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이치, 나카타 에이이치, 야마시로 아사코, 에치젠 마타로] 메리 수를 죽이고 - 오쓰이치 外 환몽 컬렉션
저자 : 오쓰이치 / 나카타 에이이치 / 야마시로 아사코 / 에치젠 마타로 / 김선영
출판 : 비채
출간 : 2018.11.30
올해 초까지 이사준비로 집을 정리하면서 강박적으로 책을 정리했다.
당시에는 짐을 줄일수록 이사 비용도 줄어드는 상황이라 읽은 책들은 바로 재판매하고, 읽지 않은 책들도 대거 처분해 버렸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이제 와서 보니 아쉬운 책들이 있다.
<메리수를 죽이고>도 그런 책 중 하나다. 그냥 소장하고 있을 걸 그랬다- 싶다.
이 책은 오쓰이치와 여러 작가들이 모여 쓴 단편 모음집이다.
하지만 작가는 한 명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가가 제각기 다른 필명으로 쓴 단편들을 모아서 발표한 단편집이다.
그런데 모르고 읽으면 정말 여러 명이 쓴 것 같다.
글은 작가를 닮는다. 아무리 필명을 바꾸더라도 선호하는 표현, 구조, 인물 등 어느 정도 동일 작가라는 티가 나게 마련인데-
<메리 수를 죽이고>는 단편마다 분위기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필명마다 고유의 풍까지 느껴지도록 썼다.
즉, 같은 필명으로 발표한 단편끼리는 동일 작가가 쓴 느낌을 주고, 다른 필명의 단편에서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 데다가 전부 재미있다.
... 오쓰이치, 무서운 사람.
이렇게 정체성을 손쉽게 갈아 끼울 수 있을까?
그렇게 바꾼 상태가 느껴지는 글까지 '잘' 쓸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오싹하다.
<메리 수를 죽이고>는 호러나 고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으스스함이나 기이한 분위기가 감도는 단편들이다.
'환몽'이라는 표현이 딱 적절하다.
(표제작인 <메리 수를 죽이고>가 가장 산뜻하다는 점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기담류를 좋아하신다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 오쓰이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화자가 약을 하던 시기에는 긴 호흡으로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살려 서술하고, 독서에 빠져들면서부터는 명료한 문장으로 서술하는 완급조절이 멋지다. '잉크'의 비밀에 대해서는 깊게 파고들지 않지만- '문인(文人)' 느낌이 잘 담긴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염소자리 친구 - 오쓰이치>
'염소자리'라는 별자리가 미래에서 온 신문의 '염소 탈출 기사'와 연결되는 대범함.
다음 편인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과 여러모로 대비되는 점이 많다.
친구,는 다양할 수 있으니까.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 나카타 에이이치>
바로 전 수록작인 <염소자리 친구>처럼 학원물이다. 그런데도 동일 작가로는 느껴지지 않는, 훨씬 담백하고 소년적인 분위기.
은근하게 늘어뜨리는 끈적함이나 미묘함을 최대한 덜어내고, 글 자체의 박력 있는 전개로 밀어붙인다.
<메리 수 죽이기 - 나카타 에이이치>
초반의 '루카'에 대한 묘사 정도가 이세계(二世界)적일 뿐, 전체적으로 매우 건전하다... 고 할지 건전한 삶을 지향한다고 할지.
강유원 씨의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라는 문장이 생각나는 글이었다.
'원하는 바가 있다면 공상이 아닌 현실에서 실현하렴'이라고 속삭이는 듯한.
그런데 그 속삭임은 새로운 초대장이기도 하다.
그렇게 비워낸 뒤에 남는 순수한 욕망- '쓰고 싶다'. 그 순수한 욕망만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메리 수'는, 작가의 경험일까 페르소나일까.
<트랜시버 - 야마시로 아사코>
어라, 이렇게 따뜻하고 뭉클하다고?
저자의 이름을 확인해 보면 '달라져 있다'.
여성 작가라고 의식하고 읽은 건 아니지만, 이전 작의 소년스러움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은근하게 남기는 여운이 백미.
당신이 느끼는 건 오싹함인가, 그리움인가?
<어느 인쇄물의 행방 - 야마시로 아사코>
이 작품도- 여성 화자이기 때문일까, 다소 섬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다른 수록작들을 쭉 늘어놓고 '이중 같은 저자가 쓴 작품이 있다고 느껴지나요?'라고 묻는다면 곧바로 <트랜시버>를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전체적으로 낮은 채도의 서늘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건 옅은 주황색의 수조와 은은하게 느껴지는 열기.
아... 그에 더해 조금 수상해도 그런 높은 임금이라면 한 번쯤 제안을 수락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는 '현실 공포'까지 매력적이다.
<에바 마리 크로스 - 에치젠 마타로>
다 매력적인 단편이지만 가장 선명한 이미지로 남았던 단편.
개인적으로는 <엠브리오 기담>과 가장 비슷한 분위기이지 않은가 싶었는데, -그래서 야마시로 아사코가 아닌 에치젠 마타로라는 필명이라 의아했는데- 천천히 생각해 보니 납득이 갔다.
<엠브리오 기담>은 그저 그로테스크한 섬뜩함만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약간 넋을 빼고 다니는 듯한 '이즈미 로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인간적인 따스함, 그를 기준으로 해서 거침없이 아래로 밀어 떨어트리는 기괴함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는 '에치젠 마타로'보다 '야마시로 아사코'가 저자가 맞는 것 같다...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그러다 결국 다 같은 작가라는 걸 다시 상기하면, 그 사실 자체에 오싹해진다.
아. 신음 소리와도 같은 현악기의 음색이라.
현악기 연주자들은 기본적으로 절대음감을 타고나는 경우가 많다. 타악기나 타건악기와는 다른 특성 때문인데, 오롯이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음으로 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의 현의 상태에 따라 같은 자리, 같은 위치를 잡는다고 같은 음이 나는 것도 아니므로. 현과 활이라는 두 선의 만남으로 만들어지는 미세한 떨림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걸 자신의 귀와 몸으로만 감각할 수 있기에 현악기 연주자들은 대부분 꽤 예민한 편이다. -물론 음악가는 기본적으로 그런 성향이 강하다-
바이올린보다는 첼로의 묵직한 선율을 더 좋아했다. 이제는 이런 취향도 좀 달라졌으려나.
'에치젠 마타로'의 필명으로 발표되는 작품을 더 접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기록해 두며.
정말 즐겁게 읽었었다.
<메리 수를 죽이고>는 다시 구해서 소장할까 생각 중이다.
끝.
- 이걸 할 때면 음악을 삼십 분은 들었다 싶은데 실제로는 시곗바늘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현상을 종종 경험한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별세계에 빠진 기분이 드는데, 그것이 약효가 가실 때까지 계속된다.
- 그날의 통과의례는 삼십 분 만에 찾아왔다. 위에서 오블라투(약 포장에 사용하는 가식성의 얇은 반투명 막)가 녹아 속에 감싸고 있던 하얀 가루가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몸이 거부반응을 보이고 위가 날뛴다. 육체적 불쾌감. 무언가가 다른 상태로 변해서 다시 태어날 때, 통증과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급격한 변화에 육체가 적응하지 못해 두렵고 겁에 질려서 뭔가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견뎌야 한다. 이 고통은 언젠가 사라진다. 우리는 그 말을 암호처럼 주고받으며 이겨낸다. 통과의례는 사춘기와 흡사하다.
- 친구 둘과 함께 비디오를 보고 있었는데, 정상적으로 화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미안, 음악 좀 들을게. 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더듬거렸다. 그 와중에도 뇌에서 언어를 관장하는 부분이 퇴화해 간다. 덕분에 언어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언어를 깨우치지 못한 상태의 '나'를 알게 된다. 언어가 없는 세상. 그것은 마치 갓난아기의 세계와도 같다.
- 헤드폰을 끼고 스테레오를 켰다. 그러는 사이 육체적인 불쾌감은 잦아들었다. 이럴 때 세상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눈앞의 풍경이 광각 속 세계처럼 바뀐다. 엔도 쓰요시와 기리하타 사유리가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다다미 위에 털썩 널브러져 있었다.
"괜찮아?"
헤드폰을 벗고 두 사람에게 물었다. 기리하타 사유리가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카하시 너희 집 꼭 관 같다."
- 우리 집에는 물건이 적다. 텔레비전과 비디오, 침낭이 전부다. 소설도 읽지 않아서 대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산 교재 도서와 만화 잡지가 다다미 위에 쌓여 있을 뿐이다. 대학 입학 때 빌린 원룸은 집이라기보다 휑한 직육면체로 듣고 보니 정말 우리 셋은 관 속에 있는 것 같았다.
- 휴대전화에 문자 알림이 들어왔다. 힘겹게 글자를 읽었다. 어머니가 보낸 문자였다.
'마모루, 대학은 잘 다니고 있니? 택배 보냈다.'
문자가 마치 플라스틱 같은 무기질로 느껴졌다. 인간관계나 나의 과거는 모조리 사라진다. 눈앞에 있는 것이 전부인 즉물적인 인간으로 변한다.
-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택배 직원이 종이상자를 들고 있었다. 아직 몸의 감각이 어딘가 이상하다. 택배 직원이 전표에 서명을 요구했다.
내 이름. 내 이름. 내 이름이 뭐였더라? 그렇다, 다카하시 마모루다. 으드득, 이를 갈며 오른손으로 이름을 썼다. 기호가 없는 세계에 아직 반쯤 걸쳐 있는 상태다. 글씨를 쓰기가 힘들어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내 머릿속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원숭이와 똑같은 상태였다. '高(다카)' '橋(하시)' 'マ(마)' 'モ(모)' 'ル(루)'. 그 글자가 각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것을 이어 붙인 말이 나라는 개체를 나타낸다는 게 이상했다.
- 방으로 돌아가 새삼 실내를 둘러보니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방금 전 음악을 들으며 신의 철학을 발견했던 방은 그냥 쓰레기장이었다. 음식물 찌꺼기, CD 케이스, 벗어던진 양말이 관 속에 넘쳐났다. 엔도 쓰요시와 기리하타 사유리가 부둥켜안고 나뒹굴고 있었지만 다행히 둘 다 옷은 입고 있었다.
상자를 열자 두 사람이 일어나 다가왔다. 상자 속에는 고향에서 수확한 쌀과, 편의점에서도 다 팔아서 굳이 필요 없는 과자와 컵라면이 담겨 있었다. 셋이서 상자를 뒤지는데 바닥에서 신문지에 소중히 싸여 있는 물체가 나왔다.
"뭘까?"
엔도 쓰요시가 집어 들어 신문을 벗기자 지저분한 잉크병이 나왔다. 사다리꼴 모양의 병으로 뚜껑이 달린 입구가 좁았다. 병 자체는 검은색, 붙어 있는 상품 라벨은 지저분한 게 오래 사용한 감이 있었다.
- "이 잉크병은 뭐래?"
엔도 쓰요시가 병을 흔들며 물었다.
"아버지 유품인가 봐."
나는 편지에 쓰인 내용을 설명했다. 아버지는 원래 지방신문 편집 기자였다. 상자에 들어 있던 물건은 아버지가 애용하던 잉크병이라고 했다. 잉크도 아직 충분히 남아 있어, 아버지의 죽음을 기념해 어머니가 내게 보낸 것이다.
'아버지가 존경하던 여성 작가에게 받은 거란다. 무척 소중히 사용했어. 앞으로는 네가 간직해 줬으면 좋겠구나.'
- 나는 창문을 열고 눈앞에 펼쳐진 밭에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아버지가 싫어?"
기리하타 사유리가 물었다.
"정신 나간 사람이었어."
- 나는 밭에 떨어진 잉크병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창문을 닫았다. 그 후로 두 시간이 흐르자 시각적인 변화도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피부에는 따끔따끔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두통도 조금 났다. 뇌세포 일부가 사멸했는지도 모른다. 그날은 셋이서 대학 수업을 빠졌다. 두 사람이 돌아간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
- 집에 혼자 남은 나는 일단 청소를 했다. 물건이 거의 없어 청소하기 편했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는데 밭에 굴러다니는 잉크병이 보였다. 창밖으로 집어던진 걸 들키면 밭주인에게 혼날까? 그렇게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아버지가 싫지만 남에게 혼나는 건 더 싫다.
밖으로 나가 밭에서 잉크병을 주워왔다. 방구석에 잉크병을 내팽개치고 텔레비전도 보고, 컵라면도 먹고, 책상다리로 앉아도 봤다. 하지만 뭘 해도 시야 구석에 잉크병이 들어와 불안했다. 큰일이다.
- 휴지통에 버리려고 집어드는데 그러고 보니 아직 뚜껑을 안 열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뚜껑을 돌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색 액체가 병에 절반쯤 차 있었다. 모처럼 받은 거니 그 액체로 아무 글씨나 써보자. 하지만 집에 붓도 펜도 없어서 대학 구내매점에 가서 펜을 샀다. 만화가가 쓰는 것과 비슷한 펜촉과 펜대였다. 집으로 돌아와 그 두 개를 조립했다. 나의 펜 잉크병에 펜을 집어넣어 펜촉을 액체에 담가보았다. 공책 여백에 글씨를 썼다. 제법 괜찮다. 모처럼 마련했으니 의미 있는 문장을 써보고 싶었다. 그렇다. 일기를 써보자. 이튿날 동네 문방구에서 일기장을 샀다. 표지가 의외로 고급스러운 멋진 일기장이다.
