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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하라 아쓰시, 호리코시 고이치] 중세 유럽의 생활

일루젼 2021. 11. 1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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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가와하라 아쓰시 / 호리코시 고이치 / 남지연

원제 : 圖說中世ヨ-ロッパの暮らし  

출판 :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출간 : 2017.12.15


 

중세의 일상사에 관한 내용이 궁금해져서 찾아 읽었다.

 

서민들의 삶은 아무래도 사료로 남아있는 것이 극도로 적어 추정을 통한 서술 위주였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었다. 하늘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식재료의 귀천을 나누었다는 부분이 신선했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뉘는데, 그 중 농촌의 생활과 도시의 생활이 대비되며 크게 두 축을 이룬다. 마지막 중세인들의 일상은 가볍게 훑는 쪽에 가깝다. 농촌의 농작 현황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초반부에는 숫자와 정보의 나열이 많아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극초반부만 잘 넘기면 화려한 도록을 보는 재미로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그림 자료들에 대한 설명이 조금 더 상세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가옥과 건축, 식생활과 노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중세의 일상사를 재조명하려 노력한 부분이 보이지만 인용된 문구들이나 참고 문헌들이 주로 프랑스 쪽인 듯 해 뻗어 나가기는 조금 어려울 듯 하다. 가볍게 읽어보기에 괜찮은 책이라 생각한다. 

  


 

A Goldsmith’s Shop. From The Lapidary of Jean de Mandeville. c.1300-1400. 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 Paris. ("보석 상점", 의학의 책 중에서)

 

 

pesta paling gila pada zaman kuno ("불타는 무도회")

 

 

- 중세 유럽에서는 먹을거리에도 귀천의 서열이 정해져 있었는데, 하늘에서 제일 먼 땅속에서 재배된 순무나 양파 등이 가장 하급의 천한 음식으로, 그것은 성직자나 귀족이 아니라 농민이 먹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도 비슷한 사례이다. 1358년 북프랑스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인 자크리의 난 Jacquerie의 명칭은 당시 농민 일반이 귀족에게 '어수룩한 자크 Jacques Bonhomme'라는 멸칭으로 조소당하고 있던 데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농민 반란에서 농민들이 기사 계급에게 행한 잔학 행위는 프루아사르 Jean Froissart의 <연대기 Chroniques> 등에서 크게 강조되며 비난받았다. 

 

- 물론 귀족층뿐만 아니라 중세의 농민 사회에서도 명예의 관념이 정착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 점은 최근까지 남프랑스, 특히 코르시카 섬의 농민 사회에서 명예가 무엇보다 존중되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14세기 말에 국왕 정부가 발행한 사면장을 보면, 평민에게 주어진 경우의 안건 중 80% 가까이가 명예를 훼손당하여 복수한 것에 대한 사면이었다. 이렇게 보면 명예 관념의 유무를 귀족과 평민의 경계로 삼는 것이 중세의 허구였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 파리에서는 14세기 이래 제빵사가 국왕 관리인 '빵 관리관' 그랑 판티에의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빵 관리관'은 빵 굽는 작업, 굽는 날짜, 빵의 품질 전부를 관리했다. 제빵사는 빵 이외의 제품을 구울 수 없었다. 파리에서는 제빵사 외에 제과사(파티시에) 등이 다양한 구운 과자나 파테(Pate, 간이나 고기를 갈아 밀가루 반죽을 입힌 뒤 구운 요리-역자 주)를 만들었다. 

 

