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황혜원] 요르가즘

일루젼 2022. 5. 2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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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황혜원
출판 : 마음산책 
출간 : 2020.02.15 


       

발랄한 제목과 매력적인 드로잉이 시선을 끌어 집어 들었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요가에 빠져들어 요가 강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작가의 진지한 듯 발칙한 에세이. 

진지하게 요가의 자세와 연원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노라면 문득 나도 요가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며 시원하게 속엣말을 쏟아내는 저자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져 마냥 유쾌해졌다. 매일 몸-마음 수련을 챙기고자 노력하지만, 일상의 희로애락에 종종 루틴을 잃곤 하는 그에게 강한 친밀감을 느꼈다. 

(때로 너무 내밀한 생각의 흐름대로 흘러가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런 점도 저자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아쉬탕가를 사랑하던 그가 어느 순간 관심 없다던 하타에 마음을 열고 이후에는 수업까지 하게 되는 모습을 보며, 

그 이전에 순수 미술을 하던 그가 요가와 아이패드 드로잉과 타로에 빠져들게 되었던 우연들을 보며,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수많은 기연들 중에 내가 실제로 행동해서 붙잡고 있는 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효 충돌은 활발히 움직이는 입자들 사이에서 발생할 확률이 더 높다. 전체 충돌수라는 N이 커지기 때문이다. 천운이라는 촉매가 등장한다면 초심자의 행운을 뛰어넘는 성과를 단번에 얻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결과는 적어도 한 번의 시도 이후에야 확인할 수 있다. 

 

6월이 다가온다.

새로운 것들이 기다린다.

무척 설렌다. 

 


   

지금 여기, 타인은 없다. 
오롯이 나뿐이다. 
내가 해내건 못하건 상관없다. 
나만이 알 수 있다.

 

 

알라딘

 

 

- 아쉬탕가에서는 문 데이 moon day에 수련하지 않는다. 70퍼센트가 물로 이뤄진 인간의 몸은 달이 가득 차거나 fullmoon 기울 때 new moon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설마 술도 잘 취하게 되는 걸까.

 

- 얼마 전 친구의 결혼식에서 지껄였던 말이 떠올랐다.

"왜 2032냐면, 2020년에 우리가 32살이잖아! 그러니까 그 나이 정도 되면 자기 몸뚱이 하나 정도는 스스로 건사할 수 있어야 하잖아."
나는 진작에 건사해야만 했다. 이미 오래전, '껍질을 벗어야 하는 순간'을 놓쳐 그 안에서 죽어버린 건 아닐까. 만약 죽기 직전이라면 지금이라도 바위 어딘가로 돌진하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껍질을 부술 수 있다면 탈출할 수 있을까. 이제 이사 갈 집은 '소라게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고, 우습게도 나의 혼란은 타로 카드 석 장으로 해결되었다. 

- 첫 번째 카드는 '완벽한 조화'를 뜻했다. 두 번째 카드는 걱정의 안대를 풀고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 보고 선택이나 결단을 내리라는 의미였다. 세 번째 카드는 여덟 개의 별을 배경으로 나체의 여인이 자유롭게 물을 쏟아내고 있다. 책에서는 별 여덟 개를 차크라로 봤다. 아쉬탕가 요가에서 아쉬토우 astou는 숫자 8이다. 8단계는 '회복된 낙원', 삼매三昧를 뜻한다. 차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바퀴, 원반'으로, 낡은 에너지가 배출되고 새로운 에너지가 흘러들어오는 인간 정신의 중심부를 상징한다.

 

- 나는 '포레스트 요가' 수업을 들으며 눈물 흘린 이야기를 했다. 수련이 끝나고 휴식을 취할 때 울었고 예수일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에도 울었다. 왜 울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울고 나니 마음이 청량해졌다. 몸 안에 고이는 나쁜 무엇은 땀이든, 눈물이든, 침이든 액체 상태로 배출되어야 한다는 주의기에, 눈물이 반가웠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져서 울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 그때 깨달았다. 어떤 장르의 요가건 배움을 위해서는 그것을 전하는 '구루'가 필요하다. 제대로 된 구루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그것은 구라다. 그리고 나는 그녀 같은 '구루'가 될 수 없다. 

