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한병철]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일루젼 2024. 4. 30.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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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병철 / 김태환
출판 : 문학과지성사
출간 : 2015.03.02


       

다른 곳에서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가 언급된 것을 들었다. 해서 문득 생각이 난 김에 오래도록 굴러다니던 <심리정치>를 집어 들었다.

 

<심리정치>는 <피로사회>에서의 자발적인 자기 착취를 자본의 재생산과 연결 짓는다. 이전 시대까지의 권력이 규율을 통해 노동을 강제하고 자본을 착취하는 형태였다면 신자유주의에서의 새로운 권력은 더 이상 개인을 강제하지 않는다. 개인은 무엇이든 허용된 '자유로운' 느낌에 취해 자신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검열하고, 착취하고, 게시한다.

 

모두가 하나의 기준으로 자신을 검열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자본과 숫자뿐이다. 개인의 삶은 수많은 숫자들로 분해된다. 수익뿐 아니라 개인의 정신과 감정 또한 수치화된다. 저자는 이런 상태를 '양화된 자아'라 칭한다. 그러나 한 개인은 숫자들의 총합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데이터들에 '의미'와 '맥락'을 부여해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서사'가 필요하다. 

 

아직 읽기 전이지만 <서사의 위기>는 아마 이 지점에서 출발한 사유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삶은 하나의 이야기이며 이야기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 중이다.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이미 촬영된 영화의 줄거리는 결코 변하지 않지만, 어떤 쿠키 영상을 덧붙이느냐에 따라 전체의 의미와 분위기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설사 자유의지가 환상이라 하더라도, 개개인의 삶에 이러한 '색채'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 정도는 허락되어 있을 것이라고.

 

객관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보다 그것이 어떤 의미가 되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한다고도 믿는다. 

 

저자의 결론은 '바보'의 순수함이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최적화하며 최대 생산을 위해 몰아세우지 않으려면, 그 자체를 즐기고 무용함을 허용할 수 있는 '놀이'로서의 삶이 필요하다. 외부로부터의 규칙과는 다른 자신만의 놀이-삶을 즐기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이는 통일된 가치의 사회에서는 틀림없이 '이물질'이자 '바보'다.

 

본문의 바보는 한 송이의 장미로서 주변과 겉돈다.  

 

"바보는 목적 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에서 마치 떨어진 한 송이 장미처럼 빙빙 맴돌고 있다. 합의하는 인간들, 놀라운 의견일치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 사이에서."   

   

그가 수신하는 신호는 평행한 층이 아닌, 위에서부터 온다. 

 

"등주 고행승, 안테나, 어마어마한 방송의 전파가 성자의 입에서 울려 나오게 하는 것과 동일한 소리가, 바보가 세계의 약한 신호를 수신하는 순간 울려 나온다."        

   

무엇을 어떻게 읽느냐는 개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와 연결된다.

'정확히' 읽어내는 것보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바를 읽어내는 것이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독서는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오독이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 에피소드란 막간극을 의미한다. 자유의 감정은 일정한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나타나 이 새로운 삶의 형태 자체가 강제의 형식임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지속될 뿐이다. 그리하여 해방 뒤에 새로운 예속이 온다. 그것이 주체의 운명이다. 주체, 서브젝트 Subjekt는 문자 그대로 예속되어 있는 자인 것이다.

 

- 우리는 오늘날 우리 자신이 예속된 존재로서의 서브젝트가 아니라 계속해서 스스로를 기획하고 창조해 가는 자유로운 프로젝트 Projekt라고 믿고 있다. 서브젝트에서 프로젝트로의 이행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한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프로젝트 자체가 강제의 형상, 심지어 더 효과적인 예속화의 형식임이 밝혀진다. 외적 강제나 타인의 억압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프로젝트로서의 자아는 성과와 최적화의 강요라는 형식으로 작동하는 내적 강제와 자기 강제에 예속된다. 

 

-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역설적 상황에 빠진다.

 

-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과 같은 심리적 질병은 자유가 직면한 깊은 위기의 표현이다. 즉 그것은 오늘날 자유가 도처에서 강제로 역전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병리학적 표징인 것이다.

 

- 성과주체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노동을 강요하는 주인은 없다. 그는 벌거벗은 생명을 절대화하고 그러기에 노동한다. 벌거벗은 생명과 노동은 동전의 양면이다. 건강은 벌거벗은 생명의 이상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노예는 헤겔 G. W. F. Hegel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속에 등장하는 주인의 주권, 즉 노동하지 않고 오직 향유만 하는 주인의 자유를 알지 못한다. 주인의 주권은 그가 벌거벗은 생명을 넘어서고 심지어 이를 위해 죽음마저 감수한다는 데서 나온다. 이러한 과잉, 즉 과도한 삶과 향유의 양식은 벌거벗은 생명을 염려하며 노동하는 노예에게는 낯선 것이다. 헤겔의 견해와는 달리 노동은 노예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노동의 노예로 남는다. 헤겔의 노예는 주인에게도 노동을 강제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노동의 전체주의를 초래한다. 

