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석원
출판 : 달
출간 : 2020.12.02
11월 초중순의 시기의 나는 지금 돌이켜봐도 묘한 구석이 있었다. 평소 일상적으로 해오던 모든 것에 관심과 열정이 사라지고, 근 일주일 내도록 단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꽤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하나를 파고들었던 게 얼마만인지. 어느 쪽이 더 낫다거나, 나답다고 느껴진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다. 단지 '나'라고 인식되는 존재의 영역이 생각보다 넓었다는 재확인에 가깝다.
그 어딘가의 경계를 떠돌고 있던 내가 현재의 루틴으로 돌아오게 만든 책이 이 책이다.
나는 자주 책에 관한 정보를 전혀 찾아보지 않고 읽는 편인데, 특히 집에 쌓아둔 책 중에서 골라 읽을 때는 저자도 확인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번도 그런 경우였다. 에세이치고는 글쓴이가 토로하는 자신에 대한 인식들이 생각보다 크고 강하다는 느낌을 받고, 이전에도 나는 이런 느낌을 느낀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을 때에야 연결이 되었다. 아. 이 저자는 <보통의 존재>를 썼던 사람이구나. 맞다, '언니네 이발관'의 그 이석원이구나. 이 사람은 자신에 대해 치열할 정도로 고민해본 사람이구나.
자기 자신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상당히 많은 모순들이 발견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을 항시 생각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 상황에 가장 '나다운' 것에 대한 인상 정도는 품고 있는 법인데, 나중에 모아놓고 보면 일관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런 모순은 의외로 일관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더욱 강하게 두드러지곤 한다.
가장 '나다운' 것을 한 번이라도 깊게 고민해본 사람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믿었던 이상적인 나와는 사뭇 다른 모습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는 '나라고 느끼는 나'와 '내가 되고 싶은 나' 사이의 끝없는 갈등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다듬어본 이들일수록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순의 경계는 선명하고 짙다. 다듬지 않은 모순들은 경계를 이루지 못한 채 넓게 퍼져 있다.
해서 나는 그렇게 다듬어진 모순의 면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극명한 대비와 매끄러운 단면은 보석의 커팅면과도 비슷한 느낌인데, 관찰하는 기분 또한 보석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한 저 경계는, 어떤 순간에 어떤 일을 겪으며 다듬어지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몰래 두근거리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를 발견하면 괴로워진다. 그건 메두사의 괴로움과도 유사한데,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인 걸 알면서도 굳어버리게 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말과 실체의 불일치, 그리고 그 큰 간극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자기 도취에 빠진 모습은 당장 그 자리를 벗어나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 그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는 걸 알고 있더라도, 괴로운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탈피는 생존과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새롭게 굳어가는 살보다는 벗겨져나간 피 쪽에 더 자주 이입하게 되는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을 굳이 의연하게 맞서기보다는, 새로운 보석을 찾아 나서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내가 어떤 것을 마주하고 있을 때 더 행복한지를 감각하는 힘, 그리고 무엇을 닮고 싶은지 선택하는 힘 또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이 그 순간의 나 -이상적인- 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날 때부터 2인조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잘 지내는 일이
나는 왜 그리 어려웠을까.
- 글쎄.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그런 의문은 들었다. 나는 셀럽일까 아닐까. 당연히 아니지만 나란 사람의 처지가 조금 모호한 구석은 있다. 어디 가면 다 알아보는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세상 아무도 모르는 사람은 또 아닌, 이상한 중간자적 존재랄까.
- 진료 당일 아침. 오랜만에 가본 대학병원은 마치 호텔처럼 크고 쾌적해서,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취제 같았다. 고통과 두려움, 적막과 고독감 같은 질병을 다루는 공간 특유의 감정들이 건물이 주는 산뜻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고 할까.
과연, 보이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다를까.
-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진료실 앞에는 간호사가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초진 담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재진 담당이었다. 정확한 속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소속이 달라 보이는 두 사람 중, 초진 담당은 심할 만큼 친절했고 재진 담당인 다른 간호사는 놀랍도록 사무적이고도 차가웠다.
"병원은 서비스를(친절을) 파는 곳이 아니에요."
라며 내가 알던 어느 정신과 의사가 진저리를 치던 기억이 난다. 환자들이 조금만 자신이 불친절을 겪거나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쉽게 폭발을 하는지 수없이 겪은 끝에 생긴 일종의 노이로제였다.
- 짧은 시간 안에 나와 내 증상에 대해 설명해야 했던 나는 늘 그렇듯 정신을 바짝 차린 채 내가 얼마나 다른 환자들과는 다른 사람인지를 보여주려 애썼다.
