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집 2

일루젼 2024. 4. 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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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  햇살과나무꾼

빌헬름 페데르센 / 카이 닐센 / 루이스 모에 / 에드먼드 뒤락
출판 : 시공주니어 
출간 : 2010.08.15 


       

시공주니어에서 출간한 <안데르센 동화집>은 전 7권으로 친숙하고 유명한 작품부터 다소 생소한 작품까지 다양하게 수록한 전집이다. 

안데르센의 동화를 다시 읽어보기로 했을 때, 여러 판본들 중 이 책으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삽화. 현대에 다시 그려진 삽화들도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당시 수록되었던 삽화가들의 삽화를 중심으로 읽어보고 싶었다. 매 권마다 조금씩 다른 삽화가들이 실려 있는데, 이번 2권에는 개인적으로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카이 닐센과 에드먼드 뒤락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좋았다.

 

<그림 동화>로 널리 알려진 그림 형제의 민담집이 섬뜩하고 잔혹하다면, 안데르센의 동화는 자학적인 골계미가 돋보인다. -그렇다 해도 전자에 비하면 기본적으로는 아이들을 주된 독자층으로 가정하고 '창작한' 이야기들이므로 낭만과 순수가 기본 바탕이다.- 후반부에 덧붙여진 강무홍 씨의 해설에서도 각 이야기에 녹아든 안데르센의 자전적인 면모들을 살펴보고 있으니 마지막 장까지 꼼꼼하게 읽어보시길 권한다.

 

시공사가 아닌 시공주니어에서 발간된 책이지만, 사실 아주 어린아이들이 읽기에는 글줄이 빼곡하다. 어려울 법한 단어들도 꽤 있고 묘사도 은유적인 경우가 종종 있어 초등학교 고학년은 되어야 즐겁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스스로 책을 선택해 읽는 친구들이라면 나이에 관계없이 도전해도 좋다.-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스스로를 굉장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어른'은 때로는 아이의 천진함과 순수함을 잃은 이로 그려지고, 또 때로는 사소한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현명함과 성숙함을 갖춘 이로 그려진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완벽하게 어느 한쪽의 면만 가질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지 않던가. 

 

그런 순간들에 내 안의 어린아이와 다시 마주해 보는 초대장으로 <안데르센 동화집>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아이였다면 미처 읽어내지 못했을 현실의 부조리와 서글픔을 선명히 보면서도, 앞으로도 지켜주고 싶은 따스함과 낭만을 되찾을 수 있기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보내는 선물이 될 수 있기를.       

 


   

 

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내 삶에서 나왔다. 
상상으로만 만들어 낸 인물은 한 명도 없다. 
그들은 모두 내가 아는 사람이거나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람들이다. 

- H.C. 안데르센

 

 

안데르센의 초상 / 에드먼드 뒤락 <눈의 여왕>

 

 

 

- 안데르센의 동화가 발표되기 이전의 문학 작품들은 대부분 옛이야기였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고, 나아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오늘날의 동화를 탄생시켰다. 안데르센 동화가 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야기 속 나이팅게일은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던 오페라 가수 예니 린드를 가리키며, 작품은 예니 린드에게 바치는 찬사와도 같다. 안데르센은 예니 린드를 여인으로서 사랑하고, 예술가로서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다. 안데르센은 결국 사랑에 실패하지만, 작품으로 빛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 작품 속에서 전나무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큰 기대와 화려한 운명을 좇으며 살다가 결국엔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파멸에 이른다. 언제나 '신분 상승'과 '출세'를 꿈꾸고, 바라던 대로 상류사회에 들어서지만 늘 이방인처럼 주변을 서성였던 안데르센의 우울하고 외로웠던 모습이 반영된 작품이다. 

 

 

에드먼드 뒤락 <나이팅게일>

 

 

빌헬름 페데르센 <눈의 여왕> / <나이팅게일>

 

 

 

 

 

- 꽤 늦은 어느 겨울 저녁이었습니다. 주위 산들은 눈에 덮여있었지만 하늘에는 달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달빛은 북유럽의 흐린 겨울 낮만큼 밝지요. 아니, 어쩌면 더 밝을지도 몰라요. 이탈리아의 공기는 투명하고 상쾌하며 하늘은 맑고 드높으니까요. 그에 비해 북유럽에서는 차가운 잿빛 하늘이 우리를 짓누른답니다. 언젠가 우리의 관을 짓누를 그 차갑고 축축한 땅으로 말이지요. 

- 겨울에도 장미꽃이 몇천 송이나 피어 있는 대공의 궁전(팔라초 피티를 가리키며, 이 궁전의 정원을 보볼리 정원이라고 한다) 정원에 누더기를 걸친 어린 소년이 온종일 앉아 있었습니다. 소년은 아름다운 얼굴에 슬픔이 어린 잔잔한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그림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얼굴이었지요. 소년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지만 아무도 돈 한 푼 주지 않았습니다. 날이 어둑해지고 정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문지기가 소년을 쫓아냈습니다. 얼마 뒤 소년은 아르노 강에 걸린 다리 위에 서 있었습니다. 소년은 맞은편에 놓인 훌륭한 대리석 다리와 자기가 서 있는 다리 사이의 강물에 비치는 반짝이는 별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답니다. 

- 청동 멧돼지는 우피치 궁(우피치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대표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옆의 둥근 지붕이 덮인 회랑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곳은 사육제(참회 기간인 사순절 전에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가장무도회와 행렬을 즐기는 축제) 때 귀족들이 모이던 곳이랍니다. 

- "자, 나를 붙잡아! 꼭 잡고 있어야 돼! 이번엔 계단을 올라갈 거니까."
소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겁이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했지요.

- 멧돼지는 기다란 복도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소년도 와 본 적이 있어서 잘 아는 곳이었습니다. 벽에는 갖가지 그림이 걸려있고 군데군데 입상과 흉상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모든 미술품이 대낮처럼 밝고 아름다운 빛을 받고 있었지요.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옆에 있는 방문이 열리는 순간 나타났습니다. 그 방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소년도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 밤은 특별히 더욱 아름다웠답니다.

 

- 그 방에는 벌거벗은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오직 자연과 가장 위대한 대리석 조각가만이 빚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여인이 아름다운 팔다리를 움직였습니다. 여인의 발치에서는 돌고래가 팔딱거렸습니다. 여인의 눈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광채가 빛나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이 여인을 '메디치의 비너스'라고 불렀답니다. 비너스 양옆에도 대리석으로 만든 훌륭한 남성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칼을 갈고 있는 조각상으로 흔히 '칼 가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한쪽은 맞붙어 싸우는 두 용사의 조각상이었습니다. 칼은 날카롭게 갈렸고, 두 용사는 아름다운 여신을 두고 서로 싸웠습니다.

- 소년은 너무 눈이 부셔서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사방의 벽이 화려한 색으로 빛나고 모든 것이 살아 움직였으니까요. 또 거기에는 두 가지 모습으로 표현된 비너스가 있었습니다. 티치아노(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가 마음에 그리던 풍만하고 정열적인 세속의 비너스('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를 가리킨다)였지요. 아름다운 두 여인! 이 여인들은 보드라운 깔개 위에 아름답고 미끈한 몸을 뻗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가슴을 들썩이고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탐스러운 고수머리가 둥그런 어깨에서 물결쳤습니다. 커다란 검은 눈은 뜨거운 생각을 품고 있었지요. 하지만 어떤 그림도 감히 액자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습니다. 미의 여신도, 용사들도 칼 가는 사람도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 사람들은 불안해하면서도 희망을 갖고 서 있거나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 앞에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이 그림을 가장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청동 멧돼지도 그 앞에 가만히 서 있었고요. 그때 어렴풋한 한숨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그림 속에서 난 소리일까요, 아니면 멧돼지의 가슴속에서 난 소리일까요? 소년은 웃고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습니다. 이윽고 멧돼지는 소년을 태우고 그 자리를 떠나 넓은 복도를 달렸습니다. 

- "친절한 멧돼지야, 고마워! 너에게 행복이 깃들기를!"
소년은 이렇게 말하고 청동 멧돼지를 토닥여 주었습니다. 멧돼지는 소년을 태우고 또각또각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 청동 멧돼지가 말했습니다.
"고마워! 너에게도 좋은 일이 있길 바랄게! 나는 너를 도왔고, 너는 나를 도와주었어. 나는 천진난만한 아이를 태웠을 때만 달릴 수 있지. 더구나 좀 전에 보았듯이, 나는 성모 그림 앞에 있는 등잔불 밑도 지나갈 수 있단다. 나는 너를 어디든 데려갈 수 있지만 딱 하나 성당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 하지만 너만 곁에 있어 주면 문이 열린 성당 안을 들여다볼 수는 있어. 제발 내 등에서 내리지 말아 줘. 그럼 난 생명 없는 몸으로 포르타 로사에 붙박여 있어야 해."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게, 친절한 멧돼지야!"
소년이 이렇게 말하자, 멧돼지는 피렌체 거리를 날 듯이 달려 산타 크로체 성당(15세기 중반에 지어진 성당,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고딕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앞 광장에 닿았습니다. 

- 성당의 커다란 정문이 활짝 열리고 제단의 불빛이 인기척 없는 쓸쓸한 광장까지 뻗어 나왔습니다. 특히 왼쪽 복도에 있는 훌륭한 무덤에서 유난히 신비로운 빛 한 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별 몇 천 개가 빛의 띠처럼 무덤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무덤을 상징하는 문장인 푸른 바탕의 붉은 사다리는 불타오르는 듯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갈릴레이의 무덤이랍니다. 매우 소박한 기념비였지만, 푸른 바탕의 붉은 사다리는 학문과 예술에 걸맞은 의미심장한 상징이지요. 예술의 길은 늘 불타는 사다리를 지나 천국에 닿으니까요. 정신계의 모든 예언자들은 엘리야(기원전 900년경의 예언자 엘리야는 자신이 맡은 일을 끝낸 뒤 하늘에서 내려온 불의 수레와 불의 말을 타고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처럼 천국에 올라갈 것입니다.

- 갈릴레이의 무덤 맞은편에 미켈란젤로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 위에는 미켈란젤로의 흉상과 조각 그림·건축을 나타내는 세 개의 조각상이 있다. 그 옆에는 단테의 무덤이 있다(유해는 라벤나에 묻혀 있다). 이 무덤 위에는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단테의 거대한 조각상을 가리키며 서 있고, 시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죽은 단테를 그리워하며 울고 있다. 거기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월계관과 리라와 가면이 장식된 알피에리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 위에서는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울고 있다. 이 위인들 무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무덤이다. 
 
- 성당 오른쪽 복도에 있는 훌륭한 대리석 관 위에도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그 조각상들도 하나같이 살아 있는 것 같았지요. 이쪽에는 미켈란젤로가, 저쪽에는 월계관을 쓴 단테(1265~1321,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으로, <신곡>의 작가)가 서 있었습니다. 알피에리 (1749~1803, 이탈리아의 비극 시인)와 마키아벨리(1469~1527, 이탈리아의 정치가, 역사가, 정치 이론가)도 나란히 서 있었고요. 이탈리아의 자랑인 이 위인들이 바로 이곳에 잠들어 있답니다. 이보다 훌륭한 성당이 있을까요? 비록 피렌체 대성당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아름다운 성당이랍니다.

- 문득 어둠 속에서 위인의 조각상들이 대리석 옷을 사락거리는 것 같더니 뒤이어 고개를 들어 노래와 음악이 흐르는 환하고 아름다운 제단을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제단에서는 흰옷을 입은 소년들이 황금 향로를 흔들고 있어 짙은 향내가 텅 빈 광장까지 흘러나왔습니다.
소년이 눈부신 빛 쪽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바로 그때 청동멧돼지가 달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소년은 멧돼지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지요. 바람이 귓가에서 윙윙 울어 댔습니다. 

 

- "뚝 그쳐! 질질 짜는 그 얼굴을 확 부숴 버리기 전에!"
여자는 이렇게 말하더니 숯 항아리를 번쩍 쳐들었습니다.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웅크렸습니다. 그때 옆집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이 여자도 숯 항아리를 안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펠리치타! 애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이 애는 내 애예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도 있다고요. 당신도 마찬가지야, 자니나!"

- 가엾은 소년은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려 산타 크로체 성당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이 거대한 성당 문이 저절로 열렸던 일을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지요. 성당 안은 온통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오른쪽의 첫 번째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의 무덤이었습니다. 소년은 이내 큰 소리로 흐느껴 울었습니다. 사람들이 오가고 미사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소년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었지요! 그림이 끼워진 커다란 금빛 액자 위쪽 한구석에는 월계수 잎이 붙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록 잎 사이에는 죽음을 애도하는 기다란 검은색 리본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 젊은 예술가는 바로 며칠 전 세상을 떠났답니다.


- <청동 멧돼지>

 

- 여자아이는 내 동생이 될 아이였어요. 더없이 아름답고 별처럼 반짝이는 아이였지요. 어머니의 부드러운 눈도 이 아이의 눈과 견줄 수 없었답니다. 아나스타샤, 이것이 여자아이의 이름이었어요. 이 아이가 내 여동생이 된 까닭은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우정의 맹세를 했기 때문이에요. 여자아이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젊은 시절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결한 아가씨가 보는 앞에서 의형제를 맺었어요. 나는 세상에 다시없을 아름다운 우리 민족의 관습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답니다.  

- 이렇게 해서 여자아이는 내 여동생이 되었지요. 여동생은 내 무릎 위에서 놀았어요. 나는 여동생에게 꽃과 들새 깃털을 가져다주었어요. 우리는 함께 파르나소스의 샘물을 마셨고 밤이면 오두막집 월계수 지붕 밑에 나란히 누워 잠들었어요. 그 뒤로도 어머니는 겨울이 올 때마다 붉은빛, 초록빛, 연푸른 빛 눈물을 노래했어요. 하지만 그 무렵 나는 이 눈물 속에 겹겹이 배어 있는 슬픔이 바로 우리 민족의 슬픔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 어느 날 우리와 옷차림이 다른 서유럽인 세 사람이 찾아왔어요. 그 사람들은 깔개와 천막을 말에 싣고 있었고 칼과 총을 든 터키인도 스무 명 남짓 거느리고 있었어요. 세 사람은 파샤(터키에서 지방 장관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을 부르는 명예로운 칭호)의 ...
 

- 아무튼 낮과 밤이 수없이 지나갔지요. 마침내 우리는 풀려났어요. 마침 그날은 신성한 부활절이었답니다. 어머니가 아파서 내가 아나스타샤를 업고 걸었어요. 어머니는 그리 빨리 걷지 못했어요. 하지만 바다까지는 꽤 먼 길이었어요. 우리는 레판토 만에 도착해 어느 성당으로 들어갔어요. 성당 안에는 금색 바탕에 아름다운 천사들이 그려진 그림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어요. 내 눈에는 어린 아나스타샤도 그림 속의 천사 못지않게 아름다웠지요. 성당 한가운데에는 장미꽃으로 덮인 관이 놓여 있었어요. 어머니가 저 안에는 예수님이 아름다운 꽃이 되어 쉬고 계신다고 말해 주었어요. 

- 신부님이 큰 소리로 외쳤어요.
"주께서 부활하셨도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입맞춤을 했어요. 사람들은 불을 밝힌 초를 들고 있었어요. 나도 한 자루를, 어린 아나스타샤도 한 자루를 받아 들었어요. 백파이프 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남자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추며 성당 밖으로 나갔어요. 여자들은 밖에서 부활절의 어린 양 고기를 굽고 있었고요. 사람들이 우리도 나오라고 했어요. 나는 불가에 앉았어요. 나보다 나이 많은 소년이 내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말했어요.
"주께서 부활하셨도다!"

 

- 우리 두 사람, 그러니까 아프타니데스와 나는 이렇게 만났답니다.


- 어머니는 그물을 짤 수 있었어요. 바닷가에서는 그물 짜기가 좋은 돈벌이가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그 바닷가에 머물렀어요. 아, 아름다운 바다! 바닷물은 눈물 맛이 났답니다. 바다 빛은 사슴의 눈물을 떠올리게 했어요. 어떤 때는 붉은빛, 어떤 때는 초록빛, 또 어떤 때는 연푸른 빛을 띠는 사슴의 눈물을요! 

