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조수용
출판 : REFERENCE BY B
출간 : 2024.11.10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원한 방에 드러누워 핸드폰이나 만지작 거리고 싶다.
이때의 상태는 목도 마르지 않고 배도 고프지 않고 이부자리의 촉감은 딱 기분 좋게 보드랍고 시원해야 한다.
꽤나 진지하게 이 욕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 때, 결심했다.
아. 좀 쉬자.
물론 현대인의 일상은 쉼 없이 빠져나가는 돈으로 이루어져 있고 -공과금 및 생활비-
인생 최대의 지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냥 휴일에는 별다른 걸 하지 말고 잠도 많이 자고 늘어져 있자고 결심했을 뿐.
삶에는 쉼표도 필요하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마치 채무에 쫓기는 사람처럼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려 했다.
퀄리티에 상관없이, 그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관성 때문에.
그걸 깨달은 순간 생각했다.
'일'이란 대체 뭘까.
대가가 없는 노동은 '일'이 아닌가? 결과물이 없는 노동은?
<일의 감각>은 위에서 내가 언급한 '일'과는 다른 의미로 '일'을 사용한다.
저자 조수용에게 '일'은 프로젝트고, 디자인이고, 삶이다.
그에게는 모든 순간이 '일'이자 놀이이고 즐거움 -물론 괴로움도 섞여있겠지만- 이다.
번뜩이는 영감보다 중요한 건 '왜 이걸 해야 하는가'와 '왜 이건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그때부터는 흔들림 없이 그것을 지켜나가야 한다.
개인적으로 책 속 사례 중 네이버 그린팩토리의 주차장 버튼은 정말 혁신적이라고 생각했다.
들었던 소리를 기억하면 된다니. 직관적이고, 미학적이다.
에드백은 사고 싶어서 찾아봤더니 현재는 생산하지 않는 모양.
매력적인 프로젝트들이 '지속성'과 '유지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아마도 수지타산이라는 경제적 원인이겠지.
저렇게 한 번에 촥 펼쳐지는 가방이 갖고 싶은데, 그러면서도 많이 들어가야 해서 그런지 비슷한 제품이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들은 '더함'보다는 '덜어냄'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비워내고 덜어내야 할 지점에 위치해 있다.
당분간은, 흔들리는 대로.
- 일을 시작한 지 올해로 32년째입니다. 그간 여러 회사에서 다양한 일을 하는 동안 사람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이 되려면, 좋은 감각을 가지려면, 디자인을 잘하려면, 더 나은 브랜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 저는 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저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몇 달을 밤새워 일하고 나면, 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 알고 싶어서 새로운 도시로 떠나기를 반복했습니다. 전력을 다해서 일하고, 새로운 곳에서 호기심을 채워서 돌아오는 삶을 살았습니다. '일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일에 몰두했건만, 그저 '감각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 선택에 따르는 책임은 오롯이 저의 몫이라는 걸 여러 경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쇼핑을 가면 한정된 예산안에서 어떤 옷을 살지는 오직 제 선택이었습니다. 정해진 예산 내에서 가게들을 빠짐없이 둘러본 후, 햄버거를 먹으며 어떤 옷을 살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끔 그 결정이 잘못되면 그 옷을 입는 한 철 내내 후회했는데, 이 역시 온전히 저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스스로 선택한 일은 잔소리 한마디 없이 묵묵히 지지해 주셨습니다. 제가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자 없는 형편에도 컴퓨터를 사주셨고, 음악에 관심을 가지자 당시 부잣집에나 있을 법한 신디사이저를 사주셨습니다. 철마다 입고 신을 옷과 신발이 단 하나뿐인 집이었음에도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저의 '감각'은 이런 경험에서 형성되었습니다.
- 늘 오너가 옳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그냥 기업의 속성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오너와 상시 소통을 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입사 퇴사의 순간에는 오너를 보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 '이 직원은 믿어도 되겠다, 이대로 하면 손해 볼 일 없겠다.' 회사가 이런 신뢰를 가지면 내 의견에 힘이 실리고, 내 생각을 펼치며 일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믿음이 가장 큰 직원에게 사장의 역할을 맡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처럼 신뢰를 쌓으려면 일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너보다 더 오너십을 가지는 것입니다. 물론 오너십을 가지고 일하면 시키는 대로 컨펌을 받으며 일할 때보다 부담이 엄청납니다. 하지만, 결국 그 부담이 쌓여 내 자산이 됩니다. 쉽게 말해, 오너의 신뢰를 얻으려면 오너의 고민을 내가 대신 해주면 됩니다.
- 오너와 동료에 대한 공감만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서비스 혹은 상품을 직접 쓰는 '사용자'입니다. '사용자'를 진정 배려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뭘까요? 공감과 배려는 사용자를 분해하고 분석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사용자는 디자인을 분석하거나 디자이너의 의도를 해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낍니다.