"나는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느라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고, 먹으라는 약 먹지 않으며 지시에 따르지도 않는 그런 진상 환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입니다. 난 몹시 예의 바르고 눈치도 빨라서, 의사들이 진료 시간이 오버되거나 자신을 믿지 않는 환자들을 만났을 때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도 너무 잘 알지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절 믿으세요."
나는 마치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이, 어떻게든 상대를 안심시키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당신에게 완벽하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듯이.
- 일단 한계선을 넘고 나니 운동, 식사 조절 등 어떤 개인적인 노력도 듣지 않았다. 마치 스트레스에 대항하는 능력이란 게 마지막 한 방울까지 완전히 소실된 것만 같았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왜 나는 나를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 나를 구원할 것은 단순히 의사와 약 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내 삶 전반을 돌아보고 고치고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내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저 한 개인의 비과학적 추정 따위가 아닌, 길고 꼼꼼한 의학적 탐색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생의 반환점을 넘긴 한 사람이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다가올 남은 생을 도모하기 위해 써 내려간, 한 해 동안의 기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 저는 이제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은 마음에 음악을 관둔 거였는데, 그러고서야 안 거예요. 내겐 음악과 글이 서로에게 출구와 도피처가 되어주었었다는 걸.
- 그 모든 일은 십 년간 꾸려온 제 블로그에서 벌어졌어요. 저는 그곳에서 독자들과 꽤 가까이서 소통을 하는 편인데, 여러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이니만큼 이런저런 일들이 생길 때면 전 무슨 일이든 일단 회피를 하거나 다 제 잘못입니다 하며 지내왔어요. 아니면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죠. 그곳에서 썼던 글만 해도 그래요. 저는 그곳에서 지나치게 예의 발랐고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을 글만 쓰려했어요. 저는 그 역시 독자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라 글을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지도 않은 어떤 것.
- 그게 내 스스로 내린 첫 번째 처방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 그 어떤 순간에도 '나'보다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
비록 그게 가족이나 다른 어떤 중요한 존재라 할지라도.
- 저는 그렇게 다시 건강해지고 남은 생을 잘 살기 위한 내 삶의 매뉴얼의 첫 장을 써 내려갔어요.
그게 내 치료이자 회복의 시작이었죠.
- 중요한 건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었어요. 나는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고 때로 그 존중은 스스로가 이끌어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노'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면 어떤 존중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죠. 어쩌면 진작부터 알았지만 이제 와서야 비로소 실천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태어난 지 사십팔 년 만에.
- 이게 인간인가?
말했었다.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고. 이제는 이런 상황에 처할 때면 이 모든 게 어질러진 내 삶 때문인 것만 같아 마음이 두 배로 괴롭다.
정리해야 한다. 삶의 가능한 모든 것들을. 더 이상 이런 일들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 나는 한국 사람. 평생을 뭐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만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다. 어떻게 하면 잘 쉬는 것인지 그게 왜 중요한지, 쉬는 동안엔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어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인지 취미가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좋아했던 음악 듣기는 직업이 된 후로 그 즐거움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고, 여행이나 자전거 타기 등 남들 같은 취미가 없다 보니 그냥 일에 매달리다 쉴 때는 할 게 없어서 다시 일을 하며 그렇게 살았다. 일이 일이고 일이 취미였다고 할까. 변변한 취미라도 하나 있어서 제대로 쉬면서 충전도 했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하여 생겨난 네 번째 지침. 잘 쉬는 법을 익혀라. ㅡ 그러기 위해서는 취미를 가져라.
- 나는 내게 평생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긴 휴식, 다시 말해 일종의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그 시간을 채울 무언가를 찾는 것은 사뭇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취미를 찾는 일이 절실하다는 게 조금 우습긴 했지만 그걸 찾지 못하면 쉴 수가 없고 사람이 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번 일로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 누구든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불행하지 않으며 또한 남들이 짐작하는 것만큼 행운아도 아니다.
- 그런데 그때 친구의 결혼식 이후 찾은 백화점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던 어릴 적 그 감정이 수십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금 전해지는 게 아닌가.
처음엔 며칠 그러다 말 줄 알았다. 난 워낙 권태도 빠르고 뭐 하나 진득하게 좋아하질 못하는 놈이니까. (그래서 좋아하는 게 잘 없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4월 초순께 시작한 그 옷 쇼핑 백화점 나들이가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삼일이 되더니 열흘을 넘기도록 계속될 줄 누가 알았을까.
