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 반양장본 | 191쪽 | 225*132mm | ISBN(13) : 9788937461033 2004-05-15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이 한 권으로 그는 나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작가로 새겨졌다.
실제 그의 삶과 상당 부분 궤를 같이 하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도,
혹은 피상적 인간 관계를 견뎌낼 수 없었던 한 인간이 파국으로 치닫는 소설이라는 말도,
나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인간의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걸린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아.
어떻게든 이종들 사이에서 그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던 요조.
그는 나였다.
여전히 한 걸음은 선 밖에 두고 '인간'을 관찰하게 되는 서늘한 도깨비인 나는 마치 요조가 처음 다케카즈에게 들켰던 순간처럼
창백하게 질려 전율하며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몰래 수첩에 탈을 적어놓는, 어떻게든 들키지 않기 위해 익살을 떨어보는-그러면서도 언제 들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그 극렬한 감정의 폭발들 앞에서 얼어붙어 '이런 것이 인간의 특성인가' 생각해보는,
요조는 나였다.
누군가가 좋아해주면 고맙지만 그만큼 두렵다.
사실 내 안에 숨어있는 도깨비를 보여준다면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달아날 것이란 걸, 사실은, 알기 때문이다.
좋다고 해주는 것은 거짓되고 꾸며진 나의 외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몇 번이고 되풀이해 써온 가면과 연기는 이제는 살가죽에 들러붙어 어느덧 떼어낼 수도 없는 내 거죽이 되어버렸다.
사실은, 요조가 잃어버린 최초의 진실한 자화상, 그 '도깨비 그림'처럼 내 도깨비는 너무 깊은 곳으로 몰려나 다시는 드러나기조차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숨기려 애쓰는 것이다.
또한 누구도 진정한 나를 보아주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실격'.
그렇다. 나는 결국 실격자일 뿐이었다.
그러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요조와 같은 것일 뿐인가.
그것은, 두려운 것이다.
- 이상의 글은 이 책에 대해서, 이 공간에서만큼은 이렇게만 남겨두고 싶다. '너는 왜 모든 감정을 느끼지 않고 꾸며?'라는 질문을 들었던 나에게 바치는 짧은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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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애초 다른 글에서 이 글에 대한 내용을 언뜻 접하기를 '피상적인 인간 관계에 지쳐 스스로의 인간성에 대해 고뇌하던 한 남자의 파멸'로 알고 읽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첫 장에서 시작된 석 장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경악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것은 나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는 자전적인 소설을 써내는 작가들에 대해 무한에 가까운 존경심을 가진다.
자신의 내밀한 속을 드러낸 글을 발표한다는 것은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 이상의 수치와 두려움을 안겨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대범함을 갖추지 못한 '인간 실격'자이기에, 나의 느낀 바를 모두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
그러나 그렇기에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이 책에 대해 의식적으로 거리를 유지한 채로 글을 써야한다는 것 역시 아픈 일이다.
해서 나는 지금 가시넝쿨를 토해내는 심정으로 글줄을 채워내고 있다.
요조.
요조여.
그를 이해할 수 없을, 인간임이 당연한 '인간'들에게 '인간 실격'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그것의 격렬함을 담아내고 표출할 수 있는, 매 순간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들에게 요조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그것을 상상하는 일조차, '요조'와 동류인 나는 두려움으로 숨이 막혀온다. 결국 그것은 나에 대한 화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 아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 뿐이다.
'요조'는 상징성을 띤 하나의 캐릭터가 아니며, 그의 내면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가면 속에 숨어 두려움으로 가득한 생을 연명해나가는 '오니'들은 틀림없이 존재하며, 그들은 무해하나 동시에 그렇기에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인간 실격'자들이라는 것.
부디 이 글을 읽어 그들을 조금쯤 가련하게 생각해주었으면 한다는 것.
며칠을 기다렸으나 도저히 이 이상으로 어떤 감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모든 것이 두려웁다.
[발췌]
# 두 번째 사진 속의 얼굴. 이건 또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다. 교복 차림이다. 고교 시절 사진인지 대학 시절 사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대단한 미남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이상하게도 사람이란느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교복 왼쪽 가슴에 있는 주머니에는 하얀 손수건을 꽂고 등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웃고 있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음이 아니라 능수능란한 미소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웃음이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걸린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잇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것멋이 잔뜩 들었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경박하다고 하기도 그렇다. 교태를 부리고 있다고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멋쟁이라고 하는 것도 물론 부적합하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여자 같은 미모를 가진 이 학생한테서도 역시 어딘지 악몽 비슷한 섬뜩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이상한 미남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 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지금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신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나한테는 재난 덩어리가 열 개 있는데, 그중 한 개라도 이웃 사람이 짊어지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치명타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일도 있습니다.
