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1,2

일루젼 2012. 7. 13. 16:05
728x90
반응형

당신들의 대한민국 1 - 10점
박노자 지음/한겨레출판

301쪽 | 223*152mm (A5신) | ISBN(13) : 9788984310636

2001-12-24

 

 

당신들의 대한민국 2 - 10점
박노자 지음/한겨레출판

319쪽 | 223*152mm (A5신) | ISBN(13) : 9788984311794

2006-01-18

 

 

 

2권이 나온지도 벌써 6년이 흘렀다.

불교에 관심을 갖고 진학하려 하다가 '춘향전'이라는 북한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대학에서 조선학과를 전공한 전 외국인.

그의 옅은 색깔 눈에 비친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지금은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귀화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는, 예전에는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블라디미르 티코노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그가 무너져가던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라났고, 채 20살이 되기 전에 한국으로 대학원을 진학해 지금까지 지내왔음을 생각해보면 그의 시선은 이미 너나 할 것 없이 보수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많이 왼쪽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가 중국과 티베트의 일에 대해 보인 모습이나 현재의 정치관과는 무관하게 그의 글을 통해서만 생각해보고자 한다.

 

읽는 동안 많이 부끄러웠고, 또 때로는 분노하기도 했으며 간혹 그의 주장이 지나치다고 여겨져 불쾌해지기도 했었다.

 

물론 그는 그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흰 피부의 덕을 좀 보긴 했다.

같은 이야기가 하루가 멀다하고 인터넷과 진보 매체에서 쏟아져나와도 눈깜짝 하지 않았던, 지금도 강하지만 당시에는 진리로 취급받았던 보수 언론에서조차 무시하기 어려운 파급력을 가졌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몇 번이고 되풀이해 떠오른 생각은 그의 저서가 몇 년도에 출간되었었는지였다.

부끄럽게도 2012년인 지금, 한국 사회는 그가 몇 년 전부터 지적해 온, 혹은 예상해 온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다.

 

1권이 조금은 더 딱딱하게 한 두 걸음 물러서서 이곳 저곳을 짚었다면, 약 4년의 시간이 흐른 다음 나온 2권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바짝 다가서 쪼그리고 앉은 모습으로 요모 조모를 손가락을 쿡쿡 찔러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그는 1권의 발표 이후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되었고, 또 그것들이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가 꼬집는 것들 중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꼽아보자면

첫째는 군대가 인간에게 주는 정신적인 상처와 군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이득을 얻고 싶어하는 계층.

둘째는 '민족주의'라는 이념 안에 갇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적용시키곤 했던 이중 잣대.

셋째는 이제는 털어내야 할, 그러나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진 '인종주의'다.

 

 

어떤 이들은 대안도 없이 불만만 늘어놓아서 어쩌자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러나 모든 발전과 개선은 그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의견들이 모여 이루어낸 것이며, 그 해결책이란 것이 반드시 어느 한 개인이 찾아내어 발표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어딘가 잘못된 것을 알지만 일단은 굴러가니 그대로 두자고 말하는 것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병을 키워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물론 병에는 병을 치료할 의사가 필요하다. 재야에 숨어있는, 혹은 이미 요직에 존재하는 전문가들이 의사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어디가 '아프다'고 호소하며 의사를 찾아가지 않으면 어떤 명의라도 알아서 찾아와 치료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다소 쓴 소리로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그려오던 '대한민국'의 이미지와 비교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 될 것 같다.

 

 

 

[발췌] - 1권

 

 

# 한문학에 눈을 뜨기 전에는 나도 대다수 서양인처럼 알게 모르게 서양 문물을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생각했겠지만, 한시의 세계를 알고 난 뒤에는 그 서양 중심주의라는 병을 유쾌하게 치료할 수 있었다. 이백이나 왕유, 이퇴계의 시에 담긴 그 명랑한 흥취와 아담한 고적, 무욕과 지족을 서구의 시구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또, 내 마음에 든 것은 새로 급우가 된 고대생들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학우와는 여러 방면에서 대조적이었다. 무엇보다 크게 다른 점은 냉소주의로 가득 찬 레닌그라드 학생들에게서는 볼 수 없던, 아직 식지 않은 사회 참여 열기와 정의감이었다. 이 점에서 독자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그때가 '반미자주'라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학생회관에 걸려 있던, 종속이론과 신식민지 이론이 아직 학습 서클의 주요 테마이던 1991년이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 사고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해도, 미국 패권주의에 힘없이 끌려다니고, 계급계층 간의 불평등이 날로 고질화되어 가는 조국의 비뚤어진 '발전'에 대해서 반성하고 고민하면서 나름대로 문제 해결책을 모색해 보려는 그들의 열기 뜨거운 자세는 매우 바람직해 보였다.

