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오노 후유미] 시귀 세트

일루젼 2012. 8. 1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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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귀 세트 - 전5권 - 8점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북홀릭(bookholic)

2552쪽 | 186*128mm | ISBN(13) : 9788925871653

2012-07-01

 

 

 

 

 

 

 

 

 

 

 

 

 

 

시간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빌렸던 책이 오노 후유미의 시귀 1권(들녘)이었다. 그녀의 십이국기를 상당히 좋아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시귀라는 작품 자체에 대해 큰 흥미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에 관한 기억은 그리 좋지 못하다. (2권을 읽지 않았다는 것만이 명확히 기억난다)

그리고 14년만에 완역으로 한국을 찾은 시귀.

약간의 망설임 끝에 예약 판매본을 구매했고, (덕분에 이벤트에도 당첨 되어 학산 추리 문고본을 선물 받았다)

다소 긴 망설임 끝에 손에 쥔 시귀는 도착한 날 읽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로 재미있었다.

 

시귀의 '재미있음'은 다소 복잡한 의미의 '재미있음'인데....

우선 발상 자체는 읽히는 시점인 지금을 기준으로 하자면 크게 놀라울 것이 없다고 하겠다. 처음 쓰여졌을 당시는 무덤에서 다시 일어난 '시귀'라는 설정 자체가 신선한 것이었을 수 있으나 이미 다수의 좀비물과 뱀파이어물이 나와있는 지금에 와서 그런 설정은 크게 특이한 것이 아니다.

 

시귀의 강점은 세부적인 설정과 다양한 캐릭터, 그리고 주 스토리와 병합되는 세이신의 소설-그 원류로서의 카인과 아벨-이다.

오노 후유미의 다른 글인 '십이국기'에서도 그랬지만 그녀는 참으로 많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다른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에서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그 점이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온도가 결여되어 있는데, 결국 모든 캐릭터는 능력치의 차이가 있었을 뿐 '머리'로 생각하는 이들이었지 감정적인 온도가 있는 등장 인물은 없었다. 나오키는 감정형 캐릭터가 아니라 슈야처럼 될 수 없음에 절망하는 캐릭터이다)

 

이 소설의 '무서움'과 '공포'는 대립에 있다. 

작가는 모든 부분을 대립으로 풀어나가는데, 맨 처음 소방서에서의 시작은 '소토바라는 마을과 그 외부'의 대치를 보여준다. 이는 마을 내부에서 살아가는 '나츠노'나 '메구미'의 도시에 대한 열망으로도 드러난다.

외부로부터 격리되어 '죽음으로 포위된' 소토바는 낙원인가? 황야인가?

 

마을의 모든 인물들은 자신만의 사정과 고민을 품고 있지만 크게는 토박이인 '내부인'과 유입인인 '외부인'으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스토리가 이어짐에 따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로 대치되며, 그 '죽은 자'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자'와 '다시 일어난 자', 즉 '시귀'로 다시 나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소설의 포인트는 '시귀'의 잔인성과 그들을 박멸해나가는 과정에서의 고난이 아니다.

살기 위해 죽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살해는 죄인가? 라는 물음을 지고 부딪치는 것은 '시귀'와 '인간', 둘 모두이다.

'인간'이 그 죄를 사함받는다면 '시귀' 역시 그러해야 한다.

 

세이신의 글 안에서 이어지는 '카인'의 고뇌는 작은 주지 세이신이 품는 마을의 일들에 대한 고뇌와 맞물려 변화한다.

 

- 나는 왜 동생을 죽였는가. 

 

때로 세이신은 스나코와 대립하기도 하고, 때로는 친우이자 의사인 토시오와 부딪치기도 한다.

 

그 질문에 대한 인물들의 답과 반응은 모두 다르다. 

이는 같은 질문에 대해 같은 답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단순함이 아닌, 보다 근원적인 다름이다. 

그 생각들과 행동들의 부딪침이 5권이라는 긴 흐름 동안 '시귀'를 이끌어간다. 

 

쿄코에 대한 토시오의 행동은 비판받아야 하는가? 나는 그에게 격렬히 동의하지만 그에 대한 세이신의 반응 역시 존중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세이신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것을 조금만 비틀면 현재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반응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답은 하나일 수 없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답만이 존재한다.