 

-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상황'은 조금 두렵고 설렌다. 늘 두려움과 설렘은 같이 간다. 그 반대는 지겨움과 무료함이다. 중요한 건 역시 '사람'이다. 그 '사람'이 꾸린 곳에 모이는 '사람'은 분명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과연 오늘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시간을 보낼까? '과연+말줄임표'를 좋아한다. '과연' 속에 두려움이 듬뿍 담기고 말줄임표로 설렘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 백 벤딩 back bending(가슴을 내밀어 등을 접는 후굴 자세)이 갱신되었다. 최악이던 하루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후굴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마무리 자세를 끝내고 매트에 누워 생각한다. 후굴이 마음을 여는 자세라 배웠다. 어떤 마음을? 밝고 넓고 깊고 상냥한 마음을 널리 열어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 경우, 어둡고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마음까지도 열어젖혀 마주하는 것이었다. 판도라의 상자였나. 그동안 기다려왔던 내 관문은 이것이었나. 내 그릇은 얼마나 작은가. 정말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줄 몰랐다. 그동안 애인과 고양이, 가족과 친구들, 내 곁을 지켜준 큰 그릇의 당신들이 나를 품어줬던 것인가. 
 
- "하타 요가 어떻게 생각하세요?"
"책에서 읽었는데, 하타가 원래 고행을 위한 수련이래요. 버티고 견뎌내는 인 요가는 힘을 빼면 되는데, 하타는 힘을 줘야 하는지 빼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30분 넘게 하다 보면 오히려 성격 버릴 거 같아요."
그러셨구나. 의외였다. 선생님은 스캇 펙의 <그리고 저 너머에>를 읽고 있었다. 하늘색 양장본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하타를 싫어하나? 그건 아니다. 사귀고 싶지 않을 뿐 인연을 끊고 싶지는 않다. 뭐랄까 남자 사람 친구 느낌이다. 내가 하타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터놓고 말해보자. 

 

- 헤어지기 직전, 엄마가 꼭 안아준다. 뙤약볕 아래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나에게 연신 부채질도 해준다. 내가 지루하지 않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준다. 
"먹고 난 그릇이랑 반찬을 그대로 둔다는 거야."
"그래? 내 애인은 절대 안 그래."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라고 한 줄 알아?"
"어떻게 하라고 했는데? (영혼 없음)"
"그대로 두라고 했어. 그리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보는 앞에서 반찬을 개수대에 다 버리는 거지. 이미 상했을 우유도 콸콸 쏟아붓고."
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할 말을 잃 나는 두 손으로 엄지를 척 내밀며 버스로 올라탔다. 아빠가 왜 그토록 엄마를 사랑하는지 알 것만 같다. 해맑고 앙증맞다가도 냉정하고 가차 없는 외유내강 언중유골의 엄마. 당신의 성정을 내가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일단 수리야나마스카라로 몸을 풀었다. 항상 수리야로 몸을 풀어와서 그런지 다른 아사나로 호흡만 해서는 부족한 느낌이 든다. 수리야를 끝내자마자 매트 네 개를 더 가져와 깔았다. 벽에 발 던지기를 해보고 나서 약간 감을 잡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조금 무서웠다. 넓은 매트 위로 두어 번 넘어가고 나니 힘이 동났다. 그래, 핸드 스탠드는 여기까지. 

- 그렇게 하타 수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타 수업을 통해 처음 접한 신기하고 시원한 아사나를 복습했다. 깊은 전굴과 후굴 사이를 채워주는, 몸이 원하는 아사나를 본능적으로 찾아 골고루 섞어줬다. 몸에게 이끌려가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어제와 달리 각각의 아사나 속에서 여유를 느꼈고 그 온화함은 자신감으로 직결되었다. 지금 여기, 타인은 없다. 오롯이 나뿐이다. 내가 해내건 못하건 상관없다. 나만이 알 수 있다. `그래, 혜원아. 지금을 기억해. 건강한 느낌에만 집중해. 아사나가 아무리 유혹해도 좇지 마. 할 수 있으면 가고, 못하면 물러서. 괜찮아. 그게 진짜 수련이야.

