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조지 버나드 쇼] 니벨룽의 반지

일루젼 2023. 1. 5.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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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지 버나드 쇼 / 유향란
출판 : 이너북
출간 : 2013.07.18


       

연말에는 들썩들썩 변화의 징조로 가득하더니, 막상 해가 바뀌자 오히려 잠잠하다. 딱히 뭔가를 바꾼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책을 읽게 되고, 언제나처럼의 일상적 리듬으로 지내게 된다. 시기적 영향일 수 있으니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려 한다. 

 

풍월당의 <니벨룽의 반지>에 손을 댄 뒤로 버나드 쇼의 반지 해설이 읽어보고 싶어져 구해 읽었다. 처음 기대했던 건 지크프리트와 초인을 연결한 해설이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완전히 결이 달라진 건 아니지만- 너무나도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버나드 쇼가 보여주는 영국식 블랙 유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실 바그너리안이라고 칭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 터라 -나는 <니벨룽의 반지>의 서사 부분을 좋아한다- 그의 음악적 해설에 관해서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어째서 라인의 황금을 실제적 부나 황금으로 연결짓는 해석이 주류인지 의아했었는데 버나드 쇼의 해설 이후 그 연결이 주류가 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더 크지만, 다양한 시각에서 접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인용된 바그너의 편지들을 읽으며 어째서 브륀힐데는 그저 "딸"이었지만 지크프리트는 "쌍둥이 부모"에게서 나온 "아들"이어야 했는가에 관한 정리를 할 수 있었다. 바그너가 생각한 '인간 영웅'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그 설정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보탄의 표현을 빌려 언급되는 '두려움을 모르는 대장장이'가 신의 조각을 파쇄하여 처음부터 녹여내어 다시 만드는 노퉁 또한 완전한 통합의 상징이다. 

 

즐겁게 읽었다.  

 

        

 


   

 

- 이 책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걸작 <니벨룽의 반지>에 대한 해설서이다. 나는 열광적인 바그너 추종자이면서도 그의 사상을 도통 이해할 수 없거나 보탄의 딜레마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그러면서도 그의 대사가 따분하고 재미없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불손한 속물들을 보고 분개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마치 애완용 강아지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듯 바그너를 숭배하면서, 몇몇 기본적인 생각이나 욕구, 감정들에만 공감하고 나머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의 우월성에 경의를 표하는 사람은 진정한 바그너주의자가 아니다. 어쨌거나 스승과 제자가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 불행하게도 1848년에 혁명가 바그너가 품었던 사상은 그 어떤 교육이나 영국과 미국의 음악 애호가들의 경험으로도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개정치적으로 우유부단해서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 바그너가 쓴 많은 팸플릿과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도 물론 있었지만, 역자의 생각에 맞추어 원래의 내용을 터무니없이 왜곡한 탓에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번역 분야의 걸작이라 일컬을 만큼 훌륭한 번역서가 나와 우리 문학계를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바그너의 작품을 차례대로 영역한 애쉬튼 엘리스가 다른 역자들보다 독일어 사전을 더 잘 활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다만 이전의 번역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바그너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을 뿐이다.

 

-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전통적 성향의 영국인들이 갖추지 못했을 법한 사상을 전해주고 싶어서다. 나는 이것을 바그너처럼 혼자 힘으로 길렀다. 다시 말해 젊은 시절에는 그 무엇보다도 음악을 많이 배웠고, 혁명적인 학교 안에서 젊은 정치적 혈기를 방자하게 휘둘렀다는 말이다. 영국에서는 이처럼 두 가지를 함께 갖춘 경우가 매우 드문데 지금까지 이러한 결실을 맺었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음악가지만 혁명가는 아닌 사람들, 또 혁명가지만 음악가는 아닌 사람들이 이미 쓴 여러 책들에 더해서 이 해설서를 감히 세상에 내놓으려 한다.

 

- 신들의 황혼 사태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는 까닭에 사태의 귀결이 현재보다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는 어떤 우의에도 적절하게 맞아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바그너가 살았던 시대, 또 이 책이 씌어질 당시의 정치적 양상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는 점을 감안할 때, 바그너의 우의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의미심장하다는 것은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그의 능력이 얼마나 폭넓은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세계대전으로 사회의 모습이 변화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회가 쓰고 있던 가면이 한꺼번에 찢어진 꼴 이상이 된 것이다.

 

- 즉, 대전으로 알베리히는 더 부유해진 반면, 그의 노예들은 일할 수 있는 행운을 잡기는 했지만 더 굶주리고 더 혹사당하게 되었다. <니벨룽의 반지> 마지막은 라인강의 세 처녀들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다 죽는 것으로 끝난다. 비록 이번 대전을 통해 또 한 번 전쟁이 발생하면 그때는 라인의 처녀들까지도 '수중폭뢰'로 모두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암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현실의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만일 여기에 성공한다면 이 책은 다시 한번 개정판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만일 실패한다면 세계 재편이 이루어지리라. 
 

- 그는 이 작품을 그저 주역인 바리톤 가수가 따분한 이야기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놓는 크리스마스 동화극의 기괴한 전개로 여기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다행히도, 이런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니벨룽의 반지>는 오케스트라와 드라마 양쪽에 걸쳐 굉장히 매력적인 부분들로 가득하다. 전원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을 표현하는 강, 무지개, 불꽃, 숲의 음악만으로도 앞으로 더 멋있는 장면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따분한 정치적 장면을 참고 견딜 것이다.

 

- 다시 말해 <니벨룽의 반지>와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연주나 오락 음악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을 구성하는 네 개의 음악극은 전유럽에서 오페라로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네 개 음악극 중 하나인 <신들의 황혼>은 사실 오페라가 맞다. 

 

- 한편 <니벨룽의 반지>에서 절박하면서도 첨예한 철학적, 사회적 의미를 읽어내는 고수 집단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나 또한 그와 같은 고수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그 정통한 달인들과 동등한 수준에서 이 작품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 다음으로 음악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어서 <니벨룽의 반지>를 즐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주고 싶다. 불안감일랑 과감하게 버려라. 만일 음악을 듣고 감동을 느꼈다면 바그너 또한 음악에서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니벨룽의 반지>에는 '고전파적 음악' 다운 부분이 단 한 소절도 없다. -극에 음악적 표현을 한다는 직접적인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듯한 음표는 단 하나도 없다. 고전파 음악에는 프로그램 해설에도 나오듯이 제1주제와 제2주제, 자유로운 환상곡, 재현부, 코다가 있고, 푸가에는 대주제(對主題)나 스트레타, 통주보속음이 붙어 있거나 그라운드 베이스에 실린 파사칼리아, 하5도의 카논, 그 외에 여러 가지 교묘한 장치가 있다. 그런데 결국 단순하기 그지없는 민요 가락과 마찬가지로 이것들이 제대로 구성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렸다. 하지만 바그너는 결코 이런 종류의 것을 노리고 작곡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셰익스피어가 소네트나 트리올렛(ab aa abab 식으로 압운) 등을 만들어 시적 재능을 발휘하려고 희곡을 쓰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바그너의 음악은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어도 천성적으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느껴진다.

 

- 하지만 학자들은 바그너의 음악이 연주되면 일제히 소리친다. "뭐야, 이게? 아리아야 아님 레치타티브야? 카발레타가 없잖아? 마침표도 제대로 없네? 뭐야, 이 불협화음은? 왜 협화음으로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거야? 바로 앞의 조성과 같은 음이 하나도 안 나오는 조로 이행하다니 말도 안 돼. 이런 착오 관계를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군, 팀파니 여섯 개, 호른 여덟 개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게야? 모차르트는 팀파니 두 개, 호른 두 개로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나? 저 남자는 음악가도 아니야!" 하지만 아마추어들은 그런 걱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만약 바그너가 자신이 극에서 추구하려는 솔직한 목표를 버리고 전문가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소나타 형식으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만들었다면 그의 음악은 순진한 관객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음악, 온통 예의 가공할 만한 고전파적 감각으로 똘똘 뭉친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황금은 사랑을 포기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데 난쟁이는 사랑을 구하러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라인의 처녀들은 잊고 있었다. 그들이 난쟁이를 비웃고 거부하는 바람에 그에게서 사랑을 갈망하는 욕구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또 돈과 권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진리를 난쟁이가 깨달았다는 사실을. 이것은 귀족사회에 들어가기를 자청했다가 비웃음을 당하고 쫓겨난 교양 없고 촌스러운 가난뱅이가, 그 사회를 자기 발아래 두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아내를 얻기 위해서는 억만장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난쟁이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사랑을 포기한다.  

 

-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재력가로 다시 태어난 난쟁이, 알베리히! 도대체 누가 그를 거역할 수 있을까? 그는 즉시 황금의 힘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살 찌우기 위해 도처에서 굶주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채찍에 맞아가며 노예처럼 일한다. 물론 그들에게 알베리히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지금의 '위험한 사업'의 희생자들에게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주주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들의 노동으로 이루어낸 부는 오히려 자신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들이 창출해낸 부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들의 손을 떠나 주인의 것이 되어 그를 한층 강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대의 문명국가 어디에서나 이런 과정을 볼 수 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궁핍과 질병에 시달리면서 현대판 알베리히를 위해 부를 축적하지만 정작 자신들에게 확실히 돌아오는 것은 무서운 질병과 때 이른 죽음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오싹할 정도로 생생하게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현대적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엄청나고 파멸적이어서, 이제 우리는 이로 인해 파괴되는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되어버렸다. 오로지 삶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만이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만약 우리가 모두 시인이라면 비참한 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런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난쟁이를 품고 사는 우리는 난쟁이들이 매우 훌륭하고 유쾌하며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저곳에서 해악을 만들어내고 이를 증폭시키는 것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만약 알베리히에 대항할 수 있는 더 고차원적인 힘이 없다면 이 세상의 끝은 완전한 파멸일 것이다.  

