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하지은] 모래선혈

일루젼 2024. 4. 18.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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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하지은 / 소만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2023.06.19


       

<오만한 자들의 황야>와 <모래선혈>은 두 권 모두 예전에 발표되었던 작품을 복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두 권 모두 표지가 무척 매력적이고 함축적인데, 아직 읽어보지 않은 <언제나 밤인 세계>의 표지도 비슷한 화풍이라 눈길이 간다. 표지 일러스트는 소만 작가의 작품이라고.

 

사실 <오만한 자들의 황야>에서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모래선혈>을 이어서 읽으며 하지은 작가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모래선혈>의 경우는 사막과 지배적 성향의 사막 민족인 쿠세 왕국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매 작품마다 완전히 다른 배경과 설정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펼칠 수 있다니 놀랍다. 이 작품 역시 강렬한 도입부로 시작되는데, '어라?' 싶은 부분은 복선 역할도 하니 섬세하게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비오티는 어느 정도 작가의 작가관이 투영된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데, 작품 내에서는 흔히 이야기하는 MBTI의 F유형적인 인물이다. 대립되는 캐릭터로는 감정적인 부분이 결여된 T유형적 인물인 레아킨이 등장한다. 단식적 접근은 주의해야 하지만, 전형적으로 느껴지는 묘사들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이분법적으로 나눠보게 된다. 그렇게 전혀 다른 성향과 입장의 두 인물이 서로에게 끌림을 느끼는 과정이 흥미롭다. 

 

비오티에 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약 불호다.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인 캐릭터로 설정된 것 같은데, 라흐와의 관계에서나 독립이라는 이념에 있어서나 인물의 입체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지는 못했다고 느꼈다. 해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면서도 다소 평면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 불호. 하지만 작가관이나 작품에 대한 자세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만약 작품 내에서 언급되는 '실망'이 비오티의 이런 면까지 포함한 것이라면 위의 생각은 전면 수정이 필요하다.)

 

초반부의 분위기가 작품 전체로 이어지지 않은 점도 다소 아쉽다. 주사위와 관념체에게 조금 더 많은 분량이 주어졌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쿠세 인의 주사위'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주사위라면 궁 외부에서도 언급이 되었을 법한데. 아마도 형인 사자한과 레아킨이 다름을 나타내기 위한 구분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아쉬움은 내 개인적 취향의 문제인 것 같은데, 거대한 세계관과 진중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편이라 중반부 비오티와 레아킨에게 집중된 전개가 살짝 아쉽게 느껴졌다. 아마 비오티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       

 

동료 작가인 로즈웰과 비오티의 대화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일견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처럼도 느껴진다. 

 

[ "사람들은 항상 내 글에 재미는 있지만 깊이가 없다고 말해. 그놈의 깊이란 게 뭔데? 그래, 한번 해 보자고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집어넣고 진지하게 그놈을 담으려고 하면 독자들은 재미없다면서 이내 외면해 버리지. 언제는 그렇게 원한다고 말해 놓고서! 나는 또 흐지부지 반품되는 책들을 보면서 원래의 나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해. 하지만 그러고 나면 또 비평가들은 혹평을 하고 독자들은 읽으면서도 비웃지! 도대체 뭐가 옳은 길이야? 나는 알 수가 없어." ]
 
[ "다른 건 생각하지 마. 그냥 너 자신의 글을 쓰면 되잖아. 누구나 글을 쓰는 이유가 다르고 누구나 글을 읽는 이유가 달라. 유치하니 뭐니 말들 해도 난 많이 팔리는 작품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네가 자랑스럽고 말이야. 한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면 언젠가 너 스스로도 재미와 깊이 모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쓰도록 해. 쓰면 되잖아? 노력이나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야말로 욕심이야. ]

 

잘 쓴 글이란 어떤 글일까? 다양한 글이 다양한 목적에 따라 쓰여지고, 발표된다. 

 

인기가 있고 평가가 좋은 글.

독자로 하여금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글.

사상과 이념을 전파하고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글.

극의에 다다라 단어와 추상적 개념들이 하나의 존재로 화하게 만드는 글.

그리고 단 한 명의 유일무이한 독자를 위한 글. 

 

나에게 <모래선혈>은 로맨스보다는 '나는 어떤 글을 목표로 써나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한 작가의 수기로 읽혔다. 

그래서일까,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강점기를 연상케 하는 설정에도.

지니를 연상케 하는 존재와 사막의 모래와 별빛 쏟아지는 밤에도. 

 

자신의 존재를 대가로 내어주어 관념에게 먹히고 마는 사자한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다.

인상 깊게 읽었다.       


 

 

- 쿠세인들의 주사위에는 숫자 눈이 아닌 사람 눈이 박혀 있을 거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그들 민족의 기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지 잘 보여주는 말이긴 하나, 실제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쿠세인들에게 있어 잔인함의 문제가 아닌 합리성의 문제였다. 진짜 사람 눈을 박아 넣으려면 주사위가 너무 커진다는 것이다.

- 어쨌거나 그런 소문이 퍼질 만하게끔 쿠세의 황실에서 사용하는 주사위는 보통 주사위와 다르다. 거기에는 숫자 대신 각면마다 두 글자가 쓰여 있다.
차례대로 모욕, 감금, 구타, 절단, 소유 그리고 죽음. 그렇게 쓰여 있는 주사위를 절망의 주사위라고 부른다.
다시 차례대로 지연, 재도, 무통, 구제, 갑절 그리고 반전. 그렇게 쓰여 있는 주사위는 구원의 주사위다.

- "어서."

황제가 재촉했다. 하지만 남자는 쉽게 주사위를 들지 못했다. 이것이 자신을 걸고 하는 도박이라면 차라리 마음 편히 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사위의 눈대로 처벌받을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 "굴려요."
황제의 곁에 서 있던 여인이 담담히 말했다. 두 손이 묶여 있을 뿐 표정과 태도로 봐서는 이 끔찍한 형벌의 대상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 목소리에 주사위만 내려다보던 남자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내던지고 황제를 벤 다음 여인의 손을 잡아 이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러나 상대는 쿠세의 황제다. 발밑으로 모래가 가라앉은 도시, 광대한 사막을 밟고 오만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 자가 바로 그들의 황제였다. 

 

- 비명처럼 사나운 사막 바람이 남자의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남자는 상관하지 않고 한동안 더 밖을 내려다보았다.
희고 텁텁한 광경이다. 적어도 그의 눈으로 보기엔 그랬다. 색(色)을 볼 수 없는 남자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사막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하곤 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시원찮은 태도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지금 당신께서 보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사막은 그렇다면 원래 이토록 메마른 놈이렷다. 남자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 "아무튼 저희가 보는 것과는 다르게 세상을 보고 계신 것이지요."
"뭘 어떻게 다르게 보는데?"
"다채롭지 못하게 보신달까요. 다양하지 못하고 재미없고, 감동도 없고 삭막하고... 그렇게 보이실 테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엔 이렇게나 아름다운 게 많은데 말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타까워하는 그 사람과 달리 별다른 유감을 느낄 수 없었다. 적어도 그의 밤은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아름다웠기에.

- 모두가 밤을 그저 한 가지 검은색으로 볼 때 남자는 별 주위의 밤과 달 주위의 밤, 지면 근처의 밤과 가장 멀리 있는 밤, 이쪽에서부터 저쪽까지의 밤을 모두 다른 색으로 보았다. 그건 오직 그만이 구분할 수 있는, 보통 사람의 눈으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깊은 농도와 명암의 세계였다. 
그는 한밤중에도 등불 없이 다닐 수 있었고 어떤 점에 있어서는 물건을 구별할 때 평범한 사람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색에 둔감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감정 또한 남들처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별로 낙담하지 않았다. 그 부족함에 대해 느껴야 할 슬픔이나 분노 또한 그에게는 생소했기에. 

 

- 시종은 알 듯 모를 듯 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숙였다. 건물 밖으로 나온 레아킨은 짐이 실려 있는 두 마리의 낙타 중 하나에 올라탔다. 그러곤 지금껏 자라 온 자신의 집을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훌쩍 떠났다. 혼자서 사막을 건너야 했지만 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쿠세인이 사막에서 길을 잃거나 위험에 처한다면 그야말로 웃길 노릇일 테니까. 

 

- 라노프. 쿠세의 수많은 속국 중 하나이며 작지만 매력적인 문화와 예술로 가득한 땅. 연극, 미술뿐 아니라 레아킨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문학 작품들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약간이지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옹기종기 밀집한 작은 건물들과 거리를 꽉 메운 사람들, 질서라곤 없어 보이는 좁은 도로와 악취가 풍기는 시장 바닥. 사막과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제국에서 자란 그에겐 참으로 조야한 땅이었다. 


- '이런 곳에서 그런 글을 썼단 말인가.'
그는 품속에 소중히 넣어 둔 작고 두툼한 책을 매만졌다. 바로 이 나라의 작가가 쓴 책이었다. 이름도 생소했고 제목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처음 책을 펼칠 때만 해도 끝까지 읽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호반 위 황금새>. 비오티 F.
한데 그것은, 그 자신만큼이나 메마른 글이었다.

 

- 특이하게도 책에서 주인공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먼 곳에 있으며 그곳에서 다른 모든 인물들을 관조하고 있을 뿐이다. 독자는 혼자서 힘겹게 그를 찾아가야만 했다. 불친절한 작가의 필체를 이겨 내고 무서우리만치 냉담한 글자 사이를 지나 마침내 결말에 도달해야만 했다. 오직 그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그리하여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이제껏 엄하게 독자를 다스리던 작가가 처음으로 따스하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 [ 비로소 다다랐다. 그러나 평온한 호수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두 무릎을 꿇고 절망에 몸을 맡기려는 순간, 보였다. 호반 위로 황금새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찬란한, 더없이 찬란한 순간이었다. 금빛 궤적을 따라 쫓으며 조금 더, 그대로 조금만... ]

- [ 이곳에 마침내 내가 있노라. ]

- 그대로 끝나 버린 페이지를 붙잡은 채 남자는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었다. 아, 그가 거기 있었다. 폭풍을 뚫고 집에 돌아온 자식을 더없이 포근하게 안아 주는 어머니의 품처럼 그것은 말 못 할 평온이었다.

