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 반양장본 | 688쪽 | 200*140mm | ISBN(13) : 9788960174191 2012-06-18 |
다 읽고 잠시 멍했다.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첫번째로 가장 감탄하는 점은, 다양한 부분의 융합.
지금까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더라도 한 두 분야에 대해 열심히 파서 만들어낸 미스테리나 트릭 소설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다양한 부분이 잘 믹스된 글은 거의 못 봤다.
군사 부분에 더해 세계 정황과 역사, 생물학, 심리까지도.
네안데르탈 인에 대한 부분도 실제 그런 견해가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단순 생존 경쟁에서 밀렸다고 보는 의견이 대세.)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은 약학 관련 분야를 아주 생생하게 재현했다는 점!!
많은 감수인이 있기도 했지만, 대학원생의 생활과 합성, 정제 분리 등등에 대해서 읽으며 이런 저런 생각도 많이 났고
일본도 한국과 거의 유사하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교수가 그렇게 상냥하고 친절한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_-)
(물론 신약 개발이 저렇게 슝슝 되진 않는다. 이런 저런 애로사항도 훨씬 많고. 돈과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는데다 인체 투여를 위해서는 단계가 어마어마하고... 가장 문제는 기존 신약 특허를 가진 나라들에서 약효를 가진 물질에 염기나 측쇄를 단, 즉 다른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물질까지도 다 특허를 걸어놨다는 점. 특허는 다양해서 약효물질 뿐 아니라 그 물질의 제약화나 합성법에도 걸 수 있다. 유기제약에서의 독점 체제가 굳어질 수 밖에 없고, 후발 주자의 입지가 좁아지는 한 이유. 다른 이유는 웬만한 건 이미 거의 테스트해봤다는 것도... 초고분자나 유전자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게 추세)
다시 돌아가면, 한 번 자료에 대한 믿음이 생기자 몰입도가 달라졌다.
둘째는 중간 중간 나타나는 번뜩이는 견해와 충돌들.
아마존은 아닐 것이다, 라거나.
이미 한 명이 대표하기에는 너무 커졌다, 라거나.
기실 기프트는 어쩌면 근친의 약점을 대비한 것일지도 모른다거나. (이건 설정이지만)
게임이론에 등장하는 죄수의 딜레마와 신학의 대치.
번뜩이는 통찰들이 꽤 있었다.
이 모든 걸 한 편에서, 그것도 장르 소설에서 보게 될 줄이야.
믹과 예거의 경우 역시 단죄로만 남기지 않은 여운도 좋았다. 또한 용병이었던 그의 근접 발포에 대한 반응은 이채로웠다.
이 작가는 일본인이 맞는가?
아마 어느 정도는 고의적인 것 같지만, 전반적으로 일본인에 대해 객관적인-조금은 적대적이기까지 한- 어조를 구사하는데.
그에 불편함을 느낀다면-혹은 호의를 느낀다면- 이미 그것 역시 종족을 가르는 '현생 인류'임을 꼬집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셋째는 복선.
일본에서의 조력자가 언급이 될 때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그 일본 조력자를 믿고 탈출하면 된다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 때까지만 해도 에마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거기서는 정말 오싹했다.
(문제는 내가 아직 일본에 파견되었던 '사이언티스트'가 누구인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요즘에는 수많은 스토리와 반전이 등장해서 대부분은 예측을 하게 되는데,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그날 밤의 거짓말과 미나토 카나에의 고백, 그리고 제노사이드에는 통수를 맞았다. 기분 좋다.
해서 혼자 주절주절 거려봤는데,
결론은 충분히 좋았다. 결코 시간이 아깝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간략히 스포로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일본의 평범한 약학대학원생인 고가 겐토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본가로 내려온다. 별다른 정이 있던 사이는 아닌지라 장례를 치르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로부터 발송된 이메일을 보고 당황한다. 그 메일 속에는 상당히 비밀스러운 내용이 들어 있는데..... 10인치 검은 노트북과 '기프트'의 비밀은? 한국인 이정훈의 도움으로 그는 결국.....!!
한편 미국 국적의 용병 조너선 예거는 아들의 병이 날로 심각해진다는 소식에 우울하다. 당장 아들의 곁으로 가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아들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러던 차에 상관으로부터 하달된 의심스러울 만큼 많은 보수를 주는 파견 제의. 남아프리카 콩고로 가게 되는 네 용병의 진짜 의무는.....?