- 삶의 어떤 분야든 어느 하나를 집중적으로 경험해보고 심지어 잘하기까지 해 본 사람은 다른 일도 잘할 수 있을까? 나는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세상일이란 게 분야는 달라도 원리는 (대개) 비슷하기 때문이다. 가령 평생 운동만 해온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교수가 된다거나, 소설가나 시인이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해 거장이 된다든가 하는 예가 그렇다. 옷을 사는 일 역시 파고들고 몰두라는 걸 해보니 그저 허영의 퍼레이드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도 성공과 실패가 있었고 낭비와 효율이 있었으며 옷을 보러 다니고 사는 과정에서 나름의 관계란 것들이 생기고, 그래서 소통도 하고 정보의 수집과 교류의 문제도 겪고, 재정에 대한 계획을 세워서 형편 내의 합리적 소비를 추구하는 경험도 해보고, 때로는 속이 뻥 뚫릴 만큼 부러 과소비도 해보고... 그러면서 하여간에 옷에 관한 거의 모든 것들의 삶이었으며 끝내 그것들은 내 다른 일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니, 나는 그 일을 통해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들이 훨씬 더 많은 셈이었다.
- 또 뭔가에 몰두한다는 건 결국 나의 시선을 나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안다는 건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을 아는 일이었기 때문에. 결국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몰라 그렇게 고민을 했던 것은 그만큼 나를 몰랐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
- 그런데 내가 무슨 정신에서 그랬는지 "이 책 좋아하시나봐요" 하고 약간 의외라는 듯, 마치 이런 것도 읽으실 줄은 몰랐다는 듯 말을 건넨 것이 발단이었다. 그는 그런 내 말의 의도를 간파해 이 책이 어떻길래 그러느냐고 발끈하거나,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런 사적인 대화를 시도하느냐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갑자기 너무도 절망적인 표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내게 이렇게 대답했는데,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거라도 읽지 않으면 미쳐, 아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 모르겠다. 내가 그때 놀랐던 건 대체로 평온하던 그의 갑작스럽고도 격했던 감정의 표현만이 아니었다. 평소 난 손님과 매니저라는 관계에서 벗어나는 말을 그렇게 먼저 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닌데, 내게서 그런 돌발적인 행동이 나온 것에 우선 놀랐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니 이 옷 쇼핑을 시작하던 두 달 전만 해도 매사에 주눅이 들어 있던 내가, 지금은 이만큼이나 활력을 회복한 덕분이란 것을 알고는 두 번째 놀랐다. 그건 많은 돈을 들여 비싸고 좋은 옷으로 내 몸을 둘렀기 때문이 아니라 아프기 시작한 지난 넉 달 동안 끊임없이 나를 격려하고 작게라도 내게 선물을 하고 내 삶을 정리하면서 쌓아온 매뉴얼에 충실히 따른 결과였는데, 그래서 난 또 놀랐다. 그 한 마디를 함으로써 한 달 넘게 그저 내게 뭔가를 파는 사람일 뿐이었던 그가, 단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예외를 두지 않던 사람이 그 후로 자기 얘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해 우리가 뭔가를 나누게 되었기 때문에.
- "손님, 그런 게 어딨어요. 손님이 입고 싶으신 대로 입으시면 되죠."
뜻밖이었다. 트렌디한 매장에서 그렇게 세련되게 옷을 차려입은 전문가에게서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러니까, 너희들만 그렇게 멋진 것 입지 말고 나한테도 좀 너희들의 룰을 알려줘, 나 혼자 힘으로 하려니까 너무 힘들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하는 뜻으로 물은 거였는데, 그는 그런 게 어딨냐고 하니 말이다. 그 뒤 그가 덧붙인 말과 그의 태도 등을 보면 그건 결코 손님에게 성의 없이 건넨 의례적인 말이 아니었다.
"스키니를 입고 싶으시면 입고 정사이즈를 원하면 하시고 오버핏을 원하면 그러세요. 손님이 원하는 스타일, 입는 방식이 있으실 것 아니에요. 그 선에서 최선을 추구하는 게 언제나 베스트죠."
그러더니 그는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기 위해 돌아서면서 '자기 께 있으신 분 같은데...' 하고 덧붙여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 그렇구나. 그냥 내가 입고 싶은 대로, 내 스타일대로 입으면 되는 거였구나. 그런데 왜 난 나는 모르는 세상의 방식이 있는 것만 같아 그걸 궁금해하고 나만 거기서 동떨어진 것 같아 소외감을 느끼고 그랬을까. 놀랍게도 그때 그 매니저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 난 어떤 옷을 보고도 그게 예쁜 건지 아닌지를 내 판단으로는 알 수가 없어서 항상 묻곤 했다.
- 우습지 않은가. 옷이란 건 내 눈에 예뻐 보여야 하는데, 내 눈에 그러면 되는데, 그 판단을 남에게 묻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질문을 받아야 했던 직원들이 매번 약간은 당황해하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날 그 매니저의 한마디는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떤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을 떠올리게 했다.
