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캐롤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일루젼 2022. 12. 6.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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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캐럴라인 냅 / 김명남
출판 : 바다출판사 
출간 : 2020.09.04 


       

정말 좋았다. 

 

역자의 표현처럼 '얼음처럼 냉정하고 넌더리 나도록 솔직한', 그러면서도 '섬세한' 문장. 캐럴라인 냅의 문장은 지금의 내가 가장 닮고 싶은 문장이다. 지나치게 비틀리지 않았으면서도 딱 즐거울만큼 꼬집을 줄 아는, 자신에게 솔직하고 현상을 날카롭게 표현할 수 있는. 

 

나의 생각을 글이 아닌 말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한 주였다. 나는 내가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일은 거의 없었지만, 딱히 잘 한다거나 영향력 있게 말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이나 생각이 이미지처럼 전달이 되면 참 좋겠지만 우리는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의 호흡, 시선, 표정, 말을 끊는 지점과 속도 같은 수많은 것들로부터 자신만의 해석을 읽어낸다. 언제나 오해와 곡해의 여지가 존재하며, 완전한 이해나 공감은 환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잘 정제된 의도된 담화, 또는 한 순간 흘려가는 듯 뇌리에 꽂히는 한 마디 같은 것들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강렬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존재한다. 글처럼, 자신을 가라앉히고 다시 읽어볼 기회를 주지 않고. 내가 회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나의 색으로 덧칠된 기억 뿐이다. 어쩌면 그 순간의 미가 말이 가지는 힘의 원천일지도 모르겠다. 

 

<명랑한 은둔자>를 읽으며 '이게 바로 내가 하고싶었던 표현이야!'라고 강하게 공감하기도 했고, 기쁨에 휩싸여 누군가에게 '이것 좀 읽어보라'며 권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또 마치 나의 이야기인 양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연민이나 분노를 느끼게 되기도 했다. 나에게 캐럴라인 냅은 만나본 적 없는 소중한 친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명랑한 은둔자>가 여러 나라에서 이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냅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충분히 '평범'하고 '사교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 음... 아니, 명랑한 은둔자들은 그리 소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쪽이 더 적절하겠다.

 

어떤 의미에서, 한꺼풀을 벗어낸 듯한 기분이 든다. 

 

좋은 겨울이다.       

 


   

-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나는 책이 좋고 책 만드는 것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인생보다 혹은 인생만큼 대단하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 책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 내게 그런 경험이 있다. 최소한 하나의 사례를 아는 셈이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 그리고 냅의 그 섬세한 문장. 얼음처럼 냉정한 시선. 넌더리 나도록 솔직한 표현. 그것은 숙취와 자기 연민에 빠진 내 머리로도 알 수 있을 만큼 특별한 글이었다.  

 


 

 

- 이번에는 내가 무너졌다. 이런 교대에는 기이한 리듬이 있다. 꼭 우리가 감정을 말 그대로 서로에게 건네는 듯, 우울과 혼돈의 바통을 줬다 받았다 하는 듯 느껴진다. 네가 강하도록 해, 나는 약할 테니까. 올해는 네가 날 돌보도록 해, 내년엔 내가 널 돌볼 테니까.

 

- 이런 감정전이는 쌍둥이라면 으레 모든 것을 철저히 공유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롯한 게 아닐까 싶다. 인생의 여러 중요한 요소들을 -자궁 속 공간, 생일 케이크, 부모의 애정- 나눠 가지면서 자란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자원이 어느 정도인지,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된다. 세상에는 둘 모두를 위한 시간이, 혹은 관심이, 혹은 공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마음 깊은 곳에서 깨닫게 된다. 그래서 타이밍을 간파하는 특이한 본능을 키우게 된다. 이제 내가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무너질 차례라고 느끼면 그라운드로 나서고, 이제 리베카의 차례라고 느끼면 더그아웃으로 물러나는 법을 배운다.

 

- 내가 오랫동안 이 상태를 당연시하며 살긴 했어도, 우리 둘의 관계에서 이처럼 우리가 쌍으로 움직인다는 감각, 각자의 삶을 상대의 삶과 연계하여 사는 듯이 먼저 앞으로 한 발 나아간 사람은 상대가 따라잡도록 기다려주는 방식, 이것을 나는 무척 고맙게 여긴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친밀감에는 대가도 따른다. 예를 들면, 우리는 둘 다 다른 인간관계들이 완벽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모든 우정이 리베카와의 우정처럼 깊게 연결된 느낌이기를 바라고, 모든 애인이 리베카처럼 내 마음의 기복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나는 남자 친구들에게 아주 가혹하다. 뭐? 내 마음을 읽는 법을 아직도 몰라? 꺼져! 

 

- 그리고 두 심장이 하나처럼 뛴다는 신화, 우리가 영혼의 짝이라는 신화에 따르는 문제도 있다. 어떤 춤이든 -친구, 연인, 동료와의 춤이든 쌍둥이와의 춤이든- 헛발을 내디딜 때가 있는 법이다. 제아무리 숙련된 파트너라도 이따금 실수한다. 내가 사람에게 실망하는 기준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낮긴 하지만, 리베카에게는 심연에 가까울 만큼 낮다. 만약 리베카가 너무 바빠서 나와 통화할 수 없으면, 저녁 약속에 늦으면, 내가 부를 때 재깍 응답해주는 자세가 흔들릴 기미가 느껴지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맹렬한 분노를 느낀다. 내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고?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둘 다 우리의 보조가 어긋난 시기, 한 명이 너무 빨리 나아가거나 무대를 독점하거나 아무튼 상대를 뒤에 남겨둔 시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듯 싶다. 리베카가 결혼했을 때, 나는 리베카가 나를 버리고 새 파트너로 교체하기라도 한 듯이 -비이성적이긴 하지만 본능적으로- 화났다. 리베카가 아이를 가졌을 때, '엄마'라는 리베카의 새로운 상태가 '쌍둥이'로서의 상태를 무효화하기라도 하는 양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런 시기는 괴로웠고, 그럴 때 나는 내가 스스로를 지나칠 만큼 자신이 아니라 쌍둥이로 정의하고, 나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리베카의 성취를 기준으로 내 가치를 평가하고, 나 자신의 심장이 아니라 리베카의 심장박동을 듣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마 모든 자매들이 그럴 텐데, 춤은 변한다. 우리가 둘 다 성장하고, 각자 실수하고, 각자 독립된 개인으로 편하게 느끼는 법을 익히면서 우리의 레퍼토리는 넓어졌다. 우리는 이제 독자성의 스텝을 추가했고, 이따금 겪는 실망을 견디는 법을 배웠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연습했다. 요즘도 우리는 일주일에 네다섯 번 통화한다. 리베카는 교외의 널찍한 주택에서, 나는 도시의 작은 내 집에서 나는 리베카의 아기가 뒤에서 우는 소리를 듣고, 리베카는 내가 컴퓨터를 켜거나 담뱃불을 붙이려고 성냥을 켜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일상의 배경 음악은 전혀 다르고, 가끔은 둘이 충돌하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리베카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로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혹은 그냥 서로 웃게 만들 때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는 같은 화음에 맞춰서 움직인다는 걸 깨닫는다. 오래되고 익숙하고 푸근한 그 화음은 우리가 공유한 과거의 화음, 우리의 친밀한 왈츠가 그리는 음악이다.  

 

- 친구는 결혼했고,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고, 어린 두 아이의 엄마다. 마지막으로 혼자 밤을 보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나로 말하면, 혼자 밤을 보낼 수 없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친구는 중얼거렸다. "늘 혼자 있다니. 얼마나 즐거울까."  
글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내가 누리는 이런 수준의 고독이 즐거운 것은 사실이다. 사치와 안도감이 있다는 것도, 엄청난 자유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잠시 벗어난 시간과 혼자 있는 시간을 쉴 시간과 빈 시간을, 고독과 고립을 헷갈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 엄밀히 따지자면, 고립은 고독과는 무관하다. 물론 고독한 시간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사회적 의무로 꽉꽉 채워진 주중에 참석한 파티에서, 방 안 가득한 스물다섯 명의 사람들 속에서도 고립될 수 있다. 고립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도망치고 싶은 기분, 거리를 두고 싶은 기분, 내가 겉모습 너머에서는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혹은 문제투성이인지 아무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 장벽을 세우고 그 뒤에 숨고 싶은 강박과 관계된 느낌이다. '날 여기서 꺼내 줘.' 그런 기분이다. '나는 불편해. 혼자 있고 싶어.'

 

- 내 친구 그레이스는 한때 고립되었지만 지금은 그냥 고독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레이스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지만 그것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깊이 이해하고 선택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 지금 마흔여섯인 그레이스는 여전히 금요일 밤에 혼자 닭요리로 저녁을 먹고 TV를 보면서 보내는 날이 많다. 하지만 걱정은 누그러졌다. 그를 은둔으로 몰아넣었던 두려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무방비 상태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누그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예전보다 더 바람직하고 더 풍요로운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데다가 생계가 되어주는 일을 갖고 있다. 좋은 심리치료사 덕분에 자신을 훨씬 더 잘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에게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이 즐긴다는 사실도 더 또렷하게 느끼게 되었으며, 그 시간에서 공허함이 아니라 뿌듯함을 느끼는 능력도 더 기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고독과 고립의 차이다.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겪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차이가 늘 분명하거나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두 상태가 늘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고독은 내 경험상, 자칫하면 미끄러지는 경사로다. 처음에는 안락하게 느껴지지만, 종종 아무런 경고도 자각도 없이 훨씬 더 어두운 것으로 변신할 수 있는 상태다. 

