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자오시즈] 밤 여행자 1-2

일루젼 2022. 12. 2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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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자오시즈 / 이현아
출판 : 달다 
출간 : 2022.07.30 


       

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에 끌렸던 걸까? 출간된 지 얼마 안되어 구해 놓고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은 언제나처럼의 우연이지만, 마침 다 읽은 날이 남자 주인공의 생일이자 실제로 12월 24일인 '크리스마스 이브'로 일치한다는 건 기묘한 우연이다. 나는 이런 작은 우연을 알아차릴 때 혼자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즐거워하곤 한다. 

(남자 주인공인 성칭랑이 무척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그리고 2005년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떠올렸다. 그날의 나는 상하이에 있었고, 작은 조각 케이크를 사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며 페어몬트피스 호텔에 쏟아지는 황금빛 야경을 감상 중이었다. 밤 10시가 되고 거리가 어둠 속으로 잠겨들던 순간을, 왜 지금 내가 상하이에 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던 순간을 떠올렸다. 

 

잊고 있던 기억을 끌어내주어서도, 나름대로 의미 깊은 우연을 선물해주어서도 감사하지만, 일단 <밤 여행자>는 압도적인 내 취향이다. 중국 내의 작은 프랑스 조계를 배경으로 한 1937년의 이야기는 조선 시대 경성과 모던 보이 모던 걸의 분위기와 맞물린다. 당시 아시아 국가들의 상황은 각자 많은 아픔이 존재했던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이전까지 접하기 어려웠던 서양의 문물이 흘러들어오는 시기이기도 했다. 내게는 윤심덕과 사의 찬미의 시대이기도 하다. 

 

중국은 양의학과 전통의학(한의학)에 대한 인식이 주변국과는 조금 다른 편이지만, <밤 여행자> 안에서 묘사된 내용들로는 크게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편의점에서 택배를 보내고 발신 서비스를 신청하거나, 불야성을 이루는 밤거리, 자연스럽게 스마트폰(휴대폰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지만 파일을 주고 받고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GPS를 사용하는 정도)을 사용하는 장면들은 한국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사실 표현이 조심스럽지만 상해는, 당시 나에게는 서울보다 서울 같은 도시라는 인상으로 남아있다.) 

 

1900년대의 이국적인 고건물과 현대적 건물이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공존하는 도시, 상하이. <밤 여행자>는, 저자의 후기를 읽어보면 아직도 실제로 존재하는 곳인 듯한 699번지 아파트를 매개로 80여년의 시간을 건너뛰며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서로의 시대를 오가는 두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고, 그렇기에 아름답다. 자신의 상처를 무기로 삼지 않고 다듬고 일어선 이의 단단함과 다정함을 사랑한다.

 

개인적인 취향에 직격을 날리는 설정들이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재미있고 잘 구성된 소설이기도 하다.

밤 10시가 되면 찾아와 새벽 6시가 되면 돌아가는, 밤을 여행하는 남자 성칭랑.

그가 쥐고 있는 것들은 그와 함께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다만, 같은 높이의 건물이 아닐 경우 추락을 염려해 다급히 1층으로 내려갈 만큼 섬세한 설정이 새롭게 생겨난 벽이나 물체와 겹쳐질 가능성은 아무런 언급 없이 배제했다는 점이 조금 아쉬운 점. 하지만 이 정도는 다분히 소설적 허용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밤도 낮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돌아갈 곳이 없는 여자 쭝잉. 

한없이 단단해 보이는 부검의이자 경찰(공안)은 안개처럼 뿌연 담배 연기로 자신을 감싸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 마음에 드는 캐릭터들이었다. 

오랜만에 설레이며 읽었다.

 

추천. 

 

         

 


 

 

"우연 같은 일도 세월이 지나서 보면 운명이 정해놓은 필연이다."

 

   쭝잉은 가방에서 펜을 꺼내 엽서 가득 글을 쓰고 
699번지 아파트 주소를 적었다. 

받는 사람은 성칭랑이었고, 마지막 말은 '생일 축하해요'였다.

백여 년 전, 
공공조계 아이원이로 광런병원에서 태어난 성칭랑의 생일은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이었다.
 

 

 

- 택시 기사가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심야 뉴스 시사 프로그램에서 청중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쭝잉이 어릴 때부터 방송된 프로그램으로, 외할머니는 한밤중에도 잠을 안 자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밤에도 바쁜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은 모르는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 "아는 사이입니다."
남자가 손을 뻗으며 어서 가라는 표시를 했다. 옛날 신사가 손님을 배웅하던 전형적인 포즈였다.

 

-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커튼을 닫지않아 도시의 어둠이 열여섯 개로 나뉜 격자창을 통과해 들어와 실내에 빛과 어둠이 교차했다. 