- 중세 사회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사목 아래 놓여 있어, 농촌에서도 도시에서도 소교구를 단위로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사람들은 교구 교회에서 사제에게 세례와 결혼 성사를 받고, 또한 가족이 죽었을 때는 병자성사를 받아 고인을 천국으로 배웅했다. 장례는 교구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사자는 교회 부속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와 같이 중세 유럽 사람들의 일생에서 가톨릭 교회가 담당한 역할은 컸으나, 그리스도교만이 사람들의 마음에 안녕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농민들에게 숲의 성령과 대지의 지모신은 일상생활의 병이나 상처를 치유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대상으로서, 이교로 간주되던 다신교적 신앙은 중세 유럽 세계에 깊이 침투해 있었기 때문이다.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12~13세기 이후 유포된 멜뤼진 Mélusine 설화나 알자스 지방에서 알려진 성스러운 개 Saint Guinefort의 전승처럼 반인반수의 초자연적 존재나 동물의 화신이 토지 개간과 자손 번창, 순산과 아이의 병 치유 등에 대한 사람들의 소망에 응답하는 존재로서 숭경 받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계속 머무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카니발 등의 축제에 거인이나 야인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성속의 질서가 전도되고, 이를 통해 비일상과 일상이 교대함으로써 공동체가 활성화된다는 의례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의 종교적 의식 범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Fran&amp;ccedil;ois Nodot, Histoire de Melusine (Paris, 1698), 구글

 

 

- 중세 중기 이후 도시는 전쟁과 민중 반란 등 정치, 사회적 불화로 인한 인위적이고 폭력적인 소란에 위협받는 한편 기아와 역병, 화재와 같은 재해에도 여러 차례 노출된다. 14세기가 되면 유럽은 소빙하기라 불리는 기후 한랭화를 맞아 흉작, 기근으로 농촌이 황폐해지고, 그 탓에 토지와 가축을 방치한 농민들이 근교 도시로 유입되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기근은 14~15세기 내내 간혈적으로 발생하여, 평균 수명이 50세가 되지 못했다던 중세 사람들 평생에 5~6년마다 한 번씩은 기근이 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도시에서는 곡물(빵)과 육류 등 식료품 가격이 급등하고, 또한 영양상태가 악화된 사람들을 전염병인 티푸스와 맥각 중독이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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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세기 이후의 대개간운동이라 불리는 움직임 속에서는 우선 서유럽의 기존 농촌과 인접한 공간이 농지화 되었고, 더불어 그때까지 사람이 살지 않던 숲과 늪지, 하구와 해안의 얕은 여울이 새롭게 개척되었다.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후자 타입 개간의 경우 본래 숲 등을 소유한 영주가 주도하는 조직적 개간사업이 많았는데, 그 전형이 독일 동방 식민 운동 Ostsiedlung이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이슬람교 세력의 지배 지역에 대한 재정복 운동인 레콩키스타 Reconquista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사와 동시에 농촌부를 개척하고 그곳에 정주할 농민이 요구되었다. 때문에 많은 프랑스 농민이 이베리아 반도에 정주하면서, 역으로 프랑스 서남부 개발이 좀처럼 진전되지 않을 정도였다. 

 

- 삼포제가 시행되자 밭 안에 농가가 산재해 있어서는 효율이 떨어졌기 때문에, 농가는 마을 중심가와 교회가 있는 광장 주변으로 모여들게 된다. 이렇게 집촌이 형성되고 촌락 전체의 농작업이 공동으로 이루어지게 되면서 농작업에 관한 촌민의 개인적 자유가 제한된 반면, 촌락 공동체로서의 통합은 확고해졌다. 동시에 촌락은 봉건 영주의 지배하에 놓이면서도 그것과 교섭하는 힘도 지니게 된다. 한 마을을 단일 영주가 지배하는 경우는 적고, 마을 하나당 보통 영주가 여럿이었다는 점도 농민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렇게 촌락 공동체로서의 마을이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했다. 

 

- 삼포제에서는 가을에 파종하는 밀과 호밀밭, 봄에 파종하는 보리밭 외에 휴한지를 마련하여 가축의 공동 방목지로서 마을 전체의 가축을 사육했다. 비료가 적은 당시에 가축이 남기는 배설물은 지력 회복을 위한 귀중한 자원이었다. 이 같은 형태로 곡물 재배와 목축의 양립이 실현된 것은 고대에는 찾아볼 수 없던 중세 유럽 농업의 특징이다. 