 

 

# 그러나 이념적인 구도에 열을 올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로서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면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아주 종합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에게는 우리의 '자유'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인 개인적 공간과 개인적 시간 등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상적 자유 확립' 차원의 행동들, 예컨대 술을 권하거나 노래를 시키거나 회식에 초대받았을 때 본인의 취향이나 사정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 등이 그들에게는 이기주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크게 봐서는, '자본주의'와 '세계적 종속'의 거대 담론을 거부하고자 했던 그들의 '식구들'의 '일심단결'을 우선시하는 가족주의적 종속의 미시 담론을 절대화한 셈이었다.

 

 

# 보통 박정희를 변호하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논거를 이용한다. 하나는 '조국 근대화 또는 현대화의 성공'이고, 다른 하나는 '체제의 경제적 우월성의 획득'이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외화벌이를 위해 베트남 전쟁에서 4-5천 명에 이르는 한국 젊은이가 죽었다 해도, 경부 고속도로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 건설장에서 노동자 100여 명이 사고와 과로로 고통을 받아 죽었다 해도, 1년에 근로자 몇백 명이 과로사한다 해도, 일단 우리가 지금 북한보다 배불리 현대적으로 살지 않느냐는 식의 논리다.

 

 

# ... '네가 나를 밀어주면 나도 보답하겠다'는 식의 새로운 '친구'관계로 전락하는 것을 '문화의 진보'로 볼 수 있는가? ..... 옛날에 풍류의 맛을 즐기면서 친구의 한마디 말에 깨달음도 얻고 인생에 중요한 가르침도 얻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남에게 정신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으려면 그 남과 일단 생각의 범위가 달라야 하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정신생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성'과 '개인주의'를 표어로 내세우는 그들의 생각은 사실 놀랍게도 천편일률적이다.

 

 

# "귀한 외빈들이 오니 소음공해를 줄여야 한다"며 자기 나라 노동자를 탄압하는 정부와 경찰 당국의 추태를 지켜보면서 맨 먼저 생각난 것은, 외화벌이와 종주국의 눈치를 자기 민족의 피보다 훨씬 더 중시하는 베트남 파병 당시의 사고방식이 조금 변형된 형태로 아직까지 한국 정부의 '행동강령'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 남한 보수언론이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은 북한의 대권 세습을 열심히 비웃으면서도 남한의 거의 모든 재벌이 2세, 3세에게 소유와 경영을 세습한다는 사실을 당연한 일처럼 보도한다는 것이다.

 

 

# 보수정치인이 다스리고 재벌이 소유하는 한국의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군대라는 것은 '보스'에 맹종할 '충견'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일종의 '양견장' 역할을 한다. 징병제의 존재 명분으로 보통 북한군의 남침 위협을 드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합리화 수단에 불과하다. 남침 위협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병의 사기나 전문 수준이 낮은 의무 군대보다는 기술 수준이 더 높은 모병제 군대가 위험을 방지하는데 더 적합할 것이다. 징병제를 일종의 성역으로 만들어놓고 모병제는 물론이거니와 서구 모든 국가에 있는 신앙에 따른 병역 거부권과 대체 근무까지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당국은 북한의 위협보다 군대 복무의 '교육적 효과'를 의식하는 것이다.

 

 

# .... 과거가 아름답고 좋아서 배우는 것이 아니고 눈물과 피의 범벅인 그 억울하고 저주스러운 과거의 숱한 비극과 좌절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꼭 배워야 한다는 논법을 이용해 왔다. 그리고 상대방이 가장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예로 들어보라고 하면, 한국사에서 다민족적 국가들이 단일민족의 국가들보다 훨씬 자주적이고 선진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여기에서 보통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상식으로 외운 상대자는 "아니, 우리 역사에 무슨 다민족까지 있었느냐"고 당황해하곤 했다. 그럴 때 나는 북쪽의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등을 남쪽의 신라와 비교한 뒤에, 고려와 조선을 비교한다.

