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오스카 와일드] 옥중기

일루젼 2012. 6. 30.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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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어 고민만 하다가 결국은 구매.

사실은 누림에서 출판한 본을 원했지만 그건 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아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꼭집기가 좀 난감하다.

 

비어줄리의 삽화도 너무나 매력적이고,

남성이 썼다는 것이 놀라운 오스카 와일드 특유의 유미적인 아름다움도 너무나 좋고.

팜프파탈에 관한 내용 자체도 훌륭하다.

 

하지만 그 글에는 이 모든 걸 떠나 마음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처음 오스카 와일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살로메를 읽고 나서였고,

그 다음 그가 행복한 왕자를 쓴 저자였다는 걸 알고 나서 (어린 시절 나는 그 동화도 좋아했다) 더욱 정이 갔다.

그리고나서 그의 개인사를 좀 알아보다가 '얜 좋아할래' 하고 결정해버렸지....ㅋㅋ

 

 

읽는 동안 든 생각은 감옥이 많이 힘들었구나.

자기애가 넘쳐나는 인간이었구나.

좋은 정신승리다.

 

등등.

 

아,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한 사람이 감옥에 갇혀 만인의 비웃음을 받는 처지가 된 자신을 끌어안는,

그런 자신마저도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생각을 다소 수정하며 곱씹는 글인데

읽어보면 이 마저도 유려하게 썼다.

 

살로메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는 다른 맛이 있다. 

 

개인적으로 책을 구하기 쉽지 않은 것이 애석하다.  

 

 

 

 

[발췌]

 

나는 스스로를 파멸시켰으며, 또 어떠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손 이외의 것으로는 파멸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제는 기꺼이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이 잔인한 선언을 사정 없이 나 자신에게 제기한다. 세상이 나에게 가했던 것도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지만, 아마 내가 스스로에게 가한 것이 더욱 가혹한 것이리라.

 나는 내 시대의 예술과 문화 사이의 상징적 관계 속에 서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장년기에 들어설 무렵 나는 이것을 자각했으며, 내가 자각한 후에는 나의 시대가 그것을 깨닫게 하려고 애썼다. 지금까지 그러한 자세를 고수했고 또 그것을 시대에게 완전히 인식시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런 것은 아마 그 인물과 시대가 다 지나간 뒤에야 역사가나 평론가에 의해서 인정되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분명히 자각했고 또 타인에게 그것을 인식시켰던 것이다. 물론 바이런도 그런 상징적인 인물이긴 했으나, 그의 관계는 그 시대의 정열과 그 정열에 대한 권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것은 보다 고상하고 영원한 것이며, 보다 생생하고 광범위한 것이었다.

- 참회의 아픔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방이 되면 자기가 지내 왔던 감옥은 내동댕이쳐 버리며, 또 그것을 그의 가슴속 깊이 비밀스런 수치의 하나로 감추고 마치 독약을 먹은 짐승처럼 어떤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 죽어 버리고 만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비참한 일이다. 더구나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사회라는 것은 어리석음이라는 최고의 악을 항상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 개인에게 얼마나 무서운 처벌을 내렸는지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의 형기가 끝나면 사회는 그를 완전히 방임해 버린다. 말하자면 사회의 최고의 의무를 완수하여야 할 때 사회는 그를 유기해 버리는 것이다.

 사회는 그런 행동을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하며, 마치 빚을 갚을 수 없어 채권자를 피하든가, 도저히 보상할 수 없고 또 회복될 수도 없는 상처를 준 상대방을 피하듯 벌을 준 사람을 피하는 것도 부끄러해야 할 것이다.

 또 만일 내가 자신이 겪은 고난을 깨달았다면 사회도 자신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던가를 알아야 하며, 그래야만 서로의 갈등이나 증오를 멀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나는 보는 견지에 따라서는 내 사정이 다른 사람들과 퍽 다르리라는 것도 잘 알고, 또 각자의 사건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리라는 것도 잘 안다.

