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캐럴라인 냅] 드링킹 - 그 치명적 유혹

일루젼 2022. 12. 24.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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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캐럴라인 냅 / 고정아
출판 : 나무처럼 
출간 : 2017.11.10 


 

 

얼마 전 캐럴라인 냅(혹은 캐롤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읽으며 그녀의 문장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다른 저서들을 찾아보다 <드링킹>을 골랐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캐럴라인이 언급하는 일화들은 읽을 때마다 '섬짓할 정도로 솔직'하지만, 거기에도 언제나 '조금쯤은 가리워진' 구석들이 있었다. 독자들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던 자전적인 고백들 속에도 조금 더 깊은 조각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조각들은 각기 다른 맥락들 속에서 나타나는 약간의 불일치점들을 겹쳐볼 때만 어렴풋하게 드러난다. 

 

자기 자신을 이렇게까지 사고와 관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이란 영원한 뮤즈이자 동반자이기도 하니까. 어떤 의미로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강렬하게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도 <드링킹>은 '러브스토리'이다.

 

내가 그녀의 글에 강한 매력과 공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불명확하다. 나를 이입해서 읽을 수 있는 특정 조건들의 유사성 때문인지, 혹은 비슷한 연령대의 동성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녀의 글 자체가 가진 흡입력과 매력 때문인지.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드링킹>이 나에게 던진 질문은 꽤나 무겁다. 

 

'존재하기만 하는 삶'에서 '경험하는 삶'으로, 그리고 그에 이어서 '실현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지향한다면.

제 나이에 걸맞은 성숙함을 갖추고 자기 자신에게 긍지를 가진 삶을 영위하고 싶다면.

몰입의 대상만을 바꾸어가며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을 멈추고 싶다면.

 

나는 이 책을 맥주를 마시며 읽었다. 차마 와인과 함께 읽을 수는 없었는데, 그건 약간의 공포심을 동반한 망설임이었다. 

나는 과연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영구적으로 술을 끊을 수 있는가? 

잠깐 동안 흐른 머릿속의 정적이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나에게는 다른 질문이 남았다. 

 

 


 <드링킹>을 읽는 동안 떠오른 또 다른 인물은 오스카 와일드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은 '나'라는 그의 신념 -그것이 언제까지 유지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겠지만- 은 어딘지 모르게 캐럴라인 냅의 문장들과 닮아 있다. 그녀의 자기혐오는 자기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강렬한 두려움은 강렬한 열망과 다르지 않다.  

 

삶의 목적은 자기 계발이다.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우리 모두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

The aim of life is self-development. To realize one's nature perfectly that is what each of us is here for. 

 

이기심은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Selfishness is not living as one wishes to live, it is asking others to live as one wishes to live.

 

나는 내 일기장 없이는 결코 여행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항상 기차에서 읽을 만한 흥미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I never travel without my diary. One should always have something sensational to read in the train.

 

-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나는 기뻐서 마시고, 불안해서 마시고,
지루해서 마시고, 또 우울해서 마셨다.

 

마지막 시기에 이르렀을 때, 
인생을 통틀어 내게 그보다 중요한 관계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러브스토리다.

 

 

-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나는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랑이 내가 아끼던 모든 것을 망쳐버린 탓에 결국 헤어졌다. 물론 이런 일이 쉽거나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정밀하게 살펴보자면, 우리의 관계는 내가 친구의 두 딸을 죽일 뻔했던 아찔한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 리츠칼튼호텔에서 퓌메 블랑을 마시고, 회사 건너편의 칙칙한 중국 식당에서 조니워커 블랙 온더록스를 더블 샷으로 마시고, 그리고 집에서 혼자 마셨다. 나는 오랫동안 값비싼 적포도주를 마시면서 메를로의 나른하게 감기는 맛과 카베르네 소비뇽의 톡 쏘는 맛, 남프랑스산 보카스텔의 부드럽고 간결한 맛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미묘한 맛의 차이 같은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내게 그런 것은 부차적인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 전시용 코냑은 상당히 합리적인 수위 감소세를 보였다. 보통 일주일에 1인치 정도. 하지만 진짜 코냑은 아주 빠르게, 때에 따라서는 며칠 가지 않아 사라졌다. 그때 나는 혼자 살았는데, 그러면서도 이런 이중 행위를 한 것은 그러지 않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겉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내게 언제나 중요했다.

 

- "그것은 아주 위험해. 담배보다도 더." 
어머니는 말할 때 단어 하나하나를 극도로 신중하게 고르는 분이다. 그러므로 나는 '술은 담배보다도 위험하다'는 어머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담배는 암을 일으킨다. 암은 지금 아버지를 죽음의 병상에 뉘었을 뿐 아니라, 외가 쪽 친척 몇 명을 데려갔고, 머잖아 어머니 또한 쓰러뜨린 병이다. 어머니가 음주가 흡연보다 위험하다고 한 것은 담배는 몸을 망가뜨릴 뿐이지만, 술은 내 정신과 미래까지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진심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진성 알코올 중독자들도 때로는 이성의 불빛 아래 명징하게 깨닫는다. 알코올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그것이 아교처럼 신체 내부에 엉겨 붙어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든다는 것을. 

 

- 연못은 잔물결들로 아름답게 반짝거렸고, 해변에서 휩쓸려온 모래들은 연못 가장자리에서 황톳빛 흙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만큼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서른세 살이었고, 술을 지나치게 마셨으며, 사는 것이 온통 엉망이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사실은 별개의 것일 수 없었다. 

 

- 하늘은 맑고, 늦은 오후의 빛이 강렬했으며, 선글라스를 낀 승객들은 커다란 일회용 컵에 버드와이저나 미켈럽을 담아 들고 갑판의 천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결국 나는 맥주를 마셨다. 

(리뷰자 주 : 미켈러 맥주들을 말하는 거겠지... 맛있지...)

 

- 원래 그런 법이다. 진성 알코올 중독자들은 시도하고 또 실패한다. 약속하고, 약속을 지키려고 진심으로 노력하고,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외면하고, 석 잔, 아니 네 잔 다섯 잔째 술을 마시기 위한 변명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오늘만이야. 오늘은 너무 힘들었어. 위로가 필요해. 내일부터는 잘할 거야.' 

