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라즈니의 다른 작품과는 다소 색깔을 달리하여 기존 팬들에게 외면 받은 이 작품은 저 보기 싫은 '청소년 권장 도서'만 떼고 나왔어도 백 부는 더 팔렸으리라 생각한다. -_-;;
사람은 각자의 취향을 가지고 있고, 그 취향이란 때로 상당히 강한 하나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즉 나에게 엄청나게 느껴지는 어떤 것이 타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취향은 때로 객관적인 무언가를 넘어서는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어떤 것이 나에게 있어서 "대단하다"는 것은 적어도 다른 이가 쉽사리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이야기로 상대방에게 대단하다는 어떤 것이 나에게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은 채 혼자만의 것으로 남겨둔다면 지켜져야 할 것이다.
모든 문제는 자신의 느낌을 보편 타당한 것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때로, 어떤 것은 객관적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와 감상을 순전히 한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 있는가는 내게 있어서는 아직 미제로 남아있다)
서두가 거창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난 앰버 연대기가 미치게 마음에 들어!!!!! 심장이 두근 두근 뛴다고!!!!!]
음. 그렇다.
나는 이 다섯권을 읽는 동안 오랜 만에 가슴이 뛰는 설레임을 느꼈으며, 읽을 수록 남은 페이지가 줄어든다는 아쉬움 역시 느꼈다.
아직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뉴앰버'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마지막 권을 덮으며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앰버 연대기가 객관적으로 훌륭하고 위대한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내게 앰버 연대기는, 해리포터와 비슷한 지위를 차지한 것으로 느껴지는데, 음.
즉 해리포터를 즐겁게 읽고 좋아하며 설레여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내게는 앰버가 그런 책이라는 말이다. (헉헉. 코윈!!! ㅜㅜ)
모든 것의 근원인 패턴에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상상한 것을 구체화 할 수 있는 앰버의 왕족들과 혼돈의 귀족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행하는 헬라이드와 그림자에 관한 개념은 지금의 패러렐과 고대의 이데아 개념의 혼합체이며, 중간 중간 위트있게 심어놓은 아발론과 멀린, 타로카드 등의 떡밥들은 내 경우에는 아주 아주 취향에 맞아들어간 이야기였다.
1권부터 눈이 지져져서 시력을 잃는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는 흔치 않다.
(물론 이것은 곧 더욱 강한 먼치킨으로 돌아오게 되는 복선이긴 했지만)
앰버의 기억을 잃었던, 왕위에 가장 가까웠던 왕자 코윈을 화자로 내세워 진행되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흘러갈 수록 한 명 한 명의 숨겨진 진실들이 드러나며 이전까지의 '진실'들을 뒤집어 엎는다. 이런 전개는 영웅, 라쇼몽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라쇼몽 등이 하나의 사건에 대해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게 되는 구조였다면 앰버 연대기의 경우는 다발적인 사건과 시간차가 존재하고 서로가 가진 조각들이 다르기에 좀더 복잡한 퍼즐 맞추기 구조를 갖게 된다. 대조가 가능한 것은 겹치는 조각들 뿐인 것이다.
또 이런 판타지 장르 소설에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이나 고찰점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숨이 막히는 스토리 라인과 매력적인 캐릭터가 필수다!!! 그런 시각에서 봤을 때, 앰버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캐릭터다!!!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은 캐릭터, 코윈.
뭐 순전히 내 취향이긴 하지만.
정말 섹시한 캐릭터였다고 생각한다. 아, 정말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코윈이 정말 정말 정말 마음에 들어버렸다. 매력포인트를 꼭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 결말이 다소 미진한 감이 있지만,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했다. 1인칭 소설이기에 코윈이 알지 못하는 것은 독자 역시 알 수 없다는 한계에 의해 풀리지 않은 점들이 남아있다. 아마도 이것이 뉴앰버로 이어지는 듯한데, 아, 원서로라도 읽고 싶다) 그렇다 해도 정말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역시 코윈은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왕국을 물려받는 것에 그치기에는 그 그릇이 너무 컸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새로운 창조주이자 건국자가 되는 셈이고, 이는 아발론에서의 그의 모습이 이미 하나의 복선 역할을 했다고 본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다른 형제들은 그림자에서일지언정 직접적인 통치자로 전면에 드러난 이가 없었다. (신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경우는 모병이 목적이었고 코윈처럼 통치자이지는 않았다)
형제간의 권모술수와 암투라니, 이렇게 설레는 이야기가!!!
