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고바야시 야스미] 인외 서커스

일루젼 2023. 1. 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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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바야시 야스미 / 민경욱
출판 : 하빌리스
출간 : 2020.06.25


       

고바야시 야스미의 <앨리스 죽이기>, <클라라 죽이기>, <팅커벨 죽이기>를 즐겁게 읽었던 터라 저자의 이름만 보고 선택했다.

 

아. 개인적으로 '서커스'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도 선택에 영향을 끼쳤다. '진짜' 서커스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태양의 서커스>나 <동춘 서커스> 같은 진짜 쇼보다 신년특집 TV쇼에서 보여주던 서커스가 더 기억에 남는다. 클로즈업 화면으로 봤던 때문일까. 공중그네 사이로 몸을 날리던 곡예사의 표정이나, 끝없이 올라가는 것 같은 접시 같은 것들이 바로 옆에서 본 것처럼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더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 외에 <서커스 소녀의 비밀> 같은 소설이나 <소녀 곡예사>, <소년 마법사> 같은 곡들이 떠오른다. <꼭두각시 서커스>도 좋았지.) 

 

피에로에 관해서는... 조커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들은 좋아하지만 피에로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 패스. 

 

<인외 서커스>는 인크레더블 서커스 단원들과 흡혈귀, 그리고 흡혈귀 사냥꾼들의 조직인 컨소시엄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바야시 작가의 특기인 '비틀어 겹치기'가 사용되었지만, 이전 작들에 비하면 다소 가볍게 느껴진다. 

 

좋게 해석하자면, 마술사다운 심리 트릭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호칭이나 단어에 신경을 쓰는 편이라 이미 장면이 전환되는 부분부터 예상하고 읽었기 때문에 깊은 감흥은 없었다. <기억 파단자> 이후 오랜만에 등장하는 도쿠 씨가 잠시 반가웠을 뿐. 마지막 반전은 강렬하기 보다는 '굳이?'라는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다.

 

<인외 서커스>의 매력은 오히려 이입 대상의 전환에 있다고 생각한다. 흡혈귀들이 펴는 논리는, 언뜻 보면 죄다 궤변처럼 들리지만 매우 익숙하기도 하다. 입장이 바뀌었을 뿐 사람들이 흔히 펴는 주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란도가 겪는 좌절과 실패와 미티아를 겹쳐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는 낯선 것에서 익숙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신년 들어 읽은 책들에서 접한 '생존을 위해 살생할 권리', '호흡의 길이'가 다시 등장하며 '완벽이란 없다'와 '너는 곧 나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책 자체는 추천하기는 좀 어렵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어느 한 포인트도 뚜렷하게 '이거야!' 싶지는 않아서 다소 조심스럽다. 기존의 고바야시 야스미 팬들에게는 오히려 낯선 느낌을 줄 수도.

회수되지 않은 복선들이 많은데, 아무래도 확장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인 것 같아 리뷰를 다 쓰고 확인하다 보니 저자께서는 이미 별이 되셨다.

 

많은 작품들을 즐겁게 읽었던 입장에서, 평안을 기원 드리며. 

끝.  

 


   

 - "서로 보지 않고 듣지도 않아. 그런 규칙이 있지."

"하지만 실제로는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지?"

"그다지 보진 않아. 어둡고, 대개는 그늘져 있으니까. 들리는 건... 그치, 배경음악이라고 생각하면 돼."

 

- "기억나지 않는다면 아마 안 봤을 거야. 서커스를 봤던 기억이 지워지긴 힘드니까."

 

- 남자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선은 현상 파악이야. 그리고 대책을 생각하자. 

 

- 그럼 왜 공격하지 않는 걸까? 아마도 철제 파이프와 와이어 공격을 연달아 받고 경계 중일 것이다. 내가 다른 덫을 놓았을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도망쳤나? 아니야, 그건 아니지. 자신감 과잉인 녀석들이 그 정도 일로 겁먹진 않았을 거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일단 물은 사냥감은 반드시 처리한다. 그러지 않으면 녀석들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녀석은, 내가 녀석이 있는 곳을 파악한 뒤라 생각하고 경계하는 게 아닐까? 아마 판단이 서지 않으리라. 아직은 내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 왜 공격하지 않지? 그렇구나. 내가 총 쏘기를 기다리는구나. 완전 자동이 아니니까 일단 쏘면 다음 발포까지 살짝 틈이 생긴다. 그 순간에 공격할 셈이구나. 

 

- 그러나 부상 정도를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아마도 손을 보는 순간 녀석이 덮쳐올 것이다. 

