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24)

[에드거 앨런 포] 세계 호러단편 100선

일루젼 2022. 4. 7. 10:45
728x90
반응형

저자 : 에드거 앨런 포 외 / 정진영
출판 : 책세상 
출간 : 2005.07.10 


   

다양한 단편들이 모여있어 즐겁게 읽었다. 사실 공포 장르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닌데, 다행히도 당시의 공포 소설과 환상 소설의 경계는 매끄럽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까지 홀린 듯이 빠져들어 읽게 되는 단편도 있었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몇 번을 되풀이해 읽게 되는 단편도 있었다. 아무래도 단편들이다보니 깜짝 놀랄 반전보다는 공포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으스스한 초자연 현상을 이용한 단편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몇몇 단편에서는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비판 의식도 보였다.

 

페이지 자체는 어마무시하지만 100편으로 나눠 생각하면 그리 부담스러운 분량은 아니다. 읽히는 데까지 읽고 덮었다 다시 시작해도 무방하고, 궁금한 단편만 찾아 읽어도 무방하다. 읽다 보면 작가가 절로 떠오르는 글도 있었고, 평소의 저작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글도 있었는데 대체로 재미있었다. 편집 시에 한쪽 페이지에는 제목을 표시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조금. 

        


    

-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 집에서 곤경을 겪게 된 겁니까?"
"내 탓이 아니야, 선생." 여자가 대답했다.

"내 아버지 때문이야. 그분이 해로비 저택을 지으셨고, 그 침실은 내 방이었지. 아버님은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방을 꾸미셨는데, 내가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색의 조합이 파랑과 회색이라는 걸 잘 아셨기 때문이지. 단순히 나에게 심술을 부리기 위해 하신 일이었고, 나는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 그 방에서 지내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아버님은 내가 방에서 살든 풀밭에서 살든, 상관없다고 말씀하셨지. 그날 밤, 나는 집에서 뛰쳐나와 절벽으로 가서 바다에 몸을 던졌어."

"경솔한 행동이었습니다." 해로비의 주인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유령이 대답했다. "자살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알았더라면, 물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익사하고 난 뒤에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어. 일주일 동안 물에 잠겨 있는데, 바다의 요정이 다가와 말하기를, 내가 그녀의 영원한 저승 추종자가 되었고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한 시간씩 해로비 저택을 떠도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하더군. 사람이 묵고 있는 경우에도, 나는 크리스마스이브마다 저 방을 방문해야 했어. 방에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저택의 주인과 정해진 시간을 보내야 하지."

 

- 존 켄드릭 뱅스, <해로비 저택의 워터 고스트>

 

 

- 교회 묘지로 돌아온 뒤, 단단한 뚜껑 문이 있는 곳까지 계단을 내려갔다. 그 고색창연한 성과 나무들이 싫었던 터라, 아쉽지는 않았다. 지금 나는 익살스럽고 친근한 구울의 무리와 함께 밤바람을 가르고, 낮이면 나일 강변의 숨겨진 미지의 헤도스 계곡에서 네프렌 카의 무덤 사이를 뛰놀고 있다.(헤도스는 러브크래프트가 지어낸 가상의 공간이며 네프렌 카는 가상의 인물 - 옮긴이 주) 네브의 돌무덤을 비추는 달빛 외에, 나에게는 빛이 어울리지 않는다. 거대한 피라미드 아래서 벌어지는 니토크리스의 이름 없는 향연 외에, 내게 흥겨움은 어울리지 않는다(니토크리스는 이집트 육대 왕조의 왕비, 러브크래프트는 다른 작품에서 니토크리스가 나일 강변의 신전에서 열린 향연에 정적을 초대해 죽였다고 쓰고 있다 - 옮긴이 주). 그러나 나는 새로운 야성과 자유를 만끽하면서 이방인의 씁쓸함까지 반기고 있다. 진통제가 나를 위로하지만, 언제나 내가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직은 사람인 존재들 사이에서, 이 시대에 나는 이방인이다. 그것은 반짝이는 거대한 틀 속에 있던 괴물을 향해 내가 손가락을 뻗었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다. 내 손가락에 닿은 것은, 윤기 나는 거울의 차갑고 단단한 표면이었다. 