- 아프타니데스는 배를 아주 잘 몰았어요. 내가 어린 아나스타샤를 안고 배에 오르면, 배는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물 위를 달렸지요. 이윽고 해가 지자, 주위의 산들이 점점 더 짙은 쪽 빛을 띠었어요. 산맥 너머로 또 다른 산맥이 보이고 가장 멀리에는 눈 덮인 파르나소스 산이 우뚝 솟아 있었어요. 파르나소스산 봉우리는 저녁 해를 받아 불에 달궈진 쇠처럼 새빨갛게 빛났어요. 그 빛은 산속에서 퍼져 나오는 듯했어요. 해가 진 뒤에도 반짝이는 푸른 공기 속에서 오래도록 빛났으니까요.  
하얀 바다 새가 날개로 수면을 차며 날았어요. 그 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꼭 검은 바위 절벽에 둘러싸인 델포이에 와 있는 것 같았지요. 나는 배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고 아나스타샤는 내 가슴 위에 앉아 있었어요.   
 
- 별빛 때문인지 주위 산들의 형태가 뚜렷이 보였어요. 어머니는 불을 피워 양파를 구웠어요. 아나스타샤와 나는 목에서 불을 뿜는다는 무시무시한 스미드라키(죽여서 위장을 갈라놓지 않은 채 들판에 버려 놓은 양에서 나온다는 괴물)를 겁내지 않고 백리향 수풀 속에서 편안히 깊은 잠에 빠졌어요. 늑대나 들개 따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어머니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답니다. 

 

- 드디어 우리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집은 이미 허물어져 새로 지어야 했어요. 여자 두세 사람이 일을 거들어 주었어요. 이삼일 뒤에는 벽을 세우고 협죽도로 지붕도 새로 이었지요. 어머니는 동물 가죽과 나무껍질로 병을 담는 자루를 많이 짰어요. 나는 신부님들의 어린 양 떼를 돌보았고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농부는 때때로 신부가 되어 더없이 존경받는다. 농민들은 길에서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나면 그 땅에 입을 맞춘다.)  


- 어느 날 그리운 아프타니데스가 찾아왔어요. 우리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서 왔다며 우리 집에서 이틀 동안 머물다 갔지요.
한 달 뒤에 다시 아프타니데스가 찾아왔어요. 아프타니데스는 큼직한 물고기 한 마리를 어머니에게 선물로 건네며, 배를 타고 파트라스 섬과 코르푸 섬에 가게 되어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고 했어요. 아프타니데스는 아는 것이 아주 많았어요. 레판토 만의 어부 이야기뿐만 아니라 지금의 터키인처럼 우리 그리스를 지배하던 지난날의 수많은 왕과 영웅 이야기를 들려주었답니다. 

- 예전에 나는 장미 나무에 맺힌 꽃봉오리가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흐르자 탐스럽게 활짝 피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장미는 내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더없이 크고 아름다운 붉은 꽃을 피웠지요.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나스타샤는 어느새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랐고, 나도 늠름한 젊은이가 되었어요. 어머니와 아나스타샤의 잠자리에는 내가 엽총으로 잡은 늑대 가죽이 깔려 있었어요. 세월은 쉼 없이 흘러갔답니다.

- 어느 날 밤 아프타니데스가 갈대처럼 호리호리하고 볕에 그을린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와 우리 모두에게 입맞춤을 했어요. 그리고 드넓은 바다와 몰타(지중해 중앙에 있는 작은 섬나라)의 요새, 이집트의 진귀한 무덤 같은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 이야기들은 성자 이야기처럼 신비했기 때문에 나는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아프타니데스를 바라보았지요. 

- "넌 아는 것도 참 많구나!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야!"
그러자 아프타니데스가 말했어요.
"너야말로 예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잖아! 난 그 이야기를 결코 잊을 수가 없어. 우정의 맹세라는 아름다운 옛 관습 말이야! 사실은 나도 그 관습을 따르고 싶어. 형제, 우리도 네 아버지와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처럼 성당에 가자! 네 여동생 아나스타샤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결한 아가씨야. 우리 두 사람의 맹세가 고결해지도록 아나스타샤한테 그 맹세를 지켜봐 달라고 하는 거야. 우리 그리스인처럼 아름다운 관습을 가진 민족이 또 있을까!"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갓 핀 장미 꽃잎처럼 붉어졌어요. 어머니는 아프타니데스에게 입 맞추었지요.

- 오두막에서 한 시간쯤 가면 바위산 위에 흙이 쌓여 나무 두세 그루가 그늘을 드리운 곳이 있었어요. 그곳에 제단 앞에 은 등잔이 걸린 작은 성당이 있었어요. 
나는 가장 좋은 옷을 입었어요. 엉덩이까지 주름이 촘촘히 잡힌 하얀 윗옷과 몸에 꼭 맞는 붉은 조끼, 은장식이 있는 술 달린 터키모자였어요. 허리띠에는 단도와 권총을 꽂았고요. 아프타니데스는 그리스 선원이 입는 푸른 옷을 입고 성모 마리아 님이 새겨진 은메달을 목에 걸었지요. 돈 많은 신사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값비싼 장식 띠도 둘렀고요. 우리가 엄숙한 의식을 치르러 간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답니다.

- 우리는 작고 조용한 성당 안으로 들어갔어요. 문틈으로 저녁 햇살이 들어와 불이 밝혀진 등잔불과 금빛 바탕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을 비추었어요. 우리가 제단 앞 계단에 무릎을 꿇자 아나스타샤가 우리 앞에 섰어요. 아나스타샤는 부드럽고 편안하게 몸을 감싸는 기다란 흰 옷을 입고 있었어요. 우윳빛 목에는 갖가지 헌 은화와 새 은화를 꿰어 만든 꽤 근사한 목걸이를 걸어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있었지요. 땋아 올린 검은 머리칼에는 옛 신전에서 나온 금화와 은화로 만든 작은 장식을 꽂고 있었고요. 그리스의 어떤 아가씨도 이보다 아름다운 장식은 갖고 있지 않을 거예요. 아나스타샤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고 두 눈은 별처럼 반짝였어요. 

- "두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친구로 지낼 것을 맹세합니까?"
우리가 대답했어요.
"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도 내 형제는 내 분신이고 내 비밀은 내 형제의 비밀이며 내 행복은 내 형제의 행복임을 잊지 않겠다고 맹세합니까? 내 형제가 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듯이 나도 내 형제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겠습니까?" 
우리는 또 한 번 힘차게 대답했지요.

"네!"

- 우리의 작은 오두막과 델포이의 샘가는 아주 밝고 활기찼어요! 아프타니데스가 떠나기 전날 밤, 우리 둘은 바위산 비탈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아프타니데스는 내 등에 팔을 두르고, 나는 아프타니데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서요. 우리는 고통받는 조국 그리스와 믿을 만한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놓았지요. 

 

- 내가 아프타니데스의 손을 잡고 말했어요.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지금 이 순간까지는 하느님과 나밖에 몰랐던 사실이지. 내 영혼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 그 사랑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훨씬 강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묻는 아프타니데스의 얼굴과 목이 새빨갰어요.
"나는 아나스타샤를 사랑하고 있어!"


- 아프타니데스의 손이 내 손 안에서 바르르 떨렸고 낯빛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졌어요. 나는 그제야 아프타니데스의 마음을 알 수 있었어요. 내 손도 떨리고 있었을 테지요. 나는 아프타니데스 쪽으로 몸을 굽혀 이마에 입 맞추고 속삭였어요. 
"아나스타샤한테는 아직 털어놓지 않았어. 아나스타샤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몰라! 형제, 생각해 봐! 나는 아나스타샤를 날마다 봐 왔어. 아나스타샤는 내 곁에서 자랐고 내 영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났다고!" 

- 그러자 아프타니데스가 말했어요.
"아나스타샤는 네 사람이야! 네 사람이고 말고! 나 솔직하게 말할게. 너한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사실은 나도 아나스타샤를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난 내일 여길 떠나야 해. 일 년 뒤에나 또 만나겠지. 그때 너희들은 이미 결혼했겠구나. 여기 돈이 조금 있어. 받아 줘! 아니, 꼭 받아야 해!" 
우리는 말없이 바위산을 거닐었어요. 그리고 밤이 이슥해서야 어머니가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왔지요.


- <우정의 맹세>

 

- 동양의 모든 노래에는 나이팅게일이 장미꽃에게 바치는 사랑이 담겨 있지요. 별이 반짝이는 고요한 밤, 날개 달린 가수는 향기로운 꽃에게 세레나데를 바친답니다. 

- 스미르나(현재 터키의 이즈미르 지역으로,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키 큰 플라타너스 숲이 우거져 있었어요. 짐을 실은 낙타가 상인들에게 이끌려 으스대듯 긴 목을 쭉 뻗으며 성스러운 땅을 지나가고 있었지요. 나는 그곳에서 꽃이 흐드러지게 핀 장미 울타리를 발견했어요. 비둘기가 플라타너스의 높은 가지 사이로 어지럽게 날고 있었어요. 비둘기 날개가 햇빛을 받아 진주조개처럼 반짝였고요.  

- 장미 울타리에는 유난히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가 피어 있었어요. 나이팅게일은 장미꽃에게 사랑의 고뇌가 담긴 노래를 바쳤어요. 하지만 장미꽃은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장미 꽃잎에는 동정의 이슬 한 방울조차 맺히지 않았지요. 
 
- "여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잠들어 있어요! 나는 그 사람의 무덤 위에서 향기를 뿜고 싶어요. 만약 폭풍이 꽃잎을 흩뜨린다면 난 그 사람의 무덤 위에 떨어질 거예요! <일리아스>(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호메로스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시인은 이 땅 밑에서 흙이 되었어요. 나는 그 흙 속에서 싹을 틔웠고요. 난 호메로스의 무덤에 핀 장미꽃이라고요. 한낱 나이팅게일을 위해 피기엔 너무 아깝다고요!" 
그래도 나이팅게일은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다 끝내 죽고 말았답니다.

- 낙타 몰이가 짐을 실은 낙타와 흑인 노예를 데리고 이곳을 찾았어요. 낙타 몰이의 어린 아들이 죽은 나이팅게일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이 작은 가수를 위대한 호메로스의 무덤에 묻어 주었지요. 장미꽃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어요. 


- 밤이 되자 장미는 꽃잎을 꼭 닫고 꿈을 꾸었어요. 맑게 갠 아름다운 날, 낯선 유럽 사람 한 무리가 호메로스의 무덤에 참배하러 찾아왔어요. 그중에는 안개와 오로라의 고향인 북유럽에서 온 시인도 있었어요. 시인은 장미꽃을 따다가 조심스레 책갈피에 끼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머나먼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장미꽃은 슬픔으로 바싹바싹 마르며 비좁은 책갈피에 끼워져 있었지요.
시인은 고향으로 돌아와 책을 펼치고 말했어요.
"이게 바로 호메로스의 무덤에 핀 장미꽃이야!"

- 이것이 장미꽃이 꾼 꿈이었어요. 장미는 잠이 깨어 바람 속에서 몸을 바르르 떨었어요. 꽃잎에서 이슬 한 방울이 시인의 무덤에 떨어졌지요.
이윽고 해가 떠오르자 장미꽃은 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빛났어요. 날씨가 몹시 더웠어요. 장미꽃은 여전히 아시아 땅에 있었으니까요. 그때 발소리가 들렸어요. 장미꽃이 꿈속에서 보았던 외국인들이 찾아온 거예요. 그중에는 북유럽의 시인도 있었지요. 시인은 정말로 장미꽃을 꺾어 싱싱한 꽃잎에 입 맞추더니 안개와 오로라의 고향으로 가지고 갔어요. 

 

- 미라처럼 바싹 말라 버린 장미꽃은 시인의 책 <일리아스> 속에 잠들어 있었어요. 그리고 꿈속에서처럼 시인이 책을 펼치고 하는 말을 듣고 있었지요.
"이게 바로 호메로스의 무덤에 핀 장미꽃이야!"
 

- 세상에서 잠의 요정 올레 루코이에 아저씨만큼 이야기를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저씨는 이야기를 얼마나 잘하는데요! 

- 밤이 되어도 아이들이 탁자나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올레 아저씨가 찾아와요. 소리도 없이 계단을 올라오죠. 양말 바람으로 살금살금 걷거든요. 아저씨는 문을 살며시 열고 아이들의 눈에 달콤한 우유를 촉! 쏘아 넣어요. 아주 조금, 정말로 아주 조금만 넣는데도 아이들은 곧바로 눈이 감겨 버리죠. 그래서 아이들은 올레 루코이에 아저씨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답니다. 잠의 요정 올레 아저씨는 재빨리 아이들 뒤쪽으로 다가가 목 언저리에 가만히 숨을 불어넣어요. 그러면 머리가 무거워지거든요. 정말이라니까요! 하지만 아프지는 않아요. 이게 다 아이들을 위해서인걸요. 아저씨는 아이들이 조용해지기를 바랄 뿐이에요. 

 

- 끝내는 날개를 펼친 채 점점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죠. 몇 번인가 있는 힘껏 날갯짓을 했지만 헛일이었어요. 황새는 결국 돛 줄에 다리가 걸리더니 돛 위를 주르르 미끄러져 갑판에 털썩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배의 심부름꾼 소년이 황새를 붙잡아 암탉과 집오리와 칠면조가 있는 우리에 넣어 버렸어요. 가엾은 황새는 다른 새들 틈바구니에 기운 없이 서 있었죠. 

- "빨리 말해! 빨리 말해!"
황새는 따뜻한 아프리카 이야기와 피라미드 이야기, 야생마처럼 사막을 달리는 타조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하지만 집오리들은 황새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서로를 마구 떠밀며 소리쳤어요. 
"다들 이 녀석을 바보라고 생각하죠?"
"아무렴, 녀석은 바보가 틀림없어."
수칠면조는 이렇게 말하고 쿠르륵쿠르륵 목을 울렸어요. 황새는 그저 말없이 아프리카 생각에 푹 잠겨 있었죠.

- "빨리 이야기해 주세요!"
"오늘 밤에는 그럴 짬이 없단다."
올레 아저씨는 얄마르의 머리 위에 더없이 아름다운 우산을 활짝 폈어요.
"이 그림 속의 중국인을 보렴."
우산은 푸른 나무와 뾰족한 다리가 그려진 커다란 중국 접시처럼 보였어요. 조그만 중국인이 다리 위에 서서 얄마르한테 고갯짓을 하고 있었어요. 

- "우리는 내일 아침까지 온 세상을 깨끗이 청소해야 해. 내일은 성스러운 일요일이니까. 나는 교회 탑에 올라가, 난쟁이 요정이 종소리가 맑게 울리도록 종을 잘 닦아 놓았는지 검사해야 한단다. 들판에 나가 바람이 풀이랑 나뭇잎에 앉은 먼지를 털어냈는지도 봐야 하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하늘의 별을 윤이 나도록 닦는 일이야. 그러려면 별들을 일일이 앞치마에 담아 갖고 와야 하는데, 그전에 별마다 번호를 붙여 둬야 해. 별을 떼어 낸 구멍에도 같은 번호를 붙여 두고. 그래야 별을 닦아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으니까. 구멍이 맞지 않으면 별이 떨어져서 별똥별이 너무 많아지거든."

- 그때 얄마르가 누워 있는 쪽 벽에 걸린 낡은 초상화가 끼어들었어요.
"이봐요, 올레 씨, 나는 얄마르의 증조할아버지요. 우리 증손자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 아이의 머리를 어지럽히지는 말아 주시오. 하늘의 별은 떼어 내거나 닦을 수 있는 게 아니잖소! 별은 우리 지구와 마찬가지로 천체니까. 또 그것이 별이 가진 장점이고 말이오."  
올레 아저씨가 말했어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나이 많은 증조할아버님! 말씀 잘 들었어요. 과연 할아버지는 한 집안의 가장이시군요. 늙은 가장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훨씬 많답니다. 옛날 이교도 시대의 로마인이나 그리스인들은 나를 꿈의 신이라고 불렀죠. 나는 신분이 아주 높은 사람의 집도 드나들었어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또 아이들도, 어른들도 사귈 수 있죠. 하지만 오늘 밤에는 할아버지한테 이야기를 맡겨 볼까요?" 
올레 아저씨는 말을 마치고 우산을 챙겨 휙 가 버렸어요. 그러자 낡은 초상화가 투덜댔어요.
"내 참, 요즘은 자기 의견도 함부로 말 못 하겠군 그래!"