 나와 같이 감옥에 있는 도적이나 부랑자들은 사실 여러 면에서 나보다 훨씬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범죄를 목겨한 회색의 도시나 푸른 들의 길은 아주 좁고 작은 것이어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저 새가 저녁 때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날아간 거리만큼만 나가 보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선 문제가 전혀 달라 이 넓은 세계가 오히려 손바닥만큼 줄어들어 버렸으며, 어디를 가나 나의 이름이 바위 위에 씌어져 있다.

- 고독한 젊은이의 성

 

 

 

 나는 한 젊은 갈릴리의 농부가 온 세계의 짐을 자신의 어깨로 짊어질 수 있다고 상상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든다. 그가 말한 온 세계의 짐이란 이미 행해졌던, 그리고 고난을 받았던 모든 것과 또 이제 일어나려 하고 있는, 분명히 고난을 받게 될 모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네로, 시저, 보르지아, 알렉산더 6세, 또 로마의 제왕이요 태양의 숭배자였던 자들의 모든 죄를 뜻하는 것이고, 이미 무덤 속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압제하의 민족들, 공장 직공, 어린이, 도둑, 죄수, 악한 등 이제는 고난 속에서 벙어리가 되어 신만이 그의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뜻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이러한 것을 상상해 냈을 분만 아니라, 그와 접한 사람이면 누구나(비록 그의 제단 앞에서 예배도 하지 않거나, 그의 사제 앞에 무릎을 꿇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와 접하는 순간 그들의 죄의 추악함을 정화시켜 주며, 슬픔의 아름다움을 다시 그들 앞에 내보임으로써 실지로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더욱더 묘한 기분이 든다.

 나는 그리스도가 시인과 같은 계열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진실이다.

 셸리와 소포클레스는 그의 한 동료였다. 그러나 역시 그의 온 생애는 최고로 훌륭한 한 편의 시였다.

 그의 이러한 '연민과 고통'에 비길 만한 그리스 비극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주역의 절대적인 순수성은 전체 구도를, 바로 그 공포로 테베나 펠폽스의 시의 고통을 배제해 버리고 있는 낭만적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연극론에서 죄 없는 자가 고통에 젖어 있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장면이라고 한 말이 대단한 과오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자비의 선각자인 아이스킬로스나 단테에 있어서도, 모든 에술가 중에서 가장 인간미가 투철한 셰익스피어에 있어서도, 또 세상의 아름다움은 눈물의 안개를 통해서만 볼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꽃의 일생과 다름없다고 말해 주는 켈트의 모든 신화와 전설 속에서도, 장엄한 비극적 효과와 결부되어 하나가 된 연민의 정의 단순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최후의 수난에 비할 만한 것은 물론, 비교적 그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것조차 없다.

- 그리스도에게 묻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과 칭찬을 받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칭찬을 통해 살아야 한다.

 어떤 사랑이 우리에게 보여진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이상적인 사물에 대한 신성한 질서 속에서는 영원한 사랑이 영원히 가치 없는 것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말이 너무 야속하게 들린다면, 우리는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자.

- 백합꽃들의 정원으로

 

 

 나의 어떤 절친한 친구(그는 나와 10여 년이나 사귀어 왔었다)가 찾아와서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도 믿지 않으며, 나를 완전히 무고한 자로 또 엄청난 음모의 희생자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그 비난 속에는 전혀 근거도 없고 악의 어린 반감에 의한 것이 많긴 하지만 나 자신의 삶도 분명 거짓된 쾌락에 넘쳤으므로, 당신이 만약 나의 이러한 사실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이상 친구도 될 수 없고 당신의 동료일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에게 무서운 충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친구이다. 하지만 내가 위선에 의해서 그의 우정을 살려 온 것은 아니다.

 

......

 

 고티에처럼 나는 항상 '나를 위해 이 세계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것이다.

- 절망의 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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