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데번 프라이스] 게으르다는 착각

일루젼 2022. 6. 6.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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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데번 프라이스 / 이현

원제 : Laziness Does Not Exist 
출판 : 웨일북(whalebooks)
출간 : 2022.04.10 


       

저자는 '게으름'이란 일종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언뜻 보기에 누군가가 게을러 보이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신체적/사회적 환경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채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게으름'이란 잘못된 개념에 속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수도 있고, 몸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의견에 100% 동의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게으름'이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흔히 죄책감을 느끼곤 하는 그런 빈둥빈둥 타임조차 사실은 '더 많이 쉬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신호라고 주장한다. 핸드폰 그만 봐야지, 씻어야지, 일어나야지라고 생각하며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증상은 우울증 환자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대체로 '번아웃'과 '노오력'에 관한 내용인 듯했다. 성취와 성과 위주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은 일종의 낙오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면 사회는 그들에 대한 비용을 소모해야 하므로, 그 '결함'을 그들 자신에게로 돌리는 '게으름'이라는 세뇌를 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거짓말은 이미 몇 세대를 걸쳐 전해져 오고 있어서, 우리는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담론은 '게으름'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한 고찰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소수에 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에 관한 논의로 연결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삶의 개선이지 기능적 수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을 다시 가열차게 돌아가는 생산의 고리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한 조치가 아닌, 현 상황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무력감과 소진의 원인을 살펴야 한다. 

 

'내가 고생하고 노력해서 얻은 재화를 세금이란 이름으로 빼앗아가더니, 저렇게 게으른 사람에게 준다고!'

 

저자는 '게으름'의 거짓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 복지를 볼 때 이런 울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을 참고 있다는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한다고도 말한다. 저들은 나처럼 하지 않았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이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이렇게 무리하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은 삶도 존재하며, 무엇보다 그렇게 해야만 굴러가는 사회라면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에 더해 간호사나 사회복지사 같은 봉사를 업으로 삼기로 한 사람들조차 거듭된 업무 속에 소진되어 간다고 말한다. 자신 또한 이 책을 쓰기 위한 인터뷰들에서 힘들고 어두운 이야기를 들을수록 예전의 힘든 기억이 자극되어 가라앉게 되었다고. 개인적으로는 이 일화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이런 소진은 당연한 것이므로 그 누구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 두 번째는 소진과 고통에 관한 것들은 일종의 전염성이 있으므로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메시지. 

 

도중에 등장하는 인터넷과 SNS에서의 활동, 그리고 뉴스에 대한 저자의 의견은 다소 핵심 주제와 벗어나지 않았나 싶다. 아마도 이런 소수자들에 대한 의견을 펼쳐가며 그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전까지 현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쉬고 비워내라는 주장과 맞서고 반대하고 표현하라는 주장인 다소 상충적이라고 느껴졌다. 물론 분노해야 할 것에 무기력하게 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겉도는 느낌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끝없는 성취와 부에의 추구를 부추기는 사회, 머니 게임에서의 실패자들은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인한 것이므로 외면해도 된다는 면죄부, 그리고 그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 해야만 한다는 강요.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모습이 아니라는 약간의 공포.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는가에 대한 막막함. 

 

저자 또한 시원한 답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이미 사회 속에 너무 깊숙이 녹아든 환영은 단단한 실체가 되어 있다. 매 순간 자신을 살피고, 그 누구도 무리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판단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언제고 나 역시 낙오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원동력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이것은 한병철이 그린 <피로사회> 바로 그 자체이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행동해도 괜찮은, 그것이 당연시되는 사회가 될 때까지. 사실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니던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자유. 그것이 조건 없이 달성될 수 있는 방향으로 관심이 모아졌으면 한다.

 

사회적 달성이건 개인적 달성이건 그 순간까지 나는 아마도 계속 발버둥 치겠지 

        

 


   

 

- 나는 생산적인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이런 평판에는 큰 대가가 따랐다. 세상에 비춰지는 내 모습은 야무지고, 정리 정돈을 잘하고, 부지런한 일벌이었다. 수년간 살면서 마주친 그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고,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글을 쓰고, 사회 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등 두루두루 잘 해냈다. 늦게 출근한 적이 없었다. 어떤 자리에 가겠다고 말하면, 반드시 갔다. 친구가 입사 지원할 때 제출할 이력서를 손봐달라고 하면 (혹은 친구가 최근에 발생한 끔찍한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해 알릴 때 도덕적 지지를 해달라고 하면) 기꺼이 해줬다. 남들이 보기에 에너지가 넘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사실 나는 엉망진창이었다. 지나치게 예민해지고 지칠 대로 지쳐서 책 한 권조차 읽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몇 시간씩 홀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가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한 모든 사람에 분개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계속 약속했다. 나 자신을 너무 혹사하면서도 이 약속 저 약속을 하고 힘에 부치면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게으름은 용납할 수 없었다.

