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 148쪽 | 223*152mm (A5신) | ISBN(13) : 9788937461118 2004-11-20 |
자유분방함을 사랑하는 크눌프는 헤세 자신이 상당히 깊게 투영된 인물로 느껴진다.
그는 작가의 분신이자 골드문트의 형제이며 동시에 모든 자유와 자연스러움과 방랑을 사랑하는 이의 화신이다.
크눌프는 세 가지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겨울에서 초봄으로 넘어가는 때의 이야기인 '초봄', 그리고 타인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여름의 크눌프인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그리고 한겨울의 이야기인 '종말'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계절의 순환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동시에 크눌프의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구조라고도 생각한다. (작가의 의도이든 그렇지 않든) 그에게 전생애는 단 한 번의 순환이었을 뿐인 것이다.
다년생 생물에게 계절은 오고 가는 익숙하고 친숙한 것이지만, 단년생 생물에게 계절이란 생애에 단 한 번 겪게 되는 다시 없는 경이와 신비이다. 크눌프는 모든 순간을 충만하게, 그렇게 보내고 간 것이다.
드러내놓은 갈등은 아니지만 각 이야기에서는 정착하여 평이한 삶을 살아가는 크눌프의 친구들과 크눌프 간의 묘한 긴장이 일어난다. 마지막 '종말'에서 크눌프의 독백을 제외하면 그들은 서로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서로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의 친우를 사랑한다. (그들은 크눌프를 사랑한다. 크눌프의 경우는, 글쎄.)
그러나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모든 생과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는가 번민하는 크눌프가 얻은 답은 '그것이 너에게 주어진 숙명이었고 삶이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애초에 평이한 삶을 위해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었다는 것.
여기서 헤세가 얼마나 감각적인 삶과 자유를 사랑했으며, 고통스러운 결말이 존재하더라도 후회없이 지금을 사랑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변명하고 싶기도 했으리라. (자신이 유별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는 말을 넌지시 건네고 있지 않은가!!)
크눌프의 죽음은 골드문트의 죽음과도 닮아있으나, 골드문트가 친우 나르치스의 곁에서 죽음을 맞았던 것에 비해 크눌프는 보다 고독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그 죽음의 성질을 보자면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골드문트가 거침없는 충동 속에서 살아오며 갈고 닦은 자신을 조각으로 남기고 스러졌다면, 크눌프는 그조차 없다. 그저 친구에게 K.라는 이름으로 남긴 한 편의 시 정도가 전부이다.
보낸 시간 역시도 다르다. 크눌프는 여인들의 유혹에 있어 골드문트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골드문트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열정에 휩싸여 살아았다면 크눌프의 경우는 언제나 중심은 그에게 있었으며, 그런 순간들은 그의 삶에 즐거움을 더해주는 요소일 뿐 삶 자체는 아니었다.
이는 헤세가 각 작품을 저술한 시기가 중요한 듯하다.
아직 부친이 생존해 있고 아내와 막내아들이 건강하던 때에 쓰여진 크눌프는 보다 유쾌하고 경쾌하다. 그러나 심리치료와 힘든 시기를 겪으며 자신의 삶에 대해 깊게 회의를 느낀 헤세가 훨씬 뒤에 저술한 작품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이다. 이는 그가 얼마나 스스로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는지를 단편적으로 잘 보여준다.
크눌프와 골드문트의 마지막 순간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자유의 댓가는 보통보다 고통스럽고 짧은 생이라는 메세지가 아니라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이런 삶을 살겠다는 의지이다. 더이상 긴 방랑을 떠날 수 없음이 안타까운 것이지 그 대가를 치른다 해서 후회스러운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골드문트에서 더욱 깊게 드러난다. 그런 방랑이 결국 누구나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조각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헤세에게 있어 그의 글들이 그런 작품들임을 말하는 듯 하다.)
물론, 나는 헤세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작품은 쉽게 읽힌다는 것이며 매우 유려하다는 점이다.
