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하지은 / 호인 / 이재만 / 김이삭 / 한켠 / 서번연 / 지언] 야운하시곡 외 우음, 혁명가들

일루젼 2024. 4. 10.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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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하지은 / 호인 / 이재만 / 김이삭 / 한켠 / 서번연 / 지언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2021.03.12


       

        

작은 우연들이 겹치고 겹쳐 만들어진 연들이 있다. 별 것 아니라면 별 것 아니고, 별 것이라면 또 별 것인 가느다란 연들.

 

다른 작가의 소장본을 구매하기 위해 책을 고르다, 표지가 눈에 띄어 하지은 작가의 저서를 함께 구매하게 되었고.

그렇게 알게 된 하지은의 작품들을 찾아 읽다 보니 <야운하시곡>에 이르게 되었고.

<야운하시곡>에서 '한켠'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 반하게 되었다는,

그야말로 나에게만 의미 있는 별 것 아닌 이야기.

 

표제작인 <야운하시곡>에 관해서는, 하지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리뷰하면서 조금 더 이야기해 볼 생각이다. <오만한 자들의 황야>, <모래선혈>과 연이어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저자가 '부정(父情)'을 큰 화두로 삼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만 서로를 모르는 부자(父子)와 혈육의 정을 모르는 부자(父子), 그리고 그에 이끌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아비까지. 전혀 다른 테마들처럼 보이지만 하나같이 부모와 자식 간의 애증, 그리고 더 큰 의미에서 하나로 정의 내리기 힘든 인간의 관계와 정(情)과 은원(恩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 작품 중에서는 <야운하시곡>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들의 결이 잘 유지되었고, 길지 않은 분량이었기에 세부적인 장면들이 생략되어 깔끔한 여운을 준다. 특히 중심 화자의 내면을 위화감 없이 따라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호(好).

 

<호식총을 찾아 우니>는 앤솔로지다운 느낌이 강한 작품이었다. 등장인물 일부를 더미(dummy)로 소모할 수 있는 중장편과는 달리 단편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최대한으로 비워낸 여백이 훨씬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결말은 예상치 못한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주화자의 회상 이외의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아 화자와 연이 닿았던 등장인물의 속내를 헤아릴 수 없었다는 점도 결말에 모호함을 더한다. 물론 그 느낌까지도 '창귀'와 '으스스함'을 중심으로 하는 전체적 분위기와는 잘 어우러진다. 

 

<로부전>은 경연(經筵)의 한 장면을 그대로 떼어놓은 듯하다. 실제로 임금과 집현전 학사의 대화라는 점에서 더더욱 현장감이 느껴진다.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어조와 '로부전'이라는 가상의 언문서(백성들이 읽을 것을 우려했으니 언문으로 쓰였을 것이다)를 통한 비유들이 매력적이다. 임금과 학사, 그리고 그의 장인까지 모두의 생각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해서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지도, 극단적으로 격렬하지도 않은데 오히려 그 미묘한 거리감이 각자의 입장을 더 잘 드러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에 더해 독자까지 고려한 결말은 아주 훌륭한 점정(點睛)이었다.

그러나 <로부전>은 저자와 독자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작품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의도를 가질 수 있는가.

 

<다시 쓰는 장한가>는 양귀비와 현종의 실사(實史)를 비틀어 읽어본 소설이다. 김이삭 작가가 중국 문화 쪽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상당히 고증(?)이 잘 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역사를 모르고 읽더라도 총비의 처연한 매력과 권력다툼의 무상함을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하지만, 등장인물과 행동들이 대부분 실사를 기반으로 하니 조금만 찾아보신다면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혹은 여러 편의- 소설을 읽어보실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현실이 더 소설 같을 수 있다. 

'현문에서 화신한 선왕'과 궁인 한 씨의 존재에서는 작품이 소설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실사에 매몰되지 않도록 신경 쓴 저자의 안배가 느껴진다. 희대의 악녀인가, 시대의 희생양인가. 태진 도사는 말이 없다.

 

<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는 계절에>는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저자는 본문 내 삽화 또한 담당했던 서번연 작가.

개인적인 취향에 잘 맞았던 작품이었는데, 처연한 감성과 동양적인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작품의 분위기와 '장미'가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게 아쉬운 점. 중심화자를 생각한다면 작가는 찔레 또한 같은 장미과라는 점, 화려해 보이지만 가시를 두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장미'를 선택한 게 아닐까 싶다. 혹은 중의적으로 비단옷을 두른 천호 또한 연상되길 바랐던 걸까?

조심스럽지만 만약 나였다면, '당아욱'은 어땠을지. 가시는 아니지만 삐죽한 솜털이 줄기를 두르고 있고, 개화시기와 자생지 또한 맞아떨어진다. 무궁화와 닮은 심장 모양의 큰 꽃잎은 장미에 뒤지지 않는 화려함과 당당함을 뽐내는데 꽃말 또한 은혜와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 또는 자애다.

백호를 연상케 하는 육오, 그리고 주작이나 봉황을 연상케 하는 새와 사신에도 십이지신에도 들지 않는 여우의 어우러짐이 좋았다. 

'이것은 사랑인가, 사랑이 아닌가.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랑인가.'  

 

<은혜>는 신 <전설의 고향>을 본 느낌. 지금 세대에게는 오히려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못할 비극에 관해, 선의가 언제나 최선의 결말을 낳지는 않는다는 점에 관해.

자기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줄 이의 중요성에 관해, 절대적인 지지는 결국 스스로만이 품을 수 있음에 관해.

전체 작품을 닫는 위치에 수록된 이유는, 아마도 연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스러져가는 마지막 때문이 아닐까. 

 

수록 순서 상으로는 <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는 계절에>의 앞에 수록된 <서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조금 많아 리뷰 순서를 바꾸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경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통해 '한켠'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고, <서왕>과 이어지는 <혁명가들>과 <우음>도 찾아 읽고 함께 발췌해두었다.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을 생각이다. 

 

'호'라고 느껴지는 것들은 그 이유를 살펴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대개 감정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이유를 덧붙이는 것이긴 하지만, 그 정도가 가벼울수록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이유를 찾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언가에 대한 호불호가 '극호'에 가까워지게 되면 그때는 '어째서'를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진다. 이미 '어째서'가 아니라 확연한 '그렇기 때문에'가 되어 있으므로 -콩깍지가 씌었달까- <서왕>에 관한 리뷰는 이런 나의 상태를 감안해서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건조하면서도 단정한, 단정해서 잔혹한, 그러면서도 눈을 돌리지 않는 문장. 

묘사도, 담긴 감정도 과잉이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는 듯한 담담함이 절대 담담할 수 없는 인물의 상황과 어우러지면 그 짧은 어구 하나가. 단어 하나하나가. 억누르고 억눌러 담아낸 무게와 강렬함으로 가슴을 친다. 그 한 마디를 소리 내기 위해 담아 온 것들이 함께 밀려든다. 

 

쥐와 까마귀. 터부시하기도, 숭상하기도 하는 영물들.

궁 밖에 살던 아이는 새를 날려 보낸 새장과 함께 들어오고, 궁 안에 살던 아이는 쥐가 갉을 붉은 비단 장정을 들고나간다. 

이들은 시취에 익숙하다. 바닥에서 살아남는 삶에도, 비단 금침 위에서 독을 삼키는 삶에도 시취는 배어있다. 

누가 누구를 단죄하고 원망하겠는가. 그저 살아있기에 살았고, 죽지 않기를 바랐기에 살았다. 

 

<서왕>을 읽으며 매력을 느끼신 분들께서는 반드시! 꼭! <혁명가들>과 <우음>을 함께 읽어보시길 바란다. 이어지는 글이라 안내해 두셨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 세 편은 하나의 소설이고 한 권의 책이다.

 

깊게 배우지 않았어도 그렇기에 핵심을 보고, 누구보다 깊게 배웠어도 그를 드러내지 않고 물러선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면, 두 인물이 보여주는 한랭하고도 담백한 모습들과 몇 마디만으로도 서로를 짐작하는 닮음을 보고 있자면, 내가 대신 타버릴 것만 같아진다. 

 

현재 붙잡혀 있는 부분은 누이의 유서다.

누이는, 살아 있지는 않을까.

누이는, 어떻게 죽었을까.

누이는,

 

누가.

 


   

 

 

야운하시곡 夜雲下豺哭 - 하지은
냉혹한 무림의 패자 사혈공. 그는 일곱 살 어린 나이로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강호의 은원을 청산하러 떠난다. 거침없이 천하를 활보하며 수없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그가 쌓은 업보와 가슴 시린 부정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진다.

호식총을 찾아 우니 - 호인
타국을 떠돌며 무역으로 크게 돈을 벌어 조선으로 돌아온 수찬은 호랑이를 조심하라는 경고에도 산에 오른다. 호환(虎患)을 당해 죽은 이들이 창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드는 무덤 호식총을 실수로 깨뜨린 후, 그가 버린 한 모녀의 기억이 그를 잠식한다. 

로부전 勞婦轉 - 이재만
조선 후기, 득세하는 사학을 경계하는 규장각 대신들의 불만이 빗발치던 시기에 궐 안팎으로 인기를 끌던 잡서가 대두된다. 무려 3부작이나 되는 이 소설을 쓴 장본인인 집현전 학사는 임금 앞에 끌려와 작품 해석을 두고 논쟁을 벌이게 된다.

다시 쓰는 장한가 長恨歌 - 김이삭
예종이 붕어한 뒤, 황금빛 털의 사자개가 태어나자 선황의 유언에 따라 당현종은 사자개에게 태상황의 지위를 부여한다. 졸지에 태상황 사자개를보필하게 된 궁녀 한 씨는 양귀비가 처음 궁으로 왔을 때 아비가 직언을 했다 가문이 풍비박산 난 터라, 귀비를 증오하고 있다. 

서왕 鼠王 - 한켠
과거 궁의 신녀였으나 미쳐 버린 어머니와 살던 소년이 환관을 따라 궁에 들어 왕비의 양자가 되어 세자에 오른다. 소년의 입궁과 함께 권력싸움에서 왕비에게 밀린 후궁 최빈은 죽음을 맞는데, 자신의 이복형제인 최빈의 아들에게 소년은 연정을 느낀다. 

 

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는 계절에 - 서번연
천제의 명을 받아 구중의 곤륜을 지키는 문지기 호랑이 앞에 천호 한 마리가 나타나 만날 이가 있다며 문을 열어 주기를 청한다. 하늘 약초를 훔친 죄로 감옥에 든 지아비를 보기 위해 달려온 그녀에게, 차마 호랑이는 진실을 알려 줄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은혜 - 지언
부디 딸 하나만 점지해 달라는 노부부의 소원을 들은 여우요괴가 자신이 직접 부부의 자식으로 태어나기로 한다. 그렇게 부부의 막내딸로 태어난 '은혜'는 눈에 띄게 총명하고 예쁜 아이로 자라지만 자랄수록 여우 본연의 본성을 누르기가 어려워 수척해지기 시작한다.
 


 

- 아들을 묻은 지 하루가 지났다. 

다음 걸음을 내디뎠을 때 나는 이미 아들의 무덤 앞에서 있었다. 소리가 난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다 실없이 웃어 버렸다. 이미 가 버린 녀석이 나를 찾으며 울었을 거라 생각하다니, 슬픔도 자비도 느낄 줄 모른다는 사혈공(死血)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 비웃음을 날리고 그를 찾아가 최대한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한데 아들의 그 말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알았다. 다음번 장에 나가는 날에 사다주마."
"고마워요, 아버지. 고마워요."
네게서 그 말을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내가 뭔들 하지 못하겠니.

- 늑대 새끼인 휴도 영리했다. 녀석은 먹이를 얻고 가끔 친근감을 표시할 때가 아니면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가까이 오지 않고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나를 관찰하듯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나와의 관계에 대해 고려해 보는 듯한 눈치다.
이 사람은 나에게 먹이를 준다. 그러면 내가 그를 개처럼 따라야 할까?
늑대 새끼는 맹수로서의 본능과 살기 위한 본능 속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후자를 위해서라면 나를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게다. 나는 녀석이 홀로 결정하도록 먹이를 주는 것 외에 특별히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래서 녀석의 고민도 길어지는 듯했다. 
 
- 이미 지체된 시간이 사흘이었다. 기운을 차릴 때까지만 먹이를 주자고 결정한 것이 잘못이었다. 숲은 짐승들의 강호고 녀석은 새끼일지언정 맹수다. 그를 개처럼 기르는 게 옳은 일일까? 
분명한 것은 내가 떠나고 나면 홀로 오래 버티지 못하리란 점이다. 가끔 손가락을 잘근잘근 무는 녀석의 이는 아직 충분히 날카롭지 못하다. 녀석이 결정하도록 기다리는 것만이 내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일 터. 그러나 부디 나를 떠나 맹수로서 죽기를 바란다. 

- 먹이를 던져준 지 아흐레. 늑대 새끼의 고민은 끝났다. 산장 앞마당에서 선잠이 들었던 내가 눈을 떴을 때 휴는 내 품에 누워 자고 있었다. 갸르릉 갸르릉 짐승도 꿈을 꾸는지 입을 달싹거리고 앞발을 휘젓는다. 나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래. 살아야겠지. 우선은 살고 보자꾸나."
휴가 충분히 자랄 때까지 산장에서 떠나는 것을 기약 없이 미루기로 했다. 아들의 무덤을 떠나지 않을 변명거리가 생겨 잘 되었다고 내심 생각했다. 

휴는 다시 나를 본다.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멀리서 다시 한번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엔 돌아보지도 않았다.
"의리를 지키는 게냐?"
휴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기특하긴 하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문득 강호에서 만난 수많은 인간 군상보다도 이 늑대 한 마리가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것을 보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네 뜻은 알겠다만 우리는 갈 길이 다르다. 나는 지려는 해이고 너는 떠오르려는 달이지. 밤이 오거들랑 네 동료들과 함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늑대 새끼인 것을."
휴는 귀만 쫑긋거렸다. 녀석은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이해하려는 듯 그런 행동을 보이곤 했다.

- 우우우.
그날은 달이 몹시도 들뜬 밤이었다. 풀벌레들이 귀를 어지럽히는 자정, 아들의 무덤가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떨군다.
"이것이 마지막 눈물일 게다. 용서하려무나, 휴야."

 

- 다시 올 것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칼을 뽑는 매 순간이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며 살아왔음에도 나는 어느새 그렇게도 증오하던 악인이 되어 있었다. 젊을 적의 나처럼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날뛰는 젊은이들이 제일 먼저 겨냥하는 게 바로 나였다. 죽은 피가 흐르는 악당이라 해서 붙여진 사혈공이라는 이름. 그것이 경멸스럽기보다 내심 자랑스러웠던 것은 마음 한구석이 진실로 변질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휴를 얻기 전까지 나는 어찌할 바 없는 세상의 악(惡)이었다.

다 죽일 것인가, 그들의 손에 죽을 것인가. 어느 쪽이든 나쁠 것이 없으니 내게는 유리한 선택이다. 그러나 다른 고민은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고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격렬한 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당사 뒤쪽의 연무장이었다. 들킨 것인가 싶어 긴장한 채 싸울 준비를 했지만 내게 향하는 살기가 아니었다. 누군가 수련 중인 모양이었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구나. 네게는 의지가 없다. 싸워서 상대를 이기겠다는 의지 말이다."
"별로 싸우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을 어쩝니까."
"사내 녀석이 어찌 그리도 나약한 소릴 하느냐. 강호는 네가 싸우고 싶지 않아도 싸우게끔 만들 것이다. 너를 죽이려고 마음먹은 상대에게도 그런 태도를 보일 테냐?"
"저를 누가 무슨 이유로 죽이려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전 누구하고도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은원이 생기지 않도록 강자에게 굽히고 약자에게 너그러이 살아가면 됩니다."
"한심하구나, 정말로 한심해. 당이 어떤 지경인지도 모르고..."

 

-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중년의 남자는 운이었다. 기개로 보아하니 그동안 꾸준히 수련을 쌓아온 모양이었다. 청년은 그의 제자일 터였다. 운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강호는 그처럼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싸워야 할 이유가 생겼을 때는 늦다. 그런 날을 위해수련해야 하는 것이 젊은이들이거늘.  

 

- 청년이 사라지자 운이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와 누군가를 기다리듯 섰다. 뜻을 알아차린 나는 그의 앞으로 뛰어내렸다. 알고 있었던 듯 운은 놀라지 않았다. 

 

- "네놈은 잊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네놈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가슴에 선명하다."
"유검은 날카롭지. 누구에게나 흔적을 남긴다."
운의 손이 꿈틀거렸지만 아직 공격할 태세를 갖추지는 않았다.
"네가 여기 무슨 볼 일이 있어 왔느냐."
"너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왔다."
"기회?"
"나를 죽일 기회."  

 

- "그래요? 살 방도를 찾고 싶으면 지사자( 知死者 )를 찾아오라고 하던데."
"지사자라고?"
맙소사, 내가 왜 여태껏 그를 떠올리지 못했단 말인가.

- 장에 왔었다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터.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독특한 기의 흐름을 포착했다.
지사자는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수명을 읽어낼 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읽어내는 죽음은 살 방도가 있는 죽음이었다. 나그네처럼 강호의 온갖 곳을 떠돌아다니며 그는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능력을 행사했다. 대가를 주려 하면 허허 웃고 떠날 뿐이었다. 
그런 그를 여기서 만나다니, 천운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가 머무는 초라한 객잔에 내려섰다. 늦은 시간까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을 부수고 들어가고픈 걸 간신히 자제하고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 "장에서 제 아들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하니 그가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아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름에 비해 내 얼굴은 그다지 알려진 편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나를 안다면 그것은 득이 될까 실이 될까. 
"사혈공에게 아들이 있었던가."
정체가 드러난 이상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렇다네. 끓어오르기 직전이야. 차가운 제 아비 대신에 그런 업을 진 모양이지."
내 탓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방도가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방도야 있다네."
"그럼 손을 써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지사자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재차 다그치려 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설영이라는 이름에 대해 들어봤는가?"
"아니요, 못 들어봤습니다. 그를 찾아가야 합니까?"
"찾아갈 수 없네. 이미 죽었지."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괜히 꺼내는 것은 아닐 터였다. 문득 불안이 엄습했다.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네."

- 그리고 유일하게 무릎 꿇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무고한 아이의 생명을 가지고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저를 죽이시고 제 아이는 살려 주십시오. 복수를 하실 것이라면 아이가 아니라 저에게 하십시오." 
그는 무릎 꿇은 나를 보고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하고 있지 않은가."

- 그를 죽이기 위해 나는 손을 올렸었다. 그러나 태연히 목을 내미는 그를 보고 어째서인지 허탈해져 그만두었다. 결국 손을 거두고 산장으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자고 있던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아이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휴야."
휴는 칭얼거림 한 번 없이 다시 잠들었다.

- 업이란 이토록 무거운 것이다.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처음 강호에 발을 디뎠던 그날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가장 먼저 유곽에서 외다리 여인을 꺼내와 혼인할 것이다. 그러면 휴만은 그대로겠지. 

-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음 날 똑같은 아침이 찾아왔다. 휴를 안고 잠들었던 나는 아이의 몸이 뜨거운 것을 느끼고 화들짝 놀랐다.
"휴야, 왜 이러느냐? 휴야!"
그날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떻게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휴의 기혈은 엉망이었다. 나만 바로 곁에서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장사영도 그렇게 말해 주었는데. 

 

- 아들의 몸은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차가워졌다. 어느 쪽이든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고열로 인해 일찌감치 귀가 멀었고 눈도 멀어 갔다. 겁에 질린 아들은 정신이 들 때마다 소리 질러 나를 찾았고 그럴 때면 달려가 손을 잡아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음에 기절과 구토만 반복하던 아들은 열흘이 지나자 본격적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일곱 살짜리 아이가 말하는'온몸이 찢어진다'거나 '뼈가 바스러진다'는 표현은 내 가슴을 찢고 바스러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 억겁 같은 한 달이 지나, 아들도 나도 지쳐있을 때였다.

"이제 그만하세요. 아버지."
오래간만에 비명 대신 듣게 된 아들의 말이었다.
나는 대꾸할 기운이 없어 숨을 고르며 아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됐어요. 저도 아버지도 더는 못 견딜 거예요. 이제 그만 보내 주세요. 아버지는 그런 일을 쉽게 하실 수 있잖아요..."

 

- 일곱 살짜리가 하는 말이다. 잠깐의 고통을 못 이겨 하고 있는 소리일 뿐이다. 틀림없이 아들은 죽음이란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 폭풍 전에는 고요함이 먼저 찾아온다고 하셨죠? 저는 이제 그걸 알겠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에요. 이후로는 고통, 오직 고통뿐이에요. 그것을 느끼기 전에 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저는 무서워요. 너무나도 무서워요. 제발요, 아버지." 
열이 높아 하는 헛소리일 뿐이다. 아들이 내게 그런 말을 할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아들을 달래어보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들은 아파서 비명을 지를 때가 아니면 입을 열 때마다 한결같이 말했다. 
죽여주세요.

-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고 얼마나 많은 탄식을 뱉어냈던가. 아들 대신 죽을 수 있고 아들 대신 아플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손은 고통을 줄 수 있을지언정 고통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

- 열두 시간 동안 이어진 비명 끝에 아들은 목소리마저 잃었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그곳에 가서도 나를 잊으면 안 된다. 절대로 아버지의 얼굴을 잊으면 안 된다."
아들이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안 잊을게요.
"다시 만나자. 꼭 다시 만나자. 그곳에서도 서로를 기억하여 반드시 다시 만나자."

(리뷰자 주 : 무척 감동적이지만... 휴는 '일찌감치 귀가 멀었고 눈도 멀었다'. 몰입해서 읽다가 이 대목에서 튕겨져 나왔다. 손바닥에 썼다는 묘사가 들어간다면 더 좋을 것 같다.)

- 아들은 미소 지었다. 내 손으로 보내고 난 후에도 아들은 여전히 그렇게 웃었다.

- "이럴 수가. 내가 늦었을 리 없을 텐데."
하루를 꼬박 무덤 앞에 주저앉아만 있었기에 고개를 돌리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시야도 흐릿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지사자?"
"내가 너무 늦은 모양이군."


- 아니, 그는 늦지 않았다. 내가 하루를 더 견뎠더라면, 아들을 타일러 하루만 버티게 했더라면 늦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보내 버렸소."
"자네가... 아아."
"나 편하자고 그리했소. 아들의 비명을 더는 들을 수 없어서 그리했소."
"미안하네. 이제야 자네를 용서하게 된 나를 용서해 주게.
"

"그런 것은 부질없소. 이제 모든 일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들의 무덤은 작고 구슬펐다. 

"이제사 진실로 내 피는 죽었소."

