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고바야시 야스미 / 민경욱
출판 : 소미미디어
출간 : 2022.04.07
'고바야시 야스미' 작가가 고인이 되셨다는 걸 알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쓰여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고 있다. <전망 좋은 밀실>은 엄밀히 말하자면 유작은 아니지만 국내에 출간된 기준으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년기의 작품이기 때문일까? 이전까지와는 다소 계를 달리하는 무게감의 단편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이전 작품들을 몰랐었다면 상당히 당황했을 정도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취향을 탈 법한 소설들이었지만, 하드SF나 영성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는 눈이 번쩍 뜨일 법한 소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단편들은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단편에서 제기한 의문을 다음 단편에서 받아 각자 다른 입장에서 풀어나가기도 하고, 완전히 부정하기도 한다.
모든 작품이 제각기의 매력을 뽐냈으나, 책을 덮으며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 건 아무래도 <눈 비비는 여자>다. 저자의 이전 작품들과 가장 유사한 구조이기도 했고, '꿈'을 핵심적 장치로 사용했으되 충분히 현실적이기도 한 이중적 해석의 여지가 놀라웠다. 어느 쪽이건 끈적하게 남는 뒷맛도 매력적이었다.
개인적으로 고민해봤던 주제와 관련된 <망각의 침략>, <미공개 실험>, <죄수의 딜레마>는 소설이라기보다 일종의 입문서 같기도 했다.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상세하게 설명되는 개념과 그에 관한 논박은, 실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대화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저자가 풀어서 보여주는 극도로 과학적인 -혹은 극도로 마법적인- 세계는 <미리 정해진 내일>에서 크게 한 방을 맞는다. 단편선 전체를 휘감고 있던 환상성은 더없이 냉정한 방식으로 그라운딩 되는데, 당신이 존재하는 세계가 허상이건 아니건 '현실'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는 단호함마저 느껴진다.
너무도 즐겁게 읽었다.
각가의 단편에 대한 단상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여기서 멈추시는 게 좋겠다.
<전망 좋은 밀실>
표제작이자 첫 수록작. 천재적인 탐정 '시그마'라는 존재를 등장시키는데, 단편 내부에서 전개되는 추리는 일반적이지 않다.
현실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트릭을 파헤치는 형태가 아니라, 관찰된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 설사 그것이 초 현실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미 존재하는 것을, 납득이 가능한 설명을 위해 기존의 법칙이나 이론의 틀 속으로 억지로 밀어넣지 않는 자세로 읽어줄 것을 당부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지금부터 독자는 '시그마'가 되어 저자가 펼쳐보이는 다음의 이야기들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어딘가 말이 안되는 것 같다고?
괜찮다.
말이 안되는 걸 억지로 말이 되게 만드는 것이 더 문제다.
이제부터, 좋은 꿈을 꾸시길.
<눈 비비는 여자>
꿈은 꿈으로 연결된다.
새로 이사온 옆집에 살고 있던 여자는, 이 세계가 자신의 꿈이라고 주장한다. 현실은 너무 비참하고 괴로운 상황이지만 자신의 꿈 속에서는 모두 행복해질 수 있으니 안심하라고. 대신 절대 자신을 깨우지 말라고.
이 설정은 굉장히 중의적인데, 어느 쪽의 세계가 현실이더라도 말이 되는 끈적함이 마음에 든다. 모든 것이 그녀의 망상이더라도, 혹은 그녀의 말이 진실이더라도 비참하고 끔찍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을 정도의 현실과 깨어나기 싫은 꿈.
나의 꿈인데, 왜 나만이 비참하고 슬퍼야 하느냐는 그녀의 의문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모든 꿈은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녀의 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과연 또다른 '그녀'인가, 연결된 '타인'인가?
알 길이 없다.
이 세계는 나의 '꿈'이기 때문이다.
<탐정 조수>
신선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QR 코드의 형태를 빌린 도트 이미지들이 꽤 마음에 들었는데, 나는 가뿐하게 심리 트릭에 걸려들고 말았다.
내용 자체는 조금은 클리셰적이거나 겉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전 접한 <헤어질 결심>이 떠올라 몰입해서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마지막 반전이 꽤 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바꿔치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가능한 트릭이지 않을까? 하지만 기다림의 측면을 강조하려면 역시 저자의 트릭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조금은 가볍게 느껴질 법한 이 단편이 이 위치에 존재하는 것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언제나 '대화' 중이라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질 <망각의 침략>부터는 등장 인물 자체에 관한 설명보다는 그의 대사를 통한 개념적 -다소 형이상학적인- 논쟁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망각의 침략>
아주 즐겁게, 몰입 해서 읽었다.
'관찰'을 함으로써 확정되는 세계. 다수의 독자는 이것을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사실 현실 세계도 같은 이론을 정립 중이라는 것을 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단편들은 사실 저자가 상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놀라운 포인트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행위, 질문하고 대답하는 행위를 통해 확정되는 '사실'은 그것이 고정된 시점으로부터 과거와 미래를 가리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것의 영향력은 개인의 차원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데, 그러한 '사건의 지평선'은 과연 현실적 경계인가, 나의 '꿈'의 경계인가?
이 단편의 주인공이 보여준 판단력과 행동들은 감탄스러웠다. 그는 상시 자각과 자기 검증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을 때만 실천이 가능하다. 질문과 대답은 동시에 존재하며, 그것이 '내 안'에 머무는 동안은 수렴되지 않은 파동함수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미공개 실험>
이전 단편에서의 설정을 그대로 뒤집어서 풀어간다.
과연 모든 것은 '변할 수' 있나? 그렇다면 시간여행은 어떨까? 이 세계는 과연 시뮬레이션의 밖인가 안인가?
과거로 돌아가 바꾼 결정이 현재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은, 이 하나의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라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힌다. 이 세계를 관측할 수 있는 또다른 세계의 존재 가능성 만으로도,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언제고 붕괴될 수 있다.
그럼에도 동시에, 시뮬레이션 안의 시뮬레이션은 계층화되지 않은 상태로 독자적 병존이 가능하다. 개인적으로는 이에 관련한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무의식 정화나 심상화 등이 가능하다면 -개인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믿으며, 믿어서 손해나 피해를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째서 작동이 가능한지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 또다른 비유라고 본다.
저자가 의도한 설정이었을까? 단편의 배치 순서에 따라 차례로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미리 정해진 내일>에서 마침내 '현실 창조'로까지 이어진다.
<죄수의 딜레마>
인간은 과연 '무해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이타주의'란 자기애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에 불과한가?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의문과 해법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주적으로 확장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된 제국주의(보다 큰 나)와 내부 부패로 인한 자멸(나의 축소와 분열)을 다시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나 싶다.
저자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배려와 이타심을 기반으로 한 이상적인 세계가 가능한가'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딜레마였겠지만, 아케르나르 계 인들은 계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지구 안에서의 문제와 동일하며, 관점은 전혀 확장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의 행복 추구'를 깊게 파고든 부분은 매우 흥미로웠다. 사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려면 천상의 삼각형으로 나아가게 되므로, 저자가 제기한 문제와 절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문장에 등장한 파충류와 곤충과 거인으로 미루어보건대, 저자는 은하연맹과 순수한 이타심의 성립 가능성에 더 집중했던 게 아니었을까.
<미리 정해진 내일>
질문이 정해지면 답 역시 정해진다. 그 답이 직관적으로 떠오르지 않더라도, 구할 수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 아직 '구하지 못했을' 지라도.
그러나 답이 변하면, 그렇다. 질문 또한 변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누구인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은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질문'을 구하는 역산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진행된 수많은 가설들과 이론들에 지나치게 파고들면 - 그래서 잠식당하면 - 일어날 수 있는 또다른 꿈의 세계.
이것은 <눈 비비는 여자>와는 다르다. '꿈'은 '꿈'이 아니게 된다. '꿈'이 꿈으로서의 의미를 잃고 대체 현실로 기능하게 되면 '현실' 또한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이런 세계에서는 꿈도 현실도 무의미하다.
신나게 환상계를 넘나들던 이야기를 깔끔하게 갈무리하는 결말.
'나'의 꿈을 타인의 꿈으로 넘겨주어선 안된다.
모든 존재는 유일한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이므로.
- 추리 과정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찾아가는 본격 추리물과 과학적 계산을 통해 작품 무대와 설정의 정합성을 확인하는 하드 SF의 공통점은 바로 논리이다. 두 장르 모두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논리가 작품을 관통해야 독자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
- 그리고 그 논리 속에서 세상은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름다운 논리가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완구수리공>으로 독자들에게 처음 이름을 알린 고바야시 야스미는 우리에게도 <앨리스 죽이기> 같은 작품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호러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호러뿐만 아니라 SF와 미스터리까지 다양한 장르를 펼쳐내고 있다. 특히 <바다를 보는 사람>은 그를 '어두운 호러가 특기인 사람'으로만 알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진정한 SF를 그릴 수 있는 작가로 새롭게 자리매김시켰다.
