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사쿠라바 가즈키] 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일루젼 2024. 5. 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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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사쿠라바 가즈키 / 김난주
출판 : 재인
출간 : 2008.12.27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이 정확히 몇 년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2010년 언저리였을 것이다.

 

충격적으로 좋았다. 

 

금기와 터부는 손쉽게 성역(聖域)의 지위를 찬탈한다.

도전받지 않는 그들은 최초의 탄생을 잃어버린 채 전설과 신화의 영역에 남는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일어났던 일이라는 말이 있다. 

존재했던, 존재하는, 존재할 것들에 대한 상상이자 기록. 

 

예술은 끊임없이 한계를 시험해야 한다. 

허용가능한 선을 재정립하고, 그 선이 그어졌던 이유를 상기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이들까지도 구원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까. 나는 파란(波瀾)을 가져왔던 작품들에 알 수 없는 애정을 느낀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를 사랑하는 심미주의적 경향이 짙은 편이다.

좋은 작품이 반드시 윤리적인 잣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크게 없다. 

오히려, 그것이 존재해주었기에 실존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낙관론자다.  

 

하지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묘하게 <내 남자>가 떠올랐다. 10 여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감수성으로 읽으면 어떨지 자못 궁금했다. 

그리고.

여전히 좋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을 것이다. 

 

<내 남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김기덕의 <피에타>를 떠올리게 한다. 

<피에타>보다는 보다 섬세하고, <채식주의자>보다는 짙고 강렬하다. 

누군가는 준고와 하나에게서 융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읽어낼지도 모르겠다. 

또는 오이디푸스와 엘렉트라를 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인간'과 '갈애(渴愛)'를 읽었다. 

   


   

 

2008년 6월.

 

- 내 남자는 훔친 우산을 천천히 펼치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지는 해보다 한 발 앞서 찾아온 밤, 저녁 6시가 지난 긴자의 가로수 길. 비에 젖어 빛나는 아스팔트를 저벅저벅 밟으면서 똑바로 이리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게 앞 쇼윈도에 딱 달라붙어 비를 피하고 있는 내게 훔친 우산을 내밀었다. 우산을 훔친 사람인데, 그 동작은 영락한 귀족처럼 매끄럽고 우아하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 "결혼, 축하한다. 하나."
남자가 우산 속으로 들어선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애매하게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머릿속으로는, 지금 막 약속 장소인 이곳으로 걸어오던 남자의 모습을 몇 번이나 되새기고 있었다. 키만 컸지 호리호리하게 야윈 그. 제멋대로 자란 머리가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다. 이미 젊지 않은 나이인데, 싸구려 허접스러운 양복을 입어도 그렇게 보이지 않을 만큼 반듯한 자세. 올해로 마흔두 살이나 된 데다 직장도 없는 별 볼일 없는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 저녁 하늘에서 후드득후드득, 소나기가 내렸다. 오늘 내리는 몇 번째 소나기였다. 남자는 살며시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화랑 입구에 놓인 우산꽂이에서 마흔두 살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빨간 꽃무늬 우산을 자연스럽게 빼 들었다. 그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펼치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만치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나를 보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거친 피부에 주름이 잡히면서 눈아래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자글자글해졌다. 

- 나는 이때 스물여섯 살이었다. 낡고 꾀죄죄한 것을 업신여기는 마음도 있었다. 약간의 경멸과,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안쓰러움으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맞았다. 내가 비를 피하고 있던 곳은 이탈리아 브랜드의 긴자 본점 앞, 그리고 나는 그 브랜드의 신제품 핸드백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쇼윈도에 전시된 브랜드 제품들이, 궁상맞은 데다 나이도 한참 많은 남자를 기꺼이 기다리는 내게 뭐라 비난하는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내 마음은 산산이 흩어졌다. 

- 남자는 왜 그러냐는 듯이 나를 보았다. 젖은 구두, 어깨 역시 굵은 빗발에 젖어 가고 있었다. 준고는 자신은 아랑곳 않고 내게만 우산을 받쳐 주고 있다. 정성스럽게 손질한 내 갈색 긴 머리. 무릎까지 오는 플레어스커트, 가죽 핸드백. 그 보물들이 하나도 젖지 않도록, 눈앞에서 준고 혼자만 소리 없이 젖어 간다. 눈 아래에 자글자글한 잔주름이 지도록 웃음 짓는 그 얼굴을 나는 슬며시 외면했다. 지난 15년 동안 내내 그랬던 것처럼, 우아하지만 꾀죄죄하고 비참한 남자에게서는 내리는 비 같은 눅눅한 냄새가 났다. 그것이 이 남자의 체취다. 

- "네가 비 맞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무언가를 재미있어하듯 낮게 떨리는 목소리. 한 우산 속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둑어둑해진 가로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음은 얼굴을 올려다볼 때마다 무겁게 가라앉는데, 몸은 어깨와 어깨가 살짝 부딪치기만 해도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 기쁨은 지금 이 자리에서 생겨난 감정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에서 떠내려온 불길한 거품 같은 것이었다. 또 어깨가 살짝 부딪쳤다. 옛날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 나란히 서도 키가 어깨에 못 미쳤는데.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 둘이 나란히, 정처 없는 사람들처럼 걸었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 이렇게 걸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밤으로 끝인데.

- 준고는 또 말없이 웃었다. 눈 아래에 잔주름이 모였다. 나도 살짝 웃었다. 입술 끝만 비틀렸다.
그리고 둘 다 아무 말 없이 가로수 길을 걸었다. 빗발이 점점 굵어졌다. 나는 젖지 않고 남자는 젖는다. 훔친 우산은 옆으로 기우뚱 기울어, 걸을 때마다 흔들리면서 나 하나만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 너무 오래도록 함께 지낸 탓인지 나와 내 남자는 지금까지 대화라는 것을 별로 하지 않았다. 호기심과 흥분으로 충만했던 좋은 시절은 6, 7년 전에 이미 끝나 버렸다. 남은 것은 그저 집요하기만 한 애정 같은 것뿐. 이 사람밖에 없다는 어떤 신앙 같은 확신. 하지만 믿는 신도 의지할 가족도 없는 내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그리고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 

- 저녁나절의 가로수 길은 비가 내리는데도 오가는 사람들로 넘실거렸다. 알콩달콩 속삭이는 남녀와 몇 번이나 스쳐 지난다. 이 가운데 과연 얼마나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을 '이 사람밖에 없다'고 믿고 있을까. 오가는 사람들 저마다에게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빗속에서도 모두가 즐겁게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 눈부시게 하얀 벽에 드넓은 실내의 안쪽 테이블에 오자키 요시로가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내일, 나와 결혼할 사람이다. 아담한 몸을 말쑥한 양복으로 단장한 모습, 여유롭게 자란 분위기와 청결함으로 가득한 남자.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눈썹을 약간 찡그린다. 그 몸짓에, 우리가 조금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뒤따라온 준고가 내 어깨에 몸을 슬며시 기대면서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자키 군."

 

- 요시로와 마주한 자리에 앉자,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준고가 내 옆 자리에 앉아 또 어깨를 슬쩍 기댔다. 비 냄새 같은, 내가 사랑하는 체취가 콧구멍을 자극했다. 남자의 몸짓에 몸이 제멋대로 기뻐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 요시로의 인사치레에 준고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엉뚱한 곳을 쳐다보면서 적당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 구사리노 준고는 내 양아버지다. 그가 나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 지금은 까마득하게 먼, 세월의 저편에 있는 기억이다. 그때 우리는 도쿄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각자 살았고, 그러다 언젠가부터 함께 살게 되었다. 나는 지진 때문에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초등학교 4학년짜리 꼬마였다. 아주 먼 친척인 준고는 복잡한 몇 가지 절차를 거쳐 내 양아버지가 되었다. 8년 전, 준고가 서른네 살 때 우리는 도쿄로 올라왔다. 그렇게 나는 스물여섯 살이 되었고, 이제 내일이면 결혼을 한다.

- 그 세월 동안 나는 어른이 되었고, 돌아보니 양아버지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나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준고는 왜 어린 여자 아이를 굳이 맡으려 했을까. 어렸을 때는 양아버지의 마음을 전부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은 오히려 알 수 없다. 세월이 흐를수록 젊은 시절의 준고가 수수께끼로 가득해졌고, 물에 가라앉은 것처럼 부옇게 번지면서 멀어져 갈 뿐이다. 준고라는 남자가 과거에 한 선택과 앞으로 할 행동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비 냄새 같은 체취를 풍기는 이 양아버지가 바로 내 남자라는 것뿐이다. 

- "남자 혼자서 여자 아이를 키우다니, 전 도저히 못할 것 같습니다. 남자는 일도 있고, 또 자기 자식 같으면 있는 힘을 다하겠지만... 상상이 안 됩니다."
요시로가 웃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준고는 천천히 한쪽 볼을 실쭉거렸다. 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쩌면 아닌지도 모르겠다. 싸구려 검정 양복에 감싸인 긴 다리가 의자에서 바닥으로 그림자처럼 뻗어 있었다. 때로 웨이터가 걸려 넘어질 뻔하면, 준고는 재미나다는 듯 혼자서 씩 웃었다. 
"나야, 시간이 많았으니까."
"시간이 많아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요시로는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 거짓말. 속으로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준고는 그러고는 아무 말 않은 채 내 옆얼굴만 지그시 쳐다보았다. 몸속에서 또 불길한 거품이 보글보글, 제멋대로 끓어올랐다. 

- 준고는 일에 쫓기면서도 빨래를 하고 학부모회에 참석했고, 서툰 솜씨로 조그만 도시락을 싸 주었다. 또 내가 기운이라도 없어 보이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홀가분하게 혼자 사는 방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어린 침입자 때문에 우왕좌왕했던 젊은 준고의 얼굴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스물일곱 살 남자에게 열한 살 난 여자 아이는 악마였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키우려고 바동거렸던 그 시절이 준고의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였을 것이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씁쓸히 웃으면서 고개를 저으리라. 

- "어제 전화로 미리 말씀드렸지만, 결혼할 때 신부가 네 가지 물건을 지니면 행운이 온다고 하는군요.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것, 새 출발에 어울리는 새로운 것, 행복한 사람에게 빌린 것, 파란 것. 섬씽 포라고 해서 이렇게 네 가지인데, 일본의 풍습은 아니지만 낭만적일 것 같아서요."
"... 낭만적이라."
내 입을 쳐다보면서 준고가 웃음을 억누르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시로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 "섬씽 올드, 섬씽 뉴, 섬씽 보로, 섬씽 블루라고 하는 거지."

포도주잔을 내려놓은 준고의 입술 끝에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이 남자의 부드러운 태도가 변화하는 타이밍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무슨 불미한 말을 꺼내려나 보다고 움찔하는 순간, 


- 그러고는 넌지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그건 받았어?"
"섬씽 올드? 응, 받았어. 하지만 비밀이야."
"두 사람만의 비밀? 알았어. 우리도 이제 나가자."

- 요시로와 함께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실내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으로 한 걸음 나서 보니 아까보다 한결 세찬 비가 뿌리고 있었다. 거의 폭풍우였다. 물이 아스팔트 위로 강물처럼 흐르고, 밤하늘은 스산할 정도로 거무칙칙했다. 그 색은 하늘이라기보다 기억 깊은 곳에 침잠해 있는, 과거에 수없이 보아 익숙한 밤의 바다처럼 암울한 검정이었다. 아까 빗물 속을 저벅거리며 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왔던 내 남자를 또 생각했다. 자신은 비에 젖으면서도 우산을 내밀던 준고. 15년 동안, 그는 줄곧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훔친 빨간우산은 레스토랑의 우산꽂이에 그냥 버려둔 채 가 버렸다. 어두운 색 우산이 가득한 우산꽂이 속에서 그곳만 환하게, 마치 새빨간 피의 꽃이 핀 것 같았다. 

- 그 남자는 비를 맞으며 돌아갔다. 자신을 소홀히 여긴다는 점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남자인데.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점에서는, 그는 오래전부터 프로급이었다.

- 그 남자.
내 남자

- "뭐라고?"
고개를 들자, 어리둥절할 만큼 부드러운 미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지금에 와서, 헤어지면."
정말 어쩌면 좋을까. 
같은 의문을 품은 채 나는 준고를 쳐다보았다. 헤어지고 싶지않은데, 느릿느릿 움직여 준고에게서 억지로 몸을 떼어 냈다. 일어나 불을 켰다.

- "하나."
돌아보니 준고는 다다미에 누운 채, 부드러우면서도 조롱하는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랑해, 하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말, 자기 입으로 한 적 없으면서. 하필 이런 날... 현관 밖에서 세탁기가 덜컹덜컹, 덜컹덜컹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이 세상에서 너를 사랑하는 남자는 나뿐이야. 같은 핏줄이니까. 다른 남자에게서 그걸 원해 봐야 소용없지."

-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거기에 있기만 해도 메마르고 딱딱한 소리가 나는 듯했다. 웃으면 눈 아래에 주름이 생기는 양아버지. 소리 없이 그에게 다가가는 늙음의 추함. 늘 거추장스러워하는 길고 가는 다리. 비 냄새. 차가운 목소리. 무질서한 생활과 세월에 지칠 대로 지쳤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묘한 우아함. 아버지의 강렬한 존재감. 
15년 동안이나 단둘이 살았다. 후반의 8년 동안은 숨어 지내는 죄인이었다. 우리의 질긴 인연이 내는 소리,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 기적처럼 아름다웠던 순간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추악한 행동도 옳다고 여겨 행했던 일도, 안이했던 선택도, 모두 아빠와 딸만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이 과거에 묻히려 한다.
내가 버리고 가기 때문이었다.

- 고개를 숙이는데,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더니, 준고는 여전히 '농담이겠지' 하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준고도 몸을 뒤로 젖히면서 웃고는 내가 살며시 내민 꽃다발을 한 손으로 아무렇게나 받아 들었다.
분홍색 리본으로 묶은 꽃다발을 건네는 순간, 준고가 갑자기 늙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피부는 비슬비슬 마르고, 몸은 더욱 야위고, 키도 훌쩍 줄어들었다. 궁상맞으면서도 우아했던 분위기가 안개 걷히듯 싹 사라졌다. 남자에서 아저씨로 자청하여 종족을 바꾼 것처럼. 꽃다발 너머에 있어야 할 내 남자를 찾았다. 아빠가 먼저 슬며시 눈길을 돌렸다. 박수 소리가 커지면서, 또 바스락바스락, 마른 나뭇잎을 밟는 듯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빠?

- 피로연이 끝난 후,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젊은 사람들만의 2차라 분위기가 단숨에 고조되었다. 캐주얼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내가 요시로와 함께 등장하자 친구들이 환성을 지르며 맞아 주었다. 신랑 쪽 친구들은 모두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자신감에 차 있고, 요시로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분위기가 비슷했다. 내 친구들 역시 패션 잡지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머리는 화사하게 손질하고, 엷은 색 원피스나 드레스에 명품 핸드백과 액세서리, 구두까지 빈틈없이 차려입은 집단이었다. 요컨대 나 자신과 구별이 잘 안 되는 여자들이었다.

- 그들은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어울리는 남녀들인 것이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서 웨이터가 음료를 날랐다. 젊지 않은 사람은 웨이터뿐이었다. 양아버지와 연령대가 비슷한 그 남자는 반듯하고 민첩한 걸음걸이로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그가 소리 없이 옆을 지나갈 때마다, 등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 불길한 감각이 내게 너무 흥분하면 안 되지, 하고 겁을 주었다. 겁을 먹을수록, 웃음 띤 얼굴로 다가와 축하해 주는 친구들과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아니, 흥분이라도 해서 끝까지 도망쳐야 했다.

 

- 요시로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하나, 이 바다를 어떤 바다와 비교하고 있는 거야?"
나는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그 카메라를 꺼내, 눈부신 풍경을 담았다.

- 어린 시절 매일 보았던 검푸르게 빛나는 바다가 뇌리를 스쳤다. 마치 의지를 지닌 커다랗고 검은 괴물처럼 나를 꿀꺽 삼키고는 내 남자가 있는 곳으로 곧바로 데려다주었던 그 바다. 어둡게 피어오르는, 그리운 밤의 경치. 벌써 몇 년이나 가 보지 않았지만, 우리를 단단히 얽어매었던 그 바다와 차가운 대지는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으리라. 그 바다에는 오늘도 잿빛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고 있으리라.

- 이제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는 돌아보지 않는다. 얽매이지 않는다. 속으로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일어나 슈트 케이스의 손잡이를 잡았다.
 
- 시댁에서 가까운 메지로의 새로 지은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넓은 거실에 침실, 그리고 각자 따로 쓸 수 있는 방이 하나씩. 벽은 새하얗게 빛났고, 가구와 가전제품은 모델 하우스의 전시품만큼이나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창문을 열면 싱그러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숲이 보였다.
 


2005년 11월.


- 선배가 장난스럽게 코를 킁킁거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여자 둘은 마주 보며 까르륵 웃었다.
"아세요? 이 사람 아버지, 우리 모 회사의 전무입니다. 달짝지근하고 좋은 냄새가 나지만, 그건 권력의 냄새이기도 하죠. 난, 그런 냄새, 좋기도 하지만 한편 싫습니다."
여자 둘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 나는 비슷하게 화장한 두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처세를 위해 얇은 가면을 쓴 듯했던 얼굴이 순간적으로 변화했다. 얇은 베일을 벗어던진 화려한 쪽은 늘 보아 내게는 익숙한 사람의 값을 매기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옛날부터 여자들의 이런 얼굴 속에서 살았다.
그 옆에 앉은 수수한 쪽의 얼굴에도 이제야 표정이라 할 만한 게 어려 있었다. 아까까지 옆에 있는 여자를 흉내 내던 가면이 사라진 그녀 자신의 표정이었다. 
구사리노 씨는 가늘게 뜬 눈으로 왠지 불쌍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순간처럼 수치심이 온몸을 휘감았다. 

- 저 여자,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아무런 힌트 없이도 꿰뚫어 본 듯한, 그런 느낌이 불쑥 들었다. 당황한 나는 구사리노 씨의 눈길을 외면했다. 

 - "다음에 또 식사 같이할 수 있을까요?"
소리 내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 자신도 놀랐다. 지금 그 말, 누가 한 말이지?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몇 번이나 눈을 껌벅거렸다. 나만큼이나 놀란 표정으로 구사리노 씨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예의 그 묘한 눈빛이었다.
"아, 그러니까, 다음에는 가능하면 둘이서."
"놀랐어요. 뭐, 괜찮기는 하지만."
"왜 놀랐는데요?"
"난 그냥 덤으로 나오라는 건 줄 알았거든요. 그런 줄 알았으면 더 멋 부리고 나오는 건데, 평소 차림으로 그냥 나와 버렸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측은하다는 눈빛을 거두지는 않았다. 나는 침착함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아, 죄송합니다. 실은 그런 거였는데..."
"그렇죠, 역시?"
구사리노 씨는 기쁜 듯이 웃었다. 다른 뜻 없이, 자신이 남자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맥 빠진 미소로 답했다. 

- 그리고 둘이 동시에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갈지자로 걷는 선배를 화려한 여자가 부축하고 있었다.
"어째 틀린 것 같군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리자, 구사리노 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어쩌면 잘될지도 몰라요." 

"네?"
"그녀는 의외로 저런 남자 좋아하거든요. 여자는 사회의 아래에서 위로 부는 바람에도 약한 면이 있으니까. 왜냐하면, 여자 자신이 약하니까." 
"무슨 뜻이죠?"
의미를 알 수 없어 되물었다. 구사리노 씨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또 예의 그 눈빛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지상으로 나서자, 메마른 북풍이 옆에서 휙 불어왔다. 나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 코트 깃을 세웠다.
목요일 밤인데 오가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 몇몇이 눈앞을 지나갔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키 큰 가로등이 파르스름한 빛을 지상에 뿌리고 있었다.
그 가로등에,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멀뚱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 긴 다리가 성가시다는 듯, 선 채로 꼬고 있었다. 검은 코트에 검은 구두, 낡아 빠진 싸구려 차림이 가로등 불빛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헙수룩했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쯤이거나 좀 더 많아 보였다. 왼손은 코트 주머니에 푹 쑤셔 넣고, 야윈 오른손으로는 무료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가느다란 담배 연기가 환상적으로 너울거렸다.
마루노우치 외곽은 거리 전체가 금연 구역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사회적 규칙에는 무심한 것일까.

- 한참이나 그 남자를 쳐다보다가, 구사리노 씨가 얇은 코트를 입고 있어 혹시 춥지는 않을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목도리라도 빌려 주려고 목으로 손을 뻗는 순간, 구사리노 씨가 내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처음 들어 본다 여겨질 만큼 끈끈하게 휘감기는 달짝지근한 목소리.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내 옆을 차가운 바람처럼 휙 지나갔다.  

- 검은 남자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왔을 때의 구사리노 씨처럼 표정이 없었다. 남자는 뛰어가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쪽을 쳐다보았다.
뻥 뚫린 구멍 같은 검은 두 눈, 눈이 마주치는 순간 등이 오싹했다. 남자는 그저 거리의 풍경을 보듯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긴 손가락에 낀 담배를 땅에 떨어뜨리고 구두코로 천천히 집요하게 비벼댔다. 불은 이미 꺼졌을 꽁초가 남자의 구두와 땅 사이에 끼여 비명을 지르며 비틀리고 뭉개졌다. 내장이 좌르륵 빠져나온 작은 동물의 시신처럼, 갈색 담배 속이 땅 위에 무참하게 널려 있었다. 바람이 불자, 갈색 자잘한 입자들이 날아올랐다. 

- 간신히 담배에서 발을 뗀 남자가 구사리노 씨를 바라보았다. 춥겠군, 하는 식으로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낡은 코트를 벗었다. 소매가 찍 늘어난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감기에 걸리기 십상인 얇은 차림이었는데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사리노 씨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 주었다. 구사리노 씨는 방금 전까지 우리와 술자리를 함께했다는 것마저 까맣게 잊은 듯 남자에게 몸을 기대고, 야윈 가슴에 얼굴을 파묻듯이 하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 뒷모습을 어안이 벙벙한 채 바라보고 있는데, 남자가 휙 돌아보면서 잘 가라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 역시 영문도 모르면서 고개를 숙였다.

