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스 토오루] 무법 변호인 1-3
저자 : 시와스 토오루 / toi8 / 김정규
출판 : 소미미디어
출간 : 2017.08.29
저자 : 시와스 토오루 / toi8 / 김정규
출판 : 소미미디어
출간 : 2017.08.29
저자 : 시와스 토오루 / toi8 / 김정규
출판 : 소미미디어
출간 : 2018.11.30
집정리 중 어디선가 1권이 나왔고, 읽어보니 재미있어 뒷권도 찾아 읽게 되었다는, 언제나와 비슷한 흐름이었다.
사실 웬만한 책은 재미있다.
대부분의 책은 그 나름의 흐름과 포인트가 있기에, 취향이냐 아니냐가 갈릴뿐 '재미' 자체는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모든'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반례 또한 확실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각이 '책 증식'의 주요 원인이 된다.
지금 당장 읽는 건 내키지 않지만, 언젠가는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는 아쉬움과 미련.
사실 책 욕심을 간단하게 줄일 수 있는 대승적(!) 방법은 책 시장 전반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언젠가 절판이 된 책을 구하기 위해 떠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이 지름신을 부르는 것인데- 시장이 안정적으로 커지게 되면 출판사도 재고 걱정을 좀 덜고 모험적인 시도에도, 절판작의 재출간에도 적극적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나도 마음 내키면 언제든 읽을 수 있다는 믿음 하에 충동구매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 명씩 구매가 줄어들면 책 시장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돌고 돌고 도는 것이다.
결국 대안은 전자책의 활성화일까?
아직까지는 종이책에 더 매력을 느끼는 만큼-
생각이 꽤 많아지고 있다.
<무법 변호인>은 한국에는 3권까지 번역 출간 되어 있다. 하지만 3권의 마지막은 <완결>이 아닌 <계속>이다. 저자 후기에서도 원래는 3권으로 완결 지으려 했으나 뒷 이야기가 더 나오게 될 것 같다고 하니 아마 뒷 이야기가 더 있을 법 한데... 조금 궁금하지만 일본어판을 찾아 읽을 정도로 반하지는 않았다.
<무법 변호인>은 표면적으로는 천외천, 법외법으로 준법과 위법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악마 변호인' 아부쿠마와 함께 억울한 피고인들을 도와주는 신참 변호사 혼다의 이야기다. 그들이 매 에피소드마다 얼마나 기발하게 검찰과 경찰의 사각지대를 파고드는지, 도저히 믿기 어려웠던 피고인의 결백함이 증명되고 마는 순간은 얼마나 놀라운지가 주된 재미다.
하지만 한 층 아래에는, 인간의 '가치관의 변화'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과연 '옳은' 것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깔려 있다.
누군가에게 3권 말미의 혼다는 '흑화'한 상태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결심을 가만히 읽어보면, 그는 1권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항상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해 왔던 혼다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혼다와 아부쿠마가 '옳으냐'.
작가는 그에 대해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고 있다.
아부쿠마가 혼다에게 던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이 질문에도 같은 답을 댈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더해 한국과 일본의 사법제도 간 차이를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될 수 있겠다.
재미있게 읽었다.
- "이상으로 주신문을 마칩니다."
검사가 그렇게 마무리하자, 재판장이 우리 쪽을 쳐다봤다.
"그럼 변호인, 반대신문 해주세요."
- 검찰 쪽 주신문이 끝나면 그다음은 피고 측의 반대신문 차례. 형사재판에서는 아주 당연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당연한 과정을 앞둔 상황에서 검사도 증언대의 증인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그 심정도 이해가 된다. 내 의뢰인의 무죄를 증명하려면, 이 검찰 쪽 증인의 신빙성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버려야 한다. 우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검사도 증인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옆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부쿠마 씨, 부탁드립니다."
"그래. 판은 자네가 잘 깔아놨으니까, 뒷일은 나한테 맡기라고."
- '악마의 변호인'이라는 끔찍한 별명을 가진 아부쿠마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평소에는 얼빠진 중년같이 행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체격이 상당히 큰 데다 지금은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뱀 같은 눈을 하고 있다. 증인의 얼굴이 새 파래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 원래 형사재판에서 변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빤하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건 현장이건 증거를 수집, 확보하는 것은 경찰이다. 변호인이 그것을 조사하려면 일일이 신청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경찰과 검찰이 증거를 조작하는 일도 수시로 일어나고. 우리 변호인은 증거를 검증하기도 벅찬데, 조작한 증거를 들고 나오기라도 하면 효과적인 변호 따위는 꿈도 못 꾼다.
하지만, 지금 내 파트너인 아부쿠마는 거기에 대항할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럼 반대신문을 하겠습니다. 먼저 당신이 증인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인지, 자세히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 처음으로 그와 손을 잡고 했던 재판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의 방식을 처음 알았을 때는 정말 곤혹스러웠지만, 지금은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부쿠마 같은 변호사도 필요하다고.
- 그것은 벌써 1년이나 지난 일이고, 그때 나는 정말 못난 변호사였다.
- 아크릴판 두 장을 엇갈리게 접착한 것이라서,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 포기할래요...! 보나 마나 유죄잖아요...!"
접견실에서 단둘이 남자마자 아크릴판 너머에 있는 의뢰인 쿠리타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말했다.
"나도 다 안다고요! 오늘 재판, 아무리 봐도 내가 유죄로 가는 분위기였죠?!"
히스테리가 좀 심한 것 같기도 하지만,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내가 의뢰인 입장이라면 똑같은 심정이겠지.
- "진정하세요. 재판은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내일 심리도 남아 있으니까요."
"내일이 있으면 이길 수 있어요?! 배심원들 봤잖아요. 그 인간들, 틀림없이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예, 내가 요란하게 꾸미고 피어싱도 했어요. 아무래도 점잖게 보이지는 않겠죠!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고 다니건 내 마음이잖아요?!"
"예, 맞습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건 공평한 일이 아니죠... 하지만 배심원이나 방청객이 선입견을 갖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런 말이 통하는 것은 법률 전문가들뿐이고, 배심원들은 어쩔 수 없이 색안경을 쓰게 된다. 변호사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의뢰인이 재판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머리를 빡빡 깎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 "변호사 양반. 여자가 치한한테 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
"예? 글쎄요, 여성 전용 차량에 탄다든지...?"
"아니라고요, 머리를 염색하고 입술에 피어싱을 하면 돼요! 남자들은 정말 단순해서,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면 가만히 당할 거라고 생각한다고요. 여자가 요란하게 꾸미는 건 무조건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쿠리타는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는 또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런데도 조금만 요란하게 꾸미면 남자건 여자건 잔소리만 실컷 해대고! 아, 진짜 다 싫어!"
- 분명히 머리는 염색하고 눈썹도 흐릿하지만 얼굴은 나름대로 예쁘다고 할 수도 있다. 조금만 얌전하게 꾸미면 못된 남자들이 함부로 손을 대려고 들 것도 같다.
"하지만 문제는 겉모습이 아닙니다. 당신이 미성년자 때, 차에 있는 물건을 훔쳐서 조사를 받았던 것까지 배심원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이냐고! 지금은 조용히 잘 살고 있는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과거는 과거, 이번 사건은 이번 사건으로, 따로 떼어서 생각해야 한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배심원들은 그렇게 생각해주질 않는다.
-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도 억울한 누명을 쓴 피고인 입장이었다. 사람들한테 더러운 범죄자 소리를 들었고, 어머니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쿠리타처럼 신경쇠약 증상을 보이면서 일가족동반자살 직전까지 몰렸었다.
그런데 어떤 변호사가 우리를 그런 상황에서 구해줬다. 당시에 나는 겨우 다섯 살이어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변호사는 내 영웅이 되었고, 그리고 내가 꿈꾸는 직업이 됐다.
그리고 국선변호법원의 요청에 따라서 담당하게 됐지만, 쿠리타는 내 첫 의뢰인이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희망을 이루어주고 싶다.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싶다.
하지만, 나한테 그럴 힘이 없다는 건 명백했다.
- "그래서? 내일은 뭘 할 건데요? 어떻게 해서 내가 그 목걸이를 안 훔쳤다고 설득할 거죠?"
"... 아쉽지만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내일 재판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쿠리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내 설득이 먹힌 분위기는 아니다. 반쯤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
- 소장님의 말을 듣고 힘이 빠졌다. 소장님은 아직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미 현역에서 은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반쯤 은거한 상태다. 갑자기 도와달라고 하면 곤란하겠지.
"알겠습니다. 셋방살이 변호사 주제에 이런 부탁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아, 잠깐만. 좀 진정하고, 내가 큰 도움은 줄 수 없지만 아는 사람을 소개해줄 수는 있는데 말이야.]
"아는 분? 그러니까... 그분께 부탁드리면 도와주시려나요?"
[그래. 웃지 마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악마의 변호인'이라고 불리는 녀석이 있거든. 정 곤란하면 그 녀석한테 부탁해 봐. 그런 절도사건 정도는 간단히 처리해 줄 테니까.]
"아, 악마의 변호인...?!"
- 그 살벌한 수식어에, 한순간 주저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다.
"알겠습니다, 도와주기만 한다면 누구건 상관없습니다. 꼭 소개해 주세요."
[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그런데 문제가 좀 있거든. 무엇보다 변호인을 새로 추가하면 사선 변호가 되잖아. 한 마디로 국선 변호 보수를 못 받게 된다는 얘기지.]
- 국선 변호인은 피고가 금전적인 이유로 사선 변호인에게 의뢰할 수 없을 때, 말 그대로 국가에서 선택해서 변호를 맡긴다. 변호인을 새로 추가하면 국선 변호가 아니라 사선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국가가 아니라 피고인한테서 보수를 받아야 한다. 문제는 쿠리타한테 그럴 돈이 없겠지.
"예, 괜찮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미숙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돈은 필요 없으니까 힘을 빌려줬으면 싶습니다."
[그래, 말 잘했다. 그리고 또 하나 각오해 두라고. 그 녀석은 네가 알고 있는 어떤 변호사 하고도 달라. 무슨 짓을 해도 놀라지 말게나.]
솔직히 말해서 도와주기만 한다면 누구든 상관없다. 하지만 소장님이 그렇게까지 다짐을 받으니 왠지 신경이 쓰인다.
- [뭐, 조금 게으른 데다 기본적으로는 쓰레기지. 하지만 변호사한테 딱 좋은 엄청난 특기가 있거든.]
"아, 예, 대체 어떤 특기인지...?"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초능력을 쓸 수 있어.]
- 지금 이게 절박한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농담이고, 그 농담을 들었으니 웃어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뭐, 일단 만나보라고. 네 의뢰인이 무죄를 바라는 한, 그 녀석만큼 믿을 만한 변호사는 없을 테니까]
- 악마의 변호인, 법과 윤리를 무기로 삼아 약자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변호사가 악마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충분히 수상하다.
하지만 지금은 별명이나 초능력 얘기는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아니, 정말로 변호사의 탈을 쓴 악마라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 나한테 조언을 해주고 의뢰인을 구하는 걸 도와주기만 한다면.
- "정말 여기가 맞는 건가...?"
가게 이름은 루츠. 문제는 가게 이름이 아니라 가게의 업종이었다.
소위 말하는 캬바쿠라(캬바레 클럽의 약자. 기본적으로 아가씨가 손님 옆에 앉아서 술을 따르며 담소를 나누는 형태의 주점 - 옮긴이)다. 가본 적이 없어서 남자가 여성과 함께 술을 마시는 가게라는 것밖에 모른다. 그리고 왠지 외설적인 곳이라는 기분도 들고.
'악마의 변호인'에 대해 알려준 소장님은 훌륭한 변호사인 데다, 나한테 거짓말을 할 리가 없고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이 된다. 이런 가게에 와야만 만날 수 있는 변호사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 "아냐,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어."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변호사니까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 예를 들자면 최근에 여자애들한테 장래에 되고 싶은 직업을 물어봤더니 캬바쿠라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상위권에 들어갔다고 한다. 손님도 서비스의 내용을 알고서 돈을 지불하는 것이니까 법률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게다가 매일같이 이런 가게에 드나드는 변호사라면 상당히 수완이 좋은 사람이겠지. 나는 용기를 내서 가게에 들어가기로 했다.
-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나 같은 신참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니 엄청나게 어색했다.
TV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저기에 테이블과 소파가 놓인 부스가 있고, 남녀 몇 명이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다. 다만, 아직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손님은 상당히 적었다.
- 가게 안의 웨이터들이 날 볼 때마다 "어서 오세요."를 폭풍처럼 외쳐댔다. 하지만 마리라고 하는 이 여성이 "이 분, 13번 테이블에 오신 손님이야" 그렇게 말하면 뭔가를 눈치챈 것처럼 분위기가 달라졌다. 마치 나를 손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솔직히 말해서 손님이 아닌 건 사실이니까 마음은 편했다.
- 그대로 여성을 따라서 안쪽 자리로 갔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와 만났다.
"아부쿠마 선생님, 손님 오셨어요."
"응?"
그 자리에는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것도 혼자서. 이런 가게인데.
- 체격은 크다고 해야겠지. 아저씨 살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여름이면 서핑이라도 할 것 같은 몸매에 바지와 재킷, 조끼로 된 스리피스 정장이 아주 잘 어울린다. 게다가 다리를 꼬고 있어서 그런지 아주 여유가 있어 보인다. 당연히 재킷 옷깃에는 나와 똑같은 배지가 달려 있다. 천칭이 새겨진 변호사 배지가.
- "오, 마리, 한가하면 술 좀 따라주지."
"무슨 소리예요, 선생님 손님이라고 했잖아요. 길 잃은 어린양이니까 잘 상대해 주세요."
"그래, 알았다고..."
아부쿠마라는 남자가 날 흘끗 쳐다봤다. 그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빛을 보고는 겁을 먹을 뻔했다.
- "자, 앉으세요. 이상한 사람이지만 믿을 만합니다."
"예, 고맙습니다."
마리라는 여성은 나한테 자리에 앉으라고 말하고는, 이야기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것인지 인사를 한 번 하고 자리를 비켜줬다. 나와 그 남자 단둘만이 남았다.
- "흐음, 보아하니 신참 변호사군. 그렇게 죽을상 짓지 말라고.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잘 풀리는 법이라고 하잖아?"
"... 제가 그렇게 신참처럼 보이나요?"
그것이 그 사람과 내가 처음으로 주고받은 대화였다.
- "그 새 정장하고 번쩍거리는 변호사 배지를 보면 알지."
"분명히 제 정장이 신품이나 마찬가지고 아직 몸에 익지도 않기는 했습니다만, 배지는 뭘 보고 알 수 있는 겁니까?"
"그 금딱지 변호사 배지는 말이야, 10년만 지나면 도금이 벗겨져서 회색이 되거든. 내 배지처럼."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남자가 달고 있는 배지는 오래돼서 그런지 상당히 빛이 바래 있었다.
"한마디로 배지가 금색으로 번쩍거리는 동안에는 아직 풋내기라는 뜻인가요."
"그런 얘기지. 신참으로 보이기 싫다고 일부러 금박을 긁어내는 놈들도 있다는 건 아나?"
처음 들은 이야기다. 솔직히 배지를 긁어가면서까지 베테랑으로 보이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 "그런데, 당신이 정말로 '악마의 변호사'가 맞습니까?"
갑자기, 그 남자는 벌레 씹은 표정이 됐다.
"뭐야, 또 그 소리냐. 그건 헛소리야. 난 악마가 아니라 '정의의 변호인'이라고. 그리고 확실히 해두겠는데, '변호사'가 아니라 '변호인'이야. 본명은 아부쿠마 마모루. 잘 부탁하네."
생각해 보니 어느새 뒤죽박죽이 된 것 같은데, 소장님도 '변호사'가 아니라 '변호인'이라고 하셨던 것 같다.
- 변호사와 변호인. 비슷한 것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변호사는 직업이지만 변호'인'은 피의자나 피고인의 이익 보호를 위해 보조해 주는 사람. 즉 자격을 따면 변호사가 될 수는 있지만, 피의자나 피고인이 의뢰하지 않으면 변호인은 될 수 없다.
그때, 그 남자가 생각도 못 한 행동을 했다. 계속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더니 우둑우둑 씹었다.
- "구해줄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한테 부탁하면 힘을 빌려줄 거라는 얘기를 듣고 이렇게 왔습니다."
"좋았어, 그 망할 공무원 놈들한테 한방 먹이는 건 나도 좋아하니까. 도와주지."
황당할 정도로 간단하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공무원 놈들. 그것은 경찰, 검찰, 아니면 양쪽 모두를 의미하는 것일까.
-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자네가 도와줄 가치가 있는지 확인해야겠어."
"... 제 가치, 말입니까? 대체 어떻게?"
"간단해,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하면 거기에 대답만 해. 하지만, 어쩌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난 거짓말을 꿰뚫어 볼 수 있으니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 타인의 거짓말을 꿰뚫어 본다.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아부쿠마 본인이 슬쩍 웃으며, 게다가 농담처럼 말했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도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야겠지.
"알겠습니다. 어떤 것이든 진실만을 대답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좋아."
아부쿠마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술에 취한 눈이 아니라 날카로운 눈빛이다. 초능력인지 특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거짓말 정도는 간파할 것 같은 분위기다.
- "그럼 질문이다. 그러니까... 먼저, 자넨 정직한 성격인가?"
“어려운 질문이군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만, 다른 사람에게는 최대한 성실하게 대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빙빙 돌려 말하지 말라고. 일단은 겸손하게 말했다고 해두지. 그럼 다음 질문. 자네... 그래, 남자들 사이의 연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예?!"
너무나 엉뚱한 질문이었다.
갑자기 그런 것을 물은 이유를 모르겠다. 나한테 편견이 있는 건 아닌지, 그런 걸 심사하는 걸까?
"그러니까, 저는 딱히 관심은 없습니다만, 개인의 취미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군. 그런데 여기는 아가씨 하고 술을 마시는 가게야. 하지만 보다시피 내 주위엔 여자가 없지. 내가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건가?"
"... 그야, 뭐."
이런 가게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가게의 시스템을 생각해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건 됐고, 자네 몸매가 꽤 좋군.”
아부쿠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바로 옆에 와서 앉았다. 거기서 끝났으면 다행인데, 이번엔 손을 뻗어서 내 몸을 더듬 ...
- "죄송합니다만 지금 당장은... 하지만 시간만 주시면 반드시 지불하겠습니다."
"정 안 되면 돈이 아니라도 되거든? 예를 들자면 자네가 나하고 하룻밤 같이 잔다든지 말이야."
"예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황당한 소리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룻밤 같이 자자고? 한마디로 그거라는 말인가.
말도 안 돼. 난 그런 취미 없다.
하지만 지금 내 통장 잔고는 제로나 마찬가지고, 앞으로 국선변호 보수도 받을 수 없다. 아부쿠마한테 지불할 금전적 여유 따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 거절하는 건 쉽다. 하지만 난 재판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피고인 쿠리타한테 무죄 판결을 받아주고 싶지만 내 힘으로는 무리다. 달리 도와줄 사람도 없고, 있다고 해도 역시나 보수는 지불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소장님이 추천해 준 이 사람은 도와준다고 했다. 내 몸뚱이 하나만 주면.
남자하고 같이 잔다는 의미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틀림없이 조금 전에 아부쿠마가 몸을 더듬었을 때보다 더 불쾌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보수다.
"... 알겠습니다. 돈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뭐든지 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꼭 제 의뢰인한테 무죄판결을 받아내 주십시오."
나는 결심하고서 그렇게 대답했다.
- 그랬더니, 아부쿠마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실실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제가 하겠다고 했잖습니까, 불만은 없을 텐데요?"
"그래, 없어. 계약 조건은 일단 그렇다 치고, 슬슬 진짜 질문을 시작해 보자고. 자네 의뢰인은 무죄라고 주장하고 있지? 자넨 그걸 믿고 있나?"
겨우 제대로 된 질문을 해서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식은땀은 계속 흐르고 있지만.
"예. 물론입니다."
“정말이지? 어쩌네 저쩌네 해도 이 나라 경찰은 우수해서,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은 죄도 없는 사람을 체포하지는 않는다고. 자네 의뢰인도 나름대로 증거가 있어서 체포됐잖아? 그래도 무죄라고 믿는 건가?"
"예, 믿습니다. 제 의뢰인은 경찰 조사 전력도 있어서 의심을 살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편견일 뿐이고, 이 나라 경찰이 우수하다는 얘기도 일종의 편견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증거를 검토해 봤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특히 목격자의 증언이. 솔직히, 저한텐 그걸 따지고 들 재주가 없습니다만..."
지금 내가 의뢰인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남자의 힘을 빌리는 것밖에 없다. 그러는 데 필요하다면, 어떤 질문이라도 성실하게 대답해 줄 뿐이다.
- 내 대답을 들은 아부쿠마의 반응은, 큰 웃음을 터트렸다.
"좋았어. 자네 의뢰, 받아주지. 그리고 나랑 같이 자자는 얘기는 농담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나도 남자한테는 전혀 관심 없으니까."
"예?!"
영문을 모르겠다.
- "미안하게 됐다. 난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슈퍼 초능력이 있거든. 하지만 발동하려면 조건이 좀 필요해, 상대가 동요한다는 조건이."
- 끔찍한 얘기였지만 어느 정도 이해도 됐다.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심리학 같은 것을 응용해서, 상대가 동요하게 만든 뒤에 그 반응을 보고 거짓말을 간파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 "말하자면 절 동요하게 만들려고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겁니까?"
"화내지 말라고, 남자한테는 꽤 효과적인 질문이거든? 상대의 몸을 징그럽게 훑어보는 게 포인트지."
분명 아부쿠마는 체격이 꽤 좋고 시선도 날카롭다. 그런 사람이 밀어붙이면 어지간한 남자들은 틀림없이 동요하겠지.
- "덕분에 잘 알았다. 네 대답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자네는 의뢰인이 무고하다고 믿고 있고, 의뢰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각오가 돼 있다. 거짓말쟁이 하고 손을 잡는 건 사절이지만, 자네같이 다른 꿍꿍이가 없는 녀석이라면 도와줄 수도 있지."
날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은 잊어버려야겠다. 아부쿠마는 담배라도 피우는 것처럼, 또다시 담배 모양 초콜릿을 꺼내서 씹어댔다.
- 다 해서 10만. 싸다. 아니, 엄청나게 싸다. 원래는 착수금만 수십만을 받아 가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문제라면 자칭 정의의 변호인이라는 사람이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모습에서 약간 위화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지불은 조금 기다려주실 수 없을까요. 지금 정말로 돈이 없어서요. 다음 달 월세나 간신히 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거짓말이 아니라는 게 정말 싫다니까. 10만 정도는 의뢰인한테 받아낼 수도 있을 텐데?"
- "아부쿠마 마모루. 자네 이름은?"
"혼다, 혼다 노부시게입니다"
"그거 참 씩씩한 이름이군. 뭐, 짧은 인연이겠지만 잘 부탁해."
아부쿠마가 손을 내밀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도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것이 내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순간이었다.
- 날이 저물었는지 가게 안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곳곳의 테이블에서 남녀가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 13번 테이블은 다른 세상이라서, 술도 여성도 없이 남자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 이 아부쿠마라는 사람, 이 가게에서 상당히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다.
- "하지만 쿠리타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범인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호오. 자네는 끝까지 의뢰인의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단 말이지?"
아부쿠마는 짓궂게 물었다.
"... 솔직히 의뢰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 그것은 우리 변호사들에게 있어 영원한 과제다. 우리는 법정대리인으로서 의뢰인을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항상 의뢰인이 옳은 경우만 있는 것도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을 죽인 의뢰인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서 행동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이 아닌 이상, 의뢰인의 말을 믿고 변호하는 것이 변호인의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각오는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의뢰인 이건 뭐건, 자기 상황이 안 좋다 싶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 법이니까."
"... 혹시 아부쿠마 씨도 그런 경험이?"
아부쿠마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글쎄. 아무튼 자네는 운이 좋아. 이렇게 거짓말을 알아볼 수 있는 내 힘을 빌릴 수가 있으니까."
하긴, 그게 사실이라면 최강의 변호사다.
- "'고인의 자택에서 나온 케이스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고, 새로운 증언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것은 케이스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면 본 증인이 제 주장을 인정하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의 있습니다! 변호인의 해석은 잘못됐습니다. 명백하게 배심원에게 잘못된 인상을 주려는 것이며, 너무나 부당한 반대신문입니다!"
이노우에 검사는 머리카락까지 흩날려가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젠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라는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 "이의를 인정합니다. 조금 전에 변호인이 한 발언은 잊어주십시오."
재판장의 발언은 달관한 것처럼 차분했다.
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겠지만, 이노우에 검사도 왠지 체념한 것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어떤 혼란이 일어나도 아부쿠마 한 사람만은 여유 있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 재판장님, 다른 질문을 하겠으니 반대신문을 계속하도록 해주십시오."