 

-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힘이 있다. 다름 아닌 '신(神)'이다. 우리가 생명이라 부르는 신비한 존재는 새, 짐승, 벌레, 물고기 등 다양한 생물의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놀랍게도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진화하여 교활한 난쟁이나 부지런히 일하는 우람한 거인이 되기도 하는데 그 거인은 힘든 일도 꾹 참아낼 줄 안다. 그들도 사랑과 생명을 원하지만, 끔찍한 저주나 무언가를 포기함으로써 얻으려 하지 않고, 보다 높은 힘에 묵묵히 봉사한 대가로 그것을 얻으려 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다 높은 힘이란 앞서 나왔던 생물체들의 형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에게 비교할 만한 수준을 갖춘 보기 드문 사람들이나 사유의 능력과 함께 육체적 욕망이나 개인적인 만족을 뛰어넘는 목표를 지닌 생물체의 형상으로 멋지게 나타난다. 그들은 세계를 단순한 야만 상태에서 끌어올리려면 도덕적 신념이라는 공통적 유대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하지만 우매한 거인들이 사는 세계에서 신은 어떻게 이러한 질서를 확립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없는 거인들이 자신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목적에만 눈이 어두워 신의 목표 따위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텐데... 따라서 신은 우둔한 자를 상대할 때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리석은 자들이 사는 세계에서 순수하게 이성에 따르는 법을 집행할 수 없기에, 신은 무자비한 처벌과 불복종자의 파멸이라는 강제적인 규율을 기계적으로 시행하는 수밖에 없다. 법을 반포할 당시 법률 제정자들이 법에다 자신들의 고상한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쓰지만 결국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사상은 발전하고 확대된다. 생명이란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보라! 어제의 법이 벌써 오늘의 사상과 불화를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그렇다고는 하지만 만약 고위에 있는 입법자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위반의 선례를 남긴다면 신민에 대한 권위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그들을 통치하기 위해 갈고닦은 무기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 따라서 설령 법이 더 이상 자신들의 사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법의 존엄성을 유지해야 한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조차 믿지 않는 법률의 올가미에 발목을 잡혀 이도저도 못하게 된다. 관습에 의해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형벌에 의해 무서운 것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그들 자신조차 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영적인 왕이 현세의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한쪽 눈을 파냈듯이, 법에 의지해야 하는 신은 마침내 그 대가로 자신의 절반을 잃는다. 마침내 신은 자신보다 강한 힘이 도래해서 법에 의해 만들어진 제국을 파괴하고 자유로운 사상이 숨 쉬는 진정한 공화국을 건설해주기를 은근히 바라게 된다.   

 

- 법의 지배에 따른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법을 시행할 수 있는 폭력을 매수해야 하고, 이러한 폭력을 고용한 권위를 존중하도록 신민 대중을 납득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입법자가 생각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존경심을 심어줄 수 있을까? 방법은 딱 하나, 그들의 마음에 법의 힘이 웅장하고 위엄 있는 것이라고 인식시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입법자가 된 신은 교황이자 왕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 신은 자신이 그들보다 지혜롭다는 것으로는 일반 대중에게 통할 수 없으므로 대신 그들보다 엄청난 부를 축적한 채 성에 사는 존재, 황금을 걸치고 화려한 자줏빛 옷을 입고서 장엄한 연회를 여는 존재, 군대의 지휘관이요, 생사여탈권을 지닌 존재, 나아가 사후에 천국행이나 지옥행이냐를 결정해주는 존재로 알려야 한다.

 

- 황금시대가 지속되는 동안은 이런 방법만으로도 타락하지 않고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난쟁이들은 설득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정직한 거인들을 꼬드겨 신을 위해 커다란 홀과 교회, 망루와 종루를 갖춘 거대한 성채를 짓게 해서 그 주위에 거주 지역이 안전하게 형성,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단, 이 모든 것은 황금시대가 지속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금권력이 제멋대로 횡행하고 사랑을 버린 알베리히가 부패한 군대를 이끌고 등장하는 순간, 신들은 파멸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굶주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난쟁이를 부려먹고 거인들의 서비스를 살 수 있는 알베리히가 황금시대의 웅장함이나 화려함을 제압하는 강력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더 뛰어난 머리를 써서 그의 황금을 빼앗을 수 없다면 알베리히는 세계의 주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딜레마이기도 한데, 알베리히가 라인강밑에서 황금을 훔쳤을 때 비롯된 상황이라고 하겠다. 

 

- 신으로서 보탄은 위대하고 확고하며 막강해야 하지만 동시에 정열도 애정도 없어야 하는 바, 즉 전체적으로 공명정대한 존재여야 한다. 법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신이라면 어떤 나약함도, 인간에 대한 경외심도 지니고 있으면 안 된다. 그런 자질구레한 즐거움일랑 비천한 거인들에게 던져줌으로써 그들이 고달픈 육체노동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신이 전지전능한 올림포스적 권력을 얻으려면 난쟁이 알베리히가 금권력을 얻기 위해 치른 것과 똑같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 하지만 알베리히가 미메에게서 투구를 빼앗은 다음 그것이 보이지 않는 채찍을 가리는 베일이고, 투구를 쓴 사람은 자기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것은 물론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투구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자로 높다란 중절모자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쓰면 주주로서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할 수 있고, 경건한 기독교 신자, 병원 기부자, 빈민 후원자, 모범적인 남편과 아버지, 빈틈없고 무미 건조하며 자존심 강한 영국인 등등으로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사회에 기생하는 가엾은 존재다. 그들은 엄청나게 소비하면서 무엇 하나 생산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른다. 또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만 하는데 그나마 그것이라도 하는 것은, 그마저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혹은 최소한하는 척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 <라인의 황금>은 <니벨룽의 반지> 4부작 가운데 가장 인기가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가정적, 개인적인 문제에 한해 희로애락을 느끼고 종교나 정치에 대한 관념이 관습적, 미신적인 사람들에게는 <라인의 황금>의 극적 중요성이 의식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대여섯 명의 인물들이 반지 하나를 놓고 싸우면서 몇 시간 동안 서로 야단치고 속고 속이는 이야기요, 침울하고 불쾌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어두침침하고 음침한 광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지루한 장면이며, 멋진 청년이나 예쁜 여자는 약에 쓰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작품일 뿐이다. 보다 열린 의식을 지닌 관객들만이 그 안에 담긴 인류 역사의 총체적 비극과 오늘날 세계를 위축시키고 있는 딜레마를 파악하면서 숨을 죽인 채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다. 언젠가 바이로이트에서 한 무리의 영국인 관광객이 알베리히의 지루한 대사에 견디다 못해 결국 제3장이 한참 진행되는 중간에 어두운 객석에서 일어나 소나무 숲의 햇살 아래로 빠져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 대체로 말해서 머릿속에 생각이 없는 사람이나 철학자나 정치가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라인의 황금>을 드라마로 즐길 수 없다고 하겠다. 때로는 장려하고 눈부시기까지 한 특별히 아름다운 몇몇 음악을 듣다 보면 알베리히와 보탄의 지루한 말싸움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만큼이나 음악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라인의 황금>을 보러 오지 않는 편이 낫다. 

 

- 자, 현명한 독자 여러분,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분명 어떤 아둔한 사람은 내 말꼬리를 자르면서 <라인의 황금>은 단지 순수한 '예술 작품’ 일 뿐이요, 바그너가 주주나 추기경이나 납 공장, 또는 사회적·인도적 관점에서 바라본 산업이나 정치 문제 등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나설 것이다. 이런 건방진 작자들과 왈가왈부하느니 ... 

 

- 그 자신도 이 제도에 얽매여야 한다. 왜냐하면 신이 자신이 만든 법을 어기게 되면 합법성과 법의 준수가 모든 행위의 최고원칙이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셈이 되는데 이는 제사장이요, 입법자라는 자신의 권위에 치명상을 입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그 자신이 사랑을 포기할 수 있다 하더라도 파프너에게서 불법적으로 반지를 빼앗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불안 속에서 그는 영웅 호위단을 구성할 생각을 떠올린다. 자신의 사랑스런 딸들을 여전사(발퀴레)로 훈련시킨 후 전쟁터에 보낸 다음, 거기에서 죽은 자들 중 가장 용감한 남자들을 발할라로 데려오도록 한다. 이렇게 일군의 전사들에 힘입어 권력을 보강하는 한편 보탄은 최고의 변론가인 로게의 도움으로 그들의 머릿속에 법과 의무, 초자연적인 종교와 자기희생의 이상주의라는 관습적인 체제를 주입시킨다. 그들은 이런 것들이 보탄의 신성(神性)의 핵심이라고 믿지만 사실 이것들은 권력에 대한 사랑을 밑받침하는 도구적 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보탄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 어쨌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보탄의 지배 체계에 대한 그들의 헌신이 확보된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아무리 그럴듯해 보인다 하더라도 보탄은 이러한 체제가 자비로운 독재자보다 이기적이고 야심만만한 폭군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만약 알베리히가 반지를 되찾는다면 발할라 매수 작전을 진행하지 않더라도 손쉽게 발할라를 능가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따라서 지금의 안정을 영원히 유지하는 방법은 딱 하나, 이 세상에 영웅이 나타나 자신의 불법적 인선동을 받지 않고도 알베리히를 퇴치하고 파프너에게서 반지를 빼앗아오는 수밖에 없다. 보탄은 영웅이 신에 대적하는 세력이라는 생각을 아직 못하고 있기에 이렇게만 되면 걱정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구원자를 간절하게 바란 나머지 영웅이 등장했을 때 그 영웅이 처음으로 하는 일이 다름 아닌 자신들 앞에 놓인 신들과 그들의 법 체계를 일소하는 것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 사실 그는 자신의 신성 속에 영웅성의 싹이 있고, 자신에게서 영웅이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아내 프리카와 발할라를 떠나 사랑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태초의 어머니 에르다를 찾아가 영원히 풍요로운 그녀의 자궁을 통해 처음 그를 신으로 만들어준 진정한 내면의 관념을 자신의 딸로 낳는다. 그녀는 그의 야망에 의해 타락하지도 않았고 또 권력의 수단이나 자신이 프리카 및 로게와 맺은 동맹에 구속되어 있지도 않다. 이 딸 발퀴레, 브륀힐데는 그의 참된 의지이자, 진정한 자기 자신(자신이 생각한 대로의)의 분신이다. 그녀에게는 남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도 괜찮은데 이는 그녀에게 말을 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딸에게 말한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너니까 말해준다. 너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나한테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 하지만 브륀힐데와 짝지어줄 보탄 종족의 남자가 없으면 그녀에게서 영웅은 태어나지 못한다. 계속 방랑하는 보탄, 결국 한 여자와의 사이에 쌍둥이 남매를 낳는다.