- 누구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게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게 음악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아닌 바로 장사를 할 때 찾아왔다. 이천 년대 중반 와인을 팔 기회가 생겼는데 그땐 음악을 그만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그 일을 하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그런 쪽에 일절 경험이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그 분야의 전문 컨설턴트라는 사람들을 만나 상담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내가 불과 한 이삼일 매장 주변을 돌며 나름대로 조사하고 파악한 것과 반대의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 동네의 인적이 밤 언제쯤 끊기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과 달리 그들은 그저 세간의 통념을 그대로 전할 뿐이었다. 때문에 난 소위 그 요식업 컨설턴트라는 사람들의 전문성을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 그때 내 나름대로 구축한 나만의 방식이란 게 통하는 걸 보면서, 나의 인생은 많이도 바뀌었다. 그게 인테리어가 됐든 요리가 됐든 다른 무엇이 됐든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옳다 싶은 방식으로 누가 뭐라든 밀어붙이는 게, 안 돼도 될 때까지 해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 덕분이었다. 그전까지는 막연하게 나는 모르는 세상의 룰이 있어서 그게 정답일 거라 믿고 찾아다녔다면, 그때부턴 나의 룰을 세상에 적용시켜가게 된 것이다.
- 그저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작업에 임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으며 방해를 용납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야만 내 것이 나오고 그래야 성공이든 뭐든 노려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내 나이 서른여덟 즈음의 일이었다.
- 그렇다고 내 방식을 버려야 하나? 언젠가는 나도 창작자로서 낡고 뒤처지는 사람이 되는 날이 올 테지만 한두 번의 실패로 그런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 그 뒤로도 내 방식을 고수한 결과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를 기록하였는데, 문제는 그때그때의 성적표가 아니라 그 모든 일들이 내게 주는 의미였다.
세상의 인정과 평가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 성인이 되어 근 평생을 해온 그 일의 의미 말이다.
- 뭐가 됐든 너를 평가하는 사람을 평가하라.
이 지침은 개인적인 영역이든 공적인 영역이든 가리지 않고 적용된다. 작가로서 수많은 평가에 직면하게 되는 나를 예로 들어보자면 독자의 평가에 대해 그가 날 평가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따져 보는 것은 오만하게 비칠 수도 있는 일일 테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외용이 아니라 철저한 내면용, 즉 내 정신건강과 결부되는 일이므로 나로서는 정당성을 갖는다. 그래야 불필요한 마음의 상처를 줄이고, 내게 약이 될 만한 쓴소리를 가려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나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 가령 누가 내 글을 보고 이걸 글이라고 썼어? 라고 했을 때 그 이유와 근거, 또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인지 등을 따져보는 일은 중요하다. 안 그러면 공연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일격을 당한 사람의 반사적 행동이나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불필요한 데미지를 줄이고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하기 위한 건강하고도 건조한 행위이다. 나는 보통 그럴 때 내게 빵점을 준 사람이 칭찬한 다른 작가를 본다. 그런데 그의 리스트에 내가 이걸 글이라고 썼나 싶은 작가가 있다면 나는 아무 데미지 없이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이런 작가를 좋아하다니 세상에 날 평가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야, 하고 여겨서가 아니라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어긋남일 뿐이라는 것.
-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남을 평가하고 그때마다 자신이 일종의 심사위원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남을 평가한다는 건 사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많이들 잊고 산다.
- 그래서 나는 노력은 이 문제에 있어서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건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라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생존을 생각하는 처지라면 다들 절박한 만큼 비슷비슷한 최대치의 노력을 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다들 하는 그 노력이란 것 외에 무엇을 해야 좀더 오래 생존할 수 있는지가 문제라는 것.
- 다만 중요한 것. 기왕에 여러 일을 가졌을 때 그중 적어도 하나쯤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래야 일을 하는 과정이 즐거워지고, 결국엔 그 과정이 좋은 결과를 낳아 그만큼 오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기에.
- 이것은 결코 한가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음악과 글이라는 두 가지 일을 하다가 하나를 그만둔 후 남은 일에 대한 나의 스트레스는 몇 배로 커졌다. 글 쓰는 것을 유일한 일로 만들어버린 대가였다. 그전까지 글은 음악과는 달리 아직은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에 가까웠지만 그때의 선택으로 인해 끝내 하기 싫은 숙제 같은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일의 가짓수를 불려도 모자랄 판에 하나로 줄여버린 대가는 내게 그렇게나 가혹했다.
- 그러므로 뭐든 좋으니 다른 일을 하나 더 마련해두는 것은 나 같은 창작자나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회사원에게도 중요한 일이 아닐까. 언제든, 세상이 나를 파이어하기 전에 다른 보험을 들어놔야 한다. 항상, 패를 쥐는 쪽은 내가 될 수 있도록. 그래야 덜 불안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의 멘탈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남보다 덜 타격을 받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할 테니까.
- 오직 최선을 다해본 사람만이 최선을 다해도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안다.