- 레아킨은 한참을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런 기분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대로 멍하니 서있던 그는 책 위에 눈물이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유는 분명치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이 책이 특별하기에는 충분했다.
어쩌면, 하고 그는 바랐다.
어쩌면 이 책을 쓴 사람을 만나면 내 병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 내게 그 색이란 것을 보여 줄지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 레아킨은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 찾다가 곧 하늘을 뒤덮을 듯 뿜어지는 연기를 발견했다. 이 냄새와 연기. 그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 여기저기 십자가가 박혀 있는 거대한 광장과 그 뒤에 우뚝 선 칠흑의 탑 마치 신의 형상이라도 되는 양 사람들을 싸늘하게 굽어보는 가운데 광장에서 화형이 집행되는 중이었다.
연기와 냄새 모두 한때 사람이었던 것으로부터 승화되었단 걸 깨닫자 레아킨은 손수건을 꺼내 입을 틀어막았다. 광경 자체보다 그것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 타국인들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귀스트는 광장 뒤에 있는 새카만 건물을 가리켜 보였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피라미드 형태로 뾰족하게 솟은 특이한 반지가 눈에 띄었다.
"혁명재판소이자 종교재판소이며, 쿠세 정부의 거점이자 감옥입니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하이젤 성이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다들 죽은 탑이라고만 하지요. 위대한 쿠세인인 레아킨 님께서 머무실 곳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목소리가 잔뜩 비꼬여 있다는 걸 알았겠지만 레아킨은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3층짜리 건물인 그것은 앞쪽은 새카만 벽인 데 비해 뒤쪽은 창백하리만치 하얀색이었다. 레아킨이 그 까닭을 묻자 귀스트가 비웃듯이 말했다.
"앞쪽은 광장에서 화형 당한 사람들의 연기가 배어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질 않죠.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화형 집행이 이루어집니다. 혁명가, 이단자, 범죄자들... 이 작은 나라에도 땔감은 많습니다."
레아킨은 깊은 인상을 받으며 옆에 있는 라노프인을 바라보았다. 시종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라노프의 높은 귀족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가 쿠세에 망명하여 지금 같은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동포를 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불태우는 냉소적인 기회주의자라. 레아킨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 "지하 1층은 신문실(訊問室)과 고문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살아가시려면 무엇보다 먼저 비명에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아래로 더 내려가면 수는 많지 않지만 감옥이 있고, 1층과 2층엔 직원들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3층이 레아킨 님께서 쓰실 곳입니다. 심판자의 방이라고들 하죠."
귀스트 맨 아래층에 있는 감옥부터 안내했다. 지하로 내려서자 그에 어울리는 퀴퀴하고 음침한 냄새가 났다. 고문실을 지날 때는 희미한 피 냄새도 섞여 있었다.
 
- 레아킨은 고개를 끄덕이고 둘러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위층의 고문실과 달리 감옥이 있는 층은 지나치리만큼 조용했던 것이다. 본래 죄수들은 누군가 내려오기만 하면 소리를 지르고 팔을 뻗는 등 난동을 부리는데 그곳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침묵뿐이었다.
"죄수들이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글쎄요. 누구도 깨우고 싶어 하지 않을 만한 게 잠들어 있기 때문일까요."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듣기라도 한 듯 복도 저편에서 키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아킨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이미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귀스트의 뒤를 따랐다.

- 3층에는 간단히 문만 하나 서 있었다. 좁고 긴 그 문은 어쩐지 관의 덮개를 떠올리게 했는데, 그것을 열자 거대한 홀처럼 넓은 방이 나왔다. 정면의 벽은 모두 유리로 이루어져 있고 거기에도 연기가 배어 찬란한 광휘 대신 음울한 햇빛이 쏟아졌다. 레아킨은 창가 쪽으로 걸어가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화형 집행이 끝난 것인지 연기는 드문드문 피어올랐고 몰려든 사람들도 점차 흩어지고 있었다.

 

- '이런 것을 매일 같이 지켜본단 말이지.'
그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기대한 것보다는."
"다행이로군요."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냉소적이었다.

- "자네는 어디서 머물지? 내가 오는 바람에 방을 빼앗겼나 보군."

"괜찮습니다. 이 건물 뒤편에 별채가 하나 더 있지요. 전 그쪽으로 옮겨 갈 겁니다. 제 짐은 모두 들어냈지만 아직 책이 좀 남았습니다." 
레아킨은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오른편에 작은 서재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공간이 있었다. 열 개 안팎의 책장과 거기에 무수히 꽂혀 있는 책들. 
"자네도 책을 좋아하나?"
"아뇨. 저기 있는 책들은 모두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서 모아둔 것들입니다."

- "뭐, 안다고 할까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반동적인 사상과는 거리가 먼 작가라 제 손에 걸릴 일은 없었지요. 그런데 쿠세에서 방금 오신 분이 그 작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귀스트의 질문에 레아킨은 혼자만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 가도 좋다. 귀스트..."
"보좌관입니다."
"그래, 귀스트 보좌관. 나가 보게."
눈치 빠르게 그는 더 묻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 '여기 일에 적응하고 나면 바로 비오티의 다른 책들을 찾아봐야지. 그를 꼭 만나고 싶지만 그건 천천히 이뤄졌으면 좋겠군. 좀 더 이 기대감이라는 것을 느끼고 싶어.'

- 그로부터 며칠 동안 레아킨은 심판관으로서의 여러 가지 업무와 라노프에 대해 배웠다. 그를 가르치면서 귀스트는 보좌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걸핏하면 비웃음을 짓고 '네가 쿠세인이니까 참아 준다'는 태도를 대놓고 드러냈다. 사람들의 기분이나 표정을 읽는 것에 소질이 없는 레아킨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였지만 딱히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기에 눈감아 줬다. 그는 기쁨이나 슬픔만큼 분노와도 친밀하지 않았던 것이다. 

- 귀스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심판관님이 라인인지 쿠세인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군요. 너무 솜방망이 처벌만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대처럼 재량권을 남발하는 대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리하고 있을 뿐이다."
귀스트는 고개를 젓고는 다음 목록으로 내려갔다. 
"이건 좀 재미있군요. 어느 아마추어 작가가 자기가 쓴 책을 아기모스의 책이라고 속여서 팔다 적발되었답니다."
"아기모스라고?"
"그에 대해 아십니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 "물론이지. 그는 진실로 위대한 작가였고 그를 좀 지나치게 숭배하는 이들은 이 세계의 진정한 작가란 아기모스뿐이라고 말하기도 하지. 그가 남긴 유일한 책은 너무도 경이로워서 단어들이 생명을 얻고 이 땅을 걸어 다녔다고 한다."
"네. 하지만 세계가 그걸 용납하지 않았기에 아기모스는 다시 자신의 단어들을 불러들였죠. 그럼에도 단 하나의 단어만이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 유일하게 창조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건 '오만'이었지."
레아킨은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누가 해 주었더라. 아마도 그의 형이었을 거다.


- "어리석은 사기꾼이군. 전설에 불과한 책을 진실로 믿고 살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니."
레아킨이 이렇게 말하고 다음 서류로 눈을 돌리려 했으나 귀스트는 어째서인지 넘어가지 않았다.
"전설이라니요. 그건 엄연히 실재하는 책입니다."
"아기모스의 책이 실재한다고?"
"그렇습니다. 아기모스의 진정한 후손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무슨 그런 허황된 소릴. 그러다 오만도 실제로 이 땅에 걸어 다닌다고 하겠군."
귀스트는 무어라 받아칠 듯 입을 열었으나 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 "또 그걸 보시려는 겁니까? 악취미도 정도껏 하시지요."
"존중받을 만한 취미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로부터 감흥을 느끼기가 어려운 사람은 말이지, 그게 아주 약간일지라도 자극을 주는 것이라면 집착하게 되기 마련이야." 
귀스트는 정 떨어진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레아킨은 신경 쓰지 않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화형 집행이 끝난 후의 광장을 내려다보기 위해서였다.

 

-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신지요?"
서점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레아킨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물었다. 레아킨은 한눈에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예전 같았으면 몰랐겠지만 그동안 귀스트의 태도에서 많은 걸 배웠던 것이다. 
"비오티 필라프 작가의 책이 있다면 찾아 다오. 전부 살 테니까."

그가 조바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하자 서점 주인은 입가를 씰룩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 그를 기다리는 동안 레아킨은 근처에 있는 책들을 훑어봤다. 전부 흥미로워 보이는 것들이었다. 본국인 쿠세에서 라노프 작가들의 책은 마약과도 같다며 수입을 금지했는데 어쩌면 현명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중 <이 땅의 모든 죽음들>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주인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는 난처하게 웃고 있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비오티 작가의 책은 절판되어 남아 있질 않습니다."
"정말인가? 단 한 권도?"
"예. 어쩔 수 없군요."


- 그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는 걸 보고 레아킨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홀로 책장들 사이를 거닐며 책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서 분류학대로라면 비오티의 책이 있어야 할 법한 자리가 부자연스럽게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주인은 책을 찾으러 간다고 해 놓고 오히려 숨겨 놨을지도 몰랐다. 레아킨은 드물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그의 책을 구할 다른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다."
"글쎄요. 절판된 책은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인쇄소라도 찾아보시든지요."
그를 조롱하는 듯한 서점 주인을 뒤로하고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빈손으로 나오긴 싫었는지라 칼라이조 로프너의 신작을 샀다. 어차피 서점은 거기 한 군데가 아니었기에 별로 낙담하지 않았다. 

- 하지만 연이어 방문한 서점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쿠세인을 싫어해서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었지만 나중에는 정말 책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가 구할 수 없단 말인가. 여기서도?'

- 그는 하이젤 거리 한복판에 멈춰 섰다. 그런 기분은 익숙하지 않았다. 비오티를 만나겠다던 생각이 갑자기 허황되게 느껴졌다. 책조차 구할 수 없는데 그를 어떻게 만난다는 거지? 무엇을 믿고 천천히 만나겠다고 자신한 거지?

- 어두운 조명 아래 간단한 바가 있고 낡은 탁자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구석에는 당구대도 있었는데 누군가 치다 만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른 시간이다 보니 두어 명의 남자가 한 잔씩 홀짝이고 있을 뿐 대부분의 의자는 테이블에서 내리기도 전이었다. 주인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구석으로 걸어가 의자 하나를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훑어볼 요량으로 사 온 책을 펼쳤다. 수명이 다한 전구 하나가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며 방해했지만 그는 곧 책에 빠져들 수 있었다.

- 칼라이조 로프너는 대단히 박식하고 그런 지식들을 재미나게 풀어낼 줄 아는 작가였다. 다만 거기에 치중한 탓인지 대부분의 스토리는 특별할 게 없었고 결말도 평이했다. 소개 문구에 의하면 이번 책은 한 장의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체를 보기 좋게 만들어 가족들에게 인도하는 것이 일이었던 그는 어느 날 자기 자신을 염하는 꿈을 꾸게 된다. 

(리뷰자 주 : 시체 화장. 엠바밍 embalming.)


- "쿠세 산 브랜디가 있다면 부탁하네."

"<이 땅의 모든 죽음들>이라.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당한 졸작을 보시는군요. 그보다 쿠세인이 라노프 작가의 책을 다 읽다니 놀라운걸요."
"그럴 것 없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도 라노프 작가니까."

그 말에 남자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데굴데굴 구를 기세였다. 남자의 동료인 다른 사람도 궁금한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레아킨이 남자의 이 무례한 태도를 꾸짖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술집 주인이 다른 병을 내왔다. 이번엔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어쨌든 마셔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개를 여는 순간 아직도 웃음을 그치지 못한 남자가 병을 빼앗더니 잔에 따라 주었다. 
"정말 재미있는 쿠세인을 만났군요. 보아하니 책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라면야 쿠세인이든 바로인이든 다 환영이지요."
바로인 같은 저급한 민족과 비교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레아킨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이번엔 제대로 된 브랜디였다. 독하지만 향이 진한 게 마음에 들었다. 잔을 비운 그는 맞은편 남자에게도 따라 주었다.

 

- "칼라이조 로프너는 이 책을 내고 대단히 부끄러워했지요. 뭐, 안 그런 책이 없지만 말입니다."
"그런가. 적어도 지금 읽은 부분까지는 대단히 흥미로운데, 부끄러워할 만한 글은 아니다."
그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하지만 항상 결말이 문제란 말이죠. 그의 글은 처음에만 힘이 넘쳐요."
"그건 동감이다."
남자는 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딱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아무쪼록 읽고 던지지만 않으실 정도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 "칼!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와 있었네?"
무리 중 한 여성이 대화하던 남자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며 레아킨은 술집 주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오늘 정말로 이곳에서 무슨 모임이 있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일행이 와서요. 그럼."
 