 

 

# 한국 교과서들이 결코 말하지 않는 초기 남한군 역사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미국의 사학자 커밍스가 '남한군의 아버지'로 명명한 하우스만(J. Hausman) 대위다. 1946년 7월에 남한에 상륙한 하우스만은 그후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 정치무대의 '배후 실력자'로 남아 있었다. 다른 미군 고문들과 달리 한국어를 빨리 배워 미군의 '한국통'으로 통하던 하우스만은 남한 군대의 모태가 된 이른바 '조선 경비대'의 실세였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권력에 남다른 충성을 바치던 정일권, 백선엽 같은 친일파 장교의 등용에도, 제주도 등지에서 일어난 민중항쟁 토벌에도, 수사관에게 동지의 명단을 넘겨준 남로당 출신 박정희의 출세를 보장해 주는 데에도 하우스만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막대한 영항력 못지않게 동시대인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집착에 가까운 반공주의와 그에 입각한 '학살주의'였다. 죄없는 양민의 목숨을 수없이 빼앗은 '숙군'작업을 지휘한 그는 부하들이 총살하는 장면을 촬영하며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 교과서'를 만들기도 했다. 한번은 제주도 양민 20명의 총살을 지휘한 일을 따지던 미국 대사에게 "몇 개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고 의연하게 대꾸한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 여기서 밝혀두어야 할 것은, 공산당 독재의 압박을 직접 체험한 나는 북쪽 체제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복을 입은 청년들을 죽음올 내몬 것이 결국 북한의 정권이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군사적 도발의 정치적 이유들과 상관없이 내가 느낀 것은 남한 사회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 땅에서 사람이 국가의 명령에 따라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 한국인의 총탄에 동족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주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다. 첨단 무기를 가진 '우리'가 낡은 무기를 가진 '그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는 것에 보도의 주안점을 두었고, 군대에 끌려가서 이제 바닷속에서 무덤도 없는 원귀가 된 북녘 젊은이들의 어머니들이 밤새도록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에 울고 있으리라는 것은 관심 밖이었다.

..... 누군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전쟁은 원래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적군을 살상하는 것이고, 아군이 북측을 억제할 능력을 보이지 않으면 그들이 '천백 배'의 손실을 남한에 입히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말의 뜻은, 무장을 해제하라는 것이 아니고 노자의 말씀대로 전쟁을 하더라도 이를 마음으로 슬퍼할 줄 알아야 하며, 그것이 필요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적군'이 되어버린 동족에 대해서 자비의 마음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 '우리' 담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민족주의 사상가들에게 '민족을 만들기 위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전근대 시대에는 우리의 사상을 초월할 정도로 풍부한 계층적, 지역적 풍습과 전통이 존재했다. 문제는 이 풍부한 '자료'를 어떻게 취사선택하고 '재포장'하여 민족주의의 '정전'에 편입시키느냐에 있다. 예를 들어, 잘 알다시피 기독교 전파 이전의 유럽(그리스, 로마 등)이나 중세 일본에서는 동성연애를 이성연애 못지않게 당연시했다. 한국에서는 '음양 결합'과 '후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유교의 영향으로 기독교처럼 동성연애를 금기시했다. (그러나 여유 있는 양반들이 '면'이라 부르던 남사당 미동들과 '남색'을 은밀히 즐기는 것을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 유교의 국가이념화 이전에도 한국에 고대 그리스와 같은 동성연애 전통이 없었을까? 유교 사학자의 손에서 이미 조정과 윤색의 과정을 거친 현존 사료만 가지고 확실하게 답하기는 어려운 물음이다. 그러나 확증은 없지만, 6-7세기에 신라 화랑들 사이에 동성연애가 성행했다는 가설이 있다. 사춘기 3년을 남자들하고만 보내야 했던, 역사의 기록대로 '곱게 단장한' 미남에게 성적인 충동이 없었을 리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유명한 6세기의 사다함처럼,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다 며칠 만에 자신도 따라 죽을 정도의 애정이라면 연애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문제는 내가 당연한 인권으로 생각하는 동성연애를 유교 사학자는 물론이고 화랑도를 '무사집단'으로 만들어서 '우리 문화'의 정전에 편입시키려는 근현대 어용 민족주의자들도 금기시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모범생이 '화랑도의 애국애족과 임전무퇴의 찬란한 정신'을 달달 외울 수는 있지만, 화랑들의 불교적인 신앙열이나 아름다운 연애풍속은 한 줄도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똑같은 교과서에서 당당히 '우리 민족의 일원'으로 묘사하는 백제인과 고구려인을 전투에서 죽인 것은 '애국애족'과 '미풍양속'이 될 수 있지만, 친구(아마도 친구 이상의 친구)의 죽음을 슬피 여겨 따라 죽은 것은 '우리'의 정전에 들어갈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 한국에 처음 온 1991년에 나는 한국인들의 자기 민족 중심주의가 비교적 강하다는 인식을 받기는 했

