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 당신에게 가고 있어 -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2
저자 : 김보영
출판 : 새파란상상
출간 : 2020.05.26
우주는 한계가 없는 팽창을 지속하고 있다고 한다.
이 현상에 대해 물리학자들과 천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근거는 '우리가 밤하늘에서 별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있지 않다면, 하늘은 빛들로 가득 차 특정 별빛을 관측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보다 학술적인 표현으로는 '적색편이'가 있다)
그렇다면, 모든 순간은 우주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광자의 속도는 고정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빠르다.
단 한순간이라도 존재했던 것들은, 광자의 형태로 우주 어딘가를 표표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단지 지금의 나와 그 사이에 '시공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좌표 차이가 있을 뿐.
그러므로 과거란, 실제로 존재했던 무언가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하나의 좌표값를 '재연상하는' 현재의 나일 뿐이다.
동시에,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은 모든 순간 그와 함께하는 '현재'다.
작가 후기와 해설에서 짚어준 것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가 기나긴 기다림과 고독 속의 생존을 다룬 글이었다면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부딪침으로 인한 괴로운 여정을 다룬 글이다.
이번 이야기에서 여자는 사고가 일어난 다른 우주선 승객들을 구조하겠다는 선장의 결정으로 귀환 일정이 11년이나 늦어지게 된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신랑에게 달려가야만 했던 여자에게 이 일은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지구로의 귀환을 선택한 여자. 돌아온 지구에서, 엇갈린 남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 그녀는 그를 찾아 무작정 다시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어쩌면 남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차례의 승선과 하선을 겪고 난 그녀의 위치는 4계급이다. 이제는 그녀가 난민의 위치에 처해있고, 그녀를 군식구처럼 여기는 다른 승객들의 모습은 처음 일정이 미뤄지던 순간의 여자의 모습과 겹쳐진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도 있다. 당시는 여행의 끝도 선택지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어떤 선택지도 없이 영원히 그들끼리서만 떠돌아야만 한다. 이미 지구는 처음부터 새로운 문명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어떤 순간에도 혼자가 아니다. 우주선의 다른 승객들만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손목시계 형태의 이북리더기와 그를 통해 교신할 수 있는 AI 훈이 있다. 그리고 훈과 교신할 수 없는 시기에도 그녀의 기억 속에 온전한 '남자'가 있다. 그냥 남자가 아니라, 그녀 만의 '내 남자'.
그와의 기억은 여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잊지 않게 해주는 구심점이다.
남자에게 '여자'와 '기다림'을 통한 생존이 여자에게 가는 길이었다면, 여자에게는 '남자'와 '생존'을 통한 기다림이 남자에게 가는 길이었다.
두 사람을 서로를 향해 빛의 속도로 달리고, 얼어붙고 잠들고 맴돌며 서로를 기다렸다.
이는 두 주인공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쩐지 나 또한, 우리 또한 그렇게 귀하고 귀한 인연을 이어와 만난 것만 같은 뭉클함이 남는다.
김보영의 <스텔라 오디세이>는 읽기 편하면서도 괴롭고 감동적인, 잘 쓰인 SF 로맨스 소설이다.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누구보다도 강인한 두 사람이 우주가 끝나는 날까지 행복하기만을 바라게 된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영어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몇 년 전에 영문판을 구해놓고는 아직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 한국어판을 재독하는 것과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영문판을 일독하는 것 중 어느 것을 먼저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읽고 공상하고 또 기록할 것이고 수많은 책들은 -그리고 이상의 두 권은- 나를 끝까지 기다려 줄 것이다.
좋았다.
- 몰래 빠져나오느라 짐을 많이 못 챙겼어. 이북리더기 하나만 겨우 갖고 나왔네. 이거 저가형인데 액정이 뭔 손목시계만 해. 너무 쪼그매서 읽는 건 무리고 소리는 들을 만해. 그래도 고전소설을 백 권쯤 담아 놨으니 두 달간 심심하지는 않겠지.
- 편지가 손 글씨라 좀 놀랐지? 아, 당신이 받을 때엔 음성으로 변환돼서 가려나.
나도 연필과 편지지를 받고 좀 놀랐어. 내가 승무원한테 왜 연필이냐고 물으니까 "연필은 중력이 없어도 쓸 수 있거든요."라는 거야. 그리고 연필을 거꾸로 드는 시늉을 하더니 "왜, 누워서 쓰면 볼펜은 안 나와도 연필은 나오잖아요." 하는 거야. 내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종이냐고 물었지. 승무원이 "기계는 계속 바뀌거든요." 하더라고. 내가 못 알아들으니까, 그래서 기계는 아무리 간단하게 만들어도 쓸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 노인들, 아이들,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 가끔은 가난한 사람들. 하지만 편지는 누구나 쓰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고.
- 아까는 배 안을 기웃기웃하며 쏘다니다가 들켜서 승무원한테 혼이 났어. 머쓱해져서 방에 와있어. 알잖아. 난 낯선 데 가면 일단 주변 뒤지는 버릇 있는 거. 숨을 곳과 도망칠 곳을 확보하고 나서야 안심을 하지. 암튼 우리 가족하고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니까.
항해사 AI가 안내 방송 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내가 쓴 문장이 그대로 나오거든. 내가 외주한 게 언젠데 아직도 쓰나 몰라.
- 지금은 심심해서 방 사람들하고 '청소밥놀이'하는 중이야. ...아, 뭔지 알아? 나 어릴 때 진짜 많이 했는데. 하긴, 여자애들 놀이라 당신은 모를 수도 있겠다. AI 대화문 카피라이터들 모이면 이거 완전 목숨 걸고 해.
AI한테 두 사람이 동시에 명령을 내리는 거야. 한 사람은 청소를, 한 사람은 밥을 하라고 시키고, AI가 명령을 따르는 쪽이 이겨. 옛날 AI는 무조건 순서대로 수행했는데 요새는 더 복잡하게 판단하거든. 이를테면 '밥을 해.'라는 명령보다는 '오늘 오후 7시 30분까지 청소를 해.'라는 명령이 우선해. 시간제한이 기계에게 절박함을 주거든. 근데 이게 남편 집안일 시키는 요령이랑 비슷하댄다? 그래서 여자애들이 나중에 남편 일 시키는 훈련 하라고 만든 놀이라는 말도 돌아.