- 민경욱
- "사건은 경부 본인이 체험한 순서대로 말씀해 주세요."
시그마가 말을 막았다.
"주관에 사로잡히는 걸 막기 위해 경부가 신고를 받은 순간부터."
- 시그마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건에 경찰이 관여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은 어떤 것도 확실치 않다는 생각이다 -물론 경찰이 관여한 후에도 확실한 건 없으나 신뢰도가 다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두 확실한 증거에 근거해 추리해야만 한다. 그런데 자기 멋대로 생각해 사건을 재구성해버려 착오가 생기는 것이다. 미해결 사건 대부분은 그런 착오가 원인이라는 것이 시그마의 지론이다.
- "그런 데는 관심 없어."
"하지만 살인 동기로는 가능해."
"동기 같은 건 사소한 문제야. 나는 이게 살인인지 아닌지, 그리고 살인이라면 어떻게 그게 실행되었는지, 그것에만 관심 있어."
"하지만 동기와 수단, 기회를 다 찾아내야 용의자를 알아낼 수 있어."
"범인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 "우선 상황을 정리해 보지. 무슨 일이 일어났지?"
"밀실 살인."
"맞아."
"그런데 네 지론에 따르면 밀실 살인 같은 건 있을 수 없지 않나?"
"그건 그래. 밀실 살인은 있을 수 없지. 밀실 살인처럼 보이는 건, 밀실이 아니거나 살인이 아니지."
"그럼 이번에는?"
- "무슨 소리야? 너도 나와 똑같은 걸 보고 들었잖아!"
"그것도 네가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이지. 너는 지금 여기에 나와 경부가 있고 같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 "아무리 생각해도 논리에 맞지 않는 점이 있으면 우선 그걸 제일 먼저 의심해야 해."
- "그건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말을 흐리고 말았다. 왜 자신이 오토라 씨 부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를 떠올렸으나 사실을 말해봤자 믿어주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 "그의 얘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긴 듯합니다. 그가 원래는 알 수 없는 사실을 꿈을 통해 알게 되었다면 왜일까요?"
- "검증은 끝났어. 이건 꿈이 아니야."
"그건 전혀 증명이 안 되지 않을까?"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나는 지금 네가 뺨을 꼬집어 아파하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이 세계가 네 꿈일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 내게 의식이 있으니까 네 꿈이 아님은 내게는 명백하지. 물론 네 처지에서는 내 꿈이 아니라는 게 자명하므로 내가 한 검증은 소용없을지 몰라. 그럼 스스로 검증하는 수밖에 없지. 자, 네 뺨을 꼬집어봐."
- "경부님도 검증하실래요?"
"바보 같은 소리, 내가 깨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
"자신이 완벽하게 깨어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요? 뭐, 됐습니다. 억지로 하라는 말은 아니니까요."
- "그건 가상현실입니다."
"가상현실? 그게 뭔데?"
"전자계산기의 기록 공간 안에 형성된 가상 세계죠. 그러나 그 안의 인격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상 세계는 프로그램으로 제어되므로 프로그램상의 에러와 전자계산기 밖에서의 인위적인 간섭으로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게 현재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입니다."
"말도 안 돼. 자네는 우리가 가공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가?"
"가공이 아니라 가상입니다."
시그마는 냉정하게 정정한 후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초(超) 지성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지. 우리는 그런 지성이 가상 세계 속에서 태어나길 기다렸어. 그리고 지금 드디어 성과를 얻었네. 자, 시그마 군, 우리 세계로 오게."
- <전망 좋은 밀실>
- "맞아, 꿈이에요. 꿈속이라면 말하거나 걸어도 이상할 게 없죠. 오히려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죠. 초인적인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고 깨면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은 부도덕한 짓도 할 수 있죠."
- "그게 아니에요."
하치미는 고개를 숙인 채 흘긋 올려다보는 눈길로 아야코의 얼굴을 핥듯 바라봤다.
"나는 잠들어 있을 때는 돌아다니지 않아. 둥지 안에 계속 몸을 말고 있죠. 깨지 않도록 조심하죠."
- "당연하지! 이웃에 그런 사람이 사는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
"당신은 그게 문제야?"
"그야, 당신은 괜찮겠지. 낮에는 회사에 있고 이 집에 없으니까. 나는 온종일 이 집에 있다고. 아아, 소름 끼쳐."
- "그게 정말 끔찍한가 봐. 누구 하나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세계래. 사회가 붕괴해 매일 약탈이 벌어지고 아이든 여자든 가차 없이 살해된다고."
"그거 정말 지독하네."
"그녀는 폐가 안에 숨어 있었대. 그곳은 이전에 핵연료를 처리하던 곳이라 아무도 얼씬대지 않아서. 그녀도 사실은 거기에 있고 싶지 않았는데 거기밖에 몸을 숨길 곳이 없었대. 밤이 되면 거기 있는 탱크 뒤에서 태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들었다는 거야. 그녀는 지금 거기서 평화로운 세상의 꿈을 꾸고 있다고."
"그래서 낮에는 현실 세계에 깨어 있고 밤이 되면 잠들어 현실 세계의 꿈을 꾼다는 거야?"
"그렇진 않다더라. 현실 세계의 꿈을 매일 꾸는 건 아니고 지금뿐이라고."
"그건 이상하다. 현실 세계는 특별히 오늘 밤만이 아니라 어제도 그저께도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아야코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어제도 그저께도 전부 이 세계는 아키야마 씨가 꾸는 꿈이래."
- "뭐야, 거짓말이야?"
"아니, 그 사람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무서운 거지."
"하지만 그 여자가 특별히 피해를 주진 않잖아."
- 아야코는 한동안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 눈동자를 치켜뜨고 생각했다.
"뭐, 그렇게 말하니까 그러네. 특별히 피해를 주는 건 아닐지도..."
"그럼 놔둬도 되잖아. 일테면 아주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건 사회에 훌륭하게 적응하고 있다는 소리야. 실제로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니까. 전차 안에서 옆에 앉은 녀석이 망상에 빠져 있을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일일이 그런 걸 걱정하면 사회생활은 불가능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키야마 씨는 정상이라고 할 수 있어."
- "이렇게 바로 알아주는 사람은 적어요. 대부분은 이 세계가 내 꿈이라는 걸 좀처럼 인정하질 않아요."
"하지만 그게 평범한 반응일 거예요."
하치미는 찌릿 아야코를 노려봤다.
"그게 평범하다니 무슨 뜻이죠? 설마 당신도 나를..."
- "설명은 다 하잖아요. 이건 내 꿈이에요. 본인이 하는 말이니 그보다 더 정확한 말이 어디 있나요?"
"하지만 꿈을 꾸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갑자기 하치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 "아뇨, 뜨거웠던 건 아니에요. 재미있는 말을 하셔서."
"재미있는 말요?"
"맞아요, 꿈이라면 다른 사람도 자각한다니까."
"예? 다른 사람에게는 없어요? 분명 꿈을 꾸면서도 그게 꿈인지 모르는 일도 가끔 있어요. 하지만 혹시 이게 꿈이 아닐까 의심하면 대체로 꿈이란 걸 깨닫잖아요. 뭐라고 해야 하나, 현실과는 다른 애매한 감각이 있으니까."
"그래요,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이게 꿈이라는 걸 확실히 알아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그건 무리죠. 왜냐면 이건 내 꿈이니까요. 꿈을 꾸는 사람은 나 하나이고 당신과 다른 사람들은 꿈을 꾸는 게 아니니까요."
"그럼 당신 이외의 사람들... 우리는 지금 뭘 하는 거죠?"
"그건 몰라요. 나는 잠들어 있으니까."
- 나름 말이 되는 듯한 착각마저 생겼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멋진 망상이라고 아야코는 생각했다.
"그럼 혹시 잠에서 깨면 현실 속의 내 모습도 알겠네요?"
"물론이죠."
"그럼, 일단 깨서 현실의 나를 보고 자세히 알려주면 안 되나요?"
"어머, 그것도 힘들어요. 일단 깨면 같은 꿈을 또 꾼다는 보장은 없어요. 게다가 현실 세계에서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알 테니까 굳이 알려줄 의미도 없죠."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 말은 꿈속의 나와 현실의 나는 각각..."
- "당신. 역시 와줬네.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이건 꿈이니까 뭐든 딱 맞춰 일어나지."
- "왜 아무것도 몰라? 모르는 게 죄일 때도 있는데."
- <눈 비비는 여자>
- 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냐. 다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강한 감정을 지녔을 때 그 생각이 전해져. 하지만 이건 선생님에게도 비밀이야. 나만의 비밀. 그래서 알아낸 사실을 직접 선생님에게 전해줄 수 없어. 자연스럽게 힌트를 줄 뿐이지. 때로는 조바심이 날 때도 있는데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잘해왔어.
- '뭐야, 예쁜 여자잖아.'
이 여성은 20대 후반쯤일까. 색이 하얗고 살짝 차분해 보이는 맑은 눈이 아름다웠다.