 

- 국왕이 귀족 서임장을 발급하여 귀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프랑스의 경우 필리프 4세 (Philippe IV, 재위 1285-1314) 치세 초기의 일로, 그 이전까지 국가가 인정하는 귀족 신분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귀족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지표를 주장했다.대표적인 것은 말을 타고 창과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기사야말로 귀족이라는 논리로서, 이전까지는 전사 계급 젊은이의 성인식 같은 행사에 불과했던 기사 서임식을 그 통과 의례로 삼았다. 여기에는 활용도가 높았던 기사의 무력을 종교로 통제하려는 교회의 의향도 더해져 기사 서임식은 교회에서 치러지는 종교적 의식이 되어갔다. 그리고 기사 서임식을 받는 가문이 세습화 되어감에 따라 귀족 계층은 폐쇄적인 하나의 사회 신분이 된 것이다. 거기다 귀족은 다양한 기회를 통해 농민으로 대표되는 평민층이 천하고 추하며 멸시당할 만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명예가 결여된 존재라고 농민을 부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명예의 관념을 자신들이 독점하여 귀족으로서의 고귀함을 연출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중세 유럽에서는 영주 재판권을 바탕으로 봉건 영주가 주민의 생활에 필요한 시설을 설치, 유지하는 동시에 그 이용을 주변 주민에게 강제하고 사용료를 징수하는 영주 지배의 관행이 정착해 있었다. 프랑스어로 바날리테라 불리는 그러한 사용 강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제분 수차, 빵 굽는 화덕과 와인용 포도 압착기이다. 모직물을 마감할 때 짜낸 모직물을 적셔 두드리는 축융 공정용 수차나, 맥주 같은 맥아 양조주 제조가 활발하던 지역에서는 그를 위한 전용 시설이 사용 강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그러는 한편 일본의 다구와 비슷한 모양의 자가용 맷돌의 사용을 영주가 금지했기 때문에, 직접 제분하여 제분 값을 절약하려는 사람들에게 수차의 바날리테는 원망의 대상이었다. 이 바날리테를 영주에 의한 경제적 강제라는 측면에서 볼 것인가, 농민 개개인으로는 건설도 유지도 불가능한 대형 시설의 보급 계기로 받아들일 것 인가에 관해서는 다양한 논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그것보다도 중세 유럽의 농촌에서는 빵을 만들기 위한 제분과 빵 굽기, 와인이나 맥주 생산이 봉건 영주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 중세 유럽의 도시는 대부분의 경우 도시 공간을 에워싼 석조 벽에 의해, 주변 농촌 영역으로부터 구별되는 고유의 영역을 형성했다. 물론 모든 도시가 시벽을 건설한 것은 아니며, 또한 위벽을 가진 촌락도 존재했다. 그러나 시벽이 '중세 도시의 가장 중요한 물리적, 상징적 요소였다.'(J. 르고프)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시벽을 통해 도시는 가시적인 경계를 만들어내고, 도시 공간이 가지는 성스러운 상징적 힘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에워싸는' 행위는 도시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간 구분에 있어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12세기 후반에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한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밀라노 시벽을 파괴한 것이나, 15세기 후반에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아들인 용담공 샤를이 디낭시 벽을 파괴한 것은 군주 권력에 의한 도시 지배를 구현화하는 상징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 14세기 중반의 프랑스 왕 장 2세(재위 1350-1364)의 왕명으로, 파리의 도로 관리 조항으로서 파리 시벽 내부에서는 어떠한 돼지도 소유 및 사육해서는 안 된다는 금령이 발표된다. 또한 애완용 동물, 특히 개 역시 공중위생상 유해한 존재로서 때로 혹독한 조치(도살)가 도시 당국에 의해 시행되기도 했다. 14세기 이후 많은 도시에서 가로의 배설물 증가와 악취, 도로와 하수의 쓰레기 문제에 관한 법령이 발표되어, 도시 당국에 의한 공중위생 문제 자각과 도로 관리를 위한 포장도로세 도입 등의 조치가 취해져 갔다. 그러나 15세기에도 도시의 도로가 늘 비좁음, 불편함, 비위생으로 인한 결함을 가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15세기 대부분의 도시의 공공사업비 가운데 가로 포장, 청소, 공중화장실 설치 등의 사업비 비율은 시벽 수선(방위 시설)비가 50%인데 반하여 그 1할인 5%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일들이 근대의 여명에 완수해야 할 안건으로 남겨졌던' (J. P. 르귀에 Jean Pierre Leguay 저, <중세의 가도 La Rue au Moyen Age>) 것은 분명하다. 

