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빠라기 - 180쪽 | 195*143mm | ISBN(13) : 9788977771741 2009-05-15 |
박범신의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에서 언급된 것이 인상깊어 찾아본 책.
읽는 동안 많이 놀랐고, 부끄러웠고, 또 감동했다.
'빠빠라기'란 남태평양 원주민들이 문명 세계 사람, 그러니까 백인을 부르는 말이며 '투이아비'는 추장이었다.
그가 문명화를 외치며 밀려드는 서양인들에 대해 느낀 점과 생각한 바를 원주민들에게 연설하기 위해 쓴 글들을 '에리히 쇼이어만'이 모아 독일어로 번역했던 책이 이 빠빠라기다.
그들은 순수하기에 더욱 정확하게 우리를 (이제는 우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문명화의 혜택을 받은 것인지 속박된 것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꿰뚫어본다.
이 책을 덮으며 가장 슬픈 것은,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영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발췌]
# 빠빠라기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몸을 감추려고 안달이다.
"몸통과 팔다리는 고깃덩어리이고 목 위에 있는 것만 진정한 인간입니다."
.... 흰둥이는 부득이하게 손도 감추지 않고 내놓고 있다. 머리와 손이 뼈와 살로 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그것 말고 몸의 다른 부분을 내놓는 사람은 예의 바르지 못하다고 낙인찍힌다.
..."육신은 죄악이다."
빠빠라기는 늘 그렇게 말한다. 그들은 정신이 위대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물건을 던질 때 내놓는 팔은 죄악의 화살이다.
# 여자들이 몸을 그렇게 단단히 감추고 있기 때문에 남자들은 어떻게든 한번이라도 그것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다. 사정이 그러하니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들은 밤이든 낮이든 그 생각만 하고 여자의 몸매에 대해 많은 말을 나눈다. 그런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그 논의가 큰 죄라도 되는 양 어두운 그늘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이 여자의 몸을 더 자주 볼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을 많이 생각하게 될 테고,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며, 여자를 만났을 때 음탕한 말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 빠빠라기는 소라처럼 생긴 딱딱한 껍데기 속에서 마치 갈라진 용암의 틈에 사는 지네처럼 돌 속에 파묻혀 산다. 움막은 세워 놓은 돌궤짝같이 생겼다. 서랍이 많고 여기저기 구멍도 많다. 돌궤짝은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곳이 하나밖에 없다. 빠빠라기는 그곳을 들어갈 때는 입구라고 부르고, 나올 때는 출구라고 부른다. 어차피 그게 그거인데도 말이다.
# 사모아 사람한테 그런 궤짝에 들어가서 살라고 하면 모두 질식해 버릴 게다. 사모아에 흔히 있는 움막처럼 신선한 공기가 드나드는 곳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식 만드는 구석에서 나오는 냄새가 나갈 구멍마저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별로 나을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곳에서 사람이 죽지 않고 산다는 것, 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지 않고 산다는 것, 바람과 햇빛이 있는 곳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돋아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빠빠라기는 그런 궤짝에서 살아가기를 좋아하고, 그것이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알지 못한다.
# 그런 돌섬 사이에 진짜 땅이 있다. 그곳이 말하자면 '시골'이라는 곳이다. 거기에 있는 땅은 여기 있는 땅들처럼 기름지다. 나무도 있고 강도 있고 숲도 있고 진짜 마을도 있다. 물론 움막들은 모두 돌로 되어 있지만 과일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고 빗줄기가 사방을 씻어주며 바람이 다시 말려 준다.
그런 마을에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을 시골뜨기라고 부른다. 그들은 돌 틈에 사는 사람들보다 먹거리를 훨씬 많이 갖고 있지만 손은 거칠고 더러운 허리 도롱이를 걸치고 다닌다. 그들은 돌 틈에 끼어 사는 사람들보다 건강하고 아름답게 산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직접 땅을 만지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을 하지 않으며 빈둥거리는 도시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 신의 손을 더 이상 잡지 못하는, 정신이 혼미하고 병든 자들만이 햇살과 바람이 없는 돌 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빠빠라기들은 그 안에서 행복하다니까 그렇게 살아가라고 하자.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양지 바른 해안에까지 돌궤짝을 세울 것을 계획하고, 자기들만의 생각으로 인간적인 기쁨을 돌, 먼지, 소음, 연기와 모래로 말살하려는 짓은 절대로 하지 못하게 막자.
# 대부분의 사람은 수치심 없이 하느님의 것을 강탈한다. 그들은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때가 있다. 모두 그렇게 하면서 아무 생각이 없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것을 많이 물려받기도 한다.
