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24)

[수재나 클라크] 피라네시

일루젼 2022. 5. 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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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수재나 클라크 / 김해온

원제 : Piranesi

출판 : 흐름출판 
출간 : 22021.10.25 
 


       

외출할 일이 있어서 무겁지 않은 책을 들고나갔다가 홀린 듯이 읽었다. '이런 책이 나오다니?!'라는 느낌인데,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극호다. 새 책들에서 손을 떼고 기존 책들을 읽기로 다짐했는데 이런 책을 만나다니... 저자의 다른 저서인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이 무척 읽고 싶다.  

 

이 책은 잘 쌓인 서사나 친절한 설명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집'은 그저 존재할 뿐이고, 그것은 그로써 완전하다. 

강렬한 이미지들과 감각을 자극하는 전개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에 대해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들이다. 

 

때때로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비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에서나 노래되고 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느냐 아니냐의 차이였을 뿐인 것 같다.  

 

즐겁게 읽었다.  

 


   

 

사람들은 나더러 철학자라고도 하고 
과학자라고도 하고 인류학자라고도 한다.
 
나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다. 
나는 기억상실학자다. 
잊힌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나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을 점친다. 

부재하는 것, 침묵하는 것, 
사물들 사이의 묘한 틈이
내 연구 대상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마법사에 가깝다.

- 로런스 아니-세일스,
1976년 5월 <비밀의 정원>에 실린 인터뷰 중에서
  

    

- 한 조각상을 다른 조각상보다 더 사랑하면 집에 불경한 일을 저지르는 것일까? 나는 이따금 이렇게 자문한다. 내가 믿기로 집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똑같이 사랑하고 축복한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사람이라면 으레 어떤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좋아하고,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의미 있다고 여기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새들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트럼펫을 부는 천사 조각상으로 날아갔고, 다른 무리는 낮은 파도 위를 항해하는 배 조각상으로 날아갔다.
"트럼펫을 부는 천사와 배라. 그렇군."
내가 말했다. 그러고 나서 첫 무리는 커다란 책을 읽고 있는 남자의 조각상으로, 다른 무리는 커다란 접시 혹은 방패를 보여주는 여자의 조각상으로 이동했다. 방패 위에는 구름 형상이 있었다.
"책과 구름이라. 그래."
마지막으로 첫 무리는 고개를 숙여 손에 든 꽃을 바라보는 어린아이 조각상으로 날아갔다. 아이의 머리칼이 얼마나 곱슬곱슬한지 그 자체로 꽃잎 같았다. 다른 무리는 생쥐 떼가 곡식 한 부대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조각상으로 날아갔다.
"어린애랑 생쥐라고, 좋아. 알겠어."
새들은 이제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고맙다! 고마워!"
내가 외쳤다. 내 가설이 옳다면 이것은 분명 새들이 내게 건넨 가장 복잡한 전언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트럼펫을 든 천사와 배.' 트럼펫을 부는 천사는 메시지를 암시한다. 기쁜 소식? 그럴지도. 하지만 천사는 심각하거나 엄숙한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이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배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을 암시한다. '멀리에서 온 소식'이라.
'책과 구름.' 책에는 글이 담겨 있다. 구름은 그곳에 있는 뭔가를 보이지 않게 가린다. '왠지 모르게 모호한 글.'
'어린애와 생쥐들.' 아이는 순수함을 나타낸다. 생쥐는 곡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 조금씩 곡식이 줄어든다. '점점 닳아 없어지는 혹은 침범되는 순수함.'
자 이것이, 내가 아는 한, 새들이 내게 전한 말이다. 

'멀리에서 온 메시지. 모호한 글, 침범당한 순수성.'

흥미롭다.
(리뷰자 주 : 20과 레노먼드.)

 

- 앨버트로스가 남서쪽 홀에 온 해 여섯째 달의 열다섯째 날 기록.
오늘 아침에 남서쪽 둘째 홀에서 나머지 사람이 말했다.

