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정서경, 박찬욱] 헤어질 결심 각본

일루젼 2023. 1. 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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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서경 / 박찬욱
출판 : 을유문화사 
출간 : 2022.08.05 


       

기름산의 이야기는 염수 일화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낮에만 떠오르는 산, 걸어 다니는 산 등은 설화집에서 접했던 기억이 나는데 정확한 명칭이나 출전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어도는 아니었는데, 한중 설화 각각에 존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감독과 작가가 '호미산'을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실제 <산해경>이나 '공주산(지명이 아닌 명칭)'과 일치하지 않기에 허구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혹은 호미산 자체에 설화가 풍부하기에 그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였을 수도, 그리고 서래와 외할아버지와의 관계성을 암시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의병 활동은, 사람이 사람의 목을 물어뜯는 행위는, 그것이 '목적성'을 가지고 있을 때는 칭송받을 일이 되는가?

그렇다면 생존을 위한 살생과 그렇지 않은 살생의 경계는 어디에서 나뉘어지는가? 살생의 대상은 어디에서부터 허용되는가?

 

계봉석에게는 허락되었고 송서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헤어질 결심>은 호평이 많아 -나와 닿아있는 루트에서는- 꼭 보고 싶었는데, 진득하게 앉아 영화를 볼 시간이 통 나지 않았다. 해서 무작정 각본부터 읽을까 하다가 아무래도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잠과 이것저것을 포기하고 관람했다. 그리고, 그럴 가치가 충분한 영화였다. 무녀가 아닌 마님으로 등장한다던가, 구도나 대사 등 각본과 영화가 미묘하게 달라진 부분들마저 '의도가 느껴져서' 감탄했다. 다시금 곱씹을수록 매혹된다. 

 

서래와 해준과 까마귀와 고양이. 이 구도는 두 사람의 감정선 뿐 아니라 서래의 선택과도 이어지는 큰 흐름이다. 까마귀와 고양이가 경우에 따라 서로에게 포식자가 될 수 있음 또한 포함해서. 

 

또 해준의 아내 정안을 원전과 연결시켜둔 것도, 해준이 '붕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개인적으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시각과 '언제고 터질 수 있는 위험'이 공존하고 있는 견고함은 어쩐지 무너뜨려보고 싶은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자극한다. 처음 서래에게 해준은 그런 정도의 무게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붕괴'되었을 때, 모든 것은 다 함께 멜트다운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영원한 미제로 '각인'되겠다는 그녀의 말은 해준의 '바다에 버려요'와 동치되는 표현이 아닐까. 

 

송서래는 기름산이었을까 구더기였을까. 

 

 


 

오랜만에 <산해경>을 다시 펼쳤다. 구절을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꼼꼼하게 대조해보았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 같다.

 

<헤어질 결심>의 영화도 각본도 모두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에, 표지에 실린 산해경 필사 그림을 보고 문장들을 따내고 <산해경>에서 찾았다. 어디로부터 어느 방향으로 몇 리 떨어진- 은 <산해경> 자체에 수없이 등장하는 표현이므로 어느 산이 어떤 설명과 이어지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저 재미로 함께 해주신다면 좋겠다.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仍进海里巴。扱到根深根深的地方, 誰也我不到。

 

 

 

 

<헤어질 결심> 중 산해경

 

 

 

다시 동쪽으로 이백오십 리를 가면 기름산이 있는데 이 산의 봉우리는 깊이 감추어져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다. 여기 사는 구더기는 길이가 벽 년 자란 소나무와 같고 뱃바닥에서 끈적끈적한 것이 나와 미끄러지지 않고 산을 오른다. 주름이 천 개 접힌 흰 몸은 앞뒤를 분간하기 힘드나 사람들은 긴 대롱을 내미는 주둥이를 보고 어느 쪽으로 달아날지 정한다. 구더기가 사람을 만나면 기다란 몸으로 휘감고 대롱을 꽂아 피와 골을 빨아먹으므로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 벌레가 떨어져 죽으면 터진 머리에서 이만 마리 황금색 파리떼가 날아올라 비로소 세상을 향해 흩어진다.