 

-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의 특별한 영리함이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만든다. 반면 타자 착취의 질서 속에서는 착취당하는 자들이 연대하고 함께 착취자에 맞서 봉기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마르크스의 이념은 바로 이러한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억압적 지배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적 질서 속에서 사람들의 공격성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인해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된다.   

 

-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일한다. 자본에서 생성되는 자본의 고유한 욕구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라고 착각한다. 자본은 새로운 초월성, 새로운 예속의 형식이다. 우리는 삶이 어떤 외적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오직 삶 자체로 머물러 있는 차원, 즉 삶의 내재성에서 다시 추방당한다.

 

- 근대에 이르러 초월적 차원을 떠받치던 논거들이 타당성을 상실한다면, 그때 비로소 정치가, 사회의 완벽한 정치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로써 행위 규범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협상의 대상이 될 것이며, 초월성은 사회적 내재성의 담론에 밀려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사회는 자체적으로, 순수한 내재성의 차원에서 새롭게 정립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자본이 새로운 초월성으로,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하는 순간 버려진다. 정치는 이로써 다시 노예 상태에 빠지고 만다. 정치는 자본의 하수인이 된다. 

 

- 우리가 빚이 없다면, 즉 완전히 자유롭다면, 우리는 정말로 행동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아도 되려고, 즉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영원히 채무자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액의 부채는 우리가 자유로울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자본은 우리를 다시 채무자(죄인)로 만드는 새로운 신이 아닐까?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은 자본주의를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죄를 씻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지우는 제의를 벌이는 최초의 사례"다. 죄를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부자유의 상태가 영구화된다. "죄를 씻을 길을 알지 못하는 엄청난 부채의식은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보편화하기 위해서 제의에 의존한다."

 

- 전면적 획일화는 투명성의 명령이 초래한 또 하나의 귀결이다. 투명성의 경제는 불일치를 억압한다. 전면적 네트워크화, 전면적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이미 평준화를 촉진한다. 그것은 마치 첩보 기관이 감시하고 조종하기도 전에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것 같은 획일화 효과를 낳는다. 오늘날에는 감시자 없이도 감시가 이루어진다. 커뮤니케이션은 보이지 않는 진행자에 의해 평평하게 다듬어지고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으로 하향 조정된다. 이처럼 자발적인 일차적 감시는 첩보 기관에 의한 외적이고 이차적인 감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 오늘날 소비자가 된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 즉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가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것이다. 그는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는 궁시렁궁시렁 불평하면서 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따름이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는 소비자와 똑같다. 정치가와 정당 역시 이러한 소비의 논리를 따른다. 그들은 "납품"의 의무를 지닌다. 그들은 유권자 고객에게 만족스러운 상품을 제공해야 하는 납품업자로 전락한다. 

- 오늘날 사람들이 정치가에게 요구하는 투명성은 정치적 요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정치적 결정 과정의 투명성이 아니다. 소비자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투명성의 명령은 무엇보다도 정치가를 벌거벗기고 폭로하고 추문 속으로 몰아가는 데 기여할 뿐이다. 투명성의 요구는 추문을 즐기는 구경꾼의 위치를 전제한다. 그것은 참여하는 시민의 요구가 아니라 수동적인 구경꾼의 요구다. 참여는 고객 불만 신고, 환불 요청과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구경꾼과 소비자들이 거주하는 투명사회는 구경꾼 민주주의를 수립한다. 

- 정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자유의 본질적 부분이다. 

 

- 권력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현현한다. 가장 직접적 형태의 권력은 자유의 부정으로 나타난다. 이때 권력자는 심지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권력에 예속된 자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 그러나 저항을 분쇄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것만이 권력은 아니다. 권력이 반드시 강제의 형식을 취한다고 할 수는 없다. 폭력에 의존하는 권력은 최고의 권력이 아니다. 제압해야 할 반대 의지가 형성되어 권력자와 충돌한다는 사실 자체가 권력의 취약성을 증명한다. 권력 자체가 아예 화제조차 되지 않는 때야말로 권력은 어떤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은 크면 클수록 더 조용히 작동한다. 그런 권력은 떠들썩하게 자기를 과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작용한다.  