- 그가 술집을 나가는 걸 보고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보고 여자가 물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냥 좀 재미있어서."
"뭐가?"
남자는 희미하게 웃고는 말했다.
"최근에 나온 내 책을 보고 있더라고. 우리가 다 아는 졸작..."
"<이 땅의 모든 죽음들>!"
여자의 외침에 남자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요."
"괜찮아, 칼, 그건 적어도 내 데뷔작보다는 훌륭하니까."

"왜 또 이러실까. 스스로를 천재라고 믿고 있는 비오티 작가님께서"
여자는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남자의 등을 퍽 쳤다.
"마시자. 작가의 본분은 술과 담배로 속을 망가뜨리는 것이니까!"

- 술집을 나와 로우의 골목을 걸으면서 레아킨은 방금 목격한 모임에 대해 생각했다.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하는 자리를 마련해 보는 것도 좋겠군. 라노프의 기자와 언론가, 사상가 그리고 작가... 
비록 지배국과 속국의 관계라고는 하나 쿠세는 라노프를 존중하며 화합을 원한다. 그런 뜻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누구든 보고 올 수 있도록 초청장을 돌리고 신문에 게재한다. 입소문도 퍼질 것이다. 죽은 탑의 새로운 심판관이 왜 그런 자리를 만들었나 궁금해서라도 와 볼 것이다.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잡아야 해.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그가 바라는 건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모여든 사람들 중에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이 있는 것.

- 레아킨은 곧바로 보좌관에게 의견을 피력했으나 귀스트는 더 들어줄 가치도 없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임으로써 레아킨을 낙담시켰다.
"그러다 불상사라도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혁명가 무리가 과연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괜한 소동이 일어나면 귀빈들을 모셔 놓고 해하려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동포를 해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아직도 라노프인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잊으셨습니까? 이 죽은 탑에서 일하는 직원들 대부분도 라노프인이라는 걸 말입니다."
 
- "왜 그렇게까지 해서 그런 모임을 열려고 하시는 겁니까? 만나봤자 재미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릴 좋아하지도 않고요. 사사건건 검열이니 제약이니 간섭해 와서 제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를 칠 겁니다."
"그럼 자네가 빠지면 되겠군."
귀스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저 없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하지만 이 모임은 꼭 열고 싶어. 이런 명분이면 어떨까. 지금껏 괴롭혀 왔으나 쿠세에서 새로운 심판관도 왔겠다, 이젠 잘 좀 지내보자고. 그 심판관은 다행히 이전의 심판관보다는 너그러운 듯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는 거지."
"착한 역할을 맡고 싶으시다는 거군요."
"난 단지 정말 이걸 하고 싶을 뿐이야."

- "이해해 줘. 이건 내 병이라서 어쩔 수 없어. 난 감정을 잘 억제하지 못하거든. 말도 생각나는 대로 툭툭 내뱉지. 상대방의 기분이나 반응 같은 건 전혀 배려 못 하는 거야. 아니, 나는 한다고 하는데 어느새 입에서 말이 먼저 튀어 나가 버린다고 뒤늦게야 내가 그랬다는 걸 깨닫지 빌어먹을. 아, 내가 방금 또 욕했지? 이것도 제멋대로 나간 거라고."
"그런 병도 다 있나?"

 

- "이런 병이 또 있어?"
"있다. 그 병에 걸린 남자를 알지. 그는 무언가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슬픔이나 기쁨, 분노조차 그에겐 너무나 멀고 생소하지. 아버지가 죽었다는 이야길 듣고서도 '그렇군' 하고 넘어갔을 뿐이다."

-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곤 경건한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오티의 원고를 앞에 놓고 마침내 첫 장을 넘겼다. 
[ 내겐 그대에게 입맞춤할 입술이 없네. 그대의 얼굴을 볼 눈도, 향기를 맡을 코도 없네. 다만 남은 이 두 손으로 그대가 사랑하는 남자를 모조리 죽이려 하네. 마침내 나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
그 강렬한 문구에 레아킨은 조금 놀랐다. <호반 위 황금새>에 비하면 상당히 무거운 글일 듯했다.

- [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
남자가 만약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여자가 한 번쯤 돌아볼 수밖에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잔인하리만치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내게... 얼굴이 없으니까?
한참의 침묵 후, 그것을 울음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울림이 여자의 머릿속에 전달되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다만 흐느꼈다. 남자는 그녀의 등을 쓸어 주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

- 레아킨이 원고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는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의미 없이 몇 걸음을 왔다 갔다 했다.
'이상해.'
창밖 광장은 연기조차 피어오르지 않는 식은 재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걸 보면서도 마음은 조금도 진정되질 않았다.
'정말로 이상하군.'

사랑하는 여자가 한 번이라도 자신을 똑바로 쳐다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얼굴 없는 남자가 선택한 결말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었다.
레아킨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쪽이 먹먹한 이 기분 또한 설명할 수 없었다.

 

- '비오티,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누구를 만나고 무엇에 열정을 품기에 이런 것들을 쓸 수 있는 거지? 그대는 진솔한가? 이것들은 모두 진실인가? 그럴 수 있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정말 그럴 수 있는 건가? 나도?' 
침묵이 답하는 것을 들으며 레아킨은 결심했다. 그전까지는 막연한 기분이었지만 이제는 분명해졌다. 반드시 비오티를 만나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 비록 그럴 의도로 비꼰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모시는 상관이 처음으로 그런 엄청난 표정을 지었을 때는 귀스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는 비오티를 처음 만나던 장면부터 천천히 되새겼다. 그녀의 모습과 그녀의 행동을 하나씩 짚어 보면서 왜 몰랐을까, 어떻게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자신을 질책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속에서 들끓는 기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 그는, 그러니까 아마도... 실망한 것 같았다. 
그런 글을 쓴 사람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뒤흔들고 또 울게 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무언가 특별한, 혹은 반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이런 표현을 쓰는 것에 가슴이 다 아파 올 지경이었다)했다. 아니, 목소리는 큰 데다 무례하고 또 지나치게 쾌활했다.  

- 진심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겁이 나서 저러는 걸까 고민하는 순간 귀스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정말이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렇게나 저를 즐겁게 해 주시다니요."
"즐겁다니 퍽 다행이군."
귀스트는 웃음을 그치고 일어나 자리를 비켜 주었다. 레아킨은 책상 위에 있던 종이 뭉치가 조금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그게 뭔가 했지만 곧 깨달았다. 비오티의 원고였다. 
"이걸 봤나?"
"예. 비오티에게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 "왜요, 어제 직접 만나 보시니 실망스럽던가요?"
레아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귀스트는 마치 들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실망하셨겠지요. 원래 그런 겁니다. 아쉽지만 이 세상에는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게 많지 않죠. 욕심이 그치질 않는 사람을 탓할까요, 조잡한 세상을 탓할까요? 그녀가 아름다웠더라면 만족하셨을 겁니까? 혹은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시처럼 아름다운 말이 흘러나와야 만족하셨을까요? 심판관님은 이 책을 보면서 그런 것을 기대하셨습니까?" 
보좌관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 알면서도 되묻는, 되돌릴 수 없는데도 후회하는 그런 쓸데없이 인간다운 짓을 한다.
"당신이 비오티인가?"
그녀는 어째서인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이상한, 레아킨으로서는 도저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한참 동안 그를 주시했다. 눈동자는 그에게 고정한 채로 고개를 이쪽으로 기울였다가 저쪽으로 기울이면서. 
불편해질 만큼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담뱃대를 붙잡은 채 허탈하지만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내 글을 좋아했군?"

- 레아킨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마음속에서 격정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입 밖으로는 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실망한 모양이군."
그녀는 단조로이 평가했고 레아킨은 가슴 한가운데가 쿡 찔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내가 비오티야."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그녀의 모습 어디에도 특별함이나 자랑스러움 같은 건 없었다.
"실망했어? 왜, 상상하던 모습과 달라? 지적이고 우아하며 내뱉는 말들이 모두 천재적인 형용과 기발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을 줄 알았어? 종일 담배나 피워 대며 싸구려 술을 마시고, 자신이 뱉어 낸 연기와 절망 속에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겨우겨우 걸러내어 책을 쓸 거라곤 생각 못 해 봤어?" 
레아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오티의 눈이 좇아 왔지만 그는 매몰차게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밖을 내다보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 "그래, 그럼 이야기하도록 하지. 죽은 탑의 심판관 양반."
그녀는 으르렁거리듯 내뱉었으나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기다리던 레아킨은 말 대신 걸음 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왼손으로 칼집을 잡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경악했다. 그녀는 금세 등 뒤로 다가왔고 짧은 순간 레아킨은 자신이 이대로 뒤를 빼앗긴 채 허무하게 죽어 버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칼이 아닌 말로 그를 푹 찔렀다.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사람 얼굴은 보고 들어. 이 무례한 쿠세인 작자야."
  
- 무언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던 사람이 진정 절망했을 때는 그 일이 실패했을 때가 아니다. 모든 걸 바쳐 성공했는데, 그 결과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전혀 아름답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을 때다. 

- '돌아가는 건가. 그냥 이렇게 이대로.'
세상은 전보다 더 탁해진 것 같았다. 레아킨은 자신이 그나마 볼 수 있는 색 중에 또 하나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무미건조한 표류, 의미 없는 얼굴들, 황폐한 시간 덩어리. 모든 게 신기루를 보듯 멀고 낯설었다. 그렇기에 로우젤 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는 귀스트의 보고를 받았을 때 그는 차라리 반가움을 느꼈다.
 
- "여러분, 우리는 저 야만적인 쿠세인들과는 다릅니다. 오늘의 이 집회는 절대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어느 때는 말 한마디가 칼보다 강함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그것을 보여 줍시다. 우리는 성숙한 시민입니다!"
동조하는 함성이 들려왔을 때 귀스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어."
그러나 레아킨은 고개를 저으며 모여 있는 사람들의 한쪽을 가리켰다.
"여자와 아이들이 많다. 이쪽도 폭력은 자제하도록 하지."
"가끔 심판관님은 쿠세인 같지 않으십니다. 여자와 아이들이라고요? 그런 걸 신경 쓰십니까?"
"개인적으로 신경 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짐승도 제 새끼를 위해서라면 온몸이 뜯길 때까지 발악하는 법이고 자기 자신이 입은 해보다 가족이 입은 해가 사람을 더 분노하게 한다. 그것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복수심을 낳지. 잊었나 본데 우리는 어떤 속국이든 결코 군부로 통제하지 않는다." 