 

- 신의 무기고에 있는 무기로는 진정한 '인간 영웅'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다. 훈딩도, 손님 중의 그 누구도 칼을 빼지 못하고, 칼은 그대로 기둥에 꽂힌 채 운명의 손을 기다린다. 이것이 바로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 그가 이 '늑대 영웅'을 만들어냈을 때 신들의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프리카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녀는 이제, 자신들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영웅을 멸망시키라고 무자비하게 요구한다. 하지만 보탄에게는 이를 거부할 힘이 없다. 실제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의 생각이 아니라 프리카의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는 브륀힐데를 불러들여 자신이 내렸던 명령을 거두고 대신 훈딩이 볼숭을 살해하도록 명령한다. 

 

-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브륀힐데는 신성한 보탄의 내면적 관념과 의지이며, 좀 더 고차원적인 생명을 추구하는 열망 그 자체로, 정치적 권력을 위해서 신이 왕권이나 사제(司祭)권에 의지해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만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다. 지금까지 브륀힐데는 발퀴레이자 영웅의 선택자로서 보탄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면서 그의 왕국에서 자신의 사명이 가장 성스럽고 용감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그녀에게 보탄이 프리카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 아니, 브륀힐데의 말대로 그녀가 그의 마음 자체가 아니었더라면 그녀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정 즉, 알베리히와의 사이에 벌어진 모든 일과 영웅을 육성하려는 구상에 대해 말해준다. 그녀는 보탄의 생각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무렵 브륀힐데는 그녀도 프리카의 말에 복종해서 그녀의 부하인 훈딩을 도와, 영웅 육성의 위대한 사명을 포기하고 영웅을 죽여야 한다는 보탄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기를 주저한다.

 

- 자, 여기서 보탄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신은 강력한 교회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면서 무력과 두뇌라는 만만찮은 국가 조직 및 법과 결속해서 복종을 강요했다. 그리고 금권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러한 결속을 감수하고 있는데, 이는 본래 매번 최고의 존재를 더욱 향상시켜 최상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가 동맹으로부터 이탈하여 없어서는 안 될 동맹인 입법 국가를 파괴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반역자들을 제거할 수 있을까? 반역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가장 사랑스런 딸이다. 그러니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를 숨기고 제압하고 침묵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역자는 국가를 전복시키고 교회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 말 것이다. 신이 완전히 멸망하고 난 다음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자만이 기존의 질서를 흐트러뜨리거나 파괴하지 않고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출현할 때까지 어떻게 반역자들로부터 세계를 지켜낼 수 있을까?

 

- 이 대목에서 로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진실을 은폐하는 최선의 방법은 거짓말이다. 로게에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모습으로 산 정상을 둘러싸게 하리라. 과연 누가 이 불꽃을 뚫고 브륀힐데에게 갈 수 있을까? 하지만 대담하게 불속으로 들어갈 사람이라면 이 불꽃이 단지 속임수, 환영, 신기루에 불과한 것으로 탄약 보따리를 짊어지고 들어가더라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 다행히도 여기에 내포된 우의는 현대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에게 4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뻔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때만 해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절대적 진리에 의심을 품은 어린아이가 "왜 여호수아는 지구더러 도는 것을 멈추라고 하지 않고 태양더러 그 자리에 서라고 했어요?"라고 묻는다거나, "고래의 목구멍은 요나를 삼킬 정도로 크지 않은데요"라고 지적이라도 하면, 그 아이는 당장에 그런 말을 했다가는 이다음에 죽은 후에 펄펄 끓는 유황 바다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될 거라는 말을 들어야 했었다. 물론 요즘에야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잘 속아 넘어가는 수백만의 무지한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 바그너가 어렸을 때, 분별 있는 지배 계층 사람들은 지옥이 대중을 위협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허구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다. 따라서 그 당시에 남다른 개성과 대담한 사고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로게의 불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었다.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의 가사를 개인적으로 출판한 지 30년이 지난 다음까지도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당시의 미신을 명백하게 드러내놓고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만약 부정한다면 그로 인해 기소당할 수도 있음을 상기시켰다. 상당수의 멀쩡한 유권자들이 아직도 음침한 악마 숭배에 빠져 있는 영국에서는 로게의 불꽃이 중요한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바, 어떤 정부도 '신성모독죄'와 같은 말도 안 되는 법령을 폐지하자고 양심적으로 용감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 성실하고 감사할 줄 아는 아버지와 달리 지크프리트는 자기 기분 외에는 아무런 법도 개의치 않으며 자신을 키워준 추한 난쟁이도 싫어한다. 그리고 미메가 친절하게 키워준 대가를 요구할라치면 마구 화를 낸다. 간단히 말해 도덕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남자요, 타고난 무정부주의자로 이는 바쿠닌의 이상이자, 니체의 '초인'에 선행하는 존재이다. 지크프리트는 매우 강하고 활기와 기쁨이 넘치는 사람으로 싫어하는 대상에게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보이지만, 좋아하는 대상에게는 무척이나 다정하다. 그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준이 분별력 있고 건전한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유감스럽게도 할아버지(보탄)는 지배자의 자리를 위해 법과 위대한 연합 전선을 맺었고, 더 암담하게도 아버지(지크문트)는 이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비극적인 투쟁을 벌여왔다. 그런데 이러한 어두운 배경 속에서 영웅족이 탄생했으니 원기 왕성한 이 숲의 젊은이야말로 새 아침의 아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누가 그 칼을 수리하는가?" 그의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 미메는 큰소리로 탄식하며 모른다고 고백한다. 나그네는 잘난 척하다가 정작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을 묻지 않은 미메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준 다음, 두려움을 모르는 대장장이만이 노퉁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노퉁을 고치는 대장장이에게 미메의 목을 양보한다고 말하고는 숲으로 사라진다. 미메가 공포에 질려 제정신을 잃고 떨면서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 때, 지크프리트가 숲에서 돌아오다 그를 발견한다. 

 

- 이어 기이하면서도 재미있는 대화가 시작된다. 두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지크프리트는 두려움을 알아야만 완벽한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두려움을 알고 싶어 안달을 한다. 하지만 미메는 모든 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그에게 이 세상은 공포로 가득 찬 세계다. 이는 숲 속에서 곰에게 잡아먹히거나 대장간에서 손가락을 데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누군가가 살해당하거나 불구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겁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두려움 속에서 용감한 사람의 지혜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미메의 두려움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기에, 아무리 안전이 보장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미메는 어찌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수많은 신문 편집자들과 비슷하다. 그들은 자신이나 모든 독자들에게 매우 명백한 사건에 대해서조차도 감히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보도하면 자신에게 귀찮은 일이 생기기 때문일까? 아니면 겁도 없이 그런 노선을 취했다가 영향력 있는 탁월한 여론의 지도자가 되지 못할까 봐 그러는 걸까? 천만에, 둘 다 아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겸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자기 자신의 힘과 가치를 믿지 않는 바람에 자기 견해의 가치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상상 속 공포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미메가 특히 빛이나 신선한 공기처럼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것은 어떤 것이나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똑같다. 또 미메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보호하려는 준비 또한 갖추지 못한 자가 세상에 나가게 되면 그 즉시 목숨을 잃게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미메는 지크프리트가 세상에 나가 자신이 부여한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에게 공포를 가르쳐주려는 엉뚱한 시도를 꾀한다. 즉 숲이나 숲의 어둠이 주는 공포, 소름 끼치는 소리, 보이지 않게 매복하고 있는 것들, 불길하게 명멸하는 빛, 심장을 조이는 공포의 전율 등 자신이 겪었던 두려움을 지크프리트에게 이야기한다.  

 

- 하지만 이러한 미메의 노력은 지크프리트에게 놀라움과 호기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지크프리트에게 숲은 유쾌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전기 충격이 어떤 건지 느껴보고 싶어 하듯이, 지크프리트 또한 미메가 말하는 공포를 느끼고 싶어 안달을 한다. 그러자 미메는 지크프리트에게 파프너라면 공포가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을 듣고 지크프리트가 펄펄 뛰며 좋아한다. 그리고는 미메가 칼을 고치지 못하니 즉석에서 자기가 직접 고치겠다고 한다. 미메는 지크프리트가 젊은이 특유의 나태함과 고집 때문에 자신에게 대장장이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았기에 칼을 고치는 방법을 하나도 모를 것이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 지크프리트(=바쿠닌)의 반박은 단순하면서도 결정적이다. 그는 미메가 자랑하는 기술로는 제대로 된 칼을 만들기는커녕 부러진 칼조차 고칠 수 없다며 대든다. 그리고 자신의 악담에 분개하며 항의하는 선생을 무시한 채 칼을 다듬는 줄을 잡더니 순식간에 칼의 파편을 강철 부스러기로 만들어버린다. 그러고 나서 그 가루를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불을 붙이더니 본격적으로 풀무질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우선 파괴하는 무정부주의자의 환희, 그 자체다. 그는 철강이 녹자 이것을 주형에 붓는다. 보라! 칼날이 대충 완성되었도다. 미메는 자신의 기술을 완전히 무시한 채 칼을 완성한 지크프리트의 솜씨에 경탄하며 그를 최고의 대장장이라 치켜세우고 자기 따위는 밥이나 짓고 설거지나 하면 제격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독이 들어간 수프를 만들면서 지크프리트가 파프너를 죽이고 반지를 찾아오면 지크프리트마저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용의 꼬리 어쩌고 하는 미메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만약용에게 심장이 있다면 노퉁으로 찔러버리겠다는 자신감에 차서 심장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본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은 지크프리트는 그 즉시 미메를 쫓아버리고 나무 밑에 누워 새들의 아침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중 한 마리가 그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지만,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갈대 피리를 만들어 대화를 나누어 보려 하지만 역시 알아듣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뿔피리로 새를 즐겁게 해 주면서 숲에 사는 모든 생물처럼 자신에게도 사랑하는 짝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 싸움 중에 지크프리트는 자연이 전해주는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불타는 듯한 용의 피를 뒤집어쓴 지크프리트가 자신의 손에 묻은 용의 피를 맛본 순간 그는 보물이 곧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는 새의 말을 알아듣는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라 황금과 반지, 그리고 마법의 투구를 가지러 동굴로 들어간다. 이때 지크프리트에게 쫓겨났다가 돌아온 미메와 알베리히가 서로 마주친다. 두 난쟁이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는 격으로 아직 손에 넣지도 못한 보물을 어떻게 나눌지를 두고 격렬하게 싸운다. 한편 지크프리트는 황금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반지와 마법의 투구만 손에 들고 나오면서 아직까지 두려움을 배우지 못한 것에 크게 실망한다. 