- 그 후로 삼 년 하고도 육 개월. 나는 천문당의 중심에 와 있다. 과연 하늘에 대고 직접 물을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일당백의 고수였다. 정면혈투로는 승산이 없었기에 암습을 택했다. 그럼에도 긴 시간을 소요하고 나서야 지모진과 독대할 수 있었다.
그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는 대화하기에 즐거운 상대가 아니었다. 단 두 번, 손을 써서 소운영과 운의 은원을 갚았다.

 

- 늑대 휴는 그로부터 얼마를 더 살지 못했다. 녀석은 죽기 전까지 비척거렸고 늘 힘겨운 듯 헐떡였다. 그렇게 나를 볼 때면 아들이 자신을 그만 보내 달라고 말하던 때가 떠올랐다. 
"다시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내게 부탁하지 말려무나."

휴는 체념한 듯이 엎드렸다. 먹이를 줘도 먹지 않고 물도 간신히 한두 모금 마실 뿐이었다.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낀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었지만. 

- 힘없이 누워만 있던 휴가 어느 날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했을 때 녀석이 드디어 기운을 차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 반 시간 동안이나 운 녀석은 그대로 절명했다.
아직 따뜻한 녀석을 품에 안고 나는 끝없이 후회했다. 짐승 새끼 따위 거두는 게 아니었다. 그네들은 나보다 먼저 늙어 버린다. 아비보다 먼저 간 자식처럼 배덕하기 그지없다. 다시는 그 같은 것에게 정을 주지 않을 것이다. 

- 무슨 뜻이 있어 이 악한만이 계속 살아남는가. 아직 내게 남은 업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녀석을 아들 곁에 묻었다. 언젠가 나도 그 곁에 묻힐 거라고 생각하면서. 

- "그대로 돌아서라."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누군가 기척 없이 등 뒤까지 접근해 온 것을 알지 못했다. 강호에 나온 뒤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지만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아마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별로 놀라거나 감흥이 일지 않을 것이다. 

- "나를 기억하는가?"
내가 거둔 목숨이 몇인데 일일이 기억하겠는가. 누구의 제자나 아들쯤 되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이름은 자운이다."
아아, 그래. 그 이름이라면 기억하고 있다. 자비의 아들이고 운이 가르쳤던 아이다. 과연 어릴 적 그를 자극했던 것이 효과가 있었다. 싸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아이는 이제 강호에 일대일로 더 이상 적수가 없어 보였다. 

- "분명히 말했다. 너를 찾아가 복수하겠노라고."
기억한다.

 

- <야운하시곡>

 

 

 

- "내가 뭐 하룻밤 방값 벌려고 이러는 줄 아시는 모양인데, 오랑캐 땅 다니면서 속아만 봤나. 산길 험하고 산적 끓는 것만 문젠 줄 아오? 정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니까? 저 산에는 세마골 터줏대감인 늙은 호랑이가 있는데, 거느리고 있는 창귀가 수십이라 혼자 길 떠난 사람 있는 거 알면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다고. 귀신같이가 아니라 바로 귀신이지 뭐."  
"세마골 터줏대감이라. 늙은 호랑이는 알겠는데, 창귀라니 그게 무엇이오?"
수찬이 묻자 주모의 말이 한층 빨라졌다.
"아하, 이 양반이 이국땅을 떠돌며 살았다더니 창귀 무서운 걸 몰라서 그러는구나.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귀신이 창귀 아니오? 호랑이에게 먹혀서 창귀가 되면, 저 잡아먹은 호랑이 종이 되거든. 부모 형제 가리지 않고 사람을 잡아다 호랑이밥으로 바쳐야 풀려나요. 그 늙은 호랑이는 잡아먹은 사람이 하도 많아서 딸려 있는 창귀도 얼마나 많은지, 창귀들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사람 혼을 쏙 빼놓아서,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얼이 빠져 버린대요." 

- 그 순간 쪽마루에서 막걸리와 부침개를 먹던 총각이 불쑥 나서며 엉긴 것이다.
"주모에게도 저 아재가 아주 봉인가 보네. 세마골 늙은 호랑이가 혼자 다니는 사람만 잡아먹는다니, 저 봉 아재랑 나랑 둘이 가면 되겠네." 
주모는 펄쩍 뛰었다.
"아니, 둘이나 하나나 호랑이 앞에서야 그게 그거지, 총각이 힘이 세 봤자 얼마나 세다고 하룻밤을 못 참아서 그 야단이야?"
"아재, 산 너머에 장날이 오늘이니 산 넘어갈 사람들은 어제 아침에 함께 모여 다 떠났어. 오늘 밤 예서 자고 기다려 봤자 더 올 사람 없는 게 뻐언한데, 굳이 방값 보태줄 일 있수?" 

- "내 기운 하나는 호랑이 잡아먹을 천하장사 아니오? 아재, 주모 아지맹이 말에 속아 넘어가 괜히 방값 날리지 말고 나 믿고 같이 가면 오늘 저 산 넘어갑니다. 호랑이 만나면 내가 잡아서, 꼬랑지는 잘라서 아재 줄게." 
수찬은 총각의 허풍스러운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낌새를 챈 총각은 의기양양해져서 주모를 놀려먹었다.
"아줌마 오늘 방 방값은 포기하슈. 봉들은 훨훨 날아 산 넘어 갈라오." 

- "저기, 저것 보소."
총각이 가리키는 곳에는 묘한 것이 보였다. 큰 나무 아래에 무언가 봉긋한 것이 보이는데, 그 위에 꼬챙이 같은 것들이 비죽비죽 솟아 있었다. 길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은 곳이라 수찬은 성큼성큼 그리 다가가 보았다. 
넓적하고 평평한 돌들이 따박따박 아귀를 맞추어 쌓인 위에 둥그런 것이 놓여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흙과 이끼가 덮이고 그 위로 비죽 솟은 꼬챙이들이 벌겋게 녹슨 모양이 기괴했다. 손바닥으로 위에 덮인 흙을 슬슬 쓸어내리자 무슨 항아리 같은 것이 드러났다. 항아리가 엎어져놓여 있는데 그 바닥에는 구멍이 여러 개나 있고, 쇠꼬챙이들은 그 구멍에 꽂혀 있는 터였다. 

- '이건 시루가 아닌가'
험한 산 중 돌무지기 위에 시루라니 엉뚱하고 생경했지만 모양새로 보나 바닥의 구멍으로 보나 떡 찌는 시루가 분명했다.
뜻밖의 물건을 보고 눈을 껌뻑이던 수찬이 무엇에 홀린 듯이 쇠꼬챙이 하나를 잡아당겼다. 구멍을 꽉 막고 있던 흙이 부스러지면서 꼬챙이가 흔들렸다. 세게 흔들자 시루구멍 주변이 삭아 부서지며 꼬챙이가 뽑혀 나왔다. 중간에 울퉁불퉁 홈이 있는 것이 물레가락이었다. 가락은 아홉 개가 꽂혀 있었다. 아홉 개를 차례차례 다 뽑아 들고 시루 위에 남은 흙은 벅벅 긁어내는 순간, 산속에서 삭아 가던 시루가 쩌억 금이 갔다. 수찬은 제가 한 짓에 흠칫 놀라한 걸음 물러섰다. 
"어, 어... 호식총을 깨박질렀네?"

- "아니, 호식총을 몰라요?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 무덤이 호식총 아닙니까. 호식당한 사람은 남은 시신을 모아 그 자리에서 화장을 하고 저렇게 호식총을 만들어야지, 그냥 두면 창귀가 되어 사람을 끌고 간다 안 합니까. 아재는 얼마나 오래 타국살이를 했기에 호식총도 모르고 창귀도 모르고..."

- "남은 시신을 태워서 돌로 꽉 눌러 놓고, 그래도 모자라서 시루에 푹푹 찌고, 시루 구멍마다 물렛가락을 꽂아야지요. 가락이 물레 안에서만 뱅뱅 돌듯 혼백이 시루 안에서 뱅뱅이치고 못 빠져나오게 해야 하는데, 아재가 시루를 깨뜨리고 가락은 뽑아 버렸으니... 이제 창귀가 오면 아재가 책임지고 따라가야 하오." 
"호랑이 오면 잡아서 꼬리는 나 준다더니?"
"하하, 창귀란 놈이 오기만 하면야, 따라가서 호랑이를 잡아 통째로 드립지요."
호식총도 어쨌거나 무덤인데, 남의 무덤을 망가뜨린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키들거리는 것을 보니 총각은 창귀 따위는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번 웃음을 교환하자 둘은 친밀해졌다. 

 

- 꿈인지 생시인지, 네댓 살 먹은 여자아이가 보였다. 송화색 저고리에 다홍치마, 초롱초롱한 눈이 예쁜 아이였다. 아이 뒤로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앙증맞게 땋은 종종 머리에서 비어져 나와 하늘거리는 머리카락들이 석양빛을 받아 섬세하게 빛났다. 아이는 앵두 같은 입술을 움직여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수찬은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여 목소리를 짜냈다.  
"난아? 난아야?"
 
- 난아는 승문원 제조 이명윤 대감의 소실이 된 기생 혜랑이의 팔삭둥이 딸이었다.
뜬금없이 햇살 좋은 툇마루에 모녀가 앉아 있던 광경이 떠올랐다. 혜랑이 난아의 머리를 빗기고 있었다. 겨우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짧은 머리를 촘촘히 빗기고 한가운데에 가르마를 탔다. 양편으로 나눈 머리를 다시 세 갈래로 나누어 꼼꼼하게 땋고, 땋은 가닥 세 갈래를 함께 모아 댕기를 드린다. 난아의 잔머리들은 혜랑의 섬세한 손끝보다도 더 가늘고 고와서 쉽게 잡히지 않고 하늘거렸다. 햇볕 속에서 그 머리카락들은 마치 지난 봄날부터 남겨진 아지랑이의 잔재 같기도 하고, 어쩌면 꿈에 본 나비의 더듬이 같기도 하고, 그 꿈은 어쩌면 그의 것이었던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그 봄 또한 그의 것이었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그 광경이 너무 고와서 수찬은 모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혜랑이 난아에게 말했다.
"난아야, 저기 봐라. 누가 오셨나? 몰래 담장을 넘어 누가 우리 난아를 보러 오셨나?"
오래전 스쳐 지나가 버렸던 그 한 장면이 인생 전체의 기억인 양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 난아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수찬은 가라앉아 가는 의식을 깨우려 안간힘을 썼다. 필사적으로 아이를 불렀다. 

- 총각은 또 흐흐 웃었다. 
"근데 내가 전대도 풀어 봤는데, 돈이 참말로 많소?"

'산적은 아니더라도 경우 바른 인간은 아니구나.'

수찬은 기분이 나빠져 끙차, 몸을 일으켰다. 

 

- 어려서 장가는 들었다. 집안 어른들이 속히 대를 이으려고 나이 찬 처녀와 혼인을 시켰다. 그런데 신랑이 너무 어렸다. 어린 수찬은 여섯 살 많은 아내가 거북하고 어려울 뿐이었고, 아내를 어려워하는 채로 성장하며 다른 여인들을 품는 재미에 눈을 떴고, 그렇다. 그 여인들 중에 난아의 어미 혜랑도 있었다.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 것은 ...

 

- 해는 산봉우리 한 치 위까지 떨어져 있었다. 정월 대보름 보름달만큼이나 커져 온 하늘을 붉게 태우기 시작했다. 검은 띠구름 몇 줄기가 마치 기어 오는 뱀처럼 노을을 먹어 들어왔다. 장엄하고도 음산한 노을이었다. 그러나 산봉우리가 한 입 한 입, 해를 삼키자 어둠이 범람하는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돌부리며 나무뿌리들은 어둠의 물결에 잠겼다.


- <호식총을 찾아 우니>

 

- 충청도 청주목에 청천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산세는 포근하고 학이 많으니 선비들은 공부하기를 즐기며, 흙은 온순하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흙과 물의 성정이 순하고 맑으니 인심도 그 뿌리를 딛고 서는지라 개 짖는 소리보다 큰 노성이 들리지 않는 마을이었다. 그 마을 가운데에 담 너머로 웃음소리는 흘러나와도 고함소리 한 번 흘러나온 적 없는 집이 있으니, 바로 최학인의 집이었다. 

- 조정의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로 있던 조부의 밑에서 집안을 이어받은 최학인은 노비가 열에 소작지의 소출이 매해 만석을 넘었으나 반찬은 세 가지 이상을 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노비를 매질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으니 마당에서 키우는 개조차도 더운밥을 먹이며 고함질러 부르지 않는 곳이 최학인의 집이었다. 

 

- [나는 그대의 학식과 덕망을 들어 알고 있다. 그대를 칭송하는 소리가 높을수록 고고한 뜻을 품고 기품 있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대의 덕망은 귓가에서 날로 높아 가는데 어찌하여 그대는 내 앞에 모습을 보이는 것을 주저하는 것인가. 
그대의 아들인 수찬을 여러 해 지켜본 바 아마 아비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겠구나, 오히려 이보다 높겠구나 하며 기대를 품고 있다. 그대는 초야의 고고한 학과 같이 살며, 선현의 말씀을 흠앙하고, 그대가 깨우친 도를 그 아들로 보여 주었다. 그대는 이와 같은 도를 넓힐 생각이 없는가? 그대가 깨우친 도가 아들에게 이어져 뜻을 펼치고 있으니 이를 모자라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도를 세자에게도 열어 보일 마음이 없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훈육하여 나라에 큰 뜻을 이루려 하던 조부의 의리를 모른다 하려 하는 것인가? 나의 기다림은 쌓이고 쌓여 갈기를 견디지 못하고 모래를 입에 넣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나의 부름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

- 최학인은 임금의 유시를 받들 때마다 고민에 빠졌지만 더 큰 고민은 집 안에 있었다. 딸인 여진이 스무 살이 넘어 혼기를 놓치도록 마땅한 혼처를 못 찾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의 혼담은 임금의 유시만큼이나 여러 번 깨졌다. 여진은 침묵으로, 때로는 완강한 거절로 혼담을 깨부수었다. 
답답한 마음에 최학인은 여진에게 물었다.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안 차느냐. 용모더냐, 집안이더냐, 학식이더냐."
"세월은 비바람 같이 단단한 바위라도 능히 깎고 쪼개니 용모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풍파에 스치면 깎여 사라질 것에 마음을 두라고 소녀가 아버님께 그리 배웠겠습니까.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설 때가 있으면 주저앉을 때도 있는 것이오, 아예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흩어지기도 하는 모를 일이 사람의 생이옵니다. 그 또한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학식은 고매하고 깊을수록 좋은 것이니 그 끝이 있겠습니까. 모자란 것은 채울 때가 한참이니 그때를 기다리는 즐거움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니 학식의 모자람도 아니옵니다. 미련한 아녀자이오나, 어버이와 오라버니의 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인을 만나고픈 마음이 없다 하겠습니까. 다만 배우고 듣고 깨우친 바가 있어 어버이와 오라버니의 깊은 속을 닮은 정인을 스스로 가려 보고 싶사옵니다. 아녀자의 좁은 뜻이오나 배우고 깨우친 대로 뜻이 있사옵니다."
딸의 말에 최학인은 더 이상 혼사 이야기를 채근하지 않았다.
  
"이 집이라면 괜찮겠구나."
여진과 계집종은 선비를 앞질러 대문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계집종이 선비에게 말을 걸었다.
"선비님, 이 댁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시오."
화들짝 놀란 선비는 뒤를 돌아보고는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는 여진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얼굴을 붉혔다. 계집종이 재차 채근하자 선비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서울에서 과거를 마치고 담양으로 내려가던 길입니다. 곧 날이 저물 것 같아 하룻밤 신세 질 곳을 찾던 터라..."

 

- 말꼬리를 흐리는 선비를 보며 여진이 조용하게 물었다.
"그러면 사람을 불러내어 유숙할 수 있는지 물어보시면 될 일이지 어찌 마을 어귀부터 집집마다 염탐하듯이 둘러보셨단 말입니까."
여진의 말에 선비가 답했다.
"하룻밤이라 해도 집안의 살림새는 봐 가며 청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오는 길에 식솔 먹일 쌀 한 톨 없어서 손님을 내치면서도 걱정하고 민망해하는 집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길 가는 나그네를 하룻밤 받아 주는 것이 도리란 걸 알면서도 당장 주린 배를 채울 길 없어서 도리를 따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집들이 많았습니다. 그 마음을 안다면 몸을 맡겨도 발 뻗고 쉴 만한 곳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여진은 장옷을 슬며시 내려 선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을 붉힌 선비는 개밥바라기별이 꾸물거리며 올라오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희 집에 머물다 가시지요. 행랑채에 쉴 곳이 있사옵니다. 고을 인심은 다른 곳보다 결코 못하지 않고, 저희 집은 집안의 노비 먹이는 일도 걱정하지 않는 집이니 선비님이 들 하룻밤 못 모시겠습니까. 안으로 드시지요."
선비는 몇 번을 거절하다가 얼마 후 못 이기는 척 여진을 따라 집 안에 들어섰다.

- 별채에서 나온 여진은 행랑채로 밥상을 들고 들어가는 계집종을 불러 세우고 상차림을 들여다보았다.
"아버님께서야 나물 세 가지만 놓고 드신다 하여도 집 안에 들인 손님에게까지 밥상을 이리 내놓는다면 손님 뵙기 부끄럽고, 집안 인심을 두고 타박할까 두렵다. 넉넉하게 올려 드리거라. 먼 길 오가시는 분이니 시장하실 터이다."
여진의 말에 계집종은 자반을 올리고 올갱이국을 다시 끓여 저녁상을 차려내 왔다.

 

- 밥상을 물리고 나니 안채에 있는 최학인이 선비를 불렀다. 서울의 저자와 도성에 떠도는 이야기나 듣자고 청한 것이었다. 최학인은 선비의 용모를 찬찬히 살펴본 다음 본관과 이름을 물어보았다. 함께 수학하던 동문과 같은 본관이라는 이야기에 근황을 물어보고 집안의 사는 것과 글공부하는 것을 물어보았다. 선비는 겸손하게 말을 낮추었지만 최학인은 그의 말속에 품은 학식과 기품을 읽었다. 자신이 맞게 선비를 읽은 것인가 궁금해진 최학인은 여진을 불러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였다. 집안의 서책과 문방구를 관리하는 것은 늘 여진의 일이었다. 

최학인과 선비가 마주 보고 앉고 여진이 문간에 앉아 선비와 자신의 아비가 글을 나누는 것을 들었다.

 

- 밤이 깊어지자 최학인은 선비를 행랑채로 보내고 문간에 서성이던 여진을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름이 약현이고 본관은 담양 이(李) 가라고 하더구나. 나이는 스물 하나에 노모를 모시고 산다. 영특하고 비범하다. 눈가도 아주 맑구나."
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느꼈사옵니다."
"문간에서 계속 서성이더구나."
"그랬사옵니다."
"내일 약현이 떠나는 길에 사람을 딸려 담양에 보낼까 한다. 사는 것을 좀 보고 오라고 해야겠다. 괜찮겠느냐."
여진은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뜻대로 하옵소서."
최학인은 간만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게 어찌 내 뜻이더냐 이 녀석아."

- 청천의 아전이었다가 지금은 최학인의 집안을 돌보는 집사가 약현을 따라 담양을 갔다 온 뒤로 혼담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혼인은 다음 해 봄에 이루어졌고 약현은 노모를 청천으로 모시고 와서 최학인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작지만 최학인이 직접 사람을 불러 구들을 새로 앉히고 지붕을 얹은 집이었다. 딸의 출가를 반기는 임금의 유시가 내려왔다. 유시에는 축하 인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학인은 사위인 약현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는 딸의 핑계를 대려 했지만 약현이 식년문과에 급제하자 그럴 명분마저 사라졌다. 이듬해 가을걷이가 끝난 뒤 최학인 일가는 한양의 북촌으로 집을 옮겼다. 

- 최학인은 세자의 서연관으로 입직되었고 약현은 집현전의 학사가 되었다. 선왕의 업적을 정리하여 편찬하는 학사들 사이에서 말단이었지만 그가 따로 정리한 초서를 우연히 읽어 본 임금이 흡족해하며 상을 내리자 약현의 재주를 질시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약현과 여진은 금슬이 좋았다. 약현의 노모 역시 여진을 딸처럼 아끼었다. 한양에 오고 난 다음 해에 여진은 셋째 아들을 잉태하였다. 세자의 서연을 위해 입궐하는 최학인은 늘 입가에 웃음을 띠게 되었다. 

- 조회에 나온 임금의 표정은 어지러웠다.
끌로 서툴게 조각한 듯 거칠게 생긴 턱을 굳게 다물고 찌를 듯한 안광으로 신료들을 노려보던 임금은 노여움을 삭이며 말했다.
"나는 일전에 대사성을 통해 정학을 이끌어야 할 성균관의 유생들이 패관을 통해 들여온 난문으로 글을 어지럽히고 수양할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 책망하였다. 그대들은 아둔한 백성들이 남자와 교접하지도 않고 아들을 수태했다는 여인의 그림에 절을 하는 해괴한 미신에 대해서 말한다. 이러한 사학과 미신을 물리치지 않으면, 백성의 근본이 흐려지고 유자의 도가 땅에 떨어져 종묘사직을 뿌리째 뒤흔들 것이라고 염려하며 그들을 잡아다 근본을 망각한 죄를 엄하게 물으라 하였다. 그대들은 바닥에 머리를 찧고 눈물을 뿌리며 나에게 고하였다. 나는 다시 말한다. 사학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정학의 근본이 바로 서지 못해서이다. 뿌리를 곧게 내리고 하늘을 향해 가지와 잎을 만개하는 나무의 주변은 늘 향기로운 것만 감돈다. 가지를 활짝 펴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뿌리를 내린 나무의 그늘 아래 어찌 상서롭지 못한 것이 자랄 수 있겠는가. 이치는 이와 같다. 유자(儒者)는 뜻을 갈고닦아 도와 의리에 정진하기에도 열두 달과 낮밤이 너무도 짧다. 젊어서 이러한 의리를 가까이하고 몸과 마음을 수양을 하여야 할 자들이 어찌 누워서 선현의 말씀을 읽겠다고 당판본을 들이는 짓을 단절하지 못하는가. 정녕 그자들은 스승 앞에서도 그러한 불경을 저지른단 말인가.
보아라, 들어라, 이것이 나라의 근본을 바르게 할 책무를 진 자들이 오늘날 벌이고 있는 작태다. 난문으로 정학을 어지럽히고 그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의 작태란 말이다. 난문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학문을 바로 세우라 책망을 받은 자조차도 반성은 안 하고 이런 난문을 내 앞에 들이댄다. 그대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 자들이냐무엇을 위해 글을 읽고 수양을 하는 것이냐. 정학의 근본이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데 그대들이 어찌 사학을 단죄하겠다는 것이냐. 돌아가서 그대들의 뿌리부터 돌아보라."

