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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정] 더 좋은 곳으로 가자 - 능력에 요령을 더하면 멋지게 갈 수 있다

일루젼 2021. 11. 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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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문정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1.03.10  


 

읽는 동안 아픈 문장이 너무 많아 쉬어가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행복한 가정들은 모두 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다.'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불행은 모두 제각각이라 그 크기와 성격을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경험해보지 않은 고통은 상상일 뿐이라, 누구나 자신의 경험이 가장 괴롭고 아플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왜 모른다는 이유로 디메리트를 받아야 하는지 분노했었다. 출발선상이 다르니까 어쩔 수 없는 게 아닌지, 태어나자마자 보육시설에 가둬놓고 키우지 않는 한 '똑같이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비교'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절망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서울이나 경기권과 지방의 학습 환경은 상당한 격차가 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서울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스펙이라는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몰라서 답답하고 억울하고 두려웠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당시엔 남들은 다 아는 것 같은데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 불안하고 조바심이 났다. 사실 대학 시절 대부분의 동기들은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태어난 친구들이었기에 무슨 동이라고만 해도 거기서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보통', '평범'이라는 감각의 차이와 나만 읽지 못하는 분위기에 예민해져 있었다. 이제는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보통'이라는 선을 중심으로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고, 누군가는 지금의 나를 보면 실망하며 비웃을 테고 또 누군가는 나쁘지 않게 산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마음이 편한 사람들끼리 모이기 마련이라,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고만고만해진다. 

 

예전에는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정말 짠하고,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많이 겪은 것 같아 한없이 애틋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왔을텐데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려놓질 못했었다. 어쩌다 이야기한 과거 이야기에 누군가 깜짝 놀라면 부끄러웠고, 별 일 아닌 듯이 흘려 넘기면 분했다. 스스로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를 몰랐으니 지금 생각하면 지인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언젠가부터는 적당히 재미날 법한 에피소드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정말 아픈 이야기도 할 수는 있지만 적당히 감춰두게 되었는데- 나에게 나는 여전히 예전의 나인데, 이제 타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제는 조금은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으면 좋겠다.

 

'사람은 왜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때에 그에 걸맞는 나이로 존재할 수 없을까.'

<은하영웅전설>에서 내게 가장 큰 위로를 준 문장이었다. 이제는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만, 내려놓기까지 개인적으로 참 많이 힘들었었다. 

 

<더 좋은 곳으로 가자>는 지금이 아닌 어떤 순간의 나와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든 책이었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내게 해주는 말 같기도 하고,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게 해주는 말 같기도 했다. '이 책은 당신이 초행길에서 덜 헤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는 저자의 말처럼, 안타까움과 애정이 담긴 '다정하고도 고독한' 문장들이 가슴을 때렸다. 조금은 얼굴이 붉어질만한 조언까지도 담담하게, 남 몰래 살짝 빨개진 눈으로 아껴 읽을 수 있는 책.  

 

내게는 참 좋은 책이었다.  


   

- 열심히 하는데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사람에게 항상 마음이 쓰인다.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이를 보면 지나치기 어렵다. 너무 오래 둘러가는 사람. 

 

- 그런 사람들을 자꾸만 마음에 품게 되고 말을 걸고 싶어지는 이유는 결국 그들에게서 과거의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 이유 없이 싫은 것에는 상처가 묻어 있다. 

 

- 막연한 짐작이 아닌 나의 실감으로 판단하는 경험이 쌓여갈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나라는 사람을 잘 다루는 법도 알아간다. 경험해보지도 않고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고 단정하지 않기, 의견과 편견을 구분하기,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악한 짓만 아니라면 비난하지 않고 다만 궁금히 여기기. 이런 노력을 통해 제대로 좋아하고 분명하게 싫어하고 싶다. 깊어지고 넓어지며 자주 감탄하기 위해서. 

 

- 그렇게 뜨거웠던 것이 시시해질 때 우리는 성장해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다. 그러니 누군가의 팬이었던 역사는 저마다의 세계에 대한 투쟁기이자 성장담이기도 하다. 그러니 정작 덕후에게 중요한 질문은 '왜 입덕하였나'가 아니라 '왜 탈덕하였나'가 된다. 간절했던 마음이 끝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자신을 이해하고 과거의 나와 화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삶을 견디기 위해서 무엇이 절실했던 걸까?'