 

- 마지막 시기에 이르렀을 때, 인생을 통틀어 내게 그보다 중요한 관계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러브스토리다. 

 

- 열정에 대한 이야기고, 감각적 쾌락과 깊은 흡인력, 욕망과 두려움, 타오르는 갈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 강렬함으로 온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는 결핍에 관한 이야기다. 도저히 이별을 상상할 수 없는 상대와 작별을 나누는 이야기다. 

 

- 나는 술 마시는 느낌을 사랑했고, 세상을 일그러뜨리는 그 특별한 힘을 사랑했고, 정신의 초점을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의식에서 덜 고통스러운 어떤 것들로 옮겨놓는 그 능력을 사랑했다. 나는 술이 내는 소리도 사랑했다. 와인 병에서 코르크가 뽑히는 소리, 술을 따를 때 찰랑거리는 소리,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술 마시는 분위기도 좋아했다. 술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우정과 온기, 편안하게 한데 녹아드는 기분, 마음에 솟아나는 용기. 

 

- 우리의 첫 만남은 별로 극적이지 않았다. 첫눈에 반한 사이는 아니었다. 처음 술을 마셨을 때 느낌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천천히 굳어진 사이다. 막연히 품고 있던 좋은 감정이 어느 순간 열렬한 집착으로 돌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리뷰자 주 : 내 경우는 정말 기억할 수가 없다. 당시 나는 두 돌을 지난 세살배기였기 때문이다.) 

 

- '그런데 뭐가 문제였지?'

내 이력은 모범 시민이나 촉망받는 젊은이의 것이지, 술주정뱅이의 것이 아니었다. 교육과 학문의 도시 케임브리지가 고향으로, 집은 하버드 대학 근처다. 학력은 아이비리그의 명문 브라운 대학 81년 졸업으로, 마그나 쿰 라우데(우등 졸업)이다. 부모는 저명한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예술가 어머니, 두 분 모두 헌신적이며 통찰력과 지성을 고루 갖췄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안정적인 상류층 가정의 모범 자녀였다. 나는 거울을 보며 생각한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지?'

 

- 물론 간단한 답은 없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은 공기를 묘사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단정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크고 오묘하고 곳곳에 편재해 있다. 인생의 모든 굽이에 알코올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존재를 느끼면서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 알코올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평범한 술꾼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구체적인 선을 넘어버리는 것은 어떤 단순한 이유, 어떤 한순간, 어떤 단일한 심리적 사건을 통해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 점진적이며 집요하고도 불가해한 형성의 과정이다. 

 

- 나는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임종의 자리에 누워 계신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마침내 재활 치료를 받기로 하고 동료들에겐 2주간 온천 여행을 가서 스웨덴식 마사지를 받겠다고 했을 때, 그 말을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자신을 숨겼다.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들이 대개 그렇다. 이들은 대부분 대인관계가 좋고 친구도 많다.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들은 주변에 아주 흔하다. 이들은 직장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식품점 계산대에 얌전히 줄 서 있다. 의사, 변호사, 교사, 정치인, 화가, 심리치료사, 증권거래인, 건축가 등 전문 직업인도 많다. 이들을 지탱하는 힘, 다시 말해서, 이들이 밤마다 술에 빠지고, 다음 날 아침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들이 '진짜' 주정뱅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지난 몇십 년간 알코올 중독 제대로 알기 캠페인을 벌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알코올 중독은 불쾌한 이름이다. '알코올 중독'이라고 소리 내서 말해보라.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비틀거리는 고주망태의 모습, 늙수그레한 남자의 모습, 갈색 종이 쇼핑백을 옆구리에 끼고 거리를 비틀거리는 모습, 가련한 모습,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온갖 부도덕에 찌든 모습, 술을 너무 마셔 웃음거리가 된 모습. 하지만 실제로 밑바닥 빈곤층은 알코올 중독자 중 예외적인 부류로, 전체의 3~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는 질병 진행의 초기 혹은 중기에 몰려 있고, 오랜 시간 삶의 많은 영역에서 문제없이 자기 역할을 해낸다. 

 

- 강하고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은(알코올이 자기 인생에 미치는 수많은 무형의 영향을 외면한 채 술을 부어 넣는), 명확하게 강하고 똑똑하고 유능하다. 내가 아는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놀라움에 사로잡힌다. 알코올 중독을 끌어안고서도 그만한 성과를 이루었다는데, 또 자신들의 위장 노력이 그토록 기막힌 효과를 발휘했다는 데에. 자신들은 그저 견뎠을 뿐인데 말이다. 웅크리고 앉아서 하루하루를 견뎌냈을 뿐인데.  

 

- 밖으로 보이는 나와 현실의 나. 외부와 내부. 나는 술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없고, 전화로 병결을 통보한 적도 없으며, 숙취로 조퇴한 적도 없다. 하지만 내부의 나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안팎의 부조화가 너무 컸다. 

- 밖으로 보이는 내 모습은 가혹할 만큼 솔직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내 칼럼을 읽는 독자들은 나를 인생의 간난들을 잔인하도록 정직하게 마주하는 사람이라 여겼다. 나는 부모님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들을 장문의 칼럼으로 생생하게 그렸으며, 20대에 거식증과 싸우면서 보낸 괴로움의 나날들에 대해서도 열렬한 글을 쏟아냈다. 내 칼럼은 젊은 미혼 여자의 삶, 혼자 사는 일의 위험성과 나쁜 남자들에 대한 집착, 어른이 되는 일의 어려움 등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하고 또 아이러니한 문체로 담아냈다. 나는 엘리스 K.라는 고통받는 30대 여자를 대리 인물로 등장시켜 칼럼을 썼는데, 글의 첫머리에 그녀는 언제나 침대에 누운 채 처절한 불안과 남자들에 대한 집착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신문이 나오는 목요일이면 동료들은 어김없이 내게 와서 말했다. 
"어떻게 자기 속마음을 그토록 솔직하게 밝힐 수 있나요?"
"매주 그렇게 있는 대로 속을 털어내면 기분이 어때요?"

