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 - 진정한 나를 마주하기 위한 꿈 인문학

일루젼 2021. 8. 2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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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혜경
출판 :  한겨레출판사
출간 :  2014.11.10


 

<달러구트 꿈 백화점 2>에서 비고 마이어스가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꿈에는 아무런 의미 따위는 없다고 신랄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투사해서 욕망을 드러내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는 등의 헛소리는 다 그만두라고. 

 

바로 이 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다.

벌거벗고 다니는데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자신을 좀 더 드러내고 표현해도 괜찮다는 신호라고. 

 

발췌문들을 접하고 흥미로워서 읽어보았는데, 중간 정도 읽다가 어딘가 익숙한 느낌에 확인해보니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는 책으로 만난 적이 있는 저자였다. 당시에는 직접 저자가 아닌 번역가였으나 문장이 낯익었다.

 

내가 느끼기에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자신은 꿈 분석에 대해 유학을 다녀온 전문가다.

둘째, 현실을 제대로 살고 싶다면 꿈을 들여다봐야 한다.

셋째, 꿈은 다층적이므로 보이는 것 그대로를 받아들이거나 적용하려 하면 안 된다.

 

조금 더 부연하면 '꿈의 언어를 익혀야 하지만 일단 이 책에서는 맛보기만 보여주겠다, 꿈 일기를 기록해라, 하다 보면 더 많이 기억날 것이다.' 

 

분석에 관해서는 더 많고 깊은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기록을 하는 것만으로도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꿈 해몽법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더 유용할 수도 있는 책이라고 본다. 만족한다. 

 

 


- 하지만 현실이 혼란스럽고 막막하기에 꿈을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표층이 아닌 내면의 깊은 층위에서 올라오는 본질의 언어인 꿈에는 삶에 얽힌 실타래를 풀어낼 실마리가 들어 있다. 뒤죽박죽 된 감정의 실체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와 지혜를 길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 명상이든 의례든 무의식을 만나는 방식들은 언제나 주의가 필요하고 안전한 틀이 마련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꿈 선생님 제래미 테일러 Jeremy Taylor 박사는 가장 적절한 현대인의 명상법은 꿈을 들여다보는 것이라 한다. 꿈은 안전하게 무의식 세계를 탐색할 수 있는 좋은 도구다.

 

- 하지만 이미 아니마, 아니무스가 널리 사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 용어에 여러 이견이 있음을 밝히는 정도로 그치고자 한다.

 

- 융은 세상을 바라보는 순진함을 극복하는 것이 발달의 척도라 했다. 진정한 성숙은 복잡다단함과 애매모호함, 그리고 모순과 역설을 견뎌내는 힘을 갖는 과정이다. 극기와 희망, 밝음을 강조하는 심리학이나 자조 프로그램에는 삶의 모호함이나 복잡성을 수용할 여지가 거의 없다.

 

- 그림자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 힘과 에너지를 의식으로 길어 올린다는 말이다. 자신의 최상과 최악을 만나는 일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편집된 자신을 너머 온전한 자신, 자신의 모습 자체를 만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 신 체험이나 누미노제 Numinose를 경험한 사람은 신의 현존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런 경험이 없다면 의문이 영구적으로 마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분명한 점은 캠벨도 융도 각자의 삶을 통해 자신의 신화를 선명하게 드러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삶이 훨씬 더 풍요롭고 모험과 경이로 가득 찼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는 '있음의 가설'을 전제로 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찾느냐?'에 집중하고자 한다.

 

- '당신이 살아내고 있는 신화는 무엇인가?' 
 

- 삶에 의문이 생길 때, 질문을 명확하게 만들어 마음에 품고 주변과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본다. 무의식에 의식적으로 튜닝을 하면 오라클 또한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답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각만 연다면 가능한 일이다. 이때 의미 있는 우연인 공시성도 빈번하게 경험하게 된다.

 

- 직업은 찾지만, 소명은 찾아온다고 한다. 소명과 개인의 신화는 직결되는 이슈임에 틀림없다. 나를 나답게 산다고 느끼게 해 주고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자부심을 주는 일에 일생 헌신을 하는 경우이다. '내면의 노래'에 귀 기울이는 삶은 소명으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 소명은 다가온다고 했던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이분의 꿈을 보면 어떤 일이든 전심전력 매진할 때 그 일이 바로 자신의 소명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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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가 꿈 공부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95년 미국 유학을 가서야 비로소 진지하게 꿈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꿈 수업시간에 '학교에서 이런 것도 배우는구나. 참 희한한 나라다'라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흥미진진한 수업을 들으며 어느새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지금까지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까지 속고 산 게 아닌가 하는 마음도 일었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이 늘 가까이 있었는데, 황금을 발에 차이는 돌부리인 줄 알고 살아온 격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 이 화가는 2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자신의 꿈 이미지를 스케치했다. 이중 70여 점을 그림으로 완성했고, 이를 모아 꿈 이야기 책을 출간했다. 이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무의식의 방향성, 즉 꿈이 지니는 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사람은 어린 시절 겪은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망각한 채 50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꿈을 통해 그 기억을 살려내고 사건에 연루된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다루면서 서서히 상처를 치유해갔다. 그뿐 아니라 상처와 함께 갇히고 막힌 자신의 힘과 건강을 되찾았다.