"오늘은 의식을 거행할 텐데, 자네가 여기 있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의식이란 예법에 따라 시행하는 마법인데, 나머지 사람은 그 방법으로 위대하고 은밀한 지식이 이 세상 어디에 붙잡혀 있든 거기서 풀려나 우리에게 오게 하려는 생각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의식을 네 번 거행했고 매번 조금씩 형식을 바꾸었다.
"몇몇 부분을 손봤는데 어떻게 들리는지 알고 싶거든. 말하자면 '현장'에서 말이지."
"도와드릴게요.”
내가 의욕에 차서 말했다.
"좋아. 대신 너무 떠들면 안 되네. 집중해야 하거든. 맑은 정신으로."

 

- "이번 의식은 소환 작업인데 그걸 하려면 예지자가 동쪽을 향해야 하네. 어느 쪽이 동쪽이지?"
나는 동쪽을 가리켰다.
"그렇군."

 

- "그렇다면 말해 줌세. 내가 젊었을 때 시작된 일이야. 나는 동료들에 비해서 훨씬 더 총명했거든. 내가 처음으로 위대한 통찰을 얻은 것은 인류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 깨달았을 때였네. 한때 사람들은 독수리로 둔갑해서 아주 먼 거리를 날아갈 수 있었네. 강산과 소통했고 그들에게 지혜를 얻었지. 머릿속에서 별들의 움직임을 느꼈고, 나와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네. 모두들 진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서 무엇이든 새것이면 옛것에 비해 우월한 것이 틀림없다고 여긴 게야. 마치 가치라는 것이 연대순으로 생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네! 하지만 나는 고대의 지혜가 그냥 사라졌을 리가 없다고 느꼈네.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그런 일은 사실 불가능해. 나는 그것이 에너지가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일과 비슷하다고 상상했고, 그렇다면 이 에너지가 어딘가로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다른 장소들, 다른 세상들이 분명히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지. 그러해서 나는 그곳들을 찾기로 했네." 
"그래서 찾으셨나요?"
내가 물었다.
"그랬지. 이 세상을 찾았지. 이 세계를 나는 '지류支流세상 Distributary World'이라고 부르네. 이 세계는 다른 세계에서 흘러나온 개념에서 만들어졌네. 이곳은 그 세상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존재할 수 없었을 거야. 아직도 그 처음 세상이 있어야 이곳이 존재할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네. 전부 내가 쓴 책에 있네만, 혹시 그 책을 읽지는 않았겠지?"  

"네."
"안됐군. 아주 좋은 책인데. 마음에 들 텐데."

 

- "오래 머무를 수는 없네. 이곳에 머무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기억 상실, 철저한 신경 쇠약, 기타 등등. 그렇지만 자네는 놀랄 정도로 논리 정연하군 그래. 딱한 제임스 리터, 마지막에는 한 문장도 제대로 엮지를 못했는데 그 친구는 여기 있었던 시간이 자네의 반도 안 됐다는 말이지. 아니지, 내가 자네한테 해 주려고 한 이야기는 이걸세." 

그는 차갑고 뼈가 도드라진 건조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나를 자기 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에게서 종이와 잉크 냄새, 제비꽃과 아니스 씨가 잘 조화를 이룬 향이 났고, 그 아래에는 희미하지만 오해할 여지가 없는 뭔가 더럽고 거의 배설물 같은 흔적이 있었다.

 

- 상영시간은 25분이고 맨체스터 주위의 숲과 황야(무어)에서 촬영했다. 슈퍼 8밀리 컬러 카메라로 찍었지만 느낌은 거의 완전히 흑백에 가깝고 검은 숲, 흰 눈, 회색 하늘 등 - 이따금 핏빛 빨강을 썼다. 영화를 보면 신비 의식을 거행하는 고대의 사제가 어떤 작은 공동체를 노예로 속박하고 있다. 그는 남자들은 잔혹하게 대하고 여자들은 학대한다. 한 여자가 그에게 대항한다. 자기 힘을 보여주고 그 여자를 벌주려고, 사제는 주문을 건다. 여자가 강을 건넌다. 한 걸음 내딛자 발이 물에 비친 달의 그림자에 닿는다. 여자는 강에 붙잡히고, 달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사제가 오더니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여자를 매질한다. 그래도 여자는 움직일 수가 없다. 홀로 남겨진 여자는 자작나무 숲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숲을 통과하던 사제는 뒤엉킨 자작나무들에 갇혀 버리고, 나무들은 사제를 붙잡고 몸을 꿰뚫는다. 사제는 움직이지 못하다 결국 죽는다. 여자는 달의 그림자에서 풀려난다. <달/나무>는 대사가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이해가 불가하다. 여자와 사제는 각자 자기 언어로 말하는데, 둘 다 우리 언어와는 상관이 없다. <달/나무>의 진정한 언어는 단순하고 삭막한 이미지다. 달, 어둠, 물, 나무. 