 

- 하지만 그는 미메와 같은 불쌍한 족속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워왔다. 그 결과 미메가 겉으로는 아첨하는 말과 상냥한 태도로 지크프리트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만 속으로는 질투에 휩싸여 자신을 살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노퉁을 휘둘러 그를 죽인다. 숨어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알베리히는 몹시 만족스러워한다. 

 

- 지크프리트는 별 관심 없는 황금을 죽은 미메 옆에 놓아두고 피곤한 듯 몸을 눕히고 친구인 작은 새를 불러, 그렇게 배우고 싶어 하던 두려움도 배우지 못했고 친구도 얻지 못했다고 하소연한다. 그러자 작은 새는 두려움을 모르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산꼭대기의 불꽃 요새에 갇힌 채 잠들어 있는 여자에 대해 말해준다. 이 말을 들은 지크프리트는 당장 온몸의 피가 끓어올라 작은 새가 이끄는 대로 불꽃 산으로 따라간다. 
 
- 산기슭에 도착한 나그네, 이제 그의 운명도 거의 다 끝나가고 있다. 그는 태초의 어머니 에르다를 땅속에서 불러내 조언을 구한다. 그녀는 노른(운명의 여신)에게 물어보라고 하지만, 그녀들은 보탄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는 환경, 또는 상황이라는 그물로 인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운명과의 영원한 투쟁에서 어떤 길로 의지가 나아갈지 미리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에르다가 묻는다. "왜 내가 당신에게 낳아준 딸에게 묻지 않는 거죠?" 보탄은 자신이 어떻게 부녀의 연을 끊고 딸을 로게의 불꽃 속에 가두어 세상과 격리시켰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렇게 되면 태초의 어머니 에르다도 그를 도울 방법이 없다. 그런 이별은 그녀가 생의 에너지를 더욱 고차원적인 것으로 상승시키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먼저 벌어지는 혼란이기 때문이다.  

 

- 새로운 질서가 승리의 축가를 부르고 낡은 과거가 사라지는 것만큼 멋진 일도 없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낡은 과거 측에 속해 있다면 당신은 분명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워털루 전투에 참가한 영국 병사들 가운데, 조국과 인류를 위해 나폴레옹이 연합군에게 이기기를 바랐던 지식인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영국 지식인조차 프랑스 기병에게 살해당하느니 차라리 살해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좀 더 유식한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무지와 광포함과 어리석음을 애국심과 의무라고 세뇌당한 멍청하기 짝이 없는 병사만큼이나 맹렬하게 싸웠으리라. 케케묵은 낡은 존재는 비록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지언정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그리고 새로이 다가오는 행복한 천년왕국이 만일 살인이라는 지름길을 통해 오고자 한다면 그에 대해 저항할 것이다. 

 

- "젊은이여, 좀 참을성 있게 내 말을 들어보게. 만일 자네가 나이 든 사람이었다면 나는 자네를 공손하게 대했을 걸세."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대답한다.

(리뷰자 주 : 이 부분은 오이디푸스나 텔레고노스를 연상케 한다.)

 

-  복수의 삼중창이 앞의 3부작에 나왔던 보탄의 형이상학적 논설보다 더 가슴 떨리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럴싸하게 들릴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이렇다. <신들의 황혼>은 공연 순서상으로는 맨 마지막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먼저 구상된 것으로 사실상 이것을 토대로 다른 모든 부분들이 만들어졌다. 

 

- 그 경위는 이렇다. <니벨룽의 반지> 이전의 바그너 작품은 모두 오페라였다. 그중 마지막 작품인 <로엔그린>(1850)은 아마도 근대 오페라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리라. 특히 바이로이트에서 완전 무삭제판으로 공연된 <로엔그린>은 코번트 가든 왕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될 때보다 더 오페라다웠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고풍스러운 부분이 특징적으로 드러난 곳은 -예를 들어 주역들과 합창의 앙상블처럼 규모가 큰 장면 좀 더 현대적이고 바그너다운 특징이 있는- 다른 부분보다공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당시 유행하던 <로엔그린> 단축판에서는 삭제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 오페라 하우스에서 볼 수 있는 <로엔그린>은 실제 바그너가 쓴 것보다도 당시 오페라들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었다. 그래도 <로엔그린>은 합창, 중창, 대피날레가 있는 틀림없는 오페라다. 여주인공이 플루트의 오블리가토와 함께 화려한 변주를 부르지 않더라도 눈에 띄는 프리마돈나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음악적인 테크닉만 제외하면 <로엔그린>에서 <라인의 황금>으로의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 하지만 그들 모두 마지막에는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영원한 형벌도 그들의 소행에는 과분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고(故) 리튼 경은 자신의 소설, <이상한 이야기> 속에 강렬한 생명력의 희열을 형상화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그는 이 인물에게 당시 소설 속에 나오는 가장 야비한 등장인물에게조차 허락되었던 영원한 영혼을 부여하지 않았다. 대신 장난기가 많고 잔인하며 비정한 성격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흠잡을 데 없이 건강한 그에게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 다시 말해, 인간은 넘치는 생명력과 그러한 충동에 몸을 맡기는 일에 매력을 느끼지만, 자신을 깊이 불신하는 탓에 이런 것들이 해악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 그대로 신이 이끄는 대로 복종하면서 자신을 헌신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어떤 이성적인 도덕 체제에 순응하면서 이러한 생명력을 억압하거나 제지하지 않으면 전 세계가 파멸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신의 인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 세계의 제도들이란 시정(詩情)이 결여된 가짜 '계시' 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인간의 선행도 실은 악행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의적인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만약 진보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인간의 선행 충동은 파괴 충동에 의해 강해진다는 것까지 명백해진다. 이런 사고에 영향을 받아 우리는 지금까지 들어왔던 신의 은총이나 이성의 시대라는 말 대신 생명의 희열에 관하여 들을 수 있게 되었다.

 

- 음악극에서 오페라로 변한 시점부터 <니벨룽의 반지>는 더 이상 철학적이기를 포기하고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바그너도 말했듯이 철학적인 부분은 세상을 드라마로 상징한 모습이다. 하지만 교훈적인 부분에서 철학은 인간의 모든 병을 고치는 신비한 묘약으로 타락한다. 바그너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인간에 불과했기에 자신의 철학이 고갈되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만병통치약에 열광하게 된다. 

 

- 물론 바그너가 내세운 만병통치약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바그너보다 먼저 서섹스 출신의 셸리라는 젊은 시골 신사가 1819년에 예사롭지 않은 예술적 박력과 광채를 지닌 작품을 썼다.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는 영국판 <반지> 이야기로 바그너가 마흔 살에 <니벨룽의 반지> 대본을 완성한 반면, 셸리는 겨우 스물일곱 살에 <사슬에서 풀린프로메테우스>를 완성해 질투심 많은 영국인의 천박한 애국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두 작품 모두 신과 신의 지배에 대한 인간의 투쟁을 그린 것으로 인간의 의지가 완전한 힘과 자신감을 갖게 됨에 따라 신들의 압제에서 해방된다는 내용이다. 또 두 작품 모두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악에 대한 치료약이자 모든 사회적 어려움의 해결책으로 사랑을 내세움으로써 만병통치약에 의존하는 교훈주의에 빠지고 만다.

 

-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와 <니벨룽의 반지>의 차이점 또한 유사점과 마찬가지로 매우 흥미롭다. 셸리는 젊은 혈기에서 오는 치기 및 맹렬하게 밀려오는 신종교개혁의 열기와 뛰어난 예술적 역량에서 오는 성급함에 처음으로 사로잡혀 주인공의 적대자를 가차 없이 공격한다. 셸리가 주피터(제우스)라고 부른 그의 보탄은 전지전능한 마왕으로, 무지한 성서 숭배와 파렴치한 상업주의가 판을 치던 200년 동안 영국인의 신이 타락해간 모습이다. 제우스는 알베리히, 파프너, 로게, 그리고 보탄의 야심가적 면모가 멜로드라마적 악마의 모습으로 집약된 것으로, 결국 '영원한 법'을 대표하는 존재에 의해 비명을 지르며 왕좌에서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그 이래 이 '영원한 법'이 '진화'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바그너는 1819년의 셸리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풍부했기에 보탄을 이해하고 용서해 준다.  

 

- 그뿐이 아니다. 그를 파멸시킨 진실과 영웅주의가 사실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를 자신의 퇴진과 소멸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아니, 그러려고 애쓰는 존재로 표현한다. 셸리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물론 중년의 나이까지도 살지 못했지만 후기 작품에서는 바그너와 같은 관용, 정의, 겸손의 정신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만병통치약에 관한 한, 바그너 작품에 등장하는 사랑에 밤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셸리로부터 어떤 것도 진화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사랑이 생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므로 이것이 충족된 인간은 삶의 의지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마침내 죽음을 가장 큰 행복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위대한 점이라는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 하지만 셸리는 사랑이라는 만병통치약을 그렇게 터무니없이 전락시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에서 만병통치약으로 등장하는 사랑은 성적인 정열과는 무관한 사랑이 넘치는 자비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비심은 어쩌면 성적 관심과는 전혀 무관한 영역에 존재한다. 자비와 친절이라는 단어보다는 사랑이라는 말이 모호하게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바그너는 항상 자신의 관념에 육체적인 감각을 연결시켰다.  