 

- 수공업자는 장인, 직인, 도제로 이루어졌다. 동업조합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것은 당초 장인뿐이었다. 장인은 동업조합의 규약 및 신규 장인의 가입 승인, 조합장과 간부 선출권을 가지며, 또한 각 작업장에서는 도제를 고용하여 기술을 지도했다. 도제는 계약에 의해 장인에게 고용되어 의식주를 제공받았다. 도제 수업 기간은 직종마다 달랐다. 13세기 파리의 <동업조합의 서>에 따르면 도제 기간은 3년에서 5년이 일반적이었으나, 6년 이상인 직종도 있었다. 도제는 도제 기간을 마치면 직인으로 일했는데, 석공처럼 일터가 끊임없이 바뀌는 직종에서는 도시에서 도시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여성도 동업조합 안에서 섬유, 복식 관계 직종을 중심으로 장인이 될 수 있었다. 파리나 쾰른에서는 금모자공, 견직물공과 금사공 등의 길드는 여성만으로 구성되었으나, 여성이 장인이 될 수 있는 직종은 대부분의 도시에서 한정되어 있었다. 장인의 부인은 장인 사후 남편의 장인권과 도제를 계승하여 영업을 계속할 수 있던 모양이지만, 장인권이 유지되는 것은 그녀가 과부인 채 있거나 같은 직종 사람과 재혼할 경우로 한정되며, 재혼 상대가 타 직종일 때는 영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한편 직인, 도제 입장에서는 죽은 장인의 부인과 결혼함으로써 장인권 취득이 가능했다. 장인권 취득 기회가 점점 줄어 세습 말고는 힘들어졌던 중세 후기에는 그러한 사례가 증가했다. 

 

- 1459년에는 온 신성 로마 제국의 석공 조합 대표가 레겐스부르트에 모여 통일된 규약을 제정했다. 대성당과 같은 대규모 건축에서는 석공(목수) 마스터(도편수)가 직인 집단을 통솔, 지휘했다. 도편수는 재료에 관하여 통달한 동시에 기하학 지식과 역학상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건축가로서, 그들이 컴퍼스와 자를 사용해서 작도한 대성당의 입면도와 단면도가 랭스, 레겐스부르크, 빈 등지에 남아 있다. 13세기의 건축가(석공 마스터)로 유명한 북프랑스 출신의 빌라르 드 온쿠르는 유럽 각지의 건설 현장을 순회하며 교회 건축과 인물, 동물의 움직임 등을 생생하게 소묘한 건축사상 유명한 화첩을 남겼다. 석공을 비롯한 건축업 직인의 노동 시간은 여름철이 겨울철보다 길어 새벽녘부터 일몰까지 12시간 남짓이었다. 11월 11일의 성 마르티누스 축일을 경계로 겨울철 작업으로 이행했는데, 낫 시간이 감소함에 따라 겨울철의 노동 시간은 짧아졌다. 

 

- 도시의 목조 가옥에는 기와가 대량으로 필요했다. 초가지붕은 불이 나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도시 당국에 의해 자주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에는 벽돌 건축도 일반화되어가지만 기와나 주택 벽의 모르타르 사용은 내화를 위해 불가결했으므로, 모르타르공과 지붕공도 목수와 함께 일했다. 또한 창유리가 중세 도시의 서민 주택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지만, 12세기부터 교회나 수도원에 사용되던 스테인드글라스 기술과 함께 유리 공업은 13세기부터 베네치아 등에서 발전하여 시청사나 도시 귀족 저택 등에는 일찍부터 도입되었다. 

 

- 중세의 도시민은 고기를 대량으로 소비했다고 한다. 푸줏간은 도시 인구의 증대로 고기 소비가 확대되면서 부유한 직업 집단을 형성해 갔다. 하지만 그들은 거리에서 가축을 잡고 잔해를 강에 버려 오염을 일으켰기 때문에, 피혁공이나 염색공과 함께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들은 나이프와 식칼을 다루는 직업상 무장 능력도 있고 혈기 왕성하여 중세 후기 도시에서 발생한 폭력적 민중 반란에서 리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푸줏간이라는 직업 단체가 도시에서 갖는 위치를 생각할 때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302년 브뤼헤에서 일어난 수공업 길드의 '아침 기도 반란', 1384년 뤼베크에서 일어난 '시민전쟁', 1413년 파리의 카보슈 봉기 등은 모두 푸줏간 주인이 불만 분자의 지도자를 맡아 지휘했다. 또한 생선은 교회가 매주 금요일의 육식을 금지하기도 하여, 일상적으로 나름대로의 수요가 있었다. 1292년 파리의 타이유 대장에는 41명의 어부가 실려있다. 