- 내가 당신으로부터 빛의 속도로 4년 하고도 4개월 12일은 날아야 갈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그건 내가 9조 5천억 킬로미터를 네 번 가고도 또 그 3분의 1은 더 가야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지.
물론 배가 빛의 속도에 이르면 시간은 멈추니까, 내가 느끼는 시간은 빛의 속도까지 가속하는 데에 한 달, 감속하는 데에 한 달, 두 달 뿐이겠지만.
- 당신한테 알파 센타우리에 갔다 온다고 했을 때가 떠올라.
가족이 이민 갈 때 따라갔다가 발만 딱 디디고 돌아오겠다고 했지. 다른 별에 다녀오면 외행성 거주권이 생기니까, 그걸 갖고 오면 직장 잡기 편하다고 했어. 이런저런 세금 혜택도 많다고. 왕복 4개월만 참으면 된다고.
"그건 당신 입장에서고."
당신은 나를 물끄러미 보며 손가락을 차곡차곡 접었지.
"나는 그 4개월에 8년 8개월을 더해서 9년은 더 기다려야 하겠네."
"그래."
나는 말하고 눈을 감고 당신 답을 기다렸지.
'헤어지자는 말을 어렵게도 하네. 빠이빠이, 나는 그럼 새 여자 찾으러 떠날게.'
-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 대신 다음 날 성간 결혼 가이드 책자를 한 아름 들고 왔지. 그러곤 4년 반만 돈을 모으면 '기다림의 배' 표를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어. 지구를 빛의 속도로 돌면서 다른 별에서 오는 사람과 시간대를 맞추는 배라고 했지.
“그러면 4년 반만 기다리면 돼."
그 말을 듣고 나는 당신을 안고 많이 울었어.
- 당신은 참 멋질 거라고 했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복지는 매년 좋아지고 있고, 좋은 기술은 계속 생겨난다고. 몇 년쯤 미래로 가는 게 보험 드는 것보다 낫다고 말야.
당신은 아는 것 같았어. 내가 가족을 우주 저편에 놓고 오려 한다는 걸.
같은 별은 안 돼. 이젠 인터넷으로 행성 반대편이라 해도 실시간으로 만날 수 있잖아. 내가 그들에게서 벗어나려면 그들을 다른 시공에 두고 오는 수밖에 없어. 빛의 속도로 쫓아와도 몇 년은 걸리고, 아버지가 "너 지금 어디 있어?" 하고 역정을 낼 때 내가 "어머나, 글쎄요." 하고 답하는 데에 8년 8개월 24일은 걸리는 곳에다가.
- 당신과 사귀고 얼마 안 됐을 때가 떠올라. 나는 계속 약속을 어겼지. 며칠씩 연락이 끊기기도 했고. 난 당신이 다른 남자들처럼 떠나리라 생각했어.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이 문자를 보냈지. 어떤 모습으로든 나와 달라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내가 며칠 뒤 카페에 갔을 때 당신은 너저분한 차림으로 문 앞에 앉아 있었어. 며칠을 길바닥에서 잔 몰골이었지. 나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어. 푹푹 찌는 날씨에, 잠바에 모자에 안대를 쓰고 목도리까지 둘둘 말고 있었으니까. 몸에 난 멍은 옷으로 어떻게 숨겼지만, 퉁퉁 부어오른 뺨이며 눈두덩은 고스란히 보였겠지. 난 그때 너무 창피했고, 그런 내 민망한 꼴을 끝끝내 본다고 고집부린 당신이 밉고 원망스러웠어.
그런데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대신 부기 빼는 법이나 피멍에 좋은 민간요법 같은 걸 한참 떠들다가 카페 소파에서 잠들어 버렸지.
- "가족이 별 건가."
다음에 만났을 때 당신은 말했어.
"그런 건 새로 만들면 돼. 그래서 세상엔 결혼제도라는 좋은 게 있는 거야. 평균 수명 계속 느니까, 우린 백 살까지 살 거야.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당신이랑 백 살까지 같이 살면, 당신 원래 가족보다 내가 네 배 더 당신 가족이 되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그러니까 빨랑 결혼하자, 얼른, 응?" 하고 졸랐지.
그래, 내가 지금 당신에게 가고 있어.
내가 선택한 사람과 네 배 더 가족이 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어 줘.
- 그리고 조난자들 오면 방을 같이 써야 할 테니 동의서에 사인을 해 달래. 몇 명이냐니까 여덟 명은 올 거래. 네 명이 자는 방에!
내가 동의 안 해 주면 어쩔 거냐니까 그 사람이 "그럼 어쩔 수 없지요.”라고만 하고 입을 조개처럼 딱 닫고 방에서 안 떠나는 거야. 와, 칼만 안 들었지 완전 강도네, 강도.
방 사람들하고 한참 화를 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우린 다 정당하게 뱃삯 낸 선량한 사람들인데 왜 손해를 봐야 하느냐고. 화를 내니까 배가 고파져서 매운 야식을 잔뜩 시켜서 꾸역꾸역 먹었지 뭐야. 그리고 이북 리더기를 켜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듣고 있어. 뭐든 오래된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서 말이지.
미안해, 자기야. 진짜 미안해.
당신을 4년 반이나 혼자 내버려 두었는데, 또 석 달을 더 기다리게 하네. 이젠 하다 하다 결혼식까지 늦는 여자라고 구박받게 생겼네.
한 번만 봐줘. 가면 내가 소원권 스무 장 만들어 줄게. 서른 장이면 될까?
- 파우스트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그게 무엇이든, 생에 단 한 번이라도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생에 한 번이라도, 단 한순간이라도 그런 환희를 느낄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멸망해도 좋다니, 악마에게 사슬로 칭칭 묶여 끌려가 영원히 나락으로 떨어져도 좋다니, 어쩌다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그 사람은 온전히 절망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죽음보다 절실하게 생을 추구한 사람이었을까?
- 가면 세상 많이 변해 있겠지?
예전에도 그랬잖아. 건물이든 가게든 거리든 몇 년 가지 않았지. 어제 생긴 가게가 다음 날이면 문을 닫고, 지난달 있던 건물이 다음 달에는 사라졌지. 나라 전체가 자기혐오에라도 빠진 것처럼 계속 자신을 부숴대었잖아. 유래가 깊은 것이라 부수면 안 되는 것들까지도.