 

- 역시 도박하는 수밖에 없다. 다음은 자신의 반사 신경에 모든 걸 맡기자. 

 

- "... 그거 말고 또 뭘 숨겼을까?"

"이제는 지혜와 용기뿐인데."

 

- "죽이지 않으면 먹혀. 이건 정당방위야."

"학대하고 죽이는 게 정당방위야?"

"아아. 가능하면 편하게 죽이고 싶어. 그게 우리도 좋아. 하지만 너희들이 쉽게 죽어주질 않잖아."

"당연하지. 얌전히 죽어주는 사람이 어디 있냐? 생물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는 건 정당한 반응이야." 

"그럼 선택지는 없어. 우리 컨소시엄은 흡혈귀를 확실히 죽일 뿐이야. 고통스러운지 아닌지는 상관없다고."

 

- "희생자도 적은 편이야. 흡혈귀 달랑 하나에 부대가 전멸하기도 하잖아."

"나는 싫어. 내 명령으로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게. 이번에도 얼마나 살지..."

"희생자는 매번 나와. 하지만 그런 희생자가 없으면 녀석들의 섬멸은 불가능해. 이번에는 그래도 희생자가 적은 편이었고..."

"그것만이 아니야. 우리는... 나는 퀸 비를 놓쳤어."

"세 마리 중 한 마리야."

"한 마리면 충분하지. 그 흡혈귀는 동료들에게 전할 거야. 그리고 그 결과 더 많은 병사가 생명을 잃겠지."

 

- "옆구리에 끼고 있었어. 그래서 팔을 많이 펼치지 못했잖아?"

 

- "그건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어둬서 나쁠 것도 없지."

"그런가? 그럼 유감이네."

"뭐가 유감이야?"

"퀸 비의 말은 이제 들을 수 없어."

 

- "응. 팔은 오른쪽, 머리는 왼쪽 옆구리에 꼈지."

 

- 란도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 

절대 돌아봐선 안 돼.

란도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틀림없이 봐선 안 될 것을 보게 될 거야. 하지만 안 보고 넘어갈 수는 없을 듯했다. 

 

- 란도는 확신했다. 

이 녀석은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다. 성격은 물론 존재 자체가 이상하다. 

"대장,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아?"

 

- "아이디어가 될 만한 것도, 장치도 없네."

"그렇다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을 때는 일단 도망치는 게 최선책이야."

 

- "그 말은 대장이 했지."

"아까까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미안해."

"누구나 착각할 때가 있지. 신경 쓰지 마."

"그 바보 같은 대화는 무슨 비밀 신호야? 나를 속이려고?" 

키리피시는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랜돌프는 속임수에 능하다더라. 안심시켜 다가오게 해서 덫을 놓는다고."

 

- "도망치라니 어디로?" 피에로가 물었다.

"그건 알아서 해. 내가 말하면 전부 들키니까."

 

- 키리피시는 생각했다. 

만약 이게 그냥 보이는 대로의 조화가 아니라 흉악한 무기라면, 만진 순간 무수한 바늘이 발사되어 몸에 부식성 약물이 주입될 수도 있어. 그럼 꽃을 만지지 말고 직접 이 남자를 공격할까? 아니야, 그거야말로 상대가 바라는 바일지 몰라. 정말 이게 레이저 총이어서 내 몸을 두 동강 낼지도 몰라. 

망설임은 한순간이었다. 

 

-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일단 상황을 확인하자. 공격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 흡혈귀는 살해당하지 않는 한 일단 죽을 일은 없다.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몇 세기는 살 수 있다. 즉 인간은 살해당한다고 해도 앞으로 수십 년 혹은 백 년 정도의 시간을 잃는 데 불과하나 흡혈귀는 수백 년, 수천 년의 시간을 잃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보다 흡혈귀의 생명이 훨씬 귀중하다. 흡혈귀는 자신의 생명을 최대한 소중히 여겨야 한다. 

 

- 퀸 비와 싸운 적이 없으므로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모르나 그리즐리가 실력을 인정한 것을 보면 상당히 강했을 것이다. 

 

- "'보였냐,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키리피시가 말했다.

"길게 늘어놓지 말고 결론만 말해. 보였어?"

"응. 보였어. 그게 왜?"

 

- "...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그리고 너는 이미 대답했어."

"무슨 소리야? 나는 들켰는지 아닌지 말한 적 없어."

"들키지 않았으면 '들키지 않았어'라고 분명히 말했겠지. 얼버무리는 걸 보니 들킨 게 분명해."

 

-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피에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보이도록 화장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입으로 된다고 말하긴 그러네. 애당초 돈을 받고 보여주는 기술이니 그냥 보여달라면 안 된다고 할 수밖에."