"... 규칙을 지키는 한에서, 자유롭게 하십시오."
재판장이 반대신문을 계속할 것을 허락했다. 기분 탓인지 약간 체념한 경지에 들어간 것 같은 말투였다.
-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거야 아무나 할 수 있는 질문이잖아? 사기꾼이나 점술사, 종교 가입 권유할 때 상습적으로 쓰는 문구에 '당신은 지금 고민이 있군요. 혹시 건강 문제 때문입니까?'처럼 말이지."
"...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쳇, 20대 애들은 이런 것도 모르나. 잘 들으라고. 인간은 30대, 40대가 되면 누구나 몸에 한두 가지 문제가 생겨. 그래서 사기꾼들이 거길 찌르고 들어오지. 지금 고민이 있군요, 혹시 건강 때문인가요? 거 봐, 맞았네, 내가 다 안다니까, 그럴 때는 제 힘을 담은 이 파워 스톤을 사면 건강해집니다. 이렇게 끌고 가는 거라고."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하시모토 씨 경제 사정하고 어떻게 연결된다는 겁니까?"
"똑같은 얘기잖아. 요즘은 세계적으로 경제가 불안하잖아? 대기업한테 치이는 중소기업 따위는 어디나 다 빤하다고. 중소기업 사장한테 지금 경제 사정이 안 좋죠?라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끄덕거린다고. 게다가 하시모토는 사장인데 자기가 직접 일을 할 정도였고."
"그, 그렇다고 전부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그중에는 잘 되는 곳도 있을 텐데요. 하시모토 씨네 회사가 그런 경우라면 어쩔 생각이었습니까?"
"그런 때는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야. 요즘 같은 세상에 사업이 잘되는 중소기업은 찾아보기 힘든데 말이죠. 혹시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게 아닙니까? 예를 들자면 운송품 횡령이라든지- 뭐 이렇게."
"저, 정말 사람 맞습니까..."
"그런 소릴 들을 정도로 나쁜 짓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솔직히 이번 형사사건에서 가장 큰 문제는 경찰하고 검찰의 실수가 많다는 점이야. 도난당한 목걸이를 찾은 것도 아니면서 베란다에서 나온 케이스하고 하시모토가 한 증언만 가지고 피의자를 체포해서 기소까지 하다니, 일을 엉터리로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 "왜 경찰도 검찰도 그렇게 조급하게 굴었던 걸까요?"
"예전부터 그런 사건이 많이 일어났으니까 경찰도 다급 했겠지. 그런 상황에 운도 좋게 조사 이력이 있는 용의자가 나왔으니, 그 인간을 제물로 삼아서 실적을 올리려고 했겠지. 그래서 내가 파고 들어갈 틈이 생겼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어쨌거나 법을 준수해야 하는 경찰하고 검찰이?"
"자네 바보 아닌가? 그런 고정관념이 엉뚱한 사람한테 누명을 씌우는 일이 벌어지게 만드는 거야. 자네도 신참이지만 일단은 변호사잖아. 경찰이 피의자의 자백을 얼마나 많이 날조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
- 아부쿠마의 말에는 맞는 점도 있다. '경찰이 잘못된 일을 할리가 없다' '높은 검거율을 자랑하는 우수한 일본 경찰'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유죄가 될 확률은 99.9퍼센트' 그런 선전 문구들이 경찰관들에게 부담을 주고 억울한 죄인을 만들어내는 기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나저나 아부쿠마는 경찰과 검찰을 상당히 불신하는 것 같다. 도저히 '정의의 변호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 "뭐, 이건 검찰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만약에 내가 재판에서 재주껏 이끌어가지 않았다면 배심원들도 피고인의 조사 이력과 외모만 가지고 유죄 판결을 내렸을 거야."
"다 똑같은 족속이라는 건가요..."
내가 소속된 업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혼돈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 "하지만 재판에 아주 익숙한 것 같던데요. 진심은 아니겠지만 다른 사람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이 있다는 소리도 했고."
"아부쿠마 씨가 아직도 그 소리를 하고 다녀요?"
니노미야 씨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고 소장님은 큰 소리로 웃었다.
"요즘 세상에 초능력이라니, 그 자식 정말 센스도 없네. 혼다. 일단 물어보는데, 설마 믿는 건 아니겠지?"
"예. 뭐 그렇긴 합니다."
"하긴, 그 녀석은 감이 좋고 증인을 동요하게 만드는 재주도 좋지. 어떤 인간이건 동요하면 거짓말이 얼굴에 잘 드러나게 되는데, 아부쿠마는 그걸 가지고 초능력이라고 포장하는 거야."
- "이건 제 생각인데요." 니노미야 씨가 말했다. "그 사람, 다른 사람 거짓말을 꿰뚫어 볼 때는 항상 눈을 똑바로 보잖아요. 그러면서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아닌지 관찰하는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긴, 초능력 같은 것보다는 표정을 보고 거짓말을 간파하는 심리학의 프로라고 하는 쪽이 훨씬 납득하기가 쉽다.
"그래도 그 신문 테크닉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혹시 예전에는 유명한 변호사 아니었습니까? 매일 술집에 다닌다고 하던데, 돈이 꽤나 들 텐데 말이죠. 그리고 재판장님도 그 사람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이소가야 소장님이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그 녀석은 머리하고 혓바닥이 사기꾼처럼 잘 돌아가고, 연기도 아주 잘해. 그래서 재판을 어려워하는 변호사들이 정 힘들 때면 그 녀석을 데려다가 법정에 세워놓지 말하자면 변호사 업계의 용병이야."
"그래서 매일 유흥업소를 출입하는 생활인데도 먹고살 수 있는 거군요."
실제로 나도 하루 일한 대가로 10만 엔을 지불하기로 했다. 계속 그런 일용직 변호사 일을 하면서 먹고 산다는 얘기겠지.
- "솔직히 그 녀석을 고용한 변호사들이 대부분 후회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예, 저도 알 것 같습니다. 설마 갑자기 증인을 범인으로 몰아붙일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소장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녀석은 그런 방법을 좋아하거든. 범인 후보로 만들어버리면 배심원들은 고민하고 증인은 동요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일석이조 아니겠어. 예전에는 좀 더 평범하게 변호를 했었는데 말이야."
"그, 그랬습니까? 솔직히 그 사람이 진지하게 변호하는 모습은 상상도 못 하겠습니다만...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뭐, 그 녀석 하고 엮이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이건 기억해 두라고. 이용할 수 있는 동안엔 그 녀석을 이용해. 하지만 자네까지 악마가 될 필요는 없어."
- "어떻습니까, 아부쿠마씨? 타노하라 씨가 거짓말을 했나요? 체포된 지 얼마 안 돼서 동요한 것 같았는데."
가는 길에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던졌다.
"그래. 난 슈퍼 초능력이 있어서 상대가 동요하면 거짓말을 꿰뚫어 볼 수 있지. 그래서 면회를 시작한 직후에는 거짓말을 전부 꿰뚫어 볼 수 있었어. 살인에 대해서는 거짓말이 아니다. 죄가 없어."
슈퍼 초능력인가 하는 것의 존재는 그렇다 치고, 일단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든든했다.
"하지만 다른 증언은 뭐라고 할 수가 없어. 항상 이것 때문에 곤란한데, 변호하려면 '너한테 죄가 없다고 믿는다'고 해야 하잖아? 그 소리를 하면 점점 진정이 되거든."
"예, 뭐. 그건 그렇겠죠. 자기편이 늘어났다고 안심하게 될 테니까."
"그래. 그래서 곤란하다고. 점점 거짓말을 꿰뚫어 볼 수 없게 돼서."
보통 의뢰인이 진정되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일 텐데, 아부쿠마한테는 아닌 것 같다.
- "아무튼 말이야, 그 녀석과 경찰이 하는 말이 조금씩 다르기는 한데,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타노하라 씨는 마당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창문도 안 깨트렸다고 했었죠."
"그래. 모순점 중 하나지. 자넨 어떻게 보나? 경찰이 잘못 생각한 것 같아?"
아부쿠마가 내 마음속 의문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글쎄요... 저희는 타노하라 씨를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부쿠마 씨야말로 어떻습니까?"
"글쎄. 내가 아는 한 경찰도 그렇게 함부로 거짓말을 하진 않아. 이건 내 생각인데, 타노하라가 했던 말속에 아직 간파하지 못한 거짓말이 섞여 있어. 틀림없이."
"타노하라 씨가? 대체 뭣 때문에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뭐, 의뢰인이 자기한테 불리한 일을 숨기는 건 흔한 일이야. 이제, 앞으로 조사하고 반대신문을 하면서 어떻게든 해야겠지."
아쉽게도 의뢰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는 아부쿠마가 말한 대로 검증을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 법정이 조용해졌고, 여기서 이와타니 검사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뜸을 들였다. 사체가 쓰러져 있는 광경을 잘 상상해 보라는 뜻이겠다.
"당신은 어떻게 바바 씨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일단 생기가 없고 꼼짝도 안 해서 그랬습니다. 피부색도 이상했고, 무엇보다 배에 칼 같은 것이 꽂혀 있는 게 보였습니다."
여기서 이와타니 검사가 사진을 집어 들었다.
"검찰 측 증거물 1호, 피해자의 유체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배심원 여러분이 보기를 꺼려하시는 기분은 이해하고 남습니다만, 진실을 알아두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니 부디 잘 확인해 주십시오."
"왔다. 기본 패턴인 유체 사진 돌리기다."
아부쿠마가 코웃음을 쳤다. 배심원들이 유체 사진을 돌려가며 봤다. 끔찍한 유체 사진을 보여줘서 범인에 대한 분노를 자극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그 분노가 향할 대상이 피고인밖에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유죄 판결이 나오기 쉬워진다.
- 하는 김에라는 듯이 우리한테도 유체 사진이 왔다. 사실 우리는 이미 증거를 검토했다.
바바는 똑바로 누워서 자는 것 같은 자세였고, 복장은 운동복 상하의와 티셔츠 차림. 식칼은 티셔츠를 뚫고 복부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크게 뜨고 있는 눈에서 억울하다는 기색을 ...
- "그 증거를 인정하려는 아부쿠마 씨의 속을 모르겠습니다.”
"뭐, 가르쳐줘도 되긴 하지만 그전에 하나 물어보자고. 그런 새 증거가 제출됐는데, 어째서 아직도 타노하라가 무죄라고 믿는 거지?"
"이유는 두 가지 있습니다. 아부쿠마 씨, 저는 당신을 그럭저럭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했죠.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당신이 타노하라 씨가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힘을 빌린 이상은 당신을 믿어야겠죠."
아부쿠마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거 참. 전부터 생각했지만 자네는 꽤 보기 드문 인종이야. 겉 하고 속이 같다는 의미로 말이지. 아무튼 나머지 이유는 뭐지?"
"지난번 절도사건 재판이 끝난 뒤에, 사무실에서 타노하라 씨와 약혼자 쿠리타 씨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생각한다고 했었고, 그날도 타노하라 씨는 쿠리타 씨가 선물해 줬다는 새 작업복과 작업화를 아주 좋아하면서 입고 왔었습니다. 그 얼굴을 생각해 보면 며칠 뒤에 살인사건을 저지를 이유를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또 하나의 확신이다. 행복의 절정에 있는, 게다가 나 같은 변호사도 알고 있는 타노하라가 협박을 당했다고 한밤중에 아는 여성을 죽이러 갔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 "새 작업복과 작업화를 좋다고 입고 왔다고...?"
어째선지 아부쿠마가 그 말을 따라 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냐, 아무것도. 그래, 자네 말이 맞아. 타노하라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그건 나도 확신하고 있다."
"그럼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어째서 그 증거를 받아들인 거죠?"
"간단한 거야. 거기서 그 목걸이를 증거로 채용하지 않았다면 검찰이 어떻게 할까? 배심원들을 다시 모아서 재판을 처음부터 다시 할 거야. 틀림없이.”
"... 그렇게까지 할까요."
"당연하지. 어제 재판을 생각해 봐. 내가 검찰 쪽 증인들을 실컷 괴롭혔잖아? 그걸 보고 불리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자네도 말했잖아. 검찰의 입증은 특히 동기 부분이 부족하다고."
"그, 그래서 검찰이 그 목걸이를 찾아내서, 약점이었던 타노하라의 살인동기를 명확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겁니까...?"
"그래. 잊지 말라고. 이 나라의 형사재판 유죄 비율은 99퍼센트. 검찰에 패배는 용납되지 않아. 무죄 판결이라는 최악의 판결을 받느니, 세금 낭비라고 욕을 먹더라도 심리를 다시 하는 쪽이 가치가 있을 거야."
“그래서 아부쿠마 씨는 증거 채용을 인정한 겁니까... 지금 거부해 봤자 어차피 나중에 인정될 테니까."
"그래. 그래서 인정해 주는 대신에 검찰한테 빚을 만들어뒀지. 나중에 우리가 새로운 증거를 가져오면 바로 받아들이게 말이야. 자네는 아직 모르겠지만, 덕분에 우리가 꽤 유리한 상황이 됐거든? 솔직히 말해서 이긴 거나 마찬가지야."
아부쿠마는 증인은 물론이고 나까지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뛰어났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이 흐름에서 어떻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겁니까?"
"아까 자네가 한 말이 계기가 됐어. 자아, 아무튼 타노하라 한테 얘기 좀 들어보러 가자고. 갑자기 튀어나온 목걸이에 대해서, 그 녀석한테도 얘기를 들어봐야겠거든."
아부쿠마는 나한테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예. 절도사건 때문에 체포됐을 때, 모모코가 겨우 며칠 사이에 많이 야위었습니다. 또 감옥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유산될 수도 있으니까요. 애를 낳을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할 수도 있고."
남편으로서 당연한 생각이겠지.
"그래서 경찰에 신고도 안 했군요...?"
의문이 차례로 풀려나갔다. 어째서 바바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을까. 절도라는 다른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어째서 바바의 집 곳곳에 타노하라의 피가 묻어있었나. 어째서 타노하라가 하천 부지라는, 살인 현장도 자택도 아닌 곳에 있었나.
"그럼 사건 현장의 창문을 깨서 강도로 위장한 것도 당신인가요? 마당에 당신 발자국도 있었다고 하는데."
"아, 아닙니다! 집 안을 뒤지기는 했지만 창문은 깨지도 않았고 마당에는 가지도 않았습니다. 정말로!"
타노하라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 절박한 태도를 보니 이것만은 사실인지도 모른다.
- "혼다. 지금 증언은 믿어도 될 것 같은데?"
아부쿠마도 타노하라를 감쌌다.
"또 그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힘인가요?"
"그것도 있고. 하지만 그런 힘이 없어도 알 수 있어. 좋은 걸 가르쳐주지.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꿰뚫어 보려면 말이야, 그것이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면 된다고. 이 친구는 바바의 집에서 목걸이를 훔쳐다 묻었다는 말을 안 했었지. 왜 그랬을까?"
"... 들키지 않으면 자신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가요?"
"그래. 하지만 유리를 깨지 않은 것하고 마당으로 나가지 않은 건 달라. 그런 거짓말을 해봤자 아무런 이익이 안 되잖아?"
- 선물을 받아서 좋아가지고 그 차림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 같다.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그 차림이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좀 아닌 것 같다. 안 그래도 머리는 염색하고 덩치가 큰 타노하라가 작업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상당히 박력이 있을 것 같은데.
"그래, 그렇군. 그럼 또 하나. 자네는 고등학교 때 죽은 바바네 집에 모여서 놀았었지? 남녀가 섞여서."
"예? 예, 그랬습니다만."
"그렇다면 말이야, 남자들끼리 서로 물건을 빌려주기도 했겠지? 편의점 갈 때 다른 사람의 신발 신고 간다든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는지 타노하라가 잠깐 생각에 잠겼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들 은근히 체격이 비슷해서 신발이나 셔츠 같은 건 서로 돌려 입고는 했습니다."
질문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나도 경험이 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출출해서 근처 편의점에 가게 됐을 때, 현관에 슬리퍼가 있으면 빌려 신고서 나가고는 했던 것이다.
"그래, 역시 그렇군. 둘 다 기뻐하라고. 이걸로 이길 가능성이 생겼다."
아부쿠마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금방 알게 될 거야. 둘 다 잘 들어. 진실을 밝혀낼 최고의 아이디어가 있는데, 도와줄 건가?"
그렇게 말하면 나도 아부쿠마도 매달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의는 없습니다만."
“저, 저도요. 무죄만 된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좋았어. 하지만 이건 시간 싸움이야. 먼저 혼다. 자네한테 부탁이 있어. 날 위해서 택시를 잡아서 법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택시 말이죠. 알겠습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아부쿠마의 제안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반증할 증거를 모아야 한다. 아부쿠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차가 필요한 상황이겠지.
- 아부쿠마는 못돼 보이는,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중에 보면 알아. 아무튼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지. 지금 당장 가라고. 난 타노하라한테 다른 볼일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택시부터 잡아 놓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아부쿠마가 재촉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부쿠마와 타노하라 단둘만 남겨두고 접견실을 나왔다. 아부쿠마가 시키는 대로 하면 결코 헛수고는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때 두 사람만 남겨둔 것을, 나중에 진심으로 후회했다.
- 이틀째 재판은 심리 자체가 열리지 않았고, 오늘은 사흘째 날이다.
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부쿠마의 집에 가서 그를 두들겨 깨운 뒤에 법정으로 가는 중이었다. 틀림없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제 검찰 측이 새로운 증거를 제출했는데도, 내가 한 일이라고는 신발가게들을 조사해서 아부쿠마에게 가르쳐준 것뿐이니까.
한편,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아부쿠마는 벌써 오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아부쿠마 씨, 대체 오늘 뭘 할 생각입니까?"
나는 몇 번이나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아부쿠마의 대답은 수수께끼투성이였다.
"뭐, 그때 가보면 알게 될 거야. 지금 자네한테 가르쳐주면 화낼 테니까."
내가 화를 낼 수법. 더더욱 모르겠다. 이 사람 스타일대로 상당히 악랄한 반대신문이라도 생각하고 있으려나.
- "젊은 이노우에 검사는 그렇다 치고, 이와타니 검사도 의외로 어설프더라니까. 아무 조건도 없이 새 증거를 제출할 수 있다는 시점에서 내가 이기는 게 결정됐다고 볼 수 있는데 말이야."
아부쿠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정장 안주머니에서 둥글게 만갈색 봉투를 꺼냈다. 그러고는 나한테 보라는 듯이 팔락팔락 흔들었다.
"그런데 그 봉투는...?"
"새 증거 2호."
영문을 모르겠다. 나는 전부 파악하는 것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 "...
같은 공업 제품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히 곤란한 일입니다."
무토가 간신히 쥐어짠 것처럼 말했다. 그 말이 맞다. 그래서 아부쿠마는 타노하라가 새 작업화를 선물 받았다는 이야기를 물고 늘어졌던 건가.
"그러니까 현장에 남아 있던 발자국과 피고인이 신고 있던 신발이 종류는 같겠지만 같은 신발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같은 신발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만."
무토의 목소리에 분한 기색이 섞여 있다.
"좋습니다. 그럼 이다음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만약에 피고인 이외의 제3자가 피고인과 똑같은 종류의 새 신발을 신고서 현장을 걸어 다니면, 피고인이 그 자리를 걸어 다닌 것처럼 보이게 위장할 수 있겠죠?"
법정이 술렁거렸다. 나도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당에 있는 발자국도 설명할 수가 있다.
"이의 있습니다! 부적절하게 오해를 유도하는 신문입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이와타니 검사가 벌떡 일어났다.
"이의를 인정합니다. 지금 질문은 기록에서 삭제됩니다."
기각됐지만 아부쿠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 사고방식은 틀림없이 배심원들의 머릿속에 들어갔을 테니까.
"좋습니다. 이상으로 질문을 마치겠습니다."
- 시험관 같은 용기가 여러 개 들어 있었다.
"한 가지 좋은 걸 가르쳐주지. 혈액은 쉽게 응고되니까 항응고제도 없이 핏자국을 위조하는 건 꽤나 힘들어. 알겠나?"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잠깐만요. 무엇보다... 접견실은 아크릴판으로 막혀 있잖아요?"
"그거? 구멍이 있는 건 자네도 봤잖아. 주사기 바늘 정도는 간단히 들어간다고."
"..."
그 말이 맞다. 담배 모양 초콜릿이 들어갔으니 주사기 바늘정도는 간단히 들어간다.
"하, 하지만 피를 뽑은 다음에 소독을 할 수가 없잖아요."
"뭐, 그 정도 위험 부담은 있지. 하지만 '이건 널 위한 일이다'라고 했더니 타노하라도 기꺼이 팔을 걷어붙였거든? 그 친구는 젊으니까 괜찮을 거야. 혹시나 패혈증으로 죽기라도 하면 날 원망해도 되고."
"아니, 그전에 변호사가 채혈하는 자체가 위법행위 아닙니까!"
채혈은 간호사 등이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의사의 지도, 감독, 지시가 있을 때만 할 수 있다. 변호사가 접견실에서 채혈하는 것은 틀림없는 위법행위다.
"정말이지, 시끄러워 죽겠네. 그래서 말해주고 싶지가 않았다니까. 그걸로 죄가 없는 타노하라가 석방됐으니까 아무 문제없잖아?"
-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아부쿠마를 때릴 생각이었다. 당연하지. 아부쿠마는 맞아도 싼 짓을 했다. 이 주먹을 크게 휘둘러서 아부쿠마의 볼을 때리려고 했다.
심하게 화가 난 탓인지,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싸움 따위는 해본 적도 없는 내 펀치다. 아부쿠마가 피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부쿠마는 마치 내가 그러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씩 웃고 있을 뿐이다. 놀란 기색도, 피하려는 기색도 없다. 내 주먹을 달게 받겠다는 식의 표정이다.
"윽!"
나는 때리려던 주먹을 억지로 멈췄다. 아부쿠마를 때려봤자 소용없다. 나한테는 아부쿠마를 때릴 자격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는 내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고민한 끝에, 내가 선택한 행동은- 아부쿠마 대신 내 볼을 있는 힘껏 때리는 것이었다.
- "뭐 하는 거야?"
아부쿠마가 입을 떡 벌리고,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때린 변호사는 많지만 굳이 자기를 때린 녀석은 자네가 처음이야. 물어봐도 되겠나? 왜 자신을 때린 건지?"
"저한테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맞아도 싼 최악의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없었으면 제 의뢰인을 구해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사실이죠. 그래서 당신 대신에 제 자신을 때렸습니다. 당신을 신뢰한 제가 바보라고."
"호오. 참고 삼아 물어봐도 될까? 최악의 행위라고 했는데, 어떤 게 그렇게 최악이지?"
"당연히 증거를 위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변호사는 의뢰인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무도 법에 따라서 수행해야 합니다!"
아부쿠마가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이 친구 정말 젊구먼. 잘 들어. 나한테는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슈퍼 초능력이 있다. 한 마디로 의뢰인한테 정말로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어. 하지만, 만약 정말로 죄가 없다고 해도 법률적으로 구해줄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하고 유죄 판결을 받아들일까? 의뢰인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당신한테 죄가 없다는 건 알지만 방법이 없으니까 20년 정도 감방에 들어가 계시라고."
그것은 너무나 잔혹한 논법이었다.
- "그런 소리는 징그럽게 들었다. 증거 하나에 한 사람의 인생이 좌우된다고. 변호사가 어쩌네 저쩌네 따지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손을 내밀어주란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증거위조와 위법 수사는 검찰하고 경찰 특기 아닌가? 그런데 왜 변호사는 위조하면 안 되는데?"
"그, 그건 궤변입니다. 모든 경찰관과 검사가 증거를 위조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무슨 소리야. 이런 건 한 번만 저질러도 그냥 끝장이라고. 아니, 한 번 정도가 아니지. 인터넷에서 억울하게 처벌받았다는 사람들 얘기를 찾아봐.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 알아? 컴퓨터를 원격 조작한 사건에서 대학생한테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게 만들었던 카나가와 현경 사건 같은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죄도 없는 사람한테 죄를 인정하게 만들려고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존경스러울 지경이라고."
"하지만 그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경찰의 수사가 점점 올바른 방향으로 고쳐지고 있지 않습니까!"
"웃기지 말라고. 백 퍼센트의 신뢰가 무너진 시점에서 경찰과 검찰을 신뢰할 의미가 없어졌어. 무엇보다 그쪽은 재판에서 실패해 봤자 경력에 오점이 남거나 좌천되는 정도야. 하지만 우리 의뢰인들은 인생이 걸려 있거든? 경찰에 검찰 놈들은 그런 사람들을 유죄로 만들려고 자백을 강요해서 위법 수사를 하고, 하다 하다 증거까지 위조하지. 그런데 변호인은 증거를 위조하면 안 된다고? 웃기고 있네."