- 언젠가 무슨 일이 생겨서 일정이 한 육 개월인가 스톱된 적이 있었어. 그 기간 동안 드물게도 아무 스케줄이 없었지. 그때 난 되게 슬펐는데 무려 반년이나 음악을 하지 못해서였을까? 아니. 내가 슬펐던 이유는 그 반년 동안 내가 단 한 번도 내 기타에 손을 댄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어. 한마디로 난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면 내가 좋아서는 결코 기타를 잡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아버렸던 거지.
- 그때 난 안 거야.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지 않는지를. 원래 내게 음악은 결코 돈벌이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너무 아득한 시절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음악은 내 거의 유일한 친구였는데.
- 내가 음악을 할 때 사운드에 그렇게 신경을 썼던 건 그걸 곡의 일부로 이해했기 때문이지 남들처럼 단순히 좋은 음질을 추구하기 때문은 아니었거든. 나는 사운드가 멜로디의 감도나 편곡의 전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주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했을 뿐, 집에서 그냥 즐길 목적으로 음악을 들을 때는 아이패드로 들어도 충분하고 그마저도 거의 듣지 않지. 그런 내가 좋은 오디오를 갖춘다고 해서 그게 날 즐겁게 하고 안 듣던 음악을 듣게 되고 그럴까? 그게 인테리어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어서 내 삶을 풍요롭게 할까?
모르겠어. 뭔가를 하고 싶은지 아닌지 그렇게까지 모르겠으면 그건 이미 하고 싶은 게 아니더라고. 나중에 어찌 될지는 몰라도 말야.
- 지난 육 개월 동안 난 새 책을 위한 원고는 전혀 쓸 수 없었지만 내 블로그, 내 인스타, 내 일기장엔 하루도 안 빼고 몇 개씩 글을 써왔어. 블로그는 십 년째 공개 일기장은 어느새 이십 년이 넘었지. 지워진 것까지 합치면 그간 거의 몇천 개의 글을 썼을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좋으니까.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난 그 모든 나의 개인적인 지면에 각기 완전히 다른 톤의 글을 써.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 다른 사람이 쓴 건 줄 알 만큼 말야. 근데 그걸 어떻게 다 하느냐면 좋아서 해. 난 이렇게도 쓰고 싶구 나의 또 다른 면도 보여주고 싶구 하여간에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으니까.
- 봉준호 감독은 무려 열두 살 때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후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만큼 계속해서 그 일을 좋아했다고 해. 나는 그게 그 사람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탄 것보다 더 부러워. 평생의 자발성을, 그것도 그 어린 나이에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게 말야. <옥자>를 만들고 번아웃 판정을 받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을 때에도 그는 어서 <기생충>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곧바로 다시 일을 할 수 있었다잖아. 바로 그 원동력이 되어준 자발성. 누가 시키면 못하지만 내가 원하는 한 어떻게든 하게 되는, 그 힘의 원천. 하고 싶다는 마음.
- 반면 나는 열두 살은커녕 오십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뭐 어때, 나는 나대로의 삶이 있는 거잖아. 난 비록 아직도 내가 좋아할 만한 일을 찾고 있지만 어쨌거나 나는 내 삶이 지금보다는 더 나은 모습이 되길 바라는 이 마음이 도무지 식지를 않는다는 게 좋아. 스스로 조금 대견한 기분이랄까. 세월에 구애받지 않고 지속해서 추구하는 바가 있다는 게 말야.
-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고민과 생각들은 결국엔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행복이란 뭘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걸까.
나는 항상 그걸 생각해.
- 심지어는 봉준호가 아카데미상을 탔다는 소식에 나는 그동안 뭐했지? 하는 생각에 괜히 초라해지기도 한다. 진짜냐고? 누군가 무려 아카데미씩이나 탄다는 건 보통 사람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일 텐데 정말 그런 일이 있을 때 자신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냐고? 많다. 같은 직종에 있는 영화 종사자들은 물론이요 영화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냥 일반 피플들까지, 전자는 그렇다 치는데 후자는 뭘까. 왜 그런 터무니없는 먼 사람의 일조차 부럽고 비교가 되고 그러는 걸까.