왕정하면 이것 아니던가. 내가 베네치아의 보르지아 가문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정하고 따듯하고 우애가 넘치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심장이 뛰게 하는 건 이쪽이다.
붉은 머리의 마법사들이여!!!
젤라즈니는 다 풀 생각도 없었던 건지 떡밥을 엄청나게 던져놓았는데 정말 부들 부들 떨린다. 으으으. 뉴앰버가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것일까, 저런 것일까 상상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아... 이제 당분간은 다소 의무적인 독서로 돌아가야 하기에 아쉬움은 더욱 짙다.
뉴앰버를 기다리며.
사랑한다 앰버.
Voulez-vous venir avec m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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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버 연대기는 모든 그림자의 근원이 되는 유일한 실존의 도시 앰버의 한 왕자, 코윈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시각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모든 정보는 그와 독자 사이에서 공유되나 그 한계는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여기서 젤라즈니는 그가 한 사고로 인해 기억을 상실했다는 상황 설정을 통해 조금씩 '실제로 일어났던' 사고의 진상으로 접근해간다.
그 사고는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여러 그림자와 시간에 걸친 필연적인 것이었고,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형제들이 각각 가지고 있던 조각난 진실들을 맞추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글 내부의 캐릭터 코윈을 통하므로 연대기는 1인칭으로 전개되며, 그렇기에 대부분의 서술은 대화체로 이어져 친근감을 더한다.
앰버의 왕좌를 놓고 일어나던 형제 간의 치열한 왕위 다툼은 어느새 그렇게 소유하고 싶어하던 앰버 자체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이어지고,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던 아홉 왕자와 세 왕녀들은 진정한 의미의 왕족이 된다.
맨 처음 글을 쓰던 때부터 뉴앰버를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젤라즈니는 수없이 던져놓은 떡밥의 상당부분을 회수하지 않는데-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는 않았으나 뉴앰버가 받아온 평가를 살펴보면 다소 의아하긴 하지만- 그런 점에서 책을 덮으면서도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는 결말이 미진하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지만, 여운이 깊기는 하나 세련된 오픈 엔딩으로 보기에도 힘들다는 뜻이다.
코윈의 검 그레이스 원더도 레브마도 달빛 아래 홀연히 떠오르는 티르 나 로그도.
그리고 혼돈의 궁정과 오베론도.
결국 코윈은 아버지 오베론의 패턴 안에 갇히기에는 너무나 큰 그릇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뉴앰버는 조금씩 남은 자락들과 그가 앞으로 열어갈 패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젤라즈니가 펼쳐보여준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환상과 그 뒤로 어른대며 남은 장막 너머의 실루엣이 책을 덮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나를 감싼다.
.... 아무리 악평을 받아도 좋다, 나와만 다오, 뉴앰버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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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1권>
# 나는 사내를 옷장 안에 밀어 넣고 격자창 밖을 내다보았다. 줄지어 선 포플러 나무 위로 초승달을 보듬은 하현달이 떠 있었다. 잔디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밤은 태양과 힘없이 흥정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기억 속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특별한 지식을 찾아 마음속을 훑어보았다. 자신을 이렇게 타인처럼 살펴보기란 쉽지 않다. 아마 그래서 내가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 모양이다. 자기 것은 어디가지나 자기 것이자 자신의 일부며 그냥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그뿐이다.
#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한 인물과 논쟁을 벌일 마음은 없었다. 나는 디어드리의 뒤를 따랐다. 눈가로 기마병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오직 앰버의 왕자만이 그림자 사이를 걸을 수 있다. 물론 그는 사람 수에 상관없이 그 길을 이끌거나 안내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군대를 이끌었으며, 부하들이 죽는 것을 보았지만, 그림자에 대해 이 점은 말해 둬야겠다. '그림자'와 '실체'가 있으며, 이것이 만물의 근원이다. 실체는 진정한 지구 위에 서 있는 진정한 도시인 앰버뿐이며,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림자는 무한히 존재한다. 어떠한 가능성이든 진정한 도시의 그림자로서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앰버는 그 존재 자체로 모든 방향에 그림자를 투영한다. 그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림자는 앰버에서 혼돈까지 계속되고,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림자를 가로지르는 방법은 오직 세 가지뿐이며, 세 가지는 모두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 앰버의 왕자라는 자리는 자랑스러우면서도 고독한 지위며, 동시에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내 지위가 지긋지긋했지만, 어쨌든 나는 앰버의 왕자였다.