 

- 북쪽 첫째 홀을 빠져나와서 첫째 현관으로 들어섰다. 한두 걸음 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방금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다. 무엇이었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나는 두어 걸음 물러나 출입구로 돌아간 다음 숨을 들이쉬었다. 또 그랬다! 냄새였다. 레몬, 제라늄 잎사귀, 히아신스 수선화 향기.

이 한 곳에서만 향이 꽤 강했다. 누군가가 근사한 향수를 뿌린 사람이 출입구에 한동안 서서, 멀어져 가는 홀들을 내다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북쪽 첫째 홀로 돌아갔지만 거기에서는 향기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첫째 현관으로 되돌아가 거대한 미노타우로스 아래로 벽을 따라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랬다. 거기에서도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출입구에서 서쪽 첫째 홀 사이 그리고 출입구에서 남서쪽 첫째 홀로 이어지는 복도 사이에 있는 어떤 지점까지 그 사람의 흔적을 추적해 갔다. 거기에서 흔적을 놓쳐 버렸다. 이 길을 지나간 사람은 누구였을까? 나머지 사람은 아니다. 그가 사용하는 향수는 나도 알고 있었다. 고수, 장미, 백단유가 들어간 자극적인 향이다. 예언자인가? 그의 향수는 아주 잘 기억한다. 그 역시 매우 다르다 제비꽃이 지배적인 향에 정향과 까막까치밥나무, 장미향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 놀라운 점은 16과 같은 사람이, 파괴와 광기에 그토록 집착하는 사람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그렇게 햇빛과 행복을 연상시키는 향수를 쓴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니 어리석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말했다. 이걸 경고라고 생각해. 조심하라고, 16은 사악한 의도를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을 거야. 보기에는 유쾌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아. 친근하고 사근사근한 태도를 보일 거고, 그렇게 해서 너를 파괴하려는 거야.  

 

- 나는 최대한 중립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사람이 과거에 예언자를 보았으면 말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를 보면 말하라고 한 것이니, 내가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새로운 국면에서 한 가지 좋은 점은 예언자가 자기 홀로 돌아갔고 돌아올 마음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이었다. 

 

- 로런스 아니-세일스는 고대인들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고, 그들이 세상을 자기들과 교류하는 존재로 경험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고대인들이 세상을 관찰할 때, 세상도 그들을 관찰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그들이 배를 타고 이동했다면 강은 모종의 방법으로 자기 등에 그들을 얹고 데려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고 실제로 거기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이 별들을 올려다보면, 별들은 그저 보이는 대로 별자리를 만들 수 있게 해 주는 단순한 패턴이 아니라 의미를 담고 있는 매개체였다. 끝없이 흐르는 정보의 움직임이었다. 세상은 고대인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 이것은 전부 어느 정도는 전통적인 철학 역사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었으나, 아니-세일스가 동료들과 달랐던 부분은 고대인과 세상 사이의 대화가 단지 그들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것이 실제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고대인들이 세상을 인식한 방식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비범한 영향력과 힘을 얻었다. 현실은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조리 있어서 설득될 수도 있었다. 자연은 인간의 욕망에 뜻을 굽히려는, 자신의 일부를 인간에게 빌려주려는 의지가 있었다. 바다가 갈라질 수 있었고, 사람들은 새로 둔갑해 날아가거나 여우로 둔갑해 어두운 숲에 숨을 수 있었으며, 구름으로 성을 만들 수도 있었다. 