나는 어딘가 노래하는 듯 읖조려지는, 하지만 처연하기보다는 경쾌한- 한 조각 꿈결 같은 헤세 특유의 글이 아주 마음에 든다.
[발췌]
# 그는 장기간에 걸친 계획이나 약속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음날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그는 불편을 느꼈다.
# 그는 때때로 기분이 내킬 때만 일을 하되, 한번 하게 되면 정성을 다해 즐겁게 일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 주인은 경탄과 관대함을 드러내며 지켜보고 잇었는데, 그것은 노동자이자 시민인 사람이 돈벌이가 안 되는 일을 참아내며 보고 있는 듯한 자세였다. 그러나 여주인은 사교적인 처세술의 징표라 할 이런 기술을 열성적인 관심을 가지고 구경하였다. 그녀의 시선은 중노동에 의해 한번도 망가진 적 없는 그의 길고 매력적인 두 손 위에 머물러 있었다.
# "이제야 다시 나들이용 모자가 됐어. 이보게, 재단사 친구, 자넨 성경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어. 무엇이 진리인지, 인생이 보낼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일세, 내 생각은 그렇네. 성경은 오래된 책이지. 옛날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날엔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모르고 있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성경 안에는 아주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들이 담겨 잇는 거야, 진실한 이야기들도 아주 많이 들어 있고 말야. 성경 여기저기에서 난 꼭 아름다운 그림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네, 알겠나."
# 크눌프도 그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는 다시 무두질용 널빤지 다리 위에 앉아 아까 식탁에서 숨겨 가지고 온 빵 조각으로 작은 공을 만들었다. 그는 작은 공들을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럽게 물 속에 떨어뜨리고는, 그것들이 물살에 조금씩 휩쓸리면서 가라앉는 모양과 깊고 어두운 바닥에서 물고기들이 소리없이 유령 같은 몸짓으로 그 빵 조각들을 잽싸게 삼키는 모양을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바라보고 있었다.
-> 상당히 의미심장한 구절이라 생각했다. 물고기는 베르벨레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크눌프가 던지는 빵조각에는 줄이 이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쩌면 떨어져 내리는 빵조각은 크눌프 자신일수도 있다.
# 그런데 그의 음성이 너무도 분명하고, 깊고도 아름다워서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 "그래. 하지만 난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항상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왜 그렇지?"
"무슨 말이냐면,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가 하나 있다고 해봐. 만일 지금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가 늙을 것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을 거야. 어떤 아름다운 것이 그 모습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난 그것을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걸. 이것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꼭 오늘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야. 반대로 연약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난 그것을 바라보게 되지. 그러면서 난 기쁨만 느끼는 게 아니라 동정심도 함께 느낀다네."
# 예전엔 빨간 양복을 입었었지,
이제는 검은 빛 양복을 입어야 한다네,
6, 7년 동안,
나의 연인이 다 썩어 없어질 때까지.
저녁 늦게 우리는 덤불 숲의 어두운 가장자리에 마주 앉아 각자 커다란 빵 한 덩어리와 쉬첸 소시지 반 개씩을 들고 먹으면서 밤이 깊어가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낮은 언덕들은 석양을 받아 노랗게 빛나며, 솜털처럼 부드럽고 밝은 광선 속에 아련하게 녹아 있는 듯하더니, 이제는 벌써 시커멓고 뚜렷한 자태로 나무들과 산등성이와 덤불 숲을 하늘 위에 까맣게 그려놓고 있었다. 하늘엔 대낮의 푸른 빛이 여전히 옅게 남아 있기는 했지만 이미 검푸른 빛이 훨씬 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 "사람들도 정말 그대로여서 나를 다시 알아볼 때면 기뻐하고 놀라면서 나를 바라보았고, 몇몇 사람은 내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지. 하지만 난 전혀 대답할 수가 없었고 멈춰설 수도 없었어. 오히려 나는 있는 힘껏 그 친근한 거리를 달려나가 다리를 건너고 시내를 벗어났지. 그리고 비탄에 잠겨 젖은 눈으로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았어.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난 그곳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들 뿐이었지.