<2권>
# 그자들은 내부의 뭔가가 죽어 있는 것만 같았어. 목소리에는 자기가 한 말을 되씹으며 맛보는 인간 특유의 박력과 깊이가 없었어.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으며 데스마스크를 쓴 듯한 분위기를 풍겼지.
# "못할 이유도 없잖아? 그자는 이미 호되게 당했다고 여겨도 돼."
로레인은 다가와 내게 몸을 기댔다.
"사랑해요."
"헛소리하지 말고."
"알았어요. 그러면 '당신이 좋아요'는 어때요?"
"그건 괜찮아. 난....."
# "....여자들이야. 지옥에서 기어 나온 듯한 창백한 복수의 여신들. 아름답고, 차갑고, 무장을 하고 갑옷을 입었다는군. 밝은 빛깔의 긴 머리카락, 얼음 같은 눈, 불을 붐고 사람 고기를 먹는 백마를 타고 몇 년 전 지진으로 산에 생긴 미궁 같은 동굴에서 밤만 되면 나온다는군. 습격을 해서 젊은 사내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대."
# "그건 안 돼, 다라. 음모를 꾸미는 왕자는 모두 조금은 비밀을 간직해야만 해. 그건 내 비밀 가운데 하나야."
"앰버에서 그토록 불신과 음모가 판을 친다니 놀랄 따름이네요."
"왜? 그런 알력은 어디에서나 온갖 형태로 존재해. 넌 언제나 그것들에 둘러싸여 있어. 모든 장소는 앰버로부터 그 모습을 가져오니까."
# 왼손을 잘 쓰는 이와 칼싸움을 하는 것은 오른손을 잘 ㅆ는 이와 사우는 것보다 약간 더 어렵고, 이 사실 또한 내게 불리했다.
# 너무 무겁고 컸기 때문에 훔쳐가지 못한 듯했던 책은 책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책을 훔치는 이는 친구뿐이다. 그리고 저기에....
# 묘지는 아무도 자기를 대신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로 꽉 차 있다고.
<3권>
# 비록 섹스가 수많은 목록의 첫머리에 올라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들 섹스 하는 틈틈이 하고 싶은 일들이 있지. 내 경우엔 그건 드럼, 비행, 도박이야. 어느 것에 특별히 우선순위가 있는 건 아니야. 음, 어쩌면 글라이더, 기구, 그 변형물들을 타고 하는 활공 쪽에 조금 더 끌리는 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이것도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지. 내 말은, 나중에 다시 물어보면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있다는 거야. 질문을 받는 시점에 내가 뭘 가장 원하는지에 달려 있어.
#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나는군..... 내가 카드 게임에서 속임수를 섰다고 에릭이 생난리를 친 거 알아? 내가 속임수를 쓰지 않는 유일한 게 바로 카드 게임인데 말이야. 난 진지하게 카드를 해. 솜씨도 좋고 운도 좋아. 에릭은 둘 다 꽝이었지. 에릭의 문제는, 잘하는 게 너무나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잘하는 분야가 있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거야. 만약 누가 자기를 계속 이긴다면 그건 속임수를 쓰기 때문이라고 하지."
# "내가 작별인사를 한 유일한 사람은 드러머였어. 떠나기 전에 들러 내 드럼 세트를 선물했거든. 그자라면 소중히 서 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 "그래, 아래를 봐, 코윈. 내가 손만 놓으면 끝나는 거야."
"듣고 있어."
만약 정말로 제라드가 그럴 작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제라드와 함께 떨어질 수 있을지 궁리하며 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 삶의 끊임없는 의식들은 영원히 도약하고, 인간들은 희망의 품을 향해 끝없이 뛰어들지만, 뜨거운 프라이팬을 간신히 벗어났다 싶어 둘러보면 결국 뛰어든 곳은 불 속일 뿐이다. 그날 저녁, 내 평생 쌓은 지혜의 총합은 창조적 불안감의 보살핌을 받았고 랜덤의 끄덕임과 호의적인 상소리로 보답 받았다.
# 4 대 4. 방 한가운데에는 친애하는 피오나가 남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피오나는 지금 이 상황을 잘 알고 또 즐기고 있었다. 이윽고 피오나는 정교하게 조각된 검은 틀에 담긴 타원형 거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거울은 가장 가까운 책장 두 개 사이에 걸려 있었다. 피오나는 거울을 보며 왼쪽 관자놀이 근처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피오나가 움직이자 왼발을 딛고 있던 카펫의 붉은색과 황금색 기하학적 무늬 사이에서 녹색과 은색 불꽃이 번쩍였다.