- 결국 고대인들은 세상과 대화하고 세상에 귀 기울이는 일을 중단했다. 그렇게 되자 세상은 단순히 고요해진 것이 아니라 변했다. 사람과 끊임없이 소통하던 일부분이 그것을 에너지라고 부르는 힘이라고 부르는 영이나 천사나 악마라고 부르든 더는 이곳에 머무를 자리도 없고 이유도 없었기에 이곳에서 떠나버렸다. 아니-세일스의 관점에서는 실제로, 정말로 마법이 풀려 버린 것이다. 
 

- 한번 발견하면 문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한다. 그저 찾기만 하면 문은 나타난다. 어려운 부분은 처음으로 문을 발견하는 일이다. 아데도마루스가 준 식견을 따라서 내가 최종적으로 결론 지은 것은 문을 보려면 자기 시야를 맑게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려면 반드시 그 장소, 마지막으로 세상이 유동적이라고, 자신에게 반응을 보인다고 믿었던 지리적 장소로 돌아가야 했다. 한마디로 근대의 합리성이라는 철권이 자기 마음을 틀어쥐기 전에 서 있었던 마지막 장소로 돌아가야 했다. 

 

- "저는 그게 나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실종되었을 당시에 뭘 생각했는지 이해하려고 하는 거 말이에요. 아니-세일스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합리성 이전 상태의 사고방식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묘사해 줬어요. 그러면 제 주변에 길이 여러 개 보일 텐데, 그중 어떤 길로 가면 되는지도 말해 줬고요. 저는 비유적인 길을 말하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는 좀 충격이었죠.

 

- 이제 문은 완벽하게 보였다. '앙투안 리부아르'와 '코케트 데 블랑슈'의 틈새에 있었다. 나는 그 사이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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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이 북쪽 셋째 홀에 떴을 때 아홉째 현관에 들어가다. 앨버트로스가 남서쪽 홀에 온 해 다섯째 달의 첫날 기록. 
달이 북쪽 셋째 홀에 떴을 때 나는 아홉째 현관에 들어가 세계의 밀물이 합류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것은 오직 팔 년에 한 번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홉째 현관은 웅장한 계단이 세 개 있어 눈에 띄는 장소이다. 벽에는 대리석 조각상들이 무수히 늘어서 있는데 그런 식으로 한 단, 한 단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가 있다. 

 

- 높이는 대략 육 미터이고 두 가지 남다른 특징이 있다. 첫째, 서쪽 첫째 홀의 다른 조각상들보다 훨씬 크다. 둘째, 미완성이다. 이들은 허리 위쪽만 벽 바깥으로 나와 있다. 두 팔은 뒤쪽 벽을 힘차게 밀어내는 모습이고, 근육은 힘을 쓰느라 부풀어 있으며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이 조각상들은 편안하게 바라볼 수가 없다. 이들은 고통스러워하는 듯, 태어나려고 기를 쓰고 있는 듯 보인다. 이는 아마도 헛된 몸부림일 테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머리에 화려한 뿔이 있어서 나는 이들을 '뿔 달린 거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들은 비참한 운명에 맞서려는 분투와 노력을 상징한다. 

 

- 이른 저녁에 나는 여덟째 현관으로 가서 낚시를 했다. 나머지 사람과 나눈 대화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녁식사와 석양에 비치는 조각상들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서서 아래쪽 계단의 물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데, 어떤 영상이 눈앞에 떠올랐다. 잿빛 하늘에 검정색으로 휘갈겨 쓴 듯한 글자와 새빨간 뭔가가 깜빡이는 장면이 보였다. 단어들이 내 앞으로 둥둥 떠왔다 - 검정색 배경에 흰색 글자였다. 그와 동시에 요란한 소음이 들리고 금속성 맛이 혀에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온갖 영상들 영상이라기보다 영상의 흔적이나 쪼가리에 불과한 것들이 그 이상한 '배터시'라는 말 주위로 모여드는 듯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붙잡으려고, 더 선명하게 보이게 만들려고 해 보았지만 그것들은 마치 꿈처럼 희미해지다가 사라졌다.  

 

- 이 앞의 일지(9번 일지)를 살펴보면 내가 지난해 마지막 달과 올해 처음 한 달 반 동안 글을 아주 적게 썼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이런 일이 이따금 발생하는 이유는 아래 기록하려고 한다). 이 기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줄곧 그에 관해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지금 하겠다. 