 

- 이런 사람들, 즉 나와 같은 사람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존경을 받으려면 해야 한다고 가르친 모든 것을 한다. 우리는 성실한 직원이자 열정적인 활동가, 사려 깊은 친구이자 영원한 학생이다. 동시에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항상 미리 계획한다.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제해 불안을 줄이려 하고, 자신을 몰아붙이며 매우 매우 열심히 일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항상 피곤하고, 버거워하고, 자신에게 실망한다. 아무리 애써도 부족하다고 확신한다. 아무리 많이 성취해도 혹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만족감이나 마음의 평화를 느낄 만큼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고 여긴다. 그래서 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소진 burnout과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과 만성 수면 부족을 견디면서도 한계를 갖는 것이 우리를 '게으르게' 한다고, '게으름'은 항상 나쁜 거라고 확신한다.

 

- 나는 이렇게 극도로 효율적인 것을 좋아했고, 전날 밤 나를 걱정하게 만든 모든 일을 열심히 묵묵히 해냈다. 그렇게 매진하는 동안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달리고 난 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내 일다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인스타그램이나 텀블러를 봤다. 저녁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침대에 쓰러져 유튜브 동영상을 몇 편 보고 컴컴한 방에 앉아 과자나 먹는 게 전부였다. 이렇게 몇 시간 동안의 '재충전'이 끝나면 시간을 생산적으로 쓰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시작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데', '창의적인 일을 해야 하는데', '건강에 좋은 제대로 된 저녁을 차려 먹어야 하는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 해야 할 모든 일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이 되면 죄책감, 과로, 탈진의 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 수년간 나는 에너지가 달린다고 나 자신을 질책했다. 끝까지 몰아붙이지 못할 때마다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해 부끄러웠다. 일터에서 일을 거절할 때마다 밥벌이를 못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다.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돕지 못하거나 친구가 진행하는 공연에 못 가면 모두가 나를 비난할 거라고 확신했다. 휴식을 취하거나 선을 그을 때마다 내가 게으르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게으른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었다. 취미나 친구에게 할애할 에너지도 없이 피로하고 버겁고 소진되는 게 끔찍하긴 해도 게으른 것은 그보다 더 나쁘다고 확신했다. 
 

-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고군분투가 내가 '게으름이라는 거짓'이라고 부르는 훨씬 더 큰 사회 현상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 문화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신념체계다. 이 신념 체계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는다. 

* 속으로 나는 게으르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 나는 내면의 게으름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극도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
* 나의 가치는 나의 생산성을 통해 얻어진다.

* 일이 삶의 중심이다.

- 우리가 두려워해야 한다고 배운 게으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나태한 힘 따위는 없다. 한계가 있고 휴식이 필요한 것은 죄악이 아니다. 피곤하고 동기를 느끼지 못하는 게 자기 가치를 위협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감정은 인류의 가장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로, 장기적으로 생존하고 번영하는 법의 핵심이다. 이 책은 '게으름'으로 비난받는 행동과 사회가 '게으르다'고 치부하는 사람을 전폭적으로 옹호하는 변론서다. 과도하게 매진할 위험이 있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계를 잘 설정하는 법에 대한 실용적인 조언을 담고 있다. 당신이 가진 최악의 두려움, 즉 구제 불능인 게으름뱅이가 될 것에 대한 걱정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밝혀 큰 안도감을 줄 것이다. 

 

- 에너지나 동기가 없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피곤하고 소진된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내면의 악인 '게으름'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 기초적인 욕구를 가진 것을 비난하는, 요구가 과도하게 많은 일중독 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몸이 알리는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 비난으로 자신을 괴롭히며 벼랑 끝으로 몰고 갈 필요가 없다. 휴식의 필요성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게으름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게으름은 없다. 

- 게으름이라는 거짓을 믿는 사람들에게 경제 개혁, 노동자를 위한 법적 보호, 복지 제도와 같은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성공을 원하는 사람은 그저 혼자서 열심히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연구한 결과, 미국인 대다수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불행에 대해 먼저 그를 탓하며, 특히 그 불행을 게으름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이 공정하고 자업자득이 통한다고 믿으면, 사회복지 제도를 지지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궁핍에 대해 동정심을 가질 가능성이 줄어든다. 노숙자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자녀에게 말하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은 게으른 사람에게 베푸는 관대함, 연민, 상호부조는 '낭비'라고 여긴다. 아울러 세상이 독립적인 사람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졌다고 믿으면, 서로 의지하고 연민을 가질 필요가 사라진다. 심지어 타인에게 의지하면 발전에 위협이 된다고 본다. 