- 온라인 서비스를 만드는 디자이너들에게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관심 없는 사람들에 빙의해 보세요." 디자이너라면 서비스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봐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기획자나 디자이너는 서비스를 만들 때 자연스레 이 일에 이미 익숙해진 자신을 기준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 하지만 특정할 수 없는 다수가 쓰는 서비스인 만큼, 관여도가 거의 없는 사용자의 눈으로 서비스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가 만드는 서비스를 가장 많이 이용하고 구매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네이버나 카카오톡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을지가 중요합니다. 일반 사용자가 카카오톡의 노란색이 살짝 어두워진 걸 눈치챌까요? 서비스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이 카카오톡의 광고 위치가 3픽셀 밀린 걸 알아차릴까요?
- 공감은 우리의 타깃 고객이 알아볼 것과 그렇지 못할 것을 구분하고, 그들의 잠재의식 속에 남을 잔상을 유추할 때 시작됩니다. 그래야만 해야 할 일과 안 해도 될 일.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구분하기 쉬워집니다. 지금의 나를 지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 그래서 저는 어떤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기 전의 '나'를 박제해 두고 종종 그때의 내가 되어보려고 노력합니다. 온라인 서비스뿐만 아니라 제품이나 공간을 기획하고 디자인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네이버나 카카오 입사 전의 나, 별생각 없이 호텔을 이용하던 예전의 나, 식당 가서 메뉴를 뒤적이는 손님 중의 하나가 되려고 합니다.
- 인천 네스트호텔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입니다. 일반적으로 호텔 객실은 침대 발끝이 향하는 곳에 텔레비전이 위치하고 머리 쪽에 벽이 있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 보는 상황을 주로 가정하는 겁니다. 반면에 네스트호텔은 발끝이 창가를 향하도록 침대를 배치했습니다.
- 잘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부동산 개발이 제대로 되려면 땅을 사고, 건물을 설계해서 짓고, 임차인을 구성하는 모든 과정을 한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JOH 설립 때 투자해 주셨던 은인 같은 분을 찾아가서 저의 클라이언트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분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진 '사운즈한남'이라는 작은 마을의 주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 당초 사운즈한남은 고급 소형주택 프로젝트였습니다. 큰 평수의 고급 아파트와 빌라들이 모인 한남동 일대 590평 부지에 14~16평짜리 소형주택 14채를 지어 고수익형 레지던스로 기획했습니다. 크기는 작지만 높은 가치를 가진 집을 원하는 수요가 분명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그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요? 집은 작아도 욕실은 쾌적하고, 단지 곳곳에 익명의 사람이 공유하는 '거실' 역할을 하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1층으로 내려가면 식사와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다가 저녁에는 친구를 초대해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작은 마을을 상상했습니다. 사운즈한남의 중심에 서점 스틸북스와 와인 바를 만들고, 지하에 요가 스튜디오를 입점시키려 노력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당시 주변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도 했고, 처음부터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솝과 같은 뷰티 숍, 꽃집, 안경점, 편의점 등의 임차인 유치는 물론, 업장 운영까지 JOH가 직접 했습니다. 당시 JOH는 스틸북스, 일호식, 세컨드키친, 콰르텟커피, 라스트페이지를 직접 만들고 운영했지만 지금은 사운즈한남 운영에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다.
- 그런 호텔을 만들려면 꼭 전권을 위임받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저는 호텔 콘셉트의 기획, 건축설계, 네이밍과 브랜딩, 가구와 소품 선정, 레스토랑 메뉴 하나까지 모든 부분에 경계를 두지 않고 내일처럼 몰입했습니다. 그 결과 영종도 네스트호텔은 한국 최초로 디자인호텔스 닷컴 designhotels.com에 리스팅 되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시간을 내 일부러 휴식을 위해 찾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 이렇듯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사공이 하나여야 목표로 한 세계관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
- 사운즈한남, 네스트호텔이 성공한 게 과연 저나 JOH 직원들의 취향이 좋아서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어떤 일이 성공하려면 나만의 취향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선호와 타인에 대한 공감이 만나는 지점, 서로 밀고 당기는 압력이 느껴지는 그 미세한 지점을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취향과 세상의 취향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 우선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일단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남달라야 합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분야를 잘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많이 알면 알수록 더 구체적으로 좋아하게 됩니다.
- 제게는 좋아하는 것을 '디깅'하는 저만의 순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하나 사고 싶으면 오랜 시간 자전거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첫 시작은 가장 비싼 자전거, 하이엔드 브랜드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전문가용과 보급형으로 시장을 구분해서 찾아보고, 단계를 내려가며 마음에 드는 자전거를 집요하게 찾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전거 커뮤니티의 댓글을 살펴봅니다. 또 그 분야의 잡지를 찾아서 광고까지 빠짐없이 봅니다.