 

- 어느 독자는 내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찾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당신이 행복해지면 무엇을 쓰겠습니까? 당신의 칼럼도 말랑말랑하고 흐리멍덩해지지 않을까요? 

편지를 읽고 나는 웃었지만, 그 질문만은 꽤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 진실은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 깨달음의 순간마다 완전히 잘못 살고 있다는 참담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뿐, 그런 깨달음을 깊이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에 따라서 생활 방식을 바꾸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이런 느낌은 내부에서 자존감을 부식시키며 종양처럼 곪아갈 뿐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다. 알고 있지만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인생의 외피들이 견고하게 유지되는 한(안정된 직장, 전문성의 가면) 그 내부가 통일성과 자부심을 잃고 허물어져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날도 그런 전형적인 날이었다. 전형적인 통찰의 순간, 그런 느낌은 번쩍하고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가 눈 깜짝할 새 사라진다. 

 

- 학업 성적은 우수해야 했고, 교육은 어떤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키는 도구로써 존중해야 했다. 우리 집에는 업다이크의 가족, 치버의 가문과도 같은 질서가 흘렀다. 언제나 차분한 태도, 교양 있는 말씨, 저녁 7시에 마시는 가벼운 칵테일. 우리 가족은 7시 30분에 저녁 식사를 했는데, 식사 때 분위기는 고요 자체였다. 기다란 흰색 촛불들이 식탁 중앙에서 깜박이는 가운데, 들리는 소리라고는 이따금 나이프나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와 꿀꺽하고 음식을 삼키는 소리뿐이었다. 
 

- 대신 우리에게는 차분한 의례와 명백한 우선권들이 있었다. 우리 집의 주요 주거 공간이던 부엌과 식당, 거실은 내가 태어난 1959년에 본래 살던 집을 넓혀서 새로 지었다. 거실은 천장이 매우 높았다. 한쪽 벽은 높다란 전망 창들이 시원스레 뚫려 있었고, 흰색 벽난로와 거기서부터 맞은편 천장까지 뻗어 나간 굴뚝으로 거실과 식당 공간이 구분되었다. 검소하고도 품위 있는 분위기였다. 가구들도 모두 차분한 색깔의 천으로 씌워놓았고, 어머니가 그린 추상화들만이 벽 위에 간헐적인 색깔의 세계를 펼쳐주었다. 우아한 고요, 우리 집의 분위기는 바로 그랬다. 어긋나고 잘못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 이런 결핍감은 육체적인 데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적이고 본능적이며 다층적이다. 저 와인, 저 보드카, 저 버번을 원하는 감정은 어떤 어두운 두려움이다. 그것이 없으면, 그 갑옷이 없으면 세상에 맨몸으로 서게 되는 듯한 허기지고 질긴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우리 같은 중독자들에게 정신적인 문제를 육체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결국 내가 말한 두려움과 거기서 기인하는 본능적인 반응을 지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내면에 깊은 결핍감이 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는 외부의 뭔가에 탐욕적으로,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내면의 불편함을 달래줄 수 있다고 믿기에. 

 

- 이런 느낌은 늘 내 마음속에 존재했다. 이런 식의 '갈망 대상', 이것만 있으면 너는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을 거라는 영혼의 유혹물은 언제나 바깥에서 내 눈을 현혹시켰고, 나는 그런 유혹을 쉽게 잊지 않았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파티 구두와 승마 부츠에 목을 매던 나는, 커서는 그렇게 오랜 시간 알코올에 매달리게 되었다. 의도도 동기도 같았다. 다른 것은 대상뿐이었다. 

 

- 이런 허기가 가족 안에서 싹튼 것인지 아니면 내 선천적 기질에 박혀 있는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람은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이니까. 

 

- 특히 거기 나오는 램지 부인이 좋았다. 램지부인은 자녀와 손님들을 식탁에 가득 모아놓고 하나로 융합시키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여자였다. 그녀가 있으면 고통스러운 자의식 같은 것은 안개가 걷히듯 사그라졌다. 그녀 곁에 모인 각양각색의 주변 인물들도 스르르 한데 녹아들어, 시간 감각도 개별성도 잃고 완벽한 소속감을 얻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묘사하는 그런 장면을 읽고 있노라면, 그 낯선 느낌은 안타까운 갈망이 되어 뼛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런 느낌을 원했지만, 나 자신은 그걸 만들 능력이 없어 보였다. 이때 진실로 놀랍고 유혹적인 일은 술이 내게 그런 느낌을 만들어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원하던 것과 가장 유사한 종류의 편안함과 유대감, 안도감을 일시적으로나마 가져다주었다. 

 

- 또 하나의 방정식이 가동된다. '억제 + 술 = 해방'. 알코올 중독은 결국 이런 방정식이 쌓이고 쌓인 끝에 생기는 것이 아닐까. 온갖 사소한 두려움과 허기와 분노, 영혼의 밑바닥에 쌓이는 미세한 경험과 기억들이 오랜 세월 술과 함께 출렁거리다가 단 하나의 치료약으로 변모하게 된 그런 것.  

 

- 그러나 이런 방식의 자기 변모는 어떤 버전의 자신이 믿을 만한 것인지,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나는 제임스나 일레인과 함께 있을 때는 뻔뻔하고 냉소적인 버전이고, 샘과 함께 있을 때는 친밀한 버전이었으며, 친척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얌전하고 세련된 버전이 되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뭐가 뭔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어떤 버전의 내가 본래 내 속에 있던 것이고 어떤 버전의 내가 외부의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 내 심리치료사는 수년 동안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당신의 감정을 느껴보세요.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가만히 자신의 감정을 느껴보면요."
그가 하고자 한 질문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당신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당신은 무얼 두려워하고 무엇에 분노합니까? 어떤 사람도 곁에 없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 물론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할 수 없었으니까. 술 마시지 않고는, 술이라는 마취제를 들이켜지 않고는 10분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으니까. 정말로 그럴 수 없었으니까. 