 

- 그 밖에 1292년 파리의 타이유 대장에 나타나는 130개 직종 가운데 수가 많았던 것이 신발 직인, 모피 직인, 재봉사, 초장이, 나무통 제작사, 맥주 양조업자 등 제작 직인, 그리고 서비스, 유통업에 종사하는 이발사, 각종 여관(오베르주, 오텔리에, 타베르니에) 주인, 세탁여공, 물이나 와인 행상인 등이었다. 

 

- 한편 의사(내과), 이발사를 겸한 외과의, 약종상(약국) 등 의료 관계일도 전문화했다. 의사는 파도바, 몽펠리에, 파리, 툴루즈 등의 대학 의학부 수료자이며 이발사는 대부분의 수공업자와 마찬가지로 도제 수업을 거쳐 장인이 되었다. 외과의는 아직 의사로 간주되지 않았고 이발사가 겸업하는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내과의가 병자를 겉으로 진찰했을 뿐 약 처방은 약종상에 바탕을 두고 있던 데 반해, 이발사는 실제로 환자에게 사혈이나 접골 같은 다양한 의료 행위를 했다. 남프랑스에서는 특히 유대인 의사의 활동이 중요했다. 

 

- 화가는 중세에 직인(화공)이었으며 성 루가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성 루가 조합(화공 길드)을 조각가, 채색 사본화가, 사본 제작자 등과 함께 동직 길드로서 구성하고  있었다. 로베르 캉팽, 한스 멤링, 헤라르트 다비트 등 초기 플랑드르파라 불리는 화가들도 저마다 투르네나 브뤼헤의 화공 길드에 소속하여 작품을 제작했다. 이탈리아 도시의 화가들도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성 루가 조합의 일원으로서 궁정이나 교회, 부유한 시민 등 후원자에게 제단화나 초상화 같은 주문을 받아 각 공방에서 작품을 남겼다. 

 

- 크리스투스는 공간의 치밀한 구축에 매료되어 저지대 국가 최초로 체계적인 원근법(투시도법)을 사용한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리스도의 탄생> (1452)이 있는데, 이 제단화는 얀 반 에이크에게 물려받은 빨강, 초록, 주황, 노랑, 검정 등 인물의 복식을 돋보이게 하는 다채로운 색상 배합과 완벽한 원근법을 통한 화면 구성이 인상적이다. 또한 <카르투지오회 수도사의 초상>(1446)에서는 트롱프뢰유 Trompe L'oeil, 눈속임 그림 수법으로 그려진 액자 위에 파리 한 마리가 묘사되어, 보는 이들에게 마치 파리가 실제로 그림 앞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A Carthusian, 1446. wikimedia

 

- 중세는 현대 선진국의 출산율 및 사망률과 비교하면 대체로 네다섯 배의 다산다사 세계였다고 추정된다. 비위생적인 환경과 영양 부족으로 어린 목숨을 잃는 신생아와 유아가 다사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세례를 받은 뒤에 그들의 가혹한 인생이 시작된 셈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아이는 7세가 지나면 바로 어른의 사회에 던져졌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맡겨지고, 그렇지 않으면 농사일을 돕거나 상인 혹은 수공업 장인의 집에 도제로 들어갔다. 지금과 같은 어린이라는 관념이 희박하여 중세의 아이들은 유년기가 끝나자마자 어른의 세계에 몸을 던진 것이다. 

 

- 근세의 지역 사회에서는 청년단이라 불리는 사춘기 남자 그룹의 활동이 공인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혼인 기회를 빼앗는 나이차 많이 나는 노인 남성의 재혼이 이루어질 경우, 프랑스어로 샤리바리 Charivari라 불리는 소동을 일으키며 그것을 용인했다고 한다. 아마 중세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는 한편으로 결혼 연회가 마을과 가구 전체의 일대 이벤트였음은 말할 것까지도 없다.