진화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인가? 인간을 초월한 지성을 가진 신인류와 조우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현생인류만이 같은 종을 제노사이드(한 종을 멸종시키는 것, 혹은 그에 준하는 대학살)시킨다. 이는 이미 우리의 원죄이기도 하다."
[발췌]
# "제노사이드(특정 집단을 말살할 목적으로 대량 학살하는 행위ㅡ옮긴이)다. 현재 콩고에서는 '제1차 아프리카 대전'이라 불리는 전쟁이 진행중이다. 사망자 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많은 400만 명에 이르지. 정전 협정이 여러 차례 무너졌고 지금도 전투가 끝날 기미는 없다."
네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어렴풋한 의심을 읽었는지 싱글턴이 말을 이었다.
"이것은 실제 이야기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은 보도하지 않는데, 말하자면 보도 차별이다. 선진국 보도 기관은 아프리카에서 사람이 몇 사람 죽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현지에서 빈발하는 대학살보다 고릴라 일곱 마리 죽은 사건이 더 크게 보도되는 형편이다. 뭐, 확실히 아프리카인은 멸종 위기종이 아니니까."
# "이건 스폰서가 붙은 전쟁이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전쟁의 진짜 목적이 나타났다. 콩고에 잠든 대량의 지하자원. 다이아몬드, 금, 컴퓨터에 쓰이는 희귀 금속, 그리고 유전. 콩고로 침공한 놈들은 지배 지역의 광물 자원을 붙들고 있기 위해 피투성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고, 유럽과 아시아에서 100여 개나 되는 기업들이 한몫 잡으려 여기에 끼어들었다. 광산 회사 같은 곳은 자원을 약탈하는 쪽에 전쟁 비용을 원조하고 콩고물을 받아먹고 있다. 르완다가 자국 산출량을 상회하는 광물을 유출하는데도 선진국은 그것이 약탈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사들인다. 휴대전화에 쓰이는 콜탄을 얻기 위해 수십만 명의 콩고인이 살해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미국이나 러시아 두 대국은 겉으로는 콩고 정부를 지지하면서 르완다나 우간다에도 자금을 원조하고 있다. 그게 누가 승리하더라도 지하자원의 권익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니까. 자금 흐름까지 포함하면 큰 나라들 대부분이 참여한 세계 대전이 된 셈이다."
# 기차에 타서 마치다로 향하는 길에서 겐토는 머리를 흔들었다. 자기 주변의 세계가 갑자기 변한 느낌이었다. 여태 부모로만 봤던 두 사람이 부부라는 특별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부모의 존재를 두 사람의 인간으로 보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마냥 어리던 시절은 이제 아마도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까지는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모라는 존재는 죽음을 통해서 자식에게 마지막으로 가장 큰 교육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좋게도 나쁘게도.
# 겐토네 연구실에는 주마다 한 번씩 '논문 세미나' 라는 모임을 열었다. 해설자 역할에 지명된 학생이 최신 논문을 읽고 해석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그때 단순한 감정이입이나 논리가 어긋난 부분이라도 있으면 사방팔방에서 거센 비판을 받기 때문에 발언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해야만 했다. 이런 시련으로 단련되지 않으면 언젠가 과학자로서 뼈 아픈 꼴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자주 푸념에 섞어 말하곤 하셨다.
"문과 사회에서는 거짓말이나 눈속임을 잘하는 놈이 출세하지만, 과학자는 거짓말 하나라도 하면 안 돼."
하지만 이런 훈련의 부작용으로 사교적인 자리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숙고하고 과학적인 견지에서 발언하려는 버릇이 어쩔 수 없이 나왔다. 맛있는 케이크 이야기를 활발히 하는 중에 미각 수용체 작용 기제를 생각하게 되는 식이었다.
# "인육이다. 현지 인간들에게 피그미족은 인간 이하의 존재이다. 그리고 그들을 먹으면 신비로운 숲의 힘이 몸에 깃든다고 믿고 있어서 사냥하여 몸을 잘게 잘라 큰 냄비로 요리한다. 소금을 뿌려서 먹는다고 한다. 이 사실은 유엔 감시단이 확인했다."