아부쿠마의 진지한 얼굴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몇 번이고 말해주지. 경찰과 검찰은 언제 증거를 위조해도 이상하지 않을 놈들이다. 그리고 난 의뢰인을 지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한다. 필요하면 뭐든지 하고. 그게 내 기본자세다."
-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것이 있다.
딱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아부쿠마는 경찰과 검찰을 증오한다. 마치 예전에 증거를 날조당한 적이 있는 것 같고, 보아하니 내가 뭐라 하건 아부쿠마의 생각은 바꿀 수 없을 듯하다.
- 내가 간신히 입 밖으로 꺼낸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당신이 하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죠. 실제로 당신이 날조한 증거 덕분에 타노하라 씨도 석방됐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저는 재판이란 법이 정한 규칙 안에서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악마 같은 짓을 했습니다. 당신이 '악마의 변호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꼈고요."
"아주 훌륭한 생각이야. 변호사로서는 올바른 결론이지."
- 나는 허리를 곧게 폈다. 아부쿠마가 저지른 짓은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엔 신세를 졌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니 최소한 마지막에는 예의를 갖춰야지.
"이번에는 신세 많이 졌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당신의 도움을 받지 않겠습니다. 보수는 꼭 입금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당신 같은 악마를 만나러 가지 않겠습니다.”
"알았다. 그럼 잘 지내라고."
나는 아부쿠마에게 등을 돌렸다. 그런 내 등에 대고 아부쿠마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건 기억해 두라고. 일단 내가 '악마의 변호인'이라 친다면 말이지. 악마하고 한번 계약을 하면 끝장이고,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다고 하던데 말이야?"
"... 그런 건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거죠. 실제로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냐, 있어. 내가 왜 자네한테 증거를 위조했다는 얘기를 해줬을까? 자네도 이쪽 변호사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야."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증거를 위조하는 변호사 따위는 절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 하지만, 정말 화가 나는 일은.
나는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 아부쿠마한테 도움을 요청하게 됐다.
- "업무 처리가 느린 신입 교사... 입니까? 뭐, 처음에는 모든 업무가 낯설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도 교장이라는 업장이다 보니 같이 잔업도 하고는 했었죠.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건 다른 사람 하고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러시군요. 제가 실례를 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자세한 사정을 알아둬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밤에 단둘이 있는 일도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그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 악마의 증명이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일본에 뱀이 있다고 증명'하는 것은 간단하다. 근처에서 아무 뱀이나 한 마리 찾으면 되니까. 하지만 '일본에 뱀이 없다고 증명'하려면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서 뱀이 없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것은,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 내 딴에는 안심하게 하려고 해준 말인데, 어째선지 이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린 내 안색도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이이다 씨, 설마... 뭔가 다른 짓도 하셨습니까?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전부 알아두지 않으면 변호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허리를 안고서 그대로 키스까지 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입에 한 건 아닙니다. 볼에만 살짝 했다고요."
"..."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사람은 정말 거짓말을 잘한다. 내가 싫어하는 어떤 변호사가 했던 말이 너무 잘 맞아서 화가 난다.
- "이봐, 당신은 역전해서 무죄를 따낸 혼다 변호사잖아? 당신이라면 판결을 뒤집을 수 있을 것 아냐!"
"한 마디로 저한테 검은 것을 희게 만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그러니 좀 도와달라고!"
- 일이 이렇게까지 왔는데도 내가 실망하지 않은 건, 최근에 비슷한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원하신다면 기꺼이 당신의 변호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죄를 인정하고 화해할 길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방법을 찾으신다면 죄송하게도 저는 힘이 돼드릴 수 없습니다."
이이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험악한 얼굴로 날 노려봤다.
- "이런, 언젠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오겠다 싶기는 했는데 너무 빨리 온 것 아닌가."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나온 사람은 이소가야 소장님, 게다가 벨트를 풀어헤친 천박한 차림으로. 젊은 여성인 니노미야 씨 앞에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지만, 정작 니노미야 씨는 이미 익숙한지 놀라지도 않았다.
"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언젠가 고민할 때가 오다뇨."
"말 그대로야. 자네가 안고 있는 고민은 어지간한 변호사라면 한 번은 겪는 일이니까. 그때가 언제 오느냐가 문제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검은 것을 희게 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 사람이 나 하나뿐일 리가 없을 테니까.
-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했잖아. 예를 들자면 아까 그 교장은 성추행을 인정했다. 하지만 만약에 철두철미하게 자기 죄를 숨겼다면, 원하는 대로 변호를 하는 수밖에 없지. 사실이 어떻건 간에. 안 그래?"
"... 하긴, 그렇군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난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한다. 이이다라는 교장은 성추행을 인정했으니까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이라서 진실을 숨기고 끝까지 무죄라고 애원했다면, 나는 범죄자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서 활동할 뻔했다.
"그런 거야. 변호사는 신이 아니다. 진실을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하지. 억울한 누명을 쓴 불쌍한 피의자도 있겠지만, 의뢰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민하는 일이 훨씬 많은 게 변호사라는 직업이야."
- "하지만 이렇게 계속 기소를 취하하면, 세금 도둑이라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겠네. 하지만 그건 검사국 전체가 받는 비판이니까, 이와타니 검사는 굳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보기만 하면 그런 말들을 던져댔다. 물론 이노우에 검사도 받아치고 싶은 말은 얼마든지 있다. "그쪽 수사가 어설픈 탓에 이런 결과가 벌어진 겁니다."라고. 하지만 무슨 소시를 해봤자 패배자의 변명을 들릴 게 빤하기 때문에 조용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 살인사건으로부터 10일이 지나도 20일이 지나도 좌천 이야기는 나오지가 않았고, 이와타니파의 환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이와타니 본인이 직접 이노우에 검사에게 말해줬다.
"실은 기소 취하 건으로 보고하러 갔더니 형사부와 공판부 부장들이 같이 나와 있더군. 그러더니 '개인적으로는 동정한다'고 하더라고. 상대가 아부쿠마면 어쩔 수 없다고."
- 놀라움은 전염되는 것 같았다.
"그렇군, 부장급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나는 오사카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는데, 그 아부쿠마인가 하는 변호사는 대체 뭐 하는 작자인가?"
"실은 저도 조금 알아봤는데, 상당히 특이한 변호사 같습니다."
- "당연히 나서서 싸울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검사와 변호사인 이상 언젠가는 싸우게 될 날도 있겠지. 그때를 위해 대비해두고 싶다."
이노우에 검사는 자기 상관을 다시 봤다. 한 사람의 인생을 간단히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완전한 승리를 요구하고, 그것이 출세의 조건이 되는 것이 검사라는 직업이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다. 즉, 아부쿠마하고는 엮이지 않으려고 한다. 아부쿠마가 나온다고 하는 사건 따위는, 다른 지방에서 전근 온 지 얼마 안 돼서 사정을 모르는 검사한테 떠넘기는 것이 최선책이다.
하지만 이와타니 검사는 도망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상사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알겠습니다. 제가 조사한 것들을 전부 알려 드리겠습니다."
- 아부쿠마 마모루. 그의 경력 자체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나름대로 유명한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 -법학대학원이 없던 시절이었다- 에 한 번에 합격. 변호사가 된 뒤로는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많은 재판에서 무죄나 집행유예를 따내는 등의 활약을 했다. 그래도 백전백승은 아니고 몇 번인가 패배를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경력은 그의 나이가 30세를 넘었을 때부터 크게 변화했다. 그 시절부터 갑자기 변호사로서의 열의가 식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는 일이 없어졌다. 그 대신에 다른 변호사가 부탁했을 때만 법정에서 변호인을 맡게 됐다. 마치 재판 전문 용병처럼.
사실 변호사로서 활동하는 빈도는 줄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기량은 더 좋아진 것 같다. 그때부터 그의 활약은 정말 엄청났다. 무엇보다 그가 관여한 모든 재판에서 검찰이 패배라고 할 수 있는 결과를 맞이했다. 이 나라의 재판은 유죄 비율이 99퍼센트라고 하는데, 나머지 1퍼센트는 거의 아부쿠마와 관계된 재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 "내가 맡았던 안건에서는 말이야, 그 이상은 없을 만큼 완벽하게 입증했어. 누가 봐도 피고인의 유죄가 확정됐지. 그런데 아부쿠마는 전혀 예상도 못 했던 새로운 증거를 찾아왔고, 결국 무죄 판결이 내려졌어. 아직까지도 모르겠다니까."
또 다른 선배는 화를 펄펄 내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 절도사건 때 얘기야. 난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입증해서 피고인을 몰아넣었지.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변호인에 그 아부쿠마가 추가되더니 반대 신문에서 우리 쪽 증인을 아주 신나게 가지고 놀았고, 결국은 피고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 진범이라고 큰소리를 쳤지 뭐냐고. 게다가 나중에 검찰이 조사해 봤다니 정말로 그놈이 진범이었고! 솔직히 그때는 내 검사 인생도 여기서 끝이라는 각오를 했었지."
- 이노우에 검사의 조사 결과를 들은 이와타니 검사는 벌레라도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아부쿠마한테 당했는데도 그다지 책망하지 않은 이유를 알겠군."
"예. 그 사람한테 졌다는 이유로 좌천시킨다면 도쿄에 검사가 남아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적이 우수한 덕분에 살았다고 해야 할까, 복잡한 기분이군."
이와타니 검사는 자조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해서 이노우에 검사의 검사 인생에 당장은 큰 변화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 "이봐, 그런 방침 가지고는 변호사가 있는 의미가 없다고."
나는 놀라는 걸 넘어서 얼이 빠졌다.
그 말투는 거만하거나 불손한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겸허라는 단어와도 상당히 거리가 먼, 굳이 말하자면 그저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 같은 말투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 "그러지 말고 들어 봐. 전에도 말했겠지만 자네와 아부쿠마는 정말 닮았어. 자네는 의뢰인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하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잖나. 사실은 자네가 싫어하는 아부쿠마도 그래. 솔직히 '온 힘을 다한다'보다는 온갖 수단을 다 구사하는' 게 아부쿠마지만."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았다.
나는 의뢰인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률의 범위 안에서. 아부쿠마도 의뢰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문제는 필요하다면 법조차도 어기는 것이 아부쿠마의 방식인데, 그건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그리고 말이야, 아부쿠마는 자네보다 수십 배나 되는 재판을 겪었어. 의뢰인과 피해자가 누구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긴말 않겠네. 이번만은 이 녀석 도움을 받으라고."
- "솔직히 이번에는 아부쿠마 씨의 힘이 있어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의뢰인이 이미 죄를 자백했습니다. 저도 아까 면회하고 왔는데, 죄를 받아들이려는 건지 협력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군. 그래서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와서 여기 앉아 있다?"
"예. 뭐 그렇습니다."
"너 바보냐."
아부쿠마가 내 뇌를 완전히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 "그래, 바보. 전에 가르쳐줬잖아. 의뢰인은 거짓말을 하고 경찰은 위증을 한다고. 의뢰인이 죄를 인정했다고 해서 네가 믿을 이유는 없단 말이지. 그런데 좀 튕겼다고 혼자 꿍해 가지고 말이야."
정말 생각도 못했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항의하고 싶어졌다.
"예. 분명히 아부쿠마 씨한테 그렇게 배웠죠. 인간은 거짓말을 하는 생물이라고."
- "하지만 이렇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거짓말을 하는 건 뭔가 이익과 연결될 때라고. 이마이 씨가 자기 죄를 인정해서 대체 무슨 이익과 연결된다는 겁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지금부터 조사해야지."
- "나도 그 녀석이 무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그저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았으면서 의뢰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얘기지. 예를 들자면 말이야. 그 이마이라는 녀석이 일단 지금은 죄를 인정하고 있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쓸데없이 싸우기 싫다' 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나?"
"예?"
갑작스런 질문을 듣고, 급하게 이마이 씨와 했던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그랬었죠. 감옥에 들어갈 각오는 돼 있으니까 쓸데없이 싸우기 싫다고 했습니다만."
"그럼 감형 얘기는 했나? 죄는 인정하지만 형량은 최대한 줄였으면 싶다고."
"아뇨... 그런 얘기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죄를 받아들일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만 했고."
아부쿠마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너 말이야, 이상하지도 않았나? 그래, 죄를 인정하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최대한 빨리 감옥에서 나오고 싶어 할 것 아니냐고. 보통 감형 얘기 정도는 하지 않겠어?"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습니다만..."
"뭔가 알 것도 같다. 그 이마이라는 녀석, 죄를 인정할 때도 뭔가 될 대로 되라는 태도 아니었나? 경찰도 주변 사람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으니 이젠 나도 모르겠다는 그런 느낌 말이야."
-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이마이한테서 들은 말 중의 하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댁도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지? 그래, 맞아.'
그는 내뱉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뭔가 의미가 있는 발언이었다면...?
- "설마 이마이 씨가 자포자기해서 자백했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이익으로 연결되는 거짓말이 되겠지. 안 그래도 그 녀석은 전과가 있는 데다 CCTV에 범행 현장까지 찍혔잖아? 실컷 범인 취급을 당하고 싸우는 것 자체가 싫어져서 자포자기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겠지."
- 더 이상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꼭 해야만 할 말이 있다.
"얼마 전에 제가 말했었죠. 당신은 악마라고. 다시는 당신 같은 악마의 힘은 빌리지 않겠다고."
"그랬었지. 그래도 뭐, 의뢰인을 위해서니까. 쓸데없는 고집 따위는 내다버리고 예전에 할 말은 취소하면 되는 거야. 아니면 이제 와서도 계속 고집부릴 건가? 당신하고 손을 잡는 건 내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면서."
날 놀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습니다. 의뢰인의 인생이 걸린 일이니까요. 제 고집 따위는 개나 줘버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부쿠마 씨,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다시는 법을 어기지 않겠다고."
"그건 무리야."
- 아주 딱 잘라서 말한 탓에 순간적으로 넋이 나가서 뭐라고 받아치지도 못했다.
"그럼 제가 뭐라고 대답할지는 알고 계실 텐데요?"
"진정하라고. 나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면 증거 위조 따위는 안 해. 지난번 살인사건은 우연히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랬을 뿐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그전에 절도사건 때는 그런 짓 안 했잖아?"
- "그런 거야. 나하고 인연을 끊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어. 하지만 법을 어기지 않는 동안에는 편리하게 이용하라고. 그러면 되잖아?"
이 사람은 교섭 능력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이번엔 지난번처럼 저 몰래 증거를 위조하지는 말아 주세요. 항상 저하고 같이 행동하시고. 그것만은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좋았어. 계약 성립이다. 약속하지."
이렇게 해서 나는 또다시 '악마의 변호인'의 도움을 받게 되고 말았다.
- 아부쿠마가 몇 번이나 말했다. 자신에겐 동요한 상대의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이 있다고. 물론 초능력 같은 것은 털끝만큼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아부쿠마의 감이랄까,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날카로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서 재판에서도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다.
- "댁은 검사야. 한 마디로 대학은 법학부를 나왔을 텐데, 언제부터 법대에 가겠다고 마음먹었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정했어요. 쓰레기 같은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그런 인간들을 잡아넣고 싶어졌으니까. 그런데 이런 얘기가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죠?"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부쿠마가 뭘 노리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들의 그런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부쿠마가 씨익 웃었다.
"그래, 이제 알았어. 이노우에 검사, 이마이가 왜 쓰레기 같은 아버지를 따라갔을까?"
- "간단한 얘기야. 댁을 위해서지. 댁은 법대에 가서 검사가 되기로 했지? 하지만 이혼한 어머니가 애 둘을 키우는 건 힘들고 대학에 가려면 돈도 많이 들지. 그래서 이마이는 자기가 피해준 거야. 소중한 누나한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쓰레기 같은 아빠를 따라갔다는 그런 얘기지."
생각도 못 했던 아부쿠마의 추리를 듣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노우에 검사도.
- "뭐야, 말도 안 돼?! 난 장학금 받아서 진학하려고 했는데? 돈 문제로 가족들한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장학금이라. 일본의 장학금은 결국 그냥 빚이라서 많은 학생들이 갚느라고 고생한다는 기사가 최근에 잔뜩 나오고 있잖아? 이마이가 그걸 봤다면 걱정이 끊이지 않았겠지."
이노우에 검사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생기가 완전히 빠져서 멍하니 서 있다.
"무엇보다 부모가 이혼한 게 고2 때라는 것도 마음에 걸리더라고. 한 마디로 중요한 꿈이 걸린 대학수험 직전이잖아? 어쩌면 어머니도 댁을 아버지한테서 떼어놓으려고 그 시기를 고른 게 아닐까? 어린 이마이도 나름대로 그걸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고."
- "그냥 가능성 중에 하나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도 착각하지 말라고. 내가 이런 추리를 들려주는 목적은 따로 있어."
-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아부쿠마지만 사건 현장 정도는 반드시 보러 간다. 그래서 구치소에서 나온 나와 아부쿠마는 바로 택시를 타고서 사건 현장인 빌딩으로 갔다.
- "아부쿠마 씨, 큰일 났습니다...!"
나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조작하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뭔데? 인터넷에 CCTV 화면이라도 올라왔어?"
그리고 아부쿠마의 대답을 듣고는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아셨죠?"
"이런 사건에서 흔히 있는 일이야. 사람이 죽는 장면의 동영상을 보게 되면 용의자에 대한 여론이 아주 안 좋아지니까. 그런 흐름을 만들고 싶은 놈이 있다는 얘기겠지."
"한 마디로 경찰이 유출했다는 건가요?"
"글쎄. 누가 했다는 말은 안 했잖아? 사건 관계자가 재미로 흘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부쿠마의 성격을 봤을 때 경찰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냉정한 것 같다.
- "누가 그랬든 큰일입니다... 댓글 좀 보세요. 다들 벌써부터 이마이 씨의 유죄를 확신하고 있어요."
"유출한 놈이 그걸 노렸을 테니까 당연한 일이지. 자네 말이야, 세상 사람들 반응 따위 일일이 신경 쓰지 마. 그러다간 살인범 변호 따위는 못 하게 된다고."
"그렇겠군요. 죄송합니다."
아부쿠마의 말이 맞다. 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너무 무서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 세계 사람들을 전부 적으로 돌리더라도 단 한 사람의 무죄를 주장한다, 그것이 변호사라는 직업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누가 그랬든 나한테는 잘된 일이야.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중요한 증거의 내용을 알게 됐으니까. 그 동영상, 지금 볼 수 있나?"
- "무엇 때문에 연락을 하셨습니까?"
"피해자가 떠밀려서 떨어졌을 가능성, 즉 살인일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살인사건이면 현경, 그러니까 현 경찰 본부에 있는 소위 '살인과 형사'가 수사를 하게 됩니다. 이후의 수사 지휘를 인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맙습니다. 질문은 이상입니다. 반대신문 하시지요."
"40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부쿠마가 묘한 대답을 하더니 날 쳐다봤다.
"혼다, 여기서 문제다. 지금 저 형사의 증언에는 변호사로서 반드시 걸고 넘어가야 하는 큰 틈이 있다. 뭔지 알겠나?"
- 나는 당황해서 질문의 개요를 생각했다. 110번에 신고한 뒤에 모리오카 경위는 바로 피해자가 추락한 현장으로 갔다. 그리고 현장을 확보하면서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했고 빌딩 옥상에서 추락했다는 사실을 특정. 옥상으로 올라가서 CCTV를 확인하고 이마이 피고에 의한 살인의 가능성이 나왔기 때문에 현경 본부로 연락- 이것이 모리오카 경위가 한 일이다.
도저히 모르겠다. 지금 한 증언 어디에 변호사로서 걸고넘어져야 할 틈이 있다는 걸까.
- "이봐. 이런 때 반대신문을 어떻게 하는지가 그 변호사의 실력이라고. 내가 하는 걸 잘 보라고."
난 정말로 모르겠다. 특히 모리오카 경위는 평범한 일반 시민이 아니라 경찰관이다. 재판도 나름대로 익숙한 건지 요점만 골라서 담담하게 증언했기 때문에, 도저히 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반대신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리오카 경위. 당신은 의도적으로 어떤 정보를 숨기고 증언을 하셨죠? 거기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아부쿠마의 선제공격은 여러 효과를 불러왔다. 모리오카 경위는 표정이 굳어졌고, 배심원들은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리오카 경위, 당신의 증언에는 없었습니다만 이번 사건의 신고가 들어온 시간은 몇 시 몇 분이었습니까?"
"... 첫 번째 신고가 들어온 것이 오전 10시 6분입니다."
"당신이 실제로 사건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30분이 조금 안 됐을 때입니다."
"당신들은 그 뒤에 수사를 시작했죠? 당신의 증언에 의하면 먼저 현장을 확보하고 피해자의 신원을 특정. 그다음에 청소 네트워크 주식회사에 가서 허가를 받고서 옥상으로 올라갔다고 했는데 말이죠."
"예. 그렇습니다."
"그럼 현장에 도착해서 실제로 옥상에 들어갈 때까지 몇 분이나 걸리셨습니까?"
"... 30분도 안 걸렸을 겁니다."
"중요한 부분이니 최대한 정확히 말씀해 주시죠. 30분이 걸렸습니까, 안 걸렸습니까?"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일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30분까지는 안 걸린 것으로 보입니다."
아부쿠마 앞에서 그런 애매한 증언을 하다니. 제 무덤을 파는 짓이다.
하지만 의외로 아부쿠마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당신은 사건이 일어난 날의 날씨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맑은 날씨였습니다."
"그럼 바람은 어땠습니까? 빌딩 옥상이라면 보통 바람이 강한데 말이죠."
"바람... 말씀이십니까. 예, 분명히 바람이 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것은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을 때입니다. 당신이 현장에 도착한 것이 10시 30분이 안 됐을 때. 그 뒤로 30분 전후로 옥상에 도착. 한 마디로 피해자가 추락한 것으로 보이는 옥상은 사건이 일어난 뒤로 한 시간이나 방치됐다는 뜻이군요?"
-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현장은 한 시간이나 방치돼 있었다. 그렇다. 그 정도 시간이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부분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싶었는지, 모리오카 경위는 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예를 들자면 피해자가 옥상에서 밧줄 같은 장애물에 발이 걸려서 추락했다고 합시다. 하지만 한 시간 동안이나 강한 바람을 맞다 보면 그 밧줄이 어딘가로 날아갔을 수도 있겠죠?"
"이의 있습니다! 잘못된 대답을 유도하는 가정의 질문입니다!"
"이의를 인정합니다."
"그럼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사건이 발생한 뒤로 한 시간 동안 현장도 확보하지 못했고 그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틀림없죠?"
"...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피해자가 살인이 아니라 사고사였다는 증거가 현장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당신들의 수사가 늦어진 탓에 놓쳤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여전히 무자비한 질문이다.
하지만 모리오카 경위도 일방적으로 몰리는 건 싫은지, 지지 않고 받아쳤다.
"CCTV 영상을 봐도 추락 사고가 아닌 살인사건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명백했습니다. 저희가 파악하지 못한 추락사의 증거가 현장에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부쿠마의 트집을 막아내는 강한 주장이다. 나한테 저렇게 강하게 주장했다면 도저히 받아치지 못했을 정도로. 하지만.
- "그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원하는 대로 됐다는 것처럼, 아부쿠마가 악마처럼 씩 웃었다. 그리고 증언대가 아니라 배심원 쪽을 보며 말했다.
"배심원 여러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지금 이 증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인사건의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며 수사했다고. 모리오카 경위, 한 마디로 당신들 경찰은 살인사건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수사했다는 얘기군요?"
"그, 그건 오해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말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저희는 살인사건의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며 수사를 했지만, 사고나 자살일 가능성도 계속 생각하며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 "당신이 살인사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죠? 예나 아니요로만 대답해 주십시오."
"그렇게 물으신다면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군요."
"그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아부쿠마의 얼굴에 또다시 악마 같은 미소가 드리웠다.
- "그렇다면 그 한 시간 동안에 뭔가 중대한 증거가 소실됐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겠군요?”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옥상에서 대체 뭐가 소실된다는 겁니까?"
"아."
당황했다. 한 시간 동안 강한 바람에 노출된 현장이다 보니 뭔가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대체 뭐가 소실됐을까? 예를 들자면 담배꽁초 정도라면 바람에 날아갈 수 있다. 다른 직원들이 떨어트린 담배꽁초가 있다면 피고인 이외의 누군가가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마이 피고가 옥상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른 직원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달라질 것이 없다.
- 1초가 영원처럼 길게 느껴질 만큼, 내 머리가 열심히 돌아갔다. 대체 어떤 것이 소실됐다고 해야 우리한테 유리해질까.
하지만 생각한 가치는 있었다. 찾아냈다. 아부쿠마와 했던 대화 속에 그 대답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유서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르쳐준 답인데 마치 내가 생각해 낸 답인 양 말했다. 죄악감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신경 쓸 때가 아니다.