- 하워드 필립스 러브트래프트, <아웃사이더>

 

 

- 그는 떠들썩한 잔치를 싫어했고, 시기적으로도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였다. 그는 고독과 침묵을 무척 좋아해서 집에서 잘 나오지 않았고, 종종 자신이 불완전한 사나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끔 가슴 한쪽이 약간 허전해지기도 하지만 다시 얼마간 행복해지곤 했다.

탑에 음침한 이름이 붙은 것은, 마크의 할아버지 제임스 드 노트 때문이었다. 그는 사악하고 비밀스러운 사람으로서, 퍽 기묘한 의혹을 자아내면서 노트에 살았다. 아들을 집 밖으로 내친 뒤, 책과 자신만의 생각에 골몰한 채, 별을 엿보고 책 속의 이상한 그림들을 탐구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가 임종의 순간 힘겹게 작은 탑으로 올라가 죽음을 맞이한 후, 탑은 폐쇄되었다. 그곳은 아래층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간 뒤 탑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사면에 하나씩 모두 네 개의 창문이 있지만, 고원을 내려다보는 창문은 굳게 닫혀져 커다란 참나무 덧문으로 막혀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롤런드는 무료함에 지친 데다 커다란 의자에 너무도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마크 때문에 안달이 나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그 낡은 방에 가보겠다고 말했다. 마크는 책을 덮고 안절부절못하는 롤런드에게 넉넉한 미소를 짓다가 기지개를 켜고는 열쇠를 가져왔다. 그들은 함께 작은 탑의 계단을 올라갔다. 자물쇠의 요란한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자, 나무 지붕과 답답하고 탁한 냄새에 휩싸인 몹시 어두운 내부가 보였다. 벽면을 따라 책장이 놓여 있었지만 모두 자물쇠로 채워진 상태였다. 방 한복판에는 의자가 딸린 커다란 참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다. 

 

- 아서 크리스토퍼 벤슨, <막힌 창>

 

 

- "실제로 무서운 건 하나도 없었어. 내가 본 것은 분명히 아주 이롭고 상냥한 유령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유령은 사물의 어두운 면에서 유래했지. 우리의 생을 둘러싼 밤과 미스터리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으니까."

"먼저, 유령이 보이는 현상에 대해 내 의견을 아주 짤막하게 말하지." 그는 말을 이었다. "비유와 이미지를 사용하면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거야. 자, 자네와 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쉬지 않고 빙빙 돌아가는 마분지의 작은 구멍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고, 그리고 그 뒤에 다른 마분지가 있고 거기에도 구멍이 있는데, 그 두 장의 마분지는 따로따로 움직인다고 말일세. 그 두 개의 구멍, 즉 우리가 늘 바라보고 있는 구멍과 영적인 차원에 있는 다른 구멍이 우연히 일치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세계의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게 되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평생 두 개의 구멍이 일치하는 경우가 한 번도 없어.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되지.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경계를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반면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구멍들이 상대적으로 크고, 계속해서 일치하기도 하지. 천리안, 영매가 그런 경우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나는 천리안도 영매도 아니야. 그래서 오래전에 유령 따위는 없다고 마음을 굳혔지. 말하자면 내가 일치한 두 개의 미세한 구멍을 바라볼 확률은 거의 없다는 뜻이야.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던 거야.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어."

 

- 에드워드 프레더릭 벤슨, <버스 차장>

 

 