나는 욕을 내뱉고 싶은 마음과 싱긋 웃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저 쌍년은 이번에도 우리를 데리고 노는 중이었다. 하지만 언제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전혀 변하지 않았다. 욕을 하거나 웃는 대신, 나는 피오나의 예상에 맞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줄리앙 역시 다가왔다. 그것도 나보다 약간 빠르게. 줄리앙은 피오나에게 약간 더 가까운 곳에 있었고, 어쩌면 나보다 한순간 일찍 보았는지도 모른다.
줄리앙이 그것을 주워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줄리앙이 쾌활하게 말했다.
"팔찌가 떨어졌어, 누이. 멍청하게 네 손목에서 도망을 친 모양이네. 자, 내가 해 줄게."
# 브랜드의 시선이 더욱 강렬해졌다. 브랜드는 나를 살피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무엇을? 아마도 지식을.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지를, 부정적인 것을 알아내는 것이 더 어렵게 때문에, 브랜드는 아마도 의식이 든 뒤부터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브랜드를 잘 알았다. 브랜드는 내가 뭘 아는지 보다 뭘 모르는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가능하다면 브랜드는 내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으려 할 터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가 어디까지 알려 줘야 할지 그 최소한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 했다. 단 한마디라 할지라도 그 이상으로는 알려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브랜드는 원래 그런 성격이었고, 물론 뭔가를 원했다. 다만.... 나는 사람은 변한다는 사실을, 세월의 흐름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강조하는 역할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은 자신이 하고 보고 생각하고 느낀 일을 통해 질적으로 변하게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스스로 납득하려 애써 왔다.
<4권>
# 나는 대답하는 대신, 파이어 드레이크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가넬론과 나 사이에는, 가넬론이 내게 무엇을 요구해도 좋다는 무언의 양해가 존재했다. 또한 내가 가넬론이 하는 모든 충고를 귀담아듣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가넬론의 위치가 독특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피붙이가 아니었다. 가넬론은 앰버인이 아니었다. 가넬론에게 있어 앰버의 투쟁과 문제에 관계하는 것은 선택 사항일 뿐이다. 오래전 우리는 친구였다가 적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좀 더 최근에는 다시 친구이자 동지가 되어 가넬론이 정착한 땅에서 일어난 전투에 함께 참가했다. 그 문제를 매듭짓자, 가넬론은 나와 함께하며 내 개인적인 문제, 그리고 앰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돕겠다고 자청해따. 혹시라도 이런 일에 대차대조표를 꼼꼼히 기록해 놓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하는 말인데, 내 처지에서 보자면, 가넬론은 내게 아무런 빚도 지지 않았으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를 하나로 묶어 두는 것은 과거의 부채나 의리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끈끈한 우정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처럼 이미 마음을 정한 일에 대해 누가 한마디한다면 그 상대가 설령 랜덤이라 할지라도 끼어들지 말고 주둥이 닥치라고 쏘아붙이겠지만, 상대가 가넬론이라면 꼬치꼬치 캐묻고 이의를 제기해도 난 그걸 가넬론의 권리로 여기며 조용히 들을 것이다. 가넬론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좋은 뜻에서 하는 것이므로 나는 그 말에 화를 내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끔씩 가넬론의 말에 발끈하는 건, 내가 얽매인 현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관계가 시작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날, 군인 시절에 배인 습관 때문인 듯하다. 나는 내가 내린 결정과 명령에 누군가 토를 달고 나서는 걸 싫어한다. 아마도 내가 지금 가넬론이 거슬리는 건, 최근 가넬론이 날카로운 추측들을 했으며 그걸 바탕으로 상당히 그럴듯한 제안들을 내놓았기 때문인 듯했다. 남보다 내가 먼저 깨달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데에 따른 짜증이라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짜증이 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픈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 그 무렵 바이얼과 잠시만이라도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나는 배워야 할 것들을 분위기 살벌한 학교에서 배웠으며, 설사 교육 과정이 좀 더 부드러웟다 할지라도 바이얼, 당신과 같은 미덕을 얻지는 못했을 터.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늘 내가 사슴보다는 사냥개, 사냥감보다는 사냥꾼에 가깝다고 느꼈다. 만약 바이얼 당신이 내 선생님이었다면 내 신랄한 성격을 부디게 하고 증오를 진정시킬 방법을 가르쳐 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최상일까? 증오는 그 대상과 함께 죽었으며, 신랄함도 사라졌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것들 없이 내가 과연 그 시기를 버텨 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나를 삶으로 끌어내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던 이 추악한 동반자들 없이 과연 내가 유배 생활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다. 현재는 가끔 수사슴의 처지가 되어 생각해 보는 사치를 부릴 수 있지만, 당시에 그랬더라면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으리라. 실제로 어떻게 되었을지 나는 모르며, 앞으로도 알지 못할 거라오, 상냥한 숙녀여.