그러나 불안과 자국의 역사, 사상에 대한 치열한 반성으로 가득 찬 그 당시 러시아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지배층은 보기 드문 당당한 자신감을 과시했다. 내가 그때 만난 대기업의 임원이나 의사와 변호사 등 상류층 (즉, 특권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박정희의 개발독재 방식의 '근대화'와, 여당 내 세력 교체(전두환 -> 노태우) 방식의 '점차적 민주화'의 완전한 성공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 경제의 양적 성장을 '선진권 진입의 준비 완료'로 인식했고, 소련의 몰락과 북한의 가시적인 위기를 '체계 경쟁에서의 승리'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특별히 고무적으로 생각한 것은 가장 위협적으로 느끼던 운동권 세력의 위기와 약화였다. 그들의 자부심은 대부분 민족의 우수성, 혁명 없이 윗사람의 말을 잘 듣고 복종할 줄 아는 민족의 지혜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 궤변으로 포장됐다.

 

 

# 바트자갈의 이야기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끈 대목은 과연 무엇 때문에 한국에 와서 불법 노동을 할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고 인생을 바꾸어버린 그러한 결정을 하였느냐 하는 것이었다. 바트자갈의 설명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그의 석사학위 공부가 끝날 무렵이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구체제의 와해로 인한 경제적 궁핍과 사회주의적 가치의 평가절하에 따른 이념적인 공백으로 인해서 멸망해 가는 소련에서 전통적인 대국주의와 극단적인 민족주의, 배타주의가 다시 대두하게 되었다. ..... 1997년에 드디어 한 달짜리 관광비자를 들고 한국에 입국한 바트자갈은 처음부터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의 학력과 실력으로 어느 대학교든 한국어 과정에 들어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에게는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할 방법이 부업밖에 없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한결같이 학생비자로 부업을 하는 것은 처벌 대상인 '불법'이라는 말 뿐이었다. 그리고 당시 한글의 자모도 모르던 바트자갈은 그 부업이라는 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불법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몽골 교수 월급의 몇 배나 되는 비싼 비행기 삯을 내고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역에서 이렇게 봉변을 당하다니....

.... '믿음직스러운 친구'가 알선해 준 '꿈의 직장'은 실은 동대문에 있는, 주로 러시아와 몽골의 '보따리 장수'들을 상대하는 중소 무역업체였다. .... 학생들에게 문학이론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달리 직장 경력이 없던 바트자갈에게는 이러한 행위를 한다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몽골 사회에서도 한국처럼 전통적으로 '스승'으로 받들어지는 교직자의 자존심을 깡그리 잊고 해야 할 일이었다.

 ....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 달 동안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회사에서 월급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저희 회사에서 고객 유치 담당자로 정식 고용되어 있는 분은 바로 선생님을 모시고 왔던 한국 분인데, 그 분이 자신이 선생님의 가까운 친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자신이 월급을 받고 선생님께 드릴 것을 드리겠다고 했는데 그걸 못 받으셨단 이야기인가요? 좀 이상한데 두 분께서 서로 상의해서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왜 선생님을 그냥 정식으로 고용하지 못하냐고요? 관광비자로 들어왔으니까 그렇죠. 참, 비자가 한 달이었다고 그랬죠? 그러면 이미 불법 체류를 하고 계시네요...."

