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켄 리우]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일루젼 2025. 6. 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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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켄 리우 / 장성주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2020.07.03


 

켄 리우. 

지금껏 셀 수 없이 들어왔던 이름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연이 닿지 않던 작가였다. <종이 동물원>은 몇 장 읽지 못하고 잃어버렸고 -책더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밤> 역시 셀렉트가 종료되면서 다 읽지 못했었다. 

 

아쉬움이 크게 남았더라면 어떻게든 찾아 읽었겠지만, 딱히 그럴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던 것으로 봐서 당시의 내게 켄 리우는 잘 맞지 않는 작가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처음으로 완독한 켄 리우의 책,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이 책은 왜 사람들이 '켄 리우', '켄 리우'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던 책이고 동시에 왜 내가 읽기를 멈출 수 있었는지 또한 알 수 있었던 책이다.

 

<민들레 연대기>를 읽지 않은 시점에서, 단언하기는 조심스럽지만, 현재의 내 생각에 켄 리우는 단편 호흡이 무척 잘 맞는 작가다. 그의 글은 수묵으로 그려낸 환상화와 비슷하다.

 

동서양을 가늠하기 어려운 섬세한 묘사,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감탄하게 만드는 대담함과 기발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며 차분하게 이어내는 묵색의 선.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까지 다양하고 아름답게 펼쳐낼 수 있는 작가라니.

때로는 가볍게(심신오행), 때로는 은유적으로(사랑의 알고리즘, 달을 향하여), 그리고 때로는 보다 묵직하고 직설적으로(매듭 묶기, 모든 맛을 한 그릇에 -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

 

그의 이야기 속에 녹아든 '중국'은 체험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엮어낸 SF적 상상들은 더없이 환상적이어서,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발 끝에서 하늘 끝까지를 한 번에 잇는- 땅과 하늘을 잇는 인간(人)을 노래한다.

 

이 책에 담긴 모든 단편이 동양적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배경을 짐작키 어려운 글에서조차 느껴지는 것은, '언제나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독자에게 되묻는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이지 않냐고.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것은 비단 미토콘드리아 만은 아닐 것이다.

심장의 리듬, 호흡의 리듬, 그리고 기억과 경험의 리듬까지.

아버지와 아들과는 또 다를지도 모르는 그 흐름을, 평면적으로만 묘사되어 왔던 '모성애'와는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섬세한 방식으로 보여준 켄 리우에게 감히 박수와 찬탄을 보내고 싶다.

 

저자의 다른 착품들을, 아껴가며 조금씩 읽어나가고 싶다.

내 어머니의 기억에서의 모녀처럼, 오랜 시간 동안.

           

 


   

 

저자 머리말



내가 쓰는 글은 과학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로 분류되곤 한다(가끔은 '사변 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는 장르에 들어갈 때도 있다.). 꼬리표 달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장르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더 나아가 내가 상상하는 글쓰기의 미학이 어떤 것인지에 관하여 짧게나마 밝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과학 소설이 미래를 예견하는 일과 연관이 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쪽 분야에서 과학 소설은 이제껏 별 신통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어쩌면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쓴 소설 속에서 정말로 미래를 예견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나의 관심사나 목적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심지어 (표현 자체가 변명처럼 들리는) '도래할지도 모르는 미래'에 관해서도 쓰지 않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는 대부분 의도적으로,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도래할 리 없는' 미래에 관한 것들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과학 소설이 하는 일, 또는 적어도 내가 이야기 속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오히려 희망과 공포로 가득한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 확대경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최신 경향을 토대로 추론하고 점차 흔해지는 패턴들을 상술하고 아직 덜 여문 혁신의 논리적 귀결을 제시함으로써, SF는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면면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강조하는 고성능 필터로서 기능한다. 그것도 좋은 면과 나쁜 면, 양쪽 모두를. 이른바 '사실주의' 문학에서라면 너무 당연하거나 너무 모호해서 알아보기 힘든 것들이 사변과 상상의 세계에서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변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기술 자체와 그리 다르지 않다. 기술의 본분은 인간 본성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증폭하는 것이므로.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천착한 중요한 주제 하나는 격렬한 변화 앞에서 인간으로 남고자 부단히 애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현대성은 전통을 전복하고 세상의 크기를 인지하는 인간의 감각을 뒤엎었으며, 이로써 몇 세대가 흘러도 또렷이 파악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영향력으로 우리 삶을 바꾸어 놓았다. 오늘날 개개인은 고대의 어떤 현자보다도 더 많은 정보와 지식에 접근할 수 있고, 그 결과 우리는 소비와 여가, 직업, 결혼, 자기 정체성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과거의 어느 세대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린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더 자유롭다고, 더 현명하다고, 더 인간적이라고 느낄까? 아니면 역설적이게도 과거보다 더 혼란스럽고 더 답답하다고, 더 불안하다고, 그러면서도 덜 인간적이라고 느낄까?  

 

현대성이라는 말에서는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이 난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야기에서 의식 업로드나 싱귤래리티(Singularity, 특이점), 포스트 휴머니즘 같은 소재를 많이 다룬다. 그러나 핵심만 놓고 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난날의 지혜가 설득력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선 이들은 상상도 못 했던 갖가지 선택과 직면한 시대에 한 개인이 만족스러운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 만물이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변하지 말아야 할 / 변하지 않아도 되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 전통과 정체성, 문화, 가족, 사랑(이 경우에는 다양한 형태를 모두 망라하여) 같은 것들의 가치는 무엇인가? 아니면 우리 발밑의 세상이 흔들리면서 그런 것들의 의미 자체도 변해 가는가?  

내가 쓰는 이야기가 이러한 질문의 답을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그 이야기들은 등장인물이 불완전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살아남아서 꿈꾸고자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그러한 인물이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다름 아닌 이야기 짓기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 인간이라는 종(種)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진화했다. 나는 법학 교육을 받고 변호사로 일해 온 까닭에 사실과 숫자가 인간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을 이제껏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그것은 오로지 이야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든 나라와 문화권, 도시, 마을, 직업군, 가족, 심지어 한 개인에게조차도 기원설화라는 것이 있다. 이 '자기 서사'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째서 지금의 자신이 되었는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정직'이나 '공감', '관용', '애국심' 같은 말의 의미를 사전에 실린 정의를 통해 배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린 시절에 동화를 읽으며, 또는 그런 말에 깃든 가치들을 상징하고 실천하는 영웅의 모험담을 읽으며 말의 의미를 머릿속에 새긴다(미국인이라면 ‘벚나무를 잘랐다고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고백한 조지 워싱턴' 이야기나 '영국군에게 사형당하는 순간에도 조국에 바칠 목숨이 하나뿐이라 애통했던 네이선 헤일'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윤리 강령이나 두꺼운 규정집을 읽으며 도덕적인 의사나 선량한 변호사가 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자신이 흠모하는 이들을 모방하고, 이로써 그들의 삶을 우리 스스로가 선택에 직면했을 때 이정표로 믿고 따르는 이야기로 변화시킨다.

이 같은 기원 설화가 하나의 민족을 아우를 때 '서사시'라는 이름이 붙는다(통념과 달리 서사시는 지금도 현재성을 띠고 엄연히 존재하는 예술형식이다. 예컨대 뮤지컬 <해밀턴>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의했던 <아이네이스>와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미국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 주는 미국의 서사시이다). 그러나 서사시 짓기는 개개인을 단위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적잖은 경우에 우연과 돌발의 결과이다. 누구와 결혼하는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지, 어떤 책과 시에서 오래가는 즐거움을 얻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삶을 무작위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이해할 수는 없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로 엮어 이야기를 짓고, 그 이야기에 플롯을 부여하고, 스스로가 이야기 속 인물이 되어 따라갈 성장 곡선을 창조한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가 만든 장대한 판타지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단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시간의 강을 건너가는 동안 길잡이가 되어 주기도 한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 원래 출발한 곳이 어디인지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목적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가며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지키고자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결국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셈이다. 미래를 예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삶을 이런 식으로 보는 관점에는 희망이 존재한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과 달리 우리 개개인의 사적 서사와 우리가 저마다 조국으로 여기는 나라의 국가 서사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책으로 묶이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고쳐 쓸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의 전개는 우리 상상력의 펜촉에 달려 있다. 국가는 역사라는 덫에 붙잡혀서는 안 되며(다시 말하지만 오늘날의 격렬한 정치 대립은 대부분 누가 건국 신화를 쓸 자격을 차지할 것인가, 또 시대에 뒤처진 국가 서사를 어떤 식으로 되살릴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그리고 이제껏 미래 만들기에서 배제된 이들은 바로 지금 작가 회의에 자신이 앉을 자리를 요구하는 중이다), 개개인은 단지 경험의 총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누군가 내게 이야기를 통하여 전하고 싶은 것을 단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결국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를 쓴다. 이로써 우리는 자기 운명의 저자가 된다.

나의 두 번째 한국어판 단편집을 출간해 준 황금가지 출판사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내가 쓴 이야기가 새 독자들에게 닿도록 한국어로 번역해 준 번역자에게도 감사하는 바이다. 책이 나오도록 도와준 나의 저작권 대리인 대니 배러와 해더 배러에게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쓴 책을 펼쳐 주신 한국의 모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의 이야기가 외국어로 번역되어 머나먼 나라에 사는 수많은 독자들의 손에서 또 다른 삶을 누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 언어, 문화를 넘어 쓰는 이와 읽는 이가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인간다워진다고, 저는 느낍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짓는 종(種)이니까요.

 

 





- 행동거지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 같았다.
남자는 허리를 숙이고 내게 커피를 건넸다.
"이게 필요해 보여서."
내가 본 남자의 두 손은 커다랗고 거칠거칠했다. 그 손이 얼굴에 닿는 느낌을 상상해 보았다. 사포처럼 까끌까끌한 느낌을.

 

- 고마웠다. 그 관심이, 그 친절이. 뜨겁고 쓴 커피를 홀짝거리다 보니.... 술 맛이 났다. 나는 놀라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기가 있는데."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얼빠진 사람처럼, 유아차를. 바보처럼, 우리 조그만 찰리를.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난 저 덫에 걸렸는데.

- "아기가 누구의 소유물인 건 아니잖아."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는 내 곁에 앉더니, 꼭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순 없으니까. 나는 제임스라고 해."
남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이에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너를 옭아맬 덫 같은 건 없어. 너한테는 이 길밖에 없다고 제풀에 믿어 버리지 않는 한은.

- 아직 여름이었지만, 이른 새벽의 공기는 살짝 쌀쌀했다. 찰리는 우리 부모님 집 현관의 포치 바닥에 누운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포대기로 단단히 싸매서 조그만 꾸러미 같았던 아기는 두 눈이 꼭 썰물 때의 물웅덩이처럼 반짝거렸고, 표정은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잘 있어." 나는 찰리에게 말했다. "넌 내 소유물이 아니야. 나도 네 소유물이 아니고."
부모님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돌아서서, 까만 하늘에 총총한 별들 아래로 뒷마당을 힘껏 내달려서, 나는 제임스의 차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캄캄한 뉴잉글랜드의 밤 한가운데 옹송그린 한 줌의 온기와 빛 속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제임스에게 물었다. 신발이 이슬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진 거라곤 입고 있는 옷과 주머니에 든 40달러뿐이었다.
"글쎄. 목적지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렇게 첫 번째 삶을 등지고 떠나면서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 4년 동안, 제임스와 나는 자동차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한 곳에 머문 시간은 길어 봐야 몇 달, 지도를 펼쳐 놓고 눈길이 꽂히는 지명을 다음번 목적지로 삼고 떠나는 식이었다. 겨울이면 차를 몰고 멕시코에 가서 리조트의 관광객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 사람들 물건을 훔치곤 했고, 여름이면 알래스카로 가서 냇가에 캠프를 차리고 곰처럼 연어를 잡아 식량으로 삼았다.


-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싸구려 호스텔의 침대에서 눈을 떠 보니 제임스가 사라지고 없었다. 놀라지는 않았다. 내 사랑.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순 없어. 너랑 나는 영원히 자유야.
그래도 마음은 아팠다. 친절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남자였지만, 제임스는 내게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꼭 잔디 마당이 딸린 집에서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을, 돈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의무와 덫과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나날로 삶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런 교훈을 남자들은 본능처럼 알지만 여자들은 배워야만 아는 듯 싶었다. 

- 제임스에게서 자유가 무엇인지 그토록 많이 배웠는데도, 나는 아침이면 그의 널따란 어깨가 뺨에 닿는 느낌이 그리웠고, 밤이면 그의 손이 허벅지에 닿는 느낌이 그리웠다. 결국 나는 그의 것이라고, 또 그는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사랑한다는 말은 서로 간에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말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유는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나는 며칠 동안 빈속으로 지냈다. 속이 울렁거렸다. 호스텔에서 쫓겨난 후에는 쌀쌀한 바닷가에서 덜덜 떨고 기침을 하며 잠을 청했다.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은 내게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병원을 나선 후에는 멍하니 부둣가를 돌아다녔다. 딱히 찾는 것이 있지는 않았다. 무언가 내 가슴에 뚫린 구멍을 막아줄 것 말고는.
제임스와 살면서 배운 것은 자유만으로는, 또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랑만으로도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받 ...

- 플라스티네이션(plastination) 과정은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막는 방부 처리에서 시작한다. 그다음은 시신을 해부할 차례이다. 피부와 지방을 벗겨내어 속에 감춰진 구조를 보여 주기 위하여. 그러고 나면 시신을 알코올과 아세톤 욕조에 차례로 담가 조직 속의 수분과 유분을 모조리 아세톤으로 대체한다. 다음으로 시신을 폴리머 용액에 담그면 조직 주위에 진공이 발생한다. 조직 속의 아세톤은 이 진공 속에서 증발하기 시작하고, 증발해서 날아가는 아세톤이 근육과 혈관, 신경 속으로 액상 폴리머를 끌어들여 마침내 세포 하나하나까지 고분자 화합물이 침투한다. 
이 과정을 '침윤(impregnation)('impregnation'은 '수태'나 '수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 옮긴이)'이라고 한다.

- 이제 시신은 포즈를 취할 준비가 된 상태로, 열을 가하거나 가스 처리를 하면 폴리머 사슬이 교차 결합을 하면서 단단해진다. 이때쯤이면 시신은 고분자 화합물 조각상으로 변신한다. 모세 혈관 한 줄, 신경 한 가닥, 근섬유 한 올까지 고스란히 보존된 채로.
아트 디렉터, 즉 미술 팀의 총책임자인 에마가 내 작업대 옆의 스툴에 앉아 지켜보는 동안, 나는 시신의 포즈를 잡았다.
시신의 포즈를 잡는 일은 꼭두각시 인형극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허공에 고정한 틀에서 길이가 제각각인 실 수백 가닥을 아래로 드리워 시신의 팔과 손가락, 다리, 머리 등을 의도한 방향으로 고정시켰다.  

- 한 번은 에마가 이유도 밝히지 않고 자기 비서를 해고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있는 휴게실에서 그 비서가 대놓고 내 이야기를 함부로 떠든 다음 날의 일이었다. "레나는 도대체 뭘 그렇게 숨기는 걸까?" 비서가 한 말이었다. "데이트도 안 하고, 친구도 한 명도 없잖아."

-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에마가 말을 거의 무용지물로 여기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말은 생각의 그림자, 그 자체가 믿기 힘들고 잡기 힘들고 비현실적이었다. 육신은 플라스티네이션을 통해 보존되어 영생을 얻었다. 하지만 아세톤과 폴리머가 혈액과 수분의 자리를 차지할 때, 생각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어쩌면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몰라."
언젠가 에마가 내게 한 말이었다. 에마는 유물론자였다. 그래서 자기 손으로 주무를 수 있는 것만을 믿었다.


- 나는 에마의 그런 점이 좋았다. 에마는 말이 전하는 가짜 친밀감을 신뢰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식의 덧없는 친근감을, '함께'라는 헛된 기약을 더는 바라지 않았다. 에마는 오로지 나라는 물리적 존재, 내가 하는 작업, 내가 착실하게 출근하는지에만 관심을 보였다.

- 작업 중이던 시신의 포즈가 마음에 든 나는 작업대 쪽으로 물러나 에마 곁에 섰다. 우리는 앞에 있는 여성의 몸을 나란히 바라보았다. 여성의 머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듯 뒤로 젖힌 상태였고, 등은 근육이 제거되어 팽팽하게 당긴 활 같은 척추가 훤히 보였다.
에마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 흘깃 훔쳐보니, 에마가 보일락 말락 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 "예전의 아트 디렉터, 그러니까 당신의 전임자가 회사에 평생을 바치고 어떻게 됐는지 떠올리면 저는 얼굴을 들기조차 힘듭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됩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나는 존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옆으로 물러섰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흐뭇한 이야기들을.

- 존은 날마다 우리 집에 찾아왔다.
나는 자기 아기를 보존 처리해 달라던 어머니 이야기를 존에게 들려주었다.
"슬픔은 힘이 세죠. 사람의 세계관을 바꿔 놓기도 할 만큼요."
존이 말하는 동안 나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릎 위에 차분하게 포갠 두 손이 꼭 생각에 잠긴 불가사리 한 쌍 같았다. 마치... 서로의 감정에 이입한 것처럼.

- "우리 아버지는 현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너무 철저하게 격리되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보디워크스를 세웠어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죽은 육신을 동력이 끊긴 기계처럼 보도록 강제하는 방법을 써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싶었던 거예요. 아버지는 죽음을 우스꽝스럽고 절대적이지만 두렵지 않은 것으로 바꾸려 했어요."
내가 지켜보는 동안 존의 양손은 파르르 떨렸다. 한 손이 가슴 앞으로 올라와 빙빙 돌며 어떤 손짓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죽음을 너무 깊이 생각하다 보면 삶이 멈춰 버리기도 해요. 그건 플라스티네이션 자체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우리는 가끔 잊어버리는 사실이지만."
내 눈앞에서 내 손이 저절로 날아오르더니, 허공에 있는 존의 손과 만났다. 두 손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춤추는 한 쌍처럼. 기도하는 두 손처럼.
존의 손은 정말로 따뜻했다. 내가 15년 동안 세공했던 손들하고는 다르게.

- 나의 두 번째 삶은 그로부터 한 달 후, 존이 자기 집에서 함께 살자고 말했을 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월러 가문은 어마어마한 부자였고, 존은 스물한 살에 의대를 졸업한 천재였으니까.
"난 당신이 좋아. 하지만 난 고등학교도 안 나왔어. 할 줄 아는 거라곤 근육에서 근막을 벗겨내고 사람의 양손을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재주뿐이야. 당신이랑 나는 사는 세상이 달라.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어."
나는 상상했다. 20년 전에 조그마한 라텍스 주머니 하나가 제 할 일을 다했더라면, 나의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랬더라면 나도 연거푸 후회하지 않고 삶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 "이미 작동을 멈춘 틀을 신기한 것처럼 구경하느니, 차라리 그 틀의 작동 기한을 최대한 연장하는 게 낫지 않아요?"
"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어. 그래서 삶이 의미 있는 거잖아."
"그건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하는 거짓말이에요. 시인들이 영생을 구하려 애쓰는 이를 펌하한 건 아무 힘도 없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였고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무력하지 않아요."

존은 나에게 재생 신약에 관해 설명했다. 노화되어 가는 원래의 장기를 대체하도록 당사자의 세포를 이용하여 심장과 폐와 간을 만드는 기술이었다. SIRT1 같은 유전자와 GATA 전사 인자 같은 단백질, DNA 수복 및 세포 재생, 탈아세틸화효소 및 칼로리 제한, 텔로미어를 연장하고 감수 분열 단계의 오류를 줄이는 변형 바이러스 주입, 유해성 변이를 제거하도록 설계된 분자 수백 개로 구성된 세포 크기의 나노 컴퓨터에 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급류가 되어 나에게 쏟아졌고, 나는 그 말들을 다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존의 목소리 덕분에 편안함을 느꼈다.
"단지 수백 년을 살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그 기간 동안 내내 젊고 건강하게 살 수 있어요. 우리 몸속의 생체 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는지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존이 그 동화 같은 이야기를 어찌나 철석같이 믿었던지 나는 차마 부정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 그 장치가 나의 아세톤 욕조였고, 나의 폴리머 주입실이었다.
"결과가 잘 나왔어요." 존이 말했다. "당신의 신체 나이는 이제 서른 살이에요. 정기적으로 관리만 해 주면 지금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멋진데.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혼자 빙긋 웃었다. 아이를 가질지 말지 결정하는 일을 훨씬 더 나중으로 미룰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때껏 얼어붙은 껍데기 속에 삶을 멈춰 놓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동안 놓친 것들을 만회하고 싶었다. 누리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해 보고 싶은 것들도 너무나 많았다. 내가 만든 '죽기 전에 꼭 해볼 일' 목록은 갈수록 길어졌다.

- 대학 졸업식 이후 일주일도 안 되어 우리 둘은 결혼식을 올렸고, 나는 예술사 박사 과정의 공부를 계속했다. 만약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다면 나는 그 시간을 아낌없이 쓰고 싶었다.
존은 특허 전문 변호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보디워크스의 사업 분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죽은 이의 육신을 예술적인 추모비로 바꾸는 것, 다른 하나는 젊음의 샘이었다. 어느 쪽의 잠재력이 더 큰지는 자명했다.
"대부호가 될 준비를 미리 해 놓는 게 좋을 거예요."