그때 얄마르는 잠이 깼답니다.
 
- 올레 아저씨가 찾아와서 인사를 했어요.
"잘 있었니, 얄마르?"
얄마르는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증조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벽 쪽으로 휙 돌려 버렸어요. 어제처럼 끼어들어 이야기를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
"이제 이야기해 주세요. '한 꼬투리 속에 살던 초록 완두콩 다섯 알’이나 '암탉 다리를 좋아하게 된 수탉 다리'나 '너무 가늘어서 재봉 바늘인 줄 알고 뽐내던 짜깁기 바늘 이야기' 같은 걸로요!" 

- "뭐든 지나친 건 좋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밤에는 내 형을 보여 주고 싶구나. 내 형 이름도 올레 루코이에야. 다만 내 형은 모든 사람에게 딱 한 번씩만 찾아간단다. 그리고 곧바로 그 사람을 자기 말에 태워 이야기를 들려주지. 하지만 형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딱 두 가지뿐이야. 하나는 이 세상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입에 담기에도 끔찍할 만큼 무시무시한 이야기란다!"

- "자, 저기 내 형, 또 다른 올레 루코이에가 보이니? 사람들은 내 형을 죽음의 신이라고도 부르지. 하지만 잘 보렴. 그림책에 나오는 죽음의 신처럼 해골뿐인 무시무시한 모습은 아니야. 오히려 윗옷에는 경기병의 멋진 옷처럼 은실 자수가 놓여 있잖니? 저기, 검은 우단 망토를 펄럭이며 쏜살같이 말을 달리고 있구나!"
얄마르의 눈에도 올레 루코이에가 말을 달리며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을 말에 태우는 것이 보였어요. 앞자리와 뒷자리에 몇 명씩 태우고 있었죠.

 

- <잠의 요정 올레 루코이에>

 

- 젊은이가 먼저 말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헤어져야 해요! 당신 오빠는 우리 사이를 못마땅하게 여기죠. 그래서 일부러 나를 바다 저편 산 너머에 있는 먼 곳으로 심부름을 보내는 거예요. 잘 있어요, 내 사랑스러운 신부! 누가 뭐래도 당신은 내 사랑스러운 신부예요!" 


- 그리고 두 사람은 입을 맞추었어요. 아가씨가 눈물을 흘리며 젊은이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넸어요. 그전에 아가씨는 장미꽃에 진심이 담긴 뜨거운 입맞춤을 했는데, 그때 장미가 꽃잎을 활짝 펼쳤죠. 그 순간, 작은 요정은 재빨리 꽃 속에 날아들어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아름다운 벽에 머리를 기댔고요. 이윽고 "잘 가요! 안녕!" 하는 작별 인사 소리가 똑똑히 들렸어요. 장미의 요정은 장미꽃이 젊은이의 가슴에 꽂혀 있다는 것도 똑똑히 알 수 있었어요. 아, 젊은이의 심장이 얼마나 쿵쿵 뛰었는지 몰라요! 작은 장미의 요정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답니다. 

- 하지만 장미꽃이 젊은이의 가슴에 얌전히 꽂혀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젊은이가 어두운 숲길을 걸어가며 장미꽃을 손에 들고 작은 요정이 짜부라지도록 연거푸 뜨거운 입맞춤을 퍼부었기 때문이죠. 작은 요정은 꽃잎 너머로 젊은이의 뜨거운 입술을 느꼈어요.

 

- 못된 사내는 새벽녘에야 집에 돌아왔어요. 사내는 모자를 벗어 들고 여동생 방으로 갔어요. 방에는 꽃처럼 아름다운 아가씨가 잠들어 있었어요. 아가씨는 지금쯤 사랑하는 사람이 산을 넘고 숲을 지나 여행을 하고 있으려니 생각하며 그 사람을 꿈속에서 만나고 있었죠. 못된 오빠는 여동생 위로 몸을 구부리더니 악마처럼 징그럽게 웃었어요. 그때 사내의 머리에 얹혀 있던 마른 잎이 침대보로 떨어졌어요. 하지만 사내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침이 되기 전에 잠깐 눈을 붙이기 위해 방을 나갔어요. 

- 장미의 요정은 마른 이파리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잠든 아가씨의 귓가에 대고 무시무시한 살인 이야기를 꿈속의 일처럼 들려주었어요. 오빠가 젊은이를 죽이고 묻은 곳과 그 옆에 있는 꽃 핀 보리수나무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죠. 
"내 이야기를 한낱 꿈으로 여기지 않도록 당신 침대에 마른 잎 한 장을 놓아둘게요."

- 이윽고 잠이 깬 아가씨는 침대에 떨어져 있는 마른 잎을 보았어요. 아, 아가씨는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어요! 하지만 아무한테도 이 슬픔을 털어놓을 수 없었답니다. 창문이 하루 종일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장미의 요정은 언제든 정원의 장미꽃이나 다른 꽃으로 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슬픔에 빠진 아가씨를 두고 차마 갈 수가 없었어요. 장미의 요정은 창가에 있는 월계화 속에 들어가 가엾은 아가씨를 지켜보았어요. 오빠는 아가씨의 방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는데 그런 몹쓸 짓을 하고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어요. 여동생도 마음의 고통을 눈곱만치도 드러내지 않았고요. 

- 날이 저물자 아가씨는 당장 집을 빠져나가 보리수나무가 있는 숲으로 갔어요. 그리고 나뭇잎을 걷어 내고 땅을 팠어요. 이윽고 시체가 보였죠. 아아! 가엾은 아가씨는 흐느껴 울며 자기도 함께 죽여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어요.
아가씨는 시체를 집으로 가져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죠.

 

- 아가씨는 눈 감은 젊은이의 창백한 얼굴을 들고 그 차가운 입술에 입 맞추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붙은 흙을 털어내며 중얼거렸어요.
"그래도 이것만은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
아가씨는 흙과 마른 잎으로 죽은 젊은이의 몸을 덮어 주었어요. 그리고 젊은이의 머리와 젊은이가 죽은 숲에서 꺾은 재스민 잔가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가씨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가장 큰 화분을 들고 와 젊은이의 머리를 담고 흙을 채웠어요.  

- 작은 요정이 속삭였어요.
"안녕, 잘 있어요!"
작은 요정은 슬퍼하는 아가씨를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서 정원에 있는 장미꽃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장미꽃은 벌써 다 시들어 빛바랜 꽃잎 두세 장이 초록빛 꽃받침 위에 달랑거리고 있을 뿐이었어요. 

- "아, 아름답고 좋은 건 왜 이렇게 빨리 사라져 버리는 걸까!"

장미의 요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리고 아직 시들지 않은 장미꽃을 가까스로 찾아내 부드럽고 향긋한 꽃잎 속에서 안전하게 지내기로 했죠.


- <장미의 요정>

 

- 옛날 옛날에 가난한 왕자가 살았어요. 왕자가 다스리는 나라는 아주 작았어요. 그래도 결혼은 할 수 있을 정도였고, 왕자는 결혼을 하고 싶었답니다. 
 

- 왕자 아버지의 무덤에는 매우 아름다운 장미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어요. 그 장미 나무는 5년에 한 번씩, 그것도 딱 한 송이씩 꽃을 피웠어요. 그런데 그 꽃의 향기는 누구든 한 번만 맡으면 슬픔이나 걱정거리를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향기로웠죠. 왕자는 나이팅게일도 한 마리 있었어요. 이 새는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르는지 조그만 목구멍 가득 곱디고운 가락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았죠. 왕자는 이 두 가지를 커다란 은 상자에 넣어 황제의 따님에게 보냈답니다. 

- 황제는 선물을 들고 온 심부름꾼을 뒤따라 공주가 있는 큰 방으로 들어갔어요. 공주는 시녀들과 '손님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공주는 선물이 든 커다란 상자를 보더니 손뼉을 치며 좋아했어요.  
공주가 말했어요.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들어 있었으면!"
하지만 상자에서 나온 건 아름다운 장미꽃이었어요. 시녀들이 감탄했어요.
"어머나!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죠?"
황제도 한마디 거들었어요.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야. 넋을 잃을 지경이야."
하지만 공주는 꽃을 만져 보더니 금세 울먹울먹 했어요.
"아이, 아버지, 이건 만든 꽃이 아니라 진짜 꽃이잖아요!"

 

- <돼지치기 왕자>

 

- 소나기가 내린 뒤 메밀밭 옆을 지나가면 메밀이 검게 그을려 있는 걸 흔히 볼 수 있어요. 마치 불꽃이 메밀밭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말이에요. 이럴 때 농사꾼들은 "번갯불에 당했다."고해요.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자, 지금부터 참새한테 들은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참새는 늙은 버드나무한테 이 이야기를 들었다더군요. 늙은 버드나무는 예전부터 메밀밭 옆에 서 있었고 지금도 서 있는 아주 커다란 나무예요. 나이가 얼마나 많은지 온몸은 울퉁불퉁 옹이투성이고 줄기 한복판은 쭉 갈라져 그 틈새로 잡초며 나무딸기 덩굴이 자라고 있었죠. 또 바닥에 닿도록 늘어진 가지는 치렁치렁한 초록색 머리카락 같았답니다. 

- 주위 밭에는 호밀과 보리, 메귀리 같은 갖가지 곡물이 자라고 있었어요. 그래요, 그 아름다운 메귀리까지도요. 잘 여문 메귀리 이삭은 가느다란 가지에 조르르 내려앉은 노란색 작은 카나리아처럼 보이잖아요! 밭의 곡물들은 하나같이 풍성하게 여물어 있었어요. 잘 여물수록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말이에요.  


- 메밀이 말했어요.
"나도 다른 곡물만큼 값이 나가. 더구나 훨씬 더 아름답지. 내 꽃은 사과 꽃만큼 아름답다고. 나랑 우리 가족을 바라보는 건 정말 흐뭇한 일이야. 이봐요, 버드나무 영감, 우리보다 근사한 걸 본 적 있어요?" 
그러자 버드나무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뭐, 그렇지. 하고 대꾸하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메밀은 잔뜩 빼기며 말했어요.
"뭐야, 저 멍청한 나무는! 저렇게 늙어 빠졌으니 배 속에 풀이 자라지."

- 그때 무시무시한 폭풍이 몰려왔어요. 꽃들은 폭풍이 머리 위를 지나가는 동안 꽃잎을 꼭 다물고 조그만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메밀만은 보란 듯이 한껏 고개를 젖히고 있었죠. 꽃들이 말했어요.
"우리처럼 고개를 숙여요."
메밀이 말했어요.
"내가 왜!"

- "우리처럼 고개를 숙여. 이제 곧 폭풍의 천사가 날아올 거야! 구름 위에 있어도 날개가 바닥에 닿는 천사라고, 천사는 네가 잘못했다고 빌기도 전에 너를 둘로 찢어 버릴 거야." 
메밀이 대꾸했어요.
"하지만 난 고개 숙이기 싫어."
늙은 버드나무가 말했어요.
"꽃잎을 다물고 잎을 아래로 늘어뜨려! 구름이 갈라질 때 번개를 쳐다보면 안 돼! 인간들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아. 번개 속에는 하느님의 천국이 있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눈이 멀어 버리기 때문이지. 하물며 우리처럼 땅에서 자라는 것들한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인간보다 훨씬 못한 우리한테는 말이야."

- 그러자 메밀이 말했어요.
"뭐요, 훨씬 못하다고요? 좋아요, 그럼 내가 하느님의 천국을 똑바로 쳐다보죠!"
그러고는 대담하고 거만하게 말 그대로 했어요. 바로 그때 온 세상을 불길로 휘감아 버릴 듯이 무시무시한 번개가 쳤어요.


- 이윽고 폭풍이 지나가자, 꽃과 다른 곡물들은 방금 내린 비에 기운을 차리고 부드럽고 상쾌한 공기 속에서 고개를 들었어요.
하지만 메밀은 번개에 시커멓게 탄 채 잡초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죠.
늙은 버드나무는 바람에 가지를 흔들며 눈물을 흘리듯이 초록 이파리에서 커다란 물방울을 떨어뜨렸어요. 

- 참새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어요.
"왜 우세요, 이렇게 아름답고 근사한 자리에 있으면서? 보세요. 해님은 저렇게 환히 빛나고 구름은 저렇게 빨리 달려가고 있잖아요. 꽃과 풀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나고요! 대체 왜 우는 거예요, 버드나무 할아버지?"
그래서 버드나무는 잘난 척 뽐내다가 천벌을 받은 메밀 이야기를 참새들에게 들려주었어요. 참새는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요. 어느 날 밤 내가 얘기를 해 달라고 했을 때 말이에요. 

 

- <메밀>

 

- "착한 아이가 죽으면 그때마다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와 아이를 안고 새하얀 큰 날개를 펼쳐 아이가 평소에 좋아하던 곳으로 날아가요. 그리고 꽃을 한 아름 꺾어 하느님께 가져가죠. 그러면 그 꽃은 이 세상에 피어 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답니다. 하느님은 그 꽃들을 모두 품에 안고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꽃에 입을 맞추세요. 그러면 그 꽃은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어 다 함께 행복의 노래를 부른답니다." 

- 어느 날 하느님의 천사가 죽은 아이를 천국으로 데려가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 아이는 꿈결에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요. 천사는 아이가 어릴 때 놀던 고향으로 날아가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꽃밭 사이를 지났어요.

- 그곳에는 곧고 아름다운 장미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떤 몹쓸 사람이 줄기를 꺾었는지, 막 피기 시작한 꽃이 가득 달린 가지가 바싹 마른 채 늘어져 있었지요. 아이가 말했어요. 
"아, 가엾어라! 저걸 갖고 갈래요! 천국에서 꽃을 피울 수 있도록요."
천사가 그 꽃을 꺾었어요. 그리고 아이에게 입 맞추자 아이가 눈을 살짝 떴어요. 둘은 갖가지 아름다운 꽃을 땄어요.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마리골드와 야생 팬지 꽃도요. 

- "꽃은 이 정도면 됐어요!"
아이가 말하자, 천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지만 곧바로 하느님께 올라가지 않았어요.

 

- 천사가 잡동사니 더미에 있던 화분 조각과 흙덩이를 가리켰어요. 흙덩이는 화분에 있던 것으로 커다란 들꽃의 시든 알뿌리를 감싸고 있었지만, 이제 쓸모가 없어져 길바닥에 버려졌답니다. 천사가 말했어요.
"저것도 가져가죠. 그 이유는 가면서 말해 줄게요." 

- 이윽고 둘은 하늘로 날아올랐고, 천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저 좁은 골목의 어느 지하실에 몸이 아픈 가난한 소년이 살고 있었어요. 소년은 아주 어릴 때부터 줄곧 몸져누워 있었어요. 가장 건강할 때조차 목발을 짚고 방 안을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는 게 고작이었죠. 여름에는 지하실 문으로 햇빛이 30분쯤 비쳐 들기도 했는데, 그런 날이면 소년은 문 앞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었어요. 얼굴 앞에 손을 대고 붉은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햇빛에 비쳐 보기도 했고요. 그러면 그 집 가족은 '오늘 저 아이는 바깥에 나가 놀았어요.'라고 말했답니다. 소년은 이웃집 아이가 그해 처음 돋아난 너도밤나무 가지를 꺾어다 주었을 때에야 봄 숲이 아름다운 연둣빛으로 가득하다는 걸 알았어요. 소년은 가지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려, 햇살이 부서지고 작은 새가 지저귀는 너도밤나무 숲에 있는 꿈을 꾸었죠. 또 어느 봄날에는 이웃집 아이가 들판의 꽃을 꺾어다 주었어요. 그중에 마침 뿌리째 뽑혀 온 꽃이 하나 있었어요. 소년은 그 꽃을 화분에 심고 침대 옆 창가에 두었어요. 행운을 부르는 손이 심어 꽃은 무럭무럭 자라나 새싹을 틔우고 해마다 새로운 꽃을 피웠죠. 그것은 소년에게 둘도 없이 아름다운 꽃밭이자 이 세상의 자그마한 보물이었답니다. 소년은 꽃에 물을 주고 나지막한 창으로 비쳐 드는 마지막 한 줄기 햇살까지 될 수 있도록 살뜰히 보살폈어요. 심지어 꿈속에서도 꽃을 보았죠. 꽃은 오로지 소년을 위해 아름답게 피고 향기를 흩뿌렸고 오로지 소년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죠. 그래서 소년은 하느님이 부르셨을 때도 꽃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답니다. 소년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지 일 년이 지났어요. 그 사이 꽃은 창가에 놓인 채 잊혀지고 시들어 끝내는 이사 날 골목에 쌓인 잡동사니 더미에 던져졌죠. 하지만 그 보잘것없는 시든 꽃은 지금 우리 꽃다발 속에 있어요. 여왕님의 정원에 핀 가장 아름다운 꽃보다 더 큰 기쁨을 주었던 꽃이니까요." 

