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19.03.29
틀림없이 읽어본 적이 있는 작가인데 내가 읽은 책이 어떤 작품이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발표된 작품 목록을 훑어봐도 이거다 싶은 감이 오지 않는데, <46번째 밀실>을 읽었던 것 같긴 한데 확신할 수가 없다. 이래서 읽은 책들은 반드시 기록을 남겨야 하는 모양이다.
(사실 기록을 남겼으나 어플이 초기화된 것이므로 아주 조금 억울하긴 하다)
이 책은 상권이 계속 눈에 띄었으나 하권을 찾지 못해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 하권만 전자책으로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정리해나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나올 텐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책 자체에 대해서는 만족하지만 본격 추리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 남자의 생애를 더듬어나가는 드라마 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연도별로 오사카에 큰 의미가 있었던 사건들, 인물, 건축 양식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다루는 편이다. 긴세이 호텔의 외부 묘사가 너무 멋져서 실물 사진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실존 호텔이 아닌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묘하게 상세한 묘사들은 현실감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하기 위한 장치인 듯하다.
다만 결정적으로 그 결론이어야만 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는 조금 더 아침 연속극 같은 설정으로 다른 인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요도도노에 관한 부분도 개인적으로는. 하지만 즐겁게 읽었다. 시리즈 물을 순서대로 읽지 않는 것은 기피하는 편이지만 정말 즐거웠다.
끝.
- 출판업계는 그리 넓지 않고, 소설 업계로 한정하면 훨씬 좁기 때문에 각 출판사의 편집자는 '대기업으로 따지면 부서가 다른 수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도이와 가타기리도 같은 회사 선후배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따금 견제구가 날아다녔다.
- "법의학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당연하죠. 저는 일반인이니까요. 가장 큰 이유는 직감입니다. 직감이란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게 아니라 사실은 흐릿한 근거의 거대한 집합체예요. 두서없이 말해보자면 유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변사를 감정한 경찰에 따르면 자살하는 사람에게 그런 경우는 흔한 일이라는 겁니다. 좋아요. 나시다 씨가 세상을 뜨기 몇 시간 전, 저는 그 사람이 평소와 다름없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역시 흔한 일일지 모르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나시다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입니다."
- 집필할 때 내가 쓰는 글이 왠지 이상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시야가 좁아져서 제대로 된 문장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체적으로 엉성해져 스스로 길을 잃었다고 자각하는 순간,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 귀찮은 의뢰를 거절하고 싶은데 받아들일 이유를 스스로 쌓아가고 있는 기분이다.
- 뭐라 말하려는 나를 그녀가 가로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당신과 만나려 했던 건 아닙니다.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머리에 떠오른 거예요. 엉뚱한 참견이죠. 저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좋아서 세이요샤 신인상도 도왔어요. 전부 좋아해요. 문호든, 신예 작가든, 아마추어든 모방할 기량도 없는데 그걸 감추려고 독창성을 추구하다가 자의식만 철철 흘러넘치는 서툰 소설을 쓰면서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도 정이 갑니다."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말에 놀라고 있자니 가게우라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 사람이 싫지요?"
그 한마디도 자극적이었다. 가슴에 비수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 "살가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 작가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싫어하는구나 싶었어요. 곳곳에 벽이 있어서 '넘어올 수 있는 자만 내 세계를 지나가라'고 시치미를 떼고 있죠. 하지만 당연히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하기만 해서는 소설을 쓸 수 없어요. 소설이라는 번거로운 수단에 매달리지 않고 배를 몰아 바닷가로 나가거나 광석을 어루만지며 일생을 보내겠지요.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인간 집단에서 물러나, 사람을 좋아하고 싶어 발버둥 치면서 소설을 만들어내고, 그걸 읽어주길 바라며 인간 집단 속으로 돌아가지요. 당신이 그렇죠?"
맞는 말 같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벽이 있다는 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부분의 작가에게 맞아떨어지는 말이지만.
- "지금 포지션에도 이점이 있어?"