 

... 그는 애를 써 피해의식을 가지지 않으려고 한다. 피해의식을 한 번 가지게 되면 결국 복수심이 생겨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중에 또 하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는 "원망으로는 세상의 원망의 악순환을 절대 끊을 수 없다"는 [법구경]의 말을 아직도 실천하고 있다.

 

 

 

[발췌] - 2권

 

# 국책, 특수 은행을 빼면 경제의 동맥인 은행의 자산에서 외국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60%나 되고, 알짜배기 기업 주식 역시 55-60%를 외국(미국, 일본, 서구) 자본이 차지하는 등 중심부 세력들에 의해서 사실상 통제를 받고 있는 한국 자본이 자기 텃밭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무슨 수로 '세계'를 경영하겠는가? 그런데 예속성의 한계는 뚜렷함에도 한국 자본 등 지배 집단들이 한 발짝 한 발짝씩 세계의 '주류'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은, 개발독재의 시기만큼은 못하더라도 그들을 지원하고 있는 국가가 그들 뒤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르웨이인들이 그렇게도 선망하는 한국의 통신 산업은 국고 보조금을 먹고 자라온 것이고, 부분적으로 조작으로 판명된 황우석의 연구에 역시 수백억대의 국가 연구비가 들어간 것이다. 미국에서는 경기 부양의 필요성이 있을 때 국가가 침략 전쟁 하나 일으키고 군수공업의 주식을 띄워주지만,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전형적인 토목산업 국가에서 경기 부양이란 첨단 기술 개발 투자와 함께 대개 시설 투자를 의미한다.

 

 

# 그런데 어느 정도 산업화된 나라 중에서 왜 하필이면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 '생계형 영세 창업'이 최근에 이렇게도 유행하게 됐는가? 나는 위에서 잠깐 언급한 한국 국가의 성격에서 그 대답을 찾고 싶다. 한국 국가는 재벌이나 토건 업체들을 중심으로 해서 돈을 풀어 성장률을 높이는 기술을 잘 구사해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노동 부문이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나 복지가 우선순위 중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아주 익숙하다. 자본이 노동자의 임금을 깎으면서 성장하면 다행이고, 복지란 국가가 아닌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IMF 이전에도 위정자의 '상식'이었지만 IMF 사태 이후에 개발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결합되어 노동은 그야 말로 '동네북'이 된 것이다.

 

 

# ..... 압축적으로 말하자면 한국 지배자들에게는 '군대 갔다 와야 남자다'와 같은 박정희 시대의 통념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이 대단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기합을 받아보지 못하고 '이적 행위'가 뭔지도 모르는 평민의 탄생은 지배자들의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한다.

 

 

#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 때 교문 앞 복장 검사에서 '불량'으로 걸려 엎드려뻗쳐, 원산 폭격, 교실까지 오리걸음 등 인격을 파괴하는 처벌을 받고 군에서도 면도를 당연히 해야 하는 걸로 습득하고 나면, 그 후 공무원 조직, 기업체에서 일률적인 복장 문화에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옷을 '제멋대로' 입거나 외모가 '단정'하지 못한 사람을 자기도 모르게 '괴짜', '튀는 놈', '뭔가 못 믿을 자', '군기 빠진 이'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복장과 외모의 규칙을 체화하게 되면 일상적인 권위주의의 또 다른 담론과 행동방식들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끔 된다. 그것이야말로 양복 정장을 '주류' 사회의 제복으로 만든 지배층이 원하는 바이다.

 

 

# 국토로 쳐들어와 물리적으로 짓밟는 외세들을 퇴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욕망에 대한 개인 주권을 회복하기는 훨씬 더 힘든 일일 것이다.

 

 

# 이렇게 한국 텍스트들을 읽으면서 용어들을 하나하나씩 반추할 때 느끼는 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군사적인 계통의 단어들을 일상적으로 너무 많이 쓴다는 것이다. 가령 진보 단체의 홈페이지에서조차도 우리 모 진보 정당을 '지원 사격'하고 있다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전장에서나 쓰일 법한 이 끔찍한 의미의 단어를 그냥 무심히 '도움'의 동의어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사격과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해보자면,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이 단순히 유린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하지 않는가? 다들 알겠지만 사각이라는 것은 사정거리 안에 있으면서도 총포 구조 등의 문제로 사격할 수 없는 범위를 뜻하는 대표적인 군사 용어다. 사실 군사주의적 일상 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상사와 동료의 폭력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공감하면서도 사각과 같은 군사 용어를 쓴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모순적인 일인데, 우리는 그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군사 용어에 익숙해졌다.