 

- 전적으로 이러한 사랑에 바쳐진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파멸과 죽음의 시다. 활력과 재미와 행복감으로 충만한 작품인 <뉘른베르크의 명가수>(1868)에는 열렬하다고 할만한 사랑의 음악이 단 한 소절도 없다. 작품의 주인공인 홀아비는 구두를 수선하고 시를 쓰고 손님들의 사랑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인간이다. 한편 <파르지팔>은 사랑에 종지부를 찍는다. 일인즉슨 이렇다. <신들의 황혼>과 <지크프리트> 마지막 막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이라는 만병통치약은 이 이야기를 처음 오페라로 구상할 때의 원래 생각이 살아남은 것인데, 바그너가 나중에 -비록 최근은 아니지만- 갖게 된 사랑에 대한 생각, 즉 '사랑이란 생의 의지를 충족시키고 따라서 밤과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따라 수정된 것이다. 

 

- 분별 있는 제자가 <니벨룽의 반지>에서 얻을 수 있는 신념은 딱 하나,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힘으로서의 생명력 그 자체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나 외부의 감상적인 것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불가해한 에너지에 의해 내면으로부터 성장해서 늘 좀 더 고차원적인 조직의 형태로 진화한다는 점에 부디 유의하기를... 아울러 이러한 생명의 강한 힘과 그 힘의 결핍이 앞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제도를 줄기차게 몰아내고 있다는 점을.  

(역자 주 : '영원히 여성적인 것', 괴테의 <파우스트> 제2부 끝에 나오는, 인간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개념.)

 

- 따라서 우리는 낡은 인간을 쓸데없이 괴롭힐 것이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처럼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야 한다. 만일 생명의 에너지가 여전히 인간을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주고 있다면, 더 많은 젊은이들이 연장자에게 충격을 주면서 그들이 애착을 갖는 사회 제도를 조롱하고 폐지하면 할수록 세상에 대한 희망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왜냐하면 무정부주의의 성장 정도가 사회의 진보 수준을 가늠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역사를 이해할 줄 아는 깜냥이 된다면 아직 역사가 우리에게 이렇다 할 만한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역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것이다. 사회 조직이 미숙한 상태에서 복잡한 상태로 변화하고 기계적으로 작용하던 정부 기관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 변화하는 과정도 처음에는 무정부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 지크프리트의 무정부주의, 좀 더 고상한 표현이 좋다면 그의 신(新) 프로테스탄티즘에 끌리는 사람에게 한마디 해두고 싶다. 무정부주의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 또한 다른 만병통치약과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가령 완벽하게 자애로운 인간 일족을 낳아서 키운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무정부주의는 분명 진보적인 발전 단계의 필수 조건이다. 자유사상가, 즉 지적인 무정부주의자가 없는 나라는 중국(청나라)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다. 또 범죄와 형벌 -복수심과 잔인성을 고결함으로 가장한 것에 불과한- 의 개념에 기초한 형법은 몹시 혐오스러운 악폐로, 그 폐해와 무용성을 조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결국 그것을 없애버리려 한다. 하지만 무정부주의로 대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 다시 말하면, 개인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사적인 이익을 위한 경쟁에 목숨을 건 자본가들 손에 산업을 넘겨준 것은 엄청난 재앙이었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질서 정연한 사회주의에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된 경제 원리에 대해서는 지크프리트의 제자들에게 페이비언 협회가 출판한 <무정부주의의 불가능성≫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사는 지구의 물리적 조건 때문에 의식주에 소요되는 물자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적인 계획으로는 이것들을 공평하고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설명돼 있다.  

 

- 자유란 멋진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맨 처음 벌어들인 것으로 날이면 날마다 '자연'에게 지고 있는 빚을 갚지 않는 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돈으로 살아가는 자유밖에 없을 것이다. 하긴 이러한 자유를 고상한 삶의 기준으로 여기는 바람에 요즘 들어 많은 이들이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공공의 복지 차원에서 보면 결코 건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 지크프리트의 모험으로 이야기를 돌리자면 오페라의 피날레라고 밖에는 딱히 더 할 말이 없다. 아무런 상처 없이 불꽃 벽을 통과한 지크프리트가 브륀힐데를 잠에서 깨운 후, 첫눈에 보고 사랑에 빠진 황홀한 느낌을 이중창으로 부르는데 이 노래는 '죽음을 비웃으면서 밝게 비추는 사랑'이라는 가사로 끝을 맺고 있다. 밝게 빛나는 사랑과 웃고 있는 죽음, 이 둘은 서로 간에 너무 깊이 얽혀 있기 때문에 보통 하나이면서 똑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 원래의 <지크프리트의 죽음> 초고에서는 결말 때문에 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즉, 죽은 브륀힐데가 보탄에 의해 신성을 회복하고 다시 발퀴레가 된 후, 살해당한 지크프리트를 발할라로 인도해서 충성스러운 영웅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걸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크프리트는 어떨까? 그는 2막에 이어 3막에서도 보통 세상 남자가 하는 식으로 여자에 대해 말한다. "여인네들의 분노는 금방 풀리는 법" 등의 그의 말투는 앞의 드라마에 나오는 풋내기 말투가 아니라 원래 <지크프리트의 죽음>에 나오는 말투다. 옛날 사가에 흔히 나오는 로맨틱한 노래 속에 그려져 있던 주요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발퀴레>나 <지크프리트>에서 볼 수 있는, 바그너의 천재성 -지난 이틀 밤 동안 우리가 경험했던- 에 의해 독창적으로 개조된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 더구나 이렇게 되면 <니벨룽의 반지>는 우의의 중요성은 완전히 사려져 버리고 한순간에 아이들이 생각하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차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니벨룽의 반지>를 철학적인 측면으로 볼 때, 신성에서 인간성으로 변화하는 것은 전락이 아니라 한 단계 상승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니벨룽의 반지> 전체적인 핵심을 절대로 파악할 수 없다. 브륀힐데가 정직했던 까닭에 보탄의 주술이 그녀에게 먹히지 않자 그는 자기 딸이 발할라의 허구와 관습을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그녀를 로게의 불꽃 벽 속에 가두어야 했다. 


- 유일하게 봐줄 수 있는 견해라면 이미 알려진 <니벨룽의 반지> 줄거리에 의거한 것이거나 훌륭한 판단력이 있는 음악가에게는 스코어를 증거로 내세운 견해일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조만간 이야기하겠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바그너는 <지크프리트의 죽음>을 가장 먼저 썼다. 그리고는 지크프리트를 신(新) 프로테스탄트로 삼고자 하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살리기 위해 <젊은 지크프리트>(<지크프리트>의 원래 제목)를 썼다. 프로테스탄트는 사제(司祭)라는 대립 인물이 없으면 관객을 향한극적 호소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젊은 지크프리트>를 쓴 뒤에 <발퀴레>를 썼다. 그리고 마지막에 서문 격으로 <라인의 황금>을 쓴 것이다.(서문이란 항상 책을 다 쓰고 난 다음에 쓰는 법이니까) 물론 마지막에 전체적인 수정 작업이 있었다. 만약 이 수정 작업을 보다 엄격히 진행했더라면, 지금은 앞뒤가 맞지 않아 쓸모없어진 <지크프리트의 죽음>은 삭제되었으리라.  

 - 하지만 영국의 한 저명한 바그너 권위자가 바이로이트에서 <신들의 황혼> 휴식 시간에 내게 말했듯이, 바그너는 오랫동안 오페라에서 물러나 있다가 다시 <로엔그린>과 같은 오페라를 만들고 싶어 졌는데, <지크프리트의 죽음>(초고는 1848년에 씌어짐, 드레스덴 봉기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로 이 봉기 후 바그너의 인생관과 예술은 더욱 심오해졌다)은 그런 그의 내부에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오페라에 대한 욕구를 분출시키기에 안성맞춤인 대본이었다. 이리하여 바그너는 <지크프리트의 죽음>을 <신들의 황혼>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질투와 살해라는 관습적인 플롯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지크프리트와 브륀힐데가, 우의적인 지크프리트와 브륀힐데와 전혀 다른 인물이 되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제2막을 남겨두었다. 반면에 우주목 이야기나 로게가 발할라를 파괴하는 이야기 등 전설과 관련된 이야기는 잘 들어맞는다. 우의적으로 볼 때 지크프리트가 신의 창을 꺾은 것은 보탄과 발할라의 종언을 의미하는데, 이 우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사건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반드시 지크프리트가 보탄을 산 위로 데려간 후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올 것이다. 그런 질문에는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옛날이야기가 아주 좋은 답이 된다. 

 

-  또 반지에 저주가 걸려 있기 때문에 반지를 가진 자에게는 반드시 죽음이 찾아온다고 처녀들이 덧붙이자 지크프리트는, 오래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영웅적 자질을 드러낸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당하지 말 것. 결국 지크프리트는 반지를 그들에게 양보하지 않고 라인의 처녀들은 그를 운명에 맡긴다. 지크프리트를 발견한 사냥꾼 일행. 그들은 강변에 앉아 식사를 하고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모험담을 이야기한다. 

 

- "우리는 죽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것도 그 말의 최대의 뜻을 담은 죽음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모든 사랑의 결핍의 원인으로서 이것은 사랑이 시들기 시작하면서 생겨난다. 인류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가장 큰 축복인 사랑을 완전히 잃어버렸기에 마침내 그들 자신이 행하고 정돈하고 확립한 모든 것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착상되기에 이르렀다! <니벨룽의 반지>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1854년 1월 25일 바그너가 레켈에게 보내는 편지) 

 

- 하지만 음악적인 측면에서 초보자의 넋을 빼앗는 바로 그러한 특징들이 오페라에 정통한 고수들의 귀에는 다르게 들린다. 탁월한 작곡 기법, 완성의 경지에 달한 화성법과 관현악법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어 있는데도 <발퀴레>에서 똑같은 모티브가 준 감동처럼 마음을 뒤 흔드는 소절은 하나도 없고, 단지 <지크프리트>의 삶과 기질에 외형적으로 첨가된 화려함만 귀에 들어올 뿐이다. 

 

- 오리지널 가사에서는 브륀힐데가 지크프리트를 화장할 장작더미 위에서 자신의 죽음을 미루며 모여 있는 합창대원들에게 사랑이라는 만병통치약의 효능에 대해 설교한다. 