"있지.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쉬운데다가 나를 적당히 속박해주니까."
"속박의 이점이라니, 그런 게 있어?"
"있지 않을까."
히무라가 이 이야기는 그만 접자는 분위기를 발산하기 시작해 더이상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나와 그의 교우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상대를 다그치지 않는 내 성격 덕분일지도 모른다. 인간관계라는 건 거리를 얼마나 잘 두느냐로 잘 풀리기도, 망가지기도 하는 법이다. 속박한다기보다 현실에 붙들어준다고 말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히무라는 프리랜서가 되어 스스로를 들판에 풀어놓으면 일종의 폭주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게 아닐까?
- 히무라는 사냥꾼처럼 범죄자의 냄새를 추적해 법의 처벌을 받게 하려는 동기에 대해 과거에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간절히 바란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한편, 언제 누구에게 어떤 살의를 품었는지는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처음 그 말을 들은 것은 대학교 때로, 어떤 심각한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거기까지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태연히 말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다음은 털어놓지 않는다.
- 도지마가와 강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사 층 자리 건물 위에 펜트하우스처럼 5층 부분을 올린 긴세이 호텔이 보인다. 나는 정면에 서서 호텔 전체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외벽에 바른 밝은 갈색의 스크래치 타일과 큼직한 창문 주위에 자잘한 기하학무늬를 넣은 아르데코 스타일이 어디로 보나 복고적이지 아니한가. 비나 겨우 피할 만한 차양이 현관 위로 튀어나와 있고, 그 화강암 차양에는 고풍스러운 서체로 2단에 걸쳐 '긴세이 GINSEI HOTEL since 1952"라고 새겨져 있었다. 유리문에는 별 모양이 반복되는 디자인의 철제 장식이 달려 있고, 울퉁불퉁한 미드나이트 블루 색조의 유리 일부만 은색인 것이 칭찬이 절로 나올 만큼 세련되었다. 문 옆에는 호텔 이름과 같은 서체로 "레스토랑 코멧"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커다란 창문 너머로 그곳만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장려하다고 평하기에는 모든 것이 아담했지만 길모퉁이에서 이런 세련된 건물을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호강이다.
- 만난 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뭐든 깔끔하게 처리해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유능한지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가 신뢰하게 만드는 것도 일종의 능력으로, 호텔리어에게는 무기가 될 것 같다. 옆머리를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은 다카시보다 훨씬 세련되었고 굵은 눈썹도 단정하게 다듬었다. 태도는 어디까지나 살가워 활짝 웃으면 싱긋, 효과음이 들어갈 것 같았다.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젊었을 때는 플레이보이, 지금도 여전히 전성기, 첫인상은 그랬다. 보기에도 믿음직하니 지배인의 심복으로 활약하고 있겠지만 겉모습이 너무 번듯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손님들 눈에는 니와가 훨씬 더 지배인처럼 보일 것 같다. 그래도 다카시는 전혀 개의치 않을지 모르지만.
- "은퇴 생활을 하시는 줄은 알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금액이었습니다. 검소하게 사셨다고 하니 수중의 자금을 어떻게 굴릴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거겠지요."
"돈에서 자유로웠던 거야."
기와코의 한마디에 마사나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절묘한 비유네.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 앞에서 내 영업은 맥을 못 추지."
- 히무라는 뜨거운 정의감으로 완전범죄를 저지하려 한다기보다 그저 그것을 꾸미는 자를 증오하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려 들지는 않지만 그 사악함이 과거 그의 안에 깃든 적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아, 여기에도 자물쇠 잠긴 남자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무라는 에이토 대학을 졸업하고 부교수가 된 후에도 여전히 사쿄구 기타시라카와의 낡은 하숙집에서 살고 있다. 많았던 하숙생들은 그를 제외하고 다들 떠나 지금은 집주인 할머니와 둘이서 산다. 주워와 기르는 고양이가 세 마리 있고, 하숙집과 호텔은 다르지만 체류 연수 십오 년은 나시다 미노루 저리 가라다.