- 방문하고 싶다고 보낸 나의 서신에 댐피어는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초인종을 누르지 말게. 문이 열려 있을 테니까 조용히 계단으로 올라와."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계단은 이층 천장에 커져있는 가스등 하나에 의지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는 아무 문제없이 안전하게 계단을 오른 뒤, 열린 문을 통해 불빛이 새어 나오는 누대의 정방형 공간으로 들어갔다. 잠옷과 슬리퍼 차림의 댐피어는 나를 반기며, 현관까지 마중 나가지 않았다고 섭섭하게 생각지 말라는 당부와 인사를 건넸다. 
그는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 갓 마흔을 넘긴 나이인데도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고 허리도 눈에 띄게 구부정한 모습이었다. 깡마른 체구와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에 피부는 송장처럼 창백해서 혈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커다란 두 눈에서는 기이할 정도로 섬뜩한 빛이 번뜩거렸다. 그는 나에게 의자와 담배를 권했고, 심각하고 진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만나게 돼 기쁘다고 거듭 말했다. 이어서 대수롭지 않은 말들이 오갔지만, 나는 줄곧 너무도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침울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런 내 눈치를 알아챘는지, 그는 갑자기 환하게 웃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많이 실망했나 보군. 논 섬 퀄리스 에람 Non Sum Qualis Eram(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야)."
나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가까스로 궁색한 말을 늘어놓았다.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네. 아, 자네 라틴어 실력은 그대로인 것 같군."

그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 죽은 언어에 불과한 걸,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니까 말일세. 그러나 조금만 참아주게, 좀 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알아듣기 쉽게 말할 수 있을 테니까. 혹시 말뜻을 알고 싶나?"
그의 얼굴에서 차츰 미소가 사라졌고, 말을 마치고 나서는 곤혹스러울 정도의 엄숙한 눈길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위압감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으며, 죽음에 관한 그의 깊은 통찰력이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내 생각에 인간의 언어가 필요한 기능을 잃어버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걸세. 그때까지 표현력을 가진 언어의 필요성은 계속 이어지겠지."
그는 대꾸하지 않았고, 나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야기의 방향이 묘하게 꼬이는 느낌이었지만, 뾰족이 만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폭풍이 잦아드는 순간, 느닷없이 침묵을 깨뜨리듯 내 등 뒤의 벽 쪽에서 똑똑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손으로 두드리는 소리 같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도 좋으냐는 노크 소리라기보다는 옆방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미리 약속한 신호 같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직접적인 말 대신 약속된 신호로 의사를 전달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댐피어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반기는 기색이 번졌다. 그는 아예 내 존재를 완전히 잊은 듯했으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눈길로 내 뒤쪽 벽면을 응시했다. 그때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지금도 바로 얼마 전의 일처럼 눈에 선하다. 몹시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돌아갈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앰브로즈 비어스, <벽 너머>

 

 

- 샤워를 하고 차 한 잔을 마신 다음 탁자 앞에 앉았다. 탁자 앞에 빨리 앉을수록 상상력의 내용이 풍부해졌다. 간밤에 그를 난처하게 했던 문제들은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결되어 있었다. 몸이 아프지 않는 한, 그러한 과정과 일과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져 있다는 절망과 놀라움으로 충격을 받았다. 정신은 무시해버린 사소한 착상을 더듬고 있었다.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푹 쉬고 난 뒤라 가뿐하고 머리도 맑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탐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에 불분명하고 피상적으로 붙잡았다가 놓아버린 사유의 맥락을 포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구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그 위에 쏟아지는 새로운 사고, 새로운 서술 방식과 시점, 사건의 전개 등에 압도당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소설의 양상과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원래 구상은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출발점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전혀 다른 하나의 작품이라고 표현할 만했다. 새로운 암시들이 표현해달라고 떼를 지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의 잠재의식은 깨어난 일상 속에서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은 생생하고 무리를 지어 맹렬히 쇄도했다. 여기에 어둠까지 그를 당혹케 했다. 창문이 원래 자리에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지만, 촛불에 가까이 비춰본 시계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했을 때에야 비로소 방 안 구석에서 혼란스러운 속삭임이 들려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누군가 침대 바로 옆에 서서 속삭이고 있다는, 통증과도 같은 공포를 느꼈다.   