 

- 고독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형제, 아니면 연상의 친한 친구와 같다. 너무 잘 알기에 침묵조차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 베스는 불편한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고, 눈길을 아래로 깐다. 그래서 숫기 없지만 정말 착한 사람으로 보인다. 반면 내 수줍음은 전혀 다르게 드러난다. 나는 숫기 없는 것과는 별도로 기본적으로 침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스스로 침착하다고 느끼지 않는 순간에도 겉으로는 침착해 보이는 법을 터득했다. 수줍어서 말이 나오지 않고 떨리는 나를 꺼버리고 상당히 침착한 나를 내세워서 그 뒤에 숨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수줍음과 침착함은 골치 아픈 결합이다. 두 가지가 함께하면 어떤 무표정한 모습, 냉담함으로 해석되기 쉬운 딱딱한 모습이 연출된다. 

 

- 해석. 물론 이것이 핵심이고, 착각에 이르는 문이다. 수줍어하는 사람들은 과묵함의 망토 뒤에 숨은 채 상대가 스스로 관계에 대해서 품는 두려움이나 편견이나 자기 인식을 투사하는 빈 화면으로 기능한다. 만약 그 상대가(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타인에게 호감을 사고 싶다고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그 상대가 자신이 타인의 기대에 부합하는지 혹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불편함이나 과묵함이 그에게는 자신이 지루해서 그러는 거라고 보일 수 있다. 수줍음은 오해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수줍음을 타는 내 친구 하나는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했다. "침묵은 로르샤흐 테스트야."

 

- 기분은 평온하다. 나는 찢어진 레깅스, 티셔츠, 목욕 가운을 입고 있다. 대개는 거실 소파에 흡족하게(그리고 말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전화 자동응답기에 메시지가 몇 통 와 있다고 불이 깜박이는데, 내가 일부러 받지 않은 전화들이고 내일이 되어야 응답할 생각이다. 이때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단순한 사실적 진술 하나가 완전한 문장의 형태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그 말을 듣는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 이것은 정말 마술적이고 변혁적인 순간이다. 이것은 일종의 만화경 같은 변화랄까, 나 자신에 대한 기정사실들이 저절로 모습을 바꾸더니 새로운 질서에 따라, 놀랍고 신선한 시각에 따라 재구성되어 내 내면이 삽시간에 재편되는 듯한 순간이다. 오래된 생각이 새로운 생각으로 바뀐다. 기존의 정의가 새로운 전개를, 새로운 분위기를, 새로운 의미를 취한다.

 

-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이 말을 다시 들어보라. 산뜻하고 멋지게 들리지 않는가? 만약 누군가가 어제 한 시간 전 10분 전이라도 마찬가지다. 내게 내 존재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보라고 말했다면, 나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나는 독신 여성이에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서른여덟 살이고, 좀 외톨이처럼 살아요. 이 말이 슬픈 노처녀를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내 목소리에 변명의 기미가 어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휴, 미안해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지금이면 진작 결혼했어야 하는 건데, 하고 말하는 듯이 약간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시리얼 그릇을 앞에 두고 서 있던 순간, 내 정신의 만화경이 살짝 돌아가더니 변명은 흐릿해지고 대신 새로운 장면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 새로운 장면은(감히 이렇게 말해도 될까?) 행복과 아주 비슷해 보였다.

 

- 행복하게 혼자라고? 은둔하는데 명랑하다고? 그런 모순이 어딨어! 그건 불가능해!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 나는 왜 그것을 원하지 않을까? 자연히 이런 질문이 따라 나온다. 나는 왜 그런 판타지를 남편, 가족, 아이들 매력적인 꿈으로 느끼지 않고 고달픈 일이라고 여길까? 내게 문제가 있나? 내 삶도 삶인가? 

 

- 그야 옳은 생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 이상을 원한다는 사실, 완벽한 연애 관계라는 꿈은 우리 앞에 누군가 타인이 나타나서 우리 대신 궂은일을 다 해주기를 바라는 우리가 스스로 채워야 하는 욕구를 대신 채워주고, 우리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특징을 부여해주고, 사실상 모든 인간에게 있기 마련인 빈 공간을 메워주기를 바라는 환상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나마 인식하고 있다.

 

- 어떤 괴로움에 대해서든 손쉬운 해법이 있으리라고 여기고 찾아보는 것은 20세기 고유의 시각이자 소비자 문화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우리 주변의 다이어트 워크숍이나 성형외과만큼 널리 퍼진 것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 마이클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주고 내 모든 것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완벽한 영혼의 짝이 되어주고 내 모든 욕구를 빠짐없이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은- 그런 특수한 종류의 탐색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상황이다. 우리가 깊은 갈망을 다루는 방법이라고 배운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공허한 곳을 채우렴. 행여 네게 외로움과 부족감과 불만이 있다면, 그런 감정을 싹 사라지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네 바깥에서 찾아보렴. 우리 사회는 그런 충동에 대한 손쉬운 -적어도 겉보기에는 손쉬운- 해법을 제공하는 데 대단히 능했다. 그저 적당한 식단을, 적당한 옷을, 적당한 커리어를, 적당한 사람을 찾으면 된다고 했다.

 

- 요컨대, 내가 마이클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특질들은 대개 나 자신에게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특질들이다. 마이클이 완벽하지 않다면-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면 당연히 나도 완벽하지 않다.

 

- 그러면 꿈에 굶주린 평범한 20세기 여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정도가 충분할까? 사랑받고 싶은 내 바람이 과하고 비현실적인지, 아니면 정상적이고 건전한지 어떻게 구별할까?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고, 어려운 질문이 늘 그렇듯이 그 해답은 애매하고 개인적인 수준으로만 존재하는 편이다. 나는 엘리자 같은 여성을 보면 (그리고 나는 그와 비슷한 궁지에 처한 여성을 아주 많이 안다) 자존감의 언어를 떠올리곤 한다. 그는 자신이 갈망하는 수준의 만족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느끼지 않는 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믿지 않는 한 그 갈망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저 사랑받기만을 -한없이 한없이 사랑받기만을- 원한다는 건 사실 내적으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혼자서도 충분히 귀한 존재라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 느낌을 바깥의 다른 사람으로부터 -아마 지나치게 많은 양을- 얻어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뜻할 때가 많다. 

 

-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자기애는 타인으로부터 받는 사랑이든 사랑 그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안다. 나는 혼자서 진심으로 편안하다고 느낄 때면 -자신감이 있고, 자신을 돌볼 능력이 있고, 자신이 귀하다고 느낄 때는- 마이클의 애정을 덜 필요로 하고, 내면의 쓰라린 허기를 덜 예민하게 느끼는 편이다. 

 

- 내가 자기 방어적인 습관, 정해진 일과, 높은 수준의 독립성을 모두 포기하고서 대단히 높은 수준의 유연성이 필요한(게다가 의존과 책임, 그 밖에도 내가 스스로 갖고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수많은 특질들이 필요한) 관계에 진입할 수 있을까?

 

-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를 갖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삶을 조직한 방식과 내가 나를 정의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로 쓰기에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기야 생각만이라도 즐겁지 않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면서 내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이 상황을 무엇 탓으로 돌릴지 생각해본다. 내가 이기적인가? 나는 가족의 삶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지원하지도 않는 오늘날의 세상, 즉 역기능 사회가 낳은 역기능 개체인가? 나는 또 도시에 사는 전문직 개인이라는 내 겉모습, 다소 딱딱한 그 외관 아래에 얼마나 많은 두려움이 숨어 있는 걸까 생각해본다. 나는 친밀감을 정말 그토록 겁내는 걸까?

 

-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적 있는가? 젠장,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 혼자 남으면 어쩌지? 아니면 이런 생각.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시면 어쩌지? 아버지가 혼자 생활하실 줄이나 아나? 사람들이 흔히 부모에게 느끼는 죄책감, 그러니까 당신이 부모에게 좋은 자식이 아니었다는 걱정이 들 때가 있나? 혹은 만약 부모님이 아프실 경우에 당신이 좋은 자식 노릇을 하지 못하리라는 걱정이?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고? 


- 나와 같은 입장이 된 것을 환영한다. 당신이 그동안 누리던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이제 끝난 것이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란 당신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부모를 걱정할 만큼은 나이가 들지 않은 시기, 그 짧은 기간을 뜻한다. 

 

- 그리고 어젯밤, 문득 나를 내려다보고는 내가 미색 반바지와 연녹색 셔츠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아, 정말 적절한 복장이네. 거대한 프로작처럼 입었어. 나는 현실감각을 잃은 듯하다. 