 

- 성 마르티누스 형제회가 15세기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가의 코시모 및 로렌초의 주도적 원조로 유지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해두자. 코시모 데 메디치는 창건기(1440-50년대) 성 마르티누스 형제회에 대한 기부의 절반 이상을 부담하는 등 형제회 활동에 재정 면에서 크게 공헌했다. 한편 손자인 로렌초는 1470년대 이후 형제단의 최유력 멤버로서 활동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는 성 마르티누스 형제회의 원조 대부분이 메디치가의 클리엔텔라 Clientela, 즉 정치적 지지자 세대에 돌아가도록 힘썼는데, 15세기 후반 피렌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메디치가가 이 같은 자선 조직을 장악함으로써 메디치가 지지자와의 비공식적 유대 강화를 촉진하는 동시에, 빈곤에서 기원한 피렌체 시내의 사회 불안을 억제하여 도시 질서를 안정시키려 한 방책이라고 여겨진다. 빈민의 사회적 규제라는, 근세 이후 국가가 담당하게 되는 사회 정책은 15세기 피렌체 사회에서 이미 그 맹아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 사회 복지의 역사에서 이탈리아의 형제회가 벌인 자선 구빈 활동은 매우 주목할 만한데, 피렌체의 성 마르티누스 형제회는 바로 그러한 형제회의 가장 좋은 모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 집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고 있든, 또한 방 중앙에서 불을 때는 화덕이든, 벽면에 굴뚝을 설치해 연기를 배출하는 난로든, 집 안에서는 불을 피워 조리하는 장소가 '집 중의 집'이라 불리는 중심적 공간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가옥을 단위로 14세기부터 부과되던 호별세가 '푸르 Four, 화덕'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푸아주 fouage, 화덕세'라고 불렸는데, 이 사실은 가옥과 화덕이 동일시되었음을 시사해준다. 다만 벽면에 굴뚝을 갖춘 난로가 있는 경우는 드물어 집 안의 공기는 상당히 매캐했다. 또한 습기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통풍보다도 겨울의 한기 유입을 막는 것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문이 열리는 부분이 적어 출입구 이외에는 작은 창문이나 좁고 긴 슬릿형 창문이 몇 개 있을 뿐이었기에 낮에도 실내는 어둑했다. 창유리는 아직 농촌에는 보급되지 않았으니, 기껏해야 천 등으로 가린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단, 출입구에는 목제 문이 달려 있었다. 농가 유적의 입구 부분 문지방을 관찰하다 보면 석재 단차가 마련된 경우가 있어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실내는 보통 흙바닥이었다.

 

- 그러나 지면 제약상 여기에서는 중세 서민의 복장과 가재도구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겠다. 고대 이래의 전통으로서 12세기경까지는 성직자도 포함하여 귀족과 서민의 의복에 신분상 차이나 성별차 등이 없었고, 모두 프랑스어로 블리오라 불리는 발목까지 오는 옷자락이 긴 튜닉을 입었다. 단, 전사와 농민만은 몸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허리까지 오는 튜닉과 라틴어로 브라카에 Bracae라고 하는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 브라카에는 켈트 또는 게르만에서 기원한 의복이다.  

 