 

- 쭝잉은 돌아누워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오른쪽 위에 배터리 잔량이 백 퍼센트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충전 완료. 휴대전화 배터리는 0에서 100으로 회복된다. 그러면 사람은?

 

- 쭝잉은 벽에 기대 있고, 성칭랑은 맞은편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멀뚱히 서 있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희미하게 들리던 노래가 멈추자, 쭝잉이 성칭랑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은 가늘고 길고, 힘이 있었다.
그의 손은 넓고 두툼하고, 따뜻했다.

꽉 잡은 두 손이 마치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 같았다.

 

- 옷핀을 꺼내 불빛에 마주 대고 손가락으로 누르자 뾰족한 핀이 나왔고 다시 누르자 들어갔다. 힘이 담긴 평화, 그가 본 쭝잉 같았다. 

 

- 뜨거운 물을 붓고 찬장에서 홍차를 찾아 찻잎을 컵에 넣으려다 그만두었다. 
됐다. 취향이 아닐 수도 있었다. 
쭝잉은 뜨거운 물만 컵에 담아 거실로 들고 나갔다. 

 

- 야유가 섞인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을 말해도 본질을 교묘히 흐리는 수법은 여전해 거짓이 판을 쳤다. 내부자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화가 났을 수도,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람들은 진실은 관심이 없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의혹을 제기하는 이유는 그저 자기가 믿고 싶은 '사실'에 대한 근거를 찾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 다른 기사는, 사고 피해자 가족이 관련 부처와 신시제약을 '성토'하는 것 외에 아이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아이는 어깨 골절을 당해 어깨를 석고붕대로 고정한 채 멍한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기사 제목은 '사고로 부모와 아직 출생 전인형제를 잃은 아이'로 짧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하던 일을 멈추게 하는 슬픔이 있었다. 사건 밖 사람들의 냉정한 소비였다. 

 

- "수술은 좀 나중에.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요. 수술한 다음에 하면 안 돼요?"
샤오다이는 다급하게 말하고 나서 곧 후회했다. 자신은 의사이니 수술 리스크를 더 고려해야 했다. 특히 쭝잉의 사례는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수술이 성공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실패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만약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려울 텐데 '일 처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준비되면 갈게."

샤오다이의 눈에 쭝잉은 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말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일단 약으로 조절하시죠."

 

- 너무 바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잊는 것 같다. 쭝잉만이 외부인처럼 복도 끝에 놓인 긴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사탕을 한 알 한 알 까먹었다. 

 

- 성칭랑을 다시 본 것은 오후 5시였다. 성칭랑이 나오자, 쭝잉은 벌떡 일어나 사탕 껍질을 벗겨 아무 말 없이 건넸다.
"혈당이 떨어졌을 거예요." 
성칭랑은 사탕을 받고 재빨리 몸을 돌리며 말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 할 곳이 더 있어요. 갑시다."

 

- 쫑잉은 성칭랑은 성씨 가문에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서 의중을 파악하는 것은 남에게 얹혀사는 사람이 가진 본능이자 단련된 예민하고 섬세한 마음이었다. 
"큰아버지 댁에서 자랐어요?"
"네."

 

- "다행히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서 몇 년 지냈습니다."
"그때가 몇 살이었어요?" 
"열여덟 살이요."
좋아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살면 멀리 떠나는 것을 갈망하게 된다. 쭝잉도 잘 아는 감정이었다. 쭝잉은 더 묻지 않았다.  

 

- 쭝잉은 식사 속도가 빨랐지만 허겁지겁 먹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동작과 리듬이 적절하다고 성칭후이는 생각했다. 

 

- "아파트 열쇠 바꿨어요. 현관 서랍에 예비 열쇠를 넣어놨으니 그거 사용하세요." 
쭝잉은 성칭랑이 안긴 '번거로움'을 매우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너무나 비정상적인 이 생활에 적응했다. 성칭랑은 쭝잉이 찌그러진 담뱃갑에서 마지막 블랙 데빌을 꺼내는 것을 봤다. 담배를 감싼 검은색 바탕에 금색 무늬가 있는 포장이 눌려 구겨져 있었다. 쭝잉은 두 손으로 담배 끝을 잡고 천천히 굴리기만 할 뿐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 6시, 쭝잉은 다시 한번 성칭랑이 훅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마치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는 꿈 같았다.
손을 뻗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고 귓가에 '땡땡땡’ 시계 종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문을 열자 날씨가 참 좋았다. 이것이 쭝잉이 마주해야 할 세계였다. 