 

- "엉망이야." 
"끔찍해." 
"아니, 더 나빠졌어. 더 안 좋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들이지만, 대개의 사람은 이런 대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맨 처음 알게 되는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는 죽음을 끔찍하게 지독하게 잘못 다룬다. 상을 당한 사람에게 주는 휴가는 보통 사흘. 그 후에도 6주쯤은 사람들이 당신을 조심조심 대하고,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대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신에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애도 기간은 끝난다. 이후에는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거나 하루에 세 번씩 빨개진 눈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다시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정상적으로 느껴야 할 듯한 압박이 든다. 

 

- 어머니의 작품들에는 어머니의 온 생애가 담겨 있다. 그 속을 거니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머니를 좀 더 가깝게 아는 방법, 어머니의 죽음을 새롭게 경험하는 방법이었다. 별은 어머니의 작품에 반복하여 등장하는 주제였다.(그래서 내게 예의 기억이 살아난 것이다.) 별, 달, 물, 하늘. 어머니는 종교를 믿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무척 영적인 분이었고, 그 점이 자연과 영속적인 세계에 대한 꾸준한 관심으로 작품에 반영되었다. 추상적으로 재현된 계곡, 원주민 마을, 메사, 제단, 신전, 부적. 마법의 카펫과 집에 걸어두는 행운의 물건, 모래성과 절벽과 정원을 묘사한 작품이 시리즈로 있다. 거의 모든 작품에 평온함이 듬뿍 깃들어 있다. 색과 형태에 대한 깊은 이해, 뛰어난 균형 감각이 느껴진다. 

 

- 어머니와 나는 창작 과정에 대해서, 어머니의 그림과 내 글쓰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눠왔다. 하지만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내가 그분의 작품을 온전히 음미하진 못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데다가 자신을 다소 낮추는 성품으로, 자신이나 자기 작품에 남들의 주의를 끄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막 완성한 작품에 대해서 말씀하시거나 나를 화실로 데려가서 작품을 보여주거나 하는 일이 가끔 있기는 했다. 그럴 때 나는 보통 작품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아름답네요." 이 말은 늘 진심이었지만 -어머니의 작품은 실제로 아름답다- 내가 그보다 더 깊이 있게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에게 이 작품이 무슨 뜻인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어머니의 느낌은 어떤지 물은 적은 별로 없었다. 

 

- 내가 왜 거리를 두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나는 시각의 사람이 아니라 '단어'의 사람이었고,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삶에 더 깊이 얽매여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을 이제 후회한다.

 

-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마지막 작품들을 보았다. 어머니의 최고 작품으로 꼽을 만했다. 아름다운 균형미, 한가득 선명한 파란색들과 살짝살짝 비치는 은색들, 가장 활기찬 붉은색들, 마법적인 형태들.

 

- 돌아가시기 전날, 어머니는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혼수상태에 빠질 시점을 열두 시간쯤 앞둔 때였다. 그즈음 어머니는 말을 거의 하지 못했고, 이틀 가까이 변변히 먹은 것이라고는 얼음조각뿐이었다. 심한 육체적 통증에 시달리고 계셨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나와 오빠가 침대 양옆에 있을 때, 어머니가 눈을 뜨고 말씀하셨다. "정말 그 그림을 마치고 싶어. 망할, 정말 일어나서 그리고 싶어."

 

-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인생의 힘든 순간들을 겪어내는 데 술에 지속적으로 의지하면, 삶의 모든 일이 현장이 아닌 연습인 양 느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여름에 밤이면 밤마다 전화를 붙들고 애통해할 때, 나는 실제로 애도한 게 아니라 애도를 연습한 것이었다. 희석된 고통은 직면한 고통과 결코 같지 않다. 술과 자신감의 방정식, 술과 불안의 방정식도 마찬가지다. 칵테일파티에서 마티니로 얻은 세련됨은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힘겨운 작업을 거쳐서 내면으로부터 얻은 세련됨과 결코 같지 않다.

 

- 술은 효과가 있다. 술은 사람을 달래고, 느긋하게 만들고, 차분하게 만들고, 기분 좋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성장하도록 돕진 않는다.

 

- 이렇게 또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느끼는 아픔은 전과는 다르다. 감정들이 더 또렷하다. 그 날카로움은 좀 더 고통스럽지만 좀 더 순수하기도 하다. 마치 오랫동안 초점이 살짝 맞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했다가 새 안경을 쓰고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고개를 들었더니 사물의 가장자리와 음영이 잘 보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원래 이런 거였구나. 

 

- 지난주에는 아버지의 3주기 기일이 있었다. 다음 주에는 어머니의 2주기 기일이 온다. 이전에는 그분들의 부재를 구체적으로 상기시키는 일이 다가올 때 내가 불행하다고 느꼈다. 음울하게 틀어박혔다. 슬픔의 가장자리에 가서 부딪치기만 했다. 그런데 맑은 정신으로 직면하는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슬프다. 하지만 스스로가 용감하다고도 느낀다. 
애도와 명료함. 나는 감정을 느끼는 채로 다시 한번 애도하는 중이다.

 

- 굶으면 또 내가 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좋은 날에는 -내 식단을 고수하는 날에는- 퇴근할 때 식료품 가게와 식당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서 오면서 내 의지를 시험했다. 고급 식료품 가게, 던킨 도너츠, 과자 가게, 노천카페, 빵집을 지나쳤다. 도넛에 발린 달콤한 시럽 냄새를 맡았다. 프렌치프라이, 데리야키 치킨윙, 홈메이드 귀리빵 냄새를 맡았다. 그러면 내가 대단한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저 많은 음식들 속에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강렬한 식욕을 참을 수 있다니. 나는 강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이었다.

 

- 좋은 날에는 또 내가 우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길에서 사람들을 보면서 -식료품 봉지를 든 사람들, 카페에서 먹고 있는 연인들- 내가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그들은 식욕에 굴복했지만 나는 그것을 초월했고, 그들은 충동에 굴복했지만 나는 그것을 정복했다. 나 자신이 사실상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느끼던 시기에, 굶기는 내가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또 다른 중요한 조치는 올바른 도움을 얻은 것이었다. 내 경우 그것은 나를 측은하게 여기지 않고 치료를 내게도 발언권이 있는 '공동 작업'으로 설명하는 심리치료사를 만난 것이었다. 

 

- 각 단계마다 배우는 것이 있다. 당신은 경직성을 포기한다고 해서 반드시 통제력을 잃는 건 아님을 배운다. 자신의 힘을 느끼는 방법에는 좀 더 지속 가능한 다른 방법들도 있다는 걸 배운다. 

 

-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교훈들이기는 하다. 날카롭고 각진 상태를 포기한다는 것은 담요처럼 아늑한 보호감, 몸에 새겨져 있고 안전하고 익숙한 생활 방식,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 등등 다른 많은 것들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나는 '음식이 눈앞에 있을 때'의 나 자신을 믿지 못했다. 내가 쿠키가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서 그걸 몽땅 먹어치우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 착각을 일삼았다. 저녁 식사 초대를 거절하면서도 내가 먹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지, 사람들과의 접촉이 두려워서 그러는지, 진심으로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심지어 내가 음식으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굶거나 폭식하려는 충동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한 뒤에도, 그렇다면 달리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해서 힘들었던 중간 지대가 있었다.

 

- 하지만 음식을 관리하는 일은 삶을 관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약간의 시간, 약간의 자기 이해, 약간의 용기, 많은 지지를 한데 모으면, 누구나 서서히 대처할 방법을 알게 된다. 자신을 먹일 방법을 알게 된다. 

 

- 하지만 그날, 나는 당장 달아나서 새 신발을 여섯 켤레 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대신 소파에 앉아서 생각을 했다. 내 경우에 이 공허함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만족스럽거나 안정적이라고 느끼기 위해서, 나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예의 실시간 해설을 유심히 들어보면, 그 목소리는 더 크고 무서운 질문들을 던진다. 커피를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이 사람은 누구지? 이 사람은 무엇에서 삶의 쾌락과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지? 두렵고 공허한 시간을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으로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 이런 것들은 어려운 질문들이다. 그리고 나는 외로움을 앞질러 달아나는 데 급급하여, 이 질문들에 답할 기회를 회피해왔다. 물론 가끔씩 기분 전환을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새 신발의 치유력을 열렬히 증언하는 바다. 하지만 더 큰 질문들을 피하기만 했다가는 언젠가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에 돈을 펑펑 쓰면서 종종거릴 때, 보통은 내가 평범한 일요일을 계획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자라는 느낌이 강화될 뿐이다. 그래서 그날, 나는 잠시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일에 착수했다. 몇 달 동안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생각만 했던 커튼을 직접 만들어서 걸었다. 할 일을 해치웠다는 것 자체가 단순한 기쁨이었을 뿐 아니라, 이 일로 새삼스럽게 몇 가지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내게는 절망감에 맞서 싸울 자원이 있다는 사실, 내 시간을 잘 쓰고 내 영혼을 잘 돌볼 능력이 있다는 사실, 외로움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사실.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고독한 일요일이었지만, 결국에 외로운 일요일은 아니었다. 

 

- 오늘은 1997년 2월 20일이다. 정확히 3년 전 오늘, 나는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다. 3년이 아주 긴 것은 아니지만, 내게 술 없는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쳐줄 만큼은 길었다. 
술 없이 살아가는 일은 갈수록 쉬워진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 이것은 보기와는 달리 역설적이거나 해괴한 말이 아니다. 술 없이 살아가는 일은 정말 갈수록 쉬워진다. 그냥 그렇게 하게 된다. 