 

- AA 모임에 나가면 가장 먼저 듣는,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 가슴에 사무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격이 성장을 멈춘다는 것이다. 술은 우리가 성숙한 방식으로 A 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려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을 박탈한다. 간편한 변신을 위해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면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진흙탕처럼 혼탁해지고 만다. 우리는 방향 감각도 잃고 발 딛고 선 땅에 대한 안정감도 잃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기본적 사항들(두려워하는 것,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필요한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술에 젖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그것을 찾아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알코올은 우리에게 보호막을 둘러쳐서 자기 발견의 고통이 다가오는 것을 막아준다. 그 보호막은 극도의 안온감을 주지만 극도로 교활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허상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허상이면서도 진정한 실체처럼 간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비극은 그 보호막이 작용을 멈추면서 시작한다. 변신의 수학은 바뀐다. 이것은 불가피한 결말이다. 장기간에 걸친 과음은 우리 인생을 망가뜨린다.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과 맺은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업무에 장애가 발생한다. 재정 문제, 법적 문제에 부딪히거나 경찰과 부딪힐 수도 있다. 고통이 커지면 어느 순간 옛 수학(불편 + 술 = 불편 없음)은 전처럼 들어맞지 않게 된다. 편안함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소심함이나 두려움, 분노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좀 더 깊고 근원적인 것을 찾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방정식은 더욱 강력하고 완전한 내용으로 바뀐다. '고통 + 술 = 자기 망각'이라는. 

 

- 술 취했을 때는 거절이라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진다. 그것은 술 때문에 파티나 데이트 같은 특정 상황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져서만은 아니다. 술 마시는 일은 자기 존재감 형성이라는 더 크고 버거운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감 형성이라는 건 모든 사람에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좀 더 어렵고, 특히 술을 마시는 여자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 알코올 중독자들은 거의 자동으로 인간관계가 엉망이다. 우리는 자기 존재감을 느끼고 당당하게 관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못하고, 술에 취해 질척 질척 흘러 들어간다. 우리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우리 자신의 핵심 버전, 그러니까 우리가 본래 가지고 나왔고,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버전의 자기 모습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극도로 불편해하는데 여기서 알코올은 그런 불편함을 막아주는 한편, 그것을 진실로 극복하는 길 또한 막아버리는 이중적 작용을 한다. 우리는 감정을 솔직히 대면하는 것보다 거기서 한 발짝 물러서는 데 훨씬 더 익숙하다. 갈등을 느끼는가? 마셔라. 불안한가? 마셔라. 울화가 치미는가? 마셔라. 

- 데이비드와 나는 학교 근처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가 온 직후 내 마음속에는 갈등이 일어났다. 그는 도저히 내 생활에 걸맞지 않아 보였고, 나 또한 브라운 생활과 데이비드 생활을 융합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인생을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살았다. 낮 동안에는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미친 듯이 공부하고, 밤에는 작은 마케팅 회사에 취직한 데이비드와 술을 마셨다(아마 매일 마셨던 것 같다). 그 한 해 동안 나는 그렇게 두 세계의 충돌을 막으려고 온 힘을 기울이며 보냈다. 둘이 함께 대학 친구들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주로 우리끼리만 지냈다. 

 

- 알코올 중독자들은 삶을 구역화한다. 그러므로 내 행동은 아주 전형적인 사례였다. AA 모임에 가면 그런 이야기를 거듭 듣는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이중 인생(심지어 삼중, 사중 인생까지도)을 영위하는 것은 하나의 삶을 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그 하나의 삶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선명한 이해에 기반을 둬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모임에서 만난 한 여자는 알코올 중독을 '심각한 자기기만'이라고 정의했다. 그녀는 대학과 대학원 시절, 애인들에게 악착같이 집착하는 방법으로 성장이라는 버거운 과제를 피하며 살았다. 자기 존재의 판정표를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준 채, 그들이 내리는 규정을 받아들이며 살았다.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살지만(꼭 알코올 중독에 빠져야만 자아의식을 남에게 양도하는 것은 아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이런 일을 극히 열성적이고도 정밀하게 한다. 그들은 카멜레온처럼자신을 두 개, 세 개, 네 개의 버전으로 바꿔내면서, 변신의 윤활제로 술을 퍼붓는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이 말해줘. 이번에는 당신이, 그리고 또 당신이. 

 

-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데이비드와 함께 보낸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 나 또한 전혀 다른 두 가지 인생을 살았다. 데이비드와 함께 하는 친밀함과 섹스, 술, 그리고 봉합된 갈등 속의 삶이 한편에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엄격한 자제와 지적 탐색 속에 이루어지던 대학 생활이 있었다. 그런데 대학 생활 역시 한 남자에 의해 규정되었다. 브라운 대학은 필수과목이 드물기로 유명했다. 나는 저학년 때는 뚜렷한 방향 없이 이런저런 과목을 잡다하게 듣다가, 결국 영문학과 역사학을 복수 전공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선택의 이유는 내면의 깊은 지적 욕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분야의 어떤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보인 경험 때문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이끈 사람은 40대의 영문학 교수 로저였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지성을 자랑하던 그는 브라운 대학의 교수 중 처음으로 나를 특별하게 대해준 사람이었다. 

 

- '얼마나 좋을까, 지금 이 상황이 바뀐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술이라는 정신의 마취제 없이도 하루하루를 밀고 나가는 사람들은 외부의 힘에 막연한 기대를 하지 않으며, 개인의 진정한 힘과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즉 자기 앞에 닥친 과제들을(아무리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라 해도) 하나하나 해내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다.

 

- 하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뚫고 지나가는 것과 그것을 외면하는 것의 다른 점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멍청히 앉아 술을 들이켜다가 취하는 것뿐이다.

 

- 시간이 지날수록 지넷은 자신의 존재 가치에 혼란을 느꼈다. 그녀는 업무 능력이 뛰어난 유능한 직원이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 그녀는 사무실에서 남자들이 보고 즐기는,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사무실 한구석에 박아둔 젊고 귀여운 인형이었다. 