- "이의 있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촌극입니다. 증거는 이렇게 제출할 수 없고, 무엇보다 저 조서라는 것의 내용도 형사가 서명한 뒤에 변호사가 멋대로 적은 것이라서 증거로서의 가치는 전혀 없습니다. 방금 있었던 일은 전부 기각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잘 기억해 주십시오. 방금 검사가 발언한 대로 조서에 서명을 받은 뒤에 멋대로 추가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그 말은 부당하다고!"
아부쿠마의 입을 막으려는 듯이, 오다기리 검사가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진술 조서는 정식 절차를 거쳐서 작성됩니다! 아이하라 경감 혼자가 아니라 다른 경찰관도 입회하니까, 멋대로 고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이쿠야. 오다기리 검사, 당신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텐데 어쩌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시는 겁니까?"
"편의상 그렇게 대답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아이하라 경감에게 그렇게 물어보든지!"
"그렇다면 그렇게 하죠. 아이하라 경감."
"예."
-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오자 아이하라 경감은 몸이 굳어져서 질문을 기다렸다. 취조 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대답할 준비가 돼 있는 분위기다. 그래서 아부쿠마는 '다른 경찰관도 입회했습니까?' 같은 빤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질문을 날렸다.
"당신은 피고인의 자백을 들었을 때, 그 이야기를 녹음 또는 녹화하셨습니까?"
"예? 아, 아닙니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취조를 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바로 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부쿠마는 다른 관점에서 취조의 정당성에 대해 질문했다.
"그럴 줄 알았지! 여러분 들으셨습니까?! 경찰은 밀실에서, 그것도 피의자 주위에 경찰관들만 있는 상태에서 자백을 강요했고, 게다가 그때 상황을 물리적 증거로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취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우기는 겁니다! 저희 변호사들이 벌써 몇 년 전부터 경찰 취조를 눈에 보이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만, 경찰이 들어주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자백을 강요하는지가 전부 드러나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의 있습니다! 이것은 변호인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고 본 심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코지마 사장을 밀친 게 아니죠?]
[예. 그건 맹세해요. 그런데 제 인생 따위는 어떻게 돼도 좋으니까, 최소한 누나한테는 피해가 안 가게 해야겠다는 마음에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인정했어요.]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별 내용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도 피고 측 증거로 인정했다.
- "당신과 마찬가지로, 저희는 접견실이라는 밀실에서 피고인의 이야기를 들었고 무죄라고 진술했습니다. 그때 상황은 이렇게 녹화해 뒀습니다. 당신과 다르게 동영상이라는 객관적 증거물을 남겨둔 겁니다. 밀실에서 당신이 만든 진술 조서와 이 동영상, 어느 쪽을 더 믿을 수 있을까요?"
"이, 이의 있습니다! 저희에게 반대신문 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고 이런 형태로 피고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재판장님. 지금 검찰이 제기한 이의를 인정하신다면, 밀실에서 제 반대신문도 없이 작성한 경찰의 진술 조서도 증거에서 삭제해야 마땅합니다."
아부쿠마의 주장이 꽤나 그럴듯해서, 법정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아부쿠마가 엮이면 항상 이런 식이다.
- "하지만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설령 사장이 자살했다고 해도 부사장이 그 증거를 은폐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없지는 않아. 하지만 그 녀석은 전과자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빌미를 생기면 쫓아낼 생각이었어."
- 재판 전이었다면 그런 가능성은 생각도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아부쿠마의 반대신문 덕분에 츠지 부사장의 본심을 알게 된 지금이라면.
- "상대도 안 해줄 것 같습니다만."
"맞아. 그래서 큰맘 먹고 저자세로 나갈 필요가 있어. 혼다, 자네는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마도 엎드려서 빌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아부쿠마라는 사람을 약간 다시 봤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다른 사람을 놀리고 조롱하고 속여 대는 사람이지만, 필요하다면 엎드려 빌기까지 한다니. 그런 일이라면 나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
"아뇨, 꼭 같이 가야죠. 엎드려 빈다면 저도 같이 하겠습니다. 둘이 같이 하면 훨씬 임팩트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아부쿠미가 씩 웃었다.
"좋은 정신 자세야. 하지만 따라오려면 내가 하는 말에 절대로 복종해야 한다. 내가 빌라고 하면 바로 엎드려 빌어. 배를 가르라고 하면 내장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 가르고. 발을 핥으라고 하면 엉덩이까지 빨아주고. 할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피고인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다면 힘든 일도 아니죠."
그것은 내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 "자네의 그런 점은 나쁘지 않아. 의뢰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야지."
웬일로 아부쿠마와 의견이 일치했다.
하지만 이때 내가 깜박한 것이 있었다. 아부쿠마는 뭐든지 다 하기는 해도 말도 안 되는 쪽으로 하는 경우도 있는 사람이다.
이 뒤에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재판에서 절 그렇게 못된 인간으로 취급한 사람하고 말을 섞고 싶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정말이지, 당신 때문에 나는 직원을 아끼지 않는 경영자처럼 돼버렸습니다. 앞으로 코지마 사장의 뒤를 이어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곤란해지게 될지 알기나 합니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사장이 되면 협력 고용주 제도에서 탈퇴할 생각이시죠? 지금부터 그 방침을 밝힌다고 해도 싫어하는 건 전과자들뿐일 테고. 당신처럼 전과자 하고 같이 일하기 싫은 사람들은 시시할 테니까요."
"...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지 않습니까."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지 츠지 부사장의 목소리가 약간 작아졌다.
아부쿠마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말하고 인정에 호소하고, 참 바쁘게 설득한다.
하지만 효과가 있는지 츠지 부사장의 태도가 약간 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역시 당신들한테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보나 마나 어디다 마이크라도 숨겨 두고 있겠죠? 내 발언을 어떻게 이용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너무나 옳은 말이라서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었다. 츠지 부사장의 말을 몰래 녹음해서 재판에서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사용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 "그렇다면 마이크나 리코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면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간단하죠. 혼다, 홀딱 벗자."
"예?!"
내가 받은 충격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따라오려면 배를 가를 각오라도 하라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홀딱 벗으라는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아부쿠마는 이미 넥타이를 풀고 웃옷을 벗고 있었다. 진심이다.
- "잠깐, 당신들, 뭐 하는 거야?!"
츠지 부사장은 깜짝 놀라서 법석을 떨었다. 눈앞에서 다 큰 남자 둘이 옷을 벗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보면 아시잖습니까? 원하시는 대로 마이크 같은 것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중입니다."
아부쿠마는 상반신을 다 벗더니 신발과 양말에 바지까지 단숨에 벗어버리고... 사각팬티에 손을 댔다.
내 충격은 상당했다. 아부쿠마는 항상 승리를 위해서 뭐든지 다 한다고 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하지만 나도 더 이상 망설일 수는 없다. 아부쿠마를 따라서 전부 벗어버렸다.
- "장난이 아닙니다. 저는 피고인을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침내 알몸이 된 아부쿠마는 털썩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도 아부쿠마를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보십시오. 저희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타구니에 달려 있는 마이크는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동감이다.
- "부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문 밖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비서겠지. 이렇게 법석을 떨었으니 걱정이 되기도 할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니까 들어오지 마!"
츠지 부사장이 당황해서 저지했다. 아무래도 홀딱 벗은 남자 두 사람이 무릎 꿇고 엎드려 있는 광경은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짓이지만- 보여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나도 이 모습을 다른 사람, 특히 여성한테는 보여주고 싶지 않다.
"됐어. 알았다고. 뭐든지 대답할 테니까! 그러니까 빨리 옷을 입으라고!"
마침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한눈에 봐도 동요했다.
- 이때 아부쿠마가 아주 잠깐 나한테 눈짓을 보냈다.
혹시 거짓말을 꿰뚫어 본 걸까. 한 마디로 지금 츠지 부사장이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그런데 지금 한 말의 어디가 거짓말인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 부사장실에서 나온 아부쿠마는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잘 기억해 두라고. 이게 일본인의 최강최종병기 알몸 엎드려 빌기야. 남자 두 사람이 눈앞에서 홀딱 벗고 엎드려 빌면 동요하지 않는 놈은 없지."
"그야 그렇겠죠..."
픽션 속에서라면 또 모를까, 눈앞에서 사람이 엎드려 비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광경이다. 게다가 알몸이면 더 충격이겠지.
- "그나저나 아부쿠마 씨는 아주 익숙하게 옷을 벗더군요... 혹시 예전에도 그 방법을 쓴 적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건 비밀이야. 그나저나 자네는 운이 좋아. 처음으로 그걸 하는데 관객이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마치 아부쿠마는 사람들이 잔뜩 보는 앞에서 알몸이 된 적이 있다는 듯한 말투다.
- "그런 상황이 됐으니까. 내일 재판에서 자네가 해줄 일이 하나 생겼어."
아부쿠마가 이렇게 의미심장한 제안을 할 때는 정말로 뭔가 방법이 있는 때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단,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괜찮아. 이번엔 안 할 테니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내일 법정에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분개한 얼굴로 검찰을 노려보기만 하면 돼. 할 수 있지?"
-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역시나 의미를 모르겠다. 검찰을 노려보기만 하는 게 어떻게 승리로 이어진다는 건지.
하지만 의뢰인을 구해줄 수 있다면 하겠다. 마침내 오다기리 검사가 법정으로 들어왔고, 나는 시킨 대로 열심히 노려봤다.
"이봐, 자네 분개는 겨우 그 정도인가."
내 얼굴을 본 아부쿠마가 비웃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겁니다만."
"잘 봐. 노려본다는 건 이렇게 하는 거야."
아부쿠마의 얼굴을 보고 그 돌변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평소엔 헐렁한 느낌의 아부쿠마가 마치 귀신처럼 무서운 얼굴로 오다기리 검사를 보고 있다. 정말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도저히 연기가 아닌 것 같은 표정이다.
- "봤지. 자네도 해봐."오다기리 검사 쪽을 보면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죠. 전 사람을 원망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하다못해 상대가 아부쿠마라면 좀 더 진지하게 노려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 그때 아부쿠마가 엄청난 소리를 했다.
"자네 아버지가 치한 누명을 쓰고 온 가족이 동반자살 직전까지 갔었다면서? 저 양반이 그때 그 검사라고 생각해."
"그,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나는 노려보던 것도 잊어버리고 아부쿠마를 쳐다봤다."미안해. 이소가야 영감님한테 들었어."그것은 내가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아부쿠마한테는 말한 기억이 없지만, 사무소에 식객 변호사로 들어가게 됐을 때 이소가야 소장님께는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 "그나저나 별일이군. 변호사한테 도움을 받았으니까 변호사가 되겠다? 무슨 만화도 아니고."
"뭐 어떻습니까. 그때는 변호사가 제 영웅이었다고요."
이게 정말로 만화였다면 그때 도와준 변호사가 아부쿠마였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사건은 벌써 20년 전 일이다. 아부쿠마는 변호사가 되지도 않았을 때다.
- "저희는 증거물 조작을 입증하기 위해서 증거물 하나와 증인 추가를 제안했습니다. 이제 겨우 증거를 제출했을 뿐이고, 이어서 증인 신문에 들어갈까 합니다."
"... 오다기리 검사. 괜찮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재판장이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증인이 누구인지에 따라서는 재판장님께서 신속하게 판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오다기리 검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났다."그럼 증인을 소환하겠습니다. 뉴일렉트로닉 주식회사 상품 관리부에 소속된 시모자키 스구루 씨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법정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건 또 누구야- 라고.
-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재판장님."그때 아이하라 경감과 상담이 끝났는지 오다기리 검사가 말했다."결론은 나오셨습니까?""죄송합니다. 사태가 이렇게 된 이상 조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부탁인 것은 잘 알지만 심리를 잠시 중단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언제까지 말입니까? 며칠 동안 걸릴 것 같다면 배심원 해산도 고려해야 합니다만."
"일단 한 시간을 주십시오. 오늘 중에 최종 결론을 내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한 시간.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안에 어떻게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시간 동안 휴식하도록 하겠습니다. 피고 측도 괜찮으시죠?"
"1분만 주십시오."
아부쿠마는 어째선지 즉답을 피하더니,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 저놈들은 한 시간 동안에 방청석에 있는 츠지 부사장을 잡아서 족칠 생각이야."
- 그래서 이런 복잡한 상황인데도 한 시간이면 된다고 한 것이다.
"그래. 경찰한테는 오늘 석간신문에 '카나가와현 경찰 또다시 증거 조작 의혹'이라는 헤드라인이 올라오면 끝장이니까. 그러니까 자네는 경찰보다 먼저 츠지 부사장 하고 접촉해서 변호사로서 조언을 해주라고. 내용은 이렇게-"
그 내용을 듣고 전율했다. 아부쿠마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싶어서.
"... 알겠습니다. 그런 얘기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해야죠."
"좋았어. 그럼 지금 당장 자네 혼자 법정에서 나가라고. 츠지 부사장도 휴식 시간이 되면 당장 여기서 도망치고 싶을 테니까."
하긴, 츠지 부사장 입장에서 보면 당장이라도 도망쳐서 변호사를 고용하고 싶겠지.
- 복도에서 기다리던 날 보고, 츠지 부사장이 깜짝 놀랐다. 아마도 나와 얘기할 기분은 아닐 테니, 그가 지나가버리기 전에 재빨리 말을 전했다.
"츠지 부사장님, 당신이 증거를 조작했다는 것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할 겁니다. 조작을 인정하는 대신에, 바로 검찰에 거래하자고 제안하세요. 카나가와현 경찰이 곤경에 처한 지금이라면 증거 조작죄를 면제해 주는 거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아부쿠마가 전하라고 한 말이었다.
나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츠지 부사장은 당황한 것처럼 경직됐다.
"어, 어째서 나한테 그런 말을...?"
"이게 우리 모두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 당신과 검찰이 거래를 하면 당신은 증거 조작죄를 벗을 수 있고, 카나가와현 경찰도 증거 조작 의혹을 피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증거가 조작됐다면 이마이 피고의 무죄도 확정되겠죠.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건 지금뿐입니다. 만약 오늘 석간에 카나가와현 경찰이 증거를 조작했다는 기사가 나오면, 당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것처럼 대대적으로 체포할 겁니다."그때 아이하라 경감이 도착했다."츠지 씨, 잠시 이야기 좀 하시겠습니까?"
- "잘됐나?"교대하듯이 아부쿠마도 왔다.
"예, 아마도. 츠지 부사장은 아이하라 경감하고 같이 갔는데, 아마도 아부쿠마 씨가 지시한 대로 거래를 할 겁니다."
"당연하지. 증거 위조로 체포되는 건 회피할 수 있으니까.""그렇겠죠. 이제 경찰이 기소를 취소하면 끝인데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지?"
이 사람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
"... 무슨 뜻이죠?"
"재판이 아직 안 끝났다는 뜻이야."
이 사람은 오늘 하루 동안 대체 몇 번이나 놀라게 할 셈인지.
- "뭐, 한 시간 뒤를 기대하라고. 아직 근본적인 의문이 풀리지 않았어. 자네도 나하고 같이 범행을 재현했으니까 진상을 알았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아직 남아 있는 근본적인 의문? 내가 진상을 알았을 것 같다고?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 답은 알아내지 못했다.
- "신문은 이상입니다. 재판장님, 검찰은 본 사건의 기소 취하를 제안합니다."
"알겠습니다."
재판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쯤 넋이 나간 배심원들 쪽을 봤다.
"배심원 여러분, 오늘까지 출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찰이 기소를 취하했으니 본 심리는 종료되고 배심원 여러분도 해산하시게 됩니다."
- "이의 있습니다."
아부쿠마가 너무 무뚝뚝하게 말했기 때문에 그 말을 인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기분 나쁜 침묵이 법정을 지배했다. 지금 아부쿠마가 분명히 '이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은 검찰 측의 제안과 재판장의 판단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기는 것이 확정된 이 상황에서, 대체 어디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있다는 걸까.
- "예. 문제가 있습니다. 검찰이 주신문을 했으면 저희에게는 반대신문을 할 권리가 생깁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박탈당하려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이의를 제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맞는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피고인의 석방이 결정됐는데도 뭔가 신문을 하겠다는 겁니까?"
"예. 저희는 한 가지 문제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이마이 피고는 옥상에서 떨어지려는 피해자를 떠민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건 좋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는 대체 왜 옥상에서 떨어졌을까. 거기에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저희 피고 측에 그 의문을 규명할 의무는 없지만, 서비스로 해드릴까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이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반대신문은 당신의 권리입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반대신문을 하겠습니다-."
- "이제 남은 건 간단하죠. 당신은 아래층 발판의 방수 시트 틈으로 손을 내밀어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장의 넥타이를 꽉 쥐고 아래로 잡아당겼습니다."
법정이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그 추리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나였다. 분명히 아부쿠마가 말한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제 실제로 검증도 했고, 아래층 발판에 있던 아부쿠마가 내 넥타이를 잡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난 그걸 아부쿠마가 그냥 장난을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걸까. 아부쿠마는 그때부터 진범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
- "그렇습니다. 증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한테는 증거를 제출할 의무가 없으니까요. 저는 검찰 측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한 제 마음대로 주장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는 김에 말하자면-"
아부쿠마가 오다기리 검사 쪽을 봤다. 조언하는 악마 같은 얼굴로.
"코지마 사장이 입고 있던 정장에서 이마이 피고가 등을 잡았을 때 묻은 DNA가 검출됐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경찰은 넥타이도 조사해야 합니다. 이 증인의 DNA가 검출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 CCTV는 옥상에서 움직이는 것이 있으면 자동으로 녹화가 시작되도록 설정돼 있었습니다. 즉, 제 생각이 맞는다면 코지마 사장이 오기 전에 몰래 옥상으로 나온 당신의 모습과 사건이 발생한 뒤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녹화한 영상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런 것들은 바로 지워버렸겠죠. 하지만 영상이 들어 있던 하드디스크는 사건이 발생하고 한 시간 뒤에 경찰에 제출했다고 했습니다. 그 한 시간 동안에 당신은 일단 동영상을 편집해야 했는데, 거기엔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렇다면 데이터를 경찰이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지울 시간도 없었겠죠. 당장 데이터 복구 작업을 해볼 가치가 있을 겁니다."
- 이마이 피고가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겠지. 솔직히 나도 같은 심정이다.
"정말...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어. 솔직히 경찰한테 거짓말로 자백했을 때부터 정말 거지 같은 세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당신들 덕분에 아직 살 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하게 됐어. 고마워."
그것은 아부쿠마에게는 어울리는 말이지만, 나한테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저도 당신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당신이 범행을 자백했다는 말 때문에, 무죄일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었습니다."
"괜찮아. 당연한 생각이지. 그때는 나도 포기하고 자백했으니까."
위로해 주려는 듯 그렇게 말해주었지만, 아부쿠마는 내가 간파하지 못한 이마이의 거짓말을 알아차렸다. 역시 난 너무 미숙하다.
- "자네는 생각이 너무 딱딱해."
아부쿠마가 내 머리를 장난감처럼 주물렀다.
"뭐, 이 재판에서 이긴 건 90퍼센트 정도 내 덕분이지만, 자네도 서류 업무하고 자명종 시계 노릇은 했으니까, 10퍼센트 정도는 자네 덕분이라고 해도 돼."
"그건 거의 자랑거리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만..."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낫고, 결국 결과가 전부야. 자잘한 일은 신경 쓰지 말라고."
- "당신들은 매번 재판 때마다 진짜 범인을 지적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거야?"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다. 이마이가, 그리고 아마 오다기리 검사가 다른 곳으로 간 것을 확인한 뒤에 인사도 없이 그렇게 말을 건 사람은 이노우에 검사였다.
- "뭐야? 우리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아닌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것처럼, 아부쿠마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으면 해 줄 수는 있는데?"
"아닙니다. 보수도 받았고 저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자네는 여전히 숫기가 없구먼. 이럴 때는 상대의 약점을 노리고 대가를 요구하는 게 제대로 된 변호사야. 한 번 더 업소 아가씨 옷을 입어달라고 해도 좋고."
굳이 상대의 약점을 후벼 파는 게 아부쿠마답다.
"당신, 또 그 소리야...?"
"왜,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잖아? 그쪽도 가끔은 그 답답한 정장을 벗고 화려하게 꾸며보고 싶지 않아?"
"말도 안 돼. 난 평생 검사로 살아가기로 했어!"
이노우에 검사는 귀신같은 얼굴로 아부쿠마를 노려봤다. 이 사람에게도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는 것 같다.
- "어떻게 진짜 범인이 있다는 발상을 했습니까...? 저는 끝까지 코지마 사장의 사인을 자살이나 사고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사고방식의 문제지. 나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진범이 있을 가능성을 계속 고려하고 있었으니까."
- "아니, 사건의 개요 따위는 상관없어. 잘 들으라고.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우리는 관객, 즉 배심원과 방청객을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 해. 그건 여러 번 말했었지?"
"예. 뭐. 분명히 재판에서 배심원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래. 하지만 TV 프로그램에 찌들어버린 관객들은 처음부터 검찰 편, 한 마디로 적이나 마찬가지야. 그 인간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려면 먼저 이쪽 주장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 필요가 있어. 그러기 위해서 배심원이 관심을 가질 것 같은 주장을 언제든지 터트릴 수 있게 준비를 해두는 거지."
"그, 그게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는, 그 주장이라는 겁니까?"
"그래. 그렇게 드라마처럼 흘러가면 다들 재미있고 좋잖아?"
아부쿠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한 마디로 항상 배심원을 놀라게 하는 주장을 생각해두라는 건가요?"
"그래, 정답이야. 자꾸만 말하지만 자네는 좀 더 긴장을 풀어야 해. 배심원 재판이라는 건 말이야, 배심원이라는 관객들을 얼마나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지에 달렸어. 한 마디로 엔터테인먼트지. 연극이랑 다를 게 없는, 관객이 같은 편으로 붙으면 어떤 억지라도 통하거든. 예를 들자면 증거를 조작했다고 우긴다든지."
- "어때? 그런 방법은 싫은가? 이번에도 날 때리고 싶어졌나?"
"아니요. 저한테 그럴 자격은 없습니다. 아전인수가 너무 심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죄라고 할 만한 짓은 저지르지 않은 것 같으니까요."
"글쎄. 이번엔 우연히 그냥 넘어갔을 뿐이라고. 만약에 억울한 의뢰인을 구할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때는 자네가 때리고 싶어지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거야."
"..."
그런 짓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때는 제가 반드시 막을 겁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 이번 사건을 통해서 또다시 내가 미숙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한다. 예를 들자면 실제로는 죄를 저질렀으면서 무죄로 만들어달라는 의뢰인이 있다. 동시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많은 거짓말에 휘둘린 탓에, 하마터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살인자로 취급할 뻔했다. 하지만 아부쿠마는- 증거 조작까지도 저지르는, 내가 너무나 싫어하는 '악마의 변호인'은 달랐다. 나는 아부쿠마가 말하는 초능력이라는 것은 아직도 믿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번에도 아부쿠마가 옳았다. 이마이의 누나인 이노우에 검사와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마이가 유죄라고 확신하는 와중에, 아부쿠마 혼자만 이마이가 무죄라고 믿었다.
- 나는 올바른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무죄를 주장하는 의뢰인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싶었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저지른 범인이라도 정당한 판결을 받게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가까운 사람을 위해 자신이 불리해지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나는 하마터면 이마이를 교도소로 보내버릴 뻔했다. 옳은 쪽은 의뢰인을 위해서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증거를 조작하고, 온갖 궤변에 아전인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최악의 '악마의 변호인'이었다.
아부쿠마 같은 변호사가 옳은 것일까. 아부쿠마 같은 변호사가 필요한 걸까. 아부쿠마는 필요하다면 또다시 증거를 조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억울한 피고인을 구하기 위한 행위라면, 나는 그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내 고민은 당분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날, 나는 캬바레 클럽, 소위 말하는 캬바쿠라에 있었다.
나는 그런 업소에 다니는 취미가 없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돈도 없기 때문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아부쿠마가 불러서 간 것이다.
"네 일에 몇 번이나 어울려줬잖아. 가끔씩은 나하고도 좀 어울려줘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면 저로서는 거절할 방법이 없긴 합니다만..."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내가 아부쿠마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치러야 할 보수는 확실하게 치르고 있다. 굳이 이렇게 어울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세상에는 술자리에서 다지는 친목도 있다고 하니까. 아부쿠마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그런데 아부쿠마 씨. 여긴 분명히 여성과 술을 마시는 곳이었죠?"
"그렇지."
"그런데 왜 이 자리엔 여성이 없는 겁니까?"
- "역시 있는 게 좋은가 보지."
아부쿠마가 장난을 치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없는 것보다는 좋을 것 같습니다만. 요즘엔 업무 외에 여성과 접할 일이 없으니까요. 뭐, 솔직히 좀 주저되긴 합니다. 처음 본 여성하고 갑자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넌 쓸데없이 정직하다니까. 너 혹시 숫총각이냐?"
"당연하죠. 공부하고 아르바이트하느라 데이트는 꿈도 못 꿨으니까."