"하지만 밖에서 연습하는 걸 보는 건 내 마음이잖아."

"그야 그렇지. 그래서 누가 보더라도 뭐라고는 안 해. 하지만 봐도 되냐고 물으면 그러라고 하긴 힘들다고."

"그러니까 이런 소리구나. 봐도 되냐고 물으면 안 된다고 대답하겠지만, 밖에서 연습하는 걸 본다고 말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단 거지?"

"아아. 뭐 그렇지."

"들었어? 봐도 된대."

 

- "그렇게 느꼈을 뿐이야." 슈티는 피에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누구나 착각할 때가 있지."

"이래 봬도 나는 엔터테인먼트 프로야. 진짜와 영상 정도는 구별해. 무엇보다 프로젝션 매핑에는 거대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그런 걸 어디에 숨겼겠어?"

 

- "의심하는 건 아니야. 다만 조금 진정하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젠장! 어떻게 말해야 알아듣겠어?!"

"랜디, 더는 무리야. 그런 공포는 실제로 본 사람만 알 수 있어."

 

- "내가 녀석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 가져와."

"나쁜 녀석이 아닐 수도 있는데?"

"나쁜 녀석이란 걸 안 다음에 무기를 준비하면 너무 늦어."

 

- 리지의 말이 멈췄다. 진도 그 이유를 바로 알았다.

둘은 무시무시한 전율에 휩싸였다. 그것은 위젤의 살기와는 전혀 달랐다. 위젤의 그것은 소년 특유의 활기와 광기가 배어있었는데 이 살기는 훨씬 음습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를 거부하는 강렬한 악의를 흩뿌리고 있었다. 

 

- 생각이 지나쳤나?

진이 생각했다. 

너무 흥분해서 있지도 않은 살기를 느낀 걸까. 하지만...

둘이 동시에 느꼈으니 우연 같지는 않았다. 역시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 

 

- "여자, 너는 안 오나?"

캐터피라는 오른손으로 리지의 발목을 잡은 채 말했다. 공중에 붕 뜰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펄럭였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름답다고 생각했겠다. 진은 그렇게 느꼈다.

 

- "그야 그랬겠지. 물속의 물고기들은 낚시에 걸리고 싶겠어? 하늘을 나는 새는 총에 맞고 싶겠냐고? 농장의 가축들은 고기가 되고 싶겠니? 너희들은 살해당하고 싶지 않겠지. 그건 알아. 하지만 그건 상관없는 일이야. 세상은 항상 죽이는 쪽의 의사가 먼저니까."

 

- 란도는 마술 시작 전에 숨을 쉬지 않는 시간은 기껏해야 1분 정도라는 인상을 준다. 이로써 처형 완료까지의 제한 시간은 1분이 된다. 하지만 이건 거짓말이다. 훈련으로 란도는 3분 이상 숨을 멈출 수 있다. 일본의 해녀 중에는 5분이나 숨을 멈출 수 있는 사람도 있다니까 그리 놀랄 만한 시간은 아니다. 게다가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내부에 완전히 물이 찰 때까지 1분 정도 걸린다. 즉 관객이 1분 정도라고 생각하는 제한 시간이 실제로는 4분인 셈이다. 

 

-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지, 좀처럼 기억나질 않았다. 

좋은 소린지, 나쁜 소린지.

지금. 과감하게 숨을 내뱉고 물을 들이켜면 편안해질 듯했다. 

아니면 앞으로 1분, 고통을 참을까. 

 

- 책임감이 강한 아야미는 틀림없이 자신이 바로 깨닫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할 거야. 모든 건 내 탓이지 그녀에게 잘못은 없어. 하지만 그런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눈물이 나오는지 아닌지조차 모르겠다. 

 

- "그럼 좀 봐도 될까요? 다만 밖에서 안을 보기만 할게요."

도쿠 씨는 물끄러미 아야미의 얼굴을 봤다. 

"오호, 조심스러운 사람이네. 그래, 괜찮아. 집은 이쪽이야."

 

- 도쿠 씨는 울창한 숲 속을 마치 조깅이라도 하듯 성큼성큼 나아갔다. 게다가 진로 변경을 최소한으로 하고 몸을 좌우로 살짝살짝 움직여 나무 사이를 스치듯 지나가서, 마치 직진하는 듯 보였다. 뒤를 쫓는 아야미는 도저히 그 속도로 걸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나무에 부딪히며 옷이나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이 도쿠라는 노인은 숲 속 길을 숙지하고 있나? 아니면 신체 능력과 동체 시력이 크게 발달했나?