 

- 게다가 지넷은 아버지나 선생님 같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자기 존재감을 키워온 터라,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데 익숙했다. 이렇게 자기 주변의 체계가 온통 허물어졌는데, 그리고 자신이 할 역할도 갑자기 바뀌었는데, 아무도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일러주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것을 '자기 불신 증후군'이라고 일컫는다. 그녀는 뛰어난 업무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것은 어쩐지 거짓으로만 여겨졌다. 자신은 가짜 성인, 자기 존재의 진정한 가치를 믿을 수 없는 미완성 인간인 것 같았다. 이것은 많은 여자가 보편적으로 겪는 경험이다. 자기 존재 가치를 잃고, 그 아래에서 분노를 삭이는 삶. 우리는 함께 고개를 저었다.

 

- 어머니는 놀라운 '자기 위로' 능력을 지닌 분이었다. 나는 어머니보다 고독의 문제를 잘 다루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온종일혼자서 그림 그리고, 뜨개질하고, 책 읽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혼자서 예술과 공예와 지성에 몰두했다. 

 

- 두 발을 소파에 올려 깔고 앉은 채 뜨개질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평온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지루함도, 불안함도 불편함도, 고독도 느끼지 않을 수 있는지 불가사의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어머니를 바라보며 부적처럼 술잔을 들고 있었다. 나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혼자 있는 일. 

 

- 거식증은 왜곡된 방식으로나마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나는 고통과 갈등은 비밀처럼 숨겨야 한다고 믿게 되었고, 내 몸을 해골처럼 여위게 만드는 것은 내가 가진 고통을 마모시켜주는 것 같았다. 나는 성과 관련한 것들이 두려웠다. 내 주변의 남자들(로저 예전집주인 그리고 잡역부와 같은)이 나를 육체적으로 바라보고 탐하는 환경이 두려웠다. 그리고 굶주리는 일은 내 몸에서 성과 관련한 가슴과 엉덩이 부분을 쪼그라들게 했다. 생리가 멈추었다. 내 몸은 열두 살 소년처럼 딱딱하고 앙상해져 갔다. 

 

- 거식증과 알코올 중독이 갖는 유사성을 생각하면 번번이 놀란다. 두 가지 집착 모두 정서를 굴절시키고, 자신의 감정과 거리를 유지하게 한다. 하나는 그 수단이 음식이고, 또 하나는 술일 뿐이다. 

 

- 거식하는 동안 나는 이런 내면의 동기는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두려움과 성적 위협, 분노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언제 먹을지, 어디서 먹을지, 얼마나 먹을지,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먹을지였다. 나는 먹는 일을 둘러싸고 수십 가지 행동 규범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내가 나에게 허용한 극소수의 음식들은 일종의 경배 대상이 되었다. 그런 정서는 나중에 백포도주를 앞에 두고 느끼던 것과 똑같았으며, 퇴근 후 조니워커 블랙 한 잔을 대할 때 느끼던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 중독이 깊어지면 인생은 공허한 동일성의 반복으로 재편된다. 날마다 똑같은 의례와 규범에 갇히고, 어제와 오늘이 구별되지 않는다. 

 

- 나는 그들보다 우월한 사람 같았다. 그들이 굴복하는 그것을 억제하고 있었으니까. 격심한 불확실성과 가치상실에 시달리던 나에게 굶는 일은 하나의 확고한 목표가 되었다. 나는 그 일을 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그 일을 잘했다. 

 

- 나는 이따금(4주나 6주에 한 번씩) 계속된 굶주림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런 엄격함과 통제에서 잠시 놓여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미친 듯이 먹고 마셨다. 이런 폭발에 앞서서는 대개 내가 지독히 외롭다는 사실과 내가 만드는 허기는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아픈 깨달음이 선행되었다. 

 

- 그 시절 나는 정기적으로 아버지와 점심을 먹었다. 우리 사무실이 아버지의 진료실과 가까웠던 터라, 아버지는 6주나 8주에 한 번씩 차를 몰고 와서 나를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십대에 그랬듯이 긴장이 가득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고, 별일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면에 여유의 휘장을 둘러 자의식을 감추려고 애썼다. 때론 우리는 와인 한두 잔을 곁들였는데, 그럴 때면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우리 부녀의 만남은 언제나 50분 만에 끝났다. 그것은 바로 정신과 진료시간과 일치했고, 이 사실은 내게 은밀한 즐거움과 조용한 분노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런 만남이나 정기적인 부모님 집방문 때를 빼고는 가족과 얼마간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몰랐지만, 어쨌거나 마음의 본능은 나와 식구들을 분리하고 있었다. 

- 내 인생에 한결같은 것이라곤 술 마시는 일뿐이었다. 술 마시고, 그러고서 술 마시는 일을 걱정하고, 그다음에는 걱정도 잊었다. 술 마시고 질문하고, 그런 다음에는 질문을 내던져버렸다.

 

- 1986년의 어느 여름밤, 하버드 광장 근처의 어느 길에서 가게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게 나인지도 몰랐다. 그때 나는 퇴근하고 직장 동료와 술을 마신 뒤 샘을 만나러 가던 참이었다. 단정한 옷차림의 젊은 여자, 어깨 길이의 머리, 짧은 흰색 치마에 헐렁한 면 스웨터, 그리고 멋진 검은색 펌프스, 나는 약간 취해 있었다. 아직 초저녁이었지만, 와인 두 잔을 마신 탓에 이미 취기가 올라 있던 나는 마지막 저녁 빛을 받으며 거리를 뛰어가던 중이었다. 그때 나는 내 모습을 보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내가 저기 비친 모습처럼 멀쩡한 건가, 아니면 미쳐가는 건가?'

 

- 저 여자가 정말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련된 치마와 구두 차림의 스물여섯 살 여자. 내가 저 여자를 걱정해야 하는지,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모습은 젊고 세련되고 도시적이고 활동적인 전문직 여성이 오후 5시 반의 법석을 뚫고 하버드 광장 거리를 또각또각 걸어가는 모습인가? 아니면 미친 사람의 영상인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징후인가? 

- 그러나 때론 그런 밤이 깊을 무렵이면 나는 비틀거리며 화장실에 들어가 생각했다.
'내가 보여주는 겉모습에 문제가 있어.' 