- 이런 방식의 좋은 점은 해당 시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내 소비만을 위한 거라면 추천받은 특정 브랜드만 살펴봐도 충분합니다. 반면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새로운 기획과 감각적인 아이템을 찾고 싶다면 사람들이 시장을 보는 방식을 알고 거기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자전거가 좋은 것 같은데 저 사람은 왜 저 자전거가 더 좋다고 할까?'를 궁금해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공감 능력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 저는 너무 전문가스럽지 않으면서 기가 막히게 접히는 기능적 아름다움에 반해 브롬톤 Brompton의 자전거를 선택했고, 이 브랜드를 매거진 <B> 5호에서 다뤘습니다. 이후 몰튼 Moulton을 알아보는 데까지 이어졌지만... 지금은 몰튼을 현관에 잘 모셔두고 있습니다.
- 사람들의 관점과 나의 취향, 이 두 관점이 공존해야만 독자적 감성이 담겼으면서도 세상에 필요한 무언가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2012년 JOH에서 오픈한 한식집인 '일호식' 역시 나의 취향과, 사람들이 식당을 찾는 방식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 저는 내 취향을 깊게 파고, 타인에 대한 공감을 높이 쌓아 올린 결과 만들어지는 것이 '감각'이라 생각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감각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네이버 그린팩토리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버튼. 주차하면서 들은 소리를 기억하면 주차 층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 '감각'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사람마다 감각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패션 감각, 예술감각, 비즈니스 감각, 운동감각, 유머 감각 등 '감각'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감각은 '현명하게 결정하는 능력입니다. 그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감각적인 디자인은 어떻게 탄생하나요?"
- [카페에 앉아서, 혹은 산책을 하면서 영감을 떠올린다.]
[순간 떠오른 영감을 붙잡아 냅킨이나 수첩에 휘리릭 스케치한다.]
이런 상상이 흔한 이유는, 많은 사람이 감각은 '천재의 것'이고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또 감각이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며,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디자인을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감각적인 볼펜을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 두 가지 상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상상입니다. 어느 날, 친구가 당신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부탁합니다.
"미안한데, 나 볼펜 하나만 간단히 디자인해 줄래? 회사 기념품을 갑자기 만들게 되었어. 내가 나중에 밥 한번 살게."
부담 없는 부탁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 정도면 되겠지" 하면서 남는 시간을 이용해 흰 종이 위에 볼펜으로 스케치를 시작할지 모릅니다.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휙 그려봤더니 생각보다 근사한 그림이 나와서 스스로 놀랄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감각적인 디자인이 탄생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감각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 이제 두 번째 상상입니다. 어느 날, 멋진 슈트를 차려입은 누군가가 당신을 찾아와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볼펜 디자인을 부탁합니다. 디자인 비용은 10억 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부탁입니다. 10억 원은 적은 돈이 아니니까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한 당신, 어떻게 디자인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이번에도 아까처럼 바로 스케치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그러지 못할 겁니다. 대신 생전 처음으로 볼펜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게 되겠죠.
'그런데 도대체 볼펜이란 무엇인가? 10억 원짜리 디자인의 볼펜이란 대체 어때야 할까?'
그리고 아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볼펜을 알아가기 시작할 겁니다. 볼펜의 정의와 역사, 핵심기술, 가장 많이 팔린 볼펜, 가장 쓰기 좋은 볼펜... 방대한 자료를 모을 수 있는 만큼 모으려고 할 겁니다. 저라면 10억 원의 일부로 비행기표를 사서 일단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전 세계의 큰 문구점을 돌아다니며 배낭을 볼펜으로 가득 채워 돌아올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10억 원짜리 디자인입니다. 대충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디자인을 내놨는데, 과거에 이미 인기 있었던 상품과 비슷하면 곤란합니다.
- 만일 볼펜을 잔뜩 모아 왔다면, 그렇게 모은 볼펜을, 당신은 다시 본능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할 겁니다. 테이블 위에 모두 쏟아놓고 나름의 방식으로 분류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볼펜과 납득할 수 없는 볼펜, 비싼 볼펜과 저렴한 볼펜, 필기감이 좋은 것과 나쁜 것...
- 이렇게 몇 달간 볼펜을 끝없이 파 들어간 당신에게는 어느새 볼펜 보는 눈이 생깁니다. 많이 팔린 볼펜은 무엇이 다른지, 못생겨 보이지만 필기감이 좋은 볼펜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사람들은 어떤 볼펜을 선호하는지, 시장의 최신 디자인 흐름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 이 모든 건 분명 조사이자 공부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이 너무 괴롭지 않아야 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세상을 바꿀 일의 작은 시작일 뿐이거든요. 그 기본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데조차 부담을 느낀다면 금방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 감각이 좋은 사람은 이 모든 행위를 공부가 아닌 일상으로 대합니다. 우리가 재미있는 일, 즐거운 일, 재미있는 영화, 맛있는 메뉴를 찾듯이요. 그에게는 대상을 탐색하는 게 바로 일상입니다.