 

- 그냥 두고 오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고맙다는 말 정도는 등 뒤에 남겨 주고 왔어야 했는데.
좁은 골목길을 통해 조심스레 가던 그녀는 곧 바닥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불안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방향이 같아 어쩔 수 없이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저쪽 끝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 그녀는 입을 벌렸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단지 턱을 떨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피의 비라도 맞은 듯 빨갛게 젖은 몸. 아직도 머리카락 끝에서는 붉은 것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고개를 들어 비오티를 봤다. 잠시 두 사람은 서로를 그렇게 보고만 있었다.
"다쳤... 어?"
마침내 비오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오티는 안도하면서 가까스로 시선을 떼고 그의 발밑을 내려다봤다. 거기에도 피가 잔뜩 고여 있었는데, 그의 상처는 아니라고 하지만 견딜 수 없이 그가 가여워졌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순간 레아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 "사과해야 할 것 같더군. 내 멋대로 상상하고 기대하고, 그걸로 그대에게 상처 준 점에 대해서."
그는 그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조금 전 그를 피에 젖게 한 일 같은 건 아무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듯이.
"너의 글은 내게 특별했다."
비오티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한 단어, 한 단어가 고르기 힘겨운 듯 끊어 말했다.
"그래서 아마 너도... 특별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는 어렵게 말하고서 뭔가 더 이어 보려는 것 같았지만, 몇 번 실패하고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 "가끔 만날 수 있나?"
"안... 어?"
레아킨은 얼굴 다음으로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내 판단은 성급했는지도 모르지. 너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고, 좀 더 너를 알고 싶다. 네가 그 글을 썼다는 것만은 분명하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틀림없이 그게 있을 테지. 그렇다면 난 그걸 너한테서 찾겠다." 

- 그는 뭐가 만족스러운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내가 볼 수 있는 색이로군. 나도 마음에 든다."

- 비오티는 눈물로 얼룩진 잘생긴 얼굴을 매만지며 마치 엄마 같은 말투로 물었다. 로즈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녀를 올려다봤다.
"나 글 그만둬 버릴까 봐."
그러더니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비오티는 손으로는 그의 등을 토닥이면서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괘씸한 자식 보게나. 요즘 책 제일 잘 나간다면서 왜 또 시작이야?"
"그러니까 말이야. 가끔 이런 울보가 끔찍한 추리 공포 소설을 쓴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니까."
"이 모양이니 미워할 수도 없고."
"뭐, 처음 등단하던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는 건 좋은 거겠지만."

- "사람들은 항상 내 글에 재미는 있지만 깊이가 없다고 말해. 그놈의 깊이란 게 뭔데? 그래, 한번 해 보자고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집어넣고 진지하게 그놈을 담으려고 하면 독자들은 재미없다면서 이내 외면해 버리지. 언제는 그렇게 원한다고 말해 놓고서! 나는 또 흐지부지 반품되는 책들을 보면서 원래의 나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해. 하지만 그러고 나면 또 비평가들은 혹평을 하고 독자들은 읽으면서도 비웃지! 도대체 뭐가 옳은 길이야? 나는 알 수가 없어." 
 
- "다른 건 생각하지 마. 그냥 너 자신의 글을 쓰면 되잖아. 누구나 글을 쓰는 이유가 다르고 누구나 글을 읽는 이유가 달라. 유치하니 뭐니 말들 해도 난 많이 팔리는 작품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네가 자랑스럽고 말이야. 한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면 언젠가 너 스스로도 재미와 깊이 모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쓰도록 해. 쓰면 되잖아? 노력이나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야말로 욕심이야. 그러니까 잘 들어, 이 징글맞게 귀여운 녀석아.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네 글도 좋아해. 능력도 충분하다고 봐. 그러니까 앞으로 증명해 보여. 울지 말고 네가 되고 싶은 것이 돼. 이 누님이 믿어 줄 테니까."

- 로즈웰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랑해."
"컥, 심장 떨어질 뻔했네. 너 그거 죄다. 그 잘생긴 얼굴로 아무한테나 사랑해를 남발하지 말란 말이야!" 

 

- "그런데 오늘도 뭔가 낯간지러운 걸 물어볼 거야?"
"그대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나?"
바로 이어진 말에 비오티는 빠뜨린 턱을 찾으려고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 응, 해 봤을 거야. 아마도."
"그럼 그대가 만약 얼굴 없는 남자라면, 정말로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겠나?"
이 말에는 비오티도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쓴 글인데 당연하지. 내가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사실을 거기에 그럴듯하게 써 놓으면 독자가 읽고 공감할 수 있을까? 물론 탁월한 거짓말쟁이들도 있겠지만 난 아니야. 모두 내가 진실로 생각하고 느끼니까 쓴 것들이지." 
그렇다면 거기 그가 있는 것도 진실이겠군. 레아킨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 레아킨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 주체 못 하는 감정의 기복을 좀 나눠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등..."
"가치 없는 소리지. 그래, 알아. 그래도 전이라는 게 있잖아. 내가 쓰는 글이란 것도 결국 내 의지와 감정을 남들에게로 전이시키는 게 아닐까? 내가 느끼는 이것을 당신도 느껴라, 하고 말하는 거지. 나 작가잖아. 아기모스처럼 위대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 그러니까 나라면 가능하지 않으려나?" 

- 레아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커다란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그랬다. 그녀는 그를 울게 했다. 그렇다면 다른 것도 가능하게 할지 모른다. 비오티를 만나려던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깨달음에 놀라워하며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고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것을 그리워하고 원한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무슨 말이냐고 되물을 줄 알았던 비오티는 쉽다는 듯 씩 웃었다.
"당신은 이미 그러고 있는 걸."

- 그녀의 그 말은 마치, 구원처럼 들렸다...

 

- 라흐는 웃으며 그들에게 쉬라는 손짓을 하곤 한쪽 구석으로 비오티를 데려갔다. 거기에 또 다른 방이 있었다.
"라흐."
방문을 열자 누군가 다정한 목소리로 라흐를 부르며 우아하게 일어났다. 비오티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곤 입을 벌린 채 두 눈만 끔벅였다. 도저히 이 담배 냄새와 곰팡내로 찌든 공간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사해. 이쪽은 카이라, 우리 혁명단 동지야."
제대로 마주 보기도 힘든 미인이 비오티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혁명단 동지라고 했지만 차림새로 봐서는 틀림없이 코케트였다.  

- "이쪽은 비오티야, 알지?"
"알다마다. 독립을 위한 글 대신 자신만의 글을 쓰는 걸로 유명한 작가분 아닌가?"
그녀의 말에 조소가 섞여 있다는 걸 알아차린 비오티도 물론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새 라흐가 이렇게 거물이 됐나? 여기가 귀족 살롱도 아닌데 코케트 같은 게 꼬일 정도면."


- "아,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니. 어째 맥 빠지네. 그건 네 거니까 도로 가져가라. 나는 널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유품인 양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아."
라흐는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노려볼 뿐 떨어진 파이프를 주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친쿠세파라, 그렇게들 떠들든 말든 난 상관 안 해.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거야. 그리고 나를 향해 서슴없이 화살을 쏘려던 옛 연인과 나를 위해 서슴없이 동포들을 죽인 그 쿠세인 중에 택하라면, 후자로 하겠어.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 볼 생각은 하지 마." 

- "그는 너를 정말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로군."
확신하는 라흐의 태도로 보아 이미 늦은 것 같았다.

- "독립을 바라는 것, 그 외에 당신이 무얼 하지? 신문에 한 페이지 글조차 기고하지 않으면서 말이야. 나는 몸을 바치고 있어. 말 그대로 내 몸을 당신은 그 이상의 것을 바칠 수 있나?" 
카이라는 웃고 있었으나 더없이 싸늘한 얼굴이었다. 라흐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미안하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비오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택한 건가.'

- "그렇다면 가증스럽게 독립을 바란다는 등의 말은 하지 말아 줘. 적어도 당신의 손으로 보탬이 되기 전에는."
"난, 그래도 쓰지 않을 거야. 글은 내게..."
"당신이 그 심판관을 끌어내지 못하면 결국엔 내가 해야 돼. 다음에도 당신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지 궁금하군."

비오티도 궁금했다. 이미 시선은 빛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됐어. 돌아가, 비오티. 배웅은 못 해."

- "그게 뭐지?"
"주로 귀족들을 상대하는 고급 정부를 말합니다."
레아킨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레아킨 쪽을 슬쩍 보고는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다면서 곁에는 이런 여인을 두는가 보군."
"사랑은 지고지순할 수 있지만 욕망만은 어쩔 수 없더군요."
"그 변명을 네 아내도 납득할 수 있을까? 본 적 없지만 가엾은 그녀를 위해서라도 바라야겠군. 그녀 또한 본국에서 욕망에 충실하기를."
나힘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얼굴에 팬 칼자국은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레아킨은 느긋하게 그를 마주 봤다. 물론 온몸의 근육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저런 전사라면 몇 합 주고받을 것도 없었다. 단칼이면 승부가 날 것이다.

- 긴장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살포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코케트였다. 그녀는 방 안에 감도는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찻잔을 들고 사뿐사뿐 레아킨에게 걸어왔다. 가볍다고 느껴질 만한 걸음이었으나 차는 전혀 출렁이지 않았다.
"두 분께서 심각한 이야기라도 나누시나 보군요. 표정들이 무서운데요. 저도 쿠세어를 안다면 좋을 텐데요."
 
- 그
사이 죄인들이 차례대로 십자가에 묶였다. 비오티는 자신이 밟은 기름 묻은 장작이 달그락거릴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그제야 비로소 죽는다는 사실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 저절로 눈앞이 흐려졌다. 그녀는 공허하게 사람들을 훑었다. 군중의 몽롱한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들과 눈이 마주치자 이전까지는 관심 가지지 않았던 사실이 궁금해졌다. 그들은 왜 저런 눈으로 곧 죽을 사람을 바라보는 걸까. 위안을 얻는 걸까? 저기 걸려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오늘 당장 죽을 사람은 내가 아닌 저 사람이라고 자위하는 걸까?
소리 없이 거친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 칼라이조는 멈칫했고 비오티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만 만날 생각이었어. 나와 관련되기만 하면 그 사람에게도 곤란한 일만 생긴다고. 빌어먹을, 빚진 게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야. 하루라도 빨리 끝내."
비오티는 테이블 위에 엎어져 분한 듯이 탄식했다.
"그 사람이 왜 쿠세인이지? 도저히 내가 붙잡혀 간 곳에서 본 쿠세인들하고 같다고 생각할 수 없어."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칼라이조는 조심스럽게, 대답을 듣기 두렵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비오티는 엎드린 채로 고개를 휘저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나에게는 정말로 아무 짓도. 다만 다른 사람에게 하는 짓을 보여 줬어. 끊임없이 계속..."

"무엇을?"
"눈을 감아서도, 꿈에서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 고개를 드는 그녀는 그때의 광경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나운 짐승의 울음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사람의 비명 소리임을 깨달았다. 죽여 달라고 외치는 소리였다. 제발 죽을 수 있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통곡하고 있었다.  

- "숨 좀 쉬어. 심하게 떨고 있군."
비오티도 그걸 깨닫고 제대로 호흡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온몸이 곤두서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그대에겐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여성과 아이에겐 저런 고문을 가하지 않는다."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서 순식간에 의심스러운 희망이 솟구쳤다.
"그럼..."
"대신 다른 사람이 고문을 받지. 그대가 보는 앞에서, 그대 때문에. 물론 그건 직접 고문받는 것보다야 쉬운 일이야. 자기 속의 죄책감을 죽이기만 한다면." 

- "마침 잘 아는 사이인 듯하니, 이 자로 할까?"