 

조선은 열양하의 동쪽, 황해의 북쪽, 분련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하의 동쪽 바닷가에는 작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신비로운 산이 있다. 이 산은 낮에 봉우리 속에 고개를 숙여 웅크리고 있다가 저녁이 되면 고개를 들고 봉우리 사이를 걸어 다닌다. 이 산은 가끔씩 해변 한가운데서 우뚝 솟은 채 구름을 뚫고 나타나곤 한다. 그곳에는 선인의 궁전이 있는데 모두 금과 은으로 만든 것이다. 이 산은 해가 뜨면 산에 살던 새나 짐승들이 나타나곤 한다. 다시 해가 가라 앉으면 산속 깊숙이 파고들어 모두가 잠들고 작은 산마저 모습을 감춘다. 이것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늘 이야기하던 신기루 섬이다.  

 

다시 남쪽으로 오백리를 가면 닿는 곳이 우산이다. 남쪽 지방 세번째 산줄기의 첫머리에 있는 산을 구산이라고 ...

 

다시 동쪽으로 삼백 리를 가면 부엉산이 있다. 이곳에는 보름달을 자신의 뿔로 받쳐 계곡물을 빛나게 하는 물사슴이 있다. 이를 처음 본 사람들은 겁에 질려 어두운 산속으로 도망가 길을 잃어버린다. 이 산은 너무 조용해서 나무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데, 사람이 이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면 사라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깊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머물기 시작한다. 걸어 다니던 가시나무들은 사람을 긁어가매 정신까지 긁어먹더니 다시 그곳에는 보름달이 내려앉는 날 물사슴이 계곡을 빛나게 하고 검은 계곡 ... 

 

다시 남쪽으로 삼백 리를 가면 호미산이 있는데, 이 산은 사람이 오지 않을 땐 걸어 다니다가 사람이 알아채면 그대로 주저앉아 평범한 산이 된다

- 공주산(公州山) 외- 

 

"특이한 나무 한 가지 있는데, 그 모습이 벼나 고량 같이 곡식이 열리는 풀처럼 생겼다. 그렇지만 나무줄기를 뜯어보면 속이 붉고 줄기에서 나오는 즙은 칠처럼 까맣다. 이 즙은 보리로 만든 물엿처럼 달콤한데 그것을 먹으면 ... 이 나무 이름을 백구라 한다. 그것으로 옥을 물들이면 옥이 눈을 찌르듯 한 빛을 발하게 된다." 

- 윤자산(侖者山), 백구 - 

 

백구가 있는 곳은 북쪽으로 제비산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며 북쪽에서 몰아치는 강한 바람에 몸이 덜덜 떨린다. 또 이 산에 사는 신은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머리가 둘이다. 백구의 즙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두 번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허락 없이 가져간 사람은 벌들이 쫓아와 괴롭히고 살고 있는 마을에 농작물들이 벌레로 가득해져 먹을 것이 없게 된다.

- 호저산(縞羝山) 중 평봉산(平逢山), 교충(嬌蟲) 각색- 

 

산 꼭대기에는 하얀 흙이 가득한 작은 바위가 있다. 

- 총롱산(蔥聾山) 추정 - 

 

"이 산에는 신녀가 사는데 피부가 얼음처럼 희고 처녀처럼 매혹적이다. 비룡을 몰아 사해의 밖으로 왕래한다."

- 장자, <소요유 逍遙遊>, 고야산 -  

 

"바둑알 만드는 납작한 박석으로 멀리서 보면 들쭉날쭉한 ... 능선 안에서 간혹 ..."

- 칠오산(漆吳山), 박석 - 

 

"밤에 순찰 도는 순라가 시간을 알려주며 두드리는 딱따기 소리와 비슷하다."
- 대함산(大咸山), 장사(長蛇) -

 


 

- 서래 : (진심으로 궁금해서) 한국은 하루만 연락이 안 돼도 신고하나요?

(해준, 뭐라고 답하면 좋을까 잠깐 생각하는데) 남편이 산에서 어떤 모습이었나요? 


서래를 똑바로 보며 그녀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해준.

해준 : 말씀으로 해 드릴까요, 사진을 보시겠어요?

서래 : 말씀.
(왠지 조금 실망한 해준이 말씀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갑자기)

사진.

해준 : (반가워하면서도 말로는) 눈 뜬 채 발견됐는데... 볼 수 있으시겠어요?

미세하게 끄덕. 그 단호함에 깊은 인상을 받는 해준, 태블릿 PC를 돌려서 절벽 아래 도수의 모습 보여 준다.

 

 

...

 

 

- 해준 : 너 아니지?
(놀라는 지구)
싸워 보니까 넌 사람 못 죽이겠더라... 범이, 산오가 죽였지? 돈은 둘이 나눠 갖고. 