- "그녀는 젊고 아름답고 장래가 있어."
"하지만 그녀는 살인자예요."
-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핸들을 꼭 쥐었다. 나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았다. 선생님은 그 여자를 감싸려 하고 있다. 나는 그걸 말릴 방법이 없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선생님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 <탐정 조수>
- 인류에 대한 침략자의 공격은 이미 시작된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야 원인을 모르는데 발표했다가는 사회의 불안만 늘어나니까."
- "미지의 침략자에게 그런 게 통할까요?"
"통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순간의 틈을 뚫고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좀 유리해."
"무슨 소리죠?"
"나는 투명한 괴물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만약 투명한 괴물이 공격해 오면 미리 그런 생각을 해두지 않은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기조차 힘들겠지. 물론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하면 투명한 존재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인간이란 의외의 상황이 일어나면 바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 어떻게든 기존에 알고 있는 현상으로 설명하려 하거나 혹은 혼란에 빠져 공황 상태가 되지. 하지만 나는 원래 투명한 침략자의 존재를 추측하고 있으니까 만에 하나 공격을 받아도 바로 대응해 행동할 가능성이 크지."
- "조금이라도 믿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은 침략자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겠지. 그럼 또 다양한 증거가 나올 테고. 그러다 보면 언론이나 정부도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거야."
"그렇군요. 다만 그런 경우 인터넷과 언론의 다양한 정보에 묻혀 당신이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없게 되지 않을까요?"
"나는 그래도 괜찮아. 침략자의 위협만 제거할 수 있다면 나 개인의 명예 따위는-"
- "말도 안 돼. '상자 속의 고양이'와 '내 머릿속의 대답'은 전혀 달라."
"마찬가지야. 둘 다 관측하기 전의 수렴되지 않은 파동함수 상태지."
- "다친 걸 기억하지 못해 순간 통증도 느끼지 못했구나. -으윽."
- "우선은, 이 침략자가 우리 인류를 공격한단 거지."
"그건 희망이 아니라 절망 아닌가요?!"
"천만에. 그들은 우리 기억에 남지 않는 존재야. 원리적으로 어디서 뭘 하든 우리 기억에는 없어. 즉 그들은 완전히 자유롭지. 인류 같은 존재가 따라갈 수 없는 존재지. 그런데도 침략자는 인류를 공격해. 이는 곧 우리 인류가 그들에게 어떤 면에서 위협이 됨을 알려주지."
"그게 왜 희망인데요?"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한다는 소리는 곧 우리가 그들을 위협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데요?"
"그걸 이제 분석해야지."
- "다른 희망도 있나요?"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거지."
- "아냐, 지금은 아직 그녀를 관측할 때가 아니야. 그녀와 인류를 지키기 위해."
- 이미 관측해 버렸다. 이제 눈 돌려도 소용없었다.
-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내 직감을 믿기로 했다.
-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한 남학생의 사체였다. 뒤에서 공격받은 듯했다. 자상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안된 일이었다. 하지만 관측해버린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 손바닥을 보고 다시 비디오 파일을 삭제한 다음 촬영을 재개했다.
- 사태는 점점 확정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편이 나았을까? 내가 녀석들에게 들키지 않고 얌전히 살해당했다면 분명 다른 누군가가 인류를 위해 싸워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아차리고 목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 결과 인류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을지 모른다. 만약 지금 내가 포기하고 침략자에게 몸을 맡긴 채 살해되면 어떻게 될까? 내가 한 일은 모두 취소되고 인류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올까? 만약 그렇다면-
-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게 뭘까?"
"문자 그대로의 의미죠."
"그럼, 기억은 뭔데?"
"뇌 안의 전기화학적인 신호인가요?"
"양자역학적 의미를 생각하면 기억이란 즉, 관측의 흔적이야."
"관측요?"
"양자역학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 세상의 물체는 모두 파(波)라는 특성이 있지."
"실제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물리학자 대다수는 그 점을 고민했어. 그리고 몇 가지 해석 방법을 고안했지. 그중 하나가 코펜하겐 해석이야."
- "결국은 코펜하겐 해석이든 다세계 해석이든 인간의 관측이 물체에 영향을 준다는 현상은 회피할 수 없어. 여기까지 이해했어?"
"네, 물론이죠."
"파동함수의 수렴이 관측에 기인한 거라면 그건 뇌와의 상호작용이야."
"그렇겠죠."
"상호작용의 결과, 물체 측은 파동함수가 수렴되고 뇌 측은 기억이라는 흔적이 남지."
"합리적인 해석이네요."
"만약 기억에 남지 않은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의 파동함수는 수렴되지 않아."
- "근거는 있어. 그들이 인류를 공격하는 이유 말이야. 만약 파동함수가 절대수렴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완전히 자유야. 인간에게 들킨 순간에는 어떤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겠으나 그 밖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누릴 수 있는 존재야. 그들이 인류를 공격하고 카메라를 파괴하는 이유, 그건 틀림없이 그런 자신의 가능성을 한정시키는 존재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지."
- "고전역학적 세계관과 양자역학적 세계관의 이용 방법이 제대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 거야. 고전역학적으로는 처음부터 그 형태이므로 나는 수없이 세로의 지그재그 상처를 입지. 그게 다야. 하지만 양자역학적으로는 아까 말한 방법으로 이 현실을 선택했어. 두 가지 견해 다 옳고 객관적으로 구별할 수는 없어."
- <망각의 침략>
- "그러니까 '수학이 옳다는 사실은 수학 자체를 이용해 증명할 수는 없다'라는 말이야.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야."
- "이 세계를 현실 또는 가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가상으로 취급해도 상관없단 소리지."
- "잠깐만, 가령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으로 취급되더라도, 그 시간을 역행하려면 세계 밖에서 누군가가 조작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는 않아. 하드웨어 속의 소프트웨어를 가상 하드웨어로 취급하는 소프트웨어가 있다고 치자. 처음 소프트웨어에서 보면 두 번째 소프트웨어는 내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 하지만 실제로는 최초의 소프트웨어도 두 번째 소프트웨어도 같은 하드웨어의 메모리에 존재하는 대등한 존재야. 그러니까 이 세계가 가상 세계로 취급될 수 있다면 그 안에 존재하는 소프트웨어는 이 세계와 동등한 소프트웨어가 된다는 소리지."
- "곧바로 행동하지 않고 일단 조용히 현상을 분석하자는 게 내 정책이야."
나는 대놓고 반론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질문했어야지."
"질문이 그 자리의 분위기를 결정할 때도 있어. 어떤 영향이 있을지 모를 때는 무턱대고 질문해선 안 돼."
- "단순한 시간 변경은 엄밀히 따지면 타임 패러독스가 아니야. 다이쇼 봉환이 이뤄지든 않든 각각은 모순 없는 시간 축을 형성해. 타임 패러독스란 즉 유명한 '부친 살해의 역설' 같은 원리적 모순을 포함해야만 해."
- "컴퓨터 성능은 문제가 안 돼. 컴퓨터는 이 세계의 일부이고 이 세계는 거대한 메모리 공간 아래 존재해. 컴퓨터는 전체 메모리 공간과 상호작용하니까 컴퓨터에서 하는 작업은 이 세계를 내장한 하드웨어에 작업하는 것과 같아."
- "있든 없든 그걸 관측할 수단이 없어. 그럼 없다고 쳐도 지장은 없다고. 만약 플랑크 길이 이하의 규모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면 그건 곧 관측할 수 있었다는 뜻이니까 양자역학에 반하는 일이지."
- "명령을 잘못 입력하거나 하면?"
"아아, 머릿속에만 또렷이 있으면 손가락과 키보드는 거의 관계없어."
"지금 뭐라는 거야?" 아와비가 되물었다.
"내 뇌도 이 세계의 메모리 위에 존재하니까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 입력한 거나 마찬가지지."
- "프로그램은 완료했어. 다음은 출발 타이밍인데 그건 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면 돼."
"머릿속으로 누르면 안 되냐?"
"분명한 개시 의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어. 그러지 않으면 타임머시이인의 작동이 불안정해져."
- "지금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지.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 작동해 이 타임머시이인 안의 시간 속도는 그대로 둔 채 바깥쪽 시간 속도를 빠르게 한 상태야. 그건 즉, 우리 주관에서 보면 타임머시이인 안의 시간만이 느리게 움직이지." 마루노는 자세를 취했다.
- "조금 전은 미래로 향하는 여행이었고 지금은 과거로 향하는 여행이야. 같은 현상은 발생하지 않아."
"그럼 아까와 반대인가? 타임머시이인 속만 시간이 빨리 흘러?" 이카리가 자세를 취했다.
- "단순히 주위 시간의 흐름이 늦어진다고 과거로 갈 수 있겠어? 미래로 가는 건 곧 자기 이외의 모든 세계가 빨리 간다는 거야. 과거로 향하려면 자기 이외의 모든 세계를 되감아야지."
"모든 세계를?"
