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 352쪽 | 203*137mm | ISBN(13) : 9788954610742 2010-04-05 |
숨그네.
이 단어는 헤르타 뮐러가 숨과 그네라는 두 단어를 조합해 만들어낸 것이다.
한글로 만난 숨그네는, 두려워했던 것에 비해서는 다정하게 나를 태워주었다.
앞뒤로 흔들리면서도- 이것이 진짜 숨그네는 아닐 것 같다는 의심과 불안을 완연히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첫 세 장을 읽어나가며 구체적이고 또렷한 모습을 갖춰나갔다.
숨그네의 시작은 한 아이의 시점에서부터 흘러간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의 성별을 모호하게 흐려버린다. 징발되었다는 말에서 남성인가 생각하면 바로 다음에는 대상으로 선정된 여성들과 남성들 모두가 언급되며 다시금 모호해진다. 결국 글 내부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화자의 성(性)이 뚜렷해지는데 만약, 이것이 뮐러의 고의적인 연출이었다면 아마도 그녀는 다음과 같은 점을 노리지 않았나 싶다.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이야기가 헤르타 뮐러의 손 끝을 빌어 탄생된 글이다.
그 이야기는 둘 모두의 것으로, 화자는 파스티오르이며 또한 뮐러였다. 그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고.
또는 파스티오르와 글 안의 레오폴트, 둘 모두가 동성애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 키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것이 서서히 부각되기를 원해서 모호하게 흐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선입견이 배제된, 한 '인간'으로서의 화자를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후반부에 급작스럽게 회상으로 노출시키는 것 역시 같은 선상에서 배제하고 싶었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한글로 만난 숨그네 안에서의 이야기이다.
독일어는 명사의 성이 뚜렷하다.
또한 격 역시 존재하여, 뮐러가 숨그네를 서술할 때 남성, 여성, 중성 중 어떤 명사들을 선택해 사용했고 어떤 격으로 받았으며 어떤 명사들끼리 조합해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었을지를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상상의 영역으로 미뤄둘 수 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열 일곱살의 '레오폴트 아우베르크'라는 독일 아이가 전시 상황에 따라 루마니아에서 러시아로 강제 추방 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보낸 5년 간의 시간을 보여주는 글이다. 뮐러는 그것을 감상적으로 늘어놓지도, 절망과 저주와 증오로 가득 메워 던져대지도 않고 정말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더 추웠고, 더 고통스러웠다.
결국 숨그네를 덮는 나는 레오의 가족의 곁에서 약간의 두려움과 안쓰러움이 공존하는 눈으로 그의 발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레오는 '존재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아니, 사실 그 시간들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 지 잘 모르겠다.
[살아남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살아냈다. 견뎌냈다. 버텨냈다.] 이런 단어들로는 그 시간을, 수용소에서의 5년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불현듯 어째서 뮐러와 파스티오르가 '배고픈 천사', '입천장', '심장삽', '숨그네', '볼빵' 같은 단어를 만들어냈는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이어붙여 만들어낸 단어가 아니면 그 기억들을 담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저것들로도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이 전에 이 글을 읽은 이의 리뷰가 떠오른다.
그의 말이 옳았다.
레오는, 끝까지 인간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적으로 돌리지도, 원망하지도 않은 채 살아남았다.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흘러가야만 했던 시간들을.
꼭 한 번, '보기를' 바란다.
지금의 우리는 전쟁을 잊은 세대이지만, 불과 반세기 전까지도 이 땅 역시 전쟁의 포화로 뒤덮였었고 그 조금 더 전에는 수많은 이들이 북으로 만주로 일본으로 러시아로 끌려갔었다. 그들의 이야기 역시 나와야 한다. 우리 역시 해야할, 그리고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 이들이다.
선혈이 뿜어져 나오는 격렬함이어도 좋고, 숨그네처럼-우아하기까지했던- 흔들리는 그 무엇이어도 좋다.
동족이었기에 더욱 아플 수 밖에 없었던 쓰라림이어도 좋다. 나라와 말이 사라졌던 원통함이어도 좋다.
당대를 살아 펄떡였던, 그러나 그렇기에 차마 말할 수 없던 것들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이들의 손끝에서 다시 피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는 흔들림이 잦아드는 숨그네를 가만히 다시 밀어보게 되었다.
[발췌]
# 나는 소리 없는 짐을 들고 다닌다. 나는 나를 너무나 깊이, 그리고 너무나 오래 침묵 안에 싸두었던 탓에 어떤 말로도 나라는 짐을 꺼내놓을 수 없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나를 단지 다른 식으로 포장하는 것에 불과했다.
