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원제 : いけない
출판 : 청미래
출간 : 2022.04.11
아. 간만에 뒤통수가 얼얼한 책을 만났다.
총 네 편의 이야기는 모두 유미나게 절벽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다. 제각각 독립적으로 보이던 이야기들은 마지막 '거리의 평화를 믿어서는 안 된다'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마무리된다.
각 편의 마지막 장에는 해당 이야기를 한 장의 이미지로 압축해서 보여주는데, 본문을 읽으면서 맞았던 통수의 얼얼함이 가시기도 전에 맞은 데를 또 맞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모두 읽은 후 역자의 후기를 꼭!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이 장르를 읽다보면, 가끔은 이미 설정된 플롯을 이끌어나가기 위해 고안된 설정이구나- 하고 느껴질 때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조금은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작품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절벽의 밤>은 이미 눈 앞에 드러나 있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 순간 밀려오는 오싹함과 당혹스러움이란. 나는 심리 트릭에 이끌리는 편인 것 같다.
사회파라고 하기도 묘하고, 완전히 본격이라고 하기도 묘하지만 다른 작품들이 무척 기대되는 작가였다.
+) 라고 써놓고 확인해보니 이 책으로 처음 만난 작가가 아니었다!
<렛맨>, <스켈레톤 키> 등을 읽었었는데 해당 작품들은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았었다. 다른 발표작들을 좀 더 읽어볼 생각이다.
- 멀리서 대나무 피리 소리가 울렸다. 둥, 쿵, 쿵, 둥, 빈 상자라도 두드리는 듯한 큰북 소리도 작게 들렸다. 축제 음악을 연습하는 것이다. 유미코는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오늘은 7월 5일 이틀 후에 가마쿠라 시에서 주최하는 칠석 축제가 열린다. 칠석 축제는 현의 정보지에도 실릴 만큼 규모가 크다. 당일에는 중앙상점가의 기다란 아케이드를 전구 장식, 손수 만든 별과 달 등으로 잔뜩 꾸민다. 사람들은 길 한복판에 주르르 세워진 커다란 대나무의 가지 끝에 소원을 적은 색색의 종이를 매단다.
- "무슨 일로 오셨죠?"
"부인께 필요한 가르침을 전하러 왔어요."
여자는 다짜고짜 문틈으로 얇은 책자를 건넸다. B5 종이 크기에, 표지에는 활짝 웃는 가족의 모습이 부드러운 터치로 그려진 책자였다. 위쪽에 클립으로 고정한 명함에는 '십왕환명회 봉사부 미야시타 시호'라고 적혀 있었다.
- "십왕이란 염라대왕을 중심으로, 사람이 죽은 후에 갈 곳을 결정하는 열 명의 왕이에요. 죽은 사람이 육도, 그러니까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수라도, 인간도, 천상도 중 어디로 환생할지 판단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생전의 소행을 보고 죽은 사람을 육도 중 하나로 보내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교의 가르침이죠. 저희의 가르침은 달라요. 저희는 생전에 선했는지 악했는지 하고는 상관없이 죽은 사람이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록 기도를 통해 십왕과 교섭해요. 그게 올바른 길이니까요."
- "설명이 아니라 증명하라고?"
경찰서에 끌려온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구마지마는 똑같은 소리를 하고 싶어졌다. 신문을 좀 읽으라고. 어휘를 모르고, 세상도 전혀 모르면서 왜 그들은 불안해하지 않을까. 어떻게 이렇게 얕아빠진 속을 늘 태평하게 드러내 놓고 다닐 수 있는 걸까.
말이야 어쨌든, 하고 모리노 마사야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까 그 형사가 아무런 설명도 안해줬다고. 그날 밤에 내가 나오의 차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대뜸 여기로 데려왔다니까."
- 그리고 시력을 잃은 사람도 혼자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생각이 미쳤다.