"아, 그, 그러냐. 그렇게까지 당당하게 말하는 녀석은 또 처음 봤네."
"총각이건 아니건, 인간의 가치 하고는 상관없지 않습니까? 살인귀가 숫총각이 아니라고 존경받는 것도 아니고, 숫총각이라도 인명을 구한 의사라면 존경해야겠죠?"
"그, 그래,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아부쿠마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 "아부쿠마 씨는 마음만 먹으면 굳이 법을 어기는 수단을 쓰지 않아도 무죄를 따낼 수 있을 겁니다!"
"말로는 뭔들 못 해. 지난번 재판은 우연히 잘됐을 뿐이야. 다음 재판에서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 기회가 있다면 난 아마 또 해버릴걸?"
"어째서 못 알아듣는 겁니까. 전 당신을 때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그보다 너야말로 슬슬 생각을 바꾸지 그래? 그렇게 짭새들하고 싸워봤으니 그 녀석들이 가진 권력이 얼마나 큰지 잘 알았을 텐데? 정정당당히 싸워서 이기는 놈이 이상한 놈이야."
그렇게 말하니 나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 일례로 지난번 사건에서는 옥상의 펜스가 망가져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사건 현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위험한 곳에 누가 들어가서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 문제가 되니까. 하지만 그 탓에 우리는 경찰이 이것저것 다 뒤진 뒤에야 현장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다른 동료 변호사들에게 들어봐도 비슷한 사례가 아주 많다고 했다. 예를 들자면 사건 현장에 혈흔이 남아 있다고 하자. 당연히 경찰은 감정을 하러 보내는데, 그때 이미 혈흔을 다 써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변호사 측은 경찰의 감정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 "중요한 증거는 경찰이 입수한 뒤에나 볼 수가 있잖아. 만약 우리가 못 보는 곳에서 증거를 조작한다면 어쩔 건데? 그걸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찰도 증거를 확보할 때는 나름대로 절차가 있을 텐데요."
"사진을 찍은 뒤에 채취한다든지? 그럼 그 사진을 조작하면 어쩔 건데?"
"그, 그렇게 따지면 끝이 없을 것 같은데요."
"거 봐. 그거야 언제든 조작할 가능성은 있어. 다음에 담당하는 재판에서 조작된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어?"
"그렇다고 저희가 조작해도 된다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래? 그럼 말이야, 만약 경찰이 날조한 증거를 제출했다고 하자. 거기에 대항하려면 증거를 날조하는 방법밖에 없어. 그럴 땐 어쩔 건데?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의뢰인한테 '당신이 무죄인 건 알지만, 반증할 수 없으니까 여생은 빵에서 지내세요'라고 할 수 있겠어? 예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 아마."
"... 그래도, 저는 생각하는 걸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날조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을 겁니다."
"그럴 시간이 있을까? 법원은 배심원들 잡아 두는 시간을 줄이려고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해결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리 있겠어?"
아부쿠마는 조롱하듯이 웃었다. 분하지만 반론할 방법이 없다.
- "우리가 이런 의논을 벌써 몇 번이나 했지? 그만 포기해. 나한테는 내 방법이 있어. 너한테 그 방법을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내 방식을 바꾸려는 건 그만 포기하라고. 그리고 말이야, 너도 언젠간 내 방식이 옳다는 걸 이해하게 될 거야."
"...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증거를 날조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아직도 모르겠냐? 넌 옳은 일만 하면 보답을 받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그 생각이 배신당했을 때의 반동도 크겠지. 그때 절망한 너는, 틀림없이 나처럼 될 거야."
예언하는 것 같은 아부쿠마의 말이 내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마치... 아부쿠마 씨한테 그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 같은 말이군요."
- "당연한 얘기지만, 뚜껑을 따고 시간이 지나면 술도 맛이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단골손님한테는 새 술을 내가지만, 아부쿠마 씨한테는 항상 따놨던 술을 주고 있어요."
"하아, 아부쿠마 씨는 그런 줄도 모르나 보네요."
"맞아요. 게다가 그 사람, 술이 약하거든요. 별로 못 마셔요."
"그, 그렇습니까?! 어쩐지 천천히 마신다 싶기는 했는데. 그나저나 술도 못 마시고 여성에게 수작을 부리는 것도 아니면서 매일 술집에 오다니... 정말 모를 사람이네요."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에요. 혼자 집에 있어봤자 쓸쓸하니까 여기 오는 거죠."
"그러고 보니까 부인과 이혼하고 딸 친권도 빼앗겼다고 했었죠."
"이혼이 아니라, 사별이에요."
- 나는 당황해서 기억의 실마리를 더듬었다. 변호사에게 필요한 능력 중 하나는, 법조문을 외우는 기억력이다.
생각해 보니, 분명히 아부쿠마가 나한테 '아내와는 헤어졌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걸 내가 일방적으로 이혼했다고 해석했을 뿐이다. 매일 업소에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이혼당해도 싸다고. 변호사로서 실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선입견이었다.
- "혼다 선생님, 이 얘기는 부디 비밀로 해주세요. 손님의 개인정보를 알려주는 건, 원래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이거든요."
"알겠습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비밀을 제게?"
"당신은 아부쿠마 선생님하고 오래 어울리게 될 것 같으니까요. 언젠가 본인 입에서 듣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미리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하긴, 어느 날 갑자기 '아내 하고는 사별했다'는 말을 들으면 대체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마리 씨에게 감사해야겠다.
- 그때,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아부쿠마의 모습이 보여서, 나와 마리 씨는 입을 다물었다.
"이봐, 마리. 왜 그 녀석한텐 따라주고 나한텐 안 해주는 거야?"
아부쿠마가 우리를 보면서 삐쳤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아부쿠마 선생님은 따라드려도 지명료가 안 나오잖아요. 혼다 선생님은 잘해드리면 언젠가는 지명해 주실 것 같고."
역시 대단하다. 조금 전까지 아부쿠마의 과거에 대해 심각한 얘기를 했었는데,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아부쿠마의 이야기에 맞춰줬다. 나 같았으면 생각을 전환하는 게 따라가지 못해서 얼굴에 다 드러났을 텐데.
- 과연, 역시 프로다. 안 그래도 나는 여성을 접해본 경험이 상당히 적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술을 따라주시니까 왠지 단골이 되고 싶은 기분이 드네요."
그 말에 어째선지 아부쿠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그 소리 들었지. 마리, 이런 소리 하는 놈이 단골이 되겠어? 얼굴이 시뻘게져서 횡설수설하는 놈이라면 모를까."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번엔 마리 씨도 내 편이 돼주지 않았다.
"혼다 선생님, 혹시 여자 경험이 많지 않으세요? 어지간한 손님들은 이런 얘기하면 홀랑 넘어가는데."
"아뇨, 그런 경험은 전혀 없습니다만. 아무튼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마리 씨가 술을 따라주시니까 정말 좋습니다."
"어머나, 정말 못 당하겠네."
- "그나저나, 노부시게라는 이 녀석 이름, 신기하지."
갑자기 백부님이 내 이름에 관한, 항상 듣는 얘기를 꺼내셨다.
"아, 그러네요. 대하드라마 같은 데서 봤는데, 노부시게라면 분명히 사나다 유키무라하고..."
나는 씁쓸하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전국시대 마니아셨거든요. 처음에는 유키무라라는 이름을 지으려고 했을 만큼."
"유키무라는 너무 유명해서 포기했다는 것 같아. 노부시게라면 그다지 유명하지 않으니까,라는 이유로 지었다나."
- 두 사람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은 건 좋지만, 나로서는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아뇨, 그건 제가 아니라, 저랑 같이 일을 한 분의 솜씨가 좋아서 잘된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TV에 나가는 걸 정말 싫어해서, 제가 대신 나간 것뿐입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까지 이 이야기를 대체 몇 번이나 했던가.
"하지만 항상 그 우수한 분과 일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인정을 받은 게 아닌가요?"
사사키바라 씨가 조심스레 그렇게 말했다.
"글쎄요. 언젠가 이 경험을 살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냥 내 기분이지만, 언젠가 아부쿠마와 싸우고 헤어지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부쿠마와 함께 진행한 재판이 내게 귀중한 경험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짜증 나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 "그나저나 변호사도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우수한 사람도 변호사로서는 대단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성격에 문제가 좀 있거든요."
"우수한 자영업자는 다 그런 법이지."
자영업자인 백부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까 변호사 드라마 같은 데서 종종 보는, 피해자한테 합의해 달라고 쫓아다니는 변호사도 있지 않냐? 그런 놈들에 비하면 성격에 문제가 있는 정도는 양반이지."
백부님의 약간 짓궂은 질문에, 씁쓸하게 웃었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합의 교섭은 형사 변호사의 중요한 일입니다. 저도 언제 그런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요."
-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변호사분이 피해자를 따라다니는 일도 있나요?"
"예. 가령 제가 백부님을 때려서 다치게 했다고 해보죠. 백부님이 상해죄로 고소를 하면, 아마도 저는 체포될 겁니다. 거기서 제가 변호사를 고용해서 백부님과 직접 교섭을 하는 겁니다. ‘돈을 지불할 테니까 합의하고 고소를 취하해 주십시오’라고. 양쪽이 잘 합의하면 제가 일단 체포됐더라도 석방이 됩니다."
이런 때 변호사가 악당 같은 취급을 받는다. 개중에는 ‘강간 사건도 취하를 따냈다!’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법률사무소도 있다. 그렇다고 그게 꼭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변호사의 일은 의뢰인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고, 합의를 따내는 것도 당연히 그 일 중의 하나니까.
- 내가 생각해도 변호사에 대해 너무 나쁘게 말한 것 같다. 사카키바라 양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당혹스러워하는 걸 보니. 나는 당황해서 부연설명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변호사가 범죄 피해자를 너무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군다는 민원이 많이 들어온 결과, 지금은 피해자 쪽의 합의가 없으면 주소 등의 개인정보를 알려주지 않게 됐습니다. 자꾸 합의를 강요하면 재판장님이 화를 내기도 하고."
"허어, 민원이 들어오면 대응을 하는 거냐. 그거 의외네. 법조계는 꽤나 보수적인 이미지였는데."
"저희 업게도 그런 이미지로 보이는 게 싫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몇 년 전에 치한 누명을 쓴 사건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해서 상황을 바꿔가고 있습니다."
- "백부님, 그런 건 언제든 부담 없이 얘기하세요. 비용은 신경 쓰지 마시고. 친척 할인은 해드릴 테니까요."
"무슨 소리야. 친구나 친척일수록 돈은 제대로 내야지. 그런 서비스 가격은 다른 손님한테 해주고. 그게 장사야."
감명을 받았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보면, 비용이라는 것은 쌀수록 선전은 되지만 부담도 늘어난다.
선전할 필요가 없는 친구나 친척 관계일수록 정당한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 "역시 혼다 씨가 같이 와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일요일에 이렇게 시간을 내주시고."
"무슨 말씀을요, 전 그냥 서 있기만 했는데요. 스토커는 사회적으로도 꽤 큰 문제였으니까 경찰 쪽 대응도 개선됐을 겁니다."
스토커 사건은 몇 년 전에 크게 문제였고, 항상 경찰의 대응이 너무 느리다는 비난을 받았다. 치한 누명 문제처럼, 그런 일들에 대해 관계 부서들이 매년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지금으로 이어진 것이겠지.
"그런데 경찰이 대응한다고 약속은 했지만, 오늘 당장 상황이 개선되진 않을 겁니다. 당분간은 집에 들어가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예, 며칠 동안은 비즈니스호텔에서 출퇴근할 생각이에요."
- "글쎄요, 없는 것보다는 좋겠죠. 호신용 경보기나 다른 사람들을 부를 수 있는 물건이 있으면 좋겠죠. 뭔가 가지고 계신가요?"
"경보기라고 하셨죠. 지금은 없지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하나 사두겠습니다. 아, 식칼은 종종 가지고 다니기는 하는데요."
사카키바라 양이 웃으면서 엄청난 소리를 했다. 그건 총도법(銃刀法) 위반인데.
"식칼을요? 대체 왜?"
"요즘 퇴근하면서 요리 교실에 다니고 있거든요. 그래서..."
"아, 백부님도 그런 얘기를 하셨죠. 이유가 있어서 가지고 다니신다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호신용 도구로는 사용하지 마세요. 꺼낸 순간에 총도법 위반이 되니까요."
"저도 요리할 때 쓰는 칼로 사람을 찌르는 건 싫지만... 그런 건 정당방위가 안 되나요?"
'예, 총도법이라는 게 여러모로 귀찮은 법이거든요. '정당한 이유가 없이 일정한 길이 이상의 날이 달린 물건을 가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많이 들어봤어요. 그것 때문에 만화가가 잡혀갔다는 얘기요."
"다시 말해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문제가 없으니까, 만화가가 커터를 가지고 있다거나 요리사가 식칼을 가지고 다니는 정도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경찰이 불심검문을 했을 때 식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경우, 자신이 요리사라서 식칼을 가지고 다녔다는 정당한 이유를 증명할 때까지는 경찰이 풀어주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한마디로 식칼을 가지고 다니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 사정을 경찰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는 발생한다는 건가요?"
"그렇게 해석하시면 됩니다. 만약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식칼을 가지고 다녔다고 해도, 그것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면 그 순간에 정당한 이유가 사라지고 총도법 위반에 상해죄가 될 겁니다. 법률에서는 기본적으로 식칼 같은 것으로 사람들 다치게 하는 것은 전부 죄가 됩니다. 물론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고려해 줄 가능성도 있지만요."
"알겠습니다. 아무튼 무슨 일이 있어도 칼은 쓰지 않을게요."
사카키바라 양은 농담조로 그렇게 말했다.
- [착각하지 마, 부러워서 하는 소리야. 코난이나 김전일처럼 허구한 날 주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 변호사는 굶어 죽을 일이 없을 테니까.]
"제가 괜히 전화를 했나 보군요. 실례하겠습니다!"
농담을 듣고 있을 심정이 아니다. 나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잠깐, 잠깐, 잠깐, 농담이야, 농담. 잘 생각해 봐, 자넨 날 고용할 수밖에 없다고. 의뢰인이 너희 백부님이라고 했지. 변호사가 친척을 변호하면 재판장이 자네 말을 들어주겠어?]
"... 당신은, 정말로 악마입니다."
나는 통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 친척의 증언은 효력이 약해지기 쉽다. 조카인 내가 아무리 백부님을 변호해 봤자 듣는 사람이 얼마나 귀를 기울여줄까. 나 혼자서 백부님을 변호할 수는 없고, 그리고 정말 화가 나지만, 도와달라고 부탁할 변호사는 이 아부쿠마밖에 없다.
[그리고 말이야, 친척이 살인 혐의로 체포된다고 하니 냉정하게 있을 수 없다는 건 나도 이해해. 그렇다고 그렇게 굴어서 무슨 득이 있겠어? 이런 상황일수록 농담이라도 한마디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지. 안 그래?]
이런 때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아부쿠마가 정말 너무나 싫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자네는 그 백부님한테 뭐라고 했지?]
"일단 경찰을 불러서 자수하라고 했습니다. 저도 금방 갈 테니까, 그때까지 묵비권을 행사하라고."
[너, 바보냐.]
아부쿠마한테 욕을 먹는 데도 익숙해진 기분이 든다.
- [경찰을 불러서 어쩌자는 거야. 경찰보다 우리가 먼저 현장에 가야지. 그러면 경찰한테 증거를 뺏기게 되잖아.]
"... 그거, 증거를 숨기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죠?"
[무슨 소리야, 경찰이 증거를 청구하면 얼마든지 보여줄 거라고. 말 안 하면 가만히 있겠지만. 그건 문제 될 게 없잖아? 한마디로 짭새들이 하는 짓을 우리가 먼저 한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 말을 들으니 딱히 이상하지 않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 "하지만 이번에는 무리라고 봅니다. 이미 다른 지나가던 사람이 목격한 탓에, 백부님이 신고하지 않았어도 다른 사람이 했을 테니까요."
[이런,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런 때는 착한 척하면서 심증을 좋게 만드는 게 제일이야.]
이 사람은 매사에 일일이 손익을 따지면서 행동해야만 하는 건가. 아니,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려나.
[그렇다면, 결과적으로는 자수하라고 한 게 정답이 되겠네. 살인 사건이니 최종적으로는 체포에 기소가 될 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쪽이 우리한텐 차라리 잘된 일이야. 자네도 변호사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 "그렇군요. 임의동행이면 변호사를 부를 권리가 없으니까?"
[맞아. 하지만 체포되면 접견하기가 쉬워. 그리고 백부님이 어디 계신지는 알지? 연행될 것 같은 경찰서를 알아봐. 장소를 보면 관할서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오실 거죠?"
[그래. 다행히 지금은 밤이니까, 저쪽도 인권 문제 때문에 오밤중에 붙잡고 취조할 수는 없어. 그사이에 접견을 하자고. 나도 가줄 테니까.]
- "이쪽에 조금 전에 체포된 사카이 코지라는 인물이 구속돼 있을 겁니다. 저희는 변호 의뢰를 받은 변호사인데, 지금 당장 접견을 하고 싶습니다만."
창구의 경찰은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기분도 이해가 된다. 우리는 서로의 입장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경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아부쿠마가 말했다.
"딱 3분 주겠어. 이 밤중에 취조를 할 리가 없으니까. 혹시나 하고 있으면 인권 침해 아니겠어. 우리가 당장 접견을 못 하게 할 이유는 없겠지? 그리고 자네 이름이 뭔가? 뭐, 딱히 민원을 넣겠다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확인해 볼 테니까."
경찰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확인하러 갔다.
- "아부쿠마 씨, 자꾸 그런 식으로 겁을 주지 않아도..."
"이런 건 꼭 해야 돼. 그러면 저쪽도 우리 접견 요구를 인정할 수밖에 없거든. 저 자식들은 뭔가 핑계를 대서 기다리게 만드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고."
하긴, 의도적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접견할 때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됐으면 정당방위가 될 수도 있겠군요."
"이 멍청아!"
아부쿠마가 내 머리를 세게 때렸다.
"아야, 뭐 하는 겁니까?!"
"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해야 하냐고. 상대의 말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얘기를 얼마나 더 해야 이해할 거야. 있는 그대로 믿어도 되는 건,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확신이 있을 때뿐이야."
마지막 한마디는 안 해도 될 것 같지만, 내가 맞은 이유는 알았다.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또 백부님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아부쿠마는 지금 백부님이 한 얘기에 거짓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뜻이 된다.
- "듣고 보니 그렇군요."
사카키바라 양을 메고 있었다면 스토커의 목과 사카키바라 양의 몸이 거의 밀착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부쿠마가 나를 들어 올릴 때도 오른팔 하나의 힘으로는 모자라서 두 팔을 다 썼다. 사람을 쌀자루처럼 오른쪽 어깨에 멨다고 치자. 그리고 몸을 안정시키려고 왼팔도 댔다고 보면- 왼팔이 몸을 가리는 모양이 된다. 식칼로 목을 찌를 수 있을까?
- 백부님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들 지금 내 변호사잖아, 그런데 왜 내 말을 안 믿는 건데? 내가 스토커를 찔렀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 말은, 당황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혼다, 힌트를 하나 주마. 내 슈퍼 초능력에 의하면 네 백부 양반은 지금 거짓말을 했다."
"말 안 해도... 압니다."
증언의 모순을 지적해서 동요하기 시작한 증인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봤는데, 지금의 백부님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 "이런 얘기가 있어. 미국 변호사들한테는 어떤 터부가 있는데, 살인 혐의로 체포된 용의자한테 '정말로 사람을 죽였습니까?'라고 물으면 안 된다더라고."
"... 왜 그러는 거지?"
순수한 의문 때문인지, 백부님이 물었다.
아부쿠마가 그 말을 한 이유를 눈치채고, 내가 대신 대답했다.
"미국 변호사는 변호 활동을 하면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만약 살인 혐의로 체포된 혐의자한테서 '사실은 제가 죽였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절대로 무죄를 주장할 수가 없죠. 그래서 사실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블랙 조크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엔 그런 게 없지. 우리 변호사의 의무는 의뢰인의 이익을 최대한 지키는 거야. 의뢰인이 원한다면 기꺼이 의뢰인을 살인범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고."
아부쿠마가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모른다.
- "그랬군요. 그래서 백부님은 감싸주려고 하셨고?"
"그래. 재빨리 케이코가 들고 있던 식칼을 집어서 손수건으로 닦은 다음에, 내 손으로 꽉 쥐었다. 난 독신이고 자영업자다. 체포된다고 해서 민폐 끼칠 사람도 없어. 노후의 즐거움이라고 해봤자 너랑 케이코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것밖에 없고. 그렇다면 내가 감옥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냐."
"잠깐만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직 사카키바라 양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확정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야, 나도 케이코가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은 안 해. 하지만 상대가 위험한 스토커니까,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으니까. 게다가 피가 묻은 식칼을 쥔 채로 시체 옆에 쓰러져 있었어. 현장에 다른 사람이 있었던 흔적도 없었으니까, 당연히 케이코가 의심받지 않겠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당혹스러웠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을 변호한 적은 있다. 누나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인정했던 사람을 변호한 적도 있고. 하지만 다른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인정하는 사람을 변호해 본 경험은 없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옆에 있는 악마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부쿠마 씨,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일단, 지금 한 얘기는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아."
- "'거짓말이었습니다’라고 주장해 봤자 배심원들이 믿어줄 리가 없을 텐데요."
"어렵지 않다니까. 생각해 봐, 이 아저씨는 사카키바라가 범인이라고 생각해서 그 죄를 뒤집어쓰려고 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역전 무죄를 따낼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겠어?"
백부님을 간단히 무죄로 만들 방법? 백부님은 사카키바라 양을 구하기 위해서 죄를 뒤집어썼다. 어떻게 하면 그런 백부님을 간단히 무죄로 만들 수 있을까.
"아."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혹시, 사카키바라 양한테 '제가 진범입니다'라고 자백하게 만들겠다는 겁니까?"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네. 맞아, 그러면 최소한 이 아저씨의 형사 재판은 이길 수 있어."
"잠깐만, 그건 내가 용납 못 해. 그러면 케이코가 체포당하게 되잖아."
백부님의 말씀은 당연한 것이다.
"괜찮아. 그때는 나중에 사카키바라가 이렇게 증언하는 거야. '사실 그건 아저씨를 구하기 위해서 한 거짓말이었습니다'라고. 안 그래도 살인 사건 형사재판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야. 게다가 그때면 사건이 발생하고 한 달은 지났을 테고. 증거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을 테니, 만약 사카키바라를 체포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재판을 열 수도 없어. 왜냐하면 우리가 변호를 할 테니까."
끔찍한 작전이다. 하지만 아부쿠마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는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무능한 검찰이 저 피고인을 유죄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엔 이쪽 피고를 기소했습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용납해도 되는 겁니까- 그렇게, 후안무치한 열변을 토하는 아부쿠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 "식칼을 구석구석 완벽하게, 100퍼센트 닦았나?"
"그, 글쎄? 날 부분은 안 닦았는데. 그 부분에 피가 묻어 있지 않으면 오히려 의심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 식칼은, 원래 댁이 사카키바라한테 선물한 물건이라고 했지?"
"그래."
"그렇다면 말이야. 아직 지문 정도는 남아 있을 수도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불에 태워버리는 게 제일인데."
"그, 그런가? 흉기가 없어지면 의심을 받을 것 같은데."
"핑계야 나중에 얼마든지 댈 수 있으니까. 좀 더 철저히, 조카의 흔적을 지웠어야 했어."
내 눈앞에서 당당하게 증거 조작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이니까 그냥 흘려듣기로 했다.
"한마디로 식칼에는 사카키바라의 지문과 스토커의 혈액이 묻어 있다고 봐야 해. 그렇게 되면, 솔직히 말해서 댁보다 사카키바라가 체포되는 쪽이 변호하기 더 귀찮아지지. 그러니까 일단 댁이 범인으로 체포되는 쪽이 나중에 편해질 것 같아. 경찰도 혼란스러워할 것 같고."
이 악마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 "그게 다가 아니라, 또 한 가지 좋은 부록도 있어. 잘 들어, 우리한테 최악의 상황은 사카키바라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고, 댁이 증인으로 재판에 나가는 일이야."
백부님에게 삿대질을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댁은 현장에서 본 것들을 전부 말해야 돼. 그렇게 되면 끝장이라고. 댁은 상황을 보고는 바로 사카키바라가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배심원들한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야 한다고."
"그, 그건 정말 안 되겠는데. 케이코를 살인자로 만드는 증언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맞아. 하지만 안심하라고. 자신이나 친족이 불리해지는 증언은 거부할 수 있는 법이 있어. 사카키바라가 댁의 친족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불리해진다는 이유로 증언을 거부할 수는 있을 테니까."
"어떻게요? 백부님이 뭔가 죄를 지었다는 겁니까? 백부님은 범인이 아닌데요?"
그렇게 묻자, 아부쿠마는 씩 웃었다.