- 하지만 일기장을 사자 고민은 더욱 커졌다. 모처럼 멋지게 생긴 일기장을 마련했는데, 방에 굴러다녀서야 왠지 폼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야 여긴 다다미방이니까.
- 그런 이유로 북엔드라는 물건을 사보았다. 두 개가 한 세트로 책이 쓰러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눌러주는 도구다. 이걸로 방구석에 일기장을 세워놓을 수 있다. 하지만 북엔드는 책이 몇 권은 되어야 폼이 난다. 원래 내가 구입한 북엔드는 늘어선 책의 무게를 이용해 단단히 고정하는 타입이라 일기장 한 권만으로는 도저히 고정했다고 볼 수 없었다. 어쩌지. 그렇다! 북엔드를 고정하기 위해 책을 좀 사야겠다! 그런 이유로 서점에 가서 폼이 나는 책을 몇 권 사보았다. 나는 독서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무슨 책을 사야 할지 몰라 서점 직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저, 제가 무슨 책을 사야 할까요? 가급적 책등 부분이 멋진 책이 좋겠는데... 서점 직원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서점에서 산 하드커버 단행본 몇 권을 일기장과 함께 꽂아보니 어찌나 폼이 나던지 몹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며칠 지나자 또 초조해졌다. 일기장과 함께 꽂아둔 책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나는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넌 우리를 샀으면서 읽어주지는 않는구나, 하고 책등이 나를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북엔드를 고정할 목적만을 위해 샀다니, 우리는 어쩜 이리 불행할까? 책들의 그런 한탄이 들려왔다. 하, 하지만 나는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구차하게 변명해 보지만 그들은 들어주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일기장 옆에 꽂아둔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읽다니,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독서라니 어른이 하는 일 아닌가? 나는 아직 열여덟 살인데, 이런 내가 글자만 가득한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읽다 보니 날이 샜다. 독서는 즐거웠다. 무사히 첫 번째 책을 다 읽은 나는 두 번째, 세 번째 책도 차례로 해치웠고, 어느새 독서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 북엔드 사이에 꽂아둔 책을 전부 읽었을 즈음, 나는 자발적으로 서점을 찾게 되었다.
- 그때까지 함께 어울렸던 엔도 쓰요시와 기리하타 사유리는 내 변화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끝내 내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나를 예전 상태로 돌려놓고 싶었는지, 그들은 온갖 약물을 인터넷으로 구입해 내게 쥐여주었다. 나는 그 약물을 버렸다. 독서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그런 걸 하면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약물의 존재는 내 안에서 차츰 희미해졌고, 오용했던 감각을 오로지 추억으로만 남기고 실물에는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하루가 멀다 하고 책을 읽었더니 어느새 두 개 한 세트의 북엔드가 방 한쪽 벽에서 반대편 벽까지 닿았다. 뭐야, 이러면 이제 북엔드는 쓰지 않아도 벽만 있으면 책을 세울 수 있잖아? 하지만 책은 그 후로도 계속 늘어났다. 책등이 만드는 행렬은 방을 한 바퀴 돌고, 두 바퀴에 돌입해 방 안에서 나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내 책장을 사기로 결심했다.
- 지금, 내 곁에 나나코가 있고, 가케루가 존재해,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몹시 소중하게 느껴졌다. 가케루, 내가 태어난 의미 바로 그것. 내 미래의 결정체. 그리고 나는 또한 아버지를 생각했다. 예전에 품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 작가를 뒤따르려 가족을 버리다니 어리석은 남자다. 하지만 그 감정도 이제는 풍화되어 버렸다. 시간이라는 바람에 깎여나가 뾰족했던 부분이 곡선을 띠었다. 지금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네"라는 생각뿐이다.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내 펜으로 글을 쓰게 된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 나는 몇 년 전, 잉크병 뚜껑을 열고 글씨를 쓰고 싶어졌던 순간의 충동을 떠올렸다. 나는 잉크병 뚜껑을 열었다. 동시에 글씨를 쓰고 싶어졌다. 글을 풀어내고 싶어졌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갑자기 생겨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성장이란 시간의 흐름이 가져오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굉장히 신성한 행위다. 몇만 년 전 인류 사이에서 처음으로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던 원숭이를 생각했다. 가령 원숭이가 매머드 그림을 그렸을 때 거기에는 어떤 충동이 있었을까? 어째서 그걸 그릴 생각을 했을까? 나는 상상해 본다. 설원에서 늘 볼 수 있는 거대한 그것을 벽에 그려놓고, 친구와 가족에게 보여주고 끽끽거리며 기뻐 날뛰는 원숭이들을 상상해 본다. 그때 그들 사이에 자연의 일부에서 거대한 그것만을 따로 정의하는, '매머드'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있었을까? 그것을 의미하는 울음이 있었을까? 벽화는 이윽고 단순한 형태가 되고, 상징성을 띤 기호가 되고, 문자로 변화한다. 문자의 발생, 언어의 발생. 일설에 따르면 인류는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이름과 언어라는 기호를 발명했다고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나니' 성서의 그 구절은 옳다. '매머드'라는 말이 없다면 거대한 설원에서 코를 휘두르는 털북숭이 그것은 바람과 태양, 밤과 똑같은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인류 최초로 매머드의 그림을 벽에 그린 자는 약동하는 대자연 속에서 특별히 '털북숭이 그것'만을 골라내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뭐야. 책 출판하고 똑같잖아? 나나 아버지가 회사에서 해온 일과 똑같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다양한 가치를 발견한다. 그것을 글로 써서 발표한다. 매머드의 그림과 출판의 세계에서 매일 벌어지는 활동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진화하다니 인간이라는 생물은 참으로 용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로 약에 빠져 있었다면 일기를 쓸 생각도 하지 않았으리라. 몽롱한 정신으로 도로에 뛰어들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용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여기서는 생략했지만 중간에 몇 번 위험한 상황이 있어 죽음과 소멸에 접근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용케 오늘 이날까지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
- 나는 잉크병 속에 가만히 펜촉을 담갔다. 검은색 액체가 펜촉에 스며든다. 아버지가 존경했던 신성한 작가의 잉크병, 얼굴조차 모르는 그분의 액체로 일기장에 하나하나 글씨를 써간다. 이 하나하나의 글씨는 내 의지의 상징이다. 약동하는 대자연에서 무언가를 포착하려는 의지 그 자체다. 펜과 잉크병으로 낳은 글씨다. 아득히 예로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낳고, 또 낳고, 기르고, 길러서, 그렇게 연결된다. 글씨가 연결되어 한 권의 책이 되고 이야기를 형성하듯이, 가케루 내 미래의 결정체. 우리가 펜과 잉크병으로 낳아온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이윽고 걸작이 완성될 것이다. 이 일기를 누가 읽을지 나는 모른다. 원숭이가 쓴 일기를 누가 읽을지 나는 모른다. 계속될 미래에 이 일기가 영원히 존재할지, 그렇지 않을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쓰지 않을 수 없다. 원숭이가 매머드 그림을 그린 것처럼.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린 것처럼.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한 것처럼.
-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오쓰이치
- 두 남학생은 선택했던 것이다.
자살은 하지 않을 테다.
그 대신 내가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죽일 테다.
- 나와 같은 반인 와카쓰키 나오토 역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마른 데다가 키도 작아 중학생 같은 체격이었다.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동자를 가진, 실수로 다른 성별로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은 얼굴이 특징적이었다. 그가 만약 여자였다면 누군가에게 보호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친구와 내년 수학여행은 어디로 갈지 이야기했던 날, 나는 자정이 넘은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때 이미 가네시로 아키라는 이 세상에 없었다.
- 9월 25일 목요일
알람시계를 끄고 커튼을 젖혔다. 푸른 하늘이 싱그럽다. 부모님과 아침식사를 하면서 텔레비전으로 일기예보를 보았다. 바람도 없고 편안한 하루가 될 거란다. 밤에도 비는 내리지 않을 거라 한다.
- 나오토에게 건물 뒤에 숨어서 기다리라 하고 경비원의 시선이나 감시 카메라를 피해 은행 현금인출기로 저금을 전부 찾았다. 세뱃돈을 고스란히 저금해 두었기 때문에 만 엔짜리 지폐가 다섯 장이나 나왔다. 고속버스 승강장으로 갈 때 앞쪽에서 다가오는 경찰이 보였다. 근처 가게에 들어가서 경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걸음을 뗐다.
"어디로 달아날까? 도쿄? 오사카? 홋카이도?"
"도쿄가 좋겠어, 이유는 없지만."
그렇게 우리는 도쿄로 달아났다.
- 도쿄로 가는 고속버스는 몇 번 신호에 걸리면서 거리를 달렸다. 이윽고 고속도로로 들어가자 순조롭게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몇 시간의 여정 동안 와카쓰키 나오토와 잡담을 했다. 우리 둘 다 태어나 처음 구입한 CD가 간노 요코(일본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다양한 애니메이션과 게임,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하였다)의 사운드트랙이었다는 게 판명되었다. 내가 언젠가 읽으려 했던 <용의 알>(미국의 물리학자이자 작가인 로버트 포워드의 장편소설로 '용의 알'이라 이름 붙인 중성자별의 지적생명체와 인류의 조우를 그렸다)이라는 SF소설을 와카쓰키가 이미 읽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창밖으로 풍경이 흘러갔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보니 맹렬한 스피드로 달리고 있을 승용차나 트럭이 도로 위를 느리게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미술관에 있는 하얀 도자기처럼 단정한 이목구비였다. 소년이 아니라, 소녀로서. 가네시로 아키라를 둘러싼 불쾌한 소문을 떠올렸다. 교생 실습을 온 여대생이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둔 일. 옆 동네 여중생이 자살한 일.
- "가네시로가 시켜서 고양이 죽인 적이 있어."
목줄을 찬 고양이를 붙잡아 잔뜩 고통을 주고 괴롭혔다고 했다. 와카쓰키 나오토는 가네시로 아키라가 건넨 가위를 받아 들어 그가 시키는 대로 고양이를 상처 입혔다고 한다. 함께 있던 2학년 다카기 요스케는 매스꺼워한 듯했지만 가네시로 아키라는 마치 관찰이라도 하듯이 고양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괴롭혀야 동물이 죽는지 실험하는 것 같았어. 진지한 표정이었어. 마지막에는 고양이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죽여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차라리 죽여줘, 그게 그 고양이의 마지막 소원이었을 거야. 그날 아침까지는 주인에게 사랑받으며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고양이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자기가 오늘 죽는다는 건 생각도 못했을 거야. 어째서 가네시로는 그런 짓을 했을까?"
- 달리는 전철 소리와 진동이 아늑했다. 끔찍한 이야기와는 반대로 전철 안은 빛으로 충만했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너머로 나무 그림자와 햇살이 차례로 스쳐가는 게 느껴졌다. 눈꺼풀 속 가느다란 핏줄이 빛 속에서 형태를 맺어, 붉은빛 속에 식물 뿌리 같은 형태가 떠오르나 싶더니 단숨에 캄캄해졌다. 이럴 때 내 의식은 육체를 통해 세상과 맞닿아 있다는 걸 느낀다. 육체가 부서진 가네시로 아키라는 이제 이 세상과 맞닿을 수 없다. 그도 현실감이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무엇을 해도 현실감이 없다. 그런 나날 속에서 살았던 건지도 모른다.
- "그러고 보니 자수할까?"
와카쓰키 나오토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전철은 기치조지 역 도착을 앞두고 느릿느릿 플랫폼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전에 하나만. 염소가 달아난거, 내일이지?"
염소 한 마리가 동물원을 빠져나가 고마고메 역으로 뛰어들어 야마노테선을 탄다.
신문 조각에 그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모처럼 도쿄에 왔으니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러 가보자."
"뭐, 그래도 되고."
"응, 결정했어. 염소를 보고 나서 자수할 거야."
- 전철에서 내려 인파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이노카시라 공원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늘어선 운치 있는 장소였다. 벤치에 앉아 연못 위를 지나는 백조 모양 보트를 바라보았다. 이노카시라 공원이라는 이름도 역시 어디서 들어보았다. 텔레비전인지, 만화인지, 어느 매체에서 처음 접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모르겠다. 정보로 인식했을 뿐인 유명한 공간에 내 육체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연못 위를 훑는 바람이 팔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신발 밑으로 땅바닥이 느껴졌다. 아아, 난 왜 이런 곳에 ...
- 애니메이션 같은, 마니아나 오타쿠 대상 점포가 잔뜩 있다는 지식이 있었다. 예전에 도쿄에 다녀온 친구가 "거기는 도쿄에서 가장 어두운 심연이야, 마의 소굴이야, 도저히 오래 못 있겠더라. 그 이상 오래 있었다가는 머리가 어떻게 돼서 밖으로 못 나왔을 거야"라고 말했던 게 인상 깊었다.