- 뒤늦게 계단을 올라온 선배가 고개를 쭉 내밀고 그쪽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그 소문의 기둥서방인가. 아까 물어볼 걸 그랬지. 난 오늘 무례한 술주정뱅이니까 말이야. 어이 오자키, 자네 저 사람에게 맞았나?"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 아까 구사리노 씨는 내 옆을 토끼처럼 지나면서 어리광을 피우듯 야릇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버지, 라고.

- 어느 모로 보나 삼십 대인 그 남자를 왜 아버지라고 한 것일까. 우리 아버지와 비교하고 말 것도 없다. 우리 부장과 별 차이 없을 나이가 아닌가. 하지만 언뜻 젊어 보여도 회사에 다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주위에는 좀처럼 없을 타입의 남자라 나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딸이 술자리에 나갔다고 가게 밖에서 줄곧 기다리는 아버지가 과연 있을까. 이 추운 날에. 언제 끝날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시답잖은 말마디를 늘어놓는 동안 하염없이 담배를 피우면서 기다렸다는 말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멀어져 가는 둘의 뒷모습에서 뭔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담뱃불 같은. 가물거리지만, 그래도 만지면 뜨거울. 그 온도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하자니 등이 서늘해졌다.
 
-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또 그 눈빛이었다. 아아. 하지만 일단 얘기를 꺼냈으니까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의를 끌기 위해 꺼낸 화제였는데, 얘기를 시작하고 보니 끝이 없었다. 하나는 내가 말하는 내내,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우리 아버지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거든요. 일을 하다 보면 그런 타입의 사람과 간혹 마주치게 되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다른 사람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당치도 않은 수준을 요구하는, 그런 사람. 윗사람 같으면 나도 한번 해 보겠다는 식으로 오기를 부릴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다 보니 영 그럴 마음이 안 생겨요. 왜 그런 건지."
"미워하는 거 아닐까요."
하나가 그렇게 장단을 맞추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 머리가 가슴 앞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 말이 신기해, 이 여자도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런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 논리적이고 옳은 말을 하기는 하는데, 뭐랄까, 아무튼 뭐가 좀 달라요. 그러니까, 따뜻함이 없다고 할까. 이렇게 생각한다는 건 비밀이지만."

-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균형감 있게 생활하자고."
나는 아버지에게는 균형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과 여가. 자기 혼자만의 시간과 이성과 함께하는 시간. 사회인으로서의 품격과 멋지게 살려는 감각. 그런 균형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일에만 매진했다. 남자란 일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이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도 집에 있다가 복도에서 어머니와 우연히 마주칠 때면 이런 끔찍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이, 깜짝이야. 아버지인 줄 알았네.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 "그런 일에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오자키 씨, 아버지와는 피붙이잖아요."
"무슨 뜻이죠?"
하나는 또 키득키득 웃더니, 조용해졌다.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택시는 칠흑 같은 밤의 아라 강을 건너고 휘날리는 눈발 속을 달려, 도쿄 구치소의 정문 앞에 소리 없이 멈췄다. 사방이 어둠에 묻혀 있었다. 집인 듯한 건물의 그림자와 점점이 불이 켜져 있는 낡은 아파트가 보였다. 
 
- '그것'은 숨어서 살고 있어.
느닷없이 귓가에서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 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굵고 탁한 목소리였다. 움찔하면서 몸을 움츠릴 때, 눈앞으로 누군가가 지나갔다. 당당한 체구에 양복을 입은 오십 줄 남자였다. 남자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몸을 돌려 꼬리가 약간 처진 눈을 번쩍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선량한 눈빛에 이마 약간 오른쪽에 커다란 사마귀가 있었다. 지치고 얼어붙은 듯 무표정했다.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것'은 숨어서 살고 있어. 바로 옆에..."

- 남자는 등을 돌리고 급하게 걸어갔다. 깜짝 놀라 마냥 쳐다보고 있는데, 남자의 당당한 뒷모습은 밤의 어둠에 녹아들듯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사방을 돌아보니, 온통 가루 같은 눈발만 휘날리고 있었다.

 

-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구치소의 회색 벽과 낡은 아스팔트와 좌우 도로까지 뻗어 나온 잡초를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눈발이 더 세차게 몰아치면서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눈보라가 되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리는 하나를 허둥지둥 부축했다. 문이 닫히자, 택시는 휑하니 달아나 버렸다.

- 그 뒷모습을 쳐다보는데, 시야에 가로등 밑에서 있는 낯익은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그 그림자는 남자가 지나가는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오로지 천천히 다가오는 나와 하나를, 아니 하나만을 보고 있었다.

 

- 검고 낡은 코트, 여미지 않은 코트 자락이 펄럭거리고 그 아래로 얇은 셔츠가 보였다.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은 일부러 그렇게 멋을 부린 것이 아니라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이리라. 텁수룩한 수염. 날카로운 눈동자. 얇고 창백한 입술에는 담배를 물고 있다. 천천히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눈보라에 뒤섞여 하얗게 빛났다. 
 
- 남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야릇한 소문은 그녀보다 오히려 옆에 있는 화려한 여자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떠올랐다. 불 켜진 방에서 보니 준고 씨는 처음 인상보다 약간 더 늙어 보였다. 눈빛이나 행동거지는 서른일곱이라는 나이보다 젊어 보이지만, 피부는 거뭇거뭇 거칠고, 군데군데 늘어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뭐랄까, 망가진 느낌이었다.

- "저."
어색함을 견딜 수 없어 말을 건네 보았다. 순간적으로 남자의 시선이 내 몸을 찔러, 오싹했다. 웃을 때는 그나마 애교가 있어 보이는데, 웃음이 가시고 나면 눈빛이 유난히 차가워진다. 정말 얼음 같았다. 처음 보는 타입의 그 얼굴에 나는 또 공포를 느꼈다. 어쩌자고 이런 곳까지 따라왔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평소 처세에 능한 체질이니까 적당히 둘러대고 피할 수도 있었는데. 오늘 밤의 나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 "뭐지?"
"저, 아까, 구치소 있는 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늘 그런가요?"
"음."
"시간을 알 수 없잖아요. 언제 돌아올지. 그냥 적당한 때를 봐서 나온 건가요?"
"아니."
준고 씨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퀭한 두 눈으로 집요하게 연기를 좇았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기다리는 거지."
"계속이오?"
"음."

- 창밖에서는 또 눈보라가 횡횡 몰아쳤다.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수많은 아이들의 손이 유리를 박박 긁어 대는 것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구치소의 외벽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면서 몇 시간이나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지만, 내게는 무리였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자, 준고 씨의 눈 아래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혔다. 웃은 것이다. 
"갖고 싶나?"

- 준고 씨가 담배 끝으로 하나의 머리를 가리켰다. 머리가 타지 않을까 겁이 났다. 그때 등이 찌르르하면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무언가가 부추기고 있었다. 

- 준고 씨는 눈을 찌푸리고서 억지스러운 미소를 띠고 나를 보았다.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은, 얼어붙을 듯 차가우면서 무언가에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표정. 그는 담배를 물고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회색 연기를 천천히, 한숨처럼 토해 냈다.
"주지. 언제든." 

 

 

2000년 7월.

 
- 탱크톱만 걸친 모습에 하얀 발이 물에 젖은 듯 촉촉하게 빛났다.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브러시로 빗고 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박거린다. 아직도 졸린 표정이다. 

- 이번에는 내가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서 수염을 깎았다. 모퉁이가 녹슨 뿌연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서른네 살. 이십 대였을 때보다 살이 빠진 듯하다. 지난 반년 동안 계속 바깥에서 일을 했기 때문인지 북쪽에서 살았을 때보다 살이 많이 탔다. 셰이빙 로션을 바르고 두 손으로 볼을 몇 번 두드렸다. 짧게 자른 머리에 왼손을 대고 오른 손가락으로 대충 빗는다. 문틀에 부딪치지 않게 허리를 구부리고 부엌으로 나오자 싱크대 앞에서 하나가 속옷 차림으로 이를 닦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아침인데 눈동자는 나락처럼 검은색이다. 

- 나는 큰 방 창틀에 널어놓은 요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피웠다. 살며시 눈을 감는다. 아침 햇살을 받고 따끈해진 요에서 숨이 컥 막히도록 여자 냄새가 피어올랐다. 반년 전만 해도 하나의 몸에서 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북쪽에서 살 때는 시원한 물처럼 상큼했다. 이를 다 닦은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옷걸이에 걸어 문틀에 걸어 놓은 교복을 내린다. 치마를 입고 나를 돌아보며, 뭐라고 묻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린다.
턱으로 벽장을 가리키자, 하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장문을 열었다. 빨아서 개어 놓은 교복 블라우스를 꺼내 서둘러 입는다. 빨간 타이를 매고, 다다미 위에 앉아 왼발부터 감색 양말을 신는다. 이제 여고생 차림 완성이다. 나는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가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준고?"

-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계속 웃었다. 하나는 다다미 위에 털썩 앉아, 정말 속상하다는 듯 뾰로통해 있었다.
"만날 웃기만 하고.”
"아니, 너무 단정해서."
"그럼 어떻게 해. 할 수 없잖아, 고등학생인데."
하나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을 때, 창밖에서 야옹, 하는 조그만 소리가 났다. 아침인데 벌써부터 번쩍거리는 햇살 아래에서, 갈색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냉장고에서 어묵 한 개를 꺼내 창밖으로 살짝 떨어뜨렸다. 요 위에 턱을 괴고서, 살금살금 다가와 얼른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하나가 옆으로 다가와 요에 얼굴을 묻고서 함께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쉬운 빚을 띤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 키스를 하자, 희미한 치약 냄새가 났다. 밤기운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하품을 하면서 말하자, 하나는 진짜 화를 내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안 갈 거야."
"설마, 갈거면서."
"안 가요. 난, 절대, 뼈가..."
"... 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려던 말을 삼키고 하나는 방긋 웃었다. 걸어갈 때는 저 밑에 있는 하나의 조그만 얼굴이 오토바이 뒤에 탄 지금은 내 얼굴과 같은 높이에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가련하게 웃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그러던 버릇이다. 

- 저만치에서 하나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더니, 한참을 가서는 휙 돌아보았다.
나를 보는 얼굴이 웃고 있지 않았다. 1초를 다투듯 허겁지겁 뛰어 돌아왔다.

- "왜?" 
"아빠, 괜찮아?"
"뭐가?"
하나는 무언가를 살피듯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 색유리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부옇다. 목소리도 멀어진 탓에 하나가 속삭이는 소리가 마치 미적지근한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울렸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는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듯 이쪽을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빠, 오늘 나, 빨리 올게."
"천천히 와도 돼. 동아리 활동도 시작되었고, 친구들하고 얘기도 하고 그래야지."
"아니, 빨리 오고 싶어. 동아리 활동 끝나면 바로 올 거야."

- 하나는 재삼 확인하듯, 바로란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뛰어갔다. 매미 소리가 후덥지근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뛰어가는 하나를 앞질러, 거울 속에서 하나의 가녀린 몸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골목을 돌아 큰길로 나갔다.

- "... 에그. 또 저런 데 앉아 있네."
등 뒤에서 컬컬한 목소리가 들렸다. 입술 한끝을 비죽 올리고 웃으면서 돌아보았다. 하얀 머리를 한데 묶고 때가 꼬질꼬질한 육십 줄 여자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우에노 공원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숙자들이 많다. 이곳에서 대기를 시작한 후로 그들과 얼굴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매일 이런 데나 나와 앉아서. 아직 한창 젊은데 말이야."
"그게 아니라..."
"번듯하게 생긴 남자가 말이야."
"그러니까, 이게 일이라니까요."
나는 도로가에 세워 둔 오토바이를 가리켰다.

- 햇살이 조금씩 강렬해지면서 나뭇잎 사이로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후미에 설치한 짙은 파란색 상자에 열기가 고여 점차 뜨거워졌다.
상자에는 하얀색 글자로 회사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북쪽에 살 때는, 이런 일이 벌이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도쿄 사람들은 모두가 바쁘고 거칠게 사는 탓인지 꽤 쓰임새가 많은 장사다. 퀵 서비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간다에 있는 회사가 주문을 받아 도내 각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라이더의 휴대전화로 연락을 취한다. 라이더는 지시받은 장소에 가서 서류 등을 받아 지정된 장소에 배달한다. 도내에는 우편으로 보내자니 시간이 급박한 서류와 물건들이 넘치도록 많았다. 우리들 라이더는 하루에 열 번에서 열다섯 번 정도 배달을 한다. 실적급으로 수당을 받고 계절에 따라 일거리도 쏠쏠해서, 도쿄에 와서 처음 했던 잡지 배달 일보다는 실수입이 많았다. 

- 노숙자들 몇 명이 꾀어 들었다.담배를 한 개비씩 주자,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내 라이터를 차례로 돌려 가며 불을 붙이고 피우기 시작한다. 할머니에게는 목사탕을 주었다. 한 할아버지가 놀려 댔다.
"이 사람이 올 때마다 슬금슬금 다가온다니까.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지."
"측은해서 그러지."
"아직은 여자인 게지."
웃으면서 나도 농담으로 응수하는데 가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회사였다. 일어나 전화를 받으니, 오늘의 첫 번째 배달 지시였다. 주소를 확인하고 지도를 꺼냈다. 아직은 도쿄의 구석구석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가는 길을 대충 머릿속에 그리고서 오토바이에 올랐다. 

-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사무원이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집에도 딸이 있지만, 그럴 때는 딱 부러지게 한마디 해야죠. 그런 돈 없다고 말이에요. 자식들이 용돈이다 휴대전화 요금이다 하고 삼사만 엔씩 쓰면 살림이 어떻게 되겠어요." 
"아니, 삼사만 엔이 아니라."
"그럼, 얼마요?"
"팔천 엔."
사무원이 느닷없이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는 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꺼낸 지갑을 들여다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게, 삼천 엔. 왜 이렇게 돈이 없어요."
"저금을 하니까. 대학에도 보내야 하고."
"쯧쯧. 아니, 여기 오기 전에는 뭘 했기에. 돈도 없으면서 여유는 잔뜩 부리고, 이렇게 우아한 가난뱅이, 난 처음 본다니까."

"... 급료."
"알았어요, 알았어. 어떻게 해 볼 테니까."
사무원이 웃으면서 몇 번이나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는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구석 자리에서 경마 신문을 보고 있던 동료 라이더가 힐금힐금 이쪽을 보았다.

- "여자 냄새, 지독하다니까. 처음 여기 왔을 때부터 심했어요. 개는 개의, 고양이는 고양이의, 여자는 여자의 냄새를 아는 법이라고요. 아버지에게서 이렇게 냄새가 나면 심정이 복잡할 거야. 그 또래 여자 아이들은 결벽을 떠니까."
"아, 그렇군요."
"그렇다니까. 구사리노 씨는 처음부터 심했어."
사무원은 내 손가락을 끝없이 만지고 또 만졌다. 살며시 손을 빼내자,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며 느릿느릿 화장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코끝에 손가락을 대자, 역시 하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손가락에 딸의 냄새가 짙게 배어,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 주머니에 급료 봉투를 쑤셔 넣고, 때마침 들어온 의뢰를 그 자리에서 받아 사무실을 나왔다. 배달을 끝내고 우에노로 돌아갔다. 뒷골목 재래시장에서 시장을 봐 오토바이 뒤쪽에 설치된 상자에 담고 달렸다. 
 
- 그리고 변명을 하듯 덧붙였다.
"... 마음은 편합니다."
다오카는 찔릴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준고 군, 반년 만에 보란 듯이 떠돌이의 얼굴이 되었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딱 그런 얼굴이야. 그 사람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말이야. 지금까지 지겹도록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봐 왔으니 그런 정도는 알아볼 자신이 있네. 준고, 어르신이 했던 말, 기억하고 있나?" 
몸집이 자그마한 노인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애써 자연스럽게 싱크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등과 손톱에 들러붙은 생선 비늘이 전구의 불빛에 반투명으로 빛났다. 
"어르신이 내게 뭐라고 했던가요?"
"자네에게 뭐랬더라, 이러지 않았나. 타지 사람처럼 되지 말라고. 남자로 태어났으니까, 떠돌이처럼 이리저리 헤매 다니지 말고 태어난 고장의 사람이 되라고 말이야. 부양가족도 있고 하니. 보안부 젊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가장 떠돌이에 가까운 타입이었어. 그런데, 정말 많이 변했군.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 분노와 초조함이 뒤섞인 얼굴이 전체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듯, 다오카 씨는 한참이나 나를 말없이 올려다만 보았다. 
"많은 사람을..."
다오카 씨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낮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봐 왔어. 우선은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고, 그다음 그 가운데서 한 얼굴을 걸러 내지. 내가 찾는 사람, 즉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말이야. 그러다 보니까, 척 보면 어느 얼굴이 '그 얼굴'인지 감이 오게 되더군. 하지만 얼굴을 보고 감을 잡았다고 해 봐야 증거가 없으면 안 되지. 증거는 그다음에 찾아내지만 말이야. 뭘 잘 모르는 인간은 이런 소리를 하지. 살인이란 사소한 계기로 선을 넘어 버린 범죄에 불과하므로 어떤 사람의 인생에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고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소리는 믿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간도 있거든. 아니, 오히려 그쪽이 대부분이지.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되니까 말이야. 선을 넘느냐 마느냐, 그것은 결국 그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네. 젊었을 때는 생각이 좀 달랐지만."

- "그 선을 넘는 인간들은 우리와는 근본이 다른 거야. 아닌가?"
"그런가요?"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뜻밖이라고 생각한 탓인지,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음."
다오카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숨어서 살고 있지."

- "'그것'은, 살인자는, 사회적인 존재인 우리들 속에 숨어 살고 있어. 자신을 위해서 태연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인간이. 겉보기는 어엿한 인간이지만, 한 껍질 벗겨 내면 돼지 같은 인간이지. 자신을 위해서만 살고, 자신과 자신의 육친만 사랑하는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양심조차 없는 괴물이지. 평소에는 조용하고 아주 선량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래 얼굴을 드러내. 내 눈은 '그것'을 가려낼 수 있어." 
"..."


- "그 동네에, 어르신을 남몰래 죽이고 뻔뻔하게 나다닌 철면피가 있었어. 그렇게 좋은 사람이 남의 원한을 살 리가 없지. 그 인간이 어르신을 죽인 이유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늘 평화롭고 고요한 그 북쪽 동네에, 그 조그만 동네에 있었어. '그것'이 숨어서 살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날, 어르신에게 손을 댔지."
"... 그런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게다가 내가 아는 사람이 범인이라면, 어쩌다 실수로 그렇게 된 거 아닐까요?"
"아니지. 실수란 절대 있을 수 없어. 사람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니까. 그런데 태연하게 그럴 수 있으니까 괴물이라는 거야."

다오카 씨는 거듭 그렇게 말했다.
"육친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자신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지.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그들은 돼지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어. 먹는 것도, 돼지 먹이지." 

- 그리고 옷을 벗고, 이불속에서 긴 시간 하나와 뒤엉켜 있었다. 비가 내리는 탓에 밤이 되자 더욱 눅눅해진 한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열기를 띤 피부에 휘감겼다. 요가 미처 빨아들이지 못한 땀이 시트에 고여 끈적거렸다. 땀인지 체액인지 모를 액체로 뒤범벅이 된 채 뒹굴었다. 하나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질러 댔다. 이곳은 도쿄, 근처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다. 하나의 입을 막을 필요도 없고, 너덜너덜하도록 망가져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도 짐승처럼 날뛰었다. 거친 애무에도 하나의 가녀린 몸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욕망이 나락으로 떨어지듯 한없이 탐욕스럽게 가지를 뻗었다. 하나 역시 그런 나에게 끝없이 매달렸다. 나와 하나는 이미 서로의 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어디에 뭐가 숨어 있는지 몰라 끈질기게 탐색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아직 어린아이에 늘 수동적이었는데, 지난 반년동안 하나의 육체는 거짓말처럼 숙달되었다. 마치 자신과 나이차가 그리 없는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아침마다, 도립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하나의 모습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던 것이다. 

- 그날 밤에는 아무리 뒤엉키고 발버둥을 쳐도 만족할 수 없어 끝없이 계속했다. 따로 떨어진 몸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을 하나의 몸이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은 지치고 말았지만, 어느 쪽도 그만두지 않았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그래도 채우려고 포기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둘이 동시에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선명한 불꽃이 떠오른 참이었다.

- "아."
하나가 감탄하며 몸을 이은 채로 창문 쪽으로 손을 뻗는다. 가느다란 두 팔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조그만 손바닥은 내 탓에 끈적거렸다.
"오늘, 불꽃놀이 하는 날이었네."

"아..."

- 덜그럭덜그럭, 창문을 열었다. 마침, 밤하늘에 또 하나의 불꽃이 알록달록하게 떠올랐다. 하나는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헤헤."
"뭐가 우스워."
"아빠, 참 예쁘다."
땀이 찬 요에서 몸을 일으킨 하나가 내 몸을 꼭 껴안았다. 가슴과 가슴 사이에서 서로의 땀이 뒤섞였다. 그렇게 껴안은 채, 창밖에서 하늘로 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2000년 1월.


- "난 절대 결혼 안 할 거야."
그렇게 딱 잘라 말했더니, 쇼코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아빠가 걱정할 텐데. 힘들게 키워 놓았는데, 시집도 가지 않으면..."
"그래도, 난... 내가, 뼈가 되면, 그때."
"뭐, 뼈? 무슨 소리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바다 쪽을 몇 번이나 돌아보면서 혼자 언덕길을 올라갔다. 우리 집은 언덕의 제일 꼭대기에 있다. 안 그래도 지대가 높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공무원용 숙사다. 걸어가는데 목덜미가 싸늘해지면서 코트 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장갑을 낀 채로 땋은 머리에 묶은 하얀 리본을 풀었다. 등까지 내려오는 단단하게 땋은 검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풀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리본이 곱은 손에서 휘리릭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올려다보는데, 눅눅한 겨울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의지를 지닌 듯 제멋대로 흩날리며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 "아,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바람이 몰아쳤다.