존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 "월러 씨, 밤에 잠이 오기는 합니까?" 어느 기자가 던진 질문이었다. "무자비한 독재자들이 무병장수하는 게 당신 탓이란 걸 아시잖습니까?"
어찌나 화가 나던지, 내 눈앞의 세상이 잠깐 동안 빨갛게 변하고 말았다. 첫 질문이 이런 식이라면 이후의 기자회견은 보나 마나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존이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지금 진지하게 물어보시는 겁니까? 일개 사기업인 보디워크스가, 정치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는지 좌우하는 일에 관여한다고요? 방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는 고객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정치적 신념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경우는 더더욱 없습니다." 
"돈으로는 차별하면서!" 기자들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저희 회사의 시술 과정은 반드시 개별 고객의 게놈에 최적화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돈이 많이 들고 앞으로도 수십 년은 지금처럼 비쌀 겁니다. 적정한 액수를 청구해야 연구비를 더 투자할 수 있고, 이로써 이용료를 낮출 수 있습니다. 저희 시술에 건강 보험이 적용되도록 기자 여러분께서 의회에 건의해 주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 다음 또 그다음, 가시 돋친 질문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으리으리한 선물을 받아 놓고선 포장지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있게 마련이지.
그 문제의 해결법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건강 보험은 특권이지 결코 권리가 아니었으니까. 내 손으로 정밀 검사를 한 시신이 하도 많다 보니 나는 흘긋 보기만 해도 시신의 주인이 생전에 얼마나 건강했는지를 바꾸어 말하면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는지를 대번에 간파했다. 부자는 사는 법도 죽는 법도 가난뱅이 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어서, 부와 권세는 얄따란 살갗에 보이는 흔적이 다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말 그대로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일찍이 죽음은 평등의 수호자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이제 그마저도 부자들은 피해 가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분노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당연했다.

- 존은 자기가 한 말을 지키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연구소에서 살다시피 했다. 노화 방지 시술의 단가를 낮출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더 많은 사람이 그 혜택을 누리도록.
반면에 나는, 어느새 창작의 벽에 부딪힌 상태였다. 내가 예전에 만든 플라스티네이션 작품들은 여러 박물관과 수집가가 눈에 불을 켜고 입수하려 한 탓에 가격이 껑충 뛰었고 비평 역시 호평 일색이었지만, 나는 그런 상찬이 다 가짜라는 기분을 도무지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자기한테 영생을 안겨 줄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내를 악평으로 모욕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는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한 점도 만들지 못했다. 애써 잡은 포즈는 억지로 짜낸 것처럼 보였다. 내가 세공한 손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사랑을 만끽했다. 나를 해방시키고, 죄책감을 안기지 않고, 나를 짓누르는 일 없이 끌어올리는 사랑을 당연히 행복해야 마땅했지만 내가 느낀 것은 무력감과 정체감,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어디로도 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 할 일이 필요했던 나는 대학으로 돌아갔다. 존 덕분에 나의 뇌세포는 쉬지 않고 저절로 재생되었다. 그렇게 결코 성숙하지 않았기에, 한편으로는 결코 호기심이 마르지 않았다. 나는 역사와 문학, 경제학의 박사 학위를 잇달아 취득하고 나서 의대에 입학했다. 그냥 재미 삼아서 한 일이었다.
배울 것은 너무나 많았고, 나의 끝나지 않는 학생 생활은 언제나 시작을 눈앞에 둘 뿐 실제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삶이 아닐까? 나는 잠재력과 가능성과 첫걸음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았다. 악기를 배워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연습할 시간이 100년이라면 거장이 될 법도 했으니까. 

- 존과 나는 여행도 다녔다. 몇 달에 한 번 있는 나의 재생 시술이 끝난 직후에, 지구의 머나먼 귀퉁이에 있는 오지로 모험을 떠나곤 했다.
그런 여행이 끝날 때쯤 존은 어김없이 내게 물었다.
"준비됐어요?"
존의 눈을 보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존과 몹시도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일찍이 우리 사이에 틈이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아니, 아직. 하지만 곧 될 거야."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다음번에 할 대답을, 그리고 그 다음번에 할 대답도.

- 그렇게 한 해 또 한 해가 흘렀다. 어차피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사실상 불멸이었으니까.

- 나의 가장 자랑스러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무려 십 년이 넘게 걸렸다.
내가 만든 <아담의 창조>에서 주인공은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벽화에 나오는 아담과 같은 포즈로 몸을 젖히고 누워 있다. 다만 그의 뒤편에는 언덕도, 지면도 없다. 내가 만든 아담은 허공에 고정되어 있다.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 존은 그렇게 말했다.

- 내 아담은 미켈란젤로의 아담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얼굴이 없다는 점이다. 얼굴 한복판, 이마부터 턱까지 피부가 절개되어 양옆으로 벌려져 있는 모습이 마치 나비의 날개 한 쌍, 또는 세 폭짜리 제단화의 좌우 그림처럼 보인다. 움직이다가 갑자기 멈춰 버린 상태로 고정된 피부는 바닷물 속에서 너울거리는 갯민숭달팽이의 얄따란 몸통처럼 말려 있다. 그 속에 드러난 근섬유 다발은 첫 인간의 형상을 빚었던 붉은 흙처럼 날것 그대로의 색이다. 그리고 결코 깜박이지 않는 두 눈은 형형하고, 영원히 젊고, 아무런 감정도 없다. 보디워크스가 상장 기업이 되고 나서 20년 동안,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시술을 받았다. 요금은 비쌌지만 영원한 젊음은 인간이 거절할 수 있는 유혹이 아니었다.

- "나한테는 유전적 결손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내가 받은 재생 시술은 노화를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체세포의 노쇠 과정을 촉진하고 말았어요."

- 내 아담은 나머지 부분들도 자세히 살펴볼 만하다. 작품의 측면으로 다가가서 보면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한 몸통이 세로로 얇게 절단되어 각각의 단면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격장의 인체 모양 표적지 한 뭉치를 손가락 간격으로 걸어놓은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몸통의 단면들은 집 바깥의 빨랫줄에 널려 있던 침대보가 바람에 펄럭이다 정지한 모습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뒤틀리고 구부러지고 배배 꼬인 형상으로 가공하여 고정시켰다. 간과 대장, 폐 같은 내장의 단면들은 원이나 타원, 또는 로르샤흐 테스트의 불규칙한 무늬 같은 모양을 하고 빨강과 분홍과 포도주색과 적갈색으로 폭발하다 멈춰 버린 것처럼 보인다.
16세기 사람들이라면 그 단면들을 내우주(內宇宙), 즉 우리 몸속 세계를 그린 일련의 지도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 나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제야 비로소 남편의 말에 깃든 진실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실은 오래전에 눈치채 놓고서 억지로 무시한 진실이었다. 눈가와 입가의 주름, 감추려고 염색을 해서 뿌리 쪽만 하얗게 센 머리, 느려지고 뻣뻣해지고 조심스러워진 몸동작 같은 것들. 남편은 내 나이를 이미 한참 전에 따라잡고 그대로 계속 나이를 먹은 반면, 나는 우리 둘 다 시간의 파괴력 앞에 끄떡없는 척했다. 두려워서, 끝끝내 진실을 부정하려 발버둥을 쳤다.
"간섭 작용을 강화해서 노화를 멈추려 했는데, 체세포들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분열하는 식으로 반응하더군요. 난 암에 걸렸어요."

 

-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내 남편의 단면들 사이 아무 데나 서서 악성 종양의 형상을 발견하고 찬찬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라이스페이퍼에 번진 섬뜩한 잉크 자국처럼 생긴 종양은, 가장자리의 실핏줄이 둥그렇게 퍼져 나가며 프랙털 패턴을 이룬다. 그 패턴은 몹시도 아름답다.

- "자만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병은 죽음에서 벗어나겠다는 헛된 망상을 품은 대가일까요?"
질문을 던진 기자가 내 얼굴에 마이크를 들이미는 동안, 나는 꿋꿋이 버티고 서서 내 몸으로 존을 가려 주었다. 그때 존은 너무나 병약했다. 살날이 일주일도 안 남은 시점이었으니까.
나는 기자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예뻤다. 아직 스물다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애였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 20년도 더 전에 나와 함께 대학에 다닌 동창이었다. 그 기자 또한 내 남편의 시술을 받았던 것이다. 기자의 눈에 겁먹은 빛이 어렸다.
분노도 증오도 내 안에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기자의 질문은 내 남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진 것이기도 했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이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의 전조가 아니기를 바라며.

- 오로지 남편의 양손만이 무언가 표현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 그의 오른손을 보라, 태아처럼 옹송그린 그 손을 왼손을 보라, 쭉 뻗어 갈구하는 그 손, 애초에 빼앗아갈 속셈으로 영생이라는 약속을 내걸었던 무정한 신을 향하여.

- 남편이 숨을 거두고 그 이튿날,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작업실에 들어섰다. 시작의 순간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시작했다.
조수는 한 명도 쓰지 않았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내 손으로 만들었다. 한때는 묵직했던 그의 몸을 나 혼자서 어렵사리 작업대에 올리고 다시 내렸다. 오롯이 내 힘으로 져야 할 십자가였으므로.
작품의 양손을 완성하는 데에만 꼬박 1년이 걸렸다. 작업실에 그저 멍하니 앉아 내 손으로 남편의 손에 깍지를 낀 채 며칠을 보내곤 했다. 그와 함께 낭비했던 나의 시간을 돌아보며,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함께하는 삶을 상상하며, 영영 태어나지 못할 우리 아이들을 그리며. 

- 미안. 나는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도 있으니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당신이 돌아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어요."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났다. 나의 시간이 멈춰 있는 동안 너무나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떴다. 그런데도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몇 년 후에는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내가 얼마나 멍청한 놈이었는지 그제야 알겠더군요. 당신은 나에게 삶을 줬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소유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사랑은 중력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늘 존재하는 거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선 안 돼요. 그러니까 나는 계속 그렇게 기다릴 게 아니라, 마땅히 내 손으로 삶을 개척해야 했던 거죠."
넌 정말 내 아들이 맞구나. 찰리에게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실수도 나랑 똑같은 걸 저지르잖아.

- "나는 어부가 되기로 마음먹고 대서양에서 조업하는 저인망 어선에 탔어요. 손을 쓰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뭔가 위험한 일, 영원한 젊음 같은 거랑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일을 당신을 잊어버리고 싶었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나 스스로를 동정하는 짓도 그만뒀고. 그러다가 당신 남편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고, 당신이 남편을 기리려고 얼마나 애쓰는지에 관한 기사도 읽었어요. 괴로워하는 당신 모습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는 그 사람을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더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아. 그 사람한테는 내가 필요하니까. 나한테 그 사람이 필요했던 것보다 더.'"
무릎에 얹은 내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떨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도,
"당신 집으로 찾아가서 일하는 여자분한테 내가 누군지 얘기했어요. 그분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이곳으로 가라고 가르쳐 주더군요."
나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찰리를 보았다. 그 아이를 똑바로 보았다. 내 아들의 얼굴에서 나와 꼭 닮은 두 눈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 캐시는 찰리의 여동생이었다. 쉰여섯 살 터울인 남매였다.
나는 캐시를 안고 조그마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존을 닮은 구석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아기가 엄마를 닮았네요." 찰리가 말했다.

- 다시 보니 그 말이 옳았다. 마법처럼 신비한 일,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속에 온기를 느꼈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었다.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는 가녀린 물줄기 같은 사랑이.

- 내가 겁먹은 열여섯 살 아이였을 때에는 내 안에서 찾아 불러내지 못했던 것이 일흔두 살이 되고 보니 자연스레 나를 찾아왔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삶을 견디는 능력이었다.  

- 찰리는 내가 권유한 재생 시술을 거듭 거절했다. 나는 늦게 시작할수록 시술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낮아진다고 몇 번이나 아들을 타일렀다. 그러나 아들은 그때마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인생은 한 번으로 차고 넘쳐요."
캐시가 찰리의 손을 잡았다. 아들의 두 손은 가죽처럼 거칠었고, 저승꽃이 잔뜩 피어 거뭇거뭇했다. 딸의 손은 잡티나 흉터 하나 없이 도자기처럼 뽀얗기만 했다.

- 캐시는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내가 세심하게 마련한 항노화 요법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의 발달을 방해하지 않고 신체 기관의 나이를 최상의 연령대에서 고정시키도록 설계한 요법이었다. 다행히 캐시는 존의 목숨을 앗아간 유전자를 물려받지 않았다. 내 딸과 같은 세대의 아이들은 그 어느 선조보다 더 건강한 인간으로 살 운명이었다.
"동기간에 우리만큼이나 터울이 지면 보통은 친하게 지내기가 힘든 법인데."
"하지만 우리한테는 함께 만든 이야기가 있잖아."
찰리의 말에 캐시는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오빠의 성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다정하게 빗겨 주었다. 그 손이 꼭 모래언덕에 자란 풀을 스쳐 날아가는 한 마리 비둘기 같았다.

- 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때, 내 아들은 어머니가 필요한 시기를 이미 한참 전에 지나 버린 어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더 순수하면서도 덜 확실하다고 느꼈다. 볕에 바래어 쉬이 바스러지는 모래톱의 동물 뼈처럼.
나는 허리를 숙여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들한테서는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만족감의 냄새가 났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건 우리가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지우려고 만든 미신이에요."
언젠가 존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존은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했다. 그럴 만큼 오래 살지 못했으니까.
내 아들은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지 않았고, 나의 삶은 그렇게 또 한 번 끝을 맞았다.

- 캐시는 내가 찰리의 조언을 따라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이제 백 살을 코앞에 둔 할머니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내 몸은 아직 젊은 여성의 육체라며, 가끔은 나를 억지로 데리고 외출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 둘은 꼭 자매처럼 보였다. 
보디워크스와 경쟁 업체들이 시술의 가격을 지속적으로 낮추면서 나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 사람은 점점 더 흔해졌다. 나중에는 '상록(常綠) 혁명'이라는 축복을 세계의 여러 가난한 국가에 어떻게 전파할지, 또 사람들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시대의 인구 증가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놓고 논의가 벌어졌다. 심지어 우주 식민 계획이 다시 회자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사뭇 진지했다.
하지만 그 뜨거운 열광 속에서 나는 홀로 부유하는 기분, 외따로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 "죽음이야말로 삶이 만들어 낸 가장 멋진 거예요. 나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두려운 일에 도전해요.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숨이 거칠어지게 하는 일들 말이에요. 그날 당신한테 다가갔던 것도 내가 언젠가는 늙어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겼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그 얘기를 하는 동안 데이비드의 손은 허공에서 거침없이, 시원시원하게 움직였다. 결코 멈추지 않고, 쉬지도 않고.
나는 존과 함께 보냈던 길고 긴 나날을 돌이켜보았다. 그런데 기억에 남은 날들은 너무도 적었다. 끝없는 시간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선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낭비했다. 그래서 기꺼이 내 삶에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했다. 고치 속에 숨은 누에처럼. 

-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 내 막내딸 세라는 내 큰아들 찰리와 같은 날에 태어났다. 다만 태어난 해는 찰리보다 100년이 늦었다.
나는 세라를 끝으로 더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 재생 시술은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세라가 자라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세라의 아버지인 데이비드와 함께 늙어 가며, 서로의 변화를 즐거워하며. 그러다 나의 차례가 오면 죽음을 맞기로 했다.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이루지 못한 채로, 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한 채로,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배우지 못한 채로, 그러나 한 여자의 삶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린 채로. 내 인생은 하나의 기다란 호(弧)가 될 터였다. 시작과 끝이 있는.

-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 인생이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선택해야 해요."
데이비드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당신은 자유로워야 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돌아보았다. 나의 수월했던 방랑 생활과 험난했던 사랑을 나의 자랑스러운 작품들과 후회들을 나의 허장성세와 사소하고 질박한 즐거움들을.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내 팔다리 속에서 그것이 일으키는 진동이 느껴졌다. 다가오는 파도를 향해 총총거리며 백사장을 가로지르는 게의 걸음처럼.
"나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거야." 나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소유하지 않아. 서로를 위해 곁에 있기를 원하는 거지."

- 캐시는 내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우리는 함께 포치에 앉아 쿠키와 레모네이드를 나누어 먹었다. 여름이었고, 뇌우가 한바탕 쏟아진 직후였다. 세상이 낡았으면서도 한편으로 새로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죽음 없는 삶이 변하지 않는 삶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도 있고, 사랑에서 벗어날 때도 있어요. 연애든 결혼이든, 우정과 우연한 만남이든, 모든 관계에는 포물선이 있어요.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살아가는 시간과 죽음이 있는 거죠. 엄마가 찾는 게 상실이라면 그게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 내 딸은 현명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 자신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딸은 나와 다른 세상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서지 못했듯이, 나는 영원한 시간을 감당하며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할 운명이었다.
내가 늙어 가다가 죽기로 마음먹은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운명으로부터.
"나는 여러 번의 삶을 살면서 이미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어.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법이란다."
"그럼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여성이자 영원히 살 기회를 얻은 최초의 여성이 그 기회를 포기한 최초의 여성이 되겠군요." 

캐시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난 엄마가 죽는 거 싫어요. 죽음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미신이에요."
어쩌면 그리도 제 아버지 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이인데.
"그게 미신이라면, 나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 될 거야."

- 나는 두 손을 눈앞으로 들어 올려 아치를 만들었다. 간청하는 것도, 방어하는 것도 아닌, 설명을 위한 손짓이었다. 손끝이 거의 닿을 듯하면서도 닿지 않았다.
믿음의 문제란 모름지기 그 끝에 이르면 합리에 기반한 주장으로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게 마련이고, 거기서는 도약을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다시 창작의 열망을 느꼈다. 작품을 만들고 싶은 열망을.

- 여기까지가 내가 기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인간적인 기삿거리에 관심이 있으니까.
나의 마지막 작품은 플라스티네이션이 아니었다. 정체(停滯)야말로 진정한 죽음이므로.

- 그 대신 나는 보디워크스의 협력을 받아 나의 노화 과정이 철저하게 담긴 기록을 만들고 있다. 감각의 쇠퇴와 신체 기관의 노화, 신체 기능의 상실 하나하나를 고해상도 스캐너가 날마다 추적한다. 나의 기록은 죽음을 향한 인체의 여정을 유례없이 철저하게 담은 기록물이 될 것이다. 실존의 적나라한 진실에 덧씌워진 환상을 오랫동안 천천히 벗겨 가는 과정을. 그것은 낭만적이지 않다. 보기에 흐뭇하지도 않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자주 지루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삶이고, 그것이 진실이다.


- 언젠가 내 아이들의 아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못 할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식의 존재 양식, 이토록 짧고 폐쇄적인, 출생과 사망으로 괄호가 쳐진 삶이라는 것을. 그때는 아마도 나의 연대기가 이해의 틈을 메워 줄 것이다. 예술 작품이 다 그렇듯이.

호(弧)



- 52일째.
내 이름은 타이라 헤이스, 초급 과학 연구관이다. 아직 살아 있고, 아직 기록 중이다.
아마 이 기록을 읽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할 일이 없고, 이 구명정에는 나 혼자뿐이다.

- [저 여기 있는데요.]
고마워, 아티. 널 무시하려고 그런 건 아니야. 넌 이때껏 훌륭한 조력자였어, 어딜 가도 너만 한 맞춤형 인공지능은 없을 거야. 난 그저 나 말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으면 해서.
[귀하는 꼬박 24시간 동안 활동을 멈추지 않으셨어요. 제자리에서 서성거리기, 누워서 뒤척거리기. 에너지 보존을 권장합니다. 이미 비상식량 섭취량을 3분의 1로 줄이셨잖아요.]
내가 네 외장 케이스를 피탈 방지끈으로 묶어서 목에 걸고 계속 움직여야 너랑 이 기록 장치에 들어가는 전력을 생산할 거 아니야, 잊어버렸어?
[귀하의 활동량은 제게 필요한 에너지양을 월등히 초월할 뿐 아니라 귀하의 평소 활동 양태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타이라?] 
물순환 장치 때문에 그래.
[작동 속도가 더 느려졌나요?]
어제 완전히 멈췄어.
[그럼 하루 동안 물을 마시는 시늉만 했던 거예요? 왜 그랬는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사흘 전에 네가 말했잖아, 수리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널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랬어.
[옳거니. 그럼 시드 익스플로레이션사에 건의해서 누락된 해당 항목을 다음 인공지능 업데이트 때 손보도록 하겠습니다.]
넌 정말 타고난 낙관주의자구나. 이 판국에도 앞날을 생각하다니. 그런데 하이퍼 무선 스캔에 구조선 신호가 하나도 안 잡혀.
[놀랄 일도 아니에요. 댄덜라이언(민들레)호가 구조 강성을 너무 빠르게 잃는 바람에 함교에서는 구난 요청을 보낼 시간도 없었을 테고, 이 구명정의 통신 장비는 고작 아광속 수준이니까요. 탐사선의 남녀 탑승자 265명이 이미 사망한 걸 아는 외부인은 분명 아무도 없을 겁니다.]

- 이제 곧 266명이 되겠지. 

- 호숫가에 가까워지면서 보니 오테이 촌장님과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어리를 목격했던 것이다.
오테이 촌장님은 구체를 자세히 보려고 눈을 찡그리셨다.
"페이젠, 이건 하늘 조각배다. 우리 선조들께서 타고 오신 거대한 하늘 방주와 비슷한 물건이야."

- 시조(始祖)님들께서 나무배가 물 위를 나아가듯이 별과 별 사이를 거뜬히 날아다니는 하늘 방주를 타고 이 별에 도착하셨다는 전설은 내가 어릴 적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부모가 아이를 재우려고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실은 진짜였던 걸까?

- 그러나 나는 촌장님의 말씀을 거슬렀다. 그 문에 나 있는 홈을 손으로 붙들고 온 힘을 다해 돌렸다. 뜨거운 쇠에 닿은 손바닥과 손가락의 살갗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났다. 나는 이를 악 물고 고통을 참으며 계속 문을 돌렸다.
나의 아랫배에 있는 단전(丹田), 내 심신(心神)의 집인 그곳은 평온했다. 이 무모한 용기는 내 몸이 아직 조화를 이루지 못한 탓에 생겨났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왠지 목적이 있어서 나왔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올바른 용기처럼 느껴졌다.