"어려운 일은 아니야. 아까도 말했듯이 이 세계는 하드웨어 메모리상에 존재한다고 간주할 수 있어. 세계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산과 뒤로 감는 계산에 필요한 처리 능력은 같아. 사실 계산 기간은 그다지 관계없지만 말이야. 이를테면 1초분의 계산에 백만 년이 걸렸다 해도 이 세계 안에서는 단지 1초일 뿐이니까."
-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 그걸 지적해야 할까?
- "네 시뮬레이션 이론이 옳다면 이 세계 밖에서 타임머시이인의 움직임을 보게 돼." 나는 자세를 취했다.
"지금, 세계 시뮬레이션은 지금 현재를 시뮬레이션하고 있어. 미래를 보려면 시뮬레이션 속도를 올리면 되고, 과거를 보려면 시뮬레이션 진행을 역전시키면 돼."
"그건 내가 수없이 설명했잖아."
"잠자코 들어줄래? 과거로 돌아간 시점에서 시뮬레이션에 손을 대. 그건 즉 역사 바꾸기에 해당하지.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진행해 현재에 도달하면 아까와는 다른 상태가 되어 있어."
"그게 목적이니까."
"하지만 아까와 다른 상태가 되었다고 해도 그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 왜냐면 시뮬레이션 안에서 시간은 되돌려진 것일 수 있으나 시뮬레이션 밖에서는, 시간은 여전히 과거에서 미래로 흘렀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바깥 얘기지."
"시뮬레이션 안의 시점에서는 시뮬레이션만이 유일한 세계일지 모르지. 하지만 시뮬레이션 밖의 세계에서 보면 시뮬레이션 역시 그 세계의 일부야. 그 세계의 물리법칙에 반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 "아냐, 과거로 돌아간 것 같으나 그건 진짜 과거가 아니야. 과거처럼 보여도 그건 시간 계열로 보아 미래에 존재하지. 그리고 거기서 현재로 돌아와도 지금 현재에는 도달하지 못해. 그건 미래에 있는 다른 현재지."
- <미공개 실험>
-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이데알은 생각했다.
아니면 이미 죽었나?
- 무엇보다 이곳은 천국인가 지옥인가? 예를 들어 지구인은 우주 끝에서 죽어도 지구의 천국으로 끌려오나? 아니면 천국은 우주 어디서나 공통인가?
그 또한 좋은 소식 같네. 일단 확인하지 않으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 아니, 웃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웃는 것처럼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지구 기준이 통할 때이다.
- "하지만 너, 고전적인 게임이론 모델이잖아. 분명 '죄수의 딜레마'로 불리는 걸 텐데."
"고전적이라고 해서 쓸모없다고 정해진 건 아니야."
"이 모델은, 전체 최적과 부분 최적은 일반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나타내."
"응, 분명 그렇지. 하지만 내 이론에서는..."
"네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신앙고백이야."
- "내 말 끊지 마. 상대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면 전략을 조작할 수는 없어. 이 점은 동의하지?"
팬드래건은 옆길로 새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았다.
- "내가 선택해야 하는 전략을 뭘까?"
"물론 협조 전략이지. 둘의 징역의 합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으니까. 이게 가장 합리적이야."
"그런데 나는 배신 전략을 선택할 거야."
"왜? 그건 비합리적이야."
"왜냐면 내 징역을 최소- 그러니까 제로로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징역 20년이 된다고. 둘의 징역의 합은 최대야. 그런 선택은 비합리적인 것 같지 않아?"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가령 내가 석방되어도 동료가 징역 20년을 사는 결과가 되어도 좋다고?"
"그 반대보다는 훨씬 좋지."
- "그러나 친구를 배신한 사실이 다른 동료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돼? 너는 불이익을 당할 거야."
"어이, 그 가정은 너무 비겁해."
"비겁해?"
"'죄수의 딜레마'는 쌍방의 이약을 징역이라는 숫자로 나타낸 모델이야. 거기에 '친구의 평판'이라는 다른 종류의 이득을 추가하면 아주 다른 모델이 돼. 그렇다면 '친구의 악평'이 징역 몇 년에 상응하는지 계산해 다시 평가해야 해."
- "너는 '전체 이익의 총합'이라는 개념을 갖고 (1)의 쌍방이 함께 협조 전략을 선택하는 게 가장 적합한 해답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그러나 그 이론에는 큰 결함이 적어도 두 가지 있어."
"두 가지?"
"맞아. 하나는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나만의 전략이고 상대의 전략은 제어할 수 없다는 점이야. 즉 자신이 협조해도 상대가 배신하면 징역은 최대가 되어버려. 그런 위험한 다리는 건널 수 없겠지."
"그건 아까도 들었어. 하지만 상호 신뢰가 확고하다면..."
"또 하나는... 이게 더 근원적이고 치명적인데... 개인은 전체 이익의 합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야. 자신의 이득에만 관심이 있다면 배신 외에는 방법이 없어. 이 점은 동의하겠지."
"그러나 사회 전체의 번영이 없다면 개인의 행복은 없다고."
"그건 사회 전체의 번영이 개인의 행복과 정의 상관을 가질 경우지. 극단적인 예로 사회 전체의 경기가 나빠지고 나만 부자가 되는 것과 사회 전체의 경기가 좋아지고 나만 가난해지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면 대다수는 전자를 택할 거야."
"세상에 이기적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니야."
"아아, 물론 세상에는 자신은 돌보지 않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지."
- "그런 건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그런 훌륭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그건 네 신앙이야. 어떤 근거도 없어."
- "이기적인- 다시 말하면 배신 전략만을 선택하는 개인으로 이루어진 집단과, 이타적인- 즉 협조 전략만을 선택하는 개인으로 이루어진 집단 중에, 어느 쪽이 살기 편할까?"
"물론 후자지."
이데알은 웃었다. "네가 제대로 된 생각을 지닌 것 같아 안심했어."
"너는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어."
- "그러니까 적자생존이란 거야. 이기적 사회와 이타적 사회를 비교하면 후자가 번영해. 그럼 생존에 적합하다는 소리지. 적자생존, 즉 이기적인 사회는 도태돼."
"그래서?"
"자명하지. 모든 사회는 다 이타적인 사회로 진화해."
"그건 네 신앙이야."
- "네가 증명한 것은 이기적인 사회와 이타적인 사회가 존재했을 경우, 후자가 살아남기 쉽다는 것뿐이야."
"그게 모든 걸 증명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디까지나 '전체 구성원이 이타적인 협조 사회'와 '전체 구성원이 이기적인 배신 사회'를 비교한 경우겠지. 그런 순수한 상태가 계속 유지될 것 같아? 한 가지 사고실험을 해보자. '전체 구성원이 이타적인 협조 사회'에 이기적인 개인이 침입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야 일시적으로 이기적인 개인의 이득을 얻겠지. 하지만 하나뿐이라면 사회 전체의 경향은 변하지 않아."
"협조 사회 속에 소수의 이기적인 개인이 존재하는 경우, 그는 적자가 되지 않을까?"
- "그렇다면 그의 전략은 계승되고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이기적인 사람이 돼. 그렇지?"
"하지만 이기적인 사람이 너무 늘어나면 사회 전체의 경쟁력이 떨어져. 그럼 이기적인 개인에게도 불이익이 발생해."
"맞아. 그래서 이기적인 개인의 수는 특정 비율로 억제될 거야. 즉 대다수 이타적인 사람들을 소수의 이기적인 개인이 착취하는 게 안정된 사회라고."
"그런 사고방식은 너무 허무하지 않냐?"
"하지만 많든 적든 현실 사회가 그래. 과거에 인공적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사회주의가 도입되었으나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잖아?"
- "그러나 그건 인류가 아직 미성숙해서..."
"인류가 성숙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증거는?"
"증거를 댈 필요도 없어. 인류의 이상은 언젠가 실현될 거야."
"그러니까 그건 네 신앙이라고."
- "우리도 이기적이에요. 이기적이기에 협조적인 전략을 선택해 자신이 살기에 좋은 사회를 형성하죠."
"맞아. '이기적' '이타적'이라는 건 표층적인 의미일 뿐이야. 모든 인간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면 이는 곧 이기적인 부분도 충족하지. 그야말로 '정(情)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게 아니야'라는 말이 되는 거지."
- "그건 곧 당신들에게는 이미 그런 속담이 필요 없기 때문이겠지. 지구에 이 속담이 존재하는 것은,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야."
"그렇군요. 이해가 되는 설명이네요."
- "해결 방법은 간단해요. 모두 성실히 일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제품과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면 돼요. 그럼 모두 행복해져요."
"그게 내 말이야. 하지만 지구인 대다수에게는 이 원리를 이해시킬 수 없어."
- "당신은 아무래도 접근 방법이 틀렸던 것 같네요. 그걸 깨달았어요."
"틀려? 내가?"
"네, 논리로는 문제를 해결할 순 없어요."
"아니... 이성이 충분히 발달하면 저절로 이상 사회가 실현되리라 생각했는데..."
