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야쿠마루 가쿠] 돌이킬 수 없는 약속

일루젼 2022. 6. 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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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야쿠마루 가쿠 / 김성미

원제 : 誓約 
출판 : 북플라자 
출간 : 2017.02.02 


       

오래도록 남는 한(恨)은 어떤 기억들일까.

 

누가 들어도 수긍할 만한 아픔부터,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더 당황스러울 정도로 개인적인 아픔까지 다양할 것이다. 문득 고통의 수치가 객관화가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신체적 통증의 경우에 통증 수치 기준이 있긴 하지만 그 역시 객관적이라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상대는 이미 잊었을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 스쳐가던 표정, 불어오던 바람 같은 것들이 강한 인상으로 남는 경우가 있다. 사진처럼 남은 이미지는 떠올릴 때마다 추체험이 가능할 만큼 선명하다. 지나치게 선명해서 틀림없이 꿈이었을 거라 생각하게 될 만큼.

때때로 떠오르는 가을의 어느 오후, 발 아래 황금빛으로 말라 있던 풀들 같은 것들처럼. 

 

이 책은 이미 출간된 후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책이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스포일러는 피하고 싶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크고 푸른 반점이 있어 사회로부터 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한 청년이 있었다. 독기만이 남아 아무 곳에나 송곳니를 드러내며 마구잡이로 살아가던 중, 야쿠자와 은원이 얽히게 되며 도망자 신세가 된다. 삶을 포기하려던 찰나, 한 가지 약속을 해준다면 다른 호적과 성형한 얼굴로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큰돈을 줄 수도 있다는 제안을 받게 된다. 하지만 몇십 년이 걸려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그 약속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악'과 그를 없애기 위한 '소악', 그리고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연대한 피해자와 그 가족들. 

이들 사이에 얽히고 쌓인 16년의 시간은 각자에게 어떤 기억들이었을까.

이이제이, 그러나 어디서부터가 악이고 어디서부터가 선량한 시민인가. 

개과천선은 가능한가? 

 

책 자체는 몰입감 있게 읽을 수 있었지만 연이어 일본 작가의 추리물을 읽었기 때문인지 특유의 분위기가 있기 때문인지 정말 놀랐다, 신선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종의 원죄로서 누구나 어떤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는가, 완벽해 보이는 것 뒤에 가려져 있을지도 모르는 각자의 사정이 있는가 등으로 생각이 튄고 만다.

 

다들 한 꺼풀 벗겨보면 적당히 추하다고 염세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누군가는 받고만 상처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의도도 없었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 누군가에게 생긴 상처는 오롯이 스스로 상처 입힌 자만의 것인가? 직접 자신의 버튼을 누른 것이니 그에 관해서는 자신이 자신을 감당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대체 '상처'란 무엇인가? 관계에 있어서의 상처란 각자 무엇을 주고받는 것이며 용서란 무엇을 행하는 것인가? 

 

상념이 많아지게 만드는 책이었다.  

끝.


   

 

- 얼음을 채운 믹싱 글라스 안에, 드라이 베르무트와 탱커레이 진을 따르고 재빨리 휘젓는다. 올리브를 꽂은 꼬챙이를 칵테일 잔에 넣고, 잔을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잔 위에 여과기를 끼우고, 믹싱 글라스의 술을 칵테일 잔에 따른다. 레몬 필로 마지막 향을 내고, 잔 받침과 함께 완성된 칵테일을 눈앞의 야마데라 씨에게 내밀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티니입니다."
야마데라 씨는 칵테일 잔에 입을 대고 천천히 음미했다.
"맛있네. 이 나이 먹도록 칵테일은 처음 마셔봤는데 이거라면 괜찮겠어. 아무래도 이런 건 달착지근하다는 선입견이 있었거든."
"야마데라 씨는 위스키 파니까요."

- 야마데라 씨는 오늘 가게에 와서, 첫 잔으로 뭔가 괜찮은 칵테일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우리 가게에는 벌써 5년째 단골이지만 칵테일을 주문한 건 처음이었다. 보통 때는 스카치나 위스키를 마신다.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의 이유를 물으니 야마데라 씨는 오늘이 예순 살 생일이라고 대답했다. 야마데라 씨는 자신의 가치관과 취향에 확고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만, 환갑을 맞은 오늘부터는 이제까지 관심이 없었던 일과 몰랐던 것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 오치아이는 당시 내가 일하던 가게에 오면 마스터가 아니라, 수습인 내게 자주 칵테일을 주문했다. 처음에는 진피즈를 만들게 했다. 오치아이는 내가 긴장하며 만든 진피즈를 마시고 흡족하게 끄덕였다. 오치아이는 어떤 가게에 처음 가면 꼭 바텐더에게 진피즈부터 시켜본다고 했다. 

- 진과 레몬주스와 설탕을 넣고 흔들고, 그것에 소다를 탄다. 언뜻 간단해 보이는 칵테일이지만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바텐더로서의 다양한 자질이 필요해, 맛있게 만드는 건 의외로 어렵다고 한다. 흔히 오믈렛을 주문해보면 쉐프의 실력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알려진 것처럼, 칵테일 바에서는 진피즈 맛으로 그 가게와 바텐더의 역량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고 오치아이는 말했다. 물론 "그 사람의 취향도 있겠지."라고 덧붙였지만. 

 

- 노부코가 제단 옆에 있던 장롱 서랍을 열었다. 안에서 클리어 파일 하나를 집어서 내게 내밀었다. 펼쳐 보니 사건에 관한 각종 기사가 스크랩되어 있다. 그중 하나에는 노부코의 사진도 실려 있었다. 범인들에게 무기징역을 내린 확정판결에 대해 노부코가 쓴 기고문이었다. 기고문 속에서 노부코는 그들이 그토록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에 처해지지 않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매섭고 준엄하게 유족으로서의 감정을 강변하고 있었다.

 

- 지금과는 아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오래전 젊은 시절의 사진 같았지만, 막상 날짜를 보니 1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새하얀 머리칼과 생기가 거의 없는 완전히 야윈 얼굴을 보고 70대 후반 정도로 생각했지만, 눈앞의 노부코는 아직 55살이었다. 딸이 살해당한 뒤 노부코가 어떤 나날을 보냈을지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자 억누를 수 없는 답답함이 나를 덮쳐왔다. 

- 하지만 한편으로, 야쿠자들로서는 그런 복수가 너무 가벼운 응징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목숨의 가치라는 게 다른 것 같다. 지금이니 드는 생각이지만, 그 무렵의 나는 내 목숨과 인생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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