"가장 신성한 나의 지혜의 보물을 이제 세상에 가르쳐주겠노라. 나는 재산도 황금도 믿지 않노라. 신앙심이나 가정도, 고귀한 지위도 화려함도, 관습도 계약도 믿지 않노라. 오직 사랑만 믿을 뿐! 사랑이 온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그러면 행복이나 불행 속에서도 축복받으리니..."

 

- 여기서는 소유의 거부라는 점에서 약간의 바쿠닌 냄새가 난다. 하지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성숙한 정신의 소유자의 의지나 손에 칼을 들고 있는 숙명적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그저 사랑뿐이라고 주장한다. 그것도 셸리가 추구하는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격렬한 성적 열정이다. 바그너가 이러한 진부한 표현을 고수하지 않고, (그가 레켈에게 한 고백에 의하면 오랫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낀 끝에) 가사가 출판된 지 20년이나 지나서 <파르지팔>을 작곡할 즈음에 완성한 <신들의 황혼> 스코어 속에서 이를 뺐다는 사실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결국 바그너는 브륀힐데의 설교를 삭제하고 처음 의도대로 대책 없이 무모하게 마지막 장면의 음악을 작곡한다. 앞의 드라마에서 라이트모티브를 사용할 때 지켜온 엄격한 원칙을 거리낌 없이 포기하고. 바그너는 결말 부분의 라이트모티브로, <발퀴레> 제3막에서 지클린데가 브륀힐데로부터 자신이 앞으로 태어날 영웅의 어머니가 될 숭고한 운명이라는 말을 듣고 기뻐 날뛰면서 부르던 구절을 선택한다.

 

- 하지만 이 주제를 재현함에 있어서, 자신을 희생하려는 브륀힐데의 도취감을 표현하기 위한 극적인 원칙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변명의 여지는 있다. 둘 다 지크프리트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는 충동에 빠져 있지 않느냐는...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하자면 알베리히나 보탄도 똑같이 야심에 불타 있고, 그 야심의 대상도 같은 반지니까 발할라의 모티브를 알베리히에게 갖다 붙여도 괜찮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신들의 황혼>을 작곡할 당시 바그너가 그 취지를 기억하고 지속적으로 사용한 라이트모티브가 용, 불꽃, 물 등과 같이 단순한 외적 특장을 표시하는 것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 어쨌거나 그것이 아주 강렬하게 분출하는 소리였던 까닭에 바그너는 편의상 이를 마지막 장면으로 선택하였다. 브륀힐데와 지크프리트의 사랑에 연관되는, 훨씬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라이트모티브를 사용하지 않고 말이다. 만약 전체를 10년 정도만 빨리 완성시켰더라면 바그너는 분명 이것을 중대한 문제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니벨룽의 반지> 가사가 1853년에 완성되고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아울러 유럽의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생성, 발전해온 사회적 사상이 1849년 드레스덴 봉기를 계기로 이런 사상에 몹시 강한 영향을 받고 있던 바그너 안에 둥지를 틀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 바그너가 <신들의 황혼> 초고를 썼을 때,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1876년 제1회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올리려고 스코어를 완성했을 때에는 예순이었다. 따라서 그가 초고를 쓰고 있을 당시 품었던 열의를 잃어버린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 만약 실제의 삶과 자신의 철학적 주제 사이에 괴리가 없었더라면 바그너는 설령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더라도 자신의 위대한 주제를 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1849-1876년까지의 독일 역사를 지크프리트와 보탄의 이야기에 대입할 수 있었다면 <신들의 황혼>은 시대에 뒤떨어진 오페라가 아니라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의 논리적 완결 편이 되었을 것이다. 

 

- 하지만 실제로는 지크프리트가 실패했고 비스마르크는 성공했다. 레켈이 투옥되었지만, 그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바쿠닌은 발할라가 아니라 인터내셔널(사회주의 운동의 국제 조직)을 날려버렸고, 결국 그와 칼 마르크스 사이의 불명예스러운 싸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1848년에 지크프리트들은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패배한 반면 보탄들, 알베리히들, 로게들은 혁혁한 승자가 되었다. 미메들조차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했다. 페르디난드 라살 단 하나를 제외한 모든 혁명 지도자들이 실제정치에서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그 라살도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정력적으로 연설 활동을 했으나 결국 대다수 노동자 계급이 자신에게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또 그럴 생각이 있는 소수파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더니 도대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연애에 얽힌 결투로 목숨을 잃는다.  

 

- 1861년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창립한 인터내셔널은 신경질적인 신문들로부터 몇 년 동안에 걸쳐 붉은 망령이라는 오해를 받았지만, 실은 멍청한 허깨비에 불과했다. 인터내셔널은 영국 노동자를 설득해 대륙 측의 파업을 지지하는 자금을 보내도록 하고 또 파업 진압대에 의해 북해 너머로 끌려간 그들을 다시 불러들이기도 함으로써 국제 노동조합운동을 시작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사회 혁명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모든 활동은 낭만적 허구에 불과했다. 파리코뮌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유능한 행정 관료와 군인들이 현실적인 압력에 의해 낭만적인 호사가들과 연극적인 몽상가들을 파멸시켰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비극 중의 하나로, 결국 감상적인 사회주의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 마르크스가 자신의 글재주로 티에르를 현존하는 악당 중에서 가장 나쁜 인간이라고 주장하거나, 갈리페에게 아직도 프랑스 정계에 발붙일 수 없을 정도로 지우기 어려운 낙인을 찍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빅토르 위고가 저지섬에서 나폴레옹 3세에게 뛰어난 글 솜씨로 공격을 퍼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피아트와 들레클뤼즈 쪽이 티에르나 갈리페보다 고매한 이상을 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총을 쏘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갈리페가 들레클뤼즈를 쏘았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티에르니까 프랑스 국정을 그만큼이나 운영할 수 있었지, 피아트는 스스로 실천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수다를 멈추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지도 못했다. 티에르를 추종하던 자들은 그 대가로 토지 소유자나 자본가들에게 이용당했다. 하지만 만약 피아트를 따랐더라면 미친개처럼 사살당하든가, 아니면 운 좋게 목숨은 건지더라도 공연히 뉴칼레도니아로 유형당했을 것이다.    

 

- 이것을 바그너의 우의에 빗대어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알베리히는 반지를 되찾아서 발할라 최고 집안의 규수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보탄과 로게를 쫓아내겠다고 벼르던 예전의 마음을 바꾼다. 니벨하임이 너무 음산한 곳이라서 안전하고 쾌적하게 살고 싶다면 보탄이나 로게에게 자기 대신 사회를 조직하게 하고 그 대가를 무척 후하게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웅장함, 군사적 영광, 충성, 열광, 애국심을 원했는데, 자신의 무지막지한 탐욕으로는 도저히 이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반면에 보탄과 로게는 1871년에 독일에서 이 모든 것을 승리의 정점까지 끌어올리고 의기양양해 있었다(독일 제국의 성립을 의미함). 바그너 자신도 '황제 행진곡'에서 이를 축하하는데, 이 곡은 마르세예즈나 카르마뇰(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들이 광각에서 춘 춤)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명한 <공산당선언>(1848)과 마찬가지로 <니벨룽의 반지> 또한 역사 법칙과 자본주의적 신권정치 시대의 종언에 영향을 받고 탄생한 작품이다. 하지만 바그너 역시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기술적인 통치나 행정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고 계급투쟁에 있어서 영욱과 악한을 나누는 관점 또한 너무 감상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일반론이 실제 진행 과정에 어떻게 들어맞을지, 또 그 과정에서 각 계급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 이러한 대조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기는 하지만 경제적인 측면의 우의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생활에서의 파프너는 구두쇠가 아니라 배당금과 안락한 삶을 추구하며, 보탄이나 로게와 같은 집단에 끼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황금을 알베리히에게 돌려주고, 그 대가로 그의 사업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본을 얻은 알베리히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동료 난쟁이들을 착취하는 한편, 자본이 없는 파프너의 동료 거인들도 착취한다. 게다가 이러한 착취를 위해 수반되게 마련인 노력과 선견지명과 자기 통제, 그리고 그 성공으로 얻은 자존심과 사회적 존경심은 알베리히 자신의 성격을 점점 개선시킨다. 

 

- 이러한 변화는 마르크스나 바그너도 예측하지 못한 것 같다. 알베리히는 둔하고 탐욕스러우며 도량이 좁은 축재가는 절대로 큰돈을 모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탐욕으로는 십을 백으로, 백을 천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르나, 천을 몇십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금전에 대한 의지보다 커다란 배짱과 권력에 대한 의지가 필요하다.  

 

- 그리고 '언론'이라 불리는 새로운 신을 소유하고 통제하는데 언론은 여론을 그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고 지크프리트를 탄압하고 박해하는 일을 수행한다. 

 

- 이러한 상황은 지크프리트가 알베리히의 방법을 배운 다음 그가 행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지크프리트가 여전히 알베리히에게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끽소리도 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알베리히의 일이 보탄이나 로계의 일처럼 꼭 필요한 것이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전사가 아니라 그의 업무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계승할 수 있는 유능한 실업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만큼 아둔하고 무지하거나 아니면 공상적인 비현실주의자라면 또 반항을 할지 모르겠지만...

 

- 가령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의식을 가지고 마르크스의 호소 아래 단결해서 계급투쟁에 승리한 다음, 모든 자본이 공유 재산이 되고, 군주, 부자, 지주, 자본가가 모두 평등한 시민이 되었다고 치자. 하지만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다음날 굶어 죽거나 아니면 그때까지 로마노프 왕가나 호엔촐레른 왕가 또는 크룹이나 카네기 등과 같은 독재적 군주, 기업가, 혹은 그 하수인들이 수행하던 일들을 도맡아 해야 하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거물들은 일이 그렇게 진행되기 전에 전력을 다해 자신들의 권력과 재산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마르크스를 실무가로, 티에르를 악당으로 오해하고 있는 혁명 세력이 그저 의분에 휩싸여 항거하거나 설교하는 아마추어 음모가가 아니라 긍정적이면서 실무 능력을 갖춘 행정 요원이 될 때까지 버틸 것이다. 
 