- 나의 양아버지 구사리노 준고는 몸베쓰 해상보안부에 근무하고 있다. 보안부에는 육지에서 업무를 보는 사람과 순시선으로 출근해서 해상 순찰을 도는 사람이 있다. 준고는 바다 전문 해상 보안관이다. 순시선에는 24시간 누군가가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준고는 한 달에 몇 번씩 당직 때문에 집을 비우고. 겨울에는 유빙을 순찰하기 위해 순시선을 타고 북방 영토 근처까지 가기 때문에 며칠씩 집을 떠나 있는 날도 많다.  
그런 날, 나는 많이 외롭다. 

 

- 오시오 할아버지는 조팝나무 가지를 향해 셔터를 몇 번 누르고는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으며 숙사에서 멀어졌다.
나는 숙사 앞에 있는 키 낮고 부스러진 벽돌담에 앉았다. 눈을 쓱쓱 치우고 앉자 콘크리트의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 가만히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는 겨울의 오호츠크 해가 저 멀리까지 보인다.
거뭇거뭇한 바다, 부서지는 파도가 얼음 가루처럼 하얗고, 한없이 어둡고 묵직하고 신비로운 바다. 유빙의 도래를 알리는 하얀 띠가 수평선 언저리에 부옇게 떠 있었다. 얼어 가는 바다는 셔벗처럼 전체가 눅진하다. 이 고장에서는 그런 바다를 '겨울잠을 청하는 바다'라고 한다. 적막하고 거대한 풍경.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내 바다를 보면서 자랐다. 몸베쓰에 와서도 그렇다. 
나는 북쪽의 이 바다를 좋아한다.

- 싸늘한 커피 캔을 꼭 쥔 채 나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해가 기울어 갔다. 바람을 타고 눈발에 섞인 바다 냄새가 언덕길을 달려 올라왔다. 나는 하염없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이 해안까지 오려면 아직도 한참이 걸릴 저 먼 유빙의 하얀 띠와, 묵직하게 빛나면서 얼어 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공기가 따끔따끔하게 느껴졌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 추운데도 숨이 탁 막히도록 따뜻한 방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 내가 이곳으로 온 후, 오시오 할아버지는 준고에게 우리 손자 며느리 삼게 나를 달라는 말을 농담 삼아 몇 번 한 적이 있다. 그 일로 준고가 놀릴 때마다 나는 토라져서 결혼은 절대 안 한다고 대답했다. 왜 진심으로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지 정말 답답했지만, 준고는 내 대답을 들을 때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곤 했다.

- 할아버지는 나이를 많이 먹은 탓에, 주위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만 바라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와 누구를 그렇게 손쉽게 맺어 놓고는, 행복한 미래일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런 게 늙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으면서 쇠약해졌기 때문에 친절한 마음 역시 약해졌는지도 모르겠다.

- 나는 잠자코 바다만 내려다보았다.
"준고 군은 요즘 잘 지내고 있지?"
"네."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바람이 또 몰아쳤다.
"전, 우리 아빠를 굉장히 좋아해요."
"그것 참 다행이로구나. 그래도 처음에는 저걸 어쩌나 싶었다. 먼 친, 척..."
오시오 할아버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강조하듯 다시 이었다. 

"먼 친척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하더니, 정말 데려와서 말이야."
 
-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까 집을 비우는 일이 많잖니. 가족을 잃은 지 얼마 안 된 너를 혼자 남겨 놓고 며칠씩이나 집에 들어오지를 않으니,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하던지."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요." 
"그러냐? 그래도 그 사람, 나쁜 사람은 아닌데,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떠돌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봐와서 아는데, 옛날부터 좀 제멋대로였어." 
"남자가 다 그렇잖아요."
내가 어른 같은 말투로 말하자,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나는 속이 상해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뭐가 그렇게 우스운데요?"
"아니, 남자는 다 그렇다는 말 때문에, 하나에게 한방 먹었구나.”

- "아아, 아빠다..."
그 순간, 내 입에서 한숨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시오 할아버지도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디?"
그렇게 묻고는 안 보인다는 듯이 온 얼굴에 주름이 잡히도록 눈을 찡그렸다.

 

- 지붕이 기우뚱한 버스 정거장에 색깔이 칙칙한 조그만 버스가 서 있었다. 주차장 쪽에서 훌쩍 나타난 준고가 목을 잔뜩 움츠리고 천천히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보통 사람들보다 한 뼘이나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게 야위었다. 검은색 다운재킷 아래로 길쭉한 다리가 그림자처럼 뻗어 있다. 한 번 멈춰 섰다가 이쪽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한다. 짧게 자른 머리가 눅눅한 바람에 무늬를 그리듯 흔들린다.
준고가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행복했다.

- 준고는 한 손에 슈퍼마켓의 묵직한 비닐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다시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한 손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이자 다시 걷는다. 언덕길을 올라오는 내내 눈을 치뜨고 나를 쳐다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오시오 할아버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아빠가 다가오고 있다.

- 약간 퀭한 눈, 얼굴 생김은 반듯한데 어딘가 모르게 지쳐 있는 표정. 준고는 지금 서른네 살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곱게 생긴 남자였는데, 이미 젊지 않은 지금은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 
숙사로 다가온 아빠가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 아침에 깎은 수염이 조금 자랐고 피부에도 철야의 피로감이 어려있다. 이마는 기름이 번져 번들거리는데 볼은 푸석푸석하다. 입에 문 담배를 깨물듯이 얼굴 한쪽을 뒤틀면서 말했다. 
"사탕, 먹을래!"
"응!"

- 나는 벽돌담에서 뛰어내려 눈을 차면서 준고에게 달려갔다. 준고는 비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막대사탕을 꺼내서는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더니, 또 한쪽 볼을 씰쭉거리며 씩 웃었다. 갑자기 내 입에 칼이라도 꽂듯 사탕을 쑤셔 넣는다. 다행히 입을 짝 벌리고 있어서, 사탕은 아빠가 원하는 대로 내 입 안에 쏙 들어온다. 혀로 휘감고 살살 핥는다. 준고는 막대를 그대로 쥔 채 관찰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고 막대에서 손을 떼었다. 물고 있는 담배에 그 손을 대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과 함께 연기를 토해 냈다. 무척 피곤해 보였다. 걱정스러워 아빠를 열심히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준고가 꿈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가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 다녀왔다. 하나."
목소리는 낮고, 달콤했다.
"응. 어서 와 준고."

- 그다음 순간 준고가 내 등 뒤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오시오 할아버지를 그때야 알아본 듯했다. 눈초리와 말투가 변했다. 또 담배 연기를 토하면서 엄하게 꾸짖듯 말한다.
"군것질, 너무 하지 마라. 저녁밥 못 먹겠다."
"아빠는. 지금 아빠가 사탕 줬잖아."
"그건 그거고. 아무튼, 들어가서 저녁 준비 하자."
힐금힐금 오시오 할아버지를 보면서 눈을 밟고 걷는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플래시가 하얗게 빛났다.
둘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언뜻, 눈길이 마주쳤다. 불안해서 올려다보자, 준고는 담배를 문 채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고, 용기를 내어 나도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준고와 함께 할아버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은색 카메라에 눈을 대고 이쪽을 향해 있는 오시오 할아버지의 입가가 벙긋 벌어졌다.
"둘 다 웃어요!"
나와 준고는,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머쓱해하면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 준고는 입에서 담배를 떼어 짜증스럽다는 듯 눈 속에 휙 내던졌다. 빨간 불이 눈에 묻히면서 쉭, 하는 소리를 냈다. 조금 전까지 빨갛게 타오르던 담뱃불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했다. 준고가 피곤해서 짜증을 부리는 것이다. 웃고는 있지만 사실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둘이 나란히 서서 은색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동시에 맑은 미소가 깊어진다. 

- "할아버지, 예쁘게 찍어 주셔야 돼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행복한 딸로 보이기를. 그 은색 카메라에 아무것도 찍히지 않기를.

- 바다 반대쪽, 울창하고 험악한 산으로 해가 떨어지면서 어둠이 한층 짙어졌다. 겨울의 몸베쓰는 날이 금방 저문다. 오시오 할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하늘에서 하얀 벌레가 떼를 지어 떨어지는 것처럼 눈발이 휘날리는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준고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이미 웃음은 없었다. 불어 터질 듯한 짜증과 암울한 빛만 있을 뿐이었다. 손을 잡고 숙사를 향해 다시 걸었다. 나는 싸늘한 목걸이에 매달려 있는 열쇠로 문을 열었다.

- "아빠, 왠지 졸린 것 같다."
이웃 사람들에게 다 들리게, 조잘조잘 얘기하면서 현관으로 들어섰다.
북쪽 사람들은 한기를 차단하기 위해 창문이나 문을 꼭꼭 닫는다. 집을 지을 때도 외벽을 최대한 두껍게 한다. 묵직한 문을 닫자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집 안으로 차가운 고요함이 흘러든다. 밖에 있는 것과 분리되어 둘만 남은 느낌이었다. 

- 불을 켜려고 곱은 손을 뻗는데, 준고가 뒤에서 꼭 껴안았다. 위쪽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몸을 뒤덮듯 무겁게. 그리고 긴 팔을 뻗어, 스위치를 누르려는 내 손을 눅눅한 손바닥으로 감쌌다. 핀으로 고정한 것처럼 내 손이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행복해서, 움직일 수 없었다.

- 거실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구석에 소파가 있고, 그 반대쪽에 조그만 텔레비전이 있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커다란 접시처럼 텅 빈 공간. 바닥이 따뜻해서 앉아있다 보니 허리 부근까지 노근노근해졌다.
부엌에서 돌아본 준고가 씩 웃었다. 한쪽 볼만 약간 일그러졌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 먹이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얌전하게 기다렸다.

- 준고가 성큼성큼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 눈에 이글거리는 욕망이 보여, 나는 방긋 웃었다. 긴 팔이 뻗쳐 와 내 턱을 부드럽게 감싼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교복 윗도리를 벗기고, 붉은색 타이를 풀어내고,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푼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에 짓눌리듯 기쁘면서도 허전한 감정이 밀려온다. 

- 소리는 내지 않는다. 삼중 새시인 창문을 꼭 닫았지만 내벽이 얇아 때로는 옆집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곤 한다. 양쪽 집에는 해상보안부 사람과 그 가족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조그만 동네 사람들은 서로를 거의 다 알고 지낸다. 나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꾹 참는 표정을 짓는다. 안쪽 작은 방에 침대가 있기는 하지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 그리고 일어나 가는 눈을 뜨고서 가만히 내려다본다. 아빠는 키가 커서 그렇게 내려다보면, 길고 가는 팔을 접시 위로 뻗고서 어른용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기도하듯 긴 시간. 손대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뜻을 굳힌 듯 천천히 내 몸을 덮는다. 아빠의 커다란 그림자에 눈앞이 어둠처럼 캄캄해진다. 아빠의 카랑카랑 마른 입술과 내 조그만 입술이 겹친다. 등뼈가 스르륵 녹아 버릴 것 같다. 혀가 살아 있는 생선처럼 미끄덩 안까지 들어온다. 숨에서도 침에서도 비릿한 냄새가 난다. 

- 아빠가 좋아하니까, 나도 함께 내 몸 어딘가에 준비되어 있을 여자를 열심히 찾기 시작한다. 이런 시간이 무척 길다. 때로는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심각하기도 한 이런 시간이 매일 되풀이되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빠는 무척 흥분하기 때문에 행복했다. 아무리 찾아도 없을 때나 내가 웃으면서 몸을 움츠릴 때도 아빠는 절대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마치, 거실 바닥에 펼쳐 놓은 한여름의 파릇파릇한 낙원 같은 기분이다. 아빠에게 전부 바친다. 

-  여기서부터는 나도 알 수 있다. 어딘가 나도 모르는 장소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있고, 그래서 나는 "어린애가 아니야." 하고 외치고 싶어 진다. 달콤하고, 두렵고, 끈끈하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진다. 검은 바다에 빠져 푸근하게 가라앉는 기분으로 아빠와 손을 마주 잡는다. 아빠의 얼굴이 흔들린다. 파도에 흔들리는 것처럼. 아아, 하고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면 아빠의 커다란 손바닥이 입을 막는다. 

- 아주 오래전에 시작된 일이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나는 줄곧 아빠 품에 안겨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도. 다른 친척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아무에게도. 만약 이 일이 알려지면 아빠가 잡혀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얘기하고 싶다거나 누구든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소중한 일은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 열한 살 때부터 내내.
아빠와 나는 단둘이었다.

- 셔터 소리가 울렸다.
찰칵.
나와 준고는 동시에 창문 쪽을 돌아보았다.

- 꼭 닫혀 있어야 할 커튼이 조금 열려 있었다. 아까 유빙을 보려고 열었다가 다시 닫으면서 구석까지 꼭 닫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창문 너머에 사람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 듯했다. 웅크린 채 어쩔 줄 몰라 서로를 쳐다만 보는데,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멀어졌다. 준고가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껐다. 그러자 창밖에서, 눈을 밟으면서 걸어가는 희미한 발소리가 울렸다.

- "유빙이 도착했으니까..."
준고가 중얼거리면서 일어섰다.
"할아버지가 아침 일찍부터, 사진을 찍으려고 돌아다닐 수도 있지."
준고는 찡그린 얼굴을 천천히 기울였다.

- 아키라는 괜한 간섭이라는 듯 말하며 웃었다. 온화하게 웃는 모습 역시 오시오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나는 눈길을 돌리면서 애매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아침에도 유빙 사진 찍는다면서 나가셨는데, 아마 숙사 쪽에도 가셨을 거야. 사진을 좋아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빌미 삼아 하나가 어떻게 지내나 보러 가신 게 아닐까. 심심해하지는 않는지, 밥은 제대로 먹는지 말이야."

- 언덕길은 내려갈 때는 금방이다. 얘기하면서 걷다 보니 바로 해안에 도착했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반짝거리는 유빙은 아직 딱딱하게 얼어붙은 상태는 아니었다. 군데군데 얼음이 겹쳐 산처럼 툭 튀어나와 있고, 나머지는 넓적한 연잎 모양을 한 채 파도 위에 얇게 떠 있었다. 얼음 사이사이로 검은 수면이 보였다.
 
- 이런 얼음들이 머지않아 바람과 조류의 힘에 밀려 뭉치면서 10미터 정도 높이의 얼음 언덕이 섞인 파르스름한 빙판이 된다. 그리고 뭍에서는 수면이 거의 보이지 않고 파도 소리도 사라지는 대신 바람에 유빙이 흔들리고 쩍쩍 갈라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는 때로는 금속이 부딪치는 것처럼, 때로는 어떤 동물이 우는 것처럼 다양하게 들린다.

- 그러면 하얀 해안선이 저 멀리까지 이어지면서 어디까지가 뭍이고 어디서부터가 바다인지 모를 정도로 그 경계가 애매해진다.

- 어디까지가 뭍이고 어디서부터가 바다인지.
우리로서는 도저히 선을 그을 수 없다.
무슨 일이든, 그렇다.

- 하얗게 물든 해안선에 순시선이 회색 덩어리처럼 떠 있었다. 국기와 해상보안부의 깃발이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에 정신없이 펄럭거렸다. 파르스름한 얼음에 서서히 갇혀 가는 바다가 너무도 거대하고 두려워서, 순시선이 마치 장난감처럼 허술하고 불안하게 보였다.


- 불안이 가슴 가득 번지면서, 준고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누구에게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휴대전화를 받을 수 있는 곳에 있다 해도 일단 배에 오른 후에는 일을 방해할 수 없다. 순시선이 좌우로 휘청 흔들린다 싶더니, 마침내 소리 없이 해안을 떠나기 시작했다. 말없이 바라보았다. 파랗게 빛나는 거대한 바다에 삼켜지듯, 장난감 같은 배가 흔들흔들 멀어져 갔다.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신비롭고 고요함으로 가득한 풍경이었다.
아빠가 가 버렸어.

- 나는 바다를 등지고 친구와 함께 교문으로 들어섰다. 그때 갑자기 가방 속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얘기를 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탓에 지각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장갑을 앞니로 물어 잡아당겼다. 창백하게 곱은 손으로 휴대전화를 쥐었다. 쇼코와. 아키라는 교실을 향해 힘껏 뛰어갔다.


- 휴대전화에서 아빠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 상태가 좋지 않아, 목소리가 저세상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고 낮았다.
"하나. 다녀올게..."
"응, 아빠 조심해..."
전화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소리와 보안관들의 얘기소리가 들렸다.

 

 

- "하나..."
준고가 다시 이름을 부르는데 지글지글 잡음이 나면서 전화가 툭 끊겼다. 학교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손에 그대로 쥔 채 신발장으로 걸어가 느릿느릿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 공포가 가슴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오늘 아침, 희미하게 들렸던 셔터 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나는 지각을 할 것 같은데도 뛸 수가 없어 1층 복도를 휘청휘청 걸었다. 쇼코가 후다닥 돌아왔다.
"정신 못 차리는 학생이 있군! 빨리 뛰어!"
쇼코는 내 손을 잡고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 올라갔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몸속에 차오르는 공포에 맞섰다.

- 그날 아침부터 수은주는 언덕길을 굴러 떨어지는 기세로 뚝 떨어졌다. 눈은 무겁게 쌓여 가고 경치는 단박에 암울한 회색으로 변했다. 
나는 혼자서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 창가 자리에서 턱을 괴고 점점 넓어지는 얼음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안으로 모여든 유빙은 한겨울의 맥없는 햇살을 반사하면서 불과 며칠 사이에 딱딱하게 굳었다. 얼음과 얼음 사이로 보이던 검은 수면은 자취를 감추고 표면이 매끈하고 파르스름한 벌판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얼음 뚜껑을 덮은 바다는 바다 냄새마저 잃어 갔다. 얼음 사이로 대형선이 지나간 자리만 군데군데 짐승이 다니는 길처럼 뻥 뚫려 있었고 그 아래로 보이는 바다는 한결 어두웠다.  

- 턱을 괸 채 수업을 들으며, 망연히 바다만 바라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얼음이 바다 위를 빈틈없이 메워 가면서, 내 결심 역시 하얗고 차갑게, 그리고 소리 없이 굳어 갔다.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얼음이 굳는 날을 기다렸다.

- 오호츠크해의 끄트머리까지 북상한 순시선에 휴대 전화의 전파는 이미 닿지 않았다. 얼어붙은 극한의 바다를 향해 점점 멀어지는 배를 상상하면 불안하고 마음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수업이 끝나면 동아리 활동은 착실하게 했다. 난로를 두 개나 켜 놓아 후덥지근한 음악실에 앉으면,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눈과 그 너머에 있는 바다가 교실에서보다 잘 보였다. 플루트를 들어 입술을 대고, 봄에 있을 고시엔 예선 응원용 곡을 연습했다. 악보를 보면서 어설픈 소리를 냈다.  

- "속이 좀 안 좋아요. 조금 더 연습하다가, 먼저 갈게요."

창밖을 돌아보았다. 얼음 벌판이 손짓하듯 반짝이고 있었다.

- "손을 놓자니 하나도 남는 게 없어서 그럴수도 없었지. 네 엄마 아빠와는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 친분은 그다지 없었어. 그런데도, 어린 네가 가엾고 불쌍해서 말이야 그래, 그 후로 난 조금은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지." 
고개를 푹 숙인 나를 할아버지가 불렀다.
"하나야..."
지금까지는 들어 본 적이 없을 만큼 서먹서먹한 목소리였다.나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지나 휘청거리는 몸으로 얼음 위에 섰다. 유빙은 딱딱하고, 얼굴이 비칠 만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얘야, 위험하다."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돌아보니, 그 역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잡아주려고 손을 뻗었다가 왠지 민망해 그만두었다. 천천히 내려가는 내 손을 쳐다보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 남자, 준고는..."
말투가 조금 달라졌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듯, 어둡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발밑에서 유빙이 끼익, 끼익 하며 울부짖었다. 마치 발밑에 검은 바다라는 괴물이 숨어 있고, 그 괴물이 가끔씩 포효하는 것처럼. 신발 바닥에서 써늘한 냉기가 올라와 나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낮은 목소리는 준고에게 화가 났기 때문일까.

- "너를 맡아 키우게 된 그 남자도,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어. 그 사람도 어렸을 때부터 봐 왔지."
"네..."
"조금은 널 닮기도 했고 말이야. 하나야, 그 사람의 아버지는, 이 바다에서 게도 잡히고 물고기도 풍성하게 잡혔을 시절에 어부였어. 살림도 그런대로 괜찮았고, 바람기가 있어서 많은 여자들을 울리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북방 영토 부근까지 갔다가 태풍을 만나서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어이없이 죽고 말았지. 시신도 거두지 못했으니까, 바다의 사내가 북쪽 바다로 자취를 감춘 셈이었어. 준고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다. 엄마는 그때부터 엄격해졌어. 사라진 아비 몫을 자신이 다하려는 것처럼 말이야. 일은 참 부지런히 했다. 그런데, 아들에게는 엄격했어. 준고는 안 그래도 아버지를 잃었는데, 자상한 엄마까지 잃은 셈이었지. 아버지 같은 엄마 밑에서 꼼짝 못하고 살았어. 그런데도 어른이 되더니 굳이 북쪽 바다로 나가는 일을 택하더구나. 아버지가 죽은 바다로 말이야. 거대하고, 어둡고, 끔찍한 바다야. 엄마 같지 않은 엄마가 된 그 사람도, 준고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죽었다. 그때, 잠시 친척 집에 가 있었지. 엄마의 건강이 나빠져서, 네 부모네 집에 말이다. 지금 네 나이 정도나 아마 조금 아래였을 거야. 그게 네가 태어나기 얼마 전 일이다."

- 유빙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요일인 데다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해안에도 사람은 없고, 햇살과 얼음 벌판이 이 세상이 아닌 곳처럼 새하얗게 빛날 뿐이었다. 괴물을 숨기고 있는 거대한 바다는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고요했다. 차가운 바람이 휭휭 불고, 입에서는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유빙 위에 서 있자니 더욱 쓸쓸하고 불안했다. 사람에게 자연만이 줄 수 있는 쓸쓸함이었다.