어쨌든 하느님은 이제 거의 모든 것을 빼앗겼고,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서 강탈해 내 것과 네 것으로 만들었다. 하느님이 모두를 위해 창조해 놓은 해를 이제는 모두에게 똑같이 골고루 나누어 줄 수 없게 되었다. 몇몇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넓은 양지에는 몇 안 되는 사람이 앉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은 응달에 앉아 초라한 빛을 간신히 쬔다. .... 생각을 제대로 한 빠빠라기라면 하느님이 모두 함께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넉넉한 자리를 마련해놓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구나 햇빛을 조금씩 나누어 가지면서 작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정도로 이 세상이 크고, 누구나 야자수 숲에 들어갈 수 있을 만한 땅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 가진 자들에게는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럴 생각이 없고,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갖고 싶어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런데 가진 것이 없는 자들 역시 하느님의 전사가 아니다. 그들은 너무 늦게 왔거나 재주가 좋지 않거나 기회가 없어 훔치지 못한 자들일 뿐이다.
정작 빼앗긴 쪽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신의 손에 다시 갖다 놓으라는 말을 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 형제들이여, 사모아에 있는 마을 정도 되는 움막을 소유한 자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하룻밤 자고 갈 편의를 베풀지 않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팔에 바나나를 한아름 안고 있으면서 배가 고프니 하나만 달라고 조르느 사람에게 눈도 꿈쩍하지 않는 자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 거기에 보이는 인간들은 허상일 뿐이고 진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손으로 만지면 그것이 빛으로만 되어 있고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빠빠라기에게 기쁨과 슬픔을 주고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한다.
.... 때때로 빠빠라기는 어떤 사내가 다른 사내의 여자를 빼앗는 것을 본다. 또는 처녀가 젊은이를 속이는 것을 본다. 거친 사내가 돈 많은 부자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목을 조르면 부자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가는 죽고, 거친 사내가 그의 허리 도롱이 속에서 둥근 쇠붙이와 묵직한 종이를 훔쳐 가는 것도 본다. 빠빠라기는 눈으로 그런 즐거운 장면과 무서운 장면을 보면서 조용히 침묵한다.
... 그래도 빠빠라기는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히려 재미있어하며 쳐다보기만 한다. 충격이나 수치심 따위는 아예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는 전혀 종류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그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자기가 빛 속에 나오는 사람보다 잘났고, 그 사람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소리마저 죽인 채 벽을 응시하면서 그들은 용맹스러운 사람이나 고귀한 허상을 보면 그것을 자기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널빤지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 뒤쪽 벽에서 마술사가 좁은 틈을 통해 빛을 던져 만드는 허상인 거짓된 삶이 난무하는 벽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이다.
진정한 생명이 없는 허상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빠빠라기에게 큰 기쁨을 준다. 어둠 속에서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도 않으며 스스로 거짓된 삶으로 들어간다. 가난뱅이가 부자가 될 수 있고, 부자가 가난뱅이가 될 수 있고, 병자가 건강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약한 자가 강한 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어둠 속에서 실제 삶에서는 경험하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며 거짓된 삶을 맛볼 수 있다.
빠빠라기는 열정적으로 그런 거짓된 삶에 빠져들고, 가끔은 그 열정이 너무 지나쳐 자신의 진짜 삶을 잊어버린다. 그것은 병이다. 진정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허상을 좇지 않고 환한 햇빛을 받으며 따뜻하게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 빠빠라기는 생각이라는 것을 끝없이 한다. '내가 사는 움막은 야자수보다 작다' '야자수는 폭풍이 불면 휜다' '폭풍이 큰 소리로 호통을 친다' 따위를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 방식대로.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난 키가 작아' '내 마음은 여자를 보면 늘 들떠' '난 여행을 아주 좋아해' 등. 그런 짓은 재미있고, 좋고, 머릿속으로 그런 짓 하기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빠빠라기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생각이 습관이 되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으며, 정말 강제로 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항상 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못 견뎌 한다. 그래서 머리는 깨어 있는데 다른 감각은 쿨쿨 자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똑바로 서서 걸어가고 말하고 먹고 웃고 있지만 말이다.
생각하는 것, 혹은 생각이 열매인 사상이 그를 꼼짝 못하게 한다. 마치 자기의 독자적인 생각에 중독된 것 같다. 햇빛이 아름답게 비치면 그는 금방 이렇게 생각한다.
"아, 태양은 왜 저토록 아름다운가!"
이것은 잘못이다. 완전히 잘못되었다. 어리석은 짓이다. 태양이 비칠 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똑똑한 사모아 사람은 따뜻한 햇살에 느긋하게 몸을 맡긴 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햇빛을 머리로만 쬐는 것이 아니라 손, 발, 허벅지, 배, 그 밖의 모든 신체 부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피부와 살이 나름대로 생각하게 둔다. 그것들도 머리와 다르기는 하지만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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