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와 뼈의 딸 - 504쪽 | 209*146mm | ISBN(13) : 9788925545929 2012-01-26 |
즐겁게 읽었다.
현재 영화 제작 중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영화화되는 소설들 특유의 느낌이 있다.
생생하게 눈 앞에 떠오르는 색감과 이미지들이 강렬한 글. 그것을 단점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덧붙이자면 나는 제작 중이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기대가 큰 편이다. 요즈음의 CG 기술이라면 어쩌면 이클립스 이상 가는 인기를 끌만한 로맨스 판타지 영화가 나올지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메인으로 하고 그 위에 강인하고 대등한 여성상을 소스로 끼얹어 버무려 놓으면 어째서 그들은 그렇게 한 순간에, 아무런 개연성 없이 사랑에 빠질 수 있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진다. 아름답다지 않은가. 아름다움 중에서도 특별하게 마음을 끌었다는데야 뭐. 즐겁게 읽을 수 밖에.ㅋ
내용 자체만 놓고 보자면 어느 한 곳 꼬집기 어려운 완벽한 클리셰지만, 그 클리셰를 신선하게 느껴질 만큼 다듬고 곳곳에 박아넣어준 각종 신화적 이미지는 꽤나 마음에 든다. 환수, 타락천사와 천사, 라미아(나가), 함사스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고심해서 만들어낸 듯한 키메라와 세라핌들의 세계도 흥미롭다. (취향 직격)
가장 마음을 끄는 부분은 마법, 또는 소원의 대가로 치러지는 고통에 대한 것.
등가 교환의 법칙은 대부분의 마술서에서 다뤄지는 부분인데, 흑마술의 제물들도 그렇고 주술사들이 스스로의 생명을 깎아낸다고 말하는 부분도 그렇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인지 혹은 그래야만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여기서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조금 꼬아서 보자면 세라핌은 화이트 칼라 앵글로색슨, 키메라는 그 외 다른 인종들로 볼 수도 있겠다. 그들의 노동과 고통을 기반으로 위시를 마법처럼 이뤄내는 세상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상당한 몰입감으로 쭉쭉 읽어나가다보니 이런.
마지막 페이지는 올 가을에 다시 만나자는 다음 권 예고.
허허. 차라리 더 기다렸다가 읽을 걸 그랬나 싶다.
다행히 지금은 여름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다.
덧) 스쿠피 팔찌 하나만 얻을 수는 없을까?
[발췌]
# 너무 외로워서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지른 거지.
# 카지미르가 생각하는 이별이란 자신이 원할 때 헤어지는 것이지 감히 여자가 원해서 헤어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정말 카루의 머리카락은 물감 튜브에서 막 짜낸 것 같은 군청색으로 자라지만, 그녀는 마치 농담을 하는 것처럼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한다. 지난 몇 년 사이에 그녀는 이렇게 하면 통한다는 걸 깨달았다.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며 진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그 말이 정말이란 걸 믿지 않고 그냥 넘어가곤 했다.
# "청상아리 태아들은 자궁 속에 있을 때 서로 잡아먹는다는 거 알고 계세요? ... 사실이에요. 동족들을 잡아먹는 태아들만 살아서 태어나죠. 사람들이 그런 식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어요?"
# 사랑에 대한 갈망을 떠올리면 그녀는 자신이 항상 주인의 발목 주위를 맴돌며 날 쓰다음어 줘요, 날 봐 줘요, 예뻐해 줘요, 사랑해 줘요, 라고 야옹거리는 고양이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보다는 높은 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도저히 그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냉랭하게 사람들을 응시하는 고양이가 되는 편이 낫다. 사람들이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피하고,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고양이 말이다. 그녀는 왜 그런 고양이가 될 수 없단 말인가?
# 그가 파충류 눈을 들었을 때, 그 눈은 지쳐서 흐릿했다.
"네가 어떻게 할지는 너도 모른단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위시본을 손으로 만졌다.
"그 말로 널 구속하지 않으마."
# "그녀는 과즙과 소금 같은 맛이 나. 과즙과 소금과 사과를 합친 것 같은 맛이 나지. 꽃가루와 별들과 경첩을 합친 것 같아. 그녀에게선 동화 같은 맛이 나. 한밤중 백조 처녀 같은 맛이야. 여우의 혓바닥에 올려놓은 크림 같은 맛이야. 그녀에게선 희망의 맛이 나."
#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죠. '괴물이 되고 싶지 않거든 괴물과 싸우지 말 것이며,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이 널 마주 볼 것이다.'라고요. 니체라고 아십니까. 아주 끝내주는 콧수염을 길렀던 사람이죠."
# "그의 정체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당신일 수도 있잖아?" 그가 천천히 말했다.
"뭘?" 그녀가 물었다. "내가 정확히 뭘 모른다는 거지?"