 

'가축'에 대한 토오루와 리츠코의 상반됨 역시 그러하다. 토오루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리츠코가 더욱, 더욱 아프게 다가왔으리라. 이는 마사오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결말이 매우 '시귀' 답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무척 불만스럽다. 

내가 느끼고 이해한 세이신은 거기서 얻은 답으로 만족했어야 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오히려 그런 결말이 그가 얻은 답에 더 합치된다고도 느낀다.

 

'시귀는, 다시 일어난 자는, 이미 신의 손바닥을 벗어났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이상 인간적 잣대로 스스로를 억누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책이었다.

해서 리뷰를 위해 며칠의 시간을 묵혔으나 이 이상의 리뷰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여기까지 끄적인다.

후유미 상. 미안합니다.

 

 

 

[발췌]

 

 

- 1권 -

 

 

# 자애로운 동생은 그가 흉기를 손에 들었을 때, 형이 살인자가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생은 살해당할 자신보다 살인을 저지를 형을 가엾게 여겼다. (굵은 글씨 - 세이신의 글)

 

 

# 어째서 결심이 서지 않을까. 어머니는 리츠코가 마을에 남아서 집을 다시 지어 주고 앞으로 계속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 어쩌면 자신도 그걸 바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노골적인 기대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의 기대를 떠올리면 도망치고 싶어지지만 자신이 도망치면 이번에는 여동생이 얽매이리라. 그런 생각에 역시나 마음이 무거웠다. 그딴 마을이라고 험담하는 상대와 도망친다면 더욱이 무거워지리라.

 

 

# '모닥불 따위를 피우니까 그렇지.'

유령에게 집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불을 피우다니.

'산에서 찾아왔다면 당연히 귀신이잖아.....'

 

 

# "아저씨, 하나 가르쳐 드리죠."

스나코는 몸을 내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손목을 긋는 정도로 사람은 죽지 않아요."

세이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스나코는 상체를 둥실 일으키더니 미소를 띤 채 몸을 돌려 돌층계를 가볍게 총총 내려갔다. 밤길에 원피스가 흔들흔들 멀어졌다. 스쳐 지나가며 재앙을 내리는 악마처럼.

강도라도 만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소녀가 사라진 길을 바라보았다. 일어설 새도, 불러 세울 새도 없었다.

"그래, 맞아."

세이신은 뒤늦게나마 대답했다.

"...... 아마 나도 알았을 거야."

 

 

# 여자가 우아하게 웃었다. 준코는 다른 종류의 생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가씨도, 중년 여자나 어느 집의 며느리도 아니었다. 남자 역시 그랬다. 마흔을 넘어서 아저씨가 아니라 남자로 있을 수 있는 남자라니. 준코는 지금까지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을 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저 같은 구 소토바 주민은 이걸 이론이 아니라 피부로 압니다. 마을의 처음 내력, 역사에서부터 길러져 온 무조건적인 각인이 있어요. 삼역이라고 하면 특별하고 위대하다고요. 그런데 나중에 마을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그런 감각이 없어요. 역사를 모른다면 더욱더 삼역이 뭐라고 저렇게 어깨에 힘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을 테죠. 특히 단가가 아니라 절과 접점이 없는 신 거주민은 절이 으스대는 걸 한층 더 부조리하게 느낄 거예요. 결속이 굳건한 마을 안에서 자신들이 사사건건 차별받고 잇다는 의식을 갖게 되죠. 배타성의 정점에 절이 있으니 절에 대해 왠지 모를 반감이 생길 수밖에요."

"그랬군요....."

하세가와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신 거주민, 새로 정착한 사람들이 타관 사람한테 텃세가 더 심해요. 물론 어느 쪽 진영에도 예외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오래된 집이 외지인에 대해 대범해요. 구별은 해도 노골적으로 차별은 하지 않죠. 새로운 사람이 더 노골적이에요."

 

 

# 분명히 그는 고향 언덕에서 추방당했다. 하나, 이렇게 황야를 유랑하는 악령들 또한 그와 똑같이 저주받은 존재이며 신이 만든 질서 안에서 쫓겨난 자들일 터였다.

너희 역시 추방자가 아닌가.