- 권력은 심지어 자유를 이용할 수도 있다. 부정적 형태의 권력만이 의지를 꺾고 자유를 부정하는 폭력, 안 된다고 말하는 폭력으로 발현된다. 오늘날 권력은 점점 더 허용적 형식을 취해간다. 너그럽게 허용하는 친절한 권력은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자유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 규율 권력은 여전히 전적으로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 그것은 허용이 아니라 금지의 형태로 구현된다. 규율 권력은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를 기술하는 데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는 긍정성의 빛을 발산한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섬세하고 유연하며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며, 결국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예속된 주체는 자신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예속된 주체에게 지배 관계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 지배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다. 스마트 권력은 호감을 사고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려고 한다. 다음과 같은 경고 문구는 좋아요-자본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 1980년대 초에 푸코는 "자아 기술"에 관심을 돌린다. 푸코가 말하는 자아 기술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 규칙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변모시키고 자신의 특수한 존재에 수정을 가하며 자신의 삶을 일정한 미적가치와 일정 수준의 스타일을 갖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행"하는 "의식적이고 의욕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푸코는 역사적 시각에 바탕을 둔, 하지만 권력과 지배의 기술과는 대체로 무관한 자아의 윤리학을 전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푸코가 이때부터 권력과 지배 기술에 저항하는 자아의 윤리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점 커지고 있습니다."

- 신자유주의적 성과주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착취한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자아는 아름다운, 하지만 기만적인 가상이다. 그러한 가상은 자아를 완벽하게 착취하려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섬세한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인을 예속시키지 않는다. 개인이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자신의 내면에 전사하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은 이렇게 내면에 전사된 지배 관계를 자유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의 최적화와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 게다가 총체적인 개념의 혼란으로 감정과 관련된 범주들이 정확한 정의 없이 혼용되고 있다.
감정 Gefühl은 기분 Emotion이나 흥분 Affekt과 동일하지 않다. 우리는 법 감정, 정의 감정, 생활 감정, 민족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법 기분, 정의 기분, 생활 기분, 민족 기분 같은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다. 법 흥분, 정의 흥분 역시 있을 수 없다. 이를테면 비애는 감정에 속한다. 비애의 감정이라고 하지 않고, 비애의 기분, 비애의 흥분이라고 한다면,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 것이다. 기분과 흥분이 모두 뭔가 단순히 주관적인 것만을 나타낸다면, 감정은 일정한 객관성을 띤다. 

- 감정은 이야기를 허용한다. 감정은 서사적 길이와 폭을 지닌다. 흥분이나 기분은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연극이 직면하고 있는 감정의 위기는 이야기의 위기이기도 하다. 오늘날 감정을 이야기하는 연극은 소란스러운 흥분의 극장에 밀려나고 있다. 이러한 연극에서는 이야기가 없는 까닭에 거대한 흥분의 덩어리가 무대 위로 방출될 뿐이다. 감정과 달리 흥분은 어떤 공간도 열어주지 않는다. 흥분은 일정한 선로를 찾아 스스로를 분출시키면 그만이다.  

- 감정은 서술적 konstativ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가 어떠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가 어떠하다는 기분이 될 수는 없다. 기분은 서술적이지 않고 수행적 performativ이다. 기분은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 더 나아가 기분은 지향적 성격을 지니며 일정한 목표를 겨냥한다. 반면 감정은 지향적 구조를 이루지 않을 수도 있다. 불안 감정은 종종 아무런 구체적 대상도 전제하지 않으며, 그 점에서 지향적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공포와 구별된다. 우주적 공감이나 대양적 세계 감정과 같이 특정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감정도 존재한다. 기분도, 흥분도 감정을 특징짓는 이러한 광대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기분이나 흥분은 모두 주관성의 표현일 뿐이다.

- 좌파에게 추악한 것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일 뿐이다. 그래서 모든 노동자 정당의 강령은 노동 해방을 내세울 뿐 노동에서의 해방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동과 자본은 동전의 양면이다.

- 마르크스도 결국 노동 우선의 원칙을 고집한다. 그리하여 "자유 시간의 증가"는 "최대의 생산력”으로서 "노동의 생산력"에 역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로써 필연성의 왕국은 자유의 왕국을 식민화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한가로운 시간은 더 고차원적인 활동을 위한 시간으로서" 그러한 시간을 가진 사람은 그저 일만 하는 주체보다 더 많은 생산력을 지니는 "새로운 주체"로 탈바꿈한다. 자유 시간은 "개인의 완전한 발전을 위한 시간"으로서 "고정 자본의 생산"에 기여한다. 그렇게 지식은 자본이 된다. 한가로운 시간의 증가와 함께, 현대적 표현을 사용한다면, 인적 자본도 증가한다. 목적도 강제도 없는 행위를 가능케 할 한가로움은 자본에 흡수되어 버린다. 마르크스는 "인간 자신이 고정 자본이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일반적 지성"과 함께 자본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오직 삶이 자본이라는 새로운 초월성에서 완전히 해방될 때만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초월성은 삶의 내재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 마르크스의 가정과는 달리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증법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새로운 착취 관계 속에 얽어맨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 사유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자유로운 시간을 정말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 자유로운 시간은 오직 노동의 타자만이, 생산력이 아닌 다른 힘, 어떤 노동력으로도 전환되지 않을 어떤 힘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 형식이 아닌 어떤 삶의 형식, 완전히 비생산적인 어떤 것.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생산의 피안에서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 인간은 사치스러운 존재다. 사치는 본래 소비 행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사치는 오히려 필요와 필연성에서 자유로운 삶의 형식이다. 자유는 일탈, 즉 필연성에서의 이탈(Luxieren, '발목 따위를 삐다'라는 의미-옮긴이)에서 시작된다. 사치는 궁지에서 빠져나오려는 의도를 초월한다. 그런데 오늘날 사치는 소비에 흡수되어 버렸다. 과도한 소비는 부자유이며, 노동의 부자유에 상응하는 강박이다. 자유로서의 사치는 놀이처럼 오직 노동과 소비의 피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사치는 금욕과 가까운 이웃이다.