 

- 게으르다는 느낌은 일상의 요구를 최적의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지 못하다는 신호다.  

 

- 정신 활동을 하지 않는 기간이 필요하다. 좋은 아이디어들은 종종 아이디어를 내려고 애쓰는 것을 중단했을 때, 예컨대 샤워 중이거나 한가롭게 산책을 하는 동안 떠오른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뇌가 쉬는 동안 머릿속에서 조용히 무의식적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생산적인 휴식 시간을 '부화기 incubation period'라고 부른다. 건강한 병아리가 태어나려면 알을 따뜻하고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정신의 창의적인 부분도 아이디어나 통찰을 낳기 위해 안전과 휴식, 이완이 필요하다. 

- 고용주의 눈으로 볼 때, 소진은 직원이 하는 일의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피해를 준다. 일에서 정서적 한계점에 도달하면 우리는 며칠간 쉬거나 아예 그만둔다. 소진을 겪으면 일을 대충 하고 사무실에 있을 때마다 '딴 생각'을 하게 된다. 소진은 자기 감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면서 동시에 선택과 집중력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소진의 가장 끔찍한 부분이 아니다. 그 근처도 못 갔다. 

- 소진이 가진 최악의 면은 그것이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이다. 소진은 여러 색으로 세상을 보다가 흑백으로만 세상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소진되면 감정을 강하게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고통과 배고픔도 제대로 경험할 수 없어서 우리 자신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소진된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지는데, 이것은 곧 그들이 가족과 친구와도 쉽게 교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고립이 악화된다. 소진의 원인이 된 상황에서 벗어난다 해도, 감정적으로 무뎌지고 무심해진 상태가 몇 달간 계속될 수 있다. 일부의 경우, 소진은 인간관계를 아주 심각하게 파괴해 관계가 영원히 회복되지 못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소진되면 전반적으로 사고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이 약화된다.

 

- 그들은 진정한 자아를 세상에 공개했을 때 존중과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많은 것을 성취하고 달성하기 위해 애쓴다. 사회 주변부에 사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자신이 받은 인정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한다. 부업을 하고, 장시간 일하고, 보고서를 일찍 제출하고, 지치게 하는 책임을 떠안는다. 상을 타고, 저축을 많이 하고, 관리자를 만족시키면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 물론 과도한 성취로 자기 보호를 하려는 것은 동성애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에서 취약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할 압박감을 느낄 수 있다. 여성과 유색 인종은 성공하고 싶다면 백인 남성에 대한 기대치 이상을 해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마찬가지로 가난하게 자랐거나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은 과도하게 성취해야만 할 것처럼 느낀다.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성취와 보상을 위해 끝없이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 우리 문화는 우리가 훌륭해지면 비로소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고 가르친다.

 

- 프레드의 연구에서 기쁨과 의미를 찾는 일은 모두 '음미 savoring'로 귀결된다. 음미란 긍정적인 경험을 지금 이 순간 깊게 만끽하는 과정이다. 음미는 세 가지 시점에 나타난다. 우선, 다가올 사건을 낙관적인 관점으로 예상할 때 나타난다. 그런 후 긍정적인 순간이 일어나는 동안 그것을 온전히 인식할 때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그 경험이 끝난 후 경외감이나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되돌아볼 때 나타난다. 

- 프레드와 동료들이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음미에는 많은 이점이 있다. 음미할 때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의 세부적인 사항들이 풍성하고 선명해진다. 행복한 순간들을 음미하면 더 행복하게 느껴지고, 그 경험이 끝난 후에도 행복감이 더 오래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음미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경험을 되돌아보고 되새길 줄 알기 때문에 삶이 녹록지 않은 때조차 행복감을 높일 수 있다. 그 결과, 음미를 자주 하는 사람은 음미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삶에 대해 훨씬 높은 수준의 만족과 긍정적인 기분을 느낀다.

 

- 음미를 자주 하는 사람은 우울을 덜 겪는다. 이런 사람은 음미하지 않는 사람보다 노화와 체력 약화와 같은 문제에 훨씬 잘 대처한다. 만성 통증, 심장병, 암을 겪는 사람들이 삶에서 좋은 것들을 음미하는 법을 알면 장기적으로 건강이 더 좋아지며, 병으로 인한 우울과 스트레스를 덜 겪는다. 행복이 전반적으로 건강할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음미는 수명을 늘리고 질병을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어떻게 경외감을 느낄 것인가? 참신함과 놀라움이 핵심이다. 습관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처해보거나 흥미로운 자극에 노출되어 보자. 이것을 시작하는 많은 방법이 있다. 몇 가지를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탐색을 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를 방문한다.