그의 노성에 악령들이 웃었다.

우리는 추방자가 아니다.

우리는 살인자가 아니다.

이 땅에 다다름은 죄 때문이 아니요, 심판 때문이 아닐지니.

마음속의 미련이, 망집이, 증오가, 회한이 거칠고 추잡한 땅에 몸을 옭아매노라.

그는 입을 다물었다.

 

 

 

- 2권 -

 

 

# "그래도 좋지만, 먼저 병명을 특정하지 못하면 관청은 움직여 주지 않을걸. 누가 뭐래도 그치들이 말하는 '전염병'은 전엽하는 병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기존의 법률이나 매뉴얼에 전염벙이라고 적힌 걸 말하니까. 대단한 사태로 번지지 않으면 원조는 기대하기 어려워. 녀석들도 손쓸 수 없으니까."

 

 

# 죽음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태어난 이상 죽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인간이 죽는 건 당연한 일인데 주변 사람의 죽음을 당연하게 느낀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반대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게 이어진다. 재난이라도 만난 것처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또 일어났다 싶은 감각. 평소에 의식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불합리한 현실을 날조해 자신에게 들이민 것 같은, 불쾌감인지 두려움인지 불안인지 모를 괴이한 정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가 하는 감개와 또 이어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 그게 사실이 되었을 때의 '역시'라는 원초적인 두려움. 꼬집어 확실히 알 수 있는 명료한 감정은 아니지만 돌아보고 말로 해 보면 그렇게 표현해야 하리라.

 

 

#  마술이나 저주에 관한 책, 역사에 관한 책, 수상한 종교의 소책자. 그것들 사이에 물리학과 생물학 책이 들어 있거나 아이를 대상으로 시시한 교훈을 늘어놓는 소설이 뒤섞여 있기도 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들을 모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순교자를 동경한 건 틀림없다. 그는 뭔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갈망했으나, 솔직히 뭘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지 스스로도 몰랐던 것 같다. 줄곧 여기서 귀의해야 할 섭리를 찾았다. 아니면 직감적으로 가슴에 품은 자신의 신을 표현할 어떤 말을 찾고 있었던 걸까?

(-> 내 방이 공개되면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하겠지......)

 

# "무로이 아저씨에게 소중한 누군가가 있다고 치고, 그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만큼 살게 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아세요?"

"의사가 되면 되나?"

스나코가 웃었다.

"아뇨. 죽이는 거예요."

세이신은 멈칫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상대를 살게 하겠다는 건 상대의 죽을 때를 지배하고 싶다는 이야기니까 자신의 뜻대로 상대를 죽이는 거죠. 그러지 않으면 누가 그 사람을 죽일 테니까. 무로이 아저씨의 손에서 빼앗아 갈 테니까."

스나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재미있죠?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니 괴로운 일이잖아요.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내 인생에서 앗아 가다니, 그렇게 잔혹한 일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걸 피하려면 상대를 제 손으로 죽이는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그런 생물이에요."

 

 

# 어째서 인간 무리는 그런 행동밖에 할 수 없을가. 신앙은 마음이 기댈 곳이며 사람의 마음에 안녕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신앙이 사람을 구분하고 배척하는 대의명분이 되는 걸, 그리고 아무도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걸 세이신은 견딜 수 없었다.

안쪽을 향해서는 자상하게 웃으며 자애마저 내비치면서도 바깥을 향해서는 냉담하고 잔혹한 행동을 한다. 그 양면성에 오한이 났다. 혹시 이런 데서 비틀거리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걸까.

 

 

# "사실 감기란 병은 없어. 요즘에는 감기 증후군인가로 부르잖아. 요컨데 상기도염이지. 기도 윗부분에 염증이 생기는 거야. 찬 공기의 자극이나 알레르기로 염증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바이러스성 염증이지. 사실 바이러스성 염증은 무슨 약을 먹어도 안 들어."

"흐음."