 

- 대교가 말을 이으려 하자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킨 다음 한동안 묵묵히 책을 읽어 내려갔다. 한 권을 다 읽고 난 다음에야 제학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재미있네, 재밌어. 너무 재미있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야. 이 글을 쓴 자도 이 글만큼이나 재미있는 사람이던가."

대교는 빙긋이 웃으며 답하였다.
"서연관 최학인의 사위 이약현이 그 글을 쓴 자이옵니다. 집현전 학사로 있는 자입니다."
제학은 글쓴이의 이름을 듣고는 웃음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와 그 장인의 이름이 재미있다는 생각은 거두지 않았다.

- 임금은 고하를 막론하고 신하들과 자주 독대하였다. 사관이 없는 자리에서 독대하는 일이 잦자 삼사가 불평을 하였다. 임금은 마냥 흘려들었으나 삼사의 의견을 매번 모른척할 수는 없었기에 독대를 되도록 삼가려 하였다. 그러나 제학이 몰래 사람을 보내 전한 서찰과 서책들을 본 임금은 이번은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 서찰의 내용은 명료하였다. 서연관 최학인을 탄핵하려는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목적을 이루려 할 것이다. 제학은 당론에 따라 최를 탄핵하려 하지만 임금의 뜻이 그러하지 않으니 당론을 달래고 잠재울 방도로 약현을 거래 조건으로 밀었다. 서연관 대신 그가 아끼는 사위를 처벌하여 서연관에게는 경고를, 자신의 당원들에게는 할 일을 다했다는 만족감을 주자는 제안이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제학과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으며 당파를 조종하던 임금은 서찰에 알았다고만 써서 답장을 보냈다.

- 며칠 뒤 임금은 제학이 답신으로 보낸 서찰을 불태우고, 그가 보낸 서책들을 읽어 보고 있었다. 책은 총 세 권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 권을 읽는 도중에 상선이 조용한 목소리로 약현이 왔음을 알렸다. 임금은 약현을 보지 않고 서책에만 눈길을 주었다.

- 부복하고 있던 약현의 귀에는 임금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약현은 가까이에서 임금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집현전 학사 중에서도 가장 말단이었고, 그가 선대왕의 업적을 정리하고 편찬하는 중에 나름대로 정리한 초서를 우연히 임금이 읽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가 초서를 보고 순수하고 정한 문장이라고 칭찬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로, 하지 않은 일로도 무슨 죄를 뒤집어쓸지 모르는 게 구중궁궐의 일이다. 약현은 손마디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임금의 침묵 속에서 한 장 한 장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두려움도 그만큼 쌓여가고 있었다. 

- 임금은 눈가에 두려움이 어린 청년의 얼굴을 보았다.
"너를 따로 부른 것은 죄를 추궁하기 위함이 아니다. 너의 죄는 이미 너무나 명백하여 따로 추궁할 필요가 없다. 단지 궁금한 것들이 있어 너를 부른 것이다. 그러니 답하라."
"네, 전하."
"너의 이야기는 참으로 해괴하다. 이것은 중국의 요설이나 저자의 떠도는 야담에서 본 이야기가 아니다. 대개 이러한 요설들은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가 있어 그것을 고쳐 읽기 좋게 만든다. 하지만 너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도, 읽은 적도 없는 이야기이다. 신선을 돕고 얻은 청실과 홍실을 나무토막 인형에 묶어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게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참으로 해괴하다. 이렇게 해괴한 이야기를 너는 오늘의 조선에서 하고 있다."

- "너의 이야기에서 백성들은 고을의 수령이 바뀔 때마다 송덕비를 세우느라 노역에 동원되고, 그 송덕비를 세우자마자 수령이 다시 바뀌어 또 다른 송덕비를 세우다가 농사의 때를 놓친다. 백골징포에 시달려 집안이 야밤에 산으로 도주하고 풀뿌리를 끓여 먹으며 모질게 살아간다. 나도 이것을 들어 알고 있다. 내 백성들이 그렇게 죽지 못해 살며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다. 이야기의 첫머리에 너는 백성의 모진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삶 위에 이렇게 허황된 이야기를 놓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려 함이냐. 옛 현인의 도를 따라 오늘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이야기도 아니며 오늘의 곤궁함을 일깨워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글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약현은 임금이 자신이 난문을 썼다는 것 자체를 힐책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뻔했다고 여겼다. 약현은 머리를 조아린 채로 말이 없었다.

- 약현의 글은 대략 이러하였다.
진천 지방에 가뭄이 극심한 해였다. 연이은 기근으로 백성들은 말라가고 밭 가는 소마저 잡아먹는 이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가뭄과 치수를 다스리지 못한 질책을 받아 고을 수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기 일쑤였다. 수령이 바뀔 때마다 도리를 따른다며 송덕비를 세우고, 떠나는 수령에게 전별금을 걷어 바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떠나는 수령의 전별금을 걷어 바치고 나면 오는 수령을 맞이해야 했다. 일 년에 이 같은 일이 한 번이 있어도 민가의 솥단지조차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많게는 세 번을 치르니 견디지 못하고 야음을 틈타 산으로 도주하는 일가들도 늘어났다. 죽은 자마저 병적에 올리고 노역에 동원하니 산 자들은 죽은 자의 이름에 묶여 노역에 시달렸다. 

- 이야기의 주인공인 산해도 그런 자였다. 기근에 시달리다 죽은 아비의 군포를 짊어지자 홀어미의 봉양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산으로 도망친 자였다. 산해는 손재주가 좋아 목불상을 조각하거나 수레바퀴를 고치는 일을 즐겨하였다. 때때로 불상을 조각하며 살던 산해는 어느 날 나무를 하러 숲 속을 거닐다가 올무에 잡힌 사슴을 발견하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올무를 벗겨 사슴을 구해 주었다. 사슴은 산의 신령이 잠시 기거하던 몸이었으니 신령은 그 일로 산해를 어여삐 여기었다.

- 어느 날 나무를 하러 갔던 산해는 신령을 다시 만나 청실패와 홍실패, 대추나무 토막 하나를 받게 되었다. 산해는 청실과 홍실이 가진 신묘한 음양의 힘을 깨닫고 목각을 조각하여 그 마디에 청실 홍실을 엮어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었다. 불상을 조각하던 솜씨로 대추나무 토막에 인자한 여인의 얼굴을 만들어 준 산해는 인형을 로부(勞婦)라 칭하였다.  

 

"이렇게... 두 손을 맞대어 비벼 붓대를 돌리는 것처럼 회전하는 움직임이 얻어지게 됩니다. 만물의 움직임은 이렇게 위, 아래로 향하고 둥글게 도는 것 안에 모두 속하니 로부가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약현의 말에 임금은 손을 비벼 붓대를 돌리는 시늉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여유당(與猶堂)이 그러한 이치를 거중기로 내게 보인 적이 있다." 

- 처음 임금과 마주했을 때와는 달리 약현의 목소리는 떨림을 멈추었고 때때로 임금의 용안을 살펴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였다. 본디 인상이 거칠고 안광이 매서운 임금이었으나 약현이 이야기할 때는 눈빛에 호기심과 경탄이 함께 머물렀다. 임금은 약현의 말이 끝난 다음 잠시 생각하다 질문을 던졌다. 
"너는 나라의 근간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군왕은 백성을 자식으로 여기고 보살피며 백성은 군왕을 어버이로 섬기고 그 삶을 충과 효로 이루어 간다. 이러한 선현의 도가 있기 전에도 나라는 존재하여 왔다. 도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나라의 모습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 약현이 대답하였다.
"충과 효의 도는 나라를 평안케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충과 효를 위하여 나라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것은 단지 밭을 가는 쟁기와 같은 것입니다. 밭이 쟁기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흙이 갈리기 위하여, 밭이 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여깁니다. 좋은 밭을 일구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도입니다. 나라는 백성들이 이루어 만듭니다. 그들은 흙과 땅같이 태초부터 있던 것들입니다. 무언가를 위해서 태어나게 된 것들이 아닙니다."
말을 마친 약현은 임금의 안색이 찰나에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어둡게 찌푸린 것이 금방이라도 우레를 쏟아부을 먹구름 같았다. 약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이 마지막에 한 말의 무게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조차도 내뱉고난 다음에야 깨닫게 된 무게를.
'그것은 애시당초 그렇게 있어 왔던 것들이다.'
임금은 이 한마디에서 반역을 이끌어 낼지도 모른다. 

 

- 임금은 찌를 듯한 안광으로 약현을 노려보았다.
"괴이하다. 날개가 달린 것이 날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지느러미와 아가미가 달린 것이 헤엄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란 말인가?"

 

- 임금은 근자에 사학의 무리들이 읽는 천주실의를 놓고 곰곰이 읽고 한 구절 한 구절 짚어 보고 있었다. 그는 천주실의를 읽으며 때때로 경탄하고 때때로 경악하였다. 친모의 장례에서 신주를 불태우는 패륜을 저지른 양반을 처형하고 난 다음부터 임금의 고민은 깊어졌다. 천주를 믿는 자들이 죽은 다음 가게 된다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자와 아이에게도 모두 똑같이 문이 열려 있고, 부자가 그 문을 통과하기에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가는 것과 같다고도 하였다. 임금은 '하나님의 나라'는 생의 고난을 도피하고 환상과도 같은 내세를 내세워 오늘을 도피하려 하는 자들의 혹세무민이라고 결론 내렸다. 오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보다 오늘의 조선에서 백성을 입히고 먹여야 한다고 믿었다. 여자와 아이,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의 조선에서 그는 왜(倭)에서 벌인 박해처럼 그들의 입에서 배교를 이끌어내기만 하면 신앙은 이미 녹은 얼음처럼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녹은 얼음이라 하더라도 그 물은 땅으로 스며든다. 임금의 걱정은 그 땅으로 스며든 녹은 얼음의 물이 나라의 뿌리에 스며들어 '어떤 나뭇가지를 뻗게 할 것인가'였다. 아니, 새로운 나뭇가지를 뻗게 할 것인가, 아니면 뿌리를 썩게 할 것인가.


- 약현은 대답을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 안의 총기와 의기가 그를 벼랑으로 몰아붙였다.
"날개가 있기에 날고, 아가미가 있기에 물속에서 숨을 쉬고 헤엄치는 것이옵니다. 그것을 위해 날개를 달고 태어난 것이 아니옵니다."
"네 이야기 속의 로부도 그러한 것이냐. 밭을 갈고 산해의 일을 돕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냐. 산해가 그를 만들었을 때는 그러한 목적이 없었던 것이냐. 그 뜻에 따라 로부가 산해를 돕고 살았던 것이 아니냐."

 

- 약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산해가 뜻한 바이지 로부가 뜻한 바는 아니옵니다. 무릇 음양의 이치에 따라 태어난 것들은 스스로의 뜻으로 먹이를 구하고 잠자리를 찾습니다. 로부가 산해에게 이름을 구한 것이 그 뜻이 옵니다. 산해는..."

 

- 임금은 서안을 손으로 내려치며 약현의 말을 잘랐다.
"그대는 밭 가는 쟁기가 스스로 뜻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필묵이 스스로 뜻을 구하여 제 몸을 움직여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무슨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런 공허하고 허황된 이야기였단 말인가. 그런 허황된 요설로 무지한 백성들을 현혹시키려 했단 말인가. 현자의 도를 따라 학문을 흠앙하고 문장을 바로 세울 것이 너의 할 일이다. 문장이 바로서야 도를 전할 길이 닦이는 것이고 그 길을 따라 군왕의 뜻이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대는 그 길을 닦기 위하여 이곳에 있는 것 아니던가. 백성이 도를 따라 군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살핌을 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대가 닦는 길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의 수양과 갈고닦은 도는 대체 무얼 하는데 쓰느냔 말이다.  
묻노라! 그대는 이와 같은 요설로 백성에게 어떤 길을 열어 주려 한 것이냐. 그것이 나에게로 오는 길이더냐. 네가 이 글을 읽을 백성들에게 열어 주려 했던 길은 어디로 이어지느냐. 답하라."

- 약현은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소신은 길을 열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옵니다. 소신의 글은 백성을 잠시 곤궁한 삶에서 마음이나마 벗어나 위로를 구하고자 할 때 읽으라 쓴 잡문이옵니다." 
임금은 약현의 책을 들어 흔들었다. 그의 격한 성정처럼 책장이 거칠게 펄럭였다.
"말하라. 로부는 어찌하여 그 쓰임을 망각하고 산해의 곁을 떠나는가. 이름을 달라 하였다가 거절당한 것만이 그 참뜻은 아닐 것이다. 너는 숨기고 있다. 글을 읽는 자들은 저마다 로부의 처지를 동정할 것이다. 밭 가는 쟁기와 로부가 다를 것이 무언가. 너는 쟁기의 쓰임이 쟁기의 뜻과 다르다 하고 있다. 너는 애초부터 잘못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쟁기가 어찌 뜻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 임금은 침묵했다. 약현은 등줄기에서 짜르르 흐르는 떨림을 느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말하여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약현은 물러나고 싶었다. 살아서 이 방을 나가고 싶었다.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떨림은 임금에게도 전달되었다.

- "백성은 흙이다. 애초부터 그렇게 존재하여 왔고 쟁기에 갈려 밭이 되기 위해 존재하고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냐. 네 글을 읽는 백성은 나에게 오는 길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냐. 다시 묻노라. 네 글을 읽는 나의 백성들이 가는 길은 어디냐. 네 글은 백성들에게 어떤 길을 열어 줄 것이냐. 답하라."

- 약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임금이 재촉하는 답은 약현을 반역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약현의 눈에는 갑자기 여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를 안아 조용히 어르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었다. 어질고 강인한 여인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땀이 흥건한 약현의 이마를 식혀 주는 느낌이 들었다.임금이 나를 죽이고자 하였다면 어찌 그것을 물어볼까. 약현은 몸을 바로 세우고 눈을 감았다. 임금을 시험하고 싶지 않았다. 무의미한 말 돌리기로 자리를 모면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약현은 말했다.
"그것은 백성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길이옵니다."

 

- <로부전 勞婦轉>


적황색 용포가 나부꼈다. 검붉은 하늘에 노란 구름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피어올랐다.
"태상황께서 붕어하셨다."
날카롭게 쉰 목소리가 침묵을 가르자 꺽꺽거리는 통곡소리는 물에 떨어진 핏방울처럼 곧 황궁 전체로 퍼져갔다.

- "태상황께 인사를 올립니다."
이마에 붉은 점을 찍은 궁녀 두 명이 미색 옷자락을 펄럭이며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 앞에는 사자개 한 마리가 있었다. 적황색 갈기가 땅에 닿았다가 다시 허공으로 솟아오르는구나. 사자개의 끄덕임에 궁녀 두 명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자개는 다시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정처 없는 길이었다. 여관(女官) 한(韓)씨와 환관 서 씨 그리고 궁녀 대여섯 명이 그 뒤를 뒤따랐다. 

-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던 궁녀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등롱을 들고 있던 궁녀의 손길은 하염없이 떨렸고 등롱 안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던 촛불도 흔들림에 점멸을 반복했다. 
귀가 밝은 한 씨가 궁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궁녀가 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맹수 앞에 놓인 먹이가 몸을 사린다고 하여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먹이는 선택권이 없는 법이거늘. 

- 사자개는 용모(龍毛)를 휘날리며 뛰어갔다. 뒤따르던 이들은 모두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앞장서 뛰어가는 저 개는, 황제의 색을 뿜어내는 저 개는 함량전(含涼殿)의 주인이자 대명궁(大明宮)의 궁주였다. 붕어한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태상황의 자리에 오른 개였다.
 
- 옛말에 '성주신보다 조왕신'이라 하였으니, 황제보다 더 무서운 이가 황제를 보필하는 환관인 고력사였다.

- 한 씨는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도 좋다는 윤허가 없었기에. 한 씨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력사의 목소리를 기다렸고, 고력사는 그런 한 씨를 훑어보며 콧방귀를 내뀌었다. 모시는 주인이 함량전의 그분이라 그러할까. 그 모습이 주인의 명 없이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개와 같구나. 자신에게 순종하는 한 씨의 모습을 본 고력사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게나."

- 한 씨의 아비는 언관(言官)이었다. 그는 황제가 자신의 며느리인 양 씨를 궁으로 데려와 도사로 삼자 제일 먼저 목소리를 내세웠다. 당나라에서 여도사가 어떠한 신분인가. 혼인을 피해 자유롭게 방중술을 연마하는 자들이 아니던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며느리였다. 무혜비(武惠妃)를 잃고 슬픔에 젖은 황제가 그 슬픔을 잊고자 무혜비 소생인 수왕(壽王)의 비를 뺏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한 씨의 아비는 주문이휼간(主文而譎諫)을 할 줄 몰랐다. 죽어도 아니 된다는 아비의 목소리가 흥경궁에 울려 퍼졌다. 성군이었던 황제는 아비의 직간을 중히 여겼지만, 혼군이 된 황제는 아비의 직간에 노여워했다. 아비는 참수되었다. 아비의 피는 황제의 마음이 아닌 황제의 땅을 붉게 물들였다. 가문의 남자들은 관노(官奴)가 되었고 여자들은 궁비(宮婢)가 되었다. 한 씨는 침선방으로 배정받았다. 계절이 바뀌면 녹색 혼례복을 입고 혼례를 치를 예정이었던 한 씨는 자신의 혼례복에 원앙을 수놓던 손으로 비단옷에 모란꽃을 수놓았다. 아비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족을 노비로 만든 태진 도사가 입을 옷이었다. 한 땀 한 땀 수놓은 붉은 모란꽃은 한 씨의 울분과 아비의 피를 먹고 만개한 흡혈화였다. 

(리뷰자 주 : 당나라의 혼례복은 흔히 붉은색으로 알려져 있으나 녹색도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사계절이 네 번 윤회했을 때, 황제가 한 씨를 찾았다. 일개 궁비인 자신을 찾은 것이다.
 
- 풍설은 관병이 들이닥친 날 죽임을 당하였다. 다 자란 사자개는 송아지만큼 컸다. 커다란 덩치를 보고 위협을 느낀 관병 몇 명이 풍설을 둘러싸자 맹견인 풍설은 곧장 공격을 가했다. 늑대나 곰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개는 오직 사자개뿐이었다. 관병 서넛이 명을 달리했다. 놀란 관병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창으로 풍설을 찔렀고, 풍설의 목숨은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처럼 사라졌다.

- "가져가서 읽도록 해라."
귀비의 발 옆에 떨어진 물건은 사관(史官)이 글을 기록한 기록서였다. 한 씨는 황급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황제가 던진 서책을 집어 들었다. 몸을 일으키자 자신을 바라보는 귀비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 씨는 용기를 내어 귀비의 모습을 곁눈질하였다. 아비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문을 풍비박산 낸 경국지색의 용모가 궁금하였다. 이는 호기심이 아니라 증오심이었다. 

- 꽃도 부끄럽게 만든다는 용모를 지녔다는 귀비는 처량한 눈빛을 지닌 여인이었다. 한 씨가 상상했던 요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로 천하를 쥐고 흔드는 요부의 낯빛이 어찌 저러할까. 아비를 잃고 가족과 생이별한 자신에게서도 볼 수 없는 슬픔이 요부의 얼굴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 황후를 몰아낸 뒤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해 온 무혜비가 왜 갑자기 병사하였고, 수왕은 자신의 비(妃)를 어찌하여 황제에게 바쳤는가. 태자 자리를 노려 태자와 다른 황자들의 목숨을 잃게 한 죄를 물었음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보위를 지키는 데 급급한 나머지 사태 파악도 하지 않은 채태자와 다른 황자들의 목숨을 앗아간 자가 누구던가. 바로 황제 자신이 아니던가. 
결국 모든 것은 황제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였다. 천하의 모든 것은 황제의 것이었고, 황제가 주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천하를 탐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주지 않은 것을 탐한 이들에게는 몰락의 길뿐이었다.

- 허나 천자인 황제도 모든 것을 쥐고 흔들 수는 없는 법. 현문(玄門)에서 적황색 개가 나왔다. 이미 내린 천명은 황제도 거둘 수가 없으니, 태상황은 부활할 수밖에. 다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

- 사관이 회의를 거쳐 집필한 실록이 아닌 황제의 말이 그대로 실린 글이었다. 불태워 없애야 하는 글. 보아서는 안 되는 글을 읽었고, 태어나서는 안 되는 개의 노비가 되었다. 황제가 다시 한 씨의 목숨 줄을 움켜쥐고 있었다. 
한 씨는 다시 무릎을 꿇으며 고하였다.
"어찌 천한 노비가 하늘의 뜻을 알겠사옵니까. 하문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개의 나이로 열 살이면 사람의 나이로는 칠순이라. 태상황의 나이가 종심이라 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허나 황제 또한 칠순이 아니던가.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목이 떨어지기 십상이니. 한 씨는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바닥을 쳐다볼 뿐이었다.

 
- "황상. 오늘처럼 좋은 날에 저런 자를 불러서 뭐 하십니까. 간만에 한 입궁이온데, 신(臣)이 춤이라도 한 사위 보여드릴까요."
황제는 손을 들어 여인의 말을 막았다. 황제의 손짓에 말이 막힌 이는 양귀비의 언니인 괵국부인(虢国夫人)이었다. 황제를 치마폭에 감싸 안아 천하를 호령한다는 또 다른 여인이었다. 길에서 괵국부인과 마주친 공주가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는 죄로 황제에게 하사 받은 비녀를 빼앗기고 부마마저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니 삼척동자도 괵국부인의 무서움을 알지로다. 

- "말해보아라. 짐이 묻는데 답하지 않는다면 목숨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물음에 한 씨는 허리를 바짝 숙였다. 허나 사면초가라.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비파 소리가 멈추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고하였다. 
"태상황이 화신(化身)하였다고는 하나 개의 몸을 지녔으니, 어찌 그 기질이 황상과 같으리요. 황상께서는 천자의 몸을 지녔으니 이리 강녕하시지 않사옵니까. 태상황이 경치를 탐하여 협성을 자주 기웃거린다고 하오니. 칠십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인의 말에 황제는 웃었다.
"그래. 귀비의 말이 맞다. 개의 몸을 빌려 화신 하셨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고개를 들라."
한 씨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비슷한 용모의 여인이 둘이라. 경국지색이 둘이나 되었으니 나라에 망조가 들었구나. 양귀비는 다시 고개를 돌려 황제에게 아뢰었다.

- 귀비의 말에 황제는 환히 웃으며 이를 허하였다. 귀비는 무릎을 굽히며 황은에 감사하였다.
"부인이 오늘 귀한 걸음을 하였으니 신첩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자네도 물러가게."
한 씨는 뒷걸음질하며 귀비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아직 귀비가 나가지도 않았건만, 괵국부인은 농염한 자태를 뽐내며 황제의 품에 안겼다. 자신의 언니와 자신의 지아비가 하나가 되어 이지러지는데, 귀비는 신경도 쓰지 아니하는구나. 한 씨는 그 모습을 보며 괴이하다 여겼다. 