- 낭자는 자신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나는 가끔 그 말이 사실인지 의심이 가곤 한다. 낭자의 살갗은 갓난아기처럼 보드랍고 이목구비도 섬세하고 우아해서, 꼭 안개와 이슬만 먹고 자란 것만 같다. 낭자는 흉터도 장애도 없다. 살아 있는 여성이 아니라 그림 속의 여성처럼.
"나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유전자 치료와 현대식 의료 시술을 받았어요. 게다가 내 고향 행성의 중력은 이곳보다 훨씬 약해요."
내가 타이라 낭자의 특별한 점을 이야기했을 때 돌아온 대답이었다. 알아듣지 못한 말이 여럿 섞여 있었고, 아티도 낭자의 말을 전부 통역해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타이라 낭자가 선녀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하늘 조각배가 추락했을 때 낭자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어째서? 나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 "좀 더 맛있는 음식은 없을까요?" 타이라 낭자가 물었다. "지금까지 먹은 음식은 다 싱거운 것 아니면 쓴 것밖에 없었어요. 단 게 먹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에요." 
"허나 낭자는 불 기운이 너무 세고 쇠 기운이 너무 약합니다."
타이라 낭자는 내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낭자 몸속의 오행은 다섯 가지 맛에 대응합니다. 쇠는 쓴맛, 나무는 신맛, 물은 짠맛..."

 

- "... 예,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불은 단맛, 흙은 매운맛이지요. 제가 처음 하늘 조각배에서 모셔 왔을 때, 낭자의 단전은 묘하게도 텅 비어 있었고 오행이 저마다 주도권을 잡으려 다투고 있었습니다. 낭자는 몸속에 불 기운이 너무 세서 편찮으셨던 겁니다. 불 기운이 쇠 기운을 눌렀고, 이 때문에 신체 계통의 여타 부분들이 조화를 잃었습니다. 쇠 기운이 세를 회복하여 나무 기운을 줄이도록, 낭자께서는 쓴맛 나는 음식을 더 드셔야 합니다."
내 말을 들은 타이라 낭자는 표정이 굳었다.
"물론 사람은 다 제각각이라서, 올바른 치료법은 개개인의 본성에 맞추어 저마다 다르게 섞인 오행에 길을 트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낭자의 본성은 불의 기운을 띠고 있으니 어쩌면 지금 단것을 조금 먹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때로는 과한 불 기운을 불로 다스리기도 하니까요."
타이라 낭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이마를 세게 문질렀다. 이윽고 낭자가 고개를 들었다.
"페이젠, 내가 살던 곳에서는 말이죠, 이제 세상이 당신 말처럼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신체가 생물학적 장치라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고, 질병은 외부 교란 요인 때문에 발생한 기능 부전이니까 화학적 대처와 유전자 교정이 필요한..."

- 낭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말투는 깔보는 듯했다. 우리 약을 신뢰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약 덕분에 나았으면서.
나는 화가 났고, 적잖이 슬프기도 했다. 우리 의술 지식의 토대는 고대의 지혜이지만, 우리는 이때껏 부단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 의술을 갈고닦았다. 역사책을 보면 시조님들께서는 하늘 방주에 약초 씨앗과 의서(醫書)를 싣고 도착하셨다고 한다. 그중 어떤 약초는 무성하게 자랐지만 여러 약초가 시들어 죽었고, 시조님들께서는 이 신세계에서 대체재를 찾으셔야 했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용감한 남녀들이 새로운 치료법을 찾으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몸속에 섞여 있는 오행을 개개인의 고유한 본성에 맞추어 다스리는 기술을 연마했다. 오테이 촌장님조차도 약초와 광물을 몸소 시험하다가 앓아누우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타이라 낭자의 조롱은 그들 모두를 욕보이는 짓이었다.

- 낭자는 내 표정에 숨은 뜻을 알아본 눈치였다.
"미안해요, 페이젠. 난 당신네 약이 왜 효과가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요. 그래서 벽에 부딪힌 느낌이 들어요. 도무지 이치에 맞질 않아서."
"저는 낭자께 화를 품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단전의 조화도 되찾을 겸 매실차를 마실까 합니다. 낭자께서도 한 모금 드시겠습니까?" 
타이라 낭자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내 찻잔의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 나서, 낭자는 빙그레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그렇게 웃으십니까?"
"우리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하길, 어떤 언쟁도 함께 잔을 기울이는 즐거움을 막지는 못한댔어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

- [무슨 상관인지 저로서는 명확히 알기 힘들군요.]
적당히 좀 하지?
[진심으로 이곳에 정착할 생각입니까?]
그... 당장은 그게 제일 합리적인 행동 방침 아니야?
[이해가 안 가네요. 제 데이터베이스의 모든 생존 모델에는 귀하가 현대 과학으로부터 멀어질 경우 기대 수명이 심각하게 줄어든다고 나오는데요.]
있잖아, 나는...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해. 사방이 다 원시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기 때문일까? 아니면 음식? 전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야. 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나의 일부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곳에선 원자나 쿼크, 초공간, 유전자 발현 조절 같은 것에 관한 지식보다 단 것을 먹으면 몸의 불기운이 강해진다는 지식이 더 쓸모가 있어. 때로는 비합리가 합리적이야. 주위의 모든 사람이 세상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면, 적어도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고 믿는 척이라도 하는 게 이롭단 말이야.
[그 말은 대단히 기이한 주장입니다.]
어쩌면 내가 똑바로 생각을 못하는 건지도 모르지. 이때껏 내내 이상한 기분에 젖어 살았으니까. 요즘은 내 배가 독립된 정신을 지녔는지, 자기 기분에 따라 불렀다 꺼졌다 하지 뭐야. 아예 배 속에 편도체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야.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충동이 솟질 않나, 기분이 좋아졌다 착잡해졌다 하질 않나. 왜 이러는지 페이젠한테 물어봐야겠어.
[제 생각에 귀하의 견해를 변화시킨 원인은 공기나 음식이 아닙니다. 제가 감지한 바에 따르면 당신의 날숨에 함유된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 수치가 높아졌습니다. 게다가 페이젠이 주위에 있을 때에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동공도 확장됩니다. 이러한 생리적 징후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그 말의 뜻은 설마... 지금 내가...?

[귀하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타이라.]

- 우리는 산꼭대기에 올라 별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타이라 낭자가 손을 뻗어 서쪽 하늘에 환히 반짝이는 별을 가리켰다. 그 별은 백두(白頭), 큰 연 자리의 꼬리에 해당했다.
"내가 탔던 배가 난파한 곳이 바로 저기예요. 엄청나게 커다란 하늘 배였는데."
나는 낭자의 부서진 배에서 흘러나온 빛이 보일까 하는 생각에 미간이 찡그려지도록 유심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선 아무것도 안 보여요.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때 일어난 폭발의 빛이 여기까지 닿으려면 5년은 걸릴 테니까."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타이라 낭자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았으니까. 때로는 그저 낭자의 목소리 만들어도, 낭자 곁에만 있어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 [신경 전달 물질 및 신경의 성장을 자극하는 뉴로트로핀 몇 종의 수치가 크게 낮아졌습니다.]
의사가 나한테 뭘 준거지?
[제가 확실히 아는 사실은, 그 시간 동안 귀하에게 대량의 항생제가 투여되었다는 것뿐입니다.]
그게 뭔데?
[항생제란 귀하의 선조들이 박테리아 감염을 막기 위해 사용한 주무기입니다. 오랫동안 사용할 필요가 없었지요. 섐록호에 항생제 재고가 있었다니 흥미롭군요.]

 

- 페이젠네 부족은 지금껏 박테리아와 더불어 살았어, 내가 처음 착륙했을 때 아팠던 이유가 바로 그거야. 하지만 다 낫고 나서도 내 몸속에는 박테리아가 남아 있었어... 아티, 내 몸속에 사는 박테리아가 병을 일으키는 것 말고 하는 일이 또 있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올넷에 다시 접속되어 있으니 옛 자료 저장소에 심층 검색을 실행해 보지요...... 흠, 재미있군요. 고대의 과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인간의 몸속에 박테리아 여러 종이 균형을 이루어 서식해야 건강이 유지된다고 믿었습니다. 박테리아의 혼합 양상은 사람에 따라 다른데 이를 엔테로타이프(enterotype), '장내 세균 유형'이라고 합니다. 혈액형과 비슷한 개념이지요. 그 과학자들은 박테리아를 기생생물이 아니라 공생 생물로 여겼습니다.]
그 박테리아가 하는 일이 정확히 뭐였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인간으로 하여금 음식을 소화하고 질병에 맞서 싸우고, 심지어 기분과 성격마저 변화시키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뭐? 어떻게?
[혈류 속에 화학 물질을 분비하여 신경 전달 물질을 억제하거나 활성화하고,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고, 신경계의 화학적 균형을 수정하는 방식으로요.]
그러니까 나는, 튀코409A에 있을 때, 박테리아에 감염된 거구나. 그래서 나 자신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된 거야.
[귀하의 아버지가 옳았던 것 같습니다. 이 행성에서 귀하는 문자 그대로 배로 생각했습니다. 페이젠네 부족은 단순히 자기네 배 속의 생물군과 공존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정도가 아니라 음식을 이용하여 그 생물군을 조종하는 방법마저 발견했고, 이로써 자신들의 기분을 조절했습니다.]
내 안에 사는 생물들이 나 대신 생각을 했단 말이지. 사랑에 빠진 건 나였을까, 아니면 박테리아들이었을까?
[제 생각에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고대 과학자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하나의 물리 현상으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며, 이 세계의 질서를 따른다. 우리 배 속의 박테리아는 우리 사고의 총합을 생성하는 체계 속의 또 다른 구성 요소이다. 우리는 이미 몇 조개나 되는 세포들의 공동체이다. 거기에 몇 조개를 더하여 생각하지 못할 까닭이 있을까?"]

- "이 미생물들이 몸속에 살고 있으면 나는 다른 사람이 돼요. 더 용감하고, 더 거침없고, 더 행복하거든요."
"지금의 낭자가 진짜입니다. 이게 낭자의 본래 모습이에요."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아직은, 내 의식이 나 자신의 세포들뿐 아니라 내 몸에 사는 미세 유기체 수조 개의 세포에도 구현된다는 사상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우리도 그 유기체들하고 같은 방식으로 이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죠. 나의 유기체들이지만, 그것들이 곧 나라고 할 수는 없어요. 난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이곳으로 돌아올 마음을 먹은 건, 지금의 나가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이에요. 본능적인 직감이라고나 할까요. 우리 아빠가 자랑스러워하겠네요."

- "아버님을 한번 뵙고 싶습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타이라 낭자에게서 부친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타이라 낭자에게 한 가지 청을 하기 전에 부친의 허락을 받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도 괜찮죠. 어차피 집에 들른 지도 꽤 됐고, 왠지 아빠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으니까요. 내가 시드 사하고 협상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엄청 좋아할걸요."
[제가 실행한 시뮬레이션에서는 시드사가 귀하의 유익한 해법을 알아보고 거래에 응할 확률이 52.26퍼센트밖에 안 됩니다. 꽤 큰 위험을 감수하는 셈인데요.]
"이럴 땐 내 뱃심을... 아니, 배 속의 힘을 믿는다고나 할까."

심신오행(五行)



- 古者无文字, 其有约誓之事, 事大, 大其绳, 事小, 小其绳, 结之多少, 随物众寡, 各执以相考, 亦足以相治也

옛날에는 문자가 없어서, 약속을 맺을 일이 생겼을 때 큰일이면 굵은 줄로, 작은 일이면 가는 줄로 약속의 많고 적음에 따라 매듭을 묶었는데, 각자가 이를 세어 보는 것만으로 서로 비교함에 부족하지 아니하였다.


 구가역(九家易) (『역경(易經)』의 해설서로서 중국 동한(東漢) 시대(기원후 25~220년)에 씌었다고 추정되는 책)에서


- 신령들은 우리에게 장난치기를 좋아한다.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역사에 기록된 난족(族) 사람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목격했지만, 그럼에도 한 치 앞조차 내다보지 못하는, 사실상 장님이나 다름없는 인간이다.

- 5년 전, 해마다 한 차례씩 물건을 사들이러 오는 미얀마인 상인 둘이 구름을 헤치고 험한 산길을 올라왔을 때, 머리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는 그들 뒤로 낯선 남자 한 명이 따라왔다. 그 이방인은 내가 그때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용모를 하고 있었고, 우리 마을의 줄 보관소에도 그와 비슷하게 생긴 이의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남자는 내 조카 카이보다 키가 두 척이나 더 컸다. 카이가 우리 마을에서 제일 키가 큰 사내인데도 그러했다. 남자의 얼굴은 살갗이 하얗고 혈색이 불그레해서, 화려하게 칠한 나한상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눈은 파란색에 머리카락은 누런색이었다.

-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만 제시한다는데요."
그렇다면 토무는 일종의 치유사인 셈이었다. 이는 분명 영예로운 직업이었고, 남을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내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행색이 아무리 이상하다고 해도.

- 나는 토무에게 우리 난족의 유서 깊은 치료약이 실린 책에 관해 듣고 싶은지 물었다. 실력 있는 무당인 루크조차도 머릿속에 모든 지식을 다 담지는 못했다. 처음 보는 병과 마주할 때면 그 역시 오래된 의서(醫書)를 참조하는 경우가 잦았다. 우리는 선조로부터 많은 지식을 물려받았다. 그중 일부는 약과 독의 경계를 용감하게 넘어선 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치르고 얻은 지식이었다.

- 파가 나의 제안을 통역해 주자 토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어서서 매듭지은 삼줄로 이루어진 의서를 꺼내어 왔다. 삼줄을 길게 펴고 손가락으로 줄을 더듬어 내려가며, 나는 여러 병의 증상과 처방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런데 정작 토무는 파가 통역해 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매듭 줄로 만든 의서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눈을 찻잔처럼 둥그렇게 뜨고서. 토무는 파의 말을 끊고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잔뜩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사람은 매듭 문자라는 걸 처음 봤대요." 파가 통역해 준 말이었다. "그 줄로 만든 책을 어떻게 읽는지 알고 싶다는데요."

- 상인들은 난족의 매듭 문자를 오래전부터 보았기 때문에 이미 익숙했다. 나 역시 상인들이 우리 마을에서 사들인 물건의 이름과 수량을 종이에 표시하여 기록하는 모습을 익히 보았다. 티베트어, 중국어, 미얀마어, 나가어까지, 저마다 자기네 나름의 문자로 기록을 남겼다. 모양새는 다들 제각각이었지만 잉크로 적은 글자들은 내게 하나같이 생기 없고 밋밋하고 추해 보였다. 우리 난족은 글자를 적지 않았다. 그 대신 매듭을 묶었다.

- 우리는 매듭 덕분에 선조들의 지혜와 목소리를 고스란히 살려 대대로 전해 왔다. 기다란 삼줄, 부드럽고 탄력 있는 삼으로 만든 줄을 길게 펴서 꼬아 놓으면 적당한 탄력이 생겨서 똬리를 튼다. 그 줄을 묶어서 모양이 제각각이 되도록 만든 서른한 가지 매듭은 저마다 입술과 혀의 모양에 대응하여 각기 다른 음절을 표시한다. 불교 승려의 염주처럼 둥글게 묶은 삼줄의 매듭은 단어와 문장, 이야기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말은 실체와 형상을 부여받는다. 줄을 더듬어 내려가다 보면 매듭을 묶은 이의 생각이 손끝에 느껴지고 그 사람의 목소리가 뼛속에 전해진다. 

- 매듭을 묶은 줄은 똑바로 펴진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다. 매듭이 줄을 팽팽하게 당기기 때문이다. 매듭은 하나의 형상으로 변하기를 갈망하며 저절로 꼬이고 뒤틀리고 접혀 든다. 매듭 책의 모양새는 곧게 펴진 선이 아니라 조그마한 조각상에 더 가깝다. 똬리를 튼 줄은 묶여 있는 매듭들이 저마다 다르다 보니 제각각 다른 형상으로 보이고, 이로써 책에 실린 논의의 방향과 윤곽, 귀에 닿는 듯 선명한 운율의 높낮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 나는 날 때부터 눈이 좋지 않았다. 또렷이 보이는 거리는 몇 걸음 앞이 고작이었고, 자세히 보려고 너무 오래 눈을 찡그리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손의 촉각은 일찍부터 민감해서 아이였을 적에 이미 아버지에게 서로 다른 줄과 매듭의 성질을 빨리 깨우친다는 칭찬을 들었다. 내게는 매듭이 줄의 탄성을 변화시키는 방식, 그러니까 조그마한 매듭 하나하나의 힘이 줄을 밀고 당겨서 책의 형태를 완성하는 방식을 머릿속에 그리는 재능이 있었다. 난 사람은 누구나 매듭을 묶을 줄 알았지만 매듭 하나가 완성되기도 전에 줄의 최종 형태를 내다보는 눈을 타고난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 내가 처음 맡은 일은 필경사였다. 가장 오래되어 너덜너덜하게 해진 매듭 책을 골라 매듭의 배열을 촉감으로 암기한 다음, 새 삼줄로 똑같이 다시 만드는 일이었다. 매듭 하나하나의 꼬인 방식을 충실히 복제하다 보면 결국에는 줄이 저절로 똬리를 틀어 원본과 똑같은 복제본이 만들어지고, 이로써 마을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과거의 목소리를 느끼고 그로부터 배움을 얻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마을의 촌장이자 기록 보관자가 된 후에, 나는 나만의 매듭 책을 짓기 시작했다. 주로 실용적인 것들에 관하여 매듭을 묶었다. 상인들에게 속을까 봐 매년 기록해 놓은 쌀값, 무당이 새로 발견한 전통 약초의 효능, 날씨 변화와 파종 시기 같은 것들이었다. 가끔은 다른 것들을 주제로 매듭 책을 짓기도 했다. 그저 완성된 매듭 줄의 모양새가 보기 좋아서였다. 총각이 마음에 둔 처녀에게 불러 주는 노래, 우중충한 겨울이 물러가고 처음으로 얼굴을 어루만지는 봄 햇살의 느낌, 새해 초하루 축제에서 춤을 추는 난족 동포들의 그림자가 ...  


- 하늘을 나는 상자를 보아도 딱히 신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에보는 GACT 연구소 바로 옆에 있는 원룸 건물에 나와 함께 도착하여 짐을 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침대에는 올라가지도 않았다. 그가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잠든 곳은 주방의 타일 바닥이었다. 화덕에서 더 가까운 곳에 잠자리를 만들기. 어쩌면 오래전에 읽은 인류학 책에 그러한 본능적 충동에 관한 내용이 있었던 것도 같다.

 

- "완성했을 때 이런 모양이 되게 매듭을 묶을 수 있어요?"
나는 점토로 빚은 조그마한 모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형은 용의 머리와 살짝 비슷해 보였다. 우리가 통역사로 고용한 미얀마 출신 유학생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러면서도 내 질문을 소에보에게 통역해 주었다. 그 학부생 애송이에게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다 미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웬걸, 내가 봐도 어처구니가 없기는 했다.
소에보는 모형을 집어 들고 이쪽저쪽으로 돌려가며 살펴보았다.

"여기엔 아무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아요. 이 모양대로 매듭을 묶으면 횡설수설일 텐데."
"상관없어요. 그냥 줄이 접혔을 때 저절로 이 모양이 되도록 매듭을 묶어 주기만 하면 돼요."
소에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줄을 구부려 매듭을 묶기 시작했다. 다 묶인 줄이 똬리를 튼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는 생김새를 모형과 비교해 보고, 매듭을 더 팽팽하게 조여서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젓더니, 이내 매듭 몇 개를 풀고 새로 묶었다.

-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줄줄이 묶여 이루어진 기다란 사슬로서, 생물 세포 속의 유전자에 의해 서열이 결정된다. 아미노산은 서로 다른 전하를 띤 소수성 곁사슬과 친수성 곁사슬이 붙어 울퉁불퉁한 매듭 모양을 형성하는데, 이들이 서로 끌어당기고 밀면서 수소 결합을 일으켜 알파 나선 구조나 베타 병풍 구조 같은 2차 구조를 형성한다. 기다란 단백질 사슬은 미세한 힘의 벡터 수백만 개에 의하여 위태롭게 비틀리고 흔들리는 덩어리로 존재하다가 사슬 전체의 에너지 총합을 최소화하고자 '단백질 접힘'을 일으켜 스스로 똬리를 틀고, 이로써 3차 구조에 안착한다. 이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최종 구조는 해당 단백질에 고유한 형태를 부여한다. 극히 미세한 그 3차원 덩어리는 그야말로 모더니즘 조각가의 작품 같다.

- 단백질의 기능은 그 형태에 따라 결정된다. 단백질이 올바르게 접히려면 기온과 용매, 접힘 과정을 돕는 분자 샤페론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야 한다. 단백질이 고유한 형태로 접히지 못하면 광우병이나 알츠하이머병, 낭포성 섬유증 같은 질환을 일으킨다. 반면에 올바른 형태를 띤 단백질을 이용하면 암세포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분열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도,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가 복제 및 전파되는 데에 필요한 세포 경로를 봉쇄하는 것도 가능하다. 온갖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미노산 서열의 자연 상태를 미리 알아내기란(또는 이와 반대로 아미노산 서열을 인간이 원하는 단백질 형태로 접히도록 설계하기란) 입자물리학보다 더 어렵다. 길이가 짧은 아미노산 사슬조차도 원자에 작용하는 모든 힘을 철저히 시뮬레이션하고 이를 자유 에너지 경관을 통하여 분석하라고 하면, 최고 성능의 컴퓨터도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은 수백 개 경우에 따라서는 수천 개에 이른다.