그러고 나서 내가 교외의 백양나무 아래 이르러 잠시 멈추어야 했을 때, 그때서야 내게 든 생각은 내가 고향에 와서 우리 집 앞에 갔었으며, 그런데도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친구들 등에 대한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어. 내 마음속에서는 여태 경험해 본 적 없는 당황스러움과 비애와 수치심이 끓어올랐지. 하지만 되돌아가서 모든 것을 다시 만회해 볼 수는 없었어. 왜냐하면 꿈은 끝이 났고, 난 깨어났으니까."
크눌프가 말했다.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 저곳으로 불어댈 뿐이지."
그가 조금 후에 덧붙여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한 꿈은 아마도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잇는 것 같아. 나는 헨리에테에게도 리자베트에게도 의식적으로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어. 하지만 내가 두 사람을 한때 사랑했었고 나의 소유로 만들고 싶어했었기 때문에, 그녀들과 비슷하지만 그 누구도 아닌 꿈 속의 형상이 되어 그녀들이 내게 나타난 것 같아. 그 형상은 나의 소유이지만 더 이상 살아 있지는 않지. 난 종종 내 부모님들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부모님은 내가 그 분들의 자식이고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셔. 하지만 내가 그 분들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에게 난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인간일 뿐이야. 내게 중요한 일이고 어쩌면 내 영혼 자체일지도 모르는 일들을 부모님들은 하찮게 여기시고, 그것이 내가 어리거나 변덕스러운 탓이라고 돌려버리시는 거야. 그러면서도 그 분들은 나를 사랑하시고 기꺼이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주시지. 아버지는 그의 자식에게 코와 두 눈과 심지어는 이성까지도 물려줄 수 있지만 영혼은 아니야. 영혼은 모든 사람들 속에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지."
# 하지만 크눌프는 위대한 시인은 아니어도 보통의 시인은 되었고, 그가 직접 부르는 노래들은 종종 다른 훌륭한 노래들의 귀여운 자매인 듯 들렸다. 내가 기억하는 몇몇 부분과 가사들은 정말 아름답고 나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소중하다. 그 중의 어떤 노래도 기록되지는 않았다. 그의 노래들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아무런 해를 끼침 없이, 그리고 어떤 책임감을 느낌도 없이, 이 세상에 와서 존재하다가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의 노래들은 나와 크눌프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짧은 순간순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 그는 어느 집 지붕 위의 고양이이든 다 알고 있었고 모든 정원의 과실을 맛보았고, 모든 나무에 올라가 그 꼭대기 안에 녹색빛 꿈의 둥지를 소유했었다.
#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 다만 헤세의 작품 내에서 방랑을 포기하고 굴종-까지는 아니지만-과 정착을 선택한 이들은 시간이 흐른 후 대개 보다 안정적이고 건강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헤세가 그 반대편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남은 자들이 오히려 더 먼저 스러질 수도 있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데, 떠도는 이는 훨씬 빠르게 늙고 병들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이 헤세를 지배했던 듯 하다.
# (옮긴 이 이노은의 말 중) 시민의 직업 윤리와 기준으로 볼 때 크눌프의 삶은 무가치하고 아무 쓸모 없는 것일 수도 있으나 좀더 넓은 시야로, 신의 시선으로 볼 때 그 삶 또한 그 자체의 의미를 갖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잇다. 인생을 바라볼 때 하나의 기준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좀더 깊고 넓게 상찰할 것을, 타인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권한다. 그러기에 안정된 시민의 삶을 거부하는 크눌프 역시도 다른 직업인들의 삶을 항상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곤 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배척하거나 경멸하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 크눌프는 어디에 가서도 어떤 직업인인 체 할 수도 있고, 실제 종사자와도 거리낌 없이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눈썰미 있게 그들을 관찰한다. 이는 크눌프의 떠돎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이 정착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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