 

- 물려받은 재산없이 일가를 이룬 자수성가형 인간을 영어로는 '셀프 메이드 맨/우먼' (self-made man/woman)이라 부른다. 나를 만드는 건 셀프, 나는 이 표현을 아주 좋아한다. 부모의 정보력과 인맥, 매너가 대물림되는 세상이지만 그걸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울고만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압도될 필요도 없지만 그런 것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애써 무시해버리지도 말자. 내게 주어지지 않은 걸 아예 필요치 않은 것처럼 대하는 식의 대응이 반복되면 시니컬한 자세가 인생을 사는 전반적인 태도가 된다. 그저 담담하게 찾아서 내 근처로 길어오면 된다. 주변에 책 같은 사람이 없다면 책을 통해서라도 시간이 더 걸릴지라도 견문을 넓혀 그것들을 내 정서적 서재에 꽂아두면 된다고, 아직까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 이런 순간은 또 있다. 천재가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일을 책임감 있게 해 나가는 수재를 볼 때다. 불안과 부정적인 예감에 사로잡혀 투덜거리면서도 꾸역꾸역 당장 할 일은 하는 사람은 멋지다. 진짜로 대단한 이들 속에서 내가 별것 아니었단 걸 깨달은 뒤에도 일단 지금 해야 하는 일부터 챙기는 모습을 보면 응원하게 된다. 

 

- 공무원시험 대비 학원의 한 강사가 합격생과 비합격생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걸 인상 깊게 봤다. "공부하다가 힘들고 우울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하는 이들 중 합격생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거다. 합격생은 '울면서 공부하고' 비합격생은 '그냥 운다'고. 그냥 운다... 나에게도 울기만 하던 밤이 있었지. 나카지마 아츠시의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에는 재능을 의심해 본 이가 공감할 만한 표현이 있다. 시를 잘 썼던 인물 이징이 호랑이로 변해 산속에 숨어 살다 옛 친구를 만나 한탄하는 면에서다.

"나는 시로 명성을 얻으려 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아가려고도, 친구들과 어울려 절차탁마에 힘쓰려고도 하지 않았다네. 그렇다고 속인들과 어울려 잘 지냈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네. 이 또한 나의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해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던 것이라네."

닦아봤자 결국 구슬이 아닌 걸 들킬까봐 노력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구슬일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기도 어려웠다는 고백이 마음을 찔렀다.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을 허비했다는 탄식에 공감하는 사람이 나뿐 아닐 거다. 

 

- "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어떤, 어떤 의무도 없다."

 

- 입사 전까지는 스스로를 부유하는 부레옥잠 정도로 느꼈다. 기존에 속한 곳들은 벗어나고만 싶은 곳이어서 이방인처럼 맴돌았다. 
 

- 나의 상태를 마지노선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게 관리하기, 적당히 이기적으로 나의 상태부터 챙긴 뒤에 다른 사람을 이타적으로 대할 수 있도록 해보기, 상처 받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자꾸만 모든 것에 무감해지려는 마음을 잘 다독여 생기 있게 유지하기. 회사 생활에서 습득한 나와 주변을 지키는 기술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상사의 기분을 헤아리고 눈치를 보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그중 일부라도 내 기분을 맞추는 데 쓰도록 설계하고 연습해야 한다. 눈앞의 것만 처리하다 더 중요한 것을 잃어선 안 되기에. 
 

 

더보기

-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심사위원이 공감 가는 조언을 건넬 때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걸 좀 더 저이가 일찍 알았으면 시행착오를 덜 겪었을 텐데 싶어 안타깝다. 그럴 때의 심사위원 평은 그 분야를 모르는 내가 들어도 대부분 수긍이 가는 말이다. 누가 봐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정작 본인은 처음 듣는다는 듯 화들짝 놀라는 게 우리 삶의 서러운 포인트 같다. 자기 문제를 남이 먼저 알고 본인은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는 사실. 