 

- 부질없이 빈 다락방을 탐색하는 동안, 그는 생생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더없이 난폭하고 새로운 인상들을 표현해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를 향해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두서없으면서도 일관성이 있었다. 영감이라기보다 집착이었고, 너무도 신랄하고 무서우리만큼 현실적이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는 휑한 벽면과 빈 구석에 대고 속삭였다.
바닥과 천장에서 표현해달라고 거칠게 요구하는 이미지들의 떠들썩한 합창이 쏟아졌다. 존스는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소리치게 놔두었다. 달리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는 겁에 질려 소극적으로 귀를 기울인 채 누워 있었다. 자신의 미약한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 걸작으로 엮어내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하나 분리된 느낌의 연속인 동시에, 전체로서 매우 긴밀히 얽혀 있었다. 
그는 느낌들을 분류하고 골라내려고 헛되이 애썼다. 그것은 성난 바다에서 파도를 분류해내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느낌들은 방향이나 조절에 대한 자기주장이 강했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약탈을 일삼는 야생 동물처럼 사방에서 달려들어 그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는 그 느낌들을 일정한 전후 관계로 파악할 수 있었다. 
썰렁했던 다락방은, 인간이 즐겁게 혹은 헛되이 표현하고자 갈망하고 안달하는 열정, 사랑과 증오, 복수와 기만, 질투, 용기, 비겁으로 가득 찼다. 이것들은 뒤죽박죽 들고나는 느낌들을 꿰뚫고 불꽃으로 타오르다가, 불가능한 성취를 탐하는 그의 가슴 한 켠에서 한숨짓는 절대미(美)에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그다음에는 느낌의 표면 안팎에서 기대한 질문들이 격렬하게 뒤엉킨 형태로 번뜩이고 질주하고 몰려들면서, 해명하고 솔직히 말해줄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덧붙여 다섯 시간 전에 그가 잠자리에 들면서 모호한 것으로만 간주했던 착상을 재고해보라는 암시를 계속해서 던졌다.


- 존스는 느낌들을 순서대로 받아들였다. 잠재된 표현 기법은 상상력을 짓누르고 뒤틀었으며, 그는 그 표현 중에서 일부를 골라내야 했다. 사소했던 그의 착상은 엄청난 부피로 따로 떨어져 나가. 수십 명의 삶을 채워줄 정도로 풍부해졌다. 그것은 가장 눈부신 활력이었지만, 그것을 다룰 방법은 없었다. 자기 안에 무수히 많은 정신들이 들어 있는 느낌...
또 다른 느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목소리, 질문, 표현해달라는 탄원, 그것들은 한결같은 깊이를 지녔지만 여전히 난폭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강물처럼 구석구석을 휩쓸고 밀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을 흐르는 물처럼 이끌고 있는 몇 명의 걸출한 우두머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악을 쓰고 싸우다가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핏속을 나뒹굴다가 쓰러졌다...
즉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 흰색 무리들이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열망의 얼굴로, 구름에 가려진 산맥 저편의 일출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광휘를 향해 가파른 고지를 기어올랐다... 

- "잘 잤어?" 그가 아침 늦게 식사를 하러 왔을 때, 사촌이 물었다. "그 방에서 일하니까 술술 풀리지?"
"응, 잘 잤어." 존스가 말했다. "그래, 일하기에 안성맞춤이지. 잠깐씩 쉬기도 하고." 그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그 다락방, 최근에 무슨 용도로 사용했지? 내 말은, 그 안에 뭐가 있었냐고."
"책, 책뿐이야." 사촌이 대답했다. "몇 달 동안 그곳에 내 서재를 만들어놨었거든.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어. 봐서 알겠지만, 책은 거의 다 옮겨 놓았어. 네가 오기 전에 오백 권 정도를 가져왔으니까.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그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책을 들춰보지 않았으니, 그걸 쓴 사람들이 얼마나 편치 않았을까 하고."
"어떤 책들이었는데?" 존스가 사촌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소설, 시, 철학, 역사, 종교, 음악, 음악에 관한 책만 해도 이백권은 족히 됐을 거야."