 

 

# 귀하신 몸(?)인 서구 소비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국 전통 등을 그들이 좋아할 만한 소비품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 문학의 참된 보배들은 아무리 번역을 해도 저들이 쉽게 이해하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예컨대 현대 시인 김수영의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라는 시구를 우리 세상의 쓴맛을 모르는 독자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풀이 민초들이고 동풍이 억압자들이고, 울고 눕는 것이 총구, 밥그릇 앞에서의 굴복이다"

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두발 제한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복종한 경험이나 불심검문을 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이 시를 소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그러나 참선이라는, 마음의 청소가 가능하게 만드는 역경에 대한 인내를 불교 내지 수행으로 생각했더 그 분의 불교관에는 선뜻 찬성하기 힘들었다.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치 현실 도피를 방불케 하는 신앙 행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예컨대 그 강사와 달리 고찰에서 평상심을 회복하는 방법을 모르는 강사의 후배들이, 늘 양서의 번역 등 많은 개인적 서비스를 요구하는 교수들의 등쌀에 못 이겨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정신 건강을 잃을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썩을 대로 썩어버린 이 구조에 어떻게든 맞서는 일이 조금 더 불교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백제가 일본에 불교 문화를 전수했다는 것은 개화기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자랑거리가 되어 교과서의 단골 메뉴이지만, 계백 장군 등 백제 정치인의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음에도 6세기 후반에 일본에 건너가 사찰 건축의 기반을 닦은 백제의 와박사 양귀문과 석마제미가 누군지는 도저히 모르는 것이다. 백제 정치사 대략을 기억하고 있어도 백제의 기와, 벽돌 제조법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관심조차 없다. 노동의 역사가 아닌 지배, 살육의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다.

 근대사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한강의 기적'의 바탕을 마련한 것은 1960년대의 직물 수출이었는데, 대원군과 김옥균은 알아도 100여 년 전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에서 근대적 염직 기술을 배워 온 안형중과 박정선 같은 기술자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도 역사 왜곡이 아닌가?

 우리가 북유럽만큼이나 노동자들을 존중하고 바르게 대우해주는 사회를 만들자면 우리의 역사 이해 역시 노동과 농민 수공업자, 기술자, 노동자 그리고 피지배민의 문화 및 투쟁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부르주아 정객들이 들먹이는 소수를 위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닌, 다수를 위한 '노동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각종 박물관의 주된 고객인 견학 학생들은 단순히 '과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뜻에 맞춘 국가주의적 방향으로 박제된 과거의 이미지를 시키는 대로 학습한다는 사실이다.

 그럼 학생들이 보고 외워야 할 과거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 견학생들에게 국가적 소속감을 주입해야 하므로 박물관 전시에서는 '우리'와 '남'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 예컨대 고대, 중세의 불탐, 사찰이나 불상, 사리함과 같은 불굴ㄹ 잘 이해하려면 멀리는 인도, 서역, 가까이는 중국, 일본 유물과의 구체적인 비교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의' 박물관은 '우리 것' 만을 주된 내용으로 내세운다. '우리 전통의 우수성'이 강조돼야 한다는 것이 명분인데, 우수성이 잘 드러나기 위해 보편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 둘째, '우리' 국가가 진선미의 화신으로 인식돼야 하는 만큼 박물관이 만들어서 보여주는 '우리'의 과거는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보기 좋은 청자, 백자, 산수화, 예복 등은 박물관의 제한된 공간에서 하나로 어우러져 보는 이의 미의식을 자극해 '우리'의 역사를 허물없이 예쁘게만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계급사회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과거만을 가질 수는 없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 셋째, 외세 침략과 같은 외부적 모순들은 박물관의 전시에 반영되지만 '우리' 역사의 내부적 모순들은 주로 은폐된다. 예컨대 '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는 불상의 조성이 사찰 노비의 강제된 노동과 국가라는 폭력 조직의 보시로 이루어졌다면 그건 부처의 가르침으로 보아 심각한 모순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비판의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우리 역사'는 감상용이지 반성용이 될 수 없다.