"당신들의 이성은 이미 충분히 발달했어요. 모든 개인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면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된다는 것도 다 이해했을 겁니다."
"그럴 리 없어. 만약 그랬다면 이미 우리도 당신들 같은 사회를 실현했겠지."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왜냐면 지구인 대다수는 그런 이상 사회를 바라지 않으니까요."
"아니야, 대다수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사회를 원해."
"엄밀히 따지면 그 사람들은 이상 사회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이상 사회가 실현한 결과로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거죠."
"마찬가지지."
"최종 목표가 다르므로 당연히 결과도 달라져요. 이상 사회 실현이 목적일 때는 이상 사회가 실현된 시점에서 목표는 달성된 거죠. 다음은 그 사회를 유지하기만 하면 돼요."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자신의 행복이 목적일 때는 그렇지 않아요. 전원이 협조 전략을 선택한 사회에서 한 사람만 배신 전략을 선택하면 그가 더 행복해져요."
"그런 일을 하면 사회적인 제재가 내려질 거야."
"그런 제재가 유효하게 기능한다면 애당초 당신들이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는 성립되지 않죠."
-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 그런 결과가 생기는 게 당연해요. 오히려 논리적으로 옳은 귀결이라고 할 수 있죠."
- "만약 식물을 착취하는 것보다 광합성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면 동물이 발생했을까?"
- "그게 잘 될까? 사회가 아무리 풍요로워져도 범죄나 빈부격차는 사라지지 않아. 인간의 욕망은 너무 커서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그런 게 아니야.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많은 자원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나쁜 짓을 하지 않아야 많은 자원을 얻을 수 있어. 광합성을 하면 필요한 영양을 축적할 수 있는데 굳이 식물을 찾아 헤매서 괜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처럼."
- 태양이 줄어들고 그 주위에 링이 나타났다.
"이건?" 팬드래건이 물었다.
"링이야. 이 단계에서는 니븐의 링이라고 해도 돼."
"링월드는 역학적으로 불안정해."
"이 링은 달라."
- "다이슨 구로 하려는 거야?"
"아, 맞아."
"불가능해."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 "메타 분자의 구성은 여러 가지지만 기본 세트에는 전기를 띠는 마이크로 블랙홀과 모노폴, 자성 유체와 초전도체 그리고 나노머신 복합체와 나노 카본 구조체가 포함돼. 힘의 전달에는 원자 간 상호작용이 아니라 마이크로 블랙홀이 발생하는 전자장과 중력이 사용돼. 중력은 아주 근소하게만 제어할 수 있는데 전자장은 주변 공간에 충전하는 자성체와 모노폴의 분포나 운동량에 따라 상당히 다이내믹하게 상약과 극성을 제어할 수 있어. 인력도 척력도 생각대로 할 수 있어."
- "탁상공론이야."
"어떤 인공물도 처음에는 탁상공론이야."
- "대부분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블랙홀과 모노폴은 말이야. 항성 간 공간을 찾으면 발견될 거야. 아니, 의외로 오르트 구름에 담겨 있을지 모르지. 사회 시스템에 관한 거라면, 수 세기나 살아남은 국가나 조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아. 해체할 것도 없이 소멸하겠지."
"좋아. 네 주장이 받아들여진다고 치자. 그래서 너는 뭘 하고 싶어, 이데알? 이게 완성되는 건, 몇 세기나 수십 세기 뒤라고."
"어쨌든 인류는 이 세계를 창조해.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먼 미래지. 나는 그걸 조금이라도 앞당기고 싶어. 가령 100년 앞당긴다면 그 100년 동안 태어난 사람은 전부 행복해지겠지."
- "내가 발표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누군가 생각해낼 거야. 이건 역사의 필연이야."
"그렇다면 더욱 네가 처음 발표할 필요는 없잖아?"
"응, 내가 아니라도 괜찮아. 하지만 나여도 괜찮잖아."
- "왜 개인은 서로 협조하지 않고 배신하나, 그 원인을 해소하면 됐어요."
"그게 뭘까?"
"행복의 추구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행복 추구는 당연한 권리야."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그러나 인류가 늘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했던 건 아닙니다."
"그래.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는 별개지. 가족애나 동포애 같은 영향력으로 때로 인간은 자신의 이익보다 사랑하는 대상의 이익을 우선하지."
"거기에 힌트가 있어요."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지구인도 인식했어. 그러나 무리였지.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게 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개인이 아무리 의식 개혁을 하려고 해도 무리가 있어요."
- "본능이란 뇌 안에 처음부터 넣어놓은 프로그램 같은 겁니다. 그건 일반적으로 삭제할 일도 치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뇌과학을 발달시킴으로써, 일보다 본능을 후천적으로 치환하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 "하지만 그게 정말 행복일까? 개조된 뇌가 느끼는 가짜 행복이 아닐까?"
"행복에 가짜는 없어요. 뇌가 행복하게 느끼면 행복이죠. 그게 행복의 정의입니다."
이데알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게 해답일까? 자신이 추구해온 게 이건가?
- "여행한 자와 남은 자 모두가 변해버리면 토대가 사라져. 나는 변하지 않고 있을래."
- "그렇다면 내 인격은 전과는 다르다는 건가?"
"그냥 둬도 인격은 날마다 변해요. 뇌 내부 회로는 항상 새로 기록되니까요."
"나는 의식의 연속성을 말하는 거야."
"의식이 연속되지 못할 정도의 복원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다소 잃어버린 기억은 있겠죠. 하지만 그건 일상생활에도 있는 수준입니다."
- <죄수의 딜레마>
- 케무로를 비롯한 주판 담당자는 주판 기술만을 익혀야 하고 읽고 쓰는 일을 익히는 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케무로는 몰래 읽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읽는 사람들의 회의가 끝나고 우연히 그 방에 잘못 들어간 케무로는 테이블 위에 놓고 간 메모를 보고 만 것이다. 물론 짧은 메모에 읽는 방법 전부가 적혀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보다 수학적 능력이 뛰어난 케무로에게 그 메모는 충분한 힌트가 되었다. 그날부터 케무로는 많은 시간을 들여 해독 능력을 키웠다.
- 케무로에게 건네진 숫자,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케무로가 주판을 튕겨 계산해 다음 담당에게 넘기는 숫자, 그리고 주위 주판 담당자들이 마구 적은 산더미 같은 메모. 그런 숫자들이 조금씩 의미를 형성해가는 짜릿함에 도취된 케무로는 본래 업무의 효율이 눈에 띄게 떨어질 만큼 거기에 몰두했다.
- 그리고 어느 날 케무로는 깨달았다. 자신들이 하는 일의 의미를. 그것은 바로 웅대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신성모독 같은 계획이기도 했다.
- 케무로를 비롯한 주판 담당자들에게 계획의 내용을 알려주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주판 담당자들에게 계획의 전모를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계획에 별 필요가 없는 존재이기 대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핵심이기에 계획을 알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만약 주판 담당자들이 자신이 하는 행위의 의미를 알면 그 계산 결과에 손을 대고 싶은 유혹을 견디지 못할 공산이 컸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지면 결국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 됐어. 잘될 거야. 그러니 이런 일이 일개 주판 담당자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잠시 망설인 후 심호흡하고 서서히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 케무로는 돌이킬 수 없는 영역에 한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 회사의 존속과 당장의 이익 중 뭐가 더 중요하냐는 질문을 받고 료코는 할 말이 없었다. 료코와 같은 불만을 지닌 동료들이 단결하면 그래도 타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직장의 인간관계는 열악해 아무래도 그런 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 설마 아니지? 우연이겠지. 아니면 누군가 전파를 이용해 TV로 소리를 낸단 말인가?
- "당신, 도대체 어디서 목소리를 보내는 건가요? 케무로 씨." 료코는 떨면서 말했다.
"어디냐고 하면 대답하기 어렵네요. 당신이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서 보낸다고 해야 할까요?"
- "계산량을 늘리면 늘릴수록 가상현실은 현실에 가깝습니다. 결국에는 현실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까지. 가상 세계 속에 가상의 동물과 인간과 자연, 사회가 태어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런 가상 세계 속의 가상 인간은 인격도 있답니다."
- "전자라니 정말 기막힌 걸 용케 고안해냈어요.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빛나기도 하고 열을 내기도 하고 계산도 하고 통신할 수 있다니. 아, 현실에는 그런 게 있을 수 없지만."
- 주판으로 계산한 결과에 의도적으로 오류를 더했다. 이런 일을 신중하게 계속하자 가상현실에 다양한 현상을 자유롭게 일으킬 수 있었다. 이를테면 벽에 문자를 띄우거나 노이즈를 의미 있는 언어로 바꾸거나.
- "그런 건 아닙니다. 적어도 당신은 사회에 위해를 가하는 존재는 아니니까요.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상당히 많습니다.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그보다 더 적은 게 당신 같은..."
- "이건 그리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짧은 메시지를 당신만 알 수 있도록 전하겠습니다."