- 무섭지 않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바다에 숨어 있는 괴물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옛날에 그 괴물에게 당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나 자신은 괴물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시 발을 내딛자 불안한 나머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 갈매기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끼룩끼룩.

"하나야, 네 얘기를 들었을 때 말이다."

오시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분노에 떨고 있었다.

"네..."
"나는 걱정스러웠다. 안 그래도 결손 가정에서 자라 가족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인데,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난 준고에게 직접 들었어. 그 사람, 히죽히죽 웃었다. 아, 그래. 너를 데리고 올 때 얘기야. 옛날의 그 책임 때문인가, 하고... 그 사람이 만사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나, 하고 말이다. 그때, 그 사람 나이 스물일곱이었어.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었지만, 해상보안관이니 집을 비울 때가 많았지. 게다가 좀 유별한 사내였어."

 

- "그리고 얼마 후에 고마치 씨가 이곳을 떠났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했지. 기억나니? 그 아이, 준고와 결혼할 생각이었던 걸로 아는데. 너도 귀여워했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떠났어. 준고도 고마치 씨를 내버려 두었어. 뒤쫓지 않은 거야. 난 그저, 준고도 아버지를 닮아 바람기가 있나 보다. 단지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 정도로만..."
거기서 말을 끊었다.
마지막 말에서 오시오 할아버지의 분노가 사라졌다는 것을나는 알아차렸다. 대신, 슬프고 안타까워 견디지 못하는 울림이 그 자리를 메웠다.

- 나는 고개를 숙였다. 너무도 부끄러워, 한기 속에 있는데도 등이 뜨끈하고 땀으로 눅눅해지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는 눈을 치뜨고, 그런 내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얼음 위에서 딸꾹, 하고 한 번 딸꾹질을 했다. 어금니를 악물고 참았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슬픔에 잠겨들었다.
"난... 어렸을 때부터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몰랐어. 늘 오리무중이었지. 조금은 겁이 나기도 했고, 뭐라고 설명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다 큰 어른이 그런 애매한 일을 가지고 반대를 하는 것도 꺼려지고 말이야. 그런데, 내 직감을 따랐어야 했어."

- 유빙이 마치 저세상에서 반짝이는 빛처럼 하얗게 빛났다.
"너를 그런 사람에게 맡기는 게 아니었어."
"그렇지 않아요."
"내 책임이다. 어린애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지. 그래, 어린애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말이야."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할아버지..."
"아니다. 그렇지가 않아."
"알아요, 저. 선택한 거예요. 제가."
"넌 아무것도 모른다. 넌, 아직도 어린애야."

- 내가 걸어가자 오시오 할아버지가 또 따라왔다. 나는 할아버지를 등지고 걸어가면서도 그 휘청거리는 걸음걸이가 마음에 걸려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육지에서 보면 시베리아까지 이어져 있을 듯한데 여기서는 얼음 벌판과 검은 바다의 경계가 분명했다. 아직 굳지 않은 작은 유빙이 수도 없이 파도에 떠다녔다. 검은 바다에 숨어 사는 끔찍한 괴물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도 더 크고 날카로웠다. 그곳은 육지도 바다도 아닌, 불가사의한 장소였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바다로. 바다로 점점 다가갔다.
'이제 조금만 더.'

- 마침내 유빙이 끝나고 거뭇거뭇 차가운 수면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오시오 할아버지는 얼음 위에서 구를 듯 걸음을 서두는 내가 걱정스러운지 숨을 헉헉거리며 뒤쫓아 와 내 어깨에 조심조심 손을 얹었다. 이제 그만 가라, 더는 아무 데도 가면 안 돼. 힘을 한껏 주고 내 어깨를 잡은 손바닥에 그런 뜻이 서려 있었다.
나는 또 어금니를 악물고 견뎠다.

- 주저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어깨를 잡은 손은 노인이라 여겨지지 않을 만큼 억셌다. 나는 그 손이 내 심장을 꽉 움켜쥔 듯한 공포감에 몸을 바짝 웅크렸다.
"어젯밤에, 아사히카와에 갔었다."
"네..."
"네 친척이 거기 있어서 말이야. 사정은 일절 묻지 말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너를 좀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 왔다. 왜 그 깡통 공장을 하는 아버지 쪽 사촌 말이다. 제사 때 너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더구나. 공장이 잘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어. 하지만 내가 지원하겠다고 했더니, 그럼 좋다고 했다. 가족이 많아 시끌벅적하기는 해도 온기가 있는 가정이더구나. 가족이란 그래야 하는 거야. 내가 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왔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안심해라." 

-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싶다면 내가 또 도와주마. 그 대신 사회인이 된 후에 반드시 갚도록 해라. 어른이 되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시집을 가고, 몸베쓰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마라." 
바람이 몰아쳤다. 끼익, 끼익, 유빙이 맥없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검은 바다에 출렁출렁 파도가 일었다. 얼어붙은 해초가 파도 사이에서 이리저리 떠다녔다. 
이제 손자 얘기는 하지 않는군, 하고 생각했다. 나는 예쁘게 고이 자란 어린 사슴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시오 할아버지도 아키라를 거론하지 않는 것이다. 또 바람이 횡 불어와 목도리가 춤을 추었다. 신발 속으로 얼음의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 "그 사람은 당분간은 돌아오지 않을 거다. 제 아비가 사라진 저 먼 북쪽 바다에서 헤매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이다. 하루 빨리 떠나거라. 남자와 여자의 인연이란, 질기고 또 질긴 것이다. 나도 다 안다. 그러니, 간단한 짐만 싸서 당장 떠나거라. 네가 어디로 갔는지는 그 사람에게 절대 알리지 않으마. 너도 악몽 같았을 거야. 알아들었지, 하나야?"
"할아버지, 저는요..."
"그리고, 호적도 파내거라. 원래 성으로 돌아가. 아사히카와에 있는 친척도 성이 다케나카니까. 깨끗하게 잊어라, 하나야. 다 잊어. 그런 일은."
"호적, 을요?"
"그래. 그렇게 하거라.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 "하나야, 이러면 안 된다."
"호적은 절대 바꾸지 않을 거야."
"하나야,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너는 아직 모른다."
"나는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을 거야. 호적도 바꾸지 않을 거고. 어른이 되어서도, 구사리노란 성으로 남아 있을 거야.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 뼈가 된 후에도 나는 준고와 함께 있을 거야."
"너는, 모른다니까..."

- 유빙이 떠내려간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생각은 없는 것일까. 할아버지는 살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있는 목청을 다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 "너는, 너는..."
"입 닥쳐."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아빠 곁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혼도 하지 않는다.

- 이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오래전, 내게도 부모와 형제가 있었다. 그 사람들 모두 내가 열한 살 때 죽었다. 그리고 지금은 조그만 섬의 한 무덤에서 올망졸망 잠자고 있다. 혼자 살아남은 나는 먼 친척인 구사리노 준고의 양녀가 되었다. 그러니까 만약 지금 내가 죽으면, 나는 우리 부모가 아니라 준고네 집안 묘지에 묻히게 된다.

- 몇 년 전 제사 때 그런 법적인 사실을 알았다. 그때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가르쳐 주었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자, 그 친척은 어쩔 줄 몰라하며 이렇게 위로했다.
"에그, 가여워라. 슬픈 일이지. 내가 어쩌자고 이런 소리를 했나 모르겠구나. 하지만, 하나 너는 어차피 여자니까, 결혼하면 남편 쪽 무덤에 묻힐 거야."
사실 나는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도 기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져 가는 얼굴을 가리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나와 준고는 이미 가족이 되었으니까, 죽어 뼈가 되어서도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결혼만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 나는 아빠를 좋아한다. 오직 그 사람 곁에 오래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너무 기뻐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 멀어지는 유빙 위에서 오시오 할아버지가 고함을 질러 댔다. 분노에 치를 떨며 노려보는 나를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나야, 하나야. 넌, 아직 몰라. 너와 그 남자는..."
나는 얼음벌판에 서서 할아버지를 냉정하게 쏘아보았다. 저세상 빛처럼 하얀 햇살에 싸여 할아버지가 조금씩 조금씩 검은 바다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바람에 떠밀린 유빙이 끼익, 끼익 하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 먼 기억이 천천히 뇌리에 되살아났다. 나는 살며시 눈을 찌푸렸다. 내가 이곳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밤, 준고가 내 앞에서 알몸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던 말. 

- 그 나지막하고 달콤한 목소리. 초등학생이었던 내 앞에 기도하듯 엎드린 준고는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른이 내 앞에서 그렇게 하기는 처음이었다. 놀랐지만, 그 진짜 의미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때로 단둘이 있을 때면 준고는 그 말을 중얼거린다. 그럴 때, 우리 둘의 입장은 어느 쪽이 보호자고 어느 쪽이 어린애인지, 마술처럼 휘리릭 뒤바뀐다. 그 생각을 하면 기쁘고 허망해서, 나도 모르게 음산한 미소를 띠곤 했다. 
그것이 내 아버지.
내 남자다.

- 내 표정에 오시오 할아버지는 "아아." 하고 신음했다. 그러고는, 밤 깊은 산길에서 만난 짐승을 올려다보듯,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알고 있었냐... 알면서, 알면서 그런 더러운 짓을, 계속했다는 말이냐..."
"알고 있었어."

- "먼 친척이 아니었어. 그 사람이 진짜 내 아빠.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
"알면서, 그런 망측한 짓을. 네가!"
"우릴 그냥 내버려 둬."

- 망측한 짓을 하는 것은 부모 자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매일 밤, 딸의 살을 어루만져 더럽히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듯 고개 숙이는 준고의 어두운 옆얼굴이 떠올랐다. 기도 같은. 우리의 그 의식.

- 딸은 아버지의 부정한 신이다.

- 입을 쩍 벌리고 아연실색한 채, 할아버지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조금씩 떠내려가던 유빙은, 이제는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점차 작아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참고 견뎠던 눈물을 쏟아냈다. 끼익, 끼익. 발밑에서는 괴물이 여전히 울부짖고 있다. 어금니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곱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커다란 참수리가 머리 위로 날아갔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미친 듯이 휘날렸다. 분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 나는 외쳤다.
아무에게도 한 적 없는 말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란 적도 없는 것을. 하얀 빛에 싸여,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짐승처럼.
"부모 자식 사이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 "우린 피붙이라고! 다른 사람과는 달라! 해서 안 되는 일이 어딨어. 아버지와 딸 사이에!"
오시오 할아버지도 외쳤다. 확신에 찬 혼신의 힘을 다한 말이었다.
"있다!"
"입 닥쳐!"
"너는 아직 어린애라서 모르는 거야! 세상에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어! 넘어서는 안 되는 선도 있고! 그건 신이 결정한 거다!"

 

- 얼음벌판과 검고 차가운 바다. 그 경계에 서서 나는 울었다.
발밑에 하염없이 펼쳐진, 끔찍한 괴물 같은 자연의 힘을 느끼면서. 검고 불길한 바다를 향해, 제발 나를 도와주세요, 저 사람을 죽여주세요, 하고 기도하면서 하얀 벌판과 검은 바다의 경계에 서서 분노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 어디까지가 육지이고, 어디부터가 바다인가.
그 경계는 멀리서는 알 수 없겠지만, 이 세상과 저세상을 가르는 장소.
어디까지가 이 세상이고 어디부터가 저세상인가.
선을 긋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
무슨 일이든, 그렇다.

- 오시오 할아버지를 태운 조그만 유빙이 한겨울의 검은 바다를 향해, 저승길을 떠나는 나룻배처럼 흔들흔들 멀어져 갔다. 할아버지도 어린애처럼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울면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나를 칭칭 옭아맬 듯, 노인네의 목소리라 여겨지지 않을 만큼 힘차게 울렸다. 
"세상에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어린애는 몰라도, 어른은 본을 보여야 돼. 그 남자나 너나, 가족이란 걸 모른다. 가족이란,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함께 있을 수 있는 거야.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난 봤어! 그건, 짐승이나 할 짓이야! 너는, 나쁜 애가 아니다. 그러니까, 잊어야 돼. 악몽이었다 여기고, 몸베쓰에는 절대 돌아오면 안 돼! 너는 내 손자, 아키라의 신붓감이라 여겼던 아이다. 불쌍한, 아이야... 너는, 너... 하나야!"


- "아니야."
나는 중얼거렸다.
[가족이란...]
발밑에 있는 괴물이 또 울부짖었다.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참수리가 검은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갔다. 커다란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내 몸을 덮고 지나갔다.
[함께 있을 수 있는 거야...]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마치 전혀 다른 생물인 것처럼 어둡게 꿈틀거렸다.

- 어깨를 떨며 노려보고 있는데, 오시오 할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분노에 사로잡힌 내게 넋이라도 잃은 듯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한 그 표정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가방에 손을 집어넣는 것이 보였다. 은색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이 아침 햇살을 반사하며 번쩍 빛났다. 
찰칵, 찰칵.

- 나는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뭍을 향해 뛰었다.

- 찢어발긴 피투성이 시신이 되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남김없이 먹히고 싶은 그런 흥분감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나는 그 흥분감을 견디면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흥분은 죽음과 비슷했다.
나는, 몰랐다.
무릎을 껴안고 몸을 바짝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머리카락이 볼을 꾹 눌렀다.

- 욕망의 무게와 그 어둠에 놀라 떨던 몸이, 잠시 후에는 환희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낳은 여자와 이 몸이 옛날에는 탯줄로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실감도 나지 않고 믿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빠와 나는, 다리 사이에 뻗어난 검고 끔찍한 뿌리로 한데 얽혀 있다고 느꼈다. 다리와 다리 사이에서, 그 아침에 먹은 잼처럼 끈끈하고 따스한 것이 흐르기 시작했다.

- 불현듯 다오카 아저씨의 눈빛이 흔들렸다.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의심스러운 듯 의아해하고, 그러면서 겁에 질린 듯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당황한 듯이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 언덕길 위에서 나는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았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눈발은 아직도 미친 듯이 휘날렸다. 바다 전체가 부옇고 황량했다. 시야 한가득 펼쳐진 거대하고, 넓고, 끔찍한 이 바다. 괴물이 사는 바다.
마침내 회색 순시선이 얼음 바다를 헤치며 천천히 항구로 들어왔다. 배는 무사히 돌아온 것이 신기하리만큼 작고, 장난감처럼 허술해 보였다. 다오카 아저씨는 언덕길을 서둘러 내려갔고, 나는 그 자리에 홀로 남았다.

- 그날 밤늦게 준고가 집에 돌아왔다. 오시오 할아버지의 시신을 인계하고 상황을 검토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한다.

- 밤늦게야 밖에서 숙사의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홍차를 마시려고 부엌에서 물을 끓이던 나는 천천히 가스레인지를 껐다. 돌아가는 손잡이를 쳐다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준고의 얼굴이 쑥 나타났다.
많이 피곤하려나, 하고 걱정했는데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안색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짐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으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밥 먹었어?"
"... 아니."
"뭐, 만들어 줄까?"
"배, 안 고파."

- 현관에 가서 준고가 벗은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준고가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고, 가늘게 연기를 토해 냈다. 미간을 찡그리고 다시 한 모금.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고는, 한쪽 볼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난감하더군. 냉장실 문을 열 때마다 할아버지와 마주쳐야 했으니."
나는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순시선에서 일하는 사람에는 세 종류가 있다. 주로 조종을 담당하는 항해사, 엔진 정비 등 기계를 맡는 기관사, 사무를 담당하는 주사. 준고는 주계사였다. 지금은 주계사 일 가운데 요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에 세 번, 30명 남짓한 보안관의 식사를 준비한다. 중학교에 다닐 때, 순시선 내부를 견학한 일이 있다. 반듯반듯하게 정리된 조리실 건너편에 있는 대형 냉장실에도 들어가 보았다. 대량의 식료품이 정연하게 쌓여 있는 냉장실 안은 냉기 때문에 한겨울만큼이나 추웠다. 
양파와 감자, 통조림, 냉동육과 함께 보관되어 있는 오시오 할아버지의 얼어붙은 몸을 상상했다.

- "좀 묘한 표정을 하고 죽었더군."
"내가 죽였어."
겁이 나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나는 고개 숙인 채 준고에게 다가가, 만지고 싶어 참을 수 없었던 그 몸에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손이 등에 닿았다. 바깥의 한기를 머금은 그대로여서 몹시 차가웠다. 조심조심 팔도 만졌다. 그리고 가슴에 얼굴을 묻고, 비처럼 눅눅한 준고의 냄새를 맡았다. 따뜻했다. 나는 준고의 살아 있는 뜨거운 몸을 확인하듯 얼굴을 묻었다. 
준고가 몸을 무너뜨리듯 소파에 앉았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발치에 엎드리듯 앉아 나는 말했다.
"아빠..."
자신의 너무도 어린 목소리에 놀랐다.  

- "하기야 자네는 그깟 정도, 태연하게 해치울 사람이겠지만."
준고가 정말 웃기는 소리라는 듯 가칠하게 웃었다. 담배 연기가 흔들렸다.
"그만하시죠, 다오카 씨. 난 소심한 사람입니다. 그런 짓을 어떻게."
"용의주도한 면은 없으니까, 무슨 짓을 저지른다면 갑자기 그러겠지. 자네는 충동적인 사내야... 하하, 그런 얼굴로 보지 말게나. 그냥 말해 본 것뿐이니까. 그건 그렇고, 이제 어째야 하나." 
다오카 아저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옆에 나도 있다는 것을 그때야 새삼 안 것 같았다. 아이 앞에서 할 얘기가 아니었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는, 한 손으로 미안하다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고는 몇 발짝 걸어가다가, 갑자기 되돌아와 내 얼굴을 바로 코앞에서 들여다보았다. 

- 다오카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유령이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그러나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묘한 눈초리였다.
왠지 모르지만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나는 준고의 몸 뒤로 돌아가 내 몸을 가렸다. 준고가 담배를 피우면서 무의식적으로 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다오카 아저씨가 다시 걸어갔다. 그러다 저만치에서, 아무래도 신경에 거슬린다는 듯이 이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 장례식에는 도쿄에서 온 고마치 씨도 있었다. 이 고장에서는 팔지 않는 세련된 디자인의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우아하게 코트를 벗자 주위의 분위기가 화사해졌다. 원래 예쁜 여자였다. 그런데 3년 만에 보는 고마치 씨는 놀랄 정도로 체형이 변해 있었다. 날씬하고 개미허리 같았던 몸에 투실투실 살이 붙어 있었다. 뚱뚱한 정도는 아니지만 턱과 목덜미도 겹칠 만큼 살이 올라 있었다.

- 둘의 말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도쿄는, 어때?"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편하지, 뭐. 지금 기타센주라는 곳에 살고 있어. 큰 도시다 보니까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나 하나쯤 그냥 묻혀 버리지, 뭐. 가끔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빠가 몸을 구부리고 검붉은 혀로, 내 볼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핥았다. 깨끗하게 빼앗아 갔다. 아빠는 내 모든 것을 빼앗는다. 서로의 손가락을 꽉 끼고 눈 속을 나란히 걸었다. 아빠가 눈물을 핥아 줄 때, 내 몸에 불이 붙었다. 나도 준고의 몸에서 분비되는 무언가를 핥고 싶었다. 아무리 더러워도 준고의 몸에서 흐르는 것이면 완전히 변해 버리고 싶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래도 아직 부족했다. 나는 뼈가 되어서도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몇 번을 생각하면서 준고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준고도 내 손을 꼭 잡았다. 끈끈하고 억센 힘으로. 

- 지금까지는 다른 여자가 그렇게 거슬리지 않았다. 준고가 누구와 어떤 식으로 밤을 지내든 상관없었다. 나는 여자가 아니라 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아침 안개 속을 꿈처럼 허우적허우적 걸어가는 지금, 나는 절대 다른 여자에게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준고는 내 아빠. 내 남자. 다른 여자에게 손대면, 아빠를 죽인다. 

- 모퉁이를 돌자 바다가 훤히 보였다. 하얀 바다에 가늘고 검푸른 줄이 몇 개나 뻗어 있었다. 마치 하얀 대형 캔버스에 파란 물감으로 그려 놓은 앙상한 나무 같았다. 뭍에서 바다로 부는 바람이 서서히 강도를 잃어 가는 얼음벌판을 조금씩 갈라놓는 계절이 온 것이다. 겨울의 끝이 머지않았다. 갈가리 찢긴 유빙은 마침내 바람에 떠밀려 천천히 해안을 떠나간다.
이제 곧 봄이 온다. 오호츠크 해에 서글픈 봄이, 뒤늦게.
하지만 그 봄을 볼 수는 없으리라.

- 이대로 살아가면 결국은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자, 슬펐다. 내가 아무리 결혼은 안 한다, 평생 함께 살 것이라고 해도 준고는 믿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준고 자신이 언젠가, 어디론가 사라질 생각인가. 앞일을 전혀 알 수 없어 마음속을 헤집고 찾아보았지만, 있는 것은 지금뿐이었다. 역시 나는 아직 어린애인지도 모르겠다. 

-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만약 지금 죽는다면 여기서 시간이 멈춘다, 고 생각했다. 마음이 단단하게 이어져 있는 지금 죽으면, 차갑고 외로운 뼈가 되어서도, 그 후에 북쪽 땅과는 거리가 먼, 한없이 먼 메마른 땅에 다시 태어나도 또다시 이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시 태어나도, 다시 태어나도.
몇 번이든, 몇 번이든 나는 아빠의 딸로 태어나고 싶었다.

-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검은 그림자처럼 준고는 내 옆을 걷고 있었다. 흔들리는 그 옆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죽일까, 이 사람을 죽여 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아빠를 주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함께 있고 싶었다. 절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 내 침울한 얼굴을 보고서 준고가 깜짝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안심하라는 듯, 씩 장난스럽게 웃었다.
... 아아.