- 관계없는 내용 중에서 마음에 남는 문장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분명 하권이었는데, 책을 꺼내 글귀를 찾아보니 바로 나왔다. 231 페이지, '다만 진실을 말하려고 애써왔다'라는 문장 몇 줄 뒤에 그의 사후 발견된 쪽지에 적혀 있던 문장이 인용되어 있었다. 어느 날엔가 어둠이 덮쳐와 나를 지워버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잠시 동안 그것을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죽은 후에도 아주 조금 오래 살아보려 했던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빛 속에 머물러, 잠깐이라도 더 산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잠깐은커녕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숨 쉴 작품을 낳은 서스펜스의 거장과 나를 비교하는 건 우습지만 아이리시와 나의 생각은 일치한다. 죽어버린 뒤에도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내 작품을 통해 산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 그 소망 앞에서는 한때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나 하는 한시적인 성과는 큰 의미가 없다. '잠깐'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작가에게 커다란 야망이다.
- '당신, 사람이 싫지요?'
가게우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아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불평불만을 퍼붓는 주제에 죽고 나서도 '잠깐이라도 산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 부분에 부전지를 붙이고 책을 덮기 전에 페이지를 들췄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어느 문장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아이리시의 일기에 있던 메모로, 뭔가의 인용인 듯하지만 출전은 알 수 없다고 한다.
'한 사람을 죽이는 자는, 세상을 죽이는 것이다.'
히무라라면 내가 부전지를 붙인 자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 한 문장에 어지러이 새빨간 밑줄을 긋지 않을까. 펜 끝이 긁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그건 안돼. 탯줄에서 검출할 수 있는 건 아이의 DNA 뿐이야."
- 그러자 긴 머리에 안경을 쓴 여성이 나를 알아보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위, 서른 후반쯤 되어 보였다. 실루엣이 아름다운 하운즈투스 체크무늬 정장 차림으로 하얀 얼굴에 선이 날카로운 안경이 잘 어울렸다. 도이 사키에였다.
"어려운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짜고짜 무례한 전화를 드려 결례가 많았습니다. 뵙는 건 처음이지요."
목소리는 가늘지만 시원스러운 말투다. 명함을 교환하자 그녀는 부득이한 지각을 사과하며 오늘 답사에 대해 성과는 있었는지 물었다. 조금은 있었다고 치자.
"기다리시게 해 놓고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저런 상황이라, 파티가 끝나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음식이라도 좀 드시죠."
- 가게우라 나미코 앞에는 편집자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눈치 빠른 사람이 옆에서 음료수를 내밀었지만 오르되브르 접시는 괜찮다고 거절당했다. 뭘 먹을 상황이 아니리라. 사진을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 큰 여성이었다. 굽 높이를 빼도 1미터 70센티미터 가까이 되어 보였다. 6할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염색하지 않고 꼬아서 어깨까지 가볍게 늘어뜨렸다. 콧대가 높은 뚜렷한 이목구비와 헤어스타일이 조화를 이루면서 여유 있는 행동과 어우러져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대화 상대가 차례로 바뀔 때마다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또렷한 목소리로 군더더기 없이 응대한다. 광택이 흐르는 푸르스름한(그래도 작가인데 터쿼이즈 블루라고 써야 할까?) 새틴 소재의 롱드레스 위에 검은 숄을 두르고, 큼직한 진주 목걸이로 목 주변을 장식했다. 앞이 뾰족한 검은 하이힐은 물결 모양으로 굽이치는 은색 라인이 세련되었다. 브랜드를 알아볼 재주는 없지만 몸에 두른 모든 것이 고급품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관록과 위엄을 두르고 스스로 주위를 위압하는 것도 아니다. 가게우라 나미코의 첫인상을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바로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 "발행일은 삼월 말로 정해진 거지요?"
내가 물었다.
"예, 여름 전투로 오사카 성이 함락된 게 음력 5월 7일이라, 그 시기에 맞춰 요도도노 붐을 일으키고 싶어요. 의미 있는 해에 맞춰서 책을 낼 수 있도록 연재를 부탁드리기도 했고요."