 

- 그 요령이라는 거 대체 뭘까? 선배들이 팔짱을 끼고 있다가 뒤늦게 말해주는 기술 중에는 동의할 수 없는 편법이나 부적절한 처세술도 많았지만 살면서 두고두고 도움이 된 말도 많았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이런 걸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단 말이지. 특히 핵심에 집중하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데 필요한 현실적인 요령이 요긴했다. 몰라서 못하는 것과 알지만 안 하는 건 다르니까 일단은 알아두려고 힘썼다. 눈치로 알아채기도 했고 책에서 찾아내기도 했고 선배들이 미리 검증을 끝내서 전승되고 있는 실천과 루틴을 적극적으로 추려서 활용했다. 
 

- 이 책은 당신이 초행길에서 덜 헤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물론 헤매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고 어떤 난관도 돌이켜보면 불필요했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 기회 자체가 한정적이고 이끌어줄 사람이 많지 않은 이들에게 고난이란 자신을 성장시키기보다 납작하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오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이 시대에 그건 극소수 생존자만 회고하며 하는 말이고 대부분은 기약 없이 고생하다 자신을 미워하고 목소리 내는 법을 잊어버린다. 미처 못 본 함정은 어디서든 튀어나오니 일단 잘 아는 부비트랩의 위치부터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 우왕좌왕하던 나를 잡아준 건 한 수업에서 교수님이 해준 말이었다. 그분은 내가 수업 때 과제로 제출했던 에세이를 가져와 사람들 앞에서 읽어주었다. 다 읽은 후 글이 참 좋다, 하더니 "네 글에는 사람 마음을 두드리는 뭔가가 있어.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렴." 하고 덧붙였다. 찰칵, 그 말은 사진처럼 찍혀서 오래 남았다. 사라질세라 그 순간을 잡아 마음에 담고 단단히 꿰매었다. 그건 한동안 부적이 되어 부정적인 말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 가난하면서 남에게 관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릴 때 나는 여유 있어 보이는 이를 자주 질투했고, 그 부러움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대강 덮었다. 취향이 없다는 걸 들킬까 봐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낭비일 뿐이라고 무시하려 애썼다. 그렇게 쌓인 '신 포도'들에 걸려 자주 넘어졌다. 

 

- 첫눈에 반해버린 생선의 살을 음미하며 새삼스레 돈을 열심히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맛을 모르고 살았던 이유는 이 음식이 비싸서인데, 비싸도 뭔가 먹고 싶을 때 참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날 이후 제주도는 내게 옥돔구이 먹으러 가는 곳이 되었는데, 이때의 충격은 미식에 대한 내 기준을 바꾸어놓았다. 그간 내가 가졌던 죄책감을 마주하는 계기도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먹는 데 돈을 많이 쓰는 건 탐욕이고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라고만 여겼었다. 어린 시절, 뭔가를 살 때는 '꼭 필요한 것과 안 사도 큰 지장 없는 것'을 구분하라고 배웠다. 방송인 유병재가 어릴 적 부모님께 무언가 사달라고 하면 "그거 안 하면 죽냐?"는 말이 돌아왔다며 그 기준에 맞춰 살 수 있는 건 쌀밖에 없지 않으냐며 항변해 난 웃프게 공감했던 적이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경험보다 물질적 소유를 중시하게 된다. 옷이나 신발, 사무용품이나 참고서같이 반드시 필요한 물품만 사는 데도 빠듯하니 당장 손에 잡히지 않는 경험에는 돈을 최대한 아끼게 된다. 경험을 가성비와 대체품을 따져 소비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미식과 여행이다. 음식을 먹거나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당장은 좋아도 남는 게 없으며, '그 돈이면 차라리 ㅇㅇ을 할 수 있다'는 계산부터 하는 게 그때 나와 내 주변의 상식이었다. 돈이 없을 땐 당연한 수순으로 식대부터 줄였다. 그때 또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입에 들어가면 결국 다 똑같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음식을 5000원이면 먹을 수 있는데 만 원에 먹는 건 바보고, 미식가도 아니면서 비싼 음식을 먹는 건 허세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런 멍청이나 허세꾼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항상 비슷한 맛, 익숙한 맛만 찾게 된다는 거였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맛은 대부분 학교 급식이 기준이었는데, 그 경험만으로 나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거나 싫어한다고 결론 내렸다. 급식실에 앉아 생선구이를 먹으며 생선을 좋아하게 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기에 오랫동안 생선구이를 싫어해왔다.  
 