표정이 일그러지는 지구, 서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바닥에 흩어진 종이 중에 산오의 사진을 발견하고 유심히 본다. 

 

 

...

 

 

- 무녀 : 죽음은 포기가 아닙니다, 선생님. 죽음은 용맹한 행동입니다.

 

류선생 : 아니다, 소화야... 아니야... 진정 용맹한 행동은 사랑이야. 

소파에 누워 눈 감은 서래의 얼굴에 번쩍이는 TV 불빛. 잠든 것 같았던 서래, 조용히 중얼거리며 대사를 따라 한다.

류선생/서래 : 사랑은... 그 외 다른 모든 것의 포기니라.

 

 

...

 

 

- 돌아온 해준, 까마귀 깃털을 만지작거리면서 스마트폰의 통역기 앱을 돌려 아까 녹음한 서래의 말을 해석한다.

 

서래 : 당신이 먹으려고 살상하는 건 내가 뭐라고 못하죠. 근데 말이야, 내가 밥 주니까 고맙다고 선물을 하는 거라면 그럼 됐어. 진짜로.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 해준, 심장이 찌르르.

 

 

...

 

 

- 서래 : (중국어로) ... 다시 남쪽으로 삼백 리를 가면 호미산이라는 곳인데 이 산은 사람이 보지 않을 땐 걸어 다니다가 사람이 알아채면 그대로 주저앉아 평범한 산이 된다.

... 又南三百里曰鋤头之山。其超人不备, 多行走, 而人若覺知, 则就地而坐, 成普通一山也。 

 

서래 손에 들린 책 몇십 년 묵은 낡은 종이에, 붓으로 직접 쓴 제목 - <山海經> 그 아래로 '桂俸石’.

 

 

... 

 

 

- 서래 : 엄마, 난 엄마를 전문적으로 돌보려고 간호사가 됐는데 엄마는, 간호사니까 전문적으로 죽여 달라고 하네?

妈, 你知道我是想专业地照顾你才去当护士。 可你现在却说, 就因为我是护士, 所以让我专业地把你给杀了?  

 

 

...

 

 

- 서래 : 이 산은 너무 조용해서 나무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데 사람이 이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면 사라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其山板静溢, 可阐树木生长之音。人若入此树林之中, 即消失, 永不归来。

 

 

...

 

 

- 두리번거리며 집안 냄새를 맡는 해준, 음반장 한구석에 세워 둔 '카발란' 위스키 병을 본다. 화병에 꽃 대신 꽂힌 까치와 까마귀 깃털 서너 개도. 서래, 쿠션을 들추더니 종이 뭉치를 꺼내 온다. 하나같이 빨간 편지봉투들. 열어 보면 또 모조리 빨간 편지지 - 흰 종이에 프린트한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오려 붙였다. 

 

 

...

 

 

- 수완 : 물론 엄마를 죽인 게 남편 죽인 증거는 아니죠. 근데 형 이런 말 한 적 있잖아요. 살인은 흡연과 같아서... 처음만 어렵다.

 

 

...

 

 

- 눈 흘기는 서래, 거실로 간다. 커튼이 드리워진 벽과 마주해서 책상이 놓였고 그 위에 서류와 책들, 아이패드, 헤드폰, 그리고 까마귀 깃털 하나. 책상 옆에는 프린터. 호기심 많은 서래, 책을 하나하나 살핀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사이에서 초보자를 위한 중국어 교재를 발견하고 어디까지 공부했나 살펴본다. 커튼도 살짝 들춰 본다.  

 

 

... 

 

 

- 서래 : 개미가 사람 먹어요?

해준 : 어, 그건 이제 떼야하는데. (서래 봤다가 웍 봤다가, 볶음밥을 뒤적이며) 맨 먼저 금파리가 나타나요. 낮이건 밤이건 십 분 안에 도착해요. 피하고 분비물을 먹은 다음에 상처나 인체의 모든 구멍에 알을 낳아요. 거기서 구더기가 나오면 그걸 먹으려고 개미가 모여요. 또 그다음엔 딱정벌레 하고 말벌도, 그것들이 사람을 나눠 먹습니다.   

 

 

...


 

- 해준 : 그러게... 그런 놈이 감옥 갈 거 각오하고 사람을 때렸네...?

서래 : 죽을 만큼 좋아한 여자네?