그것은 행복으로 가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포인트 자의식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 자의식에 대해서는 여러 사전적, 개인적 정의들이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내가 나에 대해 인식하는 여하한의 모든 정신적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랬을 때 늘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나 스스로를 너무 큰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고, 이것을 자의식의 비대, 또는 자의식이 과잉되었다고들 흔히 표현한다. 쉬운 예로, 운동 경기를 볼 때 '내가 보면 응원하는 팀이 진다'고 믿는 사람들의 믿음 역시 일종의 자의식 과잉이다. 수십 수백만이 시청하는 경기의 승패가 나의 운세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운동 경기야 애교로 넘어갈 수 있지만 자의식이 너무 크면 스스로의 삶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두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저 평범한 동네 형일뿐인데, 세상에 잘났다는 사람들은 전부 가져다 자신과 비교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겉으로 내어놓고 말하진 못해도 최소한 내 안에서 나는 그들과 동급이기 때문에 나는 이러고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 즉 그만큼 큰 존재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어찌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어째서 그럴까요. 어째서 제대로 된 사과를 접하기가 그토록 어렵고, 늘 남의 사과에 대해 그것으론 부족하다, 무엇 무엇이 빠지고 잘못되었다 지적하고 평가하던 사람조차 자신이 사과할 일이 생기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은 세상 모든 일에 자신을 중심으로 놓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 해도, 어쨌든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하면 그것을 시련으로 인식하기 쉽죠. 이것은 그 자신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계속 세상의 중심에 '나'만을 놓은 채 살아가게 되면,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도 자신의 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엄청난 운명에 처한 이 가련한 나'밖엔 보이지 않게 될 수도 있죠.
-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든 스스로를 연민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강도가 커지고, 그러한 상태가 너무 잦아지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결국엔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는 눈이 멀게 됩니다.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타인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에 도취되어 자신의 행이나 불행을 과장하고, 늘 자신을 피해자로 여긴다거나, 무슨 일이 벌어져도 자신의 입장에서밖엔 생각하지 못하게 되죠.
- 자기 연민, 자의식 과잉, 자기도취... 이러한 것들은 누가 먼저인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연관이 깊고, 인간이기 때문에 완전히 배제한 채로 살 수는 없어요. 자의식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게 과잉되거나 너무 부족하지 않도록 우린 노력해야 합니다.
- 저는 어떨까요. 저는 저를 과대평가하기보단 대체로 비하하는 편이죠. 난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도 나 같은 사람 좋아하지 않을 거야, 하는 식으로 말이죠. 저처럼 자기 비하나 혐오가 심한 것도 일종의 자의식 과잉입니다. 자신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거나, 남들이 그렇게 평가할까 두려워 미리 선수를 치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느 쪽이든 늘 경계해야 해요. 자의식은 썩지 않는 나무처럼 언제나 자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지를 뻗으니까요.
- 또한 타인의 자의식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고 평가하는 일을 남발하는 것은 본인의 자의식 역시 위기에 처해 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자의식 측정기가 아니며, 어떤 일이건 사람이 습관적으로 남을 평가하는 상태에 있다는 건 본인의 내면이 허약해진 상태라는 방증이기 때문이죠.
- 흔한 환경 운동가들의 홍보 전단지구나 싶어 나는 별 감흥 없이 그걸 손에 쥔 채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뭐 오염이야 시키겠지. 그런데 그런 거 다 신경 쓰면서 어떻게 세상을 살어.
그러나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해서는 차에 쓰레기를 두기 싫어가지고 내린 전단지를 무심히 들여다보던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말 이게 사실이란 말인가?
- 가령 이런 것이다. 내가 좋아서 산 한 장의 면 티셔츠를 만드는데 무려 2,700리터나 되는 물이 소요된다면 어떨까. 여러 벌도 아니고 한 벌, 그것도 평범한 반팔티 한 장을 만드는 데 드는 물이 사람 한 명이 이 년 반 동안 마시는 물의 양과 같다면. 그 하얀 도화지 같은 티 위에 그림이나 색깔을 입히기 위해 엄청난 양의 고독성 물이 만들어져야 한다면.
-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예쁘지만 간단해 뵈는 녀석들을 만드는 데 어째서 그렇게나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지. 검색을 통해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한 전단지에는 그 밖에도 이와 비슷한 정보들이 여럿 들어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5조 리터의 물이 직물 염색에 사용된다든가, 그 대부분이 폐수로 강과 농지에 버려져 이 지구의 물과 땅을 심대히 오염시키고 있다든가 하는 내용들. 물론 그것들은 언젠가 내가 먹고 씻을 물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 이런 정보들은 사실 익숙한 것이긴 하다. 우리가 먹는 그 많은 고기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잔인하게 도륙당하고 있는지, 그 많은 소와 돼지들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환경과 기후의 오염이 이뤄지는지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며 오늘도 맛있게 고기를 먹는다. 그런 문제들을 일일이 신경 썼다간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도 맞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이 문제를 그냥 두고 넘어가야 하나? 모르고 넘어갔다면 모를까 이렇게 알아버렸는데?
- 세상의 부당하고 불편한 일들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되 부정적인 에너지가 날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그런 단단함.