 

- 어려운 부분은 '살아가는 부분'이다. 이것은 내면과 관련된 일이다. 우리가 술로 끊임없이 무디게 하고 가릴 때는 잘 몰랐지만 그러지 않으면 금세 나타나는 의문들, 선택들, 감정들과 관련된 일이다. 이것이 진짜 중요한 문제다. 새벽 3시에 잠 못 들고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문제다. 나는 정말로 어떤 사람일까? 나는 정말로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일까? 내게 적합한 삶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격려받고, 무엇에 의욕을 얻고, 무엇에 만족하는 사람일까? 자아에 관한 이런 고민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적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20대에 묻기 시작하는 질문들이다. 그러니 서른일곱에 문득 내가 이 나이를 먹도록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는 고사하고 제대로 물은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말 심란한 일이다. 어떻게 하면 나는 주야장천 취한 상태가 아닌 채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보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훨씬 더 어려웠다.

 

이런 질문들은 물론 기본적인 정보가 있어야만 답할 수 있는 인생의 큰 질문들이다. 그리고 나는 금주 3주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여태 자신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질문들에 답하려고 애쓰면서 데이터를 모으고 있다. 나는 자유로운 저녁과 주말을 어떻게 쓰기를 좋아할까? 내게 혼자 있는 시간과 함께 있는 시간의 적절한 혼합 비율은 얼마일까? 나는 타인이 나를 얼마나 접촉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면 좋겠는가? 내가 정말로 허기를 느끼는 대상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재미를 느끼고, 무엇에서 위안을 얻고,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일까?

 

- 술꾼들은 적정법의 대가들이다. 얼마나 마실지, 언제 마실지, 어떤 비율로 마실지, 술 마실 때 무엇을 함께 섭취할지, 무엇을 피할지, 이튿날 아침에 침대에서 나오려면 커피와 음식과 애드빌을 어떻게 섞어 먹어야 하는지. 술꾼들은 오랜 연습과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서 그런 것들을 알아낸다. 술꾼들은 감정을 관리하기 위해서 적정법을 활용한다.

 

- 시행착오와 데이터 수집. 이것은 수고가 들고 힘든 일이다. 나는 개와 함께 미들섹스 펠스 자연보호 지구를 걷는 일을 700번 한 뒤에 발견했다. 그래, 나는 이게 좋아, 개와 함께 숲에 오는 일이 좋아. 재봉틀과 900번 씨름해서 족족 패배한 뒤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 나는 이게 싫어, 난 바느질에 필요한 인내력이 없고 이걸 하면 내가 무능하다는 느낌만 들어. 너무 사소한 발견들이 아닌가 싶겠지만(실제로 사소하다), 그래도 이런 교훈들은 주야장천 술만 마실 때는 배울 수 없고 우리가 견고한 자아 감각을 구축하려면 꼭 필요한 작은 벽돌들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내 욕구는 이것이야, 내 특별한 강점과 약점은 이것이야 하는. 

 

- 술을 끊는 일은 기차 사고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좀 비슷하다. 당신은 멍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일어나서,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다 머리가 맑아지고 트라우마가 잦아들면, 자신도 모르게 망연히 잔해를 보며 서 있게 된다. 저 기차에서 내린 나는 이제 누구지? 이제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거기까지 어떻게 가지? 이것은 겁나는 시기이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주 상기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기인 건 맞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이기도 하다고. 

 

- 요즘도 전 제가 우아한 바에서 드라이한 백포도주를 음미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눈을 감으면 곧장 거기 가 있는 듯하죠. 저는 가령 리츠 호텔 바에서, 차가운 쇼비뇽 블랑과 담배를 앞에 두고, 자신이 1940년대 영화의 한 장면 속에 있는 양 느끼고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우아하고 침착하죠 한 모금 홀짝일 때마다 수줍음은 조금씩 사라지고, 자의식은 약해지고, 그 대신 용기가 생겨납니다. 저는 술의 언어를 사랑했어요. 스플래시 splash (소량의 음료를 말할 때 쓰는 단어), 트위스트 (칵테일에 꽂는 과일 조각을 뜻하는 단어). 술의 소리도 사랑했어요. 잔에서 얼음이 부드럽게 쨍그랑거리는 소리, 포도주병이 탁자에 쿵 하고 놓이는 만족스러운 소리. 술이 주었던 연결감과 동료애를 사랑했어요. 퇴근 후 친구들과 술집 탁자에 둘러앉아서 술을 마시고 웃고 무용담을 나누던 것을. 제가 새로 알게 된 사람에게 건네는 말 중 최고의 칭찬은 오랫동안 이것이었어요. 우리 언제 함께 술 마셔요. 밖에서 만나서 술 마셔요. 저는 완전히 현혹되었어요.

 

- 당신이 전쟁 지역에 산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이 사는 곳에는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지붕 위에는 저격수들이 있고, 발밑에는 지뢰들이 있다. 그다음 또 상상해보라. 당신은 그곳에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교한 대응 체제를 구축해두었다. 밖에서는 변장을 하고 다니고, 방탄조끼와 금속 헬멧으로 몸을 가리고 다닌다. 안에서는 구석에만 머물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서, 총성이 들리지 않도록 귀를 계속 막고 있다. 당신은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법을 알고 있다.

 

- 마지막으로 이렇게 상상해보라.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났더니, 방탄조끼와 헬멧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밖으로 끌려 나온다. 보호 장구도 없이 안전한 구석에서 끌려 나와서 햇살 아래에 선다. 그때 당신이 얼마나 헐벗은 느낌일지, 얼마나 무서울지 상상해보라. 세상에 노출된 기분을 상상해보라. 
상상이 되는가? 이것이 바로 중독을 포기한 사람의 기분이다.

 

- 마약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재활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종종 '좋은 소식 - 나쁜 소식' 선언을 듣게 된다. 상담사나 의사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좋은 소식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 잠시 침묵. "나쁜 소식은, 여러분이 졌다는 것입니다."

 

- 물론 이 전쟁은 앞선 전쟁보다는 훨씬 더 희망적이다. 알코올 중독이나 섭식장애 같은 적과 싸울 때보다는 당신이 이길 확률이 상당히 더 높고, 전투에서 얻은 흉터가 눈에 훨씬 덜 띄는 형태일 테고, 승리가 더 의미 있을 뿐 아니라 더 영구적일 것이다. 그래도 이것이 전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번에는 내면에서 벌어진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애초에 당신을 중독으로 내몰았던 적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은 차이가 없다. 그 적들이란 당신의 두려움과 분노와 불안정함, 위로와 위안을 갈구하는 마음, 곧 당신 자신이다. 

 

- 그러다 한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M&M's에 몰두하느라 모든 집중력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 쏟고 있다는 사실을.

"M&M's를 먹을까 말까, 얼마나 먹을까, 내가 먹은 양을 딴 사람들이 모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데 온 에너지를 쏟는 한, 나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거죠. 내가 그 자리에서 남의 눈을 의식하고 안절부절못한다는 사실, 내가 내 인생을 싫어한다는 사실, 내가 내면에서는 불행하다는 사실을." 

빙고, 결국 헬렌은 M&M's를 물리치고 새로운 방식으로 대처했다. 먼저 일어나 보겠다고 말하고 파티를 나와서 집으로 가서 욕조에 오래 몸을 담그는 것으로 불안을 달랬다. 헬렌은 이 일화를 "M&M's 계시"라고 부른다.  

 

- 나는 생각했다. 이래서 내가 술을 마셨던 거야, 이런 기분을 피하려고. 또 생각했다. 술로써 도피하지 않고 내 감정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 술 없이 산다는 건 이런 거야. 우리는 잠시 후에 식당을 나섰다. 하지만 그 저녁의 사건은 술이 내게 어떤 역할을 해왔으며 술 없이 사는 삶은 얼마나 다르게 느껴지는지를 가르쳐주는 작은 교훈으로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 우리는 말짱한 상태에 곧 익숙해진다. 우리가 약이나 술이 없어도 사람들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 친밀감이 더 진실되게 느껴진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갑옷이 사라졌지만, 외로움도 사라진다. 

- 사라지는 것이 또 있다. 두려움도 약간 사라진다. 마취제 없는 삶은 격렬한 운동과도 좀 비슷하다. 각자 선택했던 중독의 대상이 없는 채로 고통스러운 순간을 반복하여 겪다 보면, 결국에는 감정의 근육이 길러진다. 우리가 술을 마셔서 -혹은 굶어서 먹어서, 도박을 해서, 살을 찌워서- 감정을 몰아낼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셈이다. 자신의 두려움과 자기 의심과 분노를 이해해볼 기회를, 마음속에 묻혀 있는 감정의 지뢰들과 제대로 한번 싸워볼 기회를. 중독은 우리를 보호해줄지 몰라도 성장을 저지한다. 사람을 한층 더 성숙시키는 인생의 여러 두려운 경험들을 우리가 온전히 겪지 못하도록 막는다. 중독을 포기하면, 그래서 그런 힘든 순간들을 온전히 겪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근육들을 구부리게 된다. 자라게 된다.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물론이다. 하지만 또한 무척 흐뭇한 과정이다. 