* 새로운 경로를 따라 출근해 보거나 잘 모르는 동네 골목길을 따라 걸어본다.
* 전혀 모르는 주제에 대해 공부한다.
*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과정에 관여했는지 생각해 본다.
* 당신이 전혀 모르는 활동에 대해 열정적인 사람들이 모인 축제, 모임 또는 워크숍에 가본다.
* 예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예술(시, 단편영화, 조각, 춤 등)을 음미하려고 해 본다. 

 

- 적극적으로 읽기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암울한 뉴스만을 미친 듯이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것과 정반대의 정보 소비다. 가능한 한 빨리 많은 정보를 흡수하려는 대신, 천천히 의도적으로 작은 단락들로 나눠 읽는다. 이렇게 하면 읽은 내용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처리할 가능성이 커진다. 나는 적극적으로 읽기를 많은 학생, 특히 공부를 수년간 중단한 후 다시 학교에 돌아온 학생에게 권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학생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유익한 매우 훌륭한 방법이다. 적극적으로 읽기에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기술이 사용된다.  

 

- 첫째, 글이 묘사하는 것을 시각화한다. 한 단락을 읽은 후 방금 읽은 내용에 대해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복잡하거나 과학적인 주제의 경우, 현상을 시각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동영상을 찾아보거나 스스로 차트를 그려본다.

- 둘째, 혼란스러운 단락과 낯선 용어들을 명료화한다.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시간 들여 천천히 다시 읽는다. 모르는 단어와 용어를 적은 후, 각 페이지가 끝나면 시간을 내어 그것들의 정의를 찾아본다.

- 셋째, 저자의 가정과 관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가 왜 그런 예시를 들었는지 생각해 본다. 이용한 자료들을 보고 믿을 만한 출처인지 확인한다. 그 글에 대한 저자의 목표가 무엇인지 헤아려본다.

- 넷째, 다음에 무슨 내용이 올지 예측한다. 각 단락이 끝나면 다음에 이 글이 다뤘으면 하는 것을 적어본다. 어떤 질문들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가? 저자가 글을 어떤 식으로 전개할지 상상해 본다.

 

- 다섯째, 글을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연결한다. 이 글이 당신이 이미 믿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관련이 있어 보이는 다른 주제는 무엇인가? 다른 누가 이 글이 흥미롭다고 생각할까?

- 여섯째, 글의 질을 평가한다. 이 글이 설득력이 있었나? 따라가기 쉬웠나? 사실을 공정하게 제시한 것으로 보이는가? 저자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근거를 이해할 수 있는가?

- 인터넷이 제공하는 끊임없는 정보의 흐름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지고 나쁜 읽기 습관을 가지기 쉽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가능한 한 많은 기사를 읽고 제대로 생각해 볼 시간도 없는 피상적인 사실들로 머릿속을 채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만일 나처럼 정보 과부하로 고전한다면, 속도를 늦추고 더 확실한 의도를 갖고 글을 처리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하면 좋다. 

- 우리의 삶은 생산성에 집중하지 않는 시간을 가질 때 더 활기 넘치고 즐겁다. 무엇보다, 모든 주제에 대해 다 잘 알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고 비현실적이다. 겸손하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한 방법이다. 

- 나는 노숙자는 게으르며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말을 자녀에게 하는 부모의 예를 들며 이 책을 시작했다. 이런 예시로 시작한 것은 신중하게 의도된 선택이었다. 많은 사람이 노숙자를 게으름의 상징으로 보고, 게으름이 바로 노숙자가 겪는 고통의 근원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산다.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오롯이 그들의 탓으로 돌리는 이러한 경향성은 왜곡된 방식으로 안도감을 준다. 즉, 그렇게 믿으면 우리는 마음을 닫고 타인의 고통을 무시할 수 있다. 또한 바로 이 경향성 때문에 과잉 생산성의 쳇바퀴 위에서 끝없이 뛴다. 

- 노숙자, 실업자, 가난한 사람을 '게으름'의 희생자로 볼 때, 뼈 빠지게 일해야 할 동기는 한층 더 강해진다. 노숙자가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고, 이것은 다시 한계를 넘어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끝없는 고투로 삶을 전락시킨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친절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 게으름이라는 거짓과의 싸움은 온종일 일하는 사람에게 힘을 빼고 더 많이 쉬라고 장려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과로하려는 강박은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핵심 요소이므로 그런 충동에 저항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 '게으른' 사람들을 혐오하는 문화는 인간관계, 자녀 양육, 신체 치수, 투표를 막는 요인 등등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 거짓은 우리에게 더 많이 일하는 사람이 더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불안과 비판으로 점철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 이 모든 것에 대한 치료법은 한없는 연민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을 해체하고 해방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사회가 우리에게 가르친 '게으름'에 대한 모든 비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 가운데에는 탈학습하기 매우 어려운 것도 있다. 당신이 휴식과 불안전함과 게으름과 나태함의 순간을 누릴 자격이 있다면, 노숙자도 우울증을 겪는 사람도 알코올 중독자도 그럴 자격이 있다. 당신의 삶이 당신의 생산성과 상관없이 가치가 있다면, 다른 모든 인간의 삶도 가치가 있다. 