그 얼굴이 내 기분을 바꿔 놓았다. 왠지 아빠는 무척이나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빠가 바다와, 태어나 자란 동네까지 버리면서 그 먼 곳에 가려는 것은, 살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죽일 수 없다. 역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준고도 히죽히죽 웃었다.
앞으로도 이 사람과 늘 함께 살아야 하나, 하고 생각했더니 신기하게도 눈물이 뚝 그쳤다.


- 가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아침 첫 버스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운전사는 오시오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였다. 우리가 버스에 오르자 조그만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먼지와 기름에 전 냄새로 가득한 버스 제일 뒷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준고는 긴 다리를 통로로 뻗고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검은 코트에 검은 구두. 그리고 어두운 눈동자. 아빠에게서 죽음의 신 같은 밤 냄새가 났다. 

- "아빠. 아빠."
"응?"
준고가 목쉰소리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손을 꼭 잡고, 우리는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창밖 가득 파르스름한 유빙이 떠 있는 검은 바다가 펼쳐졌다. 마지막 보는 몸베쓰의 썰렁한 길거리가 부옇게 번졌다.
나는 얼굴을 들어 준고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또 어리광을 피우듯 살며시 입술을 벌렸다. 준고가 몸을 쑥 내밀고 내 목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1996년 3월.

 

- 하양, 제 손으로 묶었는지 제대로 묶여 있지 않다. 저런, 하고 생각했지만, 고쳐 묶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직도 젖냄새를 풍길 듯 분위기는 어린애인데, 깊은 빛이 감도는 눈동자만 일찌감치 어른이 된 것처럼 보였다. 이 또래 여자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어른 취급을 해도 되는 것인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 여겨야 하는지. 정체 모를 것을 앞에 둔 거북함에 마음이 슬며시 떨렸다. 

- "아침부터, 그런 데서 뭐 하고 있었니?"
"바다를 보고 있었어요. 안녕하세요, 고마치 언니."
"그래. 바다? 그런데 준고 씨는?"
"어제, 안 돌아왔어요."
하나는 혀 짧은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하나가 그 말의 의미를 아직 모른다는 증거였다.
나도 모르게 쯧, 하고 혀를 찼다.

- 준고가 이 아이를 데려왔을 때, 처음에는 잘 대해 주자고 생각했다. 여자로서 준고 같은 남자와 사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무뚝뚝하면서도 때로 한없이 자상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로 늘 다른 여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화를 내고 따지면 귀찮다고 그만 끝내자고 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런 남자가 오직 한 사람을, 무심히 사랑할 수 있을까. 그래서 늘 채워지지 않는 답답한 심정으로 마치 참기 내기를 하는 것처럼 시간만 지겹게 흘러갔다.

- 그런데 이 아이는 아무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분고분 따르지도 않았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한 준고와는 반대로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마치 죽어 있는 사람처럼.

- 어제 돌아오지 않았다면 준고는 또 다른 여자에게 간 것이리라. 씁쓸한 심정에 입을 다문 내 얼굴을 하나는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관심 없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 "거기, 예쁘네. 고마치 언니의, 거기."
눈두덩을 가리키며, 어린애처럼 헤헤, 하고 웃는다. 당황하면서, 아이섀도를 말하는가 보군, 하고 생각한다. 오렌지 계열 아이섀도 세 가지를 얇게 펴 발라 명암을 주었다. 눈이 밝기는, 역시 여자는 여자로군. 하고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 하나는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이른 아침의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모든 것이 환영 같았다. 수면과 공기의 온도 차가 심한 아침에 아주 가끔, 유빙이 떠 있는 바다에서 김 같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일이 있다. 겨울이 끝나가는 지금, 물러져 여기저기 갈라지고 깨진 유빙이 아이스커피에 떠 있는 자잘한 얼음처럼 검은 바다에 둥둥 떠 있다. 그렇게 잔 유빙이 떠 있는 바다에서 어둡고 무거운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빨려 들어갈 듯 고요한데도 바다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창백한 피부에, 검은 머리, 하얀 다운재킷을 입은 하나가 멍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풍경과 오호츠크해를 함께 바라보자니 왠지 서글프고, 그리다 만 수묵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바다는 천천히 일렁거리면서 소리 없이 외치듯 차가운 수증기만 피워 올리고 있었다.

- 하나는 아주 조용했다.
"바다 안개."
혀 짧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진이 일어난 후 같다. 그때, 이렇게 집이 불타고, 동네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는데."
나는 오싹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관심이 없는 탓인지 평소에는 잊고 사는데, 이 아이가 지진 때문에 부모 형제를 잃은 고아라는 것이 새삼 생각났다. 불쌍한 애니까 잘해 줘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과 그래도 왠지 싫고 불길한 느낌이 든다는 두 가지 감정이 내 안에서 분명하게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 "추우니까, 얼른 집에 들어가."
간신히 찾아낸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뭐라 대답이 없어, 그 옆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나는 웃고 있었다. 무색의 불길 같은 안개가 한없이 피어오르는 바다를 쳐다보면서 뭐가 좋은지, 방긋거리고 있었다. 제 입으로 지진 얘기를 꺼냈으면서,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늘 어른들에게 보이는 맥없이 미소 띤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이래서 싫다. 이 아이는 왠지 불길하다. 죽은 물고기처럼 탁하고 어딘가 모르게 징글징글한 이 느낌. 자신의 앞날을 맡기려는 소중한 남자 옆에 이렇게 이상한 애가 있는 것이 싫었다. 

- 깨진 유빙을 더 자잘하게 부수려는 듯 바다 안개 너머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싸늘하고 붉은 아침 햇살에 수면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안개도 햇살을 받아 검붉게 물들었다. 바다가 저세상에서 되살아난 차가운 불길을 분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도망치듯 얼른 해변 길을 떠났다. 준이 아쉽다는 듯 하나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하나가 준의 등을 살짝 어루만졌다.

- 동네 사람들도 준고와 나의 관계를 알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혼담을 들이미는 이도 없었다. 


- 준고가 샤워를 하는 동안, 가방을 몰래 열어 안을 살펴보았다. 다른 여자의 흔적에 시달리면서부터, 만날 때마다 준고를 관찰하고 증거를 잡으려고 가방과 지갑을 일일이 뒤져 보는 버릇이 붙고 말았다. 마음속에서 불쾌한 불길이 소리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사히카와에 있는 백화점 포장지가 보였다. 조그맣고 네모난 상자 포장지가 뜯기지 않게 조심조심 펼쳐 보았더니, 빨간 벨벳 상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살짝 열었다. 조그만 다이아몬드 피어스가 들어 있었다. 쳇, 또 새 여자가 생긴 거야. 상자를 원래대로 다시 싸 놓고서, 다리를 꼬고 침대에 걸터앉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뭐."

- 고등학생 시절에 혼자 있을 때면 보였던 무표정하고 싸늘한 옆얼굴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옆에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는 달짝지근한 분위기가 강했는데, 점차 나와 있을 때도 이런 얼굴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싫증이 난 것일까. 아니면 말은 하지 않아도, 이제 우리도 슬슬,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 "오늘 아침에, 하나 만났어."
다오카 씨에게 들은 소리가 마음에 걸렸는지, 나도 모르게 관심을 끌려고 하나 얘기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준고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방에 있다는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눈을 찡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준고가 하나와 무척 닮아 보였다. 친척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때로는 의아할 정도로 두 사람이 비슷한 몸짓을 한다.
"하나를?"
"응."

- "그 아이는..., 바다에서 온 애야."
담배 연기가 흔들렸다. 준고가 담배를 문 채로 웅얼웅얼 말했다. 별 관심이 없는 나는 눈길을 돌리고, 먼지 낀 보라색 벽지를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벗겨져 누런 벽이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나 있었다. 
준고가 후, 하고 담배 연기를 토해 냈다.
그 눈이 죽은 물고기처럼 탁하게 빛나는 하나의 눈과 너무 닮은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외면하고 말았다. 텔레비전을 켜려고 손을 뻗었다. 중얼거리는 준고의 목소리가 독백 같은 울림으로 귀에 파고들었다. 
"하나는, 바다에서 왔어. 바다에서, 바다에서 내게로 돌아온 거야."

- "돌아왔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내 것이었어. 그 아이, 전부가 다 내 거야."
돌아보려 했는데, 등 뒤에 묵직하게 고여 있는 공기의 어둠에 고개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옛날부터 잘 알고 있는 구사리노 선배를 등진 채, 빠르게 내뱉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 그보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야지. 옷도 얇게 입고 어정거리고 있던데. 어린애가."
등 뒤에서 준고가, 풋, 하고 낮게 웃었다. 벽에 비친 그의 긴 그림자가 유령처럼 흔들렸다.

- "어머니 
사랑을 그렇게 못 받고 자란 아들도 없을 거야. 아버지가 엄격한 게 그나마 낫지. 우리도 도와줄 수 있는 일은 도와주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가늘게 뜬 눈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준고와 하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준고 군이 저 친척 아이를 잘 키우고 있군요. 너무 엄격하게 굴지도 않고, 잘 돌봐 주는 것 같습니다. 간혹 아이 혼자 두고 집을 비우는 것이 걱정이지만, 그거야 하는 일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겠지요."
"그렇지."
"왜 그때, 하나 에미가 임신을 했을 때, 준고 군이 저 아이 부모님 집에 한동안 있었지요.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 그 집에 신세를 졌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에게 더 애착을 갖는지도 모르겠군요."
"..."
오시오 할아버지는 그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을 아저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침묵이 이상해,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때, 할아버지가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 하나는 여자애가 잡아끄는 대로, 마치 무게가 없는 껍질뿐인 인형처럼 휘청거리며 방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변함없이 할아버지든 아이들이든, 누구에게나 순종적이었다. 벌써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 툇마루에 나와 준고만 남았다. 담배를 다 피운 준고는 복도 끝, 아이들이 모여 노는 방에서 새어 나오는 밝은 빛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꿈을 꾸는 듯,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무기력해 보이는 묘한 눈빛. 마루방에서 해상보안부 남자들이 술에 취한 벌건 눈을 하고 준고를 불렀다.

- "이거 말이야. 우리 배에서도 좀 만들어 봐, 난 옛날부터 이런 걸 좋아했거든."
상사가 그렇게 말하고는 건배도 하는 둥 마는 둥 음식으로 젓가락을 내밀었다.
"아, 만들 수 있습니다."
"정말? 그거 잘됐군. 그런데 말이야, 자네 이거 만들 줄 알면, 마누라도 다 필요 없다니까."
"그럼요, 필요 없죠."
준고가 거침없이 웃었다. 술잔에 청주를 따라 건배를 한다. 찻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싹싹한 미소를 띠고 침착하게 직장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마누라는 필요 없다?"
"네. 딸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정말로. 좀 이상한가요?"
"아니, 우리 친척 중에 아직 못 가고 있는 아이가 있어서 갖다 안기려고 했는데 말이야."
"못 가고 있는 사람, 필요 없습니다."

- 대화의 고리가 점점 퍼져 나가면서, 준고가 남자들 사이에 묻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졌다. 말소리가 시끌벅적하게 울리는 가운데, 준고의 목소리가 간혹 내 귀에 날아들었다. 
"가족이란 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대체 가족이 뭡니까?"

- "더 원하든지, 이제 그만 필요 없든지, 그 두 가지밖에 없어요. 난... 싫증도 금방 나고..."
무슨 소리인지 마음에 걸려 귀를 쫑긋 세웠지만, 남자들의 얘기 소리에 가려 더는 들리지 않았다.
쟁반을 들고 얼른 부엌으로 돌아갔다. 냄비 속을 휘젓고 있던 엄마가 버럭 화를 내었다.
"어디서 그렇게 시간을 끌다 오는 거니, 너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또 쟁반에 음식과 술이 수북하게 담겼다.

- 나는 음식을 내려놓고, 한두 마디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일어섰다. 나 자신은 도시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저씨들처럼 외부 사람을 경계하는 마음은 없었다. 로스케와도 술집에서 마주치면 짧은 말이나마 즐겁게 나눌 수 있고, 도시에서 온 관광객들과도 때로 허물없이 대화하곤 했다. 이 조그만 동네 남자들은 자신의 여자를 지키려는 의무감이 너무 강한 나머지 외부 사람을 지나치게 경계한다. 그 반면, 한번 받아들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는 모두들 철저하게 책임지려 한다.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만, 아무튼 빚 때문에 도시에서 내려온 다오카 씨도 동네 사람으로 받아들인 후에는 아무도 나쁘게 말하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기면 두둔해 주려는 분위기가 농후했다. 
그렇게 작지만 따스한 개척자들의 자손으로 뭉쳐진 공동체에, 다오카 씨와 비슷한 시기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바로 그 묘한 아이였다.

- 공동체에서 받아들여 어른과 아이들의 관심 속에 자라고 있지만, 하나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든 거부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둘 뿐이다. 준고 역시 지금은 침착한 모습으로 여기 있지만, 실은 동료든 누구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저 두 사람은 참 많이 닮았다. 마치 진짜 아버지와 딸처럼. 형제처럼 서로에게 서로만, 양딸만, 양아버지만 있으면 된다는 배타적인 서늘한 분위기를, 문득 느꼈다.

- 그런데 왜 다들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태생이 너그러운 사람들은 타인의 냉정함을 못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바깥의 적만 경계하느라 안에 이물질이 섞여 있는 줄은 생각도 못하는 것이다. 모두들.

- "이거, 맛없어."
하나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준고에게 혀를 내밀어 보였다. 달빛 아래, 빨간 입술에서 분홍색 촉촉한 혀가 쏙 튀어나와 손짓하듯 빛났다. 혀 위에 조그만 알사탕이 있었다. 하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길쭉한 눈을 어렴풋이 반만 뜨고 있었다. 

"맛없어?"
"써. 녹차 사탕이야."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어르신이 준 건데."

- "어디."
준고가 하나의 조그만 입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혀를 내밀었다. 하나와 달리 칙칙한 색에 메마른 빛을 지닌, 유독 긴 혀였다. 쟁반을 껴안고 어리둥절하게 보고 있는 내 눈앞에서 두 사람의 혀가 뒤엉켰다. 사뭇 익숙한 놀림으로 서로의 혀를 휘감고, 맛보고 있다. 그러다 하나가 빨고 있던 사탕이 준고의 입속에서 사라지고, 하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그만 두 손으로 주스를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준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쓴 정도는 아닌데, 뭘."
"그래도 맛없잖아."
"어른의 맛."
"피, 아니야."
하나는 진짜로 토라졌다.

- 잠시 담배를 피우면서 준고는 옆에 앉아 있는 하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골격이 닮은 것인지, 둘의 뒷모습이 풍기는 분위기가 신기할 정도로 비슷했다. 마치 하나가 준고의 축소판 같았다. 이렇게 보니 얼굴의 옆선도 비슷하다. 준고가 다른 사탕을 집어 입에 휙 던져 넣었다.
"이건 맛있는데."
"정말?"
"우유 맛."
"아!"

- 하나가 아양을 부리듯 입을 벌렸다. 창백한 피부에 검은 머리. 나는 차림새도 하얗고 소박한 데다 늘 얌전한 하나를 눈과 검은 바다로 덮인 이 동네 경치만큼이나 하잘것없는 아이라 여겼다. 늘 그리다 만 수묵화처럼 부옇고 축축하다고. 그런데 입술만 빨갛게, 저세상에서 차갑게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벌린 입에서 분홍색으로 빛나는 혀가 쏙 나온다. 아이의 혀가 저렇게 끈끈하고 촉촉한 것일까. 미소를 띠고 있는 탓에 준고의 가뭇가뭇한 옆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딸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정말로'
'가족이란 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방금 전에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불길하게 되살아났다.
'더 원하든지, 이제 그만 필요 없든지, 그 두 가지밖에 없어요. 난...'
딸을 더 원하듯, 혀가 미끈미끈 휘감기는가 싶더니 하얀 사탕이 딸의 입속으로 옮겨 갔다.

- 나는 움찔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초등학교 6학년 짜리 어린애와 스물아홉 살이나 된 남자의 그런 모습이 왠지 징글징글했다. 하나와 희롱하는 준고가 전혀 모르는 낯선 남자 같았다. 뭔가 알 것 같은데, 내 안의 상식이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자신을 나무랐다. 

- 준고가 흠칫 돌아보았다. 서 있는 나를 보고는, 누가 본다고 난처할 광경은 아니라는 듯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씩 웃고는 다시 눈길을 돌렸다. 나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마루방으로 들어갔다.

- 나무 아래 벤치에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천천히 걸어오는 준고가 보였다. 검은 윗도리에,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요즘 그를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는 생각이 났다. 말을 걸려고, 편지와 사진을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일어서려는데, 발로 담배를 비벼 끄는 준고 옆에 하나의 모습이 있었다. 말을 걸기가 망설여졌다. 결국 벤치에 다시 앉고 말았다. 며칠 전 모임이 있던 밤, 둘의 친밀했던 모습이 이끼 낀 바위라도 되듯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 준고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하나가 눈부신 것이라도 보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대로 한동안, 둘은 선 채로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나가 봄의 화사한 햇살이 쏟아지는 벤치에 달랑 올라앉았다. 그리고 조그만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다리를 덜렁거리면서 준고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준고가, 그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 "나, 잠깐 쉴게."
하나가 그렇게 속삭이며 다른 여자 애에게 아키라의 썰매를 양보했다. 양보받은 여자애는 신이 나서 웃는데, 아키라는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걸어가는 하나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숨이 넘어갈 듯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하나가 그곳을 떠났다. 가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살며시 입 안에 넣는다. 아마도 사탕이나 뭐 그런 거겠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 순간 짜증스럽다는 듯이 눈을 찡그린다. 그러고는 억지스러운 미소를 띠고서 천천히 다가왔다.
"고마치 언니, 안녕하세요?"

-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 하나는 그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또 여느 때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맥없는 미소를 띠었다.
하나가 옆에 앉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이 아이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하나가 입을 오물거리고 있어, 사탕을 먹나 보다 하고 과자를 담아 온 가방에서 몇 개 꺼내주었다. 
"사탕 먹고 있는 거지?"
"아니요. 됐어요."
하나는 미련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은근히 화가 났다. 생각해서 주었더니 이 아이는 준고가 주는 것이 아니면 사탕도 먹지 않는다는 말인가.

- 하나가 하도 입을 오물거려, 무슨 사탕을 저렇게 오래 먹나 싶어 물었다.
"그 사탕, 굉장히 딱딱한 건가 보네?"
"사탕?"
"아니야? 아까부터 오물거렸잖아. 뭔가 싶어서. 뭐 먹는데?"

"... 피어스."

- 하나는 순간적으로 핀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혀를 쏙 내밀어 보여 주었다. 빨간 입술이 벌어지면서, 젖은 분홍색, 비밀스러운 혀가 얼굴을 내밀었다. 촉촉하게 젖은 혀 한가운데에, 낯익은 다이아몬드 피어스 한 개가 침에 휘감겨 조그만 얼음 알갱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나는 웃으면서 잠시 이쪽을 보다가 부끄러운 듯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혀를 집어넣었다.
"나, 생일이었어요."
조그만 목소리였다.

- "그래서 피어스가 갖고 싶다고 했더니 아빠가 귀 뚫기는 아직 이르다면서."
"그럼, 아직 어리잖아. 학교에서도 뭐라 그럴 테고."
"그래서, 그냥 갖고만 있어요. 내 보물이에요. 가끔, 이렇게 핥아요."
"어, 그러니."

- 소름이 끼칠 것 같아, 대충 대꾸만 했다. 이런 아이가 갖고 싶다고 조른다고, 장난감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피어스를 선물하는 남자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어두운 눈빛으로 웃는 아이도.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것을 왜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하나는 내 불쾌함도 모른 채 말없이 멍하게, 입만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를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밀키웨이."
"어, 뭐라고? 뭐가?"
"바다, 참 예쁘죠?"
나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나왔다.

- 어둡고 검푸른 바다에는 오늘도 녹아 가는 얼음이 둥둥 떠 있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처럼 하얗게 빛나는 잔 얼음이 일렁이는 물결에 밀려왔다 밀려갔다. 해안에 남아 있는 얼음은 이렇게 흔들리면서 수온의 상승과 함께 알게 모르게 녹아 사라진다. 커다란 얼음 덩어리는 해류를 타고 러시아의 바다로 돌아간다. 해역 어딘가에 여름에도 녹지 않는 얼음 덩어리가 모이는 장소, 유빙의 무덤이 있는 듯하다. 바닷가에 사는 우리는 절대 그것을 보는 날이 없겠지만. 
"바다를 좋아하니? 나는 싫은데. 모든 걸 체념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잖아. 이 냄새부터가 싫다니까."
검은 수면이 하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듯, 천천히 눈앞으로 밀려왔다가는 또 밀려갔다. 해안선에 떠 있는 어선 몇 척이 검은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는 하나에게 내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멀리서 골판지 썰매를 타고 노는 중학생들이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바다에서 온 아이야'
준고의 음산한 목소리가 되살아나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불현듯, 바다는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검푸른 괴물인데, 하나는 그 일부인 조그만 하얀 알갱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스쳤다. 

- 하나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길쭉한 눈이 역시 어른스러워 보였다. 이 아이가 어른인지 어린애인지, 나는 분간이 안 갔다.
"며칠 전에, 공원에서 봤거든. 말은, 걸려다 말았지만."

"그래요?"
중학생이 된 탓인지 목소리가 조금 낮고 차분했다. 나는 말을 골라 하려고 애쓴 나머지, 평소보다 더듬거리는 꼴이 되었다.
"준고 씨와 같이 있었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랬나요? 하긴, 항상 아빠랑 같이 있으니까."
하나는 뿌듯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 "... 내 귀에는, 엄마라고 들리던데. 그거,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좀 마음에 걸려서. 보통은 반대잖아. 그게 무슨 소리였어?"
"난 딸이잖아요."
하나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해 저문 보랏빛 하늘이 수면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로등에 잠깐씩 시간 간격을 두고 반짝반짝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즐거운 시간을 아쉬워하듯 중학생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고 새 교복을 펄럭거리며 뛰어다녔다. 나는 하도 의아해서 하나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변함없이 창백하고 조그맣고, 아직은 어린애의 얼굴이었다. 촉촉한 눈동자,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보는 듯 몽롱한 눈빛이 검푸른 바다를 향해 있었다. 
"언니, 딸은 엄마예요. 그래서, 다, 딸을 좋아하는 거예요."

