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히가시노 게이고] 명탐정의 규칙

일루젼 2012. 6. 6.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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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규칙 - 8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372쪽 | 195*132mm | ISBN : 9788990982377

2010-04-16

 

 

 

'히가시노 게이고', 그는 재기발랄한 작가다. 

 

다작을 하는 일본 추리소설 작가라는 것 외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는데-

('백야행'과 '옛날에 내가 죽은 집', '수상한 사람들'을 읽은 것이 전부. 많다면 많겠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선 극히 일부다)

 

읽었던 세 작품의 색깔이 모두 달라 상당히 혼재된 이미지였는데, 이 책으로 그는 내게 확실하게 남았다.

 

백야행의 우울한 듯 미끄러운 모노톤,

옛날에 내가 죽은 집에서 남은 묘하게 밍밍한 (내게는) 맛,

그리고 수상한 사람들에서 느낀 다소 시니컬한 유머를 즐기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이미지는 

하나로 깔끔하게 합쳐져 '새롭고 신선한 시도를 기피하지 않는, 오히려 추구하는' 추리 매니아 작가라는 이미지가 되었다.

(덧붙여 나는 백야행을 꽤 좋아한다)

 

 

이 책은 잠깐 잠깐 변동사항이 조금씩 있긴 하지만 '와가와라 반조' 경감과 '덴카이치 다이고로' 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프롤로그와 12개의 본(?) 에피소드, 그리고 에필로그와 '명탐정의 최후'라는 짤막한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게이고는 이전까지의 유명 추리 소설들이 자주 이용하는 유형들을(솔직히 클리셰에 가까운)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즐겁게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선을 잘 지킨 유머 안에 숨어있다.

(난 게이고의 유머 센스와 잘 맞는 것 같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용하거나 패러디(?)한 작품들을 그럭저럭 다 읽어서 더 즐거웠을 수도 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며, 아주 유쾌했다.

 

 

 

[발췌]

 

- 프롤로그-

 

내 이름은 오가와라 반조. 나이는 마흔둘이고 지방 경찰 본부 수사 1과 경감이다. 살인 사건이 나면 부하들을 이끌고 즉시 현장으로 달려간다.

경찰 조직 내에서는 근엄한 존재다. 그렇게 보이려고 콧수염도 기르다. 내가 "이봐, 뭐하는 거야!"라고 고함이라도 지르면 파출소의 신출내기 순경 따위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만다. ... 

 

그를 모르더라도 현명한 독자라면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즉 나는 이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의 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명탐정 소설에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펴는 형사가 반드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빈번히 등장한다. 그 멍청한 익살꾼을 연기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뭐야, 그럼 편한 배역이잖아."

이런 비아냥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진범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않아도 되고, 사건 해결의 열쇠를 놓쳐도 아무 문제 없으며, 그저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적당히 의심하기만 하면 되니 이보다 편한 역할이 어디 있냐고들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알고 보면 이렇게 힘든 배역도 없다. 사실은 명탐정보다 훨씬 고생스럽다. .그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우선 범인을 알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는 절대로 범인을 잡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진범을 밝혀내는 것은 주인공인 덴카이치 탐정의 역할이므로, 그가 멋지게 피날레를 장식하기 전에 내가 사건을 해결해 버리면 주인공은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만다. 무엇보다, 탐정 소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 3. 폐쇄된 산장의 비밀 ㅡ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 -

 

등장인물의 입장에서는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좀 더 연구하고 더 고민해서 쓰면 안 될까?"

산장은 언제나 폭설로 고립되고, 외딴섬의 별장도 폭풍우로 늘 고립된다. 이런 식이라면 독자들도 곧 질려 버릴 것이 뻔하다. 등장인물 역시 진절머리 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립시키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걸까.

"고립시키면 용의자를 소수로 한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내 독백을 옆에서 들었는지 덴카이치가 끼어들었다. ...

 

 

 

- 5. 알리바이 선언 ㅡ 시간표의 트릭 -


"자네는 독자들의 심리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구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알리바이 허점 찾기 식 탐정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 역시 시간표 따윈 안 읽어."

"정말요? 그러면 어떻게 추리하는 건가요?"

"추리 따윈 하지 않아. 주인공이 추리해 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지. 그래서 지치지 않는 거야. 마지막 단계에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이해하고 만족하는 거야."

 ...

"하긴, 본격 추리 소설을 선호하는 팬들도 마찬가지일지 몰라요."

 

 

 

- 6. 여사원 온천살인 사건 -

 

그런데 이때 갑자기 야마모토가 소설 세계에서 벗어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말 좀 하게 해 주세요."

야마모토가 말했다.

"주역인 당신들도 불만이 많겠지만, 소설이 두시간짜리 드라마가 됐을 때 가장 피해가 큰 것은 범인입니다. 이 사건도 그래요. 원작에서는 좀 더 복잡하고 교묘한 트릭이 사용됐어요. 그런데 그만, 설명하기가 어렵다면서 이렇게 간단한 트릭으로 바꾸어 버린 거예요. ... 제일 치명적인 것이 동기입니다. 실제로는 말이죠, 좀 더 심오한 살인 동기가 있었어요. 하지만 민감한 '차별 문제'를 건더린다면서 애정 문제로 변질시켜 버렸어요. 제 마음, 이해 하시죠?"

"잘 알죠."

덴카이치가 말했다.

"너무도 잘 알아요."

야마모토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야마모토가 다시 드라마 속 얼굴로 돌아왔다.

경찰이 그를 포위했다.

 

형사 A : 체포해.

야마모토 : 에잇.

야마모토, 바다로 뛰어든다. 마침 그곳을 잠수함이 지나간다.

야마모토, 잠수함에 부딪쳐 죽는다.

 

"왜, 아 도대체 왜, 왜 이런 곳에 잠수함이 있는 거야."

바다를 내려다보며 내가 말했다.

"처음에는 자동차에 치여 죽는 설정이었어요."

덴카이치가 말햇다.

"하지만 자동차는 안 된다며 내용을 바꿔 버렸지요."

"그렇게 된 거로군."

이 두 시간짜리 드라마의 스폰서가 자동차 업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바다를 향해 합장했다.

 

 

 

- 12. 흉기 이야기 ㅡ 살인의 도구 -

 

"말도 안 돼. 나는 범인이 아니야.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하지 않았다니깐."

마치내 미야모토는 울기 시작했다.

'범인이 아닐 거야.'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 범인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별수 없다. 미야모토에게 범인 역할을 부여할 수밖에. 왜냐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덴카이치이기 때문이다. 그가 '피의 단검'을 사용했다고 하면 사용한 것이다. 그의 말이 곧 진실이다. 그가 '범인은 미야모토'라고 하면 미야모토가 범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음, 그렇게 된 거였군. 정말, 이번 사건에선 자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나는 늘 하는 대사를 읊으며 손에 쥐고 잇던 메모를 조용히 찢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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