브리핑 룸 안에서 그 이야기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밖에 없었다.
"호주로 간 백인 이주자도 원주민을 사냥감으로 삼아 즐겨 잡았을 것이다. 호주의 태즈메이니아 섬에 있던 원주민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백인에게 사냥당해서 멸종했다."
# -하이즈먼 리포트 5장-
5. 인류의 진화
생물의 진화가 유전자의 점돌연변이에 의해서만 초래된다는 말은 의심스럽다. 화석 자료만 봐도 생물 진화는 점진적이며 또한 단속적이다. 진화라는 현상에는 점진과 단속 두 가지 방향에서 생물종을 탄생시키는 미지의 매커니즘이 잠재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우리 영장류에게도 해당된다.
저서 [인간과 진화]에서 형질 인류학의 시점으로 인류 진화에 대해 거론한 파리 대학 교수 조르주 올리비에의 말을 빌린다면 '미래의 인간은 머지않아 불시에 온다'는 얘기였다. 실제로도 약 600만 년 전에 침팬지와 공통된 조상에서 나뉜 생물이 원인(猿人), 원인(原人), 구인(舊人), 신인(新人)으로 모습을 바꾸는 과정에서 진화의 속도는 명백히 발라졌다. 인류의 진화는 내일 당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
현생인류에서 진화한 다음 세대의 인간은 대뇌신피질이 보다 크고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압도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지적 능력을 올리비에는 이렇게 상상했다. '제 4차원의 이해, 전체의 복잡한 상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점, 제 6감의 획득, 무한히 발달한 도덕의식 보유, 특히 우리의 지적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특질의 소유.'
이 다음 세대의 인류가 출현할 수 잇는 장소는 문명국이 아니라 주변과 교통이 단절되어 잇는 미개척지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지역에 사는 소수 집단에서는 개체 수준의 유전자 변이가 집단 전체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 새로이 탄생한 인간은 어떠한 행동을 할까? 우리를 멸망시키려 들리라는 것은 확실히 단언할 수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인류와 다음 세대의 인류, 이 두 종의 생태적 지위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한 그들의 생식 장소는 확보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본 현생인류는 같은 종끼리 살육의 나날을 보내는 데다 지구 환경을 파괴하기만 하는 과학 기술을 갖고 있는 등, 헤아릴 수 없이 위험한 하등 동물이다. 지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열등한 생물종은 보다 고도의 지성에 의해 말살된다.
인류의 진화가 일어나면 얼마 안 가 우리는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북경원인이나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되는 것이다.
# 공부에 대해서는 아쉬울 점 없는 학창 시절이었지만 그 외에는 최악이었다. 루벤스의 젊음과 두뇌, 그리고 금발로 치장된 단정한 외모는 연장자인 다른 학생들의 시샘을 사기에 충분할 정도로 튀었다. 질 나쁜 장난을 거는 연상의 동급생들 눈에는 항상 감추기 어려운 적의가 깃들어 있었는데, 동정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강조하며 놀릴 때는 정말 끔찍했다. 질투에 휩싸여 농담인 것처럼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비웃는 얼굴을 계속 보는 동안 루벤스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지적으로 열등한 남자일수록 성적인 면에서 우위에 서려 하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루벤스가 여학생과 친하게 지내기라도 하면 괴롭힘은 보다 음습해졌다. 멍청한 남자들의 모습을 보면 큰 뿔을 들이대면서 암컷을 놓고 서로 싸우는 짐승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 루벤스는 잔혹한 관찰자가 되었다. 우둔함을 가장하고 다른 사람의 악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척하고 있으면 상대는 점점 말려들어서 마음속에 숨어 있는 짐승 같은 본성을 털어놓았다. 전부 간파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자신들이 동물의 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근거리에서 적 병사와 조우한 미군 병사가 총의 방아쇠를 당긴 비율이 얼마나 될 것 같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나온 질문에 루벤스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70% 정도 입니까?"
"아냐. 겨우 20%야."
루벤스의 표정에 떠오른 놀람과 의심을 알아차린 심리학자가 덧붙였다.
"남은 80%는 탄약 보급 등의 구실을 찾아서 살인을 기피한 거야. 이 숫자는 일본군의 자살 공격에 당했던 경우조차 변함이 없었어. 최전선의 병사들은 자신이 죽으리라는 공포보다 적을 죽이는 스트레스를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는 뜻이지."