- "나와 함께 좀 걷게나."
원수라 할지라도 자네는 주인이고 나는 비이니, 내 무슨 수로 거절을 하겠는가. 한 씨는 고개를 숙이며 귀비 뒤를 따랐다.
귀비의 걸음에 낡은 치맛자락이 나풀거렸다. 머리에 꽂은 것도 황금 봉황잠이 아닌 옥비녀였다. 강산을 거머쥔 경국지색이 어찌 이리 소박할까. 황제가 너를 위해 부활시킨 직면방은 뭘 하더냐. 황금 떨잠, 황금 뒤꽂이 모두 어디 가고 옥비녀만 달랑 꽂혔는가. 너의 그 앵두 같은 입술에 이슬 맺힌 여지 열매를 넣어 주기 위해 하루에 죽어 나가는 말이 몇 마리던가.  

 

- "어서 안으로 모시게."
편전 문밖에 서 있던 궁녀들이 문을 열었다. 여관이 안으로 들어가라고 고갯짓 하자 한 씨는 사자개와 함께 교태전 편전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시위도 궁녀도 환관도 없었다. 도처에 드리워진 하얀 천과 은은한 매화향 뿐이었다. 사자개는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태상황이 며느리인 귀비를 죽이면 어떻게 될까. 이 자리에 있는 자신도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살아남은 가족들도 모두 죽게 되겠지. 허나 천하가 바로 설 것이다. 사자개가 그녀의 목을 물어 주기만 한다면. 한 씨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 사자개를 내려 보았다. 코를 킁킁거리던 사자개가 다가와 한 씨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한 씨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복수와 천하가 아무리 중하여도 내 어찌 네게 그런 짓을 시키겠느냐. 

 

- "네 아비만이 목소리를 높여 주었다 하셨다. 네 아비만이 진정한 은인이라고. 장생전에서 널 처음 보았을 때, 그제야 한 씨 가문이 풍비박산 났다는 걸 아셨다고 하시더라."
한 씨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어미를 보았다. 어머니 그게 지금 무슨 말인지 아시오? 먹이를 걱정하는 맹수 보셨소이까? 세상에 그런 맹수는 없소이다.


- "어머니는 그 말을 믿는단 말이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법이지. 역지사지란 말도 모르느냐. 그 사람의 상황을 가늠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란다. 낭랑께서 뭐 하러 정실인 왕비 자리를 버리고 황궁의 비빈이 되려고 하겠느냐. 왕야는 물론이오, 심지어 황손과도 비슷한 연배이거늘."
"수왕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왕비를 바쳤다고 할지라도, 귀비가 자기 발로 화조사(花鳥使)를 따라 입궁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오. 사람이라면 목숨을 잃을지언정 치욕을 당하지는 않으려 하는 법이오. 시아비의 여인이 되는 것이 패륜이라는 걸 알았다면, 목숨을 끊어 정조를 지켰어야 했소." 


- 한 씨 어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 씨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어쩜 그리 애늙은이처럼 말을 할꼬. 네 아비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다. 글을 알면 견문이 넓어진다고 하였는데... 너는 성인의 말씀만 알고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구나. 세상에 선비만 있는 줄 아느냐."


- 아이고, 어머니, 어머니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모르시오. 모든 걸 다 쥔 귀비가 우리를 왜 구한단 말이오. 어찌 그 요망한 것에게 현혹되시었소.

- "네가 낭랑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아도 괜찮다. 허나 낭랑께서 한수의 관비 신분을 면하게 해 주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너도 마땅히 예를 갖춰 낭랑께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안록산은 귀비의 양자이자 정인이오. 손수 양자의 몸을 씻긴 뒤, 강보에 싸인 안록산을 가마에 태워 황궁 안을 거닐은 귀비의 이야기를 누가 모른단 말이오. 황상조차 둘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소. 안록산을 시켜 한수를 구한 것은 한쪽 손을 드는 것처럼 쉬운 일이거늘, 어찌 어머니께서는 요부의 말을 믿으시오." 
한 씨 어미는 주위를 둘러본 뒤, 한 씨의 두 손을 움켜쥐며 낮게 속삭였다.
"안록산을 양자로 삼으라고 한 것도, 풍습에 따라 손수 목욕을 시키라고 한 것도 모두 황상의 명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내명부의 수장이 그런 일을 행하겠느냐."


- 개를 주인으로 섬길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 죽기 전 어미를 보았고 동생의 소식을 들었으니, 더는 한이 없다. 너도 나와 함께 가자. 그곳에 있는 내 아비와 풍설이 우리를 기다린다. 초연한 표정의 한 씨와 달리 사자개는 언제든 뛰쳐나갈 기세로 으르렁댔다. 잔뜩 긴장한 전신의 근육이 으르렁 소리와 함께 파르르 떨렸다.
"이 야심한 시각에 태상황과 같이 있을 줄이야. 네년은 여관이 아니라 빈어(嬪御)인 것이냐?"

- 두 눈에 가득 들어찬 저 가증스러운 눈빛을 보라! 네놈이 황제의 눈을 속여 괵국부인과 놀아난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거늘! 네가 재상이 된 것도 괵국부인의 베갯머리 송사 덕분이 아니던가. 궁녀를 범하고 육촌 누이와 오입질을 즐기는 천하의 말종이로다. 한 씨는 양국충을 향해 침을 퉤 하고 뱉었다.
 

- <다시 쓰는 장한가 長恨歌>


- 궁으로 불러 주시면. 내게 인육을 사 가는 사람들이 나를 죽은 죄인 시체로 먹고사는 쥐새끼라고 멸시할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왕자라고 불렀다. 왕께서 우리를 궁으로 불러 주시면 저들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이 굳어 우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거라고. 

 

- 어머니만 그렇게 말했다면 난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미친 여자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서 환관이 어머니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했기에 그 말을 믿을 수 있었다. 

- 서 환관은 우리 집에 드나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밤에만 은밀히 우리 집에 와서는 쥐가 뜯어놓아 제 구실을 못하는 발을 치고 쥐가 뛰어다니는 마루에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진짜 비단옷을 입은 수염 없는 서 환관이 굽신거리며 궁중의 예를 갖추는 꼴은 기괴한 광대극 같았다. 눈이 작고 하관이 빠르고 말할 때마다 검붉은 잇몸이 보이는 왜소한 서 환관은 늘 어머니를 귀빈마마, 나를 왕자라 했다. 

- 어머니는 서 환관이 우리 모자의 은인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나를 뺐을 때 어머니를 궁 밖으로 내보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서 환관에게 몇 번이고 들었다.
"그날 귀빈 마마께서 꿈을 꾸셨다고. 용종을 잉태하실 거라 하셨지요. 믿어 봐서 나쁠 건 없지 않사옵니까? 소신이 귀빈 마마를 출궁 시키고 그 자리에 다른 신녀를 두었사옵니다." 

- 서 환관은 왕을 속이고 신을 속였다. 신녀 한 명이 왕과 동침하고 죽임을 당해야 왕의 조상신들이 나라를 지켜 준다고 했다. 왕은 최빈과 지내다 새벽에야 돌아와 귀찮은 듯 의무적으로 내 어머니를 짧게 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대신 죽은 신녀의 청동 새장에서 새를 날려 버리고 빈 새장을 들고 궁에서 몰래 나왔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지니면 액운을 떨칠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고 했다. 서 환관은 어머니에게 언젠가 다시 궁으로 들여보내 주겠다고 약조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기다리시면 적기에 전하께서 귀빈 마마와 저하를 입궁시키실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나와 어머니를 다시 입궁시키실 분이었다면 애초에 출궁 시키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 어머니가 궁에서 살려면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며 내게 글자를 가르쳤다는 걸 남들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서 환관에게 내가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자랑했을 때도 나는 도리질만 했다.
"아는 게 뭐 있느냐."
"제 분수 정도는 아옵나이다. 그밖엔 아는 게 없사옵니다."

"머리가 좋구나. 그것만 알면 이 궁에서 목숨은 부지하고 살 수 있을 게다."

- 다음 일은 왕을 알현하는 것이었다. 손톱 밑까지 박박 씻고 다른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대전으로 갔다. 옥좌에 비스듬히 앉아 맨바닥에 꿇어 엎드린 나를 내려다보던 왕은 성군도 폭군도 아니었다. 그냥 피곤한 사내였다.

 

- "이 아이가 그 아이냐."
"그러하옵니다."
"증거가 어디 있느냐."
왕비마마와 똑같은 문답이 왕과 서 환관 사이에서 오갔고 이번에도 왕이 청동 새장을 살폈다.

 

 "궁의 물건이 분명하구나."
그리고 왕이 말했다.
"궁의 물건을 훔친 자의 손목을 잘라 버려라."
"아바마마!"
 
- "증거가 있사옵니다. 조금 전 최빈마마의 군사들이 여기 계신 왕자 마마의 어미를 죽이고 그 집을 불태웠사옵니다. 저하의 입궁을 막으려고 그런 만행을 저지르신 것이옵니다. 이분이 왕자가 아니시라면 최빈 마마께서 그리 하셨겠사옵니까?" 
내내 왕의 옆에 있던 여자가 울먹이며 왕의 발치에 쓰러졌다.
"전하. 소첩은 전혀 모르옵니다! 왕후께서 서 환관을 시켜 모함하시는 것이옵니다! 속지 마소서!"
문이 열렸다. 결박당한 병사들과 장수들이 끌려와 차가운 돌바닥에 던져졌다. 부상을 입었는지 고문을 당했는지 신음하는 자들도 있었다. 왕이 발치의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자는 네 오라비 아니냐."

- 최빈이 돌계단에 머리를 찧으며 용서해 달라고 구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 최빈의 머리채에서 옥비녀며 진주 장식이 떨어져 계단 아래로 구르며 깨졌다. 고왔다. 손을 내밀었다. 깨진 구슬들은 내 손이 뻗는 곳까지는 오지 않았다. 최빈이 왕의 옷자락을 잡았다. 왕이 뿌리치고 돌아섰다. 최빈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 환관 네놈과 왕비가 이겼군. 최빈의 일족을 멸하고 신녀의 아들을 왕비의 양자로 들인다는 교지를 내리겠다."

서 환관이 굽신대며 물러났다. 왕이 나를 불렀다. 내 귀에 왕이 속삭였다.
"죽어야 할 신녀가 죽지 않고 죽지 않아도 될 신녀가 죽었다. 사람이 신을 모욕했으니 나라가 망할 거다. 네 어미와 서 환관의 죄다. 너는 죄인의 자식이고, 망국의 군주가 될 게다."

- 그날 밤, 나는 왕비의 침대에서 잤다. 왕비의 몸 구석구석을 핥는 내게 왕비는 "내가 왕을 이겼다. 최빈 그 계집은 제 분수를 몰랐어. 왕의 애첩이면 될 것을 건방지게 왕의 어미가 되려 했으니"라고 했다. 왕비는 밤새 내 위에 있었다.
새벽에 왕비의 침소에서 나왔다. 서 환관이 밤새 마당에서 있었다. 최빈의 처소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서 환관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안내했다.

- "최빈마마의 아들은 언제 태어났느냐."
"저하와 한날한시에 태어나셨습니다. 자년 자시생이시지요."

서 환관은 나를 지밀로 데려갔다. 지밀에서는 왕의 침소가 보였다. 왕은 언제 어디서든 보여야 했다. 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왕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 누군가 늘 왕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살던 집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쥐들이 있었다.

- 왕은 최빈과 한 이불속에 있었다. 풀어헤친 최빈의 긴 머리에는 아무 장식이 없었다. 왕은 최빈을 품에 안고 울고 있었다.
"나는 너를 지켜줄 수 없지만 우리 아이의 목숨만은 살려 보겠다."
최빈은 울기만 했다. 왕은 최빈을 더 꽉 끌어안았다. 왕이 최빈에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최빈이 왕의 품 안에서 몸부림쳤다. 왕이 더 힘주어 최빈을 안았다. 최빈이 축 늘어졌다. 마치 그동안 내가 죽였던 쥐들처럼. 최빈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왕의 팔이 아래로 떨어졌다. 최빈이 쓰러졌다. 서 환관이 내 팔을 잡아챘다. 침소의 문이 열렸다. 궁녀들과 의원들이 왕의 침소로 달려 들어갔다. 왕은 천천히 일어나 옷을 걸쳤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목 졸려 죽은 죄인의 입 밖으로 길게 나온 혀처럼 햇빛이 길게 담을 넘어 들어왔다. 그 밤에서 새벽까지의 일들이 꿈만 같았다.

- 아침에 남보랏빛 예복을 입은 왕이 나와서 환관을 불렀다. 왕의 옆자리에는 최빈 대신 왕비가 있었다. 왕은 높은 옥좌에 앉아 있었고 나와서 환관은 바닥에 부복했다. 왕이 서 환관에게 옥합을 하사했다. 서 환관이 절하고 받았다. 왕이 서 환관에게 명했다.
"그 물건을 세자에게 전하라."
서 환관이 무릎을 꿇고 옥합을 내게 바쳤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옥합을 열었다. 뼛가루와 재가 들어 있었다.
"네 생모의 유해다."

- 네 생모는 서 환관이 죽인 거다, 서 환관은 일부러 네 어미를 그 집에 놓아두었다. 왕은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서 환관의 손으로 내게 옥합을 바치게 했다. 서 환관이 내 앞에서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왕이 된다면, 잠들 때 지밀에서 환관이 있겠지쥐들은 잠든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먹고 내장을 파먹는다. 

 

- "제 생모는 미친 여자였사옵니다. 사가로 나와 살다가 미쳐 버렸사옵니다. 소자는 어미가 부끄러워 혼자 입궁했사옵니다. 소자가 어미와 함께 입궁했다면 어미는 살았을 것이옵니다. 소자가 어미를 죽게 놔두었사옵니다."
어머니는 미쳤다. 하지만 절반은 맞았다. 왕은 우리를 부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입궁했고 왕자가 되어 비단옷을 입고 있다. 어머니의 예언은 당신에게는 맞지 않고 나에게만 맞았다. 죽은 신녀의 청동 새장은 어머니의 액운을 막아 주진 못했다. 그건 최빈이 그랬듯이 어머니가 '분수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왕자가 될 것이라 했지 세자가 될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왕이 되는 건 내 분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 "세자는 남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몰라도 적어도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아는군. 사람은 흔히들 그 반대인데 말이야."
왕은 턱을 괴고 씩 웃었다. 왕비는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문득 왕비의 옆자리에 앉고 싶었다.
서 환관은 내처신에 만족한 눈치였다. 물러나면서 그는 이제 내가 곧 왕이 될 것이라 했다.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모든 왕자들을 죽이셔야 하옵니다. 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들을 없애 왕권을 견고히 하기 위함이옵니다."
서 환관도 나도 왕이 어젯밤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왕은 최빈의 아들을 살려 주겠다 했다. 왕이 되면 뭘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이 나라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이 왕의 손에 달리게 되옵니다. 왕께 반하는 사람을 죽이실 수 있다는 뜻이옵니다."

 

- "죽을 사람을 살릴 수는 있느냐."
"죽을 사람은 죄가 있사오니 죽이셔야 하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있느냐."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신도 못 하시옵니다."

 

- "안 오겠다면 내가 가면 되지 않느냐."
나는 어머니의 초상도 치르지 못했다. 내 어미는 이제 왕비였고 생모는 어미가 아니었으므로, 최빈은 폐위되기 전에 죽었으므로 그 아들이 상을 치를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나보다 그 아이의 팔자가 더 좋았다. 

- 궁녀는 깊은 내실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엔 왕도 있었다. 울었는지 눈이 벌겠다. 왕은 서 환관을 돌아가게 했다. 내실엔 나와 형제와 아버지만 있었다. 내가 왔는데도 인사도 하지 않고 고개 숙인 채 소리 내지 않고 책만 읽고 있던 최빈의 아들이 고개를 들었다. 책은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침묵한 채 독서하는 모습이 기품 있었다. 고요 속에서 책을 읽는 이마가 반듯했다. 최빈의 아들은 계집애처럼 고운 미소년이었다. 어미를 닮아 곱상하니 귀티 나게 생겼다. 수척해진 얼굴이 하얘서 옥으로 깎은 듯했다.

 

- 내실 벽은 사방이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붉은 비단으로 장정된 서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나는 글자만 배웠지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먹고살기도 급한데 책을 살 돈도 없었고, 있었대도 쥐가 다 갉아 댔을 것이다. 무식한 나보다는 책을 많이 읽은 이 아이가 왕이 되는 게 분수에 맞지 않을까쥐 떼 사이에서 시체를 난도질하며 살아온 나보다는 책에 둘러싸여 궁에서 살아온 저 아름다운 아이가. 왕은 최빈에게 극심한 산통을 겪게 했다는 이유로 출산을 도운 궁녀와 어의를 죽였고, 소수의 충성스런 궁녀만이 최빈의 궁에 머물렀다. 산고의 후유증으로 최빈은 그 후로 아이를 낳지 못했다. 왕은 최빈의 외아들에게 나라에서 최고의 선생들을 붙였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최빈의 아들이 세자가 되었을 것이다. 왕비는 자식이 없고 최빈은 왕의 애첩이었고 품계도 후궁 중에 제일 높았으니까. 내가 그의 자리를 빼앗았다. 왕이 되는 건 내 분수에 맞지 않았다. 자년 자시에 태어난 우리 둘 중에 왕이 되어야 할 건 나보다는 최빈의 아들이었다. 내가 그 아이의 앞에 마주 앉고서야 그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 "저하의 생모는, 소인의 외숙이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사옵니다. 집도 이미 불타고 있었고."
최빈의 아들은 분노를 참으며 내뱉었다. 구슬 같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도 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프겠구나, 너도."
최빈의 아들이 입술을 떨며 울었다.
"그렇게까지 왕이 되고 싶으셨사옵니까?"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다." 

- 이름을 하나하나 입 속으로 발음해 보고는 서 환관이 올린 교서에 옥새를 찍었다. 죄목은 모두 하나였다. 역모 죽은 형제들의 재산은 살아 있는 내 것이 되었다. 수배령이 내려진 최빈의 아들이 갖고 있던 모든 것도 내가 가질 수 있었다. 옷은 갖고 싶지 않았다. 사가에 있을 때 죽은 죄인의 옷만 입어봐서, 그 아이의 옷을 내가 입으면 그 아이가 죽은 사람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대신 그 아이의 책을 내 처소로 옮겼다. 의아해하는 서 환관에게는 "표지가 비단이지 않느냐. 촉감이 좋구나." 하고 둘러댔다. 밤마다 연인의 살결을 만지듯 몰래 책을 어루만졌다. 그 아이가 펼쳤을 부분을 펼치고 섬섬옥수로 짚었을 부분을 짚었다.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읽던 책을 읽었다. 그 아이가 쓴 주석을 읽으며 그 아이를 생각했다. 쥐띠와 쥐띠는 불화가 없이 오랫동안 잘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미친 여자의 아들. 나도 미쳤다. 형제를 품을 생각을 하다니. 딱 한 번 만나 본 이복형제를. 

- 쥐가 들끓던 집에 살던 시절 서 환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내 어머니는 신녀였다면서 왜 쥐를 믿냐고. 궁에서 산다는 건 칼날 위에 서는 것 같으니 어디라도 마음 둘 곳이 있어야 한다고, 서 환관은 답했다나도 마음 둘 곳이 필요했다. 그곳이 이복형제일지라도.

-성군이 되기는 쉬웠다. 높은 관을 쓰고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재물을 얻고 싶어 하는 자들은 많고 많았다. 그중의 하나를 충신으로 임명하면 그자는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반대편을 모함했다.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자들은 누구에게나 역적으로 몰렸다. 그들은 왕명으로 고문당했다. 혐의를 부인하면 고문으로 죽고 혐의를 인정하면 사형당해 죽을 텐데 그들은 꼭 고문당하다 죽는 길을 택했다.

 

- 권세를 쥔 자들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저잣거리에 높아지면 왕은 어제까지 충신이라며 곁에 뒀던 자를 역적으로 몰았다. 그들이 백성에게 거둔 재물을 왕이 환수하고 백성에겐 그중의 십분지 일만 돌려줘도 백성들은 감읍하며 날 성군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면 다른 탐관오리를 충신으로 임명하고, 그가 사형장에 끌려가면 또 다른 자가 자신이 충신이라며 나타났다. 나는 궁 밖에서나 궁 안에서나 죽은 자들의 것으로 먹고살았다. 자기가 역적이라고 내몬 사람들이 죽는 걸 본 자들이 똑같이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다.

 

- 일단 역도로 지목되면 고문 끝에 역적임을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해 먹고 물러나면 목숨도 부지하고 재산도 지킬 텐데 왜들 그렇게 끝없이 권력과 재물을 탐하다가 죽는지 모르겠다.

- "다들 자기는 아닐 거라, 자기는 다를 거라 믿는 것이옵니다. 분수를 모르면 명을 재촉하는 법이옵니다."
서 환관과 대비는 나 들으란 듯이 그렇게 말했다. 대비는 자기 집안 여인을 왕비로 들이고 서 환관은 궁녀를 후궁으로 추천했다. 내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왕비는 대비에게, 후궁들은 서 환관에게 고해바쳤다. 나는 입이 있으되 말할 수 없었다. 여인들은 쥐 잡아먹은 듯 새빨간 입술로 내게 아양을 떨고 교태를 부렸다. 내가 사형장으로 죄인들을 보낼수록 여인들의 가발은 풍성하고 화려해졌다. 궁에 있는 여인들의 머리 위에 죽은 죄인들의 머리가 웃고 있는 환영을 보았다. 부드럽고 기름진 음식을 씹어 삼키면 위장이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했다. 어의는 무슨 병인지 밝혀내지도 치료하지도 못했다.

 

- 어머니의 예언은 틀렸다. 나는 산해진미를 먹지도, 쥐처럼 많은 자손을 낳지도 했다. 처첩들에게선 죽은 죄인들의 환영을 보았고 매년 왕으로서 동침하는 신녀에게선 죽은 어미의 환영을 보았다. 죽어야 할 자가 살고 살아야 할 자가 죽지 않도록, 내가 동침한 신녀가 죽는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나 같은 아들이 태어나지 않도록. 