- 나카노 브로드웨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때라 수업이 끝나고 귀가하는 중고생들로 북적거렸다. 도착했다고 해도 언제 나카 노브로드웨이에 들어갔는지도 몰랐다. 역 앞 상점가를 걷다 보니 어느새 그 건물 안에 들어가 있었다. 1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3층에 도착했다. 가게를 둘러보며 좁은 통로를 지나는데 같은 곳을 뱅글뱅글 맴돌고 있었다. 낡은 건물 벽과 바닥, 냄새, 그 모든 게 수상쩍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도쿄에는 이렇게 엄청난 건물이 다 있구나. '마도 魔都 도쿄'라는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동인지가 진열된 가게를 보면서, 때로는 코스프레를 한 점원 옆을 지나면서, 우리는 "도쿄에는 이렇게 엄청난 건물이 다 있구나"라는 말을 끝없이 중얼거렸다.
- 4층에는 사람도 없고 셔터가 닫혀 있는 가게가 많았다. 배배 꼬인 통로 제일 안쪽에서 탐정사무소처럼 생긴 문을 발견했다. '사정상 폐점합니다'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자물쇠가 망가졌는지 문은 쉽게 열렸다. 불빛이 없어 실내는 어두웠지만 천장에 천창이 있어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카노 브로드웨이 안에는 거의 창문이 없어서 몰랐는데, 바깥은 이미 밤이었다.
- "쓰러져 있는 가네시로의 가슴에 찌른 게 다야. 너는 죽이지 않았어. 그렇지?"
와카쓰키 나오토가 계단을 지나가는 경이로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며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썹을 살짝 찌푸린,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아사셀의 염소라고 알아?"
와카쓰키 나오토가 물었다.
"아사셀?"
도시의 풍경이 창밖을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 "신화야. 아사셀은 타락천사이자 황야의 악령이기도 해. 오래된 유대 풍습 중에 아사셀의 염소라는 게 있어. 나는 염소자리라 염소에 대해서는 은근히 많이 알아. 이건 실제로 열렸던 의식이야."
- 일 년에 한 번, 사제가 두 마리의 숫염소를 골라 한 마리를 신에게, 나머지 한 마리를 아사셀에게 바친다. 신에게 바친 염소는 속죄에 사용할 피를 얻기 위해 도살한다. 다른 한쪽, 아사셀에게 바친 염소는 사제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고백한 뒤에 죄를 짊어지워 황야로 추방한다.
- "사람들의 죄를 전부 떠안고 산 채로 황야에 버려져. 그게 아사셀의 염소 속죄 염소라고도 해."
신주쿠 역에서 탄 야마노테선 외선순환 차량은 붐볐다. 우리는 문 옆에 서서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 우리 집에서는 애완동물을 키울 수 없다.
고등학교 컴퓨터실에서 강아지 입양처를 찾는 전단지를 만들었다. 전단지를 작성하는 작업은 꽤나 고생스러웠다.
어쩌다 잠깐 쉬면서 컴퓨터실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는데 흐드러진 벚나무가 보였다.
강아지 사진도 넣어가며 어찌어찌 봐줄 만큼은 되었을 때 누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수컷인지 암컷인지도 적어야지."
안경을 쓴 여학생이 서 있었다.
같은 반의 혼조 노조미였다.
- "얘 어디서 주웠어?"
베란다에 떨어져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처음에 그녀는 믿지 않았다.
"바람길?"
"진짜로 있다니까.”
- 방과 후에 그녀를 우리 집 근처로 안내했다. 나는 언덕 밑 공원에서 하늘을 가리켰다. 그녀가 눈부시다는 듯이 안경 너머로 실눈을 떴다. 마을 상공에 연분홍색 선이 있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옅은 수채 물감으로 하늘에 그은 듯한 선이었다. 수많은 벚꽃 꽃잎이 바람길을 따라 날고 있는 것이다.
- <염소자리 친구>, 오쓰이치
- 나는 그렇게 말했다. 무나카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도 불안했으리라. 긴장과 중압감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참고 있었지만, 아마 무나카타도 무서웠을 것이다.
- 결국 우미노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나를 미워했던 걸까? 애초에 우미노는 나를 좋아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런 소문이 퍼진 것은 우미노가 이따금 나를 쳐다본다는 목격 정보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호의로 해석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걸까? 우미노는 나를 증오했고, 기회가 있으면 덫에 빠뜨리려고 때를 노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진상은 알 길이 없다. 우미노는 모든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전학을 가버렸다. 나를 미워한 이유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우리 아버지가 얽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 우미노가 전학 간 뒤에 드러난 사실이 있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젊은 사무직 아가씨가 아무래도 우미노의 사촌 누나였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헤어지고 그 사람을 데리고 멀리 이사를 가버렸다. 아직 함께 사는 모양이지만 어머니에게 주는 위자료와 내 양육비 때문에 생활은 빠듯하다고 들었다. 우미노가 사촌 누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사람을 빼앗은 우리 아버지나 그 딸인 나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을 것이다.
- 무나카타가 결백을 증명해 준 덕에 괴롭히는 아이들도 없어졌고 단짝 친구들과도 함께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몇몇 아이들은 사과를 했고, 예전과 같은 일상을 되찾았다. 어머니도 친한 아주머니에게 사과 문자를 받은 듯했고, 나도 예전처럼 솔직하게 학교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 아이들에게 비난받는 꿈을 꾸고 한밤중에 깰 때가 있다. 그건 이미 끝난 일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며 침대 위에서 숨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무나카타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 마지막으로 무나카타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어느 겨울날 밤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어머니와 텔레비전을 보며 도란거리고 있는데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어머니가 나갔는데 곧바로 나를 부르기에 가보았더니 무나카타가 언제나 그렇듯 어디서 주운 듯한 운동복만 달랑 걸치고 추위에 떨며 현관 밖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무나카타를 집안에 들이려고 했다. 그가 우리의 은인이라는 사실은 어머니도 알고 있었고, 저녁식사에도 몇 번이나 초대했다. 하지만 그날의 무나카타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금방 돌아가야 해서요."
무나카타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나카타 에이이치
- 메리 수를 죽이기에 이른 동기와 그 후의 몇 년에 대해 써보려 한다.
- 나라는 인간은 좋아하는 작품이 생기면 한없이 몰입하는 버릇이 있었다. 작품의 장르는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라이트노블 등이다. 지루한 수업 시간, 내가 사랑하는 캐릭터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공책구석에 일러스트를 그렸다. 용돈으로 관련 상품들을 사들이고 자료집을 닥치는 대로 읽고, 벽에 포스터를 붙이고 일러스트 소년을 마주 보며 밤을 보냈다. 이미 완결된 작품의 후일담을 상상하거나, 캐릭터들의 사이드스토리를 이래저래 몽상하거나, 작품 속 대사를 낭독하며 그것을 녹음해 끝없이 들었다.
- 나는 초라한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먹는 걸 워낙 좋아해서 그런지 체형은 호빵 같았고, 소극적인 사고방식에 말재주도 없고, 굼뜨고 뭘 해도 자신감이 없으며, 누가 말을 걸면 얼굴을 붉히고, 웃음소리는 흉하고, 촌스러운 안경을 쓰고 있어 이성은 물론 동성에게도 무시당했으며 반에서는 음침하고 기분 나쁜 여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살아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어, 내가 왜 살고 있는지 스스로 의아할 정도였다. 그런 나도 창작물의 세계에 푹 빠져 있을 때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 내가 중학생 때 좋아했던 캐릭터는 소위 말하는 드래곤퀘스트 같은 타입의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는 RPG의 주인공이었다. 말할 줄 아는 대검과 함께 모험을 하는 금발 소년이다. 제작사가 발매한 그 아이의 공식 포스터를 바라보며 나는 밤이면 밤마다 말을 걸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어느새 소년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포스터가 떠들 리 없으니 내가 머릿속으로 소년의 말을 보완하고 있었던 것이다.
- "어머, 그렇구나... 후후후, 그래, 그래..."
한밤중에 내 방 앞에서 귀를 기울여보면 음산한 혼잣말이 들렸을 것이다. 나는 소년과 나눈 대화를 나중에 마음껏 떠올릴 수 있도록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공책에 적기 시작했다. 망상 대화 노트는 차곡차곡 늘어났지만 내 뜨거운 마음은 그걸로 끝나지 않고 중학교 2학년 때 마침내 2차 창작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2차창작이란 원작이 되는 작품의 스토리, 세계관, 거기에 등장하는 캐릭터 등 각종 설정을 바탕으로 부차적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일이다. 내가 쓴 2차 창작소설은 물론 내가 좋아하는 소년 캐릭터가 대활약하는 이야기였다. 또한 원작에 나오지 않는 오리지널 캐릭터도 등장시켰다. 이름은 루카, 열네 살짜리 소녀다. 나는 그녀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글을 썼다. 소년 캐릭터와 루카가 서로 도와가며 모험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황홀했다. 집필할 때 나는 루카에게 빙의하고 있었다.
- 고등학교 1학년 봄. 굼뜨고 호빵 같은 나는 어느 동아리에 입부할 결심을 했다. 애니메이션·만화·게임 연구부, 영문으로 머리글자를 따서 통칭 ACG부라 불리는 곳이다. 동아리방을 처음 찾아갔을 때는 긴장했다. 문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데 나처럼 신입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가입하고 싶어?"
키가 작고 동그란 안경을 쓴 여학생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새집이 떠올랐다.
"나도 그런데, 함께 들어가지 않을래?"
- 학교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아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 해서 동아리방의 문턱을 넘어섰다.
동아리방은 헌책방 같은 냄새가 났다. 책장이 벽 한 면을 통째로 점거하고 있었고, SF소설과 라이트노블, 그리고 선배들이 필독서로 ...
-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나의 2차 창작소설이 게재된 페이지를 가리켰다.
"이걸 쓴 기사라키 루카는 누구야?"
"... 전데요."
"흠, 그렇군, 흐음. 너란 말이지. 매번 챙겨 읽고 있어. 문장은 괜찮은데."
쓴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치 못한 소리를 했다.
"네 소설, 메리 수가 나오지? 그 녀석 좀 어떻게 해봐, 솔직히 말해서 찝찝해."
- 모두 눈짓을 주고받으며 당혹스러워했다. 아무도 메리 수라는 이름을 몰랐다. 내 작품에 그런 캐릭터는 나오지 않는데.
- 메리 수.
나는 집에 돌아와 그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홈페이지가 여러 개 나왔다. 알고 보니 꽤 오래전부터 존재하는 표현이었다. 메리 수는 2차 창작 관련 용어 중 하나로, 작가의 소망이 불쾌할 정도로 투영된 오리지널 캐릭터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 용어의 기원은 해외 고전 SF 텔레비전 드라마 <스타트렉>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했다. <스타트렉>은 제목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열광적인 팬들이 많다는 사실도.
- <스타트렉> 방영 당시, 그 세계를 동경한 사람들이 무수한 2차 창작소설을 썼다. 그때 그들은 자기 소망을 투영한 오리지널 캐릭터를 작중에 등장시켰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함대 안에서 가장 어리고 무척 우수하며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거나, 원작에 등장하는 캐릭터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위기에 빠졌을 때는 크게 활약하여 사람들을 구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하나같이 비현실적이고 사춘기 소년 소녀의 소망을 구현한 듯한 자기애로 똘똘 뭉친 오리지널 캐릭터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을 야유하는 히로인이 탄생한다.
- 1973년, 동인잡지 <Menagerie> 2호에 <스타트렉>의 2차 창작소설 <A Trekkie's Tale>이 실렸다. 그 소설에 등장하는 오리지널 캐릭터 여주인공이 함대에서 최연소 대위로, 나이는 고작 열다섯 살반이라는 메리 수 대위였다. 이 소녀는 당시 팬들이 쓰던 2차 창작소설의 오리지널 캐릭터에게 흔한 설정이 의도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필자가 자기를 투영해 이상화한 캐릭터를 '메리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 확실히 내 소설에는 항상 메리 수가 있었다. 가령 루카라는 소녀에게는 나를 투영해서 마음에 드는 소년 캐릭터와 함께 모험을 시키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현실의 나는 굼뜬 호빵이지만 루카는 흠잡을 데 없는 미소녀라는 설정이었다. 윤기 넘치는 검고 긴 머리에 맑은 피부. 모두가 무조건 좋아하고, 사랑하는 생김새, 오른쪽 눈동자는 검은색이지만 왼쪽 눈동자는 붉은색, 소위 오드아이라 불리는 속성. 그런가. 흔히 말하는 중2병이다. 메리 수라는 용어가 낯설었던 이유는 일본에 이미 중2병이라는 표현이 있어 해외의 용어를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집필하던 원고를 다시 훑어보았다. 거기에도 메리 수가 있었다. 다음 호 <천 개의 문>에는 어느 학원 SF 만화의 2차 창작소설을 실을 생각이었는데, 거기에 오리지널 캐릭터로 등장시킨 소녀가 바로 그랬다. 그 소녀는 초능력이 있고, 천재적인 두뇌와 천진난만한 성격으로 모두에게 사랑받고, 원작에 등장하는 주인공 소년과 전생에 연인이었다는 설정이다. 게다가 오드아이. 진짜 이 속성에 사족을 못 쓰나 보다. 나는 그녀에게 나를 투영하면서 글을 썼다. 소년과 부부 만담처럼 나누는 대화를 쓸 때는 행복했다. 내가 작품 속에 들어가 소년과 친하게 지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화들이 스토리에 아무 영향이 없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지만…
- 지금까지는 작품의 완성도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메리 수의 존재를 알고 나니 이대로 둬도 괜찮을지 불안해졌다. 내게 취미라곤 2차 창작소설을 쓰는 것밖에 없다. 그 유일한 취미를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내 문장은 소설이 아니라 소망으로 똘똘 뭉친 단순한 망상의 홍수일 뿐이었다고.