 

- 먼저 밝혀둘 점이 있다. 나는 현재 어떤 데이브와도 관계 맺고 있지 않다. 데이브라는 이름의 친구도 없고, 데이브라는 이름의 동료도 없고, 그냥 알고 지내는 데이브도 없다. 그러니 이 글은 특정인을 우회적으로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좋은 데이브들도 있다는 걸 안다. 어쩌면 많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난 데이브들이 모두 나쁜 데이브들이었던 것은 그저 운이 나빠서였을 수도 있다.

 

- 하지만 나는 여기에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이름에는(혹은 별칭에는) 어떤 함축된 이미지와 행동 면에서의 기대가 담겨 있고, 그것이 그 사람의 자아상과 성격에 은근히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 부모님은 나를 소파이아 Sophia라고 부를까 잠시 고민하셨다는데, 그 이름은 자연히 '소피 Sophie'로 줄여져서 불렸을 테고, 소피는 '소파'와 발음이 비슷하고, 그래서 뚱뚱하게 들린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만약에 내 이름이 소파이아였다면 내가 엉덩이가 묵직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 늘 상냥할 것, 얌전할 것, 꼴사나운 토론을 피할 것을 강요하고, 조르고, 주입했던 방식만큼이나 강하고 엄하게 자기주장 펼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확성기를 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외쳐야 한다. 거기 당신! 연봉 인상을 요구해! 거기 당신, 당신은 그 동료에게 꺼지라고 말해! 그리고 당신! 당신은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요구해! 

 

- 착함과 순응은 여자들에게 깊게 새겨진 본능과도 같아서, 여자들은 절반의 경우에는 스스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만약 내 입에서 '좋아요'라는 말이 나왔던 순간에 네가 내게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더라도, 난 아마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거야."

베티는 이렇게 말했고, 나는 무슨 뜻인지 즉각 이해했다.

"내가 느낀 건 어쩔 수 없겠구나 하는 기분이었지. 나는 아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겠구나,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구나, 그냥 원래 이런 거구나 하는. 하지만 내가 과연 화가 났을까? 분개했을까? 그런 감정은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느꼈어."

이것이 바로 여성의 분노다. 속에 묻힌 분노, 금기가 된 분노. 우리는 그것을 느낄 줄조차 모를 때도 많다. 

 

- 아직은 너무 많은 여자들이 착해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우리가 남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가정, 인간으로서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복잡한 사람이다) 어떤 행동을(일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는가(상냥하게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가정을 짊어지고 있다. 

 

- 무력감을 떨치고 분노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억지로라도 익히고, 자신의 감정과 요구를 남들에게 정확하게 말하는 기쁨을 배우자

 

- 그냥 하는 말도, 잠시 든 생각도 아니다. 나는 예전부터 이탈리아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파스타를 좋아한다. 이탈리아 포도주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나는 만약 내가 이탈리아인이라면 -혹은 이탈리아인의 기질만이라도 갖고 있다면- 1990년대라는 이 시대가 이토록 심란하게 느껴지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 

 

- 나는 내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 걱정한다. 내 경력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지 걱정한다. 경제가 나아질 건지 걱정한다. 내가 과로하고 있다고 걱정하고,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을 적게 받고 있다고 걱정하고, 내가 일에서 만족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한다. 일이 끝나면,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일 이야기를 나눈다. 집에 가면, 일을 좀 더 하거나 종일 일하느라 피곤해서 자러 간다. 

 

- 만약 내가 이탈리아인이라면, 나는 훨씬 더 감당하기 쉬운 방식으로 일을 대할 것이다. 출근했다가, 퇴근할 것이다. 그러면 짠! 그걸로 일 생각은 끝일 것이다. 나는 친구들과 가족들과 푸짐한 저녁을 먹을 것이다.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자정 넘어서야 잠들었다가, 합리적인 시간 동안 푹 자고 이튿날 아침에 일어날 것이다. 인생은 가끔가다가 한 번씩 여유가 있는 토요일에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매일 즐기는 것이라고 투철하게 믿을 것이다.

 

- 내가 이탈리아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걸 상상하기만 해도 나는 전율이 인다. 만약 내가 이탈리아인이라면, 나는 감정과 격정과 분노를 맘껏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정말 끝내주지 않을까? 현재의 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책임감 있는 여성답게 감정을 아주 단단히 틀어쥐고 있다. 나는 내 감정을 조용히 처리한다. 남몰래 처리한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내 집에서 처리한다. 

 

- 물건들, 물건들, 나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다. 내게 필요 없는 물건들, 내가 쓰지 않는 물건들, 하지만 내가 갖고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물건들.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무실에서도 나는 물건의 바다에 익사하기 직전이다. 

 

- 하지만 이런 물건들은 이상한 측면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물론 오래된 리본 뭉치의 의미는 변변찮겠지만,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간직하고 어떤 방식으로 간직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외적인 측면과 내적인 측면에서 자기 삶을 어떻게 조직하는가를 보여주는 작은 증거다. 누군가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가 쌓아둔 물건들을 살펴보라. 

 

- 우리가 가진 물건들의 대부분이 사실은 그렇다. 우리가 옷장과 선반장에 처박아둔 물건들은 우리가 내면에서 붙들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두려움, 기억, 꿈, 그릇된 인식을 반영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내 사무실에 있는 물건들 중 다수는 내가 내심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품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언젠가 저 오래된 잡지들 중 한 권에 실린 기사가, 혹은 저 롤로덱스에 든 오래된 전화번호들 중 하나가, 혹은 저 쪽지들이나 편지들이나 기타 등등 중 하나가 실제로 필요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 언젠가 이게 필요할 수도 있어. 언젠가 이게 그리울 수도 있어. 언젠가 유행이 돌아와서 이걸 다시 입고 싶어질 수도 있어. 

 

- 우리가 노인들을 대하는 방식은 정말 창피할 지경이다. 킹거리 씨의 사례는 그 상황을 다른 어떤 사례보다도 잘 보여준다. 아마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좌절감에서 비롯한 행위였을 것 같은데, 그의 딸은 요양원에서 그를 데리고 나온 뒤 경주로에 그를 버리고 떠났다. 휠체어에 붙어 있던 신상 정보를 떼어버리고, 옷에 달려 있던 라벨도 제거한 채. 대체 어떤 압박 때문에 그 딸이 그렇게 결정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런 선택이 드물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밝혀져 있다. 미국응급의사협회의 추산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경제적 혹은 감정적 한계에 부딪힌 가족에 의해 유기된 노인이 7만 명이나 된다.  

 

- 이 가슴 아픈 통계를 보고 탓할 대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우선, 노인 인구가 늘고 있다.(현재 미국에서는 다섯 가정 중 한 가정이 연로한 부모를 돌보고 있다.) 의료비가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 알츠하이머병 같은 질환 때문에 오랫동안 치매를 겪으면서 타인이 24시간 돌봐야 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노인 환자들이 많다. 보호자들이 절망이나 번아웃이나 둘 다에 무릎 꿇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게다가 연방 정부가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지도 않는다. 노인 대상의 의료 복지와 그 보호자들에 대한 지원은 소수자 가정들을 가난의 굴레에 묶어두고, 여자들을 불평등한 위치에 묶어두고, 에이즈 환자들을 항구적인 위기 상태에 묶어두는 온갖 비참한 이유들과 같은 이유 때문에 현재 부족하다. 그런 절망들을 신경 쓸 만큼 그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그런 절망들을 살피기를 바랄 만큼 도덕적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은 더 적다. 요컨대, 노인 대상의 의료 복지란 미국의 우선순위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지 부시 같은 사람이 병든 부모를 개 경주장에 유기할 처지에 놓이지 않는 한, 앞으로도 순위가 높아질 것 같지 않다.

 

- 하지만 이 현실에는 그보다 덜 구체적인 원인도 있다. 국가 차원에서 드러난 현상은 - 무관심, 타성, 노인을 돌보는 대신 그냥 무시하고 싶은 마음- 개인 차원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그나마 덜 매정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순순히 인정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일이지만, 우리는 늙고 아픈 사람들을(그리고 대체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머릿속에서 훨씬 더 쉽게 지워버린다. 노화는 추할 수 있다. 아주 협소하게 정의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문화에서는 특히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솔직히 병에 걸려 죽어가는 과정에 공감하기란 워낙 괴롭고 어려운 일이라서 상상력을 한껏 발휘하지 않고는 그런 경험을 추체험하기 어렵다. 우리가 조만간 존 킹거리 같은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할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 몇 달 전, 한 동료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동료가 무척 사랑한 분이었다. 그가 내 방으로 와서 소식을 전했을 때, 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반응했다. 두 가지를 물었다. 첫째, 갑작스러운 부고인지? 둘째, 연세가 얼마나 되었는지? 그가 82세라고 알려주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것은 무심결에 일말의 안도감을 드러낸 몸짓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오래 사셨네. 그렇게까지 슬픈 부고는 아니겠네." 
비극과 슬픔에도 정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말은 아니다. 분명히 정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내가 저런 반응을 자동적으로 보였다는 것은 돌아보면 좀 무서운 일이다. 안도? 연세가 많으셔서? 

