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주] 왕위를 놓고 30년 동안 싸우다: 장미 전쟁
저자 : 원영주 / 배성연
출판 : 한국헤르만헤세
출간 : 2013.
장미전쟁과 리처드 3세에 관한 호기심이 생겼다.
런던탑, 계단 아래에서 발견된 두 구의 아이 유골, DNA 감식 결과 요크 공작의 친자는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는 리처드 3세.
제인 그레이와 메리, 앤, 엘리자베스의 향연이 이어지는 튜더 왕조와는 조금 다른 리처드와 에드워드들의 플랜테저넷 왕조.
하지만 결국 두 시대를 이어간 것은 랭커스터의 헨리들이었다.
문득 생각이 튄다.
장미전쟁 이전에 있었던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찬란하게 빛났던 잔 다르크, 그리고 그녀의 그림자에서 지워낼 수 없는 푸른 수염 질 드 레.
나이가 들면 역사가 재미있어진다는 속설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예전엔 전혀 믿지 않았지만, 지금의 나를 보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조금도 관심이 없던 세계사에 눈길이 간다.
역사는 정말 끝없는 반복의 흔적이자 승자의 기록일까?
Truth is the daughter of time.
장미전쟁은 백년전쟁에 비해 한국에서는 찾아볼 만한 자료가 거의 없는 것 같다.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시기는 아니라, 일단은 손 닿는 대로 가볍게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생각의 틈새에는 롤 프로젝트 방충망, 전열교환기 필터 교체, 퓨리케어 용 단독 배선 - 식세기는 괜찮은가 - 등등이 단단하게 박혀 있다.)
장미가 피는 계절을 기다리며.
- "언젠가는 왕위를 되찾아 저 왕궁의 주인이 될 거야."
창밖으로 왕궁을 바라보던 리처드 공작이 중얼거렸어요. 리처드 공작은 영국의 귀족인 요크 가문 사람이었어요. 리처드 공작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영국의 왕이 되는 것이었지요. 1422년, 헨리 5세의 뒤를 이어 영국의 왕이 된 사람은 헨리 6세였어요.
-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은 모두 영국의 가장 큰 귀족 집안이었으나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리처드 공작의 조상인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를 정복하러 간 사이에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4세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았거든요.
- 오늘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로 이루어진 그레이트브리튼 섬과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진 국가를 영국이라고 해요. 이 책에서 영국의 왕위는 잉글랜드의 왕위를 말해요.
- '장미 전쟁'이라는 이름이 잘못되었다고요? '장미 전쟁'이라는 이름은 월터 스콧이 19세기에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붉은 장미가 랭커스터 가문의 상징이라고 알려졌지만, 후대의 튜더 가문의 상징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장미 전쟁이라는 이름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헨리 6세는 그만 포로가 되고 말았어요.
"나를 죽이려거든 어서 죽여라."
리처드 공작 앞으로 끌려온 헨리 6세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말했어요.
- "어서 칼을 드십시오. 우리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리처드 공작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어요.
"지금 왕의 목을 베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왕은 오랫동안 정신병에 시달려 왔고, 몸도 약해졌다. 이런 왕의 목을 치는 것은 요크 가문의 명예에 어울리지 않는다."
- 사실 리처드 공작의 속셈은 따로 있었어요.
'무엇보다 합법적으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중요해.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해.'
- 프랑스 땅을 다스린 영국의 왕, 헨리 6세 헨리 6세의 어머니는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인 캐서린 공주예요. 헨리 6세는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영국 왕이 되었고, 1422년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왕까지 겸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백년전쟁에서 지면서 프랑스 땅을 잃게 되었고, 이때부터 영국만 다스렸어요.
- 헨리 6세가 이튼 스쿨을 세웠다고요?
헨리 6세는 학문을 좋아하고 세상의 일반적인 기준을 따르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고 해요. 나랏일을 할 때에도 종교와 교육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어요. 그가 만든 학교가 이튼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예요. 하지만 너무 한쪽에만 치우친 정책을 펴는 바람에 나랏일을 골고루 돌보지 못했답니다.
- 장미 전쟁은 30년 동안 계속된 왕족과 귀족들 간의 전쟁이었어요. 귀족들은 전쟁을 하는 동안 백성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하지만, 백성들은 힘든 삶을 살아야 했어요. 30년 동안 영국을 전쟁터로 만든 장미 전쟁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아볼까요?
- 일찍이 영국의 왕은 프랑스에도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1200년경, 영국의 존 왕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지면서 그 땅을 절반이나 잃어버리게 되었어요. 존 왕은 왕실 살림이 어려워지자,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었어요. 그러자, 귀족과 상인들이 들고일어났지요. 결국 존 왕은 왕이 세금을 마음대로 걷지 못하게 하는 내용을 담은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1215년)에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했답니다.
- 그 뒤 영국 왕인 헨리 3세가 대헌장을 무시하는 일이 일어났어요. 그러자 왕에게 반발하는 성직자 및 시민 대표들이 모여 나랏일을 의논하는 '신분제 의회'라는 것을 만들었지요(1265년). 이렇게 영국 귀족들이 왕을 무릎 꿇게 하면서 정치를 이끌어 간 적도 있었답니다.
- 런던탑이 윌리엄 1세 때 지어졌다고요?
런던탑은 영국의 수도인 런던의 템스 강 북쪽 강변에 있어요. 노르망디 공인 윌리엄 1세가 1066년에 대관식을 마친 뒤, 곧바로 요새를 세운 것이 그 시작이었지요. '화이트 타워'라고도 불리는 중앙의 건물은 로마 시대에 지은 성벽 바로 안쪽에 지은 것으로, 노르망디에서 실어 온 재료로 지었다고 해요. 이곳을 지키는 보초병들은 지금도 튜더 왕조 때의 제복을 입고 있지요. 런던탑 옆에는 템스 강을 가로질러 런던 시내 중앙으로 통하는 하나뿐인 다리인 '타워 브리지'(1894년)가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