"의외로군요. 인간은 보다 야성적인 생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랬더니 심리학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직 더 있어. 이 결과에 군은 당황했어. 병사가 도덕적이라면 그쪽이 곤란하지. 그래서 발포율을 높일 만한 심리학 연구가 시행되었고, 베트남 전쟁의 발포율은 95%까지 급상승했어."
"어떤 일을 했는데 그렇게 된 거죠?"
"간단해. 사격 훈련 때 표적을 원형 표적에서 인간형 표적으로 바꾸고 진짜 인간인 것처럼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게 했어. 거기다 사격 성적에 따라 가벼운 징계를 내리거나 보수를 주었지."
"조작적 조건화군요."
"그래. 급사기 레버를 누르면 쥐가 나오도록 하는 것과 같아. 그런데...."
심리학자가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적을 보면 반사적으로 발포한다'는 목적을 위한 이 훈련 방법에는 큰 결함이 있었다. 병사의 심리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발포하는 시점까지였던 데다 적을 죽인 후에 발생하는 트라우마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베트남 전쟁 귀환병들 사이에 대량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까지 살인 행위를 혐오하고 있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애초에 겨우 20%였던 발포율로 어떻게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겼던 걸까요?"
루벤스가 의문점을 꺼냈다.
"일단 인간을 죽여도 전혀 정신적인 충격을 받지 않는 '날 때부터 살인자'가 남성 병사의 2%야. 사이코패스지. 하지만 그들의 태반은 일반 사회로 돌아가면 평범한 시민으로 생활하지. 전시에서만 후회나 자책 없이 살인을 할 수 있는 '이상적인 병사'야."
"하지만 겨우 2%라면, 전쟁에 이길 수 없지 않습니까?"
"남은 90%의 병사를 살인자로 만드는 것도 사실 간단하다는 사실이 알려졌어. 일단은 권위자에 대한 복종이나 소속 집단에 대한 동일화 등으로 개개인의 주체성을 빼앗았지. 그리고 또 하나, 죽일 상대의 거리를 멀리 두는 것이 중요해."
"거리?"
"응. 두 가지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어.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
예를 들어 적이 인종적으로 다르며, 언어도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다르게 되면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며 그만큼 죽이기 쉬워진다. 평소에도 다른 민족과 심리적인 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스스로가 소속된 민족 집단의 우위성을 믿으며 다른 민족을 열등하다고 느끼는 인간이 전쟁에서 손쉽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소에도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사람을 한둘쯤 바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싸우는 상대가 윤리적으로도 열등한, 짐승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라고 철저하게 가르쳐 두면 정의를 위한 살육이 시작된다. 이러한 세뇌 교육이 모든 전쟁에서, 혹은 평소에도 전통적으로 시행되어 왔다. 적국 사람에게 '잽'이라거나 '딩크' 따위로 멸시하는 별칭을 붙이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려면, 병기라는 테크놀로지가 필요하지."
심리학자가 이어서 설명했다.
전투 최전선에 서면 발포를 망설이게 되는 병사도 적을 직접 볼 수 없는 원거리에 있으면 보다 파괴력이 있는 공격 수단을 주저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눈앞에 있는 적을 사살한 병사가 평생 치유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안는 것에 비해, 공중 폭격에 참가하여 100명이나 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폭격수는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점은 상상력의 유무라고 말한 학자가 있었어. 하지만 병기를 사용할 때에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상상력조차 마비되고 말아. 폭격기 아래에서 도망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거야. 이런 도착 증상을 일으키는 사람은 군인뿐만이 아냐. 일반 시민 사이에서도 보이는 보편적인 심리야. 알 수 있겠지?"
루벤스가 끄덕였다. 사람들은 적 병사를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병사를 백안시하는 한편, 적기를 10기나 격추한 파일럿은 영웅으로 추앙했다.
# "안타깝지만 우리가 관용을 베풀 수는 없네. 우리보다 머리가 좋은 생물이 있다는 점을 허용할 수 없는 걸세. 개인적으로는 누스와 만나 보고 싶기도 하지만 말일세."
# "그러고 보니 넌 미군 기지에서 일한 적이 있지?"
"응, 용산 기지에 있었어."