- 밴스는 이를 '정보 격차'라고 표현했다. 주변에 좋은 조언을 해줄 어른이나 친구가 별로 없다면, 그래서 가질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한정적이라면, 최선을 다하지만 왠지 자꾸 어긋나는 느낌을 받는다면, 낯선 세계로 나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일단 돈을 벌면서도 더 나은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자신에게 투자해야 한다. 원하는 분야를 배우고 관련된 분야에서 이미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정보 격차를 줄여가는 것이다. 어딘가 도전하고 싶어질 때 솔직하게 상황과 상태를 털어놓을 수 있고 긍정적인 지지를 받거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원하는 인생을 사는 길에 좀 더 가까워진다. 내 경우 이십 대에 서울로 가서 곁에 두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다닌 것이 주효했으나 언젠가는 고마웠던 서울도 떠날 때가 올 것이다.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지방에서 서울로 반드시 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극 없는 삶이 괴롭다면 익숙했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보고 관계를 다양하게 넓혀보자는 게 핵심이다. 

 

- 회사를 졸업한다는 개념으로 퇴사를 바라보는 자세가 실용적이어서 관련된 그 어떤 조언보다 명쾌했다. 다음 커리어를 생각해두지 않은 채, 돈도 많이 모아두지 않은 채 회사부터 그만둬버리면 생활비가 떨어지는 시기에 맞춰 행로를 결정할수밖에 없다. 퇴사 이후를 준비하는 관점으로 바라보니 해야 할 것이 정리되었다. 어딘가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정해진 과업을 완수한 후 다른 곳에 입학할 수 있도록 내 상태와 상황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퇴사 이후에 어떻게 살아갈지 방법을 모색하고, 재정 상태를 체크해서 목표치를 세워야 한다. 

 

- 회사를 졸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여기 있는 동안 무엇을 얻어낼까 생각하는걸 잊지 않는다면, 자아는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자신의 몫을 다하는 일상에도 자아는 존재하니까.  
 

- 셋째,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지고 남의 작은 실수에도 엄격해진다. 내 일상이 만족스럽고 나의 일에 긍정적으로 집중하면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쓸 시간이 없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보게 되고 그의 일상에 감정적으로 의미 부여를 많이 하게 되는 건 반대로 내 삶에 불만족하기 때문일 수 있다. 또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이 실수를 하더라도 여유롭게 이해해줄 에너지가 없거나 자격지심이 생기는 바람에 불필요한 의미 부여를 하게 되곤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실수로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발을 밟았을 때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선 '나를 무시하나?' '일부러 그런 거 아냐?' 하는 의심이 꼬리를 물게 된다. 마지막으로,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자꾸 무언가 사고 싶을 때와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꾸역꾸역 먹고만 싶을 때는 마음이 허전해서였다. 

 

- 초기에 회사에서 보인 태도가 그 사람의 캐릭터가 되고 첫 일 년의 업무 태도가 그 사람 역량의 크기로 인식되어버린다는 걸 인식하고 있으면 적절한 가면을 골라 쓰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맡은 일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똑똑이, 진심은 통한다고 말하는 순진이들이 그와는 반대로 가면서 고행길을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조직은 당신의 진가를 천천히 파악할 시간이 없으며, 여기에서는 그럴싸해 보이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진짜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담백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능력에 요령을 더하면 빠르게 갈 수 있다. 
 

- 나는 캐셔나 손님맞이를 주로 했고, 가끔 서빙 업무를 했다. 그리고 한번은 궁금한 마음에 자원해서 설거지 업무를 해본 적 있다. 업무를 반대 순서로 해보니 신기했던 지점이 있었다. 어떤 업무를 하느냐에 따라 시각과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또 얼마나 다양한 포지션을 맡아보았느냐에 따라 상황 판단의 속도와 질이 좌우되었다. 후에 나는 이 같은 분배가 마치 회사 조직에서의 팀장-과장-대리/사원-인턴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 여러 팀을 겪고 나서 알게 된 건 사내에서도 타 팀에 대한 경계심이 크다는 거였다. 각 부서는 저마다 자신이 제일 힘들며 다른 팀은 이를 이해 못한다는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을 정도는 다르지만 내면화하고 있었다. 기획팀은 다른 팀이 비협조적이라고 느끼며 디자인팀은 배려받지 못한다 느끼고 마케팅팀은 귀찮은 건 다 자신들이 한다고 느낀다. 일 잘하는 중간관리자는 실력 있는 통역가와 비슷한 것 같다. 잘한다고 생각되는 팀장들을 관찰하거나 바깥에서 여러 분야의 임원들을 만나보면 대개 소통 능력이 출중했다. 원하는 것이 상이할 때 이를 조율하고 서로에게 익숙할 만한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고, 자기 입장에서만 주장하지 않고 다른 팀과 다른 팀원의 일과 입장을 알고 상황을 공감하며 설득했다. 