- 진정한 행복은 일탈과 방종함, 풍부함, 무의미함, 넘침, 잉여에 있다. 즉 필요, 노동과 성과,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 하지만 오늘날에는 과잉 자체가 자본에 흡수되어 그 해방의 잠재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 놀이 또한 사치에 속한다. 단, 그것은 노동과 생산의 과정에서 분리된 것이어야 한다. 생산 수단으로서의 게임화는 놀이의 해방적 잠재력을 파괴한다. 놀이는 사물을 자본의 신학과 목적론에서 해방시켜 사물의 완전히 다른 쓸모를 발견하게 해 준다.

- 언젠가 그리스에서 매우 범상치 않은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다. 그 사건이 범상치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오늘날 자본의 멍에에 심각하게 고통받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뚜렷한 상징성을 띤 사건이었다. 미래에서 온 신호처럼 느껴지는 사건. 아이들이 무너진 집터에서 고액의 지폐 뭉치를 주웠다. 아이들은 그 지폐를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그들은 지폐를 가지고 놀다가 찢어버렸던 것이다. 이 아이들은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는 폐허가 되었다. 이 폐허 속에서 우리는 저 아이들처럼 지폐를 가지고 놀다 찢어버린다.

- "세속화"는 신들에게 속하여 인간의 사용이 금지된 물건을 다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인간에게 되돌려 준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의 아이들은 돈을 완전히 다른 용도로, 즉 놀이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돈을 세속화한다. 세속화는 오늘날 너무나 물신화된 돈을 일거에 세속적 장난감으로 변신시킨다. 

- 아감벤은 종교 religion를 다시 읽기 relegere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종교란 주의하고 있다는 것, 바짝 정신 차리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성한 물건들을 지키는 것, 신성한 물건들이 다른 것과 분리되어 있도록 관리하는 것. 격리야말로 종교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세속화는 격리를 유지하려는 주의 깊은 경계심에 반하여 의식적인 부주의의 태도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 이처럼 세속화는 자유의 실천이며, 우리를 초월성에서, 모든 형태의 예속화에서 해방시킨다. 그리하여 세속화는 내재성의 놀이 공간을 열어준다. 

- 사유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 노동하는 사유와 놀이하는 사유가 그것이다. 헤겔의 사유와 마르크스의 사유를 지배하는 것은 노동의 원칙이다.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 역시 마찬가지로 노동의 의무에 묶여 있다. "염려 sorge"와 "불안 Angst"에 빠져 있는 "현존재 Dasein"는 놀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느긋함"에 바탕을 둔 놀이를 발견한다. 그는 이제 세계 자체를 놀이로 해석한다. 그는 "거의 예측하지 못했던, 이전에 숙고된 바 없는 놀이 공간의 개방성"을 탐사한다. 하이데거의 "시간-놀이공간"은 어떤 형태의 노동과도 무관한 시간-공간을 지시한다. 그것은 예속화 수단으로서의 심리학이 완전히 극복된 사건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디지털 계몽주의가 노예제로 역전될 것임을 깨우쳐줄 3차 계몽주의가 필요하다.

- 빅데이터가 지식을 주관적 자의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들 한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직관 Intuition은 고차원적인 지식의 형식이 되지 못한다. 직관은 그저 주관적인 것, 객관적 데이터 부족을 만회하기 위한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복잡한 상황에서 직관은 맹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론조차 이데올로기의 혐의에 빠진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이론은 불필요하다. 2차 계몽주의는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지식의 시대다. 크리스앤더슨은 예언자적 수사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왜 인간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지 대체 그 누가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행동할 뿐이고, 우리는 유례없이 정확하게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고 측량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 1차 계몽주의의 매체는 이성이다. 이때는 이성의 이름으로 상상력, 육체성, 욕망이 억압되었다. 계몽주의의 치명적인 변증법은 계몽주의를 야만으로 역전시킨다.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변증법이 정보와 데이터와 투명성을 바탕으로 하는 2차 계몽주의 역시 위협하고 있다. 2차 계몽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계몽주의의 변증법은 신화를 파괴하기 위해 등장한 계몽주의가 한 걸음씩 전진할 때마다 스스로 신화 속에 얽혀든다는 데 있다. "거짓된 명확성은 신화의 또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아도르노 Theodor W.Adorno라면 아마도 투명성 역시 신화의 또 다른 표현이며, 다타이즘은 거짓된 명확성을 약속할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동일한 변증법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든 2차 계몽주의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데이터 야만주의로 돌변하게 될 것이다. 