 

- 쭝잉은 아침을 파는 식당에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평온하게 아침을 먹었다. 햇빛이 사치스럽게 식탁을 비추고 창밖에는 차량이 끊임없이 오가는 것이, 마치 이것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참모습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 수술실 밖에서 기다려줄 사람 하나 없이 수술 동의서에 본인이 서명하고 위험이 큰 수술을 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고독이 아니었다. 

- 여기까지 말한 쭝잉은 고개를 젖혀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마셨다. 
쭝잉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기복이 없는 어조가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덤덤한 표정 저 깊은 곳에 슬픔을 꼭꼭 숨겨놓았을 뿐이었다. 

 

- 머리 위로 내려앉은 부드러운 불빛 때문인지 여전히 딱딱한 갑옷을 입고 있어도 그렇게 냉정하지도,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쭝잉은 기계가 아니었기에 말과 행동은 차갑고 딱딱해도 감정은 있었다. 성칭랑은 쭝잉의 눈빛에서 연약한 모습과 그녀가 진짜 피곤하다는 것을 느꼈다.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탁상시계만이 째깍째깍 무정하게 새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가고, 쭝잉은 빠른 걸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쭝잉은 휴게실에 있는 성추스를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 처방전 좀 써줘."
"무슨 일이야? 아침에 준 약이 무슨 문제라도 있어?"
성추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아기가 폐렴인 것 같아. 약 좀 처방해 줘."

쭝잉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폐렴이면 입원하는 게 제일 좋은데..."
"나도 알아.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

(리뷰자 주 : 예전에는 '최선'의 선택지에 집착하는 편이었다. 지금은 그 '최선'이 누구의 '최선'인가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 성칭랑이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쭝잉이 돌아와 있었다. 

 

- "아주의 증상을 봐선 폐렴일 가능성이 커요. 관련 약을 넣었으니 칭후이에게 설명서에 써놓은 용량대로 사용하라고 하세요. 가방 안에 응급 약품도 넣었어요. 혹시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무슨 문제가 있으면 돌아와서 내게 말해요."

(리뷰자 주 : 세월의 흐름과 상관없이 통하는 글자라니. 간체와 정체, 번체 같은 차이는 있더라도 기본 소통은 당연히 가능하다는 놀라움.) 

 

- 관련 스크랩 등 파편화된 정보를 모아 붙이니 그 안에 있는 힘과 관계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 "신시를 창립했을 때, 사람들은 젊었고 이상도 같았어요. 그저 좋은 약을 만들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하지만 사람은 변하게 마련인지, 권력과 이권 다툼을 하느라 어느덧 초심을 잊었어요."

 

- 쭝잉은 성칭랑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열심히 설명하는 성칭랑의 모습을 보니 이 밤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더 이상 막막하지도, 답답하지도 않았다. 쭝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늘 덤덤하기만 했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옅은 미소였지만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전 괜찮아요."
쭝잉이 진심으로 말했다.


- "쭝잉은 똑똑하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이해력도 좋고 일도 깔끔하게 잘해서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에요."
쉐쉬안칭의 말에 성칭랑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일에 몰두하던 쭝잉의 모습들이 하나둘 지나가고, 마지막에는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쓸쓸한 옆모습이 떠올랐다. 뭐든 다 잘할 것 같은 모습 뒤에는 홀로 삼킨 고통이 있었다. 쭝잉이 이를 악물고 홀로 버틴 시간은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됐는지도 몰랐다. 

 

- 그때는 아주 혐오스러웠다면 지금은 실망스럽고 마음이 아팠다. 

 

- 쉐쉬안칭은 급한 일로 가봐야 하면서도 쭝잉을 다독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식적인 모습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만 챙겨가는 사람은 많아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상대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쭝잉은 이 인연이 아주 소중했다. 쉐쉬안칭이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쭝잉은 문 쪽을 한참 바라보다가 탁자 위에 놓인 활짝 핀 해바라기로 시선을 옮겼다. 어젯밤 성칭랑이 가져온 것이었다. 

- 쭝잉은 담배를 끄고 남은 반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속으로는 분노와 고통이 극에 달했지만, 겉으로는 표현을 안해 이상하리만큼 평온해 보였다. 증거물의 출처와 자신의 추론을 순서대로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차가워 쭝잉 자신도 이상할 정도였다. 

 

-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구름이 겹겹이 쌓여 있어 하늘이 유난히 낮게 내려앉은 것 같았다. 

 

- 여기 머무는 게 성칭랑을 사지로 밀어 넣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피하게 하는 것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성칭랑이 어디에서 불행한 사고를 당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쭝잉은 자신의 결정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 적막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게 다였다. 