- 왕비와 후궁들 대신 환관들에 탐닉했다. 그 아이를 닮은 아름다운 어린 환관들을 침소로 들였다.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붉은 비단으로 장정된 책을 펼쳤다. 환관의 나신에 꿀로 책에 있는 글자를 그렸다. 연한 피부 아래 근육이 단단하게 긴장한 나신이었다. 촛불에 글자가 황금빛으로 빛났다. 혀로 글자를 읽었다. 환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환관은 입에 붉은 비단을 물고 있었다. 침소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지밀의 궁인들은 아무 말 없이 왕을 보았다. 왕은 언제 어디서든 보여야 했다. 왕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누군가 늘 왕을 보아야 했다. 낮말은 쥐가 찍찍대고 밤말은 새가 지저귀고 왕의 일은 지밀의 궁인들이 퍼뜨렸다. 왕비는 왕이 신녀를 죽이듯 내 침소에 들었던 환관들을 죽였다. 죽은 환관의 얼굴엔 먹으로 남색(男色)을 뜻하는 글자가 새겨졌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왕비는 책은 질투하지 않았다. 서 환관은 내가 왕비와 밤을 보내지 않자 기꺼워했다. 

- 내가 환관들을 침소에 들일수록 나라 안의 요요연연한 사내아이들이 거세당하고 궁으로 들어왔다. 궁에 들어오는 아이들 중에 최빈의 아들은 없었다. 궁금했다. 그 아이는 어찌 지내는지나에게 남들 앞에서 읽지도 못하고 궁금(宮禁)에서 묵독해야만 하는 책들을 물려주고 그 아이는 무엇을 보고 읽고 사는지. 그 아이처럼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고 싶어서 처음에는 입을 달싹이며 밀어를 속삭이듯 책을 읽다가 드디어 마음속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날, 마음속으로 그 아이에게 고하고 싶었다. 그 아이에게서 빼앗은 책에는 어진 왕은 사람을 살리고 억울한 이가 없게 해야 한다는데, 나는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나는 쥐의 팔자대로 살고 있다고. 먹이가 부족한 쥐가 다른 쥐를 물어 죽이듯 살고 있다고. 궁의 사람들에게는 권력도 재물도 늘 부족했다. 대비는 서 환관을, 서 환관은 대비의 일족을 죽여 달라 했다. 최빈의 아들이 온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난 어쩌면 좋으냐고.

- 나는 왕비에게도 후궁에게도 애정을 주지 않았고, 동침한 신녀는 반드시 죽였다. 내게 자손은 없을 것이고 왕족 중 남은 이는 최빈과 부왕 사이의 아들뿐이다. 최빈의 아들을 살리려면 대비와 서 환관을 죽여야 했다. 아니다. 예전에서 환관이 나를 입궁시켰을 때처럼 서 환관과 대비 중 먼저 최빈의 아들을 찾아 데려오는 쪽이 이기고 진 쪽이 죽을 것이다. 그 아이가 오면 나는 양위의 형식으로 폐위당할 것이다. 그리고 궁에 있던 내 형제들은 모두 죽었듯이 나도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할 것이다. 아니면 암살당하거나 선왕처럼 자진하거나. 

 

- 조상신께서 제물을 더 많이 바치는 쪽에 왕자를 주시리라 믿는 모양이었다. 서로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했고 백성들에게 일부를 돌려주지도 않았다. 대비와 서 환관은 명령하지 않았다. 죽이고 수탈하는 건 모두 '어명'이었다. 선왕의 '태평성대'는 지나갔다. 밤에는 제사를 지냈고 신녀를 바쳤다. 전에는 미려한 사내아이들이 환관으로 입궁하더니 이제는 계집아이들이 신녀로 입궁했다. 가난한 부모들은 딸이 죽을 걸 알면서도 신관들에게 돈을 받고 딸을 팔았다

 

- 먹는 족족 구토를 했다. 의원들은 신경증이라고만 했다. 대비도 서 환관도 내 건강에는 관심이 없었다. 새벽에는 의무적으로 왕비나 후궁을 품었다. 최빈의 아들을 상상했지만 궁의 여인들은 그 아이처럼 아름답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서 환관을 고자라고 했었다. 그가 집에 오지 않았으면 했다. 나도 고자가 되었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날마다 자시가 되면 나와 그 아이의 운명인지 팔자인지를 생각했다. 

- 자시는 낡은 하루에서 새로운 하루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쥐는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짐승이었다. 쥐의 앞발에는 발가락이 네 개였고 뒷발에는 다섯 개였다. 어머니는 쥐의 앞발가락이 오늘, 뒷발가락이 내일을 의미한다고 했다. 나에게 새 시대는 오지 않았다. 시간은 거꾸로 흘렀다.

- "서 환관, 내가 은밀히 알려 줄 게 있는데, 내가 궁에 온 첫날밤, 대비가 나와 무엇을 했는지 아는가."
"대비마마, 서 환관이 최빈의 외숙에게 누명을 씌운 거 아시지 않사옵니까. 왕의 생모를 죽인 자는 누구이옵니까."

- 서 환관과 대비는 내 물음의 의미를 알았고 대답하지 못했다. 서로의 약점이면서 서로 공모했으며 서로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내가 입을 열자 그들은 서로 내가 자기편이라고 여겼다. 또한 사람 말을 하는 쥐를 보듯 나를 두려워했다. 나는 입이 있으되 말하면 안 되는 자였다. 저잣거리에는 다시 쥐의 소리가 들렸다. 왕세제가 오고 계셔. 그분이 새로운 왕이 될 거야. 다시 태평성대가 올 거야. 새로운 왕이 와도 나는 살아서 궁에서 나갈 수가 없다. 이 궁은 거대한 쥐구멍이었고 나는 청동 새장 안의 쥐였다. 

- 나는 왕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사형장 근처의, 그 쥐구멍 같은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을 뿐이다. 죽은 사람 덕에 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다. 어머니의 죽음도 모른 척하고 대비와서 환관의 쥐새끼가 되어 가며 나는 쥐구멍에서 더 큰 쥐구멍으로 옮겼을 뿐이다. 내가 그 아이를 사랑했던 걸까. 나는 궁에서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그 아이를 생각하는 건 아니었을까. 그 아이가 있다면 또 이 쥐구멍에서 나갈 수 있기에. 
 

- 그 아이가 문에 비친 그림자를 가리켰다. 불에 탄 집에 갔던 그 아이의 외가 친척들은 사형당했다. 밖에는 그 아이를 없애고 증거도 후환도 없애려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살 수는 없겠느냐."
"대비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야. 내가... 했으니까."

 

- "이제 나는 어찌해야하겠느냐."
"어찌하고 싶은데?"
"살고 싶다. ... 너와."
"나는 살기 위해 궁녀를 죽였는데, 너는?"

- 서 환관이 죽였다. 이제 대비의 편은 없다. 아니다. 내가 죽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너는?"
그 아이가 재차 물었다. 나는 짧게 답했다.
"모두, 전부 다."
나의 신하, 서 환관. 쥐가 죽어야 내가 산다면.

 

- 다시, 청동 새장의 쥐가 풀려났다. 그 아이가 쥐에 불을 붙였다.  


- <서왕 鼠王>

 

- 땅이 내리고 하늘이 열려 하늘엔 열 개의 해가 이글거리며 계절 없이 뜨고, 하늘인간과 땅인간이 나뉘어 살아 달이 아직 생기지 않고, 사람과 짐승의 구별이 모호해 서로 말을 나눠도 뜻이 통하고 몸을 나누어 피가 섞여도 이상하지 않던 시절에ㅡ 

 

- "... 다가오는 청화절에, 참형에 처한다."
하늘의 약초를 훔친 대가로, 죽을 날을 받은 여우가 있었다.

사람이 하늘에 탄원하면 하늘로 향하는 계단이 열려 소청할 수 있던 시대다. 짐승이라 하여 요즘 같은 짐승일 리 없다. 이치를 알고 도를 깨우치면, 축생도(畜生道), 험난한 생의 끝에도 짐승의 형(形)을 벗고 신선이 될 수 있던 시대였기에.

- 여우는 천호였다. 최초의 천호로 가장 먼저 하늘인간 꼴을 하고 하늘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뿐. 법은 하늘 아래 지엄했고, 여우의 죄는 너무 컸다. 여우는 타고 태어난 모습 그대로 곤륜에 감금당했다.

- 곤륜의 성은 이중삼중도 아닌 구중. 그 위엄만으로도 사사로이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 굳건한 장소에, 천제(天帝)는 문지기까지 배치했다. 그 문지기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사람 꼴을 띠었지만 애초부터 인간이 아닌 자였다. 먹지 않고 자지 않고 배설하지 않으면 죽는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되었고, 잠들지 않아도 되었다. 천제가 그를 귀히 여겨 쓰다듬었기에 누구보다도 축복받아 그리된 그런 자였다. 감시자였으되 처형자이기도 한 그의 이름을 육오(陸吾)라 한다. 다만 꼬리가 아홉이나 되고 본디의 형(形)대로 간간이 무심하게 얼굴을 드미는 그를, 하늘인간들은 그리 불렀다. 호형랑(虎形) 또는 호해랑(虎骸郞)이라고. 

- 다들 그를 두려워하거나 경외하거나 원망하거나 해치우고 싶어 했으나, 사내는 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형(形)은 사람이지만 천성이 어쩔 수 없는 짐승이기에 그렇다. 자신의 평가에 대해 신경 쓰는 맹수는 없다. 그런 걸 신경 쓰면 굶어 죽기 십상일 터. 어차피 삼악도의 하나인 축생의 길을 걷고 있으니 그런 감정들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업(業)만을 조심할 뿐, 애먼 피만을 아낄 뿐.

- "문을 열어 주십시오."
계집의 허리는 가늘어 주둥이를 묶어놓은 포대 같다. 몇 날 며칠을 걸어온 건지, 신발이 다 해진 발엔 보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그 먼지 색과 끝만 묶은 머리카락의 색은 맘먹고 아궁이를 쑤셔 뿌옇게 뒤집어쓴 것 같은 잿빛이었다. 면과 마를 섞어 짠 직물을 솜씨 좋게 가다듬어 지어 입은 옷은 제법 그럴싸했으나, 사내는 계집이 멀찌감치 보일 때부터 그녀의 정체를 냄새로 알아낸 상태였다. 코가 쨍할 정도의 짐승 냄새.

 

- "여우인가. 소청할 것이 있으면 괴강산에서 하라. 길을 잘못 들었다."
짐승이 본(本)인 이들은 이 길을 쓰지 않는다. 인간들이나 곤륜의 언덕을 걸어 신선이 된답시고 이런 길에 들어서곤 하는 것을. 완연한 봄날이었던지라, 사내는 햇볕을 즐기어 한없이 늘어지고 싶은 호랑이의 본성대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 저어 산 아래에서 피어날 민들레가 계절답게도 계집의 눈에도 피어 있었다. 노오란 눈, 천호(天狐)였다.

 

- 신선의 길을 걷는 여우에게 어디에선들 하늘의 계단이 내리지 않을 리 없다. 사내를 마주 보고 있다는 자체가 죄인이란 증거였으므로, 사내는 불쾌해졌다. 불쾌한 심경을 담아 산 같은 어깨를 돌려 등을 보이며, 땅에 창 자루를 콱 소리 나게 꽂았다. 
하지만 그 불쾌감 위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듯 가냘픈 목소리가 얹혔다.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보고 가게만 해 주시옵서."

- "한갓 여우에게 뚫릴 성벽이 아니다."
아래를 파면 아래가 깊어진다. 위로 기어오르면 위가 높아진다. 구중의 성벽은 신묘했다. 감히 아무에게나 하늘 길을 허락할 수 없기에 그토록 신묘했다.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린 사내를 향해 계집은 물기 묻어나는 목소리로 울상이 되어 외쳤다. 
"잠시면 되오! 축지(縮地)로 날듯이 달음질쳐 뵙고 오리다. 문도 열 수 없는 하늘땅이니 이 벽 안에 들여만 보내주옵시면 얼굴 뵙고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오겠습니다. 제발, 제발 부탁이오니 이 문 좀 열어 주십시오." 

 

- 축지도 쓸 수 있는 걸 보면 보통 도를 닦은 짐승이 아닐 텐데. 사내는 혀를 한 번 찼다. 내가 무슨 광영을 누리겠다고 이리 오래 말을 섞어 알 필요도 없는 것들을 알게 되는가, 이토록 허투루이. 사내는 인상을 찡그리곤 등을 돌렸다. 
  
- 그리고 하루, 또 하루. 닦았을 도(道)가 아까워 죽이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신경줄이 당기고. 계집이 호소하고, 호소하고, 또 호소했다.  

- 사내는 온갖 세상일에 무심하고 그런 사소한 것들엔 관심을 갖지 않아 왔다. 하지만 그렇게 자꾸 나타났다가 우는 게 분명한 등만 보이며 사라지는 계집을 볼 때마다 뭔가 울컥 치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그것은 화병 같기도 토기 같기도 하여 사내는 불쾌했다. 그저 불쾌했다. 콱! 물어뜯어 버렸어야 했는데, 콱! 목을 떨어뜨려야 했는데.

 

- 신선의 시신은 사람의 시신처럼 남지 않는다. 본(本)이 인간이었든 동물이었든, 신선의 시신은 살아생전 본인이 닦은 선력 오래 남아 있다가, 썩지 않고 어느 순간 원래 만큼부터 없었던 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시체 썩는 냄새 안 맡아도 어딘가 던져두면 깔끔하게 처리될 것을, 나는 왜 또 널 보며 성이 나고. 

- "문을 열어 주십시오."
"허, 세상사 무자비하기로 이름난 육오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다. 같은 말을 세 번 이상 들은 일이 없었거늘..."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 꼬리를 탁탁 치며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멀찌감치 떨어진 회색의 계집이 제 오른팔을 베고 길게 드러누운 사내의 큼지막한 등판을 보다 눈을 내리깔고 안개처럼 말했다. 
"소문은 그리합니다만, 그와 달리 성정이 모질지 못하며 본디 다정한 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사내는 기가 찼지만, 기묘함이 찾아왔다. 멀찍이에서 계집의 형체만 봐도 늘 찾아왔던 짜증이 눈 녹듯 스르르 내려앉은 것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더 어이없게도 웃음이 났다. 기분이 좋으면 심술궂어지는 사내의 얼굴이 웃으면 어찌 될지? 흉악한 얼굴을 머리를 받치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가려 숨기며, 사내가 손가락 사이로 말했다.
"씨알도 안 먹힐 것인즉 꺼져라."
"쫓겠다 말은 하셨으나 적극적으로 몰아내진 않으셨소이다. 죽이겠다 수 번을 겁박하셨으나 정작 매서운 공격은 하지 않으셨소이다. 그것으로 알았지요. 가여운 이를 그 맹렬한 소문보다 어엿비 여기는 분임을." 

- "그러니 들여보내 주소서. 저는 보아야 합니다."
입에 발린 소리로 살살 꼬드기려는 짓거리를 보니 과연 여우는 여우였다. 천호가 아니고 매구인 게지, 사악한 계집, 간악한 계집. 방만하기가 이를 데가 없도다.
"불허한다. 썩 꺼져라."

- "도대체 뉘를 보려 이리 귀찮게 구는가!"
이런, 무릎을 꿇은 계집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보았다. 노란 눈, 그 노오란 눈에 망예(望霓) 같은 갈망을 담고 계집이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계집의 입술이 봄날 복숭아 꽃잎 같았다. 웃기는 일이다. 그 입술이란 게 파리하고 봄가물 땅처럼 쩌적적 갈라져 있는데도. 복숭아 꽃잎은 무슨 얼어 죽을 복숭아 꽃잎! 사내는 자신의 눈을 치 고 싶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내의 손 대신 계집의 말이 사내의 눈을 때렸다. 질끈 감기도록 눈을 때렸다. 
"제 지아비입니다. 저보다 먼저, 아니 누구보다도 먼저 천호가 되신 분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자기 아픔처럼 여기다 천제의 약초밭에 들고, 발각되어 그 죄로 끌려가신 분입니다. 선처될 것이외다. 그리 길게 처벌받지 않으리니, 소(訴)의 진행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소이다."

- 사내는 계집이 지근거리에 있지 못하도록 뿌리친 후 이마를 짚었다. 제기랄 놈의 여우, 일처일부로 천년만년 해로하는 여우 새끼!
"이런 젠장, 내일 이 시간에 알려 줄 것인즉 어서 썩 꺼져라!"
네 꼬락서니를 봐라, 가서 뭐나 좀 먹으면서 기다리던지! 그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씹어 삼키고선, 꾸벅꾸벅 손을 모아 인사하는 계집을 바라본 사내가 얼굴을 거칠게 비비며 다시 짜증을 냈다. 손, 하찮은 손, 너무 작고 위협적이지 못한 손, 그 되다 만 것 같은 모양으로 땅을 파고 또 파서 손톱이 다 뽑힐 듯 망가지고 뒤집어진, 그놈의 하얀 손.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다시 울컥하고 뭔가가 치솟아 올랐다. 화병 같기도, 토기 같기도 한 뭔가가. 

- 만사 관심 없는 바보천치라 그런 것도 모르냐고 실컷 새한테 놀림받으며, 호랑이가 곤륜 안쪽을 거닐었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먹지도 자지도 않는데 안에 들어올 일이 있을 리 없다.
"모른단 말이냐? 그런 것도 모르며 어떻게 인세(人世) 입구를 지키고 있는가?"
"그 꽁지깃 콱하고 깨물어 짓눌러 버리기 전에 그 입 다물어라."
그 말에 새가 하하하 웃으며 쪼로록 위치를 옮겼다. 그 바람에 흩날리는 붉고 노랗고 보라색인 꽁지깃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다 사내는 다시 땅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노랗게 민들레가 피었다. 그저 동그랗고 노오란 민들레. 


-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본(本)이 새인 사내가 자신의 양팔로 팔짱을 끼고, 심성대로 삐딱하게 기대어 이죽거렸다.
"계집, 계집, 세상서 제일로 하찮은 게 계집이라 그러더니! 이거 봐라. 마음 약한 놈 험상궂게 생겼다고 문지기 세워서 좋을 일이 없어. 금방 이 꼴이 난다지?" 
"시끄럽다. 네 아는 거나 말하라."
새가 그 말에 붉고 긴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정말 몰라서 묻는가? 하며 믿을 수 없어하는 얼굴을 했다가, 기묘한 표정으로 바뀐 새가 고개를 들어 갸웃거리곤 물었다.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냐?"

- "그 여우가 말한 것이 전부 참이라면, 찾는 죄수는 최초의 천호다. 천제의 약초밭에 들어간 죄로 청화절에 참형을 받을 예정이지. 그래, 그러고 보면 이제 보름 조금 더 남았네?"

훔친 게 뭔 줄 알아? 무려 백년등선근(百年登仙根) 두 개랑 생사(生死草)야, 생사초, 간도 큰 놈 아니냐? 하며 새가 높은 소리로 호방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말에 사내는 그저 인상을 썼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계집이로다. 이름처럼 생명을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는 생사는 인간의 목숨으로 키워 내는 것이다. 아랫사람이 주군을 위해, 아내가 남편을 위해, 자식이 부모를 위해 목숨을 걸고 얻어냈다 해도 절대로 선처받을 수 없을 터. 전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맛이 쓰다. 사내에겐 지난한 일이다.

- "그런데, 묻는 이가 아내라 했다고?" 
새가 다시금 기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내는 귀찮게 왜 그런 것을 자꾸만 확인하냐 하고 험상궂은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새는 땅으로 고개를 향했다가 본(本)이 종종 그러는 것과 같은 꼴로 하늘로 고개를 향하고선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비 맞은 놈처럼 뭘 그리도 이상하다고 중얼거려? 하고 사내가 투덜거리자 그 심술궂은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야, 새가 중얼거리는 내용이 바뀌었다. 그 말을 들어 버린 사내가 먹물 잘못 튄 천 구기듯 얼굴을 확 구겼다. 
"이상하다. 그 천호, 새끼 배고 죽어가는 자기 아내를 위해 생사를 훔쳤다가 걸린 거라 들었는데? 이상하다. 요호(妖狐)들은 비늘 달린 놈들처럼 축첩하지 않는데? 이상도 하다."

- 다른 천호가 또 있는 거 아니냐 하고 사내가 천둥처럼 으르렁거리자 잡혀 있는 여우는 하나뿐이고, 애 뱄다는 그 아내가 와서 울며불며 수발 중이다 하고 대답이 돌아왔다. 하늘땅의 소식을 전부 다 아는 발 넓은 놈의 말이니 틀릴 리도 없다. 사내는 계집의 작은 손을 떠올렸다. 그 되다 만 것 같은 모양으로 땅을 파고 또 파서 손톱이 다 뽑힐 듯 망가지고 뒤집어진 손을 떠올렸다. 그 손에 맞는 건, 눈송이를 맞는 것만큼의 위력도 없다.  
 
- 직물을 솜씨 좋게 가다듬어 지은 옷은 분명히 계집이 직접 만든 것일 터이다. 어째서 제 서방이 천호라는 계집이 이런 재질의 옷을 입고 있는가. 하물며 스스로도 천호인 계집이, 여우 신선인 계집이, 왜 비단과 솜털로 자아낸 옷이 아닌 한갓 아랫것들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왜 자신은 계집의 차림과 신분 사이의 균열을 발견하지 못했던가. 맨발에 가까운 몰골로 심장이 터지도록 다가오는 계집은 왜 그리도...
계집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치솟아 오름과 동시에 세상만사에 화가 나기 시작한 사내는 오늘에야말로 기필코 이 계집을 내쫓아야겠다, 그리 결심했다. 

- "... 알아내셨습니까?"
숨이 턱 끝까지 닿아 발그레하게 달게 숨결을 뿜어낸 계집이 민들레 같은 눈으로 올려다보며 숨을 고른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다. 저 눈을 보고 싶지 않다. 저 그저 맑은 표정이 바뀌는 걸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왜? 왜 보고 싶지 않은가? 하고 자문하다 사내는 체한 것 같은 속을 욱여넣고 우격다짐하듯 강제로 분노를 끌어왔다. 
"네가 나를 속였구나."
네? 동그래진 눈에 베인 것처럼 아린 눈을 쓰라리게 부라리며 사내가 일갈했다.
"만만히 약초밭에 들른 것이 아니렷다! 죄인은 백년등선근을 두 개 훔쳤고, 생사초 하나를 빼돌리다 걸렸다. 만지기만 해도 대죄로 치죄하는 생사초를 후린 죄인의 죄를 네가 감히 낮추어 고하여 나를 우롱해? 나의 동정심에 호소하려 해?"

- 원래부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새로이 각시를 얻은 것인지. 어쨌든 여우가 선택한 아내는 지금 현재 옥에서 수발을 들고 있는 임신한 여우였다. 아직 천호가 되지 못한 그 계집을 위해, 그 계집과 같이 하늘에 오르고 싶었던 늙은 여우는 자신의 천계위(天界位)를 백분활용해 백년등선근을 훔쳤다.