 

- 생각이 많다는 것. 회사에 다닐 때는 나의 단점이자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던 이 자질이 작가로 일할 때는 장점이 되었다. 글쓰기는 익숙한 것에 질문하는 일이고 궁금해하는 일이고 일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다. 질문하지 않는데 글을 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질문에만 몰입하지 않도록 애쓰는데, 적절한 거리 감각을 유지하려면 머리 쓰는 시간과 몸 쓰는 시간의 비율에 적절한 배분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생각하다 보면 부정적인 에너지에 휩싸이기 쉽고, 걱정이 많아지고, 자신의 실수에도 다른 사람의 실수에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어 많은 것들을 미워하게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왜라는 질문을 잊지 않되, 너무 자주 질문하면 빨리 가기는 어렵다는 사실도 알아두자. 

 

- 또다른 사실도 하나 깨달았다. 요즘 회사 안에서 질투하게 되는 사람이 없네?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않으니 괜스레 비난할 필요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으니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도 홍을 잃고 말았다. 비난의 말은 주파수가 맞아서 함께 진동하는 사람들끼리 기막히게 전해지는 법이다. 질투하게 되는 대상은 나와 수준이나 환경이 비슷해서 공통점이 있는 사람이고, 질투하게 되는 분야는 내가 관심 있고 잘하고 싶은 분야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의 핵심은 '사촌'에 있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낼 상속세만 10조를 넘는다는 소식에는 별생각이 없다가 직장 동료가 산 아파트가 5억 올랐다는 말을 듣게 되면 마음이 일그러지는 건 그래서다. 

 

- 더는 회사 내에 질투하게 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뒤 퇴사를 결심한 건 그래서였다. 사람은 잘하고 싶어하는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미 이룬 사람을 시기하면서도 그의 영향을 깊이 받고야 만다. 관심이 없다면 시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므로 내가 회사 안에서 시기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건 그 안에서 무언가 더 이루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사람은 질투의 대상을 견제하면서 그 불덩어리를 연료로 성과를 내곤 한다. 나 또한 경쟁자보다 뛰어난 평가를 받기 위해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프로젝트도 거침없이 자진했었다. 조직 내에서 질투심을 잘 다루고 싶다면, 결국 이런 마음의 회로 자체가 동일한 욕망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누군가 너무 대단하거나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본질은 '나도 하고 싶은 일을 (나와 비슷해 보이는) 저 사람이 먼저 해냈다'는 것에 속상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다. 

(리뷰자 주 : 질투는 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질투할 필요 없이 느긋하게 즐기는 장르를 하나쯤은 꼭 가지는 것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된다. 그걸 취미나 취향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잘하지는 못해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활동에 시간을 쓰면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어 잠시나마 정신적 평온함을 누릴 수 있다. 또한 타인의 성취에 함께 기뻐하는 감정도 자기긍정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므로, 질투하지 않을 만큼 다르면서 인격적으로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을 사귀는 것도 좋다. 잘하지 못하지만 잘할 생각도 없는 분야에서 성과를 쌓고 있는 사람을 보면 마음으로 축하해주기가 쉬우니까. 순수하게 누군가의 성공에 축복을 더하는 경험을 쌓을 때 자신의 인격에 마이너스 점수만 주던 일을 멈출 수 있다. 

(리뷰자 주 : 그러나 나는 여전히 순수한 축하가 가능할 것이란 이상주의를 꿈꾼다.)

 

- 우선, 질투하게 되는 상대의 기준을 자꾸 올려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좋다. 질투는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라 할 만큼 사람의 본성이므로 성인이 아니고서야 없앨 수 없고, 다만 그 기준선을 올리는 게 중요하다. 성장하고 싶다면 아무런 자극이 없는 것보다는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 나보다 어떤 면에서든 뛰어난 부분이 있으면서도, 내가 질투를 해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차이가 '넘사벽'은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신경 쓰는 사람들보다 나를 신경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는 순간도 온다. 이는 한편으로 견제받을 정도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니 나쁘게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 시기에는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질투를 받는 역할로 계속 머물지,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있거나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또 다른 질투를 하면서 따라잡아볼지.  