- 커피에 비유를 해보죠. 커피를 마시는 게 즐거운 사람은, 어디를 가든 커피에 가장 먼저 관심이 갑니다. 어느 도시에서든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에 먼저 들르겠죠. 잡지를 뒤적이다가 커피 브랜드의 론칭 소식을 보면 꼭 한번 찾아가 보려 할 거고요.
- 자연스레 여러분은 궁금해지실 겁니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 일로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이죠.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낯선 분야에 '쇼핑하듯 접근하는 겁니다. 이 방법을 쓰면 평소 관심이 없었거나, 스스로 벽을 세웠던 분야도 비교적 쉽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 예컨대 순수미술에 대해 알고는 싶은데 그림 보는 법도 모르고, 어떻게 그림을 사는지도 모른다고 합시다. 큰 전시장에서 매년 열리는 아트 페어는 늘 성황이라지만, 어딘가 남의 일 같이 느껴지고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느낀 따분한 감정이 밀려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순수미술을 떠올리면 드는 느낌일 겁니다.
- 어느 분야든 처음에 모르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낙서 같아 보이는 그림이 수억 원에 거래되는 걸 보고, '난 저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라며 등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을 바꿔 '방 벽에 걸어둘 그림을 사러 가볼까?" 하고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 아이와 함께 큰 아트 페어에 가서 쇼핑하듯 처음 시작해 보기를 권합니다.
“30만 원 예산안에서 네 방에 놓을 그림을 하나 골라봐. 아빠가 사줄게."
미술이나 아트페어에 전혀 관심 없던 아이들도, ...
-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그림 앞에서 묻는 질문도 달라지고, 그림이 왜 이 가격인지 궁금해지다가 심지어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림이 정말 갖고 싶어지기도 할 겁니다.
- 일상 속에서 쇼핑에 집중하는 일은 '내 취향을 깎고 다듬어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물건을 사지 않아도 그 과정만으로 좋은 경험이 됩니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틈날 때마다, 욕실 수건부터 빌딩까지, 가상쇼핑을 즐깁니다.
- 감각은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직관에 가까운 재능일까요, 아니면 성실한 노력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영역일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성실함으로 감각을 조금씩 성장시키고 나면 마치 직관처럼 그것이 떠오르게 됩니다.
- 종종 이런 질문을 듣습니다.
"우리 아이의 감각을 키워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부모님이 항상 어떤 대상을 성실하게 좋아하시면 됩니다. 사소한 일상부터 큰일까지, 그렇게 사는 모습을 평소에 보여주면 됩니다.
- 취미가 아닌 일상이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볼 영화를 고르고 오늘 입고 나갈 옷을 고릅니다. 여행지를 고르고 점심 메뉴를 고르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이런 일상에도 대상을 알아가고 범위를 넓혀서 경험하고 취향을 좁히는 과정을 반복하는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고르고,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과정에서 감각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발견하려면 먼저 그 시장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내 취향으로 좋은 것을 발견해 낼 줄 아는 사람이 결국 감각적인 결과를 만듭니다.
- 좋아하는 게 확실하다는 말을 '까칠하다'라는 표현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기준에서 감각적인 사람은 까칠하지 않습니다. 까칠한 사람은 그냥 까다로운 사람이지 감각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성실한 과정의 결과로 나의 선호가 생기면 반드시 타인의 취향 또한 같은 깊이로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고 나쁨의 이분법이 아닌 다양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감각을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한 과정입니다. 비스킷 하나, 운동화 하나를 사기 위해 여러 제품을 살펴보는 이유는 까칠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사소한 결정도 애정을 가지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 하나를 고를 때도 가족과 의견을 나누며 자란 아이는 저절로 자신의 감각을 키우는 습관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매사에 까다롭다고 감각이 좋은 게 아닙니다.
- 삶은 자잘한 결정들이 쌓여서 누적된 하루하루의 결과물이죠. 이성적으로 계산해서 정해야 할 일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삶의 순간이란 늘 그렇게 결정되지 않습니다.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신발을 신을지, 또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살지까지,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의사결정의 연속입니다. 이 의사결정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의 일상이 됩니다. 그 일상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만듭니다. 이 결정에 따라 우리가 누구와 어울리고 어떤 기회를 갖게 될지도 정해집니다. 일상에서 수도 없이 마주하는 자잘한 결정을 모두 논리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각이 중요합니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려 노력하고, 같은 마음으로 타인을 존중하면서 감각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감각의 힘이 있어야 사람들의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고 나의 선택으로 일과 삶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 자신이 브랜드가 됩니다.