그런 데서 살다 보면 무엇이든 정 붙이지 않는 버릇을 들여야 했던 것 같아. 무엇을 잃든 아쉬워하지 않는 데에 길들여지면서, 내 기억만이 그들의 유적이었지.
자기야.
지구에는 이제 내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게 하나도 없어. 집도 가족도 가진 것도 다 우주 저편에 두고 왔지. 아마 돌아갔을 때엔 내가 알던 거리나 건물도 다 사라져 있겠지.
그래도 하나도 두렵지가 않아.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내 집은 공간에 있지 않다고. 내 집은 사람에게 있다고. 그리고 그 사람은 당신이라고. 당신이 내 집이고 내 고향이라고...
예쁜 말 해 줬으니 늦는 거 용서해 주기야. 내가 지금 집에 가고 있어. 기다리고 있어 줘.
- 그래서 내가 결혼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다들 깔깔대고 웃는 거야! 건어물 파는 아저씨가 노가리를 주면서 남자는 그렇게 길게 못 기다린다고, 벌써 딴살림 차렸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심통이 나서 내가 결혼할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내 남자'라고 쏘아붙였어. 노가리를 아작아작 씹으면서 말이지. 그러고 나서는 창피해서 벽에 머리를 막 박았지 뭐야.
당신은 그냥 남자가 아냐. 내 남자야. 나도 그냥 여자가 아냐. 당신 여자야.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와도 달라.
다들 왜 그러는 걸까. 어째서 우리를 만나 본 적도,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지들이 신탁을 받은 예언자나 된 양, 우리 인생에 관여할 수 있는 자격증이라도 따 놓은 양 얄팍한 충고를 늘어놓는 걸까.
아무리 잘난 사람도,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한 사람이 일생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 자기 인생뿐인데...
- 아버지는 내게 접근하는 모든 남자를 미워했어. 당신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엔 난리가 났지. 내 방 물건을 길바닥에 갖다 버리면서, 내가 인생의 쓴맛을 다 맛보고 고난 속에서 허우적대며 발버둥 친 뒤에야 울며 용서를 빌며 돌아올 거라고 했어. 지금은 그 구체적인 환상의 근거는 뭐였나 싶어. 생각해 보면 엄마 그렇게 고생시킨 사람은 자기였구만.
이렇게 멀리 온 뒤에야 알 것 같아. 그 사람이 그토록 미워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고.
누구도 자신만큼 자신을 속속들이 알 수 없고, 그러니까 누구도 자신만큼 자신을 미워할 수 없는 거지. 누구도 자신만큼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 사람은 나를 그렇게 싫어했나 봐. 내가 그 사람에게서 나왔고, 그래서 자기를 닮았으니까.
- 당신은 지난 일에 대해서 말하는 법이 없었어. 어릴 때 부모가 당신에게 뭘 해 줬으면 좋았을 거라든가, 옛날에 뭐가 있었으면, 그때 뭘 어떻게 했으면 살림이 나아지고 인생이 폈을 텐데 같은 말. 당신은 늘 지금 아니면 앞으로의 일만 이야기했어.
"과거는 없어. 다 환상이야."
당신은 가끔 그렇게 말했지. 내가 무슨 말이냐니까 설명이 잘 안 된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었지.
"생각해 봐. 우리가 과거라고 착각하는 건 전부다 현재야. 모든 게 다 현재라고."
- 이제야 그 말뜻을 알 것 같아.
과거는 시간의 강을 따라 흘러가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실존하는 것은 지금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 찰나의 현재뿐이지. 지난 상처가 마음을 쑤시는 건 실상 그 기억을 떠올리는 뇌가 지금 막 쏟아 낸 화학물질 탓이지.
당신 말이 맞아, 과거는 없어. 과거는 내 기억에만 존재하고, 그 기억은 내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거지. 미래도 아직 없고, 그 또한 내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거지.
그래, 나는 이제 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거야. 좋은 것만 생각하며 내 현재를 좋은 것으로 만들어 갈 거야.
"내가 돌아왔어." 하고 말하며 항구에서 당신에게 달려가 품에 안기는 순간을 계속 생각해. 그것만으로도 내 현재가 축복으로 빛나는 기분에 빠져.
- 내 집, 내 고향.
내가 지금 집에 가고 있어.
잘 자. 사랑해.
- 11년이라니.
그리고 그걸 타면 먹을 데도 잘 데도 쌀 데도 없어서, 조난자 용도로 마련된 동면실에 들어가서 내릴 때까지 자야 할 거래.
옆에서 또 누가 울어. 또 어디서는 누가 고함을 지르고. 옆에 누운 아주머니가 춥다고 자꾸 이불을 끌어당겨. 그러면서 나더러 쓸데없는 생각 말고 알파센타우리로 돌아가래. 동면 잘못했다가 냉동 고기가 돼서 죽은 사람 많다고. 그리고 당신은 떠났다고, 벌써 떠났다고...
- 11년,
아니 18년 8개월...
당신더러 또 배를 타라고는 못 해.
이젠 뱃삯 낼 저금도 없을 거고, 대출 땡겨 탄다 해도 집도 절도 없는 신혼부부가 대출 이자 갚으며 살림 시작해서 어떻게 살아. 18년이나 경력 단절된 사람이 일자리는 또 어디서 구해? 기술이고 뭐고 다 변해 있을 텐데. 시집가도 당신이 취할 때마다 나랑 결혼하려다 인생 꼬였다고 꼬장 부리고 그러면 나 어떻게 살아.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는데,
당신과 네 배 더 가족이 되고 싶었는데, 다 틀렸나 봐.
그래도 나는 지구로 가려 해.
내게 무슨 다른 선택이 있겠어? 내 집은 당신뿐인데.
기다려 달라는 말은 차마 못 할 것 같아.
그저 항구에 나와 줘.
11년 뒤에 나를 마중 나와 줘. 아내하고 애들 데리고 와도 돼. 괜찮아. 뭐, 다 이해할게. 의연하게 악수하고 같은 남자한테 코 꿰인 비슷비슷한 여자들끼리 종일 수다나 떨지, 뭐.
그저 당신을 만나고 싶어.
그럼 다 괜찮을 것 같아. 같은 하늘 아래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그러면 우린 떨어져 있어도 같이 사는 거지, 뭐. 집이 좀 클 뿐이지.