- 비오티는 잔을 떨어뜨렸다. 그러곤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칼라이조는 어쩔 줄을 모르고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다시는 그들을 거스르지 않을 거야. 겁쟁이, 비겁자,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다시는 그걸 보고 싶지 않아. 그걸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러지 않아도 돼. 괜찮아, 비오티. 이제 다 괜찮아."
걱정이 되었는지 톤이 다가왔지만 칼라이조는 고개를 저었다. 톤은 우울한 얼굴로 잔을 주워 주방으로 돌아갔다.

- "당분간 집에서 조용히 쉬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아니, 차라리 글을 쓰거나 책을 보거나 다른 일에 몰두해서 빨리 잊어버려. 무슨 일이 있었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다시 겪을 일도 없을 거야. 알았지?"
비오티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칼라이조는 여러 가지 위로의 말을 해 주었고 덕분에 그녀도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한참 후 눈물이 멎은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 "칼, 나 가끔 하는 착각이 있어. 칼은 원래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절한데, 그래도 나한테 이럴 때마다 혹시 칼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웃기지?" 
"그래, 웃겨. 하지만 비오티."
칼라이조는 와인 병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네가 자주 하는 비유가 있지. 책이 그렇듯 세상에도 주연과 조연이 있고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그랬지. 그런데?"
"나는 비오티의 인생에서 주연이 아니라는 걸 알아."
비오티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적어도 단역은 아닌 정도로………… 곁에 있고 싶어."

칼라이조는 스스로의 말이 멋쩍은 듯 웃어 버리고는, 자신의 잔을 들어 천천히 비웠다. 비오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테이블만 내려다봤다.
십년지기 사이에는 그렇게 영원할 듯이 침묵만 흘렀다.

- 나힘이 군부에서 보내 준 의사 덕에 레아킨은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하얀 가루약을 고집했던 사관은 면목이 없는 듯 자기 방에 틀어박혀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뒤 몸의 상처를 회복한 레아킨은 이번엔 마음에 큰 타격을 입었다. 편지 한 통에 의해서였다.

- 그리고 편지의 말미에는 호반 위 황금새에 나오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 죽음만이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아니며 사는 것만이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은 아니다. 끝없이 인생을 항해하는 자여, 자신만의 별을 좇기를. ]

- 레아킨은 편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다시, 그리고 또 한 번. 마침내 편지를 내려놓고 그대로 잠시 서 있었다. 그래, 그녀의 말대로 틀림없이 그게 서로에게 좋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모든 게 무너져 버린다.
메마른 사막의 밤,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게 해 준 책 한 권. 만나 보고 싶었던 사람, 색을 보고 싶었던 자신, 느껴 보고 싶었던 자신. 

- 그는 편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책상으로 걸어가 그가 가장 아끼는 책 <호반 위 황금새>를 집어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그것 역시 쓰레기통에 넣었다. 서랍 안에 있던 얼굴 없는 남자의 원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말없이 쓰레기통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해 놓은 행위에 경악하던 그는 그 모든 것을 발로 차버렸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 "제가 다시 오길 바라시나요?"

"또 올 건가?"

"저를 원하신다면요."

레아킨이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또 와라."
카이라는 상대를 애태울 때 쓰는 살짝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달콤한 말로 해 줄 순 없어요?"
레아킨은 말이 없었고 그대로 침묵이 길어지자 그녀는 초조해졌다. 그냥 떠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매일 그대가 내 얼굴을 그려 다오. 그대가 웃으라면 웃고, 그대가 울라면 울겠다. 내가 미울 땐 내 입은 지워 버려도 좋아. 하지만 눈만은 반드시 뜨고 있게 해 다오. 언제까지고 그대를 보게."
한번 마주치면 시선을 돌리기 어려운 눈동자가 그녀를 조용히 바라봤다. 카이라는 잠깐이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 말을 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아마 그대로 그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알고 싶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 
"비오티의 <얼굴 없는 남자>의 한 구절이지. 마음에 드나?"
순식간에 현실로 되돌아온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비오티, 비오티, 비오티. 또 그 여자로군.

- "문장은 제 취향이 아니지만, 당신이 고른 것이니 마음에 들어요."
"읽어 보면 그게 얼마나 슬픈 말인지 알게 될 거야."
조국을 위해 글을 쓰지 않는 여자의 책 따위 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았다.
"읽어 보겠어요."
그대로 우아하게 인사한 후 카이라가 방을 나갔다.

- 레아킨은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 두 팔로 얼굴을 덮었다. 마음에도 없는 그런 말을 그녀에게 왜 했을까.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황제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슬퍼하는 척했다. 그러지 않으면 살해했다는 누명을 쓸지도 몰랐으니까. 또한 황위에 오른 형이 그를 곁에 두고 보살펴 줄 때는 그것에 고마워하는 척했다. 그러지 않으면 살해당할지도 몰랐으니까.
'어쩌면 사랑하는 척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군.'


- 그는 농담처럼 생각했다가 스스로 떠올린 그 발상에 놀랐다. 그러고 보면 정말 안 될 것도 없었다.
'얼굴 없는 남자도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던가. 무언가를 느끼고 싶어 하는 내가 끝내 느낄 수 없다면, 느끼는 척하는 것으로도 좋지 않을까.'


- 왜 그렇게까지 해서 그토록 느껴 보길 원하는 건지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예전에는 굳이 색을 보지 못해도, 혹은 영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도 별 유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왜인지 그것을 갈구하고 있다. 그게 무언지도 잘 모르면서 그리워하고 있다. 가 본 적 없는 곳에 대한 향수처럼 모순적인 것이지만, 비오티는 그게 가능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 그렇다면 느끼는 척해 보자. 사랑하는 척 해 보자. 그러다가 정말로 그 모든 게 진짜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누구를?

거기서 생각이 막혔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 "들어와라."
귀스트였다.
"코케트도 부를 줄 아시고 놀랐습니다. 상당한 미인이던데요."

"용건이 무엇이냐."
"전에 말씀하신 라흐를 붙잡기 위한 계획,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여태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던 라노프인 거상을 섭외했고 그가 몰래 독립 자금을 지원하는 척하면서 라흐든 그 측근이든 끌어낼 겁니다. 한데 정말 라흐가 돈에 움직일 거라고 보십니까?" 
"물론. 그게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실패하기 어려운 방법 중 하나니까."
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적어도 정(情)에 움직일 놈은 아니지요."

- 귀스트는 천천히 감옥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평소보다 아주 느린 속도였다. 누구든 자기 무게만 한 것을 끌고 가려면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있겠지 했어. 라흐가 어떤 녀석인데 사람 하나 안 심어 뒀겠어. 확신하고 있는 게 두 녀석이고 서너 명 의심 가는 녀석들도 있었어. 하지만 그게 뭐? 난 내버려 뒀어. 다들 각자의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인데 굳이 내 손으로 끌어낼 필요는 없잖아." 
계단이 끝나자 그는 어둡고 퀴퀴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 "정말이야. 적당한 선만 지켰다면 너도 나도 편했겠지. 한데 이런 식이면 곤란해. 로즈웰 켈러의 <침묵의 선>이라는 소설 혹시 봤나 모르겠네. 알다시피 그 작가는 추리 소설의 대가지 웃기는 게 말이야. 정작 본인을 만나 보면 이건 뭐, 어리광쟁이 샌님이 따로 없거든. 그런데 글은 치밀하고 잔인하고 긴장감이 넘친단 말이지. 이 이야길 하려던 게 아니라 아무튼 그 소설에서 살인자는 단지 자신이 그어 놓은 선을 넘었다고 해서 사람의 사지를 잘라 버려. 선을 넘어온 부분만 마치 종이처럼 정확하게 오려 내지." 
그의 손에 끌려가던 것이 그 말에 반응하듯 꿈틀했다. 하지만 귀스트는 신경 쓰지 않고 나아갔다.
"아니, 내가 뭐 그런 끔찍한 짓을 하겠다는 게 아니야. 오히려 나는 네가 바라던 걸 이뤄 주려고 해. 알고 싶어 했잖아? 내가 여기 왜 내려오는지." 
 
- 복도 끝에 다다른 귀스트가 멈춰 섰다. 거기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운 기분이 드는 오래된 철문이 하나 있었다. 귀스트는 열쇠를 꽂아 넣으면서 키들거렸다. 
"아니면 이쪽이 더 끔찍하려나?"
철문은 마치 수십 년 만에 처음 열리듯 힘겨운 소리를 냈다. 그 안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누구든 결코 발을 들이밀고 싶어 하지 않을 중첩되고 공포스러운 어둠.


- "들어가서 확인해 봐. 라흐에게 보고는 할 수 없겠지만 개인적인 호기심은 충족할 수 있을 테니. 그거 인간들의 버릇 아니던가? 죽기 전에 뭐든 꼭 알고 싶어 하는 거. 누구의 사주냐, 왜 나를 죽이는 거냐, 내가 죽으면 그들을 무사히 풀어 줄 거냐... 아, 소설을 너무 많이 봤군. 아무튼 나중에 라흐를 만나게 되면 네가 명령을 온몸으로 직접 수행했다고 꼭 전해 줄게." 
귀스트는 끌고 온 것을 안으로 던지고 문을 닫았다. 그러곤 철문에 기대어 잠시 앉아 있었다. 희미하게 뒤에서 비명 같은 것이 들려왔지만 그는 듣지 못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 봐야 단지 소설일 뿐인데. 위대한 아기모스의 유산을 신이 왜 숨겼다고 생각해?"
그는 검지에 끼운 피라미드 모양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스스로 답했다.
"두려워했기 때문이지. 창조는 자신만의 권한인데 한 위대한 작가가 그것을 진실로 침범했기에."

 

- 레아킨은 한숨을 흘려보내고 말을 쏟아 냈다.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진 기분이었다.
"그대가 알다시피 나는 무언가 잘 느끼지도 못하고 사랑이 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 한번 무언가 느끼는 척해 본 적이 있고, 그게 꽤 성공했던 것 같다. 따라서 사랑하는 척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대상을 그대로 결정한 것 같다." 
비오티는 기가 막힌 듯 그를 바라봤다.
"이런 것마저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을 내린 다음 논리 정연하게 읊는 게 당신네 쿠세... 아니, 당신 성격이야?"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앞으로 고쳐 보도록 노력하겠다. 이제부터 그대가 바라는 것과 그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만 해야 하니."

 

- 레아킨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비오티는 세상에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신기한 물건을 보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이야, 도대체. 감정마저도 생각으로 통제해야만 굴러가? 사랑하기로 결정했다고? 이거 진짜 화나네."

"그럼 어떻게 해야 좋겠나."

- "느끼지 못하지만 느끼고 싶어 하는 내가 그럼 어떻게 해야 좋겠나. 하다못해 그것을 느끼는 척이라도 해야 비참하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것마저 안 된다고 할 참인가? 다리 하나가 없어 절뚝거리는 사람에게 그럴 거면 걷지 말라고 말할 건가? 나를 구원한 게 그대야. 나에게 이런 빌어먹을 것들을 원하게 만든 것이 그대라고!" 

- "당신을 구원한 것이 내 잘못이라면, 사죄하기 위해서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려야 하는가 보네."
"그게 무슨... 허락하는 건가?"
"허락이니 뭐니, 그건 당신 감정인데 내가 무슨 수로 해. 정말 나를 사랑해 볼 거야?"
"내 모든 것을 바쳐서."
레아킨은 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하게 말했다.
"만약 진짜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이 와도 나는 당신을 받아주지 않을 텐데?"
"상관없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면 더 이상 상관없게 되지 않을 텐데?"
"그것도... 상관없다."