- 여기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선택'입니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건 '무엇을 선택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바꿔 말하면,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말아야 할지를 잘 가려내는 것이 곧 감각입니다.
- 만일 당신이 카페를 차리고 싶다고 해봅시다. 대개는 이런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카페를 하겠어', '카페는 좋은 자리에 차려야 하는데 임대료가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나네', '카페는 인테리어가 중요한데 잘하는 데 맡겨야겠지?'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은 틀릴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카페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카페를 끝까지 추구하는 일입니다.
- 그러려면 일단 카페를 많이 다녀봐야 합니다. 최대한 다양한 카페를 체험하고, 가능하다면 먼 나라의 뒷골목에 있는 카페까지도 다녀보면 좋을 겁니다. 그러고는 그중에서 내가 좋아한 카페를 떠올려봅니다. 정말 마음에 들었던 카페를 최대한 정교하게 기억하려고 애써봅니다.
- 감각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직군에 따라 필요 유무가 결정되는 능력이 아닙니다. 이 마케팅이 우리 회사에 정말 필요한가? 이런 쓸데없는 걸 매번 반복해야 하나? 이 제품은 시장에서 지금 어떤 의미인가? 같은 생각과 행동은 서비스 기획자, 마케터, 디자이너만 하는 게 아닙니다. 비즈니스를 키워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마땅히 늘 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탁월한 재무 담당, 인사 담당, 개발자는 그 누구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공감하려 애쓰고 더 나은 방향을 제안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런 노력은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감각은 모두에게 꼭 필요합니다. 단, 실행하고 싶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찾는 일보다 안 해도 될 일을 찾아내는 감각이 더 중요합니다.
- A. 꼭 잘되어야 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가난해야 한다는 공식은 깨져야 한다. 그런 친구들이 돈도 잘 벌고 잘됐으면 좋겠다. 나는 디자이너가 나중에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든지 디자인이 다음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디자인은 점점 커먼센스 common sense, 상식이 될 것이다. 웬만큼 잘하지 않고는 잘한다는 말 듣기 어려울 거다. 디자인을 커먼센스로 가지고 있는 제너럴리스트, 다방면에 걸쳐 박학다식한 사람이 더 주목받을 것이다.
Q. 좀 더 통합된다는 얘기인가?
A. 경영학을 공부 안 해도 경영하지 않나. 그 안에 커먼센스가 있는 거다. 의사소통, 예의범절, 사람 관리에 대한 믿음과 신뢰, 이런 것들은 기본이고 상식이지 않나. 인간이라면 해야 하는 것들 아닌가. 디자인도 그렇다는 거다. 좋은 걸 보고 좋다고 해야 하는데 혼자 아니라고 하면 감이 없는 거니까. 이미 많은 브랜드가 검증했다고 본다. 현대카드도 애플도 그렇다. 스티브 잡스가 디자이너여서가 아니라, 누가 봐도 스티브 잡스의 고집으로 만드는 거다. 콘셉트가 너무나도 잘 정제되어 있다. 애플을 말할 때 디자인을 언급하는 것보다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게더 맞다고 본다. 애플을 보고 디자인, 디자인하는 것도 맞지 않는 말인 것 같다. 한결 같이 끌고 가는 사람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디자인의 브랜드들을 보면, 작은 부분을 놓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 디지털 세상에 많이 들어와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아날로그'에 많이 빠져 있는 것도 비슷하지 않나.
인터뷰 : 홍석우
- 저는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다시 찾으러 갈 때 몇 층에 주차했는지 기억하기 어려웠던 경험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B3, B4, B5 같은 숫자보다 더 직관적인 네이버다운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실제 적용에 문제가 없는지 여러 번 검토한 후, 과감하게 '청각 경험'을 활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 그린팩토리 지하 주차장에서는 개구리 소리, 풀벌레 소리, 새소리, 파도 소리처럼, 층마다 다른 소리가 들립니다. 자연스레 방문객은 파도 소리나 새소리를 들으며 주차를 하게 되는데, 되돌아갈 때는 엘리베이터에서 파도나 새가 그려진 버튼만 찾으면 됩니다. 자연의 소리가 기억을 보강하는 실용적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이 공간을 방문한 사람에게 좋은 첫인상을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린팩토리의 독특한 외관도 '네이버다움'을 고민한 결과였습니다. 그린팩토리의 외벽은 단순한 투명 유리입니다. 대신 건물 안에 채광을 조절하는 블라인드를 달았습니다. 각 블라인드는 명도와 채도가 조금씩 다른 녹색으로 각각 다양한 각도로 열리고 닫힙니다. 이 투명 유리와 블라인드의 조합이 멀리서 보면 마치 픽셀처럼 보이길 의도했습니다. 그 결과 그린팩토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외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각 공간에 머무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블라인드가 다르게 움직였으니까요. 결국 건물 각 층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건물 외관을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 그린팩토리의 화장실에서 양치 공간을 분리한 것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일입니다. 점심 식사 후 화장실에서 양치하는 직원들을 발견하고 떠올린 기획입니다.