 

 

# 우리나라 학생들을 접하면서 내가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는 조선독립운동사에 대해 대다수가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는 점이었다. 대부분은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존경하면서도 독립운동을 현재와는 전혀 무관한 과거사로 여겼다. 이처럼 생각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 교육이 독립운동을 일률적으로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건국을 위한 민족적 투쟁만으로 묘사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식민지 암흑 속에서 투쟁의 중요한 목표는 일제로부터의 독립 쟁취와 민족국가 건설이었다. 문제는, 제도권의 서술이 '민족 독립' 만을 획일적으로 강조하고 식민지 시기 국내외 반체제 운동의 여러 갈래들에 담긴 보편주의적, 초국가적 지향은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가 그들에게 강요한 일제 타도라는 급선무만이 강조되고, 세계와 미래를 향해 나아간 그들의 고귀한 뜻이 도외시되어 학생들이 자연히 독립운동을 지금 우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박제화된 '옛날 일'만으로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 약 15년여 전 나는 러시아에서 1980년대 운동권에 몸담았던 한 한국 박사 과정 유학생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학생은 나에게 국립도서관에서 북한 관련 저서를 찾는 법을 물었다. .... 유명한 월북 작가인 민촌 이기영의 1940-50년대 소설 [땅]과 [두만강]도 읽어보라고 권했다. 월북 뒤 이기영의 체제 순응적인 행각은 아쉽게 여겼지만 나는 그의 소설의 독특한 토박이 언어와 옛날 조선 농촌의 일상과 농민들에 대한 입체적인 묘사를 좋아했다.

 그 작품이 그 박사 과정생에게 '또 하나의 코리아'의 발견이 되리라 확신했던 나는 후에 다시 만나 독후감을 물어보았는데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기법이 낙후하고 19세기 풍의 리얼리즘 수준을 못 벗어나고, 서구의 영향을 계속 받아온 남한 소설은 이미 다른 차원을 이루었기에 한국 사람에게는 이기영류의 작품은 문학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기영의 작품이 요즘 남한 소설의 세계와 다르기에 남한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약할 수도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진짜 이유는 말이 아니라 그 어조와 눈빛이었다. 서구의 '선진적' 수준에 도달한 우월적인 입장에서 '후진적' 북한의 문예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문예라면 무조건 '전체주의적 선전 아트'로 송두리째 취급하는 서구, 미국의 우파적 '주류'처럼 말이다. 인종주의, 서구 중심주의, 반공주의가 뒤섞인 서구, 미국인 '주류'들의 극히 편협된 북한관은 고쳐질 리 만무하다.

 그러나.... 남한의 주민들마저도 침략주의자들의 자기 우월주의적 세계관을 마냥 따라가서, 세계 체제에 편입되지 않은 죄 아닌 죄를 가지고 형제들을 촌스럽게 여기고 무시하면 정말 큰일이다. 1980년대의 지적인 세례를 받은 사람마저 '풍요의 1990년대'에 들어 그 풍요를 나누지 못한 북녘 동포 문학의 묘미를 이 정도로 모른다면, 더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나 북한을 '재앙 지역'으로만 아는 세대의 북한 인식은 어떨까? 북한에는 독특하며 배울 점이 많은 학술, 문학, 음악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이 인식할 수 있을까?

 

 

# 3년 전 서울 도심에서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전직 북파 공작원들이 열띤 시위를 벌여 국가를 상대로 '포섭 때 약속의 이행'ㅡ빼앗긴 청춘에 대한 보상ㅡ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었다.

 ... 북파 공작원들에 대해서는 국가가 일종의 '악덕 기업주' 노릇을 해왔다. 그 결과로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없는 '특무 간첩들의 항의 시위'를 보게 된 것이다. 사지로 보낼 사람을 포섭할 때 '봉첩'(물색 요원)이 금전적 보상과 제대 이후의 생활 안정, 직업 소개 등 약속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말하자면 다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부랑자, 극빈층 출신의 '포섭 대상'들에게 신분 향상, 계급사회의 중간 계층쯤으로의 '파격적인' 계급적 지위 이동을 미끼로 내놓은 것이었다.