"우선 그의 마법." 아키바가 말했다. "당신의 소원들. 그 마법이 어디서 나오는지 당신은 알아?"
"온다고?"
"그건 공짜가 아니야, 카루. 마법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그 대가는 고통이야."
# 주자나는 곧바로 테이블로 걸와 서서 아키바를 쳐다봤다. 그녀는 사나웠고, 그를 꾸짖을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지만, 그를 보자, 정말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자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사나운 표정과 감탄하는 표정이 격투를 벌이다 마침내 감탄하는 감정이 이기고 말았다. 그녀는 카루를 곁눈질로 보면서 하는 수 없이 탄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젠장, 반드시 이 남자와 짝짓기를 하도록 해. 당장."
그건 너무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고, 카루는 이미 긴장할 대로 긴장 했던 터라 그만 느닷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정신없이 웃어 댔다. 부드럽고 활기찬 카루의 웃음소리를 들은 아키바는 기대에 부푼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그런 아키바의 강렬한 시선에 그녀는 전율했다.
"아니, 정말이야." 주자나가 말했다. "지금 당장. 이건 그야말로 최상의 유전자를 확보해야 한다는 생물학적 명령과 같은 거야. 이 물건은..." 그녀는 마치 대변인 같은 동작으로 아키바를 가리켰다. "내가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 그가 말했다. "당신이 알아 줬으면 해..." 그는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위시본을 보기 전부터 내가 당신에게 끌렸다는 걸 알아 줬으면 해. 내가 진실을 알기 전부터, 그리고 난... 당신이 어떻게 숨어 있건 항상 찾아낼 것라고 생각해." 그는 그녀에게 한껏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당신의 영혼이 내게 노래를 불러. 내 영혼은 당신 것이고, 우리가 어떤 세계에 있든 항상 그럴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고, 그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기억해 줘."
# 옛날 옛적에 두 개의 달이 있었는데, 그 둘은 자매였다. 니티드는 눈물과 삶의 여신이었고, 하늘이 그녀의 것이었다. 엘라이를 숭배하는 이는 은밀한 연애를 하는 연인들 뿐이었다.
# 그 순간, 미래는 어떤 가면으로도 감출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날개와 눈을 가지고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그녀가 한 선택이 날갯짓 한 번에 먼지처럼 쓸려 나가면서 그 자리에 생각할 수도 없는 것, 즉 사랑을 남기게 되리란 건 아무도 몰랐다.
# 옛날 옛적에 키메라와 세라핌이 있기 전에, 해와 달들이 살았다. 태양은 환하게 빛나는 니티드와 약혼했지만, 태양의 욕망을 불러일으킨 건 대담한 언니 뒤에 항상 숨어 있는 얌전한 엘라이였다. 그는 바다에서 목욕을 하는 엘라이에게 덤벼들어 그녀를 범했다.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지만, 그는 태양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엘라이는 그를 찌르고 도망쳤고, 태양의 피가 마치 불꽃처럼 지구로 흘러들어 천사가 됐다. 천사는 태양의 사생아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천사들 역시 그들이 원하는 건 뭐든 가지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엘라이가 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자 니티드가 울었다. 그녀의 눈물이 지구로 떨어져서 키메라가 됐다. 키메라는 회한의 아이들이다.
태양이 다시 자매들에게 왔을 때, 둘 다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니티드는 엘라이를 뒤에 숨기고 보호했다. 하지만 아직도 불꽃을 흘리고 있는 태양은 엘라이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태양은 니티드에게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지금까지 태양은 하늘을 가로지르면서 그 자매들을 따라 다니며 그녀들을 원하지만 결코 갖지 못하는 벌을 영원히 받게 됐다.
니티드는 눈물과 인생, 사냥과 전쟁의 여신으로 그녀의 신전은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여인의 자궁을 채우고, 죽어 가는 이의 심장을 틎추고, 자신의 자손들을 천사들에게 대항하도록 이끄는 이가 바로 니티드다. 그녀의 빛은 마치 그림자를 쫓아내는 작은 태양 같다.
엘라이는 좀 더 미묘하다. 그녀는 흔적이자, 유령의 달이며, 매년 그녀 혼자 하늘을 차지하는 날은 불과 며칠 되지 않는다. 이런 밤들을 엘라이의 밤이라고 하며, 이런 밤들은 어둡고, 별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어서 은밀한 일을 하기에 좋은 밤이다. 엘라이는 자객과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는 이들을 위한 여신이다. 그녀의 신전은 거의 없고, 숨겨져 있다.
# "마법이라기보다는 희망이죠. 희망은 아주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어요. 여기에 진짜 마법은 없지만, 자신이 뭘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지 알고 그 희망을 자신 속의 빛처럼 간직하고 있으면, 마법처럼 그런 일들이 이뤄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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