- 앨저넌 블랙우드, <속삭임>

 

 

- 그 소리 없는 거리와 그 메아리 없는 풍경 속에서,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인데도 우리의 현실이나 실존과 유리되어 있는 거울의 세계에 나를 비춰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열정이 되었다.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유리의 매끄러운 표면에 길게 늘어진 또 다른 나의 모습은 실체 없는 촉감처럼 나를 사로잡았고, 나를 심연과 신비를 향해 이끌어갔다. 
거울에 가까이 다가갈 때면, 기이하게 내 존재를 혼란하게 만드는 눈앞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거울 속의 여자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내 오른손이 그녀의 왼손이 되는지, 어떻게 결혼반지를 낀 손가락의 위치가 바뀌어 있는지 등의 생각으로 골몰했다. 그 수수께끼를 증명하고 해결하려 할 때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누구든 만질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실제로 살아가고 있다면, 관찰만 할 수 있는 반사의 저 세계 속 그녀는 환영으로 존재한다. 그녀는 거의 나 자신이면서 여전히 완전한 나는 아니다. 내 모든 동작을 따라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정확히 내가 만든 동작과 일치하지 않는다. 맞은편의 그녀는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감춘 채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고 있다. 

- 그러나 나는 각각의 거울마다 독립적이고 특별한 세계가 있음을 간파했다. 똑같은 곳에 두 개의 거울을 하나씩 놓아보면, 두 개의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내 앞에 놓인 각각의 거울에서 다른 모습이 솟구치는데, 모두 나와 비슷하면서도 서로 완전히 닮지는 않았다. 조그만 손거울에는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맑은 눈망울의 순진하고 아담한 소녀가 살고 있다. 둥그런 내실 거울에는 애무의 달콤함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뻔뻔하고 자유분방하며 아름답고 대담한 여자가 숨어 있다. 옷장 문에 달려 있는 직사각형의 거울에는 언제나 엄하고 오만하며 차갑고 무심한 여자가 나타난다. 이밖에도 화장대 거울과 금 테두리의 삼단 접이식 거울, 참나무 테두리의 벽거울, 작은 손거울을 비롯해서 내가 아끼는 무수한 거울들 속에는 또 다른 나의 분신들이 있다. 나는 거울 속에 숨어 있는 존재들에게 그만의 개성을 지닐 수 있는 가능성과 구실을 주었다. 그들은 그들 세계의 기묘한 조건에 따라서 거울 앞에서는 사람들의 형체를 모방해야 하지만, 그처럼 빌린 외형 이면에는 저마다 자신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 나는 거울의 세계 중에서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싫어했다. 어떤 세계에서는 그 매력적인 공간에 넋을 잃고 기꺼이 몇 시간을 오갔다. 하지만 어떤 세계에서는 그냥 도망쳐버렸다. 솔직히 나는 내 분신들을 모두 좋아하지는 않았다. 내 취향에 맞춰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인지, 그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여자 중에는 연민이 느껴지는 여자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증오를 용서하고 아주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그들 중 일부를 경멸하고 그들의 무기력한 분노를 비웃어주었다. 또 어떤 이들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독립성을 앞세워 조롱했고, 내 힘을 이용해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한편 내가 두려워하는 존재들도 있었는데, 힘에 부칠 정도로 강한 그들은 감히 나에게 조롱으로 맞설 뿐 아니라 나를 제압하려고 했다. 

 

- 발레리 야코블레비치 브류소프, <거울 속에서>

 

 

- 그의 비범한 사생활은 나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촌경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공부를 일찍 시작한 탓에 아직 어렸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최근이지만 우리는 같은 학교, 같은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학식의 깊이에서 나를 앞섰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애송이에 불과할 때 이미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그에게 빠져드는 동안 나는 그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전해 들었다. 숱한 사연과 서로 어긋나는 모순이 있었지만, 그가 결코 평범하지 않으며 언급을 회피하는 고통이 무엇이든 여전히 탁월한 인물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와 친분을 쌓으며 그의 우정을 얻고자 노력했지만,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금 그가 애정을 느끼는 대상이 무엇이든, 어떤 것에는 관심이 없고 어떤 것에 집중하든, 그의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나는 그를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감정을 통제할 수는 있지만, 속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실체를 규정하기 어려운 방식을 통해 어떤 대상에 열정을 부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의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느낌은 약간씩, 그러나 너무도 빨리 변해서 그 본질을 찾아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가 까닭 모를 불안에 사로잡혀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야망, 사랑, 회한, 슬픔에서 비롯된 불안인지, 아니면 그중에 하나 혹은 전부에서 비롯된 것인지, 단순히 병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조지 고든 바이런, <미완의 소설>