즉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그러나 그 괴로움이야말로 제일 지독한 고통이며, 제가 지니고 있는 열 개의 재난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처참한 아비지옥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도 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다. 괴롭지 않은 게 아닐까?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낀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편하겠지. 하긴 인간이란 전부 다 그런거고 또 그러면 만점인 게 아닐가. 모르겠다....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얼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 그야 누구든 남이 비난을 퍼붓거나 화를 낼 때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 저는 그 사자 탈이 전혀 갖고 싶지 않았습니다. 숫제 책이 나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가 그 사자 탈을 저한테 사주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써 아버지 기분을 좋게 해드리고 싶은 일념에 한밤중에 감히 손님방에 몰래 숨어드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 그러나 이런 것은 정말이지 하찮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으니까요.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의 삶과 대립되어 밤이면 밤마다 지옥 같은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즉 제가 머습과 하녀들의 그 가증스러운 범죄조차 아무한테도 호소하지 않았던 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도 아니고, 또 물론 기독교적 박애주의 때문도 아니고, 인간이 저 요조에게 신용이라는 껍질을 단단히 닫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조차도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면을 가끔 보이셨으니까요.
# 그렇지만 저는 다케이치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그림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엇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을 다케이치한테서 전수받은 저는 예의 여자 손님들 몰래 조금씩 자화상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눌러서 감추고 감추었던 내 정체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하고 혼자 인정했지만 그 그름인 다케이치 외에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제 익살 밑바닥에 있는 음산함을 간파당하여 하루아침에 경계당하게 되는 것도 싫었고, 또 어쩌면 이것이 내 정체인 줄 모르고 또다른 취향의 익살로 간주되어 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제일 가슴 아픈 일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그림은 바로 이불장 깊숙이 집어넣어 두었습니다.
# 그저 흥이 깨지면서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이 질식할 만큼 끔찍 해서, 나중에 저한테 불이익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의 '필사적인 서비스', 그것이 비록 잘못되고 시원찮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서비스 정신에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 덧붙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습성 또한 세상의 소위 '정직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저야말로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저에게 냉철한 의지를 주소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주소서. 사람이 사람을 밀쳐내도 죄가 되지 않는 건가요. 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 그리하여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 된다.
즉 거칠고 큰 기쁨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큰 슬픔 또한 찾아오지 않는다.
앞길을 막는 방해꾼 돌을
두꺼비는 돌아서 지나간다.
- Guy Charles Cros.
# 이것은 제가 발명한 놀이로, 명사에는 모두 남성 명사, 여성 명사, 중성 명사 등의 구별이 있는데 그렇다면 희극 명사, 비극 명사의 구별도 있어야 마땅하다. 예컨대 증기선과 기차는 둘 다 비극 명사고 전철과 버스는 둘 다 희극 명사다. 왜 그런지를 이해 못하는 자는 예술을 논할 자격이 없다.
#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해설 발췌]
# 기독교가 지배 논리가 되기 전의 서구 사회뿐 아니라 인류사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숭고한 자살에 대한 용인 내지는 존경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어왔다. 세네카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한 카토(Marcus P. Cato Uticensis)의 '의지적 죽음', 즉 자살은 '자기 목숨으로 자유의 가치를 조명해 낸' 정의로운 죽음으로 평가되었다. 자살이 기독교에 의해 비난의 대상으로 규정되기 200년 전의 얘기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책임하에 완결 짓는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성숙한 인간의 자주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자살은 용인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죽음의 미학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 ...... 다자이는 혜택받은 자로서 못 가진 자에 대한 죄의식 내지는 부채의식을 평생 업고처럼 짊어졌던 작가다.
# 이런 그의 존재는 에토 준의 "(개인적인 일로) 나는 멸망하고 싶다고 기원했다. 이미 옛 가치가 전도된 이상 거기 소속된 나는 멸망해야만 했다. 그것은 아마도 동시에 '혁명' 가운데 재생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멸망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파멸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데 이런 시대에 부딪힌 젊은이의 성실이 있다고 믿었다.([다자이 오사무], 1963)" 와 같은 공감으로 이어지며 가라타니 고진으로 하여금 "정신적 어두움이 상실된 1970년대에" 사카구치 안고 등 자기 존재의 모든 것을 걸고 실존에 부딪혀간 작가 중의 하나로 다자이를 기리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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