 문제는, 한국과 같은 극단적인 계급사회에서는 자수성가형으로 사업에 극적으로 성공하거나 천재적 재능과 초인적 인내로 학력 자본을 획득하여 주류에 편입되는 등의 예외에 속하지 않는 이상, '맨 밑'으로부터 '중간'으로의 '파격적인' 계급적 상향 이동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신분 향상시켜주겠다"는 약속에 속아 넘어간 가난한 젊은이들을 기다린 것은 살인적인 훈련과 일상화된 인권 유린, 구타와 죽음이었다.

 

 

# 그런데 구조적으로 보면 말단 직원에게 하루 8시간 동안 웃어주는 감정 노동을 무조건 강요하는 대기업들의 '의무화된 친절'의 근저에 무엇이 깔려 있는가? '친절'이 '경쟁력'이 될 수 있는 배경은 '강제된 웃음'이 소비자에게 일으키는 무의식적 환상들이다. 대기업에게 약간의 돈을 가진 '개미' 소비자가 통계상의 한낱 수치에 불과하다는 것은 냉정한 현실이지만, 은행이나 항공사 직원의 웃어주는 태도가 어렵게 벌고 어렵게 사는 소시민에게는 순간적으로 '왕 대접을 받는' 찱각을 일으킨다. 항상 웃어주느라 입이 아픈 직원도, 그 직원의 '친절도'를 감시하는 윗사람들도 자신에 대한 하등의 특별한 존경이나 동정을 가질 리가 없다는 사실을 '개미' 소비자도 알고는 있지만 일단 본인도 모르게 흔쾌해지고 만다. 독점 자본주의의 '친절'이라는 주술에 걸리는 것이다.

 이쯤 되면 바쁘고 짜증나는 자본주의적 지옥 생활에 찌들고 지친 소시민에게 '친절한 서비스'를 해주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쁠 것이야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지배인의 감시 속에서 '친절히 모셔야'만 하는 창구의 말단, 대개의 경우 여성 비정규직 직원은 저녁쯤 되면 말 그대로 파김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한국 재벌의 모델인 일본 이상의 '친절도'까지 강요된다면 노동의 강도가 훨씬 높아진다. 더군다나 여성인 창구 직원의 '친절도'를 남성 계장이나 과장이 감시하는 것은 일본과 마찬가지지만, 창구 직원의 상당수가 차별의 대상인 비정규직이라는 상황은, 비정규직 양산 측면에서 아직도 한국에 뒤지고 있는 일본과 다른 점이다.

 둘째, 말단 직원이 고객에게 웃어준다고 해서 그 말단 직원이 대기업 조직 내에서 친절한 대접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여성이 대다수인 말단 직원에 대한 각종의 언어적인 성희롱이나 반말, 명령의 문화가 한국의 '친절한' 항공사나 은행, 대규모 유통 업체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친절'은 어디까지나 '고객 붙잡기'를 위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 베끼기 식의 획일적인 상술일 뿐이지 그 업체의 '문화'나 '분위기'와는 무관하다.

 셋째, 특히 유통업의 경우에는 대형 업체의 '친절'은 영세 업체를 경쟁의 장에서 내밀어버리는 도구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영세 업체는 가격 경쟁부터 버티기 힘들지만 대자본의 획일적인 규제와 감시가 필요한 '모시는' 태도의 강요를 더더욱 하기 힘들다. '영세 업체의 도산'이라는 것은 물론 어디서나 후기 자본주의의 독점화, 대형화 경향의 합법칙적 반영이긴 하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사회 안전망이 전무한 한국에서는 이 경향이 해당 업자나 그 직원들의 빚더미 신세, 건강 상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비관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갈 때마다 "안녕하십니까"를 로봇처럼 연발하는 대형 체인점보다 연로한 주인 아저씨가 말투도 투박하고 인사도 잘 안하는 동네 슈퍼로 더 잘 간다. 어찌할 수 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유통 구조를 이용해야 할 신세라면 차라리 약하고 어려운 쪽을 도와주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바트자갈이 그때 나에게 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