- 다타이즘은 디지털 다다이즘 digitaler Dadaismus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다이즘 역시 의미 맥락을 포기한다. 언어는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다. "삶의 사건들은 시작도 끝도 없다. 모든 것이 대단히 어리석은 방식으로 흘러간다. 따라서 모든 것은 동일하다. 그 단순함을 다다라고 한다."  

- 다다이즘은 허무주의다. 다다이즘은 의미를 완전히 포기한다. 데이터와 수치는 그저 더해져 갈 뿐, 아무런 서사도 지니지 않는다. 반면 의미는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서사의 부재로 인한 의미의 공허는 그저 데이터로 채워질 뿐이다.
 
- 삶의 계측 가능성 내지 양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디지털 시대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양화된 자아" 역시 이러한 신앙을 추종한다. 신체에 자동적으로 데이터를 수집하는 센서가 부착되고 이로써 체온, 혈당, 칼로리의 섭취량과 소모량, 지방질 비중, 이동 프로필 등이 측정된다. 센서는 명상 시의 심장 박동도 체크한다. 긴장을 이완시키는 휴식의 시간에도 중요한 것은 여전히 성과와 효율인 것이다. 마음의 상태, 감정, 일상적 활동도 일일이 기록된다. 이러한 자기 측정과 자기 통제의 목적은 정신적, 육체적 성능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축적되는 어마어마한 데이터 더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도 해주지 못한다. "양화된 자아" 역시 자아에서 의미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다다이즘적 자아 기술이다. 자아는 온갖 데이터로 분해되어 결국 의미의 진공 상태에 이르고 만다.  

- 양화된 자아의 구호는 "수치 Numbers를 통한 자기 인식"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가능한 모든 데이터와 수치를 쌓아 올린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자기 인식이 만들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수치는 자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계산 zahlung은 이야기 Erzählung가 아니다. 그런데 자아를 지탱하는 것은 이야기다. 계산이 아니라 이야기가 자기 발견과 자기 인식에 이르게 해 준다. 

- 빅데이터를 통해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망을 읽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특정한 상황에서 의식조차 되지 않는 모종의 애착을 발전시킨다. 우리는 심지어 왜 갑자기 특정한 욕구를 느끼는지조차 알지 못할 때도 많다. 임신부가 특정 임신 주차에 어떤 물건에 대한 욕망을 가지게 된다면, 이때 임신 상태와 욕망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저 그 물건을 구입할 뿐, 그것을 왜 사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럴 뿐이다. 그냥 그럴 뿐이라는 것, 이는 아마도 의식적 자아에 잡히지 않는 프로이트 Sigmund Freud의 이드와 심리적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빅데이터는 이드를 심리정치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에고로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만일 빅데이터가 우리의 행동과 소망의 배후에 있는 무의식의 왕국으로 입장하게 해 준다면, 우리의 심리 속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가 이를 착취하는 심리정치도 충분히 가능해질 것이다. 

-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영화 카메라로의 문을 열어준다. "클로즈업으로 공간이 확장되고, 슬로모션을 통해 움직임이 확장된다. (...) 여기서 카메라를 향해 말하는 자연은 눈을 향해 말하는 자연과 다르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들이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의식이 섞여 있는 공간이 카메라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공간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 또한 우리는 라이터나 숟가락을 잡으려고 할 때 대강 아무렇게나 해도 전혀 어려움이 없지만, 이때 손과 쇠붙이 사이에서 본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하물며 우리가 느끼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그 동작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 카메라는 자기만의 보조 수단으로, 즉 하강과 상승, 중단과 분리, 확장과 압축 등의 조작을 통해 개입한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을 통해 충동과 무의식의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카메라를 통해 비로소 시각적 무의식을 알게 된다."  

- 인간의 기억은 하나의 이야기이며, 그것은 망각을 필수적 구성 요소로서 포함한다. 반면 디지털 기억은 빈틈없는 덧붙이기이며 누계이다. 저장된 데이터는 셀 수 있을 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저장과 호출은 서사적 과정인 회상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를테면 자서전이 서사적인 회상의 기록인 데 반해, 타임라인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타임라인은 그저 사건과 정보 들의 열거와 덧붙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 기억은 살아 있는 역동적 과정으로서 그 속에서 상이한 시간의 층위가 서로 간섭하고 영향을 미친다. 기억은 부단한 고쳐쓰기와 재배치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해 간다. 프로이트 역시 기억을 유기적 생명체로 파악한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의 연구는 우리의 심리적 메커니즘이 중첩된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네. 때때로 현존하는 기억 자취의 재료가 새로운 관계에 따라 재배열되고 재기술되는 과정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내 이론의 본질적 새로움은 기억이 다양한 종류의 기호로 기록되어 있어서, 한 겹이 아니라 여러 겹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에 있네."