서류에 붙은 '오가인'이라는 여자의 사진을 함께 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해준.

해준 : 죽기보다 감옥을 무서워하는 놈이 살인을 이백만 원 때문에? 지구하고 나눠 가졌으니까 백만 원인데? 이 오가인, 먼 데 사는데? 경기도서 미용실 하는데? 게다가 결혼도 했는데? 

서래 :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서래를 돌아보는 해준, 눈 피하지 않는 서래. 마주치자 무안해져서 허공으로 눈길을 올리는 해준.

 

 

...

 

 

- 해준 : 산오야... 일단 내려가자... 가서 형하고...

산오 : 아, 됐고... 가인이한테, 너때매 고생깨나 했지만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요렇게 좀 전해 주세요.

(여자 비명에 잠깐 고개 돌려 지상을 내려다보더니) 안 전해 주셔도 되겠네.

 

 

...

 

 

- 서래 : 눈 감아요.

해준 : (눈 감았다가 이내 다시 뜨더니) 정말 내 심장이 갖고 싶어요? 그걸로 뭐 하게요?

무슨 소리인가 잠깐 생각하다 깨닫고 웃는 서래.

서래 :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 아니라.

(빙긋 웃는 해준의 눈을 손으로 감겨 주며) 내 숨소리를 들어요, 내 숨에 당신 숨을 맞춰요.

몸을 기울여 해준 가까이 가는 서래, 눈 감는다. 서래의 숨소리 듣는 해준. 어느 순간 둘의 숨 쉬는 템포가 딱 맞는다.

 

서래 :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내려가요. 점점 내려가요. 당신은 해파리예요. 눈도 코도 없어요, 생각도 없어요.

(중국어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아요. 아무 감정도 없어요. 물을 밀어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밀어내요, 나한테. 내가 다 가지고 갈게요, 당신한텐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不喜也不悲, 没有任何情感。 一下一下划水, 把今天发生的事都划出去, 推給我。 我会全部帶走。現在, 你就什公都没有了。

 

 

...

 

 

- 일요일이지만 가랑비가 오니 경내에 승려 몇 말고는 사람이 없다. 까마귀 몇 마리가 난다. 우산을 함께 쓰고 한가로이 거닐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해준과 서래. 서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얼굴에 붙자 정리해 주는 해준. 그의 손에 제 손을 얹는 서래. 굳은살을 느낀 해준, 서래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면서 만진다. 서래, 부끄러운 듯 손을 빼며- 

서래 : 한국 여자들은 손이 참 보드랍죠?

(주머니에서 핸드크림을 꺼내는 해준, 서래 손에 정성껏 발라준다. 쑥스러워하는 서래) 첨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진 형사가 품위 있어서.

해준 : 경찰치고는 품위 있다. 이건가요?

(고개 젓는 서래) 한국인치고는?

(고개 젓는 서래) 남자치고는?

서래 : (고개 젓고) 현대인치고는.

해준 : (웃음 터뜨리며) 서래 씨는 어느 시대에서 왔길래? 당나라?

 

 

...

 

 

 

- 해준 : 왜 서래 씨는, 내가 왜 서래 씨 좋아하는지 안 물어요?

알면 자꾸 그 생각만 할까 봐? 내가 잠복하는 거 어떻게... '잠복', 숨어서 보는 거. 주차된 차들을 다 들여다보고 다녀요, 원래? 내가 안 보일 땐 안 보고 싶었어요?  

(아리송한 미소만 띤 채 대답 안 하는 서래) 서래 씨가 나하고 같은 종족이란 거, 진작 알았어요. 남편 사진 보겠다고 했을 때. '말씀'은 싫다고.

(서래의 '아하' 표정. 서래에게 우산을 넘겨주고 풀어진 운동화 끈을 묶는 해준) 나도 언제나 똑바로 보려고 노력해요. 현장에서 시신들 보면 한 절반쯤은 눈 뜨고 있는데요, 그 눈이 마지막으로 봤을 범인을 꼭 잡아 드리겠다고 약속해요.

(무섭다는 듯 몸서리치는 서래. 일어서 우산을 되찾는 해준) 내가 정말 무서워하는 건 피 많은 현장... 냄새 때문에.

 

 

...

 

 

 

- 서래(소리) : 한국 여자들은 손이 참 보드랍죠?

신음하며 일어나 앉는 해준, 힙 플라스크를 꺼낸다.