"도청 같은 건 어떻게 생각해? 우리 피해망상 아닐까?"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기술적으로는 가능해. 미국이나 영국이 공동으로 '에셜론'이라는 전 세계 도청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고 들었어. 극동에는 일본 미사와 기지에 있는 안테나가 감청하고 잇고 인도네시아 상공에는 거대한 전파 감청 위성이 있기도 하고 말이야. 해저 케이블도 전부 도청되니까 안전한 통신 방법은 없겠지."
겐토는 아연실색했다. 자기가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살아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무리하게라도 굳이 설명하자면 사람고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는 강한 힘이라고 해야 하나. 한 번 얽힌 상대와는 좋든 싫든 관계없이 정으로 묶이게 되는 거지."
"그럼 우호적인 거라든가 박애 정신 같은 건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정은 안 좋은 일에도 생길 수 있어. 싫은 상대와도 정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100% 거절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거지.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대부분은 이 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어."
"어, 그런 거야?"
겐토는 지금까지 한국 영화를 몇 편 본 적이 있지만 그런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같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사람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른 점이 놀라웠다.
"좀 더 나가 보면 정이란 건 사람과 사물 사이에 생기기도 하는데.... 이런 설명으로 될라나?"
겐토는 정이라는 것을 심정적으로 이해해 보려 했으나 마음속으로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네."
"그렇지? 정이란 말의 의미는 정을 알고 있는 사람밖에 알 수 없어. 말이란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으니까."
정훈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과학 전문 용어랑 같다고 겐토는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이. 그것이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이기 때문이다.
# 원래 이 아이는 보통 사람으로 태어나야 했을 아이였다. 그런데 미세한 유전자 변이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본인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되길 바라지도 않았는데도.
# 군산 복합체의 중심에 있다 보면 지배 논리란 것이 굉장히 단순하다는 사실에 놀라고는 했다. '공포'였다. 전쟁으로 돈을 벌고 싶은 정책 결정자는 다른 나라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민에게 크게 퍼트리기만 하면 됐다. 판단의 근거를 국가 기밀이란 벽으로 감춰 버리면 매스컴도 확인 없이 이 위협론에 올라탔다. 그저 그것만으로 막대한 자금이 세금에서 국방 예산으로 흘러들어 군수 기업 경영자들에게 갈 대가가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심어진 공포는 국경 밖으로도 전파되어 다른 나라도 미국을 따라서 군사 예산을 늘렸다. 이런 국가 간의 긴장은 의심 때문에 현실에 비해 훨씬 고조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진짜 전쟁으로 이어져 특정인만 이득을 얻는 무한한 금맥이 형성됐다. 게다가 위정자로서는 외적을 만들면 덤으로 지지율이 오른다는 이익이 생겼다.
이 사태를 예견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으로서의 마지막 연설에서 군산 복합체의 위험성을 국민에게 경고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세계 각국에 전쟁으로 이윤을 얻는 기업이 존재하는 이상,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질 일은 없을 터였다.
# 자연수론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고 수학계에 충격을 주었던 괴델은 나치 독일에 점령된 오스트리아를 떠나 미국에 망명하기로 했다. 그가 있던 지역의 시민권을 얻으려면 담당 판사와의 면접에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고지식했던 괴델은 미국 헌법을 공부해 두려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놀랄 만한 발견을 햇다. 논리적으로 해석해 보면 미국 헌법에는 큰 모순이 있었던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뒤에서는 합법적으로 독재자를 만들어 내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괴델은 하필이면 면접 자리에서 담당 판사를 상대로 이 발견을 강의했다. 하지만 보증인이 된 친구 아인슈타인이 사전에 판사에게 이야기해 두엇기에 무탈하게 지나갔다. 괴델은 떳떳하게 미국 시민이 될 수 있었다.
# "어디서 일어났지? 아마존은 아니겠지. 동남아시아인가? 아니면 아프리카?"
"어째서 아마존을 제외하시는 겁니까?"
"내가 알기로는 아마존 소수 민족에는 기형아를 죽이는 관습이 있어서 그렇네. 신종 인류가 탄생했다고 해도 바로 죽겠지."