 

- 그러므로 늘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며 동일한 형태로 호출될 수 있는 유일한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디지털 기억은 무차별한, 마치 언데드와 유사한 현재의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살아 있는 것의 시간 구조가 넓게 펼쳐진 시간적 지평을 본질로 한다면, 디지털 기억에는 그런 지평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디지털화된 삶은 생동성을 잃어버린다. 디지털의 시간은 언데드의 시간이다.

- 빅데이터는 절대지絶對知의 인상을 준다. 모든 것이 측정되고 양화될 수 있다. 빅데이터를 통해 사물들은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비밀스러운 상관관계를 드러낸다. 인간 행동에 대한 정확한 예측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지식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대체한다. 그냥 그럴 뿐 Es-ist-so이라는 확인이 왜 그런가 Wieso 하는 질문에 대한 설명을 대체한다.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현실의 양화 과정이 정신을 지식에서 몰아내고 있다.

- 정신의 철학자인 헤겔이라면 오늘날 빅데이터가 약속하는 전지성이란 절대무지에 불과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헤겔의 <대논리학>은 지의 논리학으로 읽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상관관계는 지의 가장 원시적인 단계에 속한다. A와 B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은 A가 변화하면 B에도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강력한 상관관계가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왜 그러한 관계가 성립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냥 그럴 뿐이다. 상관관계는 필연성의 관계가 아니라 개연성의 관계다. A는 빈번히 B와 동시에 발생한다. 이 점에서 상관관계는 인과관계와 구별된다. 인과관계의 근본 특징은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A는 B를 초래한다. 

- 인과율도 지의 최고 단계는 아니다. 상호작용은 인과관계보다 더 복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그것은 A와 B가 서로에 대해 조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A와 B 사이에는 필연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단계에서도 아직 A와 B 사이의 연관성이 파악된 것은 아니다. "주어진 내용을 단순히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데 그친다면, 이는 전적으로 무개념적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 "개념 Begriff"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가 생성된다. 개념이란 A와 B를 자기 안에 포함하면서 in sich begreifen, 이를 통해 A와 B가 이해되도록 begriffen 만드는 C를 가리킨다. 개념은 A와 B를 포괄하며 양자의 관계에 근거를 제공하는 최상의 연관성이다. 이에 따르면 A와 B는 "더 고차원적인 제3항의 계기"를 이룬다. 개념의 단계에서 비로소 지가 성립한다. "개념이란 사물들 자체에 내재하는 것, 사물을 바로 그 사물로 만드는 근거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의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의 개념을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 C에서 비로소 A와 B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 빅데이터는 매우 파편적인 지식만을 제공할 뿐이다. 빅데이터가 보여주는 상관관계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빅데이터에는 개념도 없고 정신도 없다. 빅데이터가 약속하는 절대지는 절대무지와 다름이 없다.

- 개념은 자신의 계기들을 자기 경계 내에 거두어들이고 ein-schließen, 포함시키는 ein-begreifen 하나의 통일체다. 개념은 속에 모든 것이 완전히 포함되어 있는 inbegriffen 결론 Schluss의 형식을 취한다("모든 것은 결론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은 개념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절대지는 절대적 결론이다.

 

- "절대적인 것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것은 결론이다." 계속 덧붙여가는 것만으로 결론에 이를 수는 없다. 결론은 덧붙이기가 아니라 이야기다. 절대적 결론이란 그 뒤에 덧붙이기를 허용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이야기로서의 결론은 덧붙이기의 반대 형상이다. 순수한 덧붙이기로 이루어지는 빅데이터는 결코 결론이나 완결에 이르지 못한다. 빅데이터가 생성시키는 상관관계나 덧붙이기와는 반대로 이론은 서사적지의 형식을 취한다.

- 정신은 하나의 결론, 즉 부분들이 지양되어 의미 있게 담겨 있는 전체다. 전체는 결론의 형식이다. 정신이 없다면 세계는 단순히 덧붙여진 것들의 더미로 해체되고 말 것이다. 정신은 자기 안에 모든 것을 모아들이는 세계의 내면, 세계의 총화를 이룬다. 이론 역시 부분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거두어들이는 하나의 결론이다. 크리스 앤더슨이 선포한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빅데이터는 정신을 완전히 불구로 만든다. 순수하게 데이터의 힘으로 추진되는 인문과학은 더 이상 인문과학이 아니다. 