"감기에 걸리면 일단 푹 쉬는 수밖에 없어. 먹고 자고 체력 다지기밖에 없는 거지. 감기약이란 그걸 돕는 거지 감기를 해치우는 약이 아니니까 먹기만 해서는 안심할 수 없어. 하지만 특히 노인들은 약만 먹으면 낫는다고 생각하잖아? 이걸 먹으면 한 방에 낫는다고들 하지. 아무리 약을 먹어도 쉬지 않으면 나을 리 없는데."

 

 

# "그래. 여섯 세계를 전생하니까 육도 윤회라고 해.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여섯 세계지. 재라는 건 재판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판결을 내려 주세요, 재판을 빨리 마치고 극락으로 보내 주세요, 하고 빌기 위해 올리는 거야."

카오리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 나츠노는 속으로 어느 집도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여기는 '집'이 아니다. 애초에 부부라는 형태와 집이라는 제도를 거부한 사람은 자신들이지 않은가. 여기는 단순히 두 남녀와 한 아이가 같이 사는 장소일 뿐이다. 부모의 삶을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은 없지만, 당연함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당연함을 요구하는 무신경함이 지긋지긋했다.

 

 

# 원망의 소리를 들었다고 특별히 마음이 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토시오의 조바심을 이해하고 있다는 게 전해지지 않아 슬펐다. 초조한 토시오의 마음을 아니까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 주고 싶어서 했던 행동임을 이해해 주지 않아서 슬펐다. 아니, 토시오도 알고 있으리라. 알지만 스스로에게 조바심이 나서, 지금은 세이신에게 화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토시오가 나무란 사람은 세이신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그것마저 잘 아는 세이신은 부당하다고 화낼 수도 없었다. 나중에 돌아보고 더 깊은 자기혐오에 사로잡힐 만한 행동을 해 버린 토시오가 측은했다.

 

 

# "인간은 고립해 있어요. 진정한 의미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죠. 아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서로 말로 안다고 확인해도 정말로 이해했는지 진실은 몰라요. 이해와 공감을 바라며 타인과 접촉하지만 이해나 공감 따위 전부 환상에 지나지 않아요. 참 애달픈 일이죠. 아저씨의 책을 읽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요."

 

 

# "하지만 사실 난 절대적인 뭔가를 믿지 않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없다는 걸 아니까. 절대적인 하나의 가치관은 모든 걸 통제한 상황에서밖에 생겨나지 않아. 통제한 결과 절대적인 지위를 얻고 떠받들어진 이상 따위, 논할 가치가 없어.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한 이상주의자야."

 

 

 

- 3권 -

 

 

#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에덴동산은 낙원이죠? 아담과 이브는 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당했으니, 낙원 밖은 유형지가 아닌가요? 노드는 유형지의 바깥이죠. 유형지 밖은 대체 뭘까요?"

세이신은 눈을 깜빡거렸다.

"축복받은 땅과 축복받지 못한 땅. 낙원과 유형지. 세계가 그렇게 이분되어 잇다면, 유형지 바깥은 낙원이 아니었을까요?"

스나코는 멀리서 웃었다.

"재미있지 않아요? 카인은 죄를 짓고 유형지에서 쫓겨나 낙원으로 추방된 거예요. 신은 죄를 저지른 카인을 미쳤다고 보고 낙원에서 보호하기로 했는지도 모르잖아요. 아니면 유형지의 죄인을 죽여 심판한 공으로 죄를 용서받고, 신이 낙원으로 불러들였을 수도 있죠."

세이신은 몸을 일으켰다.

"벌을 받아 마땅한 유형지의 죄인을 죽인 사람은 살육자인가요, 아니면 정의의 사도인가요?"

스나코는 작게 웃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불러세울 겨를도 없이 기울어진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세이신은 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야 그는 의구심을 품었다.

'낙원과 낙원을 둘러싼 유형지.'

언덕 주위에 황야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황야 안에 언덕이 존재하는 것일까.

'죄인을 죽인 사람은......

언덕 기슭에 빙 둘러쳐진 성벽은 신이 만든 질서의 끝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 죄는.'

아니면 신이 내린 기적의 한계를 가리키는 것일까.

 

 

 

- 4권 -

 

# "쿄코, 부탁이야."

토시오는 이제껏 아내에게 뭔가를 진심으로 바란 적이 없었다.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인 간절한 바람이다.

"...... 되살아나 줘."