올해는 1615 년 오사카 여름 전투로부터 꼭 사백 년째 되는 해로, 오사카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가게우라 나미코 정도 되는 작가라면 그런 화제에 편승해 책을 팔 필요는 없지만 시의적절한 출판이기는 하다. 출판사로서는 그 신간이 연초에 서점에 깔리는 게 이상적이었으리라. 꾸준한 인기를 끌 건 당연하니 사소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 텔레비전 오른쪽에는 2단짜리 장식 선반이 있어 프리저브드 플라워, 장식용 접시, 주먹만 한 크기의 지구의 동물 모양 유리 장식품 등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위쪽 벽면에는 별 하늘을 모티프로 한 크고 작은 그림이 세 점, 목제 액자가 예술적이라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웠다. 동쪽 벽에는 침실로 이어지는 문 옆에 묵직한 옷장과 서랍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저기 있는 건 호텔에서 설치한 게 아니라 지배인의 양해를 얻어 나시다 씨가 구입하신 가구입니다. 기존에 설치된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고 하셔서."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물건이 적다. 내가 여기 틀어박혀 살았다면 옷은 별로 안늘어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벽 쪽에 책과 잡지의 산을 쌓아 올렸을 게 분명하다. DVD도 얼마나 모아댈지.
-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너는 나시다 씨가 자살할 동기가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동기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극히 단순한 이유, 바로 고독입니다. 저는 올해 쉰 하나로 나시다 씨에 비하면 젊은 축이긴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기울어가는 태양을 보는 것처럼 날이 저물고 노을이 찾아와 어스름에 묻히는 감각입니다. 젊었을 때와는 경치가 달라요,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혼자가 마음 편하고 좋다, 자유를 만끽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라도 사고방식이나 감각에 변화가 생깁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화 없이 살아온 나시다 씨가 무언가를 계기로 강하게 무상함을 느끼고 그런 생활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했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끝내고 싶었다면 호텔에서 나가 다른 식으로 살아보면 되는 일 아닙니까?"
"가능하다면 그랬겠지만 뭔가 이유가 있어 그러지 못한 걸지도 모릅니다."
- 나는 전시회에 가면 기념으로 엽서나 기획 상품도 잘 사는 편이고, 활자 중독이라 해설을 좋아하다 보니 대개 도감도 산다. 영화, 연극, 콘서트에 가면 팸플릿을 구입하고 그렇게 쌓인 자료를 정리하지 않아 집이 너저분해지는 원인이 되는데... 나시다가 감격했다는 구사마 야요이 전시회의 도감이나 엽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 어떤 전시회나 공연에 관해서도 팸플릿 한 권, 전단지 한 장 남기지 않았다. 보고, 듣고, 느끼고, 추억을 만들고 끝내는 것이다. 나와는 성격이 딴판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따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잔뜩 쌓일 만큼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남기는 법이다.
- 먼저 디너 타임에 들어가기 전에 셰프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호텔에서 옮겨와 근속 칠 년 차. 완고한 장인 스타일의 그는 주방 구석에서 질문에 응해주었다. 그와 나시다는 레스토랑 안에서 이따금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이라 어떤 인물인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잘 먹었습니다. 오늘도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자주 칭찬해주셨습니다"라고 했다. 근속 오 년 차라는 프런트 담당 미즈노 유키도 상황은 비슷했다. 손님에 대해 주절주절 떠드는 것은 금기라는 호텔리어의 본능이 작용한 탓인지 그녀의 입은 다소 무거웠다.
- 새침한 얼굴로 어딘가 차가운 인상마저 감도는 다카히라가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딱히 그의 증언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무기질적이고 인간미가 부족한 말투이기는 하지만 이런 타입의 호텔리어를 신뢰하는 손님도 있을 것이다.