-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겠다던 결심을 철회하겠어. 남들이 뭐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당신을 진실한 친구로 여기고 곁에 둘게. 그렇지만 일부러 당신을 유혹하거나 사랑하는 척함으로써 도와줄 수는 없어. 그것으로 괜찮겠어?" 
레아킨은 만족했다.

-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하지 않는다."
모두가 후회하기 전에 반드시 하는 말을 그도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 비오티는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때 라흐를 붙잡은 게 나였으니까."
귀스트는 처음엔 눈살을 찌푸렸고 다음엔 의혹에 찬 표정을 지었으며 마지막엔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비오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의 처형이 있던 날, 가지 말라고, 죽지 말라고, 그들의 목숨보다 당신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고... 곁에 있어 달라고 붙잡은 게 나야."
그녀는 우는 얼굴로 웃었다.
"그 녀석은 후회했어. 정말 많이 후회했어. 내 탓이라고 생각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뒀지. 하지만 그게 지속되자 라흐는 보상받고 싶어 했어. 내게도 요구하기 시작한 거야. 내 소중한 걸 그에게 내줄 것을."

- "그런데도 난 그 녀석을 붙잡아 놓고 정작 내 것을 요구할 때 주지 못했던 거야. 어쩌면 라흐가 나를 배신한 게 아닐지도 몰라. 내가 먼저 배신한 건지도."
"그만해. 못 들어주겠군."
귀스트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고 비오티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쨌든 그래서 그 녀석을 포기할 수가 없어."

- "그때 내가 하얀색이라고 하니 당신이 그랬지. 그건 내가 볼 수 있는 색이라고. 그래서 마음에 든다고."
레아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대로 침묵이 흘렀고, 입을 다문 채 서 있던 비오티는 갑자기 그를 보듬어 안았다.

- "색을 보여 달라니, 나는 의사가 아니야.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색의 느낌을 당신에게 이야기해 줄 수는 있어."
그녀가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레아킨을 품에서 놓았다. 아쉬움을 느끼며 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우선 당신의 머리카락, 그건 쿠세인들이 대개 그렇듯 검은색이지. 하지만 완전히 까맣지는 않아. 새벽의 하늘빛처럼 약간은 푸른빛이 있어. 그래, 당신의 머리카락은 밤을 닮았어. 새벽 밤하늘의 색이야."
새벽 밤하늘의 색. 레아킨은 그것을 속으로 되새겼다.

- "그리고 눈동자, 당신 눈은 우리 로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정말 예쁜데 말이야. 무얼 닮았냐면... 그래, 황혼빛을 닮았어."
황혼빛. 레아킨은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황혼이 질 무렵 하늘은 깊은 농도와 명암의 세계를 보는 그에게는 엄청난 광경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색을 알게 된 레아킨은 문득 비오티의 색도 궁금해졌다.
"그대는 어떤 색이지?"
"나? 내 머리카락은 당신도 볼 수 있는 하얀색이지. 쌓여 있는 눈의 색이라고 보면 되겠네. 그리고 눈동자는..."
그녀는 뭔가를 떠올린 듯 씨익 웃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는데 아주 깊은 바다색이래. 까맣지도 않고 푸르지도 않은, 결코 그 속을 들여다볼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색."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느낌이지?"
"어? 그건... 글쎄. 사랑에는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 하지만 내 정의는 그래. 그 사람을 끌어안고 그대로 죽어 버리고 싶다면 그건 사랑이야."

- 비오티는 이 불쌍한 남자의 품에서 문득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하는 말의 반이라도 진심으로 느끼고 있을까. 마음에도 없을 말을 하고 그것을 진짜처럼 받아들이고, 그게 정말 그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까.

-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레아킨은 조바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든지 해라.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어떤 것이든지."

 

- 그가 모시는 심판관은 어떤 때는 냉철한 쿠세인 그대로이면서 어떤 때는 터무니없이 어수룩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아무리 비꼬아도 못 알아채는 것처럼 보였고 혹은 알아채도 오히려 재미있어하기 일쑤였다. 
그런 사람이, 어제는 보이는 모든 걸 부수고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레아킨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드러난 것은 비오티의 정체를 알았을 때 이후 처음인지라 귀스트는 꽤 놀랐다. 그래서 이번 일 또한 비오티 때문임을 직감했다. 비오티는 라흐를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할 거라 했고 그 대신에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줄 거라 했다. 어제 그 이야기를 나눴고 그게 레아킨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 후로 계속 식사도 거부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말이다. 지하 감옥에 뭘 숨기고 있는지 보자고 말했던 것도 잊어버린 듯했다.

- '지금 들어갔다간 칼이 날아올지도 모르겠지만... 뭐, 어차피 그걸 받아 주는 것도 내 역할이지.'
귀스트는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통 엉망이 되어 있으리라 예상한 방은 그러나 정갈했다. 아무것도 건들지 않고 곧장 침대로 직행한 듯했다. 귀스트는 침대로 다가가 휘장을 살짝 걷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 "이쪽입니다."
그 뒤를 따라가며 레아킨은 그동안 철저히 감춰 왔으면서 순순히 안내하는 보좌관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비오티까지도 같이 말이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변하게 만든 걸까. 라흐가 잡힌 것? 

- 세 사람은 복도 끝에 다다랐다. 지나오면서 본 감옥들과는 어쩐지 괴리가 느껴지는 철문이 그곳에 있었다. 귀스트는 횃불을 든 채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으나, 그것으로 문을 열기 직전 뒤로 돌아섰다.
"비오티, 당신이 작가니까 말해 봐.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의 경계는 뭐라고 생각하지?"
"어? 뜬금없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대답해 봐."

- "작가로서 대답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경계는 없다."
귀스트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짙고 만족스러운 비웃음이었다.

 

- "어쨌든 빚진 것도 많고 글로써 느끼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만큼, 당신을 위해 꼭 좋은 글을 쓰고 싶었거든."
레아킨은 대답 없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영문을 모르는 채로 비오티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만 본다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말이야. 하긴 예전에 어떤 위대한 음악가도 그랬다. 평생 자신을 이해해 줄 단 하나의 청중을 찾아 헤맸다나. 그러니 내가 당신을 위한 책을 완성하면, 그건 당신 하나만을 위한 책이 되겠지. 난 단 하나의 독자를 찾은 셈이란 말이야." 

- 그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기쁜 것 같다. 아니, 행복하다. 아주 많이."
그의 눈은 차분히 내리깔려 있고 입가에는 나지막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비오티는 그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 "굳이 말하자면 그 중간 단계인 것 같다."
비오티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두렵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자 레아킨이 횃불을 위로 높이 들었다. 비오티의 시선은 저절로 횃불을 따라 올라갔다. 이내 그녀는 레아킨의 표현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깨달았다. 그건 확실히 고치 이상의 다른 것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둥근 돔 모양의 천장에 마치 뿌리처럼 박아 넣은 흰 줄기들이 중간에 매달린 거대한 구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구는 탁한 색깔의 거미줄 같은 것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뭔지 몰라도 그 안에 든 게 대단히 불쾌한 것임에 틀림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 "나도 확신할 순 없지만, 허물을 다 벗으면 마지막으로 무엇이 있을 것 같나."
"그럼 저 안에 든 게..."
비오티는 말끝을 흐렸다가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그가 거기 있는 게 가능하다면, 이것도 가능해."
"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천장을 봐."
비오티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 밝지 않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거기엔 어떤 글귀가 쓰여 있었다.

- "그의 탄생에 세계가 운다. 그가 존재함에 세계가 탄식한다. 그의 손에 닿은 비(非) 생명은 견디지 못하고 가장 작은 단위로 부서지며, 그와 마주 본 생명은 스스로의 치부를 견디지 못하고 영혼까지 썩어 분해된다. 그는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일 것이나 너무도 깊고 농밀하여 감히 품을 수 없다. 그는 누구이겠는가?" 
그 말에 비오티는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나 그런 글을 틀림없이 어디선가 읽었는데."
"무슨 수수께끼 같군. 아무튼 저 고치 안에 든 게 수수께끼의 답인 모양이다."

- 레아킨이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신비로우면서도 음험했다. 횃불의 일렁임 탓일까, 거대한 고치가 답을 재촉하며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비오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 분위기 속에 유독 홀로 괴리된 것 같은,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거 답 아는데?"

- '실수한 거야, 라흐.'
혁명단이 계단을 돌아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는 주저 없이 화살을 쏘았다. 두 명이 맞고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자 뒤따라오던 혁명단 몇몇도 중심을 잃고 계단을 굴렀다. 
'차라리 비오티가 빼내 줄 때까지 가만히 있었어야 했어. 나한테 직접 죽일 기회를 주다니 친절하기도 하지.'
간신히 몸을 피한 자들은 귀스트가 다시 화살을 메기는 걸보고 급히 뒤돌아 뛰어 내려갔다.

- 그것은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다. 단지 오늘을 위하여 그렇게 기다려 왔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 때까지. 아니, 틀린 말이었다. 오래전부터 바로 오늘이 그의 이름이 불릴 날이었고 그 이름을 부를 자도 정해져 있었다. 
그는 누구도 맞히지 못한 수수께끼의 답이었고 답이 없던 수수께끼의 답이었고 그 답을 말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증명해 줄 자를 위한 답이었다.

- 그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눈을 떴다.

- 비오티는 어떤 단어를 말했다. 레아킨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것이라고?"
"응. 나는 어릴 때부터 글을 쓰면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보여줬는데,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긴 뭐 하지만 아버지는 날 천재라고 생각했어. 딸 하나밖에 없는 팔불출 아버지가 그렇지, 뭐. 어쨌든 어느 날엔가 어떤 책을 보여 주면서 하는 말이, 글을 너무 잘 쓰지 말라는 거야. 그러다가 단어들이 책 속에서 걸어 나올지 모른다고. 그때 처음 아기모스에 대한 전설을 들었지."  
"무슨 책을 보여줬는데?"
"아주 이상한 책이었어. 그 책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닌 단어들이었는데, 방금 내가 말한 단어의 장에 바로 그 수수께끼가 적혀 있었..." 

- 레아킨도 뭔가를 깨닫고 비오티를 바라봤다.
"아기모스의 책이 바로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들 하지 않나?"
비오티는 심하게 떨면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럼, 내가 본 그 책이..."

-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고개가 꺾일 듯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새하얀 고치, 그 질기지만 부드러운 것의 한가운데가 북 찢겼다. 그리고 그 틈으로 소름 끼칠 만큼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의 경계는 무너지지 않았어.'
그녀는 기절할 듯한 광경 속에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없었기에.'

- 고치가 완전히 찢어지면서, 그것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진실로 위대한 아기모스의 유산, 신이 두려워하여 봉인한 세계에 반(反)하는 의지, 결코 실재해서는 안 되며 생명을 가져서도 안 되는 관념.
그는 타락이었다.

- [창조주와 피조물의 감동적인 만남의 순간을 방해할 셈인가, 인간.]
그의 입술이 열리고 듣는 순간 기분이 몹시 이상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인지 자신의 가장 깊고 은밀한 부분을 자극하는 목소리였다.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레아킨은 여전히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이런 말을 자신이 하면 좀 우습겠지만, 상대에게는 아무런 색이 없었다.
 