료코가 좀 더 세부적인 조건을 대려는 순간 느닷없이 TV가 꺼졌다. 서둘러 스위치를 누르자 더는 모래 폭풍이 나타나지 않고 일반 심야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방금 꿈이었나? 아니면 정말일까? 뭐, 됐어. 내일, 빨리 컴퓨터를 사보자. 지금 와서 컴퓨터 한 대 정도의 빚이 는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 다른 주판 담당자에게 알려줄까도 생각했다. 모두 주판이 아니라 전자계산기를 사용하면 계산은 훨씬 수월해진다. 아마도 이 방법을 생각해낸 케무로는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질투로 박해받을 가능성도 있었다. 숙고 끝에 케무로는 이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밝히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 가끔 찜찜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상 세계의 주민에게는 인권 같은 건 있을 수 없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들은 주판알과 메모용지 속의 존재였다.
- 그녀가 불행한 일을 당한다는 계산 결과가 나왔을 경우, 그 결과를 포함해 그녀의 운명을 거슬러 지워버렸다. 그럼 그 불행은 그녀에게 찾아오지 않게 된다. 그리고 불행을 경험하기 전의 그녀에게 재앙을 피하는 힌트를 간단한 신호로 알려준다. 그건 TV에 등장한 인물의 자연스러운 대사일 때도 있고 잡지 기사에 실린 경구일 때도 있고 전화에 혼선된 생판 모르는 사람의 대화일 때도 있다.
- "아무리 작은 간섭이라도 일단 차이가 생기면 그건 예상할 수 없을 만큼 확대되지. 자네가 간섭한 쪽의 계산 결과는 전부 파기하기로 했네. 앞으로 옳은 쪽의 수치를 베껴 재개할 예정이야."
- "곧 노력은 전혀 줄지 않았다는 소리야."
"하지만 저는 실제로 엄청난 양의 계산을 해냈습니다."
케무로는 넋을 놓고 말했다.
"자네가 편해진 만큼 다른 누군가의 계산량이 늘었을 뿐이야. 아니, 오히려 같은 프로그램이 여러 개 존재하게 되는 바람에 더욱더 계산량은 늘었겠지."
쓰는 사람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 "자네가 저지른 죄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어." 쓰는 사람은 눈을 감았다. "자네는 주판 담당자가 될 수 없어. 대신 쓰는 사람의 그룹으로 들어오게 하지."
케무로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 죄를 용서해주시는 건가요?"
"용서하는 건 아니야. 너무 커서 죗값을 치를 방법이 없어. 하지만 그런 일을 해내고 만 자네의 재능을 묻어버리는 게 더 죄겠지."
- "자네는 큰 착각을 하고 있군. 그 세계를 창조한 건 우리가 아닐세."
"예? 하지만 우리는 그 세계를 계산하고 있잖아요."
"계산은 창조와 달라."
- "그 숫자는 자네가 주판알을 튕겼기에 비로소 생긴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나?"
"물론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죠. 주판알을 튕기기 전부터 저는 답이 55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자네는 원주율의 1만 자릿수를 아나?"
"아뇨."
"그럼 계산으로는 구할 수 있나?"
"네, 시간만 충분하면."
"그 숫자는 자네가 계산해야 비로소 생기나? 아니면 계산 전에 이미 존재했나?"
- "계산 과정은 미리 정해져 있으니까 실제로 계산이 어떻든 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던 케무로는 자신의 말에 경악했다.
"답은 정.해.져. 있군요."
"그렇다네. 실제로 계산을 하든 안 하든 문제가 주어질 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네. 다만 그 답이 뭔지 우리가 모르는 것뿐이지. 원주율은 무한한 자릿수를 지니고 있지. 주판 담당자는 일정한 과정을 되풀이함으로써 그 숫자를 수백 자릿수든 구할 수 있어. 무지한 사람이 그 모습을 봤다면 주판 담당자가 원주율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실제로는 그게 아니라네. 원주율은 주판이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어. 주판 담당자는 그것을 창조한 게 아니라 발견한 데 불과해. 마침 땅에 묻혀있던 화석을 발굴한 것처럼."
- "우리 쓰는 사람은 세계의 시작을 설정했어. 즉 문제를 제시한 거야. 그리고 자네들 주판 담당자는 가정된 법칙에 따라 그 세계의 미래 모습을 계산한 거지. 자네들은 세계를 창조한 게 아니라 그저 계산 문제를 풀었을 뿐이야. 계산하지 않으면 세계가 어떤 모습이 되어가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계산으로 세계가 만들어지진 않아. 문제가 만들어졌을 때 답은 이미 존재해. 세계가 만들어졌다면 이미 그 미래도 존재하지. 자네는 일부러 틀린 수치를 계산 결과에 섞어 넣었어. 그 결과 계산 문제가 변해버렸어. 그래, 자네는 우리 쓰는 사람이 만든 것과는 다른 계산 문제-세계를 만들어낸 거야. 그리고 문제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 답도 존재하기 시작했어. 다시 말하지. 이제 계산을 계속하느냐 아니냐 와는 상관없이 자네가 만든 세계는 계속해서 존재해."
케무로는 자신이 한 짓을 이해하고 비명을 질렀다.
- TV 속에서 남성 배우가 말했다. "너는 요즘 너무 일을 많이 해."
케무로의 경고였다. 내일은 회사를 쉬자. 유급휴가는 이미 다 써서 결근이 계속되고 있으나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케무로가 쉬라고 했으니까.
- 료코는 시계를 봤다. 10시 24분. 즉 1024라는 소리다. 1024란 2를 열 번 곱한 숫자이다. 그리고 2월 10일은 내 생일이다. 틀림없어. 내게 보내는 사인이야. 그도 아마 동료일 것이다. 케무로는 동료가 있다고는 하지 않았으나 다 안다. 바로 연락해야지. 비밀을 공유하는 세계에서의 유일한 동료.
- 료코가 편지를 쓴 다음 날, 다른 프로그램에서 그 가수는 의자에 앉아 얘기하다가 갑자기 다리를 바꿔 꼬았다. 아아, 읽었구나.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왜 그런 게 필요한지는 생각할 필요 없어. 케무로가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당연히 필요하겠지.
꽉 찬 보스턴백을 안고, 료코는 밤거리로 나왔다.
미리 정해진 빛나는 미래를 향해.
- <미리 정해진 내일>
- 나는 여기에 놀라운 재능을 지닌 한 탐정에 대해 보고하려 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의 본명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이니셜인 시그마(∑)로 부르는 것을 양해하길 바란다.
- 시그마는 타고난 탐정이다. 그와 같은 두뇌를 지녔다면 어떤 직업을 가졌더라도 틀림없이 성공했겠으나 그는 과감하게 탐정이라는 고단하기만 하고, 실익은 적은 직업을 선택했다. 게다가 그는 배우자의 외도 조사 같은 종류는 전혀 받질 않았다. 그가 관여하는 일은 경찰이 두 손 든 어려운 사건으로 정해져 있었다.
- "너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경찰에게 마음대로 부림을 당해도 괜찮아?"
"경찰이 나를 마음대로 부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마!"
- "지금의 네 발언에 두 가지 정도 논평해도 될까?"
시그마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아, 좋고말고!"
나는 심호흡해 흥분을 가라앉혔다.
"우선 첫 번째는 말이야, 나는 불가능범죄를 해결한 기억이 없어."
- "완전히 달라. 무엇보다 단어 정의부터 말하자면 불가능이란 실행할 수 없다는 뜻이야. 만약 실행되었다면 그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소리지."
"맞아, 논리적으로는 그렇지만..."
"논리는 아주 중요해. 그 범죄는 불가능범죄가 아니었어. 스스로 진상을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라고 바로 불가능범죄라는 말을 꺼내는 건 나쁜 버릇이야. 불가능범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만약 누군가가 불가능범죄라는 말을 꺼낸다면 그 녀석이 말하는 '불가능범죄'는 불가능하지 않거나 범죄가 아니었다는 소리지."
"알았어. 불가능범죄 얘기는 이쯤에서 접지. 불가능범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상관없으니까."
시그마는 싱긋 웃었다.
"그럼 두 번째로 넘어가지. 내가 사건을 해결하고 경부는 고맙다고 했어. 여기서 어떤 점이 문제가 되지?"
"문제라는 건 아니야. 그저 경부는 그거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지. 네가 해결하지 못했다면 사건은 미궁에 빠져 결국 경부의 실책이 되었을 거야. 그런데 실제로는 사건은 무사히 해결되었고 경부의 공이 되었어."
"그래서?"
"'그래서'라니? 너는 분하지도 않아?"
"전혀."
- "경부가 가져온 사건 대부분은 그저 그랬어. 머리 쓸 필요도 없이 무조건반사처럼 대답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어. 하지만 아주 드물게 기가 막힌 향기를 품은 사건을 가져와. 그럴 때 그는 너무나 위대해서 내 눈에는 후광이 있는 것처럼 보여. 맞아, 달콤한 향기를 발하는 사건 자체가 내게는 충분한 보수야."