- "히네노야 님과 쓰유구치 님이 좋아하시는 수프도 준비해 두었고, 스테이크는 고급 사가산 육우가 들어왔습니다. 그럼 모두 편한 시간 되십시오."
니와와 교대하듯 종업원이 와인 리스트를 들고 다가왔다. 히네노야가 와인에 박식한 것 같아 그에게 일임하자 코스 메뉴를 확인한 뒤 세 번 복창해도 기억 못 할 이름의 보르도 와인을 주저 없이 주문했다. 건배한 뒤에 바로 나온 아뮈즈부슈와 그에 이어지는 오르되브르, 콩소메 줄레를 곁들인 당근 무스와 닭고기 파테를 먹으며 히네노야는 나시다 이야기를 화제로 올렸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서 신경을 써준 것 같다.
"나시다 씨가 이곳 생활을 정말로 즐겼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유유자적을 뛰어넘어 지나칠 정도로 우아한 생활은 왠지 지옥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저는 이곳을 피난처로 삼아 태평하게 지내곤 하는데, 그건 언젠가 일상으로 돌아갈 게 확실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끝이 없다면 아무래도 괴롭죠. 어떤가요?"
- 나시다와 달리 히네노야 아이스케나 쓰유구치 요시호는 이 호텔에 살았던 건 아니니 가끔 체류 기간이 겹쳤을 때만 만날 수 있는 처지라,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늘로 세 번째라고 한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편안한 모습은 분명 히네노야의 살가운 캐릭터에 기인하는 것 같다. 아내와는 원만하지 않다지만 가게 고객은 저런 태도로 대하고 있으리라. 생선 요리는 뜻밖에도 개구리 다리 소테. 이게 푸아송으로 나오다니 배움이 부족해 예상을 못 했다. 맛은 완전히 치킨이었다. 그건 그렇고...
- "부인이신 기와코 씨가 웃으며 말씀해주셨어요. 남편 마사오 씨는 뭔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분이라, 어느 날은 '온천에 들어가고 싶네. 맛있는 중화요리도 먹고 싶어'라고 하시기에 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더니 '그래, 타이완에 가자' 하고..."
"이튿날 타이완 여행을 떠난 건가요?"
"이튿날은커녕 바로 그날 사모님을 끌고 타이베이에 가 저녁에 우라이 온천 여관에서 중화요리를 즐기셨다고 해요. 만나고 두 번째 데이트 때 프러포즈를 받았는데,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낭만적이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기차 폭주 장면에서 '좋아, 결혼하자' 이러셔서 진심인 줄 모르셨다고, 얼마 전 여행지에서 수족관에 들렀을 때는 갑자기 펭귄을 키워보고 싶다고 해서 크게 당황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엄청난 사람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충동에 내맡기고 행동하지 못하는 남자다. 뭘 추진하려면 이유를 잔뜩 모아서 정밀하게 구축하고 타이밍을 따져야 한다.
- 오늘의 메인은 참돔 로티에 닭새우를 곁들인 생선 요리로 어제 먹은 개구리와는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 생선살을 부드러운 크림소스에 담뿍 찍어 먹었다.
- "집필 중인 신작 이야기라던데요. 그건 드문 행운이죠. 나시다 씨는 역사를 좋아하셔서, 요도도노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대해 두 분이서 열심히 이야기를 나눴다고 들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일본사도 세계사도 전혀 몰라 요도도노라는 말을 듣고도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지만요. 아내는 일본사에 박식합니다. 이곳 니와 씨를 만나자마자 이름표를 보더니 '니와 나가히데의 후손이신가요?'라고 물었을 정도예요. 요도도노가 전국시대 으뜸가는 미녀라는 오이치 님 따님이 었나? 오이치 님은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이니, 노부나가의 조카인가. 어릴 적 이름은 자차고, 노부나가 사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혼인해 요도노카타가 된 거 맞나?"
- "오이치의 첫 번째 남편은 누군지 기억해?"
와인잔을 한 손에 들고 기와코가 남편의 지식을 체크했다.