- 이 모든 게 '어떻게 하면 멋진 건물을 만들 수 있을지'가 아닌, '이 건물을 쓰거나 방문하는 사람들이 네이버를 어떻게 인식하도록 만들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지금도 경부고속도로를 오갈 때 단순한 유리상자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유기적인 초록 패널을 보면 여전히 네이버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린팩토리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은 유사한 모습의 그레이 박스더군요. 아마도 기술력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직간접적으로 반영된 결과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일터로서는 차가운 느낌이 들어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원래 네이버는 차가웠을지도 모르겠네요.
- 기획은 상식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감각적인 기획은 어떻게 떠올리는 걸까요. 실제로 저를 만나면 '조 대표, 이거 어떻게 생각해? 아이디어 좀 줘봐' 하고 부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에게서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기대하는 거죠.
- 감각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하고, 훈련해서 키워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감각적인 기획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하는 게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 감각적인 기획을 생각해 내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가장 상식적이고도 기본적인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저의 모든 기획은 상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령, 앞서 언급한 그린팩토리의 지하 주차장은 '주차한 층을 기억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한글 캠페인은 '네이버는 한글의 토대 위에 존재하는 서비스'라는 기본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상식과 기본을 돌아보면 평소 '원래 그런 거야'하고 넘겼던 그 모든 것들을 원점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됩니다.
- JOH가 광화문 D타워의 설계를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부동산의 기본 상식은 '부동산은 임대료로 수익을 극대화한다'는 것이죠. 이 상식을 기준으로 ...
- 그러려면 이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과 방문객 사이에 구분이 없어야 한다. 위층에도 상업시설이 있다는 게 훤히 보여야 한다.
'로비'가 문제였습니다. 보통 빌딩 1층에는 로비가 존재하죠. 로비는 빌딩의 내부인과 외부인을 구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1층에서 밀려난 상업시설은 지하의 아케이드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되면 지하 식당들은 주변 직장인들이 점심을 해결하러 오는 장소가 될 뿐, 외부인이 일부러 찾는 식당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광화문 D타워는 로비를 지하로 옮겼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프라임 오피스가 로비를 지하에 두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방문객을 위한 입구를 따로 만들고 건물의 중심을 통과해 5층까지 바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를 과감하게 배치했습니다. 그 결과 방문객은 1층부터 5층까지 올라가며 자연스레 상업시설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입점해 있는 많은 가게들에 테라스 공간을 만들어서 내부이지만 외부 같은 쾌적함을 사계절 내내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 이렇듯 감각적인 아이디어는 상식에서 착안해 본질부터 다듬어 나가는 겁니다. 사실 본질에서 시작하는 아이디어든, 자다가 벌떡 일어나 떠올린 아이디어든, 아이디어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이디어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여러 이해 당사자들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실행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디어가 만일 상식과 본질에서 시작되었다면 실행이 비교적 수월합니다. 상대를 설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 광화문 D타워 기획 과정을 '아이디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부동산을 가진 주인과, 방문객들, 그리고 임대료를 내는 다양한 업장의 마음으로 들어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상식의 조합을 찾으려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 정리하자면 기획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1. 이 비즈니스의 본질(상식)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2. 기존 레퍼런스에서 문제점을 찾아낸다.
3. 비상식적인 부분을 상식적으로 되돌려 문제를 해결한다.
- 제가 일을 할 때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이런 겁니다.
이 일은 왜 하는 건가요? 안 해도 되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뭐 하는 회사인가요? 이걸 하면 수익이 생기나요?
어느 조직에서든 제게 회의 시간이란 이런 질문을 하고, 거기에 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의 역할은 업의 본질에 대해 반복해서 묻는 질문자였습니다.
- 의뢰받은 요청을 기반으로 시안을 디자인하고 의뢰한 사람을 만족시키는 게 디자이너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뢰를 받았을 때 “이게 이 사업에 어떤 의미가 있죠?"라고 물을 수 있어야 기획자로 한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을 늘 했기에 저는 디자이너임에도 여러 기획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 기획이라는 일에는 정해진 틀이 없습니다. 자기 분야의 벽을 깨고, 이 일이 가야 할 방향과 그 본질에 대해 깊게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일, 그것이 기획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일하다 보면 브랜드가 되는 것이고요. 요즘 브랜딩의 의미가 왜곡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본질은 뒷전이고, 소비자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를 포장하는 일을 브랜딩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다들 소위 브랜딩 전문가에게 요즘 트렌드는 어떻고, 캠페인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견을 구하고 싶어 합니다. 실은 브랜딩에 전문가는 필요 없습니다. 진짜 브랜딩은 포장이 아닌 내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브랜딩이란 일의 본질이자 존재 의미를 뾰족하게 하는 일입니다. 포장은 곧 벗겨지기 마련이고 그럼 얼마 안 가 본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니까요.
