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1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310쪽 | 223*152mm (A5신) | ISBN(13) : 9788984310858 2003-02-07 |
한국은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가공된 역사가 아닌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그러나 '사(史)'라는 것은 결국 기록이므로 누군가의 주관이 배제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여러 시각에서 바라본 역사를 가르쳐 입체성을 지켜주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다소 좌 쪽의 시각이 아니냐는 말은 들어도 왜곡했다는 말은 듣지 않는 책이라 알고 있다.
먹먹하다.
남은 세 권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발췌]
# 1930년대에 국내의 반일운동, 특히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이 쇠퇴한 것은 결코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희망이 민족독립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 만주국에 주둔한 관동군과 만주국군이 소련이라는 가상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면, 이남의 군부는 '북괴'라는 주적 없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
# 좌우대립의 대치구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과 계급적 입장이지, 민족적 입장이 아니었다. 좌우대립의 구도는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와는 전혀 다른 논리와 기준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렇다면 좌우 대립의 지형은 친일파들에 어떤 점이 유리하였을까? 한 예로 일제의 고등계 형사였던 조선인들을 보기로 하자. 이들은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 구도하에서는 일제의 앞잡이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 살해한 민족반역자들이지만 좌우대립의 구도 속에서는 공산당 때려잡는 데 풍부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로서, 이승만으로부터 "자네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발 뻗고 잘 수 있다"는 칭찬을 듣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친일파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다. 친일파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크게 기여한 분의 글을 잠시 보자.
"친일파 문제는 한국사회의 원죄이다.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한국사회가 발전할 수도 없고 존재하기도 어려운 그런 난제이다. 민족분단의 문제가 여기서 비롯되었고 경제종속의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군사독재가 친일파의 사생아이고 사회혼란이 그 결과물이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문제이건 친일파와 관련이 없는 것은 없다. ... 실로 오늘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모든 병폐는 모두가 친일파가 저지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 친일파 청산의 좌절은 우리의 현대사에 잘못 끼운 첫 단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잇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친일파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친일파만 제대로 청산하였으면 모든 문제가 다 풀렸을 것인가? 그렇다면 친일파 청산에서 남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던 이북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이 백범 선생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이 환국한 뒤 이 당의 재정부장을 지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백범 선생 역시 해방 뒤의 현실정치에서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라도 일정하게 친일파들과 손을 잡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백범 선생 스스로 남북협상에 임하면서 자기비판을 했다. 다른 하나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방응모가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이라는 공식직함을 맡을 정도로 인적 청산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방응모나 <조선일보>의 친일이 그냥 넘어가도 좋은 문제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백 보를 양보하여 그들의 친일이 하루하루 신문을 내기 위해 부득이한 행위였다 하더라도 방응모와 <조선일보>는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최소한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서 민족지라고 자랑하는 망발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 유엔이 '저노사이드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을 채택한 1948년 12월 9일은 제주도에서 4.3사건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절정에 달했던 때이고, 이 협약이 발효된 1951년 1월 12일은 함평에서 제 3차 학살이 일어난 날이다. 제노사이드 협약을 채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다시는 안 돼(Never Again)"라는 구호를 외치는 그 순간 한반도에서 엄청난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만큼 제주는, 아니 한반도 전체가 학살을 감시하려는 인류의 양심과 이성의 눈길이 닿지 않는 외진 땅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한국전쟁은 흔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불리는데, 그중에서도 학살은 잊혀진 전쟁 중에서도 가장 깊숙이 묻혀버린 사건이었다.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00만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모르는 척하거나 정말로 모른 채 반세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엄청난 일들이 묻혀 있음을 애써 외면한 채, 또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상의 삶을 살아왔다.