 

-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잦아들었으니, 통계학적 이성은 곧 낭만주의 운동과 같은 저항에 부딪혔던 것이다. 평균적인 것, 범상한 것에 대한 혐오는 낭만주의의 근본 정서에 속한다. 낭만주의는 통계학적 개연성의 대립항으로서 독특한 것, 비개연적인 것, 돌연한 것을 내세우며, 통계학적 정상성보다는 별난 것, 비정상적인 것, 극단적인 것을 양성한다.

- 통계학적 이성에 대한 혐오는 니체 Friedrich W. Nietzsche에게서도 나타난다. "통계학은 역사에 법칙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 통계학은 군중이 얼마나 구역질 날 정도로 천박하게 획일적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너희가 통계학을 한 번 아테네에 적용해 봤다면! 그랬다면 차이를 느낄 수 있었으리라! 군중이 저급하고 몰개성적일수록 통계 법칙은 더 엄격하게 관철된다. 군중이 더 고귀하고 뛰어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면, 법칙은 당장 끝장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저 꼭대기로 가서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에 이르면, 너희는 더 이상 계산조차 할 수 없으리라. 위대한 예술가들은 언제 결혼했을까! 이에 관한 법칙을 찾으려 하다니, 그 무슨 헛수고란 말이냐! 그러니 역사에 법칙이 있다 한들, 그런 법칙이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고, 그런 역사, 즉 법칙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는 것도 무가치한 것이다." 통계학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행동하는 위대한 인물들 대신 엑스트라들만을" 고려할 따름이다. 니체는 "거대한 군중의 움직임을 중요하고 주된 것으로 취급하고 모든 위대한 인물들을 단순히 그것의 가장 뚜렷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거대한 물결 위로 드러나 있는 작은 물방울 정도로 이해하는" 모든 역사 서술에 대해 반대한다. 

- 니체에게 통계 수치는 그저 인간이 무리 짓는 짐승이라는 것, "점점 더 인간이 똑같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러한 획일화는 오늘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타자, 낯선 것, 불일치를 제거하는 순응의 압력이 발생한다.

 

- 빅데이터는 무엇보다도 집단적 행동 패턴을 가시화한다. 다타이즘 자체가 동일화의 증대 경향을 강화한다. 데이터 마이닝은 기본적으로 통계학과 다르지 않다. 데이터 마이닝이 드러내는 상관관계는 통계적 개연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통계적 평균치를 계산해 낸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 1980년 스피노자 강의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씀드립니다. 그들은 바보 노릇을 합니다. 바보 노릇하기. 바보 노릇하기는 언제나 철학의 기능이었습니다."

 

- 철학의 기능은 바보 노릇하기에 있다. 철학은 처음부터 바보짓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새로운 표현 방식,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모든 철학자는 본래 바보였음이 틀림없다. 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백치 상태 속에서 사유는 모든 예속화와 심리화에서 이탈하는 사건과 유일무이한 것으로 이루어진 내재성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철학사는 바보짓의 역사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만을 아는 소크라테스 Socrates는 바보다. 모든 것을 회의하는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역시 바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바보 같은 말이다. 사유의 내적 수축은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데, 이는 곧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감으로써 처녀 상태를 회복한다. 들뢰즈는 데카르트적 바보의 맞은편에 다른 유형의 바보를 내세운다. "예전의 바보는 명증성을 원했고, 거기에 자기 스스로 도달하려 했다. (...) 새로운 바보는 도대체 어떤 명증성도 원하지 않으며, (...) 부조리한 것을 원한다. 이것은 생각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미지다. 예전의 바보는 진리를, 새로운 바보는 부조리를 생각의 최고 권능으로 끌어올린다."

- 오늘날 아웃사이더, 천치, 바보는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전면적인 디지털 네트워크화와 총체적 커뮤니케이션은 순응의 압박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합의의 폭력은 바보짓을 억압한다. 보토 슈트라우스 Botho Strauss는 오늘의 순응주의와 시민적 관습 사이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 "바보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서로 세심하게 조율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장 잘 견딜 수 있을 만한 분위기로 낮추어진 수준에서, (...) 과거 부르주아 시대의 관습보다 훨씬 더 완고한 관습." 

- 바보 Idiot는 기인 Idiosynkrat이다. 독특함을 의미하는"Idiosynkrasie"라는 단어는 본래 체액의 특이한 혼합과 여기서 비롯하는 과민성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타자에 대해 면역학적 거부 반응을 보이는 특이체질은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계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교환 과정을 가로막는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면역 작용에 대한 억압이다. 정보와 자본의 빠른 순환을 위해 면역 반응은 강력한 억제 대상이 된다. 커뮤니케이션은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반응할 때 최대 속도에 도달한다. 반면 타자성 또는 이질성에서 나오는 저항과 완고함은 동일한 것 사이의 매끄러운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동일자의 지옥 속에서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 커뮤니케이션과 순응의 압박 앞에서 바보짓은 자유의 실천을 의미한다. 본질적으로 바보는 묶여 있지 않은 자, 네트워크에 낚이지 않은 자, 정보가 없는 자다. 그는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한다. "바보는 목적 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에서 마치 떨어진 한 송이 장미처럼 빙빙 맴돌고 있다. 합의하는 인간들, 놀라운 의견일치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 사이에서."