- 천사 품에 안겨 하늘로 올라가던 아이가 물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천사가 대답했지요.
"잘 알 수밖에요! 목발을 짚고 걷던 아픈 소년이 바로 나니까요. 이건 내 꽃인걸요.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요?"
아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천사의 아름답고 환한 얼굴을 쳐다보았어요.
 

- <천사>

 

- "아, 어쩌면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요!"

주위의 귀부인들이 이렇게 소곤거렸어요. 
하지만 그것은 책이 아니라 조그만 세공품이었어요. 살아 있는 나이팅게일과 똑같이 생겼는데, 온몸에 다이아몬드와 루비와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어요. 이 세공품 새는 태엽을 감으면 진짜 새처럼 고운 소리로 노래 한 곡을 불렀어요. 노래를 하면서 금빛과 은빛으로 반짝이는 꼬리도 까딱까딱 움직였죠. 또 목에 두른 작은 리본에는 "일본 황제의 나이팅게일도 중국 황제의 나이팅게일만 못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모두들 입을 모아 감탄했어요.
"정말 아름다워!"

- "나이팅게일과 같이 노래를 불러 보게 하면 어떨까? 아주 멋진 이중창이 될 거야."
새 두 마리는 함께 노래를 불렀어요. 하지만 그 소리는 전혀 아름답지 못했어요. 진짜 나이팅게일은 자기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렀고, 세공품 새는 왈츠풍으로 불렀기 때문이죠. 

- 악장이 말했어요.
"세공품 새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박자도 아주 정확해서 제 마음에 쏙 드는군요."
이번에는 세공품 나이팅게일 혼자 노래를 불렀어요. 그리고 진짜 나이팅게일만큼이나 큰 성공을 거두었어요. 게다가 보기에도 훨씬 아름다웠죠. 팔찌나 브로치처럼 반짝반짝 빛났으니까요. 세공품 새는 같은 노래를 서른세 번이나 불렀지만 조금도 지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한 번 더 듣고 싶어 했지만, 황제는 살아있는 나이팅게일의 노래도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팅게일은 어디로 갔을까요? 진짜 나이팅게일은 아무도 모르게 열린 창을 통해 숲으로 돌아가 버렸답니다. 

- 황제가 호통을 쳤어요.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궁궐 사람들은 은혜도 모르는 새라며 나이팅게일을 헐뜯었어요. 그러고는 "하지만 우리한테는 더 좋은 새가 있는걸!" 하고 입을 모아 말했죠.

- 세공품 새는 한 번 더 노래를 불렀어요. 사람들은 똑같은 노래를 서른네 번이나 들은 셈이죠. 하지만 곡이 워낙 어려워서 완전히 외울 수가 없었어요. 그런 만큼 악장은 침이 마르도록이 새를 칭찬했어요. 그리고 세공품 새가 진짜 나이팅게일보다 뛰어난 건 겉모습과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때문만이 아니라 몸속의 장치 때문이기도 하다고 딱 잘라 말했죠.
"여러분, 그리고 특히 폐하, 아시다시피 진짜 나이팅게일은 다음에 어떤 노래를 부를지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공품 새는 모든 것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지요. 언제나 정해진 대로 노래하며 결코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새를 분해해서 그 원리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왈츠가 어떤 식으로 들어 있는지,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또 어떻게 한 음 한 음 옮겨 가는지도요!"
 
- 악장은 황제의 허락을 받아 다음 일요일에 백성들에게 이 새를 보여 주고 노래를 들려주기로 했어요.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듣자 차를 마시고 한껏 기분이 좋아진 사람처럼 즐거워했어요. 그야말로 중국식이었죠. 다들 "오!" 하고 감탄하며 집게손가락을 높이 쳐들고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하지만 진짜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어 본 가난한 어부들은 말했어요.
"뭐, 소리도 나쁘지 않고 진짜랑 비슷하기도 하군. 그렇지만 뭔가 부족해!"

- 세공품 새는 황제의 침대 바로 옆의 비단 요 위에 놓였어요. 새 주위에는 선물로 받은 황금과 보석들이 가득했어요. 세공품새는 '황제 머리맡의 가수'로 불렸고, '좌1품'이라는 지위까지 얻었어요. 황제는 심장이 있는 쪽이 가장 고귀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심장도 왼쪽에 있었으니까요.

- 한편 악장은 이 세공품 새에 대한 책을 25권이나 썼어요. 그 책은 학문적이고 두꺼울 뿐 아니라 몹시 어려운 중국 말로 쓰여 있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잘 알겠다고 떠들어댔어요. 안 그러면 웃음거리가 되어 배를 얻어맞았기 때문이죠.

- 어느덧 꼬박 일 년이 흘렀어요. 이제 황제와 궁궐의 신하와 모든 백성들은 세공품 새의 노래를 음 하나하나까지 외울 수 있었어요. 그래서 모두들 이 새를 더없이 귀하게 여겼어요. 다 함께 노래할 수 있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이 새와 함께 노래했어요. "치치치치! 쿠르쿠르!" 거리의 아이들도 노래하고 황제도 노래했죠. 이것은 분명히 즐거운 일이었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밤 황제가 잠자리에 편히 누워 세공품 새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새의 몸속에서 '빠각!' 소리가 나며 뭔가가 튀어 오르더니 이내 ‘땍때그르!' 하고 톱니바퀴가 헛돌고 음악이 뚝 멎고 말았어요. 황제는 벌떡 일어나 의사를 불렀어요. 하지만 의사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이번에는 심부름꾼이 시계 수리공을 불러왔어요. 시계 수리공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고 이것저것 살펴본 끝에 그럭저럭 고치기는 했어요. 하지만 회전축이 많이 닳았으니 아주 조심스레 다루라면서, 회전축을 새로 갈더라도 예전 소리를 되찾을 수는 없을 거라고 하지 뭐예요. 세상에 이렇게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그 뒤로 세공품 새의 노래는 일 년에 한 번밖에 들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사실은 그것도 너무 잦았답니다. 하지만 악장은 어려운 말로 짤막하게 연설하고 전과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다들 그런 줄 알았죠. 

- 어느덧 5년이 흘렀어요. 이번에는 정말로 온 나라가 커다란 슬픔에 잠겼어요.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던 황제가 병에 걸려 살아날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죠. 새 황제도 벌써 정해져 있었어요.

- 황제는 차갑고 창백한 얼굴로 크고 화려한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궁궐 사람들은 황제가 죽은 줄 알고 너나없이 새 황제에게 인사를 하러 가 버렸어요.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시종들은 황제가 죽었다는 말을 퍼뜨리러 나갔고, 젊은 여자 시종들은 떠들썩한 커피 모임을 가졌죠. 넓은 방과 복도에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융단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어요. 하지만 황제는 아직 죽지 않았어요. 기다란 벨벳 커튼과 묵직한 황금 술이 드리워진 화려한 침대에 창백한 얼굴로 꼼짝도 못 하고 누워 있었어요. 달빛이 높은 창으로 비쳐 들어 황제와 세공품 새를 비추었어요. 

- 가엾게도 황제는 숨이 몹시 가빴어요. 뭔가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눈을 뜨고 살펴보니 가슴 위에 죽음의 신이 앉아 있었어요. 황제의 금관을 쓰고 한 손에는 황제의 황금칼을, 다른 한 손에는 황제의 아름다운 깃발을 들고서요. 기다란 벨벳 커튼의 주름 사이로는 이상하게 생긴 얼굴들이 기웃거리고 있었어요. 흉측하게 생긴 얼굴도 있고 상냥하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도 있었어요. 그것은 지금까지 황제가 했던 좋은 일과 나쁜 일이었죠. 그 얼굴들은 죽음의 신 밑에 깔려 있는 황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 그 얼굴들이 차례차례 속삭였어요.
"당신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나요? 기억하겠죠?"
그러면서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자, 황제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어요.
황제가 큰 소리로 외쳤어요.
"나는 몰라! 전혀 모르는 일이야! 음악, 음악을! 중국의 거대한 북을 울려라. 이놈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 <나이팅게일>

 

- 팽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어요. 
"나는 공이 어디 있는지 알아! 틀림없이 제비 둥지 속에 있을 거야. 그리고 제비랑 결혼했겠지." 
그렇게 생각할수록 팽이는 점점 더 공이 그리웠어요. 그저 공하고 결혼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이 더욱 깊어졌고요. 그런데 공이 다른 상대와 결혼했다는 건 생각해 보면 참 묘한 일이었죠. 팽이는 여전히 팽글팽글 돌며 춤을 추었지만 마음속은 늘 공 생각으로 가득했고, 공은 팽이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아름다워졌어요. 하지만 어느덧 세월은 흐르고 팽이의 사랑도 빛바랜 옛사랑이 되었죠.

- 팽이도 이제 몹시 늙었어요. 어느 날 팽이의 온몸이 황금빛으로 칠해졌어요. 여태껏 팽이가 이렇게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어요. 이제 황금 팽이니까요. 황금 팽이가 튀어 올라 붕붕 소리를 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멋진 볼거리였죠. 하지만 너무 높이 튀어 오르는 바람에 그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답니다. 모두들 여기저기 팽이를 찾아다녔어요. 지하실까지 샅샅이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어요. 팽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 <연인들>

 

- 시골 풍경은 어디나 아름다웠어요. 왜냐하면 여름이었으니까요! 밀은 노랗게 익고 메귀리는 파릇파릇 자라고, 저 너머 초록 들판에는 마른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요. 그 사이로 황새가 기다란 붉은 다리로 걸어 다니며 엄마한테 배운 이집트 말로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었고요. 밭과 들판 주위에는 넓은 숲이 펼쳐져 있고 숲 한가운데에는 깊은 호수가 여러 군데 있었어요. 시골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답니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오래된 저택 한 채가 있었어요. 저택 옆에 깊은 수로가 나 있고, 흙벽에서 물가까지는 커다란 수영 잎으로 뒤덮여 있었어요. 수영이 얼마나 높이 자랐던지 가장 큰 이파리 밑에는 어린아이가 똑바로 서 있어도 될 정도였어요. 꼭 깊디깊은 밀림 한복판 같았죠. 거기서 어미 오리 한 마리가 알을 품고 있었어요. 어미 오리는 슬슬 따분해지던 참이었어요.

 

- 새끼 오리는 시무룩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문득 신선한 공기와 햇빛 생각이 났어요. 이상하게 물에서 헤엄치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했고요. 마침내 새끼 오리는 이런 생각을 닭한테 털어놓았어요. 

- "하지만 물에서 헤엄치는 게 얼마나 멋진데요! 머리에 물을 뒤집어쓰거나 물속에서 자맥질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데요!"

그러자 닭이 말했어요.
"어지간히도 즐겁겠다! 너는 미쳤어! 고양이한테 물어봐! 그이는 내가 아는 이 가운데 가장 똑똑하니까. 물에서 헤엄치거나 물속에서 자맥질하는 게 좋다고? 뭐, 내 생각은 밝히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 주인 할머니한테 물어보라고. 세상에서 그 할머니보다 지혜로운 분은 없으니까! 넌 주인 할머니가 헤엄을 치거나 머리에 물을 뒤집어쓰는 걸 좋아할 것 같니?" 

- "아,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흥,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럼 대체 누가 이해한단 말이지? 나는 그렇다 치고, 설마 네가 고양이나 할머니보다 똑똑하다고 우길 셈은 아니겠지? 나이도 어린 주제에 건방지긴. 그보다 남이 베푼 친절을 하느님께 감사하라고. 이렇게 따뜻한 집에서 먹고 자고 우리와 지내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바보라니! 널 상대하는 건 딱 질색이야, 정말! 그래도 널 걱정하니까 이렇게 싫은 소리도 하는 거라고. 이런 걸 진짜 친구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알을 낳든지 목을 가르랑거리든지 불꽃을 튀게 하려고 애써 보란 말이야!"  
"그래도 난 넓은 바깥세상에 나가 보고 싶어요."

- 어느덧 가을이 되었어요. 숲의 나뭇잎이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 바람에 뱅글뱅글 춤을 추며 차가운 하늘로 날아오르고, 구름은 싸락눈과 눈을 머금은 채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어요. 산울타리 위에는 까마귀가 내려앉아 몹시 추운 듯 "까악, 꺄악!" 하고 울어 댔고요.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오들오들 떨릴 만큼 추웠어요. 추위는 가엾은 새끼 오리에게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답니다. 

- 새끼 오리는 물 위에 내려앉아 아름다운 백조들 곁으로 헤엄쳐 갔어요. 그러자 백조들도 깃털을 살랑거리며 새끼 오리 쪽으로 스르르 다가왔죠. 가엾은 새끼 오리는 "나를 죽여주세요!"하고 말하며 물 위로 목을 쭉 뻗고는 죽기를 기다렸어요. 그러자 맑은 물에 무엇이 비쳤을까요? 바로 자신의 모습이 비쳤어요. 못생기고 꼴사나운 잿빛 새끼 오리가 아니라 아름다운 한 마리 백조의 모습이 말이에요. 

- 백조의 알에서 나왔다면 설사 오리 농장에서 태어난 무슨 상관이겠어요?
백조는 자신이 온갖 슬픔과 고통을 견뎌 냈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뻤어요. 덕분에 자신에게 다가온 행복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쁨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이윽고 커다란 백조들이 가까이 다가와 부리로 깃털을 쓰다듬어 주었어요.

 

- <못생긴 새끼 오리>


 - 숲 속에 사랑스러운 어린 전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어요. 볕도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는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죠. 주위에는 자기보다 키가 큰 전나무와 가문비나무가 우거져 있었고요. 그런데 어린 전나무는 빨리 자라고 싶어 하기만 할 뿐 따사로운 햇살이나 시원한 바람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딸기나 나무딸기를 따러 온 농가 아이들의 이야기도 귓등으로 들었고요. 아이들은 딸기를 바구니에 가득 채우거나 지푸라기에 촘촘히 꽂고 나면 곧잘 어린 전나무 옆에 앉아 말했어요. 
"이 나무 좀 봐! 정말 작고 사랑스럽지 않니?"
하지만 전나무는 그런 말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어요.

- 어린 전나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어요.
"아, 나도 다른 나무들처럼 키가 컸으면! 그럼 가지를 사방으로 활짝 펼치고 꼭대기에서 넓은 세상을 내려다볼 텐데! 새들이 내 가지에 둥지를 틀 수도 있고! 바람이 불면 나도 다른 나무들처럼 점잖게 고개를 끄덕여 줄 텐데!" 
전나무는 반짝이는 햇살을 보아도, 새들을 보아도, 아침저녁머리 위로 흘러가는 분홍빛 구름을 보아도 눈곱만큼도 즐겁지 않았어요.

- 이윽고 겨울이 되었어요. 온 숲이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눈으로 덮이자, 이따금 토끼가 어린 전나무를 폴짝 뛰어넘고 지나갔어요. 전나무는 약이 바싹 올랐어요! 하지만 겨울이 두 번 지나고 세 번째 겨울이 찾아오자, 전나무도 꽤 많이 자랐어요. 그래서 토끼도 이젠 전나무를 빙 둘러 가야 했죠. 

- 전나무는 생각했어요.
'아, 점점 자라는 거야! 점점 자라서 나이를 먹는 거야! 세상에 이보다 즐거운 일은 없어.'