# 민간인 학살이 남긴 부정적 유산이야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다할 수 없지만, 꼭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박멸의 기억'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나에게 맹복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어딘가 부족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수자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 이건창의 할아버지 이시원은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 당시에 아우와 함께 양잿물을 마시고 목숨을 귾었다. 이시원은 강화도력이었던 철종이 임금이 된 뒤 강화에 어진 이가 살고 있다던 옛 소문을 듣고 등용하여 잠시 이조판서를 지낸 바 있었다.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하자 가족들은 그에게 울면서 피난을 갈 것을 청하였다. 78살의 노령에 이질이 걸려 몇 달째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이시원은 피난이 무슨 말이냐며 관원들이 다 도망을 가 순사한 자가 하나도 없는 마당에 향대부마저 도망을 가면 후세의 사가들이 무어라 하겠느냐고 꾸짖었다. 그리고는 들것에 실려 조상의 산소를 돌아보고 동생과 함께 약을 먹고 태연히 담소하다가 세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손자 건창에게, 다른 한 통은 일가 식솔들에게, 그리고 약기운이 퍼져 채 끝내지 못한 마지막 한 통을 막내 아우에게.
열다섯 어린 이건창은 이 장엄한 의식을 목격하며 자랐다. 그렇다고 이건창이 할아버지의 자결에 발목을 잡혀 위정착사파나 수구파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중국 사정에 정통했고, 개화당의 인물들과도 깊이 교류했다.
# 고향에 돌아온 황현에게 끝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아편을 준비했다. 그 밤 조선의 마지막 대시인인 황현은 절명시를 짓는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 지식인이 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다'
(秋燈俺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추등엄권회천고 난작인간식자인)
몇 해 전 첫 손자를 보았을 때 갓난아이에게 글 아는 사람이 되어라 하고 축원해 주었던 그 황현이었다.
벼슬을 살지 않은 포의의 황현이었다. 그는 유서에 '내가 꼭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라며 '황은이 망극해서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지만' 500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나라가 망하는 날에 죽는 사람이 하나 없다면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냐며 치사량의 아편을 먹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지만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어 목숨을 끊는다고 절명시에 썼다. 그런 황현이 약기운이 퍼져갈 때 동생에게 웃으며 고백을 한다.
"죽는 것도 쉽지 않아. 내가 약을 마시려다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어. 내가 그처럼 어리석다네."
# 그들만이 아니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석영, 이회영, 이시영 형제들, 모두 판서의 자제로 한 분은 양자로 가서 영의정의 아들이요, 한 분은 고종의 측근이요, 다른 한 분은 영의정 김홍집의 사위였다. 그 6형제가 지금으로 치면 재벌 부럽지 않을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가 독립운동의 기에 나섰다. 그 지체 높은 집안의 부인들이 독립군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전에 집에서 부리던 종들을 위해 밥을 짓고 빨래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해 지나지 않아 가져간 재산이 떨어지자 대가댁 마님들이 몸파는 여자들 옷을 지어주며 생계를 꾸린다. 1970년대, 1980년대 대학생들이 '위장취업'을 한 것이 기득권을 버린 것이라지만 어찌 여기에 비길 수 있을까?
옛 보수주의자들의 행동을 보면 요즈음의 편가르기 논쟁과 관련하여 드는 생각은 편이란 것이 꼭 이념만으로 갈리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이다. 이건창이나 황현같이 동학농민군을 때려잡자고 한 보수주의자들의 행적은 필자 같은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감동적이다. 이념의 문제라고만 하기에는 한국의 이른바 진보파는 그 부리부터 너무 보수적이다. 장준하,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김수영, 리영희 등 실천과 이론으로 한국의 재야와 진보진영에 뚜렷한 영향을 끼친 분들이 해방 직후 또는 한국전쟁 전후에 보인 행적을 보자. 장준한ㄴ 극우민족단체 민족청년단 간부, 함석헌은 신의주반공의거의 배후이자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한 사상가, 문익환은 미군 통역장교, 계훈제는 우익반탁진영의 행동대장, 김수영은 의용군에 나갔다가 탈출하여 거제도에 수용된 뒤 남쪽을 택한 반공포로, 리영희는 국군 장교 등이었다.