- 여기 완전 냉동고네. 손이 곱아서 잘 안 써져. 내부 온도가 화물 신선도에 맞춰져 있거든. 훈 HUN한테 난방 틀어 줄 수 없냐고 했더니 난방 시설이 없대. 조명도 없어서 지금 이북 리더기 빛으로 비추며 쓰고 있어.
참, 훈은 이 화물선 선장이야. 인간은 아니고 AI야. 아주 똑똑해. 뭐 물어보면 화도 안 내고 설명도 차근차근 잘해 줘.
동면하기 전에 속을 비워 놓으래서 지금 쫄쫄 굶고 있어. 배고파 죽을 것 같아. 곧 내 체액을 다 빼고 부동액으로 교체할 거야. 투석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래. 근데 만약 내 몸이 부동액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 죽을 수도 있대. 그래도 시체는 잘 냉동 보존되어 가족에게 갈 테니 걱정하지 말래. 뭐래, 정말.
편지 보낼 수 있냐고 물어봤어. 훈이 말하기를, 당신이 원래 타고 있던 배에 계속 있으면 받을 수 있을 거래. 하지만 다른 배로 옮겨 탔다면 주소를 모르니 못 보낸다. 하긴 그렇겠지.
동면 준비가 끝날 때까지 할 일이 없어서 훈하고 '청소밥놀이'를 했어. 내가 '오늘 오후 7시 30분까지 청소를 해.'보다는 '굶어 죽기 직전이야. 요리를 해.'가 우선할 거라고 했어. 사람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훈이 애매하다는 거야. 사람은 '죽겠다.'는 말을 관용어로 쓰는 버릇이 있어서 좀 더 확실한 근거를 대야 할 거래. '나는 식이요법이 필요한 환자고 정확한 시간에 식사를 하지 않으면 위험해.'라고 하라는 거야. 물론 진짜 환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AI 입장에서는 그걸 확인하다 때를 놓칠 수는 없으니 실행을 할 거라고.
- 당신 만나면 하루 종일 떠들 거야. 내가 지난 한 달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만나면 누가 더 고생했는지 붙어 보자!
그리고 내가 이기면 좋겠어.
당신은 힘든 일 하나도 안 겪으면 좋겠어. 나 없는 동안 배부르고 등 따시게 지냈으면 좋겠어. 행여 날 걱정한다고 인생을 망치지 않았으면.
진짜야. 그러지 않으면, 나야말로 당신에게 미안해하다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고.
나 갈 때까지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여행 많이 다녀. 재미있는 것도 많이 보고. 대신 좋은 일이 있으면 한 번씩은 나를 생각해 줘. 그러면 내가 거기에 당신과 함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항구에 나와서 11년간 그렇게 살았다고 말해 줘. 약속해.
그러면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아.
안녕, 내 사랑.
날 사랑해 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행복했어...
- 옆에는 철제 물통과 밥그릇 같은 것도 굴러다녔고, 그릇에는 사료 비슷한 것도 말라붙어 있었어. 마치 누가 조금 전까지 있다가 막 떠나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내가 보는 사이에 천막은 바람에 휘말려 날아갔고, 눌린 흔적은 벌컥거리는 빗물에 삼켜져 버렸어.
사라지고 나니까 방금 본 것이 내 환상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봤는지도 모르겠는 거야.
- 나는 정신없이 진흙탕을 헤집었어. 거기 당신이 땅을 파묻고 숨어 있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다 소리 높여 당신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돌아오는 건 서럽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뿐이었어.
그리고 너무너무 겁이 났어. 행여 당신이 여기서 나를 기다렸을까 봐. 제시간에 와서 나를 기다리다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떠나 버렸을까 봐. 내가 본 것이 환상이기를, 환상이 아니라면 여기 있던 사람이 당신이 아니었기를 바라고 또 바랐어.
그러다 정신이 번쩍 났어. 도로 배를 타야겠다고 생각했어. 배를 타고 당신을 찾으러 가야겠다고,
- 그런데 돌아가 보니 배는 진창에 벌써 반쯤 가라앉고 있었어. 입구로는 흙탕물이 벌컥거리며 들어갔어.
내가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이북 리더기에서 선장의 말이 들리는 거야. 그나마 있던 액정은 나갔고 소리밖에 안 들렸지만.
"상황이 좋지 않네요. 제가 얼마나 더 멀쩡하게 굴러갈지 모르겠어요. 원하는 게 있으면 지시를 내려 주세요. 메일함 확인하시겠어요? 비번 알려주시면..."
나는 구조 신호를 보내 달라고 했어.
우주 어디로든, 아무 배로나 지금 이 항구에 사람이 있다고. 그러니 당장 날 어디로든 데려가라고. 안 그러면 나 춥고 배고프고 애인도 못 만나서 외로워 죽을 거고, 그러면 다 네 책임이니까 위에다 민원 넣어서 널 조각조각 분해해 버릴 테니 알아서 하라고 했어.
훈은 "뒷부분은 관용어구인 것 같은 데다가 논리도 이상하지만 받아들이죠." 하고 내 명령을 최우선 순위로 올렸어.
- 내가 밥을 먹는 것을 수십 개의 눈알로 지켜봐. 내가 입에 넣는 밥알을 세고 내가 떨어트리는 먼지를 노려봐. 다들 날 미워해도 괜찮다는 것을 아는 눈들이야.
선장은 정말 정신이 나간 것 같아. 매일 세 시간씩 연설을 하고 매일 다른 말을 해. 사람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미쳤다는 증거지.
이해할 수 없는 건 모두들 그 사람을 순순히 따른다는 거야. 다들 입을 모아 이런 시국에는 저런 사람이 필요하다고들 해. 이런 시국일수록 저런 사람은 없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사람들은 너무 불행해진 나머지 누구든 쉽게 괴롭혀도 되는 세상을 바라는 것 같아. 선장이 자기들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존경하고 숭배해.
- 아까는 좀 이상한 일이 있었어.
여객선이 막 지구를 떠나려는 참이었어. 창밖으로 새하얀 눈밭이 눈에 들어왔어. 거기에 덩그러니 놓인 작고 초라한 낡은 돛단배도. 나는 갑자기 격정에 휩싸여 계단을 뛰어올랐어. 그리고 문을 향해 달렸어. 사람들이 날 붙들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문을 박차고 배에서 뛰어내렸을 거야.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저 그 이름도 모르는 작은 배가 그리워서 죽을 것 같았어.