- 만약 아미노산 서열의 자연 상태를 빠르고 정확하게 예측하여 접는 알고리즘을 발견하면 약학 연구는 항생제 발견 이후 가장 커다란 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다. 그것도 엄청난 이윤을 거두면서.

- 이름이 정(鼎)인 그 솥에는 한자와 동물을 모티프로 한 장식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솥의 매끈한 표면은 이와 다른 무늬, 가느다란 선으로 이루어진 훨씬 세밀한 문양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진열장 아래쪽에 놓인 조그마한 명판의 설명을 읽어 보았다.

 

- 고대 중국인은 청동그릇을 비단이나 그 밖의 결이 고운 천으로 싸서 보관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릇의 표면에 슨 녹에는 겉을 싼 천의 씨실과 날실이 무늬로 새겨지고, 이 무늬는 천이 부식되어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남는다.
고대 중국의 직조 기술에 관한 현대의 지식은 거의 전적으로 이러한 흔적에서 비롯되었다.

- "그 솥을 만든 사람들은 실로 글을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무늬를 알아볼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무늬를 열심히 따라가다 보니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희미하게나마, 들렸어요. 그런 고대의 지혜를 듣는 기회는 아주 큰 선물이지요. 비록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 뒤이은 실험에서 소에보는 꽤 복잡한 사슬을 접는 데에 성공했다. 어디서 통찰력을 얻어 오기라도 한 듯, 갑자기 그의 의도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층 더 복잡한 사슬 몇 개로 실험을 반복했고, 그는 전보다 더 빠르게 사슬을 접었다.
나보다 소에보가 더 기뻐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 "뭐가 달라진 거죠?"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내가 쓰는 매듭 책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매듭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지만, 당신이 만든 놀이 속에서는 사정이 달라요. 중국 사람들의 청동 그릇에 남아있는 목소리가 나를 도와주었어요. 천의 무늬는 실 한 가닥을 수없이 엮고 또 엮은 끝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엮여서 그물 모양이 되고 나면, 그 그물을 구성하는 매듭의 탄력은 모든 방향에서 감지할 수 있어요. 아주 멀리 떨어진 매듭이라고 해도 그렇지요. 나는 당신의 놀이를 이해할 단서를 거기서 찾았어요. 그래서 당신이 제시한 무늬에 맞아떨어지도록 내가 알던 매듭 묶기 기술을 변형시켰지요. 고대인의 목소리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나는 먼저 그 목소리를 듣는 법부터 깨우쳐야 했어요."
심령술사나 할 법한 횡설수설이었지만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실험만 제대로 된다면.

- 우리는 소에보가 보여 준 시범을 컴퓨터로 재생하여 그의 동작을 추상화하고, 그가 내린 결정의 과정을 추론하고, 그의 시행착오를 체계화한 다음, 이 모든 것을 통합하여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완성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소에보의 본능을 다듬어 명확한 지침으로 만들기까지는 엄청난 창의성과 노고가 필요했다. 그러나 소에보의 동작이라는 등대가 있었기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의 노력은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나는 이사회 사람들에게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내가 뭐랬어요.'

- 소에보는 내게 약속을 지키라고 했다. 우리가 함께 일한 지 벌써 몇 달째였건만, 나는 실험의 진전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와 했던 약속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 나는 대학원 시절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한 동창 크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에너다인 애그로에 근무하는데, 그 회사는 다양한 품종의 유전자 변형 벼를 취급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나는 크리스에게 내가 원하는 벼의 조건을 설명했다. 가뭄을 잘 견디고 고도가 높은 곳에서도 잘 자랄 것, 산성 토양에서도 거뜬히 버틸 것, 낟알이 많이 영글 것, 가능하면 동남아시아에 흔한 병충해에도 강할 것.
"조건에 들어맞는 품종이 몇 가지 있어." 크리스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가격이 비싸. 게다가 우리 회사는 보통 미얀마 같은 나라에는 종자를 팔지도 않아. 정치 상황도 불안하고, 아시아 쪽이 거의 그렇듯이 지적 재산권도 전혀 보장이 안 되거든. 그 나라 방방곡곡에서 돈도 안 내고 우리 벼를 재배하는 꼴을 두 눈 빤히 뜨고 볼 수는 없지. 너도 알다시피 그쪽 경찰이나 법원은 허수아비니까. 그렇다고 깡패를 고용해서 농사꾼들한테 특허 사용료를 받아냈다가는, 저녁 뉴스에 영 듣기 안 좋은 소식이 나오고 말이야." 
나는 크리스에게 부탁을 좀 들어 달라고 사정했다. 지적 재산권에 관해서라면 내가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어쩌면 종자를 무단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기술적 제한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 크리스는 그렇게 덧붙였다.

- 아주 작은 크기의 배배 꼬인 끈 조각이 들어 있고 이를 유전자라고 하며, 이것이 생물의 성장과 외모를 결정한다고 했다. 유전자는 미세한 덩어리가 한데 묶여서 만들어지는데 이 덩어리들이 형성하는 언어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 난족의 매듭 같은 거로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토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 누군가 새로운 유전자를, 다시 말해 새로운 말로 이루어진 끈을 발명하고 그 끈을 하나의 씨앗 속에 심어 넣으면, 그 씨앗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질을 지니게 된다. 말이 씨앗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발명한 사람의 소유물이기에, 만약 다른 이들이 그 씨앗을 기르고자 한다면 발명가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토무가 설명하길, 이러한 경우에 발명가는 반드시 씨앗 값을 받아낼 목적으로 그 씨앗에서 새로운 씨앗이 맺히지 않게끔 몇 마디 말을 더 집어넣기도 한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해마다 돈을 내고 씨앗을 살 테니까.
"그런 유전자가 들어 있는 씨앗을 발명가의 허락 없이 기르는 건 도둑질이에요. 발명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 쌀독의 쌀을 한 바가지 퍼 오는 짓이랑 똑같다는 말이죠. 종결 인자 유전자는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도록 도와주려고 첨가한 거예요."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내가 남의 쌀 한 바가지를 가져오는 짓이 절도인 까닭은 그 사람에게 쌀 한 바가지가 더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힘이 깃든 새 말을 한마디 가르쳐준다 해도, 내가 그 말을 상대방에게서 빼앗아 오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은 여전히 그 말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상황을 더 잘 이해하려고 기를 썼다.

- "당신 설명에 따르면 볍씨 속에 매듭으로 묶여 있는 그 말들을 쓰기 위해 우리가 돈을 내야 한다는 거로군."
내 말에 토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토무는 그의 놀이 속에서 매듭을 묶는 내 모습을 지켜보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신도 우리 매듭 책에 담긴 말을 배웠잖아. 우리 난족의 매듭 묶기에서 우러난 지혜를. 그렇다면 당신도 우리한테 해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건가?"
토무는 껄껄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보아하니 마음이 편치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뇨,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촌장님한테 배운 것들은... 오래됐으니까요. 보호받는 대상이 아니에요. 저작권으로도, 특허권으로도."

- 파가 통역하기 힘든 말이 줄줄이 나왔지만, 굳이 파를 시켜 토무에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토무에게서 더 많은 말을 배웠다가는 그 말의 값마저 치러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토무가 우리 난족에게서 얻은 가르침을 아무 값어치도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쯤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바보였다. 내 딴에는 우리 마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토무가 제시한 달콤한 조건에는 단서가 주렁주렁 붙어있었다. 내가 한 일은 결국 먼 곳의 군주가 파놓은 빚 구덩이에 ...

매듭 묶기

 


- "그 대상을 실제로 보여 주면 돼요. 로라는 패턴 인식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의 얼굴도 구분할 수 있답니다."
남은 인터뷰 시간 동안 나는 긴장한 부모들을 안심시켰다. 로라는 당신들에게 설명서를 읽으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물에 빠뜨려도 폭발하지 않을 것이며, 혹시라도 댁의 귀여운 공주님이 '실수로' 상스러운 말을 가르쳐도 로라가 따라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 모든 인터뷰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로라가 처음 진행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질문에 대답하면 어김없이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생명이 없는 물체가 지적 행동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반응했다. 다들 귀신 들린 인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뒤이어 내가 로라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면 모두 즐거워했다. 나는 어떠한 질문에도 대응하도록 전문 용어를 뺀 정감 있고 모호한 답안을 달달 외웠고, 나중에는 모닝커피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답안을 술술 말하기에 이르렀다. 어찌나 능숙했던지 가끔은 인터뷰 내내 머릿속의 자동 조종 장치를 켜 놓고 질문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그때껏 몇 번이고 되풀이해 들은 똑같은 말들에 자동으로 반응하곤 했다. 
그런 식의 인터뷰는 갖가지 마케팅 전략과 함께 효과를 발휘했다.  

 

- 우리가 묵는 펜션의 현관에는 예상대로 이 지역의 명소를 소개하는 팸플릿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대개는 마녀와 관련된 곳들이다. 팸플릿의 소름 끼치는 그림과 설명은 어째선지 도덕적 분노와 사춘기 시절에나 품을 오컬트에 대한 동경심을 용케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펜션 주인인 데이비드는 '예 올드 퍼핏 숍'이라는 곳에 '세일럼의 공식 마녀가 제작한 인형'이 있다며 우리에게 가 보라고 권한다. 세일럼 마녀재판 당시에 처형당한 스무 명 가운데 브리짓 비숍이라는 여성은 자기 집 지하실에서 핀이 꽂힌 '꼭두각시 인형'이 발견되었는데, 이 인형이 물증으로 인정되는 바람에 마녀로 기소당했다고 한다.

- 어쩌면 그 여자도 나 같았던 모양이다. 미친 여자, 어른인 주제에 인형을 갖고 노는 여자. 인형 가게에 찾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것 같다.

- 브래드가 할인 혜택이 있는 식당이 어디냐고 데이비드에게 묻는 사이에 나는 우리 방으로 올라간다. 잠들고 싶다. 아니면 적어도 자는 척하고 싶다. 브래드가 올라오기 전에. 그러면 나를 혼자 둘 지도 모르고, 그러면 생각할 시간이 잠시나마 생길지도 모른다. 옥세틴을 먹으면 똑바로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내 머릿속에는 벽이 있다. 생각 하나하나를 만족감으로 감싸 버리려고 하는, 뿌연 벽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기억이라도 나면 좋을 텐데.

- 브래드와 나는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함께 타고 간 궤도 왕복 셔틀은 푯값이 내 1년 치 집세보다 더 비쌌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우리 회사의 최신 모델인 재치 만점 킴벌리™가 하도 잘 팔려서 회사 주식 자체가 궤도를 뚫고 올라갈 지경이었으니까.
셔틀 비행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피곤했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했다. 나는 그때껏 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 둘만의 집에 같이 산다는 것도, 이제 서로 남편과 아내라는 것도.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연애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늘 그랬듯이 브래드는 야심만만하게 요리를 시작했지만 한 문단이 넘는 조리법은 따라 하질 못했고, 나는 그가 망치려 하는 새우 에투페를 구조하러 달려오곤 했다). 익숙한 일상 때문에 모든 것이 더 진짜처럼 느껴졌다. 

- 어느 날 저녁을 먹으면서 브래드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장 조사에 따르면 킴벌리를 구매한 고객 가운데 자기 아이한테 줄 목적으로 사지 않은 사람이 20퍼센트가 넘는다는 말이었다. 그들은 자기가 쓸 목적으로 그 인형을 샀다.
"대부분은 엔지니어, 아니면 컴퓨터를 전공하는 대학생이야. 킴벌리를 해킹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인터넷 사이트도 벌써 수없이 많 ...

- 일주일 후, 나는 결국 브래드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처음에 브래드는 얼이 빠질 정도로 놀랐지만, 이내 기뻐했다(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끝내주는데, 이제 우린 단순한 장난감 회사가 아니야. 이걸로 뭘 할 수 있을지 상상이 가? 당신은 유명해질 거야, 엄청나게 유명해질 거라고!"
브래드는 응용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끝도 없이 주절거렸다. 그러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 그리하여 나는 브래드에게 '중국어 방'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일찍이 철학자 존 설은 인공지능 연구자들에게 수수께끼를 하나 냈다. 설은 말했다.

방이 하나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커다란 방 안에 명령을 잘 따르는 사무원들이 앉아 있는데, 이 사람들은 일솜씨가 꼼꼼한 대신에 영어밖에 할 줄 모릅니다. 낯선 기호가 적힌 카드가 바깥에서 방 안으로 줄줄이 들어옵니다. 사무원들은 자신이 받은 카드의 기호와 다르게 생긴 낯선 기호를 백지 카드에 그려서 방 바깥으로 내보냅니다.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사무원들에게 주어진 두꺼운 책에는 영어로 쓴 규칙이 가득 적혀 있는데, 이런 식입니다. '구불구불한 세로 선 한 줄이 그려진 카드에 이어 구불구불한 가로선 두 줄이 그려진 카드를 받으면, 백지 카드에 세모꼴을 하나 그려서 옆에 앉은 직원에게 건네시오.' 규칙에는 카드의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정보는 전혀 담겨 있지 않습니다.

- 사실 방 안으로 전달되는 카드에는 중국어로 된 질문이 적혀 있고, 사무원들은 지시받은 규칙에 따라 중국어로 된 올바른 답을 적어 제출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 관여하는 요소들, 즉 규칙과 사무원, 방 자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열띤 활동, 이들 가운데 한자를 단 한 자라도 이해하는 요소가 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사무원 대신 '프로세서'를 넣고 규칙이 적힌 책 대신 '프로그램'을 넣어 보면,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튜링 테스트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하고, 인공지능이란 그저 허상일 뿐인 것을. 

- 그러나 중국어 방 논증은 다른 식으로도 전개할 수 있다. 사무원 대신 '뉴런'을 넣고, 규칙이 적힌 책 대신 '폭포처럼 흐르는 활동 전위를 지배하는 물리 법칙'을 넣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무언가 '이해'한다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사고(思考)는 허상일 뿐이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브래드가 말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윽고 나는 깨달았다. 브래드의 반응이 내 예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 "브래드," 내가 말했다. 남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난 두려워. 만약에, 우리가 타라하고 똑같다면 어떡하지?"
"우리? 인간 말이야? 여보,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만약에." 나는 적당한 표현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리가 단지 하루하루 어떤 알고리즘을 따르는 것뿐이라면? 우리 뇌세포가 단지 어떤 신호를 받아서 다른 신호를 찾을 뿐이라면? 우리가 생각이란 것 자체를 안 한다면? 내가 지금 당신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지 미리 정해진 반응일 뿐이라면,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물리 법칙의 결과라면?"
"엘레나, 당신 지금 철학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있어."

한숨 자야겠어. 나는 생각했다. 무력감에 젖어들면서.

"내가 보기엔 당신, 한숨 자야겠어." 브래드가 말했다.

- 휴가라도 가야겠어.
"휴가라도 가야겠어요."
그 애가 일부러 한숨을 푹 내쉬며 한 말이었다.
나는 안내데스크 앞을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엘레나. 뭐든 좋으니까 다른 말을 해 봐, 제발. 나는 이를 악 물었다. 부탁이야.
"안녕하세요, 엘레나."
안내데스크 직원이 말했다.

- 남편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내 주위로 바닥 없는 어둠을 파놓은 고통에 관하여, 공포에 관하여.
남편의 눈에 내가 찾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해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 브래드는 나를 설득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를 병원에 가두기 직전에
"당신이 이러는 건 그냥 집착이야. 정신을 당대에 유행하는 기술하고 연관시키는 건 유사 이래 언제나 있었던 일이라고. 마녀와 악령을 믿던 시절에 사람들은 우리 뇌 속에 조그마한 인간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어. 방직기와 자동 피아노가 등장하고 나서는 뇌가 하나의 기관이라고 믿었고, 전보와 전화가 생기자 그때부터는 뇌를 무선 연결망으로 인식했지. 지금 당신은 뇌를 컴퓨터로 여기는 것뿐이야. 그만해. 그건 착각이야." 
문제는, 남편이 무슨 말을 할지 내가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 "그건 우리가 오랫동안 부부로 지내서 그런 거고!" 브래드가 악을 썼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그 말을 하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신은 끝없이 빙빙 돌기만 해." 남편의 목소리에 패배감이 묻어났다.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만 있다고."
내 알고리즘의 루프 FOR 루프와 WHILE 루프.

 

- "돌아와 줘. 난 당신을 사랑해."

남편이 할 말이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었을까?

- 마침내 펜션 욕실에 혼자 남은 지금, 나는 두 손을 내려다본다. 피부 아래로 뻗은 핏줄들을 손을 하나로 모아 지그시 누르며 맥박을 느낀다. 무릎을 꿇는다. 나는 지금 기도를 하려는 걸까? 살과 뼈를 지닌, 훌륭한 프로그램인 나는.

-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이 눌려 아프다.
내 생각에 이 아픔은 진짜다. 아픔을 만드는 알고리즘은 없다. 나는 손목을 내려다보고, 거기 나 있는 흉터에 흠칫 놀란다. 너무도 익숙하다. 전에도 해 본 적이 있는 것처럼. 가로로 난 흉터, 벌레처럼 징그러운 분홍색 흉터들이, 나를 실패자라며 비난한다. 알고리즘에 생긴 버그들이.
그날 밤이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사방에 흥건한 피, 귀를 찢을 듯 시끄러운 경보음, 나를 꼼짝 못 하게 붙잡고 손목에 붕대를 감던 웨스트 박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던 브래드, 영문 모를 슬픔으로 일그러진 그의 표정.
제대로 했어야 했다. 동맥은 깊숙이 숨어 있으니까. 지켜 주는 뼈 아래에 진심으로 할 작정이라면 세로로 그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알고리즘이다. 어떤 일에나 정해진 방법이 있다. 이번에는 나도 제대로 할 작정이다.
시간은 조금 걸리지만, 마침내 졸음이 찾아온다.

사랑의 알고리즘

 


- 내 애플파이의 비결은 사과를 오로지 홍옥만 넣는 것이다. 홍옥은 날이 추워지기 직전까지 따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새콤한 맛을 잃지 않는다.

- "으음, 맛있어." 리즈는 카이로행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에 파이를 먹으며 말했다. "에이미 언니, 이 애플파이는 보스턴에 가서 팔아야 해. 그러면 마사 스튜어트처럼 유명해질걸."
나는 여행을 떠나는 리즈에게 주려고 파이 두 개를 구워서 새로 산 스마트 밀폐 용기에 넣었다. 컴퓨터 칩이 붙어 있어서 습도가 조절되는 용기였다. 
"가져가서 비행기에서 먹어. 출출할 때."
리즈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애의 웃음소리는 크고 거침이 없었다. 어린애처럼. 웰즐리 여대에서 보낸 4년이라는 시간도 리즈의 왈가닥 같은 목소리를 뉴잉글랜드 지방 상류층의 점잖은 미소로 바꿔놓지는 못했다. 

 

- "언니, 끼니 정도는 나도 챙길 줄 알아. 내가 굶어 죽을까 무서워서 날마다 이집트까지 파이를 부쳐 줄 작정이야?"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리즈가 사는 방식은 내게 늘 위태롭게만 보였으므로. 그 애는 어린 시절을 무슨 격류에 떠내려가는 뗏목처럼 보냈다. 요리도 바느질도 배운 적이 없었고, 5분에 한 번씩 가까스로 사고를 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는 운전도 할 줄 몰랐다. 끼니를 챙겨 먹는 것도 깜박하곤 했고, 그럴 때면 친구들한테 꿍쳐 둔 과자를 좀 달라고 불쌍하게 애걸했다. 겨울옷이 든 상자를 어디에다 뒀는지 잊어버린 어느 해 12월에는 담요를 친친 두르고 학교에 간 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못 했건만. 그러거나 말거나 리즈는 걸핏하면 큰 소리로 깔깔 웃었다. 리즈가 영리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단지 삶을 이어가는 데에 필요한 실용적이고 자질구레한 부분에 신경을 안 쓸 뿐이었다.

- 결국 우리는 파이를 공항까지 들고 가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한 조각씩 나누어 주었다. 개중에는 수상쩍다는 눈으로 보거나 빈정대며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고마워하며 받았다. 리즈는 그들 모두에게 내가 빵집을 차릴 거라며 이 파이는 맛보기용이라고 말했다. 내가 사실이 아니라고 바로잡기도 전에, 리즈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주문서를 내게 내밀었다.
"이 사람들이 언니한테 수표를 보낼 거야, 그걸 받으면 택배로 파이를 보내 줘. 잘됐잖아! 언니 요리 솜씨는 진짜 끝내준다고. 그걸로 뭔가 해야 돼."

 

- 별안간 나는 변변한 생계 대책도 없는 언니가 되었고, 리즈는 그런 나에게 세상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는 동생이 되었다. 흐뭇하면서 한편으로는 욱하는 기분이었다. 리즈와 5분 넘게 같이 있다 보면 보통은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 요즘도 일주일에 서너 건씩 파이 주문이 온다. 내가 직접 광고를 하지는 않기 때문에, 순전히 입소문으로 들어오는 주문이다. 내 파이를 2주에 한 번씩 배송받는 노부인들은 자기 조카와 딸에게 내 연락처를 알려 준다. 무슨 가보를 물려주기라도 하듯이. 주문 한 건 한 건을 처리할 때마다 나는 리즈에게 보내는 파이라고 상상한다. 뉴욕에 있는 리즈에게, 투손에 있는 리즈에게, 토론토에 있는 리즈에게 한 번은 홍콩에 보낸 적도 있다.
물론 실제로는, 리즈는 내 파이의 가장 먼 목적지보다 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 늙어 가다 보면 사람은 점점 파충류와 비슷해진다. 아침에 햇볕을 흠뻑 쬐지 않으면 돌아다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베스가 들를 때 인공 태양등을 사다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겨울 아침에는 볕을 쬐기가 힘드니까.