-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 Häresie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 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 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들뢰즈는 이미 1995년에 이러한 침묵의 정치를 선언했다. 그것은 곧 커뮤니케이션과 의사 표현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에 대한 반대 선언이다. "오늘날의 난관은 더 이상 우리가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뭔가 말할 것을 찾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고독과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제 억압적 세력은 더 이상 우리의 의견 표명을 막지 않으며, 오히려 의견을 말하도록 강제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한 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대단한 해방인가! 우리는 그럴 때만 점점 더 희귀해지는 어떤 것, 그러니까 과연 말해질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창조해 낼 수 있게 되리라." 

- 지혜로운 바보 idiot savant는 완전히 다른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수평적인 차원을 넘어, 단순히 정보화되고 네트워크화 되어 있는 상태를 넘어, 더 고차원적 영역으로 상승한다. "애초에 자폐증 환자를 의미하는 말이었던 '지혜로운 바보'는 그 개념적 의미를 덜어내고 어쩌면 그저 끼리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모험가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바보짓은 순결한 공간, 사유가 완전히 새로운 언어에 이르기 위해 필요로 하는 저 먼 곳을 열어준다. 지혜로운 바보는 등주 고행승(기둥 위에서 금욕 생활을 실천하는 동방교회의 수도승-옮긴이)처럼 먼 곳을 보고 산다. 수직적 긴장이 그를 더 고차원적인 합일에 이를 수 있게 해 준다. 그리하여 그는 사건들, 미래에서 온 신호를 예민하게 수신한다. "등주 고행승, 안테나, 어마어마한 방송의 전파가 성자의 입에서 울려 나오게 하는 것과 동일한 소리가, 바보가 세계의 약한 신호를 수신하는 순간 울려 나온다."

- 지능 Intelligenz은 '-사이에서 고르기 inter-legere'를 의미한다. 지능은 시스템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사이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지능에게 외부로 나가는 출구는 차단되어 있다. 허용되는 것은 오직 시스템 내의 선택뿐이기 때문이다. 즉 지능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없고, 다만 시스템이 제공하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고를 수 있을 따름이다.

 

- 지능은 시스템의 논리를 따른다. 지능은 시스템 내재적이다. 시스템은 각자의 방식으로 지능을 규정한다. 지능은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지능은 수평적 차원에 거주한다. 이와 달리 바보는 지배적인 시스템, 즉 지능과 결별하면서 수직적인 것을 건드린다. "백치의 내부는 잠자리의 날개처럼 부드럽고 투명하다. 그것은 극복된 지능으로 아른거린다."  
  


 

 

옮긴이 후기

 

 

- ... 할 수 없는 경우(또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관습과 제도와 법에 따른 부자유, 즉 사회적 부자유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전복을 추구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산자의 부자유를 노예나 농노의 부자유와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의 부당한 폭력에 따른 사회적 부자유로 규정하고, 전근대적 신분제가 사회 혁명을 통해 철폐되었듯이 무산자 역시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실제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통해 성립한 공산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질서의 근본 원칙을 철폐함으로써 유산자에게서 자유를 박탈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무산자를 해방시킨다는 목표에는 접근도 해보지 못한 채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큰 정치적 억압과 강제를 낳으며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 그 사이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들은 돈과 시장의 질서를 완벽하게 자연화하는 데 성공한다.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 질서 너머의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현실적 기반을 상실했고, 돈 없는 자가 감수해야 하는 사회적 부자유는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부자유보다도 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자연적 부자유 상태는 때로 기술 혁신을 통해 해소되기도 하지만, 돈 없는 자를 부자유 상태에서 해방시켜 줄 기술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마법과 같은 기술이 존재한다면 이는 곧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돈으로 인해 생겨나는 부자유는 오직 돈을 통해서만, 즉 자본주의의 논리자체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무산자의 부자유가 움직일 수 없는 자연적 질서로 고착화되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이 질서를 철폐할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국가가 자본주의 체제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강제와 폭력을 행사하는 억압적 권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필요성은 거의 사라진다. 국가는 그저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는 데 전념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돈으로 인해 느끼는 부자유는 숙명적이고 자연적인 삶의 조건이 되었고, 그것의 바탕에 놓인 질서는 나를 포함하여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따른 사회적 부자유가 기술적 불가능성보다도 더 견고한 자연적인 불가능성으로 간주되는 세계, 그 결과로 권력의 노골적인 통제와 강압이 사라져 버린 세계, 그것은 바로 한병철이 말하는 '자유'의 감정이 생겨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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