 

- 할머니는 좋은 의료 서비스를 감당할 돈이 있다는 점에서 어마어마하게 운이 좋았다.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어떤 사랑과 지원을 끝까지 제공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핵심적인 도덕적 신념을 공유하는 가족이 있다는 점에서 어마어마하게 운이 좋았다.

 

- 어쩌면 이것은 순진한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때로 죽음은 어쩔 도리 없이 이보다 더 임의적이고 흉하니까. 하지만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에 평화롭게 존엄을 지키면서 돌아가셨고, 나는 우리 모두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러는 사람은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 

 

- 나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걸 보는 게 좋다. 반들반들 닦인 표면의 윤기가 좋고, 딱 알맞게 놓인 꽃병과 촛대의 대칭이 좋고, 깨끗하게 치워진 조리대의 휑한 모습이 좋다. 나처럼 청소광인 사람들은 이런 시각적 질서에서 깊은 안도감을 맛본다. 아, 어지러운 게 전혀 없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네. 이제 좀 쉴 수 있겠어. 

- 한편으로 나는 이런 질서에서 좀 더 문제적인 충동이 가하는 부담을 느끼는데,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이 점이다. 이런 행동에는 큰 두려움이 담겨 있고, 심한 경직성이 담겨 있고, 외적인 요소들을 조작함으로써 내면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야 말겠다는 거의 본능적인 충동이 담겨 있다. 내가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우친 것은 지난 6월이었다. 그때 나는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해 들어왔는데, 정리벽이 어찌나 심해졌던지 소파에서 일어날 때마다 쿠션을 팡팡 두드려서 부풀려 두어야 직성이 풀릴 지경이었다. 나는 마치 검사를 실시하는 교관처럼 집 안을 순찰했다. 거실의 미션 양식 의자가 소파와 정확히 90도 각도를 이루고 있나? 그것이 맞은편 의자와 정확히 줄이 맞나? 조리대에 커피 가루 찌꺼기가 있나? 부엌 바닥에 얼룩이 있나? 있다고? 뭐?! 어서 스펀지를 가져오도록!

 

- 내가 이 집으로 이사 온 때는 삶이 유난히 힘들던 시기였다. 그전해와 전전해에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와 오빠와 언니는 그때 부모님이 살던 집이자 우리가 자란 집을 정리해서 파는 중이었다. 부모님의 집은 혼돈 그 자체였다. 우리는 38년 동안 쌓인 물건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내버리고, 상자에 담아야 했다. 어느 구석을 보나, 어느 표면을 보나 거기에는 수십 년 치의 감정이 숨어 있었다. 그러니 내가 내 집에서 발휘하는 정리벽은 그에 대한 아주 강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가 내면의 무질서와 격변처럼 느낀 상황에 대한 방어 행동이었다. 그것은 두려움에 압도된 나머지 통제력을 갈구하는 행동인데, 나는 과거에 거식증을 겪을 때도 그랬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혼돈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통제하려고 든다. 무엇이든 좋으니 무언가를. 이를테면 자신이 섭취하는 칼로리를, 자신의 몸무게를, 자신의 환경을 공황에 빠진 사람은 이상한 짓도 하게 된다. 

 

- 나는 남자 친구와 함께 살기로 한 친구의 결정을 무척 용기 있는 것으로 여긴다. 남자 친구의 너저분함에 대한 친구의 공포는 따져보면 일종의 굴절 현상이다. 친구가 외적인 무질서에 대해서 느끼는 불안은 사실 그보다 더 복잡한 내면의 경계선을 약간 흩뜨리기로 결정한 데 대한, 타인의 물건들을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말 그대로 공유하기로 결정한 데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가히 완벽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문제다. 나 같은 사람들이 어렵게 느끼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정리벽이 있는 사람도 보통 혼자 사는 한은 괜찮다. 자신의 사적인 경계선 안에서 그 충동을 탐닉하여, 맘껏 줄 세우고 박박 닦고 하는 동안에는 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생활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할 때, 그래서 인간관계라는 요소가 방정식에 첨가될 때다. 그리고 이 인간관계란 알다시피 무척 지저분할 수 있다. 누가 내 집에서 공간을 어지럽히면, 나는 마치 그 공간이 내 내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양 심하게 위협당하는 기분이 든다. 누가 내 조리대를 어지럽히면, 그는 내 삶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누가 내 부엌을 헝클어뜨리면, 그는 내 감정을 헝클어뜨리는 것이다. 나도 이런 생각이 비합리적이란 건 안다. 그리고 나도 애쓴다. 비와 쓰레받기를 들고 남을 졸졸 따라다니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려고 애쓴다.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고, 그런 생각의 힘은 강력하다. 

 

- 코치는 말할 것이다. 난장판을 즐겨봐! 되든 안 되든 해보고, 모든 걸 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려! 
합리적인 얘기로 들린다. 대단히 바람직한 목표인 것 같다. 하지만 당장 그렇게 될 수는 없으니, 일단은 에이잭스 세척제를 좀 더 사둬야겠다. 만일의 사태란 게 있잖아.

 

- 인간의 친절함에 대한 가슴 벅찬 자랑스러움이 인간의 눈먼 증오에 대한 좌절감과 섞인다. 두 감정이 동시에 들 때도 많다. 내가 만난 한 여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보스턴 시내 지하철에서 느닷없이 울기 시작했는데, 전혀 낯 모르는 사람인 옆자리 남자가 그의 손을 쥐더니 그가 내릴 때까지 그냥 꼭 잡아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 연민의 행동에 감동하여 더 크게 훌쩍였는데, 그러다가 지하철을 나선 순간 벽에 이런 낙서가 갓 쓰인 걸 보았다고 한다. 이슬람에게 핵폭탄을. 

 

- 이 감정들을 어떻게 조화시킬까? 나는 평소 미국 국기를 보고도 무해한 무감각 이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인데, 그런 내가 놀랍게도 이제 깊은 애국심을 느끼고 있고, 아마 덜 놀랍게도 우리 정치가들과 군대의 대응이 보나 마나 성급하고 값비싸고 근시안적인 것이리라는 회의감과 불신도 느낀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서 느끼는 깊은 증오심에 마치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 곰처럼 방어적인 기분이 들지만, 우리 스스로가 그런 적개심을 얻고 키우는 데 적잖은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겸허한 기분도 든다. 또 나는 부끄럽다.  내가 그동안 스스로 구축한 무지와 현실 안주의 고치 속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이 창피하다. 

 

- 우리 문화는 흑백 내러티브, 확실하게 정의된 감정, 손쉬운 결말을 즐긴다. 따라서 갑자기 이런 복잡함에 내던져지는 일은 피곤할 수밖에 없다. 너무 많은 감정들이 한정된 뇌 공간을 두고 다투고 해피엔딩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짧디 짧은 주의력 지속 시간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는 암묵적 믿음조차 이번에는 들지 않고, 영화나 스포츠나 컴퓨터 게임 같은 일상의 아편으로부터도 위안을 얻을 수 없다. 내가 이야기 나눈 사람들은 모두 갑자기 청소년으로 돌아간 듯 이상하게 리더십을 갈구하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리더십을 불신한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데 -헌혈을 하고, 초를 밝히고, 청원서에 서명하고, 무슨 일이든!- 그러면서도 동시에 물러나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편집증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사람들은 우리 곁에 있는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 말한다. 나는 그런 극단들 사이를 갈팡질팡 오가는 기분이다. 한순간에는 보호받는 기분이다가 다음 순간에는 취약한 기분이고, 비탄을 느끼다가도 초연해지고, 연대를 느끼다가도 소원해진다. 어떤 순간에는 선의에 벅차서 스타벅스에서 내게 커피를 따라준 남자를 껴안고 싶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짜증이 북받쳐서 내가 우유를 따르려고 할 때 새치기한 남자를 갈기고 싶다. 대체로는 닻이 풀린 기분이다. 영원하고 안전했던 반석이 사라지고 흐늘거리는 모래 위에 선 것 같다. 낯익던 것이 이제 기이하리만치 낯설어 보인다. 사이렌 소리가 다르게 들린다. 무서우면서도 안심된다. 일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정상의 정의가 뭔지 모르겠다. 

 

- 사람들이 멍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 아닐까 싶다. 이런 오만 가지 감정들이 정신을 압도하는 바람에 우리가 피로와 무력함을, 그리고 감정들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반응은 인간적인 것이면서도 무서운 것인 듯하다. 

 

- 내가 평범한 삶, 보통 사람이라는 이 목표를 진작 추구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 평범함은 나쁜 것이고 보통이란 추구할 가치가 없는 목표라고 생각하며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특권이 지나치게 많고 고상했던 내 성장 환경의 탓도 있다. 케임브리지의 세련된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숟가락 쥐는 법을 배우기 전부터 훗날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하는 게 제 운명이라고 배우면, 즉 어린 나이부터 내가 해내는 일이 나 자신의 존재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배우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의 방식을 목표로 삼기가 어렵다. "엄마, 아빠, 저 대학 졸업하고 나서 편의점 직원이 될 계획이에요. 괜찮죠?" 사방에서 심장발작 일으키는 소리가 들린다.