- 매거진 <B> 에디터들이 쓰는 가방이라는 설정으로 제작한 가방. 어깨에 메거나 손으로 들 수 있는 절묘한 길이를 의도했고, 겉보기에는 심플하지만 가방 안에서 물건이 섞이지 않도록 수납 구분을 해서 무척 실용적이다. JOH에서 제작한 에드백의 여러 시리즈 중 백팩의 모습. 심플하지만 기능이 완벽한 백팩을 구상했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마음에 드는 백팩을 아직 찾을 수 없어서 지금까지 계속 들고 있다.
- 브랜드 스토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입니다. 저는 21세기의 인문학은 바로 이러한 브랜드 스토리에서 나온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결국 모든 비즈니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것이 곧 인류 역사의 변곡점마다 등장하는 흥미로운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
- 내가 직장인이든 사업을 하든 우리의 삶은 1) 브랜드를 운영하거나 2) 브랜드를 소비하는 두 가지 중 하나, 혹은 양쪽 모두에 속해 있습니다. 꼭 자본주의에 속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의 삶이 그런 겁니다. 다시 말해 '브랜드를 키워서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이나 '브랜드를 소비하고 싶은 욕망'을 빼면 이 세상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브랜드 스토리는 고전을 읽는 것보다 더 쉽고 흥미로운 인문학 공부가 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브랜드 스토리를 통해 사람들이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대상에 끌리는 심리는 무엇인지, 한 사람이 마음을 먹으면 기술로 세상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흥미진진하게 공부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이 모여 브랜드를 움직이고, 또 브랜드가 사람의 삶을 바꿉니다. 애플이 그랬고, 츠타야 서점이 그랬습니다. 이게 바로 21세기에 브랜드가 가진 힘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브랜드로 이루어져 있고, 브랜드를 통해 변화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브랜드 이야기는 사람 사는 이야기입니다.
- '아스티에 드 빌라트 Astier de Villatte'도 철저하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다가 브랜드가 된 경우입니다. 만들기도 다루기도 어렵고 가격도 비싼 제품이지만,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많은 아름다움 중, 특히 타이포그라피는 절대 조형미의 결정체입니다. 잘 만들어진 글자체는 빈틈없는 균형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변형할 때는 매우 세심한 조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디자이너에게 필수적인 조형 감각을 꼽으라고 하면 늘 타이포그라피를 언급합니다.
- 이러한 미학적 절대성, 혹은 절대적 균형미는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사람에게는 보이고,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안 보입니다. 심미안을 꾸준히 기르면 보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훈련해도 못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걸 보는 사람끼리는 느낌으로 쉽게 대화가 가능하지만, 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대화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아름다움의 추구는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에서 결정적 차별점이 됩니다.
- 물론 오직 완벽한 아름다움만이 의미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완벽하지 않음이 우리 삶 그 자체이며, 그 부족함의 조화가 더 고귀한 아름다움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고귀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모든 소비자가 그걸 바라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완벽한 아름다움만큼 자기다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더 아름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벽함'과 '자기다움'을 계속 찾아야 합니다.
- 저는 사람에 대해서도 퍼스널 아이덴티티를 컨설팅해 준다, 이런 것도 잘 믿지 않는 게 아무리 세팅을 한다 해도 어느 순간에 자기 본성이 나오기 때문에 그게 더 이상해 보일 수도 있거든요. 스스로를 수련하고 좋은 사람과 어울리면서 실제로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대하는 일도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어떻게 보면 (브랜드) 어떤 사람이 살아온 운명 같다고 할 수 있어요.
- 개인의 세계와 매거진 <B>라는 브랜드의 세계가 통하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호기심일 수도 있고요. 사람에 대한 궁금함, 궁금증? 저는 제가 어떤 브랜드나 사람을 좋아하면 알고 싶은 욕망이 되게 많은 사람이거든요. 어떤 제품을 사도 많이 궁금해해요.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왜 지금 사람들이 구하고 싶어 하는지가 궁금하거든요. 없어지면 왜 없어졌는지도 궁금하고.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누가 너무 멋있어 보이면 왜 멋있는 거지. 왜 이렇게 매력이 넘치지. 그러면서 그 사람의 인터뷰나 이런 것들을 쭉 보다 보면 아, 이런 이유가 있구나, 이 브랜드가 이렇게 만들어진 거였구나. 호기심과 관심이 생기는 거죠. 좋은 브랜드는 이런 이야기가 끝도 없이 서로 오가는 거거든요. 어떤 브랜드를 만든 사람의 삶 속에는 그것이 식당이라면 식재료 하나부터 식기 하나까지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제품을 만드는 곳이라면 그쪽 세계에서의 재료 하나, 공법 하나만 가지고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요. 그런 집요한 관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괜찮다니까 괜찮은 거지라고 넘어가지 않는, 내가 이해해야지 좋아지는 그런 마음. 그런 것들이 공통점일 것 같아요.