- 이 모든 것은 바그너의 오페라나 마르크스의 책에서는 결코 예측할 수 없었던 발전이다. 두 사람 모두 이 시대의 종말을 예언했으며 추측할 수 있는 한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또한 둘 다 당시 역사학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통찰력으로 산업의 역사를 1848년까지 끌고 올라갔다. 비록 1913년에는 그 시대가 너무 번성했기 때문에 그런 예언이 말도 안 된다며 무시당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도 채 안 되어서 유럽의 상황이 바뀌고 말았다. 아무리 인정 많은 사람이라도 굶주림에 시달리는 수많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반 크라운만 달라는 부탁에 고개를 젓고 어깨를 움츠리게 되었다. 그리고 알베리히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자신을 불사조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보탄과의 동맹 덕분에 그의 아들딸은 위험한 봉건적 군국주의적 이념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 그때까지 바그너는 자신의 생각에 너무 빠져 있던 나머지 세계는 선의가 아닌 행동으로 지배되며, 유능한 죄인 하나가 아무 쓸모없는 성인이나 순교자 열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이 문제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모든 천재가 그렇듯이 바그너는 남들보다 월등히 성실했고, 남들보다 사실을 더 존중했으며, 감상적인 대중 운동의 최면적 영향력으로부터 남들보다 더 자유로웠고, 정치권력의 실상에 대해서도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 국가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뒷구멍으로 모든 일을 조종하면서 무력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신들의 황혼>을 작곡했을 때 그는 지크프리트의 패배와 보탄로게 알베리히 삼위일체 체제의 승리를 사실로 인정했다. 그는 더 이상 영웅이 나타나 멋지게 해결해주기를 바라지 않고 대신 <파르지팔>에서 새로운 주인공상을 구상했다.

 

- 바그너에 따르면 그 주인공은 영웅이 아니라 바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베는 검이 아니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 하에 창으로 무장하고 있다. 아울러 용을 죽이고 크게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조를 쏘아 떨어뜨린 것을 부끄러워하는 그런 사람이다. 구원자에 대한 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는 바그너의 사고방식이 <라인의 황금>에서 <신들의 황혼>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완전히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실이 그가 왜 <니벨룽의 반지>의 우의성을 버리고 이전의 '로엔그린 화'로 돌아갔는지를 설명해 준다.  

 

- 그가 왜 <지크프리트>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발퀴레>에서부터 <니벨룽의 반지>를 다시 써나가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일을 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설명을 해주어야 하리라. 바그너나 당시에 살았던 그 어떤 이도 그 일을 이룰 만큼 시기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가 이미 이루어 놓은 작품들이 그의 엄청난 에너지와 인내력을 갉아먹은 상태였기에 그는 남아 있던 에너지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작품을 쓴 것이다.  

 

- 나는 바그너에 대해서도 이가 똑같은 말을 하고자 하는데, 다행히도 내 말을 뒷받침해줄 만한 바그너 본인의 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1856년 8월 23일 레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작품이 참된 예술 작품일 경우 자신에게조차 그것이 수수께끼처럼 느껴져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어떻게 작가가 작품을 만들면서 직관적으로 느꼈던 것들을 남들이 완벽하게 이해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바그너는 작곡가인 동시에 철학가이자, 비평가였기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항상 정신적인 측면의 설명을 모색했다. 그 결과 몇몇 작품에 대해서는 훌륭하게 설명했지만, 아쉽게도 작품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는 헨리 8세가 자신의 혈액순환에 대해 나름대로 훌륭하게 고찰했지만, 그가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의사 하비가 그에 대한 진실을 규명한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 그렇기는 하지만 바그너 본인의 설명이 무척 흥미롭다. 우선 <니벨룽의 반지>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알베리히의 전제 정치와 니벨룽족의 노예 상태를 그린 부분에서는 특히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묘사한 자본주의 산업 체제의 초상화가 많이 드러난다. 이것은 인간이 지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 부분을 드라마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내무부가 관할하는 구체적인 일처럼 말하자면 바그너에게도 그 의미가 분명하다. 하지만 보탄의 운명에 관한 부분은 그렇지 않다. 1852년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 대본을 완성한 직후에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논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만나면서 그가 추구해 오던 생각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이 철학적 걸작에 푹 빠져서 이 책을 가리켜 자신이 수많은 시작(詩作)을 통해 예술적으로 증명해온 인간성의 갈등을 지적으로 논증한 책이라고 말했다. 레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백하건대, 내가 직관적으로 도달한 원리에 부합하는 논리적 개념을 다른 사람이 제공해 주었다. 이를 통해 마침내 나는 내 예술 작품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바그너는 스스로 의식하기 훨씬 전부터 쇼펜하우어주의자였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것은 그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너무 매료된 나머지 옛날 생각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드러냈을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바그너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본래의 직관적, 충동적 부분과 의식적, 이성적으로 형성된 관념 사이에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소외가 일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 쇼펜하우어가 현대 사상에 기여한 가장 큰 공로는 이러한 차이의 구분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인식시켰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이전의 '종교와 예술의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구분은 친숙한 것이었지만, 그 후로 르네상스의 이성주의에 파묻히고 말았다. 따라서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의 메타 생리학('형이상학'보다 덜 오해받을 만한 말을 사용해 본다)이 자기에게 딱 들어맞는다며 푹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메타 생리학과 정치 철학은 엄연히 다르다. 지크프리트의 정치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정치 철학과 정반대다.

 

- 물론 쇼펜하우어와 바그너 모두 인간의 본능적인 부분(인간의 의지)과 추론 능력(<니벨룽의 반지>에서는 로게가 이를 체현한다)을 메타 생리학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의지'는 인간을 보편적으로 괴롭히는 것, 즉 커다란 해악인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고, 이성은 생명 창조의 의지를 뛰어넘어 극기를 통해 휴식과 안락, 소멸과 열반으로 이끄는 하늘이 주시는 은혜다. 물론 이것은 염세주의적 주장이다. 반면에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를 쓸 즈음, 무척 낙관적인 혁명적 사회 개량주의자였다. 그는 추론 능력을 경멸하였는 바, 책략을 좋아하고 비현실적이며 사람을 미혹시키는 로게가 바로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대신 생명 창조의 의지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멋진 지크프리트로 표현하였다. 그런 그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나서는 사실 자신이 진작부터 늘 염세주의자였고 <라인의 황금>에서 보탄의 가장 사려 깊고 훌륭한 조언자가 로게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 때때로 바그너는 자신의 견해가 바뀐 것에 대해 매우 솔직하다. 그는 레켈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니벨룽의 드라마는 고대 그리스적 원리 위에 내 나름의 논리로 낙관적 세계를 세우던 때 틀을 잡은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사람들이 바라기만 하면 그런 세계가 반드시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왜 그것을 바라지 않을까라는 문제는 교묘히 미뤄놓았다. 이렇게 창작상의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서 나는 고통을 모르는 인물을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로 지크프리트의 성격을 구상했다."  

- "한 개인이 최고의 만족감을 느끼거나 자기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경우란 그 사람이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에만 가능한데 그것은 사랑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남자와 여자를 다 가리키는 말일세. 이 둘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존재한다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이 완전한 인간성에 도달하려면 오로지 사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 하지만 요즘 우리들은, 무정한 얼간이들인 관계로 인간 하면 자기도 모르게 남자만 떠올리지. 어쨌거나 남자와 여자가 사랑(감각적이면서 초감각적인)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하는 거라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 -인간 자신- 보다 뛰어난 존재란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을 통한 인간성의 완성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생명 활동인 게야."

 

- 장래 쇼펜하우어주의자의 말을 듣고 난 다음이니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바그너의 자기 작품에 대한 해설은, 대부분 그가 그날 품었던 기분이나, 질문자의 말에 자극을 받고 그의 매우 예민한 상상력과 활발한 정신 활동이 빚어낸 일련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특히 사적인 편지에서 바그너는 편지를 받는 사람에 따라 변명도 다르게 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종류의 주장을 한다. 그러므로 편지에 쓴 그의 설명은 영구불변의 진지한 해설이 아니라 재기 넘치는, 시사적인 변명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 작품은 작품 스스로 말해야 한다. 만약 <니벨룽의 반지>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중에 편지에다가 <니벨룽의 반지>의 의미를 다르게 말한다면, 마치 이 두 가지를 서로 다른 사람이 쓰기나 한 것처럼 <니벨룽의 반지>를 통해 편지의 내용을 단호하게 논파해야 할 것이다.   

 

- 그렇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바그너의 말에 제법 정통한 사람이라도 그것들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을 발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타입의 모든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다면적 성격이 바그너 속에 몹시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는 마치 여러 사람이 한 사람으로 집약된 것처럼 보인다. 싸우기 좋아하고 공격적이며 혈기 넘치는 개혁파 노릇에 지치면, 어느 순간 염세주의자에 열반지향자로 변하는 것이다. <신들의 황혼> 제3막에 나오는 브륀힐데의 "편안히 쉬소서, 편안히 쉬소서, 신이여"에서 느껴지는 마음의 평온은 깊은 확신이라는 면에서 너무도 숭고하다. 하지만 몇 페이지만 앞으로 돌아가보면 지크프리트가 제멋대로 벌이는 소동이나 부족민의 흥청망청하는 야단법석이 똑같은 강도로 묘사된다. 바그너는 일주일 내내 쇼펜하우어주의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바그너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의 생각은 그의 기분만큼이나 자주 변한다.  

 

- 황금은 어떻게 형상화했을까? 바그너는 <라인의 황금> 제1장에서 햇살이 물속을 비춰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황금이 반짝반짝 빛날 때 오케스트라가 갑자기 아름다운 모티브를 연주하는 눈에 띄는 방법으로 황금을 형상화했다. 마법 투구의 짧고 기묘한 모티브도 처음부터 확실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관객의 관심이 마법 투구와 그 마법에 홀딱 빠져있을 때 오케스트라가 먼저 이 모티브를 두드러지게 연주하기 때문이다. 칼의 모티브는 <라인의 황금> 마지막에 나타나 보탄의 영웅에 대한 구상을 표현한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바그너는 관객들의 머리뿐만 아니라 눈에도 호소해야 하기에 실제 무대를 연출할 때 출판된 스코어에는 나와 있지 않은, 보탄이 칼을 들어 휘두르는 장면을 추가한다.