- 싫어! 멋진 소설을 쓰고 싶어!
- 2차 창작소설은 내게 인간관계 그 자체였다. 사이토 로빈슨이나 사이온지 선배, 신도 선배처럼 <천 개의 문> 필자들과 화제를 공유하고 난생처음으로 내가 속해도 될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메리 수를 쫓아내야만 한다. 내 문장에서 내 소설에서 메리 수라 불리는 소녀, 그 개념적 존재를 죽여서 지워내지 않는 한, 나는 성장할 수 없다.
- 첫걸음으로 절반쯤 쓴 2차 창작소설에서 오리지널 캐릭터를 삭제했다. 소녀의 이름이나 그녀에 관한 에피소드를 삭제 단추로 지웠다. 수정 때문에 생긴 어색함이나 모순을 하나씩 보정했다. 작중에서 소년과 부부 만담 같은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내가 만든 캐릭터가 아니라 원작에도 등장하는 소녀로 설정해 새로 썼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 원작에도 등장하는 소녀가 역할을 물려받자 이번에는 거기에 메리 수가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아이가 소년과 대화를 나눌 때, 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주인공 소년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을 이번에는 그녀의 입을 빌려서 떠들고 있었다. 소녀의 캐릭터 뼈대가 점점 흔들리더니 원작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대사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위키피디아를 보니 이건 '원작 변경 메리'라 불리는 타입의 메리 수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 현실 생활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2차 창작소설을 썼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쾌락이 이끄는 대로 이야기의 방향타를 틀어버리는 것이다. 나의 볼품없는 인생이 소설 안에 메리 수를 탄생시켰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메리 수로 변한 캐릭터를 삭제 단추로 지우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캐릭터가 메리 수로 변할 뿐이다. 그녀를 죽이려면 나라는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든 해야 했다. 한 달쯤 고민하다가 한 가지 해결책이 떠올랐다.
- 고등학교 2학년 봄, 나는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알람시계 소리에 일어나 날이 밝기 전에 침대에서 빠져나온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현관에서 스니커를 신고 있는데 어머니가 하품을 하며 나왔다.
"어디 가니? 편의점? 고기호빵은 냉장고에 있는데? 데워줄까?"
"아니야, 오늘은 안 먹어. 달리고 올 거야."
"달려?"
"응. 다녀올게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서늘한 아침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봄이라고 해도 아직 쌀쌀해서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는 숨이 하였다. 배웅하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땅을 밟을 때마다 배에 붙은 지방이 출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 메리 수는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작품 세계에 나타난다. 그러니까 내가 더 바라지 않으면 된다. 현실 세계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집필로 채우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똑같이 채운다. 성공하면 나는 보다 순수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메리 수를 뿌리 뽑고 죽이기 위한 방법. 그것은 굼뜨고 호빵 같은 나라는 인간을 지우는 일이었다.
- 내 작품에는 한 가지 유형이 있었다. 이야기 해결에 메리 수의 초인적인 능력을 곧잘 이용했던 것이다. 가령 루카의 경우 어떤 위기가 닥쳐도 결국 루카가 잠재 능력을 발휘해 적을 일망타진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루카는 전설적인 마법사의 피가 섞여 있다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의적인 전개다. 메리 수와 결별하려면 그 방법은 이제 쓸 수 없다.
-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나는 소년만화잡지에 연재되는 열혈 요리만화에 푹 빠져 있었다. 주인공 소년들이 토너먼트 형식의 요리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내용으로, 요리 만화지만 뜨거운 스포츠 작품 같은 요소도 있었다. 작가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출판사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달라는 투서를 보내고, 당연한 흐름으로 2차 창작소설을 쓰기로 했다.
-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요리학원에 다니는 것이었다. 내 나름의 메리 수 대책이었다. 소설 세계의 현실성을 높이면 자연히 캐릭터도 현실적인 존재감을 보이지 않을까? 내 개인적인 소망이 파고들 여지가 사라지고 결과적으로 메리 수가 쫓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나는 2차 창작소설을 쓸 때 치밀한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 전에는 요리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현실성 있는 묘사를 위해 식칼로 채소를 써는 감촉을 느끼고, 기본적인 밑준비나, 각종 양념의 이름과 사용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요리학원 선생님에게 직접 여쭤보고 소설 줄거리를 상담했다. 선생님 말씀 속에는 메리 수의 초인적 능력 없이도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방법에 대한 힌트가 가득 숨어 있었다.
- 낯을 가리는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된 것은 원작 만화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메리 수가 작품 속에 숨어드는 데 대한 공포 때문이었으리라. 남과 대화하는 재활 연습도 되었고, 가족에게 풀코스 요리를 만들어줄 만큼 요리 솜씨도 향상되었다. 2차 창작소설을 무사히 완성한 후에도 모처럼 익힌 기술을 까먹지 않게 요리학원에는 나갔다.
- "대단해! 진짜 좋다! 감동했어!"
인쇄한 원고를 사이토 로빈슨에게 보여주었다. 흥분 섞인 반응을 어디까지 믿어도 될지 모르겠다. 어쩌면 친하니까 칭찬해 주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다 보니 허기가 지네. 돌아가는 길에 뭐 좀 먹으러 갈까?"
"음, 지금 다이어트중이라."
"아직도 하고 있어? 왜? 이제 충분하지 않아?"
"천만에, 아직 멀었어."
- 보다 훌륭한 2차 창작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다. 원작이 게임이라면 몇 번씩 공략하고 설정집을 읽었다. 배경이 되는 나라의 문화나 역사, 건축, 패션과 풍습도 공부했다. 적 몬스터의 이름이나 외형을 신화의 세계에서 따온 경우에는 신화부터 공부하고 갑옷이나 무기 소재와 강도, 구조도 조사했다. 그런 지식을 전부 작품에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용하는 것은 극히 일부였지만 작품은 현실성을 더해갔다. 자의적인 메리 수가 침입하려고 해도 주위의 견고한 세계관과 외따로 노는 게 보이니 바로 삭제 단추로 무찌를 수 있었다.
- 주인공 소녀가 이유도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묘사도 그만두었다. 전형적인 내 개인의 소망이다. 그렇다고 작품에서 연애요소를 배제하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전개에 합당한 이유를 부여하도록 신경 썼다. 외모와 내면, 양쪽 다 충실하게 묘사해 연애 발생 이벤트에 설득력을 주었다. 외모를 묘사할 때는 독자의 마음속에 캐릭터의 모습이 떠오르도록 노력했다. 복장이나 헤어스타일, 몸에 두른 장신구 디자인 등, 세세하게 떠올려가며 집필했다. 때문에 복장이나 장신구도 공부해야 했다. 캐릭터가 입고 있는 옷이나 가지고 있는 가방에 가까운 물건을 구해 실제로 걸쳐보고 소재의 감촉을 확인했다. 원작자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조사하다 보니 패션에도 박식해졌다. 뱃살이 쏙 빠지자 그때까지 입었던 옷이 너무 커서 옷을 새로 사야 했던 터라 마침 좋은 기회였다. 그간 얻은 패션 지식을 총동원해 내가 입을 옷을 고르고 코디네이션을 고민했다. 평상복을 살 때는 부모님이 돈을 주셨지만 2차 창작소설 자료로 구입한 마법사 가운이나 장신구는 용돈으로 사야 했다. 지갑이 텅텅 비어서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 소설 등장인물이 콘택트렌즈를 끼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 조사도 할 겸 나도 콘택트렌즈로 바꿔보았다. 작중 인물들이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되기 위해 손질법을 공부하고 직접 시험해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외모 콤플렉스가 줄어들고 일상의 여러 가지 일들이 충실해지기 시작했다. 소설을 쓸 때, 소망이 폭주하는 일은 이제 거의 없었고 이야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입시 공부에 시간을 빼앗겨 2차 창작소설을 좀처럼 쓸 수가 없었다. ACG부 부장이 된 사이토 로빈슨은 소책자 <천 개의 문>의 원고를 1학년이나 2학년들에게 부탁하게 되었고, 나는 동아리방에 고개를 내미는 빈도가 줄었다. 그 무렵부터 이상하게 교실에서도 아이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취재를 하다 보니 남들과 이야기할 때 느끼던 거북함이 많이 사라져 이제는 상대의 얼굴도 볼 수 있었고,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할 수도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상대가 늘자 반이 다른 사이토 로빈슨과는 소원해지고 말았다.
- 역 앞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일하면서 돌아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잘 못하는 수학 문제를 풀거나, 2차 창작소설에 쓸 자료를 보는 사이 여름이 지나갔다. 아르바이트 가게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게임 이야기는 누구 하고도 통하지 않았다. 점장 아저씨가 취미를 물었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하자 "허, 의외네"라는 표정을 지었다.
- "무슨 뜻인가요?"
"너 같은 아이가 오타쿠라니 이미지가 너무 달라서. 아니, 뭐, 나도 오타쿠에게 편견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그렇게 다른가요?"
-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게임 이야기가 통하지 않으면 예전에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 거북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다양한 장르의 화제를 따라갈 수 있었다. 요리나 패션 이야기, 서양의 거리와 건축물, 역사, 신화에 대한 일화 등 집필을 위해 얻은 지식이 도움이 되었다. 아르바이트 가게에서 만난 다른 고등학교 여학생과 문자를 주고받게 되었고 휴일에 함께 놀기도 했다.
- "나하고 사귀자."
아르바이트 가게의 대학생 선배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일을 마치고 가게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이 같아서 나란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람에 손가락이 꽁꽁 얼어 발그스름했다.
대답은 미루고 그날은 집으로 돌아와 욕조 물에 몸을 담그고 고민했다. 내가 욕실에서 너무 오랫동안 나오지 않자 어머니가 걱정한 나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러 왔다. 욕조에서 나와 탈의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 모습이 지금 어떤지 관찰했다. 달아오른 뺨이 새빨갰다.
- 남들에게 사랑받는 데 필요한 이유. 자의적으로 남들이 호의를 베푸는 전개가 되지 않도록, 사랑받을 이유를 확실하게 설정해 묘사할 것.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마련한 이유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세계에서 클리어했다는 말일까? 선배와는 휴식 시간에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 음악 CD를 빌려주기도 했고, 문자도 주고받았다. 선배 시점으로 인물을 묘사한다면 그런 소소한 일상의 장면들이 연애 감정이 싹트는 동기로 즉 연애 발생 이벤트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 나는 선배와 교제를 시작했다. 선배에게 입시 과외를 받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갔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지만 선배와의 관계는 순조로웠다. 인생의 시간이 충실하게 흘러갔다. 어느새 사이토 로빈슨과는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 성인이 되어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더는 좋아하는 캐릭터의 포스터를 향해 말을 걸고 머릿속으로 대화를 즐길 수 없었다. 그토록 심각하게, 절실하게, 영혼을 다 바쳐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과 만화, 게임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현실의 내 인생이 싫었기 때문이다. 가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마음을 지키기 위해, 좋아하는 작품 세계에 몰입했던 것이다. 메리수를 죽여가면서까지 2차 창작소설을 계속 집필했던 것도 좋아하는 작품에 보다 깊이 빠져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미 작품 세계로 달아나고 싶다는 욕구는 쏙 사라졌다. 현실 세계에서 행복해질수록 2차 창작소설을 집필할 의욕을 잃었다. 내게는 현실의 영역이 있고 거기서 생활하고 살아가며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만 남았다. 어쩌면 그것이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마니악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이제는 최신 게임 정보도 잘 모르고, 좋아하는 브랜드의 최신작을 체크하지도 않는다. 요리학원에는 가지만 그것은 신부 수업 성격이 강해, 그토록 좋아했던 열혈 요리 만화의 연재가 어느새 중단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굼뜨고 호빵 같던 나는 과거의 존재가 되었다. 남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친구도 지인도 많다. 행복해질수록 내가 2차 창작소설을 썼다는 기억을 잊어갔다.