- 아이러니하게도 게으름이라는 거짓에 저항하는 법을 배우려면 끊임없이 지속되는 내적 작업이 많이 필요하다. 자기 연민과 친절을 계속해서 실천하고, 변화가 바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력한다고 결과가 바로바로 나오는 게 아니며, 게으름이라는 거짓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해도 받게 되는 트로피도 없다. 그냥 계속해서 배우는 것이다. 결코 완벽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지금 그대로의 당신으로도 괜찮다. 다른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더보기

 

- 레오는 전략 게임을 매우 좋아하고, 역사와 철학 서적을 탐독한다. 단기적인 충동과 욕구보다 장기적인 결과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이 점이 바로 레오가 자신의 욕구와 한계를 때때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오는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자신이 피곤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 때문에 레오는 게으르다는 느낌이 위협이 아니라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 오거스트는 내게 주간 과업과 목적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하는 스프레드시트를 보여주었다. 일과 관련된 목표뿐만 아니라 연인과 시간 보내기, 명상하기, 산책하기, 사랑하는 사람들과 통화 일정 잡기와 같은 일을 적은 것도 있었다. 오거스트의 삶에서 중요한 모든 것이 스프레드시트에 담겨 있는 셈이었다. 오거스트는 이 시트의 우측에 그 주의 특정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를 표시한다. 면담에 참석했는가? 내 의도대로 친구와 통화를 했는가? 게다가 그 특정 목표의 달성 여부에 관해 어떻게 느끼는지 기록하는 부분도 있다.

- 스프레드시트 관리법 덕분에 오거스트는 어떤 목표들을 주로 놓치는지, 목표를 놓쳤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파악할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기보다 동기 부여와 '게으름’으로 그에게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지, 게으름이 가르쳐주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컨대 오거스트가 집안일에 대한 목표를 반복해서 놓치지만 그것에 대해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완벽하게 깔끔한 집이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는 뜻일 수 있다. 이것은 항상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것을 자책하기보다 실제 가치를 반영하는 새로운 목표들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 

 

- "이 모든 것은 제가 타인이 아닌 나 자신과 나의 실제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스스로 묻게 돼요. 내가 어떻게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인가? 나는 행복한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목표들에 계속 집중할 가치가 있을까요?" 

 

-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의무를 포기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패턴을 관찰하고 그것으로부터 더 많이 배울수록, 우리가 번영할 진정한 삶을 만들 수 있다. 

 

- 제이슨은 '감정을 밀어내고 감정 없는 로봇처럼 구는' 나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방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고, 스트레스나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지속 가능한 방법이 아니라고 했다. 제이슨은 내게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어떤 감정이든 떠오르는 대로 온전히 느끼는 시간을 갖도록 일정을 잡을 것을 권유했다. 몇 주 동안 나는 거부했다. 이 방법은 완전히 사기처럼 들렸고, 누가 봐도 어리석은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제이슨에게 말했다. "누군가 이걸 한다는 게 내겐 미친 소리처럼 들려요. 가만히 앉아서 이유 없이 울면 기분이 나아진다는 걸 이해할 수 없네요. 그렇게 한다고 말한 환자가 있다면, 치료를 끝내기 위해 거짓말하는 겁니다. 분명해요." 

- 모든 불평과 저항에도 제이슨은 웃으며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가만히 앉아 느껴지는 대로 감정을 느끼며, 이 방법은 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내게 정말 꼭 해보라고 다시금 강조했다. 

 

- 알고 보니 제이슨의 제안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가 많았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치료의 효과가 있으며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개선한다는 게 수십 년 동안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다. 

- 1985년 심리 치료사 제임스 페니베이커 James Pennebaker가 고통스러운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게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는지 연구했다. 연구자들은 심리 치료사에게 힘든 감정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며,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는 것 역시 감정을 다루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하지만 페니베이커는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글을 써서 자신과 감정을 공유한 후에 기분이 좋아지는지 알고 싶었다.

 

- "나는 중요한 일들을 우선에 두고 내 시간과 관심을 그것들에 투자합니다. 그게 바로 심리학 문헌들이 건강한 삶을 위해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임의적으로 정한 데드라인 때문에 걱정하며 일할 수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 바로 당신과 대화하는 걸 택할 수도 있는 거죠." 