 

...

 

 

 

- 서래(소리) : 원하던 대로 운명하셨습니다. 

 

 

...

 

 

 

- 서래 : 남편이 쓴 변명을 고치기만 했어요, 유서 느낌 좀 나게.

 

 

...

 

 

 

- 서래(소리) : 경찰이 술 먹고 여자 집에 오면, 폭력 아닌가요?


다시 현재. 제 전화기를 몰래 켜는 서래, 녹음 버튼을 누른다.

해준 : 사진 태우고, 내가 녹음한 파일 다 지우고... 그것도 참 쉬웠겠네요? 좋아하는 '느낌만 좀' 내면 내가 알아서 다 도와주니까?

 

서래 :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해준 :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행복'을 언급해 놓고는 더 화가 나)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나는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일어서) 할머니 폰 바꿔 드렸어요, 같은 기종으로. 전혀 모르고 계세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

 

 

 

- 안개 낀 바다, 화면에 '海'와 '바다'가 동시에 필기체로 적힌다. 낡고 초라한 고깃배를 띄우고 낚싯대 드리운 해준, 멍하니 찌를 본다. 휴일의 편한 복장.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늙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얼굴도 좀 탔다.  

 

 

...

 

 

 

- 해준 : 안 하면 편한 거 아니야?

정안 :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 오고부터 난 매일 집밥 먹고 석류 먹고 건강해지는 느낌인데 당신은 왜 이렇게 시들어 가지? 못 자서 그래?


해준 : 시들긴... 석류냐?

정안 : 이 주임이 당신 사진 보더니 너무 달라졌다던데? 그 잘생긴 남자가 왜 이렇게 됐냐고... 우울증 아니냐고...

해준 : 걱정하는 척 하면서 멕인다는 게 그런 거구나?

 

 

...

 

 

 

- 흐트러진 자세로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서래, '시마스시' 도시락을 먹으며 멍하니 TV 드라마 <적색비상>을 본다. 멍든 얼굴에, 핀들을 다 뽑은 채 엉클어진 머리. TV 화면 -원자력 발전소 컨트롤 룸. 연기가 자욱하고 깜빡이는 경보등 때문에 온통 시뻘건 화면. 천장에서 먼지와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진다. 젊은 여성 지민이 쓰러져 있다. 소방관 고빈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지민을 안는다. 지민, 눈 뜨며 -

지민 : 바보같이. 오지 말랬잖아요. 오면 죽는다고, 오지 말랬잖아요...

방독면을 씌워 주는 고빈을 보면서 서래, 동시에 중얼거린다.

 

고빈/서래 : 당신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거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

 

 

 

- 분노로 이글거리는 해준, 삐죽삐죽한 바위 위를 위태롭게 걷는다. 해무에 가려 어렴풋하게 보이는 뒷모습 - 서래, 스마트워치에 대고 중국어로 뭔가 말하고 있다. 감시하고 있던 순경 지혁에게 가 보라고 손짓하는 해준 서래가 돌아본다. 창백한 안색, 습기 때문에 얼굴에 달라붙은 (진짜) 머리카락, 눈에는 눈물이 가득. 해준은 그녀가 끔찍하다. 무시무시한 살인범임을 확신하는데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감정을 꾹꾹 누르며 -

해준 : 이럴려구 이포에 왔어요? 여기서 죽이면 내가 또 눈감아 줄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서래 :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서래 눈을 들여다보다 못 견디고 감아 버리는 해준. 운동화로 갈아 신은 해준의 발을 내려다보는 서래. 잠시 후 마음 단단히 먹고 눈 뜨는 해준.

해준 : 송서래 씨 잘 들으세요. 이번 알리바이는요, 차돌처럼 단단해야 할 겁니다.


홱 몸을 돌려 펜션으로 돌아가는 해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서래.

 

 

...

 

 


- 해준 : 감시 카메라 없고 사람 안 다니는 길로만... 전화기 두고 나와서 위치 추적도 안 되고. 알리바이를 입증할 길이 없네요?

서래 : 그러네요.

해준 : 별로 걱정 안 되시나 봐요?

(서래, '그럼 뭐 어쩌겠냐' 표정) 남편이 누구한테 원한 산 일 없습니까? 남의 돈으로 투자 많이 하셨다던데.

서래 : 요즘 손실이 좀...

해준 : 그런 상황에 고급 펜션에 사시고.