- 오늘 아침은 화창하다. 오늘처럼 따뜻한 날은 나뭇잎에게 축복이다. 광합성을 통해 차오른 당(糖)을 차가운 밤공기가 잎 속에 가둔다. 머잖아 단풍나무가 불타오르듯 붉어질 테고, 시골길은 남쪽에서 온 관광객들의 차로 가득 찰 것이다.

- "생존용품 중에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양말이야." 리즈는 짐을 싸면서 내게 말했다. "히치하이킹을 할 땐 발바닥이 폭신한 양말을 신는 게 아주 중요해, 왜냐면 엄청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것 말고도 양말은 쓸모가 많아. 예를 들면, 마실 물을 정화하는 필터로 사용한다거나."
나는 당장 엄마 아빠한테 달려가 일러바치겠다고 을러댔다. 내가 걱정한 것은 리즈의 반항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그때는 그런 태도를 이미 받아들여서 그러려니 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오히려 양말 두 켤레로 어떻게든 버몬트주에서 캘리포니아까지 가겠다는 고작 그걸로 가는 길에 만날지도 모르는 연쇄 살인마와 성범죄자, 사기꾼 등등을 물리치겠다는 리즈의 순진한 낙관주의가 더 걱정스러웠다.

 

- "아니, 언니는 안 이를 거야. 내가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걸 언니도 아니까."
"랜드에서 집까지 오는 길도 못 찾는 주제에 무슨 소리야! 너 그렇게 혼자서 여행길에 나서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나 해? 캠핑장비도 없지, 옷도 없지, 약도 없지, 돈도..."
"그래서 하나도 안 위험하다는 거야. 언니, 나한텐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나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 나는 리즈의 단순하고 황당무계한 논리에 할 말을 잊었다. 동생 머릿속에 상식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욱여넣고 싶은 마음이 내게 없었다면, 나는 아마 웃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리즈의 근거 없는 낙관이 잘 풀리리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일상생활에 서툰 것처럼 보이는 리즈의 결점들이 어떻게 장점으로 변하는지를 이미 몇 번이나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코네티컷주까지 가서 길을 잃었을 때, 아버지가 찾아낸 리즈는 가장 가까운 세븐일레븐 편의점의 점원들에게 슬러시를 얻어 마시며 연애 상담을 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 빌려 입은 드레스 앞섶이 온통 슬러시 시럽으로 물들었지만 드레스 가게 주인은 리즈의 모험담을 듣고서 세탁비를 받지 않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 블랑시 두보아처럼, 리즈는 남들의 친절에 기댔다. 사람들은 저절로 리즈에게 끌렸다. 그 애한테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 나는 부러웠다. 리즈의 무모함이, 자기 삶을 상대로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자신감이. 더 어릴 적에 우리는 둘 다 학업 성적이 좋았고, 특히 과학에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성격은 서로 딴판이었다. 나는 2년 과정인 전문대학을 마치고서 확신과도 같은 체념에 빠졌다. 내가 머리는 좋을지 몰라도 남 앞에 서기를 두려워한다는, 그래서 집에 들어앉아 식구들이 행복해지도록 돌보며 세상이 나를 빼고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에 만족한다는 체념이었다. 어차피 아버지의 과수원을 물려받을 사람도 있어야 했고.

- 그렇게 리즈는 생수와 양말을 챙겨 집을 나갔고, 나는 이튿날부터 일주일 내내 아버지의 호통을 들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할 마음을 먹었을 때, 마침 리즈가 보스턴에서 부친 엽서가 도착했다. 리즈는 엽서에 잘 지내고 있다고, 95번 고속도로에서 멋진 재즈 밴드를 만났다고 적었다.

- 리즈는 습관처럼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보스턴의 펜웨이에서, 뉴욕의 맨해튼에서, 워싱턴의 관광 명소 내셔널몰에서, 드넓은 미시시피강 기슭에서, 중서부에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 그레이트플레인스에서, 모르몬교 신자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보였던 메마르고 척박한 유타주 사막에서, 오래전 중국인 인부들이 산을 뚫어 철로를 놓았던 로키산맥에서, 그리고 마침내, 샌프란시스코의 피셔맨스 워프에서.

- 그렇게 보내는 엽서에 리즈는 '위대한 미국 소설'을 적었다. 그 애가 250개 단어로 그린 삽화 속에는 유별나고 인정 넘치는 미국이 그려져 있었다. 생활비를 벌려고 주유소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법학 전문 대학원 학생의 사연, 형제지간인 경찰관 두 명(히치하이킹 금지 구역에서 차를 잡으려 하던 리즈를 체포한 장본인들)과 데이트한 이야기, 샤워를 하고 싶어서 모르는 집 문을 대뜸 두드렸을 때 안으로 들여준 어느 주부 이야기(리즈는 그 집에서 샤워만 한 것이 아니라 이튿날 푸짐한 남부식 아침 식사까지 대접받았다)까지. 리즈는 판에 박힌 여행기를 새롭게 쓰는 재주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는 리즈가 적어 보내는 소식을 읽으며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셋이서 몇 시간씩 엽서를 돌려 읽으며 리즈가 만난 사람 한 명 한 명을 꼼꼼히 살피고 낱낱이 뜯어보았고, 저마다 추측한 바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미시시피주 어디쯤에서 그 애의 가출을 용서했던 것 같다.

- 리즈는 석 달 후에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탑승 게이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마침 출발 직전에 출장이 취소된 회사원한테서 탑승권을 공짜로 얻었던 것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배낭도 양말도 갖고 있지 않았다.

- 그날 밤 리즈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가 모는 차를 타고 웰즐리 여대로 가야 했으니까. 밤이 깊었을 무렵, 리즈가 몰래 내 방으로 들어왔다.
"언니도 나랑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리즈가 소곤거렸다. 내 침대에 나란히 누운 그 애의 몸은 따뜻했다. 꼭 껴안고 싶을 만큼.
동생의 목소리가 조금 슬프게 들렸지만, 한편으로 나는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 나도 갔으면 좋았을걸."
"근데 언니, 그거 알아? 제일 중요한 생존용품은 양말이 아니었어. 그건 우리 몸이야."
내 동생이 드디어 실용적인 삶의 지식을 하나 배웠구나, 그때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 이제 그 과수원은 내 소유가 아니다. 십 년 전에 팔았으니까. 존이 죽고 나서 베스와 단 둘이 살아가다 보니 내 힘으로 건사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도 들어가서 산책하기에는 여전히 좋은 곳이다. 나는 과수원 끄트머리에 있는 홍옥 나무들 쪽으로 향한다. 사과 따기 체험을 하러 오는 관광객들은 보통 과수원 가운데쯤에 이르면 바구니가 다 차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는 이가 드물다. 어차피 홍옥은 그냥 먹기에 좋은 사과는 아니다. 맛이 너무 시어서. 

- 그래도 나는 홍옥이 제일 좋다. 매킨토시종을 비롯한 '생으로 먹기 좋은' 사과는 입으로 맛을 보게 마련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과육이 말 그대로 녹아내리듯이 목으로 넘어가니까. 그런 반면에 홍옥은, 온몸으로 맛을 음미한다. 단단한 과육은 깨물면 턱이 얼얼하고, 아삭거리는 소리는 두개골에 부딪혀 메아리치고, 시디신 맛은 혓몸을 타고 넘어 발끝까지 퍼져 나가니까. 홍옥을 먹을 때면 내가 정말로 살아있는 느낌이 난다. 세포 하나하나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아아, 이거야, 더 줘, 부탁이야.' 

- 내 생각에 몸은 저 나름의 지능이 있다. 정신은 결코 하지 못할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줄 아니까.

- 리즈가 대학에 다닐 무렵, 인공지능이 또다시 시끌벅적한 유행을 일으켰다. 넥스텐션스라는 기업이 개발한 신형 3차원 칩이 마침내 실시간 데이터 처리의 장벽을 부수는 연산 능력을 실현했던 것이다. 최초의 나노 신경 네트워크 또한 대량 생산 단계에 들어섰다. 그 모든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여름 방학이 되면 리즈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연구소에서 통계 양자 컴퓨터를 연구하며 실제로 작동하는 최초의 시제품을 개발했다. 그 애의 열정은 전염력이 있어서, 나까지 덩달아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인공지능 관련 자료를 모조리 찾아 읽을 정도였다.

- 리즈는 나와 몇 시간씩 전화로 이야기하곤 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숨도 안 쉬고 재잘거렸다. 나는 장단을 맞춰주려고 그 애가 집에 두고 간 교과서를 읽으며 공부했다. 심지어 리스프와 프롤로그 같은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기까지 했다. 실력이 쑥쑥 느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아아, 내가 이렇게 내성적이지만 않았어도!). 그 언어로 프로그램을 짜는 과정에는 일종의 유기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꼭 파이를 굽는 것처럼.

- "여행은 말이야." 리즈가 말했다. "우리 정신을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일 뿐이야. 내가 하는 일은 새로운 정신을 창조하는 거고. 그러니까 내 삶은 곧 수많은 정신과 만나는 과정인 거야."

- 내 집에는 표준형 인공지능을 사용한 편의 장치가 하나도 없다. 심지어 구식 모델조차도. 러다이트 운동가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그런 기계들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리즈가 죽은 후에.

- 나는 그 물건들이 소름 끼쳤다. 내가 정말로 일어나고 싶은지 어펀지 알아맞히는 자명종 시계, 내 기분을 추측하여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알려 주는 텔레비전, 난방비 영수증과 내 건강 상태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실내 온도를 결정하는 온도계 같은 것들이. 그런 물건에 정말로 조그마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금처럼 보람 없는 일을 맡기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나는 추울 때 스웨터를 입으라고 가르쳐 주는 기계 따위는 필요 없다.

- 석양빛 속에서 리즈는, 왠지 벌거벗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 같다. 장신구에 내장된 스마트 거울이 얼굴과 팔에 젊어 보이게 하는 빛을 쉬지 않고 미세하게 비춰 주다가 이제는 꺼졌기 때문이었다. 거울이 켜져 있는 동안 리즈는 열아홉 살처럼 보였다. 거울이 꺼지자 서른다섯 살처럼 보였다. 내 눈에는 벌거벗은 리즈가 더 예뻐 보였다. 거울을 끈 상태의 리즈가.

- "이 얼마나 낭비인지. 너무나 더럽고 더러운 이 육신(셰익스피어의 <햄릿> 제1막 제2장 129행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 옮긴이)은."
점점 짙어 가는 어둠 속에서 손을 잡은 채로, 우리는 몇 시간이나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동생의 차가운 손을 내 두 손바닥으로 감싸는 느낌이 좋았다. 동생의 손끝에 천천히 피가 돌면서 따뜻해지는 느낌이, 동생의 튼튼한 심장 박동이.

- "에이미 언니, 언니는 안 무서워?"
어릴 적에 쓰던 방의 문 앞에서 리즈가 내게 물었다.
"뭐가?"
"우리 몸이 얼마나 약한지 생각해 보면 말이야. 우리가 어렸을 때 아빠가 얼마나 튼튼해 보였는지 기억나? 달려가서 아빠 품에 뛰어들 때면 무슨 벽에 부딪힌 것 같았어." 

- 그날 리즈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에이미 언니, 내가 지금부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언니는 이미다 알잖아.
"두뇌를 얇게 저미는 건 지금도 가능해. 한 번에 신경 세포 한 층씩. 우리 회사가 벌써 몇 년 전부터 보유하고 있는 기술이야."
"그 데스티니라는 이름, 무슨 뜻으로 지은 거야?"
내가 물었다. 돌아올 대답을 두려워하며.
"데스티니(DESTINY)는 '신경 수율 증폭을 위한 파괴적 전자기 스캔(Destructive Electromagnetic Scan To Increase Neural Yield)'의 머리글자야."

 

- 파괴적. 내가 말문이 막힌 채(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표정도 없이 (뭔가 느낄 수나 있었을까?)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리즈는 두뇌를 얇은 표본으로 만드는 방법을 내게 설명했다. 한 번에 신경 세포 한 층씩, 세포 간의 연결망과 기다랗게 뻗은 말단부를 하나하나 기록하여 지도로 만드는 방법을. 그 모든 과정은 두뇌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죽은 두뇌로 하면 왜 안 되는데?"
"그건 이미 해봤어. 세포 열화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더라고. 스캔용으로 구할 수 있는 죽은 두뇌에서는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패턴이 충격과 질병 때문에 모호해진 경우가 많아 더는 정신을 품지 않는 죽은 두뇌는 우리가 만들려는 정신의 토대가 될 수 없어. 살아서 박동하는 심장을 해부해 보지 않고서는 순환 계통을 이해할 수 없듯이."

- "남김없이 모조리 포착될 거야. 내 두뇌의 구석구석이, 마지막 한 귀퉁이까지, 가장 사소한 신경 연결체 하나까지도. 그러고 나서 맨 먼저 할 일은 내 두뇌의 복사본을 만드는 거야, 실리콘으로. 그렇게 하면 나는 다시 살아나. 차이가 있다면 내가 전보다 10억 배 더 빠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더 이상 늙거나 죽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왜냐면 나한테는 이제 몸이 없을 테니까. 그 일을 다 해내면 앞으로는 아무도 죽지 않아도 돼. 이 연약한 육신이 우리 감옥이 아니게 되는 거야. 그렇게 우리는 우리 숙명을 완수하는 거야." 
"만약 실패하면?"
"직접 부딪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잖아, 안 그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이미 다 마쳤어. 만에 하나 실패한다고 해도, 아주 멋진 여행이 될 거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리즈는 다시 여행에 나서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고, 그 여행길에 가져가도록 내가 쥐여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번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을. 내가 챙겨 줄 수 있는 것은 리즈의 몸뿐이었다. 그 애가 머잖아 남겨 두고 떠날 몸. 내 동생은 드디어 영영 떠나 버릴 작정이었다. 

- 나는 하얀 방 안에 있고, 내 머리 위에는 수술용 정밀 톱이, 내 시야 바로 위쪽의 안 보이는 곳에서,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다. 침착해지려고 애써 보지만 소용이 없다. 마취를 하면 측정 결과가 왜곡되기 때문에 깨어 있는 상태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수술대에 묶인 채로, 과다 호흡을 일으키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

- 아버지는 리즈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그 애가 나비 흉내를 내도록 도와주었다. 어머니가 심어 놓은 꽃나무 화분들 사이로 두 팔을 펄럭거리도록. 그 애의 웃음소리는 언덕 위의 과수원에까지 들려왔다.

- 내가 동생의 정신이 기록된 복사본들을 파기시키려고 로고리즘스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몇 년을 끌다가 결국 패소로 끝났고, 그들은 그 복사본을 지금도 소유하고 있다. 로고리즘스는 그 복사본들이 과학 데이터로서 너무도 소중하다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인공지능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촉발된 대중적 분노는 반(反)파괴적 스캔 법안의 통과라는 결실을 맺었고, 로고리즘스는 이제 북아메리카 땅에서 사업을 할 수 없다. 내가 작게나마 위안으로 삼는 결과이다. 

- 나는 리즈를 제대로 추모할 수조차 없다. 리즈가 멀리에, 다른 대륙에 위치한 기계의 데이터 그리드 간극 속에 고정되어 있는 채로는, 그럴 수 없다. 보나 마나 로고리즘스는 점점 더 정교해지는 자기네 신경망 속에서 리즈를 되살리려고 몰래 시도했을 테고, 보나 마나 리즈는 몸도 정신도 없이 영겁의 고독을 곱씹는 고통을 몇 번이고 겪었을 것이다. 그 복사본들 가운데 어떤 것이 내 동생일까? 나는 어떤 복사본을 위해 추모해야 할까? 

-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엽서 컬렉션을 돌아보고 파이를 굽고, 아침의 햇살과 커피 향기로 내 몸에 영양을 공급한다. 내가 죽을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베스는 나를 제대로 추모해 줄 것이다.

- 나는 홍옥을 한입 깨문다. 그 황홀한 신맛이 내 몸을 타고 퍼져 나가도록.

카르타고의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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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 구역을 지날 때면 엄마는 도로변 휴게소에 꼭 들러서 원주민들이 만든 전통 토기를 감상했다. 누나와 나는 진열대 사이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뭔가 깨뜨릴까 봐서.

차로 돌아온 후에 엄마는 가게에서 산 조그만 단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 단지를 손에 들고 이쪽저쪽으로 뒤집으며 살펴보았다. 거칠고 뽀얀 표면과 촘촘하고 정교한 검은색 기하무늬, 머리에 깃털을 꽂고 몸을 그린 채 피리를 부는 사람의 윤곽을 굵은 선으로 묘사한 그림 같은 것들을.

- "놀랍지, 안 그래?" 엄마가 내게 말했다. "이건 물레를 돌려서 만든 게 아니야. 여성 작가가 손으로 길게 늘인 점토 반죽을 친친 쌓아 만들었단다.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기술을 그대로 사용한 거야. 점토를 파낸 곳도 증조할머니가 흙을 파던 바로 그곳이었대. 그 사람은 오래된 전통의 생명을 이어 가는 중이야. 삶의 방식을."
손에 쥔 단지가 갑자기 묵직해진 느낌이 들었다. 몇 대에 걸친 기억의 무게를 내가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 "그냥 장사에 도움이 되라고 지어낸 이야기야." 운전석에 앉은 아빠가 뒷거울로 나를 보며 한 말이었다. "그런데 사실이라면 더 슬픈 이야기지. 만약 우리가 선조들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사는 방식은 이미 죽은 거고, 우린 화석이 됐다는 뜻이니까.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 주는 공연 같은 거지."
"그 여자는 공연 같은 거 하지 않았어. 당신은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게 뭔지, 지켜야 할 가치가 뭔지 하나도 몰라. 인간으로 살기 위해선 진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 도대체 뭘 위해 돈까지 내고서 이러는지 궁금해한다.
어머니의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살 모양은 조각한 가면처럼 변하지 않는다. 뇌졸중이 초래한 마비는 영구적이다.
이불을 젖히고서, 간병인이 당신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기 시작한다. 당신은 눈을 돌리려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보지 않는 것은 그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인 것을. 당신은 어머니의 앙상한 두 다리를, 뼈를 덮은 창백한 피부에 점점이 핀 저승꽃을 보고 흠칫 놀라고, 숨을 참는다.
그러나 냄새는 당연히 느껴지지 않는다. 젖은 기저귀도, 무력한 어머니의 수치심도, 소독약과 부패와 죽음의 냄새도 당신은 감지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처한 조건의 물성은 당신의 후각 세포를 감싼 섬세한 막에 닿지 않는다. 문명이란 죽음이라는 현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점점 더 정교해지는 거짓말을 쌓아 가는 과정이다. 당신은 여전히 드넓은 대양의 건너편에 있다. 

- 간병인은 자기 일을 조용히 척척 해치운다. 더러워진 기저귀를 침대 옆의 양동이에 던져 넣고 수건으로 어머니의 몸을 깨끗이 닦는다. 그러고는 다시 어머니의 다리를 들고 새 기저귀를 채운다. 당신은 그제야 숨을 길게 들이쉰다.

- "미국에 살아요?”
당신은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린다. 그 동작을 하느라 걸린 30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이내 말을 건 사람이 보인다. 표정에 호기심이 가득한 중년 여성이 당신은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멀리 사네. 어머니가 말은 못 해도 아들 생각 많이 하실 거야. 돌아와야지."
당신은 무례하고 주제넘은 그 여성에게 화가 치민다. 그 여성에게 당신은 짊어진 의무가 있다고, 주택 담보 대출과 어린 자식들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미국에서 살기가, 일자리를 지키기가, 이곳에 있을 형편은 안 되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인력이 부족한 병원에서 몇 시간 동안 대소변을 깔고 누워 있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서 간병인을 고용할 돈을 벌기가 쉽지는 않다고 설명해 주고 싶다. 미국으로 건너와서 같이 살자고 당신이 몇 년이나 설득했지만 어머니는 외국으로 이주하기를 거부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 여성에게 본인도 자기 자녀들 손으로 이곳에 버려진 채 기계에 구현된 유령의 모습으로만 그들을 만나는 주제에 당신한테 핀잔을 준다고 쏘아붙이고 싶다. 당신과 당신 아이들이 낯설고 머나먼 땅에서 기회로 가득한 삶을 누리기를 바란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는 점을 꼭 언급하고 싶다. 

 

-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시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30초를 더 소비해서.

- 간병인이 당신에게 손톱깎이를 건넨다. 그 물건은 당신 팔 끄트머리의 손 모양 머니퓰레이터에 찰칵 소리를 내며 장착된다.
"어머니 손톱을 깎아 주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은 눈앞이 캄캄해진다. 다른 사람의 손톱을 깎으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 이 로봇은 죄책감을 덜어 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너무 멀리 살고 핑곗거리도 너무 많은 이들을 위하여. 어머니 곁의 당신이 본질적으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기술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접속을 끊고 나서 당신은 울음도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간호사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어머니가 어젯밤에 잠드셔서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 이제 밤마다 어머니한테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당신은 서랍장 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외면하고 만다.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 떠올리려고 애쓰다가, 이럴 때 픽션을 흉내 내려하는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괜찮아, 당신?" 당신 아내가 묻는다.
"지금은 얘기하기가 좀 그래." 당신은 딱 잘라 말한다.
딸이 당신에게 다가온다. "손톱이 너무 많이 길었어요."



- 내 이름은 르네 테이오 ☆🐳 파예트. 6학년이다.
오늘은 학교가 쉰다. 하지만 오늘이 특별한 날인 이유는 따로 있다. 긴장이 돼서 아직은 그 이유를 밝힐 수가 없다. 미리 말해 버리면 징크스가 될까 봐. 