- 내가 폴과 술을 마시고 차를 잃어버린 날, 집을 비운 동거자가 바로 줄리안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가 재수 없었다. 이야기가 나온 맥락은 잊었지만, 우리가 나눈 첫 대화는 파테 요리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파티에서 만났다. 몇몇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도중 그가 파테 만드는 법이 어쩌고 하는 말을 꺼냈다. 
"우리 어머니도 크리스마스엔 항상 파테를 만들어주시죠."
그러자 그가 내게 물었다.
"혹시 '테린'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사람들은 파테하고 테린을 자주 헷갈리거든요." 
어이가 없었다.
'별 재수 없는 사람 다 봤네.'

- 얼마 후 어머니와 통화를 하다가 이 일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 말이 맞아. 파테는 껍질이 딱딱하니까." 
그렇다고 내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흥, 그렇단 말이지. 그래도 재수 없는 건 마찬가지야.'

 

- 그 뒤 내가 직장을 옮기자 그가 샴페인을 사들고 사무실에 찾아왔다. 테탱제르라는 최고급 샴페인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뒤에 그가 전화를 걸어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청했고, 내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군.'

 

- 우리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술을 마셨다. 향기로운 적포도주와 새침한 백포도주를 마셨고, 그때까지 이름도 모르던 갖가지 술도 마셨다. 그중에는 프랑스산 아페리티프인 리카르도 있었는데, 줄리안이 그것을 작은 잔에 따르고 물과 함께 섞으면 노릇하고 부드러운 액체가 되었다. 그가 처음 해준 요리는 로즈메리를 얹은 양고기 구이다. 식사를 마치고 그의 집 파티오에 앉아 브랜디를 마시며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다. 처음으로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낸 날, 그는 일찌감치 일어나서 별 재료도 없이 와플을 굽더니 그 위에 코냑을 살짝 뿌려 완성했다. 그것은 그때까지 내가 먹어본 최상의 아침 식사였다. 

 

- 한 곳에서 일이 어그러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 AA 모임에서는 이런 끊임없는 이동을 '지리적 시도'라고 부른다. 새로운 도시에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루이즈는 다른 것에 집착했다. 다시 학교에 입학해서 학위나 자격증을 따고, 직업을 바꾸는 식으로. 그녀의 조용한 이야기에서 깊은 메시지가 느껴졌다. 자기 인생의 외부를 구부리면 인생의 내부도 함께 구부러질 것을 기대하는 행동들.  

 

- 줄리안은 미술 작품 딜러였다. 도시적이고 지적인 데다 관능미까지 갖춘 그는, 특히 고급스러운 것들에 정통했다. 그는 내가 오래도록 풀지 못하던 퍼즐의 새로운 해결책 같았다. 불안감 대신 즐거움에 취하도록 해주는 사람, 내게 익숙한 지성과 내게 부족한 열정을 통합시켜주는 사람. 나는 조리대에 선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이것은 새로운 인생이야.'
그는 해답이었다.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 그러나 자신의 희망과 환상을 모조리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거는 것은 언제나 위험천만한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일레인에게서 보았고, 나 자신에게서도 보았다. 내 외모를 특별하게 느끼는 어떤 것으로 만들고자 하던 일, 남자의 승인을 통해 내 존재 가치를 느끼고자 하던 일, 그런 일이 줄리안을 통해서 똑같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느낌이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새로운 삶이 아주 가까운 곳에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눈에 뻔히 보이는 이런 공통점들을 무시했다. 

 

- 이 프로그램의 주창자들에 따르면, 알코올 중독자는 적어도 네 명의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부모님, 애인, 동료뿐 아니라 우리와 인연이 있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걱정을 끼칠 수 있다. 그들에게 화를 내고, 우리의 잘못을 덤터기 씌우며, 그들을 저 멀리 밀쳐낸다. 우리는 그들을 마음속에 들이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를 이해시키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와 너무 가까워지면 우리의 본모습에 기겁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중증 알코올 중독자의 에너지는 많은 부분이 겉에 두를 휘장을 만드는 데 쓰인다. 멀쩡해 보이는 휘장, 사랑스러워 보이는 휘장, 가치 있어 보이는 휘장, 온전해 보이는 휘장을. 그렇게 해서 내면과 외면이 어긋난다.  

 

- 큰 거짓말, 작은 거짓말, 알코올 중독자들은 드러나 봐야 별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까지 왜곡하고 조작하곤 한다. 내 친구 게일은 영화나 책에 관해서도 거짓말을 했다. 직장 동료가 책 이야기를 하면, 본능적으로 "나도 그거 읽었어" 하고 끼어든다. 실제로 읽었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또 사람들이 어떤 영화가 재미있다고 말하면 제목조차 낯설어도 자기도 재미있게 봤다며 맞장구를 쳤다. 평범한 사람들이 볼 때 이런 행동은 어리석기 짝이 없겠지만,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그 어떤 것에 관해서도(영화나 책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진정한 느낌을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술꾼들은 과잉 반응이 몸에 밴다. 그렇게 의견이 있는 듯 꾸미는 것은 우리 내부에 진정한 의견이 없기 때문이다. 

 

-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들은 자신이 만든 혼란을 두고 외부 상황을 원망하는 데 선수들이다. 존과 앤드리아를 부러워하면서 내가 보지 못한 것(사실은 보지 않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리넷도 그랬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꾸려놓고도 남자친구 제이슨을 탓했다(치졸한 인간, 내게 열등감만 심어주는 인간), 그녀는 로버트를 비난했다(그는 내가 얼마나 어려운 처지인지 몰라. 또 내가 제이슨과 얼마나 복잡한 관계인지 몰라). 그리고 그녀는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원망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 눈길에 닿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탓했다. 

 

- 존과 앤드리아처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부부는 그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한다는 것, 그들 또한 이따금 자신들의 관계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는 것, 상대의 한계를 받아들이려고 고투한다는 것, 사랑하는 이가 자신의 욕구를 모두 만족하게 해 줄 수는 없다는 실망감을 이겨내며 산다는 것, 이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 '그건 우연한 실수였을 뿐이야. 문이 잠길 줄 어떻게 알았어? 완전히 우연한 사고지.'
하지만 그런 수습 불가능함은 바로 내 인생의 이야기였다. 나는 내가 만들어낸 혼돈 속에서 거짓말하고 은폐하며 비밀을 만들고, 그런 상황에 갇힌 자신을 답답해하며 살고 있었다. 