"무슨 소리야, 다른 죄를 저질렀잖아. 범인은닉죄. 뭐, 업무방해라고 해도 되겠지."
"으아! 치사하다!"
이 악마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알았다.
- 혼다의 동기인 이노우에 검사는 담담하게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일상적인 업무만 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할까. 형사사건에서 기소한 피고인의 소를 취하해서 석방하고, 친동생이 살인 사건으로 체포된 데다 기소 취하로 석방되는 등, 그녀 주위에서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지금은 많은 동료들이 그녀를 부정이라도 탄 것처럼 대하고 있다. 무시당하는 느낌은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없다.
정작 본인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공무원이자 검찰관이기도 한 자신의 신분은 나름대로 보장돼 있다. 좌천될 가능성은 있지만, 쉽게 잘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꿈이었던 검찰관으로 있자는 각오를 했다.
- 6월 30일 밤. 그런 그녀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그것은 이노우에 검사가 하루 업무를 마치고 자기 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사무실이 있는 층 전체가 왠지 어수선했다. 퇴근할 시간인데, 동료들이 여기저기에 모여서 뭔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저기, 무슨 일이라도 났나요?"
우연히 지나가던 검찰 사무관 히요시에게 물었다.
"아, 저도 방금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같아요."
이노우에 검사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살인 사건이라면 엄청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사건들이 끝도 없이 들어오는 곳이 이 도쿄 지검이다.
"이제 와서 살인 사건 가지고 왜 이 난리죠."
"아니, 그게... 그 아부쿠마랑 혼다 두 사람이, 변호인으로 붙었다나 봅니다."
"아..."
바로 납득했다.
- 그 두 사람, 특히 아부쿠마한테 검찰은 몇 번이나 큰 창피를 당했다. 그것은 도쿄 지검이 많은 사람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기 때문에. 즉,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도 아닌 인간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는 없다. 아부쿠마가 무죄로 만든 모든 피의자가 정말로 억울한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과는 결과로서 받아들이고,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많은 검사들의 공통된 심정이겠지.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 검찰은 몇 번이나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많은 검사들이 아부쿠마를 싫어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 ‘악마의 변호인’이 또다시 검찰청 앞을 막아서려고 한다니, 동료들이 술렁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 이노우에 검사가 소속된 ‘이와타니 라인’은 이미 두 번이나 아부쿠마한테 패배했다. 이제 와서 차례가 돌아올 리는 없다. 분한 일이기는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 아부쿠마라는 변호사는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다. 피의자가 정말로 무죄인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어쨌거나 적으로 삼고 싶지는 않은 인간이다. 그리고 아마 모든 검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아부쿠마한테 지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불문율까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에서는 대체 누가 수사를 지휘하고, 그리고 누가 공판을 담당할까. 어쩌면 동료들이 술렁대는 건 ‘나한테 떨어지는 게 아닐까’라고 전전긍긍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자, 다들 그대로 들어주게."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부장이 검사들에게 말했다.
"다들 들었겠지만, 조금 전에 이케부쿠로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토키가와가 담당하기로 했는데, 상대는 그 아부쿠마다. 다들 협력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아낌없이 협력해 주길 바라네."
'그래, 누가 담당할지는 뻔한 일이지.'
- 바로 얼마 전에 형사부에서 공판부로 넘어온 토키가와라는 검사가 있다. 나이는 30대 후반. 검사 치고는 젊은 편인데, 그만큼 넘쳐나는 체력 덕분에 형사부의 에이스라는 말까지 들었던 인물이다. 그 토키가와 검사가 형사부에서 공판부로 넘어왔다. 경찰을 지휘하는 입장에서 실제로 재판에 나가서 피의자를 단죄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 지망 이유, 그리고 전속 허가가 나온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다.
아부쿠마를 막기 위해서다. 몇 번이나 검찰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형사부가 한 일을 헛되게 만들어버린 아부쿠마에게 직접 천벌을 내리기 위해, 토키가와 검사는 공판부로 넘어왔다. 게다가 형사부에 자기가 키운 부하들을 남겨두고 왔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전부 만전의 태세를 갖추고 아부쿠마와 싸우기 위한 것이다.
- "이노우에, 자네는 오늘부터 내 보좌를 맡아주게. 이와타니한테는 다 얘기해 뒀네."
"예에?!"
자기도 놀랄 만큼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저한테?! 전 아부쿠마한테 한 번 졌던, 평범한 풋내기인데요?!"
"자기를 너무 비하하지 말게. 그리고 정말로 평범한 풋내기라면 그 나이에 검사가 되지도 못했어."
일단은 칭찬하는 말인 것 같았다.
- "그런데, 제 동생 건은 들으셨죠? 동생이 체포됐을 때 그 둘이 변호했던 것도?"
"아니까 하는 일이야. 그리고 자네와 혼다 변호사가 동기라고 들었다. 아마 이 중에서는 그 인간들 다루는 법을 제일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자네는 더 물러날 데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여기에 있고. 한마디로, 검사를 그만둘 생각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부쿠마한테 한 방 먹이고 싶은 생각은?"
"당연히 있습니다."
"그럼 됐어. 잘 부탁하네."
- 이노우에 검사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아부쿠마한테 한 방 먹일 기회를 얻은 건 고맙다. 한편으로는 아부쿠마와 관련된 ㅇ리에 끌어들이지 말라는 생각도 들지만.
하지만 딱 하나, 걱정되는 일도 있다. 영장 우선주의인 일본 검찰이 하는 일은 대부분 서류 업무다. 그리고 토키가와 검사는 자기가 현장에 나갈 생각이라고 했고. 그 말인즉슨, 그 방대한 서류 업무를 자신이 다 처리해야 한다.
아부쿠마의 도제가 꼴이 된 동기를 비웃을 수 없는 처지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잘 들어. 이번엔 지금까지 우리가 맡았던 사건과 딱 한 가지 다른 게 있어. 경찰하고 거의 동시에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지. 경찰보다 먼저, 증거를 하나라도 더 찾아낼수록 우리가 유리해진다고 생각하고 움직여."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어디로 갈까요?"
"멍청하긴. 자, 문제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또 시작됐다. 이런 문답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아마도 날 위한 문제다. 어떻게든 답을 생각해내야 한다.
백부님과의 접견이 끝났으니, 다음에 조사하러 갈 곳은 두 곳밖에 없다. 하나는 범행현장, 또 하나는 사카키바라 양에게 사정을 들으러.
사카키바라 양은 아직 병운에 있을 테고, 나중에 만나러 갈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갈 곳은 하나뿐.
- "땡. 정답은 사카키바라라는 여자를 만나러 가는 거야. 증거엔 물증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래도 현장엔 빨리 가보는 게 제일일 것 같습니다만."
"그야 그렇지. 하지만 경찰의 속도는 압도적이야. 그 녀석들보다 먼저 현장에 들어갔다면 모를까, 같이 시작하면 이미 늦는 거야. 지금쯤 현장은 완전히 봉쇄됐을 테고, 주변에 있는 CCTV도 죄다 압수했을 테니까, 가봤자 의미가 없어."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경찰이 봉쇄한 현장에 들어가려다가 쫓겨난 적도 있으니까.
- "그럼 사카키바라 양, 스토커와 마주친 뒤에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사람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런저런 말을 했어요. 왜 나하고 사귀어주지 않냐, 왜 경찰에 신고했냐고."
무슨 소리를 했을지는 알 것 같다.
- "그렇게 되면 당연히 사카이를 위협하겠지. 사카키바라가 체포되길 원하지 않으면 그만 입을 열고 사실대로 말하라고. 그렇게 되면 귀찮아져. 사카이는 사카키바라를 감싸기 위해서 거짓 자백을 할 가능성이 있어. 재판 때까지 계속 입을 다물면 모를까, 경찰 쪽에 유리한 조서라도 만들면 골치가 아파지거든."
"아..."
"백부님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진실을 증언하는 것뿐이라면 된다고, 사카키바라 양을 감싸기 위해서 '사실은 내가 했다'고 거짓 자백을 할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 아부쿠마의 우려는 당연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난번 사건에서는 지는 걸 싫어하고 기가 센 것 같은 이노우에 검사의 동생조차 거짓 죄를 자백했다. 경찰이 온갖 수단을 써서 자백하라고 강요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당장 힘든 상황을 모면하려고 거짓 자백을 해버릴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 "어떻게 하면 될까요. 뭔가 생각이 있으신가요?"
아부쿠마는 씩 웃었다. 마치 내가 그렇게 묻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안심해, 방법은 있어. 하지만, 자네가 좋아할 것 같은 방법은 아니야."
"가르쳐주세요. 그렇게 해서 의뢰인의 권리를 지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좋았어, 그 말을 기다렸다. 잘 들어, 너는 내일부터 경찰서에 붙어 있어."
- "그래, 취조에는 입회할 수 없지. 하지만 피의자는 변호사의 조언을 구할 권리가 있어. 그걸 악용하는 거야."
"지금... 본인 입으로 악용이라고 하신 겁니까?"
- 다음 날, 나는 아침부터 혼자 경찰서로 갔다. 아부쿠마한테 배운 못된 짓을 실행하기 위해서다. 목적은 백부님의 증언을 철저히 막는 것이다.
- "하루 종일 저하고 이렇게 있어주세요."
그것은 정말 너무나 단순한 방법이었다. 아부쿠마한테 그 방법을 들었을 때는 나도 얼이 빠질 정도였으니까.
- "다 확인했어! 사카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아니까, 지금 여기서 취조를 거부해 봤자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죄가 더 커질 뿐이야!"
그 발언에, 나는 위축되기는커녕 크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어이, 그 대놓고 하는 한숨은 뭐야?!"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저는 지금부터 제가 아는 쓰레기 변호사 같은 소리를 해야만 하니까."
"뭐라고?! 무슨 헛소리야?!"
"방금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다 확인했다고. 사카이 씨가 뭘 했는지 알고 있다고도 하셨고? 그건 취조를 중단해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겠죠?"
당연히 젊은 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잡아떼면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죄가 더 커진다-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 나라 법에는 묵비권이 보장돼 있고, 피의자가 취조에 응하지 않는다고 불리해지는 법도 없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신다는 겁니까?"
"아, 아니, 그런 건..."
"지금 그 발언은 너무나 부적절했습니다. 공안위원회에 신고해야 할 안건이군요. 형사님, 성함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젊은 형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때, 나이 든 형사가 "자넨 빠져"라고 말하며,. 젊은 형사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물러나게 했다.
- [가능성은 있지. 하지만 나 같으면 안 그럴 거야. 자네가 아침부터 그 경찰서에 틀어박혀 있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나 같으면 그런 데로 데리고 갈 리가 없고, 무엇보다 여성이 들어갈 수 있는 유치장은 아주 한정돼 있어. 거기 경찰서에는 여성용 시설이 없을 텐데.]
"그렇다면 다른 경찰서에?! 그런데 그게 어딘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냉정하게 생각해 봐. 도쿄에 여성이 들어가는 유치장은 극단적으로 적어. 이케부쿠로 하고 가장 가까운 곳이면, 하나밖에 없지.]
"아...! 생각났다, 하라주쿠 경찰서군요!"
공부와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느꼈다.
내 고민은 여성이 들어갈 수 있는 설비를 갖춘 유치장이 있다는 것만 생각해 냈으면 바로 해결될 문제였다. 나는 그것을 몰랐고, 아부쿠마는 알고 있었다. 난 정말 아부쿠마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 "그런데, 장소는 알아냈지만 어떻게 하면 되죠? 임의동행을 했으면 체포영장이 나오거나, 사카키바라 양이 어떻게든 자기 의지로 경찰서에서 나오지 않으면 손을 쓸 수가 없을 텐데요...?"
[하하하, 맞아, 정답이야. 사실은 말이야, 사카키바라가 어느 경찰서에 있건 우리는 손을 댈 수가 없어. 임의동행으로 데려간 시점에서 우리가 접견할 방법은 없어졌다.]
저 아부쿠마가 간단히 포기한 걸 보면 그만큼 귀찮은 상황인 것 같다.
"대체 어떻게 해서 사카키바라 양을 데리고 나갔을까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제게 전화하라고, 사카키바라 양에게도 충분히 설명해 뒀는데..."
[어떻게 했는지는 알 것 같아. 일단 체포영장을 준비하고, 임의동행과 수갑을 차고 체포당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좋은지 묻는 거야. 경찰이 흔히 쓰는 수법이지. 거부하면 강제로 끌고 가겠다고 협박하는 거야.]
아마도, 그 말이 맞겠지. 이건 아부쿠마가 예리하다기보다는 그 패턴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 "뭐, 지난 일을 따져봤자 소용없으니까, 하던 얘기나 계속하자고. 아침에 병실에 경찰이 왔고, 그래서 어떻게 됐지? 사정청취를 했나?"
"아뇨. 말씀하신 대로 거부했어요.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그랬더니 이번에는 묵비권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라고 했어요.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건 뭔가 켕기는 일이 있는 거라고. 최소한 이 말은 해달라고, 어째서 현장에 쓰러져 있었는지... 제가, 점점 불안해져서... 말해버렸어요, 갑자기 스토커가 튀어나와서 절 덮쳤다고."
경찰의 말재간이 좋다고 해야 할까.
하긴, 묵비권은 자신에게 불리해질 수 있는 진술을 거부하는 권리다. 하지만 그런 진술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최소한 경찰이 판단할 일은 아니다. 경찰이 뭐라고 하건 사카키바라 양은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어야 했다. 경찰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방침이었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됐지? 짭새 놈들이 그걸로 만족하고 갔을 리가 없는데?"
"예... 약속대로, 사정청취는 그만하겠다고, 그 대신에 지문만 채취하자고 했어요. 이건 사정청취가 아니고, 지문은 어디서든 채취할 수 있으니까 문제가 없지 않느냐면서. 결국, 거부하지 못하고..."
"들었냐, 혼다. 이게 경찰이다."
아부쿠마는 실실, 상쾌하게 웃었다.
"교묘한 말로 상대를 유도해서 필요한 증언과 증거를 뜯어냈잖아. 존경해야겠어, 쉬운 일이 아닌데. 그놈들한테 걸리면 어떤 사람이건 100퍼센트 체포될 거야."
"아부쿠마 씨, 마음은 알겠지만 여기서 경찰 험담을 한다고 뭐가 해결됩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험담을 했다고 그래? 난 그냥 경찰을 칭찬한 거야."
칭찬하는 척 험담을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 "잠깐만요. 한마디로 경찰은 바로 자수한 백부님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사카키바라 양이 범인이라고 생각을 바꿨다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 경찰에도 꽤 똑똑한 놈이 있는 것 같아."
경찰은 자백을 최대의 증거로 취급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당분간은 자수한 백부님을 범인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우리 생각이 빗나간 것 같다.
"뭐, 됐고. 사카키바라 씨, 그다음엔?"
"아, 예. 정오쯤이었어요. 몸에 문제가 없으니까 퇴원하려고 하는데, 또 경찰분이 오셨어요. 사정청취를 위해서 경찰서까지 동행을 부탁한다고. 체포영장이 있으니까 거부하면 강제로 연행할 거라고. 더 이상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들었냐, 혼다. 이게 경찰이다."
아부쿠마가 또 무서울 정도로 빙긋 웃었다.
- "체포영장이 있으니까 언제라도 수갑을 채워서 연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의 체면에 문제가 생기니까, 이번엔 특별히 임의동행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이게 경찰님들의 아주 고마우신 배려 아니겠냐? 증거에 자신이 있으면 처음부터 체포하겠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임의동행이면 변호사를 부를 권리가 없으니까, 피의자께서 비싼 돈을 주고 변호사를 부를 필요가 없게 배려해 준 거야."
"알겠습니다, 경찰 칭찬은 이제 그만하세요. 그보다 사카키바라 양, 여기 온 뒤에는 어떤 질문을 받으셨죠?"
"별로 대단한 건... 일단 저도 말했어요, 혼다 씨가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체포한다는 건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죠?'라고. 그렇다면 이미 알고 있는 얘기라도 해달라고 하면서, 병원 타임카드라든지 몇 가지를 제 앞에 꺼내놨어요."
"타임카드? 아, 병원에서 몇 시에 나왔는지 물었군요."
"예, 맞아요. 그리고, 요리 교실에 다니나 보네요,라고."
"그리고 말이야, 이런 말도 했겠지. '귀가 시간을 대답하는 것 가지고는 당신이 불리해지지 않겠죠?'라든지."
아부쿠마의 질문에, 사카키바라 양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예. 바로 그렇게 말했어요."
- "예, 당신이 어떤 성격인지 알아둘까 싶어서."
아부쿠마처럼 씩 웃으면서 말했다.
"한가한 놈이구만. 뭐 됐고. 그래서, 무슨 볼일인데?"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이번에 이 살인 사건을 담당하게 돼서 인사라도 드릴까 하고."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굳이 우리- 아니, 아부쿠마를 적으로 삼는다는 건 상당히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댁도 큰일이구만. 보통 검사 같으면 내가 변호하는 형사재판은 피할 텐데. 형씨, 혹시 직장에서 인간관계가 안 좋은 것 아냐?"
아부쿠마는 평소대로 도발했다. 이노우에 검사는 조마조마한 눈치였지만, 토키가와 검사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걱정 마시죠. 당신이야말로 형사재판 연승 기록을 갱신하는 중인데,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손을 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구만, 한마디로 지금 나한테 도전장을 던지러 왔다는 건가."
아부쿠마는 씩 웃었다.
"그렇다면 그 기분 나쁜 존댓말은 때려치워도 돼. 아무리 꾸며봤자 우리는 적이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서로 피곤하지 않겠어."
"그거 정말 고마운 제안이군."
토키가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금까지의 공무원 같은 태도는 사라지고, 마치 아부쿠마가 두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 "이렇게 만났으니까 하나 충고해 주지. 자네들은 잔재주 부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그것 때문에 무덤을 파게 됐어."
"... 무슨 말입니까?"
"자네는 하루 종일 의뢰인한테 달라붙어서 철저하게 취조를 거부하게 만들었다지? 그게 쓸데없는 짓이었어. 사카이가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이 있었겠지? 그래서 하루 종일 달라붙어서 감시할 필요가 있었던 가야. 그걸 알았으니, 그 비밀이 어떤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지. 사카키바라를 감싸고 있다는 걸 말이야."
"아..."
전부 간파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상황을 이용해서 우리의 허를 찌른 것이다.
- "사카이를 범인 은닉으로 다시 체포해도 되지만, 그래 봤자 집행유예밖에 안 되고. 무엇보다 그 친구가 어설프게 묵비권을 행사한 덕분에 사카키바라가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봐주도록 하지. 고마워하라고."
"큭큭큭."
하지만 그때, 갑자기 아부쿠마가 조롱하는 것 같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 친구 재미있네. 설마 그렇게까지 완전히 속았을 줄이야."
"뭐라고?"
아부쿠마의 말에, 토키가와 검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래, 대충 그 말이 맞아. 분명히 우리는 사카이가 입을 열면 곤란한 구석이 있었지. 하지만 '사카키바라가 범인'이라는 건 아냐. 숨기려는 건 따로 있었어."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는 건가?"
"그래. 댁은 내가 깔아놓은 함정에 제대로 걸렸어. 그 정도 머리밖에 안 되면 좋은 말로 할 때 이 일에서 손을 떼라고. 기껏 쌓아온 경력에 흠집이 나기 전에."
"흥. 좋다, 이거 일이 재미있어지겠군. 누구 경력에 흠집이 나는지 두고 보자고."
"저기, 잠깐 괜찮겠습니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듣자 하니 대체 무슨 소립니까? 손을 떼라느니 경력에 흠집이 난다느니. 저희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을 밝혀서 법을 집행하는 일이 아닌가요?"
"이런. 아침부터 경찰서에 처박혀서 취조를 방해한 사람이 할 말인가?"
- "그건 오해입니다. 일본 경찰의 취조 기술은 일류입니다. 죄 없는 사람한테 죄를 인정하게 만들 정도로. 그런 경찰에 전부 맡기는 것이 반드시 진실 추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토키가와 검사가 짜증 난다는 듯이 혀를 쳤다.
"흥, 그래, 좋다. 이상은 훌륭하지만, 거기에 걸맞은 실력이 있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그래, 거래 정도는 언제든 받아주지. 얌전히 살인을 인정한다면 과잉방어에 의한 살인 정도로 해줄 수도 있다. 실형 판결은 피할 수 없겠지만, 몇 년 정도로 끝나니까."
- "인정한다. 저놈은 대단해. 내 함정을 단번에 눈치챘어."
아부쿠마가 불길한 말을 했다. 다만 아직 희망은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함정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대체 뭡니까, 저 토키가와 검사도 간파하지 못했다는 사카이- 백부님이 말하면 불리해진다는 게 대체 뭡니까?"
아부쿠마는 씩 웃고, 내 귀에 입을 대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냐? 허세였어."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완전히 한 방 먹었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건 왠지 억울해서, 사실은 더 큰 게 있다고 거짓말을 했지. 저쪽이 멋대로 의심하다가 헛짓을 해주면 참 좋겠는데."
"정말이지... 당신은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 "사카키바라라는 의뢰인은 예전부터 스토커에 대해서 경찰에 상담을 했어. 경찰은 스토커한테 경고를 보냈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사카키바라를 찾아왔지?"
"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경찰이 더 제대로 대응했다면 사건을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군요?"
"그래. 이번 사건은 경찰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야. 그걸 철저하게 찔러대자고."
"글쎄요? 현행 스토커 규제법을 생각해 봐도, 경찰은 필요한 대응을 한 것 같습니다만."
"멍청아! 그딴 생각으로 누굴 납득시키겠다는 거야? 사람이란 말이지, 경찰이나 공무원을 두들기면 좋아하는 법이라고. 경찰이 더 제대로 대응했으면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고."
여전히 쓰레기 같은 사고방식이다.
- "경찰 때문이라고 주장해야 배심원도 피고인을 동정한다고. 배심원이 우리 편이 되면 압도적으로 유리해지는 건 알지?"
"그건 알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대로 대응한 경찰관한테도 미안하지 않습니까."
"이봐, 자넨 변호사라고. 경찰 따위를 왜 신경 쓰는데? 그럼 피고인한테는 안 미안해? 경찰은 이제 와서 욕 좀 먹는다고 신경도 안 쓰지만, 일단 네 의뢰인은 남은 인생이 걸려 있는데? 자, 어느 쪽을 우선시해야 할까?"
"당신이 무슨 악마라도 됩니까."
끔찍한 양자택일이다.
- "솔직히 말이야, 무조건 나쁜 건 아니야. 스토커 규제법으로 막지 못한 범죄는 정말 많다고. 일반 시민만 그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 경찰도 싫어해. 이 사건이 계기가 돼서 스토커 규제법이 강화되면 경찰도 좋아한다고. 그걸 돕는다고 생각하면 눈 딱 감고서 해도 되잖아?"
눈을 감는 정도가 아니라 악마가 되라는 소리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실제로 나는 아부쿠마의 제안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나는 사카키바라 양의 변호인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걸린 형사재판. 그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해야 한다. 그리고 경찰의 대응을 비난하는 것이 스토커 규제법 강화로도 이어진다는 아부쿠마의 말에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고.
그것은 악마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 내 입에서 만화 같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눈에서 불이 번쩍인다는 표현이 있는데, 정말로 그랬다. 엄청난 속도로 온몸이 아파 왔다. 내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가 없어서 소파 위에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업소에 놓인 대형 소파라서 다행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난 효과였다. 전기 충격기를 댄 부분에서부터 말 그대로 온몸에 전기가 흐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감각이다. 팔꿈치를 부딪히면 팔 전체가 저린 것 같은 감각이 오는 때가 있는데, 그것을 수십 배로 불려서 온몸에 적용시킨 것 같은 느낌이다.
다행이 마비는 일시적이었지만, 너무 아파서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역시 기절하진 않았네."
"어머나, 아부쿠마 선생님, 무슨 끔찍한 짓을. 저도 써본 적은 없지만, 이거 꽤 아프다고 했어요."
마리 씨가 내 대신 항의해 줬다.
- "혼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 예, 이제 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정말, 이건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겠네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진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도 성인군자는 아니다. 아부쿠마 정도는 아니지만, 당하면 갚아주고 싶은 기분은 든다.
"아부쿠마 씨, 그거 잠깐 봐도 될까요? 이거, 몇 볼트 정도죠?"
"글쎄? 어디 적혀 있나?"
나는 성능 표시를 보는 척하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부쿠마가 들고 있던 전기 충격기를 빼앗았다.
"뭐, 하는 김에 아부쿠마 씨도 경험해 보시죠."
"뭐?"
충격기의 전극을 아부쿠마의 복부에 슬쩍 대고, 스위치를 눌렀다.
"끄아아아악!"
역시 만화 같은 비명을 지르고, 아부쿠마는 소파 위에 털썩 쓰러졌다.