- 나는 아직 어려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지 못하지만, 부모님이 주신 세계가 있어서 아주 행복하다. 내 방은 클라인 대롱(직사각형의 윗변과 아랫변을 각각 원형으로 붙여 원통을 만들고 이 원통을 한 번 비틀어 좌우 두 변의 방향이 반대가 되도록 붙인 대롱.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로 안팎을 구별할 수 없는 2차원 곡면으로, 3차원에서는 구현할 수 없고 4차원에 존재한다 - 옮긴이)이라서 안에 갇힌 느낌이 하나도 안 든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노란빛이 방 안 가득 번지다가 아득히 먼 곳의 어둠 속으로 서서히 스러진다. 이 조명은 구식이다. 한 몇 년 전, 유행하는 디자인이 아직 예전의 물질세계를 암시하려고 애쓰던 시절에 만든. 하지만 매끈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평면은 안정감이 느껴진다. 꼭 붙어 있고 싶은, 안에 감싸지는 동시에 바깥에 있는 느낌이다. 세라네 집에 있는 그 애 방보다 더 좋다. 그 방은 바이어슈트라스 '타원곡선'이라서 모든 곳이 연속되어 있지만 어느 곳도 미분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자세히 봐도 들쑥날쑥한 프랙털로 보일 뿐이다. 분명 굉장히 현대적이지만, 그 방에 놀러 가면 좀처럼 편하지가 않다. 그래서 세라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가 훨씬 많다. 

- "숙제 잘하고 있어? 뭐 필요한 건 없고?"
아빠가 묻는다. 아빠는 '안으로' 들어와서 내 방의 표면에 자리를 잡는다. 20차원인 아빠의 모습은 이 4차원 공간에 처음에는 조그마한 점으로 투영되다가, 서서히 윤곽선으로 바뀌어 천천히, 환한 금빛으로, 하지만 살짝 흐릿하게 일렁거린다. 아빠는 딴 데 정신이 팔렸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빠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인데 '휴고파예트 앤드 Z. E. 中丽 페이' 디자인 회사를 찾는 고객이 너무 많아서, 그러니까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세계를 짓도록 도와주느라 맨날 바쁘다. 하지만 나랑 같이 놀아 주는 시간이 적다고 해서 나쁜 아빠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빠는 훨씬 높은 차원에서 일하는 데에 하도 익숙하다 보니 4차원에서는 엄청 지루해한다. 그런데도 성장기 아이한테는 4차원 환경이 최고라는 전문가들 말을 듣고 내방을 클라인 대롱 형태로 디자인해 주었다. 

- "다 잘돼 가요."
세라와 나는 함께 그렇게 생각한다.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나는 우리가 긴장한 이유를 아빠가 나랑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세라가 옆에 있다 보니 아빠는 그 생각을 꺼내면 안 된다고 느낀다. 잠시 후, 아빠가 휙 사라진다.

- 우리가 하는 숙제는 유전학과 유전 형질에 관한 프로젝트다. 어제 수업 시간에 바이 박사님이 우리 의식을 여러 개의 구성 알고리즘으로 분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각각의 알고리즘은 다시 루틴과 서브루틴으로 해체되었고, 결국 우리는 개별 명령어, 즉 근원 코드가 되었다. 그런 다음 바이 박사님은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제각각 우리에게 그 알고리즘의 일부를 주었는지 설명하셨다. 우리가 태어나는 과정에서 알고리즘들이 여러 루틴을 재결합하고 재배치한 결과 우리는 완전한 인격, 즉 우주에 새로이 탄생한 어린 의식이 되었다.

- 나는 생각으로 세라에게 화답한다. 내 부모님 여덟 분이 나한테 자신들의 일부를 주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지만, 그 부분들이 변화하고 재결합하여 이루어진 나는, 여덟 분 모두와 다 다르다.

-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는 가계도를 만들고 혈통을 추적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고대인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내 가계도는 엄청 간단한데 왜냐면 나는 부모님이 여덟 분밖에 안 계시고 그분들 각각의 부모님은 훨씬 더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라는 부모님이 열여섯 분이나 되고 그 윗대로 올라가면 훨씬 더 바글바글하다.

- "르네." 아빠가 우리 생각에 끼어든다. "손님 오셨다."
아빠의 윤곽선이 지금은 전혀 흐릿하지 않다. 아빠의 생각투는 의도적으로 억제되어 있다.

- 아빠 뒤쪽에서 3차원 여성이 나온다. 그 여성의 모습은 더 높은 차원에서 투영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굳이 3차원 이상으로 가려 하지 않으니까. 나의 4차원 세계에서 그 사람은 납작하고 허전해 보인다. 교과서에 나오는 예전 세상의 그림 설명처럼.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은 내 기억 속 얼굴보다 더 예쁘다. 내가 그리워하며 잠들고 꿈에서도 보는 얼굴. 이로써 오늘은 진짜 특별한 날이 됐다.
"엄마!"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투가 네 살배기 꼬맹이 같다는 건 신경도안 쓴 채로.

- 엄마와 아빠는 나를 낳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모두에게 각자의 일부를 조금씩 나누어 달라고. 내 생각에 나의 끝내주는 수학 실력은 해나 이모한테서, 부족한 참을성은 오코로 삼촌한테서 물려받은 것 같다. 친구 사귀기에 서투른 건 리타 고모를 닮았고 정리정돈을 잘하는 건 팡레이 삼촌을 쏙 빼닮았다. 하지만 나의 거의 모든 부분은 엄마랑 아빠가 물려주었다. 나무 모양인 내 가계도에 제일 굵게 그린 나뭇가지는 엄마와 아빠를 의미한다. 

- 호를 (20년이 더 흐른 후에) 받으면 우주 비행사의 의식이 강력한 송신장치를 통해 탐사선으로 전송된다. 공허한 우주를 넘어, 빛의 속도로. 일단 전송이 끝나면 우주 비행사는 로봇에 구현되어 신세계를 탐사한다.
"엄마는 그 우주비행사가 될 거야."
나는 엄마의 생각이 무슨 뜻인지 열심히 추측해 본다.
"그러니까, 또 다른 엄마가 그 별에 살 거라는 말이에요? 금속 신체에 구현된 상태로?"
"아니." 엄마가 생각한다, 담담하게. "원본을 보존한 채로 의식의 양자 연산을 복제하는 일은 아직까지는 불가능해. 다른 세계로 가는 건 내 복제본이 아니야. 바로 나야." 

- "그럼 언제 돌아올 건데요?"
"안 돌아와. 의식을 지구로 재전송할 만큼 커다랗고 강력한 송신장치를 보내기에는 우리가 보유한 반물질의 양이 충분치 않거든. 소형 탐사선을 보낼 만큼의 연료를 구하는 데만도 수백 년이라는 시간과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들어갔어. 탐사 과정에서 수집한 데이터는 힘닿는 데까지 많이 보낼 테지만, 엄마는 영영 그곳에 남을 거야." 
"영원히요?"
엄마는 잠시 침묵하다가 방금 한 생각을 바로잡는다.
"탐사선은 튼튼하게 만들었으니까 꽤 오래 버티겠지만, 그래도 결국은 망가지겠지."

- 나는 의식 속으로 엄마의 모습을 그려 본다. 남은 삶 동안 로봇 속에 갇혀 있는 엄마를. 낯선 세계에서 녹슬고 부패하다가 망가질 로봇 속에 우리 엄마는 죽을 것이다.

- "그럼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겨우 45년 남은 거네요."
내가 생각한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인다.
45년이라는 시간은 생명의 자연적 길이에 비하면 눈 깜짝할 새다. 그러니까, 영원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 화가 나서 잠깐 동안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엄마가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만 나는 물러난다.
그러다 한참 만에 화를 삭이고 물어본다.
"이유가 뭐예요?"
"탐험은 인류의 숙명이야. 하나의 종(種)으로서 우리는 성장해야만 해. 네가 어린아이에서 성장해 가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 어처구니가 없다. 우리가 탐사할 세계는 끝도 없이 많다, 데이터센터라는 이 우주 안에만 해도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심지어 자기만의 다중 우주도 창조할 수 있다. 그럴 마음만 먹으면. 수업 시간에 우리는 사원수 쥘리아 집합의 복잡한 구조를 탐험하고 확대해 보았는데, 어찌나 아름답고 생경하던지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그 속을 날아다니는 동안 의식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우리 아빠가 고객의 가족들과 함께 디자인한 세계는 너무나 여러 차원이라서 나는 다 이해하기도 힘들다. 데이터 센터에 있는 소설과 음악과 예술 작품은 내가 평생 즐기고도 남을 만큼 많다. 그 평생이란 사실상 무한대인데도. 그에 비하면 물질세계에 있는 3차원 행성 하나가 뭐 그리 대수일까?

- 나는 그 생각을 굳이 혼자 품으려고 하지 않는다. 엄마도 나의 분노를 느꼈으면 해서.

- "내가 지금도 한숨을 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엄마가 생각한다. "르네, 그것들은 똑같지 않아. 수학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상상계의 풍경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지만, 그건 실제가 아니야. 가상의 실체에 대한 영원한 통제권을 손에 넣으면서 인류는 무언가 잃어버렸어. 안으로만 눈을 돌리다 보니 현재에 만족하게 된 거야. 우리는 별들과 저 우주 바깥의 세계를 잊어버렸어."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또 울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엄마가 고개를 돌린다.
"너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엄마는 그냥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거잖아요." 내가 생각한다. "실은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도 안 하잖아요. 엄마 미워요. 다시는 안 볼 거예요."
엄마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래서 나한테는 엄마 얼굴이 안 보이지만, 엄마의 어깨가 떨리고 있다. 알아차리기도 힘들 만큼 살짝.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손을 뻗어 엄마의 등을 다독거린다. 나는 엄마한테는 도무지 모질게 굴 수가 없다. 그 점은 분명 아빠를 빼닮았을 것이다.
"르네, 엄마랑 같이 여행 갈까?" 엄마가 생각한다. "진짜 여행."

- "우리 여행의 진짜 출발지는 바로 여기야." 엄마가 생각한다.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긴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시간 동안 뭘 할지야. 르네, 두려워할 것 없어. 엄마가 너한테 시간과 관련된 중요한 걸 보여 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는 우리 의식이 엉금엉금 기는 속도로 느려진 동안 비행체의 배터리가 다 닳지 않도록, 비행체 제어 프로세서의 클록 수를 낮추는 루틴을 실행한다. 

-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속도가 빨라진다. 태양은 점점 더 빠르게 하늘을 가로지르다가 마침내 환한 띠로 바뀌고, 변치 않는 황혼으로 뒤덮인 세상에 아치 모양으로 드리워진다. 주위의 그늘이 꿈틀거리며 빙빙 도는 사이에 나무들은 쑥쑥 자라난다. 동물들이 쌩 지나간다, 너무 빨라서 뭔지 알아보지도 못할 속도로 우리가 지켜보는 고층 빌딩은 강철로 층층이 올린 돔을 옥상에 이고서 창처럼 꼿꼿이 서 있다가 차례로 바뀌는 계절과 함께 천천히 휘어서 기울어간다. 그 모양새가 꼭 하늘을 향해 뻗은 손이 점점 지쳐 가는 듯해서, 내 안 깊숙이 무언가 찡한 느낌이 든다. 
엄마는 프로세서를 다시 정상 속도로 돌려놓고, 우리는 그 빌딩의 위쪽 절반이 추락하여 굉음과 함께 무너져 가는 광경을 본다. 끄트머리부터 부서져 가는 빙산처럼, 주위의 다른 빌딩들까지 쓰러뜨리는 광경을. 

 

- "그 시절에 우리는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질렀지만, 잘한 일도 있었단다. 저기 저 빌딩은 크라이슬러빌딩이야." 엄마의 생각에서 끝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 가운데 하나지. 르네, 인간의 피조물은 그 어떤 것도 영원토록 남지 못해. 데이터 센터조차도 우주가 열역학적 사망을 맞기 전에 언젠가는 산산이 무너질 거야. 하지만 진짜 아름다움은 남는 법이야. 실체를 지닌 것은 모두 죽을 운명이라고 해도."

-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45년이 흘렀다. 내가 보기에는 기껏해야 하루 정도밖에 안 지난 것 같았는데.
아빠는 내 방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내가 여행을 떠나던 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남겨 두었다.
45년이 흐르고 난 지금, 아빠는 모습이 전과 달라졌다. 몸집에 차원이 더 붙었고 색채도 금빛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바로 어제 집을 나섰던 것처럼 나를 대한다. 나는 아빠의 그런 배려가 고맙다. 

-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아빠가 말하길, 세라는 이미 학업을 다 마치고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지금은 어린 딸도 있다고.
그 소식을 들으니 살짝 슬프다. 클록 수를 낮추는 일은 드물기도 하거니와, 남들보다 뒤처진 느낌을 갖게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남들을 따라잡으려고 열심히 살 테고, 진짜 우정은 나이 차이 같은 건 거뜬히 뛰어넘으니까 괜찮을 거다.

- 나는 엄마와 함께 보낸 긴 하루를 세상 무엇하고도 바꾸지 않을 거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 오래전에, 네가 조그만 아기였을 때 말이야, 우리는 달에 간 적이 있어.

- 베이징의 여름은 사나워. 덥고, 불쾌할 정도로 끈끈하고, 공기는 소나기가 지나간 길가의 물웅덩이처럼 텁텁하지. 무지갯빛 휘발유막으로 덮인 물웅덩이 말이야. 너랑 나는 찜통 안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만두가 된 기분이었어. 우리가 세 들어 살던 그 방 안에서.

- 갈 데라곤 아무 데도 없었어. 바깥의 보도는 에어컨이 있는 이웃집의 실외기가 윙윙거리는 소리와 에어컨이 없는 이웃집의 텔레비전이 음량을 한껏 높여 꽥꽥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단다. 거기다 네 울음소리까지 더해졌으니, 누구든 안 미치고는 못 배길 지경이었지. 나는 너를 어깨에 앉혀 목말을 태우고 바깥에 나갔다가, 방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곤 했어. 너한테 제발 좀 자라고 애원하면서.

- 어느 날 밤의 일이야. 그날도 나는 관청에 가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진정서를 내고 집에 돌아왔지. 네 엄마의 복수에 한 걸음도 가까워지지 못한 채로 말이야. 너는 내 안의 분노와 절망을 공감하고 목청껏 울더구나. 세상이 너무나 답답하고 캄캄해서 나도 너와 덩달아 울고 싶었단다. 이 미친 세상을 가득 채운 소리와 분노에 가담하고 싶어서. 

- 그때 달이 우리 머리 위로 낮게 지나간 거야. 금빛으로 무르익은, 동그란, 화덕에서 갓 꺼낸 사오빙(烧饼)처럼 생긴 달이. 그래서 나는 네 엄마가 남긴 스카프로 너를 등에 묶은 다음, 건설 공사가 수도 없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용케 살아남은 길가의 회화나무를 오르기 시작했어. 도로 확장 공사와 철거 공사, 오염 물질과 사람들의 무관심을 모두 견뎌 낸 그 나무를. 

- 나무를 오르는 시간은 길고 고됐단다. 땅에 가까워 보이던 달이 우리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꾸만 뒤로 물러났거든. 우리는 구름을 지나 찌르레기와 참새 떼를 뚫고서, 우리를 나무에서 떨어뜨리려고 위협하는 비바람을 이기고서 계속 올라가야 했어. 그러다 마침내 나무 꼭대기에서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우듬지에 도착했는데, 바로 그때, 달이 우리 머리 바로 위를 지나가기에, 냉큼 손을 뻗어 붙잡고는 너와 함께 올라간 거야. 

- 달은 정말 멋진 곳이었어. 공기는 선선하고, 하늘은 깨끗하고, 무슨 도서관처럼 조용했거든. 너는 달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울음을 그치고 동그래진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단다. 우리가 베이징에 처음 도착해서 그 많은 자동차들을 처음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 달 사람들은 아름답고 공손했단다. 여성들은 물처럼 출렁거리고 아른거리는 드레스를 입었고, 남자들은 새 자동차의 페인트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신을 신고 돌아다녔지. 모두가 당나라 때의 시인들처럼 우아하게 말을 했어. 벽옥과 백옥으로 지은 다관(茶館)에서는 이슬로 달인 차를 마시며 귓속말을 주고받고 서로의 재치에 웃음을 터뜨렸단다. 그곳 사람들이 먹는 떡은 계화꽃으로 향을 입혔는데, 달의 선녀인 항아(嫦娥)가 직접 만든 음식이었어. 건물은 벽만 만져봐도 서늘했으니 에어컨같이 투박한 물건은 만들 필요도 없었겠지. 하지만 한편으로 달 사람들은 거만했단다. 그들은 시골 출신의 가난한 무지렁이인 우리가 달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어. 우리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지. 우리는 시끄럽고, 그곳을 더럽히는 존재였으니까.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떨지요?" 달 사람들이 묻더구나.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들을 속일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었어.

- 샐리 러시는 의뢰인을 보며 살짝 웃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커피숍의 테이블 너머에 앉은 중국인 남자는 나이가 사십 대였다. 작은 키에 깡마른 체격, 구겨진 파란색 와이셔츠는 하도 여러 번 빨아서 색이 바랬고, 구두는 수선할 가망이 없을 만큼 너덜너덜했다. 헝클어진 머리는 군데군데 하얗게 셌고 인중과 턱에 제멋대로 난 수염은 깎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남자가 보온병에 담아 온 자기 몫의 차를 마시는 동안 테이블 위의 커피는 설탕도 크림도 없이 식어갔다. 이 장원차오라는 남자는 방금 막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사람처럼 보였지만, 상대방을 관찰하는 그의 눈빛은 냉랭하고, 차분 ... 

- "그럼 제 이야기가 잘 통할지 어떨지, 어떻게 아십니까?"

"그건..."
샐리는 말문이 막혔다. 일이 머릿속에 그렸던 것과 영 딴판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선생님의 이야기에 담긴 사실들은 난민의 법적 정의와 일치하거든요. 인종과 종교, 국적,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등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샐리는 말끝을 흐렸다. 법률 용어는 추상적으로 들렸고, 눈앞의 일을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 사실 샐리는 변호사로 사는 것과 법학도로 사는 것이 아예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다. 샐리는 가상의 사건 진술서를 낱낱이 분석하는 일, 그렇게 분석한 각각의 사실을 치밀한 법적 주장으로 통합하는 일, 또 그 주장을 고매한 이상과 방침으로 보완한 다음 눈부신 미사여구로 포장하는 일에는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지만, 상법 소송의 현실에는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아아." 말을 꺼내는 장원차오의 목소리에 담긴 의미를, 샐리는 훤히 파악했다. "변호사님이 공짜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군요."

- 위드마 이튼 법무 법인에 깔끔한 사건 진술서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기업들이 분쟁 상대를 소송비 청구서 더미에 파묻어 버릴 작정으로 찍어낸 서류가 가득한 상자들을 창고에서 꺼내어 이런저런 사실을 조합하는 것이 샐리의 업무였다. 알고 보니 샐리는 그 일이 전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런 샐리에게 직무 교육을 시키는 한편으로 무의미한 단순 노동의 보상도 제공할 요량으로, 회사는 샐리를 망명 신청자 대상 무료변론 업무에 배치했다. 샐리는 소송에서 져도 업무 과실을 이유로 법무법인에 소송을 제기할 여력이 없는 난민들을 변호하는 처지가 되었다. 회사의 진짜 고객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 만큼 경험을 쌓을 때까지.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샐리는 마땅히 자신감을 갖고 앞에 나서야 했다. 의뢰인을 이끌어야 했다.

- "어쩌다가 변호사가 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알 수 있으니까요. 제가 저의 이야기를 하도록 변호사님이 잘 도와주실 수 있을지, 어떨지." 

- 이때껏 살아오는 동안 내내 샐리는 명확성을 신봉했다. 친구들이 다툴 때면 언제나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를 잘 알았다. 언제나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옳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샐리 본인만큼 옳지는 않았지만.

- 열 살이던 해, 샐리는 가사 도우미인 루이자가 저녁 식탁의 남은 음식을 자기 가방에 담는 장면을 목격했다.
"부탁이야, 못 본 척 해 주렴." 루이자가 애원했다. "우리 딸한테 갖다 주려고 그래."
루이자가 보여 준 사진에는 샐리 또래의 여자아이가 찍혀 있었다. 사진 속 여자아이는 머리카락도 눈도 검었고,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지도 않았다. 
"우리 딸이 밤만 되면 배가 고파서. 너희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줘."

- 샐리가 그날 목격한 것을 고자질했을 때, 아빠는 놀라는 한편으로 슬퍼 보였다.
"만약 그 여자애가 배가 고파서 힘들어하는 걸 네가 봤다면, 네 저녁밥을 나눠 주고 싶지 않겠니?"
"당연히 그렇겠죠."
아빠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표정이었다.
"다행이구나."
아빠는 토론이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루이자 아줌마한테 우리 집에 그만 오라고 하세요." 샐리가 말했다. "제가 자진해서 저녁밥을 나눠 주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도둑질은 잘못이니까요."
아빠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샐리를 설득하려 했다.
"가끔은 뭐가 진짜로 옳은 일인지 가늠하기 힘들 때도 있어. 그럴 때면 옳다고 느끼는 쪽을 택해야 하는 거야."
"아니요, 규칙대로만 하면 언제든 뭐가 옳은지 알 수 있어요."

- "저는 장선생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하지만 이민국 심사관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근거로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해요. 그게 법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샐리를 보며 장원차오는 처음으로 씩 웃었다. "변호사님은 신념이 강한 분이시군요."
"장선생님만큼은 아니죠."
 
- 깨어나 보니 읍내 병원이었습니다. 갈비뼈가 여섯 대 골절되고 양다리와 한쪽 팔도 부러졌고, 기흉에 뇌진탕까지 일어났습니다.
[방금 한 이야기를 뒷받침할 증거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치료비 영수증은요? 진단서라도?]
아니요. 그런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지 병원에서 발급받을 수는 있나요?]
그 병원은 지역 정부가 운영합니다. 병원에 증거를 달라고 하면 비웃으며 저를 정신병동에 감금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증거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제 흉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자, 셔츠를 걷겠습니다. 샐리 씨, 괜찮으세요? 별거 아닙니다. 지금은 다 나았어요.
[됐습니다. 셔츠를 내리세요. 그 흉터에는 날짜가 적혀 있지 않군요. 증거로서 효력이 없습니다.]