- 대학교 3학년 가을, 어느 맑은 날이었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여자들끼리 모여 차를 마시는데 "첫사랑은 어떤 사람이었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별세계 판타지 RPG에 등장한 소년 캐릭터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로 무난한 대답을 했다. 친구들은 애인하고 헤어진 이야기나, 크리스마스 전에 애인을 사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 가게에서 나왔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
- 앞에 앉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2차 창작이 아닌, 내 세계의 여행이 시작된다.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자유가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메리 수! 도와줘!
- 누군가의 세계를 빌려 소설을 썼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첫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자부심이 필요했다. 글을 쓴다는 두려움도 모르고, 무아지경으로 전진했던 옛날의 열정이.
- 나는 앞으로 자아낼 나의 세계, 아직 보지 못한 이야기가 풍요로운 결실을 맺도록 기도했다. 도중에 포기하는 일 없이 주인공들의 모험이 계속되기를. 그리고 이 집필이, 즐거운 작업이 되기를.
-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는 타이핑을 시작했다.
- <메리 수 죽이기>, 나카타 에이이치
-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내가 자살하지나 않을지, 혹은 그런 징조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여동생이 살피러 왔다. 현관 밖에서 내 얼굴을 보자마자 여동생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네, 안색이 좋아 보여."
"요새 컨디션이 좋아."
- 하지만 집에 들어온 여동생은 잔뜩 쌓인 술병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과음하는 것 아니야?"
주량이 늘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런 반면, 정신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었다. 요즘에는 집도 청소하고, 요리도 한다. 밥솥을 사고, 씻어 나온 쌀로 밥을 지어 따끈따끈한 저녁밥을 먹었다. 하지만 아침에는 여전히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밖에 없다. 밤늦도록 히카루와 트랜스시버로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 "하지만 다행이야, 오빠가 건강해 보여서."
"이젠 괜찮을 거야. 걱정 끼쳐서 미안."
여동생은 선반에 놓인 트랜스시버에 시선을 돌렸다.
"그립네, 히카루하고 자주 놀았지."
손에 들고 전원 스위치를 켜봤지만 LED 램프에 불도 들어오지 않고, 화이트노이즈도 들리지 않았다.
"건전지가 없어. 술에 취하면 히카루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내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지 여동생은 웃기만 했다.
- 그 후, 나는 회사 건강진단 결과에서 과음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슈퍼에서 일본주와 소주, 와인, 위스키를 잔뜩 사들이는 일이었다. 트랜스시버로 히카루의 환청과 대화를 나누려면 곤죽이 되도록 마셔야 했다. 눈앞이 일그러지고, 기둥이 생물의 내장처럼 꿈틀거리고, 부드러운 바닥 위에서 기우뚱한 기세로 알코올을 퍼부었다. 그리고 정신이 들면 트랜스시버의 LED가 붉어져 있는 것이다.
- "아빠는 멀리 있어서 못 해."
[... 여기로 와! ... 같이 놀자! ... 지직... ]
그 순간, 죽은 자의 말이 감미롭게 느껴졌다.
- 술에 취한 나는 평소 같으면 생각도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별 수 없네. 그럼 잠깐만 기다려."
나는 트랜스시버를 내려놓고 벽장을 열었다. 포장용 비닐끈을 꺼내 목을 매달았다.
- 거래처 회사 응접실에서 명함을 주고받았다. 가죽 소파에 걸터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젊은 사무직 여성이 다가와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케미야, 왜 그래?"
회의 상대인 남자가 차를 내온 여사원에게 물었다. 평소 같으면 찻잔을 내려놓고 바로 물러났을 텐데, 다케미야라는 여성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선이 내 목덜미에 꽂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목에 든 멍을 본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양복 옷깃에 가려지기 때문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소파에 앉아 있었던 탓에 서 있던 그녀의 눈에 띄고 말았으리라.
- 자살은 미수로 그쳤다. 목을 매달려고 끈을 건 자리가 의외로 약했다. 매달린 지 몇 초 만에 벽의 석고보드에 꽂혀 있던 고리가 빠져버린 것이다. 그 결과 목숨은 건졌지만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끈 자국이 목에 멍처럼 남아 있었다.
- 회의를 마치고 거래처 밖으로 나오자 주차장에서 누가 나를 불러 세웠다. 찻잔을 내준 젊은 여사원이 추운지 바들바들 떨면서 서 있었다.
"저..."
그녀는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초콜릿 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아무 데서나 파는 제품이었다.
"이거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 "아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녀가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목에 든 멍이 불러 세운 이유와 관계가 있을까? 자살미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걱정해 준 건지도 모른다. 초콜릿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회사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차가 출발할 때까지 그녀는 주차장에 서 있었다.
- 그 후 몇 번인가 대면했을 때 명함을 교환하고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이름은 다케미야 아키. 쑥스러운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으로 함께 술을 마셨을 때,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죽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그녀는 부모님을 그 지진으로 잃었던 것이다.
- 아파트의 내 방에 화이트노이즈가 흘러나왔다.
"엄마 거기에 있니? 바꿔줄 수 있어?"
술에 취한 나는 장난감 트랜스시버를 움켜쥐고 송신 단추를 누른 채 말했다. 트랜스시버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아들 목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
- "히카루는 거기서 평소에 뭘 해?"
[엄마하고 춤을 춰...]
언제나 이건 내 환청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픽션이고 창작된 이야기다. 하지만 정말로 죽은 자의 나라가 있고, 거기서 나쓰미와 히카루가 다른 수많은 죽은 자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이 종교를 만들고 사후 세계를 논하는 것은 소멸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종교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원동력은 죽은 자들에 대한 위안과 자애였을지도 모른다.
- 다케미야 아키와 알고 지낸 지 일 년쯤 되자 친밀한 분위기가 생겨났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친구 사이에 그쳤다. 내가 망설였다. 새로운 연인을 만들면 나쓰미와 히카루를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지진 전의 가족을 과거로 묻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그 환했던 웃음을, 나만이라도 기억해야 했다. 애인을 사귀고 나 혼자만 행복해지는 게 두 사람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다. 다케미야 아키는 나의 그런 고민을 아마 눈치챘을 것이다. 그 문제를 추궁하는 일은 없었지만.
- "저희 어머니는 후쿠시마 출신이었어요."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데 다케미야 아키가 말했다. 그 어머니의 친정이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귀환금지구역으로 지정된 동네라고 했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연간 적산 방사선량이 50밀리 시버트를 넘어, 거기서 일정 기간 머물면 인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
"그 마을에 가고 싶어도 도중에 검문을 해서 그 너머로 가지를 못해요. 거기서 차를 세우고 고향을 바라본 적도 있어요. 평범한 산길이 있을 뿐이에요. 방사성 물질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물론 육안에는 보이지 않죠."
어렸을 때 갔던 추억의 장소가 봉쇄되고 만 것이다. 앞으로도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어머니가 태어난 집이나 뛰어놀던 고향 땅은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다.
- "방사능은 참 유령 같아요."
"유령?"
"방사능이 두려워 멀리 달아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어요. 인체에 주는 피해도 명확하지 않고, 영향이 있다는 사람도 있고 없다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막연한 불안이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데, 허세를 부려 그걸 모른 척하는 사람도 있죠. '유령은 없어'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나요."
-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가사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유령은 없어요 유령은 거짓말잠이 덜 깬 사람들이 잘못 본 거랍니다 하지만 조금 그래도 조금 나도 무서운데 유령은 없어요 유령은 거짓말]
- 지진과 쓰나미의 영향으로 노심이 융해된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쏟아져 나왔다. 눈에도 보이지 않고,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막연하고 어렴풋한 불안을 끌어안은 채로 뭐 괜찮겠지, 하고 암시를 걸며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 "경계란 항상 모호해요. 각자 자기만의 현실 인식에 따라 믿는 것을 스스로 정의해갈 수밖에 없죠."
그리고 다케미야 아키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친구와 연인의 경계 역시 모호해도 되지 않을까요?"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트랜스시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환청에 대한 이야기, 히카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 죽은 자들을 잊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쭉 털어놓았다. 그녀는 웃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었다.
- 내 마음속에는 죽은 자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 두 번 다시 히카루의 환청을 들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일찍 이별을 고했어야 했다.
"이제 됐어. 고마워."
결심을 하자 눈물이 치밀었다. 그날, 가령 내가 아내와 아들 곁에 있었다면, 파도에 휩쓸려가는 두 사람의 손을 지금처럼 붙잡을 수 있었을까? 가지 말라고 외치며, 이 세상에 붙잡아둘 수 있었을까? 불길이 아키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나는 코를 훌쩍이면서 그녀를 불안하게 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높이 들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는 쪽의 사람이니까. 흩날린 불씨가 차갑게 식어 재가 되었다. 그리고 눈처럼, 우리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 아이가 태어났다. 이번에는 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한동안 잠 못 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몇 시간마다 배가 고프다고 우는 데다 기저귀도 갈아줘야 한다. 잠이 부족한 아키가 젖을 물리고, 나도 분유를 타서 젖병으로 먹였다. 딸이 아들보다 성장이 더 빠른지 아이는 어느새 일어서서 걸음마를 뗐고, 이윽고 그 시기가 찾아왔다.
"아빠! 놀자! 찌찌!"
- 그 이후의 육아는 나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딸은 기억 속 히카루의 키를 넘어섰다. 어른들이 얼굴을 찌푸릴 말도 이윽고 하지 않게 되었고, 갑자기 얌전해졌다. 딸이 중학생이 되자 나는 온전한 아저씨가 되었다. 아내와 딸은 생김새가 똑같아 자매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 어느 일요일이었다. 몇 년 전부터 키우던 개를 돌봐주고 집 안으로 들어오니 딸이 벽장을 열고 박스에서 옛날 앨범을 꺼내 바라보고 있었다. 지진 때 잃은 전처와 아들의 사진이었다. 화재 현장에서 추억의 물건을 몇 개는 회수할 수 있었다. 모두 멀쩡한 건 아니었지만 앨범이 거의 타지 않았던 건 행운이었다.
함께 쭉 살펴본 뒤에, 딸이 박스에 돌려놓으려 했다.
"아, 이거..."
딸은 그렇게 말하며 박스 안에 넣어두었던 트랜스시버를 들었다. 열 때문에 찌그러져 파란색 플라스틱은 녹아내렸고 내부 기판도 그을었다. 아파트 화재 후에 앨범과 함께 발견해 챙겨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히카루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 "있지, 아빠, 이거 망가진 거지?"
"보면 알잖니. 완전히 망가져서 못 써.”
딸은 이상하다는 듯이 트랜스시버를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송신단추를 눌러보았지만 열 때문에 플라스틱이 찌그러져 제대로 눌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 여기서 소리가 났던 것 같아. 망가진 라디오처럼. 이상한 전파를 수신했던 걸까?"
상자에 트랜스시버를 넣고 일어난 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찌찌 공주라고 그러던걸?"
- <트랜스시버>, 야마시로 아사코
- 고향집에서 차로 이십 분 떨어진 곳에 도서관이 있다. 그곳이 지금 내 직장이다. 바다 바로 옆이라 창문을 열면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 반납된 책을 카트에 싣고 책장 사이를 이동했다. 단말기로 책에 붙은 태그를 찍으면 책장 위치를 검색해 준다. 거기까지 찾아가는 길도 표시된다. 지구 자기를 이용한 매핑으로 건물 내에서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 소설 책장 부근에서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죄송하지만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책을 찾고 있는데요."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어디서 본 듯하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생김새다.
"영화감독 말인가요?"
"맞습니다."
- 남자를 안내하면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몇 편을 떠올렸다. 예전에 누가 추천해서 본 적이 있다. 그 사람 말로는 타르코프스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류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으며, 등장인물이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곧 신을 뜻한다고 했다.
- 남자는 책을 손에 들고 잠시 표지를 바라보다가 바로 책장에 돌려놓았다.
시선을 느꼈다.
남자가 나를 보고 있다.
"오노데라 씨 맞지요?"
"그렇긴 한데..."
"겨우 찾았군요, 다행입니다."
남자는 처음부터 내게 말을 거는 게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 "전 야나기하라의 친구입니다. 그를 알고 계시죠?"
남자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겁을 먹었다. 이 남자는 혹시 그 인쇄물 때문에 찾아온 걸까?
- 야나기하라 소지. 그와 사귀었던 시간은 짧았다. 상황이 달랐다면 양호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으리라. 나는 달아나듯, 고향 집이 있는 이 땅으로 돌아왔다.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것을 잊고 싶어서.
- "죽었습니다."
"네?"
"야나기하라는 죽었습니다.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 연구자가 직접 소각로를 돌리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남자가 제시한 시급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금액이었다. 나는 일을 맡기로 했다.
- 면접이 끝나고 사무실에서 선배에게 알렸다. 업무 내용에 대해 말하자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어머, 소각로?"
선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주위를 살피더니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눈길을 피하듯 책상 뒤에 숨어 말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너한테 말 안 하는 건데."
"왜요?"
"좀 그런 장소에 있거든. 외진 곳에. 그 주변에서 몇 사람 자살했어."
"네?!"
