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홍, 최병진] 의미, 의학과 미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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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전주홍 / 최병진
출판 : 일파소
출간 : 2016.11.16
대체로 전반부는 전주홍 저자가, 후반부는 최병진 저자가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회화에 집중되어 있으며, 100여 작품을 선정해 거기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상과 당대의 의학에 관해 풀어나가는 글이다. 기본적으로는 해부학이라는 공통의 접접을 기반으로 그것의 발전과 표현에서 갈라져나온 양자의 시각을 보여주는데,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하지만 다양한 작품들을 다루고 있고, 미학보다는 의학에 비중을 두고 읽는다면 만족할 수도 있겠다.
저자들은 대략적으로 중세 시기부터 근현대까지 각 시대에 따라 기대되었던 의사의 역할이나 유행하던 치료법 등을 설명하기도 하고, 어째서 그런 이미지가 생겼는지를 부연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당 이론에 대해 더 깊게 들어가기 보다는 현대의 시각에서 비판할 점을 위주로 간략히 다루는 편이다. 원인을 꼭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쩐지 학부생 대상의 교양 강의 느낌을 강하게 주는 책이다. 의학의 역사 쪽으로 중심이 쏠리면서 미술 부분이 화가의 해부학적 지식 쪽에 맞춰진 점도 다소 아쉬운 점이다.
일독에 의의를 둔다.
끝.
-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과 코로니스의 아들이다. 코로니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임신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사촌인 이스키스를 남편으로 정했다. 아폴론의 첩자인 까마귀가 이 결혼 소식을 전하자 아폴론은 크게 분노하여 흰색이었던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바꾸어 버렸고, 여동생인 아르테미스에게 활을 쏘아 이스키스와 코로니스를 죽이도록 했다. 뒤늦게 코로니스가 임한 사실을 알아챈 아폴론은 코로니스의 뱃속에서 아스클레피오스를 살려냈다. 다시 말해 아폴론은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아스클레피오스를 태어나게 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켄타우로스 중 가장 현명한 키론에게 보내져 의술을 배웠고, 이후 죽은 사람을 살려낼 정도로 명성이 자자해졌다.
- 프랑스의 화가 알렉상드르 드니 아벨 드 푸홀(1787~1861)은 히폴리토스를 살려낸 아스클레피오스의 모습을 퐁텐블로 성의 천장에 옮겨 놓았다. 히폴리토스는 테세우스와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아마존 여전사들과의 전쟁에서 아내 히폴리테를 잃은 테세우스는 페드라를 다음 왕비로 맞이했다. 페드라는 남편과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히폴리토스의 뛰어난 외모에 빠져 사랑을 고백했으나 거절당하고 이에 상심해 히폴리토스가 자신을 겁탈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해버렸다. 페드라의 유서에 화가 난 테세우스는 포세이돈에게 부탁해서 아들을 죽여버렸다. 하지만 아르테미스의 부탁을 받은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은 히폴리토스를 다시 살려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가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자연의 법칙을 어긴 것에 화가 난 제우스는 불벼락을 던져 아스클레피오스의 목숨을 거두었다. 역설적이게도 뛰어난 의술로 인해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아주 친숙한 구절이 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0)이다. 히포크라테스 잠언집 첫머리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고, 기회는 순간이고, 경험은 흔들리며, 판단은 어렵다"라고 나온다.(Antoniou 등, 2012) 중세에 출판된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권두화에는 예언자나 철학자처럼 생긴 히포크라테스가 등장하는데, 그가 들고 있는 책에서 이 유명한 문구를 볼 수 있다. 아트(art)를 예술로 번역했지만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예술이라는 개념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다. 예술(art)은 정신적, 육체적 수고의 산물인 기술이라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에서 유래됐다.