- 이른바 세상이 말하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당신은 어디까지 올라보았는가.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식의 경력을 갖춰본 적이 없다. 그 회사의 이름이나 일의 내용을 듣는 것만으로도 남의 부러움을 살 만한 그런 일, 나는 음악을 할 때에도 평범한 인디밴드로 활동하다가 그 일을 접었었고, 책은... 음악보다는 상대적으로 큰 상업적 성과가 있었지만 내가 그런 성과를 낸 줄은 나밖에 모르는 생활을 지금껏 해왔다. 그런데 이 일은, 성공하기만 하면 남들의 부러움은 물론 스스로도 얼마나 뿌듯해질지 상상이 잘 가지 않을 정도의 일이었으니.
- 주인이 편해야 손님들도 편한 법이야.
나는 묘하게 그럴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잘 동의가 되지 않던 그 말을 곱씹다가 결국 하던 시도들을 중단하지 않았고 그런 집요한 과정을 알 리 없는 손님들의 입에서 점점 공간이 편하다, 음식이 맛있다는 말이 늘어가는 걸 보면서 알게 되었다. 남이 뭐라든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끝까지 가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게 실제 현실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를.
- 물론 애초에 내가 능력자라서 그만큼 많은 기회가 필요하지 않아도 하자 없는 완성품을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가장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라도 내 능력에 맞는 방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분명 행운이었고 이후 글을 쓰거나 또 다른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그것은 거의 평생토록 나의 방식이 되었다. 누가 뭐라든 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는 것.
- 나는 세상의 모든 글이 쉬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쓰는 글은 가능한 읽기에 쉽고 이해하기도 편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 없이 다시 고쳐 쓰는 고단한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고단한 만큼 독자들은 편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가게를 할 때 '주인이 편해야 손님들도 편하기 마련'이라는 친구의 그럴싸한 말에 넘어갔더라면 아마 쓰는 나는 수월하되, 읽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 헤매는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물론 단지 쉬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만 수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잘 전달이 되고 있는지, 더 나은 표현, 더 나은 문장이 될 수는 없는지, 글에 다른 문제는 없는지 등을 살피며 가능한 정확하고 완벽한 문장이, 또 글이 될 수 있도록 반복해서 고치는 것이다.
- 그래서 내게는 이 수정이란 과정이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심지어 그 작업은 책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도 계속된다. 음악을 할 때에는 그러지 않았다. 레코딩은 말 그대로 그때 그 순간의 기록이며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작품이 세상 빛을 보고 나면 아무리 유혹을 느껴도 어떤 형태의 재작업도 해본 적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 그러나 책은 달랐다. 책은 앨범처럼 순간의 기록물이라기보다는 보다 긴 호흡을 통해 완성이 되어가는 변화의 여지가 많은 매체로 내겐 이해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중쇄라는 과정 때문이었다. 중쇄란 찍어놓은 책이 다 나가서 새로이 부수를 늘려 찍는 일을 말하는데 이때 점 하나 넣고 빼는 것에서부터 글의 순서를 바꾸고, 문장을 아예 다시 쓰는 등 어떤 수정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때마다 내 글들이 보다 완벽한 고정물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수정을 해갔다. 첫 책 <보통의 존재>는 심지어 출간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런 긴 수정을 하게 된 데에는 중간에 어떤 계기가 있었다.
- 미혼의 중년 남자들이 티브이에 나와서는 철없는 기행을 펼쳐 보이는 모습을 보는 일이 나는 조금 힘들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나이를 먹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어른 아이가 아니라, 자기가 먹은 나이답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진짜 어른이 아닐까 싶어서다.
- 나는 삶에는 큰 미련이나 욕심이 없었지만 어른이 되는 일에는 일찍부터 관심이 많았다. 나는 애송이처럼 성급하게 인생의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본 것이 전부인 양 판단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나의 미성숙을 참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얼마나 어른일까.
-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란,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홀로 스스로의 삶을 문제없이 꾸려갈 수 있어야 했다. 남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신적인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 역시 누가 옆에 있고 없고 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든 사람은 결국엔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을뿐더러, 그 시간을 잘 보낼 줄 아는 사람의 삶의 만족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경우보다 더욱 높기 때문이다.
- 우리는 살면서 사랑과 연애라는 환상에 너무 많이 학습되고 길들여져 왔다. 사람은 연애를 해야 하고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이란 게 마치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가치인 것처럼 책이, 영화가, 방송이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여온 탓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만나고 또 기다린다. 하지만 내 생각에 연애란 인생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예전의 나 역시 언제나 누굴 기다렸다. 그가 나의 삶을 구원해주리라 기대하면서. 나의 그런 기대를 부추겼던 수많은 말들 중에 언젠가 들은 '영혼의 짝' 같은 표현은 정말이지 너무도 로맨틱해서 정말 그런 존재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내 삶이 통째로 바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준 적 없음은 물론이고.
- 다만 나는 사랑과 연애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다.