- 12세기 말부터 13세기가 되면 이전까지 주름이 많이 잡히고 넉넉한 디자인이던 블리오 Blaud가 코트라고 하는, 소매와 동체부가 몸에 밀착한 옷으로 변화하는 동시에 기장도 짧아진다. 그 아래에는 남성의 경우 브레 Baies라 불리는 아마포제 속옷 비슷한 바지를 입었다. 당시의 농민을 묘사한 사본 삽화를 보면, 농민의 코트는 무릎 길이이며 머리를 덮는 모자나 두건을 쓰고, 다리에는 각반을 매거나 단화를 신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1340년대에는 귀족층 남성복에 더욱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코트가 짧아져 푸르푸앵 Pourpoint이라 불리며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앞 트임 상의가 되는 한편, 그때까지의 양말이 위로 길어져 가랑이에서 좌우가 합체하는 타이츠 형태의 하반신 옷이 되었다. 여성복의 경우는 그러한 상하 분할은 나타나지 않지만, 가슴 부분을 V자형으로 절개하고 끈이나 단추로 잠그게 되었다. 이와 비교하여 서민 남성복의 경우에는 짧아지는 경향이 약해 비교적 긴 튜닉과 무릎 아래까지 덮는 브레가 겉옷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이무렵부터 복장에 신분 차가 나타난 것이다. 여성복의 경우에는 더욱 긴 튜닉을 계속 착용하여, 남성복과 차이가 생겼다. 가르드 로브라 불리는 흰 앞치마도 여성 고유의 복장으로, 그 후 서민이 입는 유럽의 민족의상으로서 정착하게 된다. 15세기 초반에 제작된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에서 6월의 건초 수확 장면을 보면 그와 같은 남녀의 옷이 나타나는데, 일부 옷에 남녀 모두 가슴 부분이 절개된 점에 당시 복장 전체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리뷰자 주 : '가르드 로브'의 표기를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도 프랑스어 garderobe와 유사할 듯하나, 현재 이 표기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 먼저 중세 유럽 식사 내용의 전제가 되는 이 시대의 독특한 음식관이 있었다. 중세 유럽 사람들은 신이 계신 하늘에 가깝다는 이유로 높은 곳에 있는 것이 귀한 식재료이며, 반대로 낮은 곳, 특히 땅속에 있는 것은 가장 천한 음식이라고 여졌던 것이다. 동물 중에서는 하늘을 나는 새가 중요시되었고, 지면을 파헤치는 돼지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식물의 경우는 수목의 가지에 열리는 과실이 최상이며 지표에 자라는 식물이 그 뒤를 잇고, 최하는 땅속에 있는 순무, 무, 양파, 마늘 등 뿌리채소였다. 이와 같은 음식관 아래, 하위에 위치하는 식재료를 이용해 서민의 식사는 만들어졌다. 

 

- 와인과 함께 에일이라든가 세르부아즈, 맥주 등 원재료에 따라 몇 가지 호칭이 있는 맥아 양조주도 매일 1리터 넘는 분량을 마셨다. 그러나 기근 때는 제빵 이외의 곡식 소비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맥아 양조주를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도 있어 이베리아 반도 북부,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과 브르타뉴 지방, 잉글랜드의 서식스와 켄트 등 사과가 풍부한 지역에서는 맥아 양조주 대신 사과 과즙을 발효시킨 양조주를 만들었다. 농가뿐 아니라 서민의 집에는 집의 중심에 화덕이나 난로가 있어, 그곳이 온기의 원천인 동시에 부엌이기도 했다. 추운 계절은 물론 여름의 농번기에도 그곳에서는 상시 불이 피워져, 갈고리에 매달린 금속제 둥근 냄비나 화덕에 놓인 세 발 달린 질그릇 안에서 포타주 등으로 불리는 수프 요리가 만들어졌다. 귀족 메뉴의 중심이 불에 구운 고기였던 데 반해, 서민의 일상적 식사는 채소나 콩류에 소량의 고기를 함께 끓인 요리와 그것을 적셔 먹는 빵, 오트밀 같은 죽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직인이나 학생 등 독신 남성이 많이 살던 도시에서는 포장마차나 길가 가판에서 바로 구운 타르트와 파테, 튀긴 파이부터 거위 로스트까지 살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중세시대판 패스트푸드라고 할 수 있었다. 

 

- 또한 12~13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농사력(제4장 칼럼 2를 참조)을 비교해 보면 프랑스 농민의 식사 풍경에는 빵이 많이 그려지는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채소와 과일이 모티브가 되는 경우가 많다.중세 프랑스의 경우 귀족 사회에서도 채소는 그다지 먹지 않았으나, 16세기 이후 이탈리아 요리의 영향을 받아 과일(감귤류, 멜론 등)과 채소(아티초크, 아스파라거스 등) 섭취가 유행한 것을 보면 중세에도 이미 나라마다 식생활의 개성이 나타나 있었음을 알 수 있어 무척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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