- 아네트는 삶에 대해 개방적인 관점을 견지하며 스스로 삶을 개척했다. 하지만 아네트가 그런 종류의 삶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 자신에게 나쁜지 알고 피할 수 있는 특권과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많은 조직이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역사와 가치의 영향을 받았고, 그로 인해 자주 재앙과 같은 결과가 발생한다. 보통 근무일은 8시간 이상 줄곧 앉아서 결과를 양산해야 한다는 기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비현실적임을 보여주는 압도적으로 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말이다. 

 

- 그들은 타인에게 마음을 쓰고 싶어서 이 분야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자신들이 돕는 사람들에 대해 진정한 공감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무감각과 무망감을 보고하고 심지어 자신의 일에 질려버렸다고 했다. 일부는 억울한 마음까지 들며 그들이 맡은 환자들을 매우 싫어했다.

 

- 나는 이 책을 위해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종류의 정서적 무감각을 조금 맛본 적이 있다. 강박적으로 무리해서 일하는 많은 사람과 마주 앉아 게으름에 대한 두려움과 그러한 두려움이 삶에 미친 폐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들려준 수많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친구들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뼈 빠지게 일한 극한 경험에 대해 성토했다. 처음에는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서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하지만 곧 고통스러웠다. 내가 들은 상실, 질병, 스트레스에 관한 모든 이야기 때문에 동요되었다. 2014년에 내가 겪은 소진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나는 자주 그 시절을 '잃어버린 해'라고 생각한다. 그 경험은 인생 전반을 바꿔놓았다. 그해가 어땠는지 반복해서 떠올리게 되자 초조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물러나고 싶어졌다. 집에 머물며 재충전을 하기 위해 일정을 취소했다. 

 

- 그러고 나서 얼마 동안 내 감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인터뷰를 하는 게 두려워졌다. 누군가 내 앞에 앉아 과로로 힘들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지루해졌다. '주여, 제발 이 지루한 하소연을 멈춰주세요.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어요'. 이 사람들이 뱀파이어처럼 내 감정과 에너지를 모두 앗아가고, 결국 나는 빈껍데기만 남을 것 같아 비통하고 짜증스러워졌다. 공감은 많은 에너지가 요구되는데, 탈출할 방법도 없이 타인의 고통을 반복해서 덜어주는 일은 고통스럽고 나를 탈진하게 했다. 소진의 징후가 빠르게 나타나자 소진을 피하기 위해 인터뷰 전략을 바꿔야 했다. 나는 인터뷰 하나당 걸리는 시간을 줄였고, 한 주에 최소한의 인터뷰만 진행하려 했다. 

 

- 매슬랙은 소진된 사람들이 나가떨어지고 무망감을 느끼는 것을 발견했다. 고객에 대한 공감을 잃어 정체성과 목적의식의 심각한 상실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직업이 전혀 보람이 없다고 묘사했다. 한때 사랑하고 열정을 느낀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졌다. 일과 무관한 소중한 취미에 대한 관심까지 사라졌다. 일부는 애초에 간호사, 심리치료사 혹은 사회복지사라는 일에 자신이 왜 관심을 가졌는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다. 소진으로 자신들의 과거 모습은 사라졌다. 때로는 예전의 모습을 되돌릴 수 없었다. 

 

- 2014년에 소진에 대해 더 많이 알았더라면 내가 겪은 심각한 건강 악화를 피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소진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를 지키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경계를 설정할 수 있었다. 우선 인터뷰의 수를 제한했다. 인터뷰 자체를 재구성해 슬프고 어두운 이야기뿐만 아니라 긍정적이고 행복한 주제에 대한 질문도 포함했다. 더불어 게으름을 수용해 과로에서 벗어나 삶을 바꾼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정보의 양을 제한하고 더 힘이 되는 성장 지향형 대화를 위한 시간을 가짐으로써 너무 늦기 전에 소진을 막을 수 있었다. 

 

- 테일러는 올해 코딩을 배우기 시작했다. 파이썬과 자바와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아는 사람들이 좋은 일자리를 많이 얻는다는 말을 들었고, 보람 없는 사무직 일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기술을 가진 삶은 수월하고 편해 보였기 때문에 그도 이 분야에 뛰어들길 원했다. "제 친구 헤더는 정말 산만해요. 하지만 코딩을 알기 때문에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졌고 매일 사무실에서 공짜로 근사한 점심을 먹어요. 직장에는 요가실도 있어요. 저는 영어를 전공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 테일러가 한 가지 종류의 강박적 행동(온라인에서 모르는 사람들과의 토론)을 또 다른 행동(온라인에서 짧은 퀴즈 풀기)으로 대체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코드 아카데미 사이트가 최대한 흥미롭고, 보람되고, 중독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이트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아 계속해서 재방문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한다. 복잡한 주제들을 여러 작은 단원으로 세분화해 한 단원을 끝내면 작은 배지를 받는다. 더 많은 과정을 끝낼수록 더 자주 이 사이트를 이용하게 되고,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 