- 먼저 히포크라테스는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3~430)의 4원소설에 큰 영향을 받았다.(Yapijakis, 2009) 만물을 이루는 근원 물질로 밀레토스 학파의 경우 처음에는 물, 나중에는 공기로 이해했고,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35~475)는 불, 엘레아 학파는 흙으로 생각했다. 엠페도클레스는 절충주의자(eclecticist)로 아낙시만드로스(기원전 610~546)와 피타고라스(기원전 571~495) 등의 사상을 바탕으로 불, 물, 공기, 흙의 네 가지 근본 물질을 동등하게 배치시키면서 '4원소설'을 정립했다. 이 고대 물질 체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5~322)의 지지를 힘입어 로버트 보일(1627~1691)과 앙투안 라부아지에 (1743~1794)에 의해 근대 화학이 등장하고 새로운 물질 체계가 세워질 때까지 2000년 동안 서양과학을 지배했다.
- 히포크라테스는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에 대응하여 네 가지의 체액(흑담즙, 황담즙, 점액, 혈액)이 우리 몸을 구성하는 근원으로 여겼다.(Falagas 등, 2006) 불은 황담즙, 흙은 흑담즙, 물은 점액, 공기는 혈액에 대응된다. 황담즙은 불처럼 뜨겁고 건조하며 흑담즙은 흙처럼 차갑고 건조하고, 점액은 물처럼 차갑고 습하며 혈액은 공기처럼 뜨겁고 습한 특징을 보인다. 히포크라테스는 4체액의 조화와 균형이 깨진 상태를 질병으로 인식했다. 그의 의학 이론은 관념적이고 사변적이었지만 갈레노스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었고, 이후 서양의학은 1,500년 동안 체액 병리학적 관점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Orfanos, 2007)
- 알렉산드리아의 의학을 대표하는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는 각각 해부학과 생리학에 대한 사유를 확장시켰던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을 보고 상사병에 걸렸던 안티오쿠스를 치료한 일화를 남겼다. 이 이야기는 미술 분야뿐만 아니라 문학 및 다른 분야에서도 오랫동안 전승되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끊임없이 리메이크되었다.
- 이 과정에서 히포크라테스 이후 자연적 질병관을 바탕으로 크니도스, 코스, 시칠리아에서 발전했던 의학은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갔다.(Androutsos 등, 2013: Serageldin, 2013) 이곳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개방적인 분위기와 실증적 탐구를 장려하는 풍토에 힘입어 과학적 의학이 발전했고(Sallam, 2010) 사형수에 대한 인체 해부도 허용되었다.(von Stadlen, 1992) 특히 사형수의 사체에 대한 해부는 공포심을 조장하고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헤로필로스(기원전 325-255)와 에라시스트라토스(기원전 304~250)는 알렉산드리아의 의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Elhadi 등, 2012)
- 헤로필로스는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신봉자인 프락사고라스(기원전 340-280)에게 철학과 의학을 배운 것으로 전해진다. 프락사고라스는 동맥과 정맥의 차이를 최초로 기술했다. 그는 대기 중의 영기 또는 프네우마(pneuma)를 운반하는 동맥은 심장에서 뻗어 나오고 혈액을 운반하는 정맥은 간에서 뻗어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헤로필로스는 해부학의 창시자로 불리며 인체 장기에 대한 해부학 저서를 남겼다.(Bay & Bay, 2010) 라틴신학의 아버지 테르툴리안(160~230)에 따르면 헤로필로스는 약 600구 정도의 사체를 해부한 것으로 전해진다.(Reverón, 2015)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저서들은 기원전 1세기경 일어난 알렉산드리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 또한 그는 뇌가 신경계를 지휘하고 말초신경이 감각을 전달한다는 점을 알아냈다. 또한 정신 작용은 심장이 아니라 뇌에 자리하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심장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다. 하지만 그는 히포크라테스의 체액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해부학적 관점에서 새로운 질병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헤로필로스는 맥박이 환자의 중요한 증상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맥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아리스톡세누스(기원전 375~335)의 음악이론을 배웠고, 맥박의 세기와 간격을 측정하기 위해 물시계를 고안하기도 했다.(Savona &, Grech, 1999; Billman, 2011) 맥박에 대한 중요성은 고대 이집트에서 이미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Ghasemzadeh & Zafari,2011)
- 에라시스트라토스 역시 헤로필로스처럼 동물과 인체를 해부했고, 특히 인체의 기능을 탐색하여 저서를 남겼다.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심장이 펌프 기능을 한다는 것과 신경이 감각뿐만 아니라 운동을 유발한다는 것을 알아낸 최초의 생리학자이기도 했다.(Keele, 1961) 그는 심장과 순환계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도 상당히 실증적인 접근을 했다. 그는 심방을 큰 혈관의 연장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심장을 두 개의 심실로 구성된 장기로 인식했다.