 

- 또 다른 주요한 층위는 '성'에 관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삶의 가장 주요한 동인을 성 에너지로 본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오해도 흔하다. 노골적인 섹스 장면이 등장하는 꿈이 그러한데, 흔히들 이를 성적이라 착각하지만 꿈은 상징과 은유로 표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섹스 장면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꿈보다는 절구나 디딜방아로 쿵쿵 빻는 장면이 더욱 적나라하게 성 에너지를 드러낸다. 둥근 구멍 속에 기다란 막대기가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노골적일 수 있을까?

 

- 또 다른 층위로 삶의 의미의 발견, 즉 자기실현의 욕구가 등장한다. 야한 섹스 꿈은 오히려 이 층위와 훨씬 가깝다. 내 밖에 있는 존재나 에너지를 내 안으로 통합하여 하나가 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렇다. 신과 우주와 하나 됨을 갈구하는 선승이나 수도자들의 꿈에 노골적이고 짙은 섹스 꿈이 등장할 확률이 높다.

 

- 인간에게는 절대로 한 면만 있는 게 아니다. 순한 양의 얼굴을 한 사람의 마음에 악랄한 폭군이나 나치 장교가 깃들 수 있다. 꿈은 우리 안의 부인할 수 없는 양면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삶이 편향되지 않도록, 또 통합된 인간으로 온전히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 그런 의미에서 모든 부모는 꿈에 자식을 죽여야 하고 모든 자녀는 꿈에 부모를 죽여야 한다. 이 아이가 이루어낸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가? 부모 같은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몸은 어른이나 심리학적 실체는 아이인 어정쩡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이 아이처럼 해야 한다. 성장하는 자녀의 꿈을 유심히 지켜보면 아이가 투사하는 내용이 금방 드러난다. 그리고 키가 자라듯 투사 내용이 진화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아이들의 투사는 성장의 이정표이다.

 

-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긴 역사적, 정치적 사건들을 단순화하려는 의도는 없다. 하지만 암흑의 역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여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 안에 한 치도 없는 내용이라면, 아무리 집단 광기가 회오리를 일으켜도 동참할 수 없다. 사회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귀결시켜 책임을 개인에 전가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럼에도 시작은 한 사람부터라는 것도 사실이다. 집단의 광기에 에너지를 보태지 않으려면 결국 나부터 그러한 각성이 비롯되어야만 한다.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집단의식을 만든다.

 

- 그러나 긍정적 투사의 폐해도 부정적인 투사의 폐해만큼 크다. 혐한 투사처럼 직접 돌을 던지지는 않더라도, 긍정적 투사가 일어나는 자리에는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한다. 그리고 자신은 뛰어난 사람 뒤에 숨어 지낸다. 자신의 우수함을 타인에게 양도하는데, 자기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줘놓고 어느 시점이 되면 상대가 한 성취는 전부 자기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면 숭배하던 상대가 공격의 대상으로 바뀐다. 이는 당사자 개인의 비극일 뿐 아니라 세상도 빼어난 인재 하나를 잃는 결과를 낳는다. 

 

- 대다수가 '사랑에 빠지는 데' 천착하면서 사랑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강렬한 느낌을 즐기는 단계라면 이는 무드의 놀음이다. 누군가를 만나 내면의 불꽃을 살려내고 삶에 색채를 더하고 싶은 바람은 인간의 강렬한 본능 중 하나지만, 달콤함과 황홀함을 추구하면서 갈등과 혼란, 다툼 같은 복잡한 상황은 배제하고 싶다면 이는 투사 드라마이지 사랑이 아니다. 눈에 콩깍지 쓰인 투사에서 벗어날 때 느낌도 사라진다면 이 또한 사랑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 여우 신랑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토록 오래 내면세계를 방치한 자신이 문제였음을 기억할 일이다. 여우 신랑이든 괴물이든 이들은 언제나 다른 형태로 변형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른다. 이들의 본모습은 기사이고 왕자일 수도 있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영혼의 호소를 따를 때 '아니무스'는 여성을 위한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기나긴 삶의 여정에 언제나 한두 걸음 앞에서 등불을 환히 밝혀 더 심오한 자신을 만나도록 이끌어주는 소중한 안내자이다. 가장 긴밀해야 할 '내면의 파트너'이다.

      

- 흔히 그림자를 만난다고도 하고 수용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 만남을 넘어 언약과 헌신을 요하는 천생배필의 연을 맺어야 한다. 그런 차원의 결속만이 그림자 속 황금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진귀한 보화는 자신뿐 아니라 세상을 창조적으로 변모시킨다.