 

- 하지만 특별한 것에 끌리고 보통의 것은 유효한 선택지가 아니라고 여기는 내 마음은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된 듯하다. 그 근원을 빠지다 보면 일고여덟 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에 아버지가 가끔 내 방에 와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보라고 시켰다. 아버지는 정신분석가였고 그것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자유 연상 검사법이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아무거나 마음속에 떠오르는 걸 그려보렴.'

 

- 나는 침대에 앉아서 스케치북을 무릎에 놓은 채 굳어버렸다. 아버지가 무엇을 알아보려고 그러는지 당시에는 올랐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뭔가 조사하려고 그린다는 것, 뭔가 어둡고 복잡한 것을 탐구하려고 그린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서운 것들을 그린다. 괴물들, 어둠의 그림 등.

 

- 내가 정말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이미지들이 아버지를 만족시킬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지어낸다. 이 일화는 내가 살면서 겪게 될 관계들에 대한 최초의 견본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아버지는 나를 특별한 아이로 점찍고서, 그러니까 내 안에 뭔가 독창적이고 복잡한 것이 있다는 걸 꿰뚫어 보고서 나름의 서투른 방식으로 그것을 끌어내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반응은 아버지가 원한다고 여긴 것을 드리는 것, 즉 기대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감동적인 관계이기는 하지만, 아이에게는 당연히 복잡한 상황이다. 일고여덟 살의 아이는 그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떠올릴 만하다. 내가 그냥 아이면 안 되나?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아이면 안되나?

문제는 내가 요즘도 꼭 그렇게 행동한다는 점이다.

 

- 골칫거리는 내가 중심 없이 시험을 치르듯이 만성적인 수행 불만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나는 뛰어나야 해, 통찰력과 재치를 발산해야 해, 정답을 맞혀야 해, 완벽하고 착하고 모범적이어야 해. 나는 일에서 그렇다. 그래서 내 업무에 대해서 주기적으로(매주) 평가를 받는 직업에 투신했다. 게다가 나는 관계에서도 수없이 그랬다. 꼭 아버지 같은 남자들을 사귀었다.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다.) 기준이 특별히 높은 남자들을 사귀어서 내가 이만하면 괜찮은가, 이만하면 똑똑한가, 내 수행 실적이 기대에 부응할까 하고 상시적으로 조바심 내며 살았다.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이런 세계관에는 실수의 여지가 많지 않다. 나는 완벽하지 못한 상태를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몹시 불편해했다. 그것이 나의 가장 심각한 실패를 드러내기라도 하는 양 여겼다. 

 

- "평범해지는 건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그는 말했다. "실수할 수 있는 인간, 복잡한 감정과 흠과 결함을 갖고 있는 인간이 되어도 된다는 게 얼마나 안도감을 주는지 몰라요." 

 

- 그 반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지치는 일이다.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이상에 견주어 측정하면서 살다 보면, 어느새 많은 단순한 감정들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인간성에서 큰 부분을 잃게 된다. 편안함과 즐거움과 재미를 잊게 되고, 현재를 살아간다는 감각과 최소한 순간적일지라도 현재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다는 감각을 잃게 된다. 이를 악물고 살게 된다. 늘 다음에 통과할 후프를, 다음에 뛰어넘을 허들을, 다음에 우승할 시험을 기다리면서 살게 된다. 

-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모두 그 방에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저 내가 그것들을 알아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발버둥 칠 필요도, 시험을 통과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안락과 기쁨이었다. 그냥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까? 그냥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여자가 되면 안 되는 걸까?

 

- 얼마 전에 <글로브> 기자가 나를 인터뷰하려고 우리 집에 찾아왔는데, 그때 나는 어떤 옷을 입어야 좋을지 한참 고뇌했다. 어떤 모습을 보여준다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사람들은 내 모습에서 어떤 사람을 볼까? 결국에는 레깅스와 스웨터 시절의 옷들 중에서 골라 입어서 특징이라고는 전혀 없는 복장을 했지만, 그 일 이후로 나는 어떤 사람의 옷장 내용물이 그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얽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바깥으로 드러난 모습이 내 내면을 어떻게 반영할까? 곧 나올 책이 회고록이라는 점은 -게다가 내가 그다지 자랑스럽게 여기진 않는 중독적, 신경증적, 자기 파괴적 영역을 많이 다룬, 대단히 개인적인 글이다- 이런 질문을 더 시급한 것으로 만든다. 나는 내 정신 상태가 아주 좋다는 사실을 여봐란듯이 드러내는 차림을 하고 싶다. 치유하기, 함께 치유하기, "저는 이제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는 듯한 차림을 하고 싶다. 요즘 내가 텔레비전을 볼 때 자신감과 침착함의 모범 같은 인물들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 내 (여자) 친구 하나가 갑자기 자신의 (남자) 심리치료사를 사랑하게 되었다. 자연히 친구는 그 사실에 혼비백산했다. 친구가 전이轉移의 개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친구가 이것이 로맨스라는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임상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이라는 것, 즉 이것이 전이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자신이 자신의 깊은 두려움과 갈망과 허기를 심리치료사라는 백지에 투사했을 뿐임을 안다는 사실도 중요치 않다. 어쨌거나 친구의 감정은 진짜이고, 그 때문에 친구가 괴로워하고 심란해하니까. 

 

-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정신분석가와 분석 대상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이에 관한 이론을 처음 세운 것은 1890년대 말이었지만, 나는 만약에 훌륭한 정신과 의사가 환자들 대신에 치과 의사나 자동차 정비사나 뉴베리 가의 미용사를 정기적으로 만나는 괴로움을 견뎌야 했다면 그 현상을 훨씬 더 이르게 발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이는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숨쉬기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 친구가 겪는 전이가 임상적인 의미에서 중대하고 두드러진 사례일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 더 작고 덜 두드러진 사례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늘 겪고 있다. 사소한 투사의 순간들. 타인을 대할 때, 그것도 종종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아무런 맥락 없이 우리의 가장 어두운 두려움과 감정이 끌려 나오는 사건들. 우리가 일상의 사교에서 늘 겪는 그런 현상을 앞으로는 '작은 전이'라고 부르자.

 

- 잘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한 번 들어보라. 나는 일 년 동안 미뤄온 치과 처치를 받으려고 집을 나서는 중인데, 벌써 두려움에 떨고 있다. 뿌리 치료냐고? 아니다. 수술이냐고? 그것도 아니다. 그냥 정기적 스케일링을 받으려고 치위생사에게 예약해둔 것뿐이지만, 내 마음은 그 사실을 모른다. 내 마음에서 나는 사악하고 징벌적인 엄마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친구가 자신의 심리치료사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것처럼 내 감정을 진심으로 믿는다. 나는 치과 의자에 앉아서 움츠린다. 치위생사가 내 입안을 쑤시기 시작하고, 나는 작아지는 기분이다. 어어, 이분에게 다 들켰어. 그동안 치실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지. 

 

- 울화란 감정의 천연자원과도 같아서 심리치료로 캐낼 수 있는 것이라고 -결국에는 정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내가 적절한 상담사를 만난다면, 그래서 억눌렸던 화를 오랫동안 충분히 발산한다면, 어둡고 성난 마음의 영역들에 구석구석 빛을 비춘다면, 그러면 내게 주어진 울화의 총량을 다 써버리고 마침내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화를 넘어서고 평정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나는 심리치료가 화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최소한 그 감정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는 수준으로 누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분노가 유한한 것이라거나 하물며 정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다. 내가(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울화의 주된 출처를(부모나 형제자매를) 잘 다룰 순 있겠지만, 동굴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살다 보면 이따금 우리의 분노를 자극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화는 사랑이나 욕구나 애정과 마찬가지로 인간사라는 복잡한 스튜의 한 부분이다. 해롭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재료이지만 레시피에서 아예 빼버릴 수는 없다. 

 

- 물론, 이런 지혜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썩 유용하지는 않다. 나도 화를 다루는 데는 젬병이다. 아마 질투를 제외하고는 분노야말로 내가 인간의 다른 어떤 감정들보다 불편하게 느끼는 감정이고, 그래서 보통은 나도 밥처럼 그 감정과 담을 쌓으려고 갖은 애를 쓴다. 만약 누가 나를 화나게 만들면, 나는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난 뒤에야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한다. 분노가 덮쳤을 때(혹은 쌓였을 때) 내 주된 대응책은 굴절과 우회다. 나는 슈퍼마켓 계산 줄에서 낯선 사람에게 씩씩거리거나,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내 집에서 문을 쾅쾅 닫거나, 앙심에 차서 험담을 잔뜩 늘어놓거나 한다. 나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는 것보다는 울분을 품는 것을 훨씬 더 잘하고, 극히 드물게 누군가에게 정말로 화났을 때는 온몸이 반응할 정도로 심하게 불편해한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목소리도 떨리고, 그러다가 보통은 울기 시작한다.(웩.)  

