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헤르만 헤세] 동방순례

일루젼 2012. 8. 1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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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순례 - 8점
헤르만 헤세 지음, 이인웅 옮김/민음사

137쪽 | 223*152mm (A5신) | ISBN(13) : 9788937423390

2000-07-08

 

 

내가 읽은 헤세의 저서는 그리 많지 않다.

올해 들어서야 겨우 서넛 정도 될까, 이전에 읽은 작품들을 더해도 불과 대여섯을 넘기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이런 것이 헤세의 글이다'라는 인식이 잡혀가는 것을 보면 글이 남기는 이미지라는 것은 정말 강렬한 듯 하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미지는 단지 문체에 한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헤세의 글에는 항시 방랑과 자유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고, 인물에게는 전일화에 대한 욕구가 뚜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겁고 견고하기보다는 동화 같고 환상 같은 일렁임과 경쾌함이 존재하는 글이다.

 

그의 인물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작품 내에서 마주하게 되는 좌절이나 시련을 우연한 깨달음이나 계기를 통해 극복해낸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그르지 않았음을, 혹은 그 시련이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확인받는 장면이 표면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글 안에 나타난다는 말인데-, 나는 헤세가 자신의 삶이 그런 식으로 절대적으로 긍정받기를 강하게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런 구도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특징을 꼽자면, 그것은 아마 극도의 회피주의가 아닐까 한다.

헤세의 글에서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경미한 조롱기 섞인 시선까지도 느낄 수 있는데, 애초에 완전함에 가깝게 태어난 존재들 -나르치스나 막스 데미안처럼- 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것에 구애받는 것은 구속이요 진정한 본성의 훼손이라고 말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크눌프의 경우 특히 그렇다)

 

 

이런 닮은 점들은 동방순례에도 그대로 존재하지만.

이 글은 묘한 낯설음을 주는 글이기도 했다.

 

헤세의 이전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들 (클링조어나 골드문트), 그의 지인들이나 그들을 상징화한 인물들, 또한 헤세의 본가나 집을 모티브로 한 환상적인 장소들이 등장해 현실과 환상이 혼재된 초반의 글은 헤세라기 보다 보다 유순하고 기분이 아주 좋은 보르헤스를 떠오르게 한다.

 

 

동방순례는 프리메이슨이나 성당 기사단 같은 비밀스럽고 신비적인 모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에 속해 있었던 HH는 교묘하게 서술되지만 실제로는 주된 화자이기도 하며 동시에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전까지의 그의 글이 헤세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다소 몽환적이 되었다면 '동방견문' 같은 경우는 헤세가 직접, 의도적으로 그렇게 쓰고자 한 것이 느껴진다는 점이 차이점이라 하겠다.

 

(또한 동방에 관심이 있었다는 헤세는 이태백과 노자 등을 직.간접적으로 등장시키는데 반갑기도 하지만 미묘하게, 낯 간지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건 정말 개인적인 느낌이다)

 

아름다웠던 '비밀스런 순례'에 대해 글을 쓰려하는 그의 회상을 따라 '순례'를 엿보여준 헤세는 그 순례에서 풀리지 않은 비밀의 열쇠, '레오'와 주인공을 재회시킨다. 그로부터 다시 순환하되는 단죄와 반성, 그리고 받아들여짐(사해짐)의 고리를 통해 글은 맺어진다.

 

 

본디 나는 한 작가의 글을 비슷한 시기에 몰아 읽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읽게 되면 그 한 저자에 대해서는 보다 깊이 이해할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전작의 이미지를 잊어갈 때쯤 다른 작품을 통해 다시 마주하는 것을 더 선호한 탓이다. 즉, 한 작가의 글 안에서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꼽아 그가 낳은 형제들을 줄세워 보기 보다는 각기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세워보기를 더 좋아했던 것이다.

 

내가 다른 작가의 글을 읽고 다른 생각을 하며 변화한 동안, 내가 이전에 읽은 글의 저자도 그런 시간적인 간극을 거쳐 또 다른 작품을 썼다고 생각하면 묘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서들을 발표 순서대로 읽지는 않는다) 

같은 이들이 다른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마주하는 그런 기분.

 

그러나 이번 만큼은, 의도적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니나 헤세의 글들은 1-2 주를 간격으로 죽 이어 읽게 되었는데.

헤세에 한해서 말하자면.