 

 

# 마을을 구하고 싶다면 수단의 옳고 그름을 따질 때가 아니다. 마을은 그런 여유가 없다. 분명히 이건 양자택일이다. 마을을 구하고 싶다면 시귀를 뿌리 뽑을 필요가 있고, 뿌리 뽑지 않으면 참화는 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은 수단의 옳고 그름에 얽매인다. 세이신은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시귀의 삶이 우선인가, 인간의 삶이 우선인가. 세이신이 내놓아야 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다. 인간이 우선이다.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귀도 아닌 세이신이 시귀의 삶과 인간의 삶을 등가로 다루는 건 인간으로서 분을 넘어선 행동이다. 인간을 굽어보고 시귀조차 굽어보는 건 신의 사고다. 그러나 세이신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시점에 머물러야만 하고, 그럴 경우 대답은 정해져 있다. 시귀는 위협이며 적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시귀를 섬멸해 인간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 "진심은 알 수 없어. 의사소통은 할 수 없어. 그렇다고 모든 걸 인간에게 맞춰 해석하고, 비탄이 가득한 음색의 목소리와 눈빛, 비명 같은 인간이 지닌 표식을 동물에게서 읽어 내 그 마음을 이해했다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시귀는 분명히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인간의 공포와 슬픔도 이해할 수 있어. 같은 체계의 기호를 공유한 생물이니까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하지만 그뿐이야. 같은 체계의 기호를 공유하든 공유하지 않든, 시귀가 인간을 덮치는 이유는 덮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야. 사람이 짐승을 사냥하는 것과 아무 차이도 없어. 인간은 분명히 겁먹고 슬퍼하고 두려워하지.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특별한 게 아니야. 특별히 가치가 있거나, 가치가 없는 게 아니야. 같은 체계의 기호를 공유한 인간과 시귀의 관계가 특수할 뿐이지."

"같은 기호..."

"먹잇감을 가여워할 필요는 없어. 이건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당연한 일이니까. 그건 인간이 생명을 사냥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것이야. 시귀와 인간의 관계는 특수해서 특별히 잔인한 일이라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이 생명을 사냥하는 것과 똑같이 잔인하고, 똑같이 당연한 일이야. 조금도 다르지 않아. 우리는 시귀고 여기는 사냥터야. 인간은 먹잇감, 그 이상의 의미 따위 없어. 그저 우리의 먹잇감은 무척 강하고 교활해서 방심하면 역습당하지. 인간의 짐승 사냥 이상으로 위험한 사냥이야. 그러니까 주의가 필요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

 

 

# "하지만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아는 것과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마음먹는 건 별개예요. 내일이라도 죽을지 모른다고 아는 건 생명의 덧없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마음먹는 건 생명에 덧없음에 절망해 미리 내던지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덧없어도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내던져도 될 정도로 값싼 생명은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서 세이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을의 붕괴를 긍정해 버린 인간이 할 말이 아니다. 자조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 매도당할 만한 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는 단순히 이상하게 여겼다. 그가 아는 이웃들은 자애로 가득하고, 신의 영광을 믿고, 경건하고, 이타적이었다. 푸른 들판 한쪽에 고립한 그에게 손을 뻗고, 그가 조화를 파괴하는 것이 두려워 그것을 거절하면 상처 받을 정도로 선량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웃들은 질서라는 조화에서 최종적으로 비어져 나온 그에게 손을 내밀려 하지 않았을까. 동생을 질투하는 가난함을 가엾게 여기고, 질투 때문에 죄에 발을 디딘 그를 위해 슬퍼하지 않았을까. 죄를 감추려 한 어리석음, 신을 경시한 몽매함, 그 모든 것을 이웃들은 그를 위해 슬퍼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분노했다. 그를 매도하고 돌을 던졌다. 어찌하여 화를 내는가, 어찌하여 욕을 하는가, 어찌하여 돌을 던지고 죄인을 또다시 심판하려 했는가.

그가 질서의 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죄인이고 그들의 질서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웃들에게는 같은 질서를 공유하는 동포에 대한 자비는 가졌어도 적에게 드리울 자비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이웃들은 사람을 미워하고, 비난하고, 매도한다. 그런 무자비함을 동포에게 향한 적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름을 엄격히 구별하고, 자비와 무자비를 가려 쓰는 자를 과연 진실로 선량하다 할 수 있을까.

