 내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게처럼 걷게 한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손에서 자꾸 떨어진다. 그래서 이두박근에 무리를 주지 않은 채 눈높이에 맞게 유지하려면 배 위에 베개를 겹쳐 받치는 수밖에 없다. 앉아서 읽을 때는 무릎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 목 통증과 관절 통증은 따놓은 당상이다. 나는 돌리프란 두 알을 먹고 목과 어깨에 방향성 진통제 돌픽(피망이 주성분이다)을 탄두리 치킨과 비슷해 보일 정도로 듬뿍 바른다"라고 썼다.
- 아직 진통제를 먹거나 근육통 약을 바르는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동지가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다. 나만 미친 게 아니야. 모든 사람의 로망이라는 여행이 달갑지만은 않은 것도 책 때문이다. 어느 정도 책을 챙겨야 안심이 될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서점을 찾기 쉽지 않은 데다 원하는 책을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어서 자칫 여행 내내 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할 수도 있다.
- 그래도 나는 버티는 수준은 되지만 정도가 심한 사람은 시골에 갔다가 읽을거리가 떨어지면 민박 집에서 잡지 <새 농민>을 독파하거나 비료 포대에 적힌 사용 설명서와 성분, 몇 달 전 신문 쪼가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읽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두꺼운 책을 좋아한다. 다시 아니 프랑수아의 얘기다.
- "나는 얇은 소책자보다는 크고 두꺼운 책이 더 좋다. 소책자의 경우,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데, 아무리 즐기면서 천천히 읽어도, 마비용역에서 쥐씨유역까지, 혹은 페라슈역에서 파르디유역까지 가는 것보다 시간이 덜 걸린다. 반면, 두꺼운 소설은 든든하게도 일주일을 족히 버틴다. 마치 겨울 내내 장작이나 가게 문을 닫는 연휴 동안 피울 담배를 충분히 마련해 놓은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두꺼운 책의 경우 불안도 그만큼 크다. 나는 첫 삼분의 일을 게걸스럽게 읽어 치운다. 이어 책 중간, 읽기 편하고 은밀한 그 V가 다가오면 속도를 늦춘다. 그때부터 불안이 시작된다. 이제 겨우 반밖에 안 읽었는데 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끝이라는 낱말을 향해 굴러 떨어진다."
- 이런 사람이 짧은 여행도 아니고 먼 길을 떠난다면, 책을 챙기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된다. 육 개월을 미국에서 머물렀던 때가 있었다. 영어 책이야 구하자고 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겠지만 공부하듯 읽어야 하는 영어 책은 재미도 없거니와 몸과 머리로 흡수되는 정도, 읽는 속도면에서 한국어 책에 댈 게 못 된다. 한국어 책을 양껏 가져가려니 짐 무게도 만만치 않을 것 같고 돈 들여 미국까지 갔는데 영어 공부도 좀 해야지, 한국어 책만 읽을 건가 싶어서 단 한 권의 책만을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 무슨 책을 가져갈까, 서가 앞을 오래 서성였다. 당연히 좀 두꺼운 책이었으면 했고, 아주 어려워서 여러 번 읽어도 좋을 책이면 어떨까 싶었다. 아주 긴 인물 평전이나 자서전은 어떨까. 외국 책은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여러 번 읽어도 될 만큼 길고 지루한 책이 많은데...
- 그래도 계속 읽으며 좋은 저자들을 부추기고 돕는 일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
편집자 일에 대한 존중도, 벌이도 시원찮은 열악한 상황에서 편집자로 사는 일에 보람(과 환멸)을 느끼는 모든 편집자에게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내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어서 쑥스럽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일인지 ‘자뻑' 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