- "내가 한번 볼까?"
샐리가 서류철을 앞으로 슥 밀었다. 캐머런은 서류를 휙휙 넘기면서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것 같아요?"
샐리가 물었다.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키며, 캐머런은 낸들 아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뻔한 이야기네. 꽤 잘 지어내긴 했는데, 걸작 수준은 아니야. 자네 힘으로 할 만한 건 별로 없어.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캐머런은 샐리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프리카 출신들 같은 경우는, 남자들은 모두 제노사이드를 피해 도망 왔다고 하고, 여자들은 군인한테 겁탈당하거나 성기 절제를 당할 뻔했다고 하지. 중앙아메리카에서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찰하고 결탁한 폭력 조직을 피해 도망 왔다고 하고, 중국에서 온 경우는, 여자들은 다들 정부에 임신 중절을 강요당했다고 하고, 남자들은 누구나 크리스천 아니면 반체제 운동가야." 
"여기 적힌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어요." 샐리는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이 목소리를 높이는 상대가 임원인 것도 잊고 말았다.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그래, 어떤 사람한테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지. 하지만 자네 의뢰인이 그런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잖아."
샐리는 나중에 후회할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 "퇴근해, 샐리. 망명 신청자들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야. 그 사람들의 사연을 너무 자세히 검증해 봤자 득 될 건 없어. 실제로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조차도 경제적 목적의 이민 신청자들하고 자기 사연을 무기로 비자 경쟁을 벌여야 하는데, 경제 이민 신청자들은 추방당하는 사태를 피하려고 거짓말도 불사해. 그렇다 보니 망명 신청자는 자기 사연에 더 끔찍한 세부 사항을 추가해서 우리가 좋아하겠다 싶은 이야기로 가공하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믿어. 왜냐면 그 사람들의 사연은 이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얼마나 질서 있고, 안전하고, 더 행복한지 확인시켜 주니까. 우리가 아직 특별하다고 확인시켜 주는 증거란 말이야." 


- "제 딸한테도 대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습니다. 딸도 저처럼 희망을 품을 수 있게요." 나는 강보에 꽁꽁 싸인 채 잠든 너를 원숭이에게 보여 줬어.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이야기들이 거짓말이라고 하시다니."
"거짓말이라고는 안 했는데. 이야기란 건 말이지, 어떤 이야기든 간에, 네가 진실이라고 믿을 때에만 진실인 법이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저 달 사람들을 봐.”
원숭이가 말했어.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이는, 아름답게 차려입고 재스민차를 마시며 시를 읊는 달 사람들을 가리키며.
"저들은 자기네가 봉래산(蓬萊山)에 살던 신선과 서역(西域)에 살던 도사의 후손이라고 하지. 저들이 자기네 시와 예술품, 이 행복한 땅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한번 보란 말이야."
"저 사람들은 실제로 특별한데요."
"자기네가 특별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거야."
나는 원숭이를 가만히 봤단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 "저들이 이 달에 어떻게 왔을 것 같아?"
나는 알 길이 없어서 고개만 저었단다. 원숭이는 다시금 껄껄 웃었어.
"너는 저 회화나무를 처음으로 올라온 인간이 아니야. 마지막도 아닐 테고. 자기 이야기를 남한테 들려주는 인간도 네가 처음은 아니지. 물론 마지막일 리도 없고. 자, 달에 온 걸 환영한다. 이곳은 사기꾼과 재담꾼, 협잡꾼, 몽상가, 거짓말쟁이들의 땅이야. 달이 이토록 멋진 곳이 된 건 바로 너 같은 자들 덕분이라고."
그러고 나서 원숭이는 고갯짓으로 너를 가리켰어. 그때까지도 내 품에 잠들어 있던 너를.
"그 아이가 진실로 믿고 받아들이는 날에, 너의 이야기는 비로소 진실이 될 거다."

- "우리는 서로 돕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더 잘하라고 돕는 거겠죠!" 샐리는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래요?"
둘은 함께 앉아 있었다. 나란히, 조그만 공원의 벤치에. 장원차오가 샐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그저 규칙대로 하려고 애쓰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정해져 있지요."
"나는 진실이 듣고 싶어요!"
장원차오는 껄껄 웃었다. 웃음소리는 여름 매미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차게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근처의 나무에 앉아 있던 참새들이 그 소리에 놀라 파드닥 날개를 쳤다.

- "듣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진짜 크리스천이긴 한 거예요?"
"아니요."
샐리는 눈을 감았다. 캐머런이 옳았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 ...

달을 향하여



- 화웅은 자기 바둑판과 바둑돌을 챙겨 왔다. 바둑판은 태산(泰山)의 소나무로 만들었고 검은 돌은 비취, 흰 돌은 반들반들하게 연마한 산호였어. 바둑을 두는 동안 장생은 서늘하고 매끈한 바둑돌을 조금이라도 더 만져보고 싶어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시간을 끌었지.

 

- "바둑도 슬슬 지겨워지는군." 화웅이 말했다. "벌써 몇 년째 날 이긴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
장생의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생각했어. 자기 아버지한테 돈을 빌려야 하는 처지의 사람들이라 일부러 져 준다는 걸 까맣게 모르나 보군.
실은 화웅도 바둑을 꽤 잘 뒀지만, 장생만큼은 아니었단다.

- "정말 탄복했습니다." 화웅은 장생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했어. "장생은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장생의 적수가 아니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장생의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아들한테 화웅을 상대로 일부러 져 주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바둑에 진 화웅이 한바탕 난장판을 피울 거라고 내심 걱정했지. 그런데 화웅이 이렇게 나왔으니.
그렇게 못된 아이는 아니었구나. 장생의 아버지는 생각했어. 승부에 지고서도 품위를 지킬 줄 알다니. 그건 인간들 사이의 봉황이 지닌 품성이거늘. 

-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해요? 전 체커 게임 할 때 아빠한테 져도 화 하나도 안 내는데요. 그냥 실력을 더 키우면 되는걸요."

- "현령(縣令)께 알리지 않고 처리하게 해 주십시오."
장생은 문 옆에 기대 선 도끼로 눈을 돌렸단다. 그러고는 그 도끼를 향해 걸어갔지.
"안돼. 그러면 안 돼요!"
"부엌에 가서 어머니한테 땔감이 더 필요한지 보거라." 아버지가 말했어. 장생은 망설였단다. "어서!"

장생이 부엌으로 사라지자 덩치 큰 하인들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단다.
"이야기를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니, 괜찮다. 넌 장생을 구하려고 했으니까. 그의 아버지처럼."

- 화웅이 떠나고 나서, 관 씨 일가는 말없이 섣달그믐날 만찬을 먹었단다.

"정말로 인간들 사이의 봉황이었구나."
식사가 끝나고 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껄껄 웃었지. 그날 장생은 아버지와 밤새 앉아서 마지막 남은 매실주를 다 마셔버렸어.


- 아버지는 길고 긴 소장을 써서 현령 앞으로 보냈다. 화웅의 사기 행각을 낱낱이 적어서.
"관(官)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니 안타깝구나." 아버지는 장생에게 말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도 있는 법이지."

- "당신들은 쥐도 안 먹을 것 같소만."
"안 먹는 게 당연하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쥐는 병균이 득시글거리는 더러운 동물인데." 잭은 상상만으로 속이 거북해졌다.
"우리도 쥐는 먹지 않소, 보통은. 하지만 굶주린 상황에서 다른 고기가 없다면, 쥐도 먹을 만하게 요리할 수 있소."
중국인의 타락상은 끝이 없단 말인가? "

"쥐를 맛있게 먹다니, 난 상상도 못 하겠군."
"이제 알겠소. 당신네는 조금 좋아하는 동물만 잡아먹고, 많이 좋아하는 동물은 안 잡아먹는단 말이로군."
잭 시버는 로건의 말에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토하지 않으려고 꾹 참는 릴리를 부축하고서, 잭은 채소밭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엘지가 준비한 저녁은 닭고기를 넣은 파이였지만, 이날은 잭도 릴리도 뭘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 장생이 담을 기어오를 무렵, 동녘 하늘은 아직 생선 배처럼 회색빛이었다. 담을 다 넘었을 때에도 첫닭은 아직 울지 않았지. 서까래와 벽이 흰개미와 쥐에게 갉아 먹힌 오래된 저택은 눈 깜짝할 새에 활활 타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소리를 지를 때쯤 장생은 이미 20리나 달아난 후였지.
떠오르는 아침 해가 동녘 지평선의 산맥 위로 가없는 띠처럼 이어진 구름을 장생의 얼굴빛만큼이나 벌겋게 물들였다. 피처럼 붉고 긴 구름이라.
장생은 속으로 생각했어. 하늘도 나와 함께 기뻐하는가. 장생은 복수의 쾌감에 한참 동안 껄껄 웃었단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느낌, 동쪽을 향해 영원히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어. 그 기다란 구름 속에, 아니면 동쪽 바다에 뛰어들 때까지.

- 이제 새 이름이 필요하다. 장생은 생각했다. 앞으로는 깃털 우(羽) 자를 써서 관우라고 해야겠어. 자(字)는 운장(長), 긴 구름이라는 뜻에서.

- 그 한 달 전, 마을에서는 가을의 정기 순회 재판이 열렸다. 반란죄는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기에, 순회 재판관이 직접 재판을 관장했지. 칼을 쓰고 아문의 대청으로 끌려 나온 관 씨는 아내와 아들이 재판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단단한 돌바닥에 무릎을 꿇었단다. 
이제 전보다 더욱 뚱뚱해진 화웅이 재판관 앞에서 바람 속의 나뭇잎처럼 벌벌 떨며 토지 문서를 꺼냈다. 학자 출신으로 낙양(洛陽)에서 갓 부임한 젊은 재판관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자부심이 가득했지. 화웅은 곤경에 처한 관씨 일가를 도우려 했을 때 관 씨가 8할 5푼의 소작료를 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어안이 벙벙했다고 진술했어. 

- "제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수로 생계를 꾸린단 말입니까?' 그러자, 존경하는 판관님, 관 씨가 말했습니다. '만약 그자가 환관들과 이 혼란한 시절에 학자입네 하는 아첨꾼 조신(朝臣)들의 충고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렇습니다, 판관님, 이때 관 씨는 감히 천자의 이름을 욕되이 부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천하의 모든 백성이 굶주릴 것입니다. 저는 농사지은 것을 모조리 세금으로 빼앗기느니 차라리 화 대인께 다 드리고 싶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저는 황건적에 가담해서 도적이 되어 더 큰 기회를 노릴 작정이니까요.' 이상입니다."

- (목을 딴 후에) 곯아떨어진 화웅을 깨웠단다. 장생이 들고 있던 횃불의 침침한 불빛 속에서 화웅은 눈앞에 있는 것이 붉은 얼굴을 한 귀신이라고 생각했어. 자기 혼을 빼앗으러 지옥에서 온 병사라고 말이야.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화웅은 횡설수설하다가 그만 탈분하고 말았다.
장생은 칼로 화웅의 팔과 다리의 힘줄을 끊어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축 처진 뚱뚱한 몸뚱이를 다시 침상에 눕혔지. 숨이 끊어진 두 첩 사이에 안기도록. 
"깨끗이 보내 주지는 않을 거다. 너는 내 아버지가 도적이라고 했지. 이제 도적이 너 같은 자를 어떻게 처치하는지 보여 주마."
뒤이어 장생은 온 집에 불을 놓기 시작했다. 금세 연기가 자욱하게 퍼지자 화웅은 도와 달라는 소리조차 할 수 없었어. 기침이 점점 심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거든. 화웅은 자기 침에 조금씩 숨이 막혀 갔어.

- 관우는 기다란 핏빛 구름이 손짓하는 동쪽을 향해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싸움의 쾌감과 복수의 달콤함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어. 관우는 신이 된 기분이었단다.

- 중국인 남자들의 사금 채취장에서 개울 건너편에 있는 비탈 중턱의 숲은 한복판에 공터가 있었다. 이제 때는 6월 하순, 공터 가장자리의 거친 흙 땅에는 라일락 덤불이 자라 오렌지향 비슷한 싱그러운 향기를 한가득 내뿜었다. 공터 복판은 키 작은 야생 해바라기의 샛노란 빛이 양탄자처럼 깔린 가운데, 여기저기 치커리의 남자주색이 단조로움을 깨뜨렸다.

- "지금도 살짝 맛이 궁금할 정도야. 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그날 싸움에 휘말린 건 위험한 짓이었지만, 네 잘못은 절대 아니야. 내가 보기엔 그 일도 잘 마무리된 것 같아. 네가 안 다쳤으니까." 
"다치긴 했어요. 살짝." 
"다행스럽게도 중국인들의 약이 효과가 있었나 보구나. 로건은 참, 특이한 인물이야."
"로건은 이야기를 정말 재미있게 잘해요."
릴리는 아버지에게 군신 관우의 무용담이나 오랑캐에게 시집간 해우 공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아버지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로건이 위스키 기운이 감도는 억양으로 쨍그랑대는 리듬에 따라 들려주는 이야기가 얼마나 몽환적이면서도 친근한지를, 커다란 손의 길고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이야기의 장면을 묘사하는 손짓은 또 얼마나 우습고 진지한지를. 그러나 모든 것이 아직은 너무 낯설고 혼란스러웠기에, 릴리는 적절한 표현을 떠올려 그 순간순간의 인상을 제대로 된 그림 한 폭으로 아버지에게 보여 줄 자신이 없었다.

- "당연히 그렇겠지. 그게 우리가 이 서부로 온 이유란다. 서부는 누구의 땅도 아니고, 그래서 모두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이방인이니까. 캘리포니아주는 지금 천상 민족이 쏟아져 들어오는 중이니까 이제 곧 여기 아이다호에도 밀려들 거야. 머잖아 모두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릴리는 차를 다 마셨다. 마음은 편해졌지만, 악몽의 두근거리는 여운 때문에 눈이 말똥말똥했다.

 

- 유비는 관우의 얼굴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단다. 그와 비슷하게 생긴 자의 목에 두둑한 현상금을 걸었다는 수배 전단이 온 고을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지.
"지금은 수많은 사람이 범죄자가 된 시대이지만, 그중에는 다만 법이 어질지 못한 까닭에 법의 울타리 바깥에 선 사람이 적지 않소. 만약 내가 황제라면 나는 그들을 범죄자가 아니라 판관으로 세울 것이오."
"그런데 귀공께선 무슨 근거로 뜻을 이루리라 자신하십니까?"
관우가 물었다. 불콰해진 얼굴은 이미 피처럼 붉었지만, 손은 무심하게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지. 마치 화동들이 꽃을 따는 5월의 정경을 시로 쓰기에 앞서 붓을 만지작거리는 문인처럼. 
"성공할지 어떨지는 저도 모릅니다. 인생은 모름지기 실험이니까요. 하지만 훗날 죽음이 목전에 오면, 한때 용처럼 날아오르고자 애썼다는 기억은 떠올릴 수 있겠지요."
그리하여 그 복숭아밭에서 세 사람은 의형제의 연을 맺었다.
"저희 셋 비록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하늘에 바라옵건대 부디 같은 시 같은 분 같은 초에 죽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 다시 날이 저물었다. 조조는 휴전을 청하고 군대를 뒤로 물렸어. 피가 강처럼 흐르는 전장에는 잘린 팔다리와 머리가 썰물 때 바닷가의 조개처럼 널려 있었지. 지는 해가 대지에 핏빛 노을을 기다랗게 드리우자 그 붉은 빛이 노을인지 피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단다.
"투항하라." 조조는 두 의형제를 향해 외쳤다. "그대들의 용기와 유비에 대한 충성은 이미 증명되었다. 어떤 신도 인간도 그 이상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랄 것이오." 관우가 말했다.
조조는 냉정하고 속이 좁은 인물이었지만, 그런 그조차도 관우를 향한 존경심에 압도되고 말았어.

- "죽기 전에 나와 술잔을 기울이지 않겠는가?"
"기꺼이. 고량주라면 마다한 적이 없소."
"미안하지만 고량주는 없네. 허나 서역 오랑캐가 공물로 바친 처음 보는 술이 한 통 있지."
그 술은 포도로 만든 것이었다. 포도는 서역의 오랑캐 사절단이 사막을 건너 가져온 낯선 과일이었어.

- "그거 혹시 와인인가요?"
"그래. 관우는 그때 처음 와인이라는 술을 맛본 거다."

- 관우와 조조는 옥배(玉杯)에 와인을 따라 마셨다. 단단하고 서늘한 옥술잔은 부드러운 와인과 더없이 잘 어울렸지. 날은 점점 캄캄해졌지만 술잔의 재료인 옥돌은 속에 빛을 품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얼굴은 술잔의 빛으로 물들었어. 조조에게 공물과 함께 바쳐진 오랑캐 가희들은 기묘하게 생긴 류트로 구슬픈 가락을 연주했단다. 실은 류트가 아니라 비파라는 악기였지.
관우는 그 선율을 들으며 혼자만의 상념에 잠겼다. 그러다 벌떡 일어서서, 오랑캐 비파의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 밤을 밝히는 잔에 맛 좋은 포도주 

마시려 하나 비파 소리 말에 오르라 재촉하네

술에 취해 전장에 넘어져도 비웃지 마오

예로부터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이 몇이나 되던가

- 관우는 술잔을 던졌다.
"조조 공, 맛난 술 잘 마셨소. 허나 이제 하던 일로 돌아갈 때인 것 같구려."


- "그러니까 아저씨가 연주하던 그 밴조랑 비슷하게 생긴 악기가 비파군요, 그렇죠?"
로건이 부르던 구슬픈 노래가 다시금 릴리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릴리는 로건에게 비파 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로건은 비파를 무릎 위에 올리고 서양 배처럼 생긴 몸통을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운 아기를 쓰다듬듯이.
"이건 꽤 오래된 비판데, 해가 갈수록 소리가 더 그윽해진다."

"그치만 진짜 중국 악기는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로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다.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면.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처음에는 중국에서 생기지 않았지만 나중에 중국 역사가 된 것은 아주 많단다." 

- "천상 민족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로군."
잭이 한 말이었다. 그는 로건이 중국 남자아이는 누구나 엄마 젖과 함께 마시기 시작한다는 고량주의 맛에 익숙해지려고 여태 애쓰는 중이었다. 고량주를 마시면 면도날을 한입 가득 삼키는 느낌이 들었다. 릴리는 고량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팬 아버지를 보고는 웃음이 터졌다. 
"어째서?"
"난 자네들 천상 민족이 유구한 중국 역사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낀다고 생각했거든.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도 전에 공자님이 계셨나니,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말이야. 천상 민족인 자네가 야만인들한테서 뭘 배웠다고 인정할 줄은 몰랐어."
그 말에 로건은 웃음을 터뜨렸다.
"내 핏줄에도 북방 오랑캐의 피가 조금은 흐르고 있소. 도대체 중국인이란 게 뭐요? 오랑캐는 또 뭐고? 그런 걸 고민해 봤자 목구멍에 밥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내 친구들의 얼굴에 웃음이 깃드는 것도 아니요. 그럴 바에야 난 차라리 서역에서 고비 사막을 넘어온 초록 눈의 무희들에 관한 노래를 부르며 비파를 타겠소." 

- "뒷마당에서? 아니 무슨 수로? 난 세이지하고 로즈메리도 제대로 못 키우겠던데."
"음. 저는 중국에 살 때 원래 찢어지게 가난한 농사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흙에서 먹을거리를 뽑아내는 재주가 있나 봅니다."
"지난봄 내내 식초에 절인 감자만 먹었는데, 이 싱싱한 양파랑 오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이 지긋한 광부는 로건의 바구니 속에 든 커다란 오이와 토마토를 예뻐 죽겠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네 말마따나 괴혈병은 정말 무서운 거야, 그 병에 약이라고는 신선한 채소뿐이지. 젊은 친구들은 그 말을 안 믿다가 너무 늦게 깨달으니 참 아쉬워. 이거 한 타 주게." 

-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먹을 건 남겨 뒀어요?"
"저희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올해에만 대여섯 번은 더 수확할 수 있을 겁니다. 필요한 만큼 사가세요. 몇 주 있다가 또 오겠습니다."
얼마 안 가서 로건은 가져온 채소를 다 팔았다. 그는 이날 번 돈 가운데 20달러를 세어 릴리에게 건넸다.
"오스캔런 부인한테 10달러를 드려라. 요즘 그 집 벌이가 시원찮은 거 안다. 식욕이 한창때인 아들도 둘이나 있고 말이지. 남은 돈이 누구한테 필요한지는 아버지께 여쭤 봐라." 

- 나이 든 남자와 소녀는 뒤로 돌아서서, 마을 반대편 중국 남자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을 태평하게 걷기 시작했다. 인적 없는 거리 가득 환하게 이글거리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성큼성큼 걷는 키 큰 중국 남자와 대나무 멜대 양 끝에 나른하게 대롱거리는 바구니 두 개가 만든 그림자는 햇볕에 물든 연못 수면을 우아하게 미끄러져 가는 소금쟁이와 비슷해 보였다.
그러다 한순간, 남자와 소녀는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졌고, 거리는 다시 쥐 죽은 듯 고요했다.