"기타오미 지방의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이가 아니라 아자이라고 읽는 거지? 노부나가 말을 듣고 결혼했는데 아네가와 전투인지 뭔지가 복잡하게 얽혀서 노부나가가 아자이 가문을 멸하고 말지."
"정답. 오다니 성은 불에 타버렸고, 장남 만푸쿠마루는 처형당했지만 오이치와 세 딸은 목숨을 건졌어. 오이치의 두 번째 남편은?"
"자꾸 떠보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은 뒤에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와 결혼했잖아."
- "세인트 안셈 923호실, 코넬 울리치, 무슨 소설인가요?"
나시다가 책장에 돌려놓은 책 등을 보며 물었다.
"뉴욕의 낡은 호텔 923호에서 일어난 일곱 가지 이야기를 다룬 소설입니다. 해설에 따르면 작가는 굉장히 유명한 추리작가라는데, 이 작품은 호텔방을 통해 인간의 인생을 그린 드라마더군요."
- 책을 꺼내보니 추상화를 사용한 표지가 세련되었다. 표지 제목에는 923호실이 숫자로 적혀 있는데 책들에는 한자로 되어 있는 건 일부러 그런 걸까, 실수일까, 업무로 인쇄물을 다루는 사람이라 신경이 쓰인다. 원제는 'HOTEL ROOM', 1958년 작품이다. 19세기 말에 화려하게 개업한 호텔, 그곳의 어느 방을 스쳐가는 다양한 숙박객과 호텔이 낡고 쇠락해 철거되는 과정을 그렸다고 한다. 인간에 빗댄 호텔의 일생을 테마로 한 것도 재미있어 보였고 별로 두꺼운 책도 아니라 방에 가져가기로 했다.
- 어렸을 때부터 여러 호텔에서 살았던 코넬 울리치는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다른 이름으로 더 유명한 작가로, 서스펜스 소설의 거장이다. 대표작은 환상의 여인과 새벽의 데드라인 히치콕 감독의 <이창>이나 트뤼포 감독의 <상복의 여인>은 그의 소설이 원작으로, 일본 서스펜스 드라마에도 많은 원작과 소재를 제공했다. 그가 쓰는 소설에는 온통 살인사건 뿐이다.
- 사카이스지를 넘어 계단을 내려가 겐사키 공원을 둘러보는 게 시카우치의 산책 코스라 했다. 우리는 나카노시마 동쪽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화제는 일단 나시다에서 벗어나 서로의 직업에 대해 흥미 위주의 질문을 주고받았다. 이문화 교류는 즐겁다.
"미스터리란 뭐든 답을 내는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예. 그런 점이 비문학적이고 깊이가 없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해해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죠. 문학은 답이 없는 수수께끼를 다루지만, 미스터리는 답이 있는 수수께끼를 다루니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랑이란, 우정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답이 없는 수수께끼 주제는 얼마든지 있지요. 세상이란, 사회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용서란 무엇인가. 그런 건 유일무이한 답이 있는 게 아니니 독자의 사고가 확장되거나 심화되면 그만인 겁니다. 읽고 나서 오히려 의문이 부풀어 오르는 경우도 있지요. 문학 작품을 끝까지 읽고 '유일한 답이 아니잖아'라고 화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라면 '이런 진상은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화내는 사람이 있다?"
"과정을 즐기기 위한 거니 자칫하면 호되게 야단맞습니다. 풀리는 수수께끼만 쓰니 문학적이지 못하고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화내는 사람도 있어요. 모든 사람의 흥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소설이란 건 없으니 그러려니 하지만요."
투정으로 들려서는 안 된다.
"미스터리도 답이 없는 수수께끼를 그려보면 어떨까요?"
"그건 이미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풀리는 수수께끼도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게 미스터리니까요. 처음부터 풀리지 않는다는 걸 아는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건, 쓰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대충 써도 되니 편하기야 하지요."
- "냉소적인 게 아니라 독설가네요."