한 작가의 저서를 몰아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읽게 되면 그의 글 자체보다는 작가에게 더 가까이 서게 되는 느낌이 든다. (헤세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여러 모로 신선함을 남겨준 헤세.

찬양.

 

아직 남은 작품들은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도록. ㅋ

 

 

 

 

 

 

[발췌]

 

 

# 멀리 여행하는 자는 종종 사물들을 보게 되나니,

그가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고향의 초원으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고 웃음거리나 되기 십상이다.

꽉 막혀버린 사람들이란, 제 눈으로 보고

스스로 분명하다 느끼지 못하면 믿으려 하지 않으니까.

나 생각하건대, 세상 경험이 없는 자들,

내 노래를 결코 믿지 않으리라. 

 

-아리오스토의 서사시 [광란의 로를란도]중 제 7의 노래

 

 

# [그는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라고 대변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고, 우리도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언젠가 통솔자들 중의 한 사람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을 때, 나는 용기를 내어 이 변절한 동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가를 물어보았다. 나는 그가 어쨌든 후회를 하고 있고 우리를 찾고 있으니, 자신의 잘못을 보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며, 그러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장차 가장 충실한 결맹의 동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통솔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우리들로서도 기쁜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 그 일을 쉽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는 믿음을 다시 찾는 일을 스스로 어렵게 만들었어요.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의 옆으로 지나간다 할지라도 그는 우리를 보지도 못하고, 알아채지도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눈이 멀어버렸어요. 후회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

 

 

# 눈에 잘 띄지 않는 이 사나이는 어딘지 사람을 끄는 데가 있고, 쉽사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어서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는 즐겁게 일했다. 대개는 혼자 노래르 ㄹ부르거나 휘파람을 불었으며, 필요할 때 외에는 눈에 띄지도 않는 이상적인 하인이었다.

 

 

# 우리 결맹에는 개인적인 가치관과 결맹에 충실한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할지라도, 어딘지 정도가 지나치고 좀 잘난 체하는, 공상적인 면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하인 레오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웠으며, 붉은 뺨을 가진 건강하고 다정하며 겸허한 사람이었다.

 

 

# 우리에게 동방은 그냥 어떤 나라, 그냥 어떤 지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고향이자 청춘이었고, 어디에나 잇으면서도 아무데도 없는,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되어버린 그런 곳이었다.

 

 

#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엇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곧잘 꿈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내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왜냐하면 나의 행복은 실제로 꿈을 꾸며서 느끼는 행복과 똑같은 신비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상상할 수 잇는 모든 것을 동시에 경험하고, 내면과 외면을 유희하듯 손쉽게 뒤바꾸며, 시간과 공간을 무대의 세트들처럼 밀어 옮길 수 있도록 자유로이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 예술가들 모두가, 혹은 그중 몇몇이 아주 발랄하고 사랑받을 만한 인물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 의해 창조된 인물들이 예외없이 창조자인 그들 자신보다 훨씬 더 생기 있고 아름답고 쾌활했으며, 얼마간은 더 정상적이고 현실적이었다. 파블로는 천진난만하게 황홀해하며 삶의 기쁨 속에서 피리를 불며 앉아 있었지만, 그를 낳은 시인은 달빛에 반쯤 젖은 채 그림자처럼 슬그머니 강기슭으로 내려가 고독을 찾고 있었다.

 

 

# [그것은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를 낳고, 아기에게 자신의 젖과 아름다움과 힘을 다 주고나면, 어머니들 자신은 눈에 띄지 않게 되지요. 그리고 아무도 그들에 대해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는답니다.]

 

 

# [그들은 그 법칙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지배하도록 타고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배하면서도 쾌활하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즉 야심만으로 지배자가 된 사람들은 모두 무에서 끝나게 됩니다.]

 

 

# 게다가 더욱 이상하고도 불길한 일은 이런 것이었다. 나중에 발견되고 안 되고에 상관없이 분실된 물건들은 그 중요성에 따라 순위가 매겨졌다. 그리고 분실되었다고 생각했던 것들 중에서 그것이 없어졌다고 지나치게 애석해하며 그 가치를 과대평가했던 물건은 매일 쓰는 물건들 사이에서 하나씩 하나씩 다시 나타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언가 매우 비밀스럽고도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여기서 솔직히 털어놓자면, 부끄러운 얘기지만 분실되었던 도구들과 귀중품들, 지도와 서류들 등은 없어도 별 지장이 없다는 사실이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에 분명해졌다. 그 당시 우리 모두는 온잦 상상력을 동원하여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손실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애써 한탄하며 울고불고 했던 것 같았다.