(리뷰자 주 : 어떤 면에서는 '용의 꼬리가 될 것인가 뱀의 머리가 될 것인가' 와도 닿아있는 말이다. '배울 점이 없는 곳은 떠나라'라거나, '내가 최상위인 모임은 재고하라'라는 말과도 이어진다. 사람 사이에서 계산하라는 말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곳인지 그대로 안주해서 도태되는 곳인지 잘 살피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마음 편한 곳, 내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곳이 나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가 되도록 놓아두지는 않는 게 좋겠다는 것 정도.)  

 

-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다는 말에 수긍하면서도 나만의 그림자는 유독 고독하고 길게 드리워 있다 여겼는데 딱히 그렇지 않다는 자기객관화도 됐다. "너의 고통은 특별하지 않다."라고 누군가 말했다면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 테지만 스스로 깨닫는 과정에서는 수긍이 되었다. 

 

- 겉돌지 않는 대화가 특히나 그리워지는 요즘, 다정하고도 고독한 말들을 읽어가며 외로운 날들 속에서도 힘이 되어줄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보면 좋겠다. 

 

- 이때의 협상 경험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십 대 초반의 나였다면 처음 보험사 직원을 만났을 때 2000만 원이라는 금액을 듣고 바로 합의를 했을 것 같다. 아니, 분명히 했다. 더 알아볼 것도 없이, 지금이 아니면 이 돈마저 놓칠 거라 생각했겠지. 후유증이 나타날지 확실치 않을뿐더러 나타나더라도 나중 일이지만 돈을 받는 건 당장의 일이니까. 왜 이십 대 초반에는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고 지금은 그때와 달라진 걸까. 그동안 내가 갑자기 똑똑해졌나? 신중해졌나?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결국 이 선택을 가른 건 '예비비'의 유무였다. 당시 나는 직장 생활을 오 년 넘게 한 상태여서 당장 월급이 들어오지 않아도 이 년 이상 버틸 수 있는 돈이 있었다. 그랬기에 교통사고가 나고 휴직을 한 상태에서도 급할 게 없다고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거다. 살다 보면 어떤 난관에 부딪히게 되고 그럴 때는 누구든 패닉에 빠져 시야가 좁아진다. 이때 필요한 도구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와 정보력(전문가나 주변인의 도움)인데, 이것은 일단 당장의 생활비 걱정이 없어야 가능하다. 여유가 없어 다급해진, 절박함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그 어떤 이와의 파워게임에서도 진다. 이 사실을 깨닫자 전에 가졌던 의문이 풀렸다. 

 

- 나쁘지 않은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는 연습.
 어릴 때는 나쁘지 않은 걸 택하는 데 익숙했다. 다시 말하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다 좋아요" 또는 "전 괜찮아요" 같은 말을 자주 하며 살아왔다는 뜻이다. 선택지가 별로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 어차피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내면화하게 되기에 무기력해지기 쉽다. 고만고만하게 다 별로인 선택지들을 보다가 이내 심드렁해지고 마는 마음. 좋아하는 것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잘 몰랐다. 

 

- 성장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이 어른이 된 후에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는 것. 프로이트는 이것을 '반복 강박 epeltion compulsion'이라고 표현했다. 행복은 모르니까 두렵지만 불행은 내가 잘 알기에 익숙하다고 여긴다. 불행이 습관이 되면 오래 입은 잠옷처럼 편안해진다. 불행한 사람들은 행복 앞에서도 좋은 건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다가 가장 익숙한 불행을 꺼내 입는다.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사람이 부모 같은 삶을 살아가고, 상사처럼 일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뒷모습마저 그 사람을 닮아버리는 건 그래서다. 