"유령이 나올지도 몰라. 소각로 옆에 연구동이라고 불리는 낡은 건물이 있어. 거기서 일하는 연구원들만 목을 매달거든. 내가 여기서 일한 뒤로 지금까지 세 명이나. 아니, 더 있을지도 몰라. 요전까지 소각로에서 일했던 사람도 갑자기 달아나듯 그만뒀고."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고 들었는데요."
"글쎄. 얘, 지금이라도 거절할 수 없을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 선배는 나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당시 나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몇 개 병행하며 소설을 쓰고 있었다. 소설이라고 하면 듣기엔 좋지만 신인상에 응모해도 1차 심사도 통과할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아르바이트로 먹고사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 수입이 불안정해서 식비를 절약해야 했다. 집에서 혼자 파스타를 삶아 먹는 날이 이어졌다. 돈이 있으면 일할 시간에 소설을 집필할 수 있다. 돈이 있으면 탐났던 자료를 살 수 있다. 취재 여행도 갈 수 있다. 나는 유럽을 무대로 한 역사소설을 벌써 몇 년째 구상하고 있었다. 그걸 완성하는 게 소원이라고 할 만큼 정성을 쏟고 있다. 하지만 나는 유럽에 실제로 가본 적이 없었다. 수중에 목돈이 있으면 동경했던 곳에 가서 실컷 취재할 수 있을 텐데.
- 아르바이트 첫날, 나는 가방에 삼각김밥을 넣고 집을 나섰다. 유모차를 미는 젊은 어머니가 지나갔다. 아기는 온순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와는 인연이 없는 이야기다. 내 몸과는, 이라고 해야 할까.
- 연구소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수위에게 찾아온 이유를 알렸다. 본관에 들어가 선배와 인사를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에 낯선 여성이 나타났다. 화장기는 없었지만 이목구비가 아름다웠다.
"오노데라 씨 맞죠? 잘 부탁해요, 전 나스카와예요. 작업 순서를 가르쳐주려고 왔어요. 그럼 당장 가봅시다."
"예."
어디로 가는지 잘 몰랐지만 일단 대답했다.
- 유적 같기도 하고, 요새 같기도 했다. 언뜻 보면 단순한 네모상자지만.
입구는 자동개폐식 셔터 구조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휑한 공간이 펼쳐졌다. 사방이 편평한 벽이었다. 겨울철에는 분명 얼음장이겠지. 지금이 따뜻한 계절이라 다행이다. 검댕은 보이지 않았고 매캐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소각로라기보다 교회 같았다. 규모는 다르지만 단게 겐조(일본의 전통적 감성과 서구의 모더니즘을 조화롭게 결합해 현대 일본 건축의 기초를 확립한 건축가로 1987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가 만든 '도쿄 커시드럴 성 마리아 대성당'을 연상케 하는 엄숙한 공간이었다.
- 안쪽 벽에 주철로 만든 묵직한 소각로 문이 있었다. 나스카와가 앞쪽에 붙어 있는 가동식 선반에 손을 얹었다.
"여기로 운반되는 상자를 이 자리에 놓고 제어판을 조작하세요. 문이 열리면 상자를 소각로에 밀어 넣는 거예요."
제어판은 소각로 문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 조작 설명서가 놓여 있다. 나스카와에게 조작법을 배우면서 소각로를 작동시켜 보았다. 불이 붙자 벽 안쪽에서 기계가 돌아가면서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소각로 안을 확인할 수 있는 구멍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열은 소각로 문과 벽이 대부분 차단해 주어 문이 살짝 따끈해지는 정도로 그쳤다.
- "상자를 태우면 되는 거지요?"
"그래요. 상자에는 실험 폐기물이 들어 있습니다."
"위험한 약품 같은 건가요?"
"아니에요. 안심하세요. 태워도 유해한 가스는 나오지 않아요."
나스카와가 소각로 문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그녀의 눈은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 기묘한 업무였다. 작업량에 비해 보수가 너무 많았다. 내가 미안할 만큼의 금액이 계좌에 들어왔다.
- 소각로 건물 내부 구조는 휑해서 나무 의자와 작은 책상이 전부였다. 셔터를 열면 푸르른 바깥 풍경이 가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입구를 가득 채웠다. 하루에 한 번, 그곳으로 상자가 들어온다.
상자는 플라스틱 직육면체로 색은 회색, 여행용 트렁크 같은 디자인으로 크기도 꼭 그만했다. 플라스틱이지만 튼튼한 구조였다. 덮개는 개봉하지 못하도록 접착제 같은 걸로 고정되어 있었다. 내용물을 꺼내지 않고 상자째로 소각 처분하라고 했다.
- 상자를 선반에 올려놓고 제어판을 조작했다. 주철로 된 소각로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위쪽으로 밀려 올라가면 소각로 내부 공간이 눈앞에서 쩍 입을 벌린다. 별로 크지는 않다. 관이 하나 들어갈 만한 폭과 높이, 깊이였다. 바닥에는 불길이 나오는 구멍이 쭉 뚫려 있고, 찌꺼기를 받는 홈이 파여 있다. 불이 들어가기 전의 소각로 내부는 서늘하다. 당연하지만.
- 상자를 밀어 넣으면 나머지는 기계가 알아서 해주었다. 소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책을 읽어도 되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써도 된다. 열기는 차단되어 있고 연기도 굴뚝으로 나가기 때문에 소각로 앞의 엄숙한 공간은 의외로 쾌적했다. 다만 화장실 설비가 없어서 벽돌 포장길을 빠져나가 본관까지 가야 했다. 본관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맛이 끔찍했다. 밥은 질고 된장국은 싱거웠다. 연구소에서는 식사에 관한 연구는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 저녁이 되면 소각로 셔터를 내리고 사무실 선배에게 열쇠를 반납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늘 의아했다. 이 정도 일이라면 굳이 사람을 쓸 것 없이 연구원 아무나 맡아도 될 텐데.
- 소각로 옆에 있는 오래된 연구동에는 다가가지 않았다. 그곳에 출입하는 연구원은 언제나 신경이 곤두서 있어, 연구동 근처에서 나와 마주치면 언제나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자는 그들의 연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야나기하라 소지 역시 거기서 일하는 일원이었다.
야나기하라 소지는 표정이 거의 없었다. 눈은 움푹 들어갔고,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였는데 실험 폐기물을 소각로까지 운반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역할이었다.
- "전자서적 시대에도 소설 퇴고는 종이로 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편이 머리에 잘 들어오거든. 텍스트 데이터로만 된 소설이라니 육체가 없는 인간하고 비슷하지 않아? 그건 작가의 영혼에서 나온 유전 정보일 뿐이야. 인간에게 육체가 필요한 것처럼, 종이책도 사라질 일은 없지 않을까? 재고 관리나 서점 책꽂이가 부족하다는 문제는 남겠지만."
"그럼 책도 3D 프린터로 만들면 될 텐데."
- 그의 제안을 풀어 말하면 이러하다. 자택에 제본용 3D 프린터와 책의 재료를 보관해 두고 읽고 싶은 책의 데이터를 다운로드한다. 전자책처럼 텍스트만 담긴 데이터가 아니라 장정이나 재질 등 단행본을 구성하는 모든 정보가 담긴 데이터다. 그것을 3D 프린터로 출력한다. 펄프 입자나 그와 비슷한 재료를 차곡차곡 겹쳐 활자가 인쇄된 종이로 묶은 책을 집 안에서 손쉽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 방법이라면 공장 생산으로는 실현할 수 없었던 복잡한 장정도 가능해진다. 전자서적과는 달리 묵직한 책으로 수중에 남을 것이다.
- "그런 것도 가능해?"
"인간이 상상한 건 전부 실현할 수 있어."
야나기하라 소지는 소위 말하는 3D 프린터 맹신자였다. 모든 제품을 3D 프린터와 연결해 미래를 상상한다.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인쇄라는 단어가 폭주해서 개념이 변형된다. 그 무렵, 나는 행복했 ...
- 야나기하라 소지는 나를 얼마나 좋아했을까? 울창한 숲 속에 흰 가운을 입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인상에 남아 있다. 휴일에 그는 종종 스케치를 했다. 어릴 때 꿈이 화가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는 어딘가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닮았다. 자기 귀를 면도칼로 잘라내 창부에게 선물한 남자의 자화상을.
- "언젠가 함께 독일에 여행 가자."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응, 좋겠다. 유럽으로 취재 여행 가는 게 꿈이야. 그런데 왜 독일이야?"
"독일 미술관에 고흐의 귀가 전시되어 있대."
"귀? 진짜는 아니겠지?"
"어떤 의미로는 진짜 귀야. 고흐의 친족이 생체 세포를 제공했다나 봐. 세포를 배양해서 3D 프린터로 귀를 만들어냈대."
- 고흐의 귀는 유리 케이스 속 배양액에 담긴 상태로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 앞에는 마이크가 있어 방문객은 고흐의 귀에 말을 걸 수도 있다. 컴퓨터가 실시간으로 목소리를 신경 자극으로 변환해 배양액에 담긴 귀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 주 : 미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독일 여성 예술가 디무트 슈트레베 씨가 고흐의 타액과 연골 샘플을 제공받아 3D 프린터를 이용해 약 삼 년에 걸쳐 완성했다. 프로젝트명은 슈거베이브 sugababe, 고흐의 샘플은 고흐의 남동생 테오도르(1857-1891년)의 고손자 리베 반 고흐 씨가 보존해 두었던 것을 제공받았다.
- 약간 오싹하면서도 낭만적이었다. 고독한 화가가 광기 끝에 잘라낸 귀는 비애의 상징이다. 그것을 복원해 말을 걸어주면, 그의 고독도 치유될지 모른다.
- 죽음의 고독.
영혼의 고독.
그는 그런 생각을 얼마나 했던 걸까.
어쩌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는 알 길이 없다.
- 나는 몇 번이나 야나기하라 소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각로의 차가운 벽면 활짝 열린 셔터 입구. 젖은 나무들의 음울한 빛깔, 한참 지나서야 연락이 닿았다. 우산을 쓰고 나타난 그는 바닥에 방치된 상자에 시선을 던지고, 주저앉아 있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일어나 뒷걸음질을 치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해줘, 상자 속에 뭐가 들어 있는 거야? 난 지금까지 뭘 태웠던 거야?"
"오노데라 씨, 왜 그래?"
"목소리가 들렸어. 상자 속에서 갓난아기 같은."
"목소리?"
그는 상자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귀를 댔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들리는데."
"아까는 들렸어. 아마 질식해서 이미..."
- 연구동에서는 밤새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밤에는 건물 안에 한두 명밖에 남지 않는다. Y는 소각로 셔터를 닫은 후에 수풀 속에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려 연구동으로 향했다. 카드키를 대자 정면 입구 잠금장치가 해제되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창문 개수만 봤을 때는 3층짜리 건물인 줄 알았는데, 내부는 바닥이 깊게 파여 있고 중앙은 위쪽까지 뻥 뚫린 로비 구조였다. 무수한 케이블이 바닥에 뻗어 있고 기둥 사이에 컴퓨터가 몇 대나 늘어서 있었다. 하얀 가운 차림의 연구원이 로비 중앙 부근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약품 냄새가 자욱했다. 코를 찌르는 자극적인 냄새, 달착지근한 냄새, 동시에 시큼한 냄새까지, 다양한 약품 냄새가 혼연일체로 뒤섞여 있었다.
- 사각형 유리 수조가 있었다. 사람이 서서 헤엄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수조가 받침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있었는데, 주위를 에워싼 금속제 기계 팔이 마치 왕좌를 지키는 호위병처럼 보였다고 한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계 팔이 수조 속에 끝부분을 담그고 있었다. 흘러넘친 물이 수조를 타고 바닥 배수구로 흘러들어 갔다. 물은 옅은 주황색이었다. 공기가 뜨뜻했다.
- 첨벙, 첨벙...
Y는 수조에 떠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침입 사실을 들켰다. 그가 지른 비명 때문이었다. 목소리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 카페에서 마주 보고 앉은 Y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수조에서 끔찍한 것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고. 그것은 살아있었고, 크기는 꼭 갓난아기만 했다.
- Y를 발견한 연구원들은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 진정제 주사를 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업무상 스트레스와 업무 시간에 짬짬이 몰래 섭취한 알코올 때문에 환각을 보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소각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술을 마셨던 것이다. Y는 일을 그만두었지만 통장에는 넉넉한 보수가 입금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일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잠자코 있는 편이 나은 사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커피 값은 내가 냈다. Y와 헤어진 나는 망연자실했다.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역으로 향하는 길에 생각났는데, 그러고 보니 상자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 깜빡했다. Y가 연구동에서 본, 수조에 떠 있던 '그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혹은 그가 본 것은 정말로 환각이고, 내가 들은 목소리도 환청이었던 건 아닐까? 그 소각로에는 악몽을 보여주는 성분이 가득해서 그곳에 오래 있으면 꿈인지 생시인지 혼미해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연구원들에게는 소각로 일을 시키지 않고 일부러 외부에서 상관없는 사람을 고용하는 게 아닐까? 정신없이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 <어느 인쇄물의 행방>, 야마시로 아사코
- "전화기가 있는 곳까지 태워줄까?"