- 시그마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는 아직 이 사건을 가치 있다고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급하게 달려온 경부의 말을 들은 후에는 늘 명상을 시작했다. 대체로 2, 3분 후에는 눈을 뜨고 한마디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건에는 매력이 없네요." 그리고 별거 아니라는 듯 범인과 범행 경위를 한바탕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품하면서 경부를 돌려보내는 게 정해진 전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한 시간에 걸친 명상 후 시그마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부님, 현장으로 데려가주세요. 이 사건은 아주 훌륭합니다."
- "네 말은 너무 이상해. 마치 초현실적인 현상이 일어난 듯 말하네. 뭐 초현실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아주 희귀한 일이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런데 내 추리가 맞다면 일어난, 또는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일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현상이야. '현상'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말이야. ... 이게 피난소인가, 정말 튼튼하게 만들었네."
- <전망 좋은 밀실>
- "부탁이니까 그만해요! 그런 지독한 얘기를 지어내는 건 그만둬요!"
아야코는 엎드려 울었다.
"아니에요, 지어낸 얘기가 아니에요."
하치미는 무릎을 꿇고 아야코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이건 현실 세계의 진짜 이야기예요. 하지만 내가 잠든 사이에는 괜찮아요. 내 꿈속에서 당신은 이렇게 행복하니까."
- "정말요? 당신이 꿈꾸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행복해요?"
"그래요. 그러니까 조심해요. 절대 나를 깨우지 않도록.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해요. 아무렇게나 내 몸을 흔들지 말아요. 나를 짜증 나게 하지 말아요. 아주 조용히 옆에서 살아요."
아야코는 마구 울면서 끄덕였다. 하치미는 아야코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다가 아야코의 얼굴을 가슴에 품고 꼭 안았다.
- 푸른 하늘. 꿈의 하늘. 하지만 눈을 비비면 현실의 하늘이 겹쳐 보인다.
노란 하늘. 갈색의 독 구름이 깔려 있다.
하늘 아래에는 해골처럼 녹슨 건물이 늘어서 있고, 그 안에는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모든 것은 그 여름에 일어났다.
사람들이 만든 인공 별이 대기 속을 통과해 사람들 모르게 독을 뿌렸다.
- 모두가 예언을 알았으나 아무도 예언을 믿지 않았다.
그랬다. 그건 벌이었다.
오만한 자들은 자기만 생각해 다른 이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모두 평등해졌다. 누구나 자유로워졌다.
왜냐면 이 재난과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졌으니까.
- 그러므로 나는 괜찮다.
세계가 멸망해도.
사람들이 고통받아도.
내 마음에 불안이 깃든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누군가 세상을 회복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날 밤, 나는 꿈을 꿨다.
잃어버린 세계의 꿈.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여름은 무사히 끝났다.
- 아기는 바싹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꿈속이니까)
슬픈 꿈이었다.
하지만 깨지는 않았다.
내가 깨면 그곳은 재앙의 세계이니까.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내가 사랑하는 아기가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진다.
나는 모두를 위해 계속 꿈꾸기로 했다.
모든 사람은 현실 세계에서 아주 비참하다.
꿈속에서는 내가 비참하게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 나는 꿈속에서 남편을 찾아 헤맸다.
남편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꿈속이니까)
나는 깨기만 하면 이 불쾌한 꿈이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를 위해 일부러 깨지 않았다.
- 어차피 꿈이니까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어차피 꿈이니까 관계없는 일이지만.
꿈이라는 걸 알아도 나는 남편과 아이를 원했다.
어차피 꿈이라면 행복한 꿈이어도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를 위해 꾸는 꿈이니까.
그게 나쁠 리 없었다. (꿈속이니까)
- "나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야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계속 꿔야 하는 꿈이라면 즐거운 꿈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나만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 아아, 그랬구나. ... 나, 당신 가족 같은 건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어. 같이 살 수만 있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
- "이대로 조용히 꿈꾸게 해 줘. 부탁이야. 세계의 희생양이 되었으니 이 정도 심술은 받아줘야 하는 거 아냐?"
...
"싫, 다, 고."
- "왜 이런 짓을?"
"그야 나는 죽고 싶지 않으니까."
- 아야코가 눈을 비볐다.
"당신의 진짜 모습이 보이네."
창밖에 펼쳐진 노란 하늘에는 갈색의 독 구름이 깔려 있었다.
- <눈 비비는 여자>
- "그게 기사를 읽으면 바로 알 텐데 '묻지마살인'이나 '사고'라는 것은 경찰이 멋대로 정하는 거야. 실제로는 둘 다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여. 사람이 쓰러져 있고 주위에 원인으로 보이는 게 있으면 일단 사고이고 원인을 모르면 묻지마살인으로 보는 거지."
- "뉴스가 되지 않은 건, 뉴스성이 없기 때문이지."
"무슨 소리죠?"
"예를 들면 교통사고로 연간 수천 명씩 죽는 걸 알아?"
"잘은 모르지만 그런 것 같더라고요."
"매일 10명 이상 죽는데 그게 전부 뉴스가 될까?"
- "아주 드물게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부분은 아니야. '싫다 싫다 하는 것도 좋다는 증거'는 의외로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야."
"예외적인데 속담이 되었네."
"속담이 다 옳은 건 아니잖아. 무엇보다 '싫다 싫다 하는 것도 좋다는 증거'라면 정말 싫은 사람에게는 뭐라고 해야 좋을까?"
"그렇구나. '좋아'가 좋다는 의미이고 '싫어'도 좋다는 의미가 되면 뭐라고 대답해도 좋다는 뜻이 되는구나."
"그러니까 '싫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싫어'로 들어야 해. 적어도 내가 하는 '싫어'라는 말은 정말 '싫다'는 의미니까. 이해했어?"
-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르지. 너 같은 타입의 사람에게 에둘러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오해를 부르기 마련이야. 너무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분명하게 싫다고 알리는 게 본인을 위해서이기도 해."
- "말을 듣고 보니 당장 대답을 듣지 않는 편이 좋을 것도 같네. 만에 하나 네가 '싫어'라고 하면 죽고 싶어 질지도 모르겠거든.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말해두겠는데 나는 네가 죽고 싶은 심정이 들든 말든 싫으면 싫다고 할 거야. 그러니까 내가 싫다고 해도 그걸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대답을 늦춰줄 수도 있어."
"고마워. 그게 낫겠다."
"그럼 언제 대답하면 좋을까?"
"어떨까? 지금 당장도 괜찮을 듯하고 2, 3년 더 있다가 들어도 될 듯도 하고-"
"잠깐만, 어쩌자는 거야? 벌써 내 머릿속에는 대답이 정해져 있는데."
"그게 아니야. 그냥 나는 아직 관측하지 못했어."
"관측?"
"네게 대답을 들음으로써 나는 네 마음을 관측하게 돼. 그 시점에서 대답은 어떤 쪽으로든 수렴되겠지."
"그거, 혹시?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얘기야?"
"같은 게 아니라 바로 그 얘기야."
- "적은 '보이지 않는' 게 아니야. '기억할 수 없는' 거지."
- "'기억할 수 없는 적'과 '보이지 않는 적' 중 어느 게 더 까다로울까요?"
"'기억할 수 없는 적'이야. '보이지 않는 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속성만 이해하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어. 하지만 '기억할 수 없는 적'은 공격받은 일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니 '기억할 수 없는 적'에게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도 대처 방법을 몰라. 그 녀석이 빠른지, 큰지, 힘은 센지, 날 수 있는지 몰라. 아무리 싸워도 그때마다 미지의 적과 싸우는 셈이지."
"그렇다면 이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거의 절망적인 거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아. 나는 이미 몇 가지 희망을 찾아냈어."
- 앞으로 몇 번의 기회가 있을까? 확률 계산으로 알아낼 수도 있으나 지금은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내 직감은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알려왔다.
- "그건 아니겠지. 그들은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어. -고전역학적인 세계관에서는 그래."
"또 이상하게 말을 돌리네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물론 양자역학적 세계관에서는 그들의 모습은 조금 전까지 확정되어 있지 않았어."
"어느 쪽 세계관이 옳습니까?"
"둘 다 옳아. 그보다는 마이크로 수준에서는 둘을 구별할 수 없어."
"그러니까 괴물의 모습은 훨씬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생각해도 되고 조금 전까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된단 말입니까?"
"그렇지. 그리고 어느 게 옳은지 확인해봤자 소용없어."
- "그렇겠지. 만약 가능해서 실행하면 그 비디오에는 이와 같은 모습이 찍혀 있겠지."
"양자역학적 세계관에서는 그것도 조금 전 확정됐다는 말인가요?"
나는 끄덕였다.
"그리고 물론 고전역학적 세계관에서는 처음부터 같은 모습으로 찍혀 있는 셈이지."
"당신이 한 기묘한 행동은 양자역학적 세계관에 근거한 건가요?"
"그래."
- "하지만 다른 해석도 있잖아요. 다세계 해석이라든가. 이거라면 관측 문제는 회피할 수 있지 않나요?"