 

- 이처럼 바그너는 관객에게 리얼리티를 주기 위해 타협했는데, 만약 이러한 타협이 없었더라면 칼의 모티브와 칼은 <발퀴레> 제1막에 가서야 비로소 서로 연결된다. 훈딩의 집 난롯가에 무기도 없이 홀로 남겨진 지크문트가 내일 아침 훈딩과 결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장면이다. 그 순간 지크문트의 머릿속에 '필요할 때 칼이 생길 것' 이라던 아버지의 약속이 떠오른다. 그러자 사그라져가던 난로의 불꽃이 나무에 박힌 칼자루를 비추면서 갑자기 떨리는 듯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통해 칼의 모티브가 어렴풋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불꽃이 사그라들고 칼이 다시 어둠 속에 묻히면서 칼의 모티브도 사라져 간다. 이 모티브는 그 후 지클린데가 칼의 유래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흘러나오다가 지크문트가 의기양양하게 나무에서 칼을 잡아 빼는 순간 매혹적이면서도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이 모티브는 겨우 일곱 개의 음표로 이루어져 있고 박자도 매우 뚜렷하며 멜로디는 트럼펫이나 우체부의 나팔 소리처럼 단순하고 화려하다. 따라서 선율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는다.  

- 하지만 <라인의 황금> 제3장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반지 모티브는 난쟁이의 소굴을 휩싸고 있는 어둠과 혼란에 관한 어떤 특징과도 연관되지 않는다. 이것은 멜로디가 아니라 음악가들이 싱커페이션이라부르는, 리듬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일부러 정규 패턴을 따르지 않은 운율상의 악센트에 불과하다. 세 개의 단3도가 겹쳐진 친근한 화음(전문적으로는 감도 화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모티브 또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모티브들이나 반지의 저주를 표현하는 기괴하고 악의적인 모티브처럼 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전의 처리체 모티브에 관한 한 이 작품을 처음 들었을 때 음악적 설계가 아주 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모티브는 뚜렷하며 중심이 되는 멜로디 또한 셰익스피어 희곡의 극적 동기처럼 확실하면서도 알기 쉽게 되어 있다.

 

- 이외에도 관객들이 쉽게 찾아낼 수 없는 모티브들이 스코어 여기저기에 숨어 있으므로 반복해서 듣다 보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재미를 얻을 수 있다. 아울러 <니벨룽의 반지>에서 베토벤의 음악과 같은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정신도 느끼게 된다. 각각의 등장인물에 관한 모티브는 해당 인물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머릿속에 쉽게 각인된다. 그러면서 대체로 그 모티브와 인물의 성격이 아주 잘 들어맞는다. 거인들의 등장은 박력 있게 쿵쿵 걷는 박자의 모티브고, 미메는 늙고 섬뜩한 괴짜이기 때문에 가냘픈 두 개의 화음이 서로 불길하게 살금살금 나아가는 듯한, 섬뜩하고 기이한 모티브다. 구트루네의 모티브는 아름다우면서 달래는 듯한 느낌이고, 군터의 모티브는 거칠고 대담하나 평범하다. 그리고 어떤 인물이 무대 위에서 숨을 거두면 그 사람의 모티브가 점점 약해지다가 여운과 함께 침묵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데, 이는 바그너가 좋아하는 트릭 중의 하나다.  

 

- 하지만 모티브 작업에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좀 더 복잡한 성격의 인물에 대해서는 단순히 하나의 모티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개성적인 사고방식이나 포부에 부합하는 특별한 모티브가 극의 진행과 함께 흘러나온다. <니벨룽의 반지>의 주선율 구성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점은 극을 통해 드러나는 생각이나 느낌이 라이트모티브에 대위법적으로 잘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보탄의 경우, 용이나 말이 등장할 때나 베버의 <마탄의 사수>나 마이어베어의 <귀신 로베르>에서 악마가 등장할 때처럼, 그가 등장할 때마다 마치 우산에 붙여놓은 이름표인 양 오케스트라가 변함없이 고정된 모티브를 연주하는 일은 없다. 어떤 때는 발할라의 모티브가 신의 위대함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 그의 권력의 상징인 창은 다른 모티브로 표현하고 있다. 바그너는 이 모티브를 표현하는 데 자기 장기를 십분 활용한다. 즉 지크프리트가 노퉁으로 일격을 가해 창을 두 동강 냈을 때 칼의 모티브인 파열음으로써 창의 모티브를 관통해 산산조각 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 것이다. 보탄과 연결된 또 다른 모티브로 나그네의 음악이 있다. 이것은 보탄이 세 가지 퀴즈를 내는 장면에서, 그가 미메의 동굴 입구에 나타났을 때 미메를 악몽과도 같은 공포에 떨게 하는 위력을 표현한다. 이처럼 보탄과 관련된 모티브는 여러 가지일 뿐만 아니라 각각의 모티브가 극의 상황에 따라 음조나 음색에 미묘한 변화를 보인다. 젊은 지크프리트의 경쾌한 뿔피리 모티브도 마찬가지다. 당당한 화음을 자랑하는 이 모티브는 <신들의 황혼> 서막에서 지크프리트가 어엿한 영웅으로 등장할 것을 미리 알리면서 압도적인 웅장함을 과시한다.   

 

- <피가로의 결혼>(1786)과 <돈 조반니>의 피날레가 나온 후 근대 음악극의 가능성이 한층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베토벤의 교향곡이 나온 후로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시적 감수성도 음악으로는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투박한 즐거움에서 원대한 야망에 이르는 변화무쌍한 감정도 춤곡의 도움 없이 교향곡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바흐의 전주곡이나 푸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의 작품은 음으로 정교하게 엮어놓은 고딕 건축의 아름다운 트레이서리 같아서 웬만한 재능으로는 따라갈 수 없다. 반면에 베토벤의 기법은 보다 솔직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대중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렇다면 베토벤은 바흐와 같은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 베토벤도 바흐처럼 소리에서 고딕식의 멜로디를 길게 끌어낼 수 있었고 그중 몇몇 멜로디에 적당한 화음을 붙여 잘 엮어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작곡가가 일일이 작업하지 않아도 온통 감정으로 넘치는 음악이 저절로 진행되어 나간다. 요즘 비평가들이 놓치기 쉬운 이러한 감정은 우리의 공감에서뿐만 아니라 미묘한 감동을 받고 나온 감탄 속에서도 따뜻하게 우러나오는 것이다. 아울러 종종 듣는 이로 하여금 작곡가가 의도하지도 않은 감동을 그의 의도라고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어떤 소년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속에 친절함과 고상한 지혜가 들어 있겠거니 하고 상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모든 음악을 장식적인 대칭성으로 평가하던 낡은 습성이 사라질 때까지, 음악가들은 베토벤의 교향곡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한 채 그의 완전무결함을 오해하고 또 그가 제정신이 아닌가 노골적으로 의심했다. 하지만 단순히 새롭고 멋진 음의 패턴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분을 표현해줄 음악을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그는 신의 계시를 이룬 존재였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기 자신의 감정 표현만을 목표로 했던 그였기에 혁명적인 용기와 솔직함으로 19세기에 떠오르는 세대의 모든 기분을 남들보다 앞서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 그 결과는 필연적이었다. 19세기에는 작곡가가 되기 위해서 더 이상 양식 설계자로 태어날 필요가 없었다. 대신 극적이고 묘사적인 소리의 힘에 무척 민감한 극작가나 시인이 되어야 했다.    

 

 


 

- 바그너 음악의 최고 권위자 중의 하나인 버나드 쇼는 이 책에서 구귀족의 몰락, 신흥 자본가 세력의 지배, 새로운 인류의 출현 등 반지의 해석에 처음으로 사회 계층의 개념과 자본주의적 해석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이후 반지의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는 해석이지만 책이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단순한 이야기를 가지고 버나드 쇼가 자신의 편향된 사회주의적 시각에 맞추어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쇼는 드레스덴 봉기(1849년)에 가담했다가 모든 기득권을 잃고 파리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바그너의 삶의 궤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러한 논란에 대응하고 있다.


- 그러므로 이 책은 <니벨룽의 반지>에 담긴 바그너의 창작 의도를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해설했다기보다는 쇼의 정치 철학이 더 많이 담긴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 담긴 쇼의 해석이나 견해에 대해서는 독자에 따라 지지와 비판이 엇갈릴 수 있다. 또한 드라마 부분에 치우치다 보니 음악적 요소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떠나서 이 책이 바그너 애호가에게나 일반인에게 무척 흥미진진한 책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천재가 또 다른 천재를 알아보고 쓴 비평이라고나 할까. 

- 번역하는 동안 쇼의 번뜩이는 재기와 독설을 읽어 내려가는 맛과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물론 지독한 만연체 문장을 헤치고 풀어나가느라 번역하는 내내 머리가 아팠던 것도 사실이지만, 번역의 괴로움보다는 독서의 즐거움이 훨씬 컸던 책이다. 고전 음악 또는 바그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이 바그너 음악에 대한 이해와 감상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일반 독자라도 버나드 쇼의 재기 발랄한 달변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독자들이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다면 번역자로서 이보다 더한 보람이 어디 있을까. <니벨룽의 반지>와 버나드 쇼의 지긋지긋한(!) 문장에 빠져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바람결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발퀴레의 비행'이나 들어봐야겠다. 
 
 
 

 

 

 

 

 
니벨룽의 반지
바그너의 초대작 오페라『니벨룽의 반지』. 이 책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버나드 쇼가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에 대한 해설서이다.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 4편의 음악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라인강 밑바닥에서 세 처녀가 지키고 있던 황금을 훔쳐 반지를 만들었다는 모티브로 시작된다. 신, 거인, 난쟁이, 물의 요정, 발퀴레 등이 등장하지만 황당무계한 옛날이야기는 아니며 이 전설적인 인물들을 현대적인 인물들과 부합시켜 인간이 지적으로 의시할 수 있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 부분을 드라마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더불어 상습적이고 통념적인 세태의 일탈을 꿈꾸는 바그너만의 독특한 세계가 담겨 있으며 이 작품을 통해 소설가처럼 이야기를 구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진정한 음악인의 자태를 뽐낸 예술의 선두주자인 바그너의 웅대한 대서사시를 만나볼 수 있다.
저자
버나드 쇼
출판
이너북
출판일
201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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