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454쪽 | 214*138mm | ISBN(13) : 9788901097671 2009-06-30 | 초판출간 2009년 |
강신주.
명성(?)은 익히 들어왔었으나 저서를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목만 보고서는 자본주의에 관한 책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읽어나가면서 뒷통수를 한 방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뒷맛은 기분좋은 후련함이었다)
크게 보자면 이상과 짐멜, 보들레르와 벤야민, 투르니에와 부르디외, 그리고 유하와 보드리야르를 묶어가며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상당히 쉽게 쉽게 잘 풀었다.
단지 미리 걸렸던 점들을 말하자면,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랬겠지만 저자의 존대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쉽고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합쇼체보다는 해체가 책에서는 훨씬 좋다. 문장이 짧아져서 눈에 더 쉽게 들어오고 종이가 절약된단 말이다 ;ㅁ;! (아주 개인적 의견)
다음은 73page 이상의 '권태' 마지막 줄에 대한 해석.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 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그럼' 이라는 단어가 덧붙어 다분히 회의적인 뜻으로- 그러니까 '권태를 자각조차 할 수 없는 농민은 불행하다, 그러나 그 권태를 자각할 수 있는 나는 과연 그들보다 얼마나 행복한가' 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하는데 저자는 문자 그대로 이상이 자신이 더 행복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석했다.
저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는 그 편이 더 합치되므로 그러려니 하긴 하지만....
그 다음 이어진 칸트와 니체, 짐멜의 연결고리에서는 아무래도 조금 갸우뚱하게 되는 일이 있다.
사상가들의 인용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저자가 받아들이고 이해한, 그러니까 한 번 소화한 '사상'을 자신이 말하고 싶은 논지에 '맞춰' 인용한다는 것이다. 인용자 자신이야 의도를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 인용이 적절하다고 생각하기에 선택했겠지만, 사람 간의 대화에서도 발췌 인용은 앞뒤 맥이 달라져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는 일들이 허다하다.
따라서 인용문이나 해석된 사상을 읽고 그것이 그대로 그 사상가의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다고 본다. 읽어볼만한 저서들임은 틀림없으니- 맷집이 좀 더 쌓이면 직접 읽어보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그 경우에도 제대로 이해하리란 보장은 없다. 이해했다고 생각하여 주석이나 해설서를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결국 완전한 이해란 존재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대략의 생각이 정리된 4장까지의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개인적으로는 패션이 발달하게 된 것은 공업화와 대량생산이 시작되며 천편일률적으로 쏟아져나온 제품들 속에서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는데, 저자의 생각도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신선하기도 했고.
더 빠르고 지속적인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탄생한 '유행'이라... 최근의 자극적인 문화를 생각해보면 부정할 수 없다.
그에 더해 이 논지는 패션 뿐이 아닌 문화 전반으로 확장가능하다고도 본다.
문화의 유행은 한눈에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며, 그 방향성이 무척 뚜렷하다.
소위 말하는 상류 문화에서 대중 문화로의 흐름이 그것인데 그나마 이것이 틀을 갖추게 된 것에는 인터넷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본다. 그 특유의 빠른 전파력과 접근성으로 미처 새로운 고급 문화가 생성되기 전 대중적으로 전파되어 버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고급이라고 구분짓기는 애매하지만), DSLR 붐이나 와인 붐 등에서부터 발레나 뮤지컬, 공연 예술과 전시 등의 대중화를 꼽을 수 있겠다. 이전까지는 시간과 공간적 장애, 그리고 지불 비용의 장애로 인해 이들을 향유하기 어려웠던 대중들이 인터넷을 통해 한층 손쉽게 이들을 향유할 수 있어졌고 그를 통해 빠른 속도로 문화적 소양을 키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파생된 문제점이 지적재산권이다. 특히나 인터넷이 발달된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부분인데, 이 지적재산권과 다양한 문화로의 접근성의 균형은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부분이다.