"아가씨, 몸을 아주 잘 쓰네." 도쿠 씨가 말했다.

"제가 몸을 잘 쓴다고요? 이렇게나 헐떡이고 있는데요?"

"아가씨는 좀 천천히 걸으라거나 잠깐 서라는 말도 없이 같은 속도로 따라오고 있어. 자신의 움직임에 상당한 자신이 있다는 소리지. 자네, 무슨 일을 하나?"

 

- "지금은 너무 조용하니 딱 좋지 않나요?"

"너무 조용해? 말도 안 돼. 나는 좀 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지낼까 생각 중이었는데."

 

- "어때. 여기에는 아무도 숨어있지 않아."

도쿠 씨가 말했다. 아야미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살짝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는 일은 그리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 "아니야." 도쿠 씨는 기분 좋게 말했다. "오히려 자네의 행동력에 놀랐지. 깊은 숲 속까지 나를 따라올 신체 능력을 지녔으면서 오두막에 대한 경계도 게을리하지 않았어. 자네 종목은 도대체 뭐야?"

"저는 마술사 보조예요."

"그렇군. 마술사라! 늘 겉이 아니라 속을 알려 하겠군."

"마술사는 제가 아니에요."

"서커스에서 공연한다니, 테이블 마술 같은 건 아니겠지. 대단한 장치가 있는 탈출 마술이나 사라지는 마술 종류일 게야. 그렇다면 자네한테도 마술사와 다름없는 운동 능력과 재치가 요구되겠지."

아야미는 깜짝 놀랐다. 순간 도쿠 씨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는 듯했다. 이 할아버지, 보통 사람이 아니야. 

 

- "어머, 일본식 화로네요." 아야미가 말했다. 

"아아. 이거 아주 편리해. 조리만이 아니라 밤에는 조명 대신 이용할 수도 있고 겨울에는 난방도 돼."

 

- 도쿠 씨가 미끼를 던져 반응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입을 다문 걸 보니 맞혔네."

"비겁해요. 심리적인 트릭을 이용해 말을 끌어내다니."

"마술사라면 심리 마술을 아는 게 당연하지. 이제 솔직해지면 어때?"

"왜 생판 남인 당신에게 말해야 하는데요?"

"생판 모르는 남이니까. 가까운 사람에게 약한 속내를 털어놓기는 힘들지."

 

-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마술사는 없어. 내로라하는 마술사인 후디니도 탈출 마술에 실패해 목숨을 잃었잖아."

"그건 영화에서 만들어낸 얘기죠. 사실 후디니는 술 취한 학생에게 배를 맞아 죽었어요."

"어느 시대나 멍청한 학생은 있지."

 

- "단 한 번의 실패로 자신감을 잃었다는 말은, 그러니까 그 이전이 자신감 과잉이었다는 거 아닌가."

 

- "그 남자는 자신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사실은 반대였어. 인간은 반드시 실패하지. 실패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어리석은 법이야."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해선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어요."

"물론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는 일과 실패할 때의 대책을 만들어두는 일은 별개 문제야. 화재보험은 만일의 경우, 화재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들지. 하지만 불조심을 게을리하진 않아. 반대로 불조심하고 있다고 화재보험에 들지 않는 사람도 어리석어. 아무리 주의해도 화재는 일어나려면 일어나지. 그 남자는 자신을 과신했어. 자신은 실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그건 교만에 불과해. 인간은 모든 걸 예상할 수 없어. 그러므로 모든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고 그에 대비할 필요가 있지. 그래도 실패해. 하지만 현명한 자는 실패의 위험 부담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지."

 

- "그는 다시 일어서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진짜로 깨닫지 못할 테니까."

 

- 맞아. 나는 괜한 일로 고민했네.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를 믿는 것뿐이구나. 

 

- 쿠와이는 리지의 작전을 이해했다. 논리로 이해한 게 아니다. 직감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오랫동안 서커스단에서 함께 일한 동료이기에 알 수 있는 감각이었다. 

 

- 아아. 나, 죽었구나. 곧 장례식이 시작되겠네. 지금, 관 속에 있구나. 그 관을 그대로 쓰면 될 텐데 다들 기분 나쁘다고 하겠지. 

"잠깐, 랜디가 눈을 떴어!!" 쿠와이가 소리쳤다. 

시체인데 눈을 뜨고 있으면 이상한가. 

 

- "나 살았어?"

란도가 소리 내어 말했다. 

 

- "말도 안 돼. 내가 설계도까지 다 넘겼는데..."

"네 설계는 틀리지 않았어. 하지만 설계를 과신해서 완성품을 검사하지 않았지."