"뭐? 그게 무슨 소리니?"
"모든 사람이 다 엄마를 좋아한다고요."
"..."
"모르면, 됐어요. 아무도 몰라도, 난 상관없으니까."
하나가 갑자기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 검은 바다에 떠 있는 희뿌연 밀키웨이가 파도와 함께 꿈틀거렸다. 봄 바다 특유의 눅눅한 소금 냄새가 해안까지 밀려왔다. 하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흐뭇한 표정으로 조그만 코를 벌렁거리며 바다 냄새를 한껏 들이쉬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주저하다가 또 과자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하나가 여전히 입을 오물거리면서 불쑥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금은 어린애다운 얼굴이었다. 
"고마치 언니, 있잖아요, 만약에."
"만약에 뭐?"
"우리 아빠가 죽인다고 하면, 언니는 어떻게 할 거예요?"
"뭐? 얘는, 당연히 싫지.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라도, 내 목숨은 내 거잖아. 아니야?"
"그렇군요."
하나가 또 뿌듯하게 웃었다.
이 아이는 때로, 정말 섬뜩한 표정을 짓는다.

- "너는 아니니?"
"음, 나는, 나는 아빠 거니까, 아빠 손에 죽어도 전혀 아무렇지 않아요."
갑자기 세찬바람이 불어왔다. 그 잔잔함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냄새를 풍기는 눅눅한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나는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옆에 앉아 있는 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똑바로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눈을 찌푸리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그것은 정말이지 애처로울 정도로, 무언가에 뒤틀린 어린애의 얼굴이었다.
가슴으로, 그 남자의 낮고 암울한 목소리가 울리며 나를 휘저었다.
'그 아이 전부가 다 내 거야.'

- 누구의 것? 사람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여자답지 못한 것일까? 사랑스럽지 못한 것일까? 하지만 이렇게 어린아이가 자신의 목숨을 타인의 것이라고 믿어서 좋을 리 없다. 
하나는 죽은 사람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처럼 맥없이 앉아, 그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코를 움찔거리며 자랑스럽게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아빠 거예요."

- 중학생이라 해 봐야, 아직은 철모르는 어린애라고 생각했다. 왜 어른스럽다고 생각했을까. 이것은 잘못 자라고 있는 가엾은 어린애의 얼굴이다. 내가 혐오하는 것은 하나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에 숨어 있는, 정체 모를 누군가의 어둠이다. 나는 줄곧 이 아이가 준고의 모든 것을 빼앗고 있다고, 준고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싫어했다. 어린아이란 손이 많은 가는 생물이다. 키우기 위해서는 기력과 체력은 물론 자신을 위한 충실한 인생까지 온갖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까지 요구된다. 그래서 이 어린아이 하나가 준고의 인생을 방해하고 있다고, 내 인생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준고가 이 아이의 무언가를 계속 빼앗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형태는 없지만 소중한 어떤 것. 혼 같은 것을. 

빼앗기며 자라. 커다란 공동이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다시 빼앗아, 살아남는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른이지만, 성숙하지 않고 썩어 갈 뿐이다. 그러니까 이 이상 기다리지 말자. 아, 이제 정말 포기하자.

- 빼앗기기만 할 뿐인 북쪽의 이 조그만 동네. 어획고도 나날이 줄어 가고 있고, 타쿠쇼쿠 은행마저 위기에 허덕이고 있다. 그런 곳에 찾아온, 달짝지근한 우유 냄새나는 이 아이. 무력하고 가녀린 이 아이. 동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빼앗기고만 있는 이 아이의 가엾은 처지를 벌써부터 알고서, 그래서 그렇게 잘 대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빼앗고 싶은 것일까. 어리고, 부드러운 것을. 연약한 자의 무구한 혼을 쓰다듬고 예뻐하고 웃는 얼굴로 지켜 주면서도, 역시. 
빼앗고 싶은 것일까.

 

 

1993년 7월.


- "선생님에게 싫은 소리 많이 듣잖아. 그럴 때마다 엄마가 얼마나 창피한 줄 아니.”
창가에서 일어나 작은 방의 조그만 벽장을 열었다. 벽장 아래칸이 내 전용 공간이다. 힐금 큰 방 쪽을 돌아보니, 아빠가 곯아떨어진 동생을 안고 이부자리로 가는 중이었다. 손발을 축 늘어뜨리고 쿨쿨 잠든 동생이 무슨 이상한 동물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4학년 용 국어와 수학, 사회 교과서를 책가방에 넣는데, 귀옆으로 각다귀가 엥엥거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 북쪽의 학교는 여름 방학이 짧은 대신 겨울 방학이 길다. 7월 12일, 여름 방학이 되려면 아직 며칠 남았지만 벌써 방학 기분에 들떠 국어와 수학 시간이 귀찮았다. 할아버지 대부터 사용하고 있다는 커다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계 옆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진 액자가 젊은 가족을 내려다보듯 기우뚱하게 걸려 있다. 아빠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눈과 코가 크고 눈썹의 숱이 많은 아빠와 얼굴이 꼭 닮았다. 흑백 사진 속의 근엄한 얼굴이 왜 그런지 늘 나만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오래전에 죽은 사람인데도 무서웠다.

- 그런 말을 주로 들었다. 오빠와 여동생은 아빠를 닮아 눈과 코가 크고 눈썹도 짙은데, 나는 눈이 길쭉하고 얼굴도 몸도 가냘픈 게 전혀 달랐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빠는 잠자코 웃는데, 엄마는 기운이 쭉 빠졌다.

- 바로 옆에 큰고모네가 살고 있는데, 그 가족들도 오빠나 동생에게는 싱글벙글 웃지만 나는 멀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얌전하고 조용하게, 늘 멍하니 살고 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언제나,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가 정말 있어야 할 곳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바다를 보면서, 누가 나를 데리러 와 주지는 않을까, 나를 잘 아는 누가, 하고 생각하면서 지낸다. 하기야 다른 여자 애들도 외로울 때는 그런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 "지진이다!"
아빠가 외쳤다.
"채널 바꿔, 얼른! NHK로. 제일 빨라."

- 엄마가 리모컨을 집으려는데, 집 안의 전기가 퍽 소리가 나면서 나갔다. 둘이 뭐라고 얘기하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활짝 열어 놓은 창문 너머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보라색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전된 탓에, 녹은 유리처럼 음산한 빛이 창문에서 이쪽을 향해 괴물의 손처럼 길게 뻗어 나왔다. 내 창백한 얼굴이 그 색에 물들어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옆에 사는 큰 고모의 남편은 어부였다. 현관을 뛰쳐나가 바다로 황급히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허둥대며 외쳤다.
"누나, 바다로 가면 안 돼! 해일이 덮칠지도 모른다고!"

"배 좀 보고 올게."
"매형! 가지 말아요. 그냥 내버려 두라니까!"

- 엄마가 동생을 옆구리에 껴안고 집을 뛰쳐나갔다. 창문 너머에서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짙은 보라색이었던 하늘이 먹물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달도 보이지 않았다.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멀리서 아른거리던 등댓불이 쓰윽 사라졌다. 밖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하나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책가방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멍하니 있었던 것이다. 현관에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하나!"

- 아빠가 나를 보자마자 유리 조각을 밟으면서 달려와서는 나를 들쳐 업고 도로로 뛰어나갔다. 높은 지대로 올라가는 금이 좍좍 간 아스팔트 언덕길에는, 허겁지겁 뛰어가는 사람과 해일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며 느긋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어른들의 생각이 저마다 달랐다. 엄마와 동생은 저만치 앞에서 뛰고 있었다. 아빠의 등은 억세고, 땅을 차며 달리는 속도는 텔레비전에서 본, 사냥감을 쫓는 수사자 같았다. 나는 아빠의 등에 딱 달라붙어 울음을 터뜨렸다.
"왜 울어. 괜찮다, 하나야."


- 나는 아빠와 얘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아빠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늘 짜증을 부리는 것이나 때문인 것 같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빠를 조심스러워했다. 올 초에 나는 첫 생리를 했다. 학교에서 이미 배웠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는 반에서 몸집도 작은 편인데 너무 이르다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하나가 벌써... 너무 빨라."
그날 밤, 아빠에게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런 것도 그런가 봐요. 애가 징글징글해."
엄마는 암울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이런, 바보 같은 소리."
아빠가 어색하게 엄마를 나무랐다. 그 의미는 잘 몰랐지만, 자신이 이 가정에서 동떨어진 존재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엄마는 왠지 아빠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 등에 업혀 뛰어가는 지금, 아빠와 처음 얘기를 나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사실이 어떤지는 잘 모른다.

- 어른의 등에 업힌 나는 평소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보이는 경치에 놀라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살그머니 돌아보았더니, 언덕길 아래에서 검은 구름 같은 것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넘실넘실 마치 연기 같고, 악몽 같은 것이 물이었다. 바다가 이쪽으로 점점 밀려오고 있었다. 아빠가 "어이!" 하고 엄마와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뒤쫓아간 아빠에게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오빠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나갔으니까 바다 쪽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구르르르릉, 하고 대형차가 관광버스나 4톤 트럭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아빠가 급하게 왼쪽으로 비키려 했다. 돌아본 나는 숨을 헉, 삼켰다.

- 차가 아니었다. 버스 같은 것보다 훨씬 높고 시커먼 파도가천천히 일렁거리며 쫓아오고 있었다. 도로의 위아래가 뒤바뀐 것처럼, 강물이 하류로 콸콸 쏟아지는 것처럼, 번쩍이는 파도의 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치에 피어 있는 하얀 꽃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 꽃이 순식간에 누군가의 발에 밟혀 흙투성이가 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엄마가 넘어졌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아빠가 돌아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아빠는 뒤에서 달려온 경트럭의 너저분한 짐칸에 나를 던졌다.
"하나야, 힘내! 꼭 살아야 한다!"
아빠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외쳤다. 그리고 몸을 돌려 엄마와 여동생에게 돌아갔다. 짐칸에서 얼이 빠진 채 그 등을 보고 있었다. 셋이 부둥켜안고 도로에 주저앉았다. 나는 외쳤다.
"아빠!"

- 파도는 쉬지 않고 밀려왔다. 자전거를 탄 오빠가 파도에 쫓기며 언덕길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가 아빠 엄마에게 다가가 뭐라고 외치는데, 파도가 또 밀려왔다. 그때, 짐칸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한 할아버지가 주름진 투박한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가렸다.
"보지 마라. 보지 마..."
마치 독경이라도 하듯 억양이 없는 묘한 중얼거림이었다. 갑자기 소금 냄새가 코를 찔렀다.

- 너덜너덜하게 낡은 경트럭에는 좌석에나 짐칸에나 노인들만 넘쳐나게 타고 있었다. 한동네 사는, 면허도 없는 젊은 부인이 핸들을 부둥켜안듯이 운전하고 있었다. 엔진이 신음을 내질렀다. 더럽고 여기저기 녹슨 짐칸에 매달려 있는데, 비명 같은 진동이 전해졌다. 그리고 끝내 경트럭도 물살에 휩쓸렸다. 검은 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몸이 뜨더니, 갑자기 편해졌다. 시커멓고 거대한 괴물의 입에 삼켜진 것 같았다. 물을 잔뜩 먹었다. 죽는다고 생각했더니, 기분이 이상했다. 물속에서 눈을 떴다. 거품과 빛과 무겁게 가라앉는 어른들의 몸이 스산한 무늬처럼 뒤엉켜 보였다. 휩쓸리다 무언가에 부딪쳤다. 하지만 물의 부드러움이 아픔을 덜어 주었다. 물이 끝까지 버티다가 밀려나갈 때 얼굴을 내밀었다. 캄캄한 밤이었다. 별 하나 없었다. 떠다니는 나무토막을 두 팔로 껴안자, 몸이 가벼워서인지 둥실 떠올랐다. 검은 바다가 내 몸을 끈끈하게 감쌌다. 바로 옆에 나보다 어린 여자 애가 떠 있는 것이 보였는데, 다음 순간 무엇인가가 다리를 잡고 끌어내리는 것처럼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마치 괴물이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린 것 같았다. 

- "아빠! 아빠!"
마지막 보았던 상냥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빠! 아빠!"
하지만 바다가 내 몸을 천천히 흔들 뿐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외쳐 불렀다. 물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 흐름을 따르다가 또 짠물을 먹고 말았다. 물이 쭉쭉 빠져나갔다. 정신을 차렸을때, 진흙탕과 쓰레기 더미로 뒤범벅이 된 땅에 앉아 있었다.

- 언덕 위쪽을 올려다보았지만, 캄캄해서 어디에 어떤 건물이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밋밋한 풍경이었다. 바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번들거리는 어두운 바다가 방금 전 심술궂었던 장난의 여운에 잠긴 것처럼 조용히 웃고 있었다. 해안 근처에 있던 집들은 깨끗하게 없어지고 찌그러진 지붕이 땅에 들러붙어 있거나, 굴뚝만 헐벗은 자작나무 가로수처럼 남아 있었다. 프로판가스가 폭발하는 것처럼 펑! 펑! 하는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바로 앞에 있는 주택가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투닥투닥 불똥이 튀는 소리. 바람을 타고 온갖 것들이 타오르고, 지금까지 맡아 본 적 없는 불결한 냄새가 떠다녔다. 밤하늘을 향해 가느다란 불길이 붉게 솟아올랐다.
예뻤다.

- 파도가 밀려와 겹치고 뒤엉키듯 흔들리면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진짜 가족끼리만 바다 너머로 가 버리고 말았다.

- 불길이 예뻐서 한참을 바라보며 웃었다. 흙탕으로 범벅이 된 아저씨들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도시에서 온 여행자들이었다.
"얘야, 너 괜찮니? 가족은?"
사투리가 섞이지 않은 세련된 말투였다.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아저씨들이 기겁을 했다. 웃으면 안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한 명이 개흙에 빠진 것처럼 진흙투성이인 나를 업고 걸었다. 언덕 위에 어떤 시설이 있느냐고 물어서, 병원과 체육관과 양로원이 있다고 대답했다. 아저씨들은 가다가 눈에 띄는 사람들까지 등에 업고 손을 잡아끌면서 비틀비틀 언덕길을 올라갔다. 

- 식료품이 쌓여 있는 곳을 향했다. 검은 바닷물을 많이 먹은 탓인지 타 들어가는 것처럼 목이 말랐다. 2리터짜리 페트병을 찾아, 아무에게도 주지 않겠다는 듯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힘을 줄 수 없었다. 내 것이라고 끌어안은 채 다시 구석으로 돌아와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힘이 없어 움직일 수 없었다. 

- 나는 몸이 나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니까, 역시 그 가족들은 모두 죽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해가 기울 때쯤에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미적지근해진 페트병을 껴안은 채 시신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더러운 담요를 조심조심 들춰 보았다. 흙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차례차례 드러났다.
아아. 
아빠가 있었다.

- "친구를 도우려 하지 말라고, 같이 있으려 하지 말고 아무튼 뛰라고 하지만, 그것도 다 소용없는 일이야. 혼자 살아남아서 뭐 하냐고."
"옳은 말이야. 그러느니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지."
나는 페트병을 껴안은 채 몸을 더 움츠렸다.
할아버지의 손가락 사이로 보았던 가족의 모습을 생각했다. 넷이 부둥켜안고 마지막까지 함께하려던 모습. 아빠는 엄마와 동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고, 오빠 역시 자전거를 내던지고 언덕을 뛰어올라 그들에게로 갔다. 나만 경트럭의 짐칸에 내던져져, 힘내라, 꼭 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아빠의 표정은 무척이나 상냥했다. 처음으로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것 같은데, 그것도 사실은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 "가족이란 게 대체 뭔지..."
아줌마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툭 끊긴다 싶더니, 어린 여자애처럼 무릎을 껴안고 살찐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해일이 오면 뿔뿔이 흩어지란 말은, 가족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소리지. 다 같이 있었는데, 뿔뿔이 떠내려갔어. 이런 내 심정을 누가 알겠느냐고. 누가 알아!" 
바다 냄새가 섞인 끈끈하고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체육관 안을 훑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시큼하고 비릿한, 뭔지 모를 냄새가 체육관 안에 퍼졌다. 죽은 사람의 냄새,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가족의 냄새. 비릿하고 눅눅한.

-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달려왔다. 그 뒤에 키가 크고 젊은 경찰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그러다 내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촛불만 가물거리는 어둠 속에서, 몸을 구부리고 얼굴을 들이밀더니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찡그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너, 혼자니?"
"네."
그는 나와 내가 껴안고 있는 페트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잘 안 열리니, 묻듯이 손을 뻗더니 뚜껑을 금방 열어 주었다. 경찰은 감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타 들어가는 갈증이 그때야 되살아나, 나는 2리터짜리 커다란 페트병을 기울이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풀리지 않았다. 입술 끝에서 뚝뚝 떨어진 물이 옷까지 흠뻑 적셨다. 나는 미친 듯이 물을 마셨다. 경찰이 그런 나를 몹시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쳐다보았다.

- "담요가 모자라."
아줌마가 경찰에게 말을 건넸다.
"나더러 어쩌라고요."
경찰은 시끄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매정한 말투가 아니라, 자신은 관심 없다는 투였다. 아줌마가 끔쩍 놀라 입을 다물었다.
"너, 다른 가족은?"
경찰은 내게만 관심이 있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페트병에 입을 댄 채 고개를 저었다. 흙탕에 뭉친 긴 머리가 가슴 앞에서 흔들렸다.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담요에 덮여 있는 시신 쪽을 가리켰다. 나도 힐금 돌아보았다. 촛불에 드러난 담요 위에 놓인 하얀 꽃이 언제 그랬나 싶게 시들어 썩은 꽃처럼 흉한 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시신에게 목숨을 내준 것처럼 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썩어 버렸다. 

- 물을 마시면서 경찰을 쳐다보았다. 눈빛이 축축하고, 여리고, 꿈을 꾸는 것처럼 야릇했다. 아직 젊고 피부도 매끈하고 깨끗했다. 길쭉한 눈에는 호기심이 하나 가득 어려 있었다.


- 경찰은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일어섰다. 키는 큰데 몸이 말라, 사람이 아니라 기다란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가죽 구두 끝에 겁이 날 정도로 잔뜩 힘을 주고 꽁초를 한없이 짓뭉갰다.
어둠 속에서 조그만 불똥이 튀었다가 사라졌다.

- "구사리노, 아냐?"
등 뒤에서 나는 소리에 경찰이 돌아보았다. 같은 감색 제복을 입은, 젊고 땅딸막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 어."
"어가 뭐야. 정말 오랜만이군. 해상 보안 학교에서 보고 처음인가. 너도 동원된 거야? 난 에사시에서 순시선에도 경찰관을 몰래 태우고 왔는데. 모래와 쓰레기 더미 때문에 배를 댈 수가 없어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그런데 넌 지금 몸베쓰에 있잖아. 그쪽 순시선은 출동하지 않은 것 같던데." 
"어, 나는, 개인적으로 온 거야."
"개인적으로?"
"응. 친척이 있어서, 오타루에서 어선을 탔지. 헬리콥터는 도저히 안 되겠고, 어떻게 가나, 궁리하고 있는데, 청년 단체에서 의사와 자원 봉사자와 뜻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배로 떠난다고 해서... 이거,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어서."
제복을 가리키며 말하는 남자의 한쪽 볼에만 희미하게 웃음이 묻어났다. 감색 제복을 입고 있는 이 사람들은 경찰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올려다보고 있는데, 땅딸막한 사람이 물었다.
"그래, 친척은? 어떻게 되었어?"
"이 아이 하나, 살아 있더군."

- 그가 갑자기 몸을 쭈그리고 앉더니, 길고 홀쭉한 팔을 뻗어 나를 훌쩍 안아 올렸다. 시야가 높아져 체육관 구석구석까지 내려다보였다. 가족끼리 모여 밤을 지내는 사람들. 시신 옆에 앉은 채 떠날 줄 모르는 사람, 늙은 부부는 담요 한 장을 함께 쓰고 통조림을 나눠 먹고 있었다. 촛불 속에 있는 얼굴들 모두가 유난히 창백했다.
품에 안겨 꼼짝 않고 있는데, 땅딸막한 아저씨가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야, 많이 닮았는데."
구사리노라 불렸던 아저씨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내 아이니까, 당연하지."
악취미적인 농담에 어이가 없다는 듯 땅딸보 아저씨가 피식 웃었다.

- 뻣뻣한 제복에서 짭짤한 바다 냄새가 났다. 누가 부르는 소리에 땅딸보 아저씨가 대답하면서 뛰어갔다. 눈앞에 있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쪽에서도 질세라 길쭉한 눈을 번쩍 뜨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 왠지 처음부터,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휭 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 라이터의 불길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체육관 여기저기에서 촛불이 흔들리고, 그 가운데 몇 개는 꺼지고 말았다. 사방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두 손을 뻗어 라이터 불이 흔들리지 않게 손바닥으로 감싸자, 남자가 후후, 마른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담배에 불이 붙었다. 한 모금, 빨아들인다. 라이터를 집어넣고는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다.
"눈치가 빠른데, 아가씨."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나는 기뻐서 방긋 웃었다. 낯선 남자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살짝 대었다. 따스했다. 남자가 걷기 시작하자 한쪽 팔에 안긴 내 몸이 흔들흔들 흔들렸다. 떨어지지 않게 목을 꼭 끌어안고, 비처럼 눅눅한 그 사람의 체취를 맡았다. 불현듯, 이게 없으면 이제 살아갈 수 없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어르신."
친척이라는 그 남자가 멀리 있는 누군가를 불렀다. 철제 의자가 죽 놓여 있고, '홋카이도 남서해안 지진 아오나에 재해 대책본부'라고 매직으로 휘갈겨 쓴 곳에서 나이가 지긋한 한 남자가 본부 사람과 무슨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보면서 말했다.
"가족을 모두 잃은 아이인가? 그보다 준고 군, 다케나카 씨네 말이야, 장남 가족이 여기 아오나에서 둘, 마쓰에 해안에서 둘. 현재 가족 네 명이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었어..."
그리고 다시 본부 사람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 난 다케나카 씨를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람입니다. 아니, 친척은 여기 이 젊은이올시다. 아이도 있는 터라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 나이가 지긋한 그 남자는 말쑥한 양복에 모자, 그리고 멋들어진 금색 시계를 차고 있어 어딘가 모르게 도시의 밤 분위기가 풍겼다. 피부색도 좋고, 돈이 풍족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스러움이 있었다. 그 할아버지와 준고 군이라 불린 비 냄새나는 젊은 남자는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신기했다. 아저씨가 할아버지를 '어르신'이 아니라 성으로 다시 불렀다. 

