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일루젼 2012. 6. 2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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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합본) - 10점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민음사

494쪽 | 225*132mm | ISBN(13) : 9788937460661

2002-07-30 | 원제 Narziß und Goldmund (1930년)

 

 

읽기는 분권으로 읽었으나, 현재는 절판 상태라 책 소개는 합본으로. (역자와 출판사는 동일하다)

간략히 말하자면, 나는 정말 좋았다.

'데미안'만 해도 (물론 다시 읽을 생각이지만) 약간은 알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는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실로 만족스러웠다.

헤세 자신이 "영혼의 자서전"이라 일컬었다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다가오는 울림이 달랐다.

헤세의 개인사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그 안의 또다른 자신이나 절친했던 친구와 자아에 관한 성찰을 자주 했던 듯 하다. (소년들의 성장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것 같이 느껴진다.)

 

 

일찍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파악하고 그 자신이 가야할 길을 선택했던 나르치스.

그리고 서로 강한 이끌림을 느꼈으나 자신을 동경하려 하지 말고 진정한 너 자신을 찾으라는 말로 돌려세워졌던 골드문트.

 

흔히 이성과 감성을 대표적으로 드러낸 캐릭터들이라 하지만 꼭 그렇게만 나눠 볼 일은 아닌 듯 하다.

틀림없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가 있겠지만 결국 인간은 두 모습 모두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 균형의 추가 어디로 더 기울어졌느냐의 차이일 뿐이라 본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최근 나의 고민은, "읽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였다.

비문학의 영역은 저자의 주장과 결론을 이해하였느냐가 그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디에 질문을 품었으며 그리하여 어떤 생각들을 했느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 개인적인 기준을 말하자면, 스토리만이 남았다면 그는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등장인물들의 감정, 생각, 가치관을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해야만 "읽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스토리라는 것은 그들의 욕망과 가치관들의 부딪침에서 나오게 된다.

(간혹 그렇지 않은, 실로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도 있으나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가장 많은 책을 국.초등학교 때 읽었다. (대략적으로는 미취학 때부터)

그러나 아동용으로 읽은 책은 거의 없다.

 

도스도예프스키.

서유기.

세익스피어 전집.

브론테 자매.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레스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움베르토 에코.

크리스티앙 자크.

베르나르 베르베르.

이우혁.

마광수.

 

등등등.

 

모두 그 당시 읽은 책들인데, 아버지 서재에 꽂혔던 2단의 세로줄로 된 전집들을 읽다보니 + 다니던 도서관이 낙후되어 그리 되었다.

(당시만 놓고 말하자면 가로줄보다 세로줄이 익숙했었다. 그때 한자까지 깨쳤어야 했는데.... -_-)

 

그런데 나는 내가 저 책들을 과연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그 텍스트는 모두 읽었으되, 줄거리는 떠오를지언정 그 인물들을 이해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다른 해석이 들어갈 여지 없이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관심이 있는 쪽이 잘 보이게 되어있고, 그 쪽으로 프레임이 맞춰지게 된다는 뜻으로 봤을 때 말이다.

 

8살에 읽은 오셀로에 대해 내가 어떤 내재적인 재해석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의 오욕칠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오해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였을 뿐.

(물론 8세에도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개인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스토리만을 남겼고, 그나마도 지금 읽는다면 또 다른 느낌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내재화된 기억들을 더듬어 또다른 얻음을 얻을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읽지 않았다고 선을 긋고 새로이 읽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이 '추천도서 목록 도전'이라는 일을 벌였다.

 

왜 추천도서냐.

내 사적 취향으로 편향되고 싶지않았기 때문이다.

최대한 보편적으로, 최대한 넓은 풀을 만들고 싶었다.

 

읽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선호가 갈린다. 그러나 적어도 통칭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에 대해서만큼은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고 할까, 뭐 그런 저런 것들.

적어도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추천"한다고 꼽은 책들 정도는 한 번 신경 써서 읽어주고 싶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는 것은 참 보기 싫은 행동 중 하나다.

그것은 자신이 예언자나 선구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데, 읽지 않을 생각이라면 입을 대지도 않는 것이 옳다.

 

최근 많은 책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내용을 담아 쏟아져나오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들을 읽지도 않은 채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은 '아는 체'와 같다. 실제로 그 예상이 맞았다 하더라도 그는 선무당이 용케 괘를 맞춘 것이나 진배없다.

 

읽은 다음 호불호가 갈린다면 그건 어찌할 수 없으나, 적어도 안타깝게도 내게는 감흥이 없었다 혹은 나는 그 작품과는 맞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내게는 시간 낭비였던 작품도 누군가에게는 명작일 수 있으며, 그보다 우선적으로 내가 무어라고 타인의 저작을 함부로 평한단 말인가. 내가 만권의 책을 읽은들, 아무리 인정받는 독서가가 된들,  그 작품에 대한 평과 감상은 내 개인적인 선에 남아야 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마치 그것이 기준인 양 당당하게 떠벌릴 것은 못 된다. 그야말로 세상에 다시 없을 오만이다.