- 꼬박 일주일째 눈이 퍼부었다. 2월 중순의 아이다호시티는 온통 웅크려 잠든 채 아직 몇 달 남은 봄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아니, 온통은 아니고 대부분이었다. 중국인 남자들은 중국 설날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 그 일주일 내내 중국인 남자들은 설날 잔치 이야기만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주문한 기다랗고 새빨간 연발폭죽은 포장이 벗겨진 채 습기가 마르도록 선반에 올려져 있었다. 손재주가 좋은 몇몇은 향 다발과 함께 조상에게 바칠 종이 동물을 접고 자르는 일을 맡았다. 아이들에게 기분 좋은 새해 선물로 줄 말린 사탕과 연밥을 빨간 종이로 싸는 일은 모두가 함께했다. 섣달그믐 이틀 전, 아옌은 설날 당일에 먹을 만두 수천 개를 만드는 작업에 모든 중국인을 투입하고 지휘했다. 판잣집 거실이 만두 공장의 조립 라인으로 변신하여 ...

- 피곤했고, 다음날의 잔치를 기다리느라 애도 탔다. 솔직히 말하면, 살짝 죄책감도 들었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도와 달라고 할 때에는 이렇게 열심히 거든 적이 없어서였다. 릴리는 이튿날 잔치가 끝나면 어머니께 더 잘하기로 마음먹었다.

- "나도 몰라. 로건은 우리 고향 출신이 아니거든. 실은 아예 남방 출신이 아니야. 로건은 우리 배가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던 날 난데없이 부두에 나타났어."
"그러니까 자기 고향에서도 이방인이었던 거네요."
"그렇지. 우리가 미국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로건한테 물어봐."

- [유복한 사람과 권력 있는 사람은 망명을 하지 않는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 맑은 날이면 선장은 배의 '화물' 일부를 밑바닥 선창에서 갑판으로 데려와 바람을 쐬게 해 주었다. 각각의 화물은 그 밖의 시간 대부분을 관보다 더 좁은 6척짜리 자기 침상에서 보냈다. 밤처럼 캄캄한 선창에 갇힌 화물들은 잠으로 시간을 때우려고 애썼지만, 자면서 꾸는 꿈은 근거 없는 희망과 알 길 없는 위험으로 뒤죽박죽이었다. 화물들 곁에 늘 함께하는 길동무는 냄새였다. 그것은 면화 더미나 럼주 통을 보관하도록 만들어진 선창에 욱여넣어진 남자 예순 명이 자신들의 토사물과 배설물과 음식물과 씻지 않은 몸으로 빚어내는 악취였다. 거기다 무려 6주에 걸쳐 태평양을 횡단하는 범선의 끊임없는 요동은 덤이었다. 

- 화물들은 물을 달라고 했다. 가끔은 선원이 부탁을 들어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를 빼면 화물들은 비가 내리기만 기다렸고, 선창 천장에서 새는 빗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금에 절인 생선을 그만 먹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먹으면 목이 탔으니까.
캄캄한 어둠에 괴로워하다가 돌아버리지 않으려고, 인간 화물들은 머릿속에 외우고 있는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 사람들은 돌아가며 무성 관우의 이야기를 암송했다. 관우가 오로지 전마 적토와 청룡언월도 한 자루에 의지하여 여섯 관문을 돌파하면서 교활한 조조의 다섯 장수를 쓰러뜨린 이야기를.
"배를 타고 여행하는 우리가 목이 좀 마르고 배가 좀 고프다고 불평하는 걸 관우님께서 들으시면, 어린애 투정이라며 껄껄 웃으실 거요."
이렇게 말한 중국인 남자를 사람들은 라오관이라고 불렀다. 라오관은 키가 어찌나 컸던지, 침상에 누워 자려면 무릎을 당겨 가슴에 딱 붙여야 했다.

- "우리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소?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철로를 놓으러 가는 길인데. 미국은 늑대와 호랑이가 사는 땅이 아니요.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 우리와 똑같이 일하고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웃었다. 그러면서 관우의 붉은 얼굴을 떠올렸다. 어떤 전투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어떤 함정도 넘치는 기지로 무사히 빠져나왔던 관우의 얼굴을. 이깟 굶주림과 목마름과 어둠이 뭐 대순가, 관우님은 이보다 1만 배는 더 위험한 곤경에서도 끄떡 않으셨는데.


- 남자들은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라오관은 그들에게 해우(解憂) 공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나라 공주였던 해우의 이름은 '슬픔을 삭이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 해우는 무제(武帝)의 명에 따라 중원에서 수천 리 떨어진 서역 초원의 오랑캐 왕에게 시집을 갔소. 한나라는 오랑캐에게서 튼튼한 전마를 사들여야 국경을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오.

 

- '내 보배 같은 딸아.' 무제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소. '네가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가 이국땅의 오랑캐가 먹는 거친 날고기를 차마 먹지 못하고, 들소와 곰의 털가죽이 깔린 침상에서 잠을 이루지 못해 고생한다고 하더구나. 비단처럼 곱던 네 살결이 사막의 모래바람에 거칠어지고, 한때는 달처럼 밝았던 네 눈이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 흐려졌다는 말도 들었다. 네가 고향이 그리워 울다 지쳐 잠든다는 말도. 만약 그중 어느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내게 편지를 써라. 그리하면 제국의 모든 군대를 보내어 너를 고향으로 데려올 것이다. 딸아, 네가 괴로워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구나. 너는 이 늙은 아비의 빛이자 영혼의 위안이다.' 

- '아버지이자 황상(皇上)이신 폐하.' 해우 공주는 답장에 그렇게 적었소. '들으신 소식은 모두 사실입니다. 하오나 소녀에게는 소녀의 본분이 있고, 황상께는 황상의 본분이 있습니다. 제국이 흉노의 침략에 맞서 국경을 지키려면 튼튼한 말이 필요합니다. 딸이 슬퍼한다는 이유로 어찌 백성에게 오랑캐의 발굽 아래 죽고 다치는 위험을 감수하라 하겠습니까? 황상께서는 제게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저는 제 이름대로 슬픔을 삭이고, 새 고향에서 행복을 찾고자 합니다. 거친 고기는 우유와 함께 요리하는 법을 배우고, 따가운 잠자리에서는 부드러운 잠옷을 입고 잘 것입니다. 얼굴은 망사로 가려 모래바람을 막고, 추운 겨울에는 남편과 나란히 말을 달려 몸을 덥힐 것입니다. 저는 이제 이국땅에 있으니 이국인들의 방식을 배워야 마땅합니다. 저는 오랑캐의 일원이 됨으로써 진정한 중국인이 되고자 합니다. 저는 두 번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아버지께 영광을 안겨 드릴 것입니다.’ 

- "무제의 딸이라 한들 가녀린 여성이었던 해우 공주가 보인 지혜와 용기를 우리가 따라 하지 못할 이유가 뭐요? 우리가 진정으로 조상과 가족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미국인이 되어야 하오."

- "하늘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 싼룽이 물었다. "자네 말대로 하면 우린 범죄자가 되는 거잖아. 그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짓 아니야? 우리가 다 부자가 될 팔자를 타고난 건 아니라고, 뼈 빠지게 일하면서 굶주리는 팔자도 있어. 지금 누리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관우님도 한때는 죄인이지 않았소? 하늘은 운명을 제 손으로 개척하는 자에게만 웃음을 보인다는 것이 관우님의 가르침 아니오? 우리에게는 산을 뚫어 길을 내는 팔 힘이 있고, 이야기와 웃음만으로 버티며 대양을 건너는 지혜가 있소. 그런 우리가 대관절 무엇 때문에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남은 평생을 빈털터리로 살아야 한단 말이오?" 
"하지만 도망가서 더 잘 살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아옌이 물었다. "그러다 붙잡히면요? 산적들한테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불이 밝혀진 이 천막촌을 떠나서 캄캄한 저 바깥으로 나갔다가 더 고생만 하고 위험만 겪으면 어떡할 건데요?"
"바깥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는 나도 모른다. 인생은 모름지기 실험이니까. 하지만 눈을 감을 때가 되면 우리는 알 것이다. 우리 삶을 마음대로 휘두른 것은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었음을, 우리가 거둔 승리도 우리가 저지른 실수도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었음을." 

- 라오관은 팔을 쭉 뻗어 가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가리켰다. 기다란 구름이 서쪽 하늘을 나지막이 덮고 있었다.
"이곳의 땅은 고향의 냄새가 나지 않지만, 하늘만은 내가 본 그 어디의 하늘보다 더 넓고도 높소. 나는 날마다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의 이름을 익히고, 내가 할 수 있는 줄도 몰랐던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소. 우리가 힘닿는 데까지 올라가 스스로 새 이름을 거머쥐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요?" 
미약한 불빛 속에 서 있는 라오관은 남자들의 눈에 나무처럼 커다랗게 보였고, 길고 가느다란 눈은 화톳불처럼 벌건 얼굴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중국인 남자들의 가슴은 아직 이름을 모르는 어떤 것에 대한 결의와 갈망으로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당신들도 느꼈소?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그것을, 당신들도 느끼고 있소? 머리가 어질어질한 그 느낌을? 그건 위스키의 맛이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참맛이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건 실수였소. 우리는 술에 취해 싸워야 하오." 

 

- [고국 땅에서는 가난한 사람도 맛보는 소박하고 안온한 즐거움을 버리고 이국 하늘 아래 성공하여 누릴 거친 기쁨을 택했다는 말. 대대로 살아온 집의 따뜻한 난롯가와 조상들이 묻힌 들녘을 떠나 왔다는, 다시 말해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버리고 행운을 좇아 떠나 왔다는 말... 미국인들에게는 그런 말이 최상의 칭찬이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 아이다호시티 관악대는 로건의 끈질긴 요청에 따라 <피네건의 경야>를 연주했다.
"이 정도로 시끄러워서는 턱도 없소. 중국에서는 탐욕스러운 악귀를 쫓으려고 온 마을 아이들이 종일 폭죽을 터뜨린단 말이오. 지금 우리가 가진 폭죽은 몇 시간 터뜨리면 끝이오. 악귀를 쫓으려면 여러분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하는 수밖에 없소." 
팥소가 든 찰떡과 매콤한 고기만두로 배가 꽉 찬 관악대 주자들은 맡겨진 임무에 신명나게 착수했다. 그들은 독립기념일에도 그렇게 기운차게 연주하지는 않았다. 

- 중국인들의 설날잔치를 둘러싼 소문은 모두 사실이었다. 아이들의 주머니는 사탕과 짤그랑거리는 동전으로 가득했고, 마을의 어른 남녀는 눈앞에 펼쳐진 성찬을 즐기며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 "석방되면 중국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 머무실 건가요?"

"난 집에 갈 거다."

"아."
"하지만 셋집에 계속 사는 것보단 내 집을 갖고 싶구나. 집을 짓겠다고 하면 네 아버지가 도와줄 것 같으냐?"
릴리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로건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여기가 내 집이다." 로건은 빙그레 웃으며 릴리를 마주 보았다. "나는 여기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맛을 찾았다. 그 모든 단맛과 쓴맛, 위스키 맛과 고량주 맛, 거칠고 아름다운 남자들과 여자들, 그들이 지닌 야성의 흥분과 불안,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대지의 평화와 고독... 한마디로 말해 정신을 고양시키는 짜릿한 맛, 그게 바로 미국의 맛이다."

 

- 릴리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섣부른 희망을 품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로건은 이튿날 배심원단 앞에서 진술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하룻밤 더 남아있었다.

- "이야기 하나만 들려주실래요?"
"좋지. 하지만 앞으로는 중국인으로 살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만해야 할 것 같다. 이제부턴 내가 어떻게 미국인이 되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해 주마." 

- 1800년대 후반에 중국인은 아이다호 준주의 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은 광부나 요리사, 세탁부, 정원사로서 공동체를 이루고 활발하게 일하며 광산촌의 백인 사회에 순조롭게 동화되었다. 거의 모두 돈을 벌러 미국에 건너온 남성이었다. 
중국인 다수가 미국에 정착하여 미국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을 무렵, 반(反)중국인 정서가 미국의 서쪽 절반을 휩쓸었다. 1882년에 제정된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을 필두로 연방법과 개별 주법(州法), 일련의 법원 판결 등을 통하여 중국인 남성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신붓감을 데려오는 일이 금지되었고, 나중에는 중국인이라면 남녀 가릴 것 없이 미국에 입국하는 길이 막히기에 이르렀다. 백인과 중국인의 인종 간 혼인은 법적으로 허가받지 못했다. 그 결과 아이다호 광산 지대의 중국인 독신 남성 공동체는 점점 축소되다가, 결국에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배제법이 폐지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오늘날까지도 아이다호주의 몇몇 광산촌에서는 그들 사회의 일부였던 중국인들의 존재를 기리며 중국식 설날을 축하하고 있다.
1870년 아이다호 인구의 28.5퍼센트는 중국계였다.
 

모든 맛을 한 그릇에 -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



- 엄마가 나한테 주려고 가져온 선물이 있었다. 너무 작은 드레스, 너무 오래된 책들, 엄마가 타고 온 로켓의 모형이었다.
"나는 되게 오랫동안 우주여행을 했어. 우주선은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 안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단다. 고작 석 달밖에 안 지난 것 같은 느낌이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가 전에 다 설명해 준 이야기였다. 엄마가 시간을 속이는 방법이 바로 그거라고 했다. 엄마한테 남은 시간인 2년을 길게 늘여서, 내가 자라는 모습을 보려고 하지만 엄마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엄마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그만."
엄마는 내 주위에 널린 선물들을 보며 부끄러워했다. 내가 아닌 다른 아이, 엄마 마음속의 딸한테 줄 선물들이었다.

- 내가 진짜 갖고 싶었던 건 기타였다. 하지만 아빠는 나한테 기타가 너무 이르다고 했다.
내가 조금 더 나이가 많았다면 엄마한테 말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엄마가 준 선물들이 마음에 쏙 든다고.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아직 거짓말이 서툴렀다. 

- 나는 엄마한테 집에 언제까지 있을 거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밤새 같이 놀자. 아빠가 하지 말라고 한 것들, 엄마랑 같이 다 하는 거야."
엄마는 나를 데리고 나가서 기타를 사 주었다. 나는 이튿날 아침 일곱 시가 돼서야 엄마 무릎에서 잠들었다. 정말이지 꿈같은 밤이었다.
일어나 보니 엄마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 열일곱 살.

"오면 누가 반갑다고 할 줄 알았어?"

나는 엄마의 면전에서 방문을 쾅 닫았다.
"에이미!"
아빠가 방문을 다시 열었다. 아직 스물다섯 살인 엄마, 지금도 가족사진 속의 그 여자와 똑같이 생긴 엄마가 아빠 곁에 나란히 서 있으니, 아빠가 얼마나 늙었는지 더럭 실감이 났다.

- 아빠는 내가 속옷에 묻은 피를 처음 보고 머릿속이 하얘지도록 겁에 질렸을 때 나를 달래 준 사람이었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가게 점원에게 나한테 맞는 브래지어를 좀 골라 달라고 더듬더듬 말한 사람도 아빠였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대들 때 꿋꿋이 서서 나를 안아준 사람도.
엄마라고 해서 7년마다 한 번씩 찾아와 내 인생을 휘저어 놓을 권리가 있는 건 아니잖아. 신데렐라 이야기에 나오는 요정 대모도 아니고.

- 나중에, 엄마가 다시 내 방 문을 노크했다. 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운 채 대꾸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왔다. 집에 오려고 몇 광년을 건너뛴 사람이었으니, 어차피 합판으로 만든 문짝 하나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를 보려고 억지로 들어오는 엄마가 좋으면서도 싫었다. 내 마음은 뒤죽박죽이었다.
"드레스가 참 예쁘네."
엄마가 말했다. 방문 안쪽에 졸업 무도회에서 입을 내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드레스는 내가 저금한 돈 절반을 털어서 사야 했을 만큼 예뻤지만, 허리 쪽이 그만 찢어지고 말았다. 

- 한참 후에, 나는 침대에서 몸을 돌려 일어나 앉았다. 엄마는 내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입은 은색 드레스를 기타 모양으로 한 조각 잘라서 내 드레스의 찢어진 자리에 대고 깁는 중이었다.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네 외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 난 엄마가 어떤 분이셨는지 알 기회가 없었지.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던 거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았을 때."
엄마를 끌어안는 기분은 묘했다. 내 언니라고 해도 좋을 나이였으니까.

- 서른여덟 살
엄마와 나는 공원에 나란히 앉았다. 아직 아기인 내 딸 데비는 유아차에 누워 자고 있었고, 아들 애덤은 다른 남자아이들과 정글짐에서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놀고 있었다.
"스콧하고는 만나 보지도 못했네." 엄마의 목소리에서 미안한 기색이 묻어났다. "지난번에 들렀을 때 네가 사귀던 사람이었잖아. 너 대학원 다닐 때." 
좋은 사람이었어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냥 서로 멀어진 것뿐이에요. 말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에게 오랫동안 했던 거짓말이었으니까. 나 자신도 포함해서.
하지만 이제는 거짓말도 지긋지긋했다.

"나쁜 놈이었어요. 그냥, 그걸 인정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죠."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이상한 짓을 하곤 하지."
엄마는 겨우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 나이였을 때에는 나도 온갖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엄마는 내가 살아온 삶을 정말로 이해했을까?

- 엄마는 내게 아빠의 마지막 나날이 어땠는지 물었다. 나는 아빠가 편안하게 가셨다고 대답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는데도, 주름살은 엄마 얼굴보다 내 얼굴에 더 많았기에, 나는 엄마를 지켜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 슬픈 얘기는 그만하자."
엄마가 말했다. 나는 금세 방긋 웃는 엄마를 보며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엄마가 곁에 있어서 기뻤다. 내 마음은 뒤죽박죽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어두워질 때까지 애덤과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여든 살.
"애덤?"
내가 묻는다. 요즘은 휠체어 바퀴를 돌리기도 힘들고, 눈앞은 다 뿌옇게 보이기만 한다. 애덤이 왔을 리가 없는데. 그 애는 얼마 전에 태어난 아기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니까. 그럼 혹시 데비? 하지만 데비는 절대로 나를 찾아오지 않는데.

- "나야."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쭈그려 앉는다. 나는 눈을 찡그리고 자세히 본다. 엄마는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약품 냄새가 여느 때보다 훨씬 더 강하게 풍기고, 나를 잡은 손은 떨리는 느낌이 든다.
"여행을 한 지 얼마나 됐어요?" 내가 묻는다. "처음 떠났을 때부터 계산해서."
"2년이 넘었어. 이번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들으니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다. 내 마음은 뒤죽박죽이다.

- "떠난 보람이 있었나요?"
"난 다른 엄마들보다는 너를 지켜볼 시간이 적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훨씬 오래 볼 수 있었어."

- 엄마는 내 휠체어 옆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고, 나는 엄마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그렇게 잠에 빠져들면서, 나는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다. 눈을 떠 보면 엄마가 곁에 있을 테니까.

내 어머니의 기억

 

 


 


옮긴이의 말

 


2018년 11월에 발간된 <종이 동물원>은 여러 신문과 인터넷 서점의 '올해의 책' 목록에 이름을 올리며 켄 리우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한국에 알렸다. 그로부터 약 1년 반이 흐른 지금까지 중쇄를 거듭하며 사랑받는 그 책은 작가 켄 리우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이야기 열네 편을 담고 있다. 프로그래머이자 변호사, 번역가, 소설가인 리우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기술을 한껏 담아 써 내려간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한국의 독자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최고로 꼽았고, 같은 이야기에서도 다른 지점에 감동했다. 이처럼 다양한 감상에 비슷하게 나타나는 점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언뜻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역사와 언어, 기술이라는 요소를 SF와 판타지를 넘나들며 짧지만 여운이 긴 이야기로 직조하는 탁월한 이야기꾼'

이제껏 책으로 엮인 적이 없는(그러므로 '원서'가 존재하지 않는) 켄 리우의 중단편 소설 열두 편을 엮어 만든 이 책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는 이전 단편집과 달리 느슨하게나마 수록작들을 하나로 묶는 주제가 존재하는데, 다름 아닌 '초월'이다. 수록작 가운데 굳이 나누자면 SF로 분류될 이야기들은 육체라는 존재양식만이 아니라 시공마저도 초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초월을 이룬 후에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이라고, 아마도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한편 판타지로 분류될 이야기들은 역사라는 굴레를 딛고 넘으려 하는 인간 개개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 먼저 도착한 이들이 나중에 도착한 이들을 배척하는 땅, 그 땅에서 '나라 세우기'에 엄연히 한몫을 떠맡았으면서도 역사책에서 지워지고 배제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2020년 여름에 읽는 것은 아마도 각별한 독서 경험일 것이다. 

이상은 순전히 옮긴이의 공상이자 이미 만들어진 책에 덧붙이는 짤막한 설명일 뿐, 지은이가 의도한 바는 결코 아니다. 이야기 짓기와 읽기는 오로지 또 마땅히 지은이와 읽는 이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가장 인간다운 활동으로서, 거기에 옮긴이가 끼어 앉을 자리는 없다. 지은이는 이 신비한 공동 작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독자들은 제가 책에 쓴 단어 하나하나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겁니다. 왜냐면 독자 한 명 한 명이 자기만의 이야기보따리와 자기만의 해석 틀, 자기만의 상처, 자기만의 정서적 공명점을 지닌 채로 책을 펼친 다음, 제가 쓴 글을 읽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쌓아 올릴 테니까요. 이로써 완성된 결과물은 사실 절반만 제 것이고, 절반은 독자의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이번 단편집이 끝이 아니라 켄 리우의 단편 열한 편을 묶은 <신들은 죽임 당하지 않을 것이다>와 얼마 전 미국에서 발간된 최신 단편집 <은낭전(The Hidden Girl and Other Stories)>, 장편 판타지 시리즈 '민들레 왕조 연대기'의 2부인 <폭풍의 벽(The Wall of Storm)> 또한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선보이리라는 전언을 끝으로, 옮긴이는 이만 물러나고자 한다. 판권 계약부터 조판, 편집, 디자인, 제작,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책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애써 주신 모든 출판 노동자께 지은이를 대신하여 감사드리며. 

2020년 6월
장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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