시카우치가 처음으로 하하 웃었다. 누가 더 독설가인지 히무라하고 다투었을 때는 서로 "너"라고 상대에게 손가락 질을 한 적도 있다. 냉소적인 작가보다 독설적인 작가가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씁쓸하고 냉소적인 결말로 끝나는 소설은 눈물을 뽑는 소설에 필적할 만큼 쓰기 쉬우면서도 어지간해서는 작가가 멍청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빈정거리며 편한 길을 가기보다 독기 있는 소설에 도전하는 게 차라리 낫다.
- "지금은 여기밖에 안 남았지만 본고장 히로시마의 맛있는 굴을 내주는 배가 전후에도 나카노시마 부근과 도톤보리를 중심으로 열 척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오사카 굴 요릿배는 에도 시대부터 있었어요. 이 가게는 창업한 지 백 년 가까이 되는데, 다이쇼 시대에 히로시마에서 굴을 싣고 온 배라고 합니다."
맥주로 건배한 뒤 히네노야의 강의를 들으며 두툼하게 썬 잿방어 회와 청주로 삶은 굴을 음미했다. 옆에서는 여자 종업원이 국물에 조미 된장과 생강을 듬뿍 풀어 굴 전골요리를 준비해주고 있었다.
- "안타까운 일이에요. 하지만 그 사람에게만 신작에 담은 작가의 마음을 털어놓았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걸 알면 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구상이나 의도를 말해줬다고 해서 읽은 것과 똑같을 수는 없다. 구상과 의도가 정해지면 다 쓴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해주는 편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다.
"작가로서는 작품의 의도를 이러쿵저러쿵 설명해서는 안 되지만요. 그 사람이 요도도노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해서 그만."
"가게우라 씨가 옹호한 거군요?"
"도요토미 가에 어떤 선택이 가장 좋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오사카 전투에서 사실은 승산이 있었다거나, 일 년만 더 버텼다면 이에야스가 죽었을 거라거나, 일본의 미래가 어떻게 바뀌었다거나, 그런 역사 애호가의 이야기에도 저는 관심이 없어요. 요도도노를 통해 인간의 운명을 그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들 히데요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모든 걸 망친 어리석은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하아."
나는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지만 나시다가 그렇게 평했으리라.
"그 사람은 말이죠."
나시다 얘기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아버지도, 양부도, 어머니도, 오빠도, 두 개의 성도, 잃고, 잃고, 계속 잃어왔어요. 공주님이라는 대단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빼앗기기 위해 살아온 거나 다름없어요. 증오스러운 히데요시의 아내가 되어서도 열심히 살았고, 아이를 얻었나 했더니 바로 잃고, 마지막에 겨우 손에 넣은 게 히데요리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아이만큼은 놓칠 수 없었겠지요. 도쿠가와에게 항복? 어떤 형태로 굴복하더라도 겁쟁이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죽일 전 뻔해요.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 내게서 아무것도 앗아가지 못하게 할 거야. 빼앗길 바에야 오사카 성도 불에 타버리면 돼. 요도도노의 혼백은 그렇게 외쳤던 겁니다."
- 사건 다발형 인간이라는 표현을 싫어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시다는 운명의 신에게 저주와 축복을 함께 받은 것이다.
"그건 대체. 대단한 행운이군요. 일등 당첨도 그렇지만 타이밍이 너무 딱 맞아떨어집니다."
니와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 "말이 심했다, 미안하다 하며 후회해도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말이란 건 무섭지요. '잘못했어. 여기 있어'하고 아무리 사과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질 때 일억 삼천만 엔을 배로 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라고 했지만 제가 그 녀석이었다면 삼억을 내놓으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억지로 떠 안겼는데, 그게 인연을 끊는 대가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 "그건 아니야." 히무라가 강하게 말했다.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전진하는 건 아닐지 몰라도 같은 지평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건 아니야. 너는 돌면서 나선처럼 상승하고 있어."
- "꼭지가 편평한 이것 말입니까?" 다카시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포크파이 해트라고 합니다. 어머니처럼 동그스름한 얼굴보다 제게 더 잘 어울리는 타입의 모자입니다. 성별을 불문하고 애호가가 있지만 원래는 남성용이기도 하고요."