(나는 지적재산권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본인이 본인의 생성물에 한해 권리 행사를 포기할 수는 있어도 남의 권리는 엄연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그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현대의 여성을 과연 진보로 볼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는데, 이전까지 가사와 육아에만 충실하면 되었던 역할에서 그 역할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사회적인 역할까지 짊어지게 되었다는 점. 진정한 진보로 보려면 남성과 같이 가사와 육아로부터 자유롭게 사회로 나갈 수 있어지거나, 혹은 함께 지는 것이 맞다고 본다.
4장에서 도박과 매춘, 그리고 거기에서 돈이 갖는 위상을 종교적으로 접근해 신에 비견하는 부분도 무척 즐거웠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윌리엄 버로스나 토머스 드 퀸시의 '중독'에 대한 글들도 생각이 났고, 또 한편으로는 도킨스도 생각이 났는데- 그러니까 나는 신을 까는 건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 충분히 즐겁게 함께 대화해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데 문제는 도킨스의 접근방식이 무척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거다.
다시 돌아가서.
한국의 로또붐 역시 아주 연관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카지노를 비롯한 도박이 금지되어 있지만 사설도박장이 여기저기에서 기승인 것 역시 그렇다.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뿌리를 내린 현 사회에서, 이미 물과 기름처럼 노동자와 자본자가 거의 태생적으로 나뉘어져가는 현 세태에서.
평생을 잘리지 않고 일한다해도 그 금액의 총합이 빤히 정해져 있다면, 그 어디에서 희망과 일탈을 찾을 것인가.
그나마도 집 한 채 마련하기 빠듯하다면-
거기에 물가는 오르고, 부양해야할 가족이 생기고, 도중에 몸이 아프다거나 사직하게 된다면.
그런 것들에 대한 불안이 비정상적일만큼의 교육열과 한탕 주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입맛이 썼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으나, 그러면 글이 너무 길어진다 -_-;;
혹 훗날 더 덧붙이고 싶어지면 더하겠다.
꼭!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발췌]
5장.
노동은 보통 자연에 대한 합목적적 개조라고 설명됩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짓기 위해서 그에 필요한 나무를 잘라내는 행위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집은 하나의 목적이 되고 나무를 자르는 행위는 그 목적에 부합하는 노동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결국 노동이란 자연에 대한 일종의 강탈이자 폭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결국 나무는 집을 짓기 위한 목적 때문에 마음대로 잘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자본주의 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동이 자연을 개조시켜도,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마치 자연에 바치는 제물처럼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전자본주의 사회가 기본적으로 농업경제로 유지되었던 사실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 하지만 농부의 이런 생각은 자기기만적 의식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땅에 논을 만들면서 녹지를 파괴하는 행위, 논에 찬 물을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는 행위, 벼의 품종을 개량하는 행위, 그리고 잡초를 제거하는 행위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폭력이자 약탈입니다. 물론 농부는 자연의 무서움에 대해서도 경험적으로 압니다. 자신의 여러 행위에 영향을 받은 자연이 어떤 식으로든 그에 대한 무서운 복수를 하리라는 것을 잘 알지요. 더구나 자연의 위력 앞에 농부의 힘이란 마치 한 줄기 갈대처럼 연약할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농부의 의식 속에서는 자신의 행우가 자연에 대한 엄연한 폭력임에도 자연에게 바치는 자신의 정성스러운 공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싹틉니다. 이런 이유로 부리디외가 강조했던 다음의 격언이 탄생한 것입니다.
"땅에게 (너의 땀을) 주어라, 그것이 너에게 주리라"
흥미로운 점은 전자본주의 사회, 즉 농경사회의 인간이 자연에 대한 자신의 폭력과 그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는 자연의 보복을 '증여;의 논리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농경사횡에서는 농부의 노동을 자연에 바친 공물로 간주한다면, 농부의 수확인 자연은 농부가 바친 공물의 대가로 내려준 대응적 선물로 이해됩니다.
어느 곳에 갔을 때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비투스가 그곳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했다면, 이것은 새로운 환경이 자신의 아비투스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환원할 수 없는 외부, 혹은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6장.