- 전쟁 통에 죽는다고 반드시 장렬한 전사는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전쟁에서 소리 없이 목숨을 잃었다. 
죽기 전에도 장렬하지 않았고, 죽은 다음에도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 이 소설은 2013년 연말에 1930년대 인물 사진을 보고 구상했다. 옛날 배경에 양복을 입은 주인공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입가가 약간 올라간 것이 웃으려는 것 같았지만 명확하지는 않았다. 사진을 찍은 날짜는 상하이 전투 전이었고, 주인공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전쟁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었다. 

-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다. 그러나 삶이 끝나면 그 사람이 생전에 아무리 많은 일을 했어도 그의 이름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육체와 함께 사라진다. 후대 사람인 우리는 그들이 마주했던 그 시절이 참혹했던 시대였다는 것을 알지만, 거센 시대의 흐름 한복판에 있던 그들은 그것을 전혀 몰랐다. 1937년 전쟁 전 이 사진을 찍은 주인공도 가까운 미래에 상하이의 하늘에서 포성이 울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상하이는 근대부터 발전을 시작했다. 가로수가 우거진 조계의 길을 걸으면, 두세 걸음에 하나씩 옛 유적지와 건물을 만날 수 있고, 그 앞에는 건축 연도와 변천사가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다. 699번지 아파트도 그중 하나로, 1930년대에 준공됐다. 이 아파트는 프랑스 조계에 위치해 전쟁을 피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수십 년이 흐르고 아파트는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 현관 등은 첫 주인 때부터 지금의 주인 때까지 보존되어 낮에는 꺼졌다가 밤에는 켜지면서 시간의 흐름을 지켜봤다. 

 

- 민국 시대 이야기는 대부분 시대적인 낯선 느낌과 거리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시대의 인물과 아파트는 이야기에 독특한 연결감을 부여했고, 마찬가지로 도시의 역사를 탐구하고 이야기를 쓰는 동기가 되어주었다. 

- 소설 속 두 주인공은 아파트를 매개로 인연이 닿아 만난다. 한 사람은 전쟁 시기에 상하이에서 민족 공장의 내륙 이전을 위해 분주하고, 다른 한 사람은 현대 상하이에서 의심스러운 사건과 병으로 고생한다. 성 선생은 포화가 날리는 전쟁터에서 가족을 위해, 미완의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현대를 사는 쭝잉이 직면한 갈등과 음모는 다른 의미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건넨 구원과 지지는 어두운 운명 속에서 별을 본 것처럼, 어두울수록 별이 밝은 것처럼,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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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당신이 유언장을 작성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성칭랑이 본 쭝잉은 단순하고 의문투성이 존재였다. 쭝잉은 행동력이 탁월했고 직설적이었으며, 계산적이지 않고 단순함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지만, 자신은 그녀의 삶을 전혀 몰랐다. 가까이에서 쭝잉의 개인적인 물건을 많이 봤어도 말이다. 

 

- "유비무환이죠." 
차분한 말투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이 있었다. 이로써 쭝잉은 무분별하고 즉흥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신만의 생각과 주관이 있고 주도면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그 사진에 대해 말해줄 수 있어?" 
성추스는 그제야 쭝잉의 호기심이 이상했다. 평소 쭝잉은 다른 사람 일에 별 관심이 없었고, 이렇게 먼저 묻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 쭝잉의 손으로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아주라는 아기와 본능적으로 그녀의 옷을 잡았던 아라이, 이것은 쭝잉이 아라이를 성가에 데리고 간 인因이었고, 그로 인해 성칭후이가 입양을 한 것이 과였다. 성칭후이가 그들을 입양한 것이 인이었고, 그로 인해 그들이 그녀의 성을 따른 것이 과였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성추스를 있게 했다.  

 

- 하지만 쭝잉이 간여하지 않았어도 성추스는 그냥 쭝잉이 예전부터 알았던 성추스였을 것이다. 아주와 성칭후이의 만남과 헤어짐이 다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쭝잉이 간여를 했든 안 했든 그들의 인생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 "오늘은 엄마 기일이기도 해요. 예전에 돌아가셨죠." 
성칭랑은 9월 14일은 옌만이 세상을 떠난 날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쭝잉이 먼저 옛날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성칭랑은 자신이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 "그날 보모 아줌마가 저녁에 엄마가 돌아와서 생일잔치를 해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침부터 케이크와 초를 준비해 뒀죠. 하지만 아침이 밝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았어요. 늦게서야 그들이 집에 와서 엄마가 새 빌딩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줬어요. 그 말에 아빠는 몹시 화를 냈고 나한테까지 성질을 부리며 케이크와 초를 던져버렸죠." 

 

- "새 걸로 하나 샀어요. 안에 내 전화번호 저장해 놨으니 여기로 돌아오면 바로 연락할 수 있을 거예요. 제때 충전하는 거 잊지 말고 안 쓸 때는 꺼놔요." 
쭝잉은 성칭랑의 습득력을 믿었기 때문에 시범을 보여주지 않고 이렇게 말만 하고 씻으러 가버렸다.