"그럼 고맙지."
나는 그녀의 차에 올라탔다.
- "오랜만에 듣는 곡이네."
"그러게 진짜.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 자주 나왔는데."
아버지의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곡을 하염없이 들었던 적이 있다. 둘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가 카페에서 전화를 빌려 가게에 연락했다. 그리고 우리는 커피 한 잔만큼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파란만장한 만남에 감사했다. 몇 번의 식사를 거쳐 그녀와 연인이 되었고, 딱히 심각하게 싸워본 적도 없이 현재에 이른다. 조만간 결혼해서 아이라도 갖지 않을까, 그런 어렴풋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언감생심 결혼이라는 말은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내 박봉으로 과연 그녀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 그보다 에바의 겁 없는 성격이 걱정이다. 처음 보는 나 같은 남자를 뒷자리에 태우다니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만약 내가 갑자기 권총을 꺼내 운전 중인 그녀의 관자놀이에 들이대면 어쩔 셈이었을까? 바지 벨트를 풀어 그녀의 목에 휘감고 "시키는 대로 해"라고 협박하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더 가까워진 후에 나는 그녀에게 충고했다. 너는 조금 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고, 위험한 일에는 끼어들지 말고 그냥 지나쳐야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천사 같은 얼굴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내가 그런 성격이었으면 당신하고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나는 성선설을 믿어. 이 세상에 꼭 악인만 있는 건 아니야."
- 그런 부분에 이끌렸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남들에게 배신당하는 삶을 살아왔다. 부모, 친구, 옛 연인, 모두 나를 착취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다들 그런 법이라고 포기하고 어른이 된 탓에 무구한 소망과도 닮은 에바의 세계관은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누구도 짓밟게 해서는 안 되며, 언제까지나 순백 그대로 지켜주고 싶었다.
- 지인의 소개로 삼류 출판사 잡지 기자로 일하게 된 내 수입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래도 전직을 결심한 것은 출판이라는 세계를 동경했기 때문이리라. 상사의 명령으로 억지로 쓴 내 기사는 쓰레기 같았고, 쓰레기 같은 잡지에 실렸지만 에바는 활자로 된 내 문장을 소중히 잘라내 스크랩했다. 우리는 서로의 아파트를 오가며 생활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번스타인 가 노부부의 죽음에 대한 묘한 소문을 들었다.
- 이 도시에서 제임스 번스타인이라는 노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아원에서 자란 그는 부모 얼굴도 모른 채 아코디언 연주자로 십 대 시절을 보냈고, 유랑 서커스 악단에 들어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 아버지라는 남자가 나타나 그를 가난의 늪에서 끌어내고 막대한 자산을 물려주었다. 그는 유서 깊은 번스타인가의 혼외자였던 것이다.
- 수학자와도 같은 주름이 얼굴에 새겨졌다.
"나는 당장 전화기를 붙들고 경찰을 부르려 했네. 그 순간, 대마초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내 안의 이성이 그걸 신고해야 한다고 호소했지."
하지만 경찰에 신고하려던 행동은 그의 형에게 저지당했다. 알렉산드르 케인은 동생과 통화한 후에 식물원으로 쏜살같이 차를 몰았던 것이다. 신고 직전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동생이 쥐고 있는 수화기를 낚아챘다고 한다.
"형님은 번스타인 가의 추문을 퍼뜨릴 생각이 없었어. 그걸 일시적으로 식물원 창고에 보관했다가 번잡한 일들이 정리되면 불태워 재로 만들 예정이었지. 권총으로 자살한 사모님이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고 생각하네. 그걸 보고 나서도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 했던 형님은 집사의 귀감이야. 원래 동생인 내게도 말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지만 내가 멋대로 상자를 열어버린 탓에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을 게야."
-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지. 뭐가 들어 있었던 거야?"
"아코디언이었네."
"아코디언?"
"그게 유품의 정체였어. 그 밖에도 흉측한 사진이나 레코드, 서커스 전단지 따위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건 악기야."
- 그는 형 알렉산드르와 번스타인 부인이 그걸 발견한 경위를 말해주었다. 남편이 폐암으로 사망한 후, 번스타인 부인은 언제까지고 비탄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막대한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발견했다. 제임스 번스타인의 서재 벽장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고 뒷면의 판자를 떼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 그곳에는 제법 버젓한 창고 크기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취미로 모은 수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가령 이 세상의 추악함을 응축한 듯한 사진. 그것만으로도 제임스 번스타인의 변태적인 측면을 알 수 있는 물건들. 기묘한 아코디언은 그 수집품들 한복판에 장식되어 있었다. 인간의 뼈와 목제 부품이 얽혀 있고 풀무 부분에는 인간의 피부로 짐작되는 가죽이 붙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고급 앤틱 목제 가구 같은 분위기가 풍겼지만 자세히 보면 장식 부분에 인간의 치아가 박혀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케인은 그 물건들을 나무 상자에 담아 빼돌렸다. 하지만 처분하기 전에 케인 부인은 권총으로 자살하고 동생은 멋대로 덮개를 열어 그것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군, 그런 게 정말 있단 말이야? 환각 아닌가?"
"정말 있었어. 그걸 만져도 보았고, 품에 안아보기도 했네. 묘하게도 은근히 따스하고 마치 피가 통하는 것처럼 보드라웠어. 품에 안고 있으면 웅크린 아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네."
"아코디언에 바른 가죽이 인간의 피부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돼지 가죽이었을지도 모르잖나?"
"알 수 있었어. 머리카락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터럭도 늘어져 있었거든.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였지. 여러 부위의 피부를 기워서 아코디언의 일부를 만든 게야. 그뿐인 줄 아나? 나는 시험 삼아 그걸 연주해 봤어. 뼈를 깎아 만든 건반을 누르고, 풀무를 접었다 펴서 공기를 보내보았지."
- 인체 부위를 그러모아 만들었다는 아코디언은 인간의 목소리와 흡사한 소리를 냈다고 한다. 마치 소년의 목소리 같았다고 했다. 풀무에 사용된 피부의 이음매에 공기가 새어나가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그는 그 구멍으로 내부를 들여다보았는데, 안에는 마치 인간의 몸속처럼 촉촉한 살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아코디언 내부에도 인체 부위를 사용했고, 잘린 후두나 성대를 이어 붙여 부품으로 썼을 것이다. 공기가 그곳을 통과하면서 소년의 목소리와 흡사한 소리를 낸 것이다.
- "오랫동안 보관했다면 말라붙어서 미라처럼 변했을 텐데?"
"맞아.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아코디언은 살아있는 것만 같았어. 악기로 만들어진 후에도 여전히 가까스로 살아있는 인간 그 자체처럼 말이네. 내부를 들여다보았을 때는 마치 생물의 배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었어."
-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기다렸다. 눈앞의 남자가 어깨를 움츠리며 "농담일세"라고 말하는 순간을. 하지만 빌 케인은 깊은 주름을 얼굴에 새긴 채로 잠시 침묵했다. 재떨이에 내려놓은 파이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온실의 식물들이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었다.
- "그러지 말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똑바로 좀 알려줄 수 없나?"
식물원 관리인은 집게손가락을 세워 내 말을 막았다.
"쉿. 음악이야. 들어보게."
회전하는 레코드판을 둘이서 바라보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현악기 음색에 갑자기 사람 신음 소리 같은 소리가 묻어 나왔다.
- "이 레코드는 뭔가?"
"어르신의 유품 하나를 빼돌렸지. 인체 악기 연주회 콘서트를 수록한 거라나.이건 내 상상이지만 이 소리를 내는 악기에도 인체 부위가 사용되지 않았을까?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 죽지 못해 살아있는 신세일 테지. 그걸 연주할 때 악기들이 드물게 목소리를 내는 거야. 지금 저것도 악기가 어쩌다 깨어나 자기네 처지를 깨닫고 공포와 쾌락에 몸을 뒤트는 소리인 거라네."
그는 대마초 연기를 빨아들였다. 표정이 헤벌쭉 누그러지면서 입가에 침이 흘러내렸다.
- "아코디언은 그 후로 어찌 됐지?"
"형님이 처분했지. 가솔린을 끼얹고 태워버렸어. 사람이 타는 냄새가 풍겼지. 뜨거운 공기가 악기 안쪽을 빠져나가니 비명 같은 소리가 나더군. 잿더미 속에는 사람 뼈가 있었는데 형님은 그걸 주워 모아 어디론가 사라졌어. 바다에 내다 버린 것 아닐까? 형님은 이제 이 도시에는 돌아오지 않겠지. 그런 예감이 들어."
"불에 태운 건 아코디언뿐이었나?"
"번스타인 가에 명예롭지 못한 것들 전부. 하지만 남아 있는 것도 ... "
- 봉투에 들러붙은 붉은색 봉랍을 돋보기로 관찰해 보았다. 고맙게도 봉랍은 깨지지 않아 봉함인의 문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봉함인에는 발신인의 가문을 나타내는 문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것을 베껴두기로 했다. 문득 봉랍 문장이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서 보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비슷한 로고 마크를 쓰는 기업이 있어 무의식 중에 그 간판을 보았는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번스타인 부부가 살던 저택에 들어가 취미의 수집품이 숨겨져 있던 장소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아마도 나 같은 정체 모를 인간에게는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문전박대를 당할 게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초대장에 적혀 있는 콘서트 개최 장소에 가보기로 했다. 근처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옛날에 거기서 어떤 콘서트가 열렸는지 묻다 보면 뭔가 정보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떤 장소이고 어떤 지역인지 보는 것만으로도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인물상을 그려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봉함인의 문장을 가문으로 쓰는 집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 음악 콘서트가 열렸던 동네를 지도로 찾았다. 자동차로 사흘쯤 걸리는 거리였다. 에바 마리 크로스에게 한동안 집을 비울 거라고 전하고, 나는 면식이 있는 쓰레기 출판사의 쓰레기 잡지 편집부로 향했다. 편집장을 붙들고 제임스 번스타인에 관한 스캔들 기사를 쓰고 싶으니 취재비를 달라고 부탁했다. 대답은 '노'였다.
- 제임스 번스타인이 초대장을 받은 건 언제였을까? 누런 편지지 색으로 보아 한참 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이 초대장으로 문턱을 넘을 수 있다니, 그에게는 영원히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초대받을 권리가 있었다는 뜻일까?
- 가까이서 저택을 올려다보니 귀족의 성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관에도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지만 제임스 번스타인의 초대장을 보여주자 육중한 문이 열렸다. 불빛이 새어 나와 현관 밖에 빛의 띠를 드리웠다. 입구에서 검은색 외투와 가면을 받았다. 가면은 은색이었는데 디자인이 우는 표정이었다. 이 장소에서는 이게 정장인 듯했다.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얼굴과 복장을 완전히 감추면 제임스 번스타인을 사칭해도 들킬 리 없고 쫓겨날 염려도 없다. 나는 외투를 몸에 두르고 가면으로 얼굴을 덮었다.
- 실내로 들어가자 향 냄새가 넘실거렸다.
교회처럼 생긴 높은 천장 부근에 닿을 만큼 연기가 자욱하게 껴있었다. 후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바로 옆에 부패한 시체가 있다 해도 냄새로 알아차리지는 못할 것 같았다. 벽에 촛대가 늘어서 있어 양초의 불빛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환상적으로 비추었다. 손님들은 다들 가면에 검은색 외투 차림이었다. 가면 디자인은 저마다 달랐다. 웃는 표정도 있고, 화난 표정도 있었다. 코끼리 머리를 본뜬 것도 있는가 하면 사자 머리를 흉내 낸 것도 있었다. 미치광이 예술가가 만들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형상의 가면도 있는가 하면 색색의 나비를 핀으로 꽂아둔 듯한 가면도 있었다.
- 속닥속닥 이야기하는 손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내가 모르는 언어였다. 붉고 짙은 와인이 나왔다. 손님들은 글라스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는 순간에만 가면을 살짝 들어 올려 턱 언저리를 드러냈다. 입술에 청보라색을 바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하얗게 처바른 사람도 있다. 귀부인 무리도 보였다. 가면 대신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천에는 금은 자수로 새긴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있었다.
- 이들은 대체 정체가 뭘까? 제임스 번스타인도 이 비밀 클럽의 일원이었을까? 손님들을 관찰하면서 나는 저택 안으로 향했다. 나중에 글로 쓰려면 제대로 보고 들어둬야 한다. 나는 이곳에서 제임스 번스타인의 스캔들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고 그 증거를 파악해야만 한다. 대부호가 부인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인생의 측면이 이 저택에 숨어 있을 터였다.
- 궁전처럼 호사스러운 방이 줄지어 있었다. 걸려 있는 그림의 액자나 설치된 소파는 고딕풍의 장식을 두르고 있었다. 그것들에 정신을 빼앗기며 돌아다니다가 염소 가면을 쓴 남자에게 부딪치고 말았다.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조심하세요."
대답은 귀에 익은 영어였다. 국영방송 아나운서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이는 제법 있어 보였다. 목소리가 주는 느낌으로 그렇게 판단했다. 검은색 외투에 감싸인 몸은 말랐지만 키는 나보다 컸다.