칸트의 생각에 따르면 감각적으로 쾌적함의 느낌을 주는지, 아니면 윤리적으로 선하다는 생각을 낳게 하는지 등의 여부에 따라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아름다움은 그의 말대로 '일체의 관심을 떠나 만족과 불만족에 의해 판단하는 능력', 즉 '취향'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일체의 관심을 떠나서 어떤 것을 보고 만족감이 생긴다면 그것은 아름답다고 볼 수 있겠지요. 반대로 불만족스럽다면, 그것은 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실직을 비관해 투신자살한 어느 젊은 아가씨의 시신 주변에 진홍빛 꽃처럼 보이는 피의 형상은 쾌적한 느낌도 선한 느낌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무서움 그리고 젊은 아가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본주의적 비윤리성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겠지요. 그런데 칸트는 이런 감각적 불쾌감이나 윤리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핏빛 정경 그 자체가 아름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무관심하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을 때 만족감이 찾아왔다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 미학의 무자비성 혹은 냉담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 부르디외에 따르면 칸트가 말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부르주아 계층뿐입니다. 왜냐하면 무관심하게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는 이미 상당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 학습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부리디외는 칸트의 순수 미학이 아닌 현재 대중 미학을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없어 미적 학습을 받지 못한 대중들도 미적 판단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중에게 아름다움은 감각적 쾌적함이나 윤리적 메시지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칸트와는 달리 핏빛 사진을 보고 감각적 불편함을 느끼거나 아니면 도시의 자본주의 생활에 숨은 비정함을 함께 읽어내려 합니다.
물론 부르디외는 대중 미학만이 진정한 미학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정서적이고 관념적인 의미가 있어야 아름다움이 가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는 아름다움이란 물질적 조건을 다르게 갖고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상류 부르주아 계급처럼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드이 아름다움을 '자신 이외의 지시 대상은 갖고 있지 않은 이미지'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면, 노동자 계급은 '모든 미적 이미지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에 따라 '취향'이 달라짐을 보여줍니다. 부르디외는 미학 논의를 통해 칸트의 미학이 결코 보편적이거나 유일한 미적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한 것입니다.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 도중에 갑자기 상대방 핸드폰에서 트로트 음악 소리가 요란하게 울립니다. 그가 전화 통화를 마치자마자 우리 주인공은 선약을 잊고 있었다는 듯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를 나옵니다. 어떻게 세잔을 아는 사람이 트로트를 좋아할 수 있는지 우리 주인공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리스트나 파가니니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벨소리 정도는 울려야 한다고 생각했겠지요. 부르디외가 말했듯이 우리 주인공은 트로트를 좋아하는 그 사람의 취향에 대해 불쾌감을 느낍니다. 전시회장에서 서둘러 나오면서 주인공은 자신이 트로트를 좋아하던 그 사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합니다. 브리디외가 '특수한 생활조건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미적 성향은 동일한 생활조건을 공유한 모든 사람을 함께 묶어주는 반면,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시켜준다'고 말했던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부르디외에게 미적 취향 혹은 미적 성향은 '구조화된 구조이면서 동시에 구조화 하는 구조'입니다.
7장.
흔히 우리는 자유와 부자유의 느낌을 자신만의 고유한 느낌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신이 산업자본에 길들어 그런 자유 혹은 부자유의 느낌을 가진다는 사실을 또한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망각은 더 심각한 다른 종류의 망각을 낳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소비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노동자라는 사실입니다. 산업자본주의가 전체 사회를 마치 소비사회인 양 의도적으로 설정하는 진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기형적 인간형이 탄생합니다. 의대 졸업생, 경영대 졸업생, 공대 졸업생, 법대 졸업생 등은 자신의 전공분야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이것을 선택과 집중이라는 미명하에 정당화하는 것이 요즘 추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전문직에 종사하여 충분한 임금이 보장될 때까지는 별다른 걱정이 없습니다. 자신이 받은 임금으로 필요한 노동이나 상품들을 구입하면 될 뿐입니다. ... 그렇지만 만약 자신이 일하던 전문분야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되어 임금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유사 업종의 경기가 좋지 않아 자신의 전문 지식을 무기로 재입사할 곳이 별로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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