부들부들,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떨고 있는 아부쿠마.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나와 마리 씨는 한바탕 웃었다.
- "모르겠지만, 시험해 봐야지. 너, 잠깐 옷 좀 벗어봐라."
"이번엔 또 왜요?!"
이 사람이 벗으라고 한 게, 아마 이번이 세 번째다.
"착각하지 말라고, 필요한 일이니까. 전기 충격기를 맞았을 때 화상 자국이라도 생기면 증거가 될지도 모르잖아?"
"아, 그런 얘기였나요."
분명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일단 나는 셔츠와 속옷을 들춰서 조금 전에 아부쿠마가 전기 충격기를 댄 옆구리 부분을 보여줬다.
- 인터넷 구입 이력은 개인정보에 해당되지만, 변호사법 23조 2에는 법령에 따른 예외에 해당된다.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겠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구입 이력 정도는 경찰도 조회했을 텐데."
"그래, 했겠지. 어쩌면 전기 충격기를 구입했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놈들은 자기들이 불리해지는 증거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일이 아주 흔하니까."
"어. 하지만 그거, 위법 아닙니까?"
"'목록에 기재하는 걸 깜박했습니다, 의도적인 일이 아닙니다'라든지 대충 핑계를 대면 그만이야. 그러니까 카드 사용 이력 정도는 일일이 그놈들한테 청구하는 것보다 변호사 협회를 통해서 알아보는 쪽이 낫다고. 이쪽이 뭘 조사하는지 눈치채는 것도 재미없으니까."
"잘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독자적으로 알아보는 게 제일이라는 뜻이다.
-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건지, 내가 생각해도 의문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보니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아부쿠마 씨, 밥 다 됐습니다."
"음..."
침대에 잠들어 있는 악마의 변호인을 깨우고, 억지로 옷을 갈아입히고, 환자를 부축하는 것처럼 간신히 식탁 앞에 앉혔다.
아침 메뉴는 갓 지은 밥에 고기 경단과 야채수프. 그리고 요구르트와 바나나, 편의점에서 산 갓 내린 커피.
생선을 구우려고 했지만 '아침엔 국물이 좋아. 하지만 된장국은 밤에 먹는 게 좋고. 그리고 고기가 먹고 싶은데. 하지만 아침부터 부담되는 건 싫어'라는 깐깐한 주문을 해댄 결과, 이 메뉴로 정했다.
아부쿠마는 내가 식탁 위에 음식을 차리는 중인데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도 없이 먹기 시작했다. 맛에 대한 소감도 없다. 그래도 투덜대지 않는 걸 보면 그럭저럭 만족했다는 뜻이겠지.
- 하나의 사건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사건이 발각되고,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고, 수사가 시작되고, 마침내 체포하는- 그런 흐름이다. 결과적으로 형사재판이 어느 정도 정해진 순서대로 이뤄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럼 혼다. 이 재판은 어디를 추궁하면 되는지는 알고 있지?"
물을 필요도 없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전기 충격기겠죠."
- "아닙니다. 사카키바라 양을 믿는 것과 여러 가능성을 고려하는 건 별개죠. 사카키바라 양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죽였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쉽지만 말이죠."
아부쿠마는 씩 웃었다.
"자네치고는 잘했어. 그래, 변호사라면 임기응변 능력이 있어야지."
- 나도 어느 정도 아부쿠마한테 물들었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접근 방법은 아부쿠마의 사고방식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부쿠마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언제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악의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거짓말이 아니다. 백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를 감싸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의뢰인을 믿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둬야 한다.
"그런데, 나도 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우리가 어떻게 나가건, 전기 충격기 얘기는 조금 더 있다 꺼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최소한 검찰이 어떻게 나오는지 본 다음에."
"어째서죠? 당연히 뭔가 생각이 있어서 하는 얘기겠지만."
"맞아. 이치노세가 전기 충격기를 구입했다는 건 증명할 수 있어. 하지만 결국 사건 현장에서는 그 물건이 나오지 않았고, 사용했다는 것도 입증할 수가 없어. 이 상태에서 ‘피고인은 전기 충격기를 맞고 의식을 잃었다’고 주장해 봤자 황당무계한 소리가 될 뿐이야. 배심원들이 납득할 리가 없어."
"듣고 보니... 저도 반론할 수가 없군요."
"그리고 또 하나. 너, 그건 생각했냐? 피고인이 전기 충격기 때문에 기절했다는 얘기는 피해자를 죽인 범인이 따로 있다는 얘기야."
- 길가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습득해서 자신이 갖는 것은 당연히 범죄 행위다. 하지만 길가에 신기한 물건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을 때, 그걸 줍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 자기도 모르게 그럴 수도 있으니까. 이 경우에, 악의가 있는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재판과 관계없는 사람이 가지고 갔다면 저희도 찾을 방법이 없는데요?"
"찾을 방법은 없지. 하지만 다른 방법은 있어."
아부쿠마는 또 기분 나쁘게 씩 웃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사카이가 자수하기도 해서 여러모로 골치 아픈 구석이 있어. 먼저 검찰이 제출하는 증인 정도는 다 파악한 다음에 움직이는 게 좋겠지. 배심원들도 그쪽이 알기 쉬울 테니까."
"그 말은, 평소처럼 적극적인 반대신문은 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래. 최종적으로는 저쪽의 증인들을 싸그리 범인 취급 하겠지만. 그렇게 하면 진짜 범인이 누군지 몰라도 무죄 판결은 따낼 수 있겠지."
그런 전개가 되면 배심원들도 따분하지는 않을 거다.
-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아부쿠마 씨와 얘기하다 보면 진실과 배심원의 판단 중에 어느 쪽이 중요한지 모르게 돼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상황에 따라 다르지. 언제든지 진실이 우선이지만, 사람은 신이 아니니까, 진실 따위는 모르는 게 더 많아. 그래서 법치국가에서는 재판에서 인정되는 결과가 사실이 되지. 결과적으로 진실보다 배심원이 중요해지는 경우가 많아."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아부쿠마가 재판에 참여했을 때는 배심원 판결까지 간 사례가 없다. 이제 와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아부쿠마가 변호하는 재판은 역시 어딘가 이상했다.
- 이번 사건에 대한 여론은 사카키바라 양에게 동정적인 쪽이다. 피해자가 스토커라는 이유가 크다. 요리 교실에 다니느라 우연히 가지고 있던 식칼로 스토커를 찔렀다고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방송에서 그렇게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사카키바라 양은 살인 그 자체에 대해서도 무죄를 주장했다. 이건 배심원과 방청객들에게도 상당히 의외였겠지.
사실 놀라지 않은 인물도 있다. 공판 전 정리수속을 통해서 피고 측이 어떻게 주장할지 알고 있던 인물, 즉 토키가와 검사와 재판장이다.
- 연설 면에서는 아부쿠마도 토키가와에게 뒤지지 않는다. 정말 귀에 쏙쏙 들어오는 억양의 진술이었다.
"원래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엄밀한 규칙이 정해졌죠. 행사재판에서 검찰은 '합리적인 의혹을 뛰어넘어 범죄를 입증'할 의무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만약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검찰의 입장에 의문의 여지가 발생하게 되면 피고인을 무죄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때, 진범이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희는 사건 발생 당시에 피고인이 피해자의 습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의식을 잃은 피고인이 살인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몇 번이고 말씀드립니다. 합리적인 의혹을 제기할 여지가 있다면,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지금부터 시작될 재판에서, 부디 제가 한 말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평소의 게으른 모습과 정반대의 훌륭한 연설이다. 게다가 아부쿠마는 대본을 안 본 정도가 아니라, 이 진술을 연습하는 모습 자체를 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아부쿠마는 이렇게 긴 변론을 애드리브로 해내고 있는 것 같다. 모두진술에는 어느 정도 포맷이 있으니까, 아부쿠마 정도의 경험이 있으면 애드리브로 처리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 "먼저 비여 소리를 들었어요. 누가 도와달라는,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였습니다."
"아는 사람 목소리였습니까?"
"이의 있습니다. 유도적이며 사실이 아닌 억측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아부쿠마가 앉은 채로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이 맞다. '아는 사람 목소리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나오는 답은 주관적인 것, 사실은 찾아볼 수 없다.
"인정합니다. 토키가와 검사, 다시 질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토키가와 검사는 귀찮게 군다는 듯이 우리를 노려봤다.
- 현장에 사카키바라 양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도 부정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아부쿠마의 이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아부쿠마의 의도는 알 것 같다. 검찰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조금이라도 규칙을 어기면 바로 항의하겠다는.
뭐, 룰을 깨는 건 아부쿠마 쪽이지만.
- "주신문은 이상입니다. 반대신문하시죠."
토키가와 검사는 그렇게 말하고 물러났다.
"1분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부쿠마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얼굴을 내 쪽으로 가까이 댔다.
"진짜 재미없네, 저 검찰 쪽 증인."
나한테만 들리게, 아부쿠마가 속삭였다.
"저 자식들, 증인한테 연습을 너무 많이 시켰어. 증인들을 죄다 뉴스 캐스터로 만들 셈인가."
그 기분은 이해한다. 이 증인은 살인 사건 현장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검찰 측 증인으로서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원래는 훨씬 감정이 풍부하게 말하는 사람일 것 같다.
"요약해서 말해야 하니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설마 그런 말을 하려고 1분 동안 기다리라고 한 겁니까?"
"아니. 왠지 저 증인, 압박에 약할 것 같잖아? 이렇게 수군거리면 동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긴,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증인대에 있는 사람은 상당히 곤혹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 "그럼 이만하면 효과는 충분하겠죠. 계속 이러고 있으면 괴롭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슬슬 반대신문이나 하러 가시죠?"
"웬일로 자네가 납득을 했네."
아부쿠마는 정말 별일이라는 표정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 예. 그랬던 것 같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즉, 누군가가 몰래 현장을 떠났어도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지요?"
"이의 있습니다! 오도적인!"
"좋습니다. 지금 질문은 취하하겠습니다."
토키가와와 아부쿠마 사이에서 격렬한 불꽃이 튀고 있었다.
우리는 진범이 있다는 가정으로 움직이고 있다. 현장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토키가와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철저히 이의를 제기하고 있겠지.
- "조카도 이미 성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분별 있게 행동했으면 싶다는 의미에서는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었으면 싶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당연히 조카를 죽인 피고인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듣고 싶었습니다."
아부쿠마가 씩 웃었다.
이런 때, 아부쿠마와의 차이를 느낀다. 지금 답변이 얼마나 유리한지 난 모르기 때문이다.
- "아, 아닙니다. 상처의 경중을 보고 조카를 우선시한 건 사실이지만, 피고인이 기절했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아부쿠마는 또다시 씩 웃었다.
"배심원 여러분, 이 증언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의사인 이 증인이, 사건 발생 직후에 피고인이 기절한 상태였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증인이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도 않은 피고인을 원망한다는 사실도. 반대신문은 일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역시 대단하다.
와타나베라는 증인은 피해자의 백부이기도 하지만, 우연히 현장에 달려온 의사일 뿐이다. 하지만 의사라는 신분이자 피고인을 원망한다는 심정을 흘린 것을 이용해서, 사건 발생 직후에 피고인이 기절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법정은 기분 나쁜 침묵에 휩싸였고, 증언대에 선 와타나베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상당히 분한 표정이다. 토키가와 검사만은 여전히 똑같은 표정이지만, 그것도 허세인지도 모른다.
- "당신은 경찰이 올 때까지 구경꾼들을 저지했다고 했죠?"
"예."
"어째서 경찰이 아닌 당신이 그런 행동을?"
"탐정 드라마에서 본 걸 따라 했습니다. 현장이 어지럽혀지면 큰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물론 경찰이 온 뒤에는 전부 그쪽에 맡겼습니다."
"그러셨군요. 이상입니다. 남은 반대신문 권리는 보류하겠습니다."
아부쿠마는 일단 물러났다.
"별일이군요."
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경찰도 아닌 일반인이 구경꾼들을 저지했다는 얘기, 평소 같았으면 철저히 추궁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전문가도 아닌 당신이 완벽하게 현장을 봉쇄할 수 있겠냐면서."
"아니, 일부러 추궁할 여지를 남겨둔 거야."
- 다행히 아부쿠마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바로 답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 현장에 전기 충격기가 있었다고 주장할 생각이다. 그러려면 현장 상황에 최대한 구멍이 많은 쪽이 좋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반인이 봉쇄했으니, 전기 충격기가 있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그런 논법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그나저나 저 자식, 수상한테."
아부쿠마가 나한테 슬쩍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태연하잖아. 현장을 확보했다니, 대체 뭐야."
- "이의는 기각합니다. 증인은 질문에 답변하세요."
토키가와가 웬일로 분하다는 얼굴로 물러났다. 아부쿠마가 아니라 나한테 당했다는 사실이 굴욕적인지도 모른다.
- "오늘 증언을 듣고 하나 알아낸 게 있어. 이 재판, 의외로 간단히 끝날지도 몰라."
"예?! 대, 대체 무슨 얘깁니까?!"
내가 묻자, 아부쿠마는 씩 웃었다.
"너도 오늘 재판 들었잖아. 그랬으면 눈치챘을 것 아니겠어? 뭐, 나도 아직 확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 생각 좀 해보라고."
- 오늘 심리에서 그만큼 중요한 증언이 있었던가? 나도 물론 생각은 해보겠지만,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부쿠마가 뭔가를 눈치챘다고 하니 마음이 든든한 것은 사실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완전히 아부쿠마에게 의지하고 있는 내 정신 상태겠지.
- 검찰관-검사라고 하면 재판에서 피고인을 단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더 큰일이 있다.
서류 업무. 검사에게는 어느 정도의 수사권이 있어서 필요하다면 경찰에게 명령하면서 수사를 행할 수도 있지만, 매일 서류 업무에 쫓기다 보니 수사는 신경도 못 쓰는 것이 현실이다.
이때의 이노우에 검사가 그랬다. 토키가와 밑으로 들어간 그녀는, 매일 방대한 양의 서류 업무에 쫓기고 있었다.
"이노우에, 그 서류는 오늘 안에 부탁하네. 내가 준 USB 메모리에 넣어서 주고."
"아, 예."
이노우에 검사는 기계적으로 대답하면서 상사가 시킨 일을 받았다.
어차피 토키가와가 시키면 거부할 수는 없다. 대충 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자신이 기계가 됐다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서류 업무를 계속하는 쪽이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하지만 이때 이노우에 검사의 인간으로서의 욕구가 튀어나온 덕에 그녀의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삭제 파일을 검색해서 나온 데이터는 조금 전에 실수로 지운 파일 하나만이 아니었다. 다른 워드 파일 같은 것들도 같이 검색 결과에 표시됐다. 이노우에 검사는 딱히 토키가와 검사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재 자신을 실컷 부려먹고 있는 상사라는 점은 맞다. 그 상사가 삭제한 워드 파일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궁금해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보낸 러브레터라도 나오면 힘든 야근 중에 짧은 오락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 워드 하일을 몰래 자기 PC로 옮겨서 복구했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파일을 열었다. "어... 이, 이건!"
- 그것은 토키가와 검사가, 증거를 조작했다는 증거였다.
-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계셨죠?"
"예."
"사카키바라 피고는 마침 저기에 계신 혼다 변호사와 함께 경찰에 스토커 피해에 대해 신고했고, 경찰은 이치노세 씨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사실도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예?"
엄청나게 유도하는 신문이다. 토키가와 검사는 아부쿠마만큼이나 상황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다.
- 백부님을 증언대에 세워야 할지에 대해서는 나와 아부쿠마도 어느 정도 논의를 했다. 백부님은 현장을 보고 사카키바라 양이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경위를 증언하게 하면, 배심원들도 사카키바라 양을 의심하게 돼서 상당히 불리해진다. 마음만 먹으면 아부쿠마가 사용하는 그 작전- 자신에게 죄가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증언을 거부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나도 아부쿠마도 숙부님이 증언해야 하는 걸로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진범이 따로 있다고 증언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실을 밝히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 백부님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보고 당신은 사카키바라 피고가 피해자를 찔렀다고 생각했겠군요?"
"이의 있습니다!"나는 황급히 일어났다.
"의견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증언은 진실로 한정되어야 합니다."
"인정합니다."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쓰러져 있던 사카키바라 피고가 쥐고 있던 식칼을 빼앗아서, 소지하고 있던 손수건으로 자루를 닦았죠. 그리고 그 대신에 자기가 쥐었고, 다시 말해 자기 지문을 묻힌 거죠.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카키바라 피고에게 살인 혐의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나요?"
"맞습니다."
- "질문은 이상입니다. 반대신문하시죠."
"없습니다."
아부쿠마는 앉은 채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경찰, 그리고 아마도 그 수사를 지휘했을 토키가와 검사의 수사가 정말 훌륭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취조 중에 철저히 묵비권을 행사한 숙부님께는 거의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숙부님에게서 들은 사정을 정확히 맞췄으니까.
- "즉, 스토커가 경고에 따랐는지 아닌지 모르면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없군요?""그렇습니다.""질문은 이상입니다."
토키가와 검사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단하게 신문을 마쳐서, 나는 아부쿠마에게 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사카키바라 양의 집에 있던 협박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네요... 그 얘기를 하면 경찰도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 텐데.""그래, 그거야. 책임전가라고 해석하는 게 싫으니까, 더 효과적인 장면에서 제출할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반대신문은 하지 않는 게 좋을까요? 여기서 경찰의 책임을 추궁해 봤자 나중에 협박장 얘기를 꺼내면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르니까."
"아니, 경찰의 책임을 건드리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 협박장은 몰랐다고 넘어가버리면 돼. 그런데 혼다, 미안하지만 이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은 자네가 해줘. 앞으로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내가 검찰 놈들 손에 놀아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 아부쿠마는 항상 배심원과 방청객에게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썼다. 예를 들어서 아부쿠마가 뭔가 반대신문을 할 때마다 법정은 놀라움에 휩싸이고, 방청객들은 검찰의 주장에 의문을 품는다- 그런 분위기가 생기기만 해도 단숨에 승리에 다가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이 일부러 깔아놓은 것 같은 함정에는 내가 뛰어들어야 한다. 누가 봐도 풋내기인 내가 실패해 봤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 "아니, 배심원들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았을 것이야. 마지막 정도는 마음대로 떠들게 놔둬. 그 대신, 무슨 소리를 해도 태연한 척하고."
하긴, 이미 배심원과 방청객들도 두 사람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든 분위기다. 아마도 마음속에서는 결론도 내렸다. 괜히 찬물을 끼얹어서 무의미한 저항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는, 아부쿠마가 말한 대로 태연한 태도를 취하는 쪽이 좋겠지.
- 지하의 그다지 밝다고 할 수 없는 통로에, 이노우에 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할 얘기가 있어. 잠깐 나 좀 봐."
나와 아부쿠마는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 "그래, 좋아. 우리는 여자의 유혹은 거절하지 않는 게 신조니까. 기꺼이 그렇게 해주지."
"아부쿠마 씨, 은근슬쩍 저까지 끌어들이지 마시죠?"
"뭐야? 너, 기껏 여자가 유혹하는데 거절할 거냐?"
"무슨 소립니까. 저는 여성이건 아니건 똑같이 대응합니다."
"너, 남자 여자 안 가리는 녀석이었냐?"
"... 아부쿠마 씨, 일부러 착각하는 거죠?"
"이봐요, 당신들. 나 얘기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짜증이 난 것 같아서, 나와 아부쿠마는 얌전히 이노우에 검사를 따라서 지하 통로의 구석 쪽으로 이동했다.
- "토키가와 검사가 전하는 말이야. 지금 거래한다면 과잉방어 정도로 해줄 수 있다고."
"뭐야, 그런 이야기입니까."
일부러 찾아왔기에 무슨 일인가 했는데.
"이노우에 검사, 당신이라면 저희 성격은 알고 있을 텐데요. 그런 거래에 응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이건 표면적인 용무. 내가 토키가와 검사한테 부탁했거든. 이 타이밍에서 거래를 제안하는 건 어떠냐고. 보나 마나 거절하겠지만 신경은 긁을 수 있지 않겠냐고 했더니, 갔다 오라고 했어."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뜻이죠? 표면적인 용무라니."
"한마디로 우리한테 몰래 전해줄 다른 얘기가 있다는 뜻이겠지."
"맞아. 그것도 전화로는 할 수 없고, 지하에서 하는 게 딱 어울리는 얘기가."
이노우에 검사가 웬일로 에둘러서 말했다.
- "저기. 이번 재판에서 그쪽에 가장 귀찮은 증거가 뭐야?"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했다.
"그야 당연히 사카키바라의 자택에서 나온 협박장이겠지."
아부쿠마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협박장이 나온 탓에 저희는 경찰의 실수를 주장할 수 없게 됐습니다. 게다가 살인의 동기까지 돼버렸죠."
이노우에 검사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얼굴을 우리에게 가까이 대고서 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게 조작된 거라면 어쩔 거야?"
- 내 귀를 의심했다.
이노우에 검사의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는 걸렸다.
조작? 아부쿠마가 그런 소리를 한다면 이해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이노우에 검사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잠깐만요, 그게 무슨 뜻이죠? 설마..."
"그래. 그건 조작. 토키가와 검사가 자기 컴퓨터로 친 내용을, 사카키바라 피고의 자택에 몰래 두고 왔겠지."
현기증이 났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깐, 검찰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겁니까?! 증거 조작은 범죄라고요?!"
"진정해, 혼다.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 나도 자주... 아니, 농담이야, 농담. 이노우에 검사, 그렇게 노려보지 마시라고."
"두 사람 다 어떻게 침착할 수 있는 겁니까?! 사람의 죄를 처벌하는 검사가 증거를 조작했다니, 큰 문제 아닙니까?!"
"이봐, 역사를 뒤져보면 짭새 놈들이 증거를 조작한 기록은 산더미처럼 나온다고. 이제 와서 새삼 신기한 일도 아냐. 그보다 이노우에 검사, 어떻게 조작했다는 걸 알았지?"
- "그리고, 그쪽도 증거 목록은 봤잖아? 죽은 이치노세의 컴퓨터에서는 협박장을 입력한 워드 파일이 나오지 않았어. 나도 삭제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아마 처음부터 없었을 거야."
나는 계속해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증거 조작.
하긴, 사법의 역사를 뒤져보면 신기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다니. 아니, 바로 옆에 아부쿠마라는 나쁜 표본이 있기는 하지만.
- "좋은 기회니까, 아부쿠마 선생님의 증거 조작 강좌를 시작해 보자고."
아부쿠마가 기묘한 소리를 시작했다.
"거기, 신참 두 명에게 좋은 걸 가르쳐주지. 잘 들어, 증거 조작의 기본은 그게 있어도 없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증거를 조작하는 거야."
아마도 나와 이노우에 검사가 나란히 얼빠진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알겠나? 그 증거는 있어도 자연스럽고, 하지만 없어도 자연스러워. 그런 증거를 조작하면 잘 들키지 않아. 둘 다 이 업계에서 살아가려면 잘 알아두라고."
"이 세상에서... 제일 몰라도 될 지식 같은데."
"동감입니다."
"멍청아, 조작의 기본을 얕보지 말라고. 조작을 모르는 놈이 조작을 간파할 수 있겠어?"
아마도 나와 이노우에 검사는 비슷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부, 분하지만 설득력이 있네."
"저도 동감입니다..."
"증거 조작 응용편도 있는데, 필요하다면 얘기해 줄까? 아, 아니다, 이건 안 되겠네. 현역 검사한테는 얘기해 주면 안 되겠어."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정말로 했던 건 아니죠? 체포합니다?"
"어이구야, 무서워라. 괜찮아, 해도 절대로 안 들키게 하니까."
"저기, 혼다. 이 망할 변호사를 체포하면 그쪽이 증인이 돼줄래?"
"관둬. 그때는 혼다를 내 변호사로 임명할 거야. 그러면 수비의무 때문에 나한테 불리한 증언은 못 하게 되니까. 혼다가 나한테 얼마나 빚을 졌는지 알아?"
- "됐고, 하던 얘기 계속할게. 토키가와 검사의 조작은 그야말로 베테랑의 기술이야. 스토커 방지법에 걸린 남자의 협박장 같은 건, 정말 존재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겠지? 실제로 우리가 그랬으니까. 이 정도로 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증거를 위조하다니, 역시 형사부 출신의 민완 검사는 뭔가 다르네. 나도 '악마의 변호인'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악마라는 별명은 그 자식한테 양보해야겠어."
"지금 칭찬할 땝니까. 어떻게든 증거를 조작했다는 걸 증명해야..."
"그건 간단하지. 예기 계신 이노우에 선생님께서 증언해 주시면 되잖아."
"분명히 말하는데, 그것만은 절대로 안 해. 누가 뭐라든 난 검사야. 솔직히 조작한 걸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당신들한테 말하긴 했지만, 나도 검찰청 사람인 이상 당신들 편이 돼줄 수는 없어."