"아이고, 정말 잘 아네. 하지만 다세계 해석이 관측 문제를 피할 수 있다는 건 오해야."
"왜요?"
"간단히 말하자면 다세계 해석에서 파는 항상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다만 하나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파 안의 한 점일 뿐이고 파 전체는 무수한 세계 속에 한 점씩 분산해 존재해."
"정말 합리적이네요.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가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말이군요. 이로써 관측 문제는 해결되지 않나요?"
"그러나 전자를 슬릿에 통과시키는 실험을 통해 밝혀졌듯 물체는 자신과 간섭해."
"그게 왜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자신의 분신과 상호 간섭한다, 이상하지 않아?"
"물체란 원래 그런 거라 여기면 되잖아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왜 인간이 물체를 관측하면 그때까지 존재했던 다른 세계의 물체 사이의 상호 간섭이 사라질까? 그러니까 관측 문제가 형태를 바꿔 부활하는 거지."
- <망각의 침략>
- "불로소득이지. 둘 다 상당히 편한 신분이네."
전혀 편하지 않았으나 작가가 그리 편한 직종이 아님을 아무리 설명해도 결국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런 경험이 너무 많았던 터라 나는 별말 없이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 "입과 손만 있으면 되는 장사네. 너랑 같구나."
이카리는 옛날에도 말이 곱지 않았다.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다.
- 조금 전, 이름은 없다고 했는데... 하지만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대화가 이어진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이 상황에서는 침묵이 가장 견디기 힘들 듯했다.
- "이게 기존에 생각했던 시공 구조의 좌표축 표현이야."
하지만 잉크가 나오는 대신 끼익 하는 마찰음만 났다.
"이래서 나는 옛날 칠판이 좋더라. ... 에잇, 그림 따위 필요 없어. 머릿속 스크린에 떠올리라고."
- "미래로 가기 위해 타임머신처럼 미래를 구기는 연구는 필요하지 않아. 무엇보다 미래는 우리가 가지 않더라도 기다리면 상대가 찾아오니까."
- "과거로 가는 데는 시공을 구겨 미래를 과거로 만들면 돼. 이게 기존 타임머신의 원리야. 그러나 이 방법에는 커다란 결점이 있어. 즉 시공을 구기려면 태양 몇 개 혹은 은하계 몇 개라는 말도 안 되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 방식에 따라서는 마이너스 에너지도 필요하지."
- "왜 시간 여행 연구 같은 걸 시작했어? 애인이 사고로 죽기라도 했어?"
"아니, 왜 애인이 사고로 죽어야 시간 여행 연구를 시작하지?"
"사고 전으로 돌아가 애인을 만날 수 있잖아."
"새 애인을 만들 귀중한 기회인데?"
"질문이 틀렸네. 계속해."
- "원폭을 실제로 만들어 핵실험을 하면 막대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그러나 같은 일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하면 필요한 건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전기에너지뿐이야."
"하지만 그건 그저 시뮬레이션일 뿐이잖아."
"원폭은 그렇지."
- "너는 '단순한 시뮬레이션'이라고 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시뮬레이션 밖에서 보는 시각이지. 하지만 생각해 봐. 일테면 시뮬레이션 원폭이라도 시뮬레이션 안의 사람에게는 진짜 원폭이잖아."
- "하지만 그건 시뮬레이션 안의 사람 얘기지. 우리와는 상관없어."
마루노는 갑자기 침묵했다. 그리고 30초를 꽉 채워 멍하니 우리를 둘러본 후 느닷없이 후련한 표정을 짓더니 짝 손뼉을 쳤다.
"그렇구나, 그랬어!"
- "그러니까 너희들은 자신이 시뮬레이션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이번에는 우리가 30초간 침묵을 지킬 차례였다.
- "다들 괴델의 불안정성 정리는 알지? 두 번째 말이야."
"무슨 정리?" 이카리가 안쓰러운 목소리를 냈다.
"두 번째라면 '자연수론을 포함한 숫자의 형식적 체계에 모순이 없다면 그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 증명할 수 없다'라는 거 아니야?"
- "그럴 생각도 있었지. 하지만 여러 번 역사를 바꾸면서 깨달았어. 역사란 강물의 흐름 같은 거야.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해도 그만큼의 반동이 반드시 어디선가 일어나."
"하지만 할 만한 가치는 있었잖아."
"뒤에 오는 균형을 맞추기 위한 재해는 결국은 내가 일으킨 셈이 돼. 백만 명의 인명을 구하기 위해 다른 백만 명의 인명을 빼앗을 수 있어?"
"어이! 그럼 시간을 바꾼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없잖아." 아와비가 말했다.
"의미는 있어. 전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 정도의 소규모 변경이라면 효과는 계속되지."
-"맞아. 확실히 시뮬레이션 안에 있는 인간은 시뮬레이션 밖의 시간 흐름을 인식할 수 없어. 그러므로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그 세계의 진화는 거기서 끝나고 타임머시이인이 과거로 돌아간 시점에서 재출발해." 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까 주관적으로는 그 시점에서 세계는 다른 시간축을 따라 다시 진화를 시작하지."
마루노는 하품했다. "이제 됐다. 누를게."
이카리와 아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바꿔 말하면 타임머시이인이 과거를 향해 출발한 순간 그 시간축은 소멸하고 말-
- <미공개 실험>
- "아니야, 식물과 동물은 공존해. 똥이 비료가 되고 곤충이 꽃가루를 나르고 씨앗을 멀리 운반하고..."
"그건 동물이 존재한다는 걸 전제로 한, 어차피 착취당할 바에는 착취자를 이용하자는 전략이야. 가령 동물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식물은 대체 수다을 찾았겠지."
"그러니까 너는, 식물은 착취당하는 자이고 동물은 착취자라는 거야?"
"물론 그렇게까지 단순화할 수는 없어. 하지만 식물만 있는 세계라면 물어뜯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데 동물이 나타남으로써 찬탈이 이루어진 건 사실이야."
"식물도 기생식물과 식충식물이 있어."
"그건 이 논의의 본질은 아니야."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이데알은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
- "평행 진화인가? 아니면 어떤 공통의 기원을 지니고 있나?"
"그 분제는 극히 복잡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당신이 이 일에 관심이 있다는 것만은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같은 기원을 지녔다면 우리에게도 가능할 텐데."
- "당신들 문명은 배려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
"이 문명을 구축하기 위해 오랜 세월이 필요했죠. 모든 개인이 협조적으로 행동하면 세계는 훨씬 살기 편해집니다. 이 단순한 사상을 모든 아케르나르인에게 침투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 "너희들은 그 방법에 정통할지 모르나 내가 그런 걸 하면 앞으로의 인생에서 철학적인 문제로 계속 고민하게 될 거야."
- "아니, 기본 아이디어는 다이슨이라는 고대 자연 과학자의 생각이지만."
- "처음 계획대로 추진할 겁니다."
"뇌를 개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데알은 잔뜩 흥분했다.
"인류는 다른 접근으로 이상 사회를 실현했어. 나는 인생을 살면서 두 개의 이상 사회를 만났어.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 문명은 아주 쉽게 이상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거야. 이건 매우 기쁜 소식이야."
- "아케르나르계 사람이 아니면 협조 전략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반드시 선택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상대와 전력이 비슷할 때는 보복 전략을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지구 인류에게 시행하겠다는 개조는 순수한 이타주의자로 만드는 게 아니라 아케르나르 문명 지상주의자로 만들겠다는 말이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문명과 접촉할 때마다 그렇게 조처했습니다. 다만 뇌 개조를 할 수 없었던 문명은 괴멸시켰습니다. 그럼으로써 아케르나르계에 대한 현저하거나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너희들은 평화적으로 융합했다고 했어."
"전쟁에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늘 상대를 압도했으니까요."
- "냉정하게 생각해 봐. 너희 문명 안의 이타주의를 은하계 안의 모든 문명으로 확장하면 돼."
"그런 이상만 늘어놓으면 이기적인 문명과 접촉하는 순간 먹혀버려요. 물론 은하계를 모두 아케르나르 문명으로 통일하면 당신 제안을 고려할 수 있겠죠. 다만 그래도 다른 은하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어요."
- 이게 뭐지? 태양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저건 내가 설계한 세계야. 하지만 내가 상정했던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되고 있어.
- 저건 인류가 고대부터 추구해온 이상향이 분명할 텐데. 에너지도 물질도 정보도 필요한 건 충분히 있어. 저 세계에서 싸울 일은 없을 텐데.
하지만 그들은 무기를 사용했다.
이데알은 구역질이 올라왔다.
- 만약 남아도는 자원을 무기 개발에 쓴다면?
이데알은 격렬한 후회에 휩싸였다.
나는 인류의 특성을 잘못 파악했나?
- 아케르나르 대제국의 존재를 고려하면 이게 잘못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유일한 선택지일지 모른다.
- 그 모습은, 파충류로도 곤충으로도, 그리고 거인처럼도 보였다.
- <죄수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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