 

- 앨버트로스가 남서쪽 홀에 온 해 여섯째 달의 스무째 날 두 번째 기록. 
보름달이 서쪽으로 기울면서 홀에 비치는 달빛은 약해지고 문 맞은편 창으로 보이는 별자리들은 점점 밝아졌다. 나는 어떤 별자리와 별이 보이는지 기록했다. 새벽이 되자 나는 몇 시간 잠을 잔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에 나섰다.


- 나는 걸으면서 위대하고 은밀한 지식, 나머지 사람 말에 따르면 우리에게 이상한 새로운 힘을 부여할 그 지식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뭔가를 깨달았다. 내가 더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 모르겠다. 나는 그 지식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 마찬가지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것을 찾아다니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 이 깨달음, 그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깨침은 내게 일종의 계시로서 다가왔다. 다시 말해, 그 이유나 거기에 이른 과정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그것이 옳다는 점을 알았다는 뜻이다. 그 과정을 되짚어 보려고 하자 달빛에 비친 서쪽 백아흔 둘째 홀의 이미지로, 그 아름다움으로, 그 깊은 평온함과 달을 향해 고개를 돌린(혹은 돌린 듯 보이던) 조각상들의 얼굴에 비친 경건한 표정으로 생각이 되돌아갔다. 내가 깨달은 바, 지식을 찾으려다 보니 우리는 집을 풀어야 할 모종의 수수께끼로 해석해야 할 하나의 텍스트로 여기게 되었고, 우리가 만약 그 지식을 정말로 발견한다면 집은 가치가 다 벗겨져 나가 오로지 풍경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될 터였다.  

 

- 달빛에 비친 서쪽 백아흔 둘째 홀의 모습을 보고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집이 귀한 까닭은 그것이 집이기 때문이다. 집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목적에 다다르게 해 주는 수단이 아니다. 

 

- 이런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나머지 사람이 그 지식을 얻으면 생길 것이라고 설명한 능력들에 늘 마음이 불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나머지 사람은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할 힘이 생길 거라고 말한다. 음... 일단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은 없다. 여기에는 그와 나뿐이고 우리 둘 다 지적으로 예리하고 기민하다. 그러나 잠시 열등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내가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싶어 질까? 지식 탐색을 중단하면 우리는 새로운 과학을 자유로이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가 이끄는 대로 어디든 따라갈 수 있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자 들뜨고 즐거워졌다. 나는 나머지 사람에게 돌아가 이것을 얼른 설명해 주고 싶었다. 

 

- "알겠지만 예전에 자네가 부탁했을 때 내가 오지 않기로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네. 자네가 나한테 쓴 편지 말이야. 그때는 자네가 시건방진 애송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때 자네는 아마 그랬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매력적이군. 상당히 매력적이야."
 

- 어제 나는 다시는 일지의 내용을 읽거나 찾아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지 열 권과 색인을 거친 파도에 던져 버리는 모습을 떠올리고, 그것들이 없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질지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어제보다 차분하다. 두려움과 공황에 어제처럼 놀아나지 않는다. 오늘은 일지를 조사해 볼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심지어 미쳤을 때 쓴 부분조차 - 어쩌면 특히 그 부분을 -. 첫째, 나는 이곳에 살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더 많이 알고 싶었고, 이해가 안 가기는 하지만 일지에는 그들에 관한 실제 정보가 담겨 있는 듯싶다. 아무리 기이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더라도. 둘째, 나의 정신 이상과 관련한 정보, 특히 무엇이 원인인지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최대한 많이 알아내야 한다. 어쩌면 일지에서 지난 일을 살펴보다 보면 이런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일지를 읽는 행위 자체가 정신 이상을 촉발하는 행위라는 점을,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감정과 악몽 같은 생각이 떠오르게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조심스럽게 나아가면서 한 번에 아주 조금씩만 읽어야겠다. 

- 너는 집을 신뢰해?
나는 자문한다.
그래.
나는 대답한다.
집이 너로 하여금 기억을 잊게 만들었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난 그 까닭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네가 이해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 너는 집의 사랑스러운 자녀야. 안심해.
그래서 나는 안심했다.