# 세상에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목덜미의 침묵이 입 안의 침묵과는 다르다고 말할 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안다. 수용소 시절 이전부터 그 이후에 이르는 이십오 년 동안 나는 공포 속에 살았다. 나라와 가족들에 대한 공포. 나라가 나를 범죄자로 가두고, 가족들이 나를 치욕으로 여겨 내쫓으리라는 이중 추락의 공포였다.
# 바로 거기,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잇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 눈이 그녀를 밀고했다. 그녀는 숨어 있던 곳에서 제 발로 걸어 나와야 했다. 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절대 눈을 용서하지 않을거야, 그녀가 말했다. 방금 내린 눈을 내가 다시 그 모양 그대로 만들어놓을 수는 없어. 아무것도 닿지 않은 것처럼 꾸며놓을 수는 없는 거야라고. 땅은 그렇게 할 수 있지, 그녀가 말했다. 모래도 그렇고 마음만 먹으면 풀까지도. 물은 스스로 제 모양을 그대로 만들어. 물은 닥치는 대로 삼키고, 또 삼킨 후에는 곧 닫히니까. 그리고 공기는 늘 모양이 똑같지.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까. 눈이 아닌 다른 것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을 거야, 트루디 펠리칸이 말했다.
# 만성이 된 굶주림을 뭐라고 해야 할까. 병적인 허기를 만드는 그런 굶주림이라고 해야 하나. 허기 위에 그보다 더한 허기가 겹친다. 공복을 먹고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는 허기가 기원을 알 수 없는 오래되고 길들여진 허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 배가 고프다고 말하는 것 발고는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 배고픔이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러 물건들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건물 공사의 묘한 점이 그것이었다. 온종일 들여다보아도 벽이 얼마만큼 높아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삼 주쯤 지나면 갑자기 쑥 자란 듯이 보인다. 혼자 뜨는 달처럼 하룻밤 사이에. 시멘트가 사라지듯 벽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 자란다.
# 해무리 높이 걸려 있네
노란 옥수수, 시간이 없네
# 깊숙이 기운 몸 붉게 웅크려
반달은 저물 양
하늘을 떠가네
# 뿌듯했다, 내 귀가 새끼를 낳았으므로, 쥐들이 막사 안 68개의 침대 중 내 자리를 골라 태어났으므로, 하필이면 내가 아빠가 되기를 원했으므로. 새끼들뿐이고 어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한없이 믿었으므로 나는 부끄러웠다.
# 소름 끼칠 듯한 부드러움은 의도한 잔인함과는 다른 형태로 나를 죄책감에 빠뜨렸다. 더 깊이, 더 오래.
고양이가 쥐들과 똑같았던 점은,
찍찍 소리가 없었다는 것.
고양이가 쥐들과 달랐던 점은,
쥐들에게는 의도적이었고 연민을 느꼈다는 것이다. 고양이의 경우는 쓰다듬으려다가 물렸기 때문에 씁쓸했다. 거기에는 강요받는 경우와 같은 무엇이 있다. 누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 그럴 수 있다면, 내 향수는 그리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내 향수는 그저, 내가 언젠가 배불리 먹었던 곳에 대한 배고픔이 될 것이다.
# 하늘과 땅이 이 세상이야. 하늘은 넓어서 누구든 외투를 걸어둘 수 있어. 땅은 세상의 발가락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모두 합친 거라 그렇게 큰 거지. 거긴 너무 멀어서 생각을 멈춰야만 닿을 수 있어. 생각으로 따라가려고 하면 빈속이라 메스꺼운 느낌이 들 거야.
#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 무덤덤함이 나를 말렸다.
# 수용소로 가기 전 우리는 십칠 년을 함께 지냈고 문, 장롱, 탁자, 양탄자 같은 커다란 물건들을 공유했다. 접시와 컵, 소금통, 비누, 열쇠 같은 작은 물건들도 그랬다. 창과 전등의 빛도. 그러나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 더이상 우리가 아님을,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낯선 존재가 된다는 것은 분명 부담이지만, 믿을 수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 작은 보물이란 나 여기 있다라고 적힌 것들이야.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이고.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라고 적힌 것들이지.
#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저지른 가장 무거운 잘못이다. 나는 잠깐 다녀올 사람처럼 단출하게 짐을 싸서 기차를 타고 그라츠로 갔다. 거기서 손바닥만한 엽서를 썼다.
사랑하는 에마,
두려움은 가차 없지.
나는 안 돌아갈 거야.
# 특유의 동작으로 커피를 마시는 남자가 한둘은 있다. 잔을 내려놓을 때 아랫입술 안쪽에서 분홍색 석영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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