 

나의 모든 리뷰는 내 개인적인 것이며, '나는 이러이러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그 작품은 이러이러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뭐 사실 나도 주의하고 있으나 간혹 위험한 발언들을 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타인과의 대화에서 무언가를 쓰레기나 무가치한 것으로  지칭했던 적은 없다.

 

묘한 말이지만 나는 그런 나의 불편함과 불쾌감이 이 책의 결말부에 이르러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좋게 읽었는지도.

 

 

아름다운 글이다.

골드문트가 방랑 동안 스쳐지나는 많은 여인들 역시 그 나름의 매력과 아름다움이 있고, 눈쌀이 찌푸려지기보다는 함께 도취되어가며 읽을 수 있다. (바람둥이들의 전형적인 면모라고는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진심'이다, 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예전의 나라면 나르치스를 훨씬 더 좋아했을 테고, 골드문트를 향해 어쩌면 경원감이나 불편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둘 모두. 때로는 골드문트 쪽에 조금 더 마음이 간다.

 

 

 

[발췌]

 

- "나르치스 군, 고백하건대 나는 자네를 두고 한 가지 가혹한 판단을 해왔다네. 나는 곧잘 자네가 오만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어쩌면 자네한테 잘못한 게 있을지도 몰라. 여보게, 자네는 너무나 고립되어 있고 외로운 존재야. 자네한테는 숭배자는 있을지언정 친구는 없거든."

 

 

-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을 환히 꿰뚫고 있었으며, 서로 대립되는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을 아주 내밀하게 이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골드문트의 본성은 바로 그 자신이 잃어버린 또 다른 반쪽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이 온갖 공상이나 잘못된 교육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과 같이 철판처럼 단단한 껍질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모름지기 우리의 우정에는 네가 얼마나 완벽하게 나와는 다른 존재인가를 너에게 보여주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목표도 의미도 없어.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거야.

 

- 사람의 영혼을 잘 읽어내는 나르치스는 이 친구가 자기 인생의 한 토막을 잃어버린 그런 유형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골드문트는 모종의 궁지에 몰리거나 무엇엔가 홀려서 지나온 삶의 어떤 부분을 망각하기로 작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저 캐묻는다거나 가르치려는 방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자기가 지나치게 이성의 힘을 믿고 쓸데없이 말을 많이 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지만 두 친구를 묶어준 사랑과 둘이서 함께 보내곤 하는 시간들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두 친구는 비록 각자의 본성이 너무나 다르긴 했지만 서로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둘 사이에는 이성적인 말 외에도 점차 서로의 영혼과 미세한 신호로도 이해되는 말이 생겨났다.

 

 

- "물론이지" 나르치스가 말을 이었다.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성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줄 아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거의 예외없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모성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험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그 반면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들은 너 같은 사람들을 곧잘 이끌어가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만된 삶을 전혀 모르고 메마른 삶을 살게 마련이야. 과일의 단물처럼 넘쳐흐르는 삶의 풍요로움, 사랑의 정원과 예술의 땅은 바로 너희들의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네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 그런데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자기 자신의 소망과 혼동해 오지 않았던가. 

 

 

- 골드문트는 그쪽으로 가서 강둑에 앉아 물 속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물을 무척 좋아했고, 어떤 물이든 그의 마음을 끌었다. 이곳에서 수정처럼 반짝이는 결을 이루며 흐르는 수표면 아래로 어두컴컴해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강바닥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여기저기에 희미한 금빛 물체가 보는 사람을 유혹하듯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띄곤 했다. 무엇인지 식별되지 않는 그런 물체는 어쩌면 오래된 도자기 조각이나 날이 휘어 내다 버린 낫, 혹은 밝은 빛이 나는 돌멩이나 유약을 입힌 기와인지도 몰랐다. 또 때로는 아미아라든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베도라치인 경우도 있었다. 간혹 황어가 강바닥에서 몸을 틀어 한순간 배지느러미와 은빛 비늘을 드러내며 한 줄기 빛을 발하는 수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 물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검은 강바닥에 가라앉은 보물이 순간적으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매혹적으로 아름다웠고 유혹적이었다. 골드문트에게는 물 속의 이 작은 신비와 마찬가지로 모든 참된 신비, 진짜 신비는 영혼이 담긴 참된 형상이었다. 그러한 신비는 윤곽도 없고 형태도 없으며, 다만그 어떤 아련하고 아름다운 가능성처럼 그 형태를 예감케 할 뿐이었다.