서래 : 돈 쓰는 걸 보여야 돈이 모인대요.

해준 : (답답하다는 듯 약간 톤이 올라가서) 왜 그런 남자하고 결혼했습니까?

서래 : (눈에 힘주고 똑바로 보면서)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해준 : (시선 회피) 이포엔 무슨 연고가 있어서 오셨나요?

 

 

...

 

 

 

- 해준 : 사랑이 아닌 이유로 선택한 남편이고, 그 남편이 여기저기서 협박을 받고, 그러다 죽고.

(부산에서와 비슷하게 탁자의 사각 쟁반에 단정하게 놓인 티슈와 물주전자와 머그컵과 텀블러를 응시하는 서래) 작년하고 똑같네요?

서래 : (눈 동그래져) 예? 그 남편은 자살이고 이 남편은 피살인데요?

'이 여자를 이길 순 없나 보다.' 한숨 쉬는 해준, 그래도 다시 힘을 내 -

해준 : 좋아요... 두 남편이 한 형사의 관할 지역, 그것도 멀리 떨어진 관할 지역에서 자살하거나 살해됐어요. 
누가 이렇게 됐단 얘길 들었다면 난 이럴 거 같아요. "거, 참 공교롭네..." 송서래 씨는 뭐라고 할 것 같아요?

서래 : (더 이상 담담할 수 없게) 참 불쌍한 여자네.

 

 

...

 

 

 

- 지혁이 비닐봉지를 갖고 들어와 탁자에 놓는다. 음식 냄새를 맡은 서래, 기대에 차서 이번엔 뭘 먹이려나 살핀다. 지혁이 삼각김밥과 떡볶이를 늘어놓자 그만 실망해서 해준을 보는 서래. 그답지 않게 지혁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않는 해준, 음식에도 아무 관심 없다. 휴대전화로 서래 얼굴을 갑자기 찍는다. 

 

 

...

 

 


- 연수 : 칠십 대 할머니가 있었는데요, 나갔다 와 보니까 남편이 죽어 있는 거예요. 온 방에 피를 토하고, 할머니가 피 다 닦고, 하는 김에 아예 대청소까지 하고 할아버지 씻기고 때때옷 입혀서 곱게 눕혀 놓은 담에 경찰 부르셨더라구요? 

원통형 나무 필통에 꽂힌 까마귀 깃털을 빼 들고 손장난 하는 연수. 연수의 말도 행동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아 뚱해서 정지 화면을 응시하던 해준, 탁자에 단정하게 올린 서래의 손목을 지목한다. 

해준 : 저 스마트워치 우리가 갖고 있지? 음성 파일 풀어. 중국어로 녹음했을 테니까 번역자 붙이고.

해준, 까마귀 깃털을 슬쩍 빼앗아 필통에 도로 꽂아 놓는다.

 

 

...

 

 

 

- 바다를 향해 선 서래. 습기 때문에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너머로 눈물. 뒤로 멀리 펜션이 보인다. 호신의 시신이 발견되어 출동한 해준이 서래를 만나러 바위를 건너오고 있다. 그동안 그녀는 스마트워치에 대고 중국어로 말한다. 

서래 : 그가 온다. 오자마자, 이러려고 이포에 왔냐고 물을 텐데 뭐라고 하지? 송서래, 왜 자꾸 눈물이 나고 난리야, 젠장.

답을 말해야 하나? 이미 그는 알지 않을까? 묻지 않을지도 몰라.

他来了。肯定一来就问我是为了这么干才来梨浦的吗?  我該息公說吃? 宋西菜, 哭什公牙, 嗯? ...妈的!

告訴他答案鸣? 算了巴, 也许他已经知道了巴? 也许他连问都不会问我。

해준이 도착한다. 지혁에게 가보라고 손짓하는 해준, 서래가 돌아보자 -

해준 : 이럴려구 이포에 왔어요?

 

 

...

 

 

 

- 서래 :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 주지 않으니까.

(바람직한 대목에서 어처구니없어 픽 웃을 수밖에 없는 해준) 얼굴 보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살인 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해준 : (화가 치밀어) 지금 농담할 땝니까?

일어서는 서래, 중국어로 말한다. 자조적인 표정은 사라지고 진지해졌다. 이번에는 통역기 앱의 여자 목소리를 선택했다. 