- 전나무는 기쁨에 겨워 소리쳤어요.
"나도 그렇게 근사해질 수 있을까?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훨씬 좋을 것 같아! 아, 난 더는 못 기다리겠어! 어서 다음 크리스마스가 왔으면 좋겠다! 나도 이젠 작년에 실려 나간 나무들만큼 키도 크고 가지도 많은걸. 아, 마차에 실릴 수 있다면! 멋지고 아름답게 꾸며져 따뜻한 방 안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으응, 그다음엔? 그래, 그다음엔 훨씬 좋은 일이 훨씬 근사한 일이 생길 거야! 안 그러면 뭐 하러 그렇게 아름답게 꾸며 주겠어? 틀림없이 훨씬 좋은 일이, 훨씬 근사한 일이 생길 거야! 하지만 그게 대체 뭘까? 아,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 그때 공기와 해님이 말했어요.
"너한텐 우리가 있잖아? 이 넓디넓은 곳에서 너의 싱그러운 젊음을 누리렴!"
전나무는 이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며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짙푸른 초록빛으로 서 있었죠.  


- 물론 전나무는 친구였어요.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다했는걸요.

- 땅딸막한 사람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도 왕이 되고 공주와 결혼한 클룸페둠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아이들은 신이 나서 손뼉을 치며 "더 해 주세요! 더 해 주세요!" 하고 졸라 댔어요. 아이들은 이베데아베데 이야기도 듣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때는 클룸페둠페 이야기밖에 들을 수 없었답니다. 
전나무는 여전히 입을 꾹 닫고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숲 속의 새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었죠.

- 전나무는 생각했어요.
'클룸페둠페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는데도 공주랑 결혼했어! 응, 맞아! 세상은 그런 거야.'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니까 이 이야기는 틀림없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 전나무는 내일도 양초와 장난감과 금박 장식과 과일 등으로 꾸며질 거라고 생각하며 한껏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 이튿날 아침이 되자 하인과 하녀가 들어왔어요. 전나무는 생각했어요.
'아, 나를 꾸며 주러 왔구나!'
하지만 사람들은 전나무를 방에서 끌고 나가더니 계단을 올라가 빛도 들지 않는 컴컴한 다락방 구석에 처박아 버렸어요.

- 전나무는 벽에 기대어 한없이 생각에 잠겼어요. 생각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죠. 다락방에는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고 그런 채로 밤과 낮이 흘러갔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누군가가 올라왔어요. 하지만 커다란 상자 두세 개를 구석에 놓아두기 위해서였죠. 이제 전나무는 상자에 가려진 채 모두에게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답니다. 
 
- 생쥐들은 호기심이 아주 많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런 곳에 가 본 적이 있나요? 선반 위에는 치즈가 있고, 천장에는 햄이 매달려 있고, 동물 기름 양초 위에서 춤을 출 수 있는 곳, 말라깽이로 들어갔다가 뚱보가 되어 나오는 식료품 저장실 말이에요." 
"그런 곳은 몰라. 하지만 햇살이 비치고 새가 노래하는 숲이라면 잘 알지."
전나무는 이렇게 대답하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생쥐들은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어요.
"와, 정말 많은 것을 구경했네요. 할아버지는 정말 행복하겠어요!"
"내가?"

- 전나무는 방금 자기가 한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겨 보았어요.

'하긴 그때는 정말 즐거웠어!'
그러고는 과자와 양초로 꾸며졌던 크리스마스 전날 밤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작은 생쥐들은 감탄했어요.
"우아, 할아버지는 정말 행복한 분이에요! 안 그래요, 전나무 할아버지?"
"나, 할아버지 아니라니까. 난 올겨울에 숲에서 나왔어. 지금이 한창 자랄 시기라고. 다만 더는 자라지 않을 뿐이야."

 

- "할아버지는 아는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어요?"
전나무가 대답했어요.
"응, 이거 하나뿐이야. 내가 가장 행복했던 날 밤에 들은 이야기지. 하지만 그때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어."
"어유, 시시해. 베이컨이나 동물 기름 양초 이야기 같은 건 몰라요? 식료품 저장실 이야기도요?"

- "명랑한 생쥐들이 주위에 둘러앉아 내 이야기를 들어줄 때는 정말 즐거웠는데! 이젠 그것도 끝이구나. 하지만 이다음에 여기서 나가면 꼭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야지." 
그때는 과연 언제일까요?

 

- 드디어 때가 왔어요. 어느 날 아침 사람들이 쿵쾅쿵쾅 올라와 다락방을 온통 휘저었어요. 상자를 나르고 전나무도 끌고 내려갔어요. 사람들은 전나무를 바닥에 내팽개쳤어요. 곧바로 한 하인이 나타나 볕이 잘 드는 계단 쪽으로 전나무를 질질 끌고 갔죠.
전나무는 생각했어요.
'아, 드디어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구나!'

- 전나무는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맛보았어요. 그때 벌써 전나무는 바깥 정원으로 옮겨져 있었어요.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지다 보니, 전나무는 자기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주위에 보이는 것들에 넋을 빼앗겼어요. 정원은 꽃밭과 맞닿아 있었는데, 거기에는 갖가지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어요. 장미꽃은 나지막한 담 위로 고개를 내밀고 산뜻하고 좋은 향기를 흩뿌렸어요. 보리수 꽃도 한창이었고요. 제비가 날아다니며 "지지배배! 지지배배! 내 남편이 왔어요!" 하고 노래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전나무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답니다.

- "자, 이제부터 진짜 삶이 시작되는 거야!"
전나무는 기쁨에 겨워 소리치며 가지들을 활짝 펼쳤어요. 아아! 전나무는 가지가 죄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채 잡초와 쐐기풀이 자라는 정원 구석에 쓰러져 있었어요. 아직 꼭대기에 달린 금박을 입힌 별만이 환한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죠.

- 자기가 들은 유일한 이야기인 클룸페둠페 이야기도 떠올렸고요. 그러는 사이에 전나무는 모조리 타 버리고 말았어요.
사내아이들은 다시 정원에서 놀았어요. 가장 어린아이가 가슴에 금별을 달고 있었어요. 전나무가 가장 행복했던 날 밤에 달았던 별이죠. 하지만 이제 모두 끝났어요. 전나무도 끝이에요. 이 이야기도 끝이죠. 모든 것이 끝이에요. 끝났어요. 원래 이야기란 모두 이런 법이랍니다! 

 

- <전나무>

 

- 마침내 마귀들은 하늘로 올라가 천사와 '우리 주님'을 놀려주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늘 높이 올라갈수록 거울에는 더욱더 꼴사납게 히죽거리는 얼굴이 비쳤습니다. 악마들은 거울을 붙들고 있기도 버거웠지만 자꾸자꾸 올라가 하느님과 천사들이 있는 곳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러자 거울 속의 웃는 얼굴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거울은 악마들의 손에서 미끄러져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죠. 이제 거울은 몇천만, 몇억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져 지금까지 보다 훨씬 큰 불행을 세상에 뿌리게 되었습니다. 거울 조각 중에는 모래알만큼 작은 것도 있었는데 그것들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죠.  

- 거울 조각이 사람 눈에 들어가면 그대로 눌러앉아 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뭐든 거꾸로 보거나 나쁜 면만 보게 된답니다. 작은 거울 조각 하나하나에는 원래 거울이 가지고 있는 힘과 똑같은 힘이 있었으니까요. 어떤 거울 조각은 사람의 심장에 꽂혔습니다. 그러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죠. 그 사람의 심장이 얼음덩이처럼 변해 버리니까요. 어떤 조각은 유리창으로 쓸 수 있을 만큼 컸습니다. 하지만 그 유리창으로는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어떤 조각은 안경으로 쓰였는데 그 안경으로 사물을 똑바로 보거나 공평하게 보려 하면 일이 꼬였죠.  

- 악마들은 이 모습들을 보고 뱃가죽이 찢어지도록 깔깔거리며 즐거워했습니다. 집 밖에는 여전히 조그만 거울 조각들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답니다.
자, 다음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 큰 도시에는 집도 너무 많고 사람도 너무 많아 모든 사람이 자기 정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꽃나무를 심은 화분에 만족해야 했죠. 그런 도시에 가난한 두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에게는 화분보다 조금 더 큰 정원이 있었습니다. 둘은 형제는 아니었지만 친형제처럼 사이가 좋았습니다. 두 아이는 마주 보는 다락방에 살았는데, 처마 한쪽이 맞붙어 있고 맞붙은 두 처마 사이에 홈통이 뻗어 있었습니다. 조그만 창문도 마주 나 있어 홈통을 넘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었답니다. 

- 두 아이의 부모님은 창밖에 커다란 나무 상자를 내놓고 집에서 먹을 채소와 조그만 장미 나무를 길렀습니다. 장미 나무는 양쪽 상자에 한 그루씩 심겨 있었고 둘 다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 "눈의 여왕은 이 안에도 들어올 수 있어요?"
그러자 카이가 말했습니다.
"들어올 테면 들어오라고 해. 내가 뜨거운 난로 위에 앉혀 버릴 테니까. 그럼 스르르 녹아 버리겠지?"
할머니는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 저녁 무렵 카이는 옷을 벗다 말고 창가의 의자 위에 올라가 유리창에 동전으로 만든 동그란 구멍에 눈을 댔습니다. 밖에는 눈송이가 드문드문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가장 큰 눈송이가 꽃나무 상자 가장자리에 내려앉더니 쑥쑥 커져서 순식간에 젊은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얇디얇은 하얀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그 옷은 별처럼 빛나는 눈송이 몇백만 개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여자는 늘씬하고 아름다웠지만 온몸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얼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자는 살아 있었습니다. 여자의 눈동자는 별처럼 환히 빛났지만 차분하고 평온한 느낌은 없었죠. 

- 썰매를 몰던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그 사람은 여자였습니다. 여자는 눈으로 만든 망토에 눈으로 만든 모자를 썼는데 키가 크고 늘씬했으며 온몸이 새하얗게 빛났죠. 바로 눈의 여왕이었습니다.

- "꽤 멀리까지 달려왔구나. 아니, 떨고 있잖니? 내 곰 털가죽 안으로 들어오렴." 
그러고는 카이를 자기 썰매에 태워 털가죽을 덮어 주었습니다. 카이는 마치 눈구덩이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습니다.

- "아직도 떨고 있니?"
그러고는 카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 차가워! 얼음보다 차가운 입맞춤이 반쯤 얼어붙은 카이의 심장에 곧바로 스며들었습니다. 카이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죠. 

- 썰매는 새하얀 닭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 닭은 썰매를 짊어지고 카이를 뒤따라 날아왔습니다. 눈의 여왕이 카이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카이는 게르다 생각도, 할머니생각도, 가족 생각도 까맣게 잊고 말았답니다. 
눈의 여왕이 말했습니다.
"이제는 입 맞추지 않을 거야. 한 번만 더 입을 맞추면 너는 죽어 버릴 테니까."

- 카이는 눈의 여왕을 바라보았습니다. 눈의 여왕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이보다 더 지혜롭고 상냥한 얼굴이 있을까요? 언젠가 창밖에서 손짓하던 때처럼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죠. 카이는 눈의 여왕이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보였고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암산을, 그것도 분수 암산을 할 줄 알고 여러 나라의 넓이와 인구를 안다는 것을 눈의 여왕에게 자랑했습니다. 여왕은 내내 생글생글 웃고 있었어요. 하지만 카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아직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 카이는 드넓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눈의 여왕이 카이를 데리고 높디높은 먹구름 속을 끝도 없이 날아갔습니다. 폭풍이 휘이잉, 휘이잉 울부짖었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옛 노래처럼 들렸답니다. 두 사람은 숲과 호수, 바다와 육지를 지나 날아갔습니다. 발밑에서 차가운 바람이 윙윙 불어 댔습니다. 늑대는 울부짖고 까마귀는 새하얗게 빛나는 눈 위를 울며 날아갔습니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는 커다란 달이 환히 빛나고 있었어요. 카이는 기나긴 겨울밤 내내 그 달을 바라보았습니다. 낮에는 눈의 여왕의 발치에서 잠을 잤고요. 

- 카이가 사라진 뒤 어린 게르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카이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사내아이들은 카이가 크고 멋진 썰매에 자신의 작은 썰매를 연결해서 도시 문 밖으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카이가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죠. 사람들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게르다도 깊은 슬픔에 잠겨 하염없이 울었고요. 이윽고 사람들은 카이가 죽었다고, 도시 옆을 흐르는 강에 빠졌다고들 했습니다. 아, 길고 어두운 겨울날이 끝없이 이어졌답니다. 

 

- 드디어 따뜻한 햇빛이 반짝이는 봄이 왔습니다.
어린 게르다가 말했습니다.
"카이가 죽어 버렸어."
해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 안 믿어."

- 제비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어린 게르다도 그 말을 믿지 않게 되었죠.

- 아직 아슴푸레한 새벽이었습니다. 게르다는 잠든 할머니에게 살며시 입 맞추고 빨강 구두를 신고 혼자서 도시 문을 나서 강으로 갔습니다.
"강물아, 네가 내 친구를 데려갔다는 게 정말이니? 만약 카이를 돌려주면 이 빨강 구두를 줄게!"
그러자 신기하게도 물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습니다. 게르다는 무척이나 아끼는 빨강 구두를 벗어서 두 짝 다 강물에 던졌습니다. 하지만 구두가 기슭 가까이에 떨어지는 바람에 잔물결이 게르다 쪽으로 구두를 되밀어 올렸습니다. 마치 강물이 카이를 데려간 건 자기가 아니니까 게르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죠. 하지만 게르다는 자기가 구두를 멀리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

-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랐답니다.
"어머, 내가 왜 이런 곳에서 꾸물거리고 있을까? 빨리 카이를 찾아야 하는데."

- "혹시 카이가 어디 있는지 아니? 카이가 죽어서 없어졌다고 생각해?"
장미꽃이 대답했습니다. 
"카이는 죽지 않았어요. 우린 지금까지 땅속에 있었어요. 거기엔 죽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카이는 없었는걸요."

- 하지만 꽃들은 양지바른 곳에서 꼬박꼬박 졸며 자기들이 나오는 꿈만 꾸고 있었습니다. 꽃들은 게르다에게 자기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카이를 아는 꽃은 하나도 없었답니다.

- 먼저, 참나리는 뭐라고 했을까요?
"둥! 둥! 큰 북소리, 들리죠? 딱 이 두 소리뿐이에요. 끊임없이 둥! 둥! 울리죠. 여인들의 슬픈 노래를 들어 보세요. 사제들의 고함 소리를 들어 보세요. 새빨간 긴 옷을 입은 힌두교도 여자가 화형대 위에 서 있어요. 불꽃이 여자와 죽은 남편 주위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죠. 하지만 힌두교도 여자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남자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 남자의 눈은 불꽃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어요. 그 남자의 눈빛은 여자의 몸을 재로 만들어 버릴 불꽃보다 훨씬 강렬하게 여자의 마음을 불태워요. 마음의 불꽃은 화형대의 불꽃 속에 사그라져 버릴까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 그럼 메꽃은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요?
"좁다란 산길 위에 옛 기사의 성이 솟아 있어요. 무성한 늘 푸른 잎이 겹겹이 겹치면서 오래된 붉은 돌벽을 기어올라 발코니까지 뻗어 올라요. 아름다운 아가씨가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아래쪽 길을 내려다보고 있죠. 아무리 아름다운 장미꽃도 이 아가씨만큼 싱그럽지 못해요. 바람에 실려 오는 사과 꽃도 이 아가씨만큼 가볍지 못하고요. 아, 아름다운 비단옷이 사락거려요! 그분은 오시지 않는 걸까요?" 

- "나는 단지 내 이야기를, 내 꿈 이야기를 한 것뿐이에요."

 

- "사랑스러운 이야기 같긴 해. 하지만 너무 슬프게 얘기했어. 더구나 카이 이야기는 하나도 없잖아. 히아신스의 이야기는 어떤 거야?"
"어느 곳에 아름다운 세 자매가 살았어요. 셋 다 비칠 듯 투명하고 아름다웠죠. 한 사람은 빨간색, 한 사람은 파란색, 또 한 사람은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어요. 세 자매는 달빛 환한 밤, 고요한 호숫가에서 손을 맞잡고 춤추고 있었어요. 셋은 요정이 아니라 인간이었죠. 주위에는 달콤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어요. 이윽고 세 자매는 숲 속으로 사라졌어요. 하지만 향기는 점점 더 짙어졌죠. 아름다운 세 자매가 누워 있는 관이 울창한 숲에서 나와 호수를 미끄러져 갔어요. 반딧불이가 관 주위에서 조그만 등불처럼 빛나며 날아갔고요. 춤추던 아가씨들은 잠이 든 걸까요, 죽은 걸까요? 꽃 향기는 아가씨들이 죽었다고 말해요. 저녁종이 죽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어요!"
"네 얘기는 너무 슬퍼. 네 향기가 너무 짙어서 죽은 아가씨들이 자꾸만 생각나는걸. 아, 카이는 정말로 죽어 버린 걸까? 땅속에 묻혀 있던 장미는 아니라고 했는데." 