 

- 문제는 그렇게 훔쳐내어 먹인 귀한 약초가 임신한 몸에 독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었다. 주화입마 상태에 빠진 암컷이 숨이 넘어가려 하자 이 미련한 수컷은 생사초에도 손을 대었다. 들통은 금방이었고, 참형 언도는 빨랐다. 목 베일 날을 헤아리던 이 늙은 천호가 옆에 두기로 결정한 것은 구사불생으로 살아난 임신한 아내였다. 그 계집이 부른 배로 비단옷을 입고, 그래, 그놈의 비단옷을 입고, 지아비란 자의 수발을 드는 것을 천리를 달려 보고 왔다. 
네게 그 비단옷을 입히면 너는 얼마나 빛날 것인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지아비를 챙길 수 있는 너는 이렇게 소박맞을 계집이 아닌데. 너를 보면 답답하고 먹먹하여 속에서 이리도 치솟질 않겠나.  

 

- 만겁이 흘렀다. 만겁이 흘러 다 삭아 없어져 호골(狐骨)도 건질 수 없으리라.


- 혈육의 정도 축생도 위에서 그저 부질없이 흩어졌다. 동족이 흔치 않으니 피 대신 마음을 나눌 짝에 대해서도 관심이 갈 리 없다. 언제 여자를, 아니 암컷을 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품어 본 적이 있긴 한가? 새끼도 가져본 적이 없는데 젖몸살이라니, 소스라쳐도 할 말이 없다.
그러다 사내는 다시금 문득, 이제 천애의 고독이 된다는 계집을 떠올렸다.

- 바보 같은 계집. 널 소박한 네 서방을 천년만년 귀애하라고, 오로지 네 고운 기억만 남게 하려고 했는데 너는 왜, 왜 나를 그렇게. 네 서방은 여우가 아닌가 보다. 그 새끼는 천호도 아니야. 한갓 짐승인 여우도 백년해로한다. 여우는 그런 짐승이다. 하물며 그건 하늘인간의 형(形)을 띠고 하늘에 오른 여우인 것을! 그런 짐승이 첩질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가 본처인지, 누가 첩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계집은 천호였다. 수발하는 계집은 천호가 되기엔 200년 못 되게 부족하다 들었다. 결국 누가 애첩인지 명백하였으므로 사내가 혀를 찼다. 

- 바보 같은 자식. 네 여자는 소박하기에 이렇게 아까운 여자인데, 제 털을 뽑아 피로 옷을 자아 왔다. 이 복 많은 짐승아, 네가 비단옷 하나 입히지 않았던 네 여자가, 네놈을 따라 죽겠다고 머리카락으로 옷을... 잠깐, 옷을?

- 깨달음이 찾아왔다. 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가! 여우는 백년해로한다. 천호는 천년만년 해로한다. 금슬이 좋아 한쪽이 죽으면 따라 죽는다. 결코 재취하지 않고, 재가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가!

- 사내가 달렸다. 큼지막한 몸으로 땅을 박차고, 네발짐승처럼 흉흉한 기세로 달렸다. 그렇게 성벽 위, 아래, 옆을 하염없이 달리고 또 달려서 사내는 결국 작은 무덤처럼 엎드린 형체를 발견했다. 아스라이 흩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파리한 천호가 쓰러져 있었다. 눈이 좋지 않았던들, 그냥 찔레꽃 덮인 무덤쯤 된다 생각했겠지.

- 냄새도 소리도 살아 있는 자의 것인데 너무 희미하여 생기가 없다. 네 눈을 안다. 네 노오란 눈을 알아. 날 보려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네 눈을 보게 해 다오. 눈을 떠 보아. 계집은 반응이 없다. 사내는 좌우를 둘러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 "너 때문에 내 치성(致誠)이 깨졌다! 애먼 피를 묻혔어, 이 어리석은 것. 먹어라, 먹지 못하는가!"
계집은 좌우로 고개를 저었으나, 거대한 호랑이의 노호성에 몸이 굳었다. 그 입을 그렇게 강제로 벌려놓고 사내는 우악스럽게 또는 집요하게 토끼의 생명을 짜내어 그 입에 떨어뜨려 어떻게든 계집을 살려내었다. 이후 창귀(倀鬼) 묶어두듯 계집을 묶어 허튼짓을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 날마다 생명을 먹여 세상에 붙잡아 두었다. 사내가 진심으로 자신을 안쓰러워한다는 것을 서서히 계집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 이상 계집이 말하지 않았어도, 사내는 꾸러미를 잡아채어 먼지를 탈탈 털고선 사형수의 옥으로 그놈의 옷을 보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 계집은 고마워했다. 보스스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젠 기력이 없어 몸도 제대로 일으켜 세울 수 없는 계집이 일어나 앉아 보려다, 불가항력으로 자기 허리만 한 사내의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사내는 흠칫했으나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팔을 빌려줄 수 없는 날엔 성벽에 계집을 기대어 앉혀 놓았다. 낮에는 창을 꽂아 세워두고 계집의 옆에 앉아 먼 곳을 보았고, 밤에는 잠든 계집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지간히 화가 나는 모양이다, 어지간히 이 어리석은 모양에 화가 나는 모양이야. 이렇게 네 얼굴만 바라봐도 속에서 치솟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화병이 점점 더 깊어지는데도 나는 왜 널 옆에 두고 굳이 널 살리고.

- "먹어도 먹어도 그뿐이라. 짝 잃은 여우는 원래 이런 거랍니다. 자꾸 먹이려 하지 마소서."
네가 그리 말했듯 네 모습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그믐달처럼 여위어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천제께서 월궁(月宮)을 짓고 호리정(狐狸精 ) 중 천년호리정(千年狐狸精)을 월궁 관리로 올릴 계획을 세우셨으되 그건 아직 계획일 뿐이다. 달과 여우를 연결 짓는 것은 그렇게나 너무 먼 일인데, 제기랄, 너는 그걸 볼 때까지도 살 수 있으면서, 너는 왜 이지러지고 차오르게 계획된 달처럼, 그 얼굴선은 왜 그렇게나 애처롭게.

- 절대로 자신이 쓰다듬지 못할 얼굴을 바라보며 사내는 주먹을 쥐었다가, 손에 배인 땀을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쓸었다가, 손금 모양으로 남은 흙먼지를 쳐다보았다가, 손톱이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하며 주먹을 다시금 꽈악 쥐었다. 그뿐이었다. 다만 그런 식이었다. 애처롭게도 알지 못해서. 


- 네 서방의 목을 끌어안고 그 계집도 울었다. 임신한 배의 선이 홀쭉한 것이,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더라. 아이가 살아 나왔는지 죽어 나왔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몸조리할 산모가 그렇게 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가히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관심 두지 않을 일을, 너 때문에 보았다, 너 때문에 보았어. 

- 널 보면 화가 난다. 제대로 보지도 못해 지아비랍시고 슬퍼하고 있는 널 보면 화가 난다고. 그 어깨를 부여잡고 울지 말라고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남의 아내다. 닿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며 사내는 절레절레 거대한 고개를 저었다.
"행여나 따라 죽을 생각 마라. 너 때문에 내 정성이 깨진 것을, 네가 건강해져 갚기 전까진 놓아줄 생각도 없다. 꼭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 꼭꼭 식사나 잘하여라."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일부일처로 해로한다더니, 그 여우새낀 여우도 아니고 네 지아비도 아니다. 지아비일 수 없다. 그러니 다시 서방 얻어 꼭 그 뽀얗게 피었던 얼굴, 그 얼굴로 마주 보고 웃으며 그 남자에게서 고개 돌리지 말고 이번에야말로 천년해로 하여라.
"고맙습니다."

- 하지만, 그것도 그뿐이었다. 잘 먹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계집은 차차 더 야위어 갔다. 골격의 형태를 짐작케 할 만큼 앙상해져만 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하늘인간 꼴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어지간한 수련을 한 여우가 아닌지라, 그 수련을 안타까워하며 사내는 혀를 찼다.
"천제를 뵈오면 월궁에 너를 제일 먼저 추천할 것이다."
네 수행이 아깝다. 한갓 누군가의 계집으로 두기엔 네 수행이 너무 아까워. 자조하듯 희미하게 웃으며, 사내는 달이 뜨지 않는 밤에 다리 베개를 해 주며 속삭였다. 그전에 건강해라, 뼈다귀만 남은 자를 누가 관리로 쓰겠는가? 계집은 그저 웃었다. 마치 민들레 씨앗 솜털 같은 미소였다. 

- 그 후 고작 하루.
이미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계집이 매무새를 정갈히 하고 몸을 일으켰다. 


- 반면 계집은 진작부터 알았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이용하려 한 적 없지 않았으나, 그럴 순 없어서 아직도 손톱이 성치 않은 손을 들어 사내의 얼굴을 향해 뻗다 다시 거둬들였다. 그 손을 무심결에 쫓는 눈길을 보며 계집이 더욱 희미하게 속삭였다.
"당신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큰 은혜를 입었지요. 입었지만, 당신의 큰 굄에 보답할 수가 없소이다. 아시지요? 여우는 한 아내만을 사랑합니다, 한 지아비만을 섬깁니다. 내 생애 당신을 떠올리는 일 없지 않겠습니다마는, 당신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는 이제 없습니다."

- 나는 다 타버린 잿더미입니다. 우리는 너무 늦었습니다. 아니야, 늦지 않았어. 살리면 된다, 살아서, 그저 살아서...

- 이제 계집의 목소리는 말을 더 꺼내지 못하고 턱선이 도드라지도록 어금니를 악문 사내가 귀를 들이밀어야 들을 수 있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그저 보답처럼 버텨왔다가 이제야 속마음을 털어내고 사그라지는 계집이 다시금 웃었다.
"하지만, 다른 생 어딘가엔 우리가 서로 닿을 수 있겠지요."

그 말 위로 꺼져가는 마지막 숨결이 유언처럼 남았다. 그 숨결을 부여잡을 수 없음에 다시금 사내는 화병처럼 토기처럼 무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사내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알아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심술궂은 얼굴은 무엇을 뜻할 것인가. 즐거움인가, 심통인가? 사내는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 아직 윗입술 흉진 자리가 채 사라지지 않은 입술이었다.
"그 긴 생 어딘가에, 당신을 지아비로 모셔 은혜 갚을 생하나 없겠습니까."

- 은혜라니, 그런 말로 내 마음을 덮어씌워 호도하고 모욕하지 마라. 그리 불만을 표하려 했으나 계집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야 닿을 수 있는 계집을 끌어안고, 망부석처럼 앉은 사내는 무릎을 갈아낸 그 자세 그대로 오래도록 있었다. 애도라도 하듯 맹세라도 하듯 그렇게 오래도록.
 
- 호랑이였던 사내는 곤륜을 지킨다. 곤륜의 성은 이중삼중도 아닌 구중. 그 위엄만으로도 사사로이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곳이나, 문지기가 천제의 명을 받고 언제까지나 그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먹지 않고 자지 않고 배설하지 않으면 죽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그런 자였다.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되고, 잠들지 않아도 되는 그런 몸으로, 그를 그리 만들고 그 임무를 주었다. 감시자였으되 처형자이기도 한 그의 이름을 육오(陸吾)라 한다. 그리고 육오의 지근거리에는 언제까지나 회색 보오얀 계집의 형체가 누구의 손길, 심지어 본인의 손길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 그러니 네 얼굴을 이제야 만질 수 있으면서 나는, 나는 왜 아직도 널 보면 울화증처럼 심장이 널을 뛰고, 네 끝난 몸 앞에서 하늘이 닫히고 내 존재 자체가 사라질 때까지 널 찾겠다 다짐을 하고.

- 진달래가 피었다가 망울져 떨어졌다. 복숭아꽃이 아무렇지 않게 뒤를 잇듯 그 자리를 이었다가 흩어져 날렸다. 철쭉이 요염하게 붉어 흐드러졌다가 아스라이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작은 찔레가 희게 얼굴을 내밀었다. 꿀벌이 근처를 날아도 소스라치며 떨다 바람에 하나씩, 하나씩 꽃잎을 떨궜다. 피기 시작한 장미가 애처롭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붉은 꽃잎을 피워냈다. 


- 하나씩 하나씩, 더위에 지쳐 떨어져도 찔레꽃 흰 꽃잎은 아직 받아지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장미꽃이 다 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기다려, 장미가 찔레꽃을 향해 향기로 떨쳐 말했다. 네 흔적을 찾아낼게. 우리가 만난 계절이 같은 계절은 아니지만 내가 널 기억해. 다시 피면 꼭, 너를, 수없이 다시 태어나 다시 너를. 
나는 너를.

 

- <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는 계절에>

 

- "어찌 축생의 혼으로 인간의 몸에 들어간단 말이냐? 실성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단 말이냐?" 
"여우 같은 딸 하나만 점지해 달라고 빈 것은 그분들입니다. 그 정성이 갸륵하고 금슬이 좋아 잠시 딸이 되어 준 것이니, 삼신께서는 염려치 마시지요." 
"대체 어떻게 걱정을 안 한단 말이냐?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고살 수 있겠느냐?"
"인간의 법도를 지키고 측은지심을 베풀면 악인도 부처가 될 수 있고, 짐승도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헌데 삼신께서는 어찌 측은지심을 베풀어 딸 하나 점지해주지 않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요?" 
"모름지기 옳고 그른 때가 있기 마련이니라. 노쇠한 인간이 아이를 배는 것이 정녕 하늘의 섭리란 말이냐? 네가 어찌 감히 섭리를 거슬러 세상을 어지럽히려 하느냐? 너는 장차 이 가문의 인간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니라!" 
"설령 그리 되더라도 그 책임은 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바란 인간들 또한 책임이 있습니다. 왜 모든 잘못을 저에게만 물으시는지요?"
"너는 영물이다.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그릇된 일을 바란다면 계도를 할 것이지, 무턱대고 들어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 네가 그러고도 영물이라 불릴 수 있겠느냐? 너는 욕심에 눈이 멀어 한낱 축생이 되어 버렸구나!"

- 그 순간, 은혜는 싸늘한 눈으로 노파를 돌아보았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사방에 한기가 서리고,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노기를 꾹 눌러 참으며 노파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한없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를 두 번 다시 축생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이제이 집안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네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느냐?"
"저를 품어 주는 인간이 있는 한, 저는 끝까지 인간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저의 역할을 다하며 생이 다할 때까지 살아갈 것입니다. 헌데 당신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갓 태어난 아이와 가정을 축복해 주는 것이 당신의 역할 아닙니까? 그런 자애로운 신이 한낱 어린아이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으니, 그 모습이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 더 이상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설령 따진다 한들, 일방적으로 비난받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노쇠한 몸으로 아이를 바란 것이 죄가 되지는 않았고, 인간의 법도를 지키려는 영물의 의지를 함부로 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 모두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요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감나무를 보았다. 그리고는 어릴 적 은성에게 들었던 노랫가락을 나지막이 흥얼거렸다. 구슬프고 섬뜩한 선율이 피비린내와 섞여 만리까지 뻗어 나갔다.

-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은성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찍이 은혜가 소의 앞에서 읊었던 말이었다. 은수와 함께 절에 들어온 지 5년, 이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광명진언이었다. 승려들이 육식을 한 뒤 자신의 죄를 씻고, 축생의 혼을 극락정토로 보내주고자 외우는 것이었다.

 

- 처음 노승에게 그 사실을 들었을 때에는 역시 은혜가 요괴일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 절에 들른 사람들로부터 고향이 풍비박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우 요괴가 온 마을의 장정을 토막 내어 죽였다는 흉흉한 소문이었다. 은성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반쯤 정신을 놓았다. 그날 이후 홀로 언덕에 앉아 광명진언을 외우기를 반복했다.  

- 은성은 멍하니 손을 뻗었다. 받아 보니 붉은 주머니였다. 그는 곧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것을 손바닥에 털어보았다.
아름다운 구슬 세 개가 손바닥 위로 굴러 떨어졌다. 각각 녹색 구슬, 청색 구슬, 홍색 구슬이었다. 형형색색으로 흘러나오는 청아하고 맑은 기운에 뼛속까지 몸이 시렸다.

 

- 노파는 잔잔한 목소리로 은성에게 말했다.
"그 아이가 하늘의 순리를 거슬러 요괴가 되었으니, 혈육인 네가 목을 치는 것이 맞을 것이야."
"왜 하필 저입니까?"
"네가 그 아이를 믿어 주었기 때문이란다."
"그 아이를 믿어 준 것이 죄입니까?"
"그게 어찌 네 잘못이겠느냐마는... 죄를 짊어질 인간이 너와 네 동생밖에 남지 않았으니, 너희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달리 누가 지겠느냐?"
"그렇다면 제 어머와 아비도 죄인입니까? 그 나이에 딸을 바란 것이 죄가 됩니까? 가족을 믿고, 끝까지 지키려던 것이 죄가 됩니까? 일찍이 이 사달이 날 것을 알고도 내버려 둔 당신의 죄는 아닙니까?" 
노파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뒷짐을 진 채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유독 서글펐다.
"가엾구나, 가여워라. 믿어서 배신을 당하고, 믿지 못해 배신을 당하고... 인간이나 짐승이나 과욕을 부려 모두 잃는구나. 악연이 얽힌 실과도 같으니... 옥황도, 염라도 손을 댈 수가 없네."

- 구슬은 일견 투명한데 그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살며시 움켜쥔 순간, 사아아 하는 파도소리가 청아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녹색 구슬에서는 짙은 풀내음이 흘러나왔고, 홍색 구슬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은성은 그것을 주머니에 갈무리했다. 그는 지팡이를 짚어가며 절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두 형제는 언제라도 절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어느 한낮, 은혜는 홀로 머리를 빗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음식은커녕 물조차 입에 대지도 않았고, 흉가 밖으로 나가는 일도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은혜는 가만히 손을 뻗어 거울을 어루만졌다. 입술은 홍시를 베어 문 것처럼 붉었고, 피부는 밀가루처럼 희었다. 

 

- <은혜>

 

 

 


 

 

 

혁명가들 by 한켠

귀족의 아들인 '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혁명을 하려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체포당한다. 내가 결혼하려 했던 백정의 딸도 그 무렵 죽었다. 나는 감옥에서 그녀의 오빠에게 그녀의 죽음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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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은 실패했다. 아니, 실패도 하지 못했다. 혁명을 하기도 전에 조직이 와해당했다. 누군가 우리를, 아니 나를 밀고했다. 세상은 우리의 혁명을 '철없는 귀족 자제들의 허황된 내란음모 사건'이라고 했다. 

 

- "내 덕분에 내란소요죄가 되기 전에 내란음모에서 발각되어 형량이 줄었는데 왜 배은망덕하게 구나. 참전 경험이 있는 노비가 아니라 책만 읽던 도련님들이 무장혁명을 하시겠다길래 이게 실패하리란 걸 직감했지.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있는 세상을 만들겠단 자들이 노비를 모시고 혁명을 하기는 싫다고?"

 

- "누이가 고했다."

"아니야... 설마... 네 누이는 나를 연모했는데..."

"연모했다고... 그럼 왜 자결했을까..."

"오라비가 혼인을 반대했다고 했었지. 친오라버니도 아니면서!"

"왜 반대하는지는 말을 안 했는가. 연모했다면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결했다. 

 

- "누이가 그랬나... 아니야..."

"지체 높으신 도련님이 몸을 취하시겠다는데 천한 백정의 딸이 어찌 거부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혼인할 사이였어... 그런데 오라버니가 반대한다고 해서, 그 오라버니란 작자와 사람들이 의심하는 그런 관계냐고 했는데..."

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분명히 세간의 소문을 들었을 텐데도.

"그 소문대로였다면 내가 양부의 사위가 되었겠지."

 

- 내 앞에 있는 이 놈은 근본을 모르는 놈이었다. 어느 날 도축장에 나타나 소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고 뼈를 동강내는 광경을 지켜보더니 일을 배우고 싶어 했다. 백정이 기초만 알려줬는데도 금방 소 한 마리를 깔끔하게 해체했다. 뼈에는 남은 살점이 없고 내장과 부산물도 완벽하게 분리되었다. 경탄하는 백정에게 그는 "사람이나 짐승이나"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내 없이 딸과 둘이 살던 늙은 백정은 그에게 딸과 혼인하여 같이 살며 가업을 잇기를 권했다. 놈은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혼인은 못 하겠고 대신 백정을 아비로 모시며 그 딸에게 오라비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찾는다는 사람이 원수인지 가족인지 정인인지 묻자 그저 아득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릴 뿐 말이 없었다고 했다. 

 

- 나는 처음부터 이 놈이 싫었다. 말수가 적은 것은 음흉해 보였고 과거를 밝히지 않는 것은 수상했고 글을 아는 것은 의심스러웠다. 지아비가 아니라 오라비가 되어 줘서 고맙다고 하는 누이에게 놈은 도련님이 왜 글을 가르치지 않았냐고 따져 물었다. 아무말도 못 하는 애한테 직접 한 글자씩 가르치며 나와의 혼인을 반대했다. 놈이 쓴 글자는 수려하고 문장은 유려했다. 멸문한 집안의 후손인가 했는데 그러기엔 어렸을 때부터 일한 사람처럼 손마디가 굵고 손톱이 뭉뚝했다. 

 

- "난 그 혼인을 위해 부자지간의 연도 끊으려고,"

"네놈의 무리, 자칭 혁명가들 중에 귀족 집안 따님들도 있었지. 네가 그 혼인을 했다면 네 놈의 아내와 그, 귀족 따님의 관계는 어떻게 되려나?"

 

-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순수하고 무지한 천민의 딸과 혼인하고 이 결합을 반대하는 구시대 부모와 절연하고 새 시대를 연다... 가 우리의 '혼인강령'이었다. 부모들은 당연히 반대하는 혼인이었다. 부모들은 파혼할 때까지 재정지원을 끊었다. 무능하고 허황된 아비와 순종적이고 희생적으로 혁명가와 집안을 돌보는 어미와 어미의 신분은 싫고 아비의 집안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출생신고조차 되지 못하는 사생아나 다름없는 자식들이 이런 혼인의 실재였다. 지아비는 아내가 무식하여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했고 아내는 생계를 꾸리다가 지쳐서 소로 외로워졌다. 지아비들은 아내 대신 '사상을 공유하는' 혁명동지들과 토론을 했고 뒷풀이는 술자리로 이어졌고 귀가하는 길에 혁명동지 사이에서 불륜이 일어나기도 했다. 동지들은 결혼상대는 아니었다. 뒷담화의 대상이었다. 누구랑 누구랑 갈 데까지 갔다더라... 사내들은 서로 자기가 더 깊은 단계까지 갔다고 허세를 부렸고 소문을 부풀렸고 그 상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란하고 난잡한 탕녀가 되어 있었다. 