- Q. 브랜드를 창립하고 이끌어온 본인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A. 저는 대충 사는 것을 되게 억울해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이왕 할 거면 잘하자 그런 주의인데, 그런 것들이 저를 지금으로 이끌었던 게 아닌가 해요. 많은 분이 제게 어떻게 계획하고 사냐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사실 저는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거든요. 매사에 대충 하기는 싫어하고, 제가 저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런 하루하루가 모아져 돌아보니 나의 캐릭터가 생겼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조금 드는 것 같아요. 과거를 뒤돌아보면 하나도 내가 예상했던 대로 갔던 적은 없거든요. 그냥 그날그날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지라고 했던 삶들의 누적인 건 아닐까? 매거진 <B>도 그랬던 것 같고요.
- Q. 마지막 질문입니다. 매거진 <B>라는 브랜드를 이끌어오면서 어떤 조언이나 혹은 어떤 질문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됐는지요?
A. 저 스스로 질문을 많이 했던 건데, 지금도 계속하는 질문이에요. "돈 많이 벌면 뭐 하고 싶어?"라는 질문을 저한테 계속하거든요. 진짜 돈 많이 벌면, 말도 안 되게 많이 벌면 그럼 뭐 할 거야? 계속 그 질문을 저 스스로에게 해요. 예전에 JOH를 창업할 때도 그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그러면 지금 하고 싶은 걸 해야지 해서 한 게 매거진 <B>였고, 또 그래서 가방도 만들고, 식당도 만든 거고요. 지금도 정말 돈 많이 벌면 뭐 할 거야?라고 하는 것의 상을 잡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그렇게 찾아낸 것을) 미루지 않고 지금 해야겠다라고 판단하는 편이에요. 그 질문을 계속하는 중이고, 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이 잡지였어요. 진짜 돈이 많다면 잡지를 하나 해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실제로 돈이 많지도 않았으면서 한 거예요.(웃음) 그랬더니 지금 이 인터뷰를 하는 순간이 온 거죠. 누군가는 내일 죽는다면 오늘 뭐 할 거야?, 다음 달에 죽는다면 지금 뭐 할 거야?라는 질문을 하는데, 사실 그건 너무 극단적이고 상상이 잘 안 돼서. 얼마 못 산다는데 너 뭐 하고 싶냐고 물으면 다 필요 없고, 그냥 사랑하는 가족들이랑 있어야겠다고 생각할 거잖아요. 반면 돈이 진짜 많으면 뭐 할 거야?라고 하면 되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거든요.
- 두 번째 마음가짐은 타인의 의견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협업'할 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입니다. 타인의 의견을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어야 하고, 내 의견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의견을 지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협업과 소통의 기본입니다.
- JOH는 디렉터 단위로 조직이 움직였습니다. 직무가 아닌 프로젝트를 따른 것이죠. 이렇게 직무를 넘나드는 협업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디자이너가 마케팅 의견을 낸다고 해서 디자이너가 마케터의 업무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공격성 없이,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가끔 동료가 의견을 낼 때 듣지 않고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서는 일종의 콤플렉스가 느껴집니다. 다른 의견을 내는 동료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어떤 의견이든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의견에 누군가 반대해도 '내가 생각해도 좀 별로네' 하면서 훌훌 털어버리는 거죠. 그게 잘 안 될 때 '난 이것밖에 안 되는 실력 없는 사람'이라며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은 피해의식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사람은 의미 있는 의견을 내는 대신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한 공격과 방어로 매사를 허비하기 쉽습니다.
-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을 도울 방법은 물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그의 순수하고 선한 의지를 얼마나 존중하고 지지하는지 표현하는 겁니다. 살면서 나를 그렇게 지지하고 존중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겠죠. 그러므로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그렇게 지지하고 존중할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 진정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 하지만 존중이란 '척'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 본질이라고 생각하는지 고민하며 삽니다. 세상은 원래 다 그런 거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해도, 제가 믿는 것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의 많은 브랜드는 누군가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입니다. 또 그게 바로 일의 본질입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일하고, 나의 신념을 퍼뜨리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더 일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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