- "우리도 방금 보고 느꼈기에 당신이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아. 하지만 적어도 이름이라든가, 뭐든 당신을 설명할 만한 게 있을 거 아냐. 당신, 괴물이야?" 
그녀가 묻자 그는 문득 애정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아킨을 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어째서 그대가 나에게 이름을 묻는가. 내가 깨어날 수 있도록 나의 이름을 부른 것이 그대이거늘.]
천천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여전히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계의 의지를 거슬러 흐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의지. 경배한다, 나를 존재하게 해 준 창조주여, 그대의 피조물, 그대의 종, 온갖 부정한 것을 먹고 자란 나의 이름은 타락이다.]

- [그대는 글로써 없던 세상을 존재하게 하지. 마찬가지로 내가 거기 존재한다고 그대의 손으로 쓰기만 하면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다.]
"쓴다고?"
[그래.]
그는 갑자기 어디에서 꺼낸 건지 모를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고서(古書)의 한 페이지인 것처럼 낡고 신비로운 그 종이에는 무언가 쓰여 있었는데, 레아킨은 굳이 읽어 보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기모스의 책.'

-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이름을 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완전히 존재하게 되고 그대도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더 이상의 혼란이 없을 거다.]
비오티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하지만 펜을 드는 순간 레아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쓰지 마라."
"어, 왜?"
"모르겠다. 하지만 쓰지 마라."

 

- [그 인간은 나의 모체다. 그가 가졌던 증오와 분노 그리고 두려움은 훌륭한 자양분이었지. 하지만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난 새끼는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이듯 나도 마찬가지다. 굳이 인간적인 관계를 들먹이자면, 귀스트와 나는 형제가 되겠지. 그런다고 인간적인 애정까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체라니, 그럼 그 녀석 아버지가 죽은 건 탑에서 뛰어내린 게 아니라..."
그러나 레아킨이 그때 손을 들어 말렸다.
"보좌관을 찾는 게 먼저다. 그에게서 같이 들으면 돼."

- "귀스트 아고스토, 네 짓이야?"
레아킨의 등 뒤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출혈이 심해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물 젖은 얼굴로 쓰게 웃고 중얼거렸다.
"하긴, 쓸데없는 질문이지. 여기 너밖에 없는데."

- "책? 그래, 써 줄게."
그러곤 씹어 뱉듯이 덧붙였다.
"이 자식을 죽여준다면."
레아킨은 입을 열었지만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그런 부탁은 할 필요가 없다, 비오티여, 나에게 명령해라. 한 마디만 한다면 저 인간의 생명은 그대로 나락이다.]
비오티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오직 레아킨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꼭... 그래야만 하겠나."
한참 후 레아킨이 망설이듯 말했다. 귀스트에게서 흘러나오는 피 때문에 레아킨의 등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우린 그에게 들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저기 서 있는 존재에 대해 명확히 설명해 줄 수 있는 건 귀스트 밖에 없어. 네 분노는 이해하지만, 그를 죽인다고 해서 라흐가 살아 돌아오지는..."
"그만둬! 그 차분하고 이성적인 소리 좀 집어치워. 난 당신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생각하는 머리 따위, 사람 같지 않은 심장은 없단 말이야!"

- "그걸 느낄 수나 있어? 이 빌어먹을 작자야, 내가 죽어도 그렇게 침착한 얼굴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중얼거릴 거야? 아, 괜한 것을 물었네. 당신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고 했지. 부모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누군들 사랑할 수 있겠어? 불쌍하던 당신의 그런 점이 이제는 치가 떨리려고 해!"
레아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어지럽고 피곤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자신이 제대로 읽은 것이라면 그건 경멸과 증오의 표정이었으니까.
가슴 깊은 곳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이것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느끼는 척만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고 사랑하는 척으로는 역시 사랑할 수가 없는 걸까? 지금 홍수처럼 밀려오는 이 모든 것들도 다 거짓에 불과하단 말인가.

- "... 알았다."
머리가 시키고 있을 뿐,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거짓이라면.

"역시 안 되는가 보다. 그대로도 불가능한가 보다."
이 아픔 역시 거짓일 테고.
"그대의 책을 보고 흘린 눈물 또한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이 절망 역시 가짜일 테지.
"나는 쿠세로 돌아가겠다. 곧 라노프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이곳으로 올 거다. 그대가 바라던 대로, 거기 누워 있는 그가 바라던 대로 라노프는 독립하겠지."

- "그러니까 아마,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목이 무언가로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아팠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레아킨은 그녀가 이쪽을 봐줬으면 했다. 다시 볼 수 없을 그 눈을,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다는 그러나 자신은 결코 볼 수 없는 깊은 바다색의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나라는 독자가 하나쯤 있었다고. 내가 그대에게 선물로 준 책, 그 책은... 진심으로 내 생애 최고의 책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 "하긴, 나라는 사람이 쓰는 진심이라는 말도 그대는 믿을 수 없겠지만."
그리고 걸음을 옮기는 동안 눈앞의 모든 것이 흐려졌다. 레아킨은 볼 수 있던 색 중 또 하나를 잃은 것은 아닐지 의심했다. 오히려 이곳에 와서 그나마 희미하게 느낄 수 있던 감정마저 모두 잃은 것은 아닌지 회의했다.

 

- "책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군."
"저 또한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유언을 들으면서 미친 짓이라고 말렸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셨습니다. 그저 자신을 죽은 탑 가장 깊숙한 곳에 가둬 두라고 하신 뒤 그 종이를 삼키셨지요. 저는 결국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며칠 후면 풀어 달라고 하실 게 분명했으니까요."
그의 웃음은 거기서 사라졌다.
"하지만 며칠 후 들어가 보니... 그분은 더 이상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시더군요."

-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눈으로 직접 그런 모습을 봤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매일 먹이를 주고 또 주었지요. 그 먹이는..."
그는 숨을 고른 다음 말했다.
"탑 앞 광장에서 화형 당한 모든 사람들입니다."
레아킨은 눈살을 찌푸렸다.
"죽은 자들의 한, 고통, 억울함, 원통함, 혼. 유족들의 슬픔, 분노, 눈물, 증오,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때까지 결코 꺼지지 않던 불길과 광기... 그 모든 걸 탑 아래 가장 깊은 곳에서 그것이 먹고 자란 겁니다. 구조를 생각해 보시면 금세 이해하시겠지만 심판관님이 갇혀 있던 그 방은 광장 바로 아래에 있지요."
레아킨은 잠깐 떠올려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 방만 너무 깊은 곳에 있다 싶었다.
"관념이 관념을 먹고 자란 것이로군. 내 눈으로 직접 그것이 탄생하는 순간을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겠지만, 진실로 이 땅에는 타락이 태어나 걸어 다니고 있다."

- "쓴다고?"
기시감처럼 레아킨은 타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비오티가 그 페이지에 이름을 쓰기만 하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이유도 모르면서 그때 레아킨은 비오티를 말렸었다.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지?"
"다행이군요. 그가 내민 종이에 이름을 쓰는 순간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타락도 세계의 거부를 이겨 내고 이 지상 위에 존재할 수 있고 타락을 깨운 저 또한 타락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 "네, 단지 쓰기만 하면 그 종이는 아기모스의 책의 일부니까요. 권능 또한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써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을 받아들이는 건 곧 인간으로서의 모든 걸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 비오티는 칼라이조가 그렇게 해 주고 있다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지나가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신기할 만큼 마음이 차분하고 멍했다. 나른한 것도 같았다.

'참 대단한 사람이야.' 
그녀는 그 순간 엉뚱하게도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은근히 경멸하고 있던 그 코케트였다.

라흐의 죽음을 들은 카이라는 혼절했고 몇 시간이 지난 뒤 깨어났다. 하지만 깨어나자마자 울거나 부정하는 대신 차분히 자신의 옷과 머리를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본 비오티는 목 끝까지 욕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어 한 첫마디를 들었을 때 그것을 도로 삼켰다. 
"지금 쿠세의 군부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나뿐이야."

-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느낄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을 때 그가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건 절대 아무것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느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한 게 누군데. 믿으라고, 도와주겠다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

- "잠깐 조용한 곳으로 가. 할 이야기가 있어."
그녀는 영문을 모르는 채로 칼라이조와 함께 그를 따라갔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나오자 로즈웰은 주변을 살피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계속 신경이 쓰여서 말이야. 비오티, 너에겐 괴로운 기억이겠지만 처음 라흐가 죽어 있던 방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릴 수 있겠어?"

 

- 레아킨은 뭔가 떠올린 듯 말을 바꿔 다시 말했다.

"오늘도 참 아름답군. 보고 싶었다."
비오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아무튼 가르쳐 준 건 잘 따라 하네."
"그러게 말이다. 이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데."

그의 담담한 말에 비오티는 가슴 깊은 곳이 쿡 찔리는 기분을 느꼈다.

- "상관없다. 하지만 보고 싶었다는 말은 진심이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비오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위에 있던 칼라이조와 로즈웰은 동시에 거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귀스트는 그때 타락과 시선이 마주쳤다. 타락은 묘하게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 "돌아가서도 포기하지 않을 거지?"
비오티가 레아킨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레아킨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묻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바람, 그거 말이야."
그녀가 어렵게 말을 잇자 레아킨은 가볍게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참 잔인하기도 하군. 내게 희망을 주더니 그것을 빼앗아 짓밟고, 이제는 다시 돌려주려 하고 있어. 그만둬라. 나는 더 이상 그걸 바라지 않아."
"내가 했던 말은 잊어버려. 그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어. 알잖아. 나는 죽은 그 녀석을 안고 있었다고. 하지만... 미안해. 그렇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어."
"괜찮다. 그리고 상관없어. 이대로도."

 

-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을 그리워하는 남자가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자신조차 그럴 수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내디뎠다. 어디로 향할지도,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 시작을." 
그녀가 갑자기 쏟아 낸 음성에 모두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특히 레아킨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눈길로 그녀를 봤다. 하지만 비오티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지금 막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첫 문장을 써 봤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 "당신이 허락한다면 마지막 문장도 써 주고 싶어. 우리가 약속한 대로, 당신을 위한 책을 쓸게."
 
- "보좌관, 남아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레아킨의 질문에 귀스트는 이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볼일이 막 끝나서요."

- 그녀는 레아킨의 기척을 느끼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내 고향이 좋아. 좋은 곳이야."
"동감한다."
"정말?"
"그런 책들이 나오는 곳이니까."
비오티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부터 그립네. 내 나라, 내 땅, 내 보랏빛 밤, 내 친구들."

- "후회하고 있나?”
레아킨이 어렵게 물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짓을 자주 벌이곤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후회한 적은 없어. 결국 맨 처음 느낀 감정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건지도 모르지. 나는 당신을 따라가기로 한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약속한 이상 지킬게." 

- 새벽 별이 이쪽 하늘 끝에서부터 저쪽 하늘 끝까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사막의 신기루 탓인지 별은 마치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유유히 흔들렸고 그 모습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꼭 별의 비라도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난 작가 자격이 없나 봐. 저걸 도대체 어떻게 표현하면 내가 느끼는 이걸 읽는 사람도 그대로 느낄까?"
레아킨은 말없이 웃었다. 그는 조약돌을 모아 바람을 가리고 조그맣게 불까지 피워 놓고 앉아 있었다. 비오티는 자신도 모르게 고인 눈물을 닦아 내고 그 곁에 앉았다. 아련하고 안타까운 침묵이 잠시 흘렀다.