 

- "제가 이때의 역사를 잘 몰라서 무식한 질문 하나만 할게요. 지금 상황이 어때요. 얼마나 이전했어요?"
성칭랑이 서류 가방에 서류를 넣고 미간을 좁히며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렸다. 
"이십 퍼센트요?"
"아니요, 이 퍼센트요."

 

- 무거운 표정과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이 느껴졌다.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다. 성칭랑은 상하이의 크고 작은 공장 오천여 개 가운데 절대다수는 내륙 이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쭝잉은 더 묻지 않았다. 

 

- "형 여자 대단하던데." 
성칭허가 씨익 웃으며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그래서?"
성칭랑이 성칭허의 눈빛을 맞받아치며 물었다. 성칭허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생각했다.
"집과 국가에 관한 입장과 생각은 다르지만, 우리가 여자 보는 눈은 비슷해. 안 그래?"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한 손에는 성칭허가 준 깨끗한 옷을 들고 있던 성칭랑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으나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다.
"집과 국가에 관한 입장과 생각이 뭐가 다르다는 거지? 여자 보는 눈이 비슷하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 

 

- "집은, 나는 정말 참을 수가 없거든. 그런데 형은 그렇게 밀어내도 떠나질 못하잖아. 국가는, 나는 최전방에 있고 형은 후방에서 바쁘고, 여자 보는 눈은 같네. 그렇다면 쟁탈전이라도 벌여야 하나?" 
성칭랑은 화를 꾹 참으며 성칭허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침착하게 말했다.
"쟁탈전? 쭝 선생은 물건이 아니야."

- 성칭허가 활짝 웃었다. 성칭허는 미소가 진짜처럼 보이길 바라며 어투를 바꿔 말했다.
"형, 그렇게 정색하지 마. 내가 최전방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입장만 아니었으면 결과가 어떻든 한번 해볼 거였으니까."

 

- 성칭허는 아무리 노력해도 쭝잉은 자기에게 눈길 한번 안줄 것을 알았지만, 어릴 때부터 늘 성칭랑과 비교를 당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객기를 부렸다. 게다가 오늘 성칭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구애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를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미래라는 것이 그저 살아남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성칭랑은 성칭허의 '내일을 알 수 없는'이라는 말의 뜻을 알아채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어쩌면 다를 수도요. 우리는 증거를 찾으러 갔지만, 그는 증거를 덮으려고 했어요. 동기가 달라요."
"뭘 덮으려고 합니까? 당신 어머니 사건과 관련된 거요? 아니면 싱쉐이 사건과 관련된 거요?"
성칭랑은 질문을 하고 다시 말했다.
"싱쉐이가 죽은 뒤 그가 당신에게 연락했습니까?"
쭝잉이 고개를 확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 "갑작스러운 연락에는 다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문득 생각나 연락하고 만나자고 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그가 당신을 떠보려고 연락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 쭝잉은 사실 첫 번째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번째 것에 대해서라면, 그때는 공감받는 느낌이 들어 감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이상했다. 뤼첸밍은 아주 우호적인 태도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쭝잉을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그제야 소름이 끼치고 혼란스러워져 순간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성칭랑은 쭝잉이 생각을 멈춘 것을 눈치채고 더 묻지 않았다.

 

- "사람마다 수집하는 동기는 다르겠지만, 만약 제가 누군가의 정보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모은다면, 사랑하는 사람일 겁니다." 
쭝잉의 손이 순간 멈췄다. 
"싱쉐이에게 특별한 취미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면, 그는 당신 어머니에게 깊은 감정을 품고 있었을 겁니다."
성칭랑의 말뜻은 분명했다. 싱쉐이가 옌만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쭝잉이 가장 원하지 않았던 대답이었다. 

 

-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면 싱쉐이가 사건 전체에서 도대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판단하기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잘못을 저지른 자의 양심의 가책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 쭝잉은 문득 성칭랑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성칭랑은 쭝잉의 생일은 물론 지금 직면한 문제와심지어 어머니의 과거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쭝잉자신은 성칭랑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지금 성칭랑은 상황이 여의치 않고 가족도 화목하지 않으며,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공장 내륙 이전에 쓴다는 것 뿐,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 미래 계획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성칭랑은 먼저 말을 꺼낸 적이 없었고 쭝잉도 묻지 않았다.

 

- 바깥은 비가 더 거세졌다. 쭝잉이 뭐에 홀린 듯이 물었다.

"전쟁 전에도 당신은 이렇게 온종일 바빴어요?"