# 우리 앞쪽의 빛이 더 커지고 밝아졌지만 그쪽에서는 바람도, 소리도, 냄새도 느겨지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며, 내가 돌아온 이래 들어왔던 겹겹의 설명들을 떠올렸다. 개개의 설명에는 내가 없는 동안 일어났던 일들, 돌아온 뒤 일어난 일들, 지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복잡한 동기와 변명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내가 또 다른 내 무덤 위에 천천히 구축하던 진실의 도시 속을 내가 목격한 감정, 계획, 느낌, 목적 따위가 홍수처럼 소용돌이치며 흘러갔다. 그림자 지구의 한 유명 인사는, 행동은 어디까지나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내게 밀려와 부딪히는 해석의 파도들은 내가 단단히 고정시켜 두었다고 생각한 사항들의 위치를 하나 이상 바꾸었으며, 이로 인해 전체가 변했고, 결국 삶이라는 게 알고 보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진실을 둘러싸고 앰버 주변의 그림자끼리 주고받는 상호작용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최근에 시간이 남아돌아서 말이야. 그 시간을 생각하는데 쓰지 않으면 내가 문제인 거지. 그래서 그렇게 한 것뿐이야.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자네가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거야. 곧 날이 저물 테니까 말이야."
#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미쳐 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발악을 하고, 다른 자보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서려고 안달하는 것은 광기의 한 형태라고밖에 할 수 없다. 브랜드는 단지 이런 경향이 극한까지 다다랐을 뿐이다.
# 행위와 그 결과만이 남들이 우리를 판단하는 근거다. 그 밖의 다른 것을 운운해 봤자 얻는 것이라고는 만약 자신이라면 좀 더 잘 했으리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값싼 도덕적 우월감뿐이다. 그러니 그 외의 것은 하늘에 맡기는 편이 낫다. 나는 그것을 판단할 자격이 없었다.
<5권>
# 시간, 시간, 그리고 더 긴 시간이 내 거칠고 모난 부분을 부드럽게 바꾸었으며, 나를 변하게 했다. 과거의 나는 다른 사람, 이제는 소원해진 지인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떤 경우는 도무지 나라고 빋기지 않을 정도였다.
# 나는 고개 숙여 절했고, 여자는 내게 바짝 다가왔다. 안 될 것도 없었다. 여자와 술, 나는 죽을 때 이 둘만 있으면 된다고 늘 큰소리치지 않았던가.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어쩌면 여인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아발론을 떠났을 때 검은 길에서 나를 함정에 빠뜨렸던, 여자를 닮은 존재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 여자를 도우러 갔지만 어느새 그 여자의 초자연적인 매력에 사로잡혔고, 여자의 가면을 벗겼을 때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지독히 두려웠다. 비록 내가 철학자는 아니지만, 모두가 상황에 따라 바꿔 쓰는 가면이 한 벌 정도씩 있다는 것쯤은 안다. 이에 대해 통속 철학자들이 맹렬히 비난해 온 것도 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인상이 좋았지만 나중에 속내를 알게 된 뒤 혐오하게 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검은 길에서 만난 여자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즉, 가면 뒤에 아무것도 없는 그런 존재 말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나는 가면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종종 훨씬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안겨 있는 이 여인의 내면은 사실 괴물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하리라. 하지만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 사발에 가득한 솜사탕.
# "그래, 우리는 알에서 깨어 나온 뒤 일상사의 표면을 표류하지. 가끔은 뭔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느끼고, 이런 느낌은 노력을 불러일으켜. 하지만 이건 큰 잘못이야. 왜냐면 노력은 욕망을 창조하고, 가짜 자아를 만들거든. 실제로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이야. 그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욕망과 노력이 만들어지고, 결국 우리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거야."
# Carmen, voulez-vous venir avec m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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