 

- 란도는 경악했다. 자신은 완벽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장치 설계도 작업 일정도 완벽했다. 1초의 어긋남도 없이 연출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거였어. 

 

-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되기는 어렵다.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우더라도 반드시 뜻밖의 요소가 섞이게 마련인데, 란도처럼 자신의 계획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진 인간이야말로 뜻밖의 사건에 약한 법이다. 너무나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전혀 빈틈이 없기에 조금의 변경도 불가능한 것이다. 

 

- "업자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해야겠어."

란도는 신음하듯 말했다.

"그건 네 자유지만, 업자가 들어줄 리 만무하지. 뚜껑 두께에서 실수한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 실수 때문에 내 목숨이 위험해졌잖아."

"업자에게 생명과 관련된 부품이라고 했어?"

"그건... 마술 아이디어와 관련된 부분이라..."

"그렇다면 그 요구는 부당해. 그저 일반적인 널빤지라고 생각해 납품했는데 사실은 인명과 관련된 일이었다고 배상하라고 하는 건."

맞는 소리다. 슈티는 정론을 말하고 있다. 분명히 납품업자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건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인명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점을 뭐라 할 순 없다. 인명과 관련된 일이란 걸 알았던 사람은 란도였다. 그런데도 란도는 인명과 관련된 도구의 점검을 게을리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렸으나 자칫 잘못했으면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었다. 설계를 제대로 했다고 해도 죄를 면할 수는 없다. 

 

- 아야미는 다시 끌어내려 했으나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같은 일을 되풀이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 기프티는 남들보다 월등한 자신의 기술을 끝없는 연습의 산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기프티의 아크로바틱은 관객이 보기에 너무나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절대 도박을 벌이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의 기술이 완전히 자기 것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연습을 되풀이했고, 눈을 감아도 몸이 저절로 움직일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관객에게 선보였다. 그녀는 스스로 대담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겁 많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본 무대에서 무턱대고 새로운 기술을 시험하는 일 따위는 절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가 되겠네.

 

- 그렇다면 캐터피라를 자유롭게 놔두는 것도 방법이겠다. 만약 저 여자들이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면 캐터피라의 바람대로 바로 고깃덩어리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무기를 숨기고 있더라도 그걸로 해를 입는 것은 캐터피라이다. 토타스는 캐터피라가 당하는 공격을 관찰함으로써 적의 실력을 헤아릴 수 있다. 토타스에게는 어떤 손해도 없다. 

토타스는 그 생각을 다시 검증했다.

그럴 일은 일단 없겠으나 상대가 말도 안 되게 강하더라도 토타스는 캐터피라가 죽는 걸 놔두고 도망치면 그만이다. 역시 해를 입는 것은 캐터피라 뿐이다. 

좋았어. 그렇게 하자. 

 

- 곧 바닥이 열리고 금속으로 만든 관이 순식간에 일어나 그리즐리를 감쌌다. 그리즐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가만히 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신중하구나. 좀처럼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는 성격은 생존에 유리하지. 하지만 이번만은 불리해. 

 

- "관심이 생기더라. 젊은 사람이 무턱대고 서커스단을 찾아와 이곳에서 좌절과 달성을 되풀이하며 마침내 성공의 무대에 선다. 그리고 영광에 휩싸여 대기실로 돌아오니 거기에는 자신의 동료들이 죄다 목이 물린 채 죽어있다. 놀라 돌아보니 입에서 피를 흘리는 친구가 네 목을 노린다. 끝없는 절망 속에 네가 어떤 얼굴을 할까. 그게 정말 보고 싶었거든."

 

- 처음부터 없었다면 나는 누구와 친구였지? 모든 게 거짓이었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나? 운명에 맞서야 하는 이유는 뭘까? 동료가 다 살해당했는데 나만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나? 

 

- 란도는 포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내부의 무언가가 포기하려는 자신에게 반발했다

 

- 다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  
 

  

 

 

 

 
인외 서커스
탈출 마술에 실패한 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마술사 란도. 경영 악화로 열 명의 단원만 남은 ‘인크레더블 서커스’를 부활시키기 위해, 티격태격하면서도 공연 준비에 한창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괴이한 존재들이 서커스단을 습격한다. 그들의 정체는 세상에 은밀히 존재해온, 사람의 피와 살을 먹으며 살아온 흡혈귀 군단!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회복력을 지닌 흡혈귀들은 잔혹한 방식으로 학살을 시작하고, 단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특기를 살려 대항하기 시작한다. 한편 단원들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숲속을 종횡무진하던 란도는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저자
고바야시 야스미
출판
하빌리스
출판일
20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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