정말로 그들에게 죄는 없었는가. 그는 처음으로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는 언덕을 돌아보았다. 언덕은 광대한 황야 속에 작고 완고하게 닫혀 있었다. 언덕 주위에 황야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확신했다. 황야에 언덕이 있는 것이다. 바깥세상을 거절하고, 죄로 분류한 것을 황야로 쫓아내 간신히 낙원으로서의 자신을 지킨다.

 

 

# 세이신의 심정은 안다.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해한다. 옛날부터 세이신은 결과보다 과정에 구애받는 구석이 있었고, 경과에 납득이 가지 않으면 아무리 바란 결과라도 포기해 버릴 인간이었다. 토시오는 그 반대다. 문제는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이며, 과정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세이신이 토시오의 방식을 벅차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런 녀석인 줄은 알고 있었다.

 

 

 

- 5권 -

 

 

# "제 머리로 생각할 마음이 없어. 제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의지가 없어. 아우성치면 현실이 자신들 입맛에 맞게 바뀌리라 믿지. 그 밖의 생각 따위 하고 싶지도 않은 거야. 놈들은 세상이 뭔지를 몰라. 세상은 요람이 아니야. 주위에 있는 건 울면 달려와 분유를 주거나 기저귀를 갈아 주는 엄마나 보모가 아니야. 제 머리로 생각하고 제 발로 걸어가지 않으면 자신의 안전조차 손에 넣을 수 없어. 그런데 그걸 인정할 마음이 없는 거라고!"

 

 

# "그래... 아버지의 마음은 알아. 아버지는 훌륭한 주지로 있기를 강요하며 자신을 그곳에 밀어 넣은 주위를 증오하셨지. 하지만 아무도 아버지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건 아니야. 주위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기대했을 뿐이야."

"기대라는 이름의 강요가 아닐까요. 훌륭한 주지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기대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력을 동반한다면 강요예요. 훌륭한 주지로 있으면 칭송하고 소중히 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훌륭한 주지가 아니면 칭찬도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는 위협을 품고 있다고 봐요. 남의 긍정을 원하지 않는 인간은 없잖아요? 긍정을 얻으려면 남의 기대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뿐 아니라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았다가 사람들이 '주지 주제에'라며 자신을 부정한다면 기대를 등지는 건 무척 괴롭고 징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되겠죠."

 

 

# 동생 안에는 질서를 향한 혐오와 경멸이 있었으나 질서가 원하는 연기를 거부하지 못했다. 질서를 떠난 자기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질서를 떠난 자기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등지기 위해 등진다 해도 동생은 그 후 자신이 뭘 원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연기를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을 혐오하고, 자신을 그렇게 일그러뜨린 질서를 마음속 깊이 증오했다.

그런 동생에게 형은 의연하게 사는 광휘였다. 형은 질서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에 거스르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다. 동생은 형이 질서 안에 들어가고 싶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룰 수 없어 초조해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동생의 눈으로 본 형은 질서를 거절하고 떳떳하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것처럼 비쳤다. 그리고 그런 형과 달리 질서를 미워하는 주제에 알랑거릴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절망했다.

 

 

# 일찍이 그의 세계는 언덕이 모든 것이고 신은 세상의 창조주이며 그것을 묶는 섭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세계는 드넓은 황야 안에 미덥지 않을 정도로 작고 폐쇄된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드넓은 황야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세계. 그것이 신이 내린 조화의 끝을 나타내든 기적의 한계를 나타내든, 신의 영광에는 한계가 있어 절대로 황야의 모든 것을 기적으로 뒤덮을 만큼 전능하지 않음을 언덕의 모습이 증명하고 있었다.

신은 그의 신앙을 알지 못했다. 계약을 통하지 않고 그의 마음 속을 다 읽어 낼 정도로 전능하지 ㅇㄶ았다. 그렇기에 신에게 바치는 제물은 계약대로 해야만 했고, 그렇지 않은 그의 공물을 방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애초에.'