 

- 나는 그런 동지들과는 달랐다. 나는 정말로 놈의 누이와 혼인하려 했다. 왜 그랬을까. 그게 '혁명'이라서? 왜 그랬을까. 놈의 누이가 날 '존경'해서? 왜 나였을까. 내가 아랫것들에게 친절해서?

 

- "네 놈이 혁명과 변혁을 논하는 것에 반했다지. 너는 달랐다고. 아랫것들 멸시하지 않고 인간으로 대해 줬다고. 그런 애한테 글자도 안 가르쳤나. 천민은 혁명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게 그게 무슨 평등이라고. 네놈들의 사상은 다 허상이고 허영이었다."

"난 노비문서를 불태웠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먹여주고 재워주던 노비를 무작정 '해방'시키면 걸인이 될 수 있는 자유를 준 건가. 네 아비는 좋으시겠군. 아들의 치기 덕분에 집도 밥도 안 주고 노비를 헐값에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 "원하기만 하면 되나?"

"공부하면, 노력하면..."

"당장 다음 끼니 걱정하는 처지에 글자가 눈에 들어올까. 그리고 노력하면 되는 세상은 이미 열렸지."

 

- "내게 안정된 현재와 보장된 미래를 준다면 그 나랏님이 누구든 상관없지 않나. 그러니 너희들도 이민족을 몰아내자가 아니라 괜히 혁명을 하자고 하는 거지."

 

- 파종할 때와 추수할 때의 지주가 달랐던 시절에 그들은 묵묵히 땅을 갈고 소작료를 떼고 세금을 냈다. 땅주인이 바뀐다고 흉작이 풍작 되는 거 아니고 콩 심은 데서 팥 나는 거 아니라고들 했다. 인품 훌륭한 어르신보다 소작료 덜 걷는 어르신이 낫다고들 했다. 그런 무지렁이들이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슬퍼하거나 분노할 리 없었다. 그들은 효의 세계에 살았고 우리는 충의 세계에 살았다. 아니, 그건 충도 아니었다.

 

- 궁이 불타고 후사 없는 왕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상을 내릴 왕이 없어진 지방관리들은 순순히 곳간을 열고 기녀들을 내주었다. 침략군은 약탈도 강간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평화롭게 수도로 행진했다. 지방관아마다 들러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궁에 다다랐을 대 불탄 궁궐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내 아버지를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국토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공손히 이민족의 왕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 아들들은 아버지들을 비난했다. 싸워 보지도 못하는 비겁한... 아버지들은 아들들에게 물었다.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느냐. 왕을 위해? 왕조는 멸문했다. 백성을 위해? 민의는 왕이 누구건 상관하지 않는다. 아들들은 답을 찾아냈다. 나를 위해. 내 출세길을 위해. 

 

- 대대손손 노비 집안의 아이들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그저 관비의 아들이 관직에 올랐다는 성공신화만 입에서 입으로 옮겼다. 그 자리가 몇 석 되지 않는다는 것, 그나마 더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은 못 본 척했다. 귀족의 자제들이 이전처럼 음서로 관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혁명을 했을까. 

 

- "도련님, 혁명이 뭐예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거란다."

"더 나은 곳은 어떤 곳일까요?"

"모두가 평등한 곳이지. 누구나 시험에 통과하면 벼슬을 할 수 있는 세상."

"도련님이 저 같은 것과 혼인할 수도 있는 세상인가요?"

내가 바라던 '평등한 세상'이 정말로 왔다면 그녀 대신 평등한 여인과 혼인했을 것이다. 젊은 관리가 된 나와 늙은 대신의 딸이 동등하게 혼인했겠지. 

 

- 아마 동지들 중 단연 돋보였던 여인과 혼인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놓고 남장을 하고 다니던, 붉은 비단으로 장정한 서책을 끼고 다니던, 평소엔 과묵하지만 때가 되면 해박한 지식과 냉철한 현실인식으로 토론에서 지는 법이 없던 동지였다. 그 매력 덕분에 어느 집안 자제인지도 모르는 채로 우리의 혁명에 받아들였다. 그 여인은 동지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가 외치는 평등은 이민족의 귀족과 평등해져서 그들의 벼슬을 받는 것일 뿐, 아랫것들과 동등해질 평등도 아랫것들에게 우리와 같은 관직을 줄 평등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평등'이라고만 하고 그 의미는 정직하게 말하지 않는 건 기만이라고 했다. 절대다수인 아랫것들을 속여서 '혁명'에 성공하면 그다음엔? 그들이 기대했던 과실을 나눠줄 수 있겠냐고. 그러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가 했던 대로 '혁명'을 할 거라고.

 

- 그 말이 옳았다. 그걸 인정하면 우리에서 바보가 될까 봐 졸렬한 사내들은 모른 척했다. 끝내 이렇게 실패할 때까지...

 

- 양쪽 목소리는 그 애의 입을 통해 서로를 탐색했다. 왜 그 애는 그 목소리들을 내게 들려주지 않았을까. 그들이 붉은 비단에 써서 주고받았던 연서인지 밀서인지를 왜 내게는 보여주지 않았을까.

"네놈에게 보여주려 했지만 보려고 하지 않았잖나."

 

나는 왜 그 애와 혼인하려 했을까. 예쁘고 귀엽고 날 우러러보고 그러니 혼인하면 내게 순종하고 내 자식에게 헌신적일 것 같아서. 절대 명석함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내 미래의 아내가 글공부를 할 때 소가 밭일을 해야지 경을 읽어 무엇하겠느냐고 비웃기만 했다. 붉은 천에 글을 받아 따라 쓰고 그 천을 빨아 다시 글을 받던 일을 그저 종이를 아끼려고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게 증거인멸인 줄은 몰랐다. 

 

- "네놈에게 경고하려 했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지."

그 애는 자주 "우리 오라버니가 그러는데요"라며 말을 붙이려 했다. "도련님 혁명이 뭐예요"하며 나를 올려다볼 때의 그 눈빛이었다. 남장여인이 "네 오래비에게 전해 다오"하며 그 애에게 글을 주던 무렵이었다.

"그래, 너랑 동침한다는 네 오래비가 뭐라고 하더냐."

입이 걸은 아낙네들에게 대놓고 오래비와의 소문을 추궁당하던 때도 헛소문이라며 되받아 버럭 대던 애가 모욕받은 낯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문이 진실이었던 걸까. 그 후로 나도 그 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그 애는 죽었다. 정말 자살일까. 누가 죽였을까. 그때 의심했더라면 죽지 않았을까. 

 

- 그러나 그때는 그 여인을 곁눈질하느라 그 애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사내란 한 번에 두 가지를 못 하는 족속이다. 반반하고 도도한 미지의 여인. 내 것으로 만들어 부러움을 사리라. 남장여인의 환심을 사려 혁명을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다른 동지들이 혁명을 논할 때면 냉소적으로 비판하던 여인은, 내 의견엔 토를 달지 않았다. 다만 그 애와 그 애의 소문과 소문 속의 오라비에 대해 물었다. 그때는 내가 그 애에게 미련이 남은 건지 떠보는 거라 넘겨짚었다. 우리의 혁명이 와해당하기 전에 그 여인은 사라졌다. 

 

- "나 하나 잡겠다고 누이도 죽이고 양부는 화병에 걸려 죽게 하고 정인은 배신자로 만들고... 날 얼마나 증오하길래..."

 

- "네놈은 날 얼마나 증오하길래 아내가 될 내 누이를 죽이고 부모와 연을 끊고 사모했던 여인을 실종되게 했지?"

 

- 약혼녀는 죽었고 그 여인은 사라졌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존재하긴 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해 볼 걸. 그 여인이 허상이고 이 모든 게 꿈이라면 그럴걸.

 

- 우리의 이념은 숭고했다. 만인은 평등하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귀족들과 이민족의 귀족들은 평등하게 권력과 부를 나눈다. 노비와 귀족은 평등하다. 다 같이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하는 자가 관리가 된다. 시험공부는 각자 노력한다. 노비와 농민과 상인은 평등하다그들이 귀족만큼 교양 있거나 계몽되어 있지 않기에 능력을 넘어서는 보상을 줄 수 없을 뿐이다.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다. 신분과 관계없이 혼인한다. 노비출신 지어미와 귀족출신 지아비의 결합을 허용한다. 그 반대는 불허한다.

 

- 어딘가 잘못되었다. 그 여인은 그걸 알았다. 그 여인은 누구길래 알 수 있었을까. 동지들이 맹목과 치기와 열정에 매몰되어 있던 그때에. 아니다.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거울을 볼 용기가 없었을 뿐.

 

- "필사라도 하면서 시간 좀 죽여보지 그러나. 기왕이면 필체까지 똑같이."

 

- [노력하면 뭐든 될 수 있으니 꿈을 크게 가지라 해 놓고 실패하면 노력이 부족했다는 세상에서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리는 턱없이 적은데 하면 된다는 헛바람만 허파에 들어차니 노력하는 자는 많아지고 노력은 경쟁이 되어 노력을 직업으로 하는 학생 백수만 늘어나는구나이 얼마나 낭비인가. 소는 소의 일이 있고 사냥개는 사냥개의 일이 있거늘 소가 투박한 발굽으로 사냥에 힘쓸 뿐 논밭을 버려두면 그 소는 백정의 칼 아래 놓이고 농사는 흉작이 될 뿐이다. 빈한한 집의 온 식구가 우매한 아들의 성공을 빌며 희생하여 끝내 실패를 맞이하여 낙담하여 더러는 투신하고 더러는 화병에 걸려 폐인이 되니 이는 일생일대의 불효로다. 재능이 없는 자가 공부를 하는 것은 계집이 사내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하며 이치에 맞지 않다. 각자에겐 각자에 맞는 재능이 있으니 공부에 능하고 그것을 뒷바라지할 집안이 있는 자만이 공부를 하고 칼이 익숙한 자는 소를 잡고 장사꾼의 기질이 맞는 자는 장사를 함이 자신과 세상에 이롭다.] 

 

- "요새 이런 글을 쓰는 자들을 '논객'이라 칭한다나. 머리 좋고 글 잘 쓰는 백수들이 선동질하기 좋지."

 

- 떨리는 손으로 논객의 이름을 확인했다. 굳이 백정과 사내옷 입은 계집을 끌어들인 글. 나를 아는 사람이다. 사내옷 입은 여인을 두고 나와 연적 사이였던 동지였다. 그가 우리의 혁명을 교묘하게 부정해 버렸다. 공부는 귀족이 할 테니 백성들은 자기 신분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함의로 쓴 글. 우리의 이념에 한계가 있긴 했지만 그게 지향은 아니었다. 이건 우리의 치부를 드러낸 짓이었다. 이게 나를 배신하고 풀려나서 할 짓인가. 분노가 치밀었다. 분노에 이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이건 분노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감정이.  

 

그때 깨달았다. 내가 이 자를 볼 때마다 느꼈던 불쾌감이 무엇인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역겨움, 불편함. 

 

- "누이는 손톱이 없었지. 죽는 게 고통스러워서 손톱으로 긁어댔나 봐. 왜 그랬을까."

"복수라도 해 달라던가."

"그러게. 무슨 말이라도 남겼으면 좋았을걸."

 

- 시련과 고난과 굴욕은 남의 일인 줄만 알았다. 근거는 없었지만 내가 강한 사람일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누가 이 고통을 끝내주고 손가락을 붙여주고 내 인생을 회복시켜 준다면 그분의 쥐새끼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돌이켜보면 두 여인이 다 실패를 예견했었다. 왼쪽과 오른쪽 귀에서 그토록 실패를 속삭였는데도 듣지 않았다. 내가 실패자가 될 리 없다고 믿었다. 무식한 여인은 실패하기 전에 그만두라 했고 유식한 여인은 실패 후를 대비하라고 했다왜들 그렇게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반대파를 멸문시켜 버리냐고. 자기가 패자가 되지 않을 거라는 낙관은 어디서 나오냐고. 자기가 패할 때를 대비해서 재기할 발판이나 나락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짚더미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건 낙관이 아니었다. 나는 아닐 거란 회피였다. 그러나 결국 나도 실패했다.

 

- "왜 죽었을까. 네놈 때문일까 아니면 나 때문일까."

"유서를... 볼 수 있을까요."

"그건 네놈이 알아서 찾아야지."

 

- 놈이 피에 젖은 글뭉치를 주워 들어 내 뺨을 후려쳤다. 잘린 손이 아파서 뺨은 차라리 아프지 않았다. 좌우로 사정없이 치다가 글뭉치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놈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얼굴을 들이댔다.

"왜 네놈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놈이 한 짓이 중요하지."

 

- "써라. 네 동지였다는 자가 쓴 것처럼."

"대체 뭘..."

"아주 내밀한 글. 가장 부도덕한 글." 

 

- 글로 얻은 명성은 글로 앗아야 했다. 내가, 우리 귀족들이 이렇게 추락하지 않았다면 조정에서 글을 쓰고 있었겠지. 선동하는 글, 아부하는 글을. 논객의 필체와 문장을 빌어서 그를 파멸시킬 글을 썼다. 나는 죄를 짓는 게 아냐. 복수하는 거야. 네가 날 찾아와 줬다면, 네가 논객이 되지 않고 유명해지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면 나도 이러진 않아. 그러나 내가 쓴 글은 나의 진심이었다. 너의 내연의 여인. 나의 여인. 인간백정의 누이. 죽은 자를 위한 제문. 산 자를 위한 편지. 

 

- [너는 날 존경했고 혁명이란 것을 모르면서도 경외했고 나는 자만에 취했다. 천한 신분과 지냄으로써 우리는 부모세대와 다르다는 걸 과시했다. 너를 안으며 훗날 너와 가정을 꾸리겠다고 한 것은 그때는 거짓이 아니었다. 막상 아이가 생기면 부모가 천한 피가 섞인 손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유기하거나 어영부영 호적에 올리지 않고 버티는 동지들처럼 할 마음은 없었다. 물론 그들도 처음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때 내가 모든 걸 감당할 수 있는 대단한 인간인 줄 알았다.]

 

- [너는 내가 그 여인 때문에 돌아섰다고 생각할 것이다. 변명하자면, 너도 그랬다. 네 오라비란 자가 집에 온 이후 너는 신분과 상관없이 명민한 자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오라비에게 글을 배우고 그 여인에게서 혁명이란 게 실은 과거의 귀족이 현재의 통치자에게 권력을 구걸함을 뜻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너는 나를 존경하지 않았다. 다만 염려했다. 나는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는 투사가 아니라 자기기만의 불에 날아드는 부나방일 뿐이었다.]

 

- [글을 아는 자는 누구나 관리가 될 기회를 가져야 한다면서 네게 글을 가르치지 않는 나를 비웃던 그 여인 앞에서 나는 졸렬한 득권층이었다. 나는 전처럼 대단한 인간일 수 없었다. 그 여인에게 끌리면서도 유치한 자존심을 세우겠다고 동지들과 우리 혁명동지인 귀족 아씨들을 품평하고 유린할 계획을 세우며 웃기도 했다. 너무 명석한 여인은 아내보다는 내연녀의 자리가 어울린다며 학식 있는 귀족 따님들의 이름을 희롱하기도 했다. 그런 놈이었다, 나는.]

 

- 고문은 없었다. 그럼 내가 들었던 비명과 신음은 누군가가 연기했던 거겠지. 백정은 곧 제도가 바뀔 테니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댔다. 그러면서 "그런데, 도련님들이 나 같은 자와 같은 대접받을 수 있을까? 분명히 분리하고 따돌리고 배제하겠지? 같은 하급관리 주제에 출신을 따져가면서."라고 빈정댔다. 

 

- 우리가 모두 질투했던 논객은 내가 사라졌듯 최근에 사라졌다. 그의 글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두려워하며 그 글은 자기가 쓴 게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파는 자가 누군지 찾아다니던 그는 어느 순간 그 글들은 자기가 썼다고 했다. 돈과 명성이 들어오고 이민족의 명문가와 혼담이 오가던 무렵부터였다. 

 

- 그의 마지막 글은, 내가 썼다. 그럼 그 전의 글들도 그가 아닌 누군가가 썼을 것이다. 

 

세상은 그와 동지들을 비난했다. '배신과 난교가 난무하는 도당'이라고 했다. 아무도 우리의 사상과 이념에는 관심이 없었다. 부도덕과 위선이 그 모든 것들을 삼켰다. 저자에서는 종년들을 유린해서 사생아를 낳게 하고 아씨들과 혼인빙자 간음을 하는 도련님들을 씹어댔다. 그 도련님들이 했던 음담패설이 '누군가'의 증언으로 흘러나오자 혁명가들은 흉악한 강간법이 되었고 귀족 아씨들은 입방아에 올랐고 그중 한 명이 자신의 결백과 순결을 호소하면서 목숨을 끊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자들은 죄가 없으면 떳떳하게 살면 되는데 뭔가 있으니까 덮으려고 자살한 거 아니냐고들 해댔다. 그건 다 뒷담화였을 뿐 사실이 아니라는 도련님들의 변명은 거짓이 되어 버렸다. 익명에 숨은 증언과 투서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튀어나왔다.

 

- "네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는 뭔데?"

누구의 손가락이 잘렸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언제 어떻게든 악취는 새어나갔을 것이다. 음식에서 악취가 나면 맛이 어떤지는 중요치 않게 된다.

 

- 부도덕한 자들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다는 비난에 우리보다 더 미개하고 문란했던 왕조도 있었다고 반박해 봤자 소용없었다. 위선적인 사상이건 뭐건 세상을 바꾸겠다는 자들은 무결해야 했다. 

 

- 그 백정 놈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내가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유서를 그 감옥에서 들고 나온 이후로 누구도 그가 누구인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서 그의 몸 하나만 아무 기척 없이 사라졌다.

 

- 유서 속의 그 여인과 백정 놈은 내가 알지 못했던 인물들이었다. 

 

- [제가 이런 얘기하려고 했을 때마다 도련님이 안 들으려고 했으니까 도련님 잘못도 없는 건 아니에요.

도련님이 왜 그랬는지 알아요. 저 말고 딴 사람 좋아했으니까. 언니는 도련님 안 좋아했는데. 질투 아니에요. 언니는 저한테 잘해줬어요. 언니는 오라버니랑 아는 사이랬어요. 제가 오라버니를 오라버니라 부른다면 자기를 언니라고 부르랬어요. 오라버니랑 서로 좋아하는 거 같았어요. 자꾸 저를 시켜서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라고 시키고 편지 심부름도 시키고 그랬어요. 저 글공부시킨다고 어려운 글도 써줬는데 그게 서로에게 편지 보낸 거였어요. 너무 어려워서 저는 읽어도 이해를 못 하니까 도련님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안 봐줬잖아요.]

 

- [제가 그럴 거면 둘이 만나라고 했더니 둘 다 수줍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머리를 썼지요. 오라버니가 집에 없는 척하고 언니를 도축장으로 부르고 저는 숨어서 지켜봤어요. 죽은 소가 갈고리에 걸려 있고 소피는 동이에 담겨 있고 오라버니는 발골을 하고 있었어요. 언니를 보고 오라버니는 "너였구나" 했는데 되게 슬퍼 보였어요. 오라버니가 "왜 그랬어"했는데 언니는 "난 너의 운명이며 악몽"이라면서 "너의 집은 없어졌어. 어디서도 넌 살 수 없을 거야"라고 했어요. 언니는 오라버니에게 "왜 그랬어"라고 했어요. 오라버니는 권세를 누리려고 언니의 가족을 죽이고 왕을 궁에 유폐시키는데 동조하고 국새를 이민족에게 넘겨준 자들이 가문을 이어받을 자식들 자랑을 하더라고 했어요. 자랑은 시기와 질투를 대가로 하는 거라고. 그들이 망하게 한 게 자기 가문인지 왕조인지 나라인지 보게 해 줄 거라고 했어요. 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그랬더니 오라버니가 단도를 언니 주면서 소매를 걷었어요. 손목을 그으면 죽는다고. 여기서 죽으면 소피인지 사람 피인지 모를 거라고. 언니가 단도를 오라버니 손목에 대는 걸 보고 뒤쳐 나갔어요. 절 보고 오라버니는 소매를 내렸고 둘 다 아무 일 없는 척했어요. 그 담부턴 언니가 안 보였어요. 오라버니에게 그게 다 무슨 말이었는지 물어봤어야 했을까요? 그땐 오라버니랑 언니가 너무 무서워서 다 잊어버리려고만 했어요.]

 

- [오라버니는 절 다른 곳에 시집보낼 동만만 도련님을 잡아 두려고 했대요. 안 그러면 제가 도련님 못 잊을 거 같아서. 그런데 도련님이 감옥에서 자결해 버렸댔어요. 혹시 큰 벌을 받을까 봐 지레 겁먹고서요. 저한테 사랑했다고 전해달라고 하고서.] 

 

- 그 애는 제 오라비가 소를 잡던 칼로 손목을 그어 죽었다. 오래 걸리는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을 것이다. 유서를 다 읽고 나서야 생각났다. 나는 그 애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그 애의 글씨를 모른다. 누가 이 유서를 대필했거나 조작했어도 모를 일이다. 

 

- 그녀의 오라버니는 내 손가락을 잘랐다. 살아있는 동안 글을 쓸 때마다 잘린 자리가 보이도록. 볼 때마다 그의 누이를 잊지 못하도록. 내가 무엇을, 누구를 망쳤는지 평생 상기시키려고.   

 

- <혁명가들>

 


 

 

 

우음(偶吟) by 한켠

왕의 총애하는 후궁의 딸로 태어나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로 길러진 '나'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왕 노릇에 회의를 느낀다. 어느 날 사형장에서 시체를 해체해서 먹고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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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죽음과 함께 태어났다. 나를 잉태할 때 어머니는 꿈을 꾸었다. 커다란 검은 새가 어머니의 흑운 같은 오발(烏髮)에 내려앉았다가 진주뒤꽂이와 백옥비녀로 장식한 머리채에 발이 걸려 날아가지 못하고 날개를 퍼덕이며 크게 울었다. 태몽을 전해 들은 부왕은 거북의 등딱지를 구워 조상신의 뜻을 물었다.

 

- 새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로 울었다. 나는 울지 않는 새를 골랐다. 유모가 새의 속깃털을 잘랐다. 날개가 있어도 날아가지 못하도록.

 

-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된 뒤로는 유모가 지어준 장식 없는 흰 비단옷을 입고 관(冠)을 쓰지 않은 머리에 관(棺) 대신 까마귀를 얹고 새벽마다 왕비께 문안을 올렸다. 어머니를 닮아 피부가 백옥같이 희고 허리가 버들처럼 가는 나에게는 유모가 지어 준 폭넓은 옷자락이 어울리지 않았다. 