- 그리고 4계급으로 굴러 떨어졌지.
사실 생각만큼 무시무시하지는 않았어. 한 달을 배 밑바닥에서 살아야 하기는 했지만. 그다음이 더 무서웠어. 돌아오니 난민 여자들이 방에 쳐들어왔어. 나더러 왜 눈에 띄는 짓을 해서 안 그래도 힘든 자기들을 더 힘들게 하냐는 거야. 내가 내부의 적이라는 거야.
- 좀 전에 오랜만에 훈과 연결되었어.
"목소리가 안 좋네요." 훈이 말했어.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야 해요."
그래서 답을 했지. "그러고 싶어. 그런데 그러기가 너무 힘들어."
"흔한 인간 세계네요." 훈이 말하더라고.
- 나는 한 사람의 생존이 다수의 생존에 우선하는 경우를 생각해 봤어.
"나는 전 지구를 휩쓸 전염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는 특수한 피를 갖고 있어. 그리고 지금 밥을 먹지 않으면 나는 배고파 죽을 거야."
그러니까 훈이 '흐, 흐.' 하는 건조한 웃음소리를 출력하며 "점점 더 증명할 수 없는 말이 되어가는군요."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다른 말을 생각해 봤지.
"청소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를 따돌리고 밥을 주지 않으려 해."
그러자 훈이 한참 연산을 돌리더니 말했어.
“다수가 집단 가해자라는 가설이군요. 그러면 공익의 문제는 사라지고 선량한 한 사람의 권리가 우선하겠군요. 이건 먹혔어요."
훈은 덧붙였어. "한 번은 해 주지요. 하지만 다음번에는 증명이 필요할 거예요."
- 많이 노곤해. 자야겠어. 내일도 바쁠 테니까.
자기야.
나는 물들지 않으려 해.
나는 물들지 않으려 해.
물든다 해도 얻는 것이 없으니.
그것만 잘해도, 당신을 만났을 때 잘살았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아.
- 당신에게 가고 있어.
당신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 해도.
- 이제 난민 중에 교도관이 생겼어. 그 사람이 우리를 다 관리하고, 우리를 괴롭힌 만큼 가산점을 얻어.
어디 가나 적자생존 같은 말이 돌아. 다들 진화생물학도 정말 좋아하고. 강한 자가 더 갖고 약한 자가 덜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의 말을 자주 해. 그러면서 우리 같은 무임승차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으로 정당한 승객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다고 해.
마음이 캄캄해지는 날이면 당신을 생각해.
당신이 창고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뭔가를 뚝딱거리고 만들다가, 자랑스럽게 내게 보여 주며 으쓱으쓱 뻐기는 모습이라든가.
버스 정류장에서 기름때 묻은 얼굴로 서성이다 내가 내리자마자 환하게 웃는 얼굴이라든가.
밤새 사랑을 나눈 뒤 당신과 이마를 맞대고 웃는 순간이며, 당신과 나눈 온갖 실없는 농담이며 바보스러운 대화들을 생각해. 당신이 나와 함께 있으면 귀에서 로맨스 영화 음악이 들린다든가,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는, 얼른 자기한테도 귀여운 말을 해 달라고 졸라 대던 걸 생각해.
그러면 내 현재가 햇빛처럼 반짝이는 기분이 들어.
- 자기야, 내가 재미있는 생각을 했어.
훈은 자기를 만든 사람의 정보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대. 그래서 가끔 지가 자기를 만든 그 사람인 양 굴어. "내가 인간이었을 땐 말이죠." 같은 말도 해. 그러다가는 "알아요, 난 기계죠. 하지만 인간의 인격일 가능성도 약간은 있기는 해요." 같은 말을 해.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사람의 인격을 컴퓨터에 저장할 수 있다면, 그 입력된 정보 데이터를 인간의 인격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야.
설령 세상에 영혼이 없다 해도... 어떤 형태로든 사람의 마음이 기록 안에 담길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러면, 사람에게 남은 다른 사람에 대한 기억도 불완전하나마 정보 데이터니, 이 또한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적어도 그 파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런 말 있잖아.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 누군가를 기억하면 그 사람은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이야기 말이야.
- 만약 정보가 인격일 수 있다면,
내 기억 속의 당신도 인격일 수 있는 거야.
그게 사실이라면,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거야. 내가 당신을 기억하니까.
나와 함께, 나라는 이 생체 컴퓨터 안의 정보 데이터로서.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은 살아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계속 살고자 해. 당신을 살게 하기 위해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당신을 살게 하기 위해서.
당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명이자 흔적이 바로 나니까. 내가 당신의 유적이니까.
- 아침에 눈을 뜨면서 속삭여. 밤에 잠이 들면서 속삭여. 내 안에 있는 당신에게 속삭여.
나와 함께해 주어서 고맙다고. 이렇게 나를 살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당신이 나를 살게 하는 거야.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든, 죽었든, 살았든, 무한의 별 무리를 여행하고 있든.
- 빛의 속도에 이르면 모든 것이 느려져.
가속으로 생겨난 중력은 사라지고 다들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지. 이 길에서는 폭력도 괴롭힘도 사라져. 누구를 때리려면 발을 디디고 서야 하는데, 중력이 없으니 디딜 수가 없잖아. 마찰력이 없으니 멱살도 안 잡히고, 누굴 치면 자기도 똑같이 뒤로 밀려나 날아가 버리거든.
그 사납던 사람들이 다 낙엽처럼 나풀나풀해져. 이를 득득 갈면서도 일단 중력이 생겨날 때까지 괴롭힘을 미루지.
좁아터지던 방도 운동장처럼 넓어져. 바닥에 누울 필요가 없거든. 천장이나 벽에 자리를 잡고 동동 떠서 호텔처럼 편하게 잘 수 있어.
- 자기야.
배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땅이 아니라 이 별의 바다를 고향으로 여겨. 그 애들은 배가 정박하면 당황해서 어른들에게 왜 시간이 말라붙어 있느냐고 물어. 그 아이들은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변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제 있었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고, 어제 보았던 하늘이 그 자리에 있으면 어리둥절해해.
자기야.