- 불빛에 반사되어 사람들의 가면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출입구 문이 닫히자 이야기를 나누던 목소리가 잦아들며 기이한 정적에 감싸였다.
막이 걷히기 시작했다. 그 저편에는 이미 악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기묘한 악단이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악기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데 시간이 걸렸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나서야 겨우 그것이 악기라는 기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이해했다.
나는 동요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면 속에서 애써 목소리를 삼켰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꼼짝도 않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달콤한 냄새를 머금은 향의 연기는 무르익어 썩어버린 과일을 상상하게 했다. 연기 속에서 지휘봉을 든 남자가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금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가 지휘봉을 휘두르자 음악이 시작되었다.
- 먼저 베이스 드럼이 울려 퍼졌다. 하늘에 먹구름이 퍼지는 것처럼 불온한 저음이었다. 베이스 드럼은 양쪽에 가죽을 바른 커다란 북이다. 베이스 드럼을 얹은 받침대는 하얀색이었는데 모양이 울퉁불퉁했다. 유심히 보니 두 사람 몫의 뼈였다. 어린애만 한 크기였는데 살아있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엉켜서, 베이스 드럼이 쓰러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받치는 형태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취향의 디자인인 것이다. 하지만 저것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뼈가 틀림없다. 북에 바른 가죽이 멀리서도 인간의 피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인체에서 벗겨내 팽팽하게 편 가죽이 베이스 드럼의 거대한 원통에 붙어 있었다. 인체였을 무렵의 흔적이 표면에는 요철로 남아 있었다. 가슴이나 배, 배꼽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희미하게 베이스 드럼 가운데 쪽에 무늬처럼 떠올라 있다. 바느질한 자리도 없는데, 인간의 피부가 저토록 깔끔하게 벗겨지는 것일까? 그것은 베이스 드럼을 받치고 있는 두 사람의 피부가 분명했다. 양쪽에 각자의 피부를 바른 베이스 드럼을 직접 받치고 있는 것이다. 연주자는 베이스 드럼에 발린 피부의 중심을 향해 채를 휘둘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고통을 주려는 듯이.
- 관악기의 음색이 베이스 드럼의 저음 너머에서 피어올랐다. 장엄한 빛이 먹구름을 가르고 지상에 쏟아지는 것처럼. 관악기는 크고 작은 악기가 여러 종류나 되었다. 사람 뼈를 조립해서 만든 것도 있는가 하면, 피부와 내장을 이어 붙이고 금속을 덧발라 굳힌 것도 있었다. 얼굴을 위쪽 절반만 가면으로 가린 연주자들이 그 악기들에 입술을 대고 숨을 불어넣었다. 악기 안쪽에서 공기가 메아리쳐 음색을 이루었다.
- 개중에서도 눈길을 끈 관악기는 잘라낸 머리에 구멍을 여러 개 뚫어 오카리나로 만든 것이었다. 보아하니 머리를 덮은 피부는 건드리지 않고 속만 빼낸 것 같았다. 공기가 멋대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눈과 입은 바느질로 막아버렸다. 그것이 여자의 머리임을 안 것은 긴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연주자는 목 위쪽만 남은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품에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가르며 머리 구멍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과거에 뇌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에서 공기가 메아리치며 소리가 태어났다. 그 음색은 때로는 깜찍하고, 때로는 고혹적이었다. 머리가 오카리나로 변한 그 여인이 자기를 연주해 주는 연주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 현악기의 음색이 음악을 운명적으로 채색했다. 개중에서도 바이올린 음색을 자아내는 악기에 강하게 끌렸다. 다른 악기와 마찬가지로 인체를 재료로 썼다. 하지만 어떻게 처리한 건지, 피부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탐스러웠다. 바이올린으로 가공한 것은 아름다운 소녀였다. 목구멍부터 아랫배까지 세로로 죽 찢겨 있었는데 내장은 통째로 덜어낸 것 같았다. 몸에 여러 개의 쐐기를 박아 현을 걸어놓았다. 연주자는 소녀를 품에 안고 애무하듯 활을 그었다. 현의 진동은 몸속에서 메아리쳐 음색으로 변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때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떤 의학적 처리를 한 건지, 소녀는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니었다. 반쯤 뜬 눈꺼풀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은 멍했고 꽃봉오리 같은 입술이 명료한 언어를 자아내는 일은 없지만 소녀의 것으로 짐작되는 희미한 신음 소리가 바이올린 음색에 섞여 있었다. 그 목소리는 현의 진동이 쐐기에서 허리뼈를 타고 소리를 자아낼 때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저 상태로 생명 활동이 지속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혹시 끄집어낸 내장을 대신하는 기계가 뒤에 있어 튜브 같은 걸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기계는 보이지 않았다. 바이올린 소녀가 자아내는 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뒤흔들어 미칠 듯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 음색을 들은 적이 있다. 식물원 온실에서 빌 케인이 대마초를 피우면서 들었던 레코드다.
- 기묘한 악단의 연주가 얼마나 오랜 시간 계속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꿈속의 인생과 마찬가지다. 영원 같기도 하고 찰나 같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악몽 같은 연주회에 흠뻑 빠져 있었다. 공포심은 마비되었고 음악이 종반에 이르자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마지막 소리가 회장에서 사라지자 정적 끝에 가면의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내 옆에 있던 염소 가면을 쓴 남자가 내 귓가에 가면을 들이대며 말을 걸었다.
"훌륭한 연주였어요."
"아아, 정말이야."
- 막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흉측한 인체 악기들은 연주자와 함께 장막 저편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박수는 그칠 줄을 몰랐다. 북새통속에서 염소 가면을 쓴 남자가 말했다.
"그럼 가시죠. 당신에게는 특별한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제임스번스타인 님."
나는 박수를 멈췄다. 남자가 들으란 듯이 다시 말했다.
"아니, 당신은 아니지. 남의 초대장으로 몰래 들어온 자는 벌을 받아야지요."
"무슨 소리야?"
내가 침입자라는 사실을 들킬 만한 실수를 했던가? 남자가 와락 손을 뻗어 내 울상 가면을 벗겨냈다. 주위에 있던 관객들이 맨얼굴이 드러난 나를 돌아보았다.
이 자리에 머무는 건 위험하다. 나는 달아났다. 외투를 걸친 사람들을 헤치며 회장 밖으로 나갔다. 호화로운 방을 빠져나가 출구를 찾았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과 몇 번이나 부딪쳤다. 그때마다 가면 쓴 얼굴이 나를 쳐다보았다. 염소 가면을 쓴 남자가 쫓아오는 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침입자가 있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간신히 다다른 현관 앞에서 나는 가면 쓴 남자들에게 붙들렸다.
- 실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머리에 검은 천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자에 묶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게 정체를 물으며 거래를 제안한 것은 염소 가면을 쓴 남자였다.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그때마다 뒤집어쓴 천이 부풀어 올랐다.
"이 저택의 주인님은 너그러운 분이십니다. 조건부로 당신을 풀어주겠노라 약속하셨지요. 만약 당신이 그 조건을 거부하면 상상도 못 할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죽지도 못하는 영원한 고통이지요."
그 조건의 내용이 뭔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위액이 울컥 올라와 토하고 말았다. 토사물은 천 안쪽을 엉망으로 더럽히고 목을 타고 가슴에서 배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염소 가면을 쓴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사랑을 바치는 겁니다. 나쁜 거래는 아닙니다. 조건을 받아들이고 평안을 찾도록 해요."
- 무슨 뜻이지? 사랑을 바치라니? 어쨌거나 나는 공포에서 달아나 ...
- 정보를 얻으려고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그런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괴당한 것도 아니고, 그녀가 가출해서 종적을 감춘 것도 아니다. 존재가 뿌리째 지워졌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를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다. 그녀가 살던 집에도 가보았지만 빈집이었다. 우리 집에 방치되어 있던 그녀의 옷가지도 보이지 않았다. 에바 마리 크로스의 고향 집도 찾아가 보았다. 그녀의 부모님은 전에 몇 번이나 만났는데 두 사람 다 나를 처음 본다고 했다. 딸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그녀의 모친은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부친도 마찬가지라 그녀가 어렸을 때 썼던 방은 창고로 변해 있었다. 두 사람이 막는 것도 무시하고 그녀가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증거를 찾아 가구란 가구는 모조리 뒤집어엎었지만 결국 경찰에 신고당해 연행되었다.
- 빌어먹을 편집장이 악평을 퍼뜨려 출판계에서 버티기 힘들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지저분한 일에도 손을 댔다. 일하는 짬짬이 에바 마리 크로스의 흔적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뒷모습이 비슷한 여자를 보면 쫓아가서 불러 세웠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 그녀가 일했던 카페에도 자주 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잔 주문하고 그녀가 늘 있었던 장소를 바라본다. 어느 날, 카페에 있을 때 눈에 익은 여성이 가게에 들어왔다. 에바의 대학교 친구로 고아 지원 봉사 활동을 하던 사람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의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보는 눈에서 그녀가 나를 처음 보는 사람으로 인식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에바와 함께 몇 번 점심을 ...
-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됐다. 그만하자...
- 밤이면 밤마다 술을 마셨다. 사고가 미로에 빠지면 그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대마초를 피우며 음악을 들었다. 대마초라고 하니 말인데 빌 케인을 만나러 적이 있다. 사실을 따지려고 하지만 그는 없었다. 식물원은 엉망이었고 반구형 온실도 군데군데 유리가 깨져있었다. 번스타인 가의 자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폐쇄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곧 토지도 매각하겠지. 관리자가 사라진 무인 식물원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만 무성했다. 잠시 걸어 다니다가 우연히 대마 군생지를 발견했다. 빌 케인이 재배하던 대마가 야생한 것이다. 나는 거기서 대마를 꺾어 피우기 시작했다.
- 식물원 온실로 레코드와 플레이어, 팔걸이의자를 옮겼다. 과거에 빌 케인이 그랬던 것처럼 음악을 들으며 연기를 들이마셨다. 온실을 뚫고 가지를 뻗은 나무들 사이로 연기와 음악이 넘실거렸다. 햇살이 가지 사이로 쏟아져 바닥에 얼룩무늬를 그렸다. 바람은 마치 식물들의 숨결 같았다. 모든 것이 녹아들어 하나로 어우러지는 포근한 느낌에 눈물이 치밀었다.
-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대마초를 피우려고 온실을 찾았는데 팔걸이의자 위에 꾸러미가 하나 놓여 있었다. 누가 두고 갔는지는 모르겠다. 방치된 식물원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출입한다는 것도 몰랐다. 꾸러미의 크기와 두께는 꼭 레코드판만 했다. 종이로 꼼꼼히 싸서 붉은 핏빛 밀랍으로 봉인해 놓았다. 밀랍에 찍힌 마크가 눈에 익었다. 신중하게 꾸러미를 풀어보니 레코드판이 나왔다. 라벨이 없어 뭐가 녹음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편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 음악 콘서트의 초대장이었다. '친애하는...' 내 이름이 적혀 있다. 레코드를 틀어보았다. 레코드판 표면에 살며시 내려서는 바늘은 마치 발레리나 같았다. 레코드에 녹음되어 있던 것은 현악기의 음색이었다.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선율이다. 현악기의 음색에 섞여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음 소리 같기도, 쾌락에 몸을 비트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에바 마리 크로스의 목소리임을.
- <에바 마리 크로스>, 에치젠 마타로
옮긴이의 말
작품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이따금 여러 과자가 들어 있는 종합선물세트를 받으면 무엇을 먼저 먹을까 고민하면서, 무엇을 골라도 각기 다른 맛에 놀라며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만난 건 비채 사무실에서 미나토 가나에 선생님의 <리버스>를 마감한 날이었습니다. 일도 끝났겠다 기분 전환 겸 이런 책이 있는데 한 번 읽어보겠냐는 편집장님의 말씀에 오쓰이치가 여러 명의로 스타일을 바꿔 쓴 단편집이라는 점이 흥미로워 가벼운 마음으로 들고 와서 얼마 후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어찌나 재미있는지!
일부에서 오쓰이치는 잔혹하거나 어두운 스타일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블랙 오쓰이치,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화이트 오쓰이치로 나누기도 하지만, 그 활동 영역을 살펴보면 두 종류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다양한 스타일의 보여줍니다. 특히 이 <메리 수를 죽이고>의 경우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그의 방식에 더하여 각 작품에 본인이 직접 해설을 붙여, 오쓰이치 팬에게는 정말 좋아하는 제조원의 제품으로만 이루어진 종합선물세트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창작을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탐구한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와 <메리 수를 죽이고>, 미스터리 요소를 버무린 알싸한 테이스트의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오싹한 기운이 스멀스멀 퍼지는 <어느 인쇄물의 행방>, <에바 마리 크로스>, 동일본대지진이라는 부조리하리만치 폭력적인 자연의 위력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며 작가로서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 추측되는 <트랜스시버> 등 각 작품은 전부 다른 사람이 썼다고 해도 믿을 만큼 서로 섞이지 않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