 

- 시바타 쇼의 소설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이 몇 종류인가 있을 거야, 분명.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자기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는 거지. 정말로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면, 그건 너무 잘 맞아서 쉬이 익숙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행복과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 그때마다 "너무 평범해서 안 돼요." 하는 대답이 자주 나오는데 "저도 진짜 평범한데요." 하면 독자들은 웃고 말아 버린다. 진짠데... 어릴 때부터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책을 하루에 한 권씩 읽는 것뿐이었다. 요즘이라면 다독하는 어린이를 특별히 여길 것 같은데, 내가 어릴 때는 '국민 취미'가 독서와 음악 감상이었다. 아무리 빠듯한 살림이어도 집마다 전집 하나쯤은 있었고 책이든 앨범이든 인기를 끌면 밀리언셀러가 되곤 했다. 그런 분위기였으니 취미가 독서라고 하는 건 지금으로 치면 "제 취미는 유튜브 열심히 보는 거예요." 하는 느낌? 평범한 애가 취미까지 평범한 게 창피했다. 

 

- 무언가에 꽂혀서 오래 시간을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취향이 쌓이는 속도에는 정체기가 없어서 한 분야에 안목이 높아지기는 쉽다. 그러나 실력은 흡수한 안목에 비례해 늘지 않는다. 눈으로 읽고 만족하고 인정하는 작품의 수준은 점차 높아지는데 직접 손으로 쓰는 건 그에 비하면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안목은 헤비하지만 실력은 라이트한 상태의 간극을 견디려면 자기가 만든 걸 참고 봐줄 비위가 있어야 한다. 그런 소수만이 남아 창작자가 되지만, 마니아의 세계에서 방향을 틀어본 이들 중 대부분은 대체로 둘 중 하나의 행로를 택한다. 아예 그쪽 다리를 폭파해버리고 전혀 다른 코스를 밟는 사람, 또는 근처에서 비슷한 일이라도 하며 얼씬거리는 사람. 
 

- 사람들이 돈을 쓰는 데는 반드시 시대적 징후가 숨어 있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고 시시해 보여도 깊이 들어가보면 인기 있는 건 이유가 있었다. 읽고 싶은 책 다섯 권을 고르면 베스트셀러 다섯 권도 함께 샀다. 요즘 인기라는 소문이 들리면 내 관심사와 멀더라도 최대한 직접 경험해보았다. 트렌드를 분석하고 대중적 감각을 꾸준히 유지하는 일이 좋았던 건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흔치 않아서였다. 나는 그간 평범한 게 콤플렉스였는데, 신기하게도 이 업계에선 평범함을 공부하는 사람이 소수였다. 경력이 쌓일수록 자기 분야와 취향을 더 날카롭게 다듬고 싶어 하지 평균의 감각을 기르고자 애쓰지는 않으니까. 

 

- 남들이 날 보고 어떤 사람일 거라 판단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꽤 자존감이 높아 보이나보다.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워 보인다거나 당당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랑을 많이 받고자란 티가 난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식의 질문이나 추측을 들을 때면 대답 대신 형광펜으로 줄을 쳐 선물하고 싶은 책이 있다. 너무 자주 읽었기에 거의 외워둔 문장을 낭독해주고 싶다. 마치 신이 잠깐 다녀간 듯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에피파니 epiphany라고 하는데,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 돌아보면 그중 하나로 아래의 문단을 만난 하루가 떠오른다. 어떤 화두에 집중하다 보면 비슷한 시기에 읽게 된 책이나 영화, 만나는 사람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을 번뜩 얻을 때가 있다. 자존감에 관한 고민을 한참 하던 이십 대에 한 소설을 읽다가 그에 대한 대답을 받아 들고는 출력해서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었다. 2010년에 출간된 윤성희의 장편소설 <구경꾼들>에 나오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 남편이 임시의 삶 속에서 컴퓨터라는 애정의 대상을 찾고, 주류가 된 적 없지만 중재자의 캐릭터로 자신을 조립해 자존감을 세워갔듯 고난 끝에 고난만 오는 게 아니고 축복 끝에 축복만 예정된 게 아니다. 나는 가난하고 외롭게 자랐지만 그 덕에 작고 소외된 존재를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로써 가지게 된 독서라는 취향과 글쓰기라는 취미가 내 자존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해왔다. 

 

- 자존감은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이나 피해의식 같은 불순물을 없애고 순도 높게 벼려낸 보석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성정을 발효시켜 오래 기다려 구워낸 빵에 더 비슷할 것이다. 정말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고통에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뛰어넘었고 더 이상 그 흉터에 집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승리자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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