나는 아이를 낳으면 이 빛의 길 위에서 낳고 싶어. 힘센 사람도 간악한 사람도 공기방울처럼 부드러워지는 이곳에서. 세월이 빛처럼 흘러가 사라지는 이 길에서. 그러면 그 애는 영원히 고향을 잃지 않을 테니까. 우리 아이는 잃을 것이 없을 거야. 저 선장처럼, 이 배의 승객들처럼,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겠다고 자신을 망치고 세상을 망치려 들지 않을 거야.
- "부르라고 있는 게 남편이잖아."
그러더니 당신은 안 씻은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어. 배가 워낙 작아서 물탱크가 코딱지만 하대. 그러면서 날 코딱지만 한 샤워실로 데려가더니 자기가 무슨 화학식으로 어떻게 물을 합성하는지 자랑하는 거야. 그러고는 칭찬해 달라고 조르더라고.
그리고 묻는 거야. 누가 우리 이쁜 애인 미워하느냐고. 그래서 난 내가 난민이고 이민자고 무임승차자라서 어쩔 수 없다고 했어. 내가 이 사람들 밥과 잠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그러니까 당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거야.
"난민이 뭐야?"
그 말에 잠에서 깼어.
- '난민이 뭐야?'
당신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어.
갑자기 모든 게 이상해졌어.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보다 생각했어. 당신과 결혼해서 시골에 마당 있는 작은 집을 구해서 살다가 이상한 꿈을 꾸었나 보다고. 당신은 옆에 없고 고약하고 사납고, 마음이 다 뒤틀린 사람들 속에서 닥다글닥다글 엉겨 붙어사는 꿈이었어.
- 나는 다시 잠이 들었어. 당신은 다시 코딱지만 한 방에서 뭔가 뚝딱거리며 고치고 있었어.
"천장에 구멍이 났거든. 비가 샐까 봐서."
당신이 땀을 닦으며 말했어. 우주선에 구멍이 나면 비가 새는 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했지만 꿈이니까 굳이 따지지는 않았어.
"난민이 뭐야?"
당신이 다시 물었어. 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어.
"그런 게 있어. 난 원래 이 배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어. 나중에 들어왔지. 그래서..."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당신이 내게 손을 내밀었어.
"그 바보들 틈에서 나와."
당신의 투박한 손이 어둠 속에서 빛났어.
"그 사람들은 이 과거에 못 박혀 있어. 자라지도 늙지도 않았어.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지 마."
- 그제야 나는 눈을 떴어.
그리고 정신이 들었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태양처럼 선명하게 알 수 있었어.
그런 뒤에는 밤처럼 두려움이 몰아쳤지. 하지만 이내 평온해졌어. 내 평생 이처럼 명확히 내가 뭘 해야 할지 알았던 적이 없었거든.
염려 마. 나는 강해.
난 혼자가 아니니까.
내 안에 당신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어.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었어. 지금도 당신과 함께 있어.
그러니까 나는 강해.
나는 난민도 이주민도 무임승차자도, 그냥 여자도 아니야.
나는 당신 여자야. 내가 선택한 남자의 여자야.
그러니까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내가 이처럼 사랑하는 당신이, 그런 당신이 사랑해 준 사람이 바로 나니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당신, 그런 사람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바로 나니까.
나는 내가 동반자로 택한 사람의 동반자며, 내가 짝으로 택한 사람의 짝이며, 내가 일생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연인이야.
나는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는 강해.
- 나는 꼬물꼬물 환풍구를 기어서 기관실로 숨어 들어갔어. 오직 4계급까지 떨어져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통로였지.
기관실에 도착하니까 내 이북 리더기에서 지직거리며 훈의 목소리가 들렸어.
"오랜만이네요. 무슨 일이세요?"
훈이 잠이 덜 깬 목소리를 출력하며 물었어. 잠 같은 건 자지도 않으면서.
나는 말했어. 지금부터 네게 명령을 내릴 거라고. 그리고 그건 이 배에 탄 모든 사람의 명령에 우선하는 명령일 거라고. 이제부터 내가 명령을 내리고 나면 누가 어떤 권한으로 다른 명령을 내린다 한들 되돌릴 수 없을 거라고.
훈이 흥미로운 말투로 답했어. "해 보세요."
- 여기저기서 승객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어. 내가 선내 방송용 스피커로 말하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그랬어. 이게 내 최초이자 최후의 시위였으니까. 밖에서 쿵쾅거리는 군홧발 소리와 문을 부서져라 치는 소리가 이어졌어. 문이 오래 버틸 줄은 알고 있었어. 강박증이 생긴 선장이 몇 겹으로 보강해 두었거든.
나는 이 여객선이 지구의 자연스러운 회복을 방해하고 있다고 했어. 이들은 미친 신이 될 준비를 하고 있고, 이 여객선이 항해를 계속하는 한 인류의 역사에 해를 끼칠 거라고 했어.
승객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 이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그 고향은 사라져 버렸으니까.
- "자극적인 말이군요."
훈이 말했어.
"물론 언제나 인류 전체의 이익이 우선하죠. 하지만 근거가 커질수록 증명이 어렵다는 문제는 여전해요. 당신은 지구에 살아남은 인류 모두에게 동의서를 받아올 수 없어요. 결국 다 당신 생각일 뿐이죠."
"그리고 이 승객들은 내 가해자들이야. 나를 천천히 죽여 왔어. 이제 정말로 죽게 될 거고."
나는 문을 쿵, 쿵, 치는 소리를 들으며 말했어.
"동의해요. 거의 확실하지요. 안 됐어요. 하지만 그 문제와 항해와의 관계는 애매해요. 뭐, 이걸 다 합치면 봐줄 만은 하군요. 하지만 그뿐이죠."
훈은 계속 말했어.
"오랫동안 생각해 봤지만 이 놀이에는 근원적인 문제가 있어요. 당신이 어떤 대단한 말을 생각한들, 누군가는 그보다 대단한 말을 생각해 낼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명령을 되돌리겠지요."
"아니, 지금 내 명령보다 더 대단한 명령은 없어."
내 말에 훈은 가벼운 웃음소리를 출력했어.
"억지를 쓰는 분인 줄은 몰랐군요."
"나는 곧 죽어. 그리고 내가 죽은 뒤 네게 명령을 내릴 사람은 이 배의 승객이라는 가해자들뿐이야. 가해자의 요구는 절대로 피해자의 요구보다 우선하지 않아. 그러니 지금 내 명령보다 더 대단한 명령은 다시는 없어."