- 나도 이와 유사한 사이트 데이터캠프 Datacamp를 가끔 이용하는데, 내가 듣는 수업은 프로그래밍과 통계를 알려준다. 이 사이트는 학습을 게임처럼 보이게 하는데, 이는 학생들에게 동기 부여를 준다. 짧은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많은 체험 포인트를 얻고, 연습을 계속하면 보상을 주는 일일 활동을 할 수 있다. 학생의 진도는 소셜 미디어 계정에 연결되어 친구와 동료들이 그가 얼마나 많은 배지와 포인트를 모았는지 볼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작은 일벌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 때로 테일러는 동네 서점과 카페에서 글을 쓰지만, 최근 몇 개월 동안 글쓰기를 할 시간도 에너지도 없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테일러의 코딩 학습 일정이 건강하지 못한 수준으로 지나친 것은 아닌지 매우 궁금했다. 테일러는 이에 대해 확신이 없어 보인다. 그저 잠시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1, 2년이 지나면 지금의 직업을 그만둘 만큼 충분한 기술을 얻을 것이다. 그때까지 코드 아카데미에서 기술을 쌓으며 계속 꾸준히 공부한다. 자신을 위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뼈 빠지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유 시간을 포기하면서 말이다. 삶의 많은 측면이 게임화되었다. 요리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은 음식 만들기를 퍼포먼스로 바꿔버렸다. 트위터는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는 일을 점수가 매겨지는 코미디 수업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다. 핀터레스트와 인스타그램과 같은 사이트는 공예품 만들기조차 경쟁적으로 바꿔버렸다.  

 

- 사람들은 음미할 때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끽하고 마음을 쓰면서 제대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데 오롯이 집중한다. 그림 같은 자연경관 속에서 등산하는 것이든, 피로를 풀어주는 시원한 칵테일 한 잔을 즐기는 것이든, 유독 어려운 낱말 맞추기 퍼즐을 푸는 것이든 당신이 즐겁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음미할 수 있다. 대상을 해치워야 할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천천히 유념하며 대하기만 하면 된다. 

- "딴 생각을 하면서 무언가를 음미할 수는 없습니다." 프레드의 설명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피자를 먹는다고 칩시다. 하지만 학생들의 과제물을 채점하면서 그걸 먹는다면, 피자가 얼마나 맛있는지 인식하는 걸 완전히 잊게 됩니다. 갑자기 고개를 들고 '어, 피자가 다 어디 갔지? 사라졌네? 음. 내가 맛있게 먹었나 보네. 정말 빨리 먹었군!'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런데 먹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겁니다." 프레드는 이 예시에서 음미를 잘하는 사람들은 피자에만 오롯이 집중한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피자를 한 입 한 입 계획하면서 먹고, 심지어 가장 맛있는 부분을 마지막에 먹기 위해 남겨두는 식으로 즐기며, 먹는 과정이 끝날 때까지 무언가를 기대한다. 

 

- 물론 이것은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해하거나 과거의 슬픈 순간을 곱씹는 것과 반대되는 사고다. 음미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좋은 경험을 되새기는 법을 안다. 또한 미래에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 많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행복과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 평생 성취에 집착하고 미래에 대해 걱정하라고 배웠다면, 처음에는 이러한 사고 습관들을 채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프레드가 나를 계속 안심시켜 주었다시피, 이런 식의 사고를 원래 잘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음미를 잘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긍정적인 것을 만끽하는 데 집중하도록 스스로 훈련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그런 사고방식을 형성한 것이다. 

 

- "이건 음악적 재능과 유사합니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타고나길 좋은 귀를 가졌지만, 모든 악기 연주자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음미도 마찬가지죠. 공들여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면 점점 더 잘하게 됩니다.

 

