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일루젼 2012. 5.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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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 8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민음사

298쪽 | 210*148mm (A5) | ISBN : 9788937401763

 1994-09-01 | 원제 Ficciones

 

 

 

1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알모따심에로의 접근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원형의 폐허들
바빌로니아의 복권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바벨의 도서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2부 기교들

기억의 천재 푸네스
칼의 형상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
죽음과 나침반
비밀의 기적
유다에 관한 세 가지 다른 이야기

불사조 교파
남부

 

 

처음 만난 '보르헤스'는 조금 버거웠다. 

그의 유머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내가 가진 배경 지식이 너무 얕았기 때문이다. 

수시로 아래에 달린 각주를 오가며 읽어야 했던 그의 글은 제 맛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내가 마음에 들어한 글들은 뽑아놓고보니 각주가 거의 필요없는 단편들이다)  

그의 문학적인 장치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바라볼 역량이 부족해, 다소 헉헉 거리며 읽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하지만 만족스럽게 소화하지 못했음에도 보르헤스의 단편들은 재미있었다.

순환과 미로에 대한 그의 집착(이라고 생각한다)에 가까운 애정은 신기하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

당대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깊은 고찰이라거나, 패러렐로 연결될 듯한 상상력. 그리고 적절한 때에 언급하는 인물과 도서, 기사 (비록 그 대부분이 허구일지라도) 에 대한 깊은 지식과 의미심장함을 조성하는 능력에 대해 경탄했다.

 

나는 그에게서 에코의 느낌을 조금 느꼈는데, 그가 오스카 와일드의 글을 옮긴 적이 있다는 건 내게는 좀 충격이었다. (다르잖아ㅠ)

특히 좋았거나 인상 깊었던 글에는 목차에 밑줄을 쳐놓았는데, 개인적으로 '칼의 형상' 같은 구조는 지금은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싶지만...

당시에는 충격적인 반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점이 모조리 무너진 (혹은 부러 흐트러트린) 글이 아니라면 초반부터 화자가 어느 쪽일지는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그런 것이 구조적인 완결성인가?)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글은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였다.
2부는 1부에 비해서는 상당히 수월하게 읽었다. (각주를 덜 볼 수 있기도 해서였지만)

윌리엄 제임스와 드 퀸시는 상당히 반가웠다. 흠.

 

보르헤스의 글은 시간을 두고 되풀이해 읽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그만큼 잘 느끼게 해줄 작가는 드물 것 같다.

 

 

 

 

[발췌]

 

 

# 쾌인은 늘 독자란 이미 멸종된 종족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간에 (그는 이렇게 이유를 들었다) 작가가 아닌 유럽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말이네.>

그는 또한 문학이 제공하고 있는 많은 행복 중에서 가장 최고의 것은 창조성이라고 단언하곤 했다. 왜냐하면 모두가 이러한 행복을 누릴 능력이 없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의 그림자로만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쾌인은 대중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불완전한 작가들>을 위해 『선언』이라는 책을 통해 여덟 개의 이야기를 제시했다. 이들 하나하나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끝맺음을 해놓지 않아 하나의 훌륭한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도록 예시하거나 약속하고 있다. 

 

- 하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 (각주) 보르헤스가 자신의 연구가인 바레네체아에게 한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이 자신이 썼던 작품 중 가장 쉽게 씌어졌던 작품이라고 한다. 그는 왜 그렇게 쉽게 쓰여졌는가에 대한 이유를 매우 의미심장하고 어려운 말로 비유한다.

<이 작품의 모든 것이 마치 이미 다른 사람이 그것을 꿈꾸었던 것처럼 내게 다가왔다.>

- 원형의 폐허들

 

 

# 그는 불길의 날개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불길은 그의 살갗 속을 파고들지 못했다. 불길은 그를 할퀴고, 그를 집어삼켰지만 그는 불의 열기를 느끼지도 못했고, 타지도 않았다. 안도감과 함께, 치욕감과 함께, 두려움과 함께 그는 자신 또한 자신의 아들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꿈꾸어진 하나의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원형의 폐허들

 

 

 

# <모든 것에 대해 ㅡ 나는 전혀 떨지 않고 말했다 ㅡ 감사를 드리고, 취팽의 정원을 복원시켜 준 것에 대해 치하를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 그러하지는 않겠지요 ㅡ 그가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렸다ㅡ. 시간은 셀 수 없는 미래들을 향해 영원히 갈라지지요. 그 시간들 중의 하나에서 나는 당신의 적이지요.>

....

<미래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요ㅡ나는 대답했다ㅡ. 그렇지만 현재의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그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볼 수 있을까요?>

알버트가 일어섰다. 우뚝 선 채 그가 높은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그 동안 그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이미 리볼버를 꺼내들고 있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총을 발사했다. 알버트는 단 한 마디의 신음도 내뱉지 않은 채 풀썩 쓰러졌다.

.....

나의 대장은 이 암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전쟁의 와중에서) 내가 알버트라는 이름의 도시를 알려야 하는데 그와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그것을 알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끝없는 참회와 피로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으리라).

-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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