 

- "우리는 카이를 위해 울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런 사람 몰라요. 우린 그저 우리 노래를 부르는 것뿐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노래를요."

- 미나리아재비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른 봄날, 하느님의 태양이 어느 작은 정원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어요. 햇빛은 이웃집의 하얀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어요. 그 벽 옆에는 봄보다 한 발 먼저 핀 노란 꽃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죠. 늙은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어요. 그때 남의 집 하녀로 일하는 아름답고 가난한 아가씨가 휴가를 받아서 왔어요. 이 아가씨는 할머니의 손녀였어요. 손녀는 할머니에게 입맞춤을 했어요. 그 축복의 입맞춤에는 황금이, 진심 어린 황금이 깃들어 있었어요. 입에도 황금이, 땅에도 황금이, 아침 하늘에도 황금이! 자, 이것이 나의 작은 이야기랍니다."

- 게르다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 가엾은 할머니! 그래, 틀림없이 나를 생각하며 슬퍼하고 계실 거야. 카이가 없어졌을 때처럼. 나, 당장 카이를 데리고 집에 가야겠어. 꽃들한테 아무리 물어봐도 헛일이야. 다들 자기 노래만 불렀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걸."

- 게르다는 빨리 달릴 수 있도록 예쁜 옷자락을 걷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수선화를 폴짝 뛰어넘는데 꽃이 게르다의 발을 살짝 건드렸습니다. 게르다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란 노란 꽃에게 물었습니다.
"뭔가 알고 있니?"
그러고는 수선화 쪽으로 몸을 수그렸죠. 수선화는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나는 나 자신이 보여요.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요! 어머, 어머! 난 어쩜 이렇게 향기로울까요? 좁은 다락방에서 가엾은 무희가 옷을 반쯤 입은 채 서 있어요. 한 발로 서기도 하고 두 발로 서기도 하면서 온 세상을 콕콕 밟고 있죠. 하지만 그건 모두 무희의 환상에 지나지 않아요. 무희는 손에 든 천 조각에 찻주전자의 물을 부어요. 그러니까 코르셋에 말이에요.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건 좋은 일이죠! 못에는 새하얀 윗옷이 걸려 있어요. 이 옷도 찻주전자 물로 씻어 지붕에 널어 말린 거죠. 무희는 그 옷을 입고 목에 노란 스카프를 둘러요. 그러면 옷이 한결 새하얗게 보이거든요. 다리를 높이 들고 한 줄기 가지 위에 서 있는 저 미끈한 모습 좀 보세요! 나는 나 자신이 보여요. 나를 볼 수 있어요!" 
 
- 게르다는 커다란 벙어리장갑을 낀 채 산적의 딸에게 팔을 뻗어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순록은 덤불과 그루터기를 뛰어넘으며 큰 숲을 빠져나가서 늪지와 들판을 가로질러 부지런히 달렸습니다. 늑대가 울부짖고 까마귀가 울어 댔습니다. 슉! 슉! 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이 붉은 불꽃을 토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게 바로 오로라예요. 아, 저 아름다운 빛 좀 보세요!"

순록은 밤낮없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빵도 바닥나고 햄도 다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라플란드에 닿았답니다.

- 게르다를 태운 순록은 어느 작은 집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그 집은 아주 초라했습니다. 지붕은 바닥에 닿고 문은 엉금엉금 기어서 지나다녀야 할 만큼 낮았죠. 집 안에는 늙은 라프족 여자 혼자뿐이었습니다. 늙은 여자는 고래 기름 등불 옆에서 생선을 굽고 있었습니다. 순록은 늙은 여자에게 게르다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습니다. 물론 그전에 자기 이야기를 했죠. 자기 이야기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더구나 게르다는 너무 춥고 지쳐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답니다. 

- "오, 저런! 정말 안 됐구나! 아직 더 달려야 해. 여기서 750킬로미터나 더 북쪽에 있는 핀마르크(노르웨이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까지 가야 하니까. 눈의 여왕은 지금 그곳에서 지내면서 저녁마다 푸른 불꽃을 피우고 있단다. 자, 말린 대구에 짧은 편지를 써 주마. 우리 집에는 종이가 없거든. 이걸 들고 내가 아는 핀족 여자한테 가거라. 그 여자가 나보다는 자세하게 가르쳐 줄 거야." 

- 마침내 게르다는 핀마르크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핀족 여자의 집 굴뚝을 두드렸습니다. 그 집에는 문이 없었으니까요.
집 안이 몹시 더웠기 때문에 핀 여자는 거의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키가 작고 몹시 지저분했습니다. 핀족 여자는 게르다를 보자마자 옷을 벗기고 장갑과 장화를 벗겼습니다. 안 그러면 더워서 견딜 수 없을 테니까요. 순록의 머리에는 얼음덩이를 얹어 주었죠. 핀족 여자는 말린 대구 편지를 거푸 세 번 읽고 외워 버리더니 냄비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면 그럭저럭 먹을 만했거든요. 이 여자는 뭐든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답니다. 

- 순록은 자기 이야기를 먼저 한 뒤에 게르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핀족 여자는 사려 깊은 눈을 깜박이며 말없이 들었습니다. 순록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에요. 온 세상의 바람을 실 하나에 묶어둘 수 있으니까요. 뱃사람이 첫 번째 매듭을 풀면 순풍이 불고, 두 번째 매듭을 풀면 강풍이 불고, 세 번째와 네 번째 매듭을 풀면 숲의 나무도 쓰러뜨릴 만큼 강한 폭풍이 불잖아요. 그러니까 부디 이 작은 여자아이한테 약을 만들어 주세요. 눈의 여왕을 무찌를 수 있도록 열두 사람 몫의 힘이 나는 약으로요." 
"열두 사람 몫의 힘이라고? 흠,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
핀족 여자는 선반 위에 있는 큼직한 털가죽 두루마리를 들고 와서 쫙 펼쳤습니다. 거기에는 이상한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핀족 여자는 이마에 땀을 뚝뚝 흘리며 그 글씨를 읽었습니다.

- 순록은 게르다를 위해 한 번 더 진심으로 부탁했고, 게르다도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핀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핀족 여자가 또 눈을 깜박거리더니 구석으로 순록을 데리고 가서 머리에 새 얼음을 얹어 주며 속삭였습니다. 
"카이라는 아이는 분명히 눈의 여왕과 함께 있어. 카이는 거기 있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서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건 유리 조각이 그 애의 심장과 눈에 박혀있기 때문이야. 먼저 그걸 빼내야 해. 안 그러면 그 애는 영원히 눈의 여왕의 꼭두각시일 뿐, 결코 진짜 인간이 될 수 없어." 
"그러니까 게르다한테 그것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나는 게르다가 지금 지니고 있는 힘보다 더 큰 힘을 줄 수 없어. 너는 게르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니?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두 저 애를 돕고 싶어 하잖아. 그러니까 맨발로 이 세상 끝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그걸 모르겠어? 하지만 저 아이한텐 이 사실을 가르쳐 주면 안 돼. 저 아이의 힘은 마음속에 있어. 착하고 순수한 마음이 바로 저 애의 힘이지. 저 아이가 눈의 여왕을 찾아가 카이 몸속에 있는 유리 조각을 빼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도와줄 수가 없어. 여기서 15킬로미터쯤 가면 눈의 여왕의 정원 끝이 보일 테니까 너는 거기까지 저 애를 데려다주면 돼. 눈 속에서도 붉은 열매가 열려 있는 커다란 덤불이 보이거든 그 옆에 게르다를 내려 줘."  
 
- 오로라는 매우 규칙적으로 타올라서 언제 높아지고 언제 낮아질지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한없이 넓은 큰 방 한가운데에는 얼어붙은 호수가 있었습니다. 호수의 얼음은 조그만 조각 몇천 개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각 모양이 모두 똑같았기 때문에 전체가 하나의 훌륭한 예술품 같았죠. 눈의 여왕은 성에 있을 때면 늘 이 호수 한복판에 앉아 자신은 이성의 거울 위에 앉아 있다고, 이 거울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단 하나뿐인 거울이라고 말했습니다.

- 어린 카이는 추위 때문에 새파랗다 못해 거무튀튀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눈의 여왕이 입을 맞춘 탓에 추위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죠. 더구나 카이의 심장은 얼음덩어리 같았답니다. 카이는 여기저기서 판판하고 끝이 뾰족한 얼음 조각들을 끌고 와 이리저리 짜 맞추며 뭔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조그만 나무조각으로 갖가지 모양을 만들며 노는 '중국 퍼즐'과 비슷했습니다. 카이는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니며 갖가지 모양을, 그것도 아주 복잡한 모양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놀이는 '지혜의 얼음 퍼즐'이었습니다. 카이의 눈에는 이런 모양이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의미 깊은 것으로 보였으니까요. 이것도 모두 카이의 눈 속에 박힌 작은 유리 조각 때문이었지만요. 카이가 모양을 완벽하게 짜 맞추면 낱말 하나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카이가 꼭 만들고 싶은 낱말은 좀처럼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이라는 낱말이었지요

- 언젠가 눈의 여왕이 말했습니다.
"만약 그 모양을 짜 맞출 수 있다면, 그때는 너를 자유롭게 놓아주겠다. 그리고 이 세상과 새 스케이트도 주마."

하지만 카이는 결코 그 낱말을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눈의 여왕이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따뜻한 나라들을 한 바퀴 돌고 올 생각이야. 그곳에 가면 검은 솥을 들여다봐야겠어."
검은 솥이란 불을 뿜는 산으로, 이탈리아의 에트나 산과 베수비오 산을 가리킵니다.
"거기다 흰색을 좀 칠해 줘야지. 그러면 레몬과 포도나무에 아주 좋을 거야!"
 
- 그때 게르다가 커다란 문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문에는 사나운 바람이 불어 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게르다가 저녁 기도문을 외자 그토록 사납던 바람이 잠이라도 자려는 듯 차분해졌습니다. 게르다는 춥디 추운 텅 빈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카이가 있었습니다. 게르다는 카이를 한눈에 알아보고 달려가 카이의 목을 끌어안고 외쳤습니다. 
"카이! 그리운 카이! 아, 드디어 널 찾았어!"
하지만 카이는 차갑고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게르다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 눈물이 카이의 가슴에 떨어져 심장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눈물은 얼음덩이를 녹이고 그 속에 있던 작은 거울 조각을 삼켜 버렸죠. 

 

- <눈의 여왕>


- "네가 아직 안 들은 이야기가 있으려나 모르겠구나!"
그러고는 어머니한테 물었어요.
"이 아이는 대체 어디서 발을 적셔 왔답니까?"
어머니가 대답했어요.
"글쎄, 그걸 아무도 모른답니다."

- 사내아이가 할아버지한테 물었어요.
"옛날이야기 해 주실 거예요?"
"오냐, 해 주마. 하지만 그전에 궁금한 게 있단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해 주렴. 학교 가는 길 골목에 있는 도랑은 깊이가 어느 정도 되지?"
사내아이가 말했어요.
"장화 절반 정도 돼요. 하지만 그 정도 되려면 아주 깊은 데까지 들어가야 해요!"
"흠, 이제야 네 발이 젖은 까닭을 알겠구나. 그렇다면 이제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는데, 새로운 이야기가 하나도 없으니 어떡한다!"

- "할아버진 금세 지어낼 수 있잖아요? 엄마가 그러는데, 할아버지가 본 건 뭐든 옛날이야기가 되고 손에 잡히는 아무 물건으로든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대요!"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그런 이야기나 옛날이야기는 아무 쓸모가 없어! 진짜 이야기는 제 발로 찾아와 내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지금 들어가요!' 하고 말하는 법이지."
 
- 어머니는 웃음을 터뜨리며 찻주전자에 딱총나무 차를 넣고 팔팔 끓는 물을 부었죠.
"얘기해 주세요. 어서요!"
"오냐오냐, 이야기가 제 발로 찾아오면 해 주마. 하지만 그 녀석은 워낙 콧대가 높아서 자기 마음이 내킬 때만 찾아오는... 쉿!"

- "왔어! 쉿, 조용히 찻주전자 위에 있어!"
사내아이가 찻주전자를 보았어요. 뚜껑이 저절로 조금씩 들리더니 그 안에서 싱싱한 하얀 딱총나무 꽃이 피어났어요. 이어서 굵고 기다란 가지가 뻗어 나왔어요. 찻주전자 주둥이에서도 가지가 나와 사방으로 뻗으며 점점 크게 자랐죠. 그리고 마침내 잎이 무성하고 아름다운 딱총나무가 되었어요. 나뭇가지는 침대까지 뻗어 나가 침대 커튼을 밀어젖혔어요. 아, 딱총나무 꽃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향기로운지요! 그런데 나무 한복판에 상냥해 보이는 늙은 여인이 묘한 옷을 입고 앉아 있었어요. 여인의 옷은 딱총나무 이파리처럼 초록빛이었는데 희고 커다란 딱총나무 꽃으로 꾸며져 있었죠. 언뜻 보면 천으로 지은 옷인지 꽃과 나뭇잎으로 지은 옷인지 잘 알 수 없었답니다. 

사내아이가 물었어요.
"저 아줌마는 누구예요?"
"응, 옛날 로마나 그리스 사람들은 드리아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나무의 요정)라고 불렀다는데 그 까닭은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보더(뱃사람이나 해군이 많이 살던 지역으로 덴마크의 코펜하겐 변두리에 있다)에서는 좀 더 좋은 이름으로 부르지. ‘딱총나무 어머니'라고 말이다. 저 아줌마가 바로 그 딱총나무 어머니란다. 그럼 정신 바짝 차리고 이야기를 들으렴. 아름다운 딱총나무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 "크기가 딱 저만 한 딱총나무가 뉘보더에 있는 어느 작고 초라한 안뜰 구석에서 꽃을 활짝 피웠단다. 어느 날 오후, 두 노인이 나무 밑에 앉아 따사로운 햇볕을 쬐고 있었어. 나이가 몹시 많은 뱃사람과 나이가 몹시 많은 그의 아내였지. 두 사람은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였는데, 머지않아 금혼식(결혼 50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의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어. 그런데 두 사람 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단다."

- "딱총나무 꽃은 향기를 흩뿌리고, 서쪽으로 기울던 해님은 늙은 부부의 얼굴을 똑바로 비추었어. 두 사람의 뺨이 붉어졌지. 증손자들 가운데 가장 어린 꼬마가 두 사람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기쁜 목소리로 재잘거렸어. 오늘 밤은 축하 파티가 열리고 따끈따끈한 감자를 먹을 수 있다고 말이야. 딱총나무 어머니도 나무 안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세!' 하고 외쳤단다."

 

-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아이가 투덜거렸어요.
"이건 옛날이야기가 아니잖아요."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럼 딱총나무 어머니한테 물어볼까?"

 딱총나무 어머니가 말했어요.
"맞아요, 옛날이야기가 아니에요! 하지만 이제 곧 올 거예요. 가장 신비로운 옛날이야기는 진짜로 있었던 일에서 생겨나는 법이죠. 안 그러면 내 아름다운 딱총나무가 어떻게 찻주전자에서 싹을 틔울 수 있었겠어요!" 
그러고는 침대에 누워 있던 사내아이를 살짝 안아 올렸어요. 그러자 꽃이 가득 핀 딱총나무 가지가 딱총나무 어머니와 사내아이를 에워쌌어요.  

 

- <딱총나무 어머니>

 

 

- 온 지붕 위로 가지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지붕에는 장미꽃이 피어 있었는데 기다란 가지가 지붕 꼭대기까지 뻗어 있고 거기에 조그만 좀 하나가 달려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은 소리가 이 종소리였을까? 맞아! 틀림없어!'