 

- 전형적인 통과의례 이야기다. 성인이 되려면 홀로 내면이라는 고독한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 만나는 존재가 괴물인데, 이 괴물이 심리학 용어로 '그림자' 다. 그림자에게서 도망치면 엄청난 파괴가 뒤따른다. 또 순진한 나머지 그림자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괴물에게 잡아 먹힌다. 괴물을 만나면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불을 지펴 잘 관찰해야 한다. 두렵고 위협적이지만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괴물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 그렇긴 하지만 고도로 지적인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도 있다. 빨리 파악하고 정리한 의식으로 감정도, 감각도 통제하려 든다. 이런 습관에 젖은 사람이 그림자 작업에 임하면 '무슨 뜻인지 알아.' '내 그림자를 찾아내고 거기 이름을 붙일 수 있어.' '이제 파악했어.' 이런 태도면 그림자에 대한 아이디어나 통찰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기저로부터, 영혼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림자 속 황금은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 학생들의 배경도 다양했는데 공통점이 있었다. 매튜 신부님의 천재성, 예언가적 통찰이나 혁명적 아이디어, 예술과 신과학에 대한 존중, 세계의 다양한 영성을 수용하는 열린 마음에 매료되어 입학을 했다는 점이다. ... 만일 매튜 신부의 천재성에 매료되어 10년, 20년 동안 신부님의 도제나 추종자로 살아간다고 상상해보자. 이 사람은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이다. 감당해야 할 책임은 신부님이 지고 자기는 그 뒤에서 신부님을 도우니 자신도 충분히 창조적으로 살아간다며 착각할 수 있다. 물론 큰 스승을 보조하는 일이 가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스승에게 투사한 내용을 철회하지 않고 옆에 있는 데만 에너지를 쏟는다면 10년, 20년이 지나도 이 사람은 언제나 학생으로 머문다. 이는 자신이 지닌 천재성을 사보타주하는 길이다. 

 

- 실제로 선생이나 지도자 입장에서 밝은 투사를 이용하고 싶은 유혹에 놓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무척 위험한 일이다. '이 사람은 나의 치유자고, 내 영혼의 뮤즈야!' 이런 투사를 받고 있는 동안에는 무슨 말을 해도 다 먹힌다. 하지만 투사를 깨뜨리는 순간 청중은 술렁인다. 마구 날아드는 쓰레기도 감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진짜 스승이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때로, 우리 모두 이상적인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존경하는 스승들도 그림자가 있으니 오히려 다행스럽다. 만일 충분히 사랑해주고 적절히 뒷바라지하며 늘 존경하는 모습을 보여 실망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부모의 자녀나 제자라면, 성장이나 독립이라는 면에서 오히려 형벌일 수 있다. 부모의 힘을 넘어 개성화라는 힘든 여정을 거쳐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니까. 또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를 능가할 수 없다면 그 그림자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서 성공한 부모의 자녀가 힘겨운 것이다.

 

- 자아와 이상에 갇힌 시야를 극복할 방법에 대해 스웨덴 친구가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친구는 세상 모든 아이들이 어릴 때 승마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한다(스웨덴은 한국 사람이 태권도나 줄넘기를 하듯 승마가 일반화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자). 그 이유가 흥미롭다. 말을 타보면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가장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계발이나 자아 강화 심리학은 기수가 허리를 곧추 세우고 다리에 적절히 힘을 안배하면 말은 아무 문제없이 기수의 의도대로 따른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말은 자동차 경적 소리에 놀라 날뛰기도 하고 길에 놓인 장애물 때문에 기수를 내동댕이치기도 한다.  

 

- 가설이든 판타지든 이런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이미지가 있다. 새 생명이 태어날 때 이 생명은 고유한 신화적 힘과 함께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를 '운명'이나 '다이몬'이라거나 '내면의 노래', '개인의 신화'라고도 한다. 이 힘은 성장하는 동안 찰나적으로 그 자취를 드러내지만 통과의례를 거치는 순간 온전한 청사진이 드러난다.

 

- 로버트 존슨이 강조한 대로 자아는 정보를 모으고 세부사항을 다루는데 필요한 기능을 할 뿐이다. 결정은 자기의 소리를 들어 그 소리에 따르는 것이다. 삶의 주요한 결정의 순간, 내면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흐름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야말로 내 삶을 더 건강하고 지혜롭게 기획할 수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 내가 잘한 일은 재밌는 걸 만났을 때 뒤돌아보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뛰어든 것이다. 이 천진한 자세는 충분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지만 두려움이나 주저함으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해 주었다. 조지프 캠벨이 강조해온 삶의 모토, '지복을 따르라! Follow Your Bliss'를 실천하고 있다. 내 내면의 소리를 따라 사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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