바로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하여, 타고난 외로움을 스스로는 결코 떨칠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나는 언제부턴가 짝 없이 홀로 지내도 그럭저럭 나만의 시간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나 확실한 건 바라는 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어쩜 너무 당연한 얘기인 게 사람이 연애가 하고 싶으면 상대를 찾고, 자신을 꾸미는 등 그에 관한 노력을 하게 되듯이, 혼자서도 잘 살고 싶다 고민하고 애를 쓰다 보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에 부합하는 성취와 변화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그러므로 여기서 아주아주 중요한 포인트.
바라는 게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바라는 게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물론 의사도 잡아내지 못한 걸 내가 정확히 집어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의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많은 시간 동안 나를 관찰할 수 있고 나와 대화도 할 수 있다. 나는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나와 함께할 수밖엔 없는 사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의사는 아니라 해도 누가 누구와 거의 숨 쉬는 모든 시간을 같이 있는데, 그 사람의 문제가 뭔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아무튼 그런 결과 이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
그런다고 살긴 살았는데 그건 결코 나를 위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
- 관객이 없는 게 좋다는 사람이 그 무거운 앰프와 기타를 혼자서 이고 지고 거기까지 와서 그 지나다니는 사람들 많은 데서 노래를 하고 있다?
세상에 관객이 없길 바라는 가수는 없다. 있다면 집에서 혼자 노래하면 된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세상은 그렇다. 살벌한 경쟁을 거듭해야 하는 오디션 프로가 그렇게 많이 생겨도 여전히 전국, 세계 각지에서 끝없이 사람들이 몰려드는 건 그들이 유난해서가 아니다. 적어도 그게 남들 앞에 서고자 하는 이들의 인간 보편의 욕구여서 그런 거지.
- 순전히 나의 추측으로 풀어본 그의 사정은 이렇다. 그는 오디션 프로가 아닌 이 작은 골목길을 택했지만 그 역시 가슴속에선 많은 사람들이 자기 노랠 들어주길 꿈꾸며 그곳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짐작건대 그는 바람과는 달리 관객이 없는 상황에 자주 처했을 것이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무대에서 노래하길 거듭하면서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으면 상처가 더 커졌으리라. 나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 것만 같아서 더 화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 이해가 돼서. 그렇게라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도 속이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이려는 그 마음이 뭔지 알 것만 같아서.
- 나 역시 젊어 남들처럼 인정에 관한 욕망으로 들끓는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내게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산다. 나도 한 번쯤은 세상을 어떻게 해보고 싶었지만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내가 세상에 맞춰야만 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목표치를 낮추고 성공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면서 어떻게든 실망하거나 상처받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 왜냐면 나는 성공하는 것보다 아프지 않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를 어르고 달래면서 때론 속이고 세뇌하면서 애쓴 대가로 통증 없는 삶을 누리게 되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눌러두었던 나조차도 잊고 있던 무언가를 생각도 못한 곳에서 어떤 사람의 말이 건드리는 바람에 그리 격한 반응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왜 사람은 남의 모습에서 자신을 볼 때 가장 크게 반응을 한다지 않는가.
- 고갱은 평생 대놓고 한탄했다. 자신의 죽여주는 그림이 왜 파리의 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목할 건 고갱의 그런 유기적인 인정 욕구 자체가 아니다. 최소한 그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속이지 않고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못났으면 못난 대로, 잘났으면 잘난 대로, 남이 어찌 생각하든 말든. (물론 그 때문에 괴로운 사람들은 있었지만.)
- 요는 누가 누구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소위 말해 판단이라는 걸 할 때, 그러니까 누가 누구의 행동을 보고 추하다 혹은 웃긴다라고 어떤 평가를 내릴 때, 그 판단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아이고. 꼴랑 두 명 앞에 놓고 저러고 있는 놈이 무슨 빌보드를 간다고 웃긴다. 하하하' 하는 것이 그 자신인지 아니면 그게 남의 시선일 뿐인지 말이다.
그게 왜 중요할까.
- 정말 추한 건 자기애가 넘치는 것도 망상에 가까운 목표를 갖는 것도 아니다.
남이 어찌 볼지 몰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 추하다 못해 한심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게 적어도 남의 시선 때문에 자기 자신마저 속이며 살아본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떤 일을 할 때 항상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남이 그런 나를 어떻게 볼까를 더, 그리고 항상 먼저 생각해온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거다.
- 그건 나를 지킬 수 있는 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를 사랑하는 길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거였다. 나를 사랑하는 일.
나는 그걸 너무 모르고 살았다.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
편안함은 어디에서 오며 나를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지금 그 모든 것에 대한 나의 답은 하나다.
솔직함에서 온다.솔직할 수 있는 자유로부터.
남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로부터.
나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용기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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