 

 

- 언제나 세상에 처음 태어난 날의 어린아이처럼, 태초의 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방랑자는 언제나 최소한의 단순한 욕구와 필요에 따라 살아간다. 그는 영리한 사람일수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일 수도 있다. 또 일체의 삶이 얼마나 부서지기 쉽고 덧없는 것인가를, 또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우주 공간 속에서 얼마나 가련하고 불안하게 자신의 얼마 안 되는 따뜻한 피를 순환시키고 있는가를 깊이 체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유치하고 탐욕스럽게 주린 배의 명령에만 따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방랑자는 뭔가를 소유하면서 정착해 있는 사람에 맞서는 적대자이다. 뭔가를 소유하면서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방랑자를 미워하고 경멸하며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존재가 덧없고 일체의 생명이 끊임없이 시들어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가차없이 냉혹한 죽음을 상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순수한 사고의 문제로 공간의 문제에 매달린다는 것이 사실 내가 보기에는 한 남자가 몇 년씩을 바쳐 노력을 들여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공간>이라는 말도 나로서는 이를테면 우주 공간과 같은 실제 공간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고 사고할 가치도 없는 것일세. 우주 공간을 관찰하고 측량하는 것이 물론 보람 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나르치스가 빙그레 웃으며 끼어들었다.

"자네가 말하려는 것은 사고 자체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사고를 눈에 보이는 실제 세계에 적용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겠지. 자네한테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네. 우리의 사고를 적용할 기화나 그럴 용기가 우리한테도 없지는 않아. 가령 나르치스라는 사상가만 해도 사고의 결과를 골드문트라는 친구한테 적용하기도 하고 모든 수도사들한테도 수없이 적용해 왔네. 거의 늘상 그렇게 하고 있는 셈이지. 그런데 미리 익히고 단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뭔가를 <적용>할 수 있겠나. 예술가 역시 시각과 상상력을 늘상 단련하게 마련일세. 그러면 우리 같은 학자는 예술가의 단련 과장을 인식하는 것이지. 물론 그러한 단련의 결과가 실제 예술 작품으로 충분히 드러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 말이야. <적용>은 인정하면서 사고 자체를 배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모순은 명백해."

 

 

- 나르치스가 한번은 걱정하는 어조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골드문트, 나는 자네한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네. 예술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네. 예전에는 예술이 사상이나 학문에 비해 진지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러니까 인간이란 존재는 정신과 물질의 미심쩍은 혼합물이고 정신은 인간에게 영원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지만, 물질은 인간을 끌어내려 덧없는 것에 속박시키므로 자신의 삶을 숭고하게 하고 의미 있게 만들려면 감각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나는 그저 의례적으로 예술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실은 교만하게도 예술을 얕잡아보았었네. 그런데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제서야 알 것 같네. 또 정신의 길이 유일한 길은 아니며 어쩌면 최상의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물론 내가 가야 할 길은 정신의 길이지. 나는 이 길을 계속 고수할 생각이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네는 나와는 상반되는 길을 통해, 그러니까 감각의 길을 통해 웬만한 사상가 못지않게 존재의 비밀을 깊이 파악하고 있네. 아니, 오히려 더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어."

 

 

- 그래, 어쩌면 골드문트와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 그저 유치하다거나 인간의 한계라고는 할 수 없는지도 몰랐다. 세상에 등을 돌리고 손을 씻은 채 정결한 삶을 살면서 조화가 넘치는 아름다운 사상의 정원을 꾸며놓고 잘 가꾸어진 화단 사이로 죄를 모르고 거니는 것보다는 어쩌면 세상의 끔찍스런 흐름과 혼돈에 자신을 내맡긴 채 그러다가 죄를 짓기도 하고 죄의 쓰라린 결과를 감수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더 당당하고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 "하지만 나는 다르다네. 내가 살아온 인생에는 사랑이 빈곤하고, 나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랑일세. 언젠가 다니엘 수도원장님께서 내가 오만해 보인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 그 분 말씀이 맞겠지. 물론 내가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지는 않아. 사람들한테 공정하고 인내심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하지만 사람들을 사랑한 적은 없어. 수도원에 선생님이 두 분 계시면 나는 학식이 더 높은 분이 좋았지. 가령 약점이 있는 선생님을 바로 그 약점에도 불구하고 좋아하지는 않았어. 그런데도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자네 덕분일세. 자네만은 사랑할 수 잇엇으니까. 사람들 가운데 오직 자네만을 말일세. 이게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네는 어림도 못할걸세. 그건 사막에서 솟구치는 샘물이요,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와 같은 걸세. 나의 마음이 황폐하게 메마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닿을 수 있는 자리 하나가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자네 덕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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