그런 지식도 호텔리어로서 익힌 것이리라.
- 그러더니 또 갑자기 연주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슈베르트의 <자장가>였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어르는 이미지가 아니라 정체 모를 장소를 끌려들어 가는 몽환적인 연주. 활을 어떻게 쓰는지 고음부에서는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흐느끼고, 저음부에서는 남자가 가련하게 신음한다.
- "넌 자신에게 엄격하군."
"뭘 이제 와서. 나는 옛날부터 채찍질로 고행하는 교도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하잖아. 학생들만 엄격하게 대하면 인간성을 의심받으니까."
채찍질로 고행하는 탐정은 어떨까? 수사가 막히거나 추리가 빗나갈 때마다 웃통을 벗고 스스로를 철썩철썩 채찍질하며 반성한다. 글로 쓰면 전례 없는 캐릭터가 될 것 같다.
- "아, 그런 건 아니었을 거예요. 나시다 씨, 고목 같았으니까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남자는 남자입니다. 여성에게 끌리는 일은 있겠죠. 고목 같다고 하시지만 사진으로 본 바로는 꽤 남자답던데요."
"하긴. 하지만 나시다 씨에게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발산하는 섹시함이 없었어요."
호오, 남자도 사랑에 빠지면 섹시해지나? 나는 경청하면서 연어구이를 먹어치웠다.
"섹시함 말입니까?" 히무라도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애초에 나시다 씨는 비밀 투성이고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섹시함이 묻어 나올 것 같은데 별로 그렇지 않았어요. 인간적인 매력 하고는 또 다른 얘기예요."
- "이상한 질문이지만, 혹시 선생님은 사랑을 하고 계신가요?"
히무라는 "허?"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니요. 그런 훈훈한 일과는 인연이 없은지 오래입니다."
"그러신가요. 그럼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굉장한 비밀을 갖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실례할게요."
어이없어하는 히무라의 표정이 우스꽝스러웠다.
"뭐야, 저건?"
"히무라 선생님은 아침 댓바람부터 유독 섹시하시네요, 그런 뜻이겠지. 만나자마자 그런 코멘트를 들을 수 있다니 대단한 매력남이네."
시카우치 마리카는 그 짧은 시간에 히무라로부터 비밀의 향기를 맡은 것이다. 직감이 날카로운 건지, 젊어도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건지, 둘 다인지.
- "히무라 선생님이 이렇게 멋진 분일 줄은 몰랐네요. 상상했던 것하고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어요. 대학 교수님으로 안 보여요."
"뭘로 보입니까?"
쓰유구치는 본인의 질문에 장난스레 웃었다.
"IT 기업 사장님이나, 직접 회사를 차려서 돈을 버는... 앙... 앙프레에디터인가 그런 거요."
"앙트레프레너 말씀이군요. 그런 재능은 없습니다."
"그렇게 보인다는 거죠. 민완 사업자로 정력적으로 일하고 정력적으로 노는 사람. 조금 나쁜 면도 있어서 여자를 농락하기도 하고."
나는 침실에서 가져온 의자에 앉아 처음 보는 상대에게 말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면서 듣고 있었다.
"실상과 거리가 있군요."
- "저는... 뭐라 말씀드릴까요. 호텔의 마성에 사로잡힌 남자입니다. 이 일을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서비스의 실현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비스는 입지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어떤 장소에 있든 그 조건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게 중요합니다. 시설이나 설비, 접객, 요리, 방범부터 실내 온도 조절, 레스토랑 식재료가 얼마나 남고, 그걸 얼마나 다른 형태로 이용할 수 있는가 하는 예측까지, 고민해야 할 점, 습득해야 할 기술은 수도 없습니다. 손님이 기대하는 것을 준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쾌적함이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은 또 없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결혼식이나 연회를 다루면 해야 할 일, 고려해야 할 문제는 한층 더 늘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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