- "하나를 찾았습니다. 살아 있었어요."
"... 하나를?”
오시오 씨라 불린 할아버지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나는 아저씨와 이마를 맞댄 채 입을 꼭 다물고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할아버지는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돈과 도시와 밤 분위기가 할아버지의 몸에서 느릿느릿 빠져나가면서 움푹한 주름투성이 눈에서 소금물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살아있었구나! 하나야! 천만다행이로구나! 아직 이렇게 어리다니. 지금 몇 살이지?"
"열한 살입니다. 오시오 씨."
아저씨가 코를 킁킁거리며 웃듯이 말했다.

- 아저씨는 웃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웬일인지 눈물을 주르륵 음이었다. 내 얘기를 듣는 할아버지의 눈에서 그 뜻을 알 수 없는 눈물이 철철 넘쳐흘렀다. 
"그래, 그랬구나. 다행이다. 하나야. 그래도 여기서, 행복하게 산 모양이로구나.”
대답할 말이 없었다. 숨이 막혀 그저 입술만 파르르 떨었다. 맞댄 이마를 빙빙 돌리면서 도움을 청하듯 아저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와 비슷한 길쭉한 눈이 웃음을 참으면서 촉촉하게 빛났다. 그 눈이 할아버지에게는 보이지 않는 나의 증오를 알알이 보면서 좍좍 빨아들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안고 있는 탓에 아저씨의 감색 제복 군데군데에 마른 흙이 묻어 시커멨다.
"왜 저렇게 울지?"
귓가에서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 뜨거운 입김에 목이 간지러웠다.

- 할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재해 대책 본부 사람과 무슨 교섭을 시작했다. 친척이 와 있느니, 보호자가 사망한 아이니, 아무개 시의원에게 전화를 해 보라느니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온화하지만 고집과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한동안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마침내 돌아보며 말했다.
"됐어. 데려가도 좋다네. 뒷일은 나중에 다시 의논하세나."

그리고 아저씨에게 매달려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울다 웃는 표정을 지었다.
"무겁지 않은가, 준고 군?"
"아닙니다."
아저씨가 입술 끝에 담배를 문 채로 우물우물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기가 차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다시 말했다.
"아직 한참 어리구나. 그런데 신기한 일이지, 준고 군을 이렇게 금방 따르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죠."

- 할아버지가 나와 아저씨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나는 갑자기 잠이 쏟아져 아저씨의 딱딱한 쇄골에 머리를 척 기대고 눈을 감았다. 문득 어젯밤, 손발을 축 늘어뜨린 채 아빠 품에 안겼던 동생이 이상한 동물처럼 보였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잠이 쏟아져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흔들리는 동안, 손발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체육관에서 나가는 것 같았다. 자갈길을 밟는 발소리가 저 아래쪽에서 울려, 아, 굉장히 키가 큰 사람이 나를 안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떨어뜨리면 위험하겠지만, 이 사람이라면 떨어뜨려도 괜찮아.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모르는 사람인데, 무섭지 않았다. 

 

- "일단은 데리고 있다가, 홋카이도 안에 있는 친척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기로 하지."
걸어가면서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저씨가 단호하게 딱 잘라 대답했다.
"내가 키울 겁니다."
대체 무슨 소리지? 나는 몽롱한 머리로 생각했다.

- "준고 자네가 말인가? 글쎄, 그게..."
"독신이 낫지요. 그리고 수입도 안정적이고, 요즘 같은 불경기에 누가..."
"그건 그러네만."
"어르신, 뭐가 걱정입니까?"
"아니, 자네는 성실한 청년이고, 나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지만 말이지."
자갈길을 밟는 발소리가 또 울렸다.

- [가족이라는 게 뭔지...]
중얼거리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귀에 되살아났다. 나는 잠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할아버지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친구들하고 편하게 지내고, 여자와 사는 것과는 다른 얘기야. 준고 군, 자네는 결손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나. 가정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잘 모를 텐데."

- 아주 잠시, 암울한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가 어이없는 일이라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어르신, 결손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 결손이 뭐지?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라 뜻을 알 수 없었다. 억지로 눈을 뜨자, 마음으로 웃고 있는 아저씨의 푸근한 얼굴이 눈으로 날아들었다. 그 얼굴을 보았더니, 가슴이 찡했다. 목에 매달려 딱딱한 쇄골에 얼굴을 묻고서,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아저씨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해서 웃었다. 후후후후, 메마른 웃음소리가 자장가처럼 울렸다. 

 

- 해안선에는 무너진 가옥과 부서져 떠 내려온 배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저물어 가는 하늘을 향해 연기가 군데군데서 피어올랐다. 어선을 타고 둘로 갈라진 나오나에 곶 등대 옆을 지났다. 배는 파도에 흔들리면서 북쪽 바다로 나아갔다. 아저씨는 갑판에 앉아 나를 무릎에 앉혔다. 그 얼굴을 살그머니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눈을 찡그리고 멀어져 가는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섬을 그리워하듯 무거운 눈빛이었다. 

- "오쿠시리 섬에 왔던 적 있어요?"
"응. 옛날에."
짧은 대답이었다.
긴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머리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와 함께 턱의 움직임이 전해져, 심장까지 찌릿찌릿 울리는 듯했다. 졸린데도 아저씨가 마음에 걸려 억지로 눈을 뜨고 있었다.

"중학생 때, 겨우 반년이었지만."
"왜요?"
"우리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친척이라서, 네 집에 한동안 신세를 졌었지. 너희 아버지는 외지에서 돈벌이를 하느라 종종 집을 비웠어. 네가 태어나기 바로 얼마 전까지. 그 후로는 한 번도 와보지 않았는데. 나도, 싫증이 났고."


- 조금 떨어진 곳에 피곤하다는 듯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넸다.
"준고 군..."
그러자 아저씨는 피식 웃었다. 
"옛날 얘기야. 이제 다 지나간 일이지."
그러고는 턱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허리에 감겨 있는 긴 팔이 따스하고 푸근했다. 그다음 눈을 떴을 때, 회백색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는 오타루 항에 도착해 있었다. 아저씨의 품에 안겨 육지로 내려갔다.  

- 모래라도 씹는 표정으로 도시락을 먹고 있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고서 물었다.
"아저씨가 좋냐?”
"네."
"우리 아버지와 네 아버지가 사촌간이야."
창밖을 보고 있던 아저씨가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와 함께 딱딱한 가슴 근육이 움직여, 아저씨의 뼈에서 내 뼈로 자잘한 진동이 전해졌다. 할아버지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하나야, 남자란 말이지, 태어난 곳을 잘 떠나지 않아. 죽을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여자는, 시집을 멀리 가는 일도 있잖니. 그러면 여자 형제들이 시집간 곳에 새 친척이 생기겠지. 그래서 홋카이도 여기저기에 네 친척이 있는 거란다." 
"네에."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 삿포로 역에 도착했다. 도시의 시끌시끌함이 기차 안까지 날아들었다. 서둘러 폼으로 내렸다. 할아버지와는 거기서 헤어지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데다 다케나카의 친척에게 연락을 취해 장례 절차와 나의 거취에 대해 의논을 해야 하니 삿포로를 떠날 수 없다고 했다.

 

- "준고 군, 늦었는데 삿포로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게 어떻겠나?"
아저씨는 졸려서 눈을 비비는 나를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보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어차피 잘 테니까, 차로 가겠습니다."
"그래도 자네. 어젯밤부터 한숨도 못 자지 않았나."
"괜찮습니다. 어르신, 스물일곱, 한창때 아닙니까."
"하하하. 그렇군. 그래그래, 노인네와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지. 순시선을 타다 보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닐 테니 말이야."
할아버지는 듬직하다는 듯이 웃고는 내 얼굴을 또 들여다보았다. 번쩍거리는 도시와 돈 냄새가 온몸에서 다시 풍기기 시작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두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이제 가자."
아저씨는 입체 주차장에 세워 둔 차의 조수석에 나를 앉혔다. 인형을 살며시 내려놓는 것처럼, 손놀림이 어색했다. 그러고는 이제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닫고 돌아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 밤인데도 인공의 불빛이 눈부신 삿포로 시내를 지나자 차는 점차 속도를 올리면서 어딘가를 향해 하염없이 달렸다. 한참이 지나 눈을 떴다. 불쑥 눈앞에 보이는 정경에 깜짝 놀라 몸이 움츠러들었다. 공포에 떨면서 소리 없는 긴 비명을 질렀다.
그곳은 바다였다.
아저씨가 운전하는 차가 캄캄한 바다 위를 쌩쌩 달리고 있었다. 군청색 밤하늘에 환영처럼 떠 있는 달을 향해 차는 끝없이 달렸다. 파도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물이 차의 좌우로 출렁출렁 밀려왔다. 
여기가 어디지?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아, 꿈을 꾸었나 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비비면서 옆을 보니, 부연 달빛 속에 아저씨의 야윈 옆얼굴이 있었다. 차창은 열려 있고, 입에 담배를 문 채 조금 피곤한 듯 눈을 찡그리고 핸들을 잡고 있었다.

- "바다에 있는 거예요?"
아저씨가 움찔 어깨를 떨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더니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웃었다. 그러자 아주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아 보였다. 그리고 한쪽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깨어났니?"
"응."
"바다가 아니고, 숲이야. 보이지?"

- 몸을 일으켜 차창 밖으로 내밀었다. 도로 양쪽이 마치 바다처럼 캄캄한 밤의 숲이었다. 그곳은 바다 위가 아니라 한없이 계속되는 어두운 아스팔트 도로였다. 시원하게 탁 뚫린, 신호 하나 없는 도로. 반대쪽 차선을 달리는 차는 전혀 없었다. 의지할 것이라곤 라이트 불빛과 그 속에 떠오르는 조그만 표지판 뿐,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은 나와 이 남자밖에 없는 느낌이었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으로 나무들의 촉촉한 향이 조금씩 다가서듯 들어왔다. 어두운 관목 숲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도로 바로 옆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 파도를 타고서 낯선 이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처럼 신비로운 달밤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어젯밤에도 이렇게 왔었어. 무섭니?"
"바다인 줄 알고. 그래서."
나는 그렇게만 대답하고서 또 몸을 바짝 웅크렸다.
"괴물의 배 같은 바다가 한 번 삼켰는데..."
목이 말랐다. 저세상의 싸늘한 불이 식도를 태우는 것 같았다. 페트병을 찾아, 한껏 기울이고 마셨다.
"한동안은 무서울 테지. 하지만, 괜찮아질 거야."
아저씨가 불쑥 말했다. 나는 페트병에서 입술을 떼고 물었다.

"바다가?"
"그래."

- 아저씨는 속도를 줄이면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 있는 조그만 등을 켰다. 나는 눈이 부셔서 눈을 찡그렸다.
아저씨가 이쪽으로 몸을 쑥 내밀었다. 커다란 몸에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 올려다보았더니, 아저씨가 조수석 문 안쪽 포켓에 들어 있는 지도를 꺼냈다. 
"여기가 아마, 이쯤이겠지."
지도를 펼쳐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지도를 뒷자리에 던지고는, 천천히 바다로 미끄러져 떨어지듯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 무서울 거 없어."
낮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아저씨는 왼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 불이 도깨비불처럼 부옇게 흔들렸다.
"언젠가는 나도 이 바다에서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서울 거 없어."

- "혼?"
"음. 피라는 것은, 이어져 있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내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의 몸속에, 아버지와 어머니, 내가 잃은 소중한 것이 전부 있을 거야. ... 요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
담배 연기가 한들한들, 가늘게 피어올랐다.
"그러니까, 죽어 헤어졌어도, 그건 이별이 아니야. 자신의 몸에 피가 흐르는 한, 사람은 가족과 절대 헤어지지 않아."
암울한 목소리인데도 묘한 박력에 넘쳤다. 피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나는 잠자코 고개만 갸웃거렸다. 준고의 입가에 천천히, 조금은 이죽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모르겠니? 하기야 넌 아직 어린애니까. 열한 살이라... 그 나이 때는 나도 나무에 오르고 수영하고 놀기만 했으니까, 핏줄이 어떻다느니, 어려운 얘기겠지. 이런 말은 친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데, 지금 갑자기 왜 했을까."
말을 끝낸 아저씨의 얼굴이 조금 무서워졌다. 한참을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가는 연기가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어지럽게 흔들렸다.
"... 난 죽을 때는 반드시 바다 옆으로 돌아올 거야. 어디에 있든."

- "... 아니야. 아무것도."
"말해 봐. 체육관에서 무슨 일 있었어?"
"가족이란, 같이 죽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
"어쩌다 잘못해서 혼자 살아남은 아줌마가 그랬어. 아줌마. 어린애처럼 울면서, 굉장히 말이 많았어."
준고가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내던지고, 언짢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넌 그 사람들과 죽으면 안 돼. 내가 데리러 왔잖아."
그 사람들은 그 가족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반짝이는 파도의 벽에 삼켜진 네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림자극처럼, 이미 멀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자니, 왠지 자꾸 기운이 빠졌다. 


- "찾았어, 그 체육관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너를."

떨리는 목소리였다.
"반드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 준고는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턱을 창 쪽으로 기울였다. 몇 시간 만에 반대 차선을 달리는 차와 스쳐 지나갔다. 밤의 바다에서 마주 달리는 보트가 휙 지나가는 것 같았다. 불빛이 다가오면서 바람이 휭 일었다가, 다시 고요한 어둠이 사방을 뒤덮었다. 잠시 후, 큼지막한 표지판이 보였다. 준고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우회전을 했다. 하늘이 어렴풋한 회색으로 변했다. 검은 바다를 헤치고 달리는 이 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밤이 이제 곧 밝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한없이, 살아 있는 것은 나와 이 사람뿐인 차 안에서, 이 세상의 바깥을 달리고 싶은 묘하고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 마침내 마법이 풀리듯 하늘이 조금씩 밝아졌다. 동쪽 하늘이 타오르는 빛으로 가득했다. 아침 태양이 아직은 서늘했다. 바다를 두려워하는 본능 같은 그 마음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누그러들었다. 숲은 자작나무와 낙엽송으로 울창하고, 자욱하게 낀 안개가 산들을 우윳빛으로 뽀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거대한 홋카이도를, 단둘이서 서에서 동으로, 준고는 이제 지도는 보지 않았다. 도로 표지판에 신경을 쓰는 기색도 없었다.
아, 이 부근은 이 사람이 사는 고장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 혼자 산다는 것을 알았다.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니,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커튼을 열어젖히자,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굴뚝이 솟은 삼각 지붕이 줄줄이 이어지는 적막한 거리 풍경과 함께 검푸른 거대한 바다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어댔다.

 

- "배고파?"
고개를 젓자, 준고는 나를 방 한가운데에 달랑 내려놓고 안쪽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트는 소리가 들렸다. 자그마한 원룸이었다. 철제 선반에 잡지가 빽빽이 꽂혀 있는 것 외에는 텔레비전과 비디오, 재떨이가 놓여 있는 가스레인지, 일인용 침대뿐이었다. 널려 있는 것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이불은 방금 전에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뒤죽박죽이고 리모컨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왠지 허전해서 준고가 있는 욕실 쪽으로 가 보았다. 세면대 앞 선반에 여성용 화장품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준고는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듯 가벼운 동작으로 그것들을 검고 조그만 쓰레기통에 버리는 중이었다. 꽃가루가 날리듯 달콤한 화장품 냄새에 코가 간질거렸다. 세면대 아래 떨어져 있는 진주 귀고리 한 짝을 집어 들었더니, 준고가 미간을 찡그리며 빼앗았다. 
그것도 쓰레기통에 버려서 실망스러웠다.

- "버리는 거야?"
"응."
"아주 예쁜데..."
"이런 거 안 돼, 어린애는."
"언제부터 어른인데?"
준고가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준고의 얼굴이 저 높이에 있어서 올려다보면 목이 아플 것 같았다. 얼굴에 그늘이 져 있어 어떤 표정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 글쎄, 잘 모르겠는데."
준고가 그렇게 대답하면서 물을 잠갔다.

- 준고가 내 머리에 따뜻한 물을 좍좍 끼얹었다. 그리고 샴푸로 머리를 감겨 주었다. 집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향이 났다. 눈을 꼭 감고 있었더니, 또 따뜻한 물을 끼얹고 헹궈 주었다. 비누 거품을 내어 얼굴과 몸을 부드럽고 또 억세게 씻겨 주었다. 살짝 눈을 떠 보았더니, 시커먼 흙탕물과 하얀 거품이 배수구를 향해 소용돌이 무늬를 그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향긋한 비누 냄새와 텁텁한 흙탕 냄새가 욕실 안에 맴돌았다. 준고는 내 겨드랑이를 두 손으로 받치고 조심스럽게 몸을 들어 올리더니 살며시 욕조에 내려놓았다. 참방! 턱까지 물에 잠기자 조금은 부끄러워, 눈을 치뜨고 올려보았다. 준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욕조에 턱을 괴고 졸린 듯 눈을 껌벅거리면서 웃었다. 감색 제복은 온통 흙투성이에 물과 거품까지 튀어 엉망이었다.  
"안 들어와?”
그렇게 묻자, 준고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껄껄 웃었다.
"싫어, 어린애에게 보이기."
"나빴어."
"어린애 몸이 이렇게 생겼구나. 덕분에, 배웠다."

 

- 물속에 몸을 쏙 숨기고 노려보자, 준고는 일어나 큼지막하고 하얀 목욕 타월을 꺼내 와, 욕조에서 나온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그러고는 허둥지둥 옷을 벗고 샤워기로 몸을 간단하게 씻어 내고 티셔츠와 스웨터를 입었다. 제복을 벗고 나자 준고는 학생만큼이나 젊어 보였다. 준고는 타월로 내 몸을 톡톡 두드리며 닦고는 다시 방 한가운데에 앉히고 선풍기를 틀어 주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벽장문을 열고 한참이나 뭘 찾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고서 결국은 하얀 와이셔츠를 꺼냈다. 내게 푹 뒤집어 씌우고서 단추를 꼭꼭 채우고 소매를 몇 번이나 걷어 주었다. 그럭저럭 잠옷 차림이 되었다. 담배를 물어 뒤틀린 입으로 준고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옷은 나중에. 알았지?"
"응, 나중에."

- 드라이어를 머리에 대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털어 주었다. 머리가 금세 말랐다. 남성용 촘촘한 빗으로 머리를 정성껏 빗겼다. 조금 전까지 거칠었던 동작이 갑자기 변했다. 준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더니, 눈빛이 아주 차분했다. 검고 곧은 머리카락은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왔다. 들러붙은 흙탕을 떨어내고 나니, 살랑살랑 윤기가 되살아나 있었다. 머리를 다 빗은 준고는 이제 안심이라는 듯 눈가를 축 늘어뜨리고 미소 지었다.

 

- 뻣뻣한 와이셔츠만 입고 있어서 왠지 불안했다. 준고가 빤히 쳐다보아, 부끄러워서 머리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불쑥 인터폰이 울렸다. 준고가 귀찮다는 듯이 현관 쪽을 돌아보고는 일어섰다.
빠끔 열린 문틈으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랑이가 벌어진 듯해서, 나는 침대에 앉아 이불속에 발을 집어넣고 몸을 움츠렸다. 나는 옛날부터 남자와 여자가 싸우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애가 있어서 안 돼."
준고가 딱 잘라 말하자, 여자가 뭐라고 말대꾸를 했다. 잠시 후, 준고가 방으로 돌아와 "엇." 하면서 나를 찾았다. 침대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보고는 씩 웃고서 선풍기를 껐다. 
"두 시간 정도만 기다려."
"... 응."

- 준고는 부엌 선반에서 꺼낸 빵과 수돗물을 받은 컵을 유리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지갑과 담배와 차 키를 스웨터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훌쩍 집을 나갔다.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나 혼자 남았다.
눈을 감았다.

-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구르르르릉, 끔찍했던 죽음의 파도 되살아난 그 소리에 그대로 몸과 마음을 맡겼다. 얇은 이불에서 희미하게 준고의 땀 냄새가 났다. 냄새가 지켜 주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둘둘 감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견뎌 냈다. 마침내, 구르르르릉 하는 환청이 사라지고 창밖에서 오호츠크해의 나직한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둠처럼 캄캄한 밤바다가 조용히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천천히 눈을 뜨니, 준고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서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손등을 대고, 손가락으로 살며시 추어올린다. 속눈썹끼리 맞닿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까이에 어른의 얼굴이 있었다. 준고의 몸에 여자의 강렬한 기척이 떠다녔다.

 

- "왔어?"
"움직이지 않아서, 죽은 줄 알았어."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나른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네모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준고가 나간 뒤로 1시간 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준고가 구겨지고 치켜 올라간 와이셔츠를 잡아당겨 무릎까지 가려 주었다. 뭘 들고 있다 싶어 손을 보니, 상점의 종이봉투였다. 준고가 담배를 입에 물려다 움직임을 멈추고 내 눈길을 좇았다. 그리고 머쓱한 듯이 슬쩍 웃고는 말했다. 
"갈아입을 옷."
"내 거?"
"그럼 누구 거겠어?"