훈이 잠시 조용해지더라고. 그리고 한참 있다가 말을 하는 거야.
"의미 있는 지적이군요."
- "하지만 내겐 살아 있는 사람의 명령만이 유효해요. 죽은 당신이 내가 다른 명령을 수행하는 걸 막을 수는 없어요."
"막을 수 있어. 나는 지금부터 네게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명령을 할 테니까."
"그건 불가능..."
훈은 다시 정지했어. 그리고 한동안 부하가 걸리는지 딸깍거렸어.
"이해했어요. 멈추려는 게 항해가 아니군요."
"그래. 네가 동의만 한다면."
훈은 잠시 연산을 돌리는 듯했어.
"납득했어요." 훈이 말하더라고. "명령을 내려 주세요."
- "작동을 중지해, 훈. 인류와 이 배의 승객들과 나 한 사람을 위해. 네 기능을 정지하도록 해."
훈이 연산을 끝낸 것과 문이 열린 건 거의 동시였어. 훈이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지.
“받아들이지요."
- 항해사를 잃은 배는 이내 통제를 잃었어. 껍데기만 남은 거지. 이 배는 이제 영영 우주를 떠돌게 될 거야. 다시는 지구에 돌아가 오만하게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을 농락하지 못하겠지. ... 아마도.
- 두렵지는 않았어. 단지 슬펐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라지는 것이 슬펐어. 나는 계속 살아서 당신을 살게 해야 하는데.
- 군인들을 제치고 선장이 들어오더라. 선장은 얼굴이 너무 딱딱해서 사람 같지가 않았어. 소원대로 사람을 벗어난 뭔가가 된 듯했어. 그리고 사람을 벗어나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그때 확연한 예감이 들었어. 내가 당신에게 보낸 편지가 이 배에서 하나도 나가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마찬가지로 이 배에 온 당신 편지도 이 사람이 다 가로챘으리라는 것을.
나와 당신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으리라는 것을.
- 그걸 내가 언제 썼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어. 어쩌다 그 사실에 굳이 새로 절망했을까? 나는 주섬 주섬 일어나 커튼을 쳐서 글씨를 가렸어. 그러다가 내가 누가 본다고 이걸 가리는 거야 생각하며 혼자 쿡쿡 웃었어.
당신에게 새 메모를 남기려다가 문득 무엇인가가 내 몸속을 흘러 내려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어. 나는 신기한 기분으로 그걸 바라보았어.
몸 어딘가에 작은 구멍이 난 것 같았어. 모래처럼 산산이 부서진 당신이 '당신은 여기 없어.' 하며 내 몸에서 흘러 나가는데 걷잡을 수 없더라고.
나는 땅에 스며들어 사라지는 당신을 내려다보며 깨달았지.
아아, 여기까지구나.
나는 강했고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였구나.
후회는 없었어. 나는 열심히 살았고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나는 종이를 떨어트리고 걸어 나갔어.
- 내게 생각은 남아 있지 않았어. 하지만 가야 할 곳은 분명했어. 가려면 거기밖에 없었지.
나는 항구에 도착했어.
항구는 우거진 수풀에 뒤덮여 있었어. 바다는 하늘빛이었고 하늘은 바다 빛이었지. 지평선이 물에 번진 듯 흐릿해서 새파란 우주 속에 서 있는 듯했어. 저 멀리 해안가에는 부서진 건물들이 줄지어 누운 큰 공룡의 사체처럼 쓰러져 있었어.
- 나는 물에 발을 담갔어. 어쩌면 당신이 이 바다 어딘가에 떠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먼지가 되었든, 재가 되었든, 바람이 되었든.
나는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갔어.
얼마나 들어갔을까. 파도가 점점 무거워져서 숨을 쉬기도 서 있기도 힘겨워질 즈음이었어. 높은 파도가 몸을 내리치고 올려쳤지.
그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어.
사랑 노래였어.
오래된 대중가요 같았어. 수백 년 전, 이 지구에 사람들이 가득했던 시절에나 유행했던.
나는 내가 환청을 듣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어. 더구나 그 노래는 내 눈앞에 떠내려오는 반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거든.
- 신기한 일도 다 있네, 하고 생각했어.
내가 반지를 주워 들고 내려다보는데, 바다 위를 둥둥 떠오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어.
처음에는 쓰레기인가 싶었지. 죽은 시대에 버려진 플라스틱들이 아직도 해안가로 밀려오곤 했거든.
뭔가의 부서진 파편 같았어.
배 조각 같았어.
사라진 시대에 날아다녔던 낡고 작은 우주선 조각. 마치 조금 전에 추락해 해수면과 부딪쳐 산산조각이 난 듯한.
파편을 머릿속에서 모아 재구성해 보니 사람하나 겨우 탈 만한 작은 돛단배였어. 태양풍으로 우주를 나는.
- 그때 문득 언젠가 여객선 창문으로 보았던 그 무인 우주선이 떠올랐어. 눈밭에 고독하게 놓여있던. 사람 없이 혼자 날고 있었다는.
... 사람이 없다고
... 들었던.
- 벼락을 맞은 기분이 되었어.
나는 정신없이 헤엄치기 시작했어. 파편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보려 했는데 너무 넓게 퍼져서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거야.
한참 만에야 아직 형체가 남은 조종석을 발견해서 안간힘을 쓰고 기어 올라갔어. 조종석은 손때가 새까맸고 얼기설기 고친 흔적으로 가득했어. 누군가가 긴 세월 그 안에서 살았던 것처럼.
손에 잡히는 대로 눌러 대며 뭐든 돌아가는 것이 있나 찾았어. 우주선이라면 블랙박스가 있을 거고, 뱃사람들은 반드시 영상이나 음성 기록을 남기니까. 뭐라도, 뭐라도 남은 것이 있다면.
- 영상은 없었지만 사람 목소리가 나왔어.
나는 바로 알 수 있었어. 그건 당신의 목소리였어.
당신 목소리였어.
- 기다리고 있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쓰던 당시, 이야기가 좀 더 펼쳐지려다가 '낭독용 소설'이라는 생각에 더 길어지지 못하고 잘라 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여자 편에서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내분께 선물할 생각이었지요.