- 성취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또 다른 방법은 경외감을 경험할 시간을 의식적으로 찾는 것이다. 경외감은 완전히 새롭거나 깊은 영감을 주는 것, 예컨대 반짝이는 것, 푸른 바다, 녹음이 짙은 숲, 혹은 콘서트에서 뛰어난 성악 공연을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할 때 일어난다. 경외감은 위협적인 방식이 아니라 짜릿하면서도 마음에 평온함을 주는 방식으로 우주의 거대함과 인간의 하찮음을 떠올리게 한다. 경외감을 느낄 때, 우리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아름다움에 휩싸이면서 모든 개인적인 문제와 걱정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 경외감은 환상적인 소진 퇴치법이기도 하다. 간호사와 사회복지사처럼 남을 돕는 직업에 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소진되는데, 이들에게 경외감을 느낄 시간을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자기 관리법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관리를 마사지를 받거나, 새 옷을 사거나, 거품을 푼 따뜻한 물에 목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자기 관리는 상품화해 돈을 벌어들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신을 가꾸는 것은 자기 관리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경외는 영적인 요소를 지니기 때문에 훨씬 더 깊고 더 큰 회복을 안겨주는 자기 관리다. 종교가 없다고 해도, 경외와 놀라움의 순간을 찾음으로써 더 큰 목적의식, 자연과의 교감 혹은 모든 인류와의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 노아가 작성한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은 정말 길다. 내가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을 말했더니 서둘러 전화기를 꺼내어 노트 앱을 열고 약 5분 동안 스크롤을 했다. 그러더니 그 책을 목록에 추가했다. 나는 그 목록이 얼마나 긴지, 그리고 인류학부터 시작해 해양 생물학, 개인 재정, 여권 운동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광범위한 주제에 관한 책들인지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아는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면 책장을 훑어보며 목록에 추가해야 할 흥미로운 책이 있는지 살핀다. 어떤 주제의 대화를 하든지 그 주제에 관한 책 한두 권을 추천한다. 

- 내가 대화해 본, 많은 무리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노아는 노동 계층 가정 출신이다. 디트로이트의 황폐한 지역에서 어렵게 자랐다. 대학은 꿈도 못 꿨고, 장래에 좋은 직업을 가질 것이라는 전망도 없었다. 노아의 부모는 먹고사느라 힘들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노아는 삶의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게으름'을 피하려는 동기가 평균 이상이 되었다. 엔지니어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항상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려 했다. 닥치는 대로 언어를 배우고 이디시어 Yiddish (원래 중앙 및 동부 유럽에서 쓰이던 유대인 언어-옮긴이)와 히브리어로 대화를 해보기 위해 해외여행을 갔다. 신경과학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없는데도 그것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안다. 수많은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뉴스를 팔로우한다. 

- 잘못된 종류의 정보에 노출되면 실제로 트라우마 반응이 유발될 수 있다. 사회복지사, 심리치료사, 폭행 피해자의 가족들은 '2차 트라우마'라는 증상을 자주 겪는다. 다른 사람의 학대, 폭행, 폭력의 경험을 들음으로써 생기는 외상 후 스트레스 반응이다. 폭력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기 위해 꼭 직접 폭행을 당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밝혀졌다. 유감스럽게도 인터넷은 2차 트라우마를 일으킬 기회가 너무도 많다. 총격을 보여주는 동영상, 자연재해 피해자의 인터뷰,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통계를 나타내는 심란한 그래프를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쉴 새 없이 이런 영상과 데이터를 마주치면 몹시 해롭다.  

 

- "때로는 기분 나쁜 메시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두 다 볼 순 없어요. 그리고 모두와 설전을 벌일 수도 없고요. 저는 제 활동을 통해 이미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니미시르는 깨달음의 핵심에 도달했다. 인터넷에 올린 모든 글을 읽고 모든 성차별주의자와 싸우는 게 자신의 일이 아님을 안다. 트라우마에 대한 글을 올린 모든 성폭행 피해자와 대화를 하는 것조차 자신의 일이 아니다. 세상은 넓고 도처에서 끔찍한 부정이 벌어진다. 우리는 그 모든 것에 관여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나 '게으르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만으로도 스스로를 인정할 자격이 있다. 

 

-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운영되는 방식대로 따라가면, 끊임없이 분노와 두려움을 느끼는 상태로 빠져들기 쉽다. 우리 대부분이 짊어진 무거운 정보의 짐을 극복하기 위해 한계를 정해야 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단계들을 밟아나가는 것이 귀를 막고 세상의 잔혹함에 눈을 감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즉, 무관심이나 게으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게으름은 없다. 우리의 한계를 아는 것은 지속할 수 있는 길이자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다. 

 

- 인터넷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공유하라는 요청을 끊임없이 받는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모두 우리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공유하라고 유혹한다. 거의 모든 웹사이트에 댓글 창이 있어서 큰 소리로 의견을 공유하라고 애원한다. '댓글 문화'는 듣기보다 더 많이 말하고, 헤드라인만 보고 의견을 형성하고, 관련 전문성이 없어도 대화에 뛰어들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목청껏 의견을 말할 필요가 없다. 천천히 읽고 말하기 전에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연구가 보여주듯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좀 더 의도적이고 개방적인 접근법을 취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더 책임감 있는 정보의 소비자가 될 수 있다. 지식은 우리에게 힘을 주지만, 시간을 들여 그것을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사용할 때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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