신은 신앙의 증거로 공물을 요구했다. 공물은 계약으로 정해져 있고, 그는 계약을 등져 신에게 거부당했으나 신이 진정으로 전능한 존재라면 신앙의 증거 따위가 어찌 필요 있을까.

신은 인간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의 신앙을 끝내 간파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그 증거를 욕망한다. 그 증거는 일정한 형태가 정해져 있어, 그 형태를 지키는지 아닌지로만 인간의 속내를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신은 자신을 향한 인간의 신앙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앙의 증거를 요구한다. 나를 경외한다면 증거로 이것을 바치라 명령함은, 경외하는지 의심스러운 자들이 있음을 은근히 상정한 선포이리라. 아니, 항상 증거를 내세우지 않으면 신앙을 믿지 못하는 시점에서 신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반역자라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벌이 있는 까닭은 그곳에 죄가 생길 가능성을 상정했기 때문이요, 질서가 있는 까닭은 반드시 질서를 등지는 자가 있음을 상정했기 때문이다.

 

 

# "그래도 역시 하나만 고마워할게. 리츠코에게 친절하게 대해 줘서 고마워."

"응. 그런 감사 인사라면 받을게요."

 

 

# 그는 자기 안의 진실을 호소하며 질서의 총애를 바랐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질서는 그에게 질서가 부과한 것만을 요구했지 그 이상이나 이하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안에는 실망과 비탄이 쌓이고 마침내 절망이 자랐다. 자신의 경애가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생긴 절망이 씨앗처럼 엉겼다.

한편으로 그는 동생이 질서를 미워함을 알았다. 증오를 애서 감추고 질시에 아첨하는 동생. 반역도 일탈도 할 수 없는 스스로를 줄곧증오한 동생을 이해했다. 그런 동생이야말로 질서와 신과 이웃에게 인정받았다. 그 사실이 더욱 깊은 비탄에 빠져들게 했다.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기에 앞서, 그렇게까지 진실을 돌아보지 않으려 하는 질서가 그의 진심을 참작해 그를 받아들일 일 따위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질서에 사랑받을 일 따위 없다는 걸 깨달았어......"

 

 

# 당신은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당신은 남을 미워하지 못한다. 설령 증오가 움터도 미워하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남에게 증오가 생기는 순간 자신을 향한 혐오로 탈바꿈해 스스로 통제해야 할 책무로 승화한다. 나는 당신의 그런 모습을 이해한다.

 

 

# 그것은 그를 불렀다.

황폐하게 얼어붙은 기복. 대지에 부딪혀 허공에 되돌아온 목소리는 틀림없이 그의 목소리였다.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떠올렸다.

이 이름은 자신의 이름. 그에게는 동생이 없다.

고독하게 태어난 그는 동포가 없었다. 그가 낙원에서 추방당한 것은 동생을 죽인 죄 때문이 아니요, 스스로를 살상한 죄 때문이었다.

죽인 것은 그, 살해당한 것 또한 그였다. 동생은 그의 절망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절망으로 인해 동생과 자신을 살상했다.

 

 

# 이미 광휘는 그를 가를 수 없었다.

 

 

# "아까도 말했지만 난 허무주의자예요. 옛날에는 나도 사는 데 나름대로 의미를 찾았죠. 자신이 그저 떨어져 갈 분인 존재임을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난 죽지 않아요. 적어도 자신의 의사로 생존 기간을 늘일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고 나니 살 의미 따위가 필요없어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어요. 사는 건 시간을 때우는 것과 완전히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난 철저한 허무주의자가 되었죠.

내게 스나코는 멸망의 상징입니다. 모든 건 멸망합니다. 의미 같은 건 공중에서 흩어져 사라지죠. 하지만 스나코가 그에 저항해서 발버둥 치는 모습은 볼 만합니다. 떨어지는 모습 그 자체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아요. 예쁩니다."

 

 

# "살인은 신의 범주에 있는 죄야. 넌 되살아났을 때 신의 손바닥에서 흘러넘쳤지. 죄라고 나무라고 비난받을 자격조차 잃었어. 그게 이단이 된다는 뜻이야."

 

 

# "삶이란 결국 존속을 위해 존속에 봉사하는 일이지. 그저 존속하기 위해서만 존재해. 허무함을 껴안고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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