 

 

-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태비사. 어슐러는 숨을 몰아쉬며 둘째 동생에게 말했다. 태비사는 좀 더 매섭고 차가워 보였지만, 언니와 놀랄 만큼 닮은 모습이었다. 앞으로 이 방을 잠그고 다시는 열지 마."
"알았어." 태비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눈에 안 보여도 언니한테는 문제가 되겠지."
"그래." 언니는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내가 이따금씩 그것을 찾게 될지, 너도 나도 모르잖아? 이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니, 그걸 다시 보게 될 거야. 다시 돌아오겠어. 너희가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 보러 올 거야."
"언니는 너무 함부로 말하고 있어." 태비사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만을 생각하느라 언니의 쓸쓸함에 조금도 연민이 없었다. "언니가 심란해서 그런 거야. 알잖아,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한숨을 쉰 어슐러는 침대 옆에서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던 유니스를 불러 앙상한 팔로 동생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 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 <세 자매>



- "도련님은 어디 계시지?" 그가 소리쳤다.
"나 여기 있소." 내가 대답했지만, 그들은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차 앞쪽에 놓여 있는 뭔가를 항해 몸을 구부렸다.
스탠리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고, 나는 그 손길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안을 느꼈다. 끔찍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몸이 가뿐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아프지 않지, 응?" 그가 말했다.
"그럼." 내가 말했다.
"고통이 있을 리 없지." 그가 말했다.
돌연 놀라움이 파도처럼 쇄도했다. 스탠리! 스탠리! 아니, 스탠리는 보어 전쟁 때 블룸폰테인에서 장티푸스로 죽었잖아!
"스탠리!" 소리치려고 했지만 목이 메었다. "스탠리, 너는 죽었잖아."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온화하고 골몰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그가 대답했다.

 

- 아서 코난 도일, <사건의 내막>

 

 

- 독일 학생들이 어리둥절해하는 거칠고 위험한 학설에 빠져들었다. 은둔 생활, 지나친 몰두, 연구의 독특한 성질은 그의 육체와 정신에 영향을 끼쳤다. 건강을 해치고, 상상력은 병적으로 변했다. 스베덴보리(스웨덴의 자연과학자, 철학자, 신비주의자 - 옮긴이 주)처럼 정신의 본질에 대해 기발한 사색에 몰두하다가, 결국에는 자신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했다. 내가 알 수 없는 근거를 토대로, 그는 자신의 주변에 사악한 힘이 떠돈다고 생각했다. 사악한 천재 혹은 영혼이 그를 유혹하여 그의 파멸을 필연적으로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은 우울한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가장 음울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수척하고 의기소침해졌다. 정신적 질병이 그를 갉아먹고 있음을 눈치챈 친구들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파리로 와서 그곳의 화려함과 유쾌함 속에서 연구를 마저 하게 되었다.  
볼프강은 혁명이 막 일어나고 있을 때 파리에 도착했다. 군중의 광란이 그의 열정을 사로잡았고, 그는 당시의 정치적, 철학적 이론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잇따른 살벌한 광경은 그의 예민한 성품에 충격을 주었고, 그는 프랑스 사회와 세상에 대해 환멸을 느낀 채 그 어느 때보다 은둔했다. 그는 대학가 지역인 라탱의 외딴 방에서 두문불출했다. 소르본 대학의 금욕적인 담장이 멀지 않은 그 음침한 거리에서 그는 가장 좋아하는 사색에 몰두했다. 때로는 죽은 저자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파리의 거대한 도서관에서 케케묵은 책을 뒤적이며 불온한 만족을 구했다. 시체를 파먹는 귀신처럼 그는 쇠퇴한 문학의 납골당에서 허기를 채웠다.  