 

- 이렇게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계속 술을 마시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AA에서는 'yet'이라고 불렀다. 이런 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손짓 한 번 발걸음 한 번 잘못하면 내 무릎 대신 어린 소녀의 머리가 깨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YET은 AA에서는 'You're Eligible Too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의 약자로 해석한다.

- 나는 계속 술을 마셨다. 이 무렵 실제로 알코올은 모든 기능을 잃었다. 술 마시는 일은 전과 같은 즐거움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재미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퇴근 후 친구들과 만나 술을 나누는 일은 변함없이 유쾌했지만, 술을 마시다 보면 언제나 본능적이고 강박적인 욕구에 휘둘려서 즐거움 같은 것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다. 즐거움은 목적이 아니었다. 결국 술이 몇 잔 들어가지 않은 나는 내가 아니라는 느낌마저 들었고, 이런 느낌은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알코올은 내가 정상적인 감각을 되찾으려고, 정신을 차리는 데 필요한 물질이었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 내 본래의 거죽을 쓴 듯한 느낌(정신이 맑아지고, 초조감이 누그러드는)이 들었지만, 그런 느낌은 30분 이상 지속하지 않았다.  

- 우리 마음속에도 두 눈을 크게 뜨고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관찰자가 있다. 때때로 늦은 밤에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 관찰자가 혐오스러운 눈길로 나를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관찰자의 눈에 비친 나는 자기 편견에 갇혀 밖으로 한 발짝도 떼어놓지 못하는 서른네 살의 우울하고 불안한 대책 없는 여자였다. 어느새 눈 밑은 거뭇거뭇해지고,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피부에는 혈관 터진 자국들이 점점이 박혀있는 병들고 지친 모습. 그런 여자의 모습이었다.  

 

-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인제 그만 괴로워해라. 자학도 그만해라. 너를 죽이는 일을 그만해라'였던 것 같다. 

 

- 절망의 선물은 영적인 차원의 일이다. 우리에게 행운이 찾아온다면, 어느 순간 이런 식으로 계속 살다가는 결국 자신을 죽이고 말 것을 깨닫는다.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거나 교도소에 가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 이런 일은 모두 시간문제일 뿐이다. 우리의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행운이 따라준다면 어느 순간 우리 미래를 조율할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고,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우리뿐임을 깨닫게 된다.  

- 내 마음속에는 이 세상에 혼자뿐이라는 고립감이 커졌다. 부모님을 잃고서 누구나 뼈저리게 느끼는 그런 감정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고서 혼자가 되었다. 앞으로 내가 크나큰 실패를 겪을 때(직장을 잃는다거나 집을 잃는다거나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다거나) 돌아가 기댈 사람이 없었다. 나를 일으켜줄 사람이 없었다. 오빠도, 베카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마이클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그렇게 술을 마신다면 그가 내 곁에 남아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런 깨달음은 하룻밤 사이 얻은 것이 아니었다. 술의 강에서 노를 저어 그 결론에 이르렀다. AA에서 흔히 말하듯이, 그 많은 술이 쌓이고, 타락과 절망에 대한 그 많은 각성의 순간이 쌓여서 거기 이르렀다.

-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인생의 어느 지점부터 나는 나 자신을 상황의 희생자로 여기며 살았어. 아주 우연히 혼란과 분노와 우울함에 찌든 사람으로.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어. 그러니까 이렇게 술에 빠져지내고, 엉망으로 연애하고, 우울함에 허덕이는 건 내 운명인지도 몰라. 글 쓰는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고통, 이를테면 입장료 같은 거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입장료가 위험할 정도로 비싼 것 같았다.

 

- 이런 것들을 깨닫자 문득 겁이 났다. 내 직업 영역은 그때까지 타격을 받지 않은 유일한 분야였고, 글은 나를 이 세상과 연결해주는 가장 확고한 수단, 진정성을 지닌 관계를 열어주는 단 하나의 열쇠였다. 나는 12구경 엽총으로 자살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생각했다. 또 마흔다섯 살에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제임스 에이지도 생각했다. 어둡고 무거운 체념이 나를 감쌌다. 마치 상자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오전 중에 줄리안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그는 화난 기색은 없었고 그저 조금 피곤한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라."
반박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나를 믿지 않아. 당신 자신을 믿지 않으니까."

나는 수화기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나는 오래전에 나에 대한 신뢰를 버렸다. 내 직감에 대한 신뢰도, 내 행동에 대한 신뢰도 다 잃었다. 내가 언제 술에 취할지, 술에 취하면 무슨 행동이나 말을 할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기분이 될지도 알 수 없었다. 

- 셜리 매클레인은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술에 취해 무너지는 장면이 나오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이렇게 말했다. 
"사기야, 사기. 저건 술을 핑계로 고통스러운 선택을 피하는 거야."
딸각. 내 머릿속에서 스위치가 올라갔다. 불이 켜졌다.

 

- 그리고 내가 결국 AA 모임에 나가게 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AA 하면 노인들이 모여 앉은 담배 연기 자욱한 방(5년 전에 보고 질겁했던 모임의 이미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 나는 AA가 말하는 12단계 개선 프로그램에 의식적인 편견이 있었다. '우리보다 높은 힘'이 어쩌고 하는 AA의 방식은 뉴에이지 문화를 반영한 일종의 컬트 같았다. 게다가 AA를 본뜬 기이한 이름의 집단들이 날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것도 우스웠다. 12단계 프로그램은 한순간의 유행이며, 자기 연민의 한 형태로 보일 뿐이었다. 나는 재활센터에 2주간 입원해서 초기의 금단 증세를 이기고, 그다음부터는 홀로 이를 악문 채 견디리라 다짐했다. 
 