 

- 호흡이 아사나를 이끌라 누누이 말씀했다. 호흡이 아사나에 끌려가지 않도록. 아쉬탕가에서는 아사나가 끊임없이 이어져 호흡을 잃기 쉽기 때문에 선생님도 늘 아사나와 호흡의 합일을 최우선시한다. 그리고 아사나를 하는 이유가 명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의 틀, 패러다임을 깨부수기 위해 고난도 자세를 하는 것이므로. 그 외의 이유로 고난도 아사나를 수행하게 되면 심신에 고통을 불러온다고. 

- '마리치 Marichy'는 사람 이름입니다. 인도의 신화에서 마리치는 '마음의 힘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신' 브라마의 아들이자, 태양의 신 수리야의 할아버지입니다. 예사로운 족보가 아니죠. 맞아요. 마리치는 '현자'이자 마리챠아사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자세를 수련하면 현자의 장점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마리챠 시리즈를 애정하는 저로서는, 현자님께서 굉장한 소화력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 어깨 회전근은 '항상 부드럽게' 쓰도록 합니다. 팔을 길게 뻗어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어깨를 충분히 회전한 후, 팔꿈치를 접어볼게요. (팔을 대충 뻗어 어깨가 충분히 돌아가지 않은 상태에서 팔꿈치만 접게 되면, 어깨 회전근이 상할 수 있습니다.) 

 

- 두 시간 가까이 대화했다. 뭐랄까. 100분 토론 느낌이었다. 그는 자기만의 사상과 주장이 뚜렷했고 거침없이 그것들을 표현해냈다. 메시지로 주고받았을 때 느꼈던 세심함과 다정함도 물론 있었지만, 그의 눈빛+말투+몸짓이 곁들여지니 점점 아리송해졌다. 그리고 그가 쓰는 주요 단어들이 귓가에 오래 앉았다가 사라졌다.

 

-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주제를 툭 칠 때마다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평소에 그만큼의 충분한 사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참신했다. 나와 정반대의 의견도 있었지만, 굳이 내색할 필요가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들었다. 내가 애인을 만나며 배운 게 이거다. 타인에게 나의 100을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상대가 자기 자신에게 심취해 있을 경우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물어보지 않는 이상, 굳이 버선발로 마중 나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 리노 밀레의 <아쉬탕가 요가>에 암리타 빈두 Amrtabindu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전에서는 우리가 음식물을 섭취하는 32일마다 한 방울의 새로운 혈액이 만들어지고, 이 32방울이 모여한 방울의 생명 에너지인 암리타빈두가 만들어져 정수리에 보존된다. 만약 좋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면 암리타빈두가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위로 상승하는 소화의 불인 아그니 Agni에 의해 소멸된다. 이런 식으로 암리타빈두를 다 잃게 되면 생명 자체를 잃고 만다. 그래서 거꾸로 서는 자세들이 암리타빈두가 흘러내리지 않고 보존하게 해주며, 아그니의 상승하는 성질 때문에 역 자세에 머물 때 소화기관이 정화된다고 한다. 

- 그의 이름에 '석'은 석가모니를 뜻한다. 그동안 딱히 가르쳐줘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결정적인 이유기도 하다. 그에게는 수련 혹은 마음공부 따위가 딱히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피트니스 센터 같은 데 가서 근육을 뿌시고(부수고) 다닌다. 도드라진 그의 근육들을 만져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숨 쉬고 걷고 말하고 웃는 모습만으로도 느껴지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즉 이 사람에게는 요가가 필요 없다. 원래 요가는 명상을 위한 도구로 시작되었다. "Practice and all is coming." 유명한 이 문장에서 'practice'는 요가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삶 전체를 향한 수련을 말한다. 

 

- 고관절에는 압착 지점이라는 게 있다. 쉽게 말해, 무리해서 나아가면 안 되는 지점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뼈와 관절, 체격뿐 아니라 몸과 마음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서 같은 자세가 나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골반 바보라서가 아니라.

 

- 인도풍의 신비한 음악이 내 무릎에 도착한다. 둥그렇고 가볍고 푸른 음악이 핏속을 흘러 허벅지 위에서 미끄러지고 음부에 잠시 고였다가 넓게 퍼진다. 아랫배를 스치고, 둥근 가슴에 도착한다. 얼굴 가까이로 음악을 끌어올리고는 다시 아래로 내려보낸다. 천천히 반복하다 발끝에 둥그런 음악이 맺힐 즈음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몸을 깨우세요"라고 지시하는 지도 선생님의 목소리에 음악을 놓아준다. 


- 박연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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