이 정도 경력이라면 이 관제 '빨갱이'들의 사상적 검증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닐까? 그들은 민족분단의 특수상황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설 땅이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로 인해 사라졌다면,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와중에 철저히 이 땅에서 사라졌다. 새가 하늘을 나는 데 필요한 좌우의 두 날개가 모두 꺾인 것이다. 그리고 이남에서 정권은 백범 김구 선생처럼 너무나 보수적인 분을 여순반란 사건의 배후조종자인 빨갱이로 몬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의 덕목인 도덕성, 일관성, 책임감, 지혜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당치 않은' 족속들이다. 그들은 한번도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적도 없고, 희생한 적도 없다. 한국전쟁 때 마오쩌둥도,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도 아들을 바쳤지만 그들은 한강 다리를 끊고 가장 먼저 도망갔다가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았다. 그들은 일본의 보수주의를 흉내냈지만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러일전쟁 때 너무 큰 희생으로 일본 시민들이 노기 사령관에게 항의하러 부두에 나갔다가 아들 셋의 유골을 안고 배에서 내리는 노기 앞에서 같이 울었다는 일화가 있으나 자칭 우리으 보수파는 그런 신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일부 부유층은 오히려 훨씬 살기 좋아졌다면서 "이대로!"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냉전과 민족대립을 넘어 화해로 가는 마당에 이들은 또 "이대로!"를 외치며 길을 막는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지, 보수주의자들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똑같은 콩으로 똥을 만들 수도 있고 된장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재질도 색깔도 비슷해 보이지만 수구와 보수의 차이는 똥과 된장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수구로 매도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보수적 지식인이라면 시민단체들을 홍위병이라고 욕할 것이 아니다. 장엄한 최후를 맞은 한말 보수주의자들의 엄정한 전통은 일제의 간지에 의해 온건하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이 더럽혀짐으로 인해, 그리고 친일잔재 청산의 좌절로 인해 계승되지 못했다. 군사독재에 의해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이 유린당할 때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사람들은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진보와 보수의 편가르기에 앞서 보수세력이 먼저 수구세력과 스스로 결별해야 하지 않을까?
# 방북단의 평양에서의 행동을 놓고 보수언론들은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을 방불케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해방 직후에는 분명히 좌익이 존재했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 세계사적인 기준에서 볼 때 좌파라 할 만한 세력이 형성돼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신자유주의조차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일삼는 극우파의 기준에서 볼 때 좌파가 있을 뿐이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이후 이 땅에는 거의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유지돼왔다. 형성되어 있지도 않은 좌파세력을 상대로 수구세력은 우리 사회가 악령이 떠돌고 홍위병이 설치고 사회주의자들이 날뛰는 혼란에 빠져 있다며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을 방불케 한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난센스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가 좌우대립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에 그런 역할을 한 자들은 친일파였다.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가 지속된다면 친일파들이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를 이념이라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좌우대립의 구도로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미국에 돌아와 의회에서 연설할 때 자신은 초등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는 수업을 중단하고 라디오로 중계되는 연설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 그 교수는 다른 급우들과 함께 맥아더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에 감동하여 엉엉 울엇는데, 나중에 일본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맥아더의 사람됨을 알고는 너무 억울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군사독재정권 시절, 불의에 항거해 중고생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면 당장 퇴학감이었다. 4.19에서 대학생들이 주역이었다지만, 중고생들의 역할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 기억을 간직한 군사독재정권은 고등학생들이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가는 것이다.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불온한 꿈을 이뤄가면서.
#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조선시대의 지배층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유의 글을 쓰다보면 당연히 지배층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지만, 조선시대의 지배층들은 나름대로 매우 엄격한 자기관리의 잣대가 있었다.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에도 조선왕조가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당시 지배층이 그들 나름대로 엄격한 책임감으로 사회를 지탱해왔다는 점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을 선비정신이라 부르든 유교 지식인들의 자기성찰이라 부르든 불행히도 오늘날의 상류층은 그런 전통사회 지배층의 책임감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렇다고 무의 전통을 이은 서구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체현하는 것도 아니다. 이 땅의 주류는 정녕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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