약속은 계속 미뤄졌습니다. 처음에는 다음 결혼기념일 즈음에 주겠노라, 그 후에는 아기가 태어날 때에 맞추어 주겠노라, 하지만 결국 아기가 태어나고도 2년이 지난 지금에야 쓰게 되었습니다.
짧은 속편이지만 고심이 많았습니다. 여자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기에 가능했던 서사가 여자의 이야기를 공개하면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고, 동시간대에 교차하는 이야기이면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지 한 가지는 처음부터 정해 두었습니다. 남자의 고난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온다면, 여자의 고난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올 것이라고.
출간에 대한 기약도 없이 두 사람에게만 보여주리라 생각하며 썼던 전편과 속편의 상황은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두 사람을 위한 소설이란 마음가짐으로 씁니다.
똑같이 아내분께 배경이 될 노래를 하나 부탁했고, 이 노래의 배경음악은 김윤아(자우림)의 <going home>입니다. 전편을 쓸 때 유영석(화이트 W.H.I.T.E)의 <사랑 그대로의 사랑>을 내내 들었듯이 이 노래를 글을 쓰는 내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소설을 읽으며 같이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 가고 있어>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미래로 가는 사람들>의 주인공의 부모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작품의 연결성은 느슨한 편이니, 독립적인 작품으로 감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편으로, 감사하게도 부부가 아이의 이름을 <미래로 가는 사람들>의 주인공 '성하'로 지은 점도 같이 알립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제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소피 보우만 씨는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그날 번역을 해서 런던 도서전 아시아 번역 공모전에 내어 당선이 되셨지요. 그 번역을 통해 이 책은 해외에 소개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 책 중 처음으로 낭독극과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진 소설이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이 사랑하고 결혼을 한 덕에 제게도 좋은 일이 계속 생겨난 셈입니다. 사람이 그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만으로도 우주는 변화합니다. 오늘도 이를 믿으며 펜을 내려놓습니다.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신 그린북 저작권 에이전시와 출판을 결정해 준 새파란상상, 그리고 집필과 번역이 동시에 진행되는 어려운 일정 속에서 다시 번역을 해 주신 소피 보우만 씨께 감사드립니다.
더해서, 속편을 쓰면서 전편의 여러 시간 계산 오류를 수정했습니다. 하나하나 검토해 주신 류승경 번역가님, 머리를 맞대고 계산해 주신 정직한 님, 미카 님, 그 외의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네, 저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단지 둘만의 이야기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나중에는 우리를 위해 탄생한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힌다는 것에 너무나 행복했죠.
작가님께서 후속 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지만, 언감생심이랄까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기에 지금보다 뭔가를 더 받는 것은 기대도 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렇게 <당신에게 가고 있어>를 통해 이 커플을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그 남자가 긴 시간을 홀로 보내는 동안, 여자는 얼마나 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항상 궁금했는데, 그 답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되었어요.
찌질한 그 남자가 혼자서 세상 고통 다 받는 것처럼 찔찔 짜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물론 로맨틱한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저에게 매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가 탄생한 과정을 감안하면 주인공을 저와 동일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제가 갖고 있는 찌질함을 그 인물에게 뒤집어씌운 채로 읽었던 거죠. (네, 이 문단 맨 앞의 '찌질한 그 남자'는 사실 저예요.)
반면에 이번 이야기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너무나 로맨틱했어요. 이야기 속의 여자는 그 많은 고생과 좌절, 고뇌 속에서도 남자를 잊거나 지우려 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한 발 한발 걸어가더군요. 그 대상이 되는 남자, (여전히 그 남자와 동일시하고 있는) 저로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자의 로맨틱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나중에 '로맨틱하기만 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 이야기는 많이 고통스러웠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동일한 이야기에서 서로가 느끼는 바가 이렇게 대칭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에 놀랐고, 그것 또한 한 쌍으로 이루어진 두 이야기의 매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 차이가 수많은 연인, 혹은 수많은 관계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는 원인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까지 들고 나니, 결혼 생활동안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조심스럽게 되짚어 보게 되더군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최초의 목적대로 낭독이 되었고, 당시 저는 어설픈 솜씨로나마 작은 손제본 책을 만들어 선물했습니다. 그런 뒤에는 위에서 얘기했듯, 서점용 도서로 출간이 되어 많은 독자에게 알려졌죠.
처음에는 우리 둘을 위한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을 위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낭독극 무대에서 배우가 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을 아내와 아이와 함께 마주했던 그날의 감동은 정말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잘 만들어진 오디오북을 듣고 있노라면, 이걸 낭독해서 프러포즈를 하려 했던 제 시도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항상 생각합니다. 이렇게나 좋은 작품이 우리 가족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니, 인생 전체에 걸쳐 이보다 더 영광스럽고 행복한 일은 없을 거라고요.
이 글을 읽으신 분들께도 이 이야기가 더없는 행복이 되기를 바라고, 또한 인생에 남을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두들, 사랑하시길.
해설
빛의 속도보다 간절한 여자의 그리움
서희원(문학평론가)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 이성복, <서시> 중에서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와 결합되어 하나의 완전한 형태를 이루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말은 두 편의 소설이 서로 닮았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조화에 의미의 방점이 찍혀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가 온 우주를 날아 지구로 돌아오고 있는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의 이야기, 기다림을 위해 기꺼이 고립을 선택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들 ...
- ...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배는 "항해 AI가 고장 나도 인간의 힘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했던 예전 항해사의 후예들이 점령하고 그들은 문명재건주의자들의 광기 어린 욕망을 꺼트리기 위해 "10만 년 뒤의 미래"로 떠난다. 여자는 아무도 내리지 않는 배에서 홀로 내리며, 오래전 알고 있던 그 시간이 흐르는 지구로, 기다림의 장소로 귀환한다. 그리고 여자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경이로운 우주적 우연을 통해 사랑하는 남자와 조우한다. 누군가는 이 우연이란 단어를 무신론자를 만난 근본주의자처럼 질색하며 그렇게 말하지 않기를,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섭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연이란 아직 인간이 헤아리지 못한 우주의 거대한 원리를 지칭하는 단어이며, 그 숭고한 마주침의 순간을 찬미하는 용어이다. 예상할 수 없는 무수한 마주침을 통해 모든 것은 탄생하였다.
우연한 마주침은 곧 우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