"아마도요. 바쁜 내용이 달랐을 뿐입니다."

성칭랑은 쭝잉의 질문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쭝잉이 자신의 생활을 묻는 것을 기꺼워하는 것 같았다. 

 

- "성 선생님, 날마다 두 세계를 오가게 된 계기가 뭔지 생각해본 적 있어요?" 
성칭랑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있다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7월 12일, 처음으로 선생의 세계로 갔습니다. 그날은 평소와 다른 게 전혀 없었어요. 딱 한 가지만 빼고요." 

 

- "정말 고마워요." 
쭝잉은 손을 씻고 습관적으로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팔을 따라 물이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려 성칭핑의 인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이때 큰올케가 다가와 쭝잉에게 수건을 건넸다. 직업적인 습관 때문에 쭝잉은 수건으로 손을 닦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받아 들었다. 큰올케는 쭝잉이 손을 다 닦을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말했다.

 

- 성칭랑은 간단히 짐을 싸고 거실의 어두운 불빛 속에 앉아 마지막으로 아파트를 둘러봤다. 왠지 이별하는 느낌이 들었다. 몇 년 전, 귀국한 성칭랑은 집에서 이 아파트로 독립해 나와 크고 작은 가구를 모두 직접 골라 배치했다. 이 집에 오래 살다 보니 가끔은 여기서 아주 오랫동안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이 아파트가 영원히 이 모습을 유지할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수십 년 뒤 이 아파트에 매우 큰 변화가 생겼다. 

- 자신이 직접 사서 배치한 가구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다른 입주자의 물건이 그 자리를 차지해 자신의 흔적은 거의 다 지워지고 현관 등의 전등갓만이 남았다. 
수십 년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 "30년대 변호사를 닮았어."
쭝잉이 순간 숨을 죽이며 물었다.
"어떤 변호사요?"
"성은 성씨고, 파리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우리가 살았던 그 아파트에 살았어. 분명 최초로 입주한 사람이었을 거야. 그런데 몇 년 못 살고 세상을 떠났지. 상하이 전투에서 사망한 거 같은데 구체적인 날짜는 모르겠어. 하늘은 뛰어난 인재를 질투한다더니 안타까운 일이지."
쭝잉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 전화 저쪽에서 작은 외삼촌이 계속 말했다. 
"왜 이 얘기를 하게 됐지? 어쨌든 너는 혼자 사는 데다 일도 바쁘니 건강 조심하고 시간 있으면 할머니 보러 와."

 

- 성칭랑이 책 더미 앞에 서서 두꺼운 하드커버 외서를 넘겨보고 있었다. 검은색 표지에 <The book of answers(내 인생의 해답)>이라는제목이 금박으로 박혀 있었다. 쭝잉이 소리 없이 성칭랑 옆으로 다가가 한 권을 집어 들여 책 더미 위에 놓인 책 사용 설명을 읽었다.
"책을 덮어서 들고 눈을 감고 '네',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생각합니다. 두 손으로 책을 잡고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펼치면 해답이 나옵니다." 

 

- 쭝잉은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휙 돌려 책에 빠져 있는 성칭랑에게 물었다. 
"무슨 질문을 생각했어요?"

- 성칭랑은 그제야 쭝잉이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꾹 깨물며 생각했다.
"몇 분 전에 당신에게 이미 보냈습니다."
쭝잉은 주차할 때 진동하던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쭝잉이 휴대전화를 꺼내려고 하자, 성칭랑이 들고 있던 책을 건네며 물었다. 
"안 열어봅니까?"

- 쭝잉은 고개를 들어 성칭랑과 눈을 마주치고는 즉시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책을 잡고 잠시 뒤에 확 펼쳤다. 테두리를 제외한 페이지 전체에 작은 단어 하나만 달랑 적혀 있었다.
"Yes(네)."

 

- 성칭랑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휴대전화 메시지 봐요."
쭝잉이 문자 메시지를 보자, 최신 메시지는 "Will you marry me?(나랑 결혼할래요?)"였다.
"다시 펴볼래요?"
성칭랑이 책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 쭝잉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실내에 넘실대던 찬 공기가 멈추었다. 쭝잉은 논문을 계속 써 내려갔지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시선은 화면을 보면서도 주의력은 온통 성칭랑을 따라 서재로 옮겨가 있었다.

 

- 성칭랑은 약 삼십 초 뒤에 책 한 무더기를 들고 나와 탁자에 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과일차를 끓였다. 달콤한 향기가 실내를 가득 감쌌다.