 

- 워싱턴 어빙, <독일인 학생의 모험>

 


- 결혼 생활의 첫 흠집은 G에 정착한 지 몇 달이 지났을 때 나타났다. 어느 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포크 씨가 아내의 사실(私室)이자 많은 책을 갖다 놓은 이층 방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그는 방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이루어진 낮은 찬가를 들었고, 향초(香草)를 태우는 것처럼 독특한 냄새를 맡았다. 문이 잠겨 있어서, 그는 아내를 불렀다. 찬가가 갑자기 멈추더니, 잠깐만 기다리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렸을 때 방 안은 탁자 위의 작은 화로에서 타는 향초의 강한 냄새로 가득했다. 
"아니, 여보,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요?" 그가 물었다.
스텔라는 심한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연기를 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헝가리의 민간요법이라고 덧붙였지만, 찬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약간 어리둥절했던 포크 씨의 놀라움이 증폭된 것은, 얼마 후 펠스 북단에 있는 소촌 L에 다녀오겠다는 아내의 말을 들었을 때였다. 더구나 오후에 갔다가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스텔라가 황야를 홀로 여행한다는 소리는 그때 처음 듣는 것이어서, 그는 당연히 여행의 이유를 물었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정기적으로 다녀오는 여행이라는 것 외에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같이 가겠다고 했으나, 아내는 극구 거절했다. 그날 오후 집을 나서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는 포크 씨의 마음은 착잡하고 불안했다. 다음 날 오후 진흙이 묻은 옷차림과 지친 기색의, 그러나 여행으로 기분이 한결 나아진 그녀가 돌아왔다. I에 있는 '쓰리 매그파이스' 여인숙에서 묵고 펠스 북부까지 다녀왔다는 것 외에, 그녀는 여행에 대해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 아미야스 노스콧, <고 포크 부인>

 

 

- 노인은 서둘러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와 약품을 더듬거렸다. 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게 되었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얼마 후 그는 무채색 용액이 담긴 병 하나를 들고 여자의 천막이로 향했다.
"문을 열고 이걸 받아요." 그가 말했다.
문이 살짝 열렸다. 앙상한 손이 밖으로 나와 약병을 다급히 받았다. 문이 닫히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하겠죠?"
"그렇소."
"그럼, 안녕히 가세요... 건강하시길..."
노인은 나무 바닥에 부딪치는 유리병 소리를 듣고 자신의 천막 앞으로 돌아와 신중하게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도망가지 않겠어."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내가 한 최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무섭지 않아."
그는 귀를 기울였다.
여자의 천막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적뿐이었다. 화창한 여름의 여명과 함께 멀리 하늘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 배리 페인, <파장> 

 

 

-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골렘은 아직 잊히지 않았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필요할 때 골렘에게 생명력을 주는 이름, 그 이름은 엷은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므로 누구도 촘촘한 거미줄을 걷어낼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아이작 레이브 페레츠, <골렘>

 

 

- 사라진 책장에 여전히 생명을 주었고, 그런 책에 둘러싸여 앉아있으면 인쇄공의 손을 떠나온 새 책으로 서재가 채워졌을 180년 전의 시대를 막연히 그려보게 되었다. 물론, 후임 목사들 중에는 그 장서들을 좋아하는 이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목사들이 좋아했든 싫어했든 혹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든 간에 윌리엄 화이트헤드가 죽은 지 150년쯤 흘렀을 때 장서들은 모두 배첼 씨에게 전해졌다. 그는 자식처럼 책을 사랑했다. 혼자 사는 그에게 마음을 어지럽힐 만한 집안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오래전 화이트헤드 목사가 그러했듯, 독서에 빠져들 수 있었고, 오랫동안 잊힌 책들을 탐독하면서 긴 여름밤을 지내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서재로 불리기도 하는 그 방은 남향이어서 화창한 겨울 아침에도 아늑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간이 탁자에서 글을 쓰거나 높은 책상 앞에 서서 책을 읽기도 하면서 그는 유쾌한 목장에서 소가 풀을 뜯듯 책을 섭렵해나갔다.  


- 배첼 씨는 다른 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그는 규칙적으로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아니어서(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서재로 통하는 두 개의 방 중에서 하나를 침실로 사용했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이면 책 속에서 보낼 수 있었는데, 심야의 방문을 위해 언제나 탁자 위에 촛대와 성냥을 준비해두었다. 침실과 서재가 가깝기 때문에 한 가지 안 좋은 점이 있었다.  

 

- 에드먼드 길 스와인, <뼈>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