 

- 내가 왕위에 뜻이 없음을 보이고자 관을 쓰지 않고 흰 옷을 입어도 왕비는 늘 마지막에서야 마지못해 내 문안을 받았다. 새파란 새벽바람을 맞으며 입술을 물고 왕비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중궁전의 서 환관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 "한갓 미물도 왕이 되실 분을 알아보고 복종하는 것이옵니까. 날개 있는 새가 날아가지 않고 머문다니 신묘한 일 아니옵니까."

"서 환관."

"네."

내게 존칭을 붙이지 않는 저의가 흉악했다.

"혀 밑에 독을 감춘 채 입술에 꿀을 바르고 말하지 마라. 깃을 잘랐으니 날지 못하고 나를 만만히 보니 내 머리꼭대기에 앉아있는 것이다. 미물도 아는 걸 네가 모를 리 없지 않느냐."

 

서 환관에게는 시취가 배어 있었다. 머리 위의 까마귀가 서 환관 쪽으로 날개를 내리고 꼬리깃을 펴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내 후원의 세떼는 종종 죽음의 냄새를 좇아서 환관을 따라다녔다. 서 환관은 내게 궁궐 밖 사형장에 사는 아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와 한날한시에 태어난 미친 여자의 아들. 

 

- "그 아이를 만나보고 싶구나."

"언젠가는 만나실 것이옵니다."

"무슨 뜻이냐."

서 환관은 검붉은 잇몸을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을 뿐 답이 없었다.

 

- "서 환관, 나는 내 앞날을 모른다. 왕이 되지 못 한 왕자들의 운명은 조상신이 아니라 새로운 왕에게 달려 있으니까. 그런데 이것만은 약조하지. 내가 널 죽일 거다."

"그러시진 못 하실 것이옵니다.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비밀을 지키느라 너무 많은 힘을 들이기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법이옵니다."

"나에게 비밀이랄 게 있겠느냐."

"마음이 있는 곳에 비밀도 있사옵니다."

 

- 왕의 아이가 자라서 글자 대신 말 대신 그림을 그리게 한 날, 죽은 아기의 어미는 궁 밖으로 끌려나가 손이 잘린 채 죽었다. 아기가 죽었던 그곳이었다. 내 어머니는 내 비밀을 누설할 수도 있는 자를 원치 않았다.

 

- 그날 밤을 새워 유모가 그렸던 그림을 글로 옮기고 주머니를 뜯어 책을 장정했다. 내가 지은 죄로 죽은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붉은 비단으로 감산 책도 쌓일 것이다.

 

- 유모가 죽은 후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라에서 제일 검을 잘 다룬다는 무인이 내 스승이었다. 지금까지 내 스승들이 그랬듯이 머지않아 사형당할 운명이었다. 내 스승들의 죄목은 모두 하나였다. 역모. 내 어머니는 늙은 왕이 총애하는 후궁. 다른 후궁들은 어떻게든 내 주변을 모해하고 내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려 했다. 스승은 자신의 미래를 알면서도 나를 가르치라는 왕의 명령에 충성했다. 

 

- "스승님, 저는 장검을 배우지 않겠습니다. 전쟁에 나가 선봉에 서서 장검을 휘두르는 건 왕의 일입니다. 단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어디를 찌르고 베야 고통 없이 빨리 죽을 수 있는지도."

"그런 건 왜 배우시려는 것이옵니까. 암살이라도 하시려는 것이옵니까."

"제가 자결해야 할 일이 생길까 봐 그렇습니다." 

 

- 스승은 내게 가르쳐줬던 대로 심장에 단도를 꽂아 자결했다. 대장군으로서 국경에 성벽을 쌓아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왕께 읍소했으나 정적들은 그가 국가를 불안케 하여 왕의 선정을 가린다고 모해했다. 그를 벌해달라며 보란 듯 머리를 바닥에 찧어댔다. 그들의 이마에는 피 한 방울도 맺히지 않았다. 

 

- 유모도 죽고 스승도 죽은 내 곁에서 죽지 않는 목숨은 까마귀 뿐이었다. 무리에 왕이란 게 없으니 왕이 되려는 새도 왕의 곁에서 권력을 탐하는 새도 왕의 아들을 질시하는 새도 없었다.

 

- "까마귀를 다른 말로 효조(孝鳥)라고 부르기도 한다. 알고 있느냐."

"예, 아바마마."

"어미가 60일 동안 새끼를 먹이면 새끼가 자라 60일 동안 어미를 먹이는, 효심이 지극한 새라서 그렇다."

 

- 잘못 아셨다. 까마귀는 불효조였다. 다른 새들은 둥지를 벗어나면 어미로부터 벗어나 날아가 버리지만 까마귀는 다 커서 둥지에서 나간 후에도 어미에게 먹이를 받아먹었다. 어미나 새끼나 덩치도 비슷하고 까매서 분별할 수 없으니 어리석은 사람들이 새끼가 어미에게 반포지효를 행한다고 잘못 본 것이다. 

 

- "출궁 한다고 아무도 널 찾지 않을 것 같으냐."

"왕이 된다고 어미를 지킬 수 있겠사옵니까. 아바마마께서는 왕이신데도 후궁과 왕자들을 지키지 못 하시잖사옵니까. 소자가 어미를 살리기 위해 왕위에 오르면 왕권을 지키기 위해 아바마마의 다른 아들들을 모두 죽여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내 어머니가 입궁하기 전 총애하셨던 후궁의 아들에게도 아바마마는 똑같이 말씀하셨을까.

 

- "지킨다는 게 무엇이옵니까.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옵서 소자를 지키기 위해 어의와 의녀들과 유모를 죽이셨사옵니다. 소자가 왕이 되면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신하들과 백성들을 죽여야 하옵니까. 왕이 하는 일이란 게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거라면 백정과 왕이 다를 게 무엇이옵니까."

"백정은 백정의 운명을, 왕은 왕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게 다르다."

"소자는 왕으로 태어나지 않았사옵니다. 운명은, 거스를 수 있는 것이옵니까."

 

- 빈한한 집에서 태어나 궁녀로 입궁하여 후궁이 된 어머니에게는 부왕의 총애만이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백단향수에 목욕을 하고 사향을 패용하고 꽃차를 머금어 입에서 향이 나게 했다. 부왕이 처소에 들르면 늘 하얗고 갸름한 버선발로 달려 나가 백옥 같은 이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어머니가 지밀에 있는 동안 어머니의 내실에서 어머니의 옷을 입고 백옥이 장식된 흰 비단 허리띠로 잘록하게 허리를 조이고 어머니처럼 머리를 틀어 올려 진주잠을 꽂고 백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연지를 발랐다. 나는 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하나뿐인 아이. 거울 속의 나는 어머니와 닮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지친 기색으로 돌아온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러시면 우리 모자는 살 수가 없습니다."

 

- "어마마마, 욕심을 버리세요. 어마마마를 지켜 드릴게요. 우리 궁을 떠나서 살아요."

"이 어미를 죽이고 나가세요."

 

-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푸는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어릴 적 봤던 모습보다 수척하고 파리했다. 꽃은 시들고 사람은 늙는다. 어머니는 황혼이 오기 전 낮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었다.

 

- "우습지 않습니까. 왕이 될 재목이라 왕이 되는 게 아니라 어미가 총애받으니 왕이 되는 거라면."

"누가 왕이 되건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왕 같은 건 없어도 되지 않사옵니까."

 

- 왕비의 가문은 대대로 왕의 외척이 되어 왕을 조종했다. 그런 꼭두각시 왕들이 죽어서 조상신이 된다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새는 자기네들 뜻대로 소리 내는데 사람이 멋대로 새가 운다고 하는 것처럼 아무 뜻 없이 갈라지는 귀감에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붙을 뿐이다. 그걸 조상신의 뜻이라고들 한다. 

 

- "신관이 말했겠지요. 인간의 뜻이었습니다. 어마마마, 욕심을 버리세요. 소자는, 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궁 안에서 인형으로 사느니 궁 밖에서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으로요."

어머니께 자년 자시에 태어난 아이가 또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유모를 죽였듯 그 아이를 죽일까 봐. 서 환관이 그 아이를 왕으로 앉히려는 흉계에 어머니가 농락당할까 봐 아무것도 하지 마시라고 당부할 뿐이었다. 

 

- "나는 네게 줄 게 없다."

"소녀는, 후궁이 될 수 없다면 지밀의 궁인이 되어서라도 마마께서 편히 주무시는 걸 도와 드리고 싶사옵니다."

"죽으면 편히 잘 수 있겠지. 너의 연심을 내가 알겠다. 이만 가 보거라."

 

- 역심이든 욕심이든 연심이든 마음이 있으면 비밀도 있다. 연심을 품은 궁녀가 총총걸음으로 나갔다. 나는, 계속 비밀을 품고 남들처럼 살 수 있을까.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품으면 내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왕자의 외숙이 진짜 세자를 죽이려 방화했다. 그가 그곳에 굳이 가서 불을 놓은 이유는 그 아이가 조카 대신 세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논리는 없었다. 겁박당한 왕, 잔인한 고문, 위증과 밀고. 외숙은 역적이 되었다. 부왕은 총빈이 연좌제에 얽히기 전 입 맞추며 입에서 입으로 독약을 먹여 절명케 했다. 

 

부왕은 내게 독약을 주었다. 어머니를 죽인 독이었다. 혹시라도, 삶보다 죽음이 더 편해질 순간이 오면 쓰라고 했다. 그건 부왕 자신에게도 해당되었다. 왕위를 물려준 상왕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결이든 암살이든 죽어야 했다. 내가 살아서 궁 밖으로 나간다면 붉은 비단으로 장정한 책에 죽은 부모의 이야기도 써야 하리라. 

 

너였구나. 나와 한날한시에 태어난 아이. 그의 얼굴에는 부왕의 이목구비가 없었다. 너도 어미를 닮았구나.

 

-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프겠구나, 너도."

어머니의 억울함을 항변하던 내게 그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다정하게 '너'라고 했다. 너의 손을 잡고 널 보듬어 안고 위로받고 애도하고 싶었다. 너와 나는 어미를 잃은 아이들이었다. 마음과 달리 말하느라 입술이 떨렸다. 

"그렇게까지 왕이 되고 싶으셨사옵니까."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왕비와 서 환관이 너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들의 인형, 망국의 폐주가 될 것이다. 내가 지어야 할 죄를 네가 짓고 네 몫의 속죄를 내가 할 것이다.

 

- "내가 너만은 살려 주겠다."

 

- 남은 보석은 후원에 뿌렸다. 까마귀들이 반짝이는 것들을 물고 날아갔다. 내가 떠나면 아무도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지 않겠지. 까마귀들은 궁을 떠나 궁의 물건들을 나라 안 여기저기 나뭇가지 사이 돌 틈에 숨기겠지. 언젠가 누군가가 까마귀가 숨긴 왕실의 보석을 찾아 궁에 올지도 모르겠다. 왕의 물건을 증표로 가지고 왔으니 왕의 후손이 확실하다며.

 

- 죽은 왕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입속에서 불러보았다. 입안에서 터지던 연시처럼. 흘러나오던 달큰한 과즙처럼. 그들은 머리가 터지고 뇌수가 흘러나오고 살이 터지고 체액이 흘러나오도록 맞아 죽었다. 자식이 없던 왕비의 질투와 증오는 박석보다 단단하고 새벽바람보다 차가웠다. 

 

두 손을 모아 절을 했다. 까마귀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준다고 했다. 궁에서는 조상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저 까마귀들이 죽은 왕자들의 영혼을 조상신들에게 데려가 주기를 빌었다. 그리하여 궁에서 거북을 구워 조상신의 뜻을 물을 때 죽은 왕자들이 답하게 해 달라고.

 

- 까마귀를 자오(慈烏)라고 했다.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새라 하여 어머니를 뜻하는 자(慈)를 쓴다. 내가 먹이를 주었으니 자오들이 내 어머니의 혼을 위로해 주기를 원했다. 자오의 자(慈)는 자비의 뜻도 있었다. 나는 유모와 궁녀와 스승과 부모와 모든 죽은 이들과 너를 사랑하고 가여워했다. 궁에 살던 기절,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다. 나 대신 죽은 궁녀처럼 네 어미 대신 죽은 신녀처럼 널 나 대신 궁에 두고 나왔다. 너와 나는 자년 자시에 태어났다. 내가 나라를 망칠 운명이라면 너도 그러했다. 쥐든 까마귀든 결국 시체를 먹고사는 짐승이다. 너와 나는 한날한시에 태어났으니 네가 살아있으면 나도 그러하고 내가 죽으면 너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다시 만날 날도 있을 것이다. 

 

내가 왕이 되었다면 부왕도 어머니도 죽지 않았을까. 

 

- 집 없이 천하를 주유하며 달이 없는 밤에는 사형장에 오곤 했다. 그곳에서 너의 삶을 보았다. 백옥 같은 이마에 계간(鷄姦)을 뜻하는 글자를 새기고 죽은 요요한 환관들을 보았다. 반라의 몸으로 형을 받은 시신의 등에는 내가 썼던 문장들이 꿀로 쓰여진 채 굳어 있었다죽은 왕자들에게서 네가 망국의 폐주가 되라란 예언을 들으려고 죽인 신녀들을 보았다. 고작 그런 예언을 들으려고 궁에서는 점점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다. 세금을 내느라 가난해진 부모들은 큰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갓난아기를 굶겨 죽였고, 어린애들을 기르기 위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들을 환관으로, 신녀로 궁에 보냈다. 너는 선왕이 그랬듯 어제 충신이라며 곁에 두었던 신하를 오늘 역적이라며 처형했다. 죽은 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밀고자에게 상으로 내렸다. 고변이 끊이지 않았다. 역모, 역모, 역모. 너는 죽이고 또 죽였다. 너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대비와 서 환관은 극렬히 나를 찾았다. 

 

- 아무도 나의 비밀을 모른다. 나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붉은 비단으로 감싼 책에 썼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 장이 서면 붉은 비단책을 팔았다. 궁 안의 내밀하고 참혹한 이야기들이 저자로 퍼져 나갔다. 왕은 미친 여자의 아들. 왕은 환관들과 잔다네. 왕은 망국의 폐주가 될 거라네. 까마귀가 반짝이는 것을 물어 나르듯 백성들의 입이 궁의 비밀을 은밀히 실어 날랐다. 입에서 입으로 독약을 옮기듯이. 너는 그 혀들을 잘랐다. 무섭고 두려웠구나, 너도.  

 

- 너는 이 혀들도 자를 것이냐. 쥐의 주둥이와 까마귀의 부리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새로운 왕을 기다리는 저 나약한 입들을. 내 혀도 자르고 싶으냐. 내가 그림을 가르쳐 손이 잘려 죽은 유모처럼 내가 쓴 글을 몸에 덮은 환관들이 죽었다. 내가 쓴 책을 읊은 혀들이 말을 잃었다. 너는 나를 증오하느냐. 그래서 네가 날 찾지 않고 대비와 서 환관이 날 찾도록 두는 것이냐.

 

- 까마귀는 사람을 알아보고 은혜를 갚는 짐승이었다. 사형장에서 왕자들의 조장을 치른 날 이후로 내가 가는 곳마다 까마귀들이 따라왔다. 나에게서도 시취가 나는구나. 망령의 목소리처럼 한스럽게 울던 까마귀가 나무구멍에서 어머니의 진주뒤꽂이와 백옥비녀를 찾아 내게 떨어뜨렸던 날, 나는 흑운 같은 머리채에 날개를 부러뜨린 까마귀를 얹고 입궁했다. 

 

- 검은 밤, 잠이 오지 않는 밤, 까마귀가 보이지 않는 밤, 너의 침소에서 너를 안았다. 너는 미친 왕도 폭군도 아니었다. 그냥 피곤한 사내였다. 산해진미가 주지육림을 이룬다는 궁에서 여위어 광대가 도드라지는 네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핏기 없는 네 입술은 거칠고 따듯했다. 내 혀에서 네 혀로 독약이 굴러갔다. 연시처럼. 네가 뱉었다. 다시 네 입 안으로 혀를 넣었다. 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너였구나."

 

- 너는, 대비와 서 환관의 쥐가 되어 살면서 왜 죽지 않는 것이냐. 이렇게 죽은 듯이 살 거라면.

"네가 살아있으면 나도 살고 내가 살아 있으면 너도 살 테니까. 우린 운명이 같아."

 

- 너와 나는 서로가 살아야 할 삶을 맞바꿔 살았다. 그러면서도 함께 망국의 운명을 향해 가고 있었다. 

 

- "어떻게 하면 너를 다시 볼 수 있겠느냐. 네가 돌아오려면... 나는 어찌해야 좋겠느냐."

네가 왕의 말투로 말했다. 날 살려주겠다며 내 손을 잡고 궁 안을 달리던 너의 손을 놓았다. 이제 네가 내 비밀을 안다. 나에겐 이제 비밀이 없다. 내가 널 살려주겠다. 

 

- 너는 다음날 처음으로 어명을 내렸다. 나를 찾지 말라는. 아무도 네 어명을 듣지 않았다. 모두들 궁 밖에서 나를 찾았다. 

 

- 너는 이전처럼 밤에 신녀를 품고 아침에 거북을 구워 점을 쳤다. 갈라진 귀갑이 말했다. 죽은 내가 장가들어 얻은 아들이 입궁하여 세자가 될 거라고. 너를 이 궁에 데려왔던 그 밤처럼 서 환관이 사내아이를 데려왔다. 붉은 비단으로 장정한 책을 내 유품이라며 들고 왔다. 너는 책을 펴 보았다. 백지 뿐이었다. 너는 쓰게 웃으며 궁의 물건이 분명하니 세자로 책봉하겠다고 했다. 

 

사가에서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사는 삶은 어땠을까. 집을 두고 정착하여 편히 잠드는 삶은 어땠을까. 너를 궁에 두고 내가 죽인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 비밀을 품고 사는 삶은.

 

- 나는 단도를 품고 흰 비단옷을 입고 자객이 되었다. 네가 환관의 등에 꿀로 따라 썼던 내 글들을 가만가만 읽어주었다. 내 유모와 궁녀와 스승과 어머니와 부왕의 이야기들을. 네가 눈을 떴다.

"너였구나."

"그래, 나야."

 

- "... 너를 그리워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왜 나를 찾지 않았지?"

"네가 그들에게 잡히지 않기를 원했다."

 

- 내가 너에게 악심을 품을 수 있을까. 나 대신 왕이 되어 무위함으로써 망국의 군주가 될 너에게. 내가 왕이 되었다면 하려 했던 일은 왕이 되지 못하고 궁에 돌아왔기에 할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나 대신 왕이 되어 이 궁에서 그들의 쥐가 되어 주었기에. 

 

- 문이 닫히고 내실에는 너와 나 둘만 남았다. 밖에는 자객을 살해하고 왕의 시신을 불태울 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 너와."

 

- 이제는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 우리는 운명이 같아서 내가 살면 너도 살 것이다. 보이지 않더라도, 검은 밤의 까마귀처럼 나는 네 곁에 있을 것이다. 검은 벽 붉은 책이 환하게 타올랐다. 

 

- 그가 데려와 세자가 된 아이를 도망치지 못하게 끌어안고 같이 타 죽었다고 했다. 내가, 죽였다. 어린 세자를. 나 대신 왕이 될 아이를.

 

- 스승의 뜻대로 국경에 성벽을 쌓았더라면 이민족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을까.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까. 

 

-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왕이 바뀌어도 해와 달은 뜨고 지고 꽃은 피고 지는데. 징병도 군납도 전쟁도 없이 평화롭게 왕이 없는 궁을 다른 나라의 왕에게 내줬을 뿐인데. 왕의 성씨가 바뀌었을 뿐인데. 이민족의 왕은 이전 왕조의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세금을 줄여 주고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 너와 네가 망친 게 이 나라가 맞는가. 망국이라는 게 무엇인가. 너와 나는 결국, 자신을, 서로를 갉아먹고 쪼아 먹은 것인가. 그 많은 사람들을 죽여가며 살아낸 결과가 이것인가. 

 

- 새로운 왕의 나라에서 너는 죽은 소를 발골하고 있었다. 돌고 돌아 결국 짐승의 시체를 해체하는 백정이 되었다. 너의 새로운 가족을 보았다. 백정인 양부와 누이동생. 네게는 처음 가져 보는 아비와 처음 해 보는 오라비 노릇이었다. 나와 함께 가자, 어디로든, 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너는 새로운 나라에서 말단 관리가 되었다. 천대받는 백정이 아니라 번듯한 관리가 되어 누이에게 너와 내가 갖지 못했던 삶을 주고 싶다고 했다. 짝을 짓고 새끼를 낳아 기르는 짐승 같은 삶. 

 

- 그러나 너의 누이는 옛 왕조 시절 귀족집안의 도련님을 연모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의 역도들이었다. 입으로는 귀족도 평민도 평등하게 시험을 보고 공정하게 벼슬하길 원하나 속마음으로는 이민족의 왕 아래서 자기들끼리 권세를 누리고 싶은 자들. 진정 평등을 원한다면 궁을 불태우고 왕을 죽여야 했다. 혀 밑에 독을 감춘 채 입술에 꿀을 바른 위선자들. 나는 그들을 네게 밀고했다. 너는 네 누이의 도련님을 체포했다. 나를 연모했던 그를.

 

- 내가 너의 누이를, 너의 가족을 죽였다. 

 

- "왜 그랬어."

"나는 너의 운명이며 악몽이야. 집은 없어졌어. 이제 어디서도 살 수 없어."

너는 소매를 걷었다. 단도가 손목에 닿았다.

"내가 죽고 싶지 않은 게, 헛된 꿈일까."

"어찌하고 싶으냐."

"살고 싶어... 너와, 같이, 살 수는 없을까."

 

- 함께 가자, 어디로든. 아무도 우릴 찾지 않는 곳으로. 왕도 없고 사람도 없고 쥐와 까마귀와 망혼들만이 있는 곳으로. 더 이상 무서운 이야기를 쓰지 않고 연시만을 쓰며 살자. 붉은 하늘의 까마귀 떼를 따라가다 보면 북쪽에 일 년 내내 눈이 쌓인 설산이 있다고 한다. 

 

- 자오(慈烏)가 내장을 쪼고

울부짖던 폭포가 말을 잃은 빙벽을 오를 때 한아(寒鴉)가 살점을 뜯는 곳.

망자의 설부(雪膚)를 쓰고 고드름 아래를 지나

뼈를 짚고 설원을 가로질러

척추로 기둥을 세우고 갈빗대로 서까래를 걸고 살가죽으로 지붕을 덮어

집을 짓고 글을 짓고 지은 죄를 싯어 밥을 짓고 먹고 살자

감나무를 심어 심장처럼 붉은 연시를 나눠 먹고

어린 짐승들처럼 서로를 품에 안고 

달고 긴 잠을 자자

깨지 않을 꿈을 꾸며

 

- 나의 운명이며 악몽

나의 연시 속 연인이여 

 

 

- <우음 偶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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