여자 성우 : 농담 안 할 테니까 해준 씨도 솔직히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긴장하는 해준)

날 떠난 다음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살아있는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경직되는 해준)
당신은 내내 편하게 잠을 한숨도 못 잤죠? 억지로 눈을 감아도 자꾸만 내가 보였죠? (움찔하는 해준을 향해 한 걸음 다가오는 서래)

당신은 그렇지 않았습니까? (해준을 보는 간절한 서래의 눈빛)

서래 : 그날 밤 시장에서 우연히 나와 만났을 때, 당신은 다시 사는 것 같았죠? 마침내.
(서래, 해준의 뺨에 손을 댄다) 이제 내 손도 충분히 부드럽지요?

 

...

 

 

 

- 해준, 서래의 손을 감싼다. 감정이 주체가 안 되니까 막 눈물이 나려고 한다.

해준 : 지난 사백이 일 동안 당신을...

(갑자기 중단, 심호흡 몇 번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고) 그렇다고 해서, 난 경찰이고 당신이 피의자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

(필사적인 의지로 서래의 손을 제 얼굴에서 떼어 낸다) 피의자, 알죠? 경찰한테 의심받는 사람.

서래 : 나 그거 좋아요. 편하게 대해 주세요, 늘 하던 대로... 피의자로.

 

...

 

 


- 해준 : 내가 서래 씨 왜 좋아하는지 궁금하죠? 아니, 안 궁금하댔나? 그래도 말하겠습니다. 서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똑바른 사람은 드물어요. 난 그게 서래 씨에 관해 많은 걸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

 

 

 


- 눈빛을 보고 답 듣기를 포기하는 해준, 절벽 끝에 가 선다. 뼛가루를 뿌린다. 눈송이들 사이로 반짝이며 날아가는 입자들을 바라보는 서래. 해준, 항아리를 기울여 털어 내다가 아래를 본다. 아찔하다. 서래, 해준에게 다가간다. 발소리 듣는 해준, 죽음을 각오한다. 양팔을 내미는 서래. 눈 감는 해준. 그러나 서래, 뒤에서 꼭 안는다. 안도하는 해준, 체온을 느낀다. 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미는 서래, 헤드랜턴으로 비춰 준다. 이해동 할머니의 전화다. 해준, 기겁해 돌아본다. 

해준 : 버리라고 했잖아요!

서래 : 이걸로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자기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는지 몰라 말 못 하는 해준. 서래, 그의 옷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내 바른다. 해준 입술에도.

 

서래 : 난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

 

 

 

- 서래 : 벽에 내 사진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

 

 

 

- 서래 : 그건 걱정 말아요.

해준 : 걱정돼서 하는 소리가 아니잖아요! 서래 씨도 그 파일 갖고 있죠? 말해요, 무슨 녹음이에요?

서래 :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해준 : 내가요?

서래 :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어요. 그걸 남편이 알아 버렸어요.

 

 

...

 

 

 

 

- 해준 :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서래 : (쓴웃음 지으며 중국어로)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你说爱我的瞬间, 你的爱就結束了。你的愛结束的瞬间, 我的愛就开始了啊。

 

 

 

...

 

 

 

 

- 해준 (소리) :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눈 뜨는 서래, 반복 재생. 해준의 "저 폰은..."을 다시 들으면서 -

해준/서래 : ...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헤어질 결심 각본
영화 각본이 선사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촬영과 편집을 마친 최종 결과물과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 각본』은 특히 이런 발견의 즐거움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서래가 직접 지어낸 『산해경』 이야기는 서래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열쇠를 하나 더 제공하며, 이포로 떠난 해준이 전해 듣게 되는 질곡동 사건의 후일담은 불길한 기운을 풍긴다. 이렇듯 편집 과정에서 삭제된 부분들 역시 하나같이 〈헤어질 결심〉의 세계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어서, 이 책의 독자들은 자신만의 ‘관객판’ 편집본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 속의 명대사들을 그대로 재확인하는 즐거움도 크다. 〈헤어질 결심〉은 이 ‘확인’의 즐거움이 각별한 작품이기도 하다.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래의 한국어 대사는 활자로 읽었을 때도 특별한 매력을 풍기며, 해준의 대사 역시 단어 선정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천천히 톺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어 대사에는 원문이 함께 실려 있어 그 의미를 더 깊이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이렇게 영화의 안과 밖을 충실히 담은 각본을 읽고 나면 〈헤어질 결심〉의 여운을 더욱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정서경, 박찬욱
출판
을유문화사
출판일
202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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