- "내가 라노프어를 더 열심히 배우겠다."
모닥불이 타닥 하는 소리를 냈을 때 레아킨이 문득 입을 열었다. 비오티는 그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갑자기 왜 당신은 이미 억양까지도 제법 우리나라 사람 같아."
"고민해 봤는데 역시 그렇게밖에 모르겠다. 어리석다고 해도 좋아."
"... 정정할게. 분명히 내 나라 말인데 이해를 못 하겠어. 대체 무슨 소리야?"

- "지금껏 나는 스스로를 강하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오늘 저 관념으로부터 그대를 지켜 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러한 생각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또... 스스로에게 몹시 실망했다. 그래서 앞으로 라노프어를 더 잘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비오티는 헛웃음을 삼켰다. '타락은 역시 라노프어를 두려워하고 있었군. 내 짐작이 맞았어!' 이렇게 대꾸해 줄까 하다가 레아킨이 워낙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그만두었다. 대신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지만 그래도 설령, 또 한 번 이런 비극이 일어나 그대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대에게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겠다. 보지 않고도 그것을 그릴 수 있도록." 

- 비오티는 고민했고, 거듭 생각했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 남자를 떠올리면 항상 까닭 모를 안타까움이 먼저 솟았다.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그의 결함을 안아 주고 싶고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닌 모성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어머니를 부르는 것과 같이 어느 날엔가 이 남자가 마침내 모든 걸 느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그에게뿐 아니라 비오티에게도 아주 감동적인 날이 될 터였다.
"그렇다면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줘."
누군가 자신의 목소리를 닮은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 불쌍한 남자를 닮은 사람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무언가 별을 닮은 것은 저 먼 곳에서 반짝거렸다...

-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사랑에 빠진 쿠세인은 결코 냉정하지도 무심하지도 않다. 오히려 지나치리만큼 감정에 몰두하는 까닭에 그들 민족 특유의 성질은 과도한 애정 표현과 지나친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로부터 며칠간 귀스트는 눈앞에서 그 표본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 "여길 자르면 이렇게 즙이 나오지. 이건 사막 한가운데서만 자라는데 쿠세 땅에서도 보기 힘든 식물이야. 오직 행운을 가진 자만이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지."
"그렇게 귀한 거야? 그럼 혼자 먹기 좀 미안한데 나눠 먹자."

"난 많이 먹어 봤으니 괜찮다. 보좌관도 별로 생각이 없다는 군. 저 관념덩어리에게는 줄 필요 없으니 그대 혼자 먹어라."
"... 태제 전하, 저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귀스트는 항의해 봤지만 레아킨에 의해 간단히 묵살당했다. 비오티는 킬킬거리며 그에게 뿌리 한쪽을 내밀었지만 귀스트도 자존심이 있는지라 고개를 돌려 거절했다. 

- [인간들은 이래서 참 사랑스럽단 말이지. 머리와 심장이 만들어 내는 이상 상태의 합작품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신봉하지.]

"하지만 그 합작품 때문에 인간이 여기까지 온 거죠."
[그리고 그 합작품 때문에 언젠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갈걸.]
뼈가 있는 말이라고 귀스트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런 것은 그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레아킨으로 하여금 황제가 있는 하늘궁전으로 가도록 만들 수 있을까, 그것만이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 "
그대는 사랑이 그 사람을 껴안고 죽어 버리고 싶은 것이라 했다."
레아킨은 기도문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

- 다시 한번 세계가 박동했다. 시간은 흐르는 법을 잊고 바람은 부는 법을 잊었으며 빛은 닳아 없어지고 땅이 범람했다. 세계가 찢어져 무저갱의 틈에서 억겁의 밤이 흘러나와 모든 것을 어둠으로, 어둠으로 덮었다. 
모든 부정 가운데 가장 짙고 농밀한 근본, 신조차도 사할 수 없는 악 중의 악이 마침내 그 존재성을 증명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무언가가 거꾸로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아주 힘차고 비열한 역동(力動)이었다.

- "어쩔 수 있나. 창조주와 주인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라야지."

"이해하지 못하겠군."
귀스트의 말에 타락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튼 인간들은 끝없이 이기적이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니까."

- 귀스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야말로 존재 자체처럼 모순이군. 그렇게 소중히 생각한다면서 시력이니 뭐니 그들로부터 빼앗아 갈 기회만 노리고 있나?"

"그건 지극히 당연한 거지. 사랑하는 이의 일부분을 갖는다는 건 극도의 만족감을 가져다준다고. 사랑할수록, 상대에게 그것이 소중할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거지. 너희 인간들은 사랑이 이거니 저거니 떠들어 대지만, 정말 궁극적인 사랑이란 게 뭔지 아나? 먹어서 소유하는 거야."
 
- 타락은 낮게 웃었다.
"무생물일 경우에 타락한다는 것은 부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부서지는 것. 하지만 생물의 경우에는 극도로 서로를, 혹은 자기 자신을 갈망하며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스스로를 구겨 넣는 것. 어느 쪽이든 가장 하찮은 미립자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지. 내 본질이란 결국 그런 거고." 

- 그런데 어딘지 이상했다. 이게 방금 전의 그 주사위가 맞단 말인가?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분명히...
"아기모스는 진정으로 위대했으며 스스로를 작가라고 말하는 것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의 책은 정녕 대단해서 단어들이 생명을 얻고 걸어 나갔다고 하지. 그것을 세계가 용납하지 않았기에 그는 모든 단어들을 불러들여 책을 봉인했지만 단 하나의 단어만이 돌아오지 않았다." 
황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레아킨은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왜 그가 지금 귀스트가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 남아 가장 위대한 인간들만의 손을 거쳐 존재해 온 아기모스의 유일한 유산이다."

- 작은 정육각형의 물건에서 유령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레아킨은 기억해 냈다. 이것은 결코 반전이 나오지 않는다던 주사위. 타락의 기억 속에서 반으로 쪼개졌으나 어느새 다시 본래의 형태로 돌아가 얌전히 형의 손에 잡히던 그것.

- "유일하게 창조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건..."

황제가 그 이름과 더없이 잘 맞아떨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바로 '오만'이다."
 
- [정확히는 사자한과의 약속에 따라 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사자한에게 그걸 부탁한 건 너 자신이 맞는다.]

레아킨은 무언가 그를 지탱해 준 것을 잃어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내가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눈앞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는 모습을 보았으니 어린 네가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느냐. 내가 너를 데리고 나왔을 때 네가 울면서 부탁했다. 자기가 본 것을 잊게 해 달라고, 이 고통을 없애달라고.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의 부탁을 내가 어찌 거절할 수 있었겠느냐."

- 형제의 따스한 음성을 들으면서 레아킨은 온몸을 찌르는 듯 날카로운 전율을 느꼈다.
"그건, 정말로 그렇게 해 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어. 괴로움에 시달리는 어린아이가 무슨 말인들 못 하지? 맙소사, 당신은 그게 정말로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나는 내 일부분을 희생하면서까지 그것을 들어줬다. 그런데 보답이 고작 이것이란 말이냐, 레아킨?"

- 당연히 주사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라이조는 심각한 얼굴로 비오티를 바라보았다.
"저기, 비오티 괜찮아?"
"괜찮지 않아! 젠장, 왜 자꾸 이런 게 따라붙냐고!" 

- 비오티 필라프는 서른아홉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기까지 아홉 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국내뿐 아니라 국외의 독자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칼라이조 로프너와 평생 깊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녀가 죽은 뒤로 일흔 살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칼라이조 로프너 또한 그녀만을 마음속의 연인으로 두고 살았다.

- 비오티 사후 1년이 지나 우연히 그녀의 유품에서 미공개작이었던 원고가 한 편 발견되는데, 제목은 없고 다만 누군가에게 바친다는 문구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유품의 주인이었던 칼라이조 로프너는 책으로 발간하기를 거부하고 얼마 뒤 잠시 쿠세에 다녀오는데, 이 때문에 헌사의 주인이 그녀가 젊었던 시절 염문을 일으켰던 쿠세의 전 태제가 아닌가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쿠세까지 갔던 한 신문사의 기자는 돌아와 조용히 이렇게 전했다. 
"전 황제의 무덤 옆에 태제의 무덤이 있고, 거기 정말로 그 원고가 있더군요. 하지만 손을 댈 수가 없었어요. 그냥, 왠지 좀 그렇더군요.

- 시체는, 아니, 회백색의 무언가는 관의 뚜껑을 좀 더 넓게 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혼자서만 다른 물리 법칙을 적용받는 것처럼 땅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그제야 사자한은 상대가 레아킨과 키가 비슷한 작은 소년의 형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너는 무엇이냐?"
시체도 아니고, 선조는 더더욱 아니라는 걸 깨달은 사자한이 물었다. 소년은 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돌렸으나 이상하게도 사자한 쪽을 바라보지 않고 허공에 시선을 못 박은 채 물었다.
[아기모스는 죽었나?]

- [세상은 아직 흐르고 있나?]
그 질문은 퍽 형이상학적인 것이기에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했다.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계절이 끊임없이 바뀌며 사람들은 태어나거나 죽으니, 세상이 흐른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 [여길 벗어나면 매 순간 세상의 흐름에 거부당하고 떠밀리겠군. 그 고통을 견딜 만큼 내가 나여야 할 텐데.]
사자한은 소년이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희한한 존재감 때문인지 무슨 말을 해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 소년은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말이 통하는 존재라는 걸 깨달아서인지 어느 정도 두려움이 가신 사자한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 '너는 그런 아이였는데, 분명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사자한은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 어떻게든 동생을 붙잡아 두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보고 가는 모습이 그 아이라면 좋을 테니까.

- 조금만 시간을 주었더라면, 자신의 말을 들으려고만 했다면 모든 걸 설명했을 거다. 그럼 동생은 틀림없이 이해하고 용서했을 텐데. 어릴 적 모래성을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려도 늘 자신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자신이 했던 행동들은 충분히 애정을 받지 못해 삐뚤어진 아이의 심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래도 날 미워하지 않을 테냐? 이래도? 불안했기에 의심했고 두려웠기에 공격적이었다. 어차피 레아킨 또한 언젠가 자신을 배신할 거라고 믿었으니까. 

- 아, 그러나... 이제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게 사라지고 희미해져 간다. 남는 건 두려움뿐. 죽음 뒤에 자신을 먹을 존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게 이처럼 무서운 일인지 닥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 그러나 적어도 고통이 끝난 뒤에는 동생과 재회할 수 있을 터였다. 쿠세인들은 죽음 뒤에 고요하고 긴 사막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곳을 건너야만 풍요로운 안식의 땅에 다다를 수 있다고. 그렇다면 그는 그 너머에서 동생을 기다릴 것이다.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건너오기를 바라며, 언제고 동생이 모래 언덕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기를 바라며.

- 위대한 황제가 되고자 했던 이는 그렇게 눈을 감고 그 위를 자그마한 그림자가 스며들듯 덮는다. 무언가 바삭하고 깨무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내 사나운 모래바람이 은밀한 식육의 현장을 감춘다. 

- 그리 길지 않은 식사가 끝나고 몸을 일으킨 존재는 만족할 만한 맛이었던가 자문한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 자리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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