- 커는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발에 닿는 땅바닥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거리의 풍경만이 얼굴 양옆을 스르르 흘러갔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상상이 들어맞았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상상한 일이 현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상상이 실현된 적은 없었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나 학교에서 쉬는 시간을 혼자 보낼 때에 상상한 일들은 단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다. 만약 내일부터 학교에서 중국어 수업을 한다면, 만약 중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막막한 표정으로 내게 중국어를 묻는다면, 만약 중국어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중국어를 배우려고 내 자리로 몰려온다면. 만약 텔레비전 방송에 부모님의 가게가 소개되어서 손님이 늘어난다면, 만약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의 가게가 더 커지고 깔끔해진다면, 만약 좋은 집으로 이사 간다면. 세 가족의 이부자리를 깔면 방이 꽉 차는 집 말고, 내 공부방이 있는 집에 산다면, 만약 아버지가 역시 가게를 그만두고 중국으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 어머니의 빨간 털모자는 어제 옷장에 넣었다. 빨간 물건과 고추가 취셰(부적 등으로 악마를 쫓아낸다는 뜻의 중국어 - 옮긴이)를 한다고 가르쳐준 사람도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결국 의미는 없었다. 자기 자신을 쫓아낼 수는 없다.
- "무슨 일 있었니?"
어른들은 늘 물어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 일본에서 지내는 삶도, 학교에서 보내는 일상도 변함없이 가장 비참한 상태였다. 마치 오늘과는 다른 내일이 자신에게 다가오려 할 때마다 구깃구깃 구겨져서 하수도로 흘러가버리는 것처럼, 똑같은 오늘만 계속되었다. 없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만 점점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어."
- 맨션 외관을 보았을 때부터 미야시타 시호의 수입이 적지 않으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그 인상은 더욱 강해졌다. 결코 물건이 많은 집은 아니었다. 그러나 테이블, 의자, 소파, 부엌의식기, 침실의 침대 등이 전부 다케나시가 보기에도 고급이 분명한 물건들뿐이었다. 시로 씨가 말하기를 테이블 구석에 덜렁 놓인 유리컵은 바카라의 상품이라고 했다. 침대 옆의 협탁 위에는 애플의 맥북, 그리고 바닥에는 조그마한 회색 개 한 마리가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 "이 녀석은 주인에게 다가가 애교를 부리거나 놀아달라고 조르다가, 배터리가 다 닳으면 스스로 충전기로 걸어가서 배터리를 충전해. 시신의 왼손이 이 녀석 위에 얹히는 바람에 움직이질 못해서 그대로 힘이 다한 거겠지."
개는 로봇이었다. 시로 씨가 말한 충전기는 개와 같은 회색의 얇은 타원형 받침대로, 침대 옆에 있었다.
"맨션 규정 때문에 진짜 개를 기를 수 없었던 걸까요?"
미즈하라의 질문에 시로 씨는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렸다.
"누구나 다 진짜를 원하는 건 아니야."
- 미즈모토의 질문에 금방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형사 드라마의 영향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실제로 많은 형사가 드라마에 영향을 받고 이 바닥에 뛰어들었다. 다만 그걸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적을 뿐이다.
나는 왜 형사가 되었을까.
신입 때는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 뭐라고 대답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불 속에서 잠이 깼을 때 방금까지 생생하던 꿈이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것과 비슷하게, 애매모호한 조각만 남기고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이라는 듯, 멍하니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던 다케나시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의 기억이었다.
- 기억 속의 자신과 편지지에 적힌 자신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유서를 다 읽은 직후에 다케나시는 물을 채운 욕조에 잠긴 아내를 발견했다. 아마도 처음에는 따뜻했을 물과 함께 아내의 시신은 완전히 식어버린 뒤였다. 경찰서에 연락하기 전에 다케나시는 편지지를 꼬깃꼬깃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 아니, 버리지 않았다. 지켰다. 이러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세계를 지켰다. 아니다, 이러해야 한다고 바라는 세계에 진짜 세계를 맞추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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