-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딱 한 아이만 빼고요. 그 아이는 마을 사람들한테 들릴 만큼 멀리까지 울리기에는 종이 너무 작고 얇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사람들이 감동할 만한 소리가 아니라고도 했고요.

 

- 하지만 그 아이는 임금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저 애는 늘 똑똑한 척한다니까!"하고 투덜거렸죠. 그러면서 그 아이를 혼자 숲 속으로 보냈습니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아이의 마음은 점점 더 숲의 고독에 젖어들었습니다. 그사이에도 다른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던 작은 종소리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과자 장수의 천막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거기서 차를 마시며 부르는 노랫소리도 실려 왔고요. 하지만 장엄한 종소리는 훨씬 강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어서 종소리에 맞추어 오르간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 소리는 왼쪽, 그러니까 심장이 있는 쪽에서 들려왔습니다. 

- 대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불을 밝혔습니다. 마치 수많은 다이아몬드 등불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 같았죠. 왕자는 하늘과 바다와 숲을 향해 팔을 뻗었습니다. 그때 소매가 깡총한 웃옷에 나막신을 신은 가난한 사내아이가 오른쪽 오솔길로 올라왔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만의 길을 걸어 지금 막 이곳에 닿았답니다. 둘은 서로에게 달려가 자연과 시로 빚어진 거대한 교회 안에서 손을 맞잡았습니다. 두 아이의 머리 위에서 보이지 않는 성스러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축복받은 영혼들이 그 주위에서 춤추며 하느님의 영광을 기뻐하고 찬양했답니다! 

 

- <종>


- "밤낮없이 언덕을 헤집고 다니다가 내려왔는데, 거기서 이런저런 얘기를 제법 듣고 온 모양이더라고. 가엾게도 그 친구는 앞을 못 보지만 감각만큼은 아주 뛰어나거든. 그래서 귀를 잘 기울이면 무슨 일이든 알아낼 수 있지. 요정의 언덕에서는 손님을, 그것도 굉장히 귀한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래. 하지만 지렁이는 그게 누군지 말하려 하지 않았어. 어쩌면 모르는지도 몰라. 아무튼 도깨비불은 다들 횃불 행렬에 참가하려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고, 언덕에 가득한 금과 은은 깨끗이 닦여서 달빛 비치는 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대." 
도마뱀들은 입을 모아 말했어요.
"그 손님이 대체 누굴까?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들어봐, 윙윙거리는 소리를! 와글와글하는 소리를!"

- 바로 그때 요정의 언덕 문이 열리고 늙은 여자 요정이 사삭사삭 걸어 나왔어요. 이 여자 요정은 등이 없었지만(미신에 따르면, 여자 요정은 가면의 뒷면처럼 등이 텅 비었다고 한다) 옷은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있었어요. 늙은 요정 임금님의 여자 시종장인 듯했는데 임금님의 먼 친척뻘이라 이마에 하트 모양의 호박석을 달고 있었죠. 아, 어쩌면 저렇게 걸음이 빠른지요! 사삭사삭! 빨라요, 정말 빨라요! 요정은 그길로 쏙독새가 있는 늪으로 내려갔어요. 
 
- 늙은 여자 요정이 말했어요.
"당신을 요정의 언덕에 초대할게요. 바로 오늘 밤에요!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어요. 여기저기서 손님들을 안내해 오는 일이에요. 당신은 집이 없어서 답례 초대를 할 수 없으니까 이 정도 부탁은 해도 되겠죠? 우리 집에 아주 귀한 손님 몇 분이 오실 거예요. 엄청난 세력을 가진 요괴들이죠. 그래서 늙은 요정 임금님도 자기 힘을 자랑하고 싶어 하세요." 
쏙독새가 물었어요.
"누구누구를 초대할 거죠?"
"이번 성대한 무도회에는 누구든 올 수 있어요. 심지어 사람도요. 자면서 말을 할 수 있거나 요정 흉내를 조금이라도 낼 수 있다면요. 하지만 잔치에는 아무나 올 수 없어요. 가장 신분이 높은 분들만 올 수 있죠. 이 문제로 요정 임금님과 입씨름을 했어요. 나는 유령은 초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먼저, 인어와 그 딸들은 꼭 초대해야 돼요. 물론 뭍에 오르는 일을 달가워하지는 않겠지만, 하다못해 젖은 돌에라도 앉히면 되겠죠. 그러니까 이번엔 인어들도 초대를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트롤(북유럽 민화에 나오는 요정으로, 거인족인 경우도 있고 소인족인 경우도 있다)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꼬리 달린 트롤과 강의 요정과 꼬마 도깨비도 초대해야 돼요. 아 참, 묘지돼지와 지옥말(덴마크에서는 교회 밑에 산 채로 묻힌 돼지나 말이 세 발 달린 괴물이 되어 다리를 절며 찾아오면 가족 중 누군가 죽는다는 미신이 있다), 교회괴물도 빠뜨리면 안 되고요. 물론 셋 다 교회에 딸린 몸이라 우리와 어울리진 않지만, 교회 일이 자기네 일이고 또 우리하고는 가까운 친척이라서 곧잘 찾아오니까요." 

- 언덕에서는 벌써 요정 아가씨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아가씨들은 안개와 달빛으로 짠 기다란 숄을 하늘거리며 춤을 추었어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볼 만한 구경거리였을 거예요. 요정의 언덕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방은 정성스레 꾸며져 있었어요. 바닥은 달빛으로 씻고 벽에는 마녀 기름을 발라 놓아 불빛이 비치면 튤립 꽃잎처럼 빛났죠. 부엌에는 쇠꼬챙이에 꿴 개구리, 어린아이의 손가락을 채워 넣은 뱀가죽, 독버섯 홀씨와 생쥐의 축축한 코에 독초 즙을 끼얹은 샐러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음료수로는 늪의 마녀가 만든 맥주와 지하 무덤에서 익은 초석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었어요. 하나같이 훌륭한 음식이었죠. 후식은 녹슨 못과 교회의 색유리 조각이었고요. 

- "발을 내려라!"
당장은 아니었지만, 아들들은 아버지 말에 따랐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전나무 열매로 옆자리의 여자 손님을 간질였어요. 그러더니 장화를 벗고 책상다리를 하더니 여자 손님에게 장화를 건네지 뭐예요. 

 

- 하지만 아버지인 도브레산의 주인은 아들들과 딴판이었어요. 늙은 트롤 왕은 노르웨이의 깎아지른 절벽 이야기며 천둥이나 오르간 같은 소리를 내면서 새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폭포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물의 요정이 황금 하프를 퉁기면 연어가 급류를 거슬러 오르는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게 들려주었고요. 빛나는 겨울밤 이야기도 들려주었어요. 횃불 든 소년들이 딸랑딸랑 종을 울리며 매끄러운 얼음 위로 썰매를 몰고 갈 때면 투명한 얼음 밑에서 물고기들이 깜짝 놀라 허둥대는 모습이 보인다나요. 늙은 트롤 왕은 대단한 이야기꾼이었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풍경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는 듯했어요. 정말로 목재소의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것 같거나 하인과 하녀들이 노래하거나 할링 춤(노르웨이의 민속춤)을 추는 것 같았죠. 쪽! 늙은 트롤 왕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늙은 여자 요정에게 우정의 입맞춤을 했어요. 하지만 그건 진짜 입맞춤이었어요. 더구나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고요.  

- 이윽고 요정 임금의 딸들이 춤추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가볍게 발을 구르는 간단한 춤을 추었는데, 딸들한테 잘 어울렸어요. 다음에는 흔히 '춤에서 빠져나가는 춤'이라고들 하는 곡예춤을 추었어요.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다리를 쭉쭉 잘 뻗을까요! 어디가 끝이고 시작인지 도통 알 수 없었어요. 어디가 팔이고 다리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고요. 대팻밥처럼 뒤죽박죽이었으니까요. 나중에는 요정 임금의 딸들이 어찌나 빨리 도는지 가엾은 지옥말은 속이 울렁거려 자리를 뜨고 말았답니다. 

- 늙은 트롤 왕이 말했어요.
"오오, 정말 대단한 곡예로군! 그런데 춤추고 다리를 뻗고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것 말고 다른 일은 할 수 없나?"
"이제 곧 보여 주겠네!"
늙은 요정 임금님은 막내딸을 불렀어요. 막내딸은 몸이 가녀리고 달빛처럼 투명했으며 자매들 가운데 가장 예뻤어요. 막내딸이 하얀 나뭇조각을 입에 물었어요. 그러자 막내딸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죠. 이것이 막내딸의 재주였답니다. 
늙은 트롤 왕은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은 이런 재주를 부려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아들들도 그런 재주는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 둘째 딸은 자기 분신을 만들어 그림자처럼 나란히 걸을 수 있었어요. 트롤들은 결코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없죠.
셋째 딸은 전혀 다른 재주를 갖고 있었어요. 늪의 마녀한테 술 담그는 법과 오리나무 그루터기를 반딧불이로 꾸미는 법을 배웠거든요.
"이 아가씨는 살림을 잘하겠어!"
트롤 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셋째 딸과 술잔 대신 눈빛을 주고받았어요. 술은 별로 잘 마시지 못했거든요.

- 이어서 넷째 딸이 커다란 황금 하프를 들고 나왔어요. 첫째 줄을 퉁기자 다들 왼발을 들어 올렸어요. 트롤들은 왼발잡이였거든요. 둘째 줄을 퉁기자 다들 넷째 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게 되었죠. 
트롤 왕이 말했어요.
"위험한 아가씨로군!"

- 그런데 두 아들은 어느새 요정의 언덕에서 나가고 없었어요. 잔치가 따분했거든요.

- 트롤 왕이 물었어요.
"다음 딸은 뭘 할 수 있나?"
그 딸이 대답했어요.
"저는 노르웨이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그러니까 노르웨이 사람이랑 결혼해서 노르웨이에서 살 거예요."
막내딸이 늙은 트롤 왕에게 귓속말을 했어요.
"언니는 '세상은 멸망해도 노르웨이의 험준한 바위산은 선돌처럼 영원히 남는다'는 노르웨이 노래를 들은 적이 있죠. 언니는 죽는 게 무서워서 노르웨이에 가고 싶어 하는 것뿐이에요." 
트롤 왕이 웃음을 터뜨렸어요.

- "일곱째보다 여섯째가 먼저일세!"
하지만 여섯째 딸은 앞에 나서려 하지 않았어요.
여섯째 딸이 말했어요.
"저는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아무도 저한테 신경 쓰지 않아요. 저도 제가 죽으면 입을 수의를 짓느라 바쁘고요!"

- 그래서 막내인 일곱째 딸이 나왔어요. 이 딸은 뭘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야기였어요. 더구나 어떤 이야기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수 있었답니다. 
트롤 왕이 말했어요. 
"여기에 내 다섯 손가락이 있다. 손가락마다 이야기를 하나씩 지어 보아라."

 

- <요정의 언덕>

 

- 어느 날 벼룩과 메뚜기와 팔딱거위(거위 뼈로 만든 장난감으로, 건드리면 튀어 오른다)가 누가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지 겨루기로 했단다. 그래서 이 멋진 구경거리를 보고 싶어 하는 모든 이를 초대했지. 드디어 유명한 높이뛰기 선수 셋이 나란히 방 안으로 들어왔어. 
임금님이 말했어.
"가장 높이 뛰어오른 선수에게 내 딸을 주겠다! 주는 것도 없이 뛰라고만 하는 건 너무 인색하니까!"

- 먼저 벼룩이 나섰어. 벼룩은 매우 예의가 발라서 이쪽저쪽에 인사를 했어. 어쨌거나 벼룩의 몸속에는 아가씨들의 피가 흐르니까. 게다가 늘 인간 하고만 사귀고.
다음에는 메뚜기가 나왔어. 메뚜기는 벼룩보다 뚱뚱했지만 꽤 세련됐고, 날 때부터 갖고 있던 초록빛 제복을 차려입고 있었어. 메뚜기가 말하기를, 자기는 이집트의 전통 깊은 집안 출신으로 그 나라에서 매우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밭에 있다가 3층짜리 카드 집으로 옮겨졌대. 그 집은 카드 그림이 안쪽을 보도록 만들어져 있었어. 문이랑 창문도 어엿이 있는 집이었는데, 둘 다 하트 여왕의 몸에 나 있었지. 

- 벼룩과 메뚜기는 제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어. 둘 다 자기야말로 공주님의 신랑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단다.
팔딱거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사람들은 팔딱거위가 말이 없는 만큼 생각이 깊을 거라고들 했어. 성에서 기르는 개는 냄새만 맡고도 팔딱거위가 훌륭한 가문 출신이라고 했고. 말을 하지 않은 덕분에 훈장을 세 개나 받은 늙은 의원은 팔딱거위에게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어. 팔딱거위의 등을 보면 올겨울이 따뜻할지 추울지 알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 건 달력 만드는 사람의 등을 봐도 알 수 없다나. 

- 드디어 높이뛰기가 시작되었어. 벼룩은 너무 높이 뛰어오르는 바람에 어디로 갔는지 볼 수가 없었어. 그래서 다들 벼룩은 아예 뛰지도 않았고 그건 가장 교활한 방법이라고 헐뜯었지. 
메뚜기는 벼룩의 반밖에 뛰지 못했어. 게다가 하필 임금님의 얼굴 한복판에 떨어지는 바람에 임금님이 무지 불쾌해했어.
팔딱거위는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다들 팔딱거위가 뛸 줄 모른다고 생각했어.

- "설마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그 순간 팔딱거위가 휙 뛰어올랐어. 그러고는 비스듬히 날아가 조그만 황금 의자에 앉아 있던 공주님 무릎에 사뿐히 내려앉았지.

- 임금님이 말했어.
"내 딸아이한테 뛰어오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 거지. 그게 가장 중요해. 그 생각을 해내려면 머리가 좋아야 해. 팔딱거위는 머리가 좋다는 걸 똑똑히 보여 주었어. 역시 뼈대 있는 집안은 뭐가 달라도 달라!" 
이렇게 해서 팔딱거위는 공주님을 신부로 얻었단다.

 

- <높이뛰기 선수>


- 덴마크의 외레순해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크론보르 성이라는 오래된 성이 있습니다. 외레순해협에는 커다란 배가 날마다 몇 백 척씩 지나다닙니다. 영국 배도 있고 러시아 배와 프로이센배도 있습니다. 배들은 해협을 지날 때마다 이 성으로 대포를 '펑!' 쏘며 인사합니다. 성에서도 '펑!'하고 대포를 쏘아 인사하고요. 대포 소리가 "안녕하시오!", "네, 덕분에!"라는 인사말인 셈이지요.

 

- 하지만 겨울이면 배가 한 척도 다니지 않습니다. 건너편 스웨덴 해안까지 바닷물이 꽁꽁 얼어붙어 버리니까요. 대신에 바다가 그대로 넓디넓은 길이 된답니다. 그러면 덴마크 국기와 스웨덴 국기가 펄럭이고, 덴마크 사람과 스웨덴 사람이 서로 "잘 지내나?", "덕분에!" 하고 인사를 나눕니다. 물론 이때는 대포가 아니라 악수를 사이좋게 주고받지요. 그러고는 서로 상대편 나라의 흰 빵과 롤빵을 사 갑니다. 남의 나라 음식이 더 맛있는 법이니까요.

-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훌륭한 볼거리는 오래된 크론보르성입니다. 발길이 끊어진 성 밑의 깊고 어두운 지하실에는 홀거 단스케가 앉아 있습니다. 홀거는 쇠와 강철을 몸에 두르고 억센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습니다. 늘어진 긴 수염을 탁자에 뿌리내리고서요. 홀거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데, 그 꿈에는 덴마크에서 일어나는 일이 빠짐없이 보인답니다.

 

-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하느님의 천사가 찾아와서 말합니다. 지금까지 꾼 꿈은 모두 사실이며, 덴마크는 아직 큰 위험에 빠지지 않았으니 마음 놓고 자도 좋다고요. 하지만 덴마크가 위험에 빠지면 홀거단스케는 탁자에 뿌리내린 수염을 뽑고 탁자를 쩍 쪼개면서 일어난답니다! 그렇게 홀거 단스케는 다시 땅 위에 나타나 이 나라를 지키고 온 세상에 그 이름을 드높일 거예요. 