 

 

# 그런데 이 가장 소중한 것을, 최소한 그 중 한 부분만이라도 기록하여 붙잡아두고자 하는 지금, 모든 것이 그저 그 무엇엔가 반사되어 있는 수많은 그림들 덩어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다. 그런데 이때의 그 무엇이란 바로 나 자신의 자아로, 이 자아라는 거울은 내가 그것에 물어보려고만 하면 언제나 하나의 무로, 유리의 맨 바깥 표면같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 이러한 회의는 내 마음속에 <너의 이야기가 도대체 이야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가 도대체 체험 가능한 것이었던가?>라는 의문도 제기한다. 그러나 믿을 만한 이야기를 하기에 부족할 것이 없는,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병사들까지도 실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면서, 때때로 이런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선례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 [... 그러나 생각해 보게. 나는 그런 책이 열 권이나 더 쓰여지고, 그 한 권 한 권이 내 책보다 열 배는 더 훌륭하고 감동적이라 할지라도, 독자가 전쟁을 스스로 체험하지 못했다면, 호의적인 독자에게조차 전쟁에 관한 어떤 모습을 상상토록 해줄 수는 없다고 믿네. 그리고 전쟁을 체험한 사람이란 그리 많지가 않아. <종군을 했던> 사람이라 해도 그들 모두가 전쟁을 체험했다고 할 수는 없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실제로 체험했다고 할지라도ㅡ 그다음에는 곧 다시 잊어버리게 마련이네. 아마도 체험에 대한 욕망을 제외하면 인간에겐 망각에 대한 욕구만큼 강한 욕망도 없을걸세.] 

 

 

# [나로선 책을 쓰든지, 아니면 절망하든지 할 수밖에 없었지. 책을 쓴다는 것은 내가 허무와 혼란, 자살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었지. 그런 절박함 속에서 그 책은 쓰여졌다네. 그리고 잘 되고 못 되고를 떠나서 어쨌든 그 책이 쓰여졌기 때문에, 내가 기대했던 대로 구원을 가져다주었지. 그것 하나만이 중요했어. ...]

 

 

# 그 남자는 내 곁을 가까이 지나갔다. 풀어헤친 푸른 셔츠 위로 목이 드러나 있었고, 유연하고도 경쾌한 머리에는 모자도 쓰지 않은 채였다. 아름답고 즐거운 모습으로 그는 저녁의 골목길을 사뿐히 걸어 내려갔다. .... 걸음걸이가 가볍고 경쾌하며 젊은이답기는 했지만, 그는 저녁 빛을 띠고 있었다. 그에게는 황혼과 같은 울림이 있었다. 그의 모습은 바로 그 황혼의 시간, 거리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나약해진 소리드과, 이제 막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첫번째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과 다정하게 어울리며 하나로 융화되고 있었다.

 

 

# [.... 그러나 인생이 그저 하나의 유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윗도 내게 증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인생이 아름답고 행복하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하나의 유희와 같은 것이지요! 물론 인생을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하나의 의무나 전쟁, 혹은 감옥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인생이 더 아름다워지지는 않을 겁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만나서 기뻤습니다.]

 

 

#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원고를 다시 읽어가면서 나는 문장들을 하나하나 지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지워가느 사이에 문장들은 원고지 위에서 조금씩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분명하고 뾰족뾰족한 문자들은 서로 유희하듯 조각나서, 선과 점, 동그라미와 조그만 꽃, 작은 별들의 형상으로 흩어져 내렸다. 그래서 원고지들은 도배지처럼 온통 우아하기는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장식 무늬들로 뒤덮여버렸다.

 

 

# 나는 지금 이 시간 앞으로 더 경험하게 될 모든 것들을 생각하다가 문득 두려워졌다. 우리 마음의 거울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비뚤어지고 달라지고 일그러져 버렸던가! 진실은 얼마나 비웃으며 도달할 수 없다는 듯이 이 모든 보고와 반증과 꾸며낸 이야기들 뒤에서 그 정체를 감추고 있엇던가! 그렇다면 진실이란 대체 무엇이며, 아직도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촛불은 다 타서 꺼져버렸다. 나는 피로와 졸음이 한없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디 누워서 잠잘 수 있는 곳을 찾아가려고 나는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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