 

- 쭝잉은 자세를 고쳐 앉고 몸을 숙여 탁자에 쌓인 책들을 살펴봤다. 제일 위에는 인민교육출판사 버전의 <한어병음-표준중문 漢語拼音-標准中文>이 있었다. 표지에 인물 카툰이 그려진 것이 국어 과목 입문 교재인 것 같았다. 알파벳을 이용한 현대 중국어 발음 표기법인 병음을 배운 적이 없는 이 구식 선생은 병음 입력기의 효율성을 보고는 초등학생용 교재를 처음부터 공부하는 것 같았다. 공부는 매우 진지한 일이건만, 표지를 본 쭝잉은 그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 그러나 어린이 교재 아래에 있는 <한어병음 경전방안선평 語拼音 經典方案選評>은 중국어 병음 발전사 관련 서적이었다. 딱 봐도 입문 서적은 아닌 것이 하나를 배워도 끝까지 파는 구식 선생다웠다. 

- 쭝잉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성칭랑이 한쪽에 둔 휴대전화에 문자가 들어왔다. 발신인은 쉐쉬안칭이고, "방금 말한 핀란드 VR 야간열차 예약 공략(링크)입니다"에 이어서 "내가 그동안 쌓인 정이 있어서 알려주는데 쭝잉 개인 여권 없어요. 회사에 신청해야 합니다"라는 문자가 이어졌다. 쭝잉이 내용을 읽자마자 액정이 꺼졌다.

- 성칭랑이 유리 주전자를 들고나와 찻잔에 과일차를 따랐다. 쭝잉은 손을 뻗어 잔을 집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다가, 성칭랑이 소파에 앉고 나서야 툭 던지듯 말했다.

"문자 왔어요."

 

- 성칭랑은 요즘 거의 온종일 도서관 자습실에 있어서 휴대전화를 묵음으로 전환해 두었다. 쭝잉의 말에 성칭랑은 휴대전화를 가져와 잠금을 해제했다. 정말 쉐쉬안칭에게서 문자 메시지가와 있었다. 성칭랑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쭝잉은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자료를 보는 척하면서 과일차를 마셨다. 핀란드어, 티켓 예약, 여권... 
키워드를 연결해 보니 대충 상황이 파악되었다. 

 

- 그때는 정말 핀란드의 북극권에 오게 될 줄은, 그때의 불청객이 이 세계에 남아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앙역을 나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템펠리 아우키오 교회를 지났다. 쭝잉은 이 교회에 대해 조금 알았다. 암석을 파서 지은 교회는 밖에서 보면 언덕처럼 보여도 안에 들어가면 별천지였다. 터널 같은 입구를 따라 들어가자 직경 이십사 미터의 거대한 돔과 돔을 지탱하는 백 개의 구리 막대가 공간을 넓어 보이게 했고, 중앙에 서면 지하라는 압박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 저녁 무렵이라 교회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들어올 때 울리던 피아노 소리마저 멈추었다. 고요히 타오르는 초와 특별한 디자인이 교회에 정숙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 성칭랑에게는 지난 육 개월 동안의 기억이 매우 강렬하게 남아 있다. 지난해 연말 퇴원한 성칭랑은 699번지 아파트 발코니에서 칠십여 년 전 자신이 살았던 이곳의 물건은 누가 치웠고 어떻게 치웠을까, 성칭후이와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 "이 팡세는 상하이 팡세였어요."

"..."
천부적으로 유머 감각이 부족한 성칭랑은 이때부터 함부로 유머를 던지지 않았는데, 뻔뻔스럽게 이제 와 다시 시도하다니 비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시대를 오가지 않게 되고 흠칫흠칫 놀랄 일도 사라져 아침저녁으로 늘 함께 하다 보니 상대의 재미있는 일면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 객차 안은 너무 고요해 작은 웃음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는 것 같았다. 성칭랑은 손을 뻗어 쭝잉의 머리를 감싸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면서 "어서 자요, 깨면 도착해 있을 거예요" 하고 속삭였다. 성칭랑의 목소리는 사람을 안심시켰다. 성칭랑의 어깨에 기대자 향수와는 다른 따뜻한 냄새가 났다.

- 야간열차가 동화 속 설국을 뚫고 달리는 동안 열차에 탄 거의 모든 사람이 꿈나라로 향했다. 열차 밖에는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함박눈이 날렸고, 열차 안에는 어깨에서 전해지는 고른 숨소리와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성칭랑은 킨들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으며 쭝잉 쪽으로 고개를 약간 기울여 눈을 감고 방금 책에서 봤던 내용을 떠올렸다...

"우연 같은 일도 세월이 지나서 보면 운명이 정해놓은 필연이다."

-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온통 새하얀 이른 아침의 산타클로스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로바니에미였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폐허가 되었던 핀란드의 북부 도시였다. 