- 우리는 구석 자리를 찾아가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느낀 안도감은 아직도 또렷하다. 내 문제들이 생각만큼 특이한 게 아니라는 사실, 또 알코올을 개입시키지 않고도 다른 사람과 따뜻한 유대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술을 끊은 초기 단계에서 일부 사람들은 '분홍 구름' 시기를 겪는다. 그것은 마침내 자신이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위해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는 데서 오는 열렬한 행복감이다. 나는 비치힐에 있는 동안 그 구름을 타고 안도감의 물결 위를 넘실넘실 떠다녔다. 드디어 내 문제를 알아냈다. 그리고 구조의 손길을 찾은 것이다. 

- 술과 이별하는 것은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는 것이었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 어떻게 나 자신의 거죽을 그대로 쓰고 있을 수 있을까? 재빨리 도망갈 익숙한 마비의 길도 마련해두지 않고, 어떻게 진정한 감정(고통과 불안과 슬픔)을 맞아들이지? 어떻게 깊은 잠에 들 수 있지?' 

 

- AA가 주는 답은 단순하고도 복합적이다.

'그냥 하라. 오늘 꼭 하루. 연습하라. 도움을 요청하라. 한동안 공황감과 갑갑함에 괴롭겠지만 불편함을 그냥 견뎌라. 그러면 마침내 고통이 누그러들 것이다. '

그리고 진실로 고통은 누그러들었다.

 

- 윌프리드 시드도 2년여 AA 모임에 참석했지만, 모임에 가는 목적이 여흥으로 변해버렸다는 걸 깨닫고는 혼자 술 없이 사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AA 없이는 술 끊는 일을 계속하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내게는 AA에서 받는 각종 도움과 동료애, 그리고 언제라도 AA가 곁에 있다는 믿음(곁에서 항상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해야 변할 수 있는지 일러준다는 믿음)이 꼭 필요했다. 

- 그녀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술을 마시지 않고 이런 일을 견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5분 정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사건 자체는 고통스러웠지만, 이런 시기에 자신이 온전한 정신으로 가족 곁에 있을 수 있던 것과 이런 사건에 동반되게 마련인 온갖 감정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겪을 수 있었던 일은 귀중한 경험으로 남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이런 식의 깊은 고통을 꺼내어 이야기하면, 방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찬다. 그 침묵이 우리 마음속에 일으키는 뜨거운 공감은 거의 종교적인 경의에까지 이른다. 그런 고요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다. 바로 그 고요가 나를 계속 AA로 끌어당겼고, 계속 술을 끊고 살아갈 힘을 주었다.  

 - 이버지가 나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내가 죽으면 네가 해방될 수 있을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말은 너무 섬뜩했다. 그런데 잭과 헤어져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자유 비슷한 어떤 기이한 것이 느껴졌다. 나는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아버지에게서 놓여나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전에는 모르던 선택의 권한을 부여받은 느낌이다.

 

- 그런 느낌은 아버지의 죽음보다는 술을 끊음으로써 얻은 명징한 정신 덕분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내가 과연 술을 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주차장을 향해 가는 길에서 내가 무언가를 떠나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나라는 인간을 규정할 때 언제나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내세우고, 그에 따르는 온갖 어두운 굴레를 함께 끌어안던 어떤 결핍이었다. 

 

-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매일같이 하는 선택이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은 매우 간단하다. 술잔을 들거나 들지 않거나 하지만 그 추수감사절 모임 같은 경우는 좀 더 복잡하다. 그런 날 술을 안 마신다는 것은 몇 가지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 파괴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감정을 술로 다스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는 것, 술이 제공하는 해법은 결국 무용지물이고 패배적인 방편이라는 것을.

 

- 알코올 덕분에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가지 번잡한 노역을 피할 수 있었다.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라든가, 내가 물려받은 조용하고 억제되고 예민한 성격을 인정하는 것. 또 남이 와서 내 욕구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는 그런 많은 것을. 그러니까 한마디로 알코올은 내 성장을 가로막은 것이다. 

 

- 이런 말은 너무도 당연해서 말하자마자 그냥 상투적인 표현으로 여겨지지만, 그 순간까지도 나는 성장이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며, 어른이란 생물학적인 나이가 아니라 정서적인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정서적 수준이란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임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알코올 중독자는 아니든 간에)이 그렇듯이, 나 또한 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성숙이 외부에서 불쑥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지냈다. 마치 성숙이라는 것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 것처럼. 아버지나 줄리안 같은 남자들이 소량의 세련미와 자신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성장이란 우리에게 닥치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중독을 벗어나는 것은 이런 오해를 뒤집어서 성장은 안에서 뻗어 나오는 것이며,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얻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 술을 끊으면 우리는 이제 기다리지 않게 된다.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서 내가 할 성장의 노역을 대신해줄 거라는 끈질기고도 인간적인 소망을 버린다.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이 이야기는 러브 스토리다. 열정에 관한 이야기고, 감각적 쾌락과 깊은 흡인력, 욕망과 두려움, 타오르는 갈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 강렬함으로 온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는 결핍에 관한 이야기다. 도저히 이별을 상상할 수 없는 상대와 작별을 나누는 이야기다. 아이비리그 출신의 엘리트 저널리스트 캐롤라인 냅이 20년간 술과의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대하게, 섬세하고 화려하게 그려냈다. 캐롤라인 냅은 술 마시는 행위를 심리학적으로 깊이 파고들었고, 유난히 술에 집착하는 행위 이면에는 결핍과 갈망,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의사인 쌍둥이 자매를 둔 캐롤라인 냅의 삶은 부러울 것 없는 삶처럼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하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너무나도 반듯한 가정의 규율과 절제, 냉정하리만치 차가운 부모님의 애정 표현은 어린 캐롤라인에게는 버거웠고,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왔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고자 캐롤라인은 술을 마셨다. 술은 그녀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점점 술의 노예가 되었다. 술은 내 눈을 멀게 하고, 내 의지를 잠재우며 나를 멋대로 조정하는 것 같았다. 이 책에서 캐롤라인 냅은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생활을 솔직하게 고백했고, 정교하고 매혹적인 문장과 뛰어난 심리분석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으며, 탁월한 통찰력으로 인간 심연 본연의 ‘중독 심리’를 파헤쳐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저자
캐롤라인 냅
출판
나무처럼
출판일
201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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