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닐 게이먼, 크리스 리들] 잠자는 미녀와 마법의 물렛가락

일루젼 2022. 6. 4.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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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닐 게이먼 / 크리스 리들 / 장미란

원제 : The Sleeper and the Spindle 
출판 : 주니어김영사 
출간 : 2016.08.31 


       

섬세한 삽화를 보고 있자니 문득 펜화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과 그에 따르는 관념에서 자유로운 이 어른 동화는 꽤 여러 번 문장을 곱씹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 난쟁이와 살아본 적이 있다는 표현에서 바로 백설공주가 떠오르셨다면, 딩동댕. 이 이야기는 스노우화이트와 오로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이며, 잠든 채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피조종자들의 이야기이고, 그에 저항하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늑대와 함께 달리는 깨어있는 자들의 모험담이기도 하다. 

 

선택은 언제나 가능하다. 선택지가 없어보이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의 결정을 깨야만 하는 순간에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한 언제나 새롭게 선택할 수 있다.

(간단한 예로, 체중 감량을 선언하고 곧바로 야식을 시키는 건 그리 어렵지 않...)

 

작은 삽화들과 함께 어우러진 영문장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이 책은 영문으로 소장하고 싶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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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빨리! 서둘러! 도리마에서 가장 훌륭한 비단을 여왕님께 갖다 드려야 해. 서두르지 않으면 다 팔려 버릴지도 몰라. 그러면 그보다 못한 비단을 사야 하잖아."

맨 앞에 가던 난쟁이가 말했다. 

"알아! 안다고! 옷감을 담아 올 상자도 사야지. 그래야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깨끗한 비단을 갖다 드릴 수 있으니까."

가운데 난쟁이는 말이 없었다. 무슨 돌 같은 것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행여 떨어뜨리거나 잃어버릴세라 거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은 달걀만 한 루비로, 땅 속에서 캐낸 거친 상태 그대로였다. 잘 다듬어서 세공하면 왕국 하나를 살 가치가 있으니, 도리마에서 나는 가장 훌륭한 비단 하고도 너끈히 맞바꿀 수 있을 터였다.

 

- 난쟁이들은 자신들이 땅속에서 캐낸 것을 여왕에서 선물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그런 선물은 너무 쉽고 식상했다. 선물을 근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선물을 구하러 가는 데 들인 '거리'라고 난쟁이들은 믿었다.

 

- "아무래도 내일은 결혼식이 열리기 힘들 것 같군."

여왕은 왕국 지도를 가져오라고 했다. 산맥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들을 찾아보고 전령을 보내어 마을 사람들에게 해안가로 피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여왕이 언짢아할 것이라고 전하게 했다.  

여왕은 또한 총리대신을 불러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왕국을 맡아 줄 것을 당부하고, 왕국을 잘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일렀다. 

그다음에는 약혼자를 불러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비록 그가 일개 왕자이고 자신은 여왕이지만 그래도 결혼은 꼭 할 거라고 달랬다. 그러고는 약혼자의 예쁘장한 턱 밑을 다정히 만져 주며 그 얼굴에 미소가 돌아올 때까지 입을 맞추어 주었다. 

 

- 여왕은 쇠사슬 갑옷을 가져오라 일렀다. 

검도 가져오라고 했다.

식량과 말이 준비되자 여왕은 궁전을 나와 동쪽으로 말을 타고 갔다. 

 

- 난쟁이들은 산기슭의 언덕 지대에 있는 마지막 여관에서 여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쟁이들은 여왕을 모시고 자신들이 늘 다니는 깊은 굴길로 들어갔다. 여왕은 어렸을 때 난쟁이들과 함께 살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겁내지 않았다. 

 

- 난쟁이들도 이름이 있지만, 이름은 신성한 것이라 인간에게는 알려 주지 않는다. 여왕도 이름이 있지만 요즘에는 그저 여왕폐하라고만 불렸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는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 이따금 늑대들이 낙엽과 흙먼지를 날리며 여왕 옆에서 달려가기도 했다. 늑대들이 지나가도 베일처럼 드리워진 거대한 거미줄은 그대로였다. 늑대들은 나무줄기들을 뚫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여왕은 그 늑대들이 좋았다.

 

- "내가 말했지. 