박사의 말을 듣고 루벤스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20만 년에 달하는 인류 역사 중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약 100년 전까지 현생인류와 현저하게 용모가 다른 신생아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살해되었으리라. 인위적인 도태. 그중에는 진화한 개체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자신과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를 없애려는 인간의 습성이 진화의 싹을 솎아내고 있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었다.
#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 같은 종끼리 제노사이드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네. 이것이 사람이라는 생물의 정의야. 인간성이란 잔학성이란 말일세. 일찍이 지구상에 잇던 다른 종류의 인류, 원인(原人)이나 네안데르탈인도, 현생인류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나는 보고 있네."
"우리만 살아남게 된 것은 지성이 아니라 잔학성이 이겼기 때문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래. 뇌의 용적은 우리보다 네안데르탈인이 컸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현생인류가 다른 인류와의 공존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일세."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적에서 발굴되는 네안데르탈인의 뼈 대부분이 폭력을 당하거나 조리된 흔적이 발견된 것도 사실이었다. 4만 년 전, 유럽 대륙에서 먹이를 조리하는 지성을 가지고 있던 동물은 두 종류밖에 없었다. 네안데르탈인 혹은 현생인류.
# "역사학만은 배우지 말게. 지배욕에 사로잡힌 멍청한 인간이 저지른 살육을 영웅담으로 바꿔서 미화하니까 말이야."
# 며칠 동안 신문을 사 와서 국제면을 훑어보았지만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와 있지 않앗다. 정말로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면 어째서 일본 매스컴은 무시하고 있는 것일까? 지구 반대쪽 일에 대해서는 보도 기관이 전해 주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안 일어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자신이 살아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 "아서, 당신에게 실망했소. 겨우 어린애 하나를 상대로 왜 이렇게 애를 먹고 있는 거요? 당신이 무능하기 때문 아니오?"
"누스와 비교한다면, 인류는 모두 무능합니다."
#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아버지가 부탁한 연구를 다 했느냐?
너는 아이들의 생명을 구했느냐?
너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느냐?
미지의 세계로의 도전을 거리낌 없이 즐겼느냐?
자연이 환상적인 속살을 너에게만 보여 주었느냐?
그리고 너는, 어떤 예술품에서조차 얻지 못하는 감동을 맛보았느냐?
이 아버지는 알고 있단다. 네가 해냈을리라는 것을.
그런 우리 아들이, 아버지는 자랑스럽구나. 부디 이제부터도 망설임 없이 약학에의 길을 전진해 주렴.
이제 작별이구나.
안녕, 겐토.
좋은 과학자가 되거라.
- 아버지로부터.
---------------------------- 구글에서 가져온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 자료 몇 가지 -------------------------
간단히 보는 GPCR. 긴 사슬형으로 일곱번 접힌다는 것은 이런 형태를 말한다.
이 사진만으로 설명하자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정훈과 겐토가 처음 시도한 방법은 위 사진과 같다.
약품 (파란 물질)이 리셉터에 결합을 하게 되면 GPR이 변형되며 G-protein을 활성화시키게 되고,
거기서 발생한 시그널로 세포 반응이 발현된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변형 GPR(or GPCR)은 내부 염기 서열 변화로 변형이 불가하다는 설정.
따라서 여기서는 외부 리간드를 하나 더 붙여서 억지로 변형을 시키겠다는 이야기.
기프트 화면은 대략 이런 식이었겠지... 만 상상도 안되게 더 좋았겠지!!!!!!!
-_- 난 유기가 싫었다. 잘 못 했거든.
보통 많이 쓰는 관 크로마토 그래피.
상단 사진은 실리카겔.
유기 용매의 농도를 잘 조절해 시료를 내리면 층 분리가 일어난다. (원리는 패스....)
콕을 조절해 받아내고 용매를 날리면 원하는 물질 분리가 가능. (순도는... 용매와 실험자에 따라 천차만별)
NMR. (핵자기 공명 분석)
간단히 보자면 요런 분석을 했다는 말.
수소가 몇 개, 탄소가 몇 개인지 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거리와 간섭에 따라 다르게 나오니까, 계산 가능)
피크를 분석하면 원하던 물질인지 확인이 가능하다.
안에 흰 막대(빨간 거 달린)가 마그네틱 바.
아래 기계는 스터러.
전원을 올리면 바가 달각 달각 회전하며 저어주는 효과를 내 시료를 빠르게 녹이거나 잘 섞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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