"그렇다네. 혼다, 포기하자. 이렇게 되면 입증하는 건 아마도 무리다."
"뭐라고요! 아부쿠마 씨치고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어설픈 조작이면 모를까, 프로가 한 짓은 그리 쉽게 간파할 수가 없어. 아마 이노우에 검사가 우리 편이 돼서 증언해 줘도 무리야. 우리가 이 사람 동생을 무죄로 만들어준 적이 있으니까, 그 은혜 때문에 거짓 증언을 했다고 치부하면 그만이야."
그럴듯한 이야기다.
- "잠깐만요, 전에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문서를 인쇄할 때 쓰는 프린터 말인데요, 그것도 기종에 따라 특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치노세 씨가 가지고 있던 프린터와 검찰청에 있는 프린터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이봐, 죽은 이치노세의 집에 있던 컴퓨터도 프린터도 전부 우리가 압수했거든? 당연히 같은 걸로 프린트했을 거야."
"내 생각도 그래. 혼다, 상대는 형사부에 있던 베테랑 검사다. 신참의 어설픈 지식이 통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마라."
"뭐라고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러니까 어쩔 수가 없다는 거야. 검찰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칭찬하면 그만이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만이고."
"그럼, 검찰 측이 조작한 증거를 인정하라는 겁니까?! 부조리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나랑 손잡고 변호 활동을 하는 녀석이 할 소리는 아닌데."
- 그렇게 말하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우리도 증거 조작으로 의뢰인을 무죄로 만들었던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의뢰인이 무죄라는 확신이, 다른 범인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절망에 빠질 것만 같았다. 토키가와 검사도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토키가와 검사가 사카키바라 양이 범인이라고 확신했다면? 죄인을 처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증거를 조작했다면?
어차피 똑같은 놈들. 그 말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 "하지만 그 답은 아까 나왔잖아? 미츠이, 당신, 짭새 놈들하고 거래를 했다면서?"
"아..."
이노우에 검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미츠이와 거래를 했다는.
- "아마도 이런 흐름이지. 사건이 일어난 날, 댁은 이치노세한테 사카키바라의 퇴근 루트를 가르쳐줬겠지. 여기서부터는 추측도 섞였지만, 댁은 이치노세가 왜 퇴근 루트를 알고 싶었는지 의심한 게 아닐까? 그래서 현장 주변에 있었고.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치노세가 얽힌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그 순간부터 댁은 짭새 놈들한테 협력하기로 마음을 먹었겠지. 다 말할 테니까 스토커를 도와준 일은 넘어가달라고."
이치노세가 사카키바라 양의 퇴근길에서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걸로 설명이 된다.
- "난 탐정이야. 원래는 고객과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수비의무가 있지. 하지만 이치노세하고는 그걸 파기하고 아는 걸 전부 말했어. 그 대신에 스토커에 협력한 건은 넘어가주기로 했고. 그것뿐이야."
"정말 그게 다야? 증언을 위조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까지 위험한 짓은 안 해. 사실 그 거래에는 살짝 함정이 있어.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내가 사건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굴면서 거래를 했는데, 사실 아는 건 거의 없었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는 사카키바라의 퇴근 루트를 조사하고, 사건 현장에 있었던 것뿐이니까."
"그렇군. 자기 가치를 높여서 거래했다는 말인가. 그런 거 우린 아주 좋아해."
아부쿠마의 평가 기준은 도무지 모르겠다.
- "당신이 이치노세 씨에게 사카키바라 양의 퇴근 루트를 가르쳐준 탓에 이번 사건이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생각해도 못된 질문이다. 실제로 그는 기분이 상했는지 차가운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말했잖아, 난 간호해 준 사람에게 답례를 하고 싶으니 퇴근길을 가르쳐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착수금도 받았다고. 그랬으면 그냥 내 일을 할 뿐이지. 댁 같은 변호사도 마찬가지잖아? 억울하니까 변호해 달라는 의뢰를 받으면 진실이 어쨌건 간에 무죄로 만들기 위해서 변호를 해야 하겠지?"
맞는 말이라서 한 마디도 반론할 수가 없었다.
"믿지 않아도 좋지만, 나도 솔직히 미안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 말만은 해야겠어. 난 돈만 주면 뭐든지 한다고. 말해두는데, 사카키바라라는 여성 편이 될 수도 있었어. 그 사람이 스토커를 퇴치해 달라고 의뢰했다면 말이지. 하지만 이번엔 이치노세가 날 고용했어. 그것뿐이야."
"좋네, 우린 그런 사고방식 좋아해."
아부쿠마가 또다시 웃었다.
어지간히 스타일이 맞는 것 같다. 실제로 변호사도 비슷한 일을 하는 건 사실이니까.
- "아부쿠마 씨, 지금 그건 곤란한 것 아닙니까. 전기 충격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졌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진정해. 그것도 다 계산했어. 오히려 잘된 일이지."
그 발언은 너무나 든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뭘 하려는 건지를 몰라서 불안하기도 했다.
- "저희는 다음 증인으로서 사건 현장에 있던 와타나베 씨, 미츠이 씨를 순서대로 소환할 예정입니다만, 그전에 재판장님. 5분 정도 휴식을 가질 수는 없을까요. 혼다 변호인이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
나는 아부쿠마를 노려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급하게 배에 손을 대서 배가 아픈 척했다.
아부쿠마의 말에 틀림없이 의미가 있다고 믿고.
- "... 알겠습니다. 그럼 10분간 휴식을 갖겠습니다."
재판장도 내 연극을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리현상에 의한 부탁은 쉽사리 무시할 수 없겠지. 재판장은 약간 짜증이 난 얼굴이기는 했지만 허가해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재판장이 휴식을 허가한 그 순간.
아부쿠마는 씩 웃고, 나한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았어, 이걸로 포석이 끝났다. 이제 미츠이가 바보짓만 안 하면 우리 승리는 확정된다."
"미, 미츠이?"
- "아부쿠마 씨. 슬슬 뭘 하려는 건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역시 듣고 싶냐? 네 성격상 다 끝날 때까지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왠지 더 불안해졌다.
"잠깐만요, 대체 뭘 하려는 거죠? 정말 법에 저촉되는 짓은 안 했겠죠?"
"하여간. 알았어. 뭐, 어차피 나중에 혼나거나 지금 혼나거나의 차이니까. 나랑 손잡고 일하는 이상 슬슬 너도 결단을 해야겠지."
너무나 불길한 대답이었다. 아부쿠마는 법에 저촉되는 게 아니냐는 내 말을 단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 정도 눈치채고는 있었다.
아부쿠마가 또 뭔가 위법행위를 저지르려는 것 같다고.
- "알겠나? 이 사건은 아마도 현장에서 전기충격기를 가지고 간 놈이 범인이야. 즉, 이걸로 우리의 승리를 확정-"
아부쿠마는 그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내가, 아부쿠마의 얼굴을 때렸기 때문이다.
- "아프잖아, 이 자식아. 갑자기 때리는 게 어디 있어.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아부쿠마는 맞았는데도 슬며시 웃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러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맞을 만한 짓을 했으니까요. 당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1초마다 내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뜨거워졌다.
"말 안 하면 모르니까 말해주지. 범인을 밝혀내기 위한 증거를 조작했다."
나는 또 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예상했는지 아부쿠마는 쉽게 피해버렸다. 게다가 오히려 내 오른쪽 손목을 붙잡아서 비틀어버렸다. 아부쿠마한테 붙잡힌 채 나는 소리를 질러댔다.
"왭니까?! 왜 그런 짓을?! 저하고 손을 잡은 이상, 법을 어기는 짓은 안 한다고 약속했으면서!"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런 약속은 한 적 없어. 노력한다고는 했을지도 모르지만."
- "최악이라고?"
아부쿠마는 내 오른팔을 붙잡은 채, 내 몸을 벽에 밀어붙였다.
"너, 바보냐? 그럼 검찰은? 토키가와가 했다는 협박장 조작은 어떤데? 법을 어겼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법적으로 추궁할 방법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토키가와가 우리보다 훨씬 최악이야. 내 말이 틀렸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까지 똑같은 행위를 저지를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봐, 착각하지 말라고. 최악의 변호사란 의뢰인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놈이야. 증거조작, 아주 좋잖아. 그걸로 의뢰인을 무죄로 만들 수 있다면 의뢰인도 우리도 만세니까. 안 그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우리 변호사는 의뢰인을 지킬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그 의무는 법률의 범위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거야!"
아부쿠마는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쉬고 내 팔을 놔줬다.
"이런, 이런. 예전 같았으면 모를까, 검찰이 조작했다는 걸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솔직히 질렸다. 역시 너한테는 말을 안 해야 했나. 결과적으로 무죄만 따내면 내 말도 이해할 텐데."
- 그것은 나를 더욱 화가 나게 만들고도 남는 말이었다.
아부쿠마는 들키지만 않으면 뭐든 용납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아부쿠마의 별명, '악마의 변호인'. 그래, 그 말이 맞다. 주저하지 않고 증거를 조작하는 변호사 따위에게 악마 말고 다른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도 그걸 알고 있으면서 부탁하고 말았다. 난 정말 바보다.
- "됐어! 이제 지긋지긋해! 증거를 조작하는 변호사 따위하고는 손을 잡지 않겠어. 당신 얼굴 보는 것도 여기서 끝이야."
마치 내 반응을 예상한 것 같았다. 아부쿠마는 화를 내기는커녕 슬며시 웃어 보였다.
"좋아, 남은 재판을 처리할 수고가 줄어서 다행이군. 하지만 받은 돈은 돌려주지 않는다?"
"돈 따위는 가지고 가. 그 대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알았어, 내가 먼저 찾아갈 생각은 없으니. 하지만 넌 언제든지 만나러 와도 돼.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을 테니까."
두 번 다시 그럴 일은 없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 "아, 그렇지. 마지막으로 이 말은 해야겠다. 난 분명히 증거를 조작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봐.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증거를 조작한 의미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럼, 나머지 재판 열심히 해봐. 뭐, 필요한 건 다 가르쳐줬으니까, 네가 마음만 먹으면 이기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아부쿠마가 떠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 "예, 이제 괜찮습니다."
하지만 사카키바라 양의 눈을 보며 거짓말을 했더니 정말로 배가- 위가 아팠다. 지금부터 나는 혼자서 이 사람을 변호해야만 한다. 이제 아부쿠마는 없다. 내가 나 혼자 힘으로, 이 사람을 무죄로 만들어줘야만 한다.
나는 계속 생각했다. 생각하긴 싫지만, 아부쿠마는 나처럼 지켜보면서 진상을 알아차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러지 못할 리가 없다.
- 그중에서, 어째서 아부쿠마는 와타나베를 범인으로 만들려고 했을까?
"... 아."
나는 다른 힌트가 있었다는 걸 생각해 냈다.
-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알았다. 어떻게 아부쿠마가 범인을 알아냈는지. 그리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빌어먹을!"
법정 안이라는 것도 잊고, 누가 보건 말건 욕을 했다.
"전부 다 들여다봤다는 거냐, 그 망할 악마! 거기까지 생각해서 그런 짓을 한 거야!"
최악의 기분이었다.
이걸로 사카키바라 양의 무죄를, 사건의 진상을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악의 문제가 남았다.
진범을 추궁할 수단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딱 하나 있다. 지금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부쿠마가 조작한 그 전기 충격기를 이용하면 된다.
즉- 나한테 아부쿠마와 똑같은 악마가 되라는 것이다.
-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 나에게는 아부쿠마가 보고 있던 것이- 진실이 보인다. 아부쿠마가 하려던 일의 이유를 알 수 있다.
물론 다른 방법도 생각했다. 위법적인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도 진상에 도달할 길은 없는지. 없다. 아니, 계속 생각하면 언젠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끝나가는 휴식시간 중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즉, 방법은 하나. 나도, 악마가 되는 수밖에 없다.
- "그 빌어먹을 악마! 망할 악마!"
나는 내가 행실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때 나는 악마에 씐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주위를 어슬렁거렸고, 방청객이나 사카키바라 양의 눈도 신경 쓰지 않고 몇 번이나 주먹으로 책상을 때렸다.
"혼다 변호인? 무슨 일이 있습니까?"
어느새 휴식을 마친 재판장이 입정해 있었다. 내 기이한 언동을 들킨 것 같다. 그러나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어떻게 여기는지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 "그럼 10분이 지났으니 심리를 재개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부쿠마 변호인은?"
"제 복통이 옮았나 봅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귀가했습니다."
법정이 술렁거렸다. 토키가와 검사도 무슨 일인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솔직히, 나도 은근히 놀랐다. 의외로 나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인종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재판장을 향해서 말했다.
"어쨌거나 심리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대로 계속할까 합니다만."
- "그렇다면 당신이 구입했다는 이력도 증명할 수 있겠군요? 이런 상품을 구입할 때는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니까."
"아, 아니야. 그게 아냐. 이건-"
"누가 당신 가방에 넣었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재미있는 주장이군요. 언제 누가 어떻게 당신 가방에 넣었는지 꼭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혹시 제가 범인이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미리 몇 가지 반론을 막아두자 와타나베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이 몰아붙일 때다.
- "만약 당신이 범행을 저지른 뒤에 그 전기 충격기를 주웠다면, 당신은 이치노세 씨의 피가 묻은 손으로 그것을 집었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재판장님, 즉시 이 심리를 중단하고 저 전기 충격기를 감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혈액이 묻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면 이런 기소 따위는 당장 취하해 주십시오. 안 그래도 공판 전 정리수속을 거치지 않은 중요한 증거가 나왔으니까요."
나는 아부쿠마처럼 허세를 부렸다.
- 위험한 허세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마리 씨가 가지고 온 그 전기 충격기에 이치노세의 피가 묻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만약 피가 묻어 있었다면 내 주장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토키가와 검사가 그런 위험한 도박에 나설 리가 없다는 확신도 있었고.
왜냐하면 저 사람도 아부쿠마와 같은 인종이기 때문이다. 주저하지 않고 증거를 조작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노골적인 허세를 던져도, '어쩌면'이라는 생각에 승부를 걸지는 않겠지.
어쩌면- 이건 아부쿠마가 준비한 물건이다. 어디선가 입수한 이치노세의 피가 정말로 묻어 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 예상대로 저 말 잘하는 토키가와 검사가, 지금은 당혹스러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 이 재판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토키가와 검사의 꼴을 보고 배심원들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는 명백했다.
- 그때, 토키가와 검사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와타나베가 새로운 증언을 시작했다.
- "만약 이 증인이 사건 현장에서 전기 충격기를 가지고 갔다고 해도 살인의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변호인의 주장에 불과합니다!"
"토키가와 검사,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지러운 기분을 맛봤다. 그 대사까지 아부쿠마 흉내를 내야 하나 싶어서.
- "배심원 여러분. 저희는 사카키바라 피고가 전기 충격기에 맞았다고 계속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토키가와 검사가 인정했습니다. 사건에 전기 충격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기 충격기 때문에 행동할 수 없게 된 피고인은 살인을 저지를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사권도 없는 저는 와타나베 씨가 진범이라고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전기 충격기가 사용됐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피고인이 살인 행위가 불가능했다는 것이 이것으로 증명됐습니다. 토키가와 검사, 즉각 기소를 취하해 주십시오."
"그,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 재판장님, 거듭 이의를 제기합니다! 만약 전기 충격기를 사용했다고 해도 기절하지 않는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전기 충격기를 사용한 결과, 화가 난 피고인이 피해자를 죽였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저희는 언급했습니다!"
"아쉽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피고인이 무죄라고 증명할 수단이 있습니다."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아부쿠마가 생각한 대로 진행될 줄이야-
- 토키가와 검사의 주장을 아부쿠마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부쿠마는 마리 씨로부터 이 전기 충격기를 받으면서 말했던 것이다. '이걸로 토키가와 검사를 한번 지져줄까 하고 말이야'라고.
그건 비유가 아니었다. 아부쿠마는 정말로 저지를 생각이었다.
"토키가와 검사님, 지금 당신에게 이 전기 충격기를 사용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멀쩡하다면 저희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살인 행위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피고인의 무죄가 증명되겠죠."
- "거부하겠다면 이유를 제시해 주십시오. 피고인에게는 전기 충격기를 맞았다는 신빙성 있는 증언이 있고,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전기 충격기가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실제로 이 전기 충격기에 맞은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은, 유죄의 소재도 무죄의 소재도 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배심원 여러분?"
너무 오버한 것 같기도 하지만, 배심원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도발하면 토키가와 검사가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좋습니다. 분명히 지당한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부디 제게 그 전기 충격기를 사용해 보십시오."
- "자, 잠깐만 기다리세요."
재판장이 곤혹스러워했다.
"사람에게 전기 충격기를 사용했을 경우 아주 조금이라도 위험할 수 있으니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재판장님, 이것은 검찰 측과 변호 측 쌍방이 동의한 상태에서 행하는 검증 작업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법원이 개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봐주시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토키가와 검사가 교묘한 말재간으로 법원에는 책임이 없다고 보증했다. 하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으면 결코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다.
재판장도 필요성은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토키가와 검사를 말리지 않고, 묵인하는 자세를 보였다.
- "자, 사양 말고 해 보라고."
토키가와 검사는 법정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에게는 중요한 고비다. 만약 전기 충격기의 충격을 견뎌내면, 순식간에 사태가 역전되어 다시 피고인에게 유죄 혐의를 씌울 수가 있다.
그에 응하듯이, 나도 앞으로 나갔다. 한 손에 전기 충격기를 들고.
"토키가와 검사님, 뒤로 돌아주시겠습니다. 저희 생각에 의하면 피고인은 뒤에서 전기 충격기를 맞은 것 같으니까요."
- 토키가와 검사가 내게 등을 돌렸다. 그 몸이 긴장돼 있는 게 보였다. 충격에 대비하는 것이다. 기습적으로 전기 충격기를 맞으면 충격이 더 심해진다는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몸을 굳게 긴장시키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기습일 때는 충격이 더 강해질 가능성도 있다. 모든 것은 아부쿠마의 포석대로.
나는 검사의 허리에 전기 충격기를 댔고, 그리고- 아부쿠마라면 틀림없이 했을 짓을 했다. 검사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이 협박장을 조작한 걸 알고 있습니다. 이건 그 대가입니다."
- "?!"
검사는 깜짝 놀란 것처럼 움찔거렸고. 바로 그 순간, 전기 충격기 스위치를 눌렀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법정에,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토키가와 검사의 상체가 앞으로 구부러지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이마부터 바닥에 부딪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토키가와 검사의 고집이겠지.
"저, 검사. 괜찮습니까?"
재판장도 걱정이 돼서 물었다.
"개... 아... 으..."
아마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려는 것 같지만, ...
- "재판장님. 검찰은 기소 취하에 동의합니다."
포기한 듯이 대신 말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검사, 이노우에 검사였다.
당연히 토키가와 검사는 당황해서 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부정하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는지 포기한 것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내가 맡은 세 번째 살인 사건이 폐정을 맞이했다.
- 기소 취하에 의한 무죄가 확정된 다음의 일은 나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먼저 와타나베는 사정청취라는 이유로 경찰이 임의동행했다. 그리고 나는 백부님과 함께 석방되는 사카키바라 양을 맞이했다. 백부님은 울면서 기뻐했고, 나도 축하한다는 말을 했고, 사카키바라 양은 울면서 감사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동안 내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계속 다른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 아부쿠마는 나와 손을 잡은 두 번째 사건 때,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만약 정말로 의뢰인한테 죄가 없다고 해도 법률적으로 구해줄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하고 유죄 판결을 받아들일까? 의뢰인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당신한테 죄가 없다는 건 알지만 방법이 없으니까 20년 정도 감방에 들어가 계시라고.'
그때 나는 반론하지 못했다. 그저 어린애처럼 내 주장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증거를 조작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증거 조작은 법에도 정의에도 위배된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번 재판에서 내가 저지른 일을 생각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아부쿠마를 따라서 법을 어기는 수단으로 진범을 몰아붙였다. 내가 직접 법에도 정의에도 위배되는 짓을 저질렀다.
- 그러나 그래도.
만약 내가 그런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사카키바라 양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면?
그래도 정의는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
- 설령 죄가 없다고 확신했는데도 경찰에 체포되고, 기소당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경우 어떤 단순한 사실이 성립된다.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시점에서 정의가 이미 사라졌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정의에 따라 올바르게 움직인다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쓸 일이 없으니까.
사카키바라 양의 재판이 그랬다. 처음부터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 사카키바라 양이 체포된 시점에서 정의를 잃어버렸으니까. 그 상태에서 뭐가 옳고 뭐가 나쁜지를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 의미가 없다.
- 아부쿠마가 하려던 것, 그리고 내가 실행한 것은 법률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다. 나는 변호사로서 실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변호사가- 아니, 굳이 변호사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을 행사하는 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마도, 정의다.
설령 다른 누구도 몰라준다 해도, 그것이 정의다.
-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내 사고방식은 변호사로서 실격이다. 법의 원점에 서서 돌이켜보면 이 사고방식은 너무나 이상하다. 왜냐하면 의뢰인이 정말로 죄가 없는지, 신이 아닌 인간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살인마를 죄가 없다고 생각해서 무죄로 만들기 위해 변호하는 것은 정의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부쿠마는 인간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진짜 초능력인지, 단순히 높은 통찰력 덕분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부쿠마는 억울한 죄를 뒤집어쓸 뻔했던 사람들을 구해냈다. 그것은 사실이다.
-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변호사가 됐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인지.
- 나는 사카키바라 양이 석방되는 것을 지켜보자마자, 바로 어느 공원으로 향했다.
"여, 올지 안 올지 도박이었는데, 역시 왔네."
시간은 저녁. 아부쿠마는 항상 있던 그 벤치에 앉아서 태연하게 날 맞이했다. 볼이 약간 빨간 것은 내가 때린 탓일까, 아니면 저녁노을 때문일까.
"재판은 어떻게 됐어? 확실하게 무죄를 따냈겠지?"
"예, 확실하게 이겼습니다. 당신이 짠 시나리오대로 움직인 결과입니다."
"뭐, 당연하겠지."
아부쿠마는 씩 웃었다. 결국 내가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것도 그 결과도, 이렇게 보고하러 올 것도 다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다. 역시 한 번 더 때리고 싶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그러면 왜 네가 여기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석방 기념으로 저녁 식사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미인 의뢰인하고 같이."
"예, 분명히 백부님이 그런 제안을 하셨지만 거절했습니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게 뭔데. 미인의 식사 초대보다 우선할 일이라는 게?"
"당연히 당신 아니겠습니까.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이다음 말을 하려면, 지금까지 했던 어떤 발언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아부쿠마가 씩 웃었다.
"잘못 생각해? 뭘?"
"세상에는 아부쿠마 씨 같은 변호사도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죄로 체포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려선 안 됩니다. 아부쿠마 씨 같은 방법도 때로는 필요하겠죠."
"그래서 뭐? 내가 잘했다고 칭찬하러 온 거냐."
"아니, 그건 아닙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있는 아부쿠마의 정면에 서서 그 눈을 똑바로 봤다.
- "저와 콤비가 돼주셨으면 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을 구하려면 아부쿠마 씨의 힘이, 아부쿠마 씨 같은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저도 같이 ‘악마의 변호인’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부쿠마는 큰 소리를 내서 요란하게 웃었다. 지나가던 초등학생이 봤다면 '나쁜 아저씨'한테 이상한 소문이 하나 더 늘어나겠지.
"그래, 그렇구만, 이제야 알았나. 뭐, 너라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었다."
왜 나라면-이라는 점이 의문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짭새 놈들한테 한 방 먹이는 걸 도와주겠다는 말이지?"
"예. 기꺼이."
"좋았어. 그렇다면 너하고 콤비가 돼주지. 단, 하나 조건이 있어."
"뭐죠? 돈 빌려달라는 것만 빼고는 뭐든지 하겠습니다."
"잘 들어, 난 미인이 식사하자는 제안을 거절하는 놈 하고는 손을 잡을 생각이 없어. 지금 당장 사카이건 사카키바라건 전화를 걸어서 볼일 다 봤으니까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말해. 잘돼서 데이트까지 하고 오면 콤비가 돼주지."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간단한 일이죠."
"그 정도라는 말이지, 가끔씩 너란 녀석을 모르겠다니까. 뭐 됐고, 그럼 네가 또 싫다고 할 때까지 같이 열심히 해보자고."
"예. 기꺼이."
나는 미소까지 지으면서 아부쿠마한테 손을 내밀었다. 아부쿠마도 씩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
- 이렇게 해서 나는 제대로 아부쿠마를 속이는 데 성공했다. 아부쿠마는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한 거짓말은 간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부쿠마의 방식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짭새들한테 한 방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목적을 위해서 아부쿠마의 힘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 세상에는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잃어버린 정의를 되찾기 위해, 독으로 독을 제압하는 것이다. 운명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겠지만, 그것이 아부쿠마라는 악마를 만난 내 역할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 그래서 나는, 아부쿠마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