 

- 두 주 전에 나는 집에 있는 학자들 조각상을 본 덕분에, 언뜻 보기에는 말이 안 되는 이 단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운 바 있다. 당시에는 이 가설이 설득력이 약하다고 무시해 버리려고 했는데 이제는 훨씬 더 그럴듯해졌다. 비록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는 개념이 대학 외에도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나는 정원이 식물과 나무들을 보면서 심신을 쉬게 하는 장소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정원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일 뿐 아니라 그런 개념을 나타내는 조각상도 없다(나도 정원의 조각상이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상상이 안 간다). 대신 집 여기저기에 있는 조각상들 중에는 장미와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여 있거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는 사람들이나 신들이나 짐승들 조각이 있다. 아홉째 현관에는 정원사가 땅을 파는 조각상이 있고 남동쪽 열아홉째 홀에는 다른 정원사가 장미 덤불을 가지치기하는 조각상도 있다. 바로 이런 조각상들에서 나는 '정원'이라는 개념을 유추한다. 나는 이것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집이 사람들 마음에 새로운 개념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불어넣는 방법이다. 집이 나의 이해를 넓게 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깨달음이고 나는 이제 일지에 적힌 무의미한 단어를 보고 설명할 수 없는 심상이 떠올라도 그렇게 경계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걱정하지 마. 집이 그러는 거야. 집이 너의 지식을 넓혀 주는 거야. 

- "그리고 로런스 아니-세일스는 탁월한 초월적 사상가죠. 그 사람은 수많은 경계를 넘어갔습니다. 마법을 주제로 쓰면서 그게 과학인 척했죠. 매우 지적인 사람들을 설득해서 다른 세상들이 있고 그들을 거기로 데려갈 수 있다고 믿게 했고요. 아직 불법이던 시절에 동성애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 남자를 납치했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르죠." 

 

- "당신 얘기는 로런스가 무슨 무대 마법사라도 되고 우리가 전부 순진한 눈망울의 봉이라는 거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그 남자는 사람들이 자기한테 반박하기를 바랐어요. 이성주의의 견해를 내세우기를 바란 겁니다." 
"그러고 나면요...?"
"그러고 나서는 상대방을 뭉개 버리는 거죠. 그의 이론은 단순히 연기와 거울 같은 속임수가 아니었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남자는 모든 걸 치밀하게 계획했어요. 어느 정도까지는 완벽하게 논리 정연했죠. 그리고 그 남자는 지성과 상상력을 결합하는 걸 겁내지 않았습니다. '전근대인'의 사고방식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이제까지 내가 접해 본 이론 중 최고로 설득력이 있었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렇다고 그 남자가 사람들을 조종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확실히 그랬으니까요."

 

- "의식인지 뭔지 그런 걸 그 사람이 왜 했을까요? 그 사람이 쓴 글에는 당신 이론을 믿었다는 암시는 전혀 없는데요. 오히려 그와 반대죠."
"아, 믿음이라."
아니 - 세일스가 그 단어를 조롱하는 태도로 누르듯 강조하며 말했다.
"왜 사람들은 항상 그게 믿음의 문제라고만 생각하지? 그렇지 않아. 자기들 '믿고 싶은 대로' 믿으라고 해. 난 아무 상관 안 하니까."
"그래요, 하지만 믿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애초에 왜 시도했죠?" 
"왜냐하면 그 남자도 머리가 없지 않고 내가 이십 세기의 위대한 지성들 중 하나라는 걸, 어쩌면 그들 중에서도 최고라는 걸 인식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나를 이해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다른 세계에 가 보려고 한 거야.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런 시도 자체가 내 생각을 들여다볼 통찰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내 마음속을 말이야. 그리고 이제 당신도 똑같이 할 거야."
"제가요?"
래피얼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당신은 로즈 소런슨이 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할 거야. 그 친구는 내 생각을 이해하고 싶어 했어. 당신은 그 친구를 이해하고 싶어 하고. 이제 내가 곧 묘사하는 대로 인식을 조정하시게. 내가 알려주는 대로 하면 알게 될 거야."
"뭘 안다는 거죠, 로런스?"
"매슈 로즈 소런슨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돼."
"그렇게 간단하게요?"
"그렇고말고, 그렇게 간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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