-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홀거 단스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사내아이는 할아버지 말을 진짜로 믿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하면서 커다란 나무를 깎아 홀거 단스케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무 조각가로, 뱃머리에 달 조각상을 만드는 사람이었거든요. 뱃머리의 조각상은 배의 이름에 따라 정해졌지요. 할아버지가 만드는 홀거 단스케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당당하게 우뚝 서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폭이 넓은 칼을, 다른 한 손에는 덴마크 문장이 새겨진 방패를 들고서요.

- 할아버지는 훌륭한 덴마크 사나이와 여인들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손자는 자기도 홀거 단스케만큼, 아니 그보다 더 아는 게 많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홀거 단스케는 모든 것을 단지 꿈속에서만 볼 수 있으니까요. 사내아이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불을 턱까지 바싹 끌어올리자 수염이 기다랗게 자라나 이불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 같았답니다. 

- "그래,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홀거 단스케가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침대에서 자고 있는 저 아이는 홀거를 보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고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보면 볼수록 홀거 단스케 조각이 훌륭해 보였습니다. 마치 조각상에 색을 입혀 놓은 것 같았지요. 갑옷이 진짜 쇠와 강철로 만들어진 것처럼 번쩍거렸습니다. 덴마크 문장(덴마크 문장은 왕관을 쓴 푸른 사자 세 마리와 아홉 개의 붉은 하트로 이루어져 있다) 속의 붉은 하트가 점점 더 짙은 빛을 띠고 황금관을 쓴 사자가 훌쩍 뛰어올랐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과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문장이야! 사자는 힘을, 하트는 부드러움과 사랑을 나타내지!"

- 할아버지는 맨 위에 있는 사자를 바라보며 잉글랜드를 정복한 크누드 왕을 떠올렸습니다. 두 번째 사자를 보고는 덴마크를 통일하고 벤드 족의 나라를 정복한 발레마르 왕을 떠올렸습니다. 세 번째 사자를 보자 덴마크와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통일한 마르그레테 여왕 생각이 났지요. 이어서 할아버지는 붉은 하트를 바라보았습니다. 아홉 개의 하트는 전보다 훨씬 강하게 빛나며 불꽃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생각은 불꽃 하나하나를 쫓아갔습니다.  

- 첫 번째 불꽃은 할아버지를 좁고 어두운 감옥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갇혀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크리스티안 4세의 딸 엘레오노라 울펠트 부인(귀족인 코르피츠 울펠트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억울한 누명을 쓴 탓에 22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이었지요. 불꽃이 부인의 가슴에 장미처럼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덴마크에서 가장 우아하고 훌륭한 부인의 심장과 하나가 되어 꽃을 피웠답니다.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래, 이게 바로 덴마크 문장에 있는 하트야!"

- 할아버지의 생각은 두 번째 불꽃을 따라 바다로 갔습니다. 대포가 펑펑 터지고 수많은 배가 연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불꽃은 훈장에 달린 장식 술이 되어 비트펠트의 가슴에 달렸지요. 비트펠트는 덴마크 함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이 탄 배를 폭파해 버렸습니다.

- 세 번째 불꽃은 그린란드의 초라한 오두막으로 할아버지를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는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한 전도사 한스 에게데(덴마크의 선교사로 1721 년에 그린란드에 건너가 15년 동안 궁핍한 생활을 하며 기독교 정신을 몸으로 실천했다)가 서 있었습니다. 불꽃은 한스 에게데의 가슴에서 별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덴마크 문장의 하트였지요. 

- 이번에는 할아버지의 생각이 불꽃보다 앞서 날아갔습니다. 불꽃이 가려는 곳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곳은 어느 시골 아낙네의 초라한 방이었습니다. 프레데리크 6세가 그 방 대들보에 자기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 "신기하게도 대포알이 내 옆에 있던 한 사내를 겁내는 것 같지 뭐냐! 그 사내는 즐겁게 옛 노래를 부르며 대포를 쏘았어. 그 모습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여겨지지 않았지. 그 사내의 얼굴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나는 전혀 몰라, 아니, 아무도 몰라. 나는 문득문득 그 사람이 바로 홀거 단스케였을 거라고 생각한단다. 우리한테 위험이 닥치자 홀거 단스케가 크론보르 성에서 헤엄쳐 와서 우리를 구해준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어. 그리고 저기 저 조각상이 바로 그 사람이란다!"

- 조각상의 그림자가 온 벽에 드리워져 천장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그림자가 움직여서 마치 조각상 뒤에 진짜 홀거 단스케가 서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촛불이 흔들렸기 때문이지요. 며느리는 할아버지에게 입을 맞추고 식탁 앞 커다란 팔걸이의자로 할아버지를 모시고 갔습니다. 며느리와 그 남편,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아들이자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힘과 사랑을 상징하는 덴마크의 사자와 하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힘에는 칼에 깃든 힘도 있지만 또 다른 힘도 있다고 힘주어 말하며 오래된 책들이 꽂힌 책장을 가리켰지요. 거기에는 홀베르(덴마크의 위대한 극작가)의 희극 전집도 있었습니다. 워낙 재미있어서 벌써 몇 번씩이나 읽은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처럼 느껴졌답니다.

-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홀베르는 칼을 아주 잘 썼어. 사람들의 어리석은 구석과 모난 구석을 다듬었잖아."

- 할아버지는 거울 위쪽에 걸린 룬데토른(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있는 높이 37미터, 지름 15미터의 원기둥 모양의 탑으로, 천문대로 쓰였다)이 그려진 달력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튀코 브라헤(덴마크의 천문학자), 그 사람도 칼을 썼지. 살과 뼈를 발라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별들 사이에 좀 더 뚜렷한 길을 닦기 위해서 말이야. 아 참, 조각가의 아들인 그 사람(18세기 덴마크의 뛰어난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을 말한다)도 있구나. 그 사람의 아버지도 나처럼 나무를 깎는 사람이었지. 하지만 지금 하려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 이야기야. 머리가 새하얗고 어깨가 다부진 그 늙은 조각가는 온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렸지! 그래, 그 사람도 칼을 쓸 줄 알았어. 거기에 비하면 난 그저 나무 깎는 사람일 뿐이지! 암, 그렇고말고. 아무튼 홀거 단스케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온 세상에 '덴마크의 힘'을 떨친다니까! 자, 베르텔을 위해 건배하자꾸나!"

- <홀거 단스케>

 

 


 

- 그 가운데서도 <못생긴 새끼 오리>는 가장 자전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안데르센은 이 이야기에 자신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고 여러 번 언급했는데, 당대의 비평가 게오르그 브란데스(Georg Brandes)가 자서전을 쓰지 않을 거냐고 묻자 안데르센은 이미 <못생긴 새끼 오리>를 썼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안데르센은 오덴세의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고, 극단에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외모가 볼품없었다. 하지만 '백조의 알에서 나왔다면 설사 오리 농장에서 태어난 무슨 상관이겠느냐'는 말처럼, 출신 환경을 극복하고 타고난 재능으로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괴로운 시간을 참아 내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보편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안데르센의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큰 사랑을 받았다.  

-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인지 안데르센은 <못생긴 새끼오리>의 집필에 많은 공을 쏟았다. 안데르센은 <새로운 동화 : 첫 번째 권 - 첫 번째 모음집>에 수록된 네 작품 가운데 <천사>, <나이팅게일>, <연인들>은 '하나의 영감에서 떠오른 이야기처럼 차례차례 써 나갔다'고 했지만, <못생긴 새끼 오리>는 완성하는 데 여섯 달 이상 걸렸다고 했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새끼 백조>였지만, 인쇄소에 원고를 넘길 때 <못생긴 새끼 오리>로 바뀌었다. 

- 안데르센은 1844년에 <새로운 동화 : 첫 번째 권 - 두 번째 모음집 Nye Eventyr. Første Bind. Anden Samling>을 내놓았다. 이 책에도 <전나무>와 <눈의 여왕>이라는 두 편의 걸작이 실려 있었다. <전나무>는 다른 많은 작품들처럼 안데르센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안데르센은 어려운 환경을 재능으로 극복한 천재가 아니라 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전나무는 잠깐 동안은 크리스마스트리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만 결국에는 잊혀지고 마는데, 신분 상승을 했지만 여전히 상류계급에 완전히 섞이지 못하는 안데르센의 외롭고 불안정한 상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풍기는 우울하고 허무한 정서는 안데르센의 작품이 지금까지와 다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하는 조짐으로 해석된다. 

- <전나무>와 함께 수록된 <눈의 여왕>은 안데르센의 작품 가운데 비교적 자전적인 요소가 덜한 작품이다. 안데르센은 <눈의 여왕>을 쓸 때는 <못생긴 새끼 오리> 같은 작품과 달리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종이 위에서 춤을 추듯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안데르센은 <전나무>를 쓴 바로 다음 날인 1844년 12월 5일에 <눈의 여왕>을 쓰기 시작해 여드레 만인 12월 12일에 완성했다. 

- 작품 속에서 지붕 정원과 유리창에 낀 성에의 이미지는 안데르센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안데르센 자서전>(이경식 옮김, 휴먼앤북스)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붕으로 올라가면 이웃집 홈통과 우리 집 홈통 사이에 흙이 가득 담긴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건 어머니의 정원이었다. 어머니는 정원에 채소를 길렀다. 내가 쓴 <눈의 여왕>에서도 이 정원이 꽃을 피운다.' 또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안데르센은 얼음 아가씨가 아버지를 데려가 버렸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예전 기억을 떠올린다. '어느 겨울날, 우리 집 유리창에 성에가 끼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유리창을 가리키며, 처녀가 팔을 뻗치고 있는 모양 같지 않느냐며 농담처럼 말했다. 나를 데려가려고 왔나 보다.' 

- 이 작품은 일곱 가지 이야기를 통해 게르다의 기나긴 모험을 그리고 있다. 계절과 장소를 바꾸어 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다채로운 인물과 배경이 인상적으로 묘사되고 흥미로운 사건들이 쉴 새 없이 일어난다. 이 작품은 이야기 자체의 재미로도, 또 선과 악의 갈등, 아이의 성장, 모든 것을 극복하는 사랑의 힘 등 여러 층위에서 읽힐 수 있는 복합적인 구성으로도 호평을 받았다.  

- 토르발센은 1844년에 죽었으므로 연도가 잘못되었거나 이 기억이 잘못된 것이지만, '짜깁기 바늘'을 소재로 이처럼 재치 있는 이야기를 빚어낸 것에서 안데르센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콧대 높은 짜깁기 바늘의 모험담을 다루고 있는데,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길을 나섰던 짜깁기 바늘이 결국 짐마차에 깔려 영원히 바닥에 누워 있는 것으로 끝난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손가락의 별칭들은 운율이 맞는 것으로 보아 덴마크 전래 동요 같은 데에 나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 <종>은 <월간 어린이 Maanedsskrift for Børn>(1845)에 실린 작품으로 장엄하고 신비로운 종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 곧 신을 찾아가는 철학적 여정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지혜 탐구에 관한 우화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야기 속의 왕자는 과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외르스테드를, 가난한 소년은 시와 안데르센 자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덴마크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외르스테드는 과학과 아름다움이 모두 신의 작품이라고 보았고, 언제나 과학에 매력을 느꼈던 안데르센은 과학과 예술이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진실에 다다른다고 생각했다. <종>은 안데르센의 작품 가운데 가장 숭고한 이야기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전기 Hans Christian Andersen, A Biography>를 쓴 R. 니스벳 베인의 표현에 따르면 '순수와 자연의 시인이 자기 시의 정점에 다다른 작품'이다.

- <할머니>는 <프레이아 Freia>(1845)에 실린 작품으로, <짜깁기 바늘>과 비슷한 시기에 썼다. 어느 할머니에 관한 추억을 아름답게 회고하는 듯한 이 짧은 이야기에는 사랑의 추억을 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안데르센의 할머니는 실제로 은은히 빛나는 푸른 눈을 가졌으며, 요양원 정원에서 날마다 꽃을 한 아름 따서 안데르센의 집으로 찾아오는 자상한 분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안데르센의 이야기에서 할머니는 <성냥팔이 소녀>, <눈의 여왕>, <할머니> 같은 작품에 상냥하고 지혜로운 인물로 곧잘 등장한다. 
 
- <요정의 언덕>은 <새로운 동화 : 첫 번째 권 - 세 번째 모음집 Nye Eventyr. Første Bind. Tredie Samling>(1845)에 실린 작품으로, 안데르센 특유의 초자연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노르웨이에 사는 트롤들의 방문으로 요정의 언덕은 손님맞이 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성대한 무도회를 준비하는 장면 묘사를 보면 오싹하면서도 그것이 요정의 세계라는 점에서 야릇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안데르센의 묘사들은 대부분 강렬한 시각성을 동반하고 있는데, 빈센트 반 고흐는 안데르센의 옛이야기를 읽고 틀림없이 안데르센이 시각 예술가일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늙은 트롤 왕은 대단한 이야기꾼이었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풍경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는 듯했어요'라고 묘사한 부분은 바로 안데르센 자신의 이야기이리라. 

- <빨간 구두>는 <요정의 언덕>, <높이뛰기 선수>, <양치기 아가씨와 굴뚝 청소부>, <홀거 단스케>와 함께 <새로운 동화 : 첫 번째 권 - 세 번째 모음집>에 실린 작품이다. 병석에 누운 늙은 귀부인을 돌보지 않고 빨간 구두를 신고 무도회에 간 카렌의 죄를 무시무시하게 응징하는 섬뜩한 이야기로, 기독교적인 규범과 가치가 강하게 반영된 작품이다. 이 이야기에서 카렌이 쉬지 않고 춤을 추라는 천사의 형벌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으로 도시의 사형수에게 발을 잘라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나오는데, 안데르센의 작품에 구두나 발이 나오는 작품이 많은 것은 구두 수선공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재키 울슐라거에 따르면 '구두와 발의 이미지는 <빨간 구두>, <행복의 덧신>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인간의 다리와 바꾼 <인어 공주> 이야기에서 상징적으로 거듭 나타난다. 안데르센 사후에 발견된 원고 중에도 구두 만드는 수공업자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린 글이 있었다'고 한다. 

 

- 마찬가지로 무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꿋꿋한 주석 병정>이나 <연인들>은 비극적으로 끝나지만, 이 이야기는 사랑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도자기 인형으로서 '깨질 때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 <홀거 단스케>는 덴마크 전설에서 따온 이야기이다. 홀거 단스케는 덴마크 바이킹 시대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크론보르 성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붉은 수염 왕으로 불리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와 마찬가지로 덴마크가 위기에 빠지면 깨어나서 구해 준다고 전해진다. 안데르센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덴마크 인 홀거를 통해 참된 애국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안데르센은 할아버지한테서 예술적 재능과 탁월한 시각적 통찰력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나무 조각가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실제로 반인반수 등의 이상한 나무 조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던 안데르센 할아버지의 모습이 엿보인다.


- 강무홍

 




- 빌헬름 페데르센(Vilhelm Pedersen, 1820~1859)

안데르센이 발굴한 덴마크 화가로, 안데르센 동화에 처음 삽화를 그렸다. 안데르센은 그를 '천재 화가'라고 격찬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터치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그의 그림은 '안데르센 동화 그림의 정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39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뒤를 이어 로렌츠 프릴리크(Lorenz Frolich)가 안데르센 동화에 삽화를 그렸다.

<돼지치기 왕자>, <나이팅게일>, <연인들>, <못생긴 새끼 오리>, <눈의 여왕>, <빨간 구두> 

- 카이 닐센(Kay Nielsen, 1886~1957)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아서 래컴(Arthur Rackham), 에드먼드 뒤락(Edmund Dulac)과 함께 일러스트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옛이야기 그림들을 많이 남겼다.

<잠의 요정 올레 루코이에>, <딱총나무 어머니>, <양치기 아가씨와 굴뚝 청소부>

- 루이스 모에(Louis Moe, 1859~1945)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 덴마크 왕립 미술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덴마크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며 명성을 떨쳤다. <북유럽신화>, <헨젤과 그레텔> 등 신화와 옛이야기를 그린 작품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홀거 단스케>


- 에드먼드 뒤락(Edmund Dulac, 1882~1953)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아라비안나이트>,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비롯해 수많은 옛이야기에 그림을 그렸다. 수채화로 표현한 환상적인 그림이 호평을 받고 있다.

컬러 그림 : <나이팅게일>, <눈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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