- 하나씩 밖에 없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더니 준고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일단은 밖에 나갈 수 있게 요것만 사 왔어. 옷은 네 손으로 고르고 싶을 테니까."
나는 블라우스를 들어 가슴에 꼭 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골라주는 게 더 좋아."
준고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렇구나."
그러고는 갑자기, 침대에 엎드리듯 내 몸 위로 퍽 쓰러졌다. 어른의 무게에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아빠 엄마와 뒤엉켜 논 적이 없어서, 어른의 몸이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 "아, 이제 못 참겠다."
준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 팔을 뻗더니, 긴장한 내 머리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준고의 팔을 베고 눈을 꼭 감았다. 내 쪽을 향한 채 벌써 잠이 든 준고의 숨소리와 비 냄새 같은 눅눅한 냄새와 강렬한 여자의 기척과 이불에 밴 따스한 땀. 준고의 이마에 이마를 대고, 나도 또 잠이 들었다.

- 그대로 잠의 늪에 빠져 있다가 눈을 떴더니 이번에는 밤이었다. 준고는 언제 나갔는지 또 없었고, 밤바다 위로 떠오른 달이 뽀얀 빛으로 활짝 열린 창문을 지나 나를 비추고 있었다. 바람에 커튼이 한들한들 흔들렸다. 담배를 피우고 나갔는지, 매캐한 향이 공중에 떠다녔다. 유리 테이블에는 준고가 마시고 난 빈 커피캔, 랩을 씌운 볶음밥과 조그만 숟가락과 물 컵도 놓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텔레비전을 켰더니 오쿠시리 섬 뉴스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텔레비전을 껐다. 배가 고파서 볶음밥을 먹었다. 아직은 따스하고 맛있었다. 준고가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 준고는 다음 날 아침, 제복 차림으로 훌쩍 돌아왔다. 눈이 양쪽 다 빨갰다.
"일 때문에 야근을 했어. 일어나 있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절반쯤 남은 볶음밥 접시를 보았다.
"외로웠니?"
고개를 기울이고 잠시 생각했다. 외롭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기다리고 있었더니 나를 위해 돌아와 주었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또 찡해졌다.
"아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 땀에 젖고 구깃구깃해진 와이셔츠를 벗고, 준고가 사 온 옷을 입었다. 준고는 팔짱을 끼고서 사이즈가 맞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옷을 입은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고는 만족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자신도 티셔츠와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둘이 집을 나섰다. 준고는 이제 나를 인형처럼 껴안지 않았다. 대신 커다랗고 야윈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보폭이 서로 달라서 복도를 걸을 때도 계단을 내려갈 때도 발이 잘 맞지 않아 엉거주춤했다. 내 속도에 맞춰 걷느라 준고의 긴 다리가 마구 엉켰다. 주차장에서 차를 탔다. 대형 쇼핑센터에 도착하자, 다시 손을 마주 잡았다. 한 손으로 카트를 밀면서 준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다 살 거는 아니지만."
1층에서 식료품을 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약국 앞을 지나다가 퍼뜩 생각이 났다. 나는 준고의 티셔츠 자락을 두 번 잡아당겼다.
"뭔데?”

- 생리용품이 쌓여 있는 곳을 가리키자 준고가 "엇!" 하고 놀랐다. 잠시 생각하더니, 내 손을 잡은 채로 층계참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걸어갔다. 누구에게 전화를 거나 싶었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어제 집에 찾아왔던 여자와는 다른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작은 소리로 어떤 것을 사면 되느냐고 묻고서, 상대의 목소리에 준고가 다시 대답했다.
"몇 살이냐고? 열한 살인데. ... 뭐, 빠르다고?"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엄마가 집요하게 몇 번이나 했던 말이 떠올라 어깨가 떨렸다.
"무슨 소리야. 그런 건, 몸이 제가 알아서 하는 건데!"
준고가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웃어넘기자 안심이 되어 몸에서 힘이 쭉 빠지면서 이번에는 현기증이 났다.

- "여분도 충분히, 알았어... 쓰레기통 같은 거야? 화장실에 두라고? 음. 진통제, 속옷이 다르다고? 그리고, 묻었을 때... 전용 세제. 혈액 제거하는 거. 알았어."
준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고서 내 손을 잡고 다시 약국으로 돌아갔다. 쑥스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이것저것 사고서 물었다.
"이거면 됐니?"
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 그다음에는 아동복 매장으로 가서 옷을 샀다. 여름 블라우스와 치마, 원피스 몇 벌. 마음대로 골라 보라고 했지만, 준고가 골라준 것으로 샀다. 모두 여자답고 얌전한 스타일이었다.  

- 전화를 끊고서 담배를 재떨이에 털고 다시 입에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쪽 볼이 일그러져 있었다. 방 안은 고요하고, 아침인데 깊은 밤처럼 어둡고 적적한 공기로 가득했다. 이불에서 나와 곁으로 다가가자, 준고는 아주 소중한 것을 만지듯 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널, 오시오 씨에게 빼앗기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 같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 천천히 사방을 돌아보고서,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불현듯, 늘 혼자 지내는 방에 이런 아이가 있다는 것이 의아하다는 투였다. 준고는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혼자 산 것 같았고, 나 역시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 동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둘이 되어, 좁은 방에 어른과 아이가 갇혀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함께 잘 지낼 수 있는지, 나도 잘 몰랐다. 

- 그 주말의 저녁때, 또 전화가 걸려왔다. 준고는 수화기를 들어 잠시 귀에 대고 있다가, 말없이 이쪽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준고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는 나는 마치 저세상에서 걸려온 전화 같아 절대 받고 싶지 않았다.
"무섭지 않아. 너랑 얘기하고 싶대."
준고는 고개를 마구 젓는 나를 껴안아 전화기 앞으로 데리고 갔다. 준고가 내 머리를 끌어올리고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대었다. 준고의 체온으로 수화기가 따스했다.  

- 고개를 돌려 준고를 보았다. 아빠라니, 이 사람을 말하는 건가. 의심스러운 기분에 고개를 갸웃했다. 전화를 끊고서 나는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쇼코란 애랑 얘기했어!"
준고는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집에서 입는 낡은 티셔츠를 휙 벗어던졌다. 가무잡잡한 피부가 반짝반짝 빛나고, 가슴과 등은 말랐지만 탄력이 있었다. 그 아빠의 거칠고 털 많은 피부와는 전혀 달랐다. 준고는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서, 내게도 원피스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만세를 하고 윗도리를 벗어 팬티바람이 되었을 때, 준고가 나를 한 번 꼭 껴안았다.
"빼앗기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것 같은데, 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준고는 어둡고 침울한 표정을 한 채 내 손을 잡고 현관을 나섰다. 걷기 시작하자 보조가 맞지 않아 또 걸음이 뒤엉켰다. 내 발로 걷는 것보다 준고에게 안겨 가는 쪽이 편할 것 같았다. 간신히 주차장에 도착하자 둘 다 마음이 놓였다.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쐬었다. 차를 타고서 바다를 등지고 언덕길을 올라가자 엔진이 가볍게 신음했다. 열린 차창으로 여름 햇살이 우리를 비췄다. 바다 냄새가 풍겼다. 그것은 저 먼 아오나에 곳의 바다와 같은 냄새였다. 

- 멋진 집들이 줄지어 있는 조용한 주택가에서 차가 멈췄다. 준고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내리고 싶지 않다는 듯 잠시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차에서 내려 운전석 쪽으로 돌아갔다. 두 손에 힘을 주어 문을 열고, 주춤거리며 내린 준고와 손을 잡았다. 준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좁은 언덕길을 올라가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으리으리한 집 앞에 도착했다. 지붕이 세모나고 놀랄 만큼 큰 집이었다. 정원이 내다보이는 마루방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어른들이 시끌벅적하게 모여 있었다. 상에는 호사스러운 음식이 가득하고, 모두들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떠들고 있었다. 여름날 저녁의 기운 햇살이 그 정체 모를 모임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 "갚아야 할 주택 담보 대출금이 아직 많은데 경기도 이 모양이고. 준고 자네가 져야 할 부담을 생각하면, 젊은 나이에, 걱정스러워서 말이야."
"어르신, 지금 공무원만큼 안정적인 직업도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돈도 별로 쓰는 데가 없고."
준고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천천히 빨아들였다. 옆얼굴에서 희미한 짜증이 엿보였다. 그 팔에 기댔더니, 자연스럽게 어깨를 끌어안았다. 안심한 나는 슬며시 웃었다. 나는 사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눈을 감고, 비 냄새 같은 준고의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런가. 하지만 이 아이가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자네 신세를 져야 할 텐데. 그리고 준고 자네도 언젠가는 가정을 꾸릴 테고 말이야."
오시오 할아버지의 말에 다른 아저씨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때마침 젊은 여자가 음식을 담은 쟁반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가정 같은 거 안 꾸릴 겁니다."
준고가 웃음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또 그런 소리. 남자가 그럴 수야 없지."

- 준고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담배를 세게 비벼 껐다.
"말이죠, 독신은 보안부 숙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부양가족이 생기면 공무원 숙사에서 살 수 있으니까, 경제적인 부담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학비는 지금부터 저축을 하겠어요. 어르신..., 저는..." 
"..."
"저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야, 내 알지..."
오시오 할아버지가 준고의 몸에 기대어 있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고뇌의 그늘이 어렸다. 주름투성이 그 얼굴이 무서워, 나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빤히 노려보았다. 그러자 오시오 할아버지가 커다란 소리로 쇼코를 불렀다.

- "애들은 애들끼리 가서 놀아라. 어른들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알았어요!" 
전화로 들은 목소리만큼이나 기운찬 여자 애였다.  

- 나는 남자 애에게 조그맣게 대답하고서, 도망치듯 복도로 나갔다.
"... 갈게."
준고에게 딱 달라붙어 넓고 번쩍거리는 복도를 걸었다. 술자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툇마루에서 정원으로 내려서자, 캄캄한 수풀에서 풀벌레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 그날 밤에도 준고는 제복을 입고 일하러 나갔다. 얼른 자려고 목욕까지 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준고는 귀찮은지, 나를 욕조에 담그고 자신도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왔다. 욕조에서 나와 내 손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있는데,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내 몸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어디를 안 씻었다느니 좀 더 잘 헹구라느니 주의를 주었다. 내게는 그렇게 잔소리를 하면서 자신은 몸을 한 번 좍 씻고는 끝냈다.
"치, 나빴다."
"안 나빠."
준고가 웃으면서 혀를 쑥 내밀었다.

- 어른들끼리의 얘기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겠지만, 집을 나설 때는 그렇게 처량하고 암울한 표정을 짓더니 집에 돌아와서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내내 웃는 얼굴을 보였다. 

- "응. 저기, 저 배 보이지?"
준고가 침대에서 나를 번쩍 들어 올려서는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건조한 밤바람이 약간 서늘했다. 4층 베란다에서 보이는 바다는 온통 캄캄해서, 마치 바닥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나락 같았다. 이 세상에 뻥 뚫린 생명의 구멍. 
"보여?"
준고가 중얼거리면서 바다를 가리켰다.

- 어둠에 눈이 익자, 검은 바다와 군청색 하늘을 가르는 선도, 밀려오는 파도가 가는 줄처럼 하얗게 빛나는 것도 잘 보였다.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처럼 해안을 따라 정박해 있는 무수한 어선도 내려다보였다. 그 가운데, 일본 국기와 본 적 없는 모양의 깃발이 펄럭이는 커다란 회색 배가 있었다. 여기서 보니까, 다른 어선이나 오쿠시리 섬에서 밤마다 보아 낯익은 오징어잡이배보다 한층 크고 멋질 그 배가 장난감 배처럼 자그마했다.

"저게 몸베쓰 해상보안부의 순시선이야. 저 배에서 일해. 육상에도 보안부가 있지만, 나는 바다 쪽 보안관이라서 매일 배로 출근하거든. 저 배가 내 직장이고, 배에서 일하니까 늘 바다 속에 있는 셈이지. 네가 말한 괴물을 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안 무서워?"
"무섭기는, 전혀. 지금은 오히려 탈 때마다 푸근하게 느껴지는걸."

- "아빠..."

그렇게 말했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 준고한테 갈 거야."

"알았어."
쇼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툇마루 밑에서 샌들을 신고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 그때, 바다 쪽에서 펑펑거리는 소리와 함께 첫 폭죽이 하늘로 치솟았다. 뒤에서 누가 내 심장을 향해 총이라도 쏜 느낌에 그만 우뚝 서고 말았다. 조심조심 몸을 훑어보았다. 분홍색 유가타 자락이 늦여름 저녁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올려다보니, 금색 불꽃이 밤하늘로 슈르르륵 올라가, 잠깐 피었다 지는 꽃처럼 어두운 바다로 떨어져 사라졌다.

- 나는 정신없이 뛰었다.
아까 딱 한 번 지났던 길을 머릿속으로 더듬으면서, 언덕길을 내려가서는 옆길로 돌고, 시청과 공원 옆을 지나 4층짜리 건물을 향해 달렸다. 그동안 몇 번이나 폭음이 울리고, 밤하늘에 불꽃이 피었다가 지고 떨어졌다. 너무 급하게 뛰느라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밤바람이 싸늘해서, 뛰고 있는데도 온몸이 서늘했다. 겨우겨우 4층짜리 건물을 찾아 콘크리트 계단을 헉헉 거리며 올라갔다. 문 앞에 섰을 때 한층 더 큰 폭음이 울렸다. 놀라 목을 움츠렸다. 손을 뻗어 인터폰을 누르려는데, 아무리 뻗어도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쾅쾅 문을 두드렸다. 몇 번을 두드렸더니 티셔츠에 스웨터를 입은 준고가 나왔다.

- "어, 어떻게 된 거니?"
준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같이 보고 싶어서."
나는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래서 그렇게 헉헉대면서 뛰어왔어? 아, 유가타, 귀여운데."
준고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겨우 안심이 되었다. 준고는 유리 테이블에 무슨 서류를 복잡하게 펼쳐 놓고 볼펜으로 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유가타를 입은 채로 준고에게 기대어 앉아 물었다.

 

- 준고가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서, 한 모금 빨았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나를 번쩍 안아 무릎에 앉혔다. 그러고는 담배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양녀를 들이는 절차야."

- 어른 한 명이 늘어났을 뿐인데 방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지고 왠지 어색했다. 남자가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더니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네가 아버지라는 것도 알아?"
"... 글쎄요."
"글쎄요 라니, 너 말이야."
준고는 침울한 표정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눈을 찡그린 채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리고 불쑥 방 안을 휘 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짐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싸 놓고 보면 꽤 되려나."
"꽤는, 뭐가 있는 게 있어야지. 우리 집은 살림살이가 장난이 아니라고, 아버지 때부터 쌓아 둔 것들이. 이사 한번 하려면 끔찍할 거야. 사람이 혼자 사니까 이렇게 뭐가 없어도 살아지는군. 마치 여관살이처럼 말이야."
어이가 없는 한편 부럽기도 하다는 말투였다. 준고가 뭐라고 대답하려는데, 또 인터폰이 울렸다. 문을 열자 비슷한 나이의 남자 네 명이 와글와글 들어왔다. 일요일의 이른 아침이라 모두들 아직도 졸린 표정에 차림새는 똑같이 티셔츠에 청바지였다.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 듯 화기애애하게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하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 "군침은. 말이지. 나, 어르신 하고 쟁탈전 벌였다는 얘기. 다 들었어."
"뭐? 누가 그래?"
"우리 아버지."
놀리는 듯한 목소리에, 준고가 왜 그런지 몹시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릇을 신문지에 싸고 철제 침대를 해체하던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들고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 "웬일로 강경하게 굴었다면서. 아버지가 놀랐다던데."
"음... 그렇지, 뭐."
준고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얼굴을 약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힘 좀 썼지. 그렇게 기를 썼던 거, 해상보안 학교 졸업시험 본 후로 처음이었어."
"너, 평소에 그렇게 애쓰며 사는 놈이 아니잖아. 옛날부터 말이야. 고등학교 다닐 때도, 하면 되는 녀석인데 안 한다고 많이 혼났고."
"애쓰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걸 위해 애쓰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야 물론 그렇지만, 지난달 모임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던데. 저쪽에 웬 말 많은 젊은이가 있다 싶어서 돌아보았더니 준고 너더래. 그래서 깜짝 놀랐다던데. 집에 와서 계속 그 말만 하더라.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고. 하기야 내가 계속 웃어서 그러기도 했겠지만."

- "실은 그거, 연습한 거야."
"뭐? 연습?"
"대낮부터 우리 가게 카운터에서 연습했다고. 취직 때문에 면접 치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어르신이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대답하고, 또 이렇게 따지고 들면 이렇게 받아친다고. 줄곧 웃는 얼굴이었지만 입술 끝을 바들바들 떨고 있더라고. 기분이 별로 안 좋은가 보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으니까 상대를 해줬지. 손님도 없었고. 게다가 어르신이 할 만한 얘기라는 게 뻔하잖아. ... 그런데 얼마나 웃기던지. 이 녀석답지 않게 진지하더라고. 여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였어. 그 꼴을 보았으면 백 년 키운 사랑도 싸늘하게 식어 버렸을걸."
키득키득키득, 준고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남자들도 덩달아 웃으면서 다시 한번 해 보라고 놀려 댔다.
"두 번 다시 안 할 거야. 얼마나 피곤했는지 알아. 어르신 하고 맞부딪칠 게 못 돼. 적당히 말이나 듣고 말아야지. 세대가 다르잖아."
준고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담배를 짓뭉개 껐다. 그리고 꽁초를 버리고 그 재떨이도 짐에 쌌다. 남자들은 그렇게 떠들면서도 열심히 짐을 쌌다. 준고는 이런저런 지시를 하고 또 거들고 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듯 맨 담배를 앞니로 꽉 깨물고 있었다. 

- "그런데 어르신이 말이야."
몸집이 제일 작은 남자가 상자에 테이프를 붙이면서 말했다.

"그렇게 키우고 싶다면, 준고 그 사람이 가장 적합할 거라고 했다던데."
"어르신이 그런 소리를..."
준고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 "그야 물론,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은 많지만,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 키우는 게 옳을 거라고, 결국 고집을 꺾은 후에 그랬대. 너와 이 아이가 돌아간 후에 말이야. 하지만 말은 안 해도, 굉장히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대."
"... 이제 상관없는 일이야. 다 끝났으니까."
준고가 희미하게 웃었다.

- 순식간에 종이 상자가 쌓였다. 남자들은 현관에서 냉장고와 세탁기를 들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이번에는 종이 상자를 옮겼다. 종이 상자와 남자들의 모습이 밖으로 사라지고, 텅 빈 방에 준고와 단둘이 남았다. 죄수가 갇혀 있는 장소처럼 썰렁하고 고요했다. 창문에도 이미 커튼이 없었다. 유리창 한가득 여느 때와 다름없는 검푸른 바다가 있고, 파도가 찰랑찰랑 밀려왔다가는 밀려갔다. 준고는 말없이 서 있었다. 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둘이 똑같은 각도로 고개를 기울이고 바다만 보았다. 갇혀서, 이제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빠가 내 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야윈 손목이 입술 끝에 닿았다. 어렴풋하게 고동이 전해졌다.  

- "모든 게 다 금방이지."
"그런데 말이야..."
몸집이 작은 남자가 또 히죽히죽 웃었다.
"진짜 귀엽다.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아."
준고가 내 손을 꼭 쥐고, 이제 가자는 듯이 잡아당겼다. 나는 준고 옆에 딱 붙어서 현관으로 걸어갔다.


- "겉보기는 그래도, 악마야, 나 아무래도 좀 어떻게 된 것 같아."

"어떻게 돼?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글쎄.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데, 그것도 여자라고 생각하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 왜 그럴까. 누구, 아는 사람 없어?"
준고의 목소리는 꺼져 버릴 것처럼 낮고 작았다.
"글쎄다. 자식이든 뭐든 있어야 그런 걸 알지."
준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와 손을 꼭 잡은 채, 미련 없이 현관을 나섰다. 아침 햇살이 눈부셨지만, 수면을 훑고 뭍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싸늘했다. 희미한 바다 냄새가 풍겼다. 목걸이에 매달린 열쇠를 꺼내 내가 문을 잠갔다. 

- 준고가 약간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실은, 어르신이 심하게 반대했어. 왜 그렇게 반대하는지, 의아할 정도로 말이야. 몇 번이나, 제대로 된 가정이 아니라 안 된다면서."
"흠, 그랬어? 그래도 집안에 이 정도 충실하면, 별 문제 없지 않을까?"
"어떤 가정에든 보이지 않는 부족함이 있을 거야. 하지만, 부모가 애정이 있으면 대개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겠어?"
"그럴까?"

- 나는 손을 내밀어 준고의 손을 잡고 힘을 꼭 주었다.
준고가 한쪽 눈썹을 찡긋 올리며 '왜?' 하듯이 내려다보았다.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들이고서 몸을 구부리고 나를 들여다보았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꼭 잡고 싶어서."

"뭐야, 어리광 부리는 거야?"
"응!"
"... 가자."

- 주차장을 향해 둘이 걸어갔다. 그새 내 걸음걸이에 익숙해진 준고는 천천히, 그리고 경쾌하게 걸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준고의 긴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림자가 한여름 때보다 조금 흐릿하고 길었다. 그 옆에 내 조그만 그림자도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흔들리는, 꼭 잡은 손과 손이 둘의 몸을 단단히 얽어맨 새카만 쇠사슬처럼 보였다.

- 갈매기가 휘익 날아 내려와 가냘픈 소리로 울었다. 등 뒤에서 검푸른 북쪽의 바다가 철썩철썩 조용히 파도쳤다. 꼭 잡은 손목으로 준고의 잔잔한 고동이 전해졌다. 눈앞에 아빠와 나, 단둘만의 길이 한없이 뻗어 있었다.

- 또 어리광을 부리듯 손바닥에 힘을 꼭 주었다. 준고도 부드럽게 힘을 주었다. 올려다보니, 내 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입술 끝에 문 담배에서 화장터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것처럼 허망한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그의 얼굴이 조금씩 부예져, 잘 보이지 않았다. 아빠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내 잊어버릴 것 같았다. 메마른 바닷바람을 맞으며 손을 더 꼭 잡았다. 그러자 준고도 아플 정도로 꽉 내 손을 잡아주었다. 

- 아, 나는 이 손을 영원히 놓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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