- 갈레노스는 4체액설의 토대에서 생명력을 설명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추론을 바탕으로 사변적인 생리학 이론을 창안했다.(West, 2014) 주로 세 가지 영(spirit)을 상정하여 인체의 주요 기능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감각과 사유 활동은 뇌에 자리 잡은 '동물의 영(animal spirit)', 맥박과 혈액의 운동은 심장에 자리한 '생명의 영(vital spirit)', 소화와 대사 및 혈액 생성은 간에 자리한 '자연의 영(natural spirit)'에 의한 것이다.(Pasipoularides, 2014) 갈레노스는 체열이 생명과 영혼에 관련된다는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따랐다.(Aird, 2011)
- 에라시스트라토스와 마찬가지로 갈레노스는 심방을 큰 혈관의 연장이라고 생각했고 정맥이 우심실에 동맥이 좌심실에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동맥 두 곳을 묶는 실험을 통해 동맥에는 혈액이 없다고 본 에라시스트라토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동맥에도 혈액이 차 있다고 주장했다. 갈레노스의 이론에 따르면 혈액은 순환하지 않고 동맥과 정맥을 타고 말초로 퍼진 후 소모되거나 증발되는 것이다.(Aird, 2011; Karamanou 등, 2015)
- 당시 광기는 머릿속에 들어있는 어리석은 돌(우석)에 의해 생긴다는 잘못된 믿음이 있었다.(Ladino 등, 2013) 물론 이 그림은 재미있게도 고깔모자를 쓴 의사가 수술 칼로 머리를 절개하여 끄집어낸 것은 돌이 아니라 튤립처럼 보이는 꽃이다. 따라서 의료 행위의 사실적 표현이라기보다 상징적 풍자를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지만 당시 출간된 의학서적들에는 천두술을 위한 수술 도구와 장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서 이 수술이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안(?~287)은 터키와 시리아 사이의 아랍 지역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로 메디치 가문의 수호성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Matthews, 1968; Friedlaender & Friedllaender, 2016) 제노바의 대주교 보라지네(1230~1298)가 저술한 <황금 전설>에 따르면 쌍둥이 형제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가난하고 아픈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 이 중에서 검은 다리의 기적(Miracle of the Black Leg)은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이야기이다.(Hernigou, 2014) 암으로 다리가 썩어가는 한 백인 노인이 로마의 성당에서 잠이 들었는데, 두 형제가 나타나 썩은 다리를 잘라내고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검은 피부의 무어인 다리로 교체했다. 이 노인은 잠에서 깨어난 후 아무런 통증 없이 잘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검은 다리의 기적과 관련된 전설적인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화가와 작가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 검은 다리의 기적을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Maggioni & Maggioni, 2014). 15세기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작품을 보면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 형제가 오른쪽 다리 무릎 위까지 절단하여 교체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하우메 우게트(1412~1492)의 작품에서는 왼쪽 다리 무릎 위까지 이식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또 다른 작품을 보면 왼쪽 다리를 이식하고 있는데 무릎 아래까지 부분만 절단했다. 이렇듯 작품에 따라 무릎 위 또는 아래까지의 오른쪽 다리 또는 왼쪽 다리를 이식한 것으로 서로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어떤 맥락에서 이러한 차이가 왜 생겨났는지 흥미로우나 아직 그 이유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 유럽의 전역에서 학생을 끌어들였을 때 대학과 도시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은 엄청났다. 프란시스 베이컨을 필두로 등장한 경험주의 사조는 해부학 연구를 더욱 가속화시켰고, 인체를 예술적으로 재구성하는 단계를 넘어 인체 구조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체의 기능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인체 해부의 공개 시연을 통해 대학의 의사들은 객관성과 합리성을 갖춘 지식인임을 과시할 수 있었다. 기성 권위에 대한 도전과 합리적인 지식을 전파하는 수단으로써 해부학은 각광받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해부학적 지식은 교양인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고 해부학 강의는 큰 인기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