 

-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했다. 북극권으로 넘어가는 것 외에 돈만 내면 북극에 '들어왔다는' 증서를 받을 수 있었고, 우체국에서 엽서도 부칠 수 있었다. 엽서는 크리스마스에 맞춰 산 넘고 바다를 건너 목적지에 도착했다.   
 

- 쭝잉은 가방에서 펜을 꺼내 엽서 가득 글을 쓰고 699번지 아파트 주소를 적었다. 받는 사람은 성칭랑이었고, 마지막 말은 '생일 축하해요'였다.

 

- 백여 년 전, 공공조계 아이원이로 광런병원에서 태어난 성칭랑의 생일은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이었다. 
지난해 연말은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어 생일을 축하해 주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냥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북극권을 넘어 북으로 향하는 길에서 쭝잉은 성칭랑이 실시간 오로라 예보를 확인하는 것을 봤다.
"오늘 오로라 볼 수 있어요?"
성칭랑은 화면에 뜬 오로라 지수라고도 불리는 지구 자기장 지수인 Kp 지수를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나 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북쪽으로 달리다 보니 오로라에 대한 기대가 점점 강해졌다. 

 

- 북극권에서의 마지막 날 밤, 칵슬라우타넨 아틱리조트의 유리 이글루에 도착한 두 사람은 너무 피곤해 황급히 밥을 먹고 샤워를 한 뒤 일찌감치 쉬기로 했다. 유리로 만들어진 객실은 침대에 누우면 드넓은 하늘이 보여눈 덮인 야외에서 노숙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깥은 고요하고 실내 온도는 적당했다. 낮게 걸린 커튼을 반쯤 치고 서로를 꼭 끌어안고 부드러운 침대에 누우니 금세 잠이 몰려왔다. 

 

- 새벽 1시쯤, 성칭랑은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전화의 알림 소리에 잠이 깼다.
휴대전화를 들어 알림을 본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묵직하고 단조롭던 어둠의 장막을 누군가 쫙 찢은 것처럼 오로라가 춤을 추듯 용솟음쳤다. 유리 지붕 밖 높이 솟은 침엽수가 오로라의 움직임에 따라 모습을 바꾸었다. 

- 성칠량은 쭝잉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중앙은 잠결에 지붕 위의 하늘을 봤다. 형광색 리본이 춤을 추는 것처럼 밤하늘을 수놓으며 부피를 키워갔다. 순간, 깊은 바다에 잠겨 위를 쳐다보는 것처럼 머리 위에서 아름답고 웅장한 빛이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면서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했다. 

-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입을 맞췄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마침내 기다리던 장면이 나타났다.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도 나타났다.  

     

 

 

 

 
밤 여행자 1
■ “우리는 밤 10시에 다시 만날 겁니다.” 1937년 7월 11일, 상하이 699번지 아파트. 밤 10시 정각, 성칭랑은 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현관 등이 꺼졌다. 2015년 7월 11일, 상하이 699번지 아파트. 밤 10시 정각, 쭝잉은 살인사건 현장에서 돌아왔다. 갑자기 현관 등이 깜박거렸다. 두 개의 시공간에서 똑같은 현관 등이 하나는 꺼지고 하나는 깜박이는 순간, 성칭랑은 2015년 현대로 이동한다. 그리고 아침 6시면 다시 그가 사는 시대로 돌아간다. 밤 10시에 돌연 나타나 아침 6시면 사라지는 시공을 초월한 밤 여행자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그녀의 삶에 끼어들었다. 원인도 모르고 얼마나 지속될지도 모르며, 설명할 수도 없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 마음의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은 상하이 699번지 아파트에서 시공을 초월하며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끌리게 되는데…….
저자
자오시즈
출판
달다
출판일
2022.07.30
 
밤 여행자 2
■ “우리는 밤 10시에 다시 만날 겁니다.” 1937년 7월 11일, 상하이 699번지 아파트. 밤 10시 정각, 성칭랑은 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현관 등이 꺼졌다. 2015년 7월 11일, 상하이 699번지 아파트. 밤 10시 정각, 쭝잉은 살인사건 현장에서 돌아왔다. 갑자기 현관 등이 깜박거렸다. 두 개의 시공간에서 똑같은 현관 등이 하나는 꺼지고 하나는 깜박이는 순간, 성칭랑은 2015년 현대로 이동한다. 그리고 아침 6시면 다시 그가 사는 시대로 돌아간다. 밤 10시에 돌연 나타나 아침 6시면 사라지는 시공을 초월한 밤 여행자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그녀의 삶에 끼어들었다. 원인도 모르고 얼마나 지속될지도 모르며, 설명할 수도 없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 마음의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은 상하이 699번지 아파트에서 시공을 초월하며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끌리게 되는데…….
저자
자오시즈
출판
달다
출판일
202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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