- 내가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요령은, 분노를 표현하는 것과 참는 것의 상대적 비용을 저울질함으로써 언제 싸울지를 잘 고르는 것이다. 자칫하면 양쪽 모두가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약 일주일 전, 친구 하나가 내게 자기 개를 산책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정말 무해한 부탁으로 들리지만, 나는 사실 엄청나게 화가 났다. 친구가 댄 이유가 거슬렸다. 친구는 파트너가 독감에 걸린 탓에 전날 자신이 하루에 두 번 개를 데리고 나갔다며, 하지만 자신도 학교 숙제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이튿날까지 두 번이나 개를 데리고 나가기가 너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의 말을 듣고 서서 생각했다. 잠깐, 나는 매일 하루에 두 번씩 개를 산책시키는데, 그리고 늘 마감에 쫓기는데, 이 요구는 우스꽝스럽거니와 내게 모욕적인 거 아니야? 하지만 나는 친구에게 불만을 삼키고 네 개를 스스로 산책시키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불만을 삼켰다. 아침 6시 30분에 친구의 개를 데리러 가서 프레시 폰드 저수지를 성실하게 산책시킨 뒤 도로 주인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러고는 그 주 내내 깔아뭉개진 기분, 이용당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한마디로 화를 떨치지 못했다. 

 

- 내가 화를 냈어야 했을까? 친구가 부탁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발끈함으로써 그 주 내내 속으로 투덜거릴 일이 없게 만들어야 했을까? 내가 열받는 경우에 종종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만약 그 감정을 표현했더라도, 거기에는 또 응분의 대가가 따랐을 것이다. 명백한 대가도(내 거절에 친구가 내게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은밀한 대가도(그동안 나는 남을 잘 돕고 잘 맞춰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쌓아왔는데, 좋든 나쁘든 그 이미지가 손상되었을 수도 있다) 있었을 것이다. 결국에는 내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 편이 더 쉬워 보였다. 그 대신 떳떳하게 분개하는 편이 쉬워 보였고, 그 상태는 비교적 짧게 끝났다.

 

- 이보다 더 중요한 관계에서는 우리가 대가와 이득을 좀 더 분명하게 헤아릴 수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동을 취하기가 더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내 경우를 생각해보면, 절친한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치민 화를 그냥 삭인 채 내 화를 돋운 사건을 마음속에서 오랜 원망의 칸에 분류하여 간직한 적이 많았다. 그런 원망은 내면에서 곪았고, 그리하여 불신과 막연한 악의로 관계에 미묘한 악영향을 끼쳤다. 밥의 경우도 생각해본다. 밥은 만약 자신이 형제에게 직설적으로 화낸다면 관계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혼자 속으로만 걱정하지만, 밥이 지금까지 지켜온 침묵도 비록 조용한 방식일지언정 덜 파괴적이진 않은 방식으로 이미 관계를 좀 먹었다. 

 

- 화를 터뜨리는 편이 언제나 효과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화를 내면 반드시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상처가 낫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나쁜 상황이 열을 내면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싸움을 잘 고르는 것 못지않게 대상을 잘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정신적으로 치고받을 의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화내는 것이 효과가 있으려면 -어느 쪽에게든 생산적이거나 유익하려면 - 관련된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서로 신뢰해야 한다. 두 사람 모두 괴로운 시기를 견뎌보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노라는 동전의 뒷면은 친밀함일 때가 많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겁나면서도 때로 가치 있는 일인 것은 그 때문이리라. 

 

- 그러니, 비록 싫은 감정이기는 해도 나는 분노에 찬성표를 던지겠다. 열띤 언쟁과 눈물과 분해서 이를 가는 상황에 찬성표를 던지겠다. 내가 그 일에 영 젬병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이 갈고닦을 가치가 있는 기술이라고 믿는다. 
자, 다 들었으면 그만 좀 꺼져.  

 

- 결혼식을 꿈꾸면서 자란 여자아이들은 모두 아름다움과 로맨스에 집착하는 여자로 자라고, 결혼식에 콧방귀 뀐 여자아이들은 모두 섹스와 폭력에 집착하는 여자로 자라고 하는 식으로 편이 갈린다는 말은 아니다. 꿈을 하나만 품는 사람은 없고, 가장 열렬한 로맨티시스트도 그보다 좀 더 복잡하고 야심 찬 측면을 함께 갖고 있기 마련이다. 

 

-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지점은, 문화적으로 지지받는 판타지와 실제 판타지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새하얀 웨딩드레스의 판타지에도 실제로는 어둡고 복잡한 실들이 엮여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꿈이든 특이한 꿈이든, 여자아이들이 실제로 품는 꿈은 신부가 되고 싶은 꿈보다 훨씬 더 풍성하다. 또한 여성이 현실에서 겪는 체험과 훨씬 더 비슷하다. 그런 꿈은 우리가 자신에게 바라는 바를 반영하고(강해지고 싶다, 똑똑해지고 싶다, 아름다워지고 싶다), 우리의 실제 모습을 반영한다.(가족에 대한 혼란한 감정, 분노와 섹슈얼리티, 세상을 안전하지 않은 장소로 느끼는 기분.) 그런 꿈은 우리의 은밀한 야망, 연결감에 대한 갈망, 우울의 씨앗을 보여준다. 그런 꿈은 여성으로 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 결혼식 판타지에는 좀 시대착오적이고 자기 현시적인 면이 있다. 그리고 그날 하루를 여성의 인생에서 최절정에 오른 날로 못 박는다는 것은 좀 슬픈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 판타지를 없애버렸으면 좋겠다. 만약 여러분의 주변에 여자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장난감 기타와 작은 앰프 세트를 사주라. 작고 흰 실험 가운을 사주라. 자그마한 방공호를 만들어주라. 바비는 현실을 사니까. 

 

- 보살피는 것과 자기를 망가뜨리는 것이 다른 만큼 달랐고, 선뜻 내주는 것과 참으며 억제하는 것이 다른 만큼 달랐다. 

 

- 팔이 여성의 몸에서 대부분의 다른 부위에 비해 자기 수용의 측면에서 조금이나마 더 여지를 주는 부위라는 사실은 아마 많은 여성에게 공통된 일일 것이다. 세갈래근 수술을 받으려고 성형외과를 찾아가는 사람은 없고, 탈의실에서 자신의 못생긴 아래팔을 한탄하거나 팔꿈치를 불평하는 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팔은 최소한 아직까지는 우리 몸에서 가장 덜 검열되는 부위이고, 가장 덜 성애화 된 부위이며, 그 덕분에 우리는 팔을 사랑하기가 가령 엉덩이나 허벅지를 사랑하기보다 약간 더 쉽다. 

- 하지만 여기에는 이미지에서 벗어난 단순한 안도감 외에 또 다른 것들도 작용한다. 오늘 아침 일찍 나는 강에 배를 띄우고, 청명한 8월 말 하늘 아래 강을 거슬러 오르며, 배의 리듬에, 수면에 부딪혀 반짝이는 햇빛에 노가 물을 가르는 느낌에 넋을 잃고 몰입했다. 나는 스스로 강하고 유능하다고 느꼈고, 내 몸이 내가 가르친 대로 움직인다고 느꼈다. 그리고 계속 노를 저으면서 나는 내 팔을 생각했고, 힘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생각했고, 내가 여성의 몸매와 체형을 규정하는 표준 방정식을 거스르는 데 이 스포츠가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를 생각했다. 평소 내 팔은 스웨터나 긴팔 옷에 싸여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가려져 있다. 나는 팔을 내보이지 않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내가 내 팔에서 느끼는 만족은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고, 이 점이 그 만족감을 특히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몸매에 관한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나 자신의 열정과 어떤 일을 할 줄 아는 능력들에서 비롯한 미적 기쁨, 안에서 나와 밖으로 드러난 아름다움, 날개가 된 나의 팔, 이것이 바로 해방의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명랑한 은둔자
『명랑한 은둔자』는 캐럴라인 냅의 유고 에세이집으로, 캐럴라인 냅이라는 작가의 삶 전반을 빼곡히 담고 있는 초상과 같은 책이다. 캐럴라인 냅은 삶의 미스터리가 크든 작든 그 모두를 예민하게 살피고, 무엇보다 거기서 자기 이해를 갈망했던 작가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혼자 살고 혼자 일했고, 가족과 친구와 개와 소중한 관계를 맺으며 자기 앞의 고독을 외면하지 않았던 삶을 이야기한다. 또한 알코올과 거식증에 중독되었으나 그로부터 힘겹게 빠져나왔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옥죄었던 심리적 굴레를 벗어나 자유와 해방감을 경험한 한 인간의 깨달음을 들려준다. 캐럴라인 냅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중독, 결핍, 가족, 반려견, 우정, 사랑, 애착, 일, 성장, 슬픔, 상실, 고립, 고독……. 특히 중독은 냅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키워드다. 그는 알코올 중독과 거식증을 겪으면서 자신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았고, 그 까마득한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다시 한 번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시간을 보냈다. 누구보다 캐럴라인 냅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옮긴이 김명남의 말처럼, 냅은 자기 이해와 수용, 그리고 변화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애썼고, 더 자유롭고, 더 즐겁고, 더 자신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강함과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삶의 명랑을 깨달은 저자로부터, 우리는 만난 적 없지만 오래 이어온 듯한 우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냅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 같고, 내 친구 이야기 같다. 이것이 냅의 재능이고, 그의 글이 가진 힘이다.
저자
캐럴라인 냅
출판
바다출판사
출판일
20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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