'지금부터 너의 잠을 빼앗아가겠노라. 누군가는 깨어서 잠든 나를 지켜 줘야 하니까. 잠든 나를 해치고 싶어도 너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가족, 친구, 너의 세상은 모두 잠이 들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고, 다른 이들도 잠이 들었어. 사람들이 자는 동안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꿈을 조금씩 훔쳐고, 그렇게 젊음과 아름다움과 힘을 되찾았지. 나는 자는 동안 점점 강해졌어. 세월이 파괴한 것들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잠든 노예들의 세상을 만든 거지."

 

- 소녀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어려 보였다. 하지만 여왕은 소녀를 바라보다가 곧 자신이 예전에 본 것을 발견했다. 계모의 눈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순간 여왕은 이 소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차렸다. 

 

-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묻는 금발 머리 소녀는 어린애처럼 순진무구해 보였다. (아, 하지만 소녀의 눈! 그 눈은 너무나 늙어 있었다.) 

 

- "너희 종족은 늘 똑같아. 젊음과 아름다움이 필요하지. 자기 것은 오래전에 다 써 버리고 온갖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 젊음과 아름다움을 빼앗아 가. 그리고 항상 힘을 원하지."

 

- "음, 너는 우리 혈통이 아니구나. 하지만 기술은 조금 가지고 있군."

 

- "세상을 다스리기는 쉽지 않을 거야. 이 타락한 시대까지 살아남은 자매들 사이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그래, 나한테는 내 눈과 귀가 되어 주고 법을 집행하고, 바쁠 때 내 대신 일을 처리해 줄 자가 필요해. 나는 거미줄 한복판에 남아 있을 거다. 그렇다고 네가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세계를 통치하는 것은 아니야. 내 아래 있겠지만 너도 이따위 작은 왕국이 아닌 넓은 대륙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 "날 사랑해 줘. 모든 이들이 날 사랑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너, 나를 깨워 준 너야말로 누구보다도 날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

여왕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계모가 생각났다. 계모는 흠모의 대상이 되는 것을 좋아했다. 여왕은 힘든 시간을 거치며 강해지는 법을 배웠다. 진짜 자기감정을 파악하는 법도 배우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방법을 터득하고 나니 언제든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 성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아카이어 숲 빈터에 이르자, 여왕과 난쟁이들은 잔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거기에다 높은 탑 꼭대기 방에서 챙겨 온 실과 넝마 조각, 가장 작은 난쟁이가 도끼로 잘게 부순 물렛가락을 태워 버렸다. 나뭇조각이 타면서 독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여왕이 콜록거리고 공기 중에 마법의 냄새가 진동했다. 나중에 검게 타고 남은 나무 조각들은 마가목 아래 묻었다. 

 

- "이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이번 주말에는 산맥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게 열흘이면 여왕님의 궁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

여왕이 말했다. 

"여왕님, 결혼식이 미루어지기는 햇지만, 여왕님이 돌아가시는 대로 거행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축하 속에 온 왕국이 크나큰 기쁨으로 넘치겠지요."

여왕이 말했다.

"그렇군."

 

- 여왕은 말없이 참나무 아래 이끼 위에 앉아 심장의 고동 소리를 느끼고 고요함을 음미하고 있었다.

여왕은 오래도록 앉아서 생각했다.

'선택의 여지는 있어. 항상 선택의 수들은 있어.'

마침내 여왕은 결정을 내렸다.

여왕이 걷기 시작하자 난쟁이들도 뒤따랐다. 

 

- "지금 동쪽으로 가고 있는 거 알고 계시죠?"

"아, 물론이지."

여왕이 말했다. 

난쟁이가 말했다. 

"음, 뭐 이것도 괜찮겠지요."

여왕과 세 난쟁이는 동쪽으로, 자신들이 아는 땅과 석양을 등지고 밤 속으로 걸어갔다. 

 

- 이 책처럼 삽화가 많고 섬세한 책은 단순히 글로만 읽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해 줍니다. 예를 들면 우유 짜는 하녀의 양동이에서 버섯들이 자라는 장면 말이지요. 

 

- 이 이야기는 어른들과 어린이들 모두를 위해 쓴 이야기입니다. 독자에 따라서 더 깊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부분이 다를 뿐이지요. 크리스 리들의 환성적인 일러스트 작업 덕분에 너무나 